<colcolor=#fff> 국가 멸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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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목록
2.1. 한국사2.2. 중국/몽골/대만사
3. 관련 문서2.2.1.
진★2.2.2.
한★2.2.3.
서진★◆2.2.4.
전진☆2.2.5.
수★◆2.2.6.
당★2.2.7.
송★◆2.2.8.
원★2.2.9.
명★◆2.2.10.
다두 왕국2.2.11.
동녕 왕국★2.2.12.
청★◆
2.3. 일본사2.4.
베트남사2.5. 서·남아시아사2.6. 서양사2.6.1.
스파르타★2.6.2.
로마 제국2.6.3.
헝가리 왕국★◆2.6.4.
신성 로마 제국★2.6.5.
스코틀랜드 왕국2.6.6.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2.6.7.
프랑스 왕국★◆
2.7. 그 외 대륙의 역사2.8. 1차 세계 대전 직후~2차 세계대전 직후의 역사2.8.1.
카자르 왕조★◆2.8.2.
오스만 제국★2.8.3.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2.8.4.
러시아 제국★2.8.5.
폴란드 제2공화국2.8.6.
프랑스 제3공화국★2.8.7.
추축국★
2.9. 2차 세계대전 이후~2000년까지의 국가2.9.1.
팔라비 왕조★◆2.9.2.
소련★◆2.9.3.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2.9.4.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2.9.5.
민주 캄푸치아★2.9.6.
중앙아프리카 제국★2.9.7.
동독 (독일민주공화국)★2.9.8.
티베트★2.9.9.
자이르
2.10. 21세기에 사라진 국가1. 개요
여러 국가들이 멸망한 사례를 적은 문서.2. 목록
등재기준은 다음과 같다. 이미 멸망한 국가는 이 문서, 취약국가지수가 90점 이상이거나 이 중 하나에 해당되면 국가 멸망/사례/위험 국가에 서술한다. 괴뢰국인 경우 🎎 표시를 붙인다.2.1. 한국사
2.1.1. 고조선
고조선의 영토와 영향권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역량을 초월한 소모전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패전해 정복을 겪음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강한 이웃 |
내부 혼란 | 역성혁명 |
지도층 불안정 |
갑자기 사망하거나 부재중인 지도자 지도층 이탈 및 이반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 |
군사력 불안정 | 국방력 대붕괴 |
결과 | |
멸망 | 국치(합병) |
자세한 배경과 전투 상황은 왕검성 전투 참고.
왕검성 전투에서 고조선이 지도부가 자중지란으로 패전하여 소멸된 후 옛 고조선의 땅은 한사군으로 개편되었으며 고조선 유민들은 남쪽의 진으로 일부가 탈출하기도 하였다.
2.1.2. 고구려
고구려의 영토와 영향권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역량을 초월한 소모전 내전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패전해 정복을 겪음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1] 강한 이웃 |
내부 혼란 |
정변 역성혁명 지배층 쿠데타 |
부패와 양극화 | 지도층 부패[2] |
지도층 불안정 |
권력 기반이
취약한 국가원수 갑자기 사망하거나 부재중인 지도자 지도층 이탈 및 이반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3] |
군사력 불안정 |
극단적인 징병[4] 군인들의 반란 국방력 대붕괴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 |
특정 집단 소외 | 통합적인 지방 관리의 실패[5] |
인문 환경 문제 | 승려들의 물질적·정치적 타락 |
결과 | |
멸망 | 국치(합병, 안동도호부 설치) |
물론 이것에 대하여 반발하는 강경파도 분명히 고구려 내부에 있었고, 게다가 당시 임금이던 영류왕은 충분한 국정 장악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기에, 결국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시해하고는 권력을 장악한 뒤 수십년 간 당나라의 명장과 대군을 연이어 물리치며 고구려를 사수했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죽자마자 아들들인 연씨 삼형제끼리 권력투쟁이 시작되어 내분이 벌어지게 된다. 장남 연남생 vs 차남 연남건+ 삼남 연남산의 구도로 붙어서 연남생이 패배한다.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12개 성과 수천 명의 주민을 바치면서 신라에 항복했고, 권력투쟁에서 패한 장남 연남생도 고구려의 옛 수도인 국내성을 포함한 3개 성을 당나라에 공짜로 바치면서 거기다 고구려를 쳐서 동생들을 응징해 달라고 당에 요청하는 매국노가 되기까지 했다. 퍼펙트한 콩가루 집안이 된 것.
결국 당나라는 연남생을 앞잡이로 세우고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신라도 남쪽에서 공격해오면서 고구려는 더 이상은 당해낼 수가 없어 멸망하게 된다.
그나마 이후에 고구려부흥운동을 통하여 어떻게는 고구려를 다시 되살리려고 노력했으나, 아래의 백제부흥운동보다는 그래도 오래 갔지만, 그조차도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면서 고구려는 이렇게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그래도 고구려의 후예인 고려와 발해가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승하긴 했으니 그나마 위안인 셈이다.
2.1.3. 백제★
백제의 영토와 영향권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6] 역량을 초월한 총력전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패전해 정복을 겪음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강한 이웃 대국 |
내부 혼란 | 지배층 쿠데타 |
지도층 불안정 |
국가
원수의
잦은
교체 권력 기반이 취약한 국가원수 막장화한 지도자 지도층 이탈 및 이반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7] |
군사력 불안정 |
국방력 대붕괴 군인들의 반란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 |
특정 집단 소외 | 통합적인 지방 관리의 실패[8] |
잘못된 경제 개입 | 일부 특권 계급의 권력·재력 독점 |
인문 환경 문제 | 군주의 지나친 향락 심취 |
결과 | |
멸망 | 국치(흡수) → 신라 |
통념과는 달리 의자왕은 말년부터 자만심 탓에 심하게 타락해서 그렇지 즉위 중반까지는 백제 멸망 직전까지 아버지 무왕이 재정비한 국력과 자신의 능력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고구려, 왜나라와 교류를 하면서 신라를 포위하고 신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으면서 국력을 과시한 명군이었다.[9] 이러한 와중에 당나라와의 관계가 최악으로 돌아서게 되었고,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키려면 후방의 방해물인 백제부터 가장 먼저 없애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편 655년의 친위 쿠데타로 말미암아 펼친 의자왕의 왕권강화정책은 안 그래도 심했던 백제의 중앙정부와 지방세력의 대립을 심화시켰고, 이는 결국 백제 멸망전 당시 백제의 지방세력은 중앙정부가 멸망하든 말든 전혀 신경쓰지 않았고, 이로 인해 백제는 의직의 2만, 계백의 5천 외에는 병력을 동원할 수 없게 되는 대참사를 낳게 되었다.[10]
구체적으로 아버지 무왕때만 하더라도 당나라와의 외교에 상당히 신경 썼으나, 문제는 의자왕이 신라에 강력한 공세를 취하면서, 외교적으로는 당과의 관계를 파탄내고,[11] 내정으로는 왕권강화를 통해 귀족들과 대립하면서 귀족들의 마음이 백제 왕실로부터 떠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나 내외적으로나 자국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돌아가는 사태를 만든 셈.
왕권 강화 및 대 신라 강경책을 고수할 거면 그 당시 동아시아 초강대국인 당나라와 외교라도 잘 해놨어야 했는데,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맺었으니 이걸로 당 따위는 이제 신경 덜 써도 장땡이겠지 하는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른 것. 다른 것 제쳐놓더라도, 당과의 외교 파탄은 백제 멸망에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물론 당시 당나라가 고구려를 놔두고 백제를, 그것도 소수 병력도 아니라 13만 대군이 배 타고 해안선을 빙둘러 오지 않고 곧장 서해를 그대로 건너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겠지만…
전략적 판단 면에서 볼 때 탄현과 백강 하구를 막으라는 성충과 흥수의 의견은 틀리지 않았으나, 문제는 당과 신라의 기만작전에 속아 의표를 찔려 대비가 미흡했던 점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당과 신라는 고구려를 공격하는 척 하면서 백제를 공격하는 기만전을 펼쳐 성공하였고, 의자왕은 보기 좋게 낚여버렸던 것이다. 물론 국론의 분열도 있었겠지만, 이 약점 탓에 백제는 지리적 이점 없이 불리하게 싸우게 되었다.
사실 백제를 침략한 당 13만, 신라 5만이라는 병력은 당시 백제의 동원력으로는 막기 버거운 점에서 그래도 백제가 할만큼 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나마 이후에 부여풍, 귀실복신, 도침, 흑치상지가 백제부흥운동을 일으켜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보려고 했으나, 이 부흥군도 날이 갈수록 내부갈등이 심해지면서 귀실복신이 도침과의 불화 끝에 도침을 죽여버리고, 귀실복신은 부여풍과의 관계까지 나빠지자 부여풍을 죽이고자 음모를 꾸몄으나 사전에 발각되어서 되레 본인이 역으로 부여풍한테 처형당하면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고, 홀로 남은 흑치상지는 결국 당나라에 항복하고 부여풍은 고구려로 도망쳐버리면서 부흥운동도 결국 3년만에 허무하게 끝나면서 백제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2.1.4. 후백제☆
후백제의 영토와 영향권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내전 패전해 정복을 겪음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강성해진 웃동네 너무 혼란한 이웃 |
내부 혼란 | 지배층 쿠데타 |
지도층 불안정 |
갑자기 사망하거나 부재중인 후계자 권력 기반이 취약한 국가원수 지도층 이탈 및 이반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 |
군사력 불안정 | 국방력 대붕괴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12] |
특정 집단 소외 |
일부 집단을 심각하게 탄압 통합적인 지방 관리의 실패 |
결과 | |
멸망 | 국치(흡수) |
후백제는 신라의 무관이었던 견훤이 봉기해서 892년에는 무진주를 점령하고 신라 서면도통 지휘병마제치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를 사용하며 외공내왕 식으로 칭왕하고 급기야 900년에 완산주에 입성하여 정식으로 후백제를 건국하여 완산주에 도읍을 정했는데, 이 과정에서 서남해 호족들과 갈등을 빚어 903년에 훗날 태봉을 멸망시키고 고려를 건국하는 태봉의 장군인 왕건의 기습을 받아 나주를 빼앗기고 이것이 훗날 견훤이 이 지역을 통해 고려로 귀순을 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 와중에도 건국후에 신라를 여러번 침공하였으며 901년과 916년에 대야성 전투에서 신라는 여러번 후백제의 침입을 막아냈지만 끝내 920년에 후백제는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927년에 신라의 수도인 금성까지 함락하여 포석정에서 술판이나 벌이며 놀고 있던[13] 경애왕을 시해하고[14] 경순왕을 즉위 시켰으며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고려군을 공산 전투에서 크게 무찌르고 903년에 빼앗겼던 나주를 929년에 수복하면서 삼한의 패권을 가져가며 후삼국시대의 통일 근처까지 갔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경애왕의 시해 사건으로 인해 신라 지방 호족들의 원한을 샀으며 이것이 930년, 고창 전투의 패배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이로 인해 상주 일대 상실 및 영남 지방의 호족들이 고려에 투항하였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934년, 운주성 전투의 패배로 인해 웅주 지방의 호족들이 고려에 투항하였고 935년에 최종적으로 고려의 장수인 유금필에게 나주를 빼앗기는 등 영토가 크게 축소되고 만다.
그럼에도 아직 호남 지방 일대의 곡창 지대는 건재하여 국력과 군사 동원력은 문제가 없었으나, 935년에 견훤이 자기 아들 중 하나인 견금강에게 양위를 하려다가 견훤의 맏아들인 견신검과 그를 앞세운 능환의 봉기로 인해 견금강이 살해되고 견훤은 935년 3월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동년도인 6월에 탈출하여 나주를 통해 고려에 귀순을 했고, 이후 후백제는 936년에 고려의 남정을 방어 및 북벌을 위해 일리천 전투를 치렀으나 후백제의 선왕인 견훤이 고려군과 합세해 참전하자 수많은 장수들과 병사들이 사기를 잃고 줄줄이 와해 및 고려군에 투항을 하여 일리천 전투에서 패배했고 견신검은 남은 패잔병을 이끌고 수도로 퇴각을 하다가 황산벌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고려군의 포위 및 압박으로 인해 항복했다.[15][16] 그리고 고려의 창업군주 왕건은 후백제의 수도인 완산주에 입성을 하고 그 곳에 안남도호부를 설치함으로써 후백제는 936년 9월에 멸망을 했고 앞서 935년에 고려로 흡수된 신라와 함께 고려에 흡수되며 892년부터 45년이나 이어져 온 전란기인 후삼국시대는 고려의 통일로 마무리가 된다.
2.1.5. 신라★
|
신라의 영토와 영향권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내전 패전해 정복을 겪음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강한 이웃들 |
내부 혼란 |
봉기 지배층 쿠데타 |
지도층 불안정 |
권력 기반이 취약한 국가원수 국가 원수의 잦은 교체 무능한 지도자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 |
군사력 불안정 |
극단적인 군축 국방력 대붕괴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 |
특정 집단 소외 | 통합적인 지방 관리의 실패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17] |
재정 문제 | 국고 고갈 |
잘못된 경제 개입 | 일부 특권 계급의 권력·재력 독점 |
인문 환경 문제 | 지배층의 지나친 향락 심취 |
자연 환경 문제 | 장기적인 환경 악화 |
재해 | 국가 단위의 자연재해 |
결과 | |
멸망 | 소요(쿠테타, 분리독립), 국치(고려로 흡수) |
태종 무열왕때 백제를 멸망시키고 문무왕 때에 고구려를 멸망시킨 데에 이어 나당전쟁으로 당나라까지 격퇴한 뒤 한반도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한때는 삼국 최후의 승자가 된 신라였지만, 멸망 과정은 그야말로 모범적인(…) 몰락 과정이었다. 자연재해는 끊임이 없었고, 지방에 세금을 걷으려니 반란을 일으키는 통에 국고가 얼마나 텅 비었는지 원종·애노의 난을 시작으로 지방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중앙정부의 행정력에서 벗어났다. 이 시기에 발생한 신라구는 일본에 들어가 약탈을 했다는 설까지 있을 정도다. 게다가 신라의 리즈 시절에 있었던 숯 제조도 산림 훼손과 참나무류가 감소함에 따른 백성들의 기아를 불러온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작황이 좋지 않으면 도토리라도 먹었는데, 숮과 기와를 굽느라 숲을 다 베어버렸기 때문. 게다가 삼국통일의 주역이었던 화랑들도 이 무렵부터 심하게 타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신라는 행정체계까지 제대로 무너져 지방 관리가 전혀 되지 않아 말기에는 수도 서라벌 말고는 행정력도 미치지 못하는 도시국가 정도의 상태로까지 쪼그라들어버렸다.[18] 교과서의 후삼국시대 지도에는 신라가 경상도 지역 정도는 간수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그나마 이것도 후삼국시대 초반부에나 이 정도로 볼 수 있었지 중반부만 가도 경상북도 북부의 아자개, 서부 경상남도의 왕봉규 등은 완전히 따로 놀았고, 결국 후삼국시대 후반부에는 경주시에서 코 앞이나 다름없는 지금의 김해시,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지역까지 죄다 후백제와 고려에 투항했다. 멸망 몇년 전에는 차 타고 경주에서 30분 거리의 포항시까지 고려 영토가 되었을 정도. 삼국사기에서 멸망 당시 신라 왕실은 경주 지역이나 겨우 다스리고 있다고 말할 정도니 그야말로 천년 전 신라 건국한 초대 혁거세 거서간과 2대 남해 차차웅, 3대 유리 이사금 당시 영토로 돌아간 셈이 됐다.[19]
그 와중에 신라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진골 혈통 귀족들의 공고한 권력 독점 구조만큼은 따로 깨어지지 않았던 것도 본격적으로 신라를 멸망으로 이끈 여러 요인들 중 하나였다.[20]
그리고 후백제의 견훤은 신라 최후의 보루 대야성에서 몇 번이나 막혔지만, 기어코 뚫어내고 수도인 금성까지 함락하여 포석정에서 술판이나 벌이며 놀고 있던[21] 경애왕을 죽이고[22] 왕후를 겁탈했다. 견훤이 주인이고 신라가 빵셔틀이라 한 근거는 견훤이 자기 마음대로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옹립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역사상 개인이 일국의 임금을 갈아치운 역사는 그리 많지 않으니 그만큼 굴욕이 크다.
그나마 천년 왕조의 정통성만큼은 고려했는지[23] 견훤은 완전히 신라 체제의 마지막 숨통까지 끊지는 않았고 새로이 경순왕을 옹립한 후[24] 반속국 정도로 남겼는데, 결국 고창 전투와 견훤의 실각 이후로 신라 왕실과 귀족들이 고려에 자발적 귀순하는 형태로 평화적으로 멸망할 수는 있었다.[25]
2.1.6. 발해
발해의 영토와 영향권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소모전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패전해 정복을 겪음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강한 이웃 너무 혼란한 이웃들 |
내부 혼란 | 지배층 쿠데타 |
지도층 불안정 |
국가원수의
잦은
교체 갑자기 사망하거나 부재중인 지도자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 |
군사력 불안정 | 국방력 대붕괴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 |
특정 집단 소외 | 통합적인 지방 관리의 실패 |
잘못된 경제 개입 | 부도덕한 부유층이 창궐함 |
자연 환경 문제 | 장기적인 환경 악화 |
결과 | |
멸망 | 국치(흡수) |
선왕-대이진 시기의 약 40년간 전성기를 누린 발해는 12대 대건황을 거쳐 13대 대현석 시기로 들어서면서 귀족들 간의 권력다툼이 심해졌고 대현석이 문적원 배 씨와 손을 잡은 대위해에게 살해 내지는 폐위 당하면서 그 혼란상은 더 심해졌고 880년대에 들어서는 남경 이남의 말갈족들이 신라로 귀부하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이후의 기록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당과 발해가 동시에 혼란스러워지자 거란이 10세기 초에 크게 성장하여 세력을 불렸고 거란은 후방의 안정 및 본거지 마련으로서 발해와 전쟁을 벌이게 된다.
발해는 요동 지역에서 거란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치열한 혈전을 벌이면서 요동지역을 최종적으로 사수하였으나 국력의 손실은 극심했고 920년대에 들어서는 발해인들이 고려로 탈출 및 망명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게 된다.
925년 12월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발해를 멸망시키기 위해 대군을 일으켰고 기록상으로는 군을 두 개로 나눠 한 곳은 부여부에서 상경부로, 다른 한 곳은 요동을 거쳐 장령부에서 상경부로 직격하는 작전을 펼친 것으로 보인다. 발해의 대인선은 이에 맞서 장령부와 부여부에 방어선을 펼쳐 장령부로 침공해온 거란군을 막는데는 성공하였으나 부여부의 부여성은 3일간의 혈전 끝에 함락당하였고 이후 발해의 늙은 재상이 3만(혹은 5천)을 이끌고 저지하려 했으나 패하여 상경용천부의 포위를 허용하고 만다. 상경용천부가 포위된 후 대인선은 총동원령을 선포하여 저항하려 했으나 먹히질 않았고 926년 1월 14일 상경용천부가 함락되면서 발해는 228년만에 멸망하고 만다.
발해가 멸망당한 이후 옛 발해 지역에서 후발해국, 정안국, 흥료국, 대원국, 오사성발해국 등 발해부흥운동의 결과로서 나타난 후계국가들이 200여년간 거란으로부터 분리독립하며 등장하기도 했으나 절반의 성공 혹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2.1.7. 고려★
고려의 영토와 영향권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역량을
초월한
총력전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패전해 정복을 겪음[26] 내전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강하고 끈질긴 주변국들 이방인 세력들의 대출현 |
내부 혼란 |
봉기 역성혁명 |
부패와 양극화 | 지배층에서 만연한 부패 |
지도층 불안정 |
막장인
지도자 갑자기 사망하거나 부재중인 지도자 지도층 이탈 및 이반 |
국론 불균형 | 문민통제 실패 |
군사력 불안정 | 군인들의 반란 |
내정 문제 | 실패로 돌아간 개혁 |
특정 집단 소외 | 통합적인 지방 관리의 실패 |
급작스러운 화폐가치 변동 |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
잘못된 경제 개입 |
부도덕한 부유층이 창궐함 비전문 계층의 경제 개입 |
인문 환경 문제 | 종교의 물질적·정치적 타락 |
결과 | |
멸망 |
소요(
이성계의 쿠데타) 조선 건국 |
고려는 건국 직후부터 순탄치가 않았다. 당장 후백제와 한반도를 놓고 대결을 해야 했고, 통일 이후에도 요, 거란과 전쟁을 벌여야 했다. 여기까지는 잘 버텨내면서 오히려 고려가 송나라에 큰소리를 칠 정도로 전성기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미 이전에도 문벌귀족의 모순과 무신정권기로 인해 휘청거렸던 고려는 원 간섭기라는 치욕을 맞이하면서 더 막장으로 빠져들게 된다. 사실 20세기에 있었던 일제강점기 못지않게 한민족에게 있어서 더 치욕적이었던 기간을 꼽으라면 원 간섭기를 들 수 있는데, 위안부에 버금가는 미녀 공출 제도가 시행되었고, 고려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일본 원정이 단행되었으며, 쌍성총관부와 동녕총관부같이 일부 영토를 원나라 직속령으로 빼앗기는 등 치욕적인 사건들이 80여 년에 걸쳐 지루하게 이어졌다. 다만 그래도 나라가 멸망하지는 않았으며[27]그럭저럭 원나라와 교역을 통해 이득을 보며, 여몽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원나라가 힘을 잃은 이후에는 그 여파로 원나라에 의존하고 있던 경제가 붕괴되고 만다. 왜냐하면 고려가 갖고 있던 원나라의 화폐가 휴지조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홍건적의 침공으로 수도까지 초토화되며, 또 왜구가 창궐하였는데, 해안 지역에는 중앙정부의 힘이 전혀 작동하지 못하다보니, 그 결과는 백성들의 고통과 비극 뿐이었다. 이성계와 최영 등이 왜구를 격퇴하며, 기적적으로 생환하는 듯 보였지만, 위화도 회군을 통해 이성계가 몇년 후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면서 고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2.1.8. 탐라국
탐라국의 영토와 영향권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패전해 정복을 겪음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강한 이웃 이방인 대출현 |
결과 | |
멸망 | 백제와 신라 그리고 고려의 예속국으로 있다가, 조선시대때 해체 |
탐라국은 동성왕의 침입 이후 국가의 기능을 거의 상실하고 속국이 되었다. 침입으로 거의 멸망하다 싶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고립된 지형 때문에 삼국들 보다 발전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땅도 작았으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백제가 멸망후 신라에 예속되었고 그 이후 차례대로 고려, 조선의 속국으로 있다가 태종 때 완전히 해체되며 멸망했다.
2.1.9. 우산국
우산국의 영토와 영향권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패전해 정복을 겪음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강한 이웃 이방인 침입 |
결과 | |
멸망 | 지증왕의 침략으로 멸망 |
지증왕 시기 신라와의 싸움은 애초에 국력 차이가 너무 심각해서 이길 가능성이 없다시피 했다. 인구든 영토든 군사든 모든 면에서 밀렸기 때문에 복속은 피할 수 없었다. 이후 여진족 해적이 출몰해 남은 국민들이 고려로 이주하며 섬이 완전히 비게 되었다.
2.2. 중국/몽골/대만사
서로 역사의 공유점이 많아 통합해 서술한다.2.2.1. 진★
진의 영토와 영향권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내전 패전해 정복을 겪음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강성해진 옆동네 |
내부 혼란 | 봉기 |
부패와 양극화 | 지배층에서 만연한 부패[28] |
지도층 불안정 | 무능하고 막장인 지도자 |
군사력 불안정 | 국방력 대붕괴 |
특정 집단 소외 |
정복지 관리 실패 국민 대부분을 심각하게 탄압 마녀사냥 |
재정 문제 | 과도한 징세 |
인문 환경 문제 |
특정 사상·학문에 대한 박해 군주들의 지나친 미신·향락 심취 |
자연 환경 문제 | 장기적인 환경 악화[29] |
결과 | |
멸망 | 국치(합병) |
수백년간 나뉘어져있던 중국을 통일한 진은 각 지방별로 나뉘어 있던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하는 등 초기엔 여러 업적을 이루었지만, 얼마 안 가 사실상 쇠퇴기에 접어들기에 이른다. 진시황은 황제가 된 이후 이민족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건설하고 거대 궁궐인 아방궁[30], 그리고 자신의 무덤인 진시황릉을 짓기 위해 백성들을 동원했는데, 이 건축물들의 규모를 생각하면 백성들의 고충이 짐작된다. 아무튼 이렇게 무리한 토목 공사로 인해 진나라는 민심을 잃었고 또한 너무 엄한 법[31]으로 인해 사람들은 진나라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불로불사를 위해 불로초만을 찾아다니던 진시황은 결국 기괴한 장수법을 실천하다 급사하고, 조고와 이사는 개인적인 영달을 위해 무능한 호해를 왕위에 앉혔다. 호해는 사치를 일삼으며 나라를 돌보지 않았고 호해의 신임을 받은 조고는 승상이 되어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나라가 혼란스러운 그 때 진승·오광의 난이 일어났다. 마침 진나라에 대해 부정적인 백성들은 결국 다같이 일어났고 봉기군은 진나라 곳곳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난은 거의 성공을 앞두고 있었지만 얼마 안가 진은 반격을 시작했고, 장한이 통솔하던 진의 군대들의 지속적인 승전으로 결국 진승·오광의 난은 진압된다. 하지만 이미 진나라는 민심을 잃은터라 때는 늦었고, 여러 군웅들이 할거하게 된다. 이렇게 껍데기가 된 진나라는 진왕 자영에 의해 이후 제후국으로 내려 앉게 되고 결국 기원전 206년, 초나라의 항우가 진의 수도 함양에 입성하여 마지막 왕인 자영을 죽이고 이듬해에 수도를 불태워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인 진은 15년만에 멸망한다. 이는 흑역사로 일컬어지는 왕망의 신나라만큼 짧은 기간이었다.[32]
2.2.2. 한★
전한과 신의 영토와 영향권 |
후한의 영토와 영향권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내전 |
내부 혼란 |
지배층 쿠데타 정변 봉기 |
부패와 양극화 | 지도층의 극심한 부패 |
지도층 불안정 |
무능하고
막장인
지도자 갑자기 사망하거나 부재중인 지도자 권력 기반이 취약한 국가원수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 |
특정 집단 소외 |
통합적인 지방 관리의 실패 일부 집단을 심각하게 탄압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재정 문제 | 국고 고갈 |
급작스러운 화폐가치 변동 | 살인적인 초인플레이션 |
잘못된 경제 개입 | 잘못된 경제 정책 |
결과 | |
멸망 |
국치(
조비에게 황위 선양) 위나라 건국 |
《 삼국지연의》를 읽었더라면 당시 후한의 꼴이 어땠는지는 잘 알 것이다. 후한은 이미 중기부터 어린 황제가 연달아 즉위하여 중앙권력을 두고 황제, 외척, 환관 등이 다투는 일이 만연하였다. 더군다나 나라의 관리들, 그리고 심지어 황제가 매관매직을 하는 상황에서[33] 안에서는 권력 다툼, 밖에서는 참다 못해 일어난 백성들이 황건적의 난을 일으키면서 상당히 혼란스러워졌다. 결국 이때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며 세력을 키운 지방 세력들이 군웅으로 성장하면서 사실상 후한은 껍데기로 변했다.
이때 황제였던 영제가 붕어하고, 영제의 뒤를 소제가 잇는다. 권력이 하진과 하태후 남매에게 돌아가자 십상시가 결국 하진을 살해하게 되면서 십상시의 난이 일어나게 되었고, 수도인 낙양이 혼란스러운 사이 서량의 동탁이 낙양에 입성하여 권력을 잡는다. 동탁은 권력을 잡자 황제를 마구잡이로 폐위시킨 다음 죽이고, 황제를 새로이 옹립하는 사악한 짓을 저지른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동탁은 헌제를 협박해 상국에 오르고, 무리한 화폐 개혁을 저질러 후한 제국을 파괴시킨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조의 격문에 의해 반동탁연합이 결성되고, 낙양으로 가는 관문 중 하나인 호로관을 뚫고 진격했으나, 그 기세에 두려웠던 동탁은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한다. 이후 동탁이 여포에게 죽음을 당하고 그 뒤를 이은 이각과 곽사가 장안에서 갖은 폭정과 학살을 자행해 그 대도시였던 장안을 반쯤 허허벌판으로 만들어놓았고 이때문에 문무백관의 거의 전부가 이각과 곽사한테 살해당하거나 벼슬을 버리고 도망갔다. 이후 어찌어찌해서 이각과 곽사로부터 도망친 헌제를 조조가 옹립하게 된다. 이때 헌제와 동행한 조정의 문무백관이라는 사람들이 동승, 상홍, 이락, 양표 등을 포함해 고작 10명에 불과할 정도로 처참했다.
조조는 헌제를 옹립했지만, 진심으로 모신 게 아니라, 그저 명분을 위해 모신 것이었다. 특히 조조는 자신에게 대항하는 모든 세력과 전쟁을 벌일 때 황제를 거역한다는 명분을 이용했다. 결국 조조 역시 동탁, 이각, 곽사와 다를바없이 황제를 물건 다루듯이 했고,[34] 이는 반조조 세력이 조조와 전쟁을 할 때 황제를 협박하고 억압한다는 명분을 만들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이후 원소가 관도대전에서 모두의 예상을 깨고 조조에게 패배하자, 조조는 7년만에 하북과 중원을 얻은, 최강의 군웅으로 성장한다. 이때 원소가 조조보다 절대적으로 유리한 형국이었으나 그의 동맹인 유표가 채모의 농간질로 인해 조조의 뒷통수를 후리지 않았고[35] 원소는 깜냥도 안되는 안량과 문추에게 군대를 맡겼다가 임시로 조조의 객장을 하고 있었던 관우 등에게 격파를 당했고, 문추와 같이 출진한 유비 역시 함흥차사로 아무 소식도 없이 증발해버렸다.[36] 만약, 안량이나 문추보다 더 뛰어난 장합 같은 장수가 지휘관이었더라면 상황이 좀 더 나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유표가 조조의 뒷통수를 후렸더라면 조조는 꼼짝없이 죽었을 것이다.
관도대전 이후 형주를 침공하여 점령한 조조는 곧바로 유비, 손권 연합군을 공격한다. 그러나 조조는 적벽에서 대패하고 3년 뒤에 서량의 마등을 공격하며 한중으로 진군한다. 그러나 때마침 익주를 손에 넣은 유비는 한중을 얻기 위해 한중에서 공방전을 펼친다. 유비가 한중을 얻게 되고 손권이 형주를 탈취하면서 북쪽의 위왕 조조[37]와 서쪽의 한중왕 유비, 동쪽의 손권이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가, 조조가 220년에 죽고 나서 그의 아들인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을 요구하고, 결국 마지막 황제였던 헌제가 조비에게 선양을 행하면서 위나라가 건국되고 후한은 멸망한다.
헌제가 조비에게 선양을 함으로써 후한이 멸망하고 위나라가 건국된 이후, 한중왕 유비가 후한 왕조를 잇는다는 뜻에서 익주에 촉한을 건국하였으나 촉한도 263년, 사마소가 계획하고 등애와 종회가 일으킨 대규모의 촉한 침공때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2.2.3. 서진★◆
서진을 건국한 초대 황제 사마염 |
서진의 영토와 영향권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내전 패전해 정복을 겪음 |
내부 혼란 |
봉기 지배층 쿠데타 |
부패와 양극화 | 지도층에서 만연한 부패 |
지도층 불안정 |
막장인
지도자 권력 기반이 취약한 국가원수 국가 원수의 잦은 교체 |
국론 불균형 |
극단주의 세력의 준동 국론의 관리 실패 |
군사력 불안정 | 극단적인 군축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 |
특정 집단 소외 |
다문화 정책 실패 통합적인 지방 관리의 실패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재정 문제 |
국고 고갈 과도한 징세 |
급작스러운 화폐가치 변동 | 살인적인 초인플레이션 |
경제 환경 문제 | 저주받은 자원 |
인문 환경 문제 |
지배층의 지나친 특정 사상 심취 특정 사상의 물질적·정치적 타락 |
자연 환경 문제 | 장기적인 환경 악화[38] |
재해 | 국가 단위의 자연재해 |
결과 | |
멸망 |
소요(쿠데타) 국치(유린) |
조위를 멸망시키고 서진을 건국한 초대 황제인 사마염부터가 1만 궁녀와 함께 막장스러운 통치를 시작했으며,[39] 귀족들도 역시 심한 사치를 부렸다. 그런데 그 많은 돈이 다 어디서 나왔을까? 당연히 백성들을 쥐어짜서 나온 것이었다. 어마어마한 부자였던 석숭은 형주자사로 있으면서 지나다니는 상인들을 협박하여 돈을 뜯어냈다고 한다.[40] 또 서진의 귀족층 사이에는 변질된 청담사상[41]이 유행해서 국사는 돌보지 않고 궤변만 늘어놓기를 즐겼다. 구품관인법과 지나친 사치 등의 문제가 거듭 나왔으나 오로지 지적에만 그치고 개혁 따위는 시도조차 없었다. 하다 못해 귀족들을 숙청하고 황권을 강화하는 정책조차 처음부터 정통성이 취약한 사마씨 정권의 특성상 할 수도 없었고 그럴 의지조차 없었다.
게다가 사마염은 이제 난세는 끝났다며 군대를 해산시키고, 대신 친족들을 각지의 왕으로 책봉하여 치안을 맡겼다. 달리 말하자면 제위 계승권을 지닌 사람들이 각자 군대를 거느리고 자신의 지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했으니 군웅할거의 재림인 셈이었다. 때마침 적절하게 소빙기가 오면서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찾아오고 기근이 벌어지면서 민생이 파탄났고 농민들은 굶어죽기 싫으면 귀족들에게 투탁해서 반노예 상태의 객(客)으로 떨어져야 했다.[42]
거기에 사마염의 뒤를 이은 아들은 후대 사학자들이 대놓고 지적장애로 추정할 정도로 정치를 할 능력 자체가 없었는데, 그런 황제를 대신해야 할 황후 가남풍은 아예 중국 역사 전체에서 최악의 악녀라 불릴 정도로 도가 지나친 전횡을 부렸다.[43]
여기에 대귀족들의 횡포로 인해 중앙에서 밀려난 중소귀족들이 지방에 있었던 황족들의 밑으로 들어가서 바람을 불어넣자, 마침내 야심을 가진 황족들이 일어나 자기들끼리 황제 자리를 두고 싸워댔다.
그런데 이걸로도 모자라 국경 안팎에서는 흉노족과 선비족을 주축으로 한 오랑캐와 도적들이 준동했다. 익주에서는 저족 이특이, 형주에서는 만족 장창이, 화북에서는 갈족 석륵이, 산서에서는 흉노족 유연이, 산동에서는 한족 왕미가 봉기를 일으켰다. 결정적으로 중국에 침투해서 살던 흉노족의 유연이 사마씨 황족들의 내란을 틈타 독립을 선언하고 석륵·왕미와 함께 마음껏 화북을 휩쓸었다.
이미 널리 초토화된 진나라에서는 사마월이 마지막으로 발악했지만 황제인 사마치의 배신 탓에 울화통이 터져서 죽었다. 이렇게 수도 낙양이 함락되고 장안에 망명정부가 들어섰지만, 주위의 군벌들에게 이리저리 치이고, 타고 다닐 마차도 없을 정도로 형편없어서 3년 만에 멸망했다. 정통성은 강남의 제2차 망명정부로 이어졌지만, 여기부터는 동진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나눈다. 그리고 화북은 난세에 접어들었다.
보다시피 총체적인 난국으로 왕조 국가에서 이렇게 하면 망한다라는 너무나도 모범적인 사례이자 훌륭한 반면교사이다. 참고로 동진과 기타 남조의 한족 제국들도 비슷하게 돌아가며 망했다. 그나마 지도층들은 서진보다 약간 멀쩡했지만 암군 라인은 똑같았다.
2.2.4. 전진☆
파란색 부분. 노란색은 동진.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역량을 초월한 원정 내전 |
내부 혼란 |
봉기 정변 |
지도층 불안정 |
지도층 이탈 및 이반 갑자기 사망하거나 부재중인 지도자 국가원수의 잦은 교체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44] |
군사력 불안정 | 국방력 대붕괴 |
특정 집단 소외 |
다문화 정책 실패 통합적인 지방 관리의 실패 |
결과 | |
멸망 | 소요(쿠테타) |
부견은 명재상 왕맹의 보좌를 받아 내치를 다지고 개혁을 실시하면서 국력을 키워 366년부터 서서히 외부로의 확장을 시작하면서 370년에는 전연을 멸망시키고, 373년에 동진의 사천(四川) 지방을 정복하고, 승상 왕맹이 죽은 뒤인 376년에는 전량(前凉)과 대(代)를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하고 동진의 양자강 이북을 차지하며 서역을 평정하여 오호십육국 시대 최고 전성기를 누렸다.
