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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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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
암반 알춘
大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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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3년/1115년[1] ~ 1234년(119년)
성립 이전 분열 및 멸망 이후
생여진 몽골 제국
요나라 동하
동요
후요
이칭 금조([ruby(金朝, ruby=jīncháo)])
위치 동북아시아 ( 만주, 내몽골, 화북)
수도 상경회녕부(上京會寧府, 1115년~ 1153년)
중도대흥부(中都大興府, 1153년~ 1214년)
남경개봉부(南京開封府, 1214년~ 1232년)
채주(蔡州, 1232년~ 1234년)
인구 약 5,600만(1207년) 출처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황제(皇帝)
주요 황제 태조 완안아골타(민)
세종 완안오록(옹)
장종 완안마달갈(경)
애종 완안영갑속(수서)
언어 여진어, 중세 중국어
문자 여진 문자, 한자
종교 여진 샤머니즘,[2] 대승 불교, 도교, 유교
민족 여진족, 한족, 거란족, 해족, 발해유민
통화 교초(交鈔) 등
국성 완안(完顔)
현재 국가
[[중국|]][[틀:국기|]][[틀:국기|]]

[[북한|]][[틀:국기|]][[틀:국기|]]

[[몽골|]][[틀:국기|]][[틀:국기|]]

[[러시아|]][[틀:국기|]][[틀:국기|]]
언어별 명칭
여진어 <colbgcolor=#fff,#1f2023> /amba-an alcu-un/ (암반 알춘)[3]
중세 중국어 大金(다낌)
만주어 ᠠᠮᠪᠠ ᠠᡳ᠌ᠰᡳᠨ ᡤᡠᡵᡠᠨ (암바 아이신 구룬) / ᠵᡠᡧᡝᠨ ᡤᡠᡵᡠᠨ (주션 구룬)
중국어 대금([ruby(大金, ruby=dàjīn)]) / 금조([ruby(金朝, ruby=jīncháo)])
거란어 nik(니크) / niku(니쿠)

1. 개요2. 국호3. 발흥과 군사4. 정치5. 행정6. 남송을 멸망시키지 못한 이유
6.1. 내부 기반 취약 및 군사적 문제6.2. 결함이 있는 경제6.3. 극소수인 여진족과 타민족과의 갈등6.4. 국제 정세의 문제
7. 위기8. 몽골 제국과의 23년 공방전9. 문화10. 경제11. 고려와의 관계
11.1. 초기11.2. 칭신11.3. 칭신 이후 ~ 금나라 멸망11.4. 그 밖의 이야기
12. 역대 황제13. 추존 황제14. 계보15. 대중매체에서16. 기타17.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12세기 초 여진족 동아시아 중국 북부에 세운 국가이다. 수도는 초기에 상경회령부였으며 후에 금나라의 제4대 군주인 해릉양왕이 중도대흥부로 옮겼다.[4]

황성은 한국식 한자 독음으로 완안(完顔)이었는데, 금계종의 《여진문사전》 속 금대 여진어로는 온얀(/Won-{g}ian/)[5]이라고 읽었다고 한다. 만주어 발음으로는 왕야(Wanggiya) 또는 왕얀(ᠸᠠᠩᡤᡳᠶᠠᠨ, Wanggiyan)이었으며, 중국식 황성은 (王)씨였다.

원조비사》 등 몽골의 기록에서는 '주르첸'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을 몽골어로 부른 이름이다. 금대 여진어로는 주션(/ʤu-çiɛn/)[6], n음이 탈락하면 주셔(/ʤuʃə/)로 발음한 것으로 추정된다. 만주어로도 주션(ᠵᡠᡧᡝᠨ, /ʤuʃən/)이었다. 영문으로는 한어병음 표기를 따라 Jin Dynasty라 부르며, 상술한 Jurchen을 쓰기도 한다.

요나라 말기에 생여진의 복간수 완안부는 아무르강의 배수지역인 하얼빈시 아청구 일대에 거점을 두고 살았다. 그들은 요나라의 지배를 받지 않았던 생여진의 일부였는데, 1115년 완안아골타가 이들을 규합하여 역사상 첫 번째 여진 제국을 구성한 것이 나라의 시초였다.

2. 국호

금은 중국식 국호이고, 자신들의 언어인 여진어로는 암반 알춘 구룬(Amban Altʃun Gurun)이라고 불렀다.

국호인 (Antʃun)은 현재 하얼빈 동쪽 아십하(阿什河)의 옛 이름인 안출호수(按出虎水)에서 유래했는데 '안출호'(按出虎)는 금대 여진어로 황금을 뜻하는 '알춘'을 음차한 것이었다. 말갈 7부 중에 안차골부(安車骨部)를 안출호수 유역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금태조 완안아골타가 말하기를,
" 요나라는 빈철(賓鐵)로부터 국호(國號)를 정했는데[7], 그것의 견고함을 취한 것이다. 빈철은 견고하지만 종국엔 녹이 슬어버리니, 오로지 완안부의 색인 백색을 띠는 황금만이 변치 않고 녹슬지도 않는다."
라며 금을 국호로 삼았다.

다만 청나라 시절, 《 흠정만주원류고》의 편찬자들은 금나라의 국호가 안출호수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에서 안출호가 황금을 뜻하는 것인지는 알지 못해[8] 이 주장을 억지라고 기술하면서, 금황실의 시조인 함보가 신라 땅에서 여진족 땅으로 이주한 것이 여러 서적에서 언급되니 과거 신라 왕성인 김씨를 국호로 삼은 것이 아니냐고 추측하기도 했다. 물론 금시조 함보와 금태조 완안아골타 사이의 연대만 100여 년의 차이가 나는 데다가 금태조 본인이 저렇게 말하면서 국호를 지었다는데 후대 사람인 청대의 학자가 딴지를 거는 격이라 정설이라고 보긴 어렵다.

3. 발흥과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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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fff,#191919> 삼국시대 위군 촉군 오군
수군
당군
송(북송) 송군 요군 서하군
송(남송) 송군 금군 서하군
원군
명군
팔기군 / 녹영 / 북양해군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군벌 홍군
( 팔로군, 신사군)
관동군 대만군(일본) 만주군 화평건국군
현대 중화민국 국군 중국 인민해방군 }}}}}}}}}


여진족 발해 멸망(926년) 후로 한동안 만주 지역을 떠돌며 거란족에게 숨 죽인 채 지내야 했지만 거란( 요나라)에 망조가 들자 세력을 키우기 시작하여 12세기"1109년 고려의 여진 정벌" 후 부족 통일을 매듭짓게 된다. 이후 금태종 거란에게 착취당하던 송나라에 러브콜을 보내 힘을 합쳐 요나라를 쓰러트릴 것을 제안했다. 송나라는 그간 자신을 괴롭혔던 요나라를 제거할 기회라고 생각해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다음 목표는 송나라될 것이라고 반대한 신하들도 있었지만 요나라를 향한 증오가 크다보니 묵살당했다.

