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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12:45:39

헝가리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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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477050><colbgcolor=#fff> 역사 <colcolor=#000,#fff> 헝가리 왕국(1526년~1918년)( 동헝가리 왕국 · 트란실바니아 공국 · 모하치 전투 · 카를로비츠 조약 · 1848년 헝가리 혁명 · 대타협) · 헝가리 왕국(1920년~19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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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왕국
Magyar Királyság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svg 파일:헝가리 왕국 국장.svg
국기(1915-1918)[1] 국장
파일:헝가리 왕국 지도(1190).svg
[2]
1000년 ~ 1526년
1867년 ~ 1918년
1920년 ~ 1946년
표어 Regnum Mariae
Patrona Hungariae
(헝가리의 수호자
마리아의 왕국)
국가 Himnusz
("Isten, áldd meg a magyart")
위치 동유럽
면적 325,411㎢
수도 에스테르곰→페슈트→ 포조니→페슈트→ 부다페스트
정치체제 선거군주제 전제군주제 입헌군주제
국가원수
주요 국왕 이슈트반 1세(1000~1038)
벨러 4세(1235~1270)
러요시 1세(1342~1382)
마차시 1세(1458~1490)
주요 섭정 후녀디 야노시
호르티 미클로시
공용어 헝가리어
라틴어
독일어
민족 헝가리인
루마니아인, 독일인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바키아인, 체코인, 우크라이나인( 루신인)
종교 가톨릭
통화 플로렌티누스 → 탈러 플로린 굴덴 크로네 코로나 펭괴
1차 성립 이전 헝가리 대공국
1차 멸망 이후 오스만 헝가리, 합스부르크 제국, 에르데이 공국
2차 성립 이전 오스트리아 제국
2차 멸망 이후
3차 성립 이전
헝가리 제1공화국
3차 멸망 이후 헝가리 제2공화국
언어별 명칭
헝가리어 Magyar Királyság
라틴어 Regnum Hungariae
독일어 Königreich Ungarn
크로아티아어 Kraljevina Ugarska
기타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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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헝가리어 Mogyër Királyság
슬로바키아어 Uhorské kráľovstvo
루마니아어 Regatul Ungariei[3]
세르비아어 Краљевина Угарска/Ма̏ђарска (Mȁđarskā)
슬로베니아어 Kraljevina Ogrska
체코어 Uherské království
폴란드어 Królestwo Węgier
튀르키예어 Macaristan Krallığı
프랑스어 Royaume de Hongrie
이탈리아어 Ungheria
고대 교회 슬라브어 Ѫгри (Ǫgri)
이디시어 אונגאַרן (Ungarn) }}}

1. 개요2. 역사
2.1. 건국 배경: 헝가리 대공국(895년 ~ 1000년)2.2. 아르파드 왕조(1000년 ~ 1301년)2.3. 왕위 쟁탈전(1301년 ~ 1308년)2.4. 앙주 왕조(1308년 ~ 1395년)
2.4.1. 카로이 로베르트(1308년 ~ 1342년)2.4.2. 러요시 1세(1342년 ~ 1382년)2.4.3. 앙주 왕조의 몰락(1382년 ~ 1395년)
2.5. 룩셈부르크 왕조(1395년 ~ 1437년)
2.5.1. 지기스문트(1395년 ~ 1437년)
2.6. 내우외환(1437년 ~ 1458년)2.7. 후녀디 왕조(1458년 ~ 1490년)
2.7.1. 마차시 1세(1458년 ~ 1490년)
2.7.1.1. 집권과정2.7.1.2. 내치2.7.1.3. 보헤미아 전쟁2.7.1.4.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2.7.1.5. 오스트리아 대공국와의 전쟁2.7.1.6. 말년
2.8. 헝가리 왕국의 몰락: 야기에우워 왕조(1490년 ~ 1526년)
2.8.1. 마차시 1세의 계승자2.8.2. 울라슬로 2세(1490년 ~ 1516년)2.8.3. 러요시 2세 모하치 전투(1516년 ~ 1526년)
2.9. 삼분할된 헝가리2.10. 합스부르크 왕조: 트란스라이타니아2.11. 현대 헝가리 왕국: 합스부르크 왕조 이후 호르티의 섭정기
3. 관직4. 관련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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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000년부터 1946년까지 헝가리와 그 주변 지역[4]에 존재하였던 국가이다.

1526년부터 1918년까지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1867년에 대타협을 통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성립과 함께 주권 상당부분을 되찾았으나,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없어졌다.

이후 잠시 동안 공화정 공산 정권이 들어서지만 트리아농 조약으로 왕정이 부활하고 1920년부터 1944년까지 호르티 미클로시가 섭정을 맡아 집권하였다.[5] 1944년 말부터는 살러시 페렌츠가 집권하였으며, 1945년엔 소련에 점령당해 소련의 괴뢰국으로 전락한다.

2. 역사

2.1. 건국 배경: 헝가리 대공국(895년 ~ 1000년)

9세기경 아바르족의 지배를 받던 마자르족은 아바르족이 페체네그족과 수십년간 전쟁을 치르면서 쇠락해진 틈을 타 830년경 드니프로 강 드네스테르 강 사이의 땅(에텔쾨즈, 현 우크라이나 서남부)에서 독립 세력을 일궜다. 그러다가 896년 초 시메온 1세 불가리아 제1제국 페체네그의 협공으로 종족을 지키기 힘들어지자, 그들은 적의 공세를 피해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판노니아 대평원으로 집단 이주했다. 이때 줄러(군사령관)를 맡았던 아르파드는 줄러와 함께 마자르족을 이끌었던 켄데(제사장)가 단절되자 단독으로 마자르인들을 이끌었다.

아르파드와 그의 후손들이 이끄는 마자르인들은 카르파티아 산맥을 페체네그 등 동쪽 유목 민족에 대한 방어선으로 삼고 900년경 도나우 강 동쪽의 영토를 접수한 뒤 북으로는 발트해, 서로는 도버 해협, 남으론 이베리아 반도와 이탈리아 북부까지 군사 원정을 감행해 수많은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그러나 933년 독일 왕 하인리히 1세에게 패퇴했고, 955년 오토 1세가 이끄는 독일군에게 아우크스부르크 인근의 레히펠트 전투에서 참패하면서 기세가 꺾였다. 그 후 마자르인들은 대평원에서 헝가리 대공국을 결성하고 서유럽인들과 교류했으며, 지도부는 주변국들의 침략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가톨릭 개종을 추진했다.

997년 게저(Géza, 재위기간: 972년 ~ 997년) 대공이 사망한 뒤 장남 이슈트반이 뒤를 이어 대공에 올랐다. 그러나 트란스다누비아 남부 지역의 영주였던 코파니(Koppány)가 자신의 아버지 '대머리 제린드'와 게저가 체결한 협정에 따라 자신에게 헝가리 대공 직위를 상속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고, 게저의 아내 셔롤트와 결혼하겠다고 선포했다. 코파니는 게저 시절에 억압받았던 마자르 귀족들을 끌어모았고, 이슈트반은 이에 맞서 아내가 이끌고 온 바이에른 호위대와 함께 헝가리 정규군과 독일 기사들을 소집했다. 코파니는 그의 군대와 함께 북부 트란스다누비아를 침공하여 각지를 약탈했다. 이에 이슈트반이 그를 향해 진격했고, 양측은 베스프렘 인근 셰드 계곡에서 맞붙었다.

반나절 동안 이어진 격전 끝에, 이슈트반이 코파니가 이끄는 경기병대를 격파했다. 코파니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이슈트반은 시신을 매장해야 한다는 헝가리의 불문법을 무시하고 계곡에서 그대로 썩게 내버려두라고 명했다. 이는 대공의 권위에 불복종하는 자의 말로를 모두에게 보여줌으로써 다시는 반란을 꿈에 꾸지 못하게 하려는 정치적 술수였다. 그는 뒤이어 코파니의 영지를 공략하고 부하들에게 토지를 분배했으며, 코파니의 옛 부하들에게 판노할름 수도원에 십일조를 바치라고 강요했다.

999년, 이슈트반은 판노할름 수도원장을 로마로 파견해 헝가리를 가톨릭 국가로 봉헌하겠으니 자신을 헝가리 왕으로 인정해달라고 청했다. 교황 실베스테르 2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3세의 동의를 얻어낸 그는 1000년 12월 25일 또는 1001년 1월 1일에 대관식을 거행하고 '이슈트반 1세'로서 헝가리 국왕이 되었다. 이리하여 헝가리 왕국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2.2. 아르파드 왕조(1000년 ~ 1301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아르파드 왕조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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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왕위 쟁탈전(1301년 ~ 1308년)

1301년 언드라시 3세가 사망한 후, 언드라시 3세 생전부터 헝가리 왕을 자처하던 나폴리 왕국 카로이 로베르트 왕자가 에스테르곰으로 가서 에스테르곰 대주교의 추대를 받으면서 헝가리 국왕이 되는 듯했지만, 헝가리 귀족들은 교황청이 지지하는 그를 왕으로 받아들이면 자신들이 교황청의 간섭에 시달릴 것을 우려했기에 추대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대관식이 거행되는 세케슈페헤르바르가 아닌 에스테르곰에서 대관식이 거행된 것은 무효라며 카로이 로베르트의 집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소집된 헝가리 의회에서는 바츨라프 3세와 니더바이에른 공작 오토 3세가 유력 후보로 거론되었다. 그러다가 바츨라프 2세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아챙긴 귀족들은 바츨라프 3세를 헝가리 국왕으로 추대하기로 결의했다. 1301년 8월 27일, 아버지가 보내준 수행원과 보헤미아군과 함께 세케슈페헤르바르에 도착한 뒤 컬로처 대주교로부터 왕관을 쓰고 '라슬로'라는 왕호를 사용했다. 헝가리 영주들은 대부분 그의 집권을 받아들였지만, 크로아티아 영주들은 카로이 로베르트만을 왕으로 모셨다. 이에 1301년 8월 말, 이반 쾨체그가 이끄는 왕실군이 출진해 에스테르곰을 공략했고, 카로이는 헝가리 남부로 피신했다. 하지만 카로이를 따르는 주들을 본격적으로 정벌하려는 시도는 이뤄지지 않았고, 헝가리는 카로이를 지지하는 세력과 바츨라프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그나마도 강력한 권세를 떨치는 귀족들이 국정을 주도했고, 바츨라프와 카로이 모두 별다른 실권이 없었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보헤미아 왕 바츨라프 2세에게 자신의 허락 없이 아들을 헝가리 왕으로 세운 것에 항의하는 서신을 보냈다. 1301년 9월 헝가리를 방문한 교황 사절 니콜로 보카시니는 헝가리 고위 성직자들에게 교황이 헝가리 왕으로 인정한 카로이를 지지하라고 설득했다. 이에 보헤미아 왕국은 헝가리 귀족들을 묶어두기 위해 그들에게 큰 영지와 높은 관직을 주었다. 그 결과, 바츨라프를 헝가리 왕으로 세우는 데 일조했던 컬로처 대주교 이슈트반을 포함한 많은 고위 성직자들이 1302년 상반기에 카로이 지지로 돌아섰지만, 귀족들은 바츨라프를 계속 왕으로 모셨다.

1302년 9월, 카로이가 바츨라프가 있던 부더를 포위했다. 그는 부더 시민들에게 바츨라프를 인도하라고 요구했지만, 수비대와 시민들은 끝까지 바츨라프를 지지했다. 그 사이, 이반 쾨체그가 이끄는 군대가 도착하여 포위를 풀었고, 카로이는 어쩔 수 없이 달마티아로 철수했다. 교황 사절 니콜로 보카시니가 부더에 성무를 집행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선언하자, 부더 신부들은 교황과 모든 헝가리 고위 성직자들을 파문했다. 1303년, 보니파시오 8세는 바츨라프 2세에게 로마로 출두해서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바츨라프 2세가 응하지 않자, 그해 5월 31일에 바츨라프 왕의 헝가리 왕 선출은 무효이며 카로이야말로 헝가리 왕이 되어야 한다는 교령을 반포했다. 여기에 독일왕 알브레히트 1세도 바츨라프 2세에게 아들을 헝가리에서 내보내라고 요구했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많은 헝가리 귀족들이 카로이 편에 돌아섰고 바츨라프 왕의 세력은 부더와 그 주변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바츨라프 2세는 아들을 구하고 카로이를 무찌르기 위해 1304년 5월 대군을 이끌고 헝가리로 진군했다. 그의 군대는 슬로바키아 서부 일대를 행진하며 무자비하게 약탈한 뒤 에스테르곰을 공략하고 에스테르곰 주교 에호르를 생포했다. 그러나 카로이를 지지하는 영주들의 세력이 만만치 않은 데다, 아들을 왕으로 받든 영주들도 제대로 협조해주지 않고 자기들 권익을 챙기는 데 급급한 모습을 보이자, 그는 아들이 헝가리에 계속 체류했다간 위험해지겠다고 판단했다. 이에 아들을 보헤미아로 데려가되 헝가리 왕위는 계속 유지하고 이반 쾨체그를 왕을 대신하여 헝가리를 이끌 통치자로 세웠다. 이때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 역시 보헤미아로 이송되면서, 헝가리 민심이 악화되었다.

1304년 9월, 카로이와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3세가 모라비아를 침공했지만 바츨라프 2세에게 격파되었다. 이후 알브레히트 1세와 바츨라프 2세간에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으나, 이 무렵 건강이 악화된 바츨라프 2세는 1305년 4월부터 병상에 누워서 사경을 헤매다가 1305년 6월 21일에 사망했다. 그리하여 바츨라프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헝가리-크로아티아 왕위에 아버지가 지니고 있던 보헤미아와 폴란드 왕위까지 물려받았다. 그러나 당시 그가 처한 상황은 좋지 않았다. 왕실의 재정은 빚더미에 쌓였고, 폴란드의 상황은 귀족들의 연이은 반란으로 인해 혼란스러웠으며, 헝가리에서는 이름만 내걸었을 뿐 왕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없었다.

그는 일단 독일왕 알브레히트 1세와의 평화 협상을 이어갔다. 1305년 8월 18일, 알브레히트 1세는 보헤미아 국왕을 반역자로 비난했던 칙령을 취소하고 바츨라프의 전임자들이 소유한 권리와 특권을 확인했다. 이리하여 폴란드와 헝가리에 대한 권리를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 대가로, 그는 체브스코(Chebsko)를 알브레히트 1세에게 양도하고 베틴 가문에 모젤을 넘겨야 했다. 신성 로마 제국과의 분쟁을 종결한 뒤, 바츨라프는 헝가리 문제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무력으로 해결하기에는 전쟁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고 성공 가능성도 불확실하다고 보고 외교로 해결하기로 했다. 1305년 10월 9일, 그는 브르노에서 헝가리 왕위에서 물러나고 성 이슈트반 왕관과 보석을 포함한 헝가리 왕좌에 대한 권리를 니더바이에른 공작 오토 3세에게 넘겼다.

바츨라프 3세에게 헝가리 왕위를 넘겨받은 오토 3세는 헝가리로 이동해 1305년 12월 6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헝가리 왕위에 올랐다. 이때 그는 '벨러'라는 왕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는 헝가리 왕이 된 이후로 연이은 실패를 맛보았다. 언드라시 3세 치세 때부터 헝가리 왕을 자처하며 크로아티아-달마티아 등 헝가리 남부 일대에서 지지세력을 끌어모으던 카로이 로베르트가 1306년 말부터 북상해 헝가리의 수도 부더를 압박했다. 여기에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카로이를 지지하면서 오토가 헝가리 왕을 칭하는 것을 금지했다. 오토는 지지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1307년 봄 에르데이를 순행하다가 그해 6월 오토와 카로이 둘 다 왕으로 인정하지 않던 에르데이의 보이보드(Voivode) 라슬로 칸에게 체포되었다.

1307년 10월 10일 라코스에서 열린 긴급 회의에서, 귀족들은 카로이를 헝가리 왕으로 선출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헝가리의 가장 강력한 귀족들인 마테 3세 크사크, 어버 어머데, 라슬로 칸은 카로이의 권위를 무시했다. 1307년 말에 석방된 오토는 헝가리에 정나미가 떨어졌고, 1308년 헝가리 왕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카로이를 왕으로 인정한 뒤 바이에른으로 돌아갔다.

2.4. 앙주 왕조(1308년 ~ 1395년)

2.4.1. 카로이 로베르트(1308년 ~ 1342년)

1308년 카로이 로베르트가 오토에게 헝가리 왕권을 넘겨받았지만, 많은 헝가리 귀족들은 여전히 카로이를 왕으로 받들려 하지 않았다. 이에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새로운 교황 사절인 젠틸레 포르틴노 다 몬테피오레를 헝가리에 파견했다. 1308년 여름에 헝가리에 도착한 몬테피오레는 헝가리의 가장 강력한 영주들을 차례로 설득해 카로이의 통치를 받아들이게 했다. 그 결과 1308년 11월 27일, 부더의 도미니카 수도원에서 열린 의회에서 카로이가 만장일치로 왕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일전에 오토 3세를 억류할 때 성 이슈트반 왕관을 탈취했던 라슬로 칸은 왕관을 카로이에게 넘겨주라는 교황 사절의 요구를 무시했다. 결국 교황 사절은 카로이를 위해 새로운 왕관을 제작해야 했다.

1309년 6월 15일 또는 16일 부더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대관식이 치러졌다. 그러나 대다수 헝가리인들은 성 이슈트반 왕관이 아닌 다른 왕관으로 대관식을 치르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여겼다. 교황 사절이 라슬로 칸에게 파문을 선고하자, 라슬로 칸은 할 수 없이 성 이슈트반 왕관을 카로이에게 넘겼다. 1310년 8월 27일, 에스테르곰 대주교 토마스가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성 이슈트반 왕관을 카로이에게 씌워줬다. 이로써 카로이가 헝가리 왕으로 인정받았지만, 헝가리의 대귀족들은 그의 권위를 우습게 여겼다.

한편, 세르비아 왕국에서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을 상대로 내전을 벌이고 있던 스테판 드라구틴은 아들 블라디슬라프가 헝가리 왕족인 콘스탄차 모로시니와 결혼한 터라서 헝가리에서 벌어지는 내전에도 개입해 상당수의 병력을 그 쪽으로 보냈다. 그러다가 카로이가 최종적으로 헝가리 왕이 되자, 드라구틴은 그에게 아들 블라디슬라프를 후계자로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카로이가 이를 거부하자, 이번에는 그를 실각시킬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카로이는 이 음모를 간파하고 정적들을 모조리 숙청하였고, 이로 인해 드라구틴과의 관계가 매우 안 좋아졌다.