허나 최초의 모용세가 가주인 모용수의 아첨을 듣고서 승리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전쟁을 벌이고, 대판 깨졌다. 후속부대에게 설명을 안해서 대재앙을 일으키고 귀환하였고, 모용수는 1년도 안 돼서 전연을 부활시킨 후연을 세우고, 모용위의 아우 모용홍은 이에 호응하여 북지에서 반란을 일으켜 서연을 건국했다. 그리고 강족의 요장 또한 강족을 모아서 후진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장안에서 최후의 저항을 하나 요장이 등장. 385년 6월, 장안성을 빠져나온 부견 일행은 이윽고 오장산에 이르렀으나, 그 곳에서 요장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요장은 부견에게 옥새를 내놓을 것을 요구했으나, 이미 희망을 잃어버린 부견은 죽음을 각오한 채 요장을 크게 꾸짖으며 요구를 거부했다. 결국 요장은 부견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를 신평의 한 절에 감금했다가 8월 26일에 사람을 시켜 교살해버렸다. 당시 부견의 나이는 48세였는데, 재위에 오른지 28년, 비수대전에서 패한지 약 2년 만이었다. 부견이 죽자 그와 함께 장안에서 탈출했다가 마찬가지로 요장에게 사로잡혔던 후궁 장부인과 아들 부선도 모두 자살하고 말았다. 요장은 죽은 부견의 시호를 장렬천왕(壯烈天王)이라 하였다.[45] 물론 의미는 조롱이었다.
전진의 잔존세력은 부비와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부등 등의 통치하에 약 10년에 걸쳐 후진과 처절한 항쟁을 이어갔으나, 이미 뒤집힌 전세를 역전시키지 못한채 명맥만 유지하다가 394년에 멸망하였다. 서연도 같은 해 모용수에게 공격당해 멸망한다.
그나마 부견에게 다행인 점은 후진도 동진에게 멸망하고, 일족까지 멸족당했다는 거다. 후연은 또 고구려에게 얻어맞다가 망했고…
2.2.5. 수★◆
수의 영토와 영향권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역량을 초월한 소모전[46] 내전 |
내부 혼란 |
지배층 쿠데타 봉기 |
지도층 불안정 | 막장인 지도자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 |
군사력 불안정 |
국방력 대붕괴 군인들의 반란 |
특정 집단 소외 | 국민 대부분을 심각하게 탄압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재정 문제 |
국고 고갈 과도한 징세 |
인문 환경 문제 | 군주의 지나친 향락 심취[47] |
자연 환경 문제 | 장기적인 환경 악화[48] |
결과 | |
멸망 | 소요(쿠테타, 봉기) |
수문제는 중국 최고의 성군 중 하나로 취급을 받으며, 이때만큼은 수나라도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국토도 넓혔고 제도를 정비했으며, 과거 제도의 전신인 선거제를 통해 수나라를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시켰다. 문제 때 연호가 개황(開皇, 581년 ~ 600년)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를 개황성세(開皇盛世)라고 한다. 특히 문제가 개인적으로는 독실한 불자였기에 그의 치세엔 불교가 매우 흥성하였다고 한다. 그는 아들인 양광에게 군대를 주어 남진과 후량을 멸망시켜 중국을 통일시켰다.
중국은 수 문제에 의해 재통일되면서 현재의 거대 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기에 서양에서는 세계사 중요 인물을 뽑으면 100위 안, 그것도 제왕들 중에서는 10위 안에 꼽힌다. 보통 위대한 중국 황제 "성인가한(聖人可汗)"이라고 불리며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귀족들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토지를 지닌 소규모 자작농을 대규모로 늘리고 '삼장제'와 '균전제'를 확립시킨 것은 지대한 업적으로 수문제가 확립한 이런 토지 정책은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나라 시기까지 이어진 통일 왕조들의 토지 정책의 뼈대로 작용했다.
또한 사치를 줄이고 문제 스스로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세금을 줄여주었고, 어떤 해에는 아예 세금을 징수하지 않았다. 그리고 황권 강화를 위해 임용 제도를 개혁하여 육조시대 만악의 근원이었던 구품중정제를 폐지하고 연고지 복무를 금지했으며, 과거제의 전신인 선거제를 도입했다. 물론 강력한 귀족 세력을 없애지는 못했으나 이후 당대까지 관롱귀족의 견제 세력인 과거 출신자들을 기용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으며, 사유화 되어가던 관직에 공공성을 부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세를 낮추고 하사물을 성대하게 내렸음에도 국고가 모두 차 넣어둘 곳이 없어 곁채에 쌓았을 정도였으며,수 문제가 선양을 받은 초기에 집계된 민호가 채 4백만 호를 채우지 못하였으나 말년에는 890만 호로 늘어나는 업적을 이루었다. 이후 수나라의 붕괴 과정에서 누락된 수많은 인구들은 측천무후-당현종 시절의 전성기 당나라에 가야 겨우 복구가 된다. 인구 뿐 아니라 경제력 또한 막강해져서 훗날 당나라는 수 문제 시기의 경제력을 비단과 금을 분토처럼 여긴 당 현종 천보 초엽이 되어야 따라잡는다. 대놓고 그 시대에는 매우 파격적인 일부일처제를 수행하기도 했다.
그나마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 흠이긴 했지만, 그다지 국력손실을 주진 않았다. 아들 양광처럼 무리하게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나라의 리즈 시절은 거기에서 끝난다. 수 문제는 아들이 쓰레기라는 것을 알아채고서는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유술에게 양광을 폐출하고 양용을 다시 태자로 삼으라는 조서를 쓰도록 했으나, 양광은 수족들을 통하여 대보전 안의 상황을 손금 보듯이 환하게 꿰뚫고 있었다. 행동이 빠른 양광은 한발 앞서 심복들과 짜고 그날 밤에 즉시 군사들을 동원하여 황궁을 포위했다. 그는 유술 등의 대신들을 죽이고 황궁을 장악했고, 장안 인수궁 대보전에서 아버지를 시해했다. 뒤이어 형인 양용에게 조작된 유언장을 보내어 자결하라 일렀으나 겁을 먹고 자결하지 않자, 형마저도 살해하게 된다. 양견과 양광 부자의 행동은 정말 극명하게 대비된다. 양견은 근검절약하고, 백성들을 생각하면서 20년 넘게 최선을 다해서 천하를 안정시키고 농업과 상업을 증진시켜 국가와 백성의 재부를 크게 늘렸고, 인구 수도 한나라 수준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아들 양광은 이렇게 해서 쌓인 부를 자신의 욕심과 사치를 위해서 마구 낭비했다. 게다가 천하가 안정되었기 때문에 백성들을 마구 동원할 수 있었는데, 이 때문에 국가의 근본이 흔들렸다. 아버지 수문제가 천신만고 끝에 다져 놓은 기초가 아이러니하게도 아들 양광의 망나니짓을 위한 밑천이 된 셈이다.
하지만 양광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젊은 시절에 군사를 이끌고 진나라를 멸망시킬 정도로 군사적인 능력은 있었으며, 글 재주도 있었고, 예술에도 조예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좋은 머리로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다채로운 방법으로 아버지가 모은 국고를 14년에 걸쳐 아주 신나게 낭비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양광이 지나는 곳마다 해골이 땅바닥에 널렸다.
는 소문이 있었는데 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과거에 백성들은 홍수, 가뭄, 메뚜기 떼 같은 천재지변을 가장 두려워했지만, 양광 치하에서는 재난 수준으로 호화로운
유흥을 더 두려워했다. 해마다 거르지 않고 놀러 나가는 양광의 놀이 행렬은 인원이 수십만 명에 이를 정도로 그 규모가 방대했고, 이 행렬은 온갖 명목을 붙여서 백성의 재산을 쥐어짜냈다. 이런 무지막지한, 거의 약탈에 가까운 행렬이 지나가고 나면 지방의 재정은 바닥이 났고, 백성들은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다. 당시 천재지변에 희생당한 사람보다 양광의 무분별한 놀이와 그에 따른 대재앙으로 희생당한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온 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수군이 반란을 진압하는데 정신없는 와중에도 여전히 복종하지 않는 고구려를 벌하기 위해 수차례 고구려 정벌을 무리하게 추진했는데,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공격하기 위해 보낸 30만 5천명의 별동대가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에게 참패하여 30만 5천명 중 30만명이 넘게 죽는 몰살이라 해도 다름없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음에도 정신을 못차리고 심심하면 40만 가량의 대군을 보내 요동성을 공략하여 고구려의 복종을 받아낸다. 그러나 이미 수나라는 양광의 사치와 그가 일으킨 전쟁으로 피폐해졌고 결국 인내심이 폭발한 민중들이 반란을 일으켜 중원이 혼란에 빠지고 나중에는 양광이 부하 우문화급에게 살해당함으로써 수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2.2.6. 당★
당의 영토와 영향권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역량을 초월한 소모전 내전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강한 이웃들 |
내부 혼란 |
봉기 지배층 쿠데타 |
부패와 양극화 | 지배층에서 만연한 부패 |
지도층 불안정 |
막장인
지도자 권력 기반이 취약한 국가 원수 |
국론 불균형 | 문민통제 실패 |
군사력 불안정 | 군인들의 반란 |
특정 집단 소외 | 통합적인 지방 관리의 실패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재정 문제 |
국고 고갈 비정상적인 세율 |
인문 환경 문제 | 군주들의 지나친 여색· 특정 종교 심취 |
자연 환경 문제 | 장기적인 환경 악화[49] |
결과 | |
멸망 | 소요(쿠데타, 봉기) |
이야기는 위로부터 계속된다. 고구려에 3백만이 넘는 병력을 꼴아박은 결과로, 수양제 양광은 살해당하고 수나라마저도 멸망하게 된다. 그후 이연이 당나라를 건국한다. 이후 이연의 차남이자 개국공신인 이세민이 반란 세력들을 진압하고 장남이자 황태자 이건성과 3남 이원길과의 권력투쟁에서 이겨 집권한다.
이세민이 즉위한 후 당은 국가의 제도를 총체적으로 정비하고 부왕의 소극적인 대외정책을 바꿔서 토번이나 돌궐을 치고 고구려까지 제압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이세민 본인도 큰 부상을 입고 병세가 악화되어
요동을 정벌하지 말라.
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은 아들 고종은 신라와 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침공하여 승리한다. 그러다가 내친 김에 통수를 치고 신라까지 정복하려 하였으나, 기벌포 전투와 매소성 전투에서 신라에 패배하고 토번 전선의 악화가 겹쳐 실패하고 말았고, 결국 다시는 신라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각서를 쓴 뒤 다시 화친을 맺었다.
이후 고종 본인도 병세가 악화돼가면서 측천무후가 사실상 실세가 돼서 황제의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후 몇 명의 황태자를 죽이거나 몇 명의 황제를 폐위시킨 뒤 무후는 스스로 국호를 주나라라 칭하고 등극한다. 이에 반감을 가진 중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무후는 국권을 내놓고, 무후에 의해 폐위되었던 중종이 복위했다가 다시 제2의 여제가 되고 싶었던 아내 위황후와, 황태녀를 생각하고 있던 막내딸 안락공주에 의해 독살되었다. 이러한 혼란 끝에 이융기가 황제로 즉위한 후 태평공주가 숙청되면서 당나라는 2번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현종의 시대는 국가의 재정비와 교류의 발달로 '개원의 치(712년 ~ 740년)'로 일컬어지며 내치와 외치를 갈고 닦았다. 내적으로는 "화적법"을 반포해 국내의 조세/군량 체제를 안정시키는 데에 성공하고, 부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로 완전히 바꾸었다. 다민족 정책으로 선비족 문화의 면모를 보여 외적으로는 유목세력들과 협력하여 실크로드를 이용하였다. 하지만 결국 위구르족에 의해 당나라는 다시 약해진다.
그러나 치세 말년에 하필이면 현종이 희대의 악녀 양귀비에 푹 빠지게 된다. 양귀비에 의해 현종은 아예 정사에 손을 놓고, 정국은 재상 이임보 등 몇몇 지도층과 양귀비의 일족들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게다가 당시 지방의 치안을 담당한 절도사들의 세력이 나날이 커지고, 그중 가장 힘이 강했던 안녹산이 안사의 난을 일으키면서 궁궐이 함락당하고 양귀비가 그녀에게 반감을 품은 군병들의 강요에 의해 자살하는 사태를 겪었다.
이후 당나라는 심하게 국가 막장 테크를 타게 된다. 바로 절도사의 난립과 토번과 위구르의 흥성 때문이다. 당나라는 건국 당시 균전제와 연계한 군사제도인 부병제를 실시했다. 그러나 토지 지급량이 줄어들면서 과중한 군역에 못 이겨 군역을 피해 도망치는 도호화가 진행되었고, 이는 당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측천무후와 현종 시기부터 심각한 문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당은 번진을 설치 했다. 이때까지의 번진은 어디까지나 변경지역에 국한되었는데, 안사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내지에도 번진을 설치하는 내지번진이 설치된 것이다. 이로서 당조는 수도 인근 지방 일부와 당을 지지하는 강남 지방의 번진을 제외하곤 잠재적인 적들에게 둘러싸인 형국이 된다. 절도사들의 군사력은 급속히 강해지고, 절도사들끼리 서로 결탁하여 중앙정부로 조세를 보내지 않았다. 게다가 심지어 중앙정부의 군사력은 규모와 훈련, 사기 모두에서 악화되어 당나라는 총체적인 쇠퇴를 겪게 된다. 특히나 번진은 물론 당 황실에서도 부병제를 대신하여 용병제를 실시했기 때문에 재정 부담도 그만큼 늘어났다. 그래도 한때는 절도사들을 진압해서 지방 통치를 반짝 복구해 그럭저럭 120년을 버티지만, 외부적으로는 토번과 위구르의 강성으로 당은 장안과 낙양까지 위협받는 시기였다. 또한 위구르는 당나라의 요청을 받고 장안을 침입하는데, 이 때 장안 시내는 대단한 피해를 얻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이연의 자손은 남자든 여자들 싸그리 노예로 끌고 가서 후계자 문제로 고통을 받기도 하였고, 황폐화된 장안은 한동안 재기불능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또 요동과 만주 지방은 거란족과 발해의 세력권이었다. 또 이정기의 치청 번진 등은 사실상 반독립 왕국이었다.
그러나 이럼에도 당을 중흥시킨 황제들이 있었는데, 바로 덕종과 헌종이다. 덕종은 양세법을 실시하여 재정을 충실히 했고, 당조에 적대적인 하북 3진을 치러 나섰지만 전선이 지지부진했던 사이에 장안에서 주차-이회광의 난이 터지고, 그것들을 진압한 후에도 토번-회흘과 중앙아시아를 두고 계속 전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화해했다. 이런 덕종의 노력과 헌신은 손자 헌종에게도 이어진다. 특히 헌종 시기가 되면 친위 부대인 신책군이 설치되고 이를 이용해 적대적인 번진을 모두 진압한다. 이에 번진의 재정과 군사력을 회수하고 감시를 강화하는 등 큰 소득을 거두면서 나라는 다시금 살아나는 듯 싶었다. 그렇지만 헌종은 말년에 마약 금단에 빠지고 불교를 맹신하는 등의 행위를 하다 환관에게 독살당하고 만다. 그 결과 다시 나라는 막장으로 흘러간다.
이후 당은 환관들이 쥐락펴락하는 나라로 서서히 몰락해갔다. 최후의 중흥 군주 선종 때부터 시작된 연속된 반란 크리는 희종 때 터진 황소의 난을 통해 안 그래도 망해가던 당나라한테 그야말로 확인사살을 날려주고 말았다. 사실 당조가 적대적인 번진에 맞서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당에 충성하던 순지였던 강회 지역에 의존했던 덕분이었다. 강남 개발이 어느 정도 진전되었고 상업이 발달하자 강회 지역은 부유해졌다. 당조는 이 지역에 과중한 세금을 매기고, 이를 이용해 신책군을 만들어 당조에 적대적인 번진에 맞섰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 지역은 당의 착취에 저항하게 되었다. 이미 구보의 난, 방훈의 난 등이 있었고 끝내 소금 밀매상 출신인 황소가 나옴에 따라 당은 확실하게 골로 가게 된다. 농민반란군에 불과했던 황소군은 막장이었던 중앙군을 마구 격파하면서 유유히 장안에 입성하였고, 주민들의 지지까지 얻으며 다음 왕조를 예고하였으나, 전열을 가다듬은 관군에 포위되고, 심복이었던 주온이 배신하여 관군에 합류하면서 황소의 난은 진압되었다. 하지만 주전충은 자신의 이름을 파자해 인왕중심이라고 해석하는 등 이미 야심을 품고 있었고, 이미 당나라는 막장 크리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주전충이 황소군을 자기 세력으로 흡수하는 등 세력을 키워 당나라를 멸망시키니, 전충이란 이름이 무색해져 버렸다. 이후 당은 그나마 나라라도 어떻게든 다시 되살려놓기라도 하기 위해 한반도의 나라들에 도움을 청했으나, 한반도의 나라들도 본인들 코가 석 자여서 남을 도와줄 처지가 전혀 아니었기 때문에 줄줄이 거부당했다. 이후로 당은 그저 나라 이름만 유지해 오다가 애제를 끝으로 289년 만에 멸망한다.
2.2.7. 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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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의 영토와 영향권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역량을 초월한 소모전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패전해 정복을 겪음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강하고 끈질긴 이웃들 |
내부 혼란 | 봉기 |
부패와 양극화 | 지도층에서 만연한 부패 |
지도층 불안정 | 막장인 지도자[50] |
국론 불균형 |
극단주의 세력의 준동 국론의 관리 실패[51] |
군사력 불안정 | 국방력 대붕괴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52]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재정 문제 |
국고 고갈 비정상적인 세율 |
인문 환경 문제 | 군주의 지나친 향락 심취 |
결과 | |
멸망 | 국치(합병) |
먼저 송나라는 문치주의로 인해 군사력이 약했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실은 그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북송 건국으로부터 24년 전에 한간 석경당이 하북성과 산서성의 북부인 연운 16주를 요나라의 야율덕광에게 쌩으로 던져주고 시작했기 때문이다. 산해관과 거용관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만리장성 라인은 중국사에서 우회하거나, 안에서 문을 열어주거나 하지 않은 이상 절대 뚫린 적이 없었던 테오도시우스 성벽 저리가라할 수준의 철옹성이었으나, 석경당이 그걸 요나라에 공짜로 퍼줬다. 이건 장기하는데 차포를 떼는 정도가 아니라 차포를 덤으로 주는 수준의 불리함이었다. 송나라가 이것만 지켰어도 북송이 정강의 변으로 허무하게 털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명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몽골군을 상대로도 훨씬 잘 버텼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송나라는 이전의 당나라에 비해서 군사력이 약했지만, 그걸 충분히 덮을 정도로 경제력이 압도적이라서 서하나 요나라, 대리국 같은 이민족 왕조를 구워삶는 것도 능숙했다. 송은 서하나 요나라에게 막대한 세폐를 제공하며 침공을 막았는데, 그 조차도 송의 경제력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그러나, 송나라는 두 번의 갈림길에서, 치명적인 외교 실수 두 번을 저질렀고[53], 그로 인해 두 번 다 멸망하고 만다.
남송은 개봉과 낙양을 비롯한 북송의 영토를 수복하고자 20만 대군을 통해 화북을 공격했고 이는 몽골의 분노를 부른다. 이에 몽골의 오고타이 칸은 남송의 침입을 격퇴한 후 1235년 2월의 쿠릴타이에서 남송 공격에 대한 방침을 결정했고, 몽골군은 남송을 공격하기로 한다. 1235년 10월에 몽골군에 의해 성도가 떨어지고, 다음 해 3월 양양이 함락되었으며 1237년이 되자 몽골군은 동쪽으로 황주에 도달하였다. 사태가 급반전된 것은 남송의 명장 맹공 덕이었는데 맹공은 강릉에 대한 공격을 막아내고, 오히려 몽골군을 연전연파하면서 양양 일대를 다시 수복하고, 기주를 되찾았으며, 사천으로 가서 몽골군을 격파하고 영토를 수복하는 등 저력을 보여준다. 1241년에 몽골의 대칸 오고타이가 죽자 몽골군은 후퇴했고 몽골 제국이 내부의 다툼으로 시간을 준 동안, 남송은 그 막강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어마어마한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1258년에 새로 즉위한 몽골의 대칸 몽케 칸은 다시 군대를 나누어 남송으로 대대적인 침공에 들어갔다. 몽케는 이미 1253년에 동생 쿠빌라이를 시켜 운남의 대리국을 점령하여 남송을 포위 공격할 기반을 다졌는데 이 공격으로 남송을 멸망시킬 작정을 했다. 몽케 본인이 이끄는 주력은 사천, 동생 쿠빌라이는 악주(오늘날의 호북성 무한시), 다른 별동대는 운남에서 담주(오늘날의 호남성 장사시)로 치고 들어갔다. 몽케는 사천의 성도를 공략하고 곧이어 사천 합주 조어성(오늘날의 사천성 중경시)를 공격했는데 사천의 다른 지역이 겁을 먹어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던 것과 달리 남송의 명장이자 맹공의 부장이었던 왕견은 주민 10만과 결사 항전을 주장하여 저항했고 몽케는 5개월 동안 공성전을 펼치다가 철통 같은 방어를 뚫지 못하고 전사했다.[54]
이런 상황에서 전쟁 영웅이 되었던 가사도가 1260년 이후 덜컥 재상이 된다. 도량형, 통화개혁, 부정부패 엄단, 긴축 재정 정책 등 평시 수상으로는 나쁜 인물은 아니었지만 군벌들을 중앙에서 밀어내어 군사력을 악화시켰다. 그리고 양양 공성전은 무려 1267년부터 1273년까지 6년동안 이어졌다. 보통이라면 그만하고 물러갈 법도 한데, 몽골 제국 측에서도 가지고 있는 전력을 때려붓는 느낌으로 끝까지 전투를 지속했던 것이다. 1268년, 무려 10만 명의 몽골 병력이 양양성을 포위했다. 그와 동시에, 쿠빌라이는 500척이 넘는 함선을 새로 건조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양양 주변의 하천, 수로를 장악했다. 결국 번성이 무너지고, 여문덕과 여문환[55]은 1274년 병사들이 아사 직전이 되자,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 그 가사도마저 15만 대군으로 막아섰으나, 패배. 결국 송나라는 수도인 임안마저 함락된다.
이후 마지막 재상 문천상이 최후의 4년을 분투했다. 이때 망명 정부파의 양진이라는 인물이 "내가 저들의 진영에 가서 시간을 벌겠다." 며 대놓고 가서 사로잡히면서 시간을 벌었고, 그 사이에 나머지 인물들은 도망치는데 성공했고. 결국 푸저우까지 함락당하자, 이들은 홍콩 근처까지 도주해서 계속 정부를 이어나갔고 이 와중에 문천상은 몽골군에게 사로잡힌다. 그리하여 홍콩 근처의 애산에서 소략한 임시 정부를 꾸린 최후의 잔존 세력은, 군-민을 합쳐 모두 20만명 가까이 되었다. 아직, 숨을 쉬고 있는 '정부' 의 기틀은 거의 다 육수부가 전담해서 책임졌는데, 육수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꼿꼿하게 행동하다가도, 조정이나 군대에 혼자 있게 되면 늘 비통한 생각에 눈물을 흘렸으며, 그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도 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결국 1279년, 쿠빌라이의 원나라에 의해 패배 남송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고 멸망한다. 황족들과 신하들의 최후의 항전은 영화 시나리오에서 나올 법한 간지의 정석이자, 비극의 종착점이었다.[56] 자세한 이야기는 애산 전투 참고. 원나라 측 기록에 의하면 다음 날 바다 위에 떠오른 시체만 10만 구였다고 한다.
이로서 남송 왕조는 완전히 멸망하고, 남중국해로 도피한 장세걸 함대가 폭풍에 침몰, 대도로 압송된 문천상이 처형되면서 남송 부흥 운동은 종말을 맞이하였다. 세계 최강의 국가의, 가장 강력한 군단을 상대로, 가장 오랫동안 맞서 싸운 끝에 세상의 끝에서 황제도, 승상도, 대장군도, 사대부도, 황족도, 백성도…한 사람도 남지 않고 전부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다.
진정이라는 사학가는 이런 평을 내렸다.
13세기 몽고기병이 폭풍처럼 유라시아를 석권할 당시, 그들은 오직 남송에서만 가장 격렬하고 지속적인 저항을 받았다. 1235년 원나라 군대가 처음 송을 공격했을 때 부터, 1279년 광동 애산에서 남송 최후의 승상
육수부가 어린 황제를 등에 업고 바다에 뛰어내릴 때 까지,
남송은 장장 40여 년 간 전쟁을 벌여
몽케 칸 또한 합주 조어성에서 전사하였다. 장원급제 출신 재상
문천상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들이 최후의 궁지에서도 혈전을 벌이며 송 황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일은, 조송(趙宋)의 제실(帝室)이 300년 간 사대부를 우대한 것에 대한 최선의 보답이었으며, 송대 문관정치가 거둔 유종의 미 그 자체였다.[57]
진정(金諍), 중국 과거 문화사 中
진정(金諍), 중국 과거 문화사 中
2.2.8. 원★
원의 영토와 영향권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내전[58] |
내부 혼란 |
봉기 정변 지배층 쿠데타 |
지도층 불안정 |
무능한 중앙 권력 국가원수의 잦은 교체[59] 지배층 이탈 및 이반[60]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 |
특정 집단 소외 |
피정복민들을 심각하게 탄압 정복지 관리 실패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재정 문제 | 국고 고갈[61] |
급작스러운 화폐가치 변동 | 살인적인 초인플레이션 |
인문 환경 문제 | 지배층의 지나친 향락 심취 |
재해 |
초강력 범유행전염병 초거대 자연재해[62] |
결과 | |
멸망 | 소요( 북원으로 분리독립) |
원나라는 사실 이전의 몽골 제국 시절부터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봐야 할 정도였는데, 애초에 몽골 제국의 동유럽까지 먹으려고 든 지나친 정복전쟁이 가장 큰 멸망 원인이기 때문이다. 쿠빌라이 칸이 원나라를 세운 이후에도 정복 전쟁은 계속되었고 이에 따라 영토도 넓어지며 그 땅에 속해있던 민족들이 원나라의 백성들로 편입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원나라에는 큰 결점이 존재했는데, 바로 중앙 권력이 지방에 행정력을 행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사실 원나라의 영토가 말이 원나라지 실질적으로는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들어간 국가들[63] 또는 친원 군벌들이 바친 영지가 대부분이라서 각 지방은 그 부마국이나 군벌들이 다스렸으며 중앙 권력이 간섭을 할 수는 있어도 직접적 행정을 하진 못했다. 또한 지방행정에 있어서도 원나라는 송대 이후 이미 극도로 발달한 중국의 경제력을 제대로 뽑아쓰지 못했다. 원나라의 행정체계는 기본적으로 향촌의 유력세력들에게 의존하는 형태였다. 지방행정은 기본적으로 향촌자치였으며 원나라 조정은 지방 말단까지 행정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향촌 유력자들에게 일정 조세를 뜯어내고 향촌은 그들이 알아서 관리하도록 방임했다.[64] 그런 상황에서 중앙 귀족들의 권력 다툼이 생기고 마지막 황제인 순제가 사실상 정치를 방임하여 사치에 탐닉하자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해 징세도 불가능하고 징병도 불가능한 껍데기만 원나라인 상황이 된다.
그리고 이 무렵 원나라는 또 다른 문제를 겪게 되는데, 바로 몽골인의 중국화였다. 처음 몽골은 백성들을 네 개의 계급으로 나눴는데 이 중에서 몽골인은 당연히 가장 높은 계급에 위치해 있었다.[65] 그러나 몽골인은 타 계급에 비해 인구가 매우 적었는데다 시간이 지날수록 몽골인이 중국화되므로써 계급을 나눈 것에 대한 가치가 없어지기 시작했다[66]. 가뜩이나 이런 상황에서 1344년, 중화제국 역사상 가장 큰 황하의 범람이 일어나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세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원나라에 의해 최하위 계급으로써 차별되고 탄압되었던 것에 분노했던 한족들은 결국 봉기했으며, 이들이 바로 홍건적이었다.
이후 홍건적은 주원장을 중심으로 군대를 이끌고 북벌을 시행해 결국 중원을 얻어내고 명을 세웠으며, 주원장에 의해 북쪽으로 쫓겨난 원나라는 결국 실질적으로 멸망, 북원이 되어 틈만 나면 내몽골과 고비사막 일대로 쳐들어오는 명나라를 상대로 북방에서 간신히 버티게 되는 신세가 된다.[67]
2.2.9. 명★◆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내전 역량을 초월한 소모전 패전해 정복을 겪음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이방인들의 대출현 |
내부 혼란 |
봉기 정변 |
부패와 양극화 | 지배층에서 만연한 부패 |
지도층 불안정 |
무능하고 막장인 지도자들 지도층 이탈 및 이반 갑자기 사망하거나 부재중인 지도자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68] |
군사력 불안정 | 국방력 대붕괴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69]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재정 문제 | 국고 고갈 |
인문 환경 문제 | 군주들의 지나친 특정 종교& 향락 심취 |
재해 | 초거대 자연재해 |
결과 | |
멸망 | 군주 자결, 수도 베이징성 함락, 청나라로 국호 교체, 국치( 남명) |
홍건적들이 바로 위의 원을 멸망시키고 한족 왕조를 재건한 명 역시 국가 멸망 징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명은 원이 절대다수인 민중을 다스리지 못해 결과적으로 멸망한 것을 보고 창업군주인 주원장 시대부터 이갑제 등 지방 통치에 많은 신경을 썼고, 초기 공신 숙청을 통해 안정적인 황권 역시 확보할 수 있었다. 비록 정난의 변을 통해 황제가 교체되기도 하였으나 이후 영락제와 선덕제의 안정적인 내치로 명은 황금기를 맞을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영락제와 선덕제 사후 명은 대외 상황이 북로남왜로 일컬어지는, 오이라트와 왜구로 인해 심각한 외환을 맞이하고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정통제의 판단미스로 인해 일어난 토목의 변으로 황제가 사로잡히며 국난의 위기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물론 수습에는 성공하여 성화제와 홍치제의 내치로 안정기를 맞이했으나 이후가 문제였다. 이후에 즉위한 황제들은 암군이 많았는데, 혼자놀기의 정수 정덕제, 도교 심취하며 간신들을 중용한 가정제, 업무를 등한시하며 국력을 소진시킨 만력제, 지록위마 천계제 등 명 4대 암군으로 불리는 막장 정치가 시작되자 위에서 언급한 이갑제와 일조편법도 유명무실해지며 부정부패가 난립하며 기근으로 인해 유민들이 떼거지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회 불안 속에 명은 임진왜란에 참전하고 만력 3대정에 많은 군사력과 재정을 소모했다. 이를 계기로 성장하게 된 후금/청과도 소모전을 이어나가게 되었으며, 이것은 곧 심각한 국력의 소모로 이어졌다. 특히 이때 명은 청보다 압도적인 국력에도 청을 이길수가 없는 지경이 되며 수도까지 위협받는다. 결국 혜성같이 일어난 이자성의 반란군에게 힘을 잃은 명은 그대로 쓰러졌으며, 이자성군 역시 청과 내통한 오삼계에 의해 정벌당함으로서 마지막 정통 한족 왕조 명은 막을 내리게 된다. 남부에 잔존 세력인 남명이 존재하긴 했지만, 남명세력은 남송과는 달리 자기들끼리 분열되어 단합되지 못하였고, 결국 여기도 청나라에게 정복당하면서 명나라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2.2.10. 다두 왕국
다두 왕국의 영토와 영향권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소모전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패전해 정복을 겪음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이방인
세력들의
대출현 너무 강한 웃동네 |
내부 혼란 | 봉기 |
부패와 양극화 | 피지배층 부패[70]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71] |
군사력 불안정 | 국방력 대붕괴 |
내정 | 개혁 실패 |
특정 집단 소외 | 통합적인 지방 관리의 실패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72] |
잘못된 경제 개입 | 부도덕한 부유층이 창궐함 |
결과 | |
멸망 | 국치(합병) |
2.2.11. 동녕 왕국★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역량을 초월한 총력전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패전해 정복을 겪음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이방인
대출현 너무 강대한 웃동네 |
내부 혼란 |
봉기 정변 |
부패와 양극화 | 지도층 부패 |
지도층 불안정 |
갑자기 사망하거나
부재중인 지도자 권력 기반이 취약한 국가원수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 |
군사력 불안정 |
군인들의 반란 국방력 대붕괴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 |
특정 집단 소외 | 일부 집단을 심각하게 탄압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재정 문제 | 과도한 징세 |
결과 | |
멸망 | 국치( 청나라에 합병) |
서기 1644년 명의 숭정제가 산해관 함락으로 인해 자결함에 따라 명나라는 멸망하게 되었지만, 모든 한족들이 명의 멸망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우선 남은 황족들이 남경 일대로 도피하여 남명 정권을 세워 청에 저항하였으며, 이자성도 청군을 외세로 치부하여 몰아내려 하였고 명 후기의 군벌이었던 장헌충은 서나라를 세워 청에 저항한다. 이러한 혼란한 명말청초 시기에 또 떠오르는 신성이 있었으니 바로 일본계 혼혈 해적 정성공 일당이 건국한 국가인 동녕 왕국이었다.
다른 군벌세력이 그러하였든 정성공 역시 반청복명을 모토로 하였고 명나라 부흥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해징공과 절강, 복건, 광동 3성의 도독을 하사하겠다는 청나라의 회유를 거부하고 1600년대 중반에 봉기를 일으켜 청나라 정부군과 맞서던 그는 1659년에 장강을 통해 옛 명나라의 제2의 도시이자 수도였던 남경성 일대를 포위하였고 그 이듬해인 1660년에는 샤면 전투에서 정성공 일당을 토벌하려고 파견된 청나라 정부군을 갈아버리는 쾌거를 이룬다. 또한 그는 동서양을 연결하는 대항해시대 해상무역 네트워크에서 중개 무역과 해적질 등으로 큰 이윤을 거둬들여 군대를 부양하고 무기를 구매하였으며 이는 그가 극동에서 가장 강대한 해군력을 보유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이 되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북경의 순치제는 이들에게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고 청야전술을 시행하여 정성공 일당 소탕에 나서자 정성공은 주된 물자 보급 및 무역 거래처들을 잃게 되어 극심한 보급난을 겪게 되었고, 이에 그는 또다른 거점을 삼아 재기를 노리게 된다. 마침 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곳이 하나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지배하던 타이완 섬이었다. 결국 정성공은 자기 휘하의 해적들을 이끌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령 대만의 대남 지방을 침공하였고, 네덜란드 백인들의 착취와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원주민들, 한족들과 함께 네덜란드 세력을 공격해서 질란디아 요새를 점령하였고 인도네시아에서 보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지원군도 격파하여 인프라를 통째로 빼앗는다.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요새 탈환을 시도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로써 정성공 일당은 대만 남서부를 차지해 그곳에 근거지를 마련하고는 동녕 왕국을 건국한다.
동녕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한 정성공은 청나라와는 독립적인 사회 제도를 구축했고 반청복명 세력인 만큼 명나라 제후왕국의 제도를 따왔다. 또한 그는 융화정책을 실시하여 한족들을 자기 일당의 지지층으로 만들고 자신들의 세력권 안에 들지 못한 대만 원주민들의 관계 계선에 힘쓴다. 또한 다두 왕국을 통해 원주민들과 교역을 하고 관계 개선을 통해 청나라 항쟁체제를 꾸리려 했다. 하지만 강성했던 동녕 왕국도 슬슬 기울기 시작했는데, 1661년에 세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원주민들의 영토까지 침범하여 슬슬 토착 원주민들과의 갈등이 생겨난다. 또한 정성공은 반항하는 원주민들은 본보기로 탄압해 고문이나 사형을 시키고 학살하거나 종으로 부리며 착취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원주민들의 영토는 축소되고 동녕 왕국과 한족에 대한 적개심은 나날이 커져갔으며 반대로 동녕 왕국의 영토는 확장되어 갔다.
또한 농민들에게 민폐를 끼치면 닥치고 사형 급으로 엄하게 군기를 잡았는데, 잘 나갈 때야 이렇게 군기를 잡아도 별 문제 없었지만, 점점 전황이 악화되면서 이런 군기잡기로 인한 불만이 폭발하게 된다. 정성공은 반청복명을 위해서 본토의 민심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기에 계속 군기를 엄하게 잡으려 했지만 그 부하들 몇몇이 병사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약탈을 허용해서 상황이 개판으로 흘러간다. 이에 불만을 사서 병사들이 반란를 일으켰고 이는 그가 청군에 패하여 진강을 비롯한 본토 주요 점령지를 잃어버린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청나라 조정의 토벌 강도도 순치제 시절보다 더 높아졌는데, 청의 강희제는 광동성, 복건성, 절강성, 강소성, 산동성 일대의 해안 지방에 거주하는 모든 상인들과 농민들을 해안가와 항구로부터 20km 떨어진 내륙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이를 어기고 해안가로 가까이 가는 자들은 정성공 일당과 내통하는 세작으로 간주하여 곡직불문 모두 참수한다는 내용의 천계령을 선포하였다. 안 그래도 보급 불자가 부족한 판이었는데 이를 계기로 내륙과의 무역선은 완전히 끊기게 되었다. 하지만 대만에는 네덜란드인들이 남겨놓고 간 사탕수수 농장도 있었고 유능한 막료들도 있었기 때문에 그럭저럭 악으로 버틸 수 있었다.