1125년에 금은 송과 연합해 요나라를 멸망시켰다.[9] 문제는 이후 북송 송휘종이 딴 마음을 먹고 요의 잔당들과 힘을 합쳐 배신을 한 것이었다. 이에 격노한 금이 송나라를 공격해 1년 만에 북송의 수도 개봉을 함락시키고 화북 일대를 정복한 정강의 변이 일어났다. 이때 송은 황제를 비롯해 상황·황후·황자·황녀가 금에 포로로 끌려갔고 송나라는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렸다. 그나마 남쪽으로 패주한 잔당들이 임안(현재의 항저우)을 수도로 하는 남송을 유지해 중원의 절반을 사수하게 된다.

건국으로부터 화북을 점령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불과 12년으로 중원의 다크호스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아골타의 형이 동북 9성을 돌려달라고 고려에게 애원했던 때가 1109년인데, 이때부터 따져도 2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에 당시 동아시아의 두 거대 제국을 무너뜨렸다. 고려 입장에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공을 바치던 야인들이 순식간에 대제국을 이루었으니 매우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dfcf8f8b8c92b5da41b8569078c0c8c7.jpg
파일:괴자마.jpg
금나라 철기병 복원도.

맹안모극(猛安謀克, Miŋgan Moumugə)이라는 유목 민족 특유의 군사 조직이 힘을 발휘했고 두꺼운 갑옷을 입은 금나라의 철기병은 매우 막강했기 때문에 20년도 안 지난 기간에 요나라 북송을 무너뜨리고 화북을 얻을 수 있었다.[10] 특히 금나라의 초중장기병대인 '괴자마' 같은 경우 말에 2~3겹의 갑옷을 입히고 자기 자신도 갑옷을 덮었으며, 군마 3마리를 쇠사슬로 연결했다.[11][12] 1126년, 송나라의 지방관이 전공을 세울 목적으로 금나라 사신 일행을 공격했는데 사신을 호위하던 17명의 기병과 궁기병들에게 송나라 보병 2,000명이 패배했다는 기록[13][14]이 있을 정도니 얼마나 용맹하고 전투에 능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거기에 북송을 공격하면서 얻은 공성 무기들과 초기 형태의 화약을 노략하고 그것을 응용하여 기상천외한 신무기들을 개발했는데 대표적으로 로켓의 시초라 할만 한 비화창(飛火槍)과 화약 작렬탄인 진천뢰(震天雷)가 금나라 때 나온 무기들이다.

그 밖에 금나라의 전쟁 관련 기록들을 알고 싶다면 아래의 링크들을 참조.

여진군의 전투 방식
무슨 여진족이 용, 호랑이, 물개, 원숭이냐?
여진군을 창과 활로 죽이는 것은 불가하다
철부도에는 도끼가 딱이지!

4. 정치

기본적으로 요나라와 비슷하게 분리적인 관인 통치를 단행했다. 즉 지배층이 여진족이며, 피지배층은 한족이었다. 건국 초창기엔 요나라와 발해의 제도를 많이 참조하고 한자 거란 문자를 본떠 여진 문자라는 독자 문자도 개발하는 등 여진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이후 중원에 정착하자 자진해서 유교를 받아들이고 한족을 적극 기용하는 등 급속히 한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건국한지 12년 만에 제국 2개를 무너뜨리고 화북을 장악했지만 12년 전까지 동북 변방의 수렵 민족인 생여진이었기 때문에 금나라 초반기의 경우 주변 나라들보다 부족적인 성격이 짙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황제와 신하들이 같은 식탁에서 식사하고 술을 퍼마신다든가 황제가 신하에게 곤장을 맞는다든가(...)[15] 황족들과 귀족들의 의복이 일반 백성들과 별 차이가 없다든가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뜻이다. 변방 수렵 부족이 20년도 안 돼서 갑자기 제국을 건국해 벼락출세하는 바람에 일어난 일종의 문화 지체 현상이었다. 과거 찬란한 문화와 경제력을 지닌 북송의 땅이었던 카이펑과 그 일대 화북을 통치할 생각은 하지 않고 약탈만 하고 사람을 무참히 죽여대기만 하니 땅은 황폐화되고 조정에 저항하는 민란이 일어나는 건 당연지사였다.

이후 한족의 문화에 적응한 황제들이 등극하며 그런 현상은 사라졌으나 그것도 오래가지 않아 몽골 제국에 멸망하였다.

5. 행정

금나라의 행정구역
상경로 함평로 동경로 북경로 서경로 중도로
남경로 하북동로 하북서로 산동서로 산동동로 대명부로
하동북로 하동남로 경조부로 봉상로 부연로 경원로
임조로


금나라는 전국을 19개의 로(路)로 나누고, (路)-(府)/(州)-(縣)의 행정체계를 만들었다. 금나라의 제도는 송나라의 행정구역 제도를 그대로 모방하여, 여기서도 로(路)가 국가 최고 행정구역으로 기능하며 아래의 부(府)/주(州)와 현(縣)을 다스렸다. 수도는 현재의 베이징인 중도대흥부였으며, 상경회녕부, 동경요양부, 남경개봉부와 함께 4경 체제를 구축했다.

6. 남송을 멸망시키지 못한 이유

6.1. 내부 기반 취약 및 군사적 문제

금나라는 세종부터 금 장종까지 근 50년이 조금 안 되는 전성기를 누렸다.[16] 그러나 그렇게 급하게 힘을 키운 금나라는 내부 기반이 매우 취약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막 북송을 몰락시켜 한껏 기세를 타며 남하할때까지는 가히 적수가 없었으나, 금 태종의 사망과 악비(岳飛), 한세충(韓世忠) 등의 활약으로 금군이 강남에서 쫒겨나 화북으로 물러나여 기세가 한풀 꺾이고 양국간의 고착 상태가 진행된 뒤부터는, 금은 남송에게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세폐 등을 뜯어냈지만 결정적으로 남송을 멸망시킬 능력이 없었다. 금은 분명히 그 이후에도 남송의 멸망을 노리는 군사 작전을 여러 차례 시도한 바가 있지만 다 물말아먹고 끝나버렸다. 한마디로 한족을 남쪽으로 몰아내고 중원[17]을 차지할 역량까지는 가지고 있었을지언정 중국 전역을 완전히 다 차지할 역량까지는 없었던 것.

물론 금나라가 처음이자 사실상 마지막으로 남송을 멸망시킬 기회가 있었다. 바로 1129년 금나라의 정예군이 장강을 넘어와 당시 남송의 수도였던 임안까지 함락시켰지만 임안이 함락되기 직전에 간발의 차이로 남송의 황제 고종이 단신으로 남중국해로 도망쳐서 송나라의 명줄을 완전히 끊어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대신에 양쯔강 이북을 점령한 금나라는 1130년 대제(大齊)라는 제2의 괴뢰 국가를 세워 항장인 유예를 황제로 옹립함으로 써 제나라를 남송 정벌의 전초기지를 삼는데에 만족해야만 했다.