1311년 상반기, 카로이는 베네치아 공화국이 점거하고 있던 자다르 공략에 착수해 베네치아 수비대를 축출하고 믈라덴 수비치를 자다르의 백작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해 6월, 차크 마테 3세가 부더를 습격해 포위 공격했다. 카로이는 라슬로 칸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는 마테를 성공적으로 격퇴한 뒤 그해 9월 군대를 파견해 차크 마테 3세의 영지를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고, 1312년 봄 의회를 소집해 지방 영주들에게 반역자 차크 마테 3세를 토벌하는 데 힘을 보태라고 촉구했으나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 사이에 베네치아가 자다르를 도로 탈취하자, 그는 베네치아와 평화 협상을 벌인 끝에 베네치아인이 자다르 백작에 선임되는 것을 용인하되 헝가리 왕이 명목상으로나마 자다르 백작의 주군이 되는 것을 인정받았다.

한편, 공식적으로 카로이를 지지했던 어버 어머데는 1311년 9월 왕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커셔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곳을 포위 공격했다. 그러다가 커셔 주민들의 습격을 받고 피살당했고, 그의 두 아들 야노시와 데메테르가 카사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에 카로이가 카사로 와서 양자를 중재했고, 어버 가문은 10월 3일에 야노시와 데메테르가 석방되는 대가로 아바우지와 젬플렌 주를 왕실에게 돌려주고 커셔 시를 더 이상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석방되자, 어버 가문은 합의를 어기고 차크 마테 3세에게 군대 지원을 받는 대가로 어바우지와 젬플렌을 넘기기로 했다.

1312년, 어버-차크 연합군은 카사를 포위 공격했다. 이에 카로이가 왕실군을 이끌고 이들을 요격하여 1312년 6월 15일 로스고니(현재 슬로바키아의 로자노브체) 전투에서 이들을 격파했다. 그동안 어버 가문을 섬겼던 귀족 중 절반 가량이 전투가 끝난 뒤 카로이에게 귀순했다. 그해 7월, 카로이는 어버 가문의 여러 요새를 공략한 뒤 차크 마테 3세를 향한 원정을 개시해 1313년 너지솜바트, 1315년 비셰그라드를 공략했다. 1315년 초 부더에서 테메슈바르로 이동한 그는 1316년 상반기에 트란스다뉴비아와 슬라보니아에서 쾨세그 가문을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이때 그동안 쾨세그 가문의 압제에 시달렸던 소영주들이 대거 가담했고, 쾨세그 가문은 왕실군에게 연전연패해 헝가리 남부 일대에 대한 영향력을 빠르게 상실했다.

이렇듯 왕권이 갈수록 강해지자, 이에 불안감을 느낀 보르사 자캅(Borsa Jakab 1260~1332)은 1315년 라슬로 칸이 사망한 뒤 영지를 물려받은 두 아들 라슬로 4세 칸, 라슬로 5세 칸과 아코시 모이시(Ákos Mojs ?~1320) 등 여러 영주들과 연합해 카로이에 대적했다. 그들은 갈리치아의 왕 안드레이 유리에비치를 헝가리 왕으로 추대했다. 하지만 보르사 가문의 추종자였지만 이제는 카로이 편에 선 데브레첸의 도저(Debreceni Dózsa 1291~1322)가 이끄는 왕실군이 1316년 6월 말에 데브레첸에서 이들을 격파했다. 이후 2달 동안 보르사의 많은 요새들과 영지들이 비하르, 솔노크, 보르쇼드, 그리고 클루지 주에 속한 왕실군에게 함락되었다.

이렇듯 헝가리 대귀족들을 상대로 성공적인 군사 원정을 이끈 카로이는 1314년 2월 스렘스카미트로비차에서 스테판 드라구틴과 평화 협약을 맺고 전쟁을 종식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316년 3월 12일, 세르비아 왕국 북부 지역인 스렘의 왕을 칭하던 스테판 드라구틴이 사망하고 장남 스테판 블라디슬라프가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숙부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은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군사를 일으켜 스렘으로 쳐들어갔다. 카로이는 스테판 블라디슬라프가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을 권리를 인정하고 병력을 지원했다. 그러나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은 블라디슬라프를 성공적으로 격파하고 스렘을 포위했다. 카로이는 사바 강을 건너 반격을 개시해 마초 요새를 공략했다.

1317년 5월, 어버 가문이 또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곧바로 진압하고 운그바르, 네비츠케(Nevicke: 현재 우크라이나 네비츠키) 성을 공략했다. 1317년 11월 3일, 카로이는 차크 마테의 영지를 침공해 코마롬(Komárom, 현재 슬로바키아 코마르노)를 점령했다. 1318년 카로이가 차크 마테 3세가 강제로 탈취했던 교회 재산을 돌려주는 정책을 속행하지 않자, 고위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태롭게 하는 모든 이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연합했다. 그들의 거센 요구에 직면한 카로이는 그해 여름에 의회를 열었지만, 언드라시 2세 금인칙서를 재확인하라는 요구는 거부했다. 고위 성직자들은 교황에게 카로이가 교회 재산을 자기 것으로 가져가고 있다며 파문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런 상황에서 카로이가 중병에 걸리자, 파문 여부를 심사하던 교황 요한 22세는 카로이가 죽음이 임박했으니 참회한다면 모든 죄를 용서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카로이는 곧 회복되었다.

1319년, 데브레첸의 도저는 라슬로 4세, 라슬로 5세 형제 및 그들의 동맹들을 상대로 성공적인 공세를 이어갔고, 쾨치키 샨도르(Köcski Sándor ?~1328)는 쾨세그 가문의 6개 요새를 공략했다. 1319년 여름, 카로이는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로틴을 상대로 공세를 개시해 난도르페헤르바르와 마츠바 등지를 공략했다. 2년 후인 1321년 3월 18일, 그동안 카로이를 상대로 항전하던 차크 마테 3세가 사망했다. 카로이는 이 때를 틈타 차크 가문의 영지를 공격해 별다른 저항 없이 순조롭게 공략했다. 이때 카로이는 차크 가문의 핵심 도시인 트렌첸을 포위하여 8월 8일에 함락시켰다. 3개월 후, 왕실군은 라슬로 칸 아들들의 마지막 요새인 키소(Csicsó, 오늘날 루마니아 키케우-코라비아)를 공략했다.

1322년, 달마티아의 두 도시인 시베니크 트로기르가 카로이의 봉신인 믈라덴 슈비치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두 도시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종주권을 받아들였고, 믈라덴의 친형인 파바오 2세 슈비치를 포함한 많은 크로아티아 영주들도 믈라덴에게 등을 돌렸다. 카로이는 그해 9월 크로아티아로 진군해 크닌에서 믈라덴에 반대하던 영주들에게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믈라덴은 자신을 도우러 온 왕에게 감사를 표하고자 찾아뵈었지만, 카로이는 그가 영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이런 일이 생겼다는 이유로 체포했다.

이리하여 헝가리를 그동안 지배하던 대귀족들을 모조리 제압함으로써 왕권을 카르파티아 산맥 도나우 강 하류 사이의 헝가리 전역에 떨칠 수 있게 된 카로이는 1323년 상반기에 수도를 왕국의 중앙에 있는 비셰그라드로 천도했다. 같은 해, 합스부르크 가문 오스트리아 공작들은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카로이에게 병력 지원을 받는 대가로 지난 수십년간 지배했던 프레스부르크를 넘겼다. 1325년, 카로이는 그동안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던 슬라보니아를 왕실에 귀속시키고 심복 아코시 믹치(Ákos Mikcs ?~1343)를 슬라보니아 반(Ban, 특정 지역의 최고 행정관)으로 세웠다. 믹치는 헝가리 정부의 통제에 순순히 따르지 않는 크로아티아를 침공했지만, 1326년 크로아티아 영주들 중 한 사람인 이반 넬리피치에게 패배했다. 결국 크로아티아 지역 만은 카로이의 치세 동안 직접적인 통제에서 벗어났다. 바보니치와 쾨세그 가문은 크로아티아의 패전으로 왕실군의 위세가 꺾인 틈을 타 1327년 반란을 일으켰지만 곧 진압되었고, 카로이는 반란에 대한 보복으로 슬라보니아와 트란스다뉴비아의 요새 8개를 몰수했다.

카로이는 대귀족들이 그동안 불법적으로 취득한 왕실 재산을 철저히 조사하고 이를 강제 환수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특정 기간 동안 해당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을 가질 권한"을 주면서도 그것을 영원히 소유하지 못하게 했다. 여기에 더해 교황만이 주교 선임권을 가질 수 있다는 교령을 무시하고 헝가리의 고위 성직자들을 마음대로 임명했다. 당시 교황청은 아비뇽 유수로 인해 프랑스 왕국에 예속된 터라 카로이의 이러한 행동에 어떠한 제지도 하지 못했다.

1326년, 카로이는 성 지외르지 훈장을 제정하고 자신만 따르는 세속적인 기사단을 창설했다. 그는 정기적으로 마상창시합을 개최하고 "왕의 수행원", "왕의 기사"라는 새로운 직책을 설립했다. 여기에 더해, 충직한 신하들에게 투구 문장을 수여하고 특별대우를 해줬다. 그의 치세 동안 동전 주조, 관세, 소금 독점으로 인한 왕실 수입을 통제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행정 기관들이 각지에서 설립되었다. 또한 카로이는 1327년 새로 문을 연 광산에서 추출한 금의 3분의 1을 광산이 발견된 땅의 소유자에게 넘긴다고 선언했다. 이에 사람들이 금광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면서, 쾨르뫼츠바녀(현재 슬로바키아 크렘니차), 너지바녀(현재 루마니아 바이아마레), 어러뇨슈바녀(현재 루마니아 바이아 데 아리에슈) 등 여러 곳에서 금광이 새로 개발되었다. 그는 이를 토대로 금화를 대거 주조할 수 있었고, 자연히 헝가리의 경제는 크게 발전했다.

경제 발전을 이룩하면서 국고가 풍부해지자, 카로이는 군대를 강화한 뒤 대외 원정에 착수했다. 1328년 여름, 보헤미아 왕 요한 1세와 연합해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여 레이타 강둑에서 적군을 격파했다. 1328년 9월 21일, 오스트리아의 세 공작 프리드리히, 알브레히트, 오토는 헝가리와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프레스부르크와 무러쾨즈(현재 크로아티아 메지무레주)의 영유권을 헝가리에게 넘겼다. 1329년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가 파견한 세르비아군이 난도르페헤르바르를 포위했지만, 카로이가 파견한 구원군에게 패퇴했다.

1329년 말, 카로이의 장인이자 폴란드 왕국 국왕 브와디스와프 1세 보헤미아 왕국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 튜튼 기사단 연합군에게 패배한 뒤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자 아들이자 후계자인 카지미에시 왕자를 헝가리로 보냈다. 카지미에시는 카로이의 궁정에 머무는 동안 카로이의 아내인 폴란드의 엘즈비에타의 시녀 클라라 자(Clara Záh)에게 외설스러운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클라라 자의 아버지 펠리키안 자(Felician Záh)는 딸이 모욕당하는 와중에 왕족들이 만류하지 않는 것에 격분했고, 그들에게 복수하기로 마음먹었다. 1330년 4월 17일, 펠리키안 자는 왕궁 식당에 칼을 들고 난입하여 카로이와 왕비의 오른손에 상처를 입힌 뒤 카로이의 두 아들 러요시와 언드라시를 죽이려 했다가 왕실 근위대에게 사살되었다. 클라라를 제외한 펠리키안 자의 아이들은 고문을 당해 죽었고, 클라라는 입술과 손가락 여덟 개가 잘린 뒤 말에 묶인 채 여러 마을에서 조리돌림 당했다.

1330년, 왈라키아 공국 프린스 바사라브 1세가 헝가리로부터 독립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소식을 접한 카로이는 그해 9월 왈라키아로 쳐들어가 세베린(오늘날 루마니아의 드로베타-투르누 세베린) 요새를 점령한 뒤 바사라브 1세의 협상 요청을 거부하고 그가 숨은 쿠르테아 데 아르제슈(Curtea de Argeș)로 진군했다. 그러나 적군이 청야 전술을 사용하는 바람에 식량을 구하기 어렵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바사라브 1세와 휴전 협약을 맺고 철수길에 올랐다. 1330년 11월 9일 카르파티아 산맥 남부를 가로지르는 좁은 통로를 행진하던 헝가리 왕실군은 포사다에서 왈라키아인의 습격을 받았다. 카로이는 데시데리우스 헤데르바리(Desiderius Hédervári)라는 이름의 기사와 옷을 바꿔 입은 후 전장에서 탈출했다. 데시데리우스는 카로이로 자처하며 적의 시선을 잡아끌면서 끝까지 항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카로이는 왈라키아 침공을 다시는 시도하지 않았고, 왈라키아는 헝가리로부터 독립했다.

이후 폴란드 쪽으로 눈길을 돌린 카로이는 보헤미아-튜튼 기사단 연합군을 상대로 고전하고 있는 폴란드에 증원군을 보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얀 루쳄부르스키가 중재를 요청하자, 그는 기꺼이 받아들여 폴란드와 보헤미아가 1332년에 평화 협약을 맺게 해줬다. 한편, 교황청이 사절을 보내 교황들의 곤궁한 처지를 호소하며 십일조를 거둬들이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카로이는 교황청이 징수한 돈의 3분의 1을 자신에게 주는 대가로 받아들였다.

이후 내치에 전념하고 폴란드와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간의 갈등을 중재하는 데 힘을 기울이던 그는 말년에 중병에 걸려서 대외 활동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1340년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이 헝가리를 공격해 난도르페헤르바르를 함락했지만, 몸져누워 있던 그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1342년 7월 16일 비셰그라드에서 눈을 감았다.

2.4.2. 러요시 1세(1342년 ~ 1382년)

1342년 아버지 카로이 로베르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러요시 1세는 즉위 직후 새로운 토지 보조금 제도를 도입했다. 왕실로부터 토지를 수여받은 자의 형제자매와 다른 친적들은 토지를 물려받을 수 없으며, 아들이 없으면 딸이 아버지로부터 토지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또한 토지 소유자들은 그곳에서 일하는 농노들에게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1342년 9월, 커로이 로베르트 왕의 최측근이었던 드루게트 빌모시(Druget Vilmos 1300~1342)가 사망했다. 그는 자신의 영지를 형제인 미클로시에게 물려줬다. 그러나 러요시는 새 법을 적용해 토지를 몰수했다.

러요시는 라코비치 가문을 무척 총애했다. 이 가문에서 그의 치세 동안 고위직을 맡은 인물은 총 8명이었다. 이 중 라코비치 언드라시가 가장 큰 신임을 받아 헝가리 왕실군 총사령관을 맡았다. 1342년 말 또는 1343년 초, 언드라시는 세르비아 왕국을 침공해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이 카로이 1세 치세 말기에 빼앗아갔던 모에시아의 바나트를 탈환했다.

그러던 1343년 1월 20일 나폴리 왕국 국왕 로베르토[6]가 사망했다. 로베르토는 유언장에서 손녀 조반나 1세를 유일한 후계자로 지명하고, 러요시의 남동생이자 조반나 1세의 남편인 언드라시의 상속권을 배제했다. 이에 러요시는 동생이 상속권을 되찾게 해주기로 마음먹고, 모라비아의 카를에게 사절을 보내 나폴리 왕국을 공동으로 압박하기로 했다. 또한 어머니 엘즈비에타는 1343년 여름에 막대한 금과 은을 가지고 나폴리로 가서 7개월 동안 조반나 1세와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언드라시가 나폴리의 공동 왕이 되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한편, 러요시는 세금 납부를 거부한 에르데이의 작센인들을 상대로 원정을 개시해 1344년 여름에 이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후 일찍이 아버지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기고 헝가리로부터 독립한 왈라키아 공국의 지배자 바사라브 1세를 응징하려 하자, 바사라브 1세는 위협을 느끼고 아들 니콜라스 알렉산데르를 그에게 보내 봉신을 자처했고, 그는 이에 만족하여 수도로 귀환했다. 이리하여 왈라키아에 대한 헝가리의 종주권은 명목상이나마 복원되었다. 러요시는 여세를 몰아 1344년 12월 기독교를 믿지 않는 리투아니아인을 상대로 십자군 원정을 감행했다. 이 원정에 보헤미아 왕 얀 루쳄부르스키, 모라비아의 카를, 부르봉의 피에르 1세, 에노의 기욤 2세도 가담했다. 십자군은 빌뉴스를 포위 공격했지만, 리투아니아인들의 격렬한 저항을 극복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1345년 2월 말, 헝가리로 돌아온 러요시는 자기가 없는 틈을 타 에르데이와 세폐세크(Szepesség)[7] 일대를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한 킵차크 칸국을 응징하고자 라코비치 언드라시를 파견했다. 언드라시는 킵차크 칸국의 영역으로 쳐들어가서 적군을 상대로 뼈아픈 타격을 안긴 뒤 각지를 약탈한 후 귀환했다. 그해 4월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3세와 모라비아의 카를이 전쟁을 벌이자, 그는 일전에 맺은 합의에 따라 카지미에시 3세를 지원했다.

1345년 6월, 러요시는 크로아티아로 진군했다. 당시 크로아티아는 이반 넬리피치가 카로이 1세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이래 헝가리의 직접적인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러요시가 쳐들어왔을 때 이반 넬리피치는 이미 죽었고, 그의 미망인 블라디슬라바 쿠르자코비치(Vladislava Kurjaković)와 아들 이반 넬리피치(Iván Nelipčić)는 도저히 대적할 도리가 없다고 여기고 항복했다. 다른 크로아티아 귀족들도 러요시가 크로아티아에 있는 동안 앞다투어 귀순했다. 그동안 베네치아 공화국의 압제에 시달리던 자다르 역시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베네치아 총독을 몰아냈다.

크로아티아 원정을 마치고 수도로 귀환한 러요시는 1345년 9월 18일, 남동생 언드라시가 아베르사(Aversa)에서 암살당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그는 조반나 1세가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언드라시를 죽였다고 확신하고,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남편을 살해한 여왕을 폐위시키고 언드라시의 아들(칼라브리아 공작 카를로 마르텔)을 나폴리 국왕으로 세우려 하니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조카의 섭정을 맡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교황이 언드라시 암살 사건에 대해 조사하지 않자, 러요시는 나폴리 왕국의 본토인 남부 이탈리아를 침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먼저 남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에 사절을 보내 헝가리군에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베네치아 공화국이 자다르를 탈환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하자, 자다르 시민들은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나폴리 왕국과 일전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베네치아와 갈등을 벌일 이유는 없다고 여기고 응하지 않았고, 자다르는 1346년 12월 21일 베네치아에 항복했다. 1347년 4월 24일, 헝가리군 선봉대가 바사리 미클로시(Vásári Miklós ?~1358)의 지휘하에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여러 분견대가 잇따라 이탈리아로 진군했는데, 대부분이 독일인 용병대였다. 이들은 우디네, 베로나, 모데나, 볼로냐, 우르비노, 페루자를 거쳐 라퀼라까지 진격했고, 조반나 1세는 1348년 1월 11일 마르세유로 도주했다.