스페인 마닐라 총독부와의 관계도 좋지 못했다. 정성공은 필리핀 총독인 사비냐노 만리케 데 라라에게 너희들의 '소왕국'을 정복할 수 있지만 불쌍하기에 자비롭게 봐준다면서 순순히 조공을 바치라는 서신를 보냈다. 이에 사비냐노 만리케 데 라라 총독은 "너희는 청 정부와도 대만 원주민과도 네덜란드와도 척졌고 무례한 일을 범했으니 너희들과의 무역을 끊겠다. 꼬우면 사과해라." 라는 내용의 조롱하는 서신을 정성공에게 보냈다. 하지만 정성공은 이 서신을 받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가 말라리아에 걸려서 사경을 헤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였나면 그가 필리핀에서 한족 대학살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격노해서 청나라 정부와 연합해서 필리핀을 정벌하겠다고 소리칠 정도로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또한 어느 날에는 바닷가에 나갔다가 겁에 질린 눈으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가리키며 "저 쌓여 있는 참수된 시신들을 어서 치워라! 오, 저 시신들이 자신들을 무의미한 죽음으로 몰아넣은 죄를 나에게 묻기 위해 왔다!"며 벌벌 떨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핀 원정을 준비하던 도중 정성공은 이듬해인 1662년에 남명의 마지막 황제인 영력제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고 정성공 역시 그의 뒤를 따라간다.
끝내 정성공이 사망함과 동시에 반청복명의 기치는 장식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정성공이 적을 너무 많이 만들어놓고 죽었기 때문에 후계자인 정경 대부터 동녕 왕국은 청나라에 조공국으로 받아달라고 애걸하는 처지로 전락해버렸다. 그럼에도 반청복명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는데, 2대 국왕인 정경은 삼번의 난 때 청나라에 반기를 든 오삼계 세력에 호응했고 본토수복을 위해 군대를 보내 일시적으로나마 청야전술과 천계령으로 상실했던 복건성을 다시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경이 확보한 복건성 영토는 경정충과 청나라 관군에게 잃었고, 실의에 빠진 정경이 1681년에 죽자 동녕 왕국은 정경이 지명한 후계자인 정극장과 정극장의 동생 정극상의 내분으로 인해 조금씩 몰락하게 된다. 우선 정극상 부터가 정당한 방법으로 즉위한게 아니라서 주변인들로부터 지지받지 못하였고 이에 권신 풍석범의 전횡으로 인해 안그래도 천계령으로 어지러운 판에 국운은 더더욱 쇠하였다. 강희제는 이 좋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1683년에 지금은 투항한 정성공 휘하의 장수였던 시랑을 사령관으로 하여 해군을 편성해 대규모로 동녕 왕국을 침공했고, 정극상은 함대를 이끌고 22일 동안 팽호도에서 시랑이 지휘하는 청나라 수군에 맞서 보지만 200척의 함선과 2만 명의 병력이 각각 6척과 8천명만 남는 대패를 하게 되었고, 결국 이 패배로 인해 정극상은 풍석범과 함께 마닐라 총독부로 달아나려 하였으나 시랑이 너그럽게 나오자 끝내 시랑의 청 수군에게 항복문서를 전달하고 공식적으로 항복하고 이에 강희제가 천계령을 공식적으로 해제함으로써 1661년부터 1683년까지 22년간 이어진 동녕 왕국은 멸망했다.
네덜란드를 물리치고 대만에 건국된 첫 번째 독립국 혹은 첫 한족 정권이라 할 수 있기에 현대 대만인들이 중요하게 배우는 시대이다. 동녕 왕국은 좀 더 체계적인 정부를 세웠고, 영국과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써 통상조약을 체결하는 등 독립국으로써의 입지를 다졌으며 동녕 왕국 시기 한족들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대만은 동녕 왕국을 좋게 보는 편이다.
2.2.12. 청★◆
청나라의 국기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역량을 초월한 대전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강해진 이웃 이방인 세력들의 대출현 |
내부 혼란 |
혁명 정변 잦은 봉기 |
부패와 양극화 | 총체적 부패 |
지도층 불안정 |
권력 기반이
취약한 국가원수 막장인 지도자 및 실세 지도층 이탈 및 이반 |
국론 불균형 |
극단주의 세력의 준동 문민통제 실패 |
군사력 불안정 | 극단적인 군축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 |
잘못된 경제 개입 | 부도덕한 부유층이 창궐함 |
경제 환경 문제 | 저주받은 자원 |
인문 환경 문제 | 특정 종교&사상에 대한 박해 |
자연재해 | 초강력 범유행전염병 |
결과 | |
멸망 | 소요(쿠테타), 중화민국 북양정부 수립 |
청은 이미 건국 당시부터 문제가 존재했다. 청은 명을 멸망시킨 뒤에 중국 땅의 한족들을 상대로 대규모 학살을 진행했지만, 결국 오랫동안 중국을 지배해온지라 청=중국이란 이미지는 당연하고 사실상 일부 청의 만주족들은 한족에 동화되었다.[73] 그랬기에 청은 만주족의 국가가 아닌, 한족의 국가로 변해가고 있었고 이랬기에 이는 나라의 멸망에 일조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청이 망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전쟁이다. 특히 청나라는 한족의 반란을 두려워 해, 명나라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앞섰던 화기개발에서 손을 떼기 시작했고 팔기군을 계속 고집하였다. 그러나 그 팔기군이 문란해지기 시작하자 반란도 제대로 진압 못하는 애물단지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팔기군은 서양에서도 감탄한 정말 대단한 기병이었지만 서방세계에서는 이미 나폴레옹 전쟁 말기부터 보병들에게 대기병 전술이 정비되었기에 쓸모가 없었다. 실제로 제2차 아편전쟁 당시 영불연합군은 북경 인근의 팔리교에서 보르지기트 셍게린첸이 지휘하는 청나라가 자랑하던 정예군인 만몽팔기 2만을 13명의 전사자만 내고 그냥 갈아버렸다.
청 후기였던 19세기는 뒷 세기인 20세기와 함께 동아시아에게 있어 막장 그 자체였다. 이 무렵 유럽에선 산업혁명이 일어나 유럽의 국가들은 순식간에 강대국이 된다. 이때 대영제국은 자신들의 재정 적자를 막기 위해 청과 무역을 했다.[74] 그 당시 청은 관료부터 상인에 이르기까지 총체적 부패가 일어나 있었고, 이에 따라 아편 밀수로 대표되는 재정 황폐화가 발생했다. 결국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정신을 차린 청이 무역과 관련해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지만 그 사이에 청의 국력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영국은 전쟁을 일으킨다.
이 전쟁의 결과는 대패였고, 이때부터 청은 본격적으로 열강들에게 시달린다. 하지만 청나라는 대국은 대국이었고 결코 만만하지는 않았다. 청나라는 러시아가 야쿱 벡이 멸망한 틈을 타 위구르 지역을 집적거리던 군사 활동을 물리쳤고, 프랑스와의 전쟁에서는 유리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후진적인 체제 때문에 전투에서 이기고도 협상에서 손해를 보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 한편 쿠로후네 사건으로써 개항한 뒤, 메이지 유신을 통해 산업혁명을 받아들인 일본은 금세 동아시아의 강대국이 되었고[75] 이랬기에 바로 옆 나라인 조선을 청으로부터 빼앗기 위해서[76] 전쟁을 일으킨다.[77] 지휘관의 삽질과 구식 전술을 사용하는 청은 극동 최강의 함대를 갖고도 일본을 이길 수 없었고 결국 청은 정전협정을 맺었지만 사실상 패배한다.
이후 일본과 같이 서양의 기술만이 아닌, 기존 체제도 완전히 뒤엎자는 목소리가 나왔고, 이는 변법자강운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청은 대한제국과 마찬가지로 이미 열강들의 먹이가 된지 오래였고, 변법자강운동도 실패로 이어지고, 이후 반동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지만 오히려 분노하여 단합해온 열강에 의해 역으로 처참하게 털렸다. 심지어는 한때의 꼬봉이었던 조선이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청을 대놓고 무시하며 대한제국에게 간도를 삥뜯기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극이 이어진다. 의화단 운동의 결과로 청은 열강들에 의해 분할당할 위기에 놓였으나 그러나 중국땅은 생각보다 넓었고 저항하는 사람은 너무 많아[78] 식민지가 되는 것만은 면했다. 이러한 가운데 결국 1912년, 신해혁명으로 296년간[79] 이어져온 청나라는 멸망한다.
이후 무너진 청을 대신해 중국 대륙을 새로 지배하게 된 중화민국은 삼민주의를 내세우며 군주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개혁을 시도했고, 그로 만들어진 나라는 아직도 건재하지만 결과는 지금 봐선 폭 망.
2.3. 일본사
2.3.1. 에조 공화국
에조 공화국의 영토와 영향권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한계를 초과한 물량 서구열강들이 등을 돌림 유일한 핵심 전력을 상실 |
내정 |
빈약한 기반 과도한 세금 징수로 인한 주민들의 배신 |
공황 | 바닥을 드러낸 국고 |
결과 | |
멸망 | 국치(합병) |
2.4. 베트남사
2.4.1. 응우옌 왕조
응우옌 왕조의 국기 |
사실 응우옌 왕조는 근대화라는 측면에 있어서는 오히려 동시대 중국, 한국, 일본에 비해서도 훨씬 유리한 위치에 서있었다. 당시 청나라, 조선, 에도 막부 모두 세워진지 몇 백여년이 지난 시점이었기에 사회가 경직되고 보수적인 면이 강했던 반면, 1802년에 새롭게 들어선 응우옌 왕조는 신생 정권이었기에 사회의 경직성이 훨씬 덜한 면이 있었다. 물론 농민 봉기로 세워진 직전의 떠이선 왕조에 비하면 개혁적인 면이 덜했지만 아무래도 다른 동아시아권 국가들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서있었던 것. 하지만 안타깝게도 응우옌 왕조의 황제들은 개혁보다는 기존의 유교 질서에 집착하며 이른 개혁의 기회를 놓쳐버렸고 이는 결국 응우옌 왕조의 몰락을 불러오고야 만다.
응우옌 왕조 멸망의 결정적인 원인은 시대적 타이밍이 너무 안좋았다는 것이다. 당시 이미 유럽 열강들이 세계를 마음대로 갈라먹고 있던 시점이었고, 응우옌 왕조가 무슨 짓을 했더라도 유럽의 식민지라는 운명을 쉽사리 벗어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중국은 한 나라가 집어삼키기에는 너무 땅덩이가 컸고, 한국과 일본은 유럽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던 탓에 유럽의 마수로부터 한발자국 벗어나는 게 가능했지만 베트남은 동아시아권 국가들에 비하면 지나치게 유럽에 가까웠다. 게다가 건국 시점부터 프랑스의 도움을 받았을 정도로 유럽의 입김이 많이 닿아있던 땅이었다. 즉 이미 프랑스가 침을 발라놓고 있던 땅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대적 운명이라는 이유로 응우옌 왕조의 황제들이 책임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응우옌 왕조는 민망 황제 시절 기독교, 이슬람, 참족에 대한 탄압을 가속화해 전국적으로 200여 개가 넘는 반란을 일으키도록 만들었다. 참족 무슬림에게는 강제로 도마뱀과 돼지고기를, 참족 힌두교도에게는 소고기를 억지로 먹이면서 반감을 있는대로 사는 짓을 저지르기도 했다. 유교 질서를 지키기 위해 유럽인 선교사들을 포함해[80] 수많은 천주교도들을 잔혹하게 박해했고, 이는 결국 프랑스와 유럽권들의 침략을 용인하는 빌미가 되고 말았다. 즉 왕조 말기 국내의 혼란은 응우옌 왕조가 스스로 자초한 면도 있는 셈이다. 게다가 19세기 유럽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개혁파들이 황제에게 개혁과 근대화를 탄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뜨득 황제와 조정을 장악한 보수 세력은 적극적인 근대화를 꺼렸다. 당장 문호를 개방하고 나라를 열어젖혀도 모자랄 판에 쇄국 정책을 펴고 있으니 나라가 망해가는 건 시간 문제였다.
이렇게만 보면 어째 조선의 순조 ~ 고종 시대와 비슷해보이지만 황제가 독립운동에 소극적이었던 대한제국과는 달리 응우옌 왕조의 함응이 황제는 나름 친히 저항 운동에도 나서기도 했다. 1885년 발발한 껀브엉 운동(勤王運動)이 바로 그 것인데, 이 운동의 목적은 프랑스인들을 몰아내고 소년 황제에게 실권을 돌려주자는 것이었다. 함응이 황제는 후에 황궁을 탈출해 떤서의 산악 기지로 도망쳤고, 그 곳에서 칙령을 발표해 전국민에게 프랑스에 대항할 것을 명령했다. 약 4년 간 지속된 껀브엉 운동은 격노한 프랑스가 몇 만에 달하는 대군을 보내 저항군을 쓸어버리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껀브엉 운동은 황족, 귀족, 평민 등 여러 계급들이 하나되어 외세에 맞서싸웠다는 의의가 있으며, 특히 황제가 직접 시골로 내려가 레지스탕스를 벌이는 모습은 수많은 농민들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소년 황제가 주도적으로 독립 운동에 나선 건 아니었고 섭정의 뜻대로 휘둘린 것 역시 사실이었고, 지나치게 많은 세력이 궐기한 탓에 하나의 중심 세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한계는 있었지만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멸망한 것은 아니었다는 소리다.
안타깝게도 현대 베트남 내에서 응우옌 왕조에 대한 평가는 박한 편이다. 현대 한국이나 북한에서 대한제국에 대한 평가가 박한 것과 비슷한 이치다. 프랑스 식민당국은 통치의 정당성을 위해 일부러 응우옌 왕조를 깎아내렸고,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민족주의 진영이나 공산주의 진영에서도 애초에 건국 자체가 프랑스와 태국 등 외세의 힘을 빌려서 이룩했다는 점과 결과적으로는 근대화에 실패하고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점들 때문에 박하게 평가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이 때문에 베트남의 남북분단 이후 어느 쪽에서도 응우옌 왕조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해줄 정치적인 이유가 없었다. 군주정 자체와 상극인 공산주의 북베트남은 물론이고, 남베트남 역시 베트남 공화국의 건국세력인 근로인위혁명당과 혁명위원회 양쪽 모두가 바오다이에게 매우 적대적이었기에 바오다이의 조상들인 광남 응우옌 왕조를 일부러 재평가해줄 이유가 없었다. 그나마 1990년대 이후 조금씩 재평가가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결과적으로 프랑스를 상대로 이겨보지는 못하고 통치권을 내주고야 말았으니 응우엔 왕조에 대한 이미지가 여전히 좋을 수가 없기는 하다.[81]
2.5. 서·남아시아사
2.5.1. 아시리아
아시리아의 영토와 영향권 |
2.5.2. 아케메네스 왕조★◆
아케메네스 왕조의 군기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내전 역량을 초월한 대전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패전해 정복을 겪음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나도 막강해진 이웃 |
내부 혼란 |
봉기 지배층 쿠데타 |
부패와 양극화 | 지도층 부패 |
지도층 불안정 |
갑자기 사망하거나
부재중인 지도자 권력 기반이 취약한 국가원수 군략이 부족한 지도자[82]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 |
군사력 불안정 | 국방력 대붕괴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 |
특정 집단 소외 |
정복지 관리 실패 다문화 정책 실패 |
잘못된 경제 개입 | 부도덕한 부유층이 창궐함 |
결과 | |
멸망 | 국치( 헬레니즘 제국에 합병) |
아케메네스 왕조는 한때 서남아시아와 지중해 세계 거의 대부분을 장악한 대제국이었다. 하지만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멸망 직전인 기원전 333년까지만 해도 여전히 세계 최강대국이었고 경제력 역시 세계 제일을 달리는 압도적으로 부유한 국가였다. 막 새로운 황제 다리우스 3세가 즉위하느라 그 사이에 이집트나 레반트 일대에서 반란이 일어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성공적으로 진압했고, 다리우스 3세도 환관 바고아스를 제거하고 황권을 확립하는 등 나름 능력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변수만 없었다면 아케메네스 왕조는 최소한 몇 십년은 충분히 버틸만한 체력이 남아있었던 안정적인 국가였다.
하지만 안정적이었던 아케메네스 왕조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는 희대의 괴물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사실 마케도니아에서 필리포스 2세가 암살당하고 젊은 알렉산드로스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그 누구도 그 강대하던 페르시아가 그렇게 무너질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필리포스 2세가 죽자 그가 기껏 통일해놓은 그리스에서도 반란의 징조가 보였고, 무엇보다도 척박하기 짝이 없는 그리스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아나톨리아를 모조리 장악한 페르시아는 지나치게 체급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83]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압도적인 군재와 재능을 이용해 흔들리는 코린토스 동맹을 복구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군을 이끌고 페르시아로 진격할 수 있을만한 군대를 모으는 데도 성공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원전 334년에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꺾었고, 기원전 333년에는 3배가 넘는 병력의 열세를 딛고 이소스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가 이끄는 페르시아의 주력군을 박살내면서 전세를 아예 역전시켜버렸다. 이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핵심 친위군인 불사 부대들이 싸그리 전멸하면서 페르시아는 전력이 반토막났고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소스에서 승리한 직후 이집트로 남진해 이집트를 해방하기까지 하면서 페르시아에 치명타를 입혔다.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페르시아가 알렉산드로스를 격퇴할 역량은 남아있었다. 아직 페르시아를 비롯해 가장 부유한 메소포타미아와 바빌론 일대는 여전히 건재했고, 수도 페르세폴리스와 엑바타나, 수사에 금덩어리들이 산같이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이소스에서 패전해 달아난 다리우스 3세는 아득바득 페르시아의 모든 역량을 긁어모아 10만의 대군을 이끌어 기원전 331년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와 다시 맞붙었다. 하지만 전투 도중 다리우스 3세가 원인불명의 이유로 도망치면서 전열이 무너졌고, 페르시아군은 그렇게 허망하게 패배했다. 실로 한 사람의 순간적인 판단착오가 대제국의 멸망을 불러온 셈이다. 이후 페르시아는 도미노 무너지듯이 힘없게 하나하나 함락당했고 다리우스 3세는 신하에게 암살당해 죽었다.
페르시아가 3년 만에 그토록 허무하게 망해버린 이유에는 페르시아가 다민족 제국이라는 영향도 컸다. 단일민족 제국이거나 같은 문화권이었다면 민족적 동질성 때문이라도 한마음 한뜻으로 그리스에 맞섰겠지만, 페르시아가 워낙에 거대하고 다양한 민족들이 모여살다보니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니 민족들마다 분열되어 마치 모래성 무너지듯이 폭싹 내려앉은 것이다. 하지만 이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시절에도 곳곳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했고, 수많은 민족들을 몇 백여년에 걸쳐서 통제하며 오랜 전성기를 누린 점을 보면 어쨌든 결정적인 이유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는 괴물의 출현 때문이 맞다. 다리우스 3세가 지나치게 졸전과 패전 기록들로만 유명해서 그렇지 알고보면 그렇게 능력없는 인물은 아니었고 오히려 유능한 편에 가까웠다.[84] 알렉산드로스가 등장하지만 않았다면 페르시아 제국도 최소 몇 십년은 더 갔을 것이다.
2.5.3. 사산 왕조★◆
사산 왕조의 국기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한계를 초과한 소모전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패전해 정복을 겪음 내전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강한 이웃 |
내부 혼란 |
정변 지배층 쿠데타 |
지도층 불안정 |
권력 기반이 취약한 국가 원수 국가원수의 잦은 교체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 |
군사력 불안정 | 국방력 대붕괴 |
특정 집단 소외 |
정복지 관리 실패 다문화 정책 실패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재정 문제 | 국고 고갈 |
자연재해 | 초강력 범유행전염병 |
결과 | |
멸망 | 국치( 이슬람 제국에 합병) |
2.5.4. 호라즘 왕조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패전해 정복을 겪음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강한 이웃 |
내부 혼란 | 봉기 |
부패와 양극화 | 피지배층 부패 |
지도층 불안정 | 자신감에 도취하여 막장화한 지도부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 |
군사력 불안정 | 국방력 대붕괴 |
특정 집단 소외 | 정복지 관리 실패 |
잘못된 경제 개입 | 부도덕한 부유층이 창궐함 |
자연 환경 문제 | 장기적인 환경 악화[85] |
결과 | |
멸망 | 국치( 몽골 제국에 합병) |
호라즘 왕조는 본디 셀주크 제국의 속국으로 세워진 나라로 초기에는 양옆으로 있는 셀주크와 서요에게 이중으로 복속된 나라였지만 시간이 지나며 두 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다가 테키쉬와 무함마드 2세때 본격적으로 강국으로 발전하여 무함마드 2세 시기에 이르면 동부 이슬람권 유일의 패권국이 되었으며 이 때 무함마드 2세는 '제2의 알렉산더', '지상의 알라', '알라의 그림자' 등으로 불릴 정도로 강력한 정복군주였다.
다만 문제는 셀주크 이후 수십년간 사분오열된 동부 이슬람 세계를 이제 막 통일했다는 것으로 그래서 호라즘 왕조는 내부가 어수선한 상태였다. 그래도 대부분의 적들을 없애버렸으니 대외적으로 큰 적은 없었기에 내치에 전념하며 나라를 안정시켰다면 이 문제도 해결될 일이었으나 동방에서 나타난 거대한 적이 문제였다.
당시 동쪽에는 막 몽골 제국이 일어선 상태였고 본래는 두 나라는 사이에 서요가 있어서 국경을 접하지 않았지만 서요가 몽골 제국에 흡수되면서 둘이 국경을 맞대게 된다. 그래도 당시 몽골 제국은 금나라를 공격하는 게 중요했지 일부러 멀리 있는 호라즘 제국을 적대할 이유도 없었기에 처음에는 사절단을 보내며 좋게 지내려고 했는데 외교분쟁 하나가 일어나면서 모든게 달라진다.
사절단이 오트라르의 영주인 이날추크와 마찰이 생긴 것을 계기로 이날추크가 그들을 죽여버리고 재물을 빼앗았다. 문제는 이날추크가 당시 무함마드 2세의 태후인 테르켄 카툰의 친족이었고 호라즘 제국의 폭발적인 팽창에는 그녀가 속한 캉그리족 집단의 힘이 컸기에 무함마드 2세는 이날추크를 벌할 수 없었고 결국 분노한 칭기즈 칸이 전쟁을 일으키면서 호라즘 제국은 멸망하고 만다.[86]
2.5.5. 티무르 제국
티무르 제국의 국기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잦디잦은 내전 건드리지 말았어야했다 패전해 정복을 겪음 |
내부 혼란 | 지배층 쿠데타 |
부패와 양극화 | 지도층 부패 |
지도층 불안정 |
갑자기 사망하거나
부재중인 지도자 지도층 이탈 및 이반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 |
군사력 불안정 | 국방력 대붕괴 |
특정 집단 소외 | 통합적인 지방 관리의 실패 |
잘못된 경제 개입 | 부도덕한 부유층이 창궐함 |
인문 환경 문제 | 지배층의 지나친 감투 심취 |
자연 환경 문제 | 장기적인 환경 악화[87] |
2.5.6. 사파비 제국
사파비 제국의 국기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역량을 초월한 소모전 내전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강한
이웃들 이방인들 대출현 |
내부 혼란 |
지배층 쿠데타 봉기 역성혁명 |
부패와 양극화 | 지도층 부패 |
지도층 불안정 |
권력
기반이
취약한
국가원수 질시에 사로잡혀 막장화한 지도자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 |
특정 집단 소외 |
통합적인 지방 관리의 실패 일부 집단을 심각하게 탄압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재정 문제 |
국고 고갈 과도한 징세 |
잘못된 경제 개입 | 부도덕한 부유층이 창궐함 |
인문 환경 문제 |
특정 종파에 대한 박해[88] 군주의 지나친 향락 심취 |
결과 | |
멸망 | 국치 |
사파비 제국이 크게 팽창하지 못했던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바로 옆에 세계 최강국들 중 하나였던 오스만 제국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파비 제국의 창업군주인 이스마일 1세부터가 찰디란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의 막강한 화력에 깨졌고, 그 뒤를 이은 타흐마스프 1세는 오스만 군대에게 수도 이스파한을 털리고 나라가 아예 망해버릴 뻔했다. 당시 오스만의 황제가 그 쉴레이만 대제였으니 사파비 제국이 제아무리 강하더라도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깨질 수밖에 없었던 것. 심지어 사파비 제국은 최전성기인 아바스 1세 시절에조차도 오스만 제국과 호적세를 유지할 뿐 압도하진 못했고 존속 기간 내내 단 한번도 국력으로 오스만 제국을 넘을 수 없었다. 그나마 페르시아의 몸집이 워낙 커서 그렇지 작은 약소국이었다면 진작에 멸망하여 합병당했을 것이다.[89]
그러나 아바스 1세 사후 무능한 황제들이 연달아 즉위하면서 사파비 제국은 나라 꼴이 점차 말이 아니게 된다. 바그다드를 포함해 중동의 핵심 교역로를 오스만에게 빼앗겼고, 1500년대에는 러시아 제국이 새로운 경쟁자로 등장해 페르시아 지방을 호시탐탐 노리기 시작했으며 동쪽으로는 파슈툰인들과 투르크멘인들이 공격해왔다. 당연히 국력은 크게 약해졌고 황제의 권위는 땅바닥으로 추락하면서 사파비 제국은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로 전락했다.
사실 사파비 제국이 안정적이지 못한 이유는 페르시아 특유의 부족 중심 사회도 한 몫 했다. 당시 사파비는 티무르 제국 이래 몇 십여 년 동안 통일 왕조를 이루지 못하고 있던 페르시아를 하나로 겨우 묶어내는데 성공했는데, 통일 이후에도 우스타줄루 부족, 샴루 부족 등이 안에서 치고받고 싸우면서 권력쟁탈전을 벌였다. 게다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수많은 부족들이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고 1720년대에는 아프간계 호타크 왕조에게 수도 이스파한을 함락당하며 망하기 직전까지 갔다.
다만 사파비 제국은 길바닥 출신 전쟁영웅 나디르 샤의 도움을 받아 호타크 왕조를 몰아낸 후 다시 이스파한을 수복하고 재기에 성공한다. 하지만 나디르 샤의 군사적 업적을 질투한 황제 타흐마스프 2세가 독단으로 오스만 제국을 침공하는 엄청난 트롤링을 저지르면서 사파비 제국도 끝장난다. 당연히 타흐마스프 2세는 기껏 나디르 샤가 회복한 영토까지 오스만 제국에게 털렸고, 이에 격분한 나디르 샤가 타흐마스프 2세를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에 오르면서 사파비 제국도 멸망한다. 만약 타흐마스프 2세가 이 짓거리만 안했어도 이보다는 오래 존속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90]
사파비 제국이 망한 이유를 한가지 더 꼽아보자면 소수파에 대한 지나치게 가혹한 탄압이 있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수니파와 조지아인, 아르메니아인 등의 코카서스 백인종들이다. 애초에 사파비 제국은 시아파 종교 단체 사파비야에서 시작했기에 시아파를 중시하는 건 당연했지만 사파비 제국은 수니파에 대한 탄압이 유난히 심했다. 수니파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여버리는 경우가 허다했으니[91] 허구한날 수니파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같은 수니파 국가인 오스만 제국에게 좋은 침공의 빌미까지 제공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하지만 최악은 코카서스인들에 대한 탄압이었다. 아바스 1세는 반란을 진압한다는 이유로 조지아계 카헤티 왕국 인구의 3분의 2를 증발시켰다. 대부분은 죽이거나 페르시아로 노예로 끌고왔다. 이딴 짓을 해놨으니 당연히 코카서스에서 페르시아에 대한 반감이 엄청났고 이는 후일 사파비 제국 멸망의 단초가 된다.
2.5.7. 무굴 제국★
무굴 제국의 국기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내전 패전해 정복을 겪음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강한 아랫동네 |
내부 혼란 |
온갖 봉기들 지배층 쿠데타[92] |
지도층 불안정 | 국가원수의 잦은 교체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 |
특정 집단 소외 |
일부 집단을
심각하게 탄압 다문화 정책 실패 정복지 관리 실패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93] |
재정 문제 |
국고 고갈[94] 비무슬림들에게 과도한 징세 |
인문 환경 문제 | 특정 종교에 대한 박해 |
결과 | |
멸망 | 국치(합병) |
무굴 제국은 아우랑제브 황제 시기 남인도 일부를 제외하면 인도 대부분을 정복한 대제국이었지만 정작 속을 까보면 텅 빈 강정이었다. 아우랑제브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당시 무굴 제국의 정복 방식은 기존 지배계급을 전투에서 무릎꿇린 후 충성 맹세만 받아내고 그대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방법이었다. 당연히 이런 식으로 정복을 했으니 조금만 나라가 흔들리면 토후들 대부분이 반란을 일으켜 독립선포를 했고, 이는 아우랑제브 사후 무능한 황제들이 연달아 등장하면서 현실이 되고야 만다. 무굴 제국은 아우랑제브가 죽고 30여 년도 안 돼서 남인도 영토 대부분을 잃어버렸고, 북인도에서도 심심하면 반란이 터져나왔다. 게다가 남쪽에서 힌두교 동맹세력인 마라타 동맹이 끊임없이 시비를 걸어오면서 무굴 제국은 평화로울 날이 없었다.
그래도 무굴 제국은 1730년대까지는 나라 형태를 갖추고 인도의 패권국으로 인정받았다. 허나 1739년 나디르 샤가 침공해 수도 델리를 바닥까지 털어가면서 이때 이후로는 제대로 된 나라 꼴도 갖추지 못하고 휘청거리기 시작한다. 무함마드 샤 황제가 그나마 복구를 시도했지만 끝내 실패했고 이후 권력다툼과 무능한 황제들 탓에 무굴 제국은 적국인 마라타 동맹, 아프가니스탄의 보호국으로 전락하는 등 온갖 수모를 겪는다. 사실상 제국으로서의 무굴 제국은 1739년 나디르 샤의 침략 때 망했다고 봐도 된다.
아우랑제브 사후 무굴 제국은 그냥 수도 델리 일대만으로 근근이 연명하는 지방정권으로 봐도 무방하다.[95] 사실 이렇게 빨리 몰락한 결정적 원인은 아우랑제브 본인에게 있다. 독실한 무슬림이던 아우랑제브가 대놓고 극단적인 이슬람 우대 정책을 펴면서 힌두교와 시크교를 깔아뭉갰기 때문인데, 안그래도 힌두교도들이 압도적 다수인 인도에서 이런 짓을 했으니 제대로 나라가 돌아갈 리가 없었다. 특히 시크교의 경우 구루를 땅에 생매장하는 만행을 저지르며 완전히 감정의 골이 깊게 파였다. 비무슬림들에게 부과하는 인두세인 지즈야를 부활시키고 힌두 사원들을 밀어버리는 등 아우랑제브의 종교 정책은 완벽한 재앙이었다. 뿐만 아니라 50년에 걸친 재위 기간 내내 전쟁을 벌이며 국고를 탕진했고 전쟁 피로감을 어마어마하게 쌓았다. 이 역시 후일 무굴 제국이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붕괴하는 데 한 원인이 된다.
무굴 제국 붕괴의 또 다른 원인은 무질서한 제위계승원칙이다. 다른 나라에선 장자계승원칙이라는 게 존재했지만 무굴 제국은 그런 게 없었다. 무굴 제국은 몽골 제국과 티무르 제국의 후신을 주장했는데, 얘네는 전통적으로 장자계승이 아니라 능력있는 자가 모든 것을 가진다라는 마인드였기 때문이다. 후마윤, 샤 자한, 아우랑제브가 모두 제 형제들을 죽이고 황위에 올랐고 특히 아우랑제브는 아예 제 아버지를 감옥에 처넣은 후 제위를 찬탈했다. 이후 아우랑제브가 죽고 난 이후에도 계승자들이 황위에 앉아보겠답시고 허구한날 반란을 일으키고 황제를 칭제하며 무굴 제국은 제살 깎아먹기 경쟁에 시달려야 했다. 황제가 바뀔 때마다 모든 걸 소모하는 내전을 치르는 격이었으니 나라가 오래 갈 리 없었다.
그렇게 무굴 제국은 1739년 나디르 샤의 델리 약탈 이래 무기력하게 100년 넘게 존속하다가 결국 영국에게 합병당하며 허무하게 망한다. 무굴 제국이 공식적으로 영국에게 망했긴 하지만 사실 무굴 제국은 영국이 인도를 완전히 장악하기 100년도 전에 반쯤 망한 상태나 마찬가지라서 유럽인들이 무굴 제국의 붕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건 아니다.[96] 무굴 제국은 그냥 자기들끼리 지나치게 무리한 확장전쟁을 벌이다 종교 탄압, 국고 탕진, 내전으로 자멸한 감이 더 크다. 만약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삼지 않고 기존 영토로 만족했다면 무굴 제국은 다른 국가에 정복당하거나 역성혁명이 일어나는 등 다른 이유로 멸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2.6. 서양사
2.6.1. 스파르타★
스파르타의 영토와 영향권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역량을 초월한 총력전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패전해 정복을 겪음[97]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98]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강해진
이웃
도시국가들 이방인 대출현 |
내부 혼란 | 봉기 |
부패와 양극화 | 양극화와 중산층 와해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 |
군사력 불안정 | 극단적인 징병[99]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 |
특정 집단 소외 |
국민 대부분을 심각하게 탄압 마녀사냥 정복지 관리 실패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재정 문제 | 국고 고갈 |
인문 환경 문제 | 지배층의 지나친 특정 사상 심취 |
결과 | |
멸망 | 국치(합병) |
우선 스파르타가 멸망한 원인에는 헤일로타이가 있다. 헤일로타이는 스파르타 사회의 노예계층으로 그들은 원래 메세니아라는 별개의 독립 국가의 국민들이었다. 스파르타는 메세니아를 정복하여 괴뢰국으로 만들어 버리더니 그 당시 사회 통념으로 봐도 엽기적인 일을 국가 단위로 저질렀다.
-
별 명분 없이 같은 그리스인인 메세니아 전 구성원을 노예로 만들어버렸다.
이는 이례적인 일로 당시 그리스내 도시국가들은 이 당시엔 " 그래도 우리 그리스인 아이가?"(…)라는 식으로 그리스인 = 문명인으로서 묶여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민족적으로 스파르타와 타 폴리스들은 조금 다르긴 했지만, 그래도 다른 폴리스들은 같은 그리스인끼리는 노예로 삼지 않았다. - 사유 재산이 된 노예를 관리하긴커녕 생산물의 절반을 무조건 납부하게 만들었다.
- 그리고 전 국민이 스파르타의 사유 재산이지만, 형식상으로는 멸망하지 않은 메세니아에게 매년 전쟁 선포를 하여 반란 위험이 있는 자들을 모조리 살해했다.
이렇게 되면 겁을 먹거나 구심점을 잃어서 스파르타에 찍 소리를 못할 것이라는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당연히 내년에 칼 맞고 죽거나 또는 평생 착취당하며 노예로 굶어죽느냐밖에 선택지가 없는 메세니아에선 심심치 않게 반란이 일어났고, 사실상 스파르타의 몽니로 남아버렸다. 그로 인해 타국과 전쟁해서 얻은 점령지에 군사들을 장기 주둔시킬 수 없던 후기에는 다른 점령지가 반란으로 인해 떨어져 나가는 걸 눈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겐 또한 우생학적 이념이 있었다는 것 또한 알아야 한다. 스파르타에서는 영아살해라는---- 악습이 있었는데, 이는 강인한 전사들만 필요하고 나약한 이들은 필요가 없다는 스파르타인들의 이념에 기반했었다.[100] 이러한 우생학적 관념의 적용 대상은 그들이 정복한 헤일로타이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이들을 구분할 수 있는 표식을 달고 다니게 하고 혼혈을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헤일로타이와의 결혼도 엄격히 금지되었다.
이런 폐쇄적인 사회 탓에 경제는 거의 발전하지 못했다. 스파르타에서 사용되는 화폐는 외국에서는 거의 쓰레기 취급받았고[101] 게다가 헤일로타이의 사보타주 및 농업 기술 발전의 의도적인 저지는 잉여 생산물 산출을 막아 상업의 발전이 늦어져[102] 고전기 그리스 중에서 가난한 국가라는 인식을 떨쳐 내지 못하게 되었다.
특히 시대가 변화에 따라 개인의 군사적 능력보단 집단 전술, 결속력 등이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개 군사의 전투력에 의존하는 전술을 포기하지 않았다. 게다가 스파르타 특유의 우생학적 영아살해, 외부 이민의 차단[103] 및 계속된 전쟁으로 인한 인적 자원 소모로 인해 말기엔 스파르타 중장보병의 핵심인 '스파르타 완전 시민(스파르티아티코스)'의 숫자는 최전성기 1만 명에서 수백 명[104] 정도로 줄어들었으며, 그나마 스파르타인의 20배나 많은 헤일로타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이들을 모두 전장에 보낼 수도 없었다.[105]
이와 관련해서 이보다 전 이오니아가 페르시아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당시 이오니아에서 온 사신이 스파르타 왕에게 우리를 도와주면 금을 주겠네 마넸네 하면서 온갖 사탕발림으로 구슬러도 안 넘어오자, 사신이 "그럼 당신들이 우릴 도와줘서 당신들 용맹을 증명해봐라"라고 도발했더니 스파르타의 왕이 흥미가 생겼다. 문제는 스파르타 왕이 "그런데 이오니아는 여기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냐?"라고 물었는데 이에 이오니아 사신은 솔직하게 배 타고 1달은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스파르타 왕은 스파르타인을 배 타고 1달이나 걸리는 곳에 보내려고 했다며 역정을 내면서 사신을 쫓아냈다.