하지만 금나라의 이 계획마저도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마는데, 남송의 명장 한세충이 1130년 4월 강중에서 최초로 금군을 대파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18] 이후 5월에는 악비가 금군을 대파하고, 1131년에는 오린과 오개 형제, 수군장수 강민 등이 화상원에서 금군을 대파한다. 1133년에는 악비가 강광의 군도를 평정했고 1134년이 되면 한세충이 다시 한번 금군을 대파하였다. 계속되는 패배로 실의에 빠진 금태종이 1135년에 죽자 금군은 북쪽으로 물러나게 된다. 이후 금나라는 극심한 피해와 계속된 패전으로 인해 제정적으로 감당이 어려워지자 결국 1137년 괴뢰국이었던 제나라를 폐지했다.[19] 1142년 진회의 협상으로 양국은 휴전하기로 합의를 봤고 이 때부터 금나라와 남송의 경계는 회수를 기점으로 서로 남북으로 나누어졌고 금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실제로 정강의 변으로 변경이 함락되고 송조가 강남으로 밀려났음에도 금나라는 곧바로 화북 전역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금나라는 정강의 변 직후 장방창을 황제로 내세워 괴뢰국 초나라를 수립했고, 장방창이 남송으로 달아나자 다시 유예로 하여금 제나라를 세우게 하는 등 무려 10년간 연운 16주 이남 지역을 직할통치하지 않고 한족 괴뢰정권에 맡기는 쪽을 택했다. 결국 그 제나라마저 남송군에 털리는 신세가 되자 울며 겨자먹기로 제나라를 폐지하고 스스로도 힘에 부치는 것을 잘 아는 화북 전역의 직할 통치를 짊어진 쪽에 가까웠다.

6.2. 결함이 있는 경제

금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경제적인 부분이었다. 남송의 경제력이 믿을 수도 없을 만큼 가공한 데 반하여,[20] 회남 이남 땅을 남송에 내주는 금나라의 경제력은 기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결함 국가 수준이었다. 특히 금세종 이전까지 국가예산에 대한 회계도 없다시피 했으며 건국때부터 꾸준히 재정난에 시달렸다. 민간에게 납속을 받아 관직을 주는 상황이 금의 전성기었던 금 세종 대에도 나타났으니 그만큼 금의 재정상황이 매우 열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금의 해릉양왕이 소위 벌송(伐宋)군을 일으켜 남송을 공략하려다가 모두 실패했으며 나중에는 송군이 아닌 반란군에게 죽었고, 후퇴하는 금군의 뒤를 친 남송에게 숙주(宿州)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물론 해릉양왕의 뒤를 이은 금세종은 장군 복산충의(僕散忠義)를 시켜 금나라 군대가 이를 수복시켜서 즉시 숙주를 되찾았다. 그런데 승리를 거둔 금 세종은 되려 서둘러 정전 이야기를 추진하라고 명령했다.

사실 일시적인 기세를 이어가는 일이면 몰라도 장기적인 전쟁에 있어 경제력은 필수적이다. 그런데 금나라는 군사적인 우위에도 정작 경제를 남송이 보내는 세공(歲貢)에 크게 의존하는 터라 남송과 전쟁이 벌어지면 천문학적인 전쟁 비용이 나올 뿐만 아니라 남송의 경제적 지원도 모조리 끊긴다. 심지어 남송에게 받은 세공조차 남송과의 무역으로 오히려 상당부분이 남송으로 다시 유출되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고려 사신이 금에 왔을 때 금세종이 조공받는 나라의 체면에 걸맞지 않게 외화유출을 막기 위해 직접 고려 사신들의 사무역을 통제했을 정도였다.[21] 남송 정도의 나라를 무너뜨리려면 장기전은 필수적인데, 정작 금은 장기전을 벌일 여력이 없었다.[22][23]

금 세종이 추진한 화약에 따르면 남송에서 금에게 주어야 할 물건은 은 20만 냥, 비단 20만 필이었는데, 이는 일전의 은 25만 냥, 비단 25만 필에서 줄어든 액수이며, 세공(歲貢)이라는 칭호에서 세폐(歲幣)라는 단어로 바뀌었다. 즉 상하관계의 급이 완화된 것이다.[24] 금나라는 그만큼 다소 양보를 하더라도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남송의 지원을 받아내야 할 만큼 절박했다.[25]

물론 남송도 북벌하여 금나라를 칠 만한 수준이 아니라서 남송의 북벌군은 번번히 금군에게 격퇴되어 수비는 가능했다. 결국엔 금이나 남송이나 서로의 공격은 막을 수 있어도, 치명상을 주기엔 힘들었던 것이다.

6.3. 극소수인 여진족과 타민족과의 갈등

금나라의 2번째 문제로는, 터무니없이 적은 여진족의 숫자 때문에 민족 갈등의 문제가 있었다. 당시 여진족은 금나라 인구의 7분도 1도 안되었고,[26][27] 이 때문에 해릉왕이 남송을 공격했을 때 거란인들과 해족을 징집하자 그들이 이에 반발하여 서북쪽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더군다나 이 시기는 해릉왕이 남송정벌을 위한 원정을 떠났기 때문에 반란군이 아예 서북쪽을 점령한 상황이었다. 이후 금 세종에게 진압되었지만 그 후유증은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다.

게다가 문화 수준이 본래 낮은데 역대급 속도로 지배민족이 되었기 때문에, 소수의 여진족이 그야말로 한족(漢族)의 바다에 표류하는 형태라 어느새 여진족들이 자기네의 낮은 문화 등을 부끄러워하는 풍조가 생겼다.[28] 게다가 그보다 더 심각한 일은 만주의(그것도 문명에서 더 멀고, 더 기후가 척박한 동만주 베이스)[29] 자연환경에 맞게 반농반목을 해왔던 여진족의 경제가 중원으로 들어가면서[30] 너무나도 빨리 농경으로 바뀐 탓에, 적응을 제대로 못하고 심각한 빈곤에 시달리는 여진족들이 나타났다.[31]

금 세종은 여진족의 민족적 자존심을 강조했는데, 그러기 위해선 명색이 지배민족인 그들의 빈곤도 없애야 했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관유지에서 농사를 짓던 한족들의 땅과, 세금을 안 내는 토지를 빼앗아서 여진족에게 줬다. 그런데 이렇게 여진족을 도와주다보니 절대 다수인 한족들의 반감이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여기에 더해서 금세종 시기에는 한족을 대상으로 한 세금도 증가했다. 땅에 등급을 매겨 세금을 거뒀는데 문제는 높은 세금을 내는 등급은 한족이 많이 배정되었다. 그나마 금 세종 시기에는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공정하게 매겨보려고나 했지만, 그 이후는 성과나 시도도 없었다.