조반나 1세의 친척인 타란토 공작 로베르트와 두라초 공작 카를로[8]는 러요시를 찾아가 항복 의사를 밝혔다. 러요시는 이들을 우호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들의 형제이며 여전히 헝가리에 맞서고 있는 타란토의 필리포와 두라초의 루도비코를 설득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들이 시키는 대로 형제들을 설득한 뒤 함께 귀순하자, 러요시는 태도를 싹 바꿨다. 그는 남동생 언드라시가 살해된 일에 대해 그들의 책임을 추궁하며 온갖 비난을 퍼붓고 현장에서 체포했다. 다음날인 1348년 1월 23일, 두라초 공작 카를로는 러요시 1세의 명령에 따라 참수되었다. 다른 인사들은 러요시의 어린 조카 카를로 마르텔과 함께 헝가리로 이송되었다.

1348년 2월, 러요시는 나폴리로 진격했다. 나폴리 시민들이 공물을 바치겠으니 군대를 입성시키지 말고 그와 수행원들만 도시에 들어와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공물을 더 바치지 않는다면 자신의 병사들이 도시를 철저히 약탈할 것이라고 위협하며 거절했다. 그는 역대 나폴리 왕들의 칭호인 "시칠리아의 예루살렘의 왕, 풀리아 공작과 카푸아 공작"을 왕호에 덧붙였고, 여러 요충지에 용병들을 주둔시키는 등 남부 이탈리아를 자국의 영역으로 확고히 하겠다는 의사를 공공연히 드러냈다. 여기에 동생의 죽음에 연루된 모든 공범을 잡기 위해 의심되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

처음에 러요시에게 복종했던 이탈리아 귀족들은 그의 이같은 강압 정책에 분노해 봉기를 일으켰고, 교황 클레멘스 6세는 헝가리가 나폴리 왕국을 차지해버리면 너무 강해져서 교황령까지 위협할 것을 우려해 그가 나폴리를 통치하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다. 급기야 추기경 회의를 소집한 뒤 조반나 1세의 남편 살해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러요시 1세는 더 많은 병력을 이탈리아에 상륙시켜서 이탈리아 귀족들을 굴복시키려 했지만, 때마침 중세 흑사병이 돌면서 많은 병사들이 죽어나가자 어쩔 수 없이 1348년 5월 헝가리로 철수했다. 그는 울리히 볼프하르트(Ulrich Wolfhardt)를 나폴리 총독으로 임명했지만, 울리히는 조반나 1세가 9월에 나폴리로 귀환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1348년 8월 5일 베네치아와 8년간 휴전을 맺기로 합의한 러요시는 1349년 말 에르데이의 보이보드 러크피치 이슈트반(Lackfi István 1305~1353)이 이끄는 새로운 헝가리군을 나폴리로 파견했다. 그들은 카푸아, 아베르사 등 여러 요새를 파괴했지만, 독일 용병들이 도중에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헝가리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흑사병이 헝가리에 도래하면서 많은 이들이 사망했고, 급기야 왕비 마르케타마저 흑사병에 걸려 사망했다. 러요시 역시 흑사병에 걸렸지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을 이어가는 건 무리라고 여긴 러요시는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조반나 1세를 폐위한다면 나폴리 왕국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그만두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교황이 제안을 거부하자, 그는 1350년 4월 나폴리로 친정했다. 그는 바를레타(Barletta)에서 용병들의 반란을 진압한 뒤 각지를 진군하며 약탈과 파괴를 자행해 누구도 감히 원정을 방해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려 했다. 그러나 민중은 이에 두려움을 품긴 커녕 격렬하게 저항했고, 원정은 갈수록 힘겨워졌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병사들을 독려했고, 요새를 공략할 때 친히 사다리를 타고 기어올라갈 정도로 분투했다. 8월 3일 나폴리 왕국의 핵심 요새인 아베르사가 함락되자, 조반나 1세는 또다시 나폴리에서 마르세유로 망명했다.

그러나 아베르사를 공략하던 중 왼쪽 다리에 화살이 박혀 중상을 입은 데다, 주민들의 저항이 갈수록 심해지고 군자금이 바닥나서 더 이상 원정을 이어갈 수 없었던 러요시는 헝가리로 철수했다. 그 후 러요시와 조반나 1세의 남편인 루이지( 루이지 1세)는 교황청의 중재에 따라 6개월간 휴전을 맺기로 했다. 교황청은 러요시에게 조반나 1세가 언드라시 암살 사건에 얼만큼 관여했는지를 다시 조사하겠다고 약속했고, 러요시는 헝가리로 끌고 갔던 공작들을 풀어주는 대가로 30만 플로린을 받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을 살레르노의 공작이자 산탄젤로의 영주라고 칭하며, 조부인 카로이 마르텔 이래로 나폴리 왕국에 지분이 있음을 과시했다.

나폴리 왕국과의 전쟁을 마무리한 러요시는 1351년 6월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3세의 요청에 따라 헝가리군을 이끌고 크라쿠프로 진군했다. 그는 그곳에서 카지미에시 3세와 합세한 뒤 루테니아 왕국의 여러 도시들을 공략한 리투아니아인과의 전쟁을 준비했다. 그러던 중 카지미에시 3세가 병에 걸려 후방에 후송되면서, 그가 폴란드-헝가리 연합군의 유일한 사령관이 되었다. 그해 7월, 러요시는 리투아니아 대공 켕스투티스(Kęstutis)[9]를 공격했다. 이에 켕스투티스는 8월 15일 그에게 사절을 보내 헝가리 왕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형제들과 함께 부더에서 세례를 받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켕스투티스는 폴란드-헝가리 연합군이 철수한 뒤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러요시는 켕스투티스를 징벌하기 위해 재차 공세를 개시했지만, 그의 원정에 참여한 프워츠크 공작 볼레스와프 3세가 리투아니아군의 습격으로 전사하면서 군대의 사기가 떨어지자 어쩔 수 없이 부더로 철수했다. 이때 교황 사절들이 그를 찾아와서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을 정벌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351년 말 의회를 소집했지만, 귀족들은 거듭된 전쟁에 지친 데다 막대한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기들의 재산을 갈취하는 그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러요시는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1222년 언드라시 2세가 귀족들의 특권을 공인한 금인칙서를 따르겠다고 선언했다. 단, 아들을 두지 못한 귀족들이 후계자를 임의로 결정하는 것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대신, 남자 후손이 없는 귀족의 재산을 친척에게 물려주고, 남자 친척이 없으면 왕실에 넘기게 했다.

1352년 3월, 러요시는 벨츠(Belz)를 포위 공격하던 카지미에시 3세와 합류해 성공적으로 함락시켰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대공 알기르다스(Algirdas)[10]가 타타르 용병들을 대규모로 고용해 포돌레로 쳐들어오자, 러요시는 본국이 침탈당할 것을 우려해 헝가리로 귀환했다. 교황 클레멘스 6세는 그해 5월에 리투아니아와 타타르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하고, 러요시가 향후 4년간 헝가리 교회 수입에서 십일조를 징수할 권리를 승인했다. 그러면서 헝가리에 인접한 이교도들과 교회 분열주의자들의 땅을 점령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이에 고무된 러요시는 1354년 4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킵차크 칸국을 향한 원정을 개시했다. 헝가리군이 킵차크 칸국에 밀려와서 각지를 약탈하고 파괴하자, 자니베크 칸은 두려움을 느끼고 다시는 리투아니아인들을 돕지 않고 헝가리를 적대하지 않겠다는 조건하에 러요시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후 킵차크 칸국은 헝가리를 공격하지 않았다.

러요시는 여세를 몰아 세르비아 왕국을 침공했다. 헝가리군의 강력한 전투력에 밀린 스테판 두샨은 교황의 우위를 인정하겠다고 밝혔고, 러요시는 이에 만족하며 수도로 귀환했다. 1355년, 러요시는 리투아니아에 맞서는 카지미에시 3세에게 원군을 보내는 한편 스위스 서약 동맹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2세[11]에게도 보조군을 보냈다. 이 무렵 베네치아 대표단이 찾아와서 달마티아가 베네치아의 영토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6,000 내지 7,000 황금 두카트를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러요시는 달마티아 탈환 계획을 포기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베네치아를 협공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2세와 아퀼레이아 총대주교 니콜라우스와 동맹을 맺고, 크로아티아 영주들을 부추겨 달마티아 요새인 킬리스(Klis)를 공략했다.

1356년 여름, 러요시는 베네치아를 급습해 7월 27일 트레비소를 포위했다. 그는 가을에 돌아갔지만, 헝가리군은 포위를 이어갔다. 얼마 후 교황 인노첸시오 6세가 베네치아와 헝가리의 평화 협약을 중재했다. 교황은 러요시를 "교회의 기수"로 임명하면서, 교황령에서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영주들을 토벌해달라고 요청했다. 러요시는 러크피치 미클로시에게 분견대를 맡겨 교황을 돕게 한뒤, 자신은 1357년 7월 달마티아로 진군해 스플리트, 트로기르, 시베니크를 별다른 저항 없이 공략하고 여세를 몰아 자다르를 탈환했다. 1358년 2월 보스니아 통치자 트브르트코 1세(Tvrtko I)는 달마티아에 가지고 있는 모든 영토와 여러 섬들을 헝가리에게 넘기고 러요시를 주권자로 섬기겠다고 맹세했다. 뒤이어 라구사 공화국도 러요시의 종주권을 받아들였고, 달마티아의 여러 도시들은 매년 공물과 해군을 제공하며는 대가로 자치권과 무역의 자유를 인정받았다.

이렇듯 러요시가 주변 국가들을 상대로 적극적인 공세를 개시하던 와중인 1355년 12월 20일, 1346년부터 세르비아 제국 차르를 칭하고 발칸 반도에 위세를 떨쳤던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이 급사했다. 뒤이어 차르에 오른 그의 아들 스테판 우로시 5세는 "강인한 왕"이라는 평판을 받으며 만인의 존경과 두려움을 샀던 부친과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그는 외모가 훤칠하고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으나, 좋은 군인이 아니었고, 현명한 정치가도 아니었으며, 아버지가 애써 일궈낸 제국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도 없었다. 일찍이 두샨에 의해 각지의 데스포티스로 세워졌던 신하들은 유약한 차르의 등극을 틈타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고, 세르비아는 붕괴 위기에 직면했다. 러요시는 이 때를 틈타 세르비아를 몰아붙이기로 하고, 1359년 세르비아를 쳐들어갔다. 스테판 우로시 5세가 전투를 회피하자, 그는 세르비아 북부의 여러 마을을 약탈한 뒤 귀환했다.

1360년경, 러요시는 헝가리 왕국에 거주하는 유대인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이에 거부한 자들은 강제 추방되었고, 그들의 부동산은 몰수되었다. 다만 추방된 유대인들은 개인 자산을 가지고 갈 수 있었고 대출금을 회수할 수 있었다. 1361년 8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와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4세는 러요시의 동맹자인 아퀼레이아 총대주교를 상대로 동맹을 맺었다. 헝가리 서쪽 국경에 강력한 연합이 결성되는 것을 염려한 러요시는 지난날 자신과 맞섰던 조반나 1세의 남편인 루이지 1세에게 형제 중 한 명을 부더로 보내달라고 요청한 뒤, 그 형제를 데리고 루돌프 4세와 총대주교간의 화해를 중재했다.

이후 카를 4세에게 사절을 보내 화해를 주선했지만, 황제는 러요시의 어머니를 창녀라고 모욕했다. 어머니가 모욕당한 것에 분노한 러요시는 군대를 총동원하여 트렌첸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동맹을 맺어뒀던 이들이 원군을 보내주지 않는데다 신성 로마 제국과 정면 대결하는 것은 무익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그는 카지미에시 3세의 중재에 따라 카를 4세와 평화 협상을 벌였다. 1363년 5월 8일, 양자는 우헤르스케흐라디슈테(Uherské Hradiště)에서 평화 협약을 맺고 화해했다.

1363년 3월 31일, 교황 우르바노 5세는 키프로스의 피에르 1세의 요청에 따라 지중해의 무슬림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했다. 이때 우르바노 5세는 러요시에게 십자군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면서, 3년간 헝가리 교회 수입에서 십일조를 거둬들이는 권리를 승인했다. 하지만 러요시는 주변국과의 마찰이 심했기에 군대를 섣불리 보내지 못했다. 1364년 9월 키프로스의 피에르 1세가 크라쿠프에 방문해 러요시를 비롯한 12명의 유럽 군주들에게 십자군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러요시는 원조를 약속했지만 이를 이행하지 못했다. 이후 유대인이 추방된 뒤 국가 경제가 악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러요시는 1364년 유대인이 헝가리로 돌아오는 것을 허용하겠다는 칙령을 반포했다.

1365년 2월, 러요시는 테메슈바르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그는 당초에 공물을 바치기를 거부하는 왈라키아 공국을 응징하려 했지만, 왈라키아 공작 블라디슬라브 블라이쿠(Vladislav Vlaicu 1325~1377)가 복종 의사를 밝히자 방향을 바꿔 불가리아 쪽을 공략하기로 했다. 당시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이반 알렉산더르는 1355년 후계자로 정했던 미하일 아센 4세가 흑사병에 걸려 사망하자 막내 아들 이반 시슈만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에 내심 자신이 후계자가 되리라 여겼던 또다른 아들 이반 스라치미르가 반발하여 영지로 삼고 있던 비딘에서 외교권을 자기 마음대로 행하고 중앙 정부의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않는 등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러요시는 그런 그에게 비딘의 종주권을 자신에게 넘긴다면 불가리아의 왕으로 임명하겠다고 제안했다. 스라치미르가 거절하자, 러요시는 1365년 5월 1일 비딘을 침공해 6월 2일 함락시키고 스라치미르를 사로잡았다. 그는 즉시 스라치미르를 포함한 포로들이 가톨릭 세례를 받도록 강요했다.

1366년 초, 동로마 제국 황제 요안니스 5세가 부더에 있던 러요시를 찾아와서 발칸 반도에 진출하고 있는 오스만 베이국을 물리쳐달라고 요청했다. 황제는 가톨릭과 정교회의 통합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고, 러요시는 원군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교황 우르바노 5세가 황제가 약속을 이행하기 전에 원군을 보내지 말라고 권고했고, 요안니스 5세가 정교회 성직자들의 강력한 반대로 인해 교회 통합을 이루지 못했기에 헝가리군이 투입되는 일은 없었다.

한편, 러요시는 왕국 내 이교도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데 사력을 다했다. 그의 치세 동안 쿠만인들의 개종을 이뤄냈고, 비딘을 공략한 뒤 정교회 신자인 불가리아인을 개종시키기 위해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을 그곳에 대거 파견했다. 여기에 더해 1366년 왕국 내 모든 세르비아인 사제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고 세례를 다시 받게 하라는 칙령을 반포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수십 개의 새로운 수도원을 세웠는데, 특히 프란치스코회와 바오로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그는 1367년 페치(Pécs) 신학 대학교를 설립해 헝가리 성직자들을 양성하려 했다. 그러나 대학은 재정난으로 인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다가 1390년 문을 닫았다.

1368년, 왈라키아 공국의 블라디슬라브 블라이쿠가 헝가리를 상대로 반기를 든 뒤 이반 시슈만과 동맹을 맺고 비딘을 포위했다. 러요시는 이에 맞서 그 해 가을에 도나우 강 하류로 진군하면서 에르데이 보이보드 러크피치 미클로시에게 왈라키아를 침공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알로미차 강 계곡을 행진하던 중 왈라키아인들의 습격을 받고 괴멸되었고, 미클로시는 가까스로 전장을 탈출했다. 이 소식을 접한 러요시는 본군을 이끌고 왈라키아로 쳐들어가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고, 블라디슬라브는 1369년 여름에 귀순했다. 이후 러요시는 이반 스트라치미르를 비딘의 통치자로 복위시켰고, 스트라치미르는 그 대가로 러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두 딸을 인질로 보냈다.

1360년대 후반부터 나병으로 의심되는 피부병을 앓기 시작한 러요시는 가톨릭에 더욱 깊이 빠졌다. 그는 매일 기도를 드리고 종교적 사색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1370년 11월 5일 카지미에시 3세가 사망한 뒤 11월 17일 폴란드 국왕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헝가리에 전력을 쏟고 싶었던 그는 폴란드 공주였던 어머니 엘즈비에타를 폴란드의 섭정으로 세운 뒤 헝가리로 돌아갔다. 이때 폴란드 왕관과 보석들, 그리고 카지미에시의 두 딸 안나와 야드비가가 헝가리로 옮겨졌기에, 폴란드인은 자국이 헝가리의 속국이 되어버렸다며 불만을 품었다.

1371년 9월 26일, 오스만 베이군 마리차 강 전투에서 세르비아군을 궤멸시켰다. 이에 세르비아 영주들 중 한 명인 라자르 흐레벨야노비치는 러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튀르크군에 맞설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1세 역시 러요시에게 튀르크에 맞서 싸우라고 촉구했다. 그러면서도 밀라노 공작 베르나보 비스콘티(Bernabò Visconti)가 교황령을 위협하고 있으니 이를 격퇴하기 위해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여기에 더해, 베네치아 공화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파도바 공국으로부터 원군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그는 어느 쪽을 먼저 도울 지를 고심한 끝에 러크피치 미클로시에게 파도바를 구원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베네치아군은 1373년 9월 23일 트레비소에서 헝가리군을 격파하고 미클로시를 포로로 잡았고, 러요시는 어쩔 수 없이 베네치아와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1373년 가을, 폴란드 귀족들이 엘즈비에타의 통치에 집단 반발해 독립할 움직임을 보였다. 그는 크라쿠프로 가서 이들과 1년간 협상한 끝에 1374년 9월 17일 폴란드 귀족들이 왕에게 지불하는 세금을 대폭 줄이고 폴란드군을 외국에 보낼 시 보수를 약속했다. 그 대가로 귀족들로부터 자신의 딸들이 폴란드를 상속받는 것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피아스트 왕조의 일원이었던 그니에프코보 공작 브와디스와프가 폴란드 국왕을 자칭하면서 러요시에 맞섰다. 그는 브워츠와베크(Włocławek), 이노브로츠와프(Inowrocław), 즈워토리아(Złotoria) 등지를 빠르게 확보했다. 러요시는 즉각 군대를 이끌고 그를 공격했고, 브와디스와프는 지지자들에게 배신당하여 세력을 빠르게 상실하자 기사 울리히 폰 오스텐이 소유한 국경 도시 드레즈덴코로 피신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는 울리히와 용담공 필리프가 보낸 부르고뉴 공국 군대의 지원에 힘입어 러요시에 계속 저항했다.