또한 식민지인 메세니아는 "어차피 수확물이 늘어도 스파르타에 다 바쳐야 하는데 뭐하러 열심히?"라는 상황이었으므로 농업 기술 발전은 제자리걸음, 덕분에 타국과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해 군사력 증강을 위한 정책이 오히려 전체적인 군사력을 퇴보시키는 기이한 결과를 낳게 되었다. 선군정치를 시행하는 나라에서는 보편적으로 겪는 현상.[106]
나중엔 테베에게 시비 걸었다가[107] 오히려 크게 패해 메세니아를 독립시키라는 요구를 들어 줄 수밖에 없게 되면서 돈줄이 사라진 스파르타는 쇠락의 길로 돌아서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훈련을 시켰어도, 애당초 인간이라는 한계상 전투력을 올리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 결과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폴리스만 되어도 스파르타가 평생 훈련한 중장보병에 버금가는 시민병들을 육성할 수 있었는데, 당장 원래 육군이 약하기로 평가받던 아테네도 시켈리아 전투 등 스파르타를 이긴 전투는 분명히 있었고, 데기라 전투때는 테베의 300명의 신성부대에게 1,800명의 스파르타 병사들이 전멸하는 대굴욕을 겪었으며, 레욱트라 전투에서도 2배나 많은 병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처참하게 패배해 스파르타 전체가 몰락한다. 이 패전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이긴지 30년밖에 안 지난 시점이라 변명의 여지도 없다.
여기에 더해 대타격이 있었으니 바로 인구 감소. 우생학적 사고관은 물론, 신분이 내려가는 건 가능해도 올라오는 게 어렵거나 불가능한 구조다 보니 시민계급의 숫자가 계속 줄어들었다. 물론 제2계급으로 어떻게든 땜빵을 좀 하긴 했지만, 그래도 수가 모자랐다. 여기에 더 타격을 준 것은 바로 출산율 저하. 스파르타는 특이하게도 공동식사 등 공동 생활을 강조했지만, 그걸 지탱하는 건 개인의 몫이었다. 자녀교육인 아고게 비용도 공동 식사 비용도 개인이 각자 부담해야 했다. 하지만 스파르타가 패권을 차지한 후 시민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워졌고[108] 이 때문에 공동 식사 비용에 아고게 비용까지 짊어지기 어려운 사람들이 출산을 포기했다. 스파르타 같은 나라일수록 출산율에 목매달아야 하는데, 사람들 삶이 어려워지다 보니 이런 일이 벌어진 것. 물론 스파르타도 이를 알았기에 독신자 처벌 등의 정책은 내놨지만, 실효는 별로 못 보았다.
그러나 개혁의 목소리가 없지는 않았다. 고대 스파르타의 전통을 부활시키려는 복고적[109] 개혁의 시도가 있었으며 실제로도 일시적이나마 효과가 있기는 하였으나, 귀족들과 외국의 반발 및 개혁을 이끈 클레오메네스 3세나 나비스 4세의 사망으로 무산되어[110] 결국 얼마 뒤에는 마케도니아 왕국에 정복되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에는 에페이로스, 마케도니아, 아카이아, 아르고스 등의 그리스 국가들과 분쟁을 벌이다가 스파르타의 마지막 왕인 나비스 4세의 죽음과 스파르타의 함락으로 아카이아 연맹에 합병되면서 이후 로마에 편입되었다.
2.6.2. 로마 제국
2.6.2.1. 서로마 제국★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내전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패전해 정복을 겪음[111]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이방인 세력들의 대출현 |
내부 혼란 |
봉기 정변 |
부패와 양극화 | 지도층에서 만연한 부패 |
지도층 불안정 |
갑자기
사망하거나
부재중인
지도자 국가 원수의 잦은 교체 무능하고 막장인 지도자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112] |
군사력 불안정 |
군인들의 반란[113] 극단적인 군축 국방력 대붕괴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 |
특정 집단 소외 | 통합적인 지방 관리의 실패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급작스러운 화폐가치 변동 | 살인적인 초인플레이션 |
결과 | |
멸망 | 국치(유린) |
원래부터 로마 제국의 서방이 동방보다 약했던 것은 아니었다.[114]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때 로마 제국이 최초로 동서로 나뉘어졌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서부의 국력이 동부의 국력보다 약하지 않았다.[115] 이후 서서히 제국의 주도권이 동부지역으로 넘어가긴 하지만 동서 분열 불과 수십년 전인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아직도 서방이 동방보다 더 강했다. 이때는 오히려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황제가 전사하고 중앙군 대부분이 날라간 동방이 서방보다 더 위기였다.
단,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물론 로마 제국의 수도이자 정신적 고향인 로마와 이탈리아 반도가 있는 서로마가 정치적 영향력이 컸기는 했지만, 땅의 풍요도와, 문화적 영향력, 땅에 대한 행정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제력'은 동로마 지역이 비교도 안되게 우월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고대 로마 제 정 말 기가 아닌 그 지역을 정복했던 공화정 후기부터 있었던 현상이다.
대충 비교해봐도 서로마 지역 중 정복시에 어느 정도 문명화되었다 싶은 곳은 이탈리아 반도, 페니키아의 식민지 출신인 카르타고의 영토였던 북아프리카,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이베리아반도와 갈리아 남부 해안도시 정도였다. 그 외에 대부분의 영토는 미개한 땅을 근성으로 개척해 나가던 곳에 불과했다.
그에 비해 동로마는 대부분의 영토가 저 옛날 로마 왕정 시기에 이미 빛나는 문명을 이루던 곳이다. 로마인 입장에서도 까마득한 옛날에 경이로운 문명을 이루고 번성하던 이집트, 시리아 지역은 물론,[116] 헬레니즘 지역의 중심지인 그리스까지 동로마에 속했기에, 동로마는 전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지역을 가지던 셈이다. 이전 각주에서 중국이라는 압도적인 존재가 있다고 서술했는데 이는 정확하다고 보기 힘들다. 동로마, 즉 오리엔트 지역인 메소포타미아, 이집트는 대략 기원전 3500년경에 문명이 시작되고 국가라는 게 나왔다. 이는 문자 기록이 발견되었나에 관한 것임으로 그거보다 1000~2000년 전에도 뭔가 있었을 거라는 추측이 많다. 이는 중국은 물론 세계 어느 나라도 문명이랄게 없던 시절이다. 이후에도 잠시 바다 민족의 침략을 겪었던 때[117]를 제외하면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풍요도로 봐서도 동로마는 시민권자에게 식사를 공짜를 주는 돈지랄을 가능하게 한 이집트, 대부분의 땅을 잃게 된 이후에도 인구 2000만 가량을 부양할 수 있게 만든 아나톨리아 등 풍요롭기로도 제일인 땅을 가지고 있었다.
문화적으로 봐서도 로마제국 시기 인구 수십만을 찍은 세 개의 도시인 로마,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중 로마를 제외하면 모두 동로마에 있었으며 학술적인 문화를 지배한 헬레니즘의 탄생지 또한 알렉산드리아, 아테네 등 동로마의 영역에 속한 곳이었다.
이렇듯이 이미 시작부터 로마에서 정치적인 면을 제외하면 동로마가 훨씬 더 우위에 있었다. 원로원의 사람들이 서방보다 동방에서 총독으로 근무하기를 선호하고 폼페이우스, 안토니우스 모두 유리한 상황에서 동방을 선택한 것은[118] 이러한 문화적, 경제적 이점 때문이었다. 따라서 동로마는 이미 정치적인 면을 제외한 다양한 면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후에 서고트족의 로마 약탈과 새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건설로 정치적 위치까지 다진 것에 불과했다.
이렇게 분열과 혼란속에서도 나름대로 버텼던 서방 제국은 동서 분열 이후 급격하게 망국의 징조를 밟아가기 시작한다. 물론 동서 분열 직전의 황제인 테오도시우스 1세 또한 바보가 아니었기에 원래부터 지배하고 있었던 동방 지역에서 행했던 것과 같이 내전과 야만족의 침입으로 황폐화된 서방 지역의 내정과 군대 또한 개편하려고 했었는데 문제는 이 황제가 얼마 뒤인 395년에 갑자기 급사해 버린다. 이미 공동황제로 임명 되었던 황제의 둘째 아들이 존재했기에 후계문제는 별 탈이 없었지만 이 호노리우스라는 황제가 아직 어린데다가 매우 무능했기 때문에 결국 황제의 매제이자 이전 황제 때부터 황제 가문을 섬긴 스틸리코라는 걸출한 장군이 황제를 보좌해서 서방 제국을 다스리게 된다. 스틸리코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게르만족들의 침입을 대부분 막아내고 서로마 중앙군을 어느 정도 재건하는데 성공하지만 서고트족의 지도자인 알라리크를 포섭해서 손을 잡으려 한 데다가[119] 동로마 제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황제의 정책에 반대한 덕분에 호노리우스와 계속 마찰을 일으켰고 그 결과 황제의 의심을 사게 되어 황제에게 어이없게 처형당한다. 스틸리코가 처형당한 이후 그나마 남아있었던 서로마 제국의 정예병력들은 이런 막장 나라에는 꿈도 희망도 없다고 생각하고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박터지게 싸웠었던 알라리크에게 투항을 해버렸으며[120] 눈치 볼 필요가 없어진 알라리크는 서로마 정부가 약속했던 금을 바치지 않는다는 핑계와 스틸리코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목하에 로마로 진격한 뒤 사흘에 걸쳐서 약탈한다.[121]
그 뒤 암군 호노리우스도 423년에 사망하고 조카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즉위하는데 이자도 호노리우스 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상당히 무능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아에티우스라는 명장이 서로마군의 전권을 쥐고 야만족들의 침략을 막아내게 된다. 비록 아에티우스가 유능한 인물이기는 했지만 이전 찬탈자인 요한네스를 지지했었던 전적이 있는데다가 황제를 대신해서 제국의 모든 실권을 잡으려 했기 때문에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보니파키우스라는 또다른 유능한 장군과 손을잡고 그를 이용해서 아에티우스를 견제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보니파키우스는 갈라 플라키디아 황후에 의해 중앙 야전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뒤에 아에티우스와 싸워서 이겼지만 큰 부상을 입어서 얼마뒤에 죽어버렸고 결국 최고 사령관 자리는 다시 아에티우스에게 돌아오게 된다. 이와같은 전개는 서로마 제국에게 상당한 악수로 작용하게 되는데 보니파키우스가 갑작스럽게 죽은결과 그가 통치하고 있었던 북아프리카 속주지역에서 통치력의 공백이 발생했고 이를 노리고 있던 반달족은 429년에 북아프리카에 상륙해서 불과 10년만에 북아프리카 속주를 완전히 점령해버린다. 북아프리카 속주를 잃은 서로마 제국은 이후 심각한 재정적 적자에 시달려서 어쩔수 없이 군대규모를 상당수 줄이는 조치를 취했고 이는 군사력의 약화로 이어져서 고트족, 수에비족, 프랑크족 등이 본격적으로 서로마 영토에 눌러앉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훈족이 쳐들어와서 갈리아와 북이탈리아를 불태우고 다닌 덕분에 그나마 껍데기라도 유지하고 있었던 제국이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고[122] 그나마 아에티우스가 남아있던 2선급 지방수비대와 노예, 검투사들까지 닥치는대로 끌어모아서 중앙군을 재건한데다가 같은 처지이던 야만족들까지 대 훈족 동맹에 끌어모은 덕분에 훈족은 어찌어찌 막는데 성공하지만 서로마 제국의 어느 고관도 야만족들이 점령한 속주들이 제국에서 이탈하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고 결국 히스파니아에서는 수에비족, 서고트족이, 갈리아에서는 부르군트족, 프랑크족이 일리리아에서는 동고트족이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서방 제국영토 대부분이 야만족들에게 잠식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에티우스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암살당하고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에게 암살당하는 등 제국 내부의 정치적 혼란은 계속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리키메르라는 야만족 권신이 집권해서 입맛에 따라 황제를 갈아치운(….) 덕분에 서로마 제국은 아예 정부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까지 굴러떨어진다.
이렇게 내/외부적으로 망해가던 중에 혼란을 틈타서 반달족이 2차로 로마에 성지순례를 오는 등 제국의 국력은 점점 더 막장상태로 치닫게 되고 그나마 마요리아누스와 안테미우스같은 생각있던 황제들이 반달족에게 점령당한 부유한 북아프리카 속주를 재탈환함과 동시에 리키메르에게 빼앗긴 실권을 되찾아서 제국을 정상궤도로 돌려놓으려 시도했지만 여러 악재가 쳐서 모두 실패했고 이들 역시 리키메르에게 살해당하게 된다. 동로마 제국 또한 서로마가 망해가고 있던 것을 강건너 불구경 하듯이 보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468년 안테미우스 황제가 카르타고로 진격할 때 함대를 파견해 도와주었다. 문제는 그 함대의 지휘관인 바실리스쿠스가 동로마판 호노리우스라고 할정도로 무능했던 덕분에 기껏 지원나간 함대가 몽땅 반달족에게 본 곶 해전에서 불타 버렸다는 것이지만…이때 심한 병력손실을 입은 동로마는 반세기 동안서방에 관여할 힘을 상실하게 되고 결국 어쩔수 없이 야만족들이 서로마를 갉아먹는 것을 방관하게 된다. 이에 서로마는 이때의 패배로 잔존 병력들이 싸그리 없어져서 말그대로 망해버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제국은 계속 야만족에게 쪼그라들었고 470년에 들어서는 제국의 실질적 지배가 미치는 지역이 북프랑스 일부와 이탈리아 반도 및 달마티아 지역으로 축소된다. 결국 476년 리키메르의 뒤를 이은 실권자인 오레스테스에게 반감을 품은 게르만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의 반란으로 마지막 서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되면서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그 뒤 달마티아에 있던 이전 황제 율리우스 네포스도 암살당하고 갈리아 북부에 존속한 서로마 잔존세력인 수아송 왕국 또한 486년 프랑크 왕국에게 멸망하면서 서로마 제국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이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남아있던 동로마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정복 사업을 통해 한때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스페인 해안지역의 영토를 수복하는데 성공하지만 11세기에 로베르 기스카르 휘하 노르만 기사들의 공격으로 이탈리아 남부에서 축출된 이후 1453년에 멸망할 때까지 다시는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되찾지 못한다.
2.6.2.2. 동로마 제국★◆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내전 역량을 초월한 소모전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123]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패전해 정복을 겪음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이방인
세력들의
대출현 너무 강한 이웃 |
내부 혼란 |
봉기 지배층 쿠데타 |
부패와 양극화 | 지배층에서 만연한 부패 |
지도층 불안정 |
국가원수의 잦은 교체 막장인 지도자 권력 기반이 취약한 국가원수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124] |
군사력 불안정 | 국방력 대붕괴 |
특정 집단 소외 |
일부 집단을 심각하게 탄압 통합적인 지방 관리의 실패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재정 문제 | 국고 고갈 |
인문 환경 문제 | 특정 종교&사상에 대한 박해 |
자연재해 | 초강력 범유행전염병 |
결과 | |
멸망 | 국치(합병) |
로마 제국이란 나라의 역사는 길고도 길다.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기원전 8세기경 로마를 세운 이래, 2206년간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3세기의 위기를 종식시킨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이후로 로마 제국이 나라의 존망이 걸린 심각한 위기에 처했던 시기가 총 3번이 있었다. 그 첫 번째는 서로마 제국에 한하여, 동서 분할 시기이다.[125][126] 동서 분할 이후, 서로마 제국은 호노리우스, 발렌티니아누스 3세 등 무능한 황제의 즉위와 플라비우스 리키메르, 오레스테스 등 부패한 지도층에 의해 무너져가기 시작했다. 훈족과 고트족, 반달족, 프랑크족과 같은 이민족들의 침공으로 서로마 제국은 급속도로 해체되어갔고, 결국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키며 서로마는 멸망하고 만다.[127]
서로마가 멸망하며 구 서로마의 강역은 이민족 왕국들이 사이좋게 나눠먹었지만, 동쪽의 동로마 제국은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동로마 제국은 각 지방 총독들과 군사령관들에게 배분되어 있었던 권력을 강력한 황제권을 바탕으로 중앙집권화 했고 동시에 문화적으로도 기독교적으로 변화하여 자신들의 문화를 꽃피워 나가는 한편 옛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되찾아서 서방세계의 패권을 재차지하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재위하던 6세기의 동로마 제국은 5세기의 혼란을 성공적으로 수습하고 경제적, 군사적으로 매우 부강해진 덕분에[128] 대규모 원정을 일으킬 여력이 충분히 되었고 거기에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 같은 명장들의 활약까지 더해진 결과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속주들과 스페인 해안지대 일대를 탈환하고 다라 전투에서 사산조 페르시아 군대를 개박살내서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재확립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계속된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을 드러냈고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으로 불리는 전염병으로 인구와 군대 규모가 크게 줄어들어서 기껏 탈환한 이탈리아를 12년만에 대부분 상실하는 등[129] 악재가 겹치고 설상가상으로 희대의 폭군이자 암군이 즉위해서 내정을 거하게 말아먹은 덕분에 7세기 초부터 국력이 현저하게 약해지게 된다. 거기에 발칸반도 영토는 이민족들에게 서서히 잠식당하기 시작한데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내전으로 혼란스러웠던 상황 중에 로마-페르시아 전쟁이 벌어졌고 그 결과 아나톨리아와 시리아 지역을 이란에 몽땅 점령당하고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근까지 사산 군대가 밀고오는 등 위기가 겹쳐 로마 제국은 하마터면 이때 사산 왕조에 멸망할 뻔 한다.
다행히 이라클리오스 황제의 도박이 성공해서[130] 사산에게 잃었던 속주들을 전부 되찾게 되고 제국이 잠시 안정되지만 뒤이은 이슬람 제국의 침공으로 또 다시 부유한 레반트, 북아프리카 지역을 상실하고 콘스탄티노플까지 다시 밀리게 된다. 레온 3세때 이슬람군을 격파하고 아나톨리아 대부분 지역을 수복한 제국은 시리아, 이집트 등의 상실로 말미암아 더이상 대규모 야전군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기에 테마 제도를 비롯한 여러 내정/군사적 개혁들을 시행하게 되었고 그 결과 바실리오스 2세의 치세에 이르러서는 일리리아를 비롯한 발칸반도와 소아시아반도 전역을 회복하고 이탈리아 남부를 되찾은 뒤 재기하여 다시 지중해 세계의 패권국이 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바실리오스 2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후 황제위에 다시 조이를 비롯한 무능한 황제들이 집권하게 되면서 제국은 점점 쇠락하게 된다.
1071년 셀주크 술탄국과의 만치케르트 전투에서 개박살이 나서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상실한 제국은 유능한 황제들의 즉위와 서방세계의 군사원조를 바탕으로 아나톨리아 중서부를 수복하고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는 등 정치적, 경제적으로 다시 번영하기 시작하지만 이것이 제국의 마지막 번영이었고 3번째 위기인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어이없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털려서 라틴 제국이 세워지고, 제국을 부흥시키려는 세력이 니케아 제국, 트라페준타 제국,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이라는 세 개의 나라로 갈린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나라가 망해가기 시작한다. 이는 니케아 제국의 미하일 8세가 수도를 수복하고 팔레올로고스 왕조를 세운 뒤에도 계속돼서 15세기에 이르러서는 결국 제국 대부분의 영토가 오스만 술탄국에게 잠식당하고 통치 영역이 사실상 수도와 제국 제2의 도시 테살로니카, 그리스 남부일대만 지배하는 도시 국가 수준으로 축소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몰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는 말대로 동로마는 이전의 서로마와는 다르게 동서교역을 통한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몇십년가량 국가를 더 유지하였다. 더군다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난공불락의 요새였고,[131] 군대도 어느 정도 버틸수 있을 정도로 건재했다. 그러나 지속된 공격은 아무도 버틸 수 없었던 것일까,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동로마 제국의 잔존수비대 5천명과 베네치아 공화국 등 서방세계에서 보낸 용병대 2천명,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 서유럽 출신 상인들, 심지어 일반 시민들도 열심히 싸웠지만, 결국 1453년, 메흐메트 2세의 오스만 제국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며, 동로마가 멸망한다. 이로써 무려 2206년간 존재해온 위대한 왕국, 공화국, 제국이었던 로마는 멸망하고 말았다.[132]
동로마가 멸망하면서 남아있던 동방 영토도 사라진 로마는 멸망했지만, 로마 제국은 멸망할 때까지도 유럽에 큰 영향을 주었다.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133]은 물론 로마를 멸망시킨 오스만도 로마는 멸망한게 아니라 오스만이 로마의 뒤를 이었다고 주장했다.[134] 로마 제국의 후예를 자칭하므로써 로마 제국의 뒤를 이으려 했고 로마 제국의 기술과 문화는 이탈리아 반도로 퍼져 새로운 문화가 생기는 계기가 되며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이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지중해를 봉쇄하자, 결국 사람들은 지중해 안 쪽으로 파고 들어가는 뱃길이 아닌, 지중해 밖으로 가는 길을 택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새로운 시대를 가져다 주게 된다.
2.6.3. 헝가리 왕국★◆
헝가리 왕국의 국기(1516-1526)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역량을 초월한 소모전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패전해 정복을 겪음 |
내부 혼란 | 봉기 |
부패와 양극화 | 지배층에서 만연한 부패[135] |
지도층 불안정 |
권력 기반이 취약한 국가 원수 갑자기 사망하거나 부재중인 지도자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136] |
군사력 불안정 | 국방력 대붕괴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137]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재정 문제 | 국고 고갈 |
자연재해 | 초강력 범유행전염병 |
결과 | |
멸망 |
소요(분리독립) 국치(유린, 합병) |
서기 1000년에 로마 가톨릭 교회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3세에 의해 헝가리 대공국이 헝가리 왕국으로 승격되면서 헝가리 왕국이 새로이 건국되었다. 신생국 헝가리는 1102년에 칼만 국왕이 중세 크로아티아 왕국과 동군연합을 맺고 동로마 제국이 지배하던 발칸 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동로마 제국에서 알렉시오스 1세가 즉위하고 서유럽의 제후국들이 예루살렘 탈환을 위하여 십자군 원정을 벌이기 시작하였을 때에는 신성 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 베네치아 공화국 등과 함께 유럽의 강대국들 중 하나로 군림했다. 그러나 콤니노스 왕조의 마누일 대제 치세의 동로마 제국과 호엔슈타우펜 왕조 치세의 신성 로마 제국에 밀려 그렇게 영향력을 끼치진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헝가리 왕국은 당시 남동유럽, 지중해 일대의 패권국 동로마 제국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세르비아인들과 연대하여 동로마 제국에 반란을 일으킴으로서 동로마 제국을 견제하려고 하였으나 동로마 제국의 콤니노스 왕조가 하람 전투와 시르미움 전투에서 헝가리군을 격파하면서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헝가리 왕국은 여전히 강력했고, 결국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고 패전한 동로마 제국이 십자군에 의하여 라틴 제국,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니케아 제국, 트라페준타 제국으로 분할되며 몰락하자 동로마 제국에 적대하지 않겠다는 봉신서약을 깨고, 세력권을 발칸 반도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갑자기 동방에서 쳐들어온 침략자이자 몽골 제국의 명장인 수부타이와 바투가 지휘하는 몽골 제국군이 침략하자 벨러 4세는 8만의 군사를 징병하여 사요 강에서 수부타이가 지휘하는 몽골 제국군에 응전하나 징집한 8만 군사 대부분이 죽는 참패를 당했다. 몽골 제국군은 헝가리 왕국 전역을 불바다로 만들고 돌아갔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왕국 내에서 전염병까지 창궐하게 되며 헝가리 인구의 절반 이상이 사망하였고, 이 인구를 회복하는데 약 300년의 기간이 걸릴 정도였으며 이는 왕국의 발전에 크나큰 족쇄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14세기에 동로마 제국의 미하일 8세가 악수를 두며 자멸하자 동로마 제국 일대를 차지하고 남방의 발칸 반도에서 밀려들어오기 시작한 오스만 제국과 소모전을 벌이면서 조금씩 국운에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특히 1444년의 바르나 전투와 1448년의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의 무라트 2세에게 연패한 것이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제4차 십자군 원정, 미하일 8세의 트롤짓(…)으로 인하여 약소국으로 굴러떨어진 동로마 제국과는 달리, 헝가리 왕국은 마치시 1세의 치세에 중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마차시 1세는 나폴리 왕국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면서 이탈리아를 제외하면 최초로 르네상스 문화를 수용한 군주가 되었으며, 상비 용병대인 검은 군대를 창설하는 한편 베오그라드를 비롯해 오스만 제국과 국경을 접한 헝가리 남부의 요새들을 보강하는 등, 메흐메트 2세의 오스만 제국에 맞서 국방을 강화하는 데에도 노력했다. 그러나 마차시 1세는 문화 부흥과 국방력 강화를 위해 국왕의 권한을 제도적으로 강화하더니 마침내는 사실상의 전제군주로 군림했다. 헝가리는 전통적으로 지방 귀족들의 힘이 강력하고 왕권은 그리 강하지 못했는데, 유독 마차시 1세는 왕권 강화에도 관심을 기울이더니 전제군주가 되고, 면세권을 비롯해 귀족들이 그간 누려 오던 특권들을 모조리 폐지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귀족들은 당연히 국왕이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마차시 1세가 적자 없이 사망하자 마차시 1세의 유언장은 상큼하게 씹어버리고 자신들의 말을 잘 들을 것 같은 보헤미아의 왕 블라디슬라프를 울라슬로 2세[138]로 옹립했다. 거기에다 오스만 제국은 나날이 강성해져 갔고 설상가상으로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대제가 즉위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에게 친서를 보내 프랑수아 1세를 당장 석방하고 오스만 제국에 조공을 바치지 않는다면 대군을 일으켜 쳐들어가겠노라고 통보했다. 그러나 카를 5세는 쉴레이만 1세의 요구를 딱 잘라 거절했고 이를 구실로 쉴레이만 대제는 군사를 일으켜 메흐메트 2세의 한이었던 헝가리 왕국을 정벌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헝가리의 상황은 전혀 호전되지 못하고 있었다. 토모리 팔이라는 인물에게 헝가리 남부의 방어를 명령한 것이 진전이라면 진전이었지만, 그마저도 '일단 파견해놓고 보자' 라는 식에 불과했다. 제아무리 대주교라고는 해도 한 사람이 한 나라의 방어 전체를 떠맡을 수는 없는 일이었고, 1526년 4월에 오스만 제국의 대군은 도나우 강을 건너 헝가리로 쳐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쉴레이만 1세가 친히 이끄는 오스만 제국의 대군이 쳐들어오고 있는 상황에서도, 헝가리의 귀족들은 7월 2일까지 군사를 이끌고 집결지로 모이라는 왕명을 따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국왕 러요시 2세 자신도 출전 채비를 하지 않고 있었지만, 정해진 날짜에 집결지에 모인 귀족은 한 명도 없었다. 이에 러요시 2세는 부랴부랴 국왕이 친히 모범을 보인다며 먼저 집결지로 향했고, 그제서야 헝가리 귀족들은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어렵사리 헝가리군을 긁어모은 21세의 러요시 2세는, 경험이 적은 자신을 대신하여 사실상 군대를 지휘하게 된 토모리 팔과 서포여이 죄르지, 서포여이 야노시 형제 등 지휘관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군대를 크게 셋으로 나누었다. 이들 가운데 트란실바니아 지방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대귀족인 서포여이 야노시가 이끄는 8,000명에서 13,000명 가량의 군사는 트란실바니아를 지키고, 당시 헝가리의 지배를 받고 있던(정확히는 동군연합) 크로아티아를 수비하기 위해 다시 5,000명의 군사가 파견되었다. 그리고 러요시 2세 자신은 토모리 팔과 서포여이 죄르지를 부관으로 삼고, 25,000명에서 30,0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에서 오스만 제국군의 움직임을 지켜보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작전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물론 오스만 제국군이 어디로 쳐들어올지 모르니 군사를 나눈 것이기는 했지만, 오스만군이 발칸 산맥을 넘어 에르데이도 크로아티아 왕국도 아닌 부다로 바로 쳐들어올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오스만군의 위치가 분명해진 시점에서는 이미 에르데이나 크로아티아로 파견한 군사를 불러들이기에는 너무 늦어 있었고, 그 때문에 러요시 2세는 결국 황산벌 전투의 계백마냥 2만 5천에서 3만의 군사만을 거느리고 최소 2배에 달하는 오스만군에 맞서 싸우게 되는 처지로 전락하게 된다. 헝가리 왕국군은 당연히 참패했고, 왕국은 3개로 분할되어 각각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에 합병되고 나머지는 서포여이 야노시의 동헝가리 왕국[139]으로 분할되는 것으로 헝가리 왕국은 멸망하고 만다.
전체적으로 보면 백제와 멸망 과정이 비슷한데, 국가 원수가 무리하게 중앙 집권 정책을 시행하다 실패하여 이것이 멸망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는 것과, 지방 정부가 중앙 정부의 말을 전혀 따르지 않고 군사를 보내지 않은 점, 적은 병력만으로 아군의 3배 이상의 병력을 가진 적군과 맞서 싸워야만 했던 점, 당시 오스만 제국의 물량은 헝가리 왕국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어찌보면 동유럽의 백제라고도 부를수 있는 셈.
2.6.4. 신성 로마 제국★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기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내전 겸 소모전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이방인 세력들의 대출현[140] |
내부 혼란 | 봉기 |
지도층 불안정 |
권력 기반이
취약한 국가원수 지도층 이탈 및 이반 무능하고 막장인 지도자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 문민통제 실패[141] |
특정 집단 소외 | 일부 집단을 심각하게 탄압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재정 문제 |
과도한 징세 국고 고갈[142] |
인문 환경 문제 | 특정 종교에 대한 박해 |
자연재해 | 초강력 범유행전염병 |
결과 | |
멸망 |
국치(흡수) 소요(분리독립) |
신성 로마 제국[143]은 14세기 무렵부터 나라가 망해가기 시작했었다. 신성 로마 제국은 그 당시 대공위시대가 막 끝나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가 즉위한 때였다. 그 당시에 신성 로마 제국은 특이하게도 투표로 황제를 뽑는 방식이었는데 이때 투표권을 가지고 있던 것은 신성 로마 제국 내부의 영주들이었고, 이랬기에 황제는 사실상 영주들에 의해 정해지며, 당연히 황제의 권위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이후 카를 4세의 금인칙서에 의해 제국의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를 사실상 독립국처럼 다스릴 수 있게 되었고, 이때부터 황제의 권위는 더욱 더 약해지며, 황제는 자신의 영지에만 영향권을 행사하는 수준이었다.
15세기 중반 무렵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속해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를 독점하며 영향력을 더 넓혀가자[144], 그만큼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권 역시 넓어지며 신성 로마 제국은 해외 식민지를 얻기도 한다.[145]
이때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고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은 마르틴 루터로 인해 종교개혁의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무렵 독일에서 농민들이 과중한 세금과 중세 봉건제도에 반발해 농민 전쟁을 일으킨다. 농민 전쟁은 진압되었지만 신성 로마 제국은 이로 인해 혼란스러워지며 가뜩이나 이런 상황에 곧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온 유럽에 영향을 끼치게 되며 유럽은 가톨릭교(구교)파와 개신교(신교)파, 두 세력으로 나뉜다. 이러한 상황에서 페르디난트 2세가 개신교에 대한 탄압에 나서자 반발한 개신교 제후들과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제국은 내전이 일어나고 결국 30년 전쟁이라는 국제적 종교 전쟁으로 확대된다. 이 30년 전쟁은 페르디난트 2세의 실책, 주변국들의 개입으로 인해 장기화되었고 결국 제국을 제대로 파탄내고 만다. 나중에가면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하므로써 개인의 종교 자유를 보장하게 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은 영향력을 잃게 되는[146] 동시에 네덜란드, 스위스 그리고 북부 이탈리아를 잃게 되며 가장 많은 피해를 입게 되고 인구 역시 30년 전쟁 이전과 비교했을 때 2/3 수준으로 떨어졌다.
17세기 이후에도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자 프랑스의 철학자인 볼테르는 신성 로마 제국에게 다음과 같은 평을 내렸다.
스스로 신성 로마 제국이라 칭하였고 아직도 칭하고 있는 이 나라는 딱히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제국은 더더욱 아니다.
위의 평을 내렸을 정도로 신성 로마 제국은 상태가 영 아니었다.[147]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이 남아있던 이유는
영방국가 개별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국가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148]그러던 중,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프랑스가 왕정이 공화정으로 바뀌자, 신성 로마 제국은 이때를 노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필두로 프랑스를 침공했지만 오히려 역으로 패하고 프랑스한테 공격받아 라인강 서안의 영토를 모두 잃게 된다. 이 무렵 프랑스에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정권을 잡고 황제로 즉위하였고, 나폴레옹을 지지하던 영지들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지지하던 주요 세력인 주교령 및 기사단령을 갈라먹으면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프란츠 2세는 영향권을 완전히 잃는다. 프란츠 2세는 오스트리아 제국을 세워 남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를 유지하려 했지만 이마저도 나폴레옹이 자신이 독일에 영향권을 행사하는데 방해된다는 이유로 최후통첩을 통해 해체를 요구했고 여기서 일부 16개 영지들은 나폴레옹을 동맹의 보호자로 삼는 라인 동맹[149]을 결성하고 신성 로마 제국에서 탈퇴했다. 결국 그 해 8월 6일, 프란츠 2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를 포기하고 기타 제국의 지위를 포기한다는 선언을 하므로써 1006년[150] 간 이어져온 신성 로마 제국은 멸망한다.
비록 신성 로마 제국은 멸망했지만, 독일인들은 신성 로마 제국을 애착의 대상으로 여겼다. 실제로도 빈 회의에서 신성 로마 제국 재건이 제안됐을 정도로 독일 민족의 애착이 대단했고, 이후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통일한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을 계승한 독일 제국을 선포했을 정도였다.
2.6.5. 스코틀랜드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의 국기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내전 역량을 초월한 소모전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패전해 정복을 겪음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집요하고 강한 이웃 이방인 대출현 |
내부 혼란 | 봉기 |
지도층 불안정 |
국가원수의 잦은 교체 권력 기반이 취약한 왕가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151]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 |
특정 집단 소외 | 통합적인 지방 관리의 실패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재정 문제 | 국고 고갈 |
재해 | 국가 단위의 자연재해[152] |
결과 | |
멸망 | 국치(흡수) |
척박한 스코틀랜드는 강력하고 생산력이 좋은 국토를 지닌 잉글랜드의 공격을 내내 막아내야만 했다.[153] 거기에 험준한 지형은 잉글랜드의 침공을 막는데는 좋았지만, 국가 내부의 독립적인 세력들을 제압하는 것은 힘들었다. 특히 스튜어트 왕조 시기에 들어서 왕권이 약해지며 스코틀랜드는 내부가 각 클랜별로 분열되는 등 아수라장이 되었고 이에 걸맞게 스튜어트 왕조에서 통치가 그런대로 잘 되고 끝도 좋았던 왕은 얼마 없다.
한 때는 엘리자베스 1세를 끝으로 튜더 왕조의 대가 끝나자 스코틀랜드 왕국의 왕이 잉글랜드의 군주를 겸하는 동군연합이 되기도 했지만, 유럽에 다른 국가들이 식민지 경쟁을 벌일 때, 지지 않고자 참여한 다리엔 갭이 완전히 실패하면서 국가가 파산해버리고 만다. 다리엔 갭이 현재까지도 오지로 남아있다는 것[154]을 볼 때, 스코틀랜드 수준의 국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던 것. 결국 스코틀랜드 왕국은 멸망하여 독립 국가에서 그레이트브리튼의 일원이 되었다.
2.6.6.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의 국기(1763~1795)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대홍수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대북방전쟁 |
외란 | 사방 천지에 널린 강대국들( 합스부르크 제국, 러시아 제국, 스웨덴 제국, 프로이센 왕국, 오스만 제국) |
내란 | 대홍수 |
내정 |
지배층에서 만연한 부패 귀족들과 귀족 의회 세임의 국정 농단 뒤쳐진 경제 체제 실패로 돌아간 개혁 일부 집단을 심각하게 탄압 일부 정치·경제적 특권층의 권력 독점 |
공황 |
중앙집권정책의 실패와 약해진 국왕의 권위 폴란드 분할 |
결과 | |
멸망 | 국치(흡수) |
전성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은 동유럽의 강국 중 하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몰락하기 시작했다. 내적으로는 왕위 계승 법칙을 정비하지 못한 채, 외국인이 군주가 될 수 있는 취약점을 연 데다가, 세임을 중심으로 결집한 귀족들이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한편,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각종 개혁정책들을 무산시키고 중요한 군사 전력이었던 카자크들을 탄압하였으며, 외적으로는 탄압받던 카자크들이 일으킨 대홍수를 시작으로 연이은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세 차례 자행한 폴란드 분할로 인해 왕국의 영토가 이들에게 분할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2.6.7. 프랑스 왕국★◆
프랑스 왕국의 왕실기 | 프랑스 왕국의 어기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155] 역량을 초월한 대전 내전 |
내부 혼란 |
혁명 봉기 |
부패와 양극화 | 지배층에서 만연한 부패 |
지도층 불안정 |
권력 기반이 취약한 국가 원수 무능하고 막장인 지도자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 |
특정 집단 소외 | 일부 집단을 심각하게 탄압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재정 문제 |
국고 고갈 비정상적인 세율 |
급작스러운 화폐가치 변동 | 살인적인 초인플레이션 |
잘못된 경제 개입 | 부도덕한 부유층이 창궐함 |
재해 | 국가 단위의 자연재해 |
결과 | |
멸망 | 소요(쿠데타, 봉기) |
자세한 건 앙시앙 레짐 참조.