금나라 이전의 요나라의 경우는 연운 16주를 차지했지만 그곳이야 중원의 북동부 가장자리 일부였고 기본적으로는 북방의 국가였기 때문에, 중간중간 소위 한화 성향이 강해질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유목 국가의 성격이 강해서 이런 내부적 혼란은 비교적 덜했다. 반면 금나라는 근본이 어찌되었건 아예 중원 깊숙히 들어와서 뿌리를 박은 만큼, 이런 부분에서 혼란은 필연적이었다.[32][33]

게다가 금나라에 의해 조국을 잃은 거란족들도 복잡했다. 여진족은 거란족을 어느 정도 대우하면서 여진족과 거란족의 통혼을 장려했는데, 어떻게든 거란족을 끌어들이고 숫자가 적은 여진족의 단점을 보완하려고 했다.[34]
사자를 보내어 이들(거란인)을 이주시켜, 여직인(女直人)[35]과 같이 살게 하고, 남혼여빙(男婚女聘)[36]을 점차로 풍속화하는 것이 장구지책(長久之策)이다.
─ 대정(大定) 17년(1177) 세종의 조칙 ─

하지만 이 방책은 실패했다. 회유책과 강경책을 반복한 금나라의 거란족 정책은 일관성이 없었고, 세종은 거란인과 통혼을 장려하면서도 거란족 관료 수를 줄였으며, 세종의 뒤를 이은 장종(金章宗)은 마침내 거란 문자 사용까지 금지시켰다. 그 결과 거란족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몽골의 침입 당시 거란족은 반란을 일으키고 몽골에 협력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37]이 당시 저 멀리 서방에 과거에 도망친 거란인들이 세운 서요의 존재도, 거란인들의 민족성이 남은 데 영향이 있을 것이다.

6.4. 국제 정세의 문제

금나라가 반쪽짜리 제국으로 전락한 가장 큰 이유이자 나중에 비참하게 몰락해버린 이유이기도 한데 금나라는 주변국들을 제압하지 않은 상태에서 바로 중원으로 진입했다. 게다가 남송마저 끝장내는데 실패하는 바람에 동쪽에는 고려, 서쪽에는 서하, 남쪽에는 남송, 북쪽에는 몽골, 이렇게 동서남북으로 포위되는 구도가 되어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남송과 1:1 대결은 쉽지 않은 상대라서 국력을 남송에 집중시키기엔 몽골 부족들도 견제해야 하는데다 무엇보다 고려가 있었다. 비록 고려가 칭신하며 숙이고 들어왔다지만, 그 고려가 17만 대군을 동원해서 여진을 공격한 일이 정강의 변 기준으로 채 20년도 지나지 않았고, 고려의 칭신을 주도한 인사는 저 당시 선봉에서 활약하며 군공을 세운 척준경이었다. 금나라 입장에선 빈틈을 보이면 고려가 언제라도 태도를 돌변할 수 있다는 의심을 안 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금나라는 시종일관 고려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는 고려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1170년에 무신정변이 터졌음에도 금나라는 개입을 하지 못했고 무신정변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고려정부와 이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무신정권을 국제적으로 인정했고 4년 후에 일어나는 조위총의 난이 일어났을때는 조위총이 40여개 성을 바칠테니 구원병을 보내달라고 했지만 거절해서 무신정권이 조위총 세력을 쓰러뜨리는데도 간접적으로 공헌했다. 금나라가 무신정권에 대해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못하고 경고조차도 안날리는 상황이다보니 무신정권의 집권자들은 완전히 폭주해서 고려 국왕이 자기들의 마음에 안들면 가차없이 갈아치우고 그 후에 금나라에 보고해서 사후 재가를 받아댔다. 물론 그때마다 금나라는 이런 막장 행각을 묵인하였다.

7. 위기

세종때는 그나마 통치가 잘 되었지만, 이후에는 금의 국세가 기울었다. 게다가 역사상 최강의 유목제국인 몽골 제국이 북쪽에서 내려오면서[38] 금나라는 방비를 위해 방위비를 많이 지출함에도 불구하고 영토를 야금야금 뺏기기 시작한다. 이런 과정에서도 남송을 틈만 나면 공략하느라 남송의 도움도 못 얻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는 몽골과 남송의 연합을 불러와 금나라의 멸망에 기여했다.

8. 몽골 제국과의 23년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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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문화

중원을 정복한 초창기에는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불태웠으며,[39] 산동에 있는 공자 사당인 공묘(孔廟) 역시 공자가 뭔지도 모르는 여진족 병사들이 도굴하고 파헤치려던 것을 마침 같은 자리에 있었던 발해인 출신 금나라 관료 고경예가 그 광경을 보고 "대성인(大聖人)이 계신 곳이다."라며 뜯어말려서 겨우 무사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후 여진족이 중원에 정착하고 한화된 이후에는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유학을 장려하였고, 황제가 공자묘에 제사를 지냈으며 금나라가 점령한 곡부에 거주하는 공자의 직계 자손들에게 '연성공'이라는 작위를 내리고 다른 한족 왕조들처럼 이들을 우대했다. 이는 유목민족 출신 정복 왕조의 군주도 일단 중국을 지배하고 유교의 내용을 알게 되면 제왕의 통치와 군림을 뒷받침해주는 이데올로기로서 충과 효를 강조하는 유교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복 왕조의 군주도 유교를 국시로 받아들이고 유교를 대표하는 공자를 성인으로 특별 대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과정에서 공자 가문의 정통성이 좀 꼬였는데, 금나라가 중원을 공격하기 직전 공자 가문은 남송 정부와 함께 곡부를 떠나 남하해서 절강성에 터전을 잡고, 그곳에서 남송이 부여한 연성공 작위를 얻어서 공자의 후예로 인정받았다. 즉 같은 공자 가문에서 두 명의 연성공이 나오게 된 것. 금나라가 인정한 가문을 '북종', 남송이 인정한 가문을 '남종'이라고 부른다. 이후 쭉 남•북종으로 나뉘다가 원 세조 쿠빌라이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 남종 측에게 곡부에 돌아가 가문을 이으라고 명령했으나, 남종 측에서 연성공 직을 반납하고 북종 측에게 본래 공자 가문의 정통성을 인정하면서 정통성 문제가 정리되었다. 이 부분은 연성공 항목에 더 자세히 나와 있다.

금 세종은 여진족들의 복장과 풍습이 한족의 것과 유사해지는 것을 우려하여 한족 복장의 착용과 머리 모양을 법으로 금지했지만 흐지부지되었다. 당시 금나라의 상류층을 중심으로 남송풍 의복을 입는 것이 크게 유행했기 때문에 나온 정책이었다. 금나라는 남송에게서 조공을 받는 등 상국 노릇을 했지만 지배층을 중심으로 남송 문화에 빠져버리는 바람에 남송과의 무역에서 막대한 적자를 보게 되었고, 세종 이후 재정이 급격하게 나빠진다. 후대의 청나라는 금나라가 한족 문화에 빠져버린 것을 금나라 멸망의 원인으로 보고, 중원에 들어오자 만주족의 옷과 변발을 한족에게 강요했다. 물론 만주족마저도 청나라 말기 이후로는 옷과 변발을 제외하면 거의 한족 문화에 동화되어버렸고, 오히려 자신들의 의상이 한족 전통의상으로 잘못 알려지는 부작용을 야기했다.