1375년 5월, 왈라키아의 새로운 통치자 라두 1세가 불가리아 차르 이반 시슈만, 오스만 술탄국의 무라드 1세와 동맹을 맺고 헝가리에 대항했다. 그는 왈라키아로 군대를 파견해 왈라키아-불가리아 연합군을 격파하고 세베린 바나트를 공략했다. 그러나 1375년 여름에 왈라키아군이 에르데이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했고, 이들과 함께 하던 튀르크군은 바나트를 철저히 약탈했다. 설상가상으로, 리투아니아군이 루테니아 왕국을 석권한 뒤 폴란드로 쳐들어와서 1376년 11월 크라쿠프에 거의 도달했다. 이에 폴란드인들은 크라쿠프에서 엘즈비에타를 상대로 폭동을 일으켰다. 이때 160여 명에 달하는 하인들이 살해당하자, 엘즈비에타는 헝가리로 도주했다. 브와디스와프 역시 공세를 이어가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러요시는 일단 폴란드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하고, 크라쿠프로 가서 폭도들을 처형하고 질서를 재정비한 뒤 브와디스와프를 몰아붙인 끝에 1377년 3월 브제시치 쿠야프스키(Brześć Kujawski)에서 브와디스와프에게 1만 플로린을 주고 헝가리의 펀논헐머에서 수도원장 직을 맡게 해주는 대가로 폴란드 왕위를 포기하게 했다. 이후 1377년 여름 루테니아로 친정해 리투아니아군을 격파하고 헤움과 벨츠를 공략했다. 이후 옛 루테니아 왕국 대부분 지역을 헝가리 왕국에 합병시켰다. 결국 라트노 공작 페도르, 포돌레 공작 알렉산더르와 보리스 등 리투아니아 공작들은 러요시의 패권을 인정했다.

1377년, 그동안 러요시를 주군으로 섬기던 보스니아의 트브르트코 1세가 왕으로 등극했다. 그가 이를 승인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불분명하다. 1378년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전쟁을 벌이자, 러요시는 제노바를 지원했고 트로기르를 제노바 함대의 정규 기지로 내주었다. 1378년 9월 20일 교황 우르바노 6세에게 반기를 든 추기경들이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를 세우면서 서방교회 대분열 시대가 개막했다. 그는 우르바노 6세를 합법적인 교황으로 인정하고 그를 위해 병력과 물자를 지원했다.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가 클레멘스 7세를 지지하자, 우르바노 6세는 1380년 6월 17일 그녀를 파문하고 러요시의 궁정에 머물고 있던 두라초의 카를로를 나폴리의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했다. 카를로는 헝가리 왕위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러요시의 지원을 이끌어낸 뒤 남부 이탈리아로 쳐들어가 1년 안에 왕국 전역을 장악하고 1381년 8월 26일 조반나 1세의 항복을 받아낸 뒤 카를로 3세로서 나폴리 왕위에 올랐다. 한편, 러요시는 아메데오 6세의 중재를 받아 베네치아와 평화 협상을 벌인 끝에 1381년 8월 24일 사보이아 백국 토리노에서 평화 협약을 맺었다. 베네치아는 달마티아를 포기하고 헝가리에 매년 7,000 플로린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러요시는 테베의 성 바오로의 유해를 부더센틀린치(Budaszentlőrinc)에 있는 바오로 수도원으로 옮기도록 했다.

1382년 건강이 악화된 러요시는 폴란드 고위 성직자들과 영주들을 조욤(Zólyom 현재 슬로바키아 즈볼렌)에 소집한 뒤 딸 마리어와 마리어의 약혼자 지기스문트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1382년 9월 10일 너지솜버트에서 사망했고, 세케슈페헤르바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2.4.3. 앙주 왕조의 몰락(1382년 ~ 1395년)

1382년 러요시 1세가 사망한 뒤, 그의 남은 딸 중 큰딸 마리어가 왕위에 올랐다. 모후 엘리자베타가 당시 11살이었던 그녀를 대신해 행정부를 관리했다. 엘리자베타는 결정을 내릴 때 궁정백을 맡고 있던 가라이 미클로시(Garai Miklós)에게 의존했다. 그러나 많은 귀족들은 여왕의 등극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나폴리 왕국의 국왕이며 이슈트반 5세의 딸 마리어의 외증손인 카를로 3세가 헝가리 국왕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카를로 3세는 1380년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때 러요시 1세에게 자신을 지원하는 대가로 헝가리 왕위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기에 마리어의 등극에 섣불리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한편, 폴란드 귀족들은 1382년 11월 25일 라돔스코에서 열린 회의에서 러요시 1세의 딸을 왕으로 모시는 것에 다시 한 번 동의를 표했지만 여왕과 그녀의 남편이 폴란드에 거주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여기에 그니에즈노(Gniezno) 대주교 보잔타(Bodzanta)와 날레치 가문은 폴란드 피아스트 왕조의 분가 출신인 마조프셰 공작 시에모비트 4세를 폴란드 국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엘리자베타는 마리어가 헝가리를 떠나 폴란드로 갔다가는 헝가리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했기에, 작은딸 야드비가를 폴란드의 여왕으로 세우기로 했다. 1384년 10월 16일, 야드비가는 크라쿠프 바벨 대성당에서 폴란드 왕위에 올랐다.

1383년 봄, 브라나(Vrana)의 지도자 팔리스나의 야노시는 마리어와 엘리자베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크로아티아의 반(Ban)인 라코비치 이슈트반이 곧바로 진압군을 이끌고 브라나를 포위했고, 야노시는 보스니아로 도주했다. 브라나 수비대는 11월 4일 항복했다. 이후 엘리자베타는 딸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프랑스에 사절을 보내 샤를 6세의 동생이며 지난날 마리어의 언니 커털린과 약혼한 적이 있는 루이 1세 도를레앙과 마리어의 결혼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협상은 러요시 1세가 생전에 정한 대로 지기스문트와 여왕을 결혼시켜야 한다고 여겼던 헝가리 귀족들의 반감을 샀다. 또한 고위 성직자들은 프랑스인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를 지지하는 이단적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는 이유로 프랑스 왕자와 자국 여왕의 결혼에 반대했다. 헝가리에 체류하고 있던 지기스문트는 엘리자베타에게 자신이 마리어의 약혼자임을 상기시키며 결혼을 진행하라고 요청했지만 거부당하자 1385년 초에 헝가리를 떠났다.

1385년 5월 프랑스 대표단이 헝가리를 방문한 후, 마리어는 프랑스 왕자 루이와 약혼했다. 또한 엘리자베타는 루이 왕자와 마리어의 결혼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이슈트반 미클로시를 반역자로 몰아붙이며 해임했으며, 주민들에게 결혼을 반대하는 인사 및 그들의 친척을 지원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칙령을 내렸다. 이에 팔 호르바티(Pál Horváti) 주교를 비롯한 반 엘리자베타 세력은 1385년 8월 카를로 3세에게 헝가리로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아달라고 요청했다. 한편 지기스문트는 사촌인 모라비아의 요프스트(Jobst)와 프로코프(Prokop)와 함께 헝가리 북부로 쳐들어가서 포조니를 점령하며 헝가리 정부를 압박했다.

1385년 9월, 카를로 3세는 헝가리 귀족과 성직자들의 요청에 따라 달마티아의 센(Senj)에 상륙한 뒤 자그레브로 진군했다. 이에 당황한 엘리자베타는 지기스문트를 부더로 초청한 뒤 그해 10월 마리어와 지기스문트의 결혼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지기스문트는 공동 왕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실권도 얻지 못했다. 이에 화가 난 지기스문트는 부더를 떠나버렸고, 카를로 3세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부더로 행진했다. 헝가리 귀족들이 대거 카를로에게 귀순하자, 엘리자베타는 별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1385년 12월 초 딸 마리어와 함께 그를 마중한 뒤 함께 부더에 들어갔다.

이후 마리어는 카를로가 자신을 죽일 것을 우려해 12월 중순에 퇴위했고, 카를로는 처음에는 총독이라는 칭호를 칭했지만 의회에서 왕으로 등극해줄 것을 요청하자 1385년 12월 31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카로이 2세로서 헝가리 왕으로 등극했다. 카로이 2세는 마리어와 엘리자베타를 감금하지 않고 두 사람이 부더의 왕궁에서 살 수 있게 해줬다. 그러나 엘리자베타는 어떻게든 딸이 왕위를 되찾아야 한다고 여기고 가라이 미클로시(Garai Miklós)와 함께 카로이 2세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왕이 마시는 음료수를 담은 컵을 가지고 다니는 시종 포르가치 벌라주(Forgách Balázs)에게 왕을 죽여주면 기메스(Gimes, 현재 슬로바키아 옐레넥)를 주겠다고 설득했다. 벌라주는 이에 눈이 돌아가서 엘리자베타의 뜻에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1386년 2월 7일, 카로이 2세는 엘리자베타의 요청에 따라 부더 궁정을 방문했다. 이후 엘리자베타와 카로이 2세가 대화를 나누던 중, 벌라주가 둔기로 왕의 머리를 가격해 중상을 입혔다. 카로이는 비셰그라드로 실려간 뒤 2월 24일에 사망했다. 마리어는 곧바로 복위했고, 엘리자베타는 전국에 "마리어 여왕께서 신성한 왕관을 되찾았다"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얼마 후, 팔 호르바티를 비롯한 반 엘리자베타 세력이 카로이 2세의 아들 라슬로[12]를 새 왕으로 받들겠다고 선포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1386년 4월, 지기스문트와 그의 이복형이자 독일왕 겸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4세가 헝가리를 침공했다. 엘리자베타와 마리어는 두 사람과 만나서 협상한 끝에 그해 5월 초 마리어가 지기스문트의 아내임을 공인하고 지기스문트는 바그 강 서쪽의 땅을 접수한 뒤 모라비아의 요프스트와 프로코프에게 넘기기로 했다. 지기스문트가 협상 결과에 만족하여 보헤미아로 돌아간 뒤, 엘리자베타는 라슬로를 지지하는 헝가리 남부 지역을 찾아가서 딸을 여왕으로 받들어달라고 호소하기로 마음먹었다.

1386년 7월 15일, 엘리자베타, 마리어 모녀는 가라이 미클로시와 소수의 수행원들과 함께 자코보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이 고르자니에 이르렀을 때, 호바트 야노시와 그의 가신들이 습격했다. 마리어 모녀의 수행원들과 가라이 미클로시는 항전했지만 모조리 제압되었다. 이후 포르가치 벌라주와 가라이 미클로시는 참수되었고, 그들의 머리는 여왕의 마차에 던져졌다. 마리어 모녀는 자그레브 주교령의 곰네크(Gomnec) 요새 지하감옥에 감금되었다가 다시 아드리아 해 연안의 노비그라드(Novigrad) 성으로 끌려갔다. 이후 반란자들은 라코비치 이슈트반을 라슬로 왕의 궁정백으로 선출하고 지기스문트를 섭정으로 삼기로 했다. 지기스문트는 이 소식을 접한 뒤 군대를 끌어모아 1387년 1월에 슬라보니아를 침공했지만 반란군을 물리치지 못했다. 얼마 후, 호바트 야노시는 엘리자베타를 끌어낸 뒤 마리어가 보는 앞에서 그녀의 목을 졸라 죽였다.

이렇듯 헝가리가 혼란에 빠져 있는 틈을 타, 폴란드군이 쳐들어와서 루테니아 왕국을 공략했다. 지기스문트는 1387년 3월 31일에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을 칭했고, 그의 지지자 중 한 사람인 크르크의 이반은 조반니 바르바리고(Giovanni Barbarigo)가 지휘하는 베네치아 공화국 함대의 도움으로 노비그라드 성을 포위했다. 1387년 6월 4일, 그들은 노비그라드 성을 함락시키고 마리어를 해방시켰다. 그 후 지기스문트와 마리어가 헝가리의 공동 군주가 되었지만, 마리아에게 주어진 권력은 미미했다.

카로이 2세의 아들이자 나폴리 왕국의 국왕 라디슬라오는 지기스문트의 집권을 받아들이지 않고 크로아티아-달마티아-헝가리 남부 영주들을 포섭해 지기스문트를 상대로 전쟁을 이어갔다. 지기스문트는 이에 맡서 브렌덴부르크를 모라비아의 변경백이자 자신의 사촌인 요프스트에게 저당잡히는 대가로 군자금을 지원받은 뒤 나폴리 왕국 및 반란자들을 상대로 투쟁했다. 그러나 보유한 군사력이 반란군을 압도할 수준이 되지 못하는 데다 보스니아 왕국 트브르트코 1세가 반란군을 지원하는 바람에 좀처럼 승기를 잡지 못하자, 막강한 사병과 드넓은 영지를 보유한 치릴레이(Czillei)-가라이(Garai) 가문 연합의 지원을 받는 대가로 왕실 재산의 상당 부분을 양도해야 했다.

1390~1391년, 가라이 미클라시가 이끄는 왕실군이 트브르트코 1세 휘하의 보스니아군을 격파하면서 보스니아 왕국이 반란군을 더 이상 후원하지 못하게 했다. 이후 반란군의 위세는 점차 약화되다가 1394년 7월에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고, 반란군 지도자 호바트 야노시가 사로잡혔다. 지기스문트는 그를 살려주려 했지만, 일전에 어머니를 잔혹하게 죽인 야노시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던 마리어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처형했다.

1395년 5월 17일, 지기스문트의 아이를 임신중이던 마리어는 부더 숲에서 사냥을 즐기던 중 말이 발을 헛디딛는 바람에 낙마했다. 그녀는 현장에서 아기를 유산한 뒤 곧 숨을 거두었고, 유해는 너지바러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폴란드 여왕이자 그녀의 여동생인 야드비가는 자신이 헝가리 왕위를 이어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헝가리 귀족들은 이를 무시하고 지기스문트를 단독 군주로 받들었다. 이리하여 헝가리의 앙주 왕조는 단절되었다.

2.5. 룩셈부르크 왕조(1395년 ~ 1437년)

2.5.1. 지기스문트(1395년 ~ 1437년)

지기스문트는 헝가리의 단독 국왕이 된 직후인 1396년 9월 말 오스만 술탄국을 향한 십자군에 참여했으나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참패했다. 그는 잠시 붙잡혔다가 잠시 붙잡혔다가 첼레 백작 헤르만 2세의 활약으로 간신히 탈출한 다음, 어선을 타고 빠져나가 도나우 강에 있던 베네치아 군선에 올라 크로아티아로 피신했다. 크로아티아에 도착한 지기스문트는 크로아티아의 주요 도시인 크리제브치(Križevci)를 방문한 뒤 자신은 반대자들에게 개인적인 복수를 시도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의 서면 보증서를 발표했다. 이에 나폴리 왕 라디슬라오를 지지하던 라코비치 이슈트반과 추종자들이 그와 만나서 협상하기 위해 크리제브치의 사보르 교회에 찾아왔다. 크로아티아의 법률에는 누구도 무기를 들고 사보르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라코비치와 추종자들은 교회 앞에 무기를 넘기고 예배당에 들어섰고, 라코비치의 사병대는 도시 밖에 주둔했다.

그러나 사보르 내부에서 완전 무장을 한 채 대기하고 있던 지기스문트의 지지자들은 라코비치와 추종자들이 들어오자마자 그들을 에워싼 뒤 니코폴리스 전투 때 왕을 위해 제대로 싸우지 않아 튀르크인들에게 패배했다며 책임을 물었다. 라코비치가 사보르 내에서 완전무장한 것에 따져물으며 맞대응하자, 그들은 검을 뽑아들어 라코비치와 조카 이슈트반, 그리고 추종자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라코비치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도시 밖에 주둔하고 있던 사병대가 도시로 진입하여 지기스문트 지지자들과 시가전을 벌였지만 격퇴되었다.

이후 프로다비치 이슈트반이 이끄는 크로아티아 귀족들이 지기스문트를 잡으려 하자, 지기스문트는 1397년 3월 2일 신하들과 함께 드라바 강을 건너 헝가리로 도주했다. 그 후 헝가리 귀족과 성직자들이 자기 지시에 제대로 따르지 않는 상황에 염증을 느끼고 독일과 보헤미아의 왕위 계승권을 확보하는 데 관심을 돌렸다. 그는 바츨라프 4세를 부추겨서 자신을 신성 로마 제국의 총대리자로 삼게 했다. 그러나 1400년 8월 20일 바츨라프 4세가 선제후들에 의해 독일 왕위에서 물러나고 팔츠 선제후 루프레히트 3세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401년 봄, 지기스문트는 모라비아 변경백 요프스트와 상호 상속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자 자기들의 동의없이 상속 계약을 맺은 것에 분노한 브라나 공작 베베크 임레(Bebek Imre)와 에스테르곰 대주교 야노시가 그해 4월 28일 사병들을 이끌고 지기스문트를 납치한 뒤 부더 성에 수감했다. 이 소식을 접한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4세와 모라비아 변경백 요프스트는 지기스문트를 해방시키기 위해 군대를 조직했다. 이들은 바그 강과 도나우 강 사이로 진군하여 너지솜버트, 프라우엔마르크, 프레스부르크를 공략했다.

지기스문트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헝가리 귀족들은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2세를 헝가리 국왕으로 세우려 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을 비롯한 독일계 국가의 반발이 거센데다 귀족 내부에서도 폴란드 국왕을 섬기는 것에 반발하는 이들이 적지 않아서 무산되었다. 결국 지기스문트는 1401년 10월 27일 자신을 납치한 자들을 처벌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헝가리 국왕으로 복위했다. 이후 보헤미아 귀족들이 바츨라프 4세를 상대로 일으킨 반란을 지원하다가 1402년 3월 6일 헤르만 2세와 함께 바츨라프 4세를 프라하의 흐라드친에서 체포한 뒤 에페르딩 근처의 샤운베르크 성으로 이송한 후 보헤미아를 18개월간 통치했다. 그러다가 1403년에 바츨라프 4세를 석방시켜서 보헤미아를 다스리게 했지만, 실권은 본인이 계속 쥐었다.