2.7. 그 외 대륙의 역사
2.7.1. 아즈텍 제국★◆
아즈텍 제국의 영토와 영향권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역량을 초월한 지속적인 정복전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패전해 정복을 겪음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이방인 대출현 |
내부 혼란 | 봉기 |
지도층 불안정 |
권력 기반이 취약해진 국가원수 갑자기 사망하거나 부재중인 지도자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156] |
군사력 불안정 | 국방력 대붕괴 |
특정 집단 소외 | 정복지 관리 실패[157]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158] |
재정 문제 |
속국민들에게 과도한 징세 국고 고갈[159] |
경제 환경 문제 | 자원의 저주 |
자연재해 | 초강력 범유행전염병 |
결과 | |
멸망 | 국치(합병) |
결정적으로는 콩키스타도르들과의 전쟁으로 인해 멸망했지만, 사실 아즈텍은 그 이전부터 이렇게 넓은 제국이 유지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속설과 다르게 아즈텍이 멸망한 원인은 인신공양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며,[160] 코르테스의 의지보다는 동맹군의 의지가 더 컸다. 아즈텍은 가진 자원에 비해 나라의 규모가 너무나도 컸으나, 이에 그치지 않고 전쟁 준비까지 했는데다가 메소아메리카 특유의 혹독한 환경으로 인한 재해까지 겹치면서 언제나 자원 비축분 고갈 문제에 시달렸다. 따라서 속국과 연합체에 속한 주변국에 지나치게 자주 공물을 요구했고, 이는 불만과 반발심을 지속시켜 스페인군의 침략과 함께 이들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이런 자원 부족 문제와 잦은 기근은 아즈텍뿐만 아니라 톨텍 문명 등 이전의 메소아메리카 문명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리스크였다. 그래서 다른 문명권에 비해 메소아메리카 문명은 잠깐의 전성기 뒤에 순식간에 무너지고 다시 건설되는 일이 흔했다. 애초에 메소아메리카 문명권에서 인신공양 풍습이 이렇게 오래 지속되었던 이유 역시 문명 정착 시기가 늦어서 농업이 늦게 발현했다는 점과, 여러 문명이 순식간에 무너질 만큼 자연재해가 흔했기에 인신공양 종교로 이에 대한 두려움을 불식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원인이었다. 그나마 대형가축이 있었다면 인간을 이로 대체할 여지가 있었겠으나, 메소아메리카는 그마저도 부재했다.
즉 주기적인 인신공양이 존재했으나 이는 아즈텍뿐만이 아닌 메소아메리카의 일반적인 관습이었고, 콩키스타도르의 악의적인 선전이었던 식인은 실제로는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피정복민들에게 오래동안 과한 공물을 요구해서 원한을 샀던 것이 멸망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던 것.[161] 결국 콩키스타도르들이 아즈텍을 정복하러 올 때 피정복민들이 콩키스타도르 쪽으로 붙어버려서 최후에 남은 도시는 테노치티틀란, 타쿠바, 텍스코코 삼각동맹의 3개 뿐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아즈텍 제국의 역사적 후예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멕시코에서는 이때 콩키스타도르들 편에 선 원주민들( 틀락스칼텍 등)을 매국노 취급하기도 한다. 다만 16세기 당시는 근대적 국민국가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아서 같은 민족이란 의식이 없었기에 스페인이 나쁜 것이지 이들을 무작정 매국노라 비난하기 어렵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2.7.2. 잉카 제국★◆
잉카 제국의 영토와 영향권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내전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패전해 정복을 겪음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이방인들 대출현 |
내부 혼란 |
봉기 정변 |
지도층 불안정 |
갑자기 사망하거나 부재중인 지도자 권력 기반이 취약한 국가원수 국가원수의 잦은 교체[162]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 |
군사력 불안정 | 국방력 대붕괴[163] |
특정 집단 소외 |
다문화 정책 실패 통합적인 지방 관리의 실패 피정복민들을 심각하게 탄압 |
재정 문제 | 피정복민들에게 과도한 징세 |
경제 환경 문제 | 자원의 저주[164] |
자연재해 | 초강력 범유행전염병 |
결과 | |
멸망 | 국치(합병) |
아즈텍보다는 피정복민에게 그나마 더 관용적이기는 했지만 가혹한 통치는 다를 게 없었고 다른 원주민들 입장에서는 압제자였기에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게다가 스페인이 침공하기 이전에 이미 왕위계승 문제로 내전까지 벌어졌다. 결국, 콩키스타도르가 도착했을 무렵에 다른 원주민들은 잉카에 등을 돌렸고 결국 멸망했다. 다만, 안데스의 험한 지형을 바탕으로 잔존 세력이 오랫동안 저항했지만 결국 정복당한다.
2.7.3. 마야 문명★◆
마야 문명의 영토와 영향권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내전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이방인 대출현 |
내부 혼란 |
봉기 지배층 쿠데타[165] |
지도층 불안정 | 권력 기반이 취약한 국가원수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 |
특정 집단 소외 |
다문화 정책 실패 통합적인 지방 관리의 실패 |
경제 환경 문제 | 저주받은 자원 |
자연 환경 문제 | 장기적인 환경 악화 |
재해 |
초거대 자연재해 초강력 범유행전염병 |
결과 | |
멸망 | 공동체 소멸 |
대부분 남미 토착 문명을 멸망시킨 스페인인들이 마야 지역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마야 문명은 완전히 무너져 잊혀진 지 오래였다.
도대체 왜 발전된 문명이 소리소문없이 멸망했는지 의문이 많았는데 고고학계의 연구 결과, 녹색 사막이라는 별칭이 있는 열대우림에 홀로 있었다는 불리한 자연 환경과[166] 그에 맞지 않은 사회 및 경제구조였음이 밝혀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 치명적인 자연재해가 닥치면서 농업이 마비되어[167] 수많은 혼란이 유발되었고, 그 결과로 마야 문명은 구심점이 완전히 파괴되었고 생존자들은 부족 단위로 흩어지면서 완전히 잊혀지고 말았다. 21세기에도 살아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옛 마야 지역에 속한 멕시코, 과테말라 등의 지방 정부에서 전통문화 보존 차원에서 재건한 것이다.
2.7.4. 콩고 독립국★◆
콩고 독립국과 벨기에령 콩고의 국기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내전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이방인 대출현 |
내부 혼란 | 봉기 |
부패와 양극화 | 지도층에서 만연한 부패 |
지도층 불안정 | 막장인 지도자 |
특정 집단 소외 |
피정복민들을 심각하게 탄압 다문화 정책 실패 |
재정 문제 | 피정복민들에게 과도한 징세 |
잘못된 경제 개입 | 일부 특권 계급의 권력·재력 독점 |
경제 환경 문제 | 자원의 저주 |
자연 환경 문제 | 장기적인 환경 악화 |
자연재해 | 초강력 범유행전염병 |
결과 | |
멸망 | 공동체 소멸 |
최소한의 명분이 있었던 일부 막장 국가들과는 달리 이 나라의 왕인 레오폴드 2세는 처음부터 넓은 콩고를 자신의 사유지로 만들어서 운용했으니 이들보다 더 막장이라고 볼 수가 있다. 실제로 원주민을 혹사시켜서 얻은 재물들은 모두 레오폴드 2세에게로만 갔으며, 원주민들에게는 단 한 푼도 돌아가지 않았다.
레오폴드 2세는 마인드부터 썩어빠졌는데 뭔주민들에게 이런 지옥을 안겨주고 그 댓가는 하나도 지불하지 않은 것은 ' 어차피 콩고인들은 우리나라 사람 아니잖아?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막 해도 된다'라는 더러운 마인드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168]
콩고 독립국과 레오폴드 2세의 착취는 그야말로 전대미문이었는데, 각 사람들마다 감당하기 힘들도록 일할 할당량을 줘 만약 맞추지 못할 시 처음엔 손을, 두번째엔 팔을, 세번째엔 목을 잘랐다. 이 곳 관리들은 일을 열심히 했다는 증거로 절단 부위들을 소쿠리에 넣고 자랑하기도 하였다.
특히 콩고 독립국 정부와 레오폴드 2세는 당시 검은 황금이라고 부르던 고무 채집에 열을 내어 국토 절반을 고무나무로 이뤄진 플랜테이션으로 만든 뒤 원주민들을 상당히 못살게 굴었다. 그 때의 고무는 100% 나무에서 채집해야 되었는데 얼마 안 가 마을 근처의 넝굴이 동이 나자 원주민들은 나무 높은 곳에 올라가 고무를 채집하거나 사람들이 안 사는 깊은 정글 속에 들어가 작업해야 했기 때문에 굶어 죽거나 온갖 병충해에 시달려 병에 걸려 죽거나 아니면 나무에 추락해 죽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보호장비나 식량 혹은 보상은 일절 제공하지 않았다.
물론 이런 착취에 대해서 원주민들의 저항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원주민들의 봉기와 내전은 계속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콩고 독립국군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원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최신 소총과 대포라는 더 강력한 무기들로 무장한 이들에게 원주민들의 저항은 그저 지렁이가 꿈틀내는 수준이었다.
레오폴드 2세는 이 일이 외국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회계조작을 하거나 언론 매수를 시도하였다. 처음엔 이것이 먹혀들었으나 결국 몇몇 의인들의 활약으로 증거가 쌓이자 비난이 거세지고 결국 이 지역은 벨기에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렇듯 나라가 주인의 이익만을 위해서 운영됨과 동시에 원주민들은 부속품 내지는 도구 취급 받았다는 점에서 콩고 독립국은 훌륭한 기업국가의 한 전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국가 멸망 중에서도 흔하지 않은 공동체 소멸 사례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애시당초 국가 자체가 레오폴트 2세의 사기 끝에 태어난 터라 이 콩고 자유국이 기존 콩고 부족들의 정체성을 이어나간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벨기에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나 이후 독립한 이후에도, 콩고 국민들 중 이 콩고 독립국이라는 국민성을 이어가거나 유지하려 했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말 그대로 (이번엔 좋은 의미이긴 하지만)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넘어 해당 구성원들이 유의미한 공동체를 유지못할 정도로 분열된 뒤 잊혀졌다. 수많은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으나 식민지배에 저항하면서 서서히 자신들의 정체성을 갖췄던 인도 제국의 후신 국가들에 비하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2.7.5. 아메리카 연합국★
아메리카 연합국의 국기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내전 역량을 초월한 소모전 패전해 정복을 겪음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강한 적국 |
내부 혼란 | 봉기 |
지도층 불안정 | 정부수반의 잦은 교체 |
군사력 불안정 | 국방력 대붕괴 |
특정 집단 소외 |
통합적인 지방 관리의 실패 일부 집단을 심각하게 탄압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잘못된 경제 개입 | 일부 특권 계급의 권력·재력 독점 |
경제 환경 문제 | 저주받은 자원 |
인문 환경 문제 | 백인층의 지나친 특정 사상 심취[169] |
결과 | |
멸망 | 미합중국에 재편입 |
노예제 반대를 주장하던 에이브러햄 링컨이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하자 노예 중심의 목화 산업으로 경제를 지탱하던 남부 일곱 개 주들이 탈퇴해 결성했던 북미의 국가.
초기에는 유능한 장교진과 총기 숙련도가 높은 출중한 군인들에 힘입어 아메리카 연합국이 내전에서 승기를 잡아가고 있었지만 지도층들은 북부의 엄청난 생산력을 얕잡아보고 있었다. 결국 총력전 체제로 돌입한 북부가 우월한 공업 생산량을 바탕으로 반격에 성공하고 공업 기반이 부실했던 남부는 패색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흑인 노예제 고수는 아메리카 연합국에게 큰 걸림돌이 되었는데, 에이브러햄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으로 순식간에 전쟁의 명분은 북부가 차지했다. 노예해방선언을 알게 된 흑인 노예들이 필연적으로 남부 곳곳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상당수는 북부로 입대하기까지 했다. 남부는 흑인 병사들을 거의 징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군사력의 열세로도 이어졌다. 외교적으로도 아메리카 연합국을 지지하는 국가들은 거의 없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과 북부의 해상봉쇄로 남부의 경제는 완전히 마비되었다.
결국 자국의 체급을 초월하는 적과의 싸움을 감내할 수 없었던 아메리카 연합국은 끝내 1865년에 패전을 겪고 다시 연방에 편입된다.
2.8. 1차 세계 대전 직후~2차 세계대전 직후의 역사
2.8.1. 카자르 왕조★◆
카자르 왕조의 국기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역량을 초월하는 전쟁[170] 내전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강한
이웃들 이방인들의 침입 |
내부 혼란 |
봉기 정변 혁명 |
부패와 양극화 | 지배층에서 만연한 부패 |
지도층 불안정 | 무능하고 막장인 지도자들[171]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재정 문제 | 국고 고갈 |
잘못된 경제 개입 | 일부 특권 계급의 권력·재력 독점 |
경제 환경 문제 |
자원의
저주 자연이 거부한 땅 |
인문 환경 문제 |
군주의 지나친 향락 심취 성직자들의 물질적·정치적 타락 |
자연 환경 문제 | 장기적인 환경 악화[172] |
결과 | |
멸망 | 소요(쿠데타) |
카자르 왕조시대의 페르시아는 수천년간 농사를 지어온 농토들이 염화와 사막화로 버려지면서 경제적으로 오히려 퇴보하던 시점이었다. 게다가 페르시아인들은 중동 내에서도 유별난 골초라고 놀림받을 정도였고, 지력을 많이 소모하는 담배 농사를 열심히 지은 나머지 농업 생산성도 가파르게 감소하고 담배마저 수입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어느 정도냐면 당시 서민층은 수입의 3분의 1을 가장의 담배를 구입하는데 썼다. 결국 이란 농민들은 오히려 중세시대보다도 더 가난해졌지만, 카자르 왕족들은 일반인들의 생활 수준 따위에는 관심이 거의 없었고 해상 무역이나 광산 채굴권을 영국, 프랑스인, 네덜란드인들에게 헐값에 팔아 받은 돈으로 흥청망청 악기나 술 같은 사치품들을 수입하기에 바빴다.
심지어 페르시아의 지배층들은 해상 무역에 대해 거의 이해하지 못했고, 유럽 국가에서 뇌물만 조금 찔러주면 항구 이용권 및 자원 채굴권들을 넘겨주었다. 또한 사막화되는 땅에 담배나 경작하며 지력이나 소모시키는 등 이권이 극소수 부패 지도층들의 뇌물 및 열강의 이익으로 분배되며 국가적인 위기가 심화되었다. 더 심각한 것은 여전히 왕조와 고위층의 사고 방식은 중세 유목 제국 체계에만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다. 입헌주의를 타도하려는 러시아 및 열강의 획책과 제1차 세계 대전 등으로 정치적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1919년에 러시아 제국이 러시아 혁명으로 철수하자 영국은 이란을 보호국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러한 심각한 현실 속에서 결국 1921년 쿠데타로 인해 1925년에 카자르 왕조 시대는 막을 내리고 팔라비 왕조가 성립되었다. 하지만 그 팔라비 왕조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래를 보자.
2.8.2. 오스만 제국★
1793년부터 1844년까지 쓰인 국기 | 1844년 이후의 국기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역량을
초월한
전쟁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내전[173] |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강한 이웃들 | |
내부 혼란 |
봉기 정변[174] |
|
부패와 양극화 | 지배층에서 만연한 부패 | |
지도층 불안정 |
권력 기반이 취약한 국가 원수 막장인 지도자 갑자기 사망하거나 부재중인 지도자 |
|
국론 불균형 |
문민통제 실패 국론의 관리 실패 |
|
군사력 불안정 | 군인들의 반란 |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 | |
특정 집단 소외 |
다문화 정책 실패 정복지 관리 실패 일부 집단을 심각하게 탄압 |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
재정 문제 |
국고 고갈 피지배민들에게 과도한 징세 |
|
잘못된 경제 개입 | 부도덕한 부유층이 창궐함 | |
인문 환경 문제 |
지배층의 지나친 향락 심취 성직자들의 물질적·정치적 타락 |
|
결과 | ||
멸망 | 소요(봉기) |
오스만 제국의 쇠퇴는 16세기 중엽에 시작되는데, 먼저 쉴레이만 대제의 황후인 휘렘 술탄이 하렘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정치에 끼어든 것. 이 결과 쉴레이만은 황후의 말만 믿고 이브라힘 파샤 같은 명신들과 자신의 친아들을 때려잡는 암군으로 변해 갔고, 그의 뒤를 이은 황제가 술을 마시고 노는 것이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웠던 셀림 2세였다.
한편 이 무렵, 예니체리를 비롯한 데브시르메 징집 세력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른다. 오스만의 전제군주정을 확립한 메흐메트 2세 이래 황제들은 개국공신들인 가지-일미예와 데브시르메 출신을 적당히 견제시키며 황권을 유지했는데, 이게 무너진 것. 따라서 황제의 지위는 상당히 애매해졌는데, 본의 아니게 황제의 권위를 흔든 꼴이 된 쉴레이만 대제의 뒤를 이은 셀림은 황권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뒤이은 17세기에 오스만 제국의 문제는 더욱 심화되기 시작하는데, 먼저 16세기 후반 이후 서유럽발 가격혁명으로 인해 오스만의 경제가 악화되어 화폐가 평가절하되면서 국고가 텅 비게 되었고, 이 때문에 은화에 불순물이 대량으로 섞이기 시작하면서 봉급의 절대적 액수 자체는 과거와 동일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봉급이 삭감된 것이나 마찬였다. 이는 관료와 군 장교들 및 예니체리들의 연봉조차 실질적으로 감봉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였으며, 당연하게도 관리와 장교들의 매관매직과 뇌물, 예니체리를 포함한 군의 마피아화로 이어졌다. 심지어 예니체리들은 때로는 코스탄티니예를 약탈하는 짓까지 서슴치 않을 정도로 타락해 군인으로서의 신념도 완벽하게 잊어버렸다.
한편 국고가 비다 보니 오스만은 이를 메우려고 피지배민들에게 점차 무거운 세금을 물리기 시작했는데, 특히 원래부터 세금을 조금 더 내던 즘미, 즉 비(非)무슬림들의 부담이 계속해서 가중되었다. 결국 조세 부담을 이기지 못한 세르비아를 시작으로 알바니아, 불가리아 등지에서 산발적으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오스만 제국은 반란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군사를 보내 강경진압했을 뿐만 아니라 세르비아의 반란을 진압한 이후 세르비아 정교의 창립자로 최고의 성인이라 할 수 있는 성(聖) 사바의 유골을 불태우는 폐해를 저지르고 만다. 물론 ‘반역자’들의 기세를 꺾는다고 한 일이었지만, 이게 오히려 반란의 불씨에 기름을 붓는 결과가 되었다.[175]
마지막으로 17세기는 혼란의 세기이기도 했다. 페르시아의 사파비 제국, 베네치아 공화국, 폴란드, 신성 로마 제국, 러시아 등과 돌아가며 전쟁을 벌였던 것. 이거야 오스만이 잘 나가던 14, 15세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17세기에는 나라에 돈이 없는데도 전쟁을 계속 벌여댔으니 문제가 되었다. 실제로 거의 매년이다시피 정복전쟁을 벌였던 메흐메트 2세의 뒤를 이은 바예지트 2세는 재정 부담을 완화하고 제국에 휴식을 주기 위해 내정에만 골몰할 뿐 군사 원정은 되도록 자제하거나 비용이 덜 드는 지방 비정규군만으로 수행했고, '입법자' 라 불리는 쉴레이만 1세는 군사적 업적 못지않게 내정에서의 업적도 훌륭한 편이다.
그런데 쾨셈 술탄을 비롯해 황제가 아닌 모후나 애첩이 정권을 장악하고 군공을 세워 승진할 욕심에[176] 지방 총독들이 멋대로 군사행동에 나선 17세기에는 이런 배려가 없었다. 그리고 1683년에 오스만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공격하는데, 여기에서 완전히 박살이 났을 뿐만 아니라 그간 오스만에게 쌓인 것이 있었던 베네치아, 폴란드, 신성 로마 제국, 러시아 등이 동맹을 맺고 오스만을 후두려패러 나섰다.[177] 결국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 영토 전체를 잃고, 쇠퇴하기 시작한다.
제국이 본격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한 17세기 이후에도, 황제를 비롯한 오스만의 위정자들은 영 정신을 못 차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18세기 전반에는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 있는데 튤립이나 기르고 자빠졌었던 반면[178],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 흑해와 지중해로 진출하려 하는, 한때 자신들의 꼬붕이었던 러시아가 틈만 나면 군대를 보내 ‘튀르크’ 의 목을 따러 내려왔고, 앞선 대 튀르크 전쟁과 오랜 내부적 모순 및 부정부패로 턱 빠진 사자나 다름없었던 오스만 제국은 한때 빵셔틀로 여겼던 러시아 제국과 전쟁을 벌일 때마다 영 불을 비롯한 서방세계의 지원이 없으면 러시아에게 엄청난 손해만 보고 모두 크게 패하였다.
게다가 18세기 말의 프랑스 혁명으로 일어난 민족주의의 바람이 오스만에까지 불어왔고, 결국 세르비아, 그리스를 시작으로 대규모 봉기[179]가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오스만은 이러한 새로운 흐름에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했고, 결국 동유럽에서의 영토를 크게 잃고 만다.
한편, 오스만 제국의 황제들이 너나할 것 없이 모조리 막장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세계사 교과서에까지 나오는 탄지마트를 비롯해,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중엽까지 꾸준히 개혁을 위한 움직임이 있었던 것. 하지만 기득권층이 된 지 오래인 예니체리와 성직자들은 이에 반발하며 꾸준히 태클을 걸어댔고, 셀림 3세처럼 아예 폐위당하고 시해되는 황제도 있었다.
20세기 초에 일어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은 국방장관이자 실질적인 최고권력자였던 엔베르 파샤의 주도로 ‘독일과 손잡고 러시아를 친다!’ 라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이는 지난 수백년 동안 오스만에 계속해서 전쟁을 선포, 승리하여 이권을 빼앗아갔던 러시아에 대한 반발이었지만, 결국 오스만 제국은 아나톨리아 반도 일부까지 빼앗기고 멸망 직전에까지 이르렀다. 갈리폴리 전투에서의 승리로 아나톨리아 반도가 점령되는 것만은 피했으나, 전쟁에서 패배해 제국이 해체되어가던 도중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봉기를 일으켜 왕정을 폐지함에 따라 오스만 제국은 멸망하였고 오늘날의 튀르키예 공화국이 탄생한다.
2.8.3.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기[180]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역량을 초월한 전쟁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강한 이웃들 |
내부 혼란 | 혁명 |
부패와 양극화 | 지도층 부패[181] |
지도층 불안정 | 권력 기반이 취약한 정부수반[182]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 |
군사력 불안정 | 국방력 대붕괴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 |
특정 집단 소외 |
다문화 정책 실패 통합적인 지방 관리의 실패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결과 | |
멸망 | 소요(봉기, 분리독립) |
본래 '오스트리아' 라는 나라는 예로부터 프랑스와 더불어 유럽의 전통적인 강대국 중 하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전파된 계몽사상과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여러 민족들이 분리운동을 벌이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제국 내 합스부르크 황가의 지배력이 약화되었다. 이 와중에 1848년 혁명이 터지자 메테르니히가 망명을 가고 황제가 교체되는 혼란이 발생하였으며 이를 틈타 제국 주요 지역인 헝가리가 합스부르크 황가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오스트리아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대표적인 케이스가 되고 말았는데, 오스트리아 자체적으로 반란군을 진압하지 못해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며, 결국 러시아로부터 차관과 20만 군대를 지원받아 제압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실은 제국 역량 강화에 신경쓰기는커녕 오로지 독일 연방에서의 주도권을 잡는 것에만 몰두하였으나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의 패배로 독일 연방에서 퇴출되었고 황실의 영향력은 전반적으로 크게 감소되는 결과가 초래되어 합스부르크 황실은 더 큰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헝가리에서는 각종 소요가 빈발하여 황제까지 습격당할 뻔하자 더 이상 헝가리의 분리 독립 요구를 억누를 수 없게 되었다. 결국 합스부르크 황실은 헝가리 귀족들에게 대타협을 제안했고 헝가리 귀족들이 이를 수용하였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독립 내각이 따로 존재하는 이중제국 체제인 동군연합을 수립되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출범하게 된다. 이후 제국의 관료들은 선진적인 복지 정책들을 도입했고, 국민들의 생활 수준도 당대 유럽에서 높은 편이었다. 노숙자 같은 사람에게도 사회 보장의 혜택은 골고루 돌아갔으며 오스트리아의 검열은 형식적이었다. 그러나 헝가리에서는 오스트리아와는 달리 민족 억압책을 폈기에, 오스트리아 같은 사상적 다양성이 없었다. 헝가리의 강압적인 정책으로 소수민족들은 민족 정체성 붕괴를 걱정해야 했으며 슬로바키아인은 헝가리에서 독립하기 위해 체코인과 연대하려 했다.
게다가 군의 문제점도 심각한 편이었는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꾸준히 확장을 거듭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내부에서도 점점 비게르만계 출신 병사들의 수가 늘어났다. 독일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민족 출신 부대의 수가 독일어를 구사하는 부대의 수를 넘어서자, 충성심 및 의사소통과 관련된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제국군이 독일어를 공용어로 지정했음에도 언어가 달라서 제대로 된 의사 소통이 힘들었다. 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군대 슬라브어'로 널리 알려진 방언을 사용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신병들은 80개에 이르는 독일어로 된 군대 명령어 역시 함께 암기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일반적으로 대부분 독일인인 장교들과 슬라브인 출신 병사들은 아예 말을 서로 안했다. 이런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슬라브인 군인들을 징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앞서 서술했듯 당시 제국 인구의 절반 이상이 슬라브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들을 제외했다가는 갈리치아를 방어할 군인들이 매우 부족해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뽑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적국의 첩보 기관에 매수되는 군인들이 나오기도 하였는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첩보 장교 알프레트 레들 대령의 사치스러움과 동성애 성향을 파악한 러시아 제국이 그를 포섭하여 이후 무려 10년간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작전계획을 넘겨받는 등 부정부패와 군 기강해이가 심각했다. 1914년에 사라예보 사건이 터지자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사력을 과시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전력은 독일 제국의 도움 없이는 약소국인 세르비아 왕국조차 제대로 제압할 수 없을 지경이었을 정도로 막장이었고 결국 제대로 된 중화기도 거의 보유하지 못한 세르비아 군도 제압하지 못해서 세르비아 왕국 정도는 오스트리아가 혼자서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던 독일 제국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그 막장이라 불리는 이탈리아군도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으며 알프스 일대에서 소모전을 벌이다가 러시아 제국의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장군의 브루실로프 공세로 아래에 서술된 러시아 제국과 함께 사이좋게 등골이 박살나며 독일 제국의 도움없인 전쟁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가게 되었다. 이미 그 정도 수준이긴 했지만 말이다.
결국 1918년 독일 제국의 항복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협상국의 승리, 동맹국의 패배로 끝나면서 독일 제국은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바뀌고 전쟁 배상금으로 국가 경제가 파탄나고, 오스만 제국은 혁명으로 멸망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카를 1세는 퇴위함으로써 길게는 645년, 짧게는 392년간 이어진 합스 부르크 가문의 중동부유럽 지배는 막이 내리고 공화정이 선포되어 현재의 영토만을 가진 오늘날 오스트리아가 탄생하게 되었다.[183]
2.8.4.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의 소형 국장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역량을 초월한 싸움 내전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이방인 세력들의 대출현 |
내부 혼란 | 혁명 |
부패와 양극화 | 지배층에서 만연한 부패 |
지도층 불안정 | 막장인 지도자 |
국론 불균형 | 극단주의 세력의 준동 |
군사력 불안정 | 군인들의 반란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184] |
특정 집단 소외 | 일부 집단을 심각하게 탄압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결과 | |
멸망 | 러시아 혁명, 내전 후 소련으로의 정권 교체 |
환경을 뺀 4가지 부문이 취약했다. 표트르 대제가 서구화,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등 개혁을 추진하고 성공시킴으로써 러시아 제국을 선포하고 서유럽 국가들도 이를 승인함으로써 루스 차르국에서 러시아 제국이 된다. 루스 차르국 시절까지만 해도 황제국을 자처했으나 유럽 국가들에게 모스크바 대공으로 불리는 등 낙후된 반쯤은 동양 국가로 취급받고 있었으나, 표트르 대제의 개혁과 그것이 성공함으로써 이룬 급격한 서구화로 대북방전쟁에서 스웨덴을 격파하고, 오스만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는 쾌거를 보이고 7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와 함께 프리드리히 2세가 지휘하는 프로이센군을 격파하고 프로이센 왕국을 멸망 직전까지 내몰리게 하는 등 저력을 보여주지만 표트르 3세의 트롤짓(….)[185]으로 인해 끝내 실패하고, 이에 분개한 예카테리나 2세가 표트르 3세를 내쫒고 황제로 즉위하며 러시아 제국은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하자 보로디노 전투에서 어느 정도 타격을 입히고, 모스크바가 함락되었지만 끝내 나폴레옹을 물리치고 프로이센군과 함께 파리에 입성하며 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서유럽에게 본격적으로 강대국으로 대우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대제국의 화려한 겉모습과 별개로 실체는 속 빈 강정에 불과했다. 러시아 제국군의 뒤쳐진 국방과학기술 및 행정체제와 방산비리, 귀족 장성들의 무능이 심각한 골칫거리였는데, 크림 전쟁 당시에도 프랑스군은 미니에 탄과 무동력 장갑함, 증기 추진식 호위함을 실전배치하여 작전에 투입했지만 러시아군은 소총 대다수가 나폴레옹 시절에나 쓰였던 구식 활강식 머스킷이고 보병을 지원해야 하는 포병도 구식 주철 대포와 청동포 중심이었으며, 해군 함선의 대다수도 구식 범선이었다.[186]
또한 러시아는 산업화가 늦어서 군수품 생산 능력이 떨어졌으며 철도망과 도로망이 부실했다. 젊은 시절에 공병대 사령관으로 복무한 경력이 있어 공병술과 군사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니콜라이 1세가 자국군의 이러한 심각한 현실을 조금이나마 개선해 보고자 서방의 기업들으로부터 기술과 자본을 들여와 화물철도를 깔아 러시아의 도로망을 개선하긴 했지만, 독일과 오헝제국을 비롯한 제국이 외교적으로 가장 중요시했던 유럽 강대국들로 가는 철도가 우선적으로 부설되었기에 당연하게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비롯한 제국의 중심지에서 크림 반도까지 이어지는 철도는 아예 없어 병력과 군량미, 탄약과 야포 부품들을 비롯한 보급품들을 빠르게 보낼 수가 없었다.
또한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본국의 대규모 기계 공업 단지에서 체계적으로 생산한 군수품을 기차와 화물선에 실어서 병력과 함께 수송했지만, 러시아는 소규모 수공업 공장에서 생산한 군수품을 마차에 실어서 보냈고, 병사들은 육로로 그 머나먼 크림 반도까지 진군해야 했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러일전쟁 이전 발라클라바 기병대의 돌격의 원흉인 영국군 지휘관 라글란 남작 등 세계최강 똥별들의 병림픽이었던 크림 전쟁에서도 그 천하의 라글란 남작을 능가하는 엄청난 무능으로 영국군과 프랑스군에게 대패하여 러시아 제국의 민낯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여기에 군의 부정부패 또한 매우 심각해서 마진이 많이 남는 철도업을 비롯한 운수업 같은 경우에는 엄청난 부정부패가 발생했는데, 입찰 과정부터 시작해서 부지 선정, 건설비, 사용될 건축자재등등 온갖 부분에서 부패가 발생했다. 심지어 러시아-튀르크 전쟁 중에 부패한 귀족 장성 여럿이 어떤 회사의 편의를 봐주는 대가로 막대한 돈을 받아챙겼던 부패 사건이 발생한 적도 있었다. 물론 알렉산드르 2세 역시 이러한 문제점들을 좌시하고 있지는 않았고 군과 정부조직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등 부정부패를 엄단하고자 노력했지만 그러한 그도 개혁 운운해 놓고 정작 자기자신은 자신의 가족들의 배를 불려주기 위해 공유지를 가족들에게 친히 '하사' 하는 등 부정부패 엄단과 개혁을 추진한 황제로서 좋은 모범을 보이지 못하였다.
게다가 이러한 심각한 내부문제를 러시아 제국보다 훨씬 무능하고 국가 막장 테크를 심각하게 타고 있던 청나라나 카자르 왕조 페르시아, 오스만 제국과 같은 만만한 놈들을 박살내면서 얻은 승리로 해결해오고 있었고 그마저도 후반에는 러시아 제국의 팽창을 우려한 대영제국을 주축으로 한 서방세계의 방해로 영 신통치 않았다.
이후 크림 전쟁 패배로 한계가 드러날 때,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를 해방하는 등 개혁을 시도했음에도 실패했다. 러일전쟁 사이 피의 일요일로 민중들의 신임을 잃었고, 제1차 세계 대전 때 독일 제국을 상대로는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에리히 루덴도르프에게 1개 야전군 규모인 23만 대군이 박살난 것을 시작으로 벨라루스, 바르샤바를 독일 제국군에게 함락당하는 등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 제국에게 당해왔던 것처럼 독일 제국군에게 연전연패했으며 그나마 막장이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상대로는 브루실로프 공세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전쟁수행능력을 급감시키지만 러시아 제국도 100만이 넘는 병력을 잃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실제로 이는 러시아 혁명의 한 원인이 되었다. 어쩌면 이 공세의 엄청난 손실과 그외의 내부적 모순 때문에 러일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이 일본 제국에게 승전했더라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거란 추측도 있다.
결국 러시아 혁명으로 나라가 뒤집히고 니콜라이 2세와 차르 일가는 백군이 차르를 구출하여 복위시킬 것을 우려한 볼셰비키 세력에게 총살. 무엇보다도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실세짓을 하면서 지나치게 막나갔고, 그로 인해 공산당이 태동하면서 제국을 전복시켰다. 그후 볼셰비키가 러시아 내전에서 알렉산드르 콜차크나 표트르 브란겔 등의 백군을 격파하고 소비에트 연방을 건국하지만 소련도 제정 러시아의 뒤를 따라가다 결국 냉전에서 미국에게 패배했다.
다만 러시아는 위의 국가들에 비해서 변호거리는 있다. 먼저 반동정치로 일관한 차르들로 알려진 니콜라이 1세, 알렉산드르 3세, 니콜라이 2세의 경우 그들이 자유주의 개혁을 거부할만한 이유가 없지는 않았다. 이 당시의 자유주의 개혁에서 수혜자들에 결코 일반 평범한 민중이 있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민중을 위한 개혁은 아니었다. 실제로도 서유럽의 자유주의 운동도 그 첫번째 수혜자는 절대 민중이 아니었고 민중이 자유주의의 혜택을 보기 위해선 민중 스스로가 나서야 했다.
그럼 이 수혜자들은 누구냐 하면 전통적으로 왕권과 대립해온 귀족들이다. 자유주의에 대해서 이해할만한 계층인 귀족들이 자유주의를 빌미로 귀족의 권한을 더 얻어내기 위해 나선게 자유주의 운동이었던 것. 하지만 이렇게 귀족이 너무 강해지다 보니 망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사례가 있다보니 차르들은 자유주의 개혁에 적극적일 수가 없었다.
2.8.5. 폴란드 제2공화국
폴란드 제2공화국의 국기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187][188] 역량을 초월한 대전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패전해 정복을 겪음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강력한 이웃들 |
지도층 불안정 |
막장인 지도자 갑자기 사망하거나 부재중인 지도자 권력 기반이 취약한 국가원수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 |
특정 집단 소외 |
일부 집단을
심각하게 탄압 다문화 정책 실패[189]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재정 문제 | 국고 고갈 |
잘못된 경제 개입 | 부도덕한 부유층이 창궐함 |
급작스러운 화폐가치 변동 | 살인적인 초인플레이션 |
인문 환경 문제 | 지배층의 지나친 민족주의 심취 |
결과 | |
멸망 | 국치( 독소 폴란드 점령) |
상술한 폴&리투 연방이 붕괴한 지 120여 년 뒤 제1차 세계 대전이 동맹국의 패배로 끝나고 당시에 제기되던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폴란드는 독립하여 나온다.
하지만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영향을 받은 지역은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붕괴로 실질적으로 무주지가 되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이 지역에는 다양한 민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 영토를 폴란드와 러시아가 제각기 차지하려 했고 민족들은 민족들끼리 독립국을 만들려 했기 때문이었다.[190] 폴란드가 더욱 절박했는데, 양쪽에 사이 나쁜 강대국을 두고 있는 폴란드 지형상, 독일과 러시아가 힘을 회복하는 동안 아무것도 안 하면 그 결말은 뻔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볼셰비키가 러시아 내전에서 승기를 잡고 구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회복하고 독일로 혁명을 수출하기 위해 동유럽에 전면적인 침공을 개시함에 따라 동쪽의 위협이 현실화되었다.