여진 문자 금 세종의 보급 노력에도 불구하고, 차츰 여진족 스스로가 배우는 것을 경시하며 한자 사용을 더 선호했다. 초창기의 여진 부족 체제에서 유래한 정치 제도는 유명무실화하고 경의와 사부를 설치하여 한인 관료를 선발하는 과거 제도를 실시했다.[40] 또 중국식 신관제를 반포하고 중국식 백관의 의제와 조복을 채택했다. 초기에는 악비 등의 무장이 남송에 있어 이래저래 고생했지만 나중엔 한족과의 혼인도 빈번해 적인지 아군인지도 애매한 입장이었지만 기를 쓰고 공격은 했다. 이렇듯 금나라는 군사력으로는 한족에게 역사상 최초로 중원을 빼앗기고 황족들이 몽땅 다 포로로 잡히는 사상초유의 굴욕을 안겨줄 정도로 강력했으나 문화적으로는 한족에 차츰 동화되는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하술되어 있듯이 피지배층인 한족들도 지배층인 여진족들의 풍습에 물드는 경우도 있었다.

《송사전》 <금 열전>에 따르면 초창기인 금 태종 때만 해도 완안올출로 하여금 후손인 만주족처럼 정복지의 송나라 백성들에게 중국식 복장을 금지시키고 변발령을 내려 따르지 않으면 죽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나중에 가면 1150년에 중국식 의복 착용 금지령을 폐지하고 황제와 관료들의 조복, 공복, 제복 및 황후와 비빈들, 명부의 복장은 모두 송나라 제도를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북송 황실의 면류관 등 다수의 황실 제복들이 카이펑에 남아서 금나라 황제들과 관료들은 그 의상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금 희종이 처음으로 중국식 면류관과 곤룡포를 입었다. 폭군 해릉양왕 때부터 한족 문물들을 급속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금 세종 때 다시 여진의 의상을 고수하지만, 장종 이후로 다시 급격한 한화 현상이 일어났다. 이런 일을 교훈삼아서 후금(청)은 강경하게 변발과 만주족의 문화를 고수했지만, 결국 한화는 피할 수 없었으며 청의 몰락과 함께 민족 자체가 동화되었다.
중국 사극이나 무협 드라마에는 이런 점을 무시하고 한족화한 금나라 말기임에도 불구하고 금나라 출신 인물들은 사조영웅전에서 벙거지를 쓰고 가죽 옷을 입은 전형적인 북방 민족 복장을 하고 나온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 사극인 < 무인시대>에서는 고증에 맞게 금나라 관리들이 송나라식 관복을 입고 등장한다. 서민들은 흰색 의상을 즐겨 입었다고 한다.

여진족 고유의 문화 토대 위에 거란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한족 문화를 받아들였다. 여진 문자가 대표적으로 여진 문자가 발명되기 전에는 거란 문자 한자를 사용했었다. 거란 문자나 한자를 참조하여 여진 문자를 만들면서 거란 문자는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서서히 한족화로 인하여 한자를 더 많이 쓰게 되었고 여진 문자는 쓰이지 않는 경우가 많게 되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금나라 조정은 여진인이 남송의 의상 착용을 금지하는 조칙을 세종, 장종 때 두 번이나 내렸다. 이는 거꾸로 보면 조정의 명을 한쪽 귀로 흘리고 남송 의상을 입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 조칙을 통해 남송의 문화가 금나라에서 크게 유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금나라는 남송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사치품을 수입하느라 무역에서 항상 적자를 봤다.[41]

하지만 그 반대의 현상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사실 금나라 치하의 한족 사이에서는 물론이고 남송에서도 여진족 패션 스타일이 유행했다. 여진족들은 장신구들을 착용하는 것을 즐겼는데, 이걸 보고 한족들이 따라 했으며 여진족의 호복을 입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러한 여진 문화 유행 현상을 보고 당대 한족 지식인들이 혀를 찰 정도였다. 예를 들어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남송의 문인 범성대는 백성들이 말하길 오랫동안 호복에 익숙해져 제도가 오랑캐처럼 되었다고 언급했다.[출처][43] 연운 지역을 포함한 화북의 한족들은 요나라와 금나라의 지배를 거치면서 남송의 한족들과 언어, 복장, 풍습에서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금로도경에 따르면 금나라 사람의 의복은 좌임[44]이라는 점만 빼면 중국의 옷과 모양이 비슷하다고 적혀있고 조정의 공복들은 송나라 제도를 썼다고 했지만, 일상 생활에서 입는 옷들은 송나라의 의상과는 꽤나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중원으로 들어오기 전 수렵을 많이 했던 여진족 전통의 영향을 받아 동물 문양, 특히 사슴 문양을 선호했다고 한다. 요나라와 북송을 정복하면서 거란[45]과 한족의 의복을 수용하여 여진 전통 의상에는 변화가 생겼지만, 아예 한족 의상을 그대로 착용했던 요나라 남면[46] 의상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변발의 경우 발굴 유물과 앞머리를 밀고 뒷머리를 남겨 땋아서 묶었다는 기록을 토대로 볼 때 후손인 만주족의 변발과 흡사하거나 변발을 양갈래로 늘어뜨린 모양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금희종 이후 중국식 제도와 문물들을 수용하면서 거의 사라졌다. 해릉왕은 북송의 황궁을 본받아 천도한 중도(연경)에 으리으리한 황궁을 지었고 세종과 장종은 한문에 능했고 서화와 서예 솜씨도 수준급이었다.[47] 한문학은 많은 여진 귀족들을 매료시켰고 많은 여진 귀족들이 한족 문화에 흠뻑 취했다. 대표적으로 세종의 손자이자 저헌거사(樗軒居士)라고 불렸던 완안숙(完顔璹)은 금대의 대표적인 시인으로서 뛰어난 문학적 재능으로 칭송받았으며 현대에까지 그의 시가 전해 내려온다. 완안숙과 사귀던 조병문, 원호문, 왕약허 등 금나라의 한족 시인들도 유명했는데, 대표적으로 현대에 널리 알려진 금나라 시대 한시로는 안구사가 있다.

전각( 벽돌 조각이나 부조를 세기는 것)공예가 발달되었고, 무덤은 여러 조각들을 새긴 벽돌로 구성되기도 했다. 송나라의 영향으로 도자기, 칠기도 발달되었다.

대승불교, 유교, 도교, 여진족 고유 토속신앙 등을 주로 많이 믿었으나, 소수 무슬림들도 있었다고 한다.

10. 경제

초기에는 반농반목, 수렵채집 사회였던만큼 축산업과 사냥이 발달했으며, 주로 사슴과 노루, 토끼, 멧돼지, 꿩 등의 짐승들을 사냥했다. 어로 생활도 하다보니 물고기도 잡는 반농반어 생활도 겸했다. 물론 농사도 일부 짓기도 했던 만큼 나물과 야채, 곡물도 섭취했으며, 산이나 숲에서 임업을 하거나 약초를 채집하기도 했다. 물론 입관 이후에는 중원이 경제의 중심이 되면서 경제에서 목축과 사냥, 야생식물 채집 등이 차지하던 비중은 대폭 낮아졌다.

하지만 가난한 여진인도 있었으며 맹안모극호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 했다.

11. 고려와의 관계

11.1. 초기

당장 《 금사(金史)》 고려전에 대놓고 "금인은 고려의 말갈에서 떨어져나온 것에 기원한다.'라고 기록되었으며,[48] 실제로 금나라를 건국하기 전의 여진족들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이자 상국(上國)으로 섬겨 왔다.