1403년, 나폴리 왕 라디슬라오가 재차 헝가리로 쳐들어왔다. 그는 자다르를 공략한 뒤 헝가리 귀족들에게 자신을 왕으로 받들라고 요구했다. 많은 귀족들이 이에 호응해 반란을 일으켰지만, 지기스문트는 치릴레이-가라이 연합 가문의 지원과 독일인 용병들의 분투에 힘입어 라디슬라오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라디슬라오는 달마티아로 후퇴했다가 나중에는 그곳의 도시들을 베네치아 공화국에 100,000 두카트에 팔고 떠났다. 이후에도 헝가리 각지에서 발발한 반란에 시달리던 지기스문트는 부더에 소집된 의회에서 자신을 적대하는 자들을 사면하겠다고 선언해 내전을 어느정도 잠재웠다.

1404년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4세가 27세의 나이에 이질로 사망했다. 후계자인 알브레히트 5세는 겨우 7살이었기 때문에 삼촌 빌헬름이 후견인을 맡았다. 빌헬름 공작이 라디슬라오의 누이인 조반나와 결혼하고 보헤미아 왕 바츨라프 4세와도 동맹을 맺으면서, 지기스문트는 또다시 압박을 받았다. 그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1405년 헤르만 2세의 막내딸 바르바라와 결혼함으로써 당시 상당한 군사력과 부를 갖추고 있던 첼레 백국의 지원을 받았다. 또한 이탈리아 중부 도시 국가들과 동맹을 맺어 라디슬라오가 중부 이탈리아로 진출하려는 시도를 저지하게 했다. 1407년 보스니아 일대가 라디슬라오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자신에게 반기를 들자, 지기스문트는 5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하여 보스니아로 진군해 1408년 도보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보스니아 귀족 200여 명을 학살했다.

도보로 전투에서 승리한 뒤, 지기스문트는 개인 기사단인 드라곤 기사단을 창설했다. 이 기사단의 구성원들은 가라이 미클라시, 첼레 백작 헤르만 2세, 스티보르츠의 스티보르, 피포 스파노 등 그의 정치적 동맹자들과 추종자들이었다. 이들은 서로 교역할 때 관세를 매기지 않았고, 외국 상품에 대해 공동으로 관세를 부과했으며, 국가 전체의 무계 단위와 척도를 표준화함으로써 교역을 장려했다. 또한 독일인이 자신의 영역에 이주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장려했고, 이들에게 주도적인 역할을 맡겼다.

한편, 지기스문트는 오스만 술탄국의 팽창을 저지하고자 세르비아 공작 스테판 라자레비치를 봉신으로 삼고 세르비아 북서부와 헝가리 남부 일대를 수호하는 임무를 맡겼다.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1427년 사망할 때까지 지기스문트의 충실한 봉신으로서 오스만 술탄국의 공세를 저지했고, 그의 뒤를 이은 게오르게 브란코비치도 지기스문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난도르페헤르바르를 지기스문트에게 돌려줬다. 그 덕분에, 지기스문트는 헝가리 남쪽 국경을 안정화시킬 수 있었다. 그 후 헝가리는 지기스문트의 영지 중에서 유일하게 안정적으로 운영되었고, 지기스문트가 후스 전쟁을 치를 때 많은 헝가리 장병들이 보헤미아로 투입되어 전쟁을 치렀다.

2.6. 내우외환(1437년 ~ 1458년)

1437년 지기스문트가 아들을 얻지 못한 채 사망한 후, 독일왕이자 지기스문트의 사위인 알브레히트 2세가 헝가리 왕이 되었다. 그러나 지기스문트 사후 왈라키아 공국이 오스만 술탄국에 붙어버렸고, 튀르크군은 왈라키아군의 지원에 힘입어 1439년 헝가리 남부로 쳐들어가 그 일대를 초토화했다. 알브레히트 2세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남하하다가 1439년 10월 27일 네슈멜리에서 이질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임신한 아내가 아들을 낳으면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헝가리를 물려주겠으며, 아내와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5세에게 섭정을 맡기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1439년 10월 27일 알브레히트가 사망한 후, 오스만 술탄국의 헝가리 침공을 두려워한 헝가리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은 세상 밖으로 나오지도 않은 아기를 왕으로 받들라는 유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를 왕으로 받들고, 알브레히트 2세의 미망인 엘리자베트에게 브와디스와프 3세와 결혼하라고 제안했다. 엘리자베트는 처음에는 권고를 받아들이려 했지만, 의사로부터 아들을 낳을 거라는 예측을 접하자 남편의 유언대로 집행하기로 작정했다. 그녀는 하녀 헬레네 코타너(Helene Kottanner)에게 비셰그라드 성에 있는 성 이슈트반 왕관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얼마 후 헬레네가 왕관을 성공적으로 빼돌려서 가져왔는데, 바로 그 날 엘리자베트는 진통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엘리자베트는 아들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를 낳았고, 에스테르곰 대주교 세치 데네시(Szécsi Dénes 1410~1465)는 아기에게 세례를 주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였던 오스트리아 공국은 갓난아기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알브레히트 2세의 유언에 따라 프리드리히 3세를 섭정으로 지명했다. 보헤미아에서는 첼레 백작 울리히 2세가 이끄는 가톨릭 귀족들이 유언을 집행하려 했지만, 여전히 강력한 권세를 누리던 후스파 귀족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엘리자베트는 폴란드에 사절을 보내 헝가리 귀족 가문 대표들이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와 협상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헝가리 귀족들은 단호히 거부하고 1440년 3월 8일 브와디스와프 3세를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울라슬로 1세로 선출했다.

브와디스와프 3세는 엘리자베트에게 자신과 결혼한다면 그녀의 아이가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에서 군림하도록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엘리자베트는 브와디스와프 3세의 제안을 거부하고 세케슈페헤르바르에 아들을 데려가서 1440년 5월 15일 세치 데네시의 주관하에 즉위식을 거행했다. 첼레 백작이자 엘리자베트의 사촌인 울리히 2세는 아기 대신에 대관식 선서를 낭독하고, 아기의 머리 위에 왕관을 씌웠다. 6일 후 브와디스와프 3세가 폴란드-헝가리 귀족 연합군을 이끌고 부더에 입성하자,. 엘리자베트는 아들과 함께 쇼프론으로 도주했다.

가라이 라슬로, 브란코비치 주라지, 프리드리히 5세, 첼레 백작 울리히 2세를 포함한 여러 도시와 독일계 군주들은 어린 왕을 지지했지만, 대다수 헝가리 귀족들은 오스만 술탄국의 침략에 맞서려면 아기보다는 성인이 훨씬 낫다고 여겼기에 브와디스와프 3세가 집권하는 편이 낫다고 확신했다. 1440년 6월 29일, 헝가리 의회는 라슬로 5세의 즉위를 무효로 선언했다. 7월 17일 세치 데네시는 압력에 못이겨 헝가리의 초대 국왕인 이슈트반 1세의 무덤에서 가져온 왕관을 브와디스와프 3세의 머리 위에 씌웠다.

엘리자베트는 브와디스와프 3세에 대항하고자 1440년 11월 22일 노이슈타트에서 프리드리히 3세와 협약을 맺었다. 쇼프론을 프리드리히 3세에게 저당잡혔고, 성 이슈트반 왕관 역시 그에게 넘겼다. 이후 라디슬라우스는 프리드리히 3세의 궁정에서 살았다. 또한 그녀는 체코인 용병대장 얀 이스크라(Jan Jiskra z Brandýsa 1400~1469)에게 커셔를 비롯한 12개 마을을 장악하게 했다. 그러나 1441년 초 블라디미르 우즐라키와 후냐디 야노시가 이끄는 헝가리군이 라슬로 5세 지지를 천명한 적군을 상대로 바트셰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브와디스와프 3세와 휘하 지휘관들은 헝가리 서부와 동부 영토를 장악했지만, 엘리자베트의 추종자들은 에스테르곰, 죄르, 프레스부르크 및 여러 도시들과 함께 헝가리 북부 일대를 계속 장악했다.

1442년 오스만 술탄국의 침략이 가시화되자, 더 이상 내전을 벌일 수는 없다고 판단한 브와디스와프 3세는 그해 12월 13일 기르에서 엘리자베트와 만나서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특사 줄리아노 체사리니의 중재 하에 평화 협약을 맺었다. 엘리자베트는 브와디스와프 3세를 헝가리 왕으로 인정했지만, 아들의 왕위 계승권은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3일 후 엘리자베트가 갑작스럽게 사망해버리면서, 라디슬라우스는 고아가 되어버렸다. 라디슬라우스의 헝가리와 보헤미아에서의 통치권은 로쥼베르크의 울리히 2세와 얀 이스크라에 의해 보호되었다. 그러나 헝가리의 대다수 영토는 브와디스와프 3세를 따랐고, 보헤미아 동부는 그를 인정하지 않는 후스파가 지배했다.

그러던 1444년 11월 10일, 브와디스와프 3세가 바르나 전투에서 오스만 술탄국과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당시엔 브와디스와프의 생사가 불분명했기 때문에, 헝가리 귀족들은 긴급 회의를 소집한 뒤 그가 1445년 6월 1일 이전에 헝가리로 돌아오지 못한다면 라디슬라우스를 국왕으로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면서도 어린 왕의 후견인인 프리드리히 5세가 라디슬라우스와 성 이슈트반 왕관을 모두 헝가리로 보내지 않는다면 또다른 왕을 선출하기로 했다.

헝가리 의회는 후녀디 야노시, 우즐라키 미클라시(Újlaki Miklós), 로즈고니 죄르지(Rozgonyi György), 베베크 임레(Bebek Imre), 오르사그 미하이(Ország Mihály), 펀츠러체 센트미클로시(Pancrace Szentmiklósi), 그리고 얀 이스크라 등 7명의 최고 사령관을 선출해 왕국을 통치하게 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5세가 헝가리로 쳐들어가 7월 말까지 쾨세그를 포함한 헝가리 서쪽 국경의 12개 요새를 공략했고, 첼레 백국은 슬라보니아를 침공해 1445년 말에 정복했다. 프리드리히 5세가 라디슬라우스를 보내기를 거부하자, 헝가리 의회는 1446년 6월 6일 후녀디 야노시를 왕이 성년이 될 때까지의 섭정으로 선출했다.

1450년 10월 22일,후녀디 야노시는 프리드리히 5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는 프리드리히 5세가 라디슬라우스가 18세 생일을 맞이할 때까지 후견인이 되는 것에 동의했고, 프리드리히 5세는 후녀디 야노시가 헝가리의 대부분을 통치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귀족들은 성년의 나이가 12세 또는 16세인데 18세는 너무 늦다며 불만을 품었다. 1451년 말 프리드리히 5세가 라디슬라우스를 데리고 로마로 가려 하자, 오스트리아 귀족들이 막으려 들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3세는 기어이 라디슬라우스를 데리고 로마로 가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프리드리히 3세는 오스트리아 귀족들로부터 "라디슬라우스의 후견인 노릇을 그만하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이에 귀족들은 1452년 초 반란을 일으켰고, 보헤미아 가톨릭 귀족들도 이에 호응했다. 반란군은 노이슈타트를 포위했고, 프리드리히 3세는 그들의 압박에 못이겨 9월 4일 라디슬라우스를 첼레 백작 울리히에게 넘기기로 했다.

첼레 백작의 인솔하에 빈으로 이동한 라디슬라우스는 1453년 초 후녀디 야노시와 만난 뒤 그를 헝가리 왕국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왕실 수입을 관리하는 권한도 부여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매년 24,000 플로린의 금을 지불하게 했다. 1453년 1월 29일, 헝가리 의회는 라디슬라우스를 헝가리 왕으로 인정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헝가리의 수도 부더에서 브와디스와프 3세를 지지했던 이들에 대한 사면령을 반포했으며, 왕실의 보조금을 받는 이들의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헌장도 반포했다. 이후 빈으로 돌아간 그는 첼레 백작 울리히의 설득에 따라 이르지를 보헤미아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울리히는 대주교 세치 데네시, 가라이 라슬로, 우즐라키 미클로시 등 헝가리 귀족들과 협약을 맺고 라디슬라우스의 반대자들에 맞서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는 잠재적인 정적으로 간주된 후녀디 야노시를 겨냥한 것이었다.

1453년 10월 28일, 라디슬라우스는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 후 12개월간 프라하에 머물던 그는 1454년 11월 말에 슐레지엔과 모라바를 방문하여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1455년 2월 16일 빈으로 이동해 행정을 돌본 뒤 부더로 이동해 휴녀디 야노시에게 왕실 수입의 일부 관할권을 반환받고 부더, 디오슈죄르[13] 및 왕실에 귀속된 성들에게서 후녀디의 수비대를 철수하도록 설득했다. 그렇게 왕권을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이던 1455년 가을,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메흐메트 2세가 헝가리를 침공할 준비에 착수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라디슬라우스는 1456년 3월 헝가리 의회를 소집해 총동원령을 발동하고 국방비를 충당하기 위한 특별세를 부과했다. 그러나 헝가리로 몰려오는 오스만 제국군의 군세가 생각보다 엄청나자 두려움에 빠진 나머지 사냥을 핑계로 빈으로 피신했고, 후녀디 야노시가 오스만 제국군을 막는 임무를 떠맡았다.

1456년 7월 초, 메흐메트 2세가 헝가리 왕국 남부의 국경도시 난도르페헤르바르(Nándorfehérvár)를 포위했다. 후녀디 야노시가 이끄는 헝가리군은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베오그라드 공방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러나 후녀디 야노시는 이때 걸린 전염병으로 2주만에 사망했다. 라디슬라우스로부터 후녀디 야노시의 뒤를 이어 헝가리군 총사령관으로 선임된 첼레 백작 울리히 2세는 라디슬라우스를 데리고 헝가리로 귀환한 뒤 후녀디 야노시가 가지고 있던 모든 왕실의 성과 수입을 압수하려 했다.

후녀디 야노시의 장남 후녀디 라슬로(Hunyadi László 1431~1457)는 푸타크에서 열린 회의에서 명령에 복종하겠다는 자세를 취한 뒤, 라디슬라우스와 울리히 2세를 난도르페헤르바르로 초대했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었다. 후녀디 라슬로는 난도르페헤르바르에 온 왕실군을 해산시키고 울리히 2세를 참살한 뒤 라디슬라우스를 포로로 잡았다. 이후 후녀디 가문의 중심지였던 테메슈바르로 끌려간 왕은 라슬로에게 책임을 물지 않을 것이며 헝가리 왕실군 총사령관으로 선임하겠다고 약속한 후에야 풀려났다.

부더에 도착한 라디슬라우스는 헝가리 귀족 대다수가 후녀디 라슬로에게 적대적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복수를 꾀했다. 왕은 후녀디 라슬로를 설득해 동생인 후녀디 마차시도 부더로 끌어들였다. 1457년 3월 14일 마차시가 도착하자마자, 라디슬라우스는 두 후녀디를 긴급 체포한 뒤 사형 선고를 내렸다. 후녀디 라슬로는 3월 16일에 참수되었지만, 후녀디 형제의 어머니 실라지 에르제베트와 그녀의 남동생 실라지 미하이가 반기를 들면서 왕에게 충성하는 귀족들과 후녀디 가문의 지지자들간의 내전이 벌어졌다. 라디슬라우스는 얀 이스크라를 왕실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후녀디 마차시와 함께 빈으로 향했다. 이후 프라하를 방문한 라디슬라우스는 1457년 11월 23일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2.7. 후녀디 왕조(1458년 ~ 1490년)

2.7.1. 마차시 1세(1458년 ~ 1490년)

2.7.1.1. 집권과정
라디슬라우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튀링겐의 빌헬름 변경백[14]의 딸이며 라디슬라우스의 친척인 안나, 헝가리의 전임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의 동생이자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라디슬라우스의 어머니 엘리자베트로부터 성 이슈트반 왕관을 비롯한 헝가리 서부의 여러 성과 도시의 권리를 넘겨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던 프리드리히 3세가 헝가리의 왕좌를 노렸다. 헝가리 귀족들, 특히 실라지 미하이, 가라이 라슬로, 우자키 미클로시 등은 16살의 마차시를 왕으로 세운다면 통제하기 쉬울 거라고 판단했다. 또한 교황 갈리스토 3세는 후녀디 야노시의 대튀르크 전쟁에서의 활약상에 찬사를 보낸 바 있었고, 그의 아들이 이 투쟁을 지속할 거라고 믿었기에 마차시가 헝가리 왕이 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가라이 라슬로는 세게드에 머물던 실라지 미하이를 찾아가 협상한 끝에 1458년 1월 12일 실라지 형제가 후녀디 라슬로 처형에 일정 역할을 한 반팔비 공작 바리우스 2세 미클라시를 용서하고, 마차시를 석방시킨 뒤 왕으로 선출하며, 실라지 미하이는 가라이 라슬로의 딸과 결혼하고, 가라이 라슬로는 궁정백으로 선임되고 부더의 왕실 재산을 감독하기로 합의했다. 여기에 페치 주교 미클라시의 바리우스 2세를 당시 보헤미아의 후스파 권력자인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에게 보내 프라하에 구금되어 있는 마차시를 석방해달라고 요청하기로 했다.

이렇게 합의를 맺은 실라지 미하이는 군대를 이끌고 헝가리 의회로 행진한 뒤, 귀족들에게 마차시가 형제의 처형에 복수하지 않을 거라며 그를 왕으로 선출하자고 주장했다. 1458년 1월 24일, 의회는 만장일치로 마차시의 왕위 계승을 결의했으며, 실라지 미하이를 5년간 왕의 섭정으로 삼기로 했다. 실라지 미하이는 마차시가 돌아오기 전에 자신의 이름으로 법을 통과시켰다. 그 내용은 모든 왕실 소속 성채들을 자신에게 넘겨야 하며, 자신의 권위는 왕 다음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궁정백으로 선임되었던 가라이 라슬로와의 결혼 약속을 파기하고 부더의 왕실 재산을 넘기겠다는 것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한편, 이르지는 헝가리에서 온 사절단을 접견한 뒤 마차시 1세가 자신의 딸 카테리나와 결혼한다는 조건하에 마차시의 석방을 동의했다. 마차시는 몸값을 지불한 후 풀려난 뒤 카테리나와의 결혼을 선포한 후 에스테르곰을 거쳐 1458년 2월 14일 부더에 도착했다. 관례에 따르면, 그는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에스테르곰 대주교로부터 성 이슈트반 왕관을 전달받으면서 헝가리 왕으로 등극해야 했다. 그러나 그 왕관은 프리드리히 3세에게 있었기에 그럴 수 없었다. 일단 프리드리히 3세에게 왕관을 돌려달라고 요청하기로 하고, 대관식을 미루는 대신 다른 의식이 거행되었다. 마차시가 부더에 처음 이르렀을 때 성직자와 시민, 유대인들이 몰려와서 환영했다. 마차시는 그곳에서 모든 성직자와 귀족, 시민, 그리고 유대인의 권리를 인정한다고 선언하고 죄수들을 사면했다. 이후 궁전의 왕좌에 앉아서 임시로 만들어진 왕관을 쓰고 국정을 관리했다.