이 때문에 폴란드는 과거 자신들의 강역이기도 했던 동유럽 무주지로 진군, 1920년 초에는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와 동맹을 맺고 민스크와 키예프를 해방시켰지만 뒤이은 러시아 SFSR의 반격으로 큰 소득 없이 전쟁을 끝내야 했다.[191] 분명히 러시아 역시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폴란드는 유리한 조건으로 협정을 진행할 수 있었으나, 당장의 국가 안전[192]만을 위해 동맹이고 이익이고 모조리 저버린 최악의 결정이었고, 이로써 최소한의 완충지대를 확보하는 것을 포기하고 만다. 애당초 폴란드가 러시아 SFSR의 지시를 따르는 현지의 볼셰비키를 왜 공격했는지를 망각한 휴전 협정이라 할 수 있었다.
1921년에 볼셰비키와 종전한 후에도 폴란드의 주변국 대외관계는 도무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초 폴란드가 대러 방파제로 상정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는 폴란드의 적국인 러시아 SFSR 즉 소련에게 먹혔다. 서쪽으로는 독일국이 상부 슐레지엔과 폴란드 회랑의 영유권을 제기하며 무역전쟁을 걸어왔다. 체코슬로바키아하고도 민족자결주의 때문에 물러설 수 없는 대결 끝에[193] 치에신 지역을 결국 털리고, 리투아니아와는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을 세워 리투아니아의 수도이자 제1도시인 빌뉴스를 합병해버리는 통에 사실상 적대적 이웃국가들에게 둘러싸인 형국이 조성되고 말았다.
1934년 이후 폴란드 정부의 대외정책 수정은 주변국 대외관계를 오히려 개악했다. 폴란드는 이 시점에서 대외정책을 친서방에서 독자노선으로 전환하고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는 등 화해정책을 추구하였다. 그러면서 서방국가의 독일 견제에 불참하고 1938년 뮌헨 협정 당시에는 영유권 분쟁을 겪던 치에신을 병합하였다. 그 결과 폴란드는 독일에 맞설 잠재적 동맹국을 상실한 것은 물론[194], 대외 위신이 실추되고 서방세계에 트롤러로 이미지가 씨게 박히고 만다. 히틀러는 이 점을 찔러 폴란드 침공의 명분을 ' 폴란드가 우리에게 선전포고했다'로 주작을 감행하면서 세계대전을 열었고, 이게 밝혀지기 전까지 폴란드는 전쟁을 일으킨 놈들 취급만 받았다.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폴란드가 주권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빌뉴스는 제2차 대전 종전 이후 소련의 공화국으로 편입된 리투아니아에 재합병되었고, 치에신은 뮌헨 협정 당시 나치 독일에게 뜯겼다가 전쟁이 끝나고 전토가 다시 체코의 영토로 돌아간 주테텐란트와는 달리, 제2차 세계 대전의 최대 피해국이었고 전간기 때부터 치에신의 역사적 소유권을 주장해온 폴란드의 입장과 명분이 어느 정도 또는 상당부분이나마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 연합국들과 소련으로부터 참작/인정을 받아 2차 대전 이후에도 자국령으로 남을 수 있었지만 뮌헨 협정 당시 체코로부터 빼앗아먹은 치에신 지역의 영토들 중 절반을 체코에게 돌려주며 체코령 체스키테신 시와 폴란드령 치에신 시로 분할되었다.
사방팔방이 적이면 적어도 내정이나 군비 증강에도 신경을 써야 했지만, 폴란드는 이 둘에게 모두 최악이었다. 무늬만 민주주의, 구식 무기, 심지어 방어선 축소 대전략을 저버리고 국경선에 군을 배치하는 등등. 대공황이 여기에 치명타를 가한 것은 물론이다. 내부로도 외부로도 최악의 상황이었던 폴란드는 결국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던 독일과 소련에 의해 양면전선을 강요받고 국가 전체가 포위섬멸당했고, 이후로도 폴란드 망명 정부는 토사구팽당하여 소련이 수립한 공산정권에 의해 해외를 떠돌다가 1989년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민주화 혁명이 완수되고서야 귀국하여 제3공화국에 모든 걸 넘기고 해산할 수 있었다.
2.8.6. 프랑스 제3공화국★
프랑스 제3공화국의 국기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패전해 정복을 겪음[195]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강해진 이웃 |
내부 혼란 | 봉기 |
부패와 양극화 |
양극화와 중산층 와해 지도층에서 만연한 부패 |
지도층 불안정 | 갑자기 사망하거나 부재중인 지도자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 극단주의 세력들의 준동 |
특정 집단 소외 | 일부 집단을 심각하게 탄압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재정 문제 |
국고 고갈 피정복민들에게 과도한 징세 |
인문 환경 문제 | 성직자들의 물질적·정치적 타락 |
결과 | |
멸망 | 항복 후 친 나치정권 성립( 비시 프랑스) |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패전으로 프랑스 제2제국이 붕괴되고 성립된 공화국이지만, 공화국 성립 초기부터 파리 코뮌을 탄압하는 등의 모습으로 분열이 일기 시작했다. 이후 단기적으로는 해외 식민지 확보와 비약적인 산업화, 경제성장 등으로 갈등이 묻혀지나 싶었지만 제1차 세계 대전과 잇따른 경제 대공황으로 인한 부정부패가 폭발하자, 좌익과 우익 모두가 제3공화국 정권이 무너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사실 이 문제는 프랑스 대혁명때부터 자유주의자+공화주의자 vs 왕당파+전통주의자의 싸움이 이어내려온 것. 이런 와중에 정교분리 정책으로 인한 종교계의 반발이 거세어지면서 반유대주의는 심해지고, 대통령이 암살되는 혼란이 벌어지는 가운데, 패전국인 바이마르 공화국에게는 가혹한 조약과 군사적 도발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니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극단주의 사상이 싹트기 시작했고, 결국 외적으로는 이웃나라에서 싹튼 극단주의 정권에 의해, 내적으로는 좌우갈등으로 인해 무너져내렸다.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 상당수의 프랑스인이 독일에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은 여기에서 기인된다.
나치 독일이 발흥하지 않았더라도 프랑스 제3공화국은 멸망의 길로 걸어 갔을 거라는 예측도 있는데, 나치 독일이 아니라 극우 혹은 극좌화된 프랑스가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을 거라는 예상이다. 그만큼 프랑스 내부의 정치적 혼란은 극심했고, 파리가 따이자 행동하는 방식이 갈가리 나뉜 것도 이 때문이다.[196]
프랑스 제3공화국의 실패에 대한 반성 중 하나가 라이시테이다. 프랑스는 오랫동안 종교갈등이 있었고, 특히나 프랑스는 종교갈등을 안정적으로 잠재운 역사가 없었다 보니 정교분리를 넘어서 공적 영역에서 종교를 거세할 것을 헌법에 명문화하고 있는 국가이다.
2.8.7. 추축국★
후발 제국주의 열강인 만큼 선발주자 열강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을 전부 상대하는 어마어마한 시도를 했다. 물론 프랑스는 이 와중에 독일에게 패배해서 점령당했으니까 그렇다 쳐도 나머지 연합국 셋의 저력만으로도 이미 추축국들은 압도하고도 남았다. 즉 이들도 분명 강력한 열강들이었지만 문제는 상대들이 훨씬 더 강했다는 것이다.[197] 경제규모의 차이도 어마어마했는데 독일을 제외하면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후에 주요 승전국이 되는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의 GDP를 뛰어넘는 추축국은 하나도 없었다.게다가 이들 정권도 다른 집단을 차별하며 지지를 얻은 집단인 데다 정권 자신이 극단주의 세력이었다. 난징 대학살, 홀로코스트 등의 학살은 전후에도 처리를 제대로 못할 정도로 부지기수로 일어났고 그러다 보니 당연히 바르샤바 봉기군들과 레지스탕스, 파르티잔과 같은 저항조직이 끊이지 않았다. 추축국을 이끄는 지도자들도 이러한 학살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
여기에 추축국 사이에서도 서로 철저히 협력해도 모자랄 판에 서로 엇박자를 내는 통에 그야말로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할지 모를 상황이 자꾸만 벌어져 패망에 일조했다. 독일은 일본의 적국인 중화민국을 군사적으로 지원했고 일본이 소련과 국경 분쟁을 벌이는 동안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어 동맹국에게 엿을 먹였다.[198] 일본은 독일이 요청한 소련 침공은 씹은 채 되려 미국을 기습했고, 마닐라에선 친추축 중립국이었던 스페인의 대사관이나 동맹국인 독일, 헝가리 성직자와 수녀들을 보호하지 않고 냅다 학살했다.[199] 이탈리아 역시 친독 중립국이던 그리스를 침공해 연합국으로 가게 만들고 독일이 예정했던 독소전쟁이 연기되게 하는 트롤링을 저지르는 등 서로 손발이 하나도 안 맞았다.
정치 면에서는 추축국의 메이저 국가 삼국은 파시즘적 통치를 자행했고, 점령지 주민은 물론 자국민까지 심각하게 탄압했다.
이 메이저 3국을 제외한 나머지 추축국도 만만찮았다. 우선 추축동맹 가입국은 모두 권위주의 정권이 들어선 국가들이었으며 경제력, 군사력과 인력 등 모든 분야에서 독일, 이탈리아와 일본보다 훨씬 뒤떨어지는 국가들이었다. 특히 이중 헝가리 왕국과 루마니아 왕국은 국력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참전하는 바람에 동부 전선에서 성인 인구의 상당수가 전사하고, 대공황에서 겨우 극복해가던 경기도 파탄 나며 처참하게 패전했다. 추축국 가입국 중 전쟁 피해를 크게 입지 않은 국가를 찾아보자면 불가리아 왕국 정도였는데 그나마도 이 국가들은 주요 전선에서 떨어져 있었다. 특히 불가리아 왕국은 추축국으로의 합류 과정이 나치 독일의 강압에 의한 면도 존재하였다.
2.8.7.1. 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역량을 초월한[200] 소모전 내전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패전해 군정을 겪음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막강한 경쟁자들 |
내부 혼란 | 봉기 |
지도층 불안정 |
무능하고
막장인
지도부 권력 기반이 취약한 국가 원수 |
국론 불균형 |
극단주의 세력의 집권 국론의 관리 실패 |
군사력 불안정 |
극단적인 징병[201] 국방력 대붕괴 |
특정 집단 소외 |
통합적인 지방 관리의 실패 피정복민들을 심각하게 탄압 정복지 관리 실패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재정 문제 | 국고 고갈 |
경제 환경 문제 | 저주받은 자원 |
인문 환경 문제 | 지배층의 지나친 특정 사상 심취 |
결과 | |
멸망 |
괴뢰국화 후 병합 (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공화정 전환 ( 이탈리아 왕국) 식민지 상실 |
1935년 에티오피아를 침공하면서 세계대전 참전국 중 혼자서 국력을 4년 전부터 퍼붓고 있었다. 그 이후 이어지는 스페인 내전 개입, 알바니아 침공 등 혼자서 계속 군사를 굴리면서 역량을 깎아먹고 있었다. 결국 본게임 2차대전 개전 시점에서는 자체적으로 딸리는 역량을 이상한 곳에 뿌리면서 더욱 더 약해져버렸다.
이 때문에 망하기 직전의 프랑스를 상대로도 공격이 막히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프랑스가 패전한 뒤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당시 사실상 영국의 보호국이던 이집트 왕국에 먼저 쳐들어가선 역린을 찔린 영국에 자기 본진 리비아까지 쭉쭉 무기력하게 밀려 버리고는 심지어 친독일 정부였던 그리스를 침공해서 연합으로 가게 하고는 그마저도 못 밀어서 도움을 구하는 추태를 보였다. 또한, 자중지란에서 이탈리아 왕국이라고 멀쩡할 리 없었다. 이탈리아의 지방세력은 기득권에 집착하면서 조직에 마피아 같은 지역적 요소가 들어가다 보니 효율적인 조직 체계가 없었다. 또한 자주포중대와 전차중대를 묶어놓았으면서 지휘권 재편을 못하는 바람에 서로 다른 연대에 속해있던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처럼 국군 조직 체계가 막장이었기에 뭔가 하려면 죄다 줄타기와 인맥에 매달려야만 하였다.
이탈리아에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전쟁 후반기에 본토가 상륙당하며 추축국에서 연합국으로 전향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 때문에 이탈리아 내전이 발발하기도 했지만, 아예 나라가 분단된 독일이나 수년간 국권 자체가 사라졌던 일본과는 다르게 참극은 피했다.
2.8.7.2. 나치 독일
나치 독일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역량을 초월한 소모전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패전해 군정을 겪음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강력한 적국들 |
내부 혼란 |
봉기 정변 |
지도층 불안정 | 막장인 지도자 |
국론 불균형 |
극단주의 세력의 집권 국론의 관리 실패 |
군사력 불안정 |
극단적인
징병 국방력 대붕괴 |
특정 집단 소외 |
피정복민들을
심각하게
탄압 마녀사냥 정복지 관리 실패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재정 문제 |
국고 고갈 피정복민들에게 과도한 징세 |
잘못된 경제 개입 |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움 |
경제 환경 문제 | 저주받은 자원 |
인문 환경 문제 | 지배층의 지나친 특정 사상 심취 |
결과 | |
멸망 |
국치(유린) 분열( 연합군 점령하 독일) |
독일은 처음에는 잘 나갔으나 병력동원에 있어서도 비슷한데 독일은 1800만 명, 소련은 2900만 명으로 1100만 명 차이가 났었다. 그 결과 모스크바에서 패배하고 결국 스탈린그라드와 쿠르스크에서 전세가 뒤집혀 수도까지 빼앗겨 자신들이 소련 본토에서 했던 수많은 전범 행위처럼 유린당하고 말았다.
명색이 합동참모본부인데 나치당의 군 통솔 기관으로 취급받아 각군 참모본부에서 무시당한 국방군최고사령부(OKW), 전통적으로 자신을 최고 국가 엘리트라 자부하던 육군 최고사령부(OKH), 최고사령관이 나치 정부의 2인자 헤르만 괴링이라 만들어진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육해군 최고사령부를 찍어누르던 공군최고사령부(OKL), 다른 사령부에 이리저리 치이느라 조직과 자산을 지키기 바빴던 해군최고사령부(OKM), 히틀러의 친위대 슈츠슈타펠, 지방장관들(Gauleiters), 기타 당국자들의 파벌 싸움과 자원 분배 다툼으로 독일 제 3 제국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던 콩가루 집안이었다. 육해군이 영국 침공 계획에서 상륙 전술을 놓고 싸우는데, 정작 이걸 조율할 국방군최고사령부는 손도 못 대고 이런 전술적인 문제를 히틀러가 직접 손봐야 했을 정도. 끝내 전략적 식견을 갖춰야 할 이들 최고사령부들은 그저 작전급 전역사령부로 스스로의 역할을 떨어뜨렸다. 합참이 서부전선에서, 육군은 육군대로 동부전선에서 동등한 지위로 지휘한다고 생각해보라. 더 세부적으로는 히틀러 독대권을 가진 국방군의 빌헬름 카이텔과 알프레드 요들, 육군의 쿠르트 차이츨러와 하인츠 구데리안, 나중에 가면 괴벨스의 선전부[202]까지 끼어들고 온갖 기관들의 아귀다툼 사이에 낀 알베르트 슈페어의 군수부도 히틀러에게 달려가 문제를 호소했다. 공군의 기갑사단, 공군 야전사단이 이런 개싸움의 극단적인 결과물이다.
나치 독일 역시 징병에 매우 혈안이 되어 있어서 독일인은 물론 프랑스인, 폴란드인들까지 죄다 강제로 징병시키고 전쟁터에서 마구 죽여댔다. 결국 견디다 못한 이들 중 상당수가 미국이나 아르헨티나로 야반도주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 유명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박사는 미국으로, 볼펜을 발명한 비로 라슬로는 아르헨티나로 각각 망명했다. 싹 쓸어버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유대인문 말할 것도 없이 나치 독일에서 추방되었으면 다행이고, 홀로코스트가 시작되자 나치 치하 유럽을 떠나야 했다.
독일보다 소련이 사상자는 많았지만, 각각 천만이 넘게 본국민과 식민지인을 동원한 미국과 영국 및 일본, 이탈리아를 더해 비교하면 차이는 더 크다.
2.8.7.3. 일본 제국★◆
일본 제국의 국기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203] 역량을 초월한 소모전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패전해 군정을 겪음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강대한 이웃들[204] |
내부 혼란 |
봉기 정변 시도 |
부패와 양극화 | 양극화와 중산층 와해 |
지도층 불안정 |
권력 기반이 취약한 국가원수[205] 무능하고 막장인 지도부 정 부 수 반 의 잦 은 교 체[206] |
국론 불균형 |
극단주의 세력의 집권 국론의 관리 실패 문민통제 실패 |
군사력 불안정 |
극단적인
징병 군인들의 반란 국방력 대붕괴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207] |
특정 집단 소외 |
피정복민들을
심각하게
탄
압 마녀사냥 정복지 관리 실패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재정 문제 |
과도한 징세 국고 고갈 |
경제 환경 문제 | 저주받은 자원 |
인문 환경 문제 |
지배층의 지나친 특정 사상 심취 특정 종교의 물질적·정치적 타락 |
재해 | 초거대 자연재해 |
결과 | |
멸망 | 항복( 옥음방송 이후 군정 설립) |
의외로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까지만 해도 잘 나갔다. 협상국 진영에 가입한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전쟁특수를 누리며 경제가 발전했고, 비슷한 시기에 호헌운동을 거치며 민주주의와 정당정치가 발전하면서 다이쇼 로망이라고 일컬어지는 일본제국 최대의 전성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관동 대지진으로 수도가 초토화되면서 정국이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다이쇼 천황 붕어 직후에 일어난 쇼와공황과 대공황을 거치며 문민내각을 향한 신뢰가 완전히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불안정했던 문민통제는 결국 5.15 군사반란과 2.26 군사반란 등의 쿠데타가 수 차례나 연달아 일어나면서 완전히 붕괴했고, 군부의 고삐를 쥐어야 할 정부가 무력해지며 히로히토 천황의 방관 아래 '대일본제국'은 속절없이 망해가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은 일본과 대비해 평균적으로 60배 정도 자원이 많이 났고, 전쟁 말기가 되면 차이가 2배로 커져 120배로 벌어졌다. 그리고 석유가 모자라 전쟁을 개시했는데, 비축할 생각도 없었는지 시작부터 석유 차이가 1000배 가량인 막장 상황이었던 건 덤. 이런 상황에서 독자적으로 승산 없는 전쟁을 시작한 끝에, 길가의 풀을 뜯어먹고 진격했다.
그나마 독일은 히틀러라는 교통정리기라도 있었지, 일본은 천황이 시라스(知らす)[208]를 하느라 구체적인 정책에는 관여하지 못하는 동안 육군성, 해군성, 내무성( 경찰), 관동군과 연합함대[209]끼리 싸워대는 건 예사[210], 군인과 경찰이 사소한 일을 굳이 긁어 부스럼으로 만들어 싸우는 촌극까지 빚어진다. 육군과 관동군은 또 그 안에 황도파와 통제파가 갈리고, 해군과 연합함대는 항공파와 전함파로 갈려 마구 싸워댔다. 게다가 일본은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을 마구잡이로 징병해다가 아무렇게나 마구 투입해 전투에서 연전연패하는 과정에서 마구 죽여나갔다.. 또한 일본은 초기부터 식민지인들을 철저하게 차별하고 억압했으며 조선인과 중국인 등 식민지인들을 2등 국민으로 하대하는 차별을 저질렀다.
게다가 피정복민에게도 아주 잔악무도한 통치를 감행했는데 조선인도 신민이라고 인정해놨었던 일본 제국은 '조선인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니까 아무렇게나 막 해도 된다'라는 마인드로 나와서 그 결과 강제 징용, 위안부 등 여러 범죄 행위를 저질렀고 적대국 소속인 중국인들은 더 나가서 기분 나쁘다고 난징 대학살을 일으키는 등 완전히 막 나갔다.
더욱 세부적으로는 줄타기에 좌우받는 경향으로 임팔 작전 같은 것도 통과되었고 도조 히데키는 '정치권에서 시라스파에겐 독재자라고, 중앙집권주의자들에겐 사상이 불충분하다'고 까였으며 일본 제국 헌법 자체가 기관들을 나누는 경향이 컸다. 배경 자체가 이정도로 콩가루이니, 극한의 상황에서는 아예 천황이고 같은 일본인이고 할 것 없이 서로 총질을 했다.
그 결과 일본 제국은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이어야 할 군사 목적으로 사용된 핵공격을 두 번이나 맞은 뒤에야 전면 항복하기에 이르었다. 이후 미군정을 거처 개헌이 이루어졌지만, 직후 이어진 6.25 전쟁과 냉전의 상황 속에서 제대로 된 역사 청산이 못 된 고로, 이러한 일본 제국의 유산은 계승되고 있다.
2.9. 2차 세계대전 이후~2000년까지의 국가
2.9.1. 팔라비 왕조★◆
팔라비 왕조의 국기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이방인 세력들의 대출현 |
내부 혼란 |
지배층 쿠데타 혁명 |
부패와 양극화 |
지배층에서 만연한 부패 양극화와 중산층 와해 |
국론 불균형 | 극단주의 세력의 준동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 |
특정 집단 소외 | 다문화 정책 실패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211] |
재정 문제 | 국고 고갈 |
잘못된 경제 개입 | 일부 특권 계급의 권력·재력 독점 |
자연 환경 문제 | 장기적인 환경 악화 |
결과 | |
멸망 | 이란 혁명 |
본래 초대 샤인 레자 샤 팔라비는 왕정이 아니라 공화정을 선택하려 했으나, 국내 보수주의자, 민족주의자, 영국에 의해 무산되고 팔라비 왕조를 개창한다.
이후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대에 들어서서, 백색 개혁이라 부르는 이슬람 극단주의의 때를 벗기는 개혁을 단행했으나, 보수주의 종교 지도자들의 반발을 불렀고, 그 개혁 방법도 너무 강압적이어서 이란 국민들의 반발을 불렀다.
결국 반왕정 시위가 격화되고, 망명해 있던 호메이니가 돌아오며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는 망명을 택한다.
2.9.2. 소련★◆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국기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건드리지 말았어야했다 역량을 초월한 장기 소모전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부강하고
콧대높은
이웃들 너무 혼란한 이웃들 |
내부 혼란 | 정변 |
부패와 양극화 | 지도층 및 식자층 부패 |
지도층 불안정 |
국가원수의
잦은
교체 막장인 지도자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 극단주의 세력의 준동 |
군사력 불안정 |
극단적인 징병[212] 군인들의 반란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 |
특정 집단 소외 |
다문화
정책 실패 통합적인 지방 관리의 실패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213] |
재정 문제 | 국고 고갈 |
잘못된 경제 개입 | 부도덕한 부유층이 창궐함 |
인문 환경 문제 | 지배층의 지나친 특정 사상 심취 |
자연 환경 문제 | 국가 단위의 환경·산업재해 |
재해 | 초거대 자연재해 |
결과 | |
멸망 | 소요( 8월 쿠데타), 소련 해체 |
서진과 함께 5개 부문 모두 해당하는 그랜드 슬램이지만, 하나하나가 강력하게 작용했다기보다는 문제가 복합적이었다는 점이 더 컸다. 사실 근대화된 국가라면 방향을 잘못 설정하지 않는 한 지엽적인 멸망의 징조 하나하나는 잡을 수 있다. 그래도 어지간한 나라는 요것들 중 하나만 터져도 망할 터인데 이런 재앙이 몇 개씩 연달아 터졌고, 방향도 잘못 잡아서 필연적인 붕괴를 맞이했다.
일단 소련은 건국 직후부터 위기였다.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는데는 성공했지만, 러시아 제국의 잔당들은 물론이고 중도좌파들까지 반발해 백군으로 활동했고 멘셰비키들은 또다른 세력으로 활동하였고, 자본주의 국가들의 열강 등은 당연히 공산주의 사상을 경계해 견제를 놓았다. 비록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하여 소련을 성립하긴 했지만, 잠깐 숨 좀 돌리자 유대인과 공산주의를 그 누구보다 미워하는 총통이 다시 한번 소련 서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자그마치 2500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낳았다. 이 트라우마로 인해, 서방에 대한 극심한 불신을 갖게 된[214] 소련은 나라를 항상 전시상태인 것 처럼 운영했으며, 마르크스 자체는 아주 짧게 규정했던 프롤레타리아 독재 기간이 실제로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 계속되는 바람에 사회의 경직이 심각했다. 또한 그 경제규모에 비해 너무나도 비대한 군대를 운용하게 되었고, 공업 구조도 중공업에 쏠려 있어, 이후 소련은 생필품을 인민들에게 제때 공급해주지 못하는 고질적인 문제점을 가진 경제구조가 되었다. 또한 다른 좌익들마저 볼셰비키에 반발해 세력을 따로 형성하여 정권을 위협했던 만큼, 소련에서는 수정주의적인 영향이 적을 수밖에 없었고, 1956년 헝가리 혁명와 체코슬로바키아에 탱크를 보내 짓밟아버린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문제는 이런 강압정책이 국내외에서 적만 잔뜩 만들어버렸다.
미국과 냉전을 하며 세계에 혁명을 수출했으니, 부담 역시 세계구급이었다. 동유럽과 동남아시아, 서아시아의 여러 위성 국가와 쿠바 정도를 결집시켜 부유한 자본주의 국가들과 군비 전쟁을 하려니[215] 얼마전까지 동지였던 유고슬라비아와 중국, 알바니아와도 관계가 멀어졌고, 흐루쇼프의 처녀지 개간 사업이 트로핌 리센코를 비롯한 농학자들의 정책 실패로 광활하기만 할 뿐만이 아니라 세계에서 손꼽히는 옥토지대를 가지고도 크나큰 피해를 입어 미국에서 곡물을 수입해 와야 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216]. 거기에 공산주의 진영의 대장다운 모습을 보여야 했으니 별로 하고 싶지 않은 것, 즉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을 도와야 했으니 아프간의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다른 사례들과는 달리 상대가 초강대국은 아니지만 서방은 물론 중국까지 무자헤딘을 지원했는데, 정작 쿠바, 북한, 베트남 같은 최우방국은 소련을 비난하였으니 홀로 지긋지긋한 대리전을 치러야 했다. 최근의 연구로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인적 손실이 적었다고는 하지만, 이 치욕적인 패배는 소련 연방을 유지시켜 왔던 소련 군부의 위상을 추락시켰다.
거기에다가 80년대는 정치적 위기 시기였는데, 소련을 말아먹던 브레즈네프가 너무 오래 한 탓에 그 뒤로 올라갈 관료들이 폭삭 늙어서 서기장이 1~2년마다 죽었다. 거기에 브레즈네프 자체가 급진파인 흐루쇼프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오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딱히 별다른 개혁적 조치는 없었으나 군비는 계속 늘어나서 국고는 텅 비었다. 브레즈네프 사후 안드로포프가 그나마 현실을 직시하고 이후 제1세계와의 평화와 놀고만 있는 노동자들을 위한 대책을 짧은 집권기 내에 마련했으나, 위에 말했다시피 브레즈네프가 너무 오래 살았고 늙은 안드로포프도 지병으로 죽었다. 심지어 그 뒤에 올라간 체르넨코는 안드로포프보다 나이가 더 많았다. 거기에 체르넨코는 브레즈네프 계파인 사람답게 개혁의 움직임 하나 없이 안드로포프의 개혁 작업을 브레즈네프 시절로 되돌린 채 사망했다. 이는 러시아의 정치문화 자체에서 비롯된다. 러시아의 정치는 역사적으로 작은 리스크라면 대충 모면하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그게 바로 고위층의 노령화로 이어진다.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체르넨코가 1982~1985년동안 줄줄이 죽어나간 이유도, 그들이 같은 세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물은 언젠간 죽는다는 불멸의 진리 하에, 고위층이 대거 죽어나가기 시작하면 정치, 사회, 문화의 변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하며 혼란이 잇따르기 마련이다. 게다가 위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국론이 1년 정도 간격으로 뒤바뀌었으니 정치 불안정도 심했다.
그렇다고 그 이후가 평탄한 것도 아닌데, 당장 고르바초프 집권 초기에 터진 체르노빌[217]이 있었고, 이후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의 혼란과 구성국의 일부 이탈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를 타계해 보고자 승부수를 띄웠던 주권국가연맹 구상이 8월 쿠데타로 화려하게 망가지면서 소련은 그 몸집을 더 이상 유지할 수가 없었고, 구성국들이 연쇄적으로 탈퇴하면서 붕괴되고 말았다. 소련 붕괴에 대한 세계적 연구자인 구자정 교수의 말을 한 마디만 빌려 표현하면 "소련은 자살했다."
여담으로 소련이 해체되자 권력과 경제력을 동시에 가진 공산당 관료조직은 부도덕한 부유층인 올리가르히와 정보기관과 마피아 카르텔인 실로비키로 분열되었다. 2010년대 말기 시점에서 올리가르히와 실로비키간의 대립은 일단 실로비키의 승리로 끝났지만, 소련 해체 이후 근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이들에 의한 혼란이 지속되었다. 그 후 푸틴이 중앙집권체제를 재건하여 소련 시절의 영광을 어느 정도 회복하였지만, 돈바스 전쟁 개입으로 인한 미국의 제재와 점차 반 푸틴 시위가 늘어나고 푸틴은 권모술수와 억압으로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일으켰다.
2.9.3.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
베트남 공화국의 국기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내전 패전해 정복을 겪음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이방인 세력들의 대출현 |
내부 혼란 | 봉기 |
부패와 양극화 | 지도층에 만연한 부패 |
지도층 불안정 |
막장인 지도자 권력 기반이 취약한 국가원수[218] 지도자 이탈 및 이반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 문민통제 실패 |
군사력 불안정 |
군인들의 반란[219] 국방력 대붕괴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 |
특정 집단 소외 |
다문화 정책 실패 일부 집단을 심각하게 탄압 통합적인 지방 관리의 실패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재정 문제 | 국고 고갈 |
잘못된 경제 개입 | 부도덕한 부유층이 창궐함 |
인문 환경 문제 | 특정 종교에 대한 박해[220] |
결과 | |
멸망 | 베트남 민주 공화국 주도의 적화통일 |
지도자인 응오딘지엠은 초기에는 군벌화된 불교도 세력을 토벌하여 치안을 안정시키고 북베트남의 무리한 토지개혁과 종교탄압 등으로 생긴 80만이 넘는 탈북난민들을 무사히 재정착시키는데 성공해 대내외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때 그대로 끝까지 통치했으면 그래도 나라의 기틀을 잡았겠지만, 이후 엄청난 부정과 비리를 저질러서 남베트남을 말아먹는다. 국가 요직에는 죄다 친인척을 앉히고, 종교 정책에서 베트남인들이 대다수 믿는 불교를 탄압하고 소수인 가톨릭과 개신교를 우대하고 역시 공직에 가톨릭 신자와 크리스천만 골라서 앉히는 종교편향적인 정책을 시행하고 마침 제수인 쩐레쑤언이 불교 탄압에 항의하며 분신( 소신공양)한 고승 틱광둑에 대해 바베큐라고 묘사하는[221] 바람에, 남베트남 국민들의 인심을 잃고 말았다. 결국 즈엉반민 장군이 CIA의 지원하에 쿠데타를 일으켜 응오딘지엠 정부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군인들 간의 권력다툼으로 쿠데타가 연속적으로 발발해 혼란을 겪었다. 그 이후 안정을 찾나 싶었지만, 통킹만 사건이 일어나고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전면 개입해 전쟁이 심화되며 다시 혼란을 겪게 되었다.
통킹만 사건 이후로는 미국에게 군사적으로 지나치게 의존한 탓에 독자적인 전쟁수행 능력을 갖추지 못하게 되었다. 미국이 남베트남이 패전하는 것을 보다 못해 직접 미군을 파견하여 북베트남에 맞섰으나, 피해만 잔뜩 입은 후 철군 시키고 대신 막대한 군사지원을 해줘서 미군 철수 이후 남베트남군은 수치상으로 당시 세계적으로도 열 손가락 안에 손꼽히는 군사력을 가졌으나, 정작 1975년 북베트남의 공세에서 반 이상이 탈영하고 군사정보를 입수한 북베트남의 침공에 허망하게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하였다.
경제적으로도 초반에는 미국의 원조, 풍부한 쌀 수확량 등으로 북베트남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었으나, 이마저도 베트남 전쟁 이후로 재정적자, 무역적자, 인플레이션의 3박자가 겹치면서 경제도 막장화되고 농촌지역의 상당수가 베트콩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쌀 수출국에서 수입국으로 전락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게다가 이것만으로도 모자라서, 미국에서 원조한 무기를 적대국인 북베트남에 판매할 정도로 극심한 수준의 방산비리를 비롯한 부정부패가 남베트남의 멸망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오죽하면 남베트남의 멸망 원인이 공산 세력의 내부 중상이라고 그렇게 강조하는 한국의 반공주의자들 중에도 "저렇게 썩었으니 언젠가 망할 줄 알았다. 망해 마땅한 나라다"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222]
좀 더 자세한 사항은 해당 항목 참조.
2.9.4.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유고슬라비아의 국기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내전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혼란한 이웃들 |
내부 혼란 | 구성원들의 봉기 |
부패와 양극화 |
양극화와 중산층 와해 식자층 부패 |
지도층 불안정 |
갑자기 사망하거나 부재중인 지도자[223] 권력 기반이 취약한 지도수반[224] 막장인 차기 지도자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 극단주의 세력들의 궐기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 |
특정 집단 소외 |
다문화
정책
실패 통합적인 지방 관리의 실패[225] 일부 집단을 심각하게 탄압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잘못된 경제 개입 | 특정 구성원들의 권력·재력 독점[226] |
인문 환경 문제 | 구성원들의 지나친 고유 종교&사상 심취 |
결과 | |
멸망 | 소요(분리독립) |
국내의 민족, 종교, 지역간 갈등과 대립을 극복, 수습하는데 실패하면서 잔혹한 전쟁을 겪으며 국가 자체가 붕괴, 결국 해체했다. 사실 해체된 나라 중에서는 언어가 상당히 유사해, 동질성도 갖추고 있는데도 서로 잔혹한 전쟁을 벌이며 최악의 방식으로 해체되었다. 인도는 브리티시 라지 이전에는 제대로 된 통일제국을 이룬 적이 없고, 민족, 언어, 종교, 문화가 너무나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미얀마로 좋게 갈라진 편이다. 이탈리아처럼 유고슬라비아 정도의 갈등보다 심해도 붕괴되지 않고 통일을 유지한 나라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족들을 둘러싼 역사적인 갈등이 뿌리깊었고, 막장 정치지도자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 민족주의, 지역주의를 앞세워 부추기다 보니 이런 사단이 난 것이다. 특히 우스타샤, 한트샤르라는 과거사의 악몽이 분열의 촉매제가 된 것이 크다. 한국으로 따지면 서북청년단이 제주뿐만 아니라 전국 단위로 학살을 벌인 과거가 있은 뒤, 민주화 후에 서북청년단이 돌아온다며 독립을 부추겨 내전이 터진 꼴이다.
허나 아직도 악몽이 끝난 것이 아니라 불씨가 아직 남아있다는 것이 문제.
2.9.5. 민주 캄푸치아★
민주 캄푸치아의 국기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내전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패전해 정복을 겪음 |
내부 혼란 | 정변 |
지도층 불안정 | 막장인 지도자 |
국론 불균형 |
극단주의 세력의 집권 국론의 관리 실패 |
군사력 불안정 | 극단적인 징병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 |
특정 집단 소외 | 국민 대부분을 심각하게 탄압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재정 문제 | 국고 고갈 |
잘못된 경제 개입 |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움 |
인문 환경 문제 | 지배층의 지나친 특정 사상 심취 |
결과 | 외환[227] |
폴 포트가 주도하는 크메르 루주는 1975년 4월 17일에 캄보디아의 권력을 장악한 후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명목으로 사유재산을 모두 금지하고는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집단 농장으로 끌고 가 가혹한 무급 강제노동에 시달리게 했다. 여기에 폴 포트는 크메르 민족 순혈주의를 바탕으로 캄보디아 내의 소수 민족에 대해서는 무차별적인 학살을 가했던 데다가 문자 그대로 ' 가족'이라는 개념까지 파괴할 정도로 극단적인 국민 통제를 가했고, 지식인들을 자본주의자로 몰고는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했다.[228] 이것이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손에 꼽히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유명한 킬링필드다.
결국 이런 민주 캄푸치아는 베트남과 벌인 전쟁에서 패배하며 멸망했다.
크메르 루주가 축출된 이후에도 캄보디아의 경제는 아동 영양실조율이 90%에 달했을 정도로 완전 파탄 상태에 이르렀으며, 최빈국에서 벗어나는 데에 성공한 것도 2024년이었을 정도로 크메르 루주의 상흔을 치유하는 데에 오랜 세월이 걸렸다.
2.9.6. 중앙아프리카 제국★
중앙아프리카 제국의 국기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이방인 대출현 |
내부 혼란 | 지배층 쿠데타 |
부패와 양극화 | 지배층에서 만연한 부패 |
지도층 불안정 | 막장인 지도자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 |
군사력 불안정 | 군인들의 반란 |
특정 집단 소외 | 국민 대부분을 심각하게 탄압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잘못된 경제 개입 | 일부 특권 계급의 권력·재력 독점 |
경제 환경 문제 | 자원의 저주 |
인문 환경 문제 | 지도자의 지나친 향락 심취[229] |
결과 | |
멸망 | 공화정 복귀 |
중앙아프리카 제국을 건국한 보카사 1세의 본명은 장 베델 보카사로, 1966년 1월 1일에 다비드 다코 대통령이 송년회를 보내기 위해 외출한 틈을 타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 자리에 오른 사람이다. 보카사는 집권 초에는 내정 면에서는 나름 뛰어난 통치력을 보여주며 개혁 정책을 실시했지만, 1976년 9월에 의회와 정부를 해산한 후 동년 12월 4일에 새 헌법을 공포하며 황제에 오르고 중앙아프리카 제국을 선포하게 된다.