완안부가 여진족을 통일하기 전까지 여진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고, 고려는 그들 중 친고려 성향의 부족들에게 조공을 받으며 국격을 높이는 한편 속민으로 삼아 영토를 넓혔다.

하지만 완안아골타의 숙부인 완안영가와 아골타의 형 완안오아속이 완안부의 추장을 맡으며 다른 여진족들을 아우르는 한편 고려의 북방 경계를 위협할 정도로 심상찮아지자 숙종이 여진 정벌을 시도하나 예상 이상으로 완안부의 전력이 강해 성과가 없었다.

이에 고려는 절치부심해서 예종 대에 본격적으로 17만 정도의 대군을 일으켜 여진을 공격했는데 이것이 바로 윤관 동북 9성 개척(1107년)이다.

그러나 막상 해당 지역은 길이 많아 방어하기 여의치 않은 지형이었고, 근거지를 빼앗긴 여진족 역시 필사적으로 반격하여 1109년 갈라수 전투에서 고려군을 대파하며 9성 중 2성을 탈환했다. 이에 고려 측 역시 북방에서의 정책을 재검토할 수밖에 없었고, 여진 측 역시 근거지 대부분을 빼앗긴 상태에서 길주성 탈환에 실패하는 등 지칠 대로 지쳐 결국 '절대로 고려를 침략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후, 자신들의 영토를 되돌려받는다.

이렇듯 '영토 확장'이라는 1차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명백히 실패했고, 오히려 완안부가 여진족들의 구심점이 되는 데 도움만 되었다며 윤관의 여진 정벌이 실패한 정벌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하술된 성과가 있긴 했으나, 고려가 상당히 평온한 시기를 거치면서 모아놨던 국력을 한 번에 낭비해 버리고, 가시적인 성과는커녕 외교적인 부분에 효과가 있었다고 자위하는 것은 이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제법 승승장구하던 완안부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음으로써, 여진에 고려의 피해 이상으로 큰 고통과 손실을 가한 것이 효과가 아예 없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단기적으로는 당시 고려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는 형식의 화친을 성사시켜 북방 경계를 안정시켰으며,[49] 장기적으로는 여진이 훗날 금을 건국하여 요와 북송을 무너뜨리고 화북과 중원을 아우르는 대국이 되었음에도 고려와는 최대한 갈등을 일으키지 않으려 한 데에 영향을 미쳤다. 금은 망국의 순간까지 남송이나 몽골과는 싸웠으면서도 고려는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50][51]

금나라를 건국하고(1115년) 요나라를 밀어붙이는 등 세력이 커지자 되려 고려에게 자신들을 형으로 인정하는 형제의 맹약을 요구했다.(1117년) 당시 고려에서는 이를 무시했는데[52] 금나라로서는 배후의 고려가 영 거슬렸지만[53] 당장 요나라 북송을 상대하느라 여력이 없었기에 전반적으로 고려와는 대대적인 전면전을 치른 요나라의 경우와 달리 전면적인 충돌은 없이 지냈다.[54] 북송을 멸망시킨 이후 대놓고 고려에 사대적 관계를 요구했으나, 고려가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금 또한 예전에 근거지를 잃었던 뼈아픈 교훈과 남송 전선을 의식하여 별 충돌 없이 지내게 된다.

금나라가 건국된 1115년, 금나라와 고려의 이해 관계가 가장 충돌한 지역은 사실 동북 9성보다도 보주(保州), 오늘날의 평안북도 의주로 추정되는 곳이었다. 요나라의 멸망이 코 앞으로 다가오자 금나라와 고려는 각기 군사를 보내어 이 지역을 얻으러 경합한다. 일단 금나라가 요나라의 땅이었던 보주 점령에 가까워지자 고려는 즉시 아골타에게 사신을 보내 보주 반환을 요구한다. 아골타는 "爾其自取之(그대들이 직접 탈취하시오)"라고 대답한 뒤 즉시 부하들에게 전갈을 보내어, "고려가 공격하러 올 것이니 얼른 대비를 해야 된다."라며 경고한다.[55]

하지만 단순히 "너님들이 가져갈 테면 가져가봐."라고 한 건 아니고 고려와 금나라 사이 암묵적인 외교 활동의 일환이었다. 당시 요나라는 금나라가 밀고 내려오자 고려에게 지원군을 요청했으나 고려는 당연히 거부했고, 이후 요나라가 점령하고 있는 보주 일대를 두고 양 국가가 만나게 된 것이다.

고려의 요구에 아골타는 사신을 통해 직접 탈취하라고 언급했지만, 당시 보주는 아직까지도 공식적으로는 요나라의 땅이었다. 이를 고려 쪽에서 치러 간다면 고려는 요나라와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작게는 두 나라 간의 연계를 막기 위한 목적이었고 크게는 우군을 만들려는 금나라의 의중이 담겨있는 말이었다. 고려도 이를 파악하고는 군사적 움직임보다는 외교적인 움직임으로 먼저 항복을 권유하였고 결국 거란족 관리들이 고려에 성을 넘기며(1117년 3월) 보주와 내원성은 고려의 땅이 되었다. 당시 고려가 유연하면서도 이득을 챙기는 외교를 했음을 잘 알려주는 사례 중 하나.[56]

금나라 역시 1124년 "고려가 혹시라도 침략해 오면 군대를 정돈하여 그들과 싸워라. 하지만 함부로 먼저 고려를 침범한 자는 승전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내리겠다."며 압록강 주변에 군사를 두어 고려를 방비하는 한편, 불필요하게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경계했다.[57]

11.2. 칭신

금나라는 1125년, 마침내 요의 마지막 황제인 천조제를 사로잡고 요나라를 끝내 멸망시킨다. 이에 인종은 1126년 3월 신묘일에 모든 관료를 소집, 금을 상국으로 대할 것인지에 대해 토론했다.[58]

당시 고려 인종이 즉위한 지 5년이 지난 때로 이자겸, 척준경 일파가 권력을 잡았다. 고려사 인종 세가에 따르면 토론 당시 모든 신하가 반대했으나 오직 이자겸, 척준경만이 동의했다고 한다. 같은 달 을미일엔 종묘에 점을 쳐서 물어보았다고 한다.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정말 반대가 극심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결국 금나라에 숙이기로 결정, 1126년 4월 정미일에 사신을 보내 번국(藩國)을 칭한다.

보면 알겠지만 계속해서 질질 끌어오던 호칭 문제가 두달만에 결정나는 걸 볼 수 있는데 일단 국왕이 더 이상 숙, 예종 처럼 강경파가 아닌데다가 금이 요를 없앨 정도의 국력임을 인식하여 빠르게 결정했을 것이다.[59] 그 여진족과 칼을 맞댔던 척준경이 앞장서서 금나라에게 숙이자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 금나라의 강성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정권을 주도하는 이자겸, 척준경 일파가 전쟁을 원하지 않는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자신들의 권력에 금이 갈수도 있으니까.