1458년 3월 9일, 마차시는 삼촌 실라지 미하이에게 후녀디 가문의 유산 중 하나인 베스테르체바녀를 하사하고 세습 백작 칭호를 내렸다. 그러면서도 외교 정책 및 재산 증여 문서를 독자적으로 발행하는 등, 섭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이름으로 통치자의 권한을 행사했다. 그는 몇 년 전인 1453년 아버지 후녀디 야노시가 섭정직을 사임했을 때 라슬로 5세의 나이가 13세였다는 점을 근거로 삼으며 이제 16살인 자신은 충분히 통치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모두가 그의 집권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일찍이 라디슬라우스 왕으로부터 왕실군 총사령관에 선임되었던 얀 이스크라는 1458년 3월 말에 마차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마차시는 로즈고니 셰베슈첸(Rozgonyi Sebestyén)을 헝가리 북부 최고 사령관으로 삼고 얀 이스크라의 보헤미아 용병대를 토벌하게 했다. 로즈고니는 얀 이스크라를 상대로 성공적으로 몰아붙였지만, 그해 9월 오스만 제국군이 헝가리를 침공하자 이에 맞서고자 방향을 돌려야 했다. 그 후 얀 이스크라는 프리드리히 3세를 섬기다가 마차시와의 전쟁에서 연이어 패하면서 위기에 봉착하자 1462년 리파 지역에서 많은 영지와 돈을 받는 대가로 마차시에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 그의 용병 중 일부는 마차시를 섬겼는데, 이들은 마차시가 결성한 '검은 군대(Fekete sereg)'의 일원이 되었다. 여전히 그를 따르지 않은 보헤미아 용병들은 1467년까지 마차시의 공세로 인해 헝가리 북부에서 쫓겨났다.

1458년 여름, 실라지 미하이는 마차시가 자신을 섭정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에 분노해 우즐라키 미클로시, 가라이 라슬로와 함께 왕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마차시는 이 음모를 적발해 가라이 라슬로를 궁정백에서 해임했다. 그렇지만 어머니 에르제베트의 오빠이기도 한 미하이를 차마 해치지는 못했고, 일시적으로 구금했다가 관직에 복위시키길 반복했다. 실라지 미하이는 그런 그를 상대로 여러 차례 음모를 꾸몄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1460년 말 에르데이 총독을 지내던 중 오스만 제국군과의 교전에서 체포된 뒤 메흐메트 2세 앞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1459년 초, 가라이 라슬로와 우즐라키 미클로시는 네메투이바르(Németújvár)[15]에서 마차시에 대항해 프리드리히 3세를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으로 추대하기로 결의했다. 가라이 라슬로는 그 직후 사망했고, 우즐라키 미클라시는 마차시와의 항전을 이어갔으나 끝내 압도당하자 그해 7월 1일 자신의 재산을 유지하는 대가로 마차시에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마차시는 프리드리히 3세와 협상한 끝에 1464년에 그가 명목상 헝가리 왕을 칭하는 것을 용인하는 대가로 자신이 헝가리에서 군림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성 이슈트반 왕관을 반환하게 했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대대로 헝가리 왕을 칭했고, 이는 훗날 그들이 헝가리를 병합하는 명분 중 하나가 되었다. 이리하여 성 이슈트반 왕관을 접수한 마차시는 1464년 3월 29일 헝가리의 관례에 따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귀족들의 자유를 확인했다. 그는 이로써 명실상부한 헝가리의 국왕이 되었다.
2.7.1.2. 내치
마차시의 국내 정책의 주요 목표는 왕권을 강화하여 귀족들이 도전할 엄두를 못내게 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해 전국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재무 수입을 늘려 국가 재정을 튼튼하게 다지고 후녀디 가문의 왕위 계승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는 먼저 수석 재상인 에스테르곰 대주교 세치 데네시를 해임하고 컬로처 대주교 바르다이 이슈트반과 비테즈 야클로시를 재상으로 임명했다. 여기에 상급 법원인 왕실 특별 법원과 개인 법원을 하나의 최고 법원으로 통합했다. 이 최고 법원은 귀족들이 주재하는 전통적인 법원의 권위를 떨어드리고 사법 행정을 보다 전문화하는 데 기여했다. 1465년에는 에르데이의 2개 주를 지그몬드 백작, 센트죄르지 야노시 백작, 엘러바흐 베르톨트의 관할로 삼게 했다. 여기에 전통적으로 마초 반(Ban)의 지위를 누리던 우즐라키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소콜리 페테르(Peter Szokoli Peter)를 파견해 우즐라기 가문과 함께 마초 지역을 관리하게 했다.

그는 초기에는 오스만 제국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1464년 7월 메흐메트 2세가 야이체를 포위하자 사바 강을 따라 군대를 집결시켜서 메흐메트 2세가 8월 24일 포위를 풀고 물러나도록 강요했다. 이후 사바 강을 건너 스레브니차를 공략한 뒤 즈보르니크를 포위했지만 오스만 제국군이 인근에 이르자 헝가리로 철수했다. 1466년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공세를 개시하기 위해 의회를 소집하고 교황 바오로 2세로부터 보조금을 받았다. 그러나 서방 열강들이 원조를 제대로 하지 않자, 암묵적으로 반 오스만 정책을 포기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침략하지 않았고, 메흐메트 2세 역시 헝가리에 대규모 침공을 가하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포기한 뒤, 마차시는 1466년 슬라보니아를 방문해 우즐라키 미클라시와 자폴라 임레를 반에서 해임하고 비토베크 야노시와 투즈 야노시로 교체했다. 1467년 3월. 그는 의회를 소집한 뒤 2개의 전통적인 세금체계를 개편했다. '의회세'는 '왕실의 국고세'로 바뀌었고, '10 중 3세'는 '왕관의 관세'로 징수되었다. 여기에 더해, 귀족들에게 용인했던 모든 면세를 무효화했으며, 모든 세금을 왕가에 집중시켰다. 그는 왕실 수입의 관리를 개종한 유대인 상인인 에르누슈트 야노시(Ernuszt János)에게 맡겼다. 에르누슈트는 2년 안에 모든 일반 및 특별 세금 징수와 소금 광산 관리를 담당했다. 이렇게 해서 벌어들인 세입은 50만 플로린에 달했는데, 그 중 절반은 왕실의 국고세와 특별 세금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러한 세제 개혁은 귀족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1467년 8월 18일, 헝가리 귀족, 작센인, 세케이족 등 에르데이의 세 대표자들은 콜로즈모노스토르[16]에서 왕에 대항하는 동맹을 결성했다. 마차시는 즉시 군대를 소집하여 이들을 토벌하러 출진했다. 반란군은 왕실군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큰 저항 없이 항복했지만, 마차시는 반란군 지도자들을 가차없이 처벌했다. 많은 이가 그의 명령에 따라 무자비하게 고문당한 뒤 참수되거나 꼬챙이에 꽂혔다. 여기에 몰다비아 공국 슈테판 3세가 반란을 지원했다고 의심해 몰다비아를 침공했지만, 1467년 12월 15일 바이아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심한 부상을 입은 채 헝가리로 퇴각했다. 1481년, 마차시는 반역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프랑코판, 즈린스키 등 크로아티아 및 슬라보니아계 대귀족들을 잡아들였다. 그들은 새로운 토지세 도입에 동의하자마자 사면받았다.

1485년, 헝가리 의회는 이전의 많은 모순된 법령들을 대체하는 체계적인 법전인 데크레툼 마이우스(Decretum maius)를 반포했다. 궁정백의 순회 재판과 임시 주 의회가 폐지되어 주 법원의 입지가 강화되었으며, 군주가 부재하거나 소수인 경우에는 궁정백이 섭정으로서 섭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마이우스는 이외에도 사법 행정 전반에 걸친 실질적인 개혁을 단행해, 헝가리의 정부 체계 및 법 질서를 확립했다.

이렇듯 왕권 강화와 세제 개혁을 단행하면서 내실을 다지는 한편, 그는 나폴리 왕국 출신의 베아트리체와 결혼한 뒤 이탈리아에서 유행하는 르네상스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부더의 왕성에 르네상스 풍의 정원이 지어졌고, 비셰그라드 궁전 역시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축되었다. 그는 이탈리아인 치멘티 카미키아(Chimenti Camicia)와 달마티아인 조반니 달마타(Giovanni Dalmata)를 이 프로젝트의 지휘자로 임명했다. 또한 조각가 베네데토 다 마자노(Benedetto da Majano), 화가 필리피노 리피(Filippino Lippi)와 안드레아 만테냐( Andrea Mantegna) 등 유수의 이탈리아 예술가들을 궁정에 초빙하여 궁전을 장식하게 했으며, 군사 기술자 아리스토텔레 피오라반티(Aristotele Fioravanti)를 고용하여 남쪽 국경을 따라 요새를 재건하게 했다.

마차시는 콜로즈바르, 세게드, 버이더후녀드에 있는 프란치스코회와 페예레지하저(Fejéregyháza)에 있는 폴린회를 위해 후기 고딕 양식의 수도원을 짓게 했다. 그런 마차시의 궁정에는 고품질의 음악 시설이 있었다. 바르톨로메오 마라스키 교황청 예배당장은 마차시의 예배당 성가대를 그가 들어본 것 중 최고라고 묘사했다. 조스킨 도르와 요하네스 데 스토켐과 같은 작곡가들은 마차시의 궁정에서 시간을 보냈고, 수많은 이탈리아 음악가가 그 곳을 방문했다.

하지만 마차시가 르네상스에만 몰두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헝가리의 전통 예술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헝가리의 서사시와 서정시가 종종 그의 궁정에서 지어졌는데, 그 내용은 대체로 오스만 제국과 후스파에 대항하여 가톨릭을 수호한 헝가리 국왕들과 전사들을 찬미하는 것이었다. 가톨릭 신앙이 투철했던 그는 성모 마리아의 '깨끗한 잉태'에 대한 신학 논문을 저술하기도 했으며, 1460년대에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새겨진 동전을 발행함으로써 자신이 그녀를 숭배한다는 것을 거리낌없이 드러냈다.

어린 시절 독서를 즐겼던 마차시는 서적 수집에도 관심이 많았다. 1465년 페라라 출신의 갈레오토 마르치오(Galeotto Marzio)를 왕실 도서관의 첫번째 도서관장으로 임명한 뒤 유럽 각지에 흩어진 서적을 수집하는 사업을 전개했다. 여기에 더해 필사가, 삽화가, 제본가를 대거 고용해 왕실 도서관에서 일하게 했다. 그가 일생 동안 얼마나 많은 책을 모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존하는 저서만 216권에 달한다. 그의 도서관에는 크세노폰 키루스 2세에 관한 저서,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 알렉산드로스 3세 전기, 동시대에 활약한 로베르토 발투리오의 군사 논문, 제2차 포에니 전쟁에 대한 실리우스 이탈리쿠스의 저서 등이 보관되었다.

마차시는 시간이 남을 때마다 인본주의자들과 함께 다양한 주제에 대해 토론했다. 안토니오 본피니(Antonio Bonfini), 피에트로 란차노(Pietro Ranzano), 바르톨로메오 폰치오(Bartolomeo Fonzio), 그리고 프란체스코 반디니(Francesco Bandini) 같은 철학자들이 이 시기 마차시의 궁정에서 여러 해를 보내면서 신플라톤주의를 헝가리에 소개했다. 한편, 그는 별과 행성의 움직임과 조합이 개인의 삶과 국가의 역사에 영향을 미친다고 확신하고 점성술 천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당대의 유명한 천문학자인 요하네스 레기오몬타누스(Johannes Regiomontanus), 마르친 빌리카(Marcin Bylica)는 부더에 천문대를 세우고 천체를 관측했다. 레지오몬타누스는 항해에 관한 저서를 마차시에게 바치고 그 대가로 1468년 고문에 선임되었다. 이 저서는 훗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인도를 향한 여정에 착수했을 때 참고 저서로 활용되었다.
2.7.1.3. 보헤미아 전쟁
마차시는 재위 초기에 오스만 제국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지만, 서방의 도움이 제대로 오지 않는 상황에서 오스만 제국과 단독으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판단하고 전쟁을 중단했다. 그 대신, 그는 교황 바오로 2세로부터 파문을 선고받은 후스파 지도자이자 보헤미아 국왕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를 노렸다. 1468년 초 이르지의 아들 빅토르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자, 프리드리히 3세는 마차시에게 독일왕으로 추대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주며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마차시는 3월 31일 보헤미아에 선전포고하고 오스트리아로 진군해 보헤미아군을 몰아낸 뒤 모라바와 슬레스코를 침공했다. 1468년 5월 테베비차 포위전을 치르다가 부상을 입었고, 1469년 2월 크루딤에서 변장한 채 적진을 정찰하던 중 체포되었지만, 자신이 보헤미아에 사는 평범한 말 사육자라고 속이고 겨우 빠져나갔다.

이후 전세가 악화되면서 헝가리군과 보헤미아 내 가톨릭 부대가 빌레모프에서 이르지 군대에게 포위되었다. 그는 이르지와 어느 오두막에서 만나 협상을 벌인 끝에, 온건한 후스파와 교황청의 화해를 중재하겠다고 약속하면서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1469년 4월에 올로모우츠에서 다시 회의를 열어 프라하 교구장에 가톨릭 대주교를 임명하는 것을 포함한 교황 특사단의 요구를 전달했다. 5월 3일, 보헤미아 가톨릭 교회는 올로모우츠에서 마차시를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했다. 모라바, 슬레스코, 루지체는 마차시를 받아들였지만, 보헤미아 본토는 이르지를 계속 지지했다. 일부 귀족들은 폴란드 왕국의 국왕 카지미에시 4세의 장남인 브와디스와프 야기엘론치크가 이르지의 뒤를 이을 권리를 인정했다.

1469년 중순, 마차시는 이르지가 이끄는 군대를 슬레스코에서 몰아냈다. 그러나 11월 2일 우에르슈브로드에서 급습을 받아 패주했다. 이후 헝가리로 철수한 그는 의회를 열지 않은 채 특별세 부과를 선포했고, 이로 인해 헝가리 귀족들의 반감을 샀다. 1470년 2월 11일, 마차시는 빈으로 가서 프리드리히 3세에게 이르지와의 전쟁 비용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3세는 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를 공격하려는 오스만 제국군이 슬라보니아를 통과하는 것을 허용한 것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한 달 이상의 협상에도 별다른 합의가 이뤄지지 않자, 그는 어쩔 수 없이 헝가리로 돌아갔다.

이후 귀족들의 불만이 갈수록 커져서 반란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1470년 11월 의회를 소집했다. 의회는 그에게 특별세를 부과할 권한을 인정하는 대신, 한 개의 포르타(porta) 당 납부해야 할 모든 세금의 합계가 1 플로린을 초과할 수 없도록 규정했으며, 보헤미아 전쟁을 지속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이리하여 전쟁을 지속하기가 곤란해진 마차시는 보헤미아로의 공세를 중단했다. 1471년 3월 22일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가 사망하자, 보헤미아 의회는 5월 27일 브와디스와프 야기엘론치크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블라디슬라프로 추대했다. 교황 특사 로렌초 로베렐라는 이를 무효로 선언하고 마차시가 보헤미아 왕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 의회는 이를 묵살하고 블라디슬라프의 집권을 받아들였다.

1471년 마차시가 모라바로 가서 보헤미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때, 헝가리의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이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의 차남 카지미에시를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급보를 접했다. 이 음모는 비테즈 야노시 대주교와 그의 조카 파노니우스 야노시가 가톨릭 신자인 블라디슬라프와의 전쟁을 막고자 벌인 것이었다. 마차시는 즉시 헝가리로 돌아온 뒤 의회를 소집하고 "앞으로는 귀족들의 동의 없이 세금을 부과하지 않겠으며 매년 의회를 소집하겠다"라고 약속했다. 이에 귀족들은 만족했고, 9월 21일 50명 가량의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471년 10월 2일, 카지미에시 왕자가 헝가리를 침공했다. 그는 판노니우스 야노시의 지원에 힘입어 니트러를 공략했지만, 오직 로스고니 야노시와 페레니 미클라시만 가담했을 뿐, 다른 귀족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마차시가 즉각 반격을 가해오자, 카지미에시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패주했다. 판노니우스 야노시는 헝가리에서 도주하던 중 사망했고, 비테츠 야노시 대주교는 교구 밖으로 나오는 것이 금지되었다. 얼마 후 비테츠 야노시가 사망하자, 마차시는 베켄슬로르 야노시를 에스테르곰의 새 대주교로 선임했다.