제국 선포 1주년이던 1977년 12월 4일에 보카사 1세는 프랑스의 원조금까지 전부 횡령해가며 2022년 환율로 환산하면 무려 약 9천만 달러라는 거액을 들인 초호화 대관식을 열었다. 여기에 든 돈은 당시 국가 예산의 1/3, GDP의 1/5에 맞먹는 거액이었다.
이렇게 황제가 된 보카사는 철도도 없고, 의사가 12명[230]밖에 되지 않는 가난한 나라에서 프랑스에 6채의 별장을 두고 도금된 침대에서 자는 등의 호화 생활을 일삼았고, 언론도 국영 라디오 방송국 1곳 빼고는 다 없애버리는 등 극단적인 국민 탄압을 가했다. 이런 만행들 때문에 보카사가 이디 아민 이상으로 잔혹한 식인을 저질렀다는 괴소문도 암암리에 돌았다.
1978년 2월에 보카사 1세는 동년 10월부터 모든 학생들에게 자신의 모습이 그려진 교복을 입으라는 칙령을 발표했다. 황제가 직접 디자인하고 황후가 지분을 가진 섬유 기업에서 생산된 이 교복의 가격은 2022년 환율로 약 680달러라는 거액에 당시 백성들의 1인당 GDP의 절반 이상이었기 때문에 이에 항의한 학생들과 백성들이 1979년 1월과 4월에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반제정 시위를 열었다. 그러자 보카사 1세는 자이르에 군대 파견까지 요청해 직접 발포를 명령하며 무자비한 폭동적 시위진압을 자행해 총합 500명에 가까운 민간인들을 학살한 것도 모자라 황제 본인이 감옥에 방문해 시위에 참여한 어린 학생들을 직접 지팡이로 구타해 죽였다.
결국 이 광풍을 보다 못한 프랑스 정부는 1979년 9월 20일에 다비드 다코의 지지자들의 후원을 받아 특수 부대를 파견하는 '바라쿠다 작전'을 실시해 중앙아프리카 제국을 무너뜨렸고, 다비드 다코는 이튿날에 제정을 폐지한 후 다시 대통령이 되면서 중앙아프리카 제국은 1대 3년이라는 짧디짧은 역사를 마감했다.
2.9.7. 동독 (독일민주공화국)★
독일민주공화국의 국기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부강한 옆동네 |
내부 혼란 | 봉기 |
부패와 양극화 | 피지배층 부패[231] |
지도층 불안정 |
무능한 지도자 권력 기반이 취약한 국가원수[232]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 |
군사력 불안정 | 극단적인 군축[233]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 |
특정 집단 소외 | 통합적인 지방 관리의 실패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인문 환경 문제 | 지배층의 지나친 쇄국정책 심취 |
결과 | |
멸망 | 흡수[234] |
개방 개혁 바람을 억지로 진압하려 쇄국 정책을 펼치려다 대실패하고 동독은 막장 그 자체가 되어갔다. 탈주, 봉기가 만연하고, 국가 지시를 완전히 개밥그릇 취급하는 무정부 상태까지 오고야 말았고 결국 동독 정부가 국가 멸망을 선언하고 스스로 해산한 뒤, 각각의 주들이 개별적으로 서독 연방에 가입하는 방식으로 넘어갔다. 다만 이후 오스탈기(Ostalgie)라고 불리는 향수적 현상 및 재평가 움직임은 있다. # 비록 동독은 가난하고 억압적인 국가였으나 북한처럼 대규모 아사사태가 일어난 적이 없었고 나름대로 자국민들 민생에 신경을 쓴 나라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2.9.8. 티베트★
티베트의 국기인 설산사자기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내전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역량을 초월한 소모전 패전해 정복을 겪음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이방인 대출현 너무 강한 옆동네 |
지도층 불안정 |
권력 기반이 취약한 국가원수 지도층 이탈 및 이반 |
국론 불균형 | 극단주의 세력의 준동[235]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 |
특정 집단 소외 |
통합적인 지방 관리의 실패 국민 대부분을 심각하게 탄압 |
재정 문제 | 과도한 징세 |
잘못된 경제 개입 | 일부 특권 계급의 권력·재력 독점 |
경제 환경 문제 | 저주받은 자원[236] |
재해 | 국가 단위의 인재 |
결과 | |
멸망 | 국치(합병) |
티베트는 당시 중국의 속국으로 있다가 영국의 침략을 받다 중화민국과 영국령 인도 제국의 충돌을 막는 완충국 역할을 하였다. 이때 달라이 라마 13세는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이들을 막으려 했으나 역부족이였고, 결국 수도 라싸가 점령 당한다.
이 당시에도 중국은 티베트를 자국 영토로 여겨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으나, 국공내전 등의 내부 분열에 더해 영국군의 존재 때문에 티베트에 중국의 영향력을 끼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때 영국이 티베트를 양보해줘서 중국은 티베트에 간섭을 계속하였고, 중국군을 주둔 시켰다.
그러나 신해혁명으로 인하여 중국은 쇠약해졌다. 이 틈을 타 티베트는 군을 조직하고 중국군을 전부 몰아낸 뒤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티베트의 지위는 여전히 중국과 영국의 속국 취급받던 상태였으니…
영국군이 인도에서 철수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국민당을 몰아내고 건국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영국도 없겠다, 티베트를 침공하여 달라이 라마에게 조약을 강요하였다. 그리고 1953년, 세계의 관심이 6.25 전쟁으로 쏠려있었을 시기에 티베트는 완전히 중국의 영토로 합병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이를 이용해 자신들이 티베트 승려들의 잔인한 지배에서부터 티베트 인민을 해방시켜 줬다고 선전했다.[237] 그러나 합병 이후에도 티베트인들의 자유는 전혀 보장받지 못했다. 중국군이 달라이 라마 14세를 암살하려 들자,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해 망명 정부를 수립했고, 이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도 티베트 독립 운동이 일어나고는 있지만,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다. 무엇보다 티베트 민중들의 독립 열의가 턱없이 낮기 때문이다.[238] 기본적으로 세율이 무자비했던데다가 구 티베트 지배층이 농노들의 팔목, 발목을 자르거나, 눈을 뽑는 등 탄압이 워낙 심각했던 것이 원흉인데, 이를 이용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선전도 잘 먹혀들어갔기 때문이다. 선대 달라이 라마들도 이 문제를 뒤늦게 해결해보려고 개혁을 하려 했으나 이미 때가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2.9.9. 자이르
자이르의 국기 |
2.10. 21세기에 사라진 국가
2.10.1. 아시아
2.10.1.1. 바트주의 이라크
1968년부터 1991년까지의 바트주의 이라크 공화국의 국기 |
1991년부터 2003년까지의 바트주의 이라크 공화국의 국기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역량을 초월한 소모전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패전해 정복을 겪음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사방 에 널린 적 |
내부 혼란 | 정변 |
부패와 양극화 | 지도층에서 만연한 부패 |
지도층 불안정 | 막장인 지도자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 |
국론 불균형 |
국론의 관리 실패 극단주의 세력의 준동 |
특정 집단 소외 |
다문화 정책 실패 일부 집단을 심각하게 탄압 통합적인 지방 관리의 실패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재정 문제 | 국고 고갈 |
자연 환경 문제 | 장기적인 환경 악화[239] |
결과 | |
멸망 | 다국적군의 승리로 정부 항복, 이라크 연합국 과도 행정처 |
2.10.1.2.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국기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역량을 초월한 총력전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혼란을 극복하고 강해진 이웃들 |
내부 혼란 | 쿠르드족의 봉기 |
지도층 불안정 |
막장인
광신도
지도자 국가원수의 잦은 교체 |
국론 불균형 | 극단주의 세력의 집권 |
군사력 불안정 |
극단적인 징병 국방력 대붕괴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240] |
특정 집단 소외 |
국민 대다수를 심각하게 탄압 정복지 관리 실패 |
재정 문제 | 과도한 징세 |
경제 환경 문제 | 자원의 저주 |
인문 환경 문제 |
지배층의 지나친 특정 종교 심취 특정 종교를 제외한 모든 문화 배척 |
결과 | |
멸망 | 국치(병합, 흡수) |
첫 단추부터 끝 단추까지 모조리 잘못끼운 대표적 사례. 애시당초 이 미승인국은 위에 시리아와 이라크, 리비아의 극단주의 세력이 뭉쳐서 만들어졌으며, 어떤 국가로부터도 국가로서 인정받지 못했으며 자기 자신들은 모든 국가를 미승인국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 결과 극단적 이슬람 지하디스트들만 뭉쳐서 만들어진 이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는 점령지역의 거주민 대부분을 항상 필요 이상으로 잔인하게 탄압했고, 아무런 대비없이 전 세계 모든 국가에 선전포고를 한 꼴이 되고 말았다.
또한 발전된 통신수단으로 인해 지지층과 명분을 얻기 위해 반복한 잔인한 처형 및 샤리아 집행과 같은 이슬람 국가에게 외교적으로 불리한 자극적인 정보가 전파되었으나, 극단주의에 물든 지도층은 이를 통제하긴커녕 아예 국가의 주요과업으로 삼고 말았다. 결국 각국은 이런 이슬람 국가의 폭주를 단순한 중동 내 혼란으로 여기지 않았고 무리수를 두더라도 반드시 토벌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ISIL은 극단적 사상으로 인해 스스로의 성장동력과 정통성을 동시에 무력화 한 상태라 경제 전반을 중동 근방 세속 공동체 약탈과 다른 국제 테러조직의 협력 및 조공에만 의존했기에 전 세계와 유의미한 전선을 유지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고, 결국 수도와 모든 영토를 잃게 된다.
다만 워낙 정신나간 종교적 광신을 밀어붙이긴 했어도 기반이 된 중동 및 이슬람의 여건이 나아진 건 아니며, 이라크 전쟁이라는 반면교사를 겪은 연합군들도 해당 지역에 주둔하는 것을 꺼리며 그대로 물러갔다. 이들의 몰락은 국가 형태를 상실한 테러리스트 점조직으로 회귀하는 것에 그첬을 뿐 곧 지역의 안정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빠른 흥기만큼이나 빠르게 멸망한 ISIL를 교훈삼아서, 아무리 과격한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라도 대놓고 어그로를 끌지 않거나 심지어는 좀더 온건해지는 것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다. 게다가 세계 곳곳에 숨어있던 이슬람 극단주의 과격파들을 한 군데 몰아서 소탕당해버린 셈이 된 지라, 그 만큼 론 울프형 예비 테러리스트를 줄인 효과도 있고, 가담했다가 현시창을 깨닫은 생존자들도 본국으로 돌아가 조용히 살고 있다고 한다.
2.10.1.3.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의 국기[241]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242] 패전해 정복을 겪음 내전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이방인 세력들의 대출현 |
내부 혼란 |
정변 혁명 |
부패와 양극화 | 지배층에서 만연한 부패 |
지도층 불안정 |
막장인 지도자 지도자 이탈 및 이반 |
국론 불균형 |
극단주의
세력들의
준동 국론의 관리 실패 |
군사력 불안정 | 국방력 대붕괴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 |
특정 집단 소외 |
다문화 정책 실패 국민 대부분을 심각하게 탄압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재정 문제 | 국고 고갈 |
잘못된 경제 개입 | 부도덕한 부유층이 창궐함 |
경제 환경 문제 | 자연이 거부한 땅 |
자연 환경 문제 | 장기적인 환경 악화 |
자연재해 | 범유행전염병[243] |
결과 | |
멸망 | 국치(합병), 탈레반의 의한 점령 |
아프가니스탄 왕국시절의 학교 |
탈레반 집권 전/후[244] |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왕조 시절에는 가난하긴 해도 21세기의 상황에 비해서는 훨씬 양호한 나라였다. 왕조 전복 후 들어선 첫 공화정 독재정부 시절에도 초반에는 '아시아에서 제일 깨끗한 나라'라는 칭찬을 들었다. 하지만 기근 사태에 정부가 무능한 대처를 보이고, 그걸 빌미로 무함마드 다우드 칸의 쿠데타로 왕정이 뒤집어 엎히면서 그 전초가 보이기 시작했다. 잦은 정변으로 정권이 세워졌다가 전복되었다를 반복하고, 무자헤딘들이 들고 일어나고, 소련이 개입하면서 본격적인 개판이 되었다.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을 세운 다우드 칸은 세속주의자라는 점에서는 똑같았기에 보수적인 아프간 사회를 개혁한다는 명분으로 개혁을 추진했으나, 너무 성급하고 급진적인 개혁으로 이슬람 세력의 반발을 샀고 또한 반공정책으로 공산 세력의 반발도 사 결국 다우드의 공화정은 공산 세력의 쿠데타로 무너진다. 이후 들어선 공산 정권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역시 성급하고 급진적인 소련식 개혁으로 이슬람 세력의 반발을 샀고, 이슬람 세력들이 무자헤딘을 구성해서 공산 정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집권 공산당인 인민민주당 내부에서 분열과 권력다툼이 벌어졌고, 정변이 계속해서 일어나 아프간은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소련의 오판으로 소련이 기존 공산정권 지도자를 암살한 뒤 괴뢰 정권을 세우고 소련군의 대대적인 침공이 벌어지자 무자헤딘들은 총구를 소련군으로 돌리며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했다.
아프간과의 전쟁으로 국제적으로 욕만 잔뜩 먹고 내부 사정도 어려워진 소련이 물러나고 이후 전쟁은 친소 공산정권의 정부군과 무자헤딘 간의 내전으로 양상이 바뀌었다가 결국 민심을 잃고 이후 소련 붕괴로 지원도 끊긴 친소 무하마드 나지불라 정권의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이 붕괴하고 무자헤딘 정권이 세워지자 무자헤딘을 지원하던 미국은 당연히 가치가 없어진 아프간에서 떠나버렸다. 그리고 정권을 잡은 무자헤딘들은 대부분의 신생 독립국가나 거대 지배 세력이 망한 뒤 군소 집단들이 남은 지역이 대개 그렇듯이 국가의 주도권을 놓고 여러 군벌과 파벌로 분열하여 자기들끼리 내전을 벌였고, 그 혼란 속에 무자헤딘 정권에 실망한 아프간 사람들과 친파키스탄 괴뢰국을 세우려는 파키스탄의 지원[245]을 바탕으로 세력을 키우던 탈레반이 영토를 빠르게 먹기 시작했다. 서로 분열해서 싸우느라 약화될 대로 약화된 무자헤딘들은 차례차례 탈레반에게 패했다. 결국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이라는 막장 국가를 수립하고 만다. 그나마 아흐마드 샤 마수드가 얼마 남지 않은 무자헤딘 세력들을 겨우 통합해 북부동맹을 결성하여 탈레반에 맞섰지만 이미 국토의 ¾가 탈레반에 넘어간 상태라 물량에서 열세여도 너무 열세였다. 결국 무자헤딘 동맹은 수도인 카불을 내주고 북부로 쫓겨나고, 탈레반은 극단적 율법을 적용해 온갖 폭정과 깽판을 저지르며 아프간을 인권, 문화, 경제 등 모든 방면에서 중세 이전으로 완벽하게 후퇴시켰다.
그나마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후 탈레반이 성공적으로 박멸되나 싶었지만…부시가 '대량살상무기'를 명분으로 이라크를 침공한 틈을 타 파키스탄으로 튀어 힘을 기른후 다시 아프간에서 기승을 부렸다. 미국도 쓸데없이 후세인을 제거했다가 돈만 날려 이전과 달리 탈레반을 격퇴할 여력이 없다. 현재 수도인 카불과 그 인근지역을 제외하면 탈레반이 날뛰고 있는 상황. 그리고 아프간 신정부 역시 부패한데다 여성 인권을 극히 억압하는 등, 수구적인 면모가 유사했다. 거기에다 최근에는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 역시 끼어들어 탈레반과 서로 지하드를 선포하고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으니 왕정시절의 평화를 되찾는 건 머나먼 나라 이야기로 보인다. 하여간 아시아에서 제일 깨끗한 나라에서 극단주의자들이 날뛰는 바람 잘 날 없는 흡사 춘추전국시대급의 헬게이트로 추락한 사례.
결국 2021년 8월 15일 마침내 수도 카불마저 함락되고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탈레반에 항복하면서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은 멸망하면서 21세기에 멸망한 국가 사례에 또 예시가 추가되었다.[246]
2.10.1.4. 바트주의 시리아★◆
바트주의 시리아 시절의 국기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내전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혼란한 이웃 이방인 세력들의 대출현[247] |
내부 혼란 |
봉기 혁명 |
지도층 불안정 |
막장인 지도자 지도자 이탈 및 이반 |
부패와 양극화 | 총체적 부패[248] |
국론 불균형 |
극단주의
세력들의
준동 국론의 관리 실패 |
군사력 불안정 | 국방력 대붕괴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 |
특정 집단 소외 |
다문화 정책 실패 통합적인 지방 관리의 실패 일부 집단을 심각하게 탄압 |
공황 | 국가 경제의 파탄 |
재정 문제 | 국고 고갈 |
자연 환경 문제 | 장기적인 환경 악화 |
결과 | |
멸망 |
국치(유린) 소요(쿠테타, 봉기, 분리독립) |
2024년 시리아 반군 공세 참조. 러시아, 헤즈볼라, 이란의 지원이 감소하자, 아프가니스탄이 탈레반에 무너질 때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무너졌다.
2.10.2. 유럽 및 러시아 주변
2.10.2.1.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의 국기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내전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역량을 초월한 총력전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패전해 정복을 겪음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이방인
세력들의
대출현 너무 강성해진 이웃 |
내부 혼란 | 정변 |
부패와 양극화 | 피지배층 부패 |
지도층 불안정 | 국가원수의 잦은 교체[249] |
국론 불균형 |
극단주의 세력의 집권 문민통제 실패 국론의 관리 실패[250] |
군사력 불안정 | 극단적인 징병[251]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 |
특정 집단 소외 | 통합적인 지방 관리의 실패 |
인문 환경 문제 |
지배층의 지나친 특정 종교 심취 독립 이념의 물질적·정치적 타락 |
결과 | |
멸망 | 국치(유린, 합병) |
옐친의 뻘짓으로 과거의 영광을 잃고 허약해진 러시아에서 독립을 선포,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서방 국가들의 지지를 얻었으나, 이슬람주의 정책과 베슬란 학교 인질사건, 체첸클리어 등의 잔혹한 사건으로 전 세계의 지지를 잃고, 자국민이 무참히 살해당한 것에 극대노한 블라디미르 푸틴 정부에 멸망당하고 만다.
2.10.2.2. 아르차흐 공화국☆🎎
아르차흐 공화국의 국기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소모전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패전해 정복을 겪음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강해진 이웃 |
국론 불균형 | 극단주의 세력의 준동 |
군사력 불안정 | 국방력 대붕괴 |
특정 집단 소외 | 다문화 정책 실패 |
결과 | |
멸망 | 국치( 아제르바이잔에 합병) |
원래 아제르바이잔을 동네북처럼 두들겨 팼던 본국 아르메니아는, 세르지 사르키샨 등의 아르차흐 출신 정치인의 오락가락하는 외교 정책으로 내륙국, 그것도 적국인 아제르바이잔에 둘러싸여있는 내륙국인 주제에 온 사방에 적을 알아서 만들었고[252], 결국 아제르바이잔에게 연달아 패배하여 2023년 멸망하고 말았다.
2.10.3. 아프리카 및 기타
2.10.3.1.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의 국기 |
<colbgcolor=#fafafa,#26282c><colcolor=#000,#e5e5e5> 원인 | |
전쟁 |
건드리지 말았어야했다 내전 외세가 무력으로 제압 |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
너무
혼란한
이웃들 이방인 세력들의 대출현 |
내부 혼란 | 정변 |
부패와 양극화 | 지도층에서 만연한 부패 |
지도층 불안정 | 막장인 지도자 |
내정 문제 | 개혁 실패 |
자연 환경 문제 | 장기적인 환경 악화 |
결과 | |
멸망 | 국치(병합), 신정부 설립 |
3. 관련 문서
[1]
수나라가 연이어서 큰 손실을 입었으나 고구려도 수나라와의 계속적인 전쟁으로 사정이 말이 아니었기에 결국엔 수나라에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했다. 뭐 얼마 안 있다 수나라가 엎어졌지만…
[2]
왕위 계승을 둘러싼 다툼과 귀족들의 권력 암투
[3]
권신들이 두 파벌로 나뉘어 국정 병탄 및 두 계파 간 분쟁
[4]
상시 총동원으로 인한 피로
[5]
고구려 영향력 휘하의 거란족들이 당나라 쪽으로 대거 탈주
[6]
백-당 외교 실패
[7]
빈번하게 발호하는 정쟁, 왕권 암투
[8]
중앙과 지방의 대립
[9]
말년 의자왕의 부패와 타락에 대해서는 전쟁의 정당성과 명분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던 신라와 당에 의해 부정적인 방향으로 편중된 기록이 아니냐는 주장도 존재한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
[10]
정확히 말해 '의자왕의 중앙정부'에 신경쓰지 않은것에 가깝다. 풍왕 이전에도 각지에서 백제부흥운동이 진행되고 있었고 풍왕 즉위로 각지에서 난립하던 백제부흥운동 세력은 얼추 결집하여 순식간에 200여개나 되는 성을 탈환했다는 것을 보면 아무리 그래도 백제 지방세력이 백제라는 나라 자체를 버렸다고 보긴 어렵다.
[11]
물론 신라에 대한 공세는 멀리 보면 성왕 말기부터 해왔던 일이라 딱히 이상할건 없지만 문제는 의자왕 시절부터 당이 파트너로 신라를 골랐다는 것. 근데 이건 의자왕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게 의자왕 자신은 당에 딱히 신뢰를 주진 못했다. 반면 신라는 살아남기 위해선 뭔짓거리라도 해야 했기에 당의 마음을 사기 위해 온갖 행동을 해서 당 입장에서는 신라가 더 믿음직스러워 동맹을 맺었다고 볼 수 있다.
[12]
중국과 일본을 구슬려서 고려를 타파하려했지만 중국은 오대십국시대였고, 일본은 율령제가 무너져내려 다 자기 코가 석자인 상황이었다.
[13]
실제로는 놀았던 게 아니라 신라를 구해달라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가 당했다는 설도 있다. 경애왕의 구국을 위한 행적 등 여러 정황상 일단 이게 좀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14]
정확히는
자살을 강요하였다.
[15]
아이러니 하게도 백제와 후백제의 멸망을 결정 지은 곳도 모두
황산벌이다.
[16]
이때
견신검을 꼬드겨 난을 주도했던
능환은 처형이 되었고
견신검은 난을 일으킨 것도 남의 협박으로 그리한 것이라 참작을 받아 벼슬을 하사 받았다고 기록이 되었으나, 혹은 몇년 뒤에
견양검과
견용검이 처형당할 때 함께 죽었다고도 각주가 붙어서 확실하지는 않다.
[17]
중앙집권의 약화에 의한 세수 감소 및 국력 약화
[18]
실제로
혜공왕 이후부터
경문왕 이전까지는 신라의 왕 계표를 보면 잘 봐줘야 5~10년 간격으로 왕이 휙휙 자주 바뀌어버렸던 것도 잘 알 수 있다. 그 중 몇몇은
요절한 경우도 있지만, 왕위 쟁탈전과
쿠데타에 의해 희생된 왕들도 상당히 많다. 그나마 이런 와중에도
원성왕,
흥덕왕 같은
명군이자
성군들도 나타나기는 했지만, 문제는 이들도 소수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19]
신라의 영토 확장은
탈해 이사금 때 장군
거도가
거칠산국과
우시산국을 복속시킨 것이 처음이었다.
[20]
물론, 진골들은 그 대가를 신라 멸망 후 제대로 치렀다. 골품제라는 절대 깨질 수 없는 벽을 이미 잘 알고 있던 그 아래
6두품들은 진작에
고려에 넘어갔다. 결국 결과적으로 진골들은 늦게 편입됐고, 6두품들은 일찍 편입된 것이니 누가 더 우대를 받았는지 알만 하다.
[21]
실제로는 놀았던 게 아니라 신라를 구해달라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가 당했다는 설도 있다. 경애왕의 구국을 위한 행적 등 여러 정황상 일단 이게 좀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22]
정확히는
자살을 강요하였다.
[23]
사실 그런 까닭도 있고,
공산 전투를 실행하기 위해 일부러 살려둔 것도 있다. 만일 왕건이 신라의 구원군을 보내기 전이나 구원군이 오는 도중에 숨통을 끊어버렸으면 고려군은 말머리를
완산주로 돌려 공격해왔을 것이니 고려를 멸망시키기 전까지 적당히 살려두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24]
이것 때문에 견훤은
동탁에 빗대어 비판을 받았다. 동탁이 힘으로
소제를 폐위하고
헌제를 세운 것과 비슷한 꼴이 됐으니 말이다.
[25]
이 부분
고려 입장에서도 천만다행이었는데, 고려도
후백제의 사례를 생각해보면 한반도 호족들 사이에서 상징성이 크던 천년 신라 왕실을 선뜻 군사적으로 멸망시키기는 부담이 있었기 때문. 이렇게 평화적으로 해결이 되면서 신라 왕족들과 6두품들은 고려 초기 혼란기를 거친 이후, 고려의 지배 계층으로 편입된다.
[26]
정확히는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었다.
[27]
정복을 당함=국가 멸망 공식이 동아시아 역사에선 지루하게 이어진 클리셰인지라 개념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유목민족 특유의 관습과 몽골 제국의 정치구조 덕분에(?) 정복은 당했을지언정 국가가 멸망하진 않았다. 둘은 엄연히 다른 개념인 것.
[28]
간신의 난립으로 인한 황권 약화
[29]
무리한 토목공사
[30]
아방궁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긴하다.
[31]
얼마나 법이 엄했냐면, 공사장 같은 곳에 조금 늦기만 해도
참수였다. 다만 이건 해석을 달리 할 여지가 있는 게 진나라 원래 지역은 웬만해서는 공사장 등에 늦게 도착할 이유가 적은 곳이었다. 문제는 이게 비가 자주 오는 초나라 같은 곳에도 적용하다 보니 문제가 생긴 것이다. 법도 지역에 맞게 적용해야 하는데 이를 무시하다보니 뭐…
[32]
허나 신나라와 달리 진나라는 그 이전에 서주시절부터 존속해온 국가로서 수백년에 걸쳐 본토격인 함양 등 최소한 함곡관 서쪽에서는 진나라의 지배가 확고하게 굳어 있었기에 잘만하면 나라 자체가 망하는 건 피하고 전국시대 수준의 강역으로 후퇴하는 수준에서 머물수도 있었겠지만 진시황, 이세황제의 실책으로 그냥 나라 자체를 말아먹었다.
[33]
과거제가 만들어지기 전 시대라는 걸 감안해도 영제는 대놓고 '삼공은 1천, 태수는 2천, 현령은 4백' 운운하며 화려하게 팔아제꼈고, 그나마 국고에 넣었으니 참작이 되겠나 싶지만 애초에 영제는 국고를 채우려 한 게 아니었다. 이러하니 돈은 많고 자질은 없는 작자들이 돈을 들인 만큼 백성들을 쥐어짰다.
[34]
동귀비와 복황후의 사례를 보면 조조가 얼마나 헌제를 우습게 여겼는지를 알 수 있다.
[35]
채모와 조조는 친분이 엄청났다. 이 때문에 채모는 유표와 함께 조조를 건드리지 못하게 막았다.
[36]
잘못된 통념이고, 실제로는 조조군의 배후인 여남에서 유격전 중이던 유벽, 공도에 호응하고자 후방으로 파견나갔다. 그런데 원소군이 관도에서 대패하고 연락이 끊기자, 안 그래도 유비의 명분만 이용할 생각이었던 원소에게 더 기대할 것도 없겠다, 조조에게 패배한 후 그대로 원소의 동맹인 유표의 객장이 된다.
[37]
위왕이란 것도 결국엔 헌제를 협박해 얻은 것이다.
[38]
섬서성 일대의 염화
[39]
그 개막장
손호도 5,000명이었다. 웃긴 건 사마염이 오나라를 먹어치운 후 손호의 5천 궁녀도 덤으로 먹어치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반은 원래 있었던 이들이고, 반은 흡수한 이들이었다.
[40]
이건 양반인 게
양수라는 사람은 아예 국가 관청에 강제로 사채를 씌웠다.
[41]
조위 시절
죽림칠현으로 대표되는 허무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담론이었으나, 과시욕과 결합되면서 오히려 청담을 위해 사치를 일삼는 모순이 생겨났다.
[42]
농민이 귀족들에게 의식주를 의존하는 것으로, 맘만 먹으면 농민이 귀족의 곁을 떠날 수는 있었으나, 그 곁을 떠나기 위해서는 그동안의 의식주 비용을 몽땅 귀족들에게 지불해야 했다.
[43]
다른 것은 몰라도 말엽에 황태자 사마휼을 죽인게 최대의 실수였다. 가남풍이 패악질을 많이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명분이 되지 않아 움직이지 않던 사마씨 황족들이 이 사건 하나에 우르르 들고 일어났다.
[44]
전진이 지배하던 화북이 4개로 분열
[45]
장렬하다의 그 장렬이다.
[46]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을 직접 공략하기 위해서 보낸 30만 5천명의 별동대가 2700명만 남고 모두 몰살당했으며 이들을 보급하고 지원하기 위해서 가져간 수많은 물자와 설비 또한 모두 잃어버려 없어졌다.
[47]
수 양제 치세의 백성들은 메뚜기 떼나 지진, 태풍과 같은 천재지변보다도 양광의 놀이를 더더욱 두려워하였는데, 야사에 의하면 양광이 지나간 자리에는 오로지 해골 무더기만 남았다고 한다.
[48]
대운하를 만드느라 무리한 토목 공사 자행
[49]
지력 소모+
소빙하기
[50]
아울러 인성은 막장이 아닐 지언정 대신들과 황제들(
송휘종,
송흠종,
송이종)의 상상을 초월할 수준의 행정 및 외교 병크들도 국가를 막장화하는데 지대한 기여를 했다.
[51]
군벌에 대한 의도적인 배척 및 전장의 충신을 의심함
[52]
특권층의 무리한 권력/재력 개혁
[53]
첫 번째 금나라 때는
방랍의 난이라는 초대형 사건이 터졌다는 불운도 있었다.
[54]
참고로 회수가 없는 이유는 몽골은 거기 뚫기 힘드니까 일단 무시하고 형주부터 친 거다…
[55]
김용의 소설
신조협려는 이런 진짜 명장을 푸대접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탐관오리로 만들었다…..
[56]
전투에서 패배한 장세걸은 폭풍이 몰아치자 하늘에 대송이 망할 게 할 것이면 이 배를 몽땅 다 가라앉혀 다 죽게 해달라고 했는데 그의 말대로 결국 패잔 함대마저 폭풍에 몽땅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 생존자가 없지는 않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명태조의 외할아버지였다.
[57]
남송 이전 있던 왕조인 후주의 시씨 일족 역시 남송과 그 운명을 같이 했다.
[58]
양도전쟁
[59]
25년 동안 9명의 황제가 연달아 즉위
[60]
몽골인 특권층의 중국화
[61]
세금 징수 불가능으로 인한
[62]
중국 역사상 손에 꼽는 황하의 범람
[63]
여기에 포함되는 게 바로
고려다. 원나라도 고려의 내정에 간섭을 했을 뿐이지 직접적인 행정력을 행사하지 못한 것과 같다. 그리고 그 고려는 원나라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오면 "하겠다." 고 답하고는 그냥 생깠다.(…) 향후 한국사에서 이 시기를 '
원 간섭기'라 하지 '원 강점기'라고는 안하는 이유 중 하나도 이것.
[64]
그런 이유로 의외로 한족 유학자 중에서도 원나라에 끝까지 충성하고 심지어 북원이 대도(베이징)을 버리고 몽골 초원으로 밀려날 때에도 끝까지 따라간 한족 관료들이 꽤 있다. 원조정이 한족을 중앙 정계에서 차별한건 사실이지만 사실 한족 향촌 유력자들 입장에서는 원나라 때가 좋은 시절이기도 했었던 것이다.
[65]
참고로 고려인은 3번째 계급인 한인에 속했었다.
[66]
다만,
원나라가 세워진 지 200년도 채 못되어 멸망한 탓에
중국 땅에 그대로 남은 이들을 제외하고는
몽골인들이
한족에 동화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똑같이
한족이 세운 나라를 정복해서 다스렸던
만주족이 민족 정체성이 거의 말살되어버린 것을 보면, 이들에게는
전화위복인 셈이다.
[67]
그러나 이후에도 북원은 여러 차례 중원을 쳐들어갔으며,
일부는 성공했다.
[68]
청의 위협과 이에 맞서 싸울 명장을 사형시키는 대병크를 저질렀다.
[69]
유민의 난립으로 붕괴
[70]
4대 건국 동맹중 하나인 파제흐 부족의 산하 세력 안리사 부족이 한족과 동화되어 청을 도와줌
[71]
한족에 우호적인 부족들과의 갈등과 충돌
[72]
잇다른 패전이 초래한 영토 축소와 인구 감소로 인한
[73]
물론 황족은 제외고, 상당수의 사람들은 아직도 자신이 만주족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긴하다.
[74]
그런데 대영제국은 청과의 무역을 하는데 문제는
더러운 교역품을 청나라에 수출했다는 게 크게 문제가 되었다.
[75]
사실 이렇게 된 이유는 일본이 당시 주변국들에 비해 세계 정세를 제대로 알고 상황 판단을 잘했기 때문이다. 전국시대에도 포르투갈인들이 가져온 조총의 위력을 알고 거금의 돈을 통해 조총을 구매한 뒤 조총 사용법을 알기 위해 심지어 일본인 장인이 자신의 딸을 바쳐 조총 사용법을 알아냈을 정도로 세계 정세를 보는 안목이 어느 정도는 있었다.
[76]
참고로 조선에 영향권을 미치게 하기 위해 가로채려 한 것이다. 위에 조선을 청으로부터 뺏는다는 말을 조선이 청의 영토라서 가로채려고 한다는 식으로 오해하지 말자.
[77]
이미 청은 그 당시 독일 제국도 발주하지 않았던 최신예 함선을 쇼미더머니 갈겨서 발주해 실전 배치했는데, 어느
미친 황태후께서 1년 예산의 30%인 은 3천만냥을
이화원을 복구하는 데에 써버리고 군 유지비도 제대로 안 줬다(…). 백성의 귀중한 피땀을 건물 짓는데 낭비하고 군의 정예화와 증강에 등한시한 것과 무능한 지휘부의 삽질과 합쳐져, 국력상 이겨야 마땅한 일본에까지 패배하는 결과를 낳은 것(…)
[78]
비슷하게 영토와 인구가 많았던
무굴 제국은 중앙집권이 되어 있지 않고 종교와 민족으로 대립이 심했던, 중앙집권 국가라기 보단 사실상 라자들과 같은 토후들이나 군벌들의 연합체에 가까웠기에 영국이 종교, 민족, 카스트, 지방군주와 군벌들만 잘 이용하면 지배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중국은 약 2000년간 중앙집권이 이뤄진 나라였고, 소수민족들조차 동군연합이었던 청나라를 지지했다.
[79]
신해혁명은 사실상 2133년간 이어져온 중국의 전제군주제를 끝냈다. 그러기에 2133년간 존재한 중국이란 군주국을 무너뜨렸다고 봐도 된다.
[80]
티에우찌 황제의 유언이 모든 외국인을 사형에 처하라였다. 아버지의 유언을 충실히 이행한
뜨득 황제는 베트남 내 유럽인들을 싸그리 잔인하게 잡아 죽이는 등 유럽의 간섭을 받기 좋은 일만 골라서 저지르고야 말았다.
[81]
이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게 응우옌 왕조의 창업군주인 자롱 황제에 대한 평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응우옌 왕조의 이런 추한 면의 근원을 이 사람에게서 찾는 편이며 따라서 평가도 박하고 대우도 박하다. 심지어 동시대에는 응우옌반후에라는 후세에 추앙받는 라이벌에 그 라이벌이 이룬걸 다 무너뜨린게 자롱 황제라 평이 더 박하다.
[82]
마케도니아와의 전쟁에서 너무도 어이없게 연패해서 무능하다는 인식이 강하게 박혔지만, 정말로 무능한 군주는 아니었다. 다리우스가 채용한 대그리스 전술과 포진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문제는 적장이 범인의 상식 따윈 씹어먹어버린 희대의 명장이었다는 것.
[83]
이 체급 차이가 어느 정도냐면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 중 바빌론을 제외한 수사와 페르세폴리스에서 털어낸 재화가 당대 그리스에서 가장 부유한 아테네의 수백년치 재정에 해당했다. 아테네가 기를 쓰고 모아도 못모을 재화가 아케메네스 왕조에서는 수도쯤 되면 그정도 재화는 가지고 있을 정도로 부유했다는 것.
[84]
다리우스 3세가 등장하기 직전 페르시아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죽음 직후 환관 바고아스가 권력을 휘두르고 꼭두각시 황제들을 세우고 있었다. 이 바고아스를 축출하고 황권을 재강화한 인물이 바로 다리우스 3세다.