허나 이자겸 일파의 이러한 결정은 고려 내부에서 반발이 컸다. 무엇보다 당장 같은 해에 이자겸은 쫓겨난다(...). 고려사에 따르면 인종 9년(1131년) 9월 정유일에 대간이 한 신하를 고발했는데 무관이 문관직에 임명돼서이기도 했으나 그가 공공연히 "국가가 나에게 천 명의 군대를 주면 금국(金國)에 들어가 그 주(主)를 사로잡아 바치겠다!"라고 떠들고 다녀서 외교적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하였다. 삼일동안이나 간쟁했으나 인종은 끝까지 그를 임명시켰다. 윤관의 아들 윤언이의 경우엔 그들은 우리 조정의 부속이고 늘 조천(朝天)[60]해오던 자들인데 어떻게 우리가 숙일 수 있냐며 아주 분노했다고 묘지명은 기록했다.

그렇다고 해서 고려 조정이 이미 정한 금나라와의 관계를 되돌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요나라 멸망 직후 칭신한 바로 다음해인 1127년(금나라 천회 5년)에 북송이 금나라에게 멸망 직전까지 몰려 딱히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 고려-북송 관계를 참고.

금나라는 고려가 숙이고 들어온 사실에 기뻐하여 이전에 이미 빼앗긴 보주( 의주)를 고려의 영토로 인정했다. 참고로 이 보주성 반환 도중에 금나라에선 땅은 주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금나라로 보내달라고 했는데 고려에선 이미 다 죽였다(...)고 사실상 반대를 뜻하여 돌려보내지 않았다.

11.3. 칭신 이후 ~ 금나라 멸망

서화는 이미 메마르고, / 西華已蕭索
북새[61]는 여전히 혼미하다. / 北寨尙昏蒙
앉아서 문명의 아침을 기다리는데, / 坐待文明旦
천동의 해가 밝아온다. / 天東日欲紅
- 보한집 권상에 기록된 고려 외교관 진화(陳澕)의 시. 밀려난 남송과 강호 금나라를 모두 무시하고 있다.
대체로 무난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내부적으로는 팽팽한 긴장감이 있었다.

고려 의종 재위 2년( 1148년) 2월, 금과 외교 문제가 발생했다. 의종은 금에 보낸 표문에 자신의 이름을 쓰지 않았고, 보낸 사신을 배신(陪臣)이라고 쓰지 않았던 것.[62] 이걸 두고 금에서 이걸 처벌해야 될지 금 황제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의 결말은 고려사 적혀있지 않다. 하지만 고려가 금을 꺼림칙하게 여겼다는 것은 짐짓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후 해릉양왕이 고려 정벌을 선언하며 양국관계에 위기가 도래하기도 했으나, 이 작자는 금나라인들 기준으로도 제정신이 아닌 작자였기에 고려 뿐만 아니라 남송, 서하까지 칠려고 했다.[63] 결국 해릉양왕은 금세종에게 처형당하고 고려 침공은 흐지부지되었다.

칭신한 지 40년이나 지난 1164년에는 금-고려 국경 지역의 작은 군사 분쟁이 벌어졌다. 대충 말로 풀긴 했지만, 금나라와 고려 양국은 뒷구멍으로 호박씨를 분쟁의 원인이 서로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고려 기록에는 병마 부사 윤인첨이 '恥削土(치삭토 : 국토가 줄어듦을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 말이 남아서, 겉으로는 화목해 보여도 속으로는 불만이 있었음을 암시한다.[64]

무엇보다도 금-고려 관계가 요동친 사건은 1170년 무신정변이다. 1170년 겨울에 고려는 갑자기 금나라 사신의 입국을 거절하더니[65], 이듬해 사신을 보내어 "의종이 돌아서 정신이 혼미해서 동생( 명종)이 대신 왕이 됐어요."라고 알린다. 당연히 금나라 조정에선 말도 안된다며 난리를 쳤다. 애초에 상식이 있는 사람이면 믿기 어려운 얘기다.[66]

1175년, 금나라는 대략적인 사실을 알다가 비로소 사건의 진상을 아는데... 바로 조위총의 난 때문. 조위총은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 이의방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시해했다고 알리며, 자비령 서쪽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40여 성을 바치겠으니 도와주십시오라 요구한다. 하지만 금나라는 거부하고 오히려 조위총의 사신을 붙잡아 고려 조정에 보냈다. "잘했지?" 하고(...). 이 사건을 단순히 '금나라가 멍청해서'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냥 단순히 이웃 나라의 내부 문제에 개입하기가 싫어서라고도 볼 수도 있고, 황제국이 왕족도 아닌 일개 지방관 조위총의 요청에 답해서 군사를 보내기엔 격도 맞지 않고, 고려 국내 정세를 모르니 조위총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다 어느 정도 해당되지만 어찌됐든 금나라의 제1전선은 남송과의 전선이었고, 그 다음인 제2전선도 고려가 아니라 몽골과 거란 등 북방전선이었다.[67] 애초에 금나라는 자국 내부마저도 못 통합하는 판국인데 전선을 더 늘려봤자 혼란이 더 일어날 가능성에 그냥 넘어갔다.

이후로는 큰 사건 없이 조공하고 책봉하며 생일에 사신 보내고 하는 평범한 일들만 일어났다. 금나라 역인(驛人)이 국경 지역에서 고려의 하급 관원에게 맞아 죽은 사건만 빼면[68][69] 이 사건은 금나라의 변경 지역 통제력이 약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는 사건이다. 그리고 얼마 못 가 역사상 최강, 최악의 기마민족이 동북아시아에 들이닥쳤다. 위소왕 시절 이후로 금나라가 남쪽으로 밀려나 교류가 끊겼다. 1216년에는 몽골군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위기에 처한 금나라가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지만 고려 조정에서는 이 사신을 받는 것을 계속 거부하는 등 철저히 무시했다.[70] 금나라가 중원을 차지한 직후의 상황과 달리 당시의 금나라는 고려가 도와줘도 멸망당할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이었으니 고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금나라의 멸망을 방치하는 게 훨씬 이득이 되는 일이었다.[71] 금나라 건국 이전 여진족 시절의 역사적 악연도 있었기에 더더욱.[72]

고려는 북송이나 요나라와는 유교, 불교 서적과 대장경 등을 수입하는 등 문화, 사상적으로 밀접한 교류 관계를 가졌으나 금나라와의 교역은 의례적이고 정치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고려와 금나라의 교역 관계는 항목 참조.

11.4. 그 밖의 이야기

뒷날 누르하치 후금( 청나라)을 세운 것처럼, "금"은 전형적인 여진족( 만주족)의 국호로 자리잡았다. 청나라 황족의 성인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에서의 '아이신'은 금, 기오로는 '씨(氏)'를 뜻한다. 자신들이 금나라의 후손임을 강조하는 것. 이 때문에 현대의 아이신기오로 가문은 이걸 한자로 바꿔서 김씨 성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환빠들은 금은 신라 왕족의 성씨인 씨를 뜻하고, 愛新覺羅가 "新羅를 사랑하고 기억한다(愛覺)"라는 말을 섞어 놓은 것이라며, 여진·만주족은 신라의 후예라고 말한다.