1472년, 마차시는 프리드리히 3세에게 반기를 든 오스트리아 귀족들을 지원했다. 1473년 마차시, 카지미에시 4세, 블라디슬라프는 평화 협상에 들어갔지만 합의를 보지 못했다. 그는 수 십개의 작은 공국들로 구성된 슬레스코 정부를 통합하고 총사령관을 세우려 했지만, 슬레스코 귀족들은 그가 내세운 리그니츠 공작 프리드리히 1세를 총사령관으로 받들기를 거부했다. 1474년 2월, 마차시와 블라디슬라프 사이에 3년간의 휴전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1474년 3월 블라디슬라프는 프리드리히 3세, 카지미에시 4세와 동맹을 맺고 헝가리를 재차 적대했다. 카지미에시 4세와 블라디슬라프는 그해 10월에 슬레스코를 침공하여 브라티슬라프에 있던 마차시를 포위했으나, 마차시가 청야 전술을 구사하는 바람에 식량 공급에 차질을 겪은 끝에 퇴각했다. 그 후 슬레스코 귀족들은 마차시가 새로운 총사령관 후보로 내세운 자포여 이슈트반을 받아들였다. 여기에 모라바 귀족들도 치보르 토바초프스키를 총사령관으로 선출했다. 토바초프스키는 블라디슬라프 국왕의 친척이었지만, 마차시는 이들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1476년, 글로가우 공국의 공작 하인리히 11세가 사망했고 아내인 브란덴부르크의 바르바라가 공국을 상속받았다. 블라디슬라프는 그 해에 바르바라와 결혼함으로써 글로가우를 자신의 영지로 삼았다. 그러나 마차시 1세의 지원을 받은 하인리히 11세의 조카 요한 2세가 글로가우로 쳐들어와서 바르바라를 몰아냈다. 블라디슬라프는 글로가우를 탈환하기 위해 프리드리히 3세와 손잡기로 했다. 교황 특사 발다사레 데 피사로부터 마차시의 영토를 침범한다면 파문하겠다는 위협을 받았지만, 그는 이를 무릅쓰고 1476년 12월 5일 또다시 프리드리히 3세와 손잡고 마차시와 전쟁을 단행했다. 그 후 슬레스코와 모라바 연합과의 전쟁에서 고전하던 블라디슬라프는 헝가리에 평화 협정을 맺차고 요청했다. 양자간의 협상은 수 년간 진행되었으나 별 진전이 없다가 1478년 1월 15일, 발다사레 데 피사가 마차시와 전쟁을 벌였다는 이유로 블라디슬라프와 추종자들을 파문하자 재협상이 진전되어 1478년 3월 28일에 최종적으로 합의되었다. 이 협약에 따르면, 마차시와 블라디슬라프 모두 보헤미아 왕의 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으며, 보헤미아 본토는 블라디슬라프의 권위를 인정하고 모라바와 슬레스코, 루지체는 마차시의 권위를 인정했다. 그들은 7월 21일 올로모우츠에서 열린 회의에서 평화 협약을 비준했다.

1477년 6월 10일, 프리드리히 3세는 블라디슬라프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공인했다. 이틀 후, 마차시가 프리드리히 3세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니더외스터라이히를 침공했다. 블라디슬라프는 프리드리히 3세에게 지원군을 보냈지만, 적의 기세가 워낙 강해서 어찌할 도리가 없자 7월 말 이전에 오스트리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프리드리히 3세는 빈에서 헝가리군에게 포위되자 12월 1일 마차시 역시 보헤미아의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했다.
2.7.1.4.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1471년 오스만 제국이 네르트바 강을 따라 있는 헝가리 요새를 점령하자, 마차시는 우즐라키 미클로시를 보스니아 왕으로 지명하여 해당 지역의 방위를 맡겼다. 백양 왕조 샤한샤 우준 하산이 반 오스만 동맹을 제안했지만, 그는 보헤미아 전쟁이 한창인 상황에서 오스만 제국을 함부로 적대하지 않기로 하고 거절했다. 1474년 1월, 스메데레보의 베이인 알리 베이 미할로를루가 헝가리 동부 지역을 약탈하고 너지바러드를 파괴한 뒤 16,000명의 포로를 데리고 귀환했다.

1474년 말, 오스만 제국군이 본격적으로 왈라키아와 몰라비아를 침공했다. 마차시는 즉시 증원군을 몰다비아 공국 슈테판 3세에게 파견했고, 헝가리-몰다비아 연합군은 1475년 1월 10일 바슬루이 전투에서 약탈을 자행한 뒤 막대한 전리품을 끌고 귀환하던 오스만 제국군을 섬멸했다. 이후 몰다비아 공국은 마차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봉신이 되었다. 마차시는 메호메트 2세의 화평 제안을 묵살하고 오스만 제국으로 쳐들어가 1476년 2월 15일 사바 강의 중요한 요새인 샤바츠를 점령했다.

1476년 여름, 메흐메트 2세가 몰다비아를 상대로 원정을 개시했다. 그는 그해 7월 26일 발레아 알바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식량 공급에 차질이 생기자 퇴각했다. 이때 마차시가 파견한 블라드 3세가 이끄는 왈라키아 보조군이 몰다비아에서 슈테판 3세와 합세했고, 왈라키아-몰다비아 연합군은 1476년 8월 시레트 강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습격해 큰 타격을 입혔다. 당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해 헝가리로 망명했던 블라드 3세는 시레트 강 전투에서 승리한 뒤 헝가리와 몰다비아의 지원에 힘입어 당시 왈라키아 공작 바사라브 3세를 물리치고, 다시 왈라키아 공작으로 복위했다.

1479년 말, 오스만 제국군이 바사라브 3세를 앞세워 사시즈바로스(현재 루마니아의 오레슈티)를 공략하고 파괴했다. 이에 몰다비아 공작 슈테판 3세와 헝가리 장군 팔(Pál Kinizsi)이 반격에 나서 10월 13일 브레드필드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궤멸시켰다. 마차시는 남부 국경의 방위를 개선하기 위해 도나우 강을 따라 난도르페헤르바르 서쪽에 있는 모든 요새의 지휘권을 팔 키니시에게 맡겼다. 1480년 초, 마차시는 블라드 3세를 처단하고 왈라키아를 장악한 뒤 오스만 제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바사라브 3세를 응징하기 위해 왈라키아를 침공한 슈테판 3세에게 지원군을 보냈다. 또한 쇠레니바르[17], 난도르페헤르바르, 샤바츠, 스레브레니크, 야이체 요새를 중심으로 5개의 바나트 또는 '방어 주'를 세웠다.

1481년 5월 3일, 오스만 파디샤 메흐메트 2세가 사망했다. 그 후 바예지트 2세와 젬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젬은 내전에서 패한 뒤 로도스로 피신해 그곳을 관리하고 있던 구호 기사단의 보호를 받았다. 마차시는 바예지트 2세와의 협상에 써먹기 위해 자신이 젬을 보호하겠다고 주장했지만, 베네치아 공화국과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1481년 말, 헝가리 보조군은 마차시의 장인인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1세를 지원해 나폴리 왕국이 오스만 제국군에게 빼앗겼던 오트란토를 탈환하는데 기여했다. 그 후 마차시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전념하기 위해 1482년 바예지트 2세와 5년 휴전 협약을 체결했다.
2.7.1.5. 오스트리아 대공국와의 전쟁
1476년 초, 에스테르곰 대주교 베켄슬로르 야노시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헝가리에서 빈으로 도망쳤다. 그는 에스테르곰 교구의 금고를 가지고 가서 프리드리히 3세에게 제공했다. 이에 마차시는 황제가 대주교를 선동해 이런 비열한 짓을 벌였다고 비난했다. 1477년 3월 튜튼 기사단, 바르미아 대주교단과 동맹을 맺은 마차시는 프리드리히 3세를 상대로 선전포고했다. 헝가리군이 니더외스터라이히를 침공하여 빈을 봉쇄하자, 프리드리히 3세는 블라디슬라프에게 지원을 호소했으나 거절당했다. 그 후 교황 식스토 4세, 베네치아 공화국,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1세의 중재로, 마차시는 12월 1일 프리드리히 3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황제는 마차시를 보헤미아의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정하고, 그에게 100,000 플로린의 배상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3세가 배상금의 절반만 지불하고 나머지를 내지 않으려하자, 마차시는 1479년 3월 26일 스위스 연방과 일련의 협약을 체결해 신성 로마 황제의 스위스 용병 모집을 방해했다. 여기에 잘츠부르크 대주교 베른하르트 2세와 동맹을 맺고 헝가리가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케른텐 공국, 크라인 공국에 있는 대주교령의 요새를 소유하는 것을 승인받았다. 1482년 1월, 검은 군대가 하인부르크 안 데어 도나우를 포위 공격했다. 그해 4월 프리드리히 3세에게 선전포고한 마차시는 6월 말부터 하인부르크 공방전을 지휘해 10월에 함락시켰다. 그 후 그가 통솔하는 검은 군대는 3개월 동안 장크트 바이트 안 데어 글란(Sankt Veit an der Glan), 엔체르스도르프 데어 피샤(Enzersdorf an der Fischa), 쾨세그(Kőszeg)를 공략했다. 교황 특시 바르톨로메오 마라스키는 마차시와 프리드리히 3세간의 평화 협약을 중재하려 했지만, 마차시는 이를 거부했다.

1485년 1월, 흑군은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을 분쇄하고 빈을 포위했다. 5개월간 이어진 공방전 끝에, 6월 1일 수비대가 항복하면서 빈이 넘어갔다. 마차시는 빈에 입성한 뒤 왕실을 이곳으로 옮기고, 니더외스터라이히의 귀족들을 빈으로 불러들인 뒤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강요했다. 1486년 2월 16일, 헝가리를 피해 빈에서 탈출하여 린츠로 피신했던 프리드리히 3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 7명 중 6명을 설득해 자신의 아들 막시밀리안 독일왕으로 선포하게 했다. 그러나 보헤미아 왕으로서 선거 권한이 있던 블라디슬라프나 마차시는 동의하지 않았다. 마차시는 블라디슬라프를 초대해 그해 9월 이흘라바에서 동맹을 맺고 신성 로마 제국에 공동 대응하기로 했다. 그러나 보헤미아 귀족들은 이를 승인하지 않았고, 블라디슬라프는 곧 마음을 바꿔 막시밀리안의 독일왕 선출을 인정했다.[18]

마차시는 이후에도 프리드리히 3세를 상대로 공세를 이어갔다. 검은 군대는 라안데어타야와 슈타인을 포함한 니더외스터라이히의 여러 도시를 점령했고, 마차시는 니더외스터라이히를 다스리기 윈한 재판소를 세웠다. 1487년 에벤푸르트(Ebenfurth)에서 열린 니더외스터라이히 의회에서 오스트리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는 빈 대교구의 관리자인 서포여이 이슈트반을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점령한 도시와 요새의 수비를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장군들에게 맡겼다. 그 외의 행정은 프리드리히 3세 밑에서 일하다가 자신에게 복종한 오스트리아 관리들에게 맡겼다. 비너노이슈타트는 니더외스터라이히의 도시들 중 유일하게 마차시에게 끝까지 항전했으나, 1487년 8월 17일에 끝내 함락되었다.

작센 공작 알브레히트 3세[19]가 헝가리군을 격퇴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에 이르자, 마차시는 그와 협상을 벌인 끝에 1487년 12월 16일 쾰른에서 6개월간의 휴전 협정을 맺었다. 마차시는 뒤이어 프리드리히 3세와 아들 막시밀리안에게 헝가리 왕을 자처하는 것을 그만두고 자신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후계자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답변을 수 년간 미루었고, 마차시는 이들을 압박하고자 린츠로의 공세를 준비했으나 도중에 통풍에 걸려 쓰러지자 계획을 취소했다.
2.7.1.6. 말년
마차시는 말년에 신하들이 반역을 꾸몄다고 의심해 숙청을 여러 차례 단행했다. 1484년 대주교 바라디 페테르를 투옥했고, 1485년 보헤미아 재상으로서 모라바와 슬레스코를 관할하던 야로슬라프 보스코비치를 처형했다. 1487년, 마차시는 사생아인 코르빈 야노시에게 영지를 마련하기 위해 글로가우 공국을 공략하려 했다. 이때 그는 글로가우 공작 요한네스 1세의 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반피 미클로시를 투옥했다. 요한 1세는 이에 맞서 뮌스터베르크 공작 인드르지흐 포데브라트와 동맹을 맺었으나, 1487년 12월 검은 군대에게 패배하고 글로가우를 내줬다.

한편, 교황령에 속한 안코나 시민들은 마차시가 베네치아 공화국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주기를 바라며 헝가리 국기를 게양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항의했지만, 마차시는 자신이 안코나를 지켜주면서 교황청을 도와주겠다며 안코나를 돌려주지 않았다. 여기에 교황청과 베네치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던 장인이자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1세에게 지원군을 보냈다. 또한 1482년에 맺었던 오스만 제국과의 휴전을 1488년에 2년 연장했으며, 에르데이의 2개 영지를 몰다비아의 슈테판 3세에게 수여했다.

1489년 3월 이후, 마차시는 통풍을 앓으면서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이에 프리드리히 3세에게 자신의 아들 코르빈 야노시를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의 왕으로 인정해준다면 오스트리아에서 철수하고 막시밀리안이 새 황제로 등극하는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제안했으나,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다. 1490년 4월 6일, 32년간 왕국을 이끈 군주는 빈에서 눈을 감았다.

2.8. 헝가리 왕국의 몰락: 야기에우워 왕조(1490년 ~ 1526년)

2.8.1. 마차시 1세의 계승자

마차시는 1455년 12살의 나이로 첼레 백작 울리히 2세의 딸 엘리자베트와 결혼했다. 그러나 엘리자베트는 1455년 말에 원인 불명의 질병으로 사망했다. 이후 보헤미아의 후스파 권력자이자 나중에 국왕으로까지 선출되는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의 딸 카테리나와 1461년에 결혼했으나, 카테리나마저 1464년 1월 또는 2월에 태아를 낳던 중 아기와 함께 사망했다. 그 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와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 등 여러 군주들과 결혼 동맹을 제안했지만 좀처럼 성사되지 못했다.

1474년 10월 30일, 마차시는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1세의 딸 베아트리체와 약혼하고 1476년에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녀는 엄격한 성격의 소유자로, 남편을 구슬려서 신하들이 왕의 처소에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고 오직 시종을 통해서만 국왕에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게 했다. 마차시는 그녀를 맞이한 이래로 이탈리아에서 유행하는 르네상스에 많은 관심을 가져 헝가리에 르네상스가 퍼지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자식이 태어나지 않았다.

마차시는 1473년 니더외스터라이히 슈타인 시의 유지의 딸인 바르바라 에델푀크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코르빈 야노시를 낳았다. 그는 본래 이 아이를 교회에 보낼 생각이었지만, 정실 왕비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좀처럼 보지 못하자 마음을 바꿔 왕위 계승자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1470년대 중순에 코르빈 야노시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사로스 성을 영지로 주는 것을 시작으로 글로가우 공작을 검은 군대로 몰아내고 그 땅을 영지로 줬으며, 슬레스코 일대의 여러 영지를 추가로 주고 헝가리 왕국의 모든 요새 사령관들이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여기에 더해 밀라노 공작의 딸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와의 결혼을 주선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심지어 코르빈 야노시의 어머니 바르바라 에델푀크를 궁정에 초대해 왕실의 일원으로 삼았다.

베아트리체 왕비는 남편의 이같은 조치에 분노해 바르바라와 코르빈 야노시 모자를 상대로 첨예한 갈등을 벌였다. 말년에 죽음을 눈앞에 둔 마차시는 베아트리체의 형제이자 칼라브리아 공작인 알폰소에게 "헝가리 사람들은 여자가 이끄는 정부에 복종하는 것보다 끝까지 싸우다 죽기를 택할 것이다"라며 베아트리체를 설득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끝내 코르빈 야노시를 양자로서 받아들이라는 남편의 권고를 듣지 않았고, 마차시는 후계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마차시 1세 사후 헝가리 귀족들이 국왕 선출을 위해 모였을 때, 4명의 경쟁자가 경합했다. 마차시 1세의 사생아 코르빈 야노시는 헝가리 남부의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막시밀리안 대공은 1463년 노이슈타트에서 마차시가 합법적인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할 경우 프리드리히 3세나 그의 후계자들이 헝가리를 상속하자고 했던 협약을 상시키기며 자신이 헝가리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블라디슬라프는 자신이 마차시 1세의 전임 국왕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의 누이의 장남이니 왕위를 물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이자 폴란드 왕인 카지미에시 4세는 모든 아들들에게 독립된 왕국을 물려주고 싶어했기 때문에 셋째 아들인 얀 올브라흐트를 헝가리 국왕으로 세우려 했다.

대다수의 헝가리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은 블라디슬라프가 자신들의 권익을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한 것에 혹해 그를 왕으로 세우기로 했다. 여기에 더해, 블라디슬라프는 마차시 1세의 미망인인 나폴리의 베아트리체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몰다비아 공작이자 헝가리의 봉신 슈테판 3세와 팔 키니시가 그를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고, 7월 4일 코르빈 야노시를 격파해 헝가리에서 축출했다. 7월 15일, 헝가리 의회는 블라디슬라프를 헝가리 왕으로 추대했고 크로아티아에서도 이를 받아들였다, 블라디슬라프는 8월 9일 헝가리의 수도 부더에 도착한 뒤 특별세를 부과하거나 다른 "유해한 세금"을 도입하는 것을 자제하고 의회와 긴밀히 협력하겠다고 약속하는 내용의 헌장을 발표했다.

1490년 9월 18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울라슬로 2세'로 대관식을 거행한 후 부더에 정착했고, 보헤미아 왕국은 보헤미아 의회에 의해 대리 통치되었다. 모라바, 슬레스코, 루지체 역시 그의 집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동생 얀 올브라흐트는 자신이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얀은 에게르를 점령한 뒤 9월에 커셔를 포위했다. 독일왕 막시밀리안 역시 헝가리를 침공해 11월 말에 솜바텔리, 베스프렘, 세케슈페헤르바르를 점령했다.

울라슬로는 에스테르곰에서 나폴리의 베아트리체와 비밀 결혼을 했고, 그녀로부터 지원받은 막대한 자금을 활용해 대규모 병력을 편성했다. 이후 헝가리군이 반격을 가해온 데다 헝가리 귀족들을 포섭할 자금을 마련하지 못해서 그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 막시밀리리안은 12월 연말에 헝가리에서 철수했다. 울라슬로는 여세를 이어가 커셔를 구원했고, 얀 올브라흐트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1491년 2월 20일 글로가우 공국과 슬레스코 절반을 자신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헝가리 왕위 주장을 취소했다. 1491년 가을 얀 1세가 다시 헝가리를 공격했지만, 서포여이 이슈트반이 이끄는 헝가리군이 격파했다.