[85]
몽골-호라즘 전쟁으로 국토가 초토화되었으며 일부 지역은 복구를 못하고 영구 폐허로 남아있다.
[86]
이러한 호라즘 제국의 멸망은 비단 호라즘 하나로 끝나지 않았는데 호라즘 정벌 도중 제베와 수부타이가 귀환 과정에서 캅카스 일대 국가들, 킵차크족, 루스 공국들과도 상대하면서 이들도 피해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루스 공국들은 이 때 입은 피해로 10여년뒤 다시 온 몽골의 침공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다.
[87]
잦은 내전이 유발한 기근
[88]
시아파 국가였던 사파비 제국은
수니파들을 가혹하게 폭압했다.
[89]
실제로 사파비보다 국력이 약한
맘루크 왕조의 이집트는 멸망했다.
[90]
물론 그래봤자 조금 더 목숨을 연장하는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미 나디르 샤가 독자적으로 황제를 선포할 야심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스만을 침공하며 자신을 폐위할 명분을 스스로 갖다바친 타흐마스프 2세의 실책은 명백히 지탄받을 만하다.
[91]
심지어 수니파 신도들의 무덤까지 파괴했다. 그래서 오스만 황제인
바예지트 2세가 지나치다며 사파비에 항의서신을 보내고 우려할 정도였다.
[92]
황족들 간 제위계승전쟁
[93]
무리한 확장으로 인한
[94]
나디르 샤에게 바닥까지 싸그리 약탈당했다.
[95]
다만
하이데라바드나
벵골 등 상당수의 지방들은 형식적인 충성을 유지했다. 말기의
신라나
동주와 비슷한 느낌.
[96]
물론
플라시 전투에서 무굴 군대를 꺾고 일부 전투가 있긴 하지만 무굴 제국은 그 이전에도 착실하게 망해가고 있었다.
[97]
마케도니아에게는 정복만 되었지 멸망하지는 않았고 로마와의 전쟁으로 인한 소멸도 정확히는 나비스 4세 사후 로마의 지원을 받은 아카이아 연맹에 의해 멸망한 것이다.
[98]
로마 제국에 편입했어도 어찌저찌 정체성과 명맥을 이어나갔으나, 서고트 왕국의 군주 알라리크가 완전히 숨통을 끊었다.
[99]
전 국민이 사실상 군인
[100]
그래서인지 플라톤은 허약한 아이를 국가 차원에서 대신가 기르는 건 낭비라고 생각했다. 다만 이건 플라톤 개인의 생각만은 아닌지 아리스토텔레스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101]
금화를 쇠로 교체하였다. 부정축재 개혁과 더불어 검소함을 중시하기 위해서인데, 취지야 좋지만 다른 폴리스들은 희소성이 있는 금화를 사용했으니(애초에 변하지 않으면서 귀한 쇠붙이가 화폐가 되는 법인데 스파르타는 역행했다.) 도대체 어떤 정신나간 사람이 금화를 쇠로 교환하겠는가…그나마 멀쩡한 쇠라면 쓸데라도 있지 그 쇠마저도 식초에 담가 녹슬게 만든 쇠였다.
[102]
이게 심해도 그냥 심한 수준이 아니라 원래부터 생산량의 반을 납부해야 하는 데다가, 새로운 농법을 전수받은 헤일로타이들은 반란을 일으켰다고 죽였기 때문이다. 이러니 생산량이 절대 늘어날 리가 없다.
[103]
스파르타는 외국인에 대한 배타심이 굉장히 강해 외부 이민이 들어오지 않았다.
[104]
참고로 나중에 스파르타랑 크게 붙게 되는 테베의 군사들 중 특수부대라고 불리는
신성부대의 규모가 수백 명 정도 되었다.
[105]
그나마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스파르타는 어떻게든 군대는 꾸렸는데 완전시민들의 숫자가 준 반면 제2계급격인 이들이 주 전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헤일로타이처럼 스파르타에 증오심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전력으로 써먹을만 하긴 했다고 할 수 있다.
[106]
그러나 선군정치보다도 심한데 선군정치 하에서는 적어도 생산증가를 억제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장려한다. 그럼에도 실패하는 것이 선군정치의 구조적인 문제점과 그걸 행하는 집단의 잘못된 정책 때문이지 결코 생산증가를 억제하진 않는다. 그나마 북한 정도가 자율적인 면에서의 통제나 외부와의 교류가 단단히 막히긴 했는데 적어도 여기는 스파르타와는 달리 경제성장을 통해 생산을 늘리려는 시도는 한다. 물론 전부 시도만 하는 것이라는 결과로 돌아올 뿐이지만.
[107]
사실 테베도 코린트, 아테네와 동맹을 맺고 스파르타랑 한판 붙으려고 했는데, 이는 스파르타가 펠레폰네소스 전쟁에서 이겨 패권국이 되자 기존의 동맹국마저 차별하였기 때문. 아테네야 스파르타의 경쟁국이자 라이벌이었지만, 테베, 코린트는 오히려 스파르타의 동맹국이었다.
[108]
사치에 빠져 땅까지 팔아제끼는 사태가 벌어져 토지가 몇몇 대가문에 집중되었다.
[109]
사실 복고적이라는 시점에서 이미 실패가 예정되어 있었다. 과거 만들어진 자신들의 체제가 시대에 맞지 않아 몰락한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시계를 거꾸로 돌려서 과거로 돌아가려 했으니 성공할 수가 없었다.
[110]
원래 스파르타에서 군인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은 유산자뿐인데, 이들이 몰락하면서 귀족들에 의해 토지가 과점화되며 스파르타는 더더욱 약체화되었다.
[111]
멸망 후 여러 게르만족들이 영토들을 갈갈이 뜯어갔다
[112]
자중지란을 벌이다가 이민족을 막지 못하고 무너진 경우가 너무 많았다
[113]
스틸리코 휘하의 정예병들 대거 이반
[114]
당초 보면
로마가 속한
이탈리아 반도가 서로마 제국에 속한 것을 보면 로마는 서쪽에서 시작했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115]
제국의 정치,행정의 중심지 수도
로마가 서부에 있었던 데다가 로마제국의 통합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 1세의 기반이 서부였던것만 봐도 이때까지는 아직까지 서로마 지역이 강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16]
현대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를 공략했던 때까지의 시간보다 그때부터
쿠푸왕이 대
피라미드를 건설했던 때의 시간이 더 길다. 게다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시작 시점은 쿠푸 왕의 제4왕조로부터 또 2000년 가까이 과거에 시작되었다.
[117]
이 시기도 마냥 쇠퇴만을 거듭한 시대는 아니었다. 정치체의 연쇄적 붕괴로 문자 기록이 뜸해졌을 뿐, 교역 네트워크의 붕괴로 인해 청동 수급이 어려워진 결과 야금술이 크게 발전했고, 궁중 지원이 필수적이었던 서기 집단 유지가 어려워지며 보다 편하게 쓸 수 있는 선형 문자가 쐐기 문자를 대체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준 시대이다. 오히려 정치적 구심점이 붕괴하지 않은 아시리아나 바빌로니아 지역이 아나톨리아, 시리아 지역에 비해 변화가 느려 특정 부분에서 점차 뒤처지게 된 부분도 생겼다.
[118]
단 이들이 정작 로마가 가지는 상징성을 무시한 것은 후에 패인이 되기도 했다.
[119]
이건 그 당시 망해가던 서로마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침략해오는
야만족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포섭할 수 있는 부족은 포섭해서 아군으로 끌어들여야 했기 때문에. 몇년 뒤 단돈 4000파운드에 강력한 우방을 얻을 수 있었던 기회를 날려버린
호노리우스는
그 혹독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120]
토착 로마인 병사들에게 억압받은 야만족 출신
로마군들이 스틸리코가 죽은 이후 토착민들에게 가족이 학살당한 일에 대해 분노해서 알라리크에게 투항했다는 견해도 있다.
[121]
그 당시
서로마 제국의 수도는
라벤나 였기 때문에 황제와 중앙 정부조직은 무사했다. 그가 라벤나에서
닭 치다가 불탄게 "
병아리" 로마가 아니라 수도 로마여서 다행이라는 했던
개소리는 유명하다(….)
[122]
훈족이 서로마로 쳐들어오게 된 경위도 답이 없는데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이
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가 자신하고 결혼하면 서로마 영토 절반을 주겠다는 편지를 황제허락없이 몰래
아틸라에게 보냈다고 한다. 당연히 서로마 고관들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떨어진 꼴
[123]
잇다른 외교·종교 실책으로 서방의 십자군 국가들을 적으로 돌려버림
[124]
너무 애매한 황위 계승 법칙으로 인한 내전들과 종교 분열 사태들
[125]
동서 분할로 로마 제국이 사실상 멸망하고 서로마와 동로마로 나뉘어 다른 나라가 되었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오해하지 말자. 동서 분할은 사실상 통치 지역만을 나눈 것이다. 로마는 한 대제국으로써 건재했다. 단지 동서 분할은 기존의 로마 제국의 영토를 한 사람이 지배하는 체제가 아니라, 두 명의 지도자가 각각 서로마와 동로마로 나누어 지배를 하는 체제로 바꾼 것이다.
[126]
분단국가인
한국의 사례를
로마의 동서 분열에 그대로 대입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한반도의 남북이
같은 민족이라는 공감대가 있긴 해도 별개의 국명을 사용하고, 서로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동서 로마 분열은 당대에는 단지 행정구역을 나눠서 통치하는 것 정도로 이해되었고, 로마 제국이라는 국명을 공유했으며, 무엇보다도
서로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의 전쟁까지 한 남북한과는 달리
반달족에게 빼앗긴
아프리카 속주를 되찾기 위해
공동으로 군사 작전까지 수행했다.
[127]
다만
율리우스 네포스의 달마티아 속령과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지역의 서로마의 잔존세력인
수아송 왕국 등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동로마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은
율리우스 네포스를 마지막 서로마 황제로 보기도 한다.
[128]
이 때 동로마의
국력이 어느 정도였나면 서방 왕국 (
프랑크 왕국,
동고트 왕국,
서고트 왕국 등)들의 경제력을 몽땅다 합쳐도 동로마 제국의 경제력의 3분의 2도 안되었다고 한다.
[129]
그러나
라벤나 총독부 자체는 이미 이탈리아 북중부 대부분이
랑고바르드족에게 점령당한지 오래인
751년까지 건재했고
칼라브리아와 아풀리아 일대의 이탈리아 남부지방은
11세기까지 로마 제국이 움켜쥐고 있다가
제1차 십자군 원정 직전에 이르러서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뜯기게 된다.
[130]
아나톨리아가 사산의 대군에게 유린당하던 중에 소수 정예부대만 이끌고 이란의 심장부인
크테시폰을 습격했다.
[131]
테오도시우스 성벽으로 불리는 3중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그 당시 정공법으로는 함락이 거의 불가능했다. 천년동안 무려 20차례의 공성전이 벌어졌지만 그때마다 쳐들어온 야만족이나 이란군, 아랍 전사들, 십자군 기사들, 오스만 예니체리 등을 성벽 아래의 흙으로 모조리 갈아버렸을 정도면 그 견고함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정도. 성벽을 넘는데 성공했던 4차 십자군들은 취약부위인 금각만을 통해 몰래 들어온 덕분에 성공한 케이스이고 (거기에 동로마는 내전으로 혼란스러웠던 상황인데다가)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군의 경우도 수비대가 기습하러 나왔다가 정신없어서 쪽문을 안닫은 덕분에(….) 밀고 들어가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132]
다만 완전한 로마세력의 소멸은 아니고 4차 십자군 이후 분열된 세 후신국 중 하나인
트라페준타 제국이
1461년까지 존속했고,마지막 로마의 잔존세력인 이피로스 공국이 1479년까지 남아있었다.
[133]
다만
신성 로마 제국은 동로마가 건재하던 때에 세워진 나라라서 정당성이 빈약하다.
교황이 서로마 황제위를 내려준 것을 이용해
서로마 제국의 계승을 자칭했지만, 애초에 교황에게 황제를 추대할
법적 근거가 없고 이미 동방에
로마 제국이 버젓히 남아 있는데다 신성 로마 제국이 계승을 자칭한 서로마 황제위의 실질적인 권한도
동로마 제국에게 있었던지라….. 실제로
카롤루스 대제가 서로마 황제로 추대되자 이에 동로마 제국은 프랑크 왕국과
베네치아의 지배권을 두고 한바탕 크게 치고 받았다. 나중에는 양쪽다 일이 생겨서(동로마는 불가르족의 침입, 프랑크는 왕자의 전사) 결국 화해하게 되지만.
[134]
오스만은 자신들이 진정한 로마의 후신이며 타 제국들은 짭이라고 무시했다.
[135]
귀족들의 국정 병탄과 땅에 떨어진 국왕의 권위
[136]
중앙과 지방의 대립
[137]
무리한 권력·재력 강화 시전
[138]
단순히 예스맨이어서 뽑은 것은 아니고 울라슬로 2세는 전전 왕
라슬로 5세의 외조카이자 전전전 왕
울라슬로 1세의 조카였다.
[139]
1570년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가
성 이슈트반 왕관을
막시밀리안 2세에게 넘겨주면서
에르데이 공국이 된다.
[140]
'리소브지치'(Lisowczycy)라는 용병대를 투입시켜 가톨릭 편으로 간접 개입
[141]
전시중 제때 급료를 지급받지 못함 + 식량과 장비까지 제대로 못 받음이 초래한 군대의 도적화
[142]
역량을 한참 초월한 장기전이 초래한
[143]
사실 신성 로마 제국이란 이름 자체도 문제가 있긴 하다.
카롤루스 대제가 교황청에 의해
서로마 황제로써
대관식을 했을 당시에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지만,
둘로 나뉜 로마 제국의 다른 반쪽은 살아있었다. 당시에 사람들도 동로마 제국을 보고
로마 제국이라 하고 제국의 시민들을
로마인들이라 불렀다. 그런데 카롤루스 대제가 갑자기
교황에 의해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써 대관을 하면서 로마 제국의 황제는 사실상 2명이 되었고, 실제로도 당시 동로마 제국은 교황청이 세운 신성 로마 제국을 로마 제국으로써 인정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고 서로 싸우기까지 했다.
[144]
물론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선거군주제가 유지되고 있어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황제선거에 출마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 5세와 대결하기도 했다.
[145]
다만 이게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가 늘어난 것은 아니다. 단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권 때문에 그렇게 된 것뿐이다.
[146]
신성 로마 제국 내부에서도 개신교(신교)파를 지지하던 영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은 남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만 끼쳤고 그 외의 지역에선 영향력을 거의 행사하지 못했다.
[147]
비단 볼테르뿐만 아니라 훗날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독일의 작가였던
괴테는 "나의 마부가 언쟁을 벌이는 일보다 더 관심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발언도 위의 볼테르의 평과 더불어 신성 로마 제국이 허물뿐인 제국이라 느꼈던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알 수 있다.
[148]
실제로 신성 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후의 중부유럽에 발생한 혼란으로 인해 벌어진 일들이 하나 같이 개판이었던지라 맞는 말이 되었다.
[149]
라인 동맹은 말이 그렇지 사실상 나폴레옹에게 항복하고 괴뢰국이 된 셈이었다.
[150]
참고로 이건
카롤루스 대제가 대관한 기준이고,
오토 대제가 대관한 기준으로 치면 844년이다.
[151]
클랜들과 왕실의 대립
[152]
세계사에선 '불운한 7년(Seven Ill Years)'이라고 가르친다
[153]
잉글랜드의 농업 생산력 잠재력은 매우 좋다. 현재로 서유럽 최고의 농업국가는 프랑스이지만, 영국은 그 프랑스보다 단위면적당 생산량에서 앞선다.
[154]
물론 이에는 여러 악재가 있었다
[155]
학계에서는 미국 독립 전쟁이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는데 좋은 선례가 되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156]
삼국동맹의 핵심 부족 텍스코코의 왕위계승전쟁
[157]
지속적이고 잦은 조공 요구로 인한 대립과 불만의 누적
[158]
장기적 자연 및 환경 재해들이 초래한
[159]
잦은 가뭄과 냉해, 무리한 확장 정책으로 인한 빈번한 국고 고갈
[160]
애초에 메소아메리카 문명권에서 인신공양은 전혀 도덕적으로 문제될 게 없는 보편적 관습이었다.
[161]
물론 그렇다고 스페인을 결코 옹호할 수 없는게, 착취는 아즈텍을 정복한 이후에
콩키스타도르들이 아즈텍보다 더했다. 오히려 아즈텍은 겉무늬만 제국에 가깝지
황제 중심형 중앙집권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도시국가들의 연맹체였기에 공물만 제대로 내면 주변국에 일절 간섭을 하지 않았으나, 스페인령 영지인 엔코미엔다는 콩키스타도르들이 지속적인 황금 및 특산물 채취 목적의 강제 노역은 물론 본인들의 사치를 위한 세금에 성 축조 강제노역, 남미의 다른 지역 정복을 위한 징집까지 시켰다는 점에서 아즈텍 시절 원주민들의 삶이 오히려 좋았다는 게 중론이다. 게다가 아즈텍과 주변국은 그나마 서로 같은 나와틀 문화와 신화적 세계관을 공유하는 부족들이란 공통점이라도 있었지, 스페인은 나와틀 문화 탄압은 물론 원주민들을 아예 야만인 취급하며 그냥 노예로 부렸다고 보면 된다. 그야말로 늑대 무서워서 호랑이 끌어들인 셈.
[162]
신잉카국 시절
[163]
한개 중대 규모의 원정대에 의해 초토화된 왕조
[164]
잉카 자원의 저주는 자원 때문에 외부에게 유린당한 제국민들 뿐만 아니라 자원을 탐낸 콩키스타도르들에게도 이권을 놓고 분열과 유혈 내분을 초래하게 했으니, 진정한 자원의 저주라고 하겠다.
[165]
1441년
[166]
보통 다른 문명들이 강을 끼고 있었는데 반해 마야 문명은 강이 없었다.
[167]
옥수수를 주식으로 삼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옥수수가 지력 소모가 많은 것이 치명타였다. 기후가 좋든가 이런저런 수단을 마련해 지력이 떨어지지 않아야 하는데 소빙기가 닥쳐와 지력 회복도 더뎌지고 식물이 자라기 힘든 환경이 되어 옥수수를 키울 수 없게 되니
설상가상의 정확한 예시라 할 수 있다.
[168]
일제강점기 당시의
일본 제국 정부의 마인드와 동일했다. 그들도 '어차피 조선인들은 우리나라 사람 아니잖아?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막 해도 된다'라는 마인드를 갖고 우리나라를 식민지배 했다.
[169]
아메리카 연합국 항목에도 나와있다시피 남부인들은 흑인들을 사람이 아닌 사람을 닮은 유인원 정도로 간주했기 때문에 흑인들 앞에서 대수롭지 않게 군사기밀사항들을 떠들어대는 짓을 자주 저질렀다. 당연히 흑인들은 그 기밀사항들을 북부에 넘겼고 남부의 패배에 일조하게 되었다.
[170]
러시아 제국과의 2번째 전쟁에서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
[171]
창업 군주를 빼면 전부 함량 미달인 저주받은 국가였다. 그나마 창업 군주도 제 나라를 세우고 영토를 확장하는 능력만 뛰어났을 뿐이고 건국 3년만에 암살당했다.
[172]
지배층의 실정으로 인한
[173]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왕정을 박살내고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아타튀르크는 명백한 반역자다.
[174]
이중에는
이븐 사우드가 지 멋대로 군대를 만들어서 리야드에 녹색 깃발 꽂고 나라를 세웠다. 그 뒤 오스만 제국이 망해가고, 그 사이에
미국과
영국을 등에 업은 이븐 사우드가 아라비아 반도 전체를 통일해
아라비아 반도의 통일 독립 국가가 만들어졌다.
문서 참조
[175]
한국사로 조악하게나마 비유하자면, 조선을 식민지배하고 있는 일본 제국이 태조 이성계의 무덤을 파헤치고 유골을 날려버린 격이다.
[176]
이는 오스만 제국의 지방 총독들한테서 근무평가와 승진, 강등이 결정되는 주된 요소가 군사적 재능과 군공이었기 때문이다.
[177]
1645~1669년: 베네치아와 전쟁 / 1663~1664년: 신성로마제국과 전쟁 / 1672~1676년: 폴란드와 전쟁 / 1676~1681년: 러시아와 전쟁 / 1683~1699년: 이들 모두와 한꺼번에 전쟁.
[178]
튤립 시대에서 해외 문물을 들여올까 하는 시도 역시 있었으나 신품종 해외 튤립에 고위층이 집착하기 시작하면서 완벽하게 말아먹었다.
[179]
17세기와 달랐던 점은, 그때는 성직자와 유력자를 중심으로 지역적으로 일어난 반면 이제는 전 세르비아인, 그리스인이 하나되어 일어났다는 것.
[180]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보통 알려진 깃발은 상선기로 국기에 준하게 쓰였지만 공식적인 국기는 한 장에 묘사되어 있듯 두 국가가 각기 사용하는 오스트리아 제국/헝가리 왕국의 별개의 국기였다.
[181]
레들 대령 사건
[182]
군주 1명의 카리스마로만 유지되던 지도층
[183]
하나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자리에 오른 시기를 기준으로 한 것이고, 하나는
합스부르크 제국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시기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184]
개혁의 성과 자체는 매우 뛰어났다.
블라디미르 레닌을 좌절시킬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나 일찍 암살당해서 허사가 되었다.
[185]
표트르 3세가 아무 조건 없이(배상금이고 영토 획득이고 나발이고) 전쟁 이전으로 되돌려놓는 멍청한 짓거리를 저질렀다. 오죽하면
패러독스 인터랙티브 갤러리에서는 프리드리히 2세를 'tag rus', 즉 치트를 써서 억지로 러시아를 이탈시킨 콘솔충으로 취급하고 있다.
[186]
물론 러시아 제국 해군도 당시 프랑스 해군도 교리상으로는 갖추고 있긴 했지만 실전투입은 하지 않았던 고폭작렬탄을 제식채용하는 등 그나마 나은 점도 있었다.
[187]
1차대전 직후 체코와의 분쟁에서 패해 체코한테 빼앗긴 치에신 지역의 영유권을 되찾는답시고 치에신 지역을 재합병하는 과정에서 서쪽의 독일을 견제할 완충지대가 될 수 있는 이웃나라인 체코슬로바키아의 국력을 약화시켜 버렸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 당시 폴란드가 치에신을 넘보지 않고 독일을 견제하는 완충국가로 체코를 남겼다고 해도 나치독일과 소련 등 양강 사이에서 끼인 지정학적 위치를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을 거라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188]
21세기 현재 폴란드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 싸우고 있는 우크라이나를 완충지대로 남기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는 배경으로 제2차 대전 직전 뮌헨 협정에 개입해 완충국가가 될 수 있는 주변국가의 영토를 뜯어먹은 것에 대한 전략적 실패에서 교훈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89]
이 당시의 폴란드 인구/인종 구성은 복잡했다.
[190]
이때 폴란드가 폴란드인의 거주지를 자국으로 모두 편입하려한 정책 자체는 이기적이되 딱히 특이한 것은 아니었다.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체코슬로비키아, 캅카스 3국 등 이때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신생국 모두 자기 민족의 거주지 전체를 자기 영토로 선포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독일과 러시아는 물론 신생국끼리도 서로 치고박고 싸우다가(예:
1918년 헝가리 혁명,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발트3국이 살아남았을 뿐이다.
[191]
8월에 볼셰비키가
바르샤바 인근까지 진격하여 정말로 나라가 절단날 뻔했으나
바르샤바 전투에서 승리하고 이후 수차례 볼셰비키를 더 격파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지역은 거의 개발되지도 않은데다 비옥도도 떨어지는 벨라루스 서부 일대였다.
[192]
미래에 큰 역할을 해줄 만한 우호적 완충국 확보도 아니다. 애당초 휴전 협정과 함께 폴란드가 지원하던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반공 진영은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몰락해버리고 말았다.
[193]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수데티 지역은 게르만계 거주지역이자 천혜의 요새 겸 최고의 공업 지대였고, 폴란드의 논리면 치에신(테셴[독일어]/테신[체코어])이 폴란드에 가는 동시에 수데티가 독일/오스트리아로 떨어져나가는 걸 막을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막았다.
[194]
당장 1937년만 해도 히틀러는 폴란드에 단치히 영유권을 제기하지 않는다고 보장한 바 있었다. 그러다 주데텐란트를 먹어치운 1939년 초 다시 단치히에 대한 영유권을 제기했다.
[195]
정확히는 나치 독일의 괴뢰 정부로 전락.
[196]
독일에 저항하고자 하는 자들은 자유 프랑스가 있는 영국으로 가고 내부에서 레지스탕스 노릇을 하고 했지만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에 비하면 좌우로 마구 나뉘어 체계적이지 못한 편이었고, 식민지는 런던으로 도망간
자유 프랑스보다 본토의
비시 프랑스에 충성한 탓에 이들 식민지를 회유해서, 그리고 연합군의 힘을 빌려 탈환해서 본토 싸움에 들어갈 병력을 확보해야 했으며, 비시는 비시대로 '전쟁은 끝났고 패전을 유발한 내부를 꽉 잡아야지' 하며 민주정을 탄압하고 새로운 국가를 확립하고자 하는 움직임까지, 프랑스 침공 이후의 프랑스는 글자 그대로 '혼란이 국가의 껍데기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고 평할 수 있다.
[197]
다만 당시 독일의 공업력은 본인들이 점령하는데 성공한 프랑스는 물론이고 영국보다도 우세였으며, 당시 소련도
수도 앞까지 밀어붙이기는 했고 일본군도 해군 한정으로는 당대 세계에서 3손가락 안에 드는 강군이었다. 미군이 압도적이어서 그렇지 미국이 참전하기 전까지는 오히려 추축국이 우세라고 볼 수 있었다.
[198]
실제로 당시 일본 내각이 외교 실패의 책임을 지고 내각총사퇴를 감행했다.
[199]
이때문에 분노한 스페인은 얼마 후 일본 제국과 단교를 했고, 그로 인해 일본은 안 그래도 얼마 없던 유럽 우호국중 하나를 잃었다.
[200]
이미 2차대전이 일어나기 전부터 여러 분쟁에 개입하면서 스스로 역량을 소모하고 있었다.
[201]
파시스트 국가답게 징병을 고수했는데 그 폐해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로, 너무 못 싸우고 삽질을 반복하는 걸 넘어 그냥 싸울 의지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202]
선전부지만 괴벨스가 정권 3인자라
국민돌격대 지휘권을 따냈다.
[203]
국제법을 위반한 기습공격을 시전함으로써 미국 여론이 분노하고 단결하게 한 주원인이 됐음.
[204]
기술력으로 어찌어찌 중화민국까지는 붙는다 쳐도 그 광활한 영토와 인구수는 별 수 없었다.
[205]
백성들의 지지와 정통성, 기반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정부의 가려진 내면에 폭주하는 군부의 전횡을 황권으로 제대로 제압하지 못했고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압박과 위험에 시달렸다.
[206]
내각이 교체되는 게 거의 일상이었다. 안정적이었던 내각을 한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
의원내각제의 단점의 대표적인 사례.(의회 해산, 내각 불신임이 통과되면 내각 국회 전부 총사퇴하고 재선거행이다.)
[207]
너무 애매모호하게 만들어진 헌법 해석 문제.
[208]
시라스는 뜻이 굉장히 애매모호한데, 덕으로 다스린다, 모범으로서 다스린다 같은 뜻이 있다. 굳이 가져오자면 '무위지치(無爲之治)'와 비슷한 개념. 일본이 대대로 천황을 허수아비로 만들다 보니 이런 걸 부여한 것.
[209]
이들은 각각 육군 해군 소속이어야 하지만 천황의 직속 기관이라 자기 상급 기관과 동등한 지위를 얻었다.
[210]
원래 파벌끼리 싸우게 만들고 권력자가 교통정리하는 것은 독재자의 통치전술이었다. 히틀러가 바로 그런 방법으로 실권까지 완벽하게 장악했다. 그런데 일본의 텐노는 예로부터 허수아비였기 때문에 그런 게 불가능했다.
[211]
오일쇼크 안정화로 인한 수익 감소
[212]
소련 재정과 경제를 망가뜨리는 비대한 규모의
소련군
[213]
비민주적 계획경제 체제의 고질적인 생산성 저하 & 소련 경제를 장악한
지하경제
[214]
러시아가 원래
타타르의 멍에 이후 심각하게 늦춰진 발전 때문에 서유럽은 러시아를 아시아 취급하는 등 굉장히 무시했고, 러시아 제국이 강대해지고 나서도 여전했다. 그 감정은 소련 패망 후 현재 러시아 연방에서도 계속 이어지는 중.
[215]
그나마
동독이나
체코슬로바키아 같은 나라는 나름 경제력이 있었고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도 나름 상태는 괜찮았다지만, 아시아, 아프리카의 공산주의 국가들과 쿠바는 그렇지 못했다.
[216]
실제로 나무위키의
공산주의 유머/소련 문서에 이와 관련된 유머가 두 개나 있다. 실제로는 사람이 먹을 양은 충분히 생산되었다. 하지만 소련의 경제가 발전하면서 육류 요구도 늘어났는데, 육류를 생산할 곡물이 없었던지라 사료용 곡물을 수입해야 했다.
[217]
고르바초프의 말과는 달리 체르노빌이 결정적인 타격은 아니겠지만, 분명 상당한 부담이었다. 사실 소련은 워낙 여기저기에서 폭발 일보직전 상황이었는데
눈썹쟁이와
지나치게 많은 판돈을 건 도박 등 어차피 언젠가는 폭발할 것들을 억지로 틀어막고 있었는데
체르노빌 사고가 이것들의
뇌관 역할을 해버렸고 결국 다 폭발해버린 것이다.
[218]
총선거 거부로 잃어버린 명분
[219]
월남전 내내 반란이 두 자리수나 터지는 막장 사태가 벌어졌다. 심지어 수도로 월맹군이 진군하는 와중에도 정쟁/반란 음모가 펼쳐지고 있었다…
[220]
그런데 사실 남베트남의 카톨릭교도 제외 대부분이라 봐도 무방하다.
[221]
출처
[222]
참고로 이 당시의 대한민국은 정말로 약소국이었던 데다가, 심지어 아직 북한의 국력이 강해 항상 적화통일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걸 생각하면 저런 여론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남베트남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를 증명하는 셈이다.
[223]
티토의 사망 직전 헌법을 개정해 각 연방내 공화국 출신 공산당원이 1년마다 대통령직을 역임하는 집단지도제를 택했으나 결과적으로 티토 생전만큼이나 강력한 결속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224]
티토 1명만의 지도력으로 유지되던 정부
[225]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라는 국호에서 보듯이 정치체제도 연방제였지만 유고 연방내에 속해있던 다른 소속 공화국들이 수도를 개별적으로 따로 두었던 것에 비해 연방의 수도였던 베오그라드를 미국의 워싱턴 D.C.이나 호주의 캔버라, 인도의 델리 연방 수도 구역 등 수도가 별개 특별행정구로 분할되어 있는 다른 연방제 국가의 수도들처럼 지방권력과 수도권력을 분할하여 두지 않고, 세르비아의 수도와 함께 겸해서 써먹으며 수도와 지역 간 정치권력이 분산되어 있지 않는 불안정한 연방제의 한계를 드러내다 티토 사후 연방 말기에 세르비아가 연방내 권력을 독식하여 사실상 세르비아가 다른 공화국들을 억누르는 중앙 집권제로 변질되면서 끝내 1991년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발발하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226]
정치 기득권층은 세르비아계, 경제 기득권층은 크로아티아계, 슬로베니아계, 보스니아계
[227]
1979년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이 발발하였고, 이에 의해 민주 캄푸치아 정권이 붕괴하고 베트남의 괴뢰국인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이 성립된다. 다만 일부 지도층들은
민주 캄푸치아당을 창당한 뒤,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캄푸치아 구국인민동맹임시정부라는 미승인 정부를 운영하였다.
[228]
예를 들어 '책을 똑바로 들었으니 지식인' '시계를 똑바로 볼 줄 아니 지식인'이라는 실소도 나오지 않은 일들이 발생했을 정도였으며, 선전장관이던 후 님은 라디오에서 피아노 음악을 틀었다는 이유로 악명 높은 강제수용소
뚜올쓸라엥에 끌려간 후 아내와 함께 목숨을 잃었다. 정작 모순적이게도 폴 포트를 위시한 크메르 루주 수뇌부들은 부유층 출신에
프랑스 유학까지 다녀온, 한마디로 오늘날 기준으로도
엘리트들이 태반이었다.
[229]
국가예산의 1/3이 든 초호화 황제 대관식이 유명하다
[230]
크메르 루주 집권기조차 살아남은 의사의 수가 40명이었는데, 이보다 더 적은 수이다.
[231]
이로 인한 대거 탈주, 이탈 및 무정부 상태 초래
[232]
에리히 호네커의 퇴진으로 급히 지도자가 된 상황이었으며, 이미 동독은 손도 쓸 수 없을 정도의 혼란한 상황을 겪고 있었던지라 본인도 결국 1달밖에 권좌를 유지하지 못했다.
[233]
국가 무장 해제
[234]
법률상으로는 동독이 해체된 이후 구 동독에 해당하던 주들이 서독으로 흡수된 형태라고 간주된다. 흡수의 대분류가 국치이기이는 하나, 이를 국치로 보는 시각은 반서방 국가나 중립국으로 망명한 일부 구 동독 지배층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
[235]
티베트 공산당으로 불리는 군소정당인데, 전 티베트의 민중을 모두 통합한답시고 외부 세력을 끌어들이는 짓을 했다.
[236]
땅이 척박해 보였고 종교적 이유로 발굴을 안해서 자원이 없는 듯 했으나 실제론 있었다. 이렇게 발견된 자원은 중국이 티베트를 지배하면서 상당량을 캐갔으니 남 좋은 일만 시킨 꼴.
[237]
이걸 보고 현재의
달라이 라마인
달라이 라마 14세를 기득권을 옹호한
보수주의자라고 비판하기도 하는데, 현재의 달라이 라마도 그렇고, 전임 달라이 라마인
달라이 라마 13세도
티베트의 기득권층이 벌이는 각종 만행에 대한 개혁을 대대적으로 추진하는 등, 명백히
진보주의적인 입장을 취했던 이들이다. 심지어 달라이 라마 14세는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고백했다. 현재의
티베트 망명정부가 공화정을 채택한 것도 독립국 시절부터 행해오던 개혁 정책의 연장선인 셈이다.
중국의 침공으로 인해 의도치 않게 기존 기득권 세력이 몰락했으니 그렇지, 티베트 정부가 꾸준히 해오던 개혁에 초를 친 건 다름아닌 중국이다.
[238]
독립 열의가 가장 뜨거웠던 2008년조차 30%정도의 지지율이었다
[239]
시리아에서 시작된 똑같은 환경 악화 여파가 여기에게도 들이닥쳤다.
[240]
변형된
샤리아
[241]
이전의 국기(공화정 시절~북부동맹/탈레반 정권 시절)들은
아프가니스탄/역사 문서와
해당 링크를 참조.
[242]
비단 소련과 미국에 제압당한 것뿐만 아니라 직접 아프간을 침공한 것은 아니지만, 탈레반을 후원해준 파키스탄이나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개입도 한몫했다.
[243]
사실 아프가니스탄은 1950년 이후로 백신가격이 100원대로 떨어진 폴리오가 아직도 유행하고 있었던 수준이었다.
[244]
탈레반이 집권하기 이전의 아프가니스탄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참고.
#
[245]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탈레반을 키워준 파키스탄도 나중엔 탈레반에게 북부 지역을 점령당하고 내전 상태로 돌입했으며, 파키스탄 육군 사령부를 공격당하는 등 탈레반에게 신나게 털렸다.
[246]
21세기에 멸망한 나라로는 이 나라 말고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포르투갈 제국,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노보로시야,
튀니지 제1공화국 등 상당히 많다. 국가를 사칭한 집단 중에서는
ISIL과
헛리버 공국이 있다.
[247]
비단 여기에 링크된 나라들 뿐만 아니라
프랑스,
이스라엘 등의 국가들과 여러 무장조직들도 내전을 악화시키고 아사드 정권을 망하게 하는 데에 크게 일조했다. 이스라엘이 일으킨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과 이스라엘-헤즈볼라 전쟁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함께 시리아 정부에 대한 우방 세력들의 지원이 줄어드는 큰 원인이 되었다. 또한 이스라엘은 시리아 내전 중에 지속적으로 공습을 가했다.
[248]
2023년 기준 시리아의 부패인식지수는 13점으로, ‘완전 부패‘ 에 있는 국가들 중에서도 최하위권의 순위를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바샤르 알아사드는 마약 제조 및 밀수를 지속적으로 저질러 왔고, 러시아로 도주하기 직전 한화로 약 193조 원을 빼돌렸으니 부패가 총체적 난국 수준이었다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249]
지도자들이 전부 암살로 명을 달리했다
[250]
조하르 두다예프 세력 vs 샤밀 바사예프 세력
[251]
샤히드카(шахидка) 참조
[252]
러시아와 서방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모두의 신뢰를 잃고 말았다. 그나마 서방은 독재 국가인 아제르바이잔을 비판했지만, 이는 말로만 그쳤고
튀르키예와
이스라엘의 강력한 지원을 등에 업은
아제르바이잔을 이길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