1491년 11월 7일, 울라슬로는 프레스부르크에서 막시밀리안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마차시 1세 생전에 헝가리가 빼앗았던 모든 오스트리아 영토를 막시밀리안에게 돌려주며, 울라슬로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사망할 경우 합스부르크 가문이 헝가리와 보헤미아를 상속받는 것을 인정했다. 그 대신, 막시밀리안은 헝가리에 대한 그의 주권을 인정하며 적대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2.8.2. 울라슬로 2세(1490년 ~ 1516년)

울라슬로 2세는 온갖 고생 끝에 헝가리 왕위에 올랐지만, 마차시 1세의 중앙집권화 정책을 포기하고 거의 모든 정책이 의회에서 정해지게 내버려뒀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의회에서 정해진 결의안에 대한 서명을 요구받을 때마다 "도브르제(Dobrze, 아주 잘했다)"라고 말하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서명했다. 마차시 1세 재위 32년 동안 5번밖에 소집되지 않았던 의회는 1492년 초 소집된 이래 그의 치세 내내 거의 매년 빠지지 않고 열리면서 헝가리의 중대소사를 결정했고, 자연히 의회를 운영하는 대귀족들의 권세가 대단히 강해졌다. 1492년 6월 7일, 아버지 카지미에시 4세가 폴란드 왕국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각각 울라슬로의 동생인 얀 올브라흐트와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에게 넘기고 사망했다. 그는 폴란드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차시 1세는 생전에 2만 기병대와 8천 보병대로 구성된 최정예군인 '검은 군대(Fekete sereg)'를 양성했다. 이들은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 대공국과의 전쟁에서 탁월한 전투력을 발휘해 헝가리 왕국이 승승장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마차시 1세 치세 때 이들에게 억압당했던 귀족들은 울라슬로 집권 이래 검은 군대에게 줘야 할 급료를 일부러 대폭 삭감해버렸다. 급료가 오랫동안 지급되지 않자, 검은 군대는 반란을 일으켜 사바 강 유역의 여러 마을을 약탈했다. 그러나 팔 카니시가 이끄는 진압군이 9월에 이들을 무찔렀다. 대다수 부대원들은 처형되었고, 1493년 1월 3일에 잔당들도 강제 해산되었다. 이리하여 헝가리 최강의 정예군은 마차시 1세 사후 3년도 안 되어 사라졌다.

검은 군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헝가리의 국방력이 약화되자, 오스만 제국은 이때를 틈타 헝가리를 공격했다. 1493년 9월 11일, 오스만군은 크르바바 평원 전투에서 크로아티아 귀족 연합군을 격파한 뒤 네레트바 강 북쪽의 아드리아 해 연안을 병합했다. 오스만 습격대는 이후로도 헝가리 남부 지역을 거의 매년 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울라스로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1494년 봄 의회의 승인없이 특별세를 부과했다. 귀족들은 왕국 전역에서 세금에 항의했는데, 특히 헝가리에서 가장 부유한 귀족이었던 우일러키 뢰린츠(Újlaki Lőrinc)는 세금 징수원들을 살해하고 울라슬로를 황소라고 모욕했다. 이에 울라슬로는 1495년 초 우일러키 가문이 오스만 제국과 협력했다고 비난하고 군대를 일으켰다. 우일러키 뢰린츠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항복하고 벌금을 납부하는 대가로 대부분의 영지를 보전받았다.

1495년 4월 울라슬로 2세와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바예지트 2세는 3년간 휴전 협약을 맺기로 했다. 그러나 오스만 습격대는 이후로도 크로아티아와 헝가리 남부 일대를 주기적으로 습격했다. 1496년 5월, 헝가리 의회는 울라슬로의 재무관 에르누스트 지그몬드를 횡령 혐의로 고발했다. 울라슬로는 귀족들의 강권에 못 이겨 에르누스트를 체포했고, 에르누스트는 40만 골드 플로린의 몸값을 지불한 후에야 풀려났다.

1498년, 헝가리 의회는 지주들이 자신의 가신들에게 지불하기 위해 세금의 절반을 보유할 수 있게 하고, 가장 부유한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이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대비하여 사병을 양성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내용의 법령을 반포했다. 또한 귀족 배심원들이 회의에 참석해야만 왕실 평의회의 결정이 효력을 발휘한다는 법령도 반포되었으며, 도시와 시민들의 경제적 특권을 제한하는 법령도 통과되었다. 1500년 3월 11일에는 왕실이 귀족들의 토지 소유를 간섭할 수 없다는 내용의 법령도 반포되었다. 이로 인해 왕권은 크게 약화되었고, 귀족들은 왕의 간섭을 걱정할 필요없이 평민들의 자유를 억압하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하지만 울라슬로가 통치에 손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의회가 내정을 이끄는 것을 내버려두면서도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나름의 조치를 내렸다. 1498년 7월 20일 크라쿠프에서 얀 1세와 군사 동맹을 맺어 오스만 제국이 쳐들어올 경우 서로 지원하기로 했다. 또한 코르빈 야노시와 화해하고 크로아티아의 방위를 그에게 맡겼다. 검은 군대가 해산되면서 국방력이 크게 약화된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에게는 다행히도 바예지트 2세가 페르시아와 지중해 연안 공략에 관심을 집중했기 때문에 생전에 오스만 제국의 대대적인 침략을 겪지 않았다. 1495년에 체결되었던 휴전 협약은 1498년, 1503년, 1511년에 갱신되었다.

울라슬로 2세는 어떻게든 왕위를 이어갈 아들을 낳으려 했으나 10여 년이 지나도록 얻지 못했다. 그러다가 1506년 7월 1일, 안 왕비가 아들 러요시를 낳았다. 그러나 안은 출산으로 인한 합병증에 시달리다가 아들을 낳은 지 3주가 조금 넘은 1506년 7월 26일 2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울라슬로는 아내의 죽음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이후로 죽을 때까지 기면증에 시달렸다. 이로 인해 가뜩이나 약화되었던 왕의 권력은 유명무실해졌고, 서포여이 야노시(Szapolyai János), 에스테르곰 대주교 바코치 타마시(Bakócz Tamás), 궁정백 페레니 임레(Perényi Imre), 그리고 재상 서트마리 죄르지(Szathmári György)가 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주도했다. 1516년 3월 13일 부더에서 사망했고, 3월 19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2.8.3. 러요시 2세 모하치 전투(1516년 ~ 1526년)

울라슬로 2세가 사망한 뒤, 10살된 아들 러요시 2세가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새 왕으로 등극했다. 어머니 안은 이미 죽었기에, 서포여이 야노시(Szapolyai János), 에스테르곰 대주교 바코치 타마시(Bakócz Tamás), 궁정백 페레니 임레(Perényi Imre), 그리고 재상 서트마리 죄르지(Szathmári György)가 왕을 대신하여 헝가리의 국정을 주도했고, 보헤미아 쪽은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게오르크 변경백(Georg von Brandenburg-Ansbach 1484~1543)[20]가 담당했다.

러요시 2세는 재위 내내 별다른 실권이 없었고, 섭정들이 왕실의 수입을 낭비하는 바람에 가난에 찌들었다. 특히 에스테르곰 대주교 바코치 타마시가 사망한 후에는 바토리 추기경, 서포여이 추기경, 베르베츠 추기경이 에스테르곰 대주교 직위를 놓고 격렬하게 정쟁을 벌이면서, 국정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중앙 정부가 제 기능을 못하자, 각지의 대귀족들은 정부를 대놓고 무시하고 백성들을 쥐어짜며 부귀영화를 누렸고, 민중은 자신들을 보살피지 않는 나라를 원망했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의 침략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도 군대에 제대로 된 지원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국경지대의 요새들은 방치되었고 병사들의 기강은 문란해졌다.

1520년 오스만 제국 파디샤로 즉위한 쉴레이만 1세는 러요시 2세에게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칠 것을 종용했으나 러요시 2세는 이를 무시했고, 오스만 제국의 사신을 처형해 쉴레이만 1세에게 보냈다. 쉴레이만 1세는 이 사건에 분노하여 헝가리 공격을 준비했다. 당시 헝가리의 재정 상태는 파탄 직전이었고 군대는 해체 직전까지 몰려있었다. 국경 수비대는 임금도 받지 못하고 있었고 국경 요새들은 제대로 된 보수 공사를 받지 못한채 폐허가 되가고 있었으나 러요시 2세는 돈이 없다는 이유[21]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교황과 손윗처남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빽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헝가리의 약점을 전부 파악한 쉴레이만 1세는 벨그라드 공략에 나서 10만 대군으로 당시 헝가리 왕국 최남단의 요충지이자 군사 요새였던 벨그라드를 손쉽게 함락시켰다. 로도스 섬 공방전이 마무리 되자 본격적으로 헝가리 침공을 개시한 쉴레이만 1세에 맞서기 위해 친정에 나섰으나 종조부 브와디스와프 3세처럼 오스만 기병대를 상대로 정면승부를 하겠다는 똑같은 실책을 저질러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군은 궤멸당했고 본인은 패주 끝에 도망치다 강에 빠져 익사했다.

2.9. 삼분할된 헝가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33px-Central_europe_1683.png
1683년 당시의 옛 헝가리 영토와 그 주변. 합스부르크 헝가리(A Magyar Királyság a kora újkorban)와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인 에르데이 공국과 고지 헝가리 공국, 오스만 직할령으로 나뉘었다.

러요시 2세는 생전에 아내 마리아로부터 자식을 얻지 못했다. 사생아로 버시 야노시를 두었으나, 그 누구도 왕의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보헤미아와 크로아티아, 서부 헝가리는 울라슬로 2세와 막시밀리안 1세가 체결한 협약[22]에 따라 누나 언너와 결혼한 다른 매형인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를 국왕으로 옹립했지만, 동부 헝가리는 에르데이 지역을 중심으로 서포여이 야노시(Szapolyai János 1487?~1540)를 왕으로 옹립했다. 양측은 진정한 헝가리 왕이 되기 위해 전쟁을 벌였는데, 전세가 불리해진 야노시가 오스만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며 신하국이 되겠다고 자청했다. 쉴레이만 1세는 즉시 군대를 파견해 그를 도와줬고, 헝가리 왕국은 양분되었다.

1541년 야노시가 죽고 갓난아이인 야노시 2세가 즉위하자, 어린 아이를 헝가리 왕에 앉힌다면 합스부르크 왕조에게 헝가리를 잃겠다고 판단한 쉴레이만 1세는 헝가리 왕국을 분할하여 중부는 직할지로 삼고 비교적 안전한 동부만 야노시의 영토로 인정했다. 역사가들은 이 야노시의 헝가리를 동헝가리 왕국이라고 따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리고 1570년에 야노시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2세에게 헝가리 왕위를 완전히 양도하면서, 그는 '에르데이 공작이자 헝가리 왕국 영토 일부의 지배자(여기까지가 공식 직함이다)' 가 되었다.

이리하여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헝가리, 오스만 헝가리, 에르데이 공국으로 삼분할되었다. 헝가리의 중심부는 오스만 제국의 최북단 영토로서 1699년까지 무려 170년이나 통치를 받아야 했으며, 서북부는 최후의 헝가리 국왕 러요시 2세의 누나와 결혼한 페르디난트 1세가 서부를 기반으로 한 헝가리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선출되어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이 시대는 헝가리인의 민족적 치부로 남았다. 한편. 헝가리는 문화적으로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합스부르크령 헝가리를 제외하고 상당수 백성들이 칼뱅파로 개종하였다. 이로 인해 헝가리도 체코처럼 가톨릭 이외에 개신교 문화유산이 건재할 수 있었다.

1683년, 제2차 빈 공방전에서 함락에 실패한 오스만 제국은 오스트리아- 폴란드-리투아니아- 베네치아 공화국- 루스 차르국이 엮인 신성 동맹 군대의 역공을 받았다. 1686년 신성 동맹은 헝가리의 옛 수도였던 부더를 탈환해 1541년 부더 함락 이후 145년 동안 이어졌던 오스만의 지배를 끝냈으며, 이듬해인 1687년에는 161년 전 모하치 전투가 벌어졌던 그 모하치 평원에서 대승을 거두고 오스만 제국을 도나우 강 이남으로 몰아냈다. 오스만 제국군은 다시 도나우 강 이북으로 올라가 헝가리를 탈환하기 위해 10년 가까이 전쟁을 지속했으나 1697년 젠타 전투에서 사부아 공자 외젠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를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결국 오스만은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헝가리의 잔존 영토와 에르데이 공국을 오스트리아에 할양했다.[23] 이리하여 헝가리 왕국 전체가 중세에 그렇게 날을 세웠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한편, 임시수도 포조니에 있던 헝가리 의회는 합스부르크의 부다 수복과 2차 모하치 전투의 공로를 인정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헝가리 왕위 사실상 세습을 인정하여 헝가리 왕위 후보자를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만 배출하도록 했다.

헝가리 전역을 손아귀에 넣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레오폴트 1세는 제2차 빈 공방전의 원인[24]인 헝가리인들에 대한 보복으로 새로 탈환한 헝가리와 에르데이 공국을 새롭게 정복한 '적'의 영토로 취급하고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새로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된 헝가리 동부와 에르데이의 헝가리인 귀족들은 합스부르크의 탄압에 분개하였고 결국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터지고 난 1703년 헝가리의 대귀족 라코치 페렌츠 2세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에르데이 공작으로 선출되어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라코치의 독립 전쟁은 수년을 끌었으나 제앞가림에 바빠진 루이 14세가 지원을 거부하였고 고립된 라코치의 독립군은 합스부르크 제국을 지지하는 헝가리인 귀족들의 원군과 세르비아인· 루마니아인 민병대에 의해 격파당했다. 독립 전쟁을 진압한 후 요제프 1세는 1711년 반합스부르크파의 온상인 에르데이 공국의 주권을 폐지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서트마르 조약으로 헝가리 귀족들이 합스부르크 왕조에 충성을 바치는 조건으로 합스부르크 왕조가 헝가리 귀족들의 권리를 존중해주는 타협을 맺었다. 이로서 헝가리 왕국은 완전히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가 되었다.[25]

2.10. 합스부르크 왕조: 트란스라이타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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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현대 헝가리 왕국: 합스부르크 왕조 이후 호르티의 섭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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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관직

헝가리 왕국의 귀족 작위와 직책들
헝가리 왕국 역시 중세 중기가 되면서 신성 로마 제국,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 왕국처럼 왕실을 중심으로 한 궁정 관직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특히 헝가리 왕국은 몽골 제국의 침략 전까지는 봉건제가 제대로 잡지 않아 백작 이상의 대영주들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이스판이라는 왕이 임명한 지방관들이 지방의 귀족 세력들을 통제했다.다만 영문 위키백과에선 원어 그대로 표기하기도 하지만 백작(count)으로 표기되기에 사실상 이스판=백작으로 보기도 하며 헝가리어 위키백과에서도 라틴어 표기로 comesrk 표기되어 있다.

해당 직책들은 헝가리의 서구화와 함께 사라졌고, 중세 중기가 되면서 새로운 직책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밖에도 1760년대 합스부르크 가문의 국왕들을 호위하기 위한 헝가리 귀족들로 구성된 귀족 경비대를 지휘한 왕립 귀족 경비대장(királyi nemesi testőrség), 1439년 성 이슈트반 왕관의 수호를 위한 왕관 경비대장(Koronaőrök), 1181년 서유럽의 첸슬러와 어느 정도 대응되는 재상(Kancellár), 1464년 왕실 판사와 별개의 사법직이었던 대법원장, 헝가리 1260년 왕실 재산의 회수와 법률 사건에서 왕을 대표하는 왕립 성왕관의 검사(Királyi ügyigazgató) 등이 있습니다.

4. 관련문서



[1]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독립한 뒤, 1946년까지 사용된 헝가리 왕국 국기는 이렇다.
[2] 1190년의 헝가리 왕국 [3] 또는 Regatul Maghiar. [4] 현재 오스트리아 부르겐란트, 슬로베니아의 프레크무레(Prekmurje) 지방, 세르비아 보이보디나 자치주,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우크라이나 자카르파탸, 슬로바키아 전역. [5] 하지만 정작 카를 1세의 복위는 거부하고 호르티 혼자 섭정이라는 직함으로 독재를 했다. [6] 헝가리어 발음은 '로베르트', 이탈리아어 발음은 '로베르토'로 둘 다 같은 이름이다. [7] 현재의 슬로바키아 스피슈주. [8] 조반나 1세의 여동생 마리의 남편이기도 했다. [9] 비타우타스의 아버지. [10] 딸 야드비가와 결혼하는 브와디스와프 2세의 아버지. [11] 독일왕 알브레히트 1세의 4남.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독일왕,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들은 모두 이 사람의 후손이다. [12] 헝가리어 발음은 '라슬로', 이탈리아어 발음은 '라디슬라오'로 둘 다 같은 이름이다. [13] 미슈콜츠 근교의 성. [14] 베틴 가문의 초대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의 동생으로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공동 설립자. [15] 현재 오스트리아 귀싱(Güssing). [16] 현재 루마니아 클루지나포카의 마나슈투르 지구. [17] 현재 루마니아의 드로베타투르누세베린. [18] 어차피 황제(독일왕) 선거는 만장일치가 아니라 과반수였기 때문에 블라디슬라프가 승인하건 말건 막시밀리안의 독일왕 선출은 인정되었다. [19] 에른스트의 동생으로 베틴 가문 알브레히트계의 시조. [20] 호엔촐레른 가문의 안스바흐 방계 출신으로 초대 프로이센 공작 알브레히트의 둘째 형이다. 동생이 독일 기사단국을 세속화하여 최초의 루터파 국가로 만들었듯, 형도 독일 종교 개혁에 헌신한 인물이었다. [21] 부왕 울라슬로 2세가 헝가리를 이미 나락으로 보냈고, 본인도 향락에 빠져 살았다. [22] 울라슬로 2세가 자식을 두지 못하고 사망할 경우 합스부르크 가문이 헝가리와 보헤미아를 점유하는 것을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23] 단, 현재의 티미쇼아라를 중심으로 하는 바나트(Banat) 지방은 1718년에 체결된 파사로비츠 조약 전까지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남았다. [24] 1670년 반합스부르크파 헝가리 귀족들이 프랑스와 오스만의 지원을 얻어 합스부르크를 전복하려던 즈린스키 역모 사건이 발각되어 여기에 가담한 귀족들이 대거 처형당했는데 그중에는 훗날 반란을 일으키는 퇴쾨이 임레의 아버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버지를 죽인 합스부르크에 대한 복수를 꿈꾸던 퇴쾨이 임레는 1678년 반란을 일으켜 상부 헝가리 대부분을 장악하고 오스만에게 신종하는 조건으로 오스만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이 요청을 받아들인 메흐메트 4세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을 정복하기 위해 15만 대군을 빈으로 보내면서 제2차 빈 공방전이 벌어졌다. [25]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스부르크 왕조와 헝가리 귀족들과의 사이는 마리아 테레지아 시절 정도를 제외하면 대체로 좋지 않았다. 물론 합스부르크 왕조는 전임 왕조인 야기에우워 왕조와 가장 가까운 인척으로서 정당하게 헝가리 왕위를 주장할 수 있는 위치였지만, 헝가리 귀족들에게는 자력으로는 맞설 수 없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선택한 차악이었다보니 좋을 리가 없었다. 특히 라코치 페렌츠 2세의 독립 전쟁이나 1848년 헝가리 혁명 등 헝가리 동부와 에르데이를 기반으로 하는 귀족들은 1526년부터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충성한 헝가리 서 북부 크로아티아에 비해 반항심이 거셌다. [26] 현재 루마니아 왈라키아 지역의 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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