12. 역대 황제

<rowcolor=#ece5b6> 대수 묘호 시호 (여진식/중국식) 연호 재위 기간 능호
초대 태조
(太祖)
응건흥운소덕정공
인명장효대성무원황제
(應乾興運昭德定功
仁明莊孝大聖武元皇帝)
완안아골타(完顏阿骨打)/
완안민(完顏旻)
수국(收國, 1115년 ~ 1116년)
천보(天輔, 1117년 ~ 1123년)
1115년 ~ 1123년 예릉(睿陵)[73]
2대 태종
(太宗)
체원응운세덕소공
철혜인성문열황제
(體元應運世德昭
功哲惠仁聖文烈皇帝)
완안오걸매(完顏吳乞買)/
완안성(完顏晟)
천회(天會, 1123년 ~ 1134년) 1123년 ~ 1135년 공릉(恭陵)
3대 희종
(熙宗)
[74]
홍기찬무장정효성황제
(弘基纘武莊靖孝成皇帝)[75]
완안합라(完顏合剌)/
완안단(完顏亶)
천회(天會, 1135년 ~ 1138년)
천권(天眷, 1138년 ~ 1141년)
황통(皇統, 1141년 ~ 1149년)
1135년 ~ 1149년 사릉(思陵)
4대 - 해릉양왕(海陵煬王)[76] 완안적고내(完顏迪古乃)/
완안양(完顏亮)
천덕(天德, 1149년 ~ 1153년)
정원(貞元, 1153년 ~ 1156년)
정륭(正隆, 1156년 ~ 1161년)
1149년 ~ 1161년 해릉왕릉(海陵王陵)
5대 세종
(世宗)
광천흥운문덕무공
성명인효황제
(光天興運文德武功
聖明仁孝皇帝)
완안오록(完顏烏祿)/
완안옹(完顏雍)
대정(大定, 1161년 ~ 1189년) 1161년 ~ 1189년 흥릉(興陵)
6대 장종
(章宗)
헌천광운인문의무
신성영효황제
(憲天光運仁文義武
神聖英孝皇帝)
완안마달갈(完顏麻達葛)/
완안경(完顏璟)
명창(明昌, 1190년 ~ 1196년)
승안(承安, 1196년 ~ 1200년)
태화(泰和, 1200년 ~ 1208년)
1189년 ~ 1208년 도릉(道陵)
7대 - 위소왕
(衛紹王)[77]
완안과승(完顏果縄)/
완안영제(完顏永濟)[78]
대안(大安, 1209년 ~ 1212년)
숭경(崇慶, 1212년 ~ 1213년)
지녕(至寧, 1213년)
1208년 ~ 1213년 -
8대 선종
(宣宗)
계천흥통술도근인
영무성효황제
(繼天興統述道勤仁
英武聖孝皇帝)
완안오도보(完顔吾睹補)/
완안순(完顔珣)
정우(貞祐, 1213년 ~ 1217년)
흥정(興定, 1217년 ~ 1222년)
원광(元光, 1222년 ~ 1223년)
1213년 ~ 1223년 덕릉(德陵)
9대 애종
(哀宗)
[79]
순황제(順皇帝) 완안영갑속(寧甲速)/
완안수서(完顔守緒)
정대(正大, 1224년 ~ 1232년)
개흥(開興, 1232년)
천흥(天興, 1232년 ~ 1234년)
1223년 ~ 1234년 -
10대 소종
(昭宗)
[80]
말황제(末皇帝)[81] 완안호돈(完顔呼敦)/
완안승린(完顔承麟)
성창(盛昌, 1234년) 1234년 -

13. 추존 황제

<rowcolor=#ece5b6> 묘호 시호 성명 재위 기간[82] 능호 비고
시조(始祖) 의헌경원황제(懿憲景元皇帝) 완안함보(完顔函普) 941년 ~ 960년 희릉(熙陵) 태조 추숭, 금의 시조
- 연목현덕황제(淵穆玄德皇帝) 완안오로(完顔烏魯) 960년 ~ 962년 희릉(熙陵) 태조 추숭, 함보의 장남
- 화정경안황제(和靖慶安皇帝) 완안발해(完顔跋海) 962년 ~ 983년 건릉(建陵) 태조 추숭, 오로의 장남
헌조(獻祖) 순렬정소황제(純烈定昭皇帝) 완안수가(完顔綏可) 983년 ~ 1005년 휘릉(輝陵) 태조 추숭, 발해의 장남
소조(昭祖) 무혜성양황제(武惠成襄皇帝) 완안석노(完顔石魯) 1005년 ~ 1021년 안릉(安陵) 태조 추숭, 수가의 장남
경조(景祖) 영렬혜환황제(英烈惠桓皇帝) 완안오고내(完顔烏古迺) 1021년 ~ 1074년 정릉(定陵) 태조 추숭, 석노의 장남
세조(世祖) 신무성숙황제(神武聖肅皇帝) 완안핵리발(完顔劾里鉢) 1074년 ~ 1092년 영릉(永陵) 태조 추숭, 오고내의 차남, 태조의 부친
숙종(肅宗) 명예목헌황제(明睿穆憲皇帝) 완안파자숙(完顔頗刺淑) 1092년 ~ 1094년 태릉(泰陵) 태조 추숭, 오고내의 4남
목종(穆宗) 장순효평황제(章順孝平皇帝) 완안영가(完顔盈歌) 1094년 ~ 1103년 헌릉(獻陵) 태조 추숭, 오고내의 5남
강종(康宗) 헌민공간황제(獻敏恭簡皇帝) 완안오아속(完顔烏雅束) 1103년 ~ 1113년 교릉(喬陵) 태조 추숭, 핵리발의 장남
휘종(徽宗) 윤공극양효덕현공우성경선황제
(允恭克讓孝德玄功佑聖景宣皇帝)
완안종준(完顔宗峻) - 흥릉(興陵) 희종 추숭, 희종의 부친
덕종(德宗) 헌고홍도문소무열장효예명황제
(憲古弘道文昭武烈章孝睿明皇帝)
명숙황제(明肅皇帝)
완안종간(完顔宗幹) - - 해릉양왕 추숭, 해릉양왕의 부친
해릉양왕 폐위 이후 삭탈
예종(睿宗) 입덕현인계성광운문무간숙황제
(立德顯仁啓聖廣運文武簡肅皇帝)
완안종요(完顔宗堯) - 경릉(景陵) 세종 추숭, 세종의 부친
현종(顯宗) 체도홍인영문예덕광효황제
(體道弘仁英文睿德光孝皇帝)
완안윤공(完顔允恭) - 유릉(裕陵) 장종 추숭, 장종의 부친

14. 계보

금 황실 계보
시조 경원제
현덕제
경안제
헌조 정소제
소조 성양제
경조 혜환제
세조 성숙제 숙종 목헌제 목종 효평제
강종 공간제 태조 무원제 태종 문열제
예종 간숙제 덕종 예명제 휘종 경선제
세종 인황제 폐제 해릉양왕 희종 성황제
현종 광황제 폐제 위소왕
선종 성황제 장종 영황제
애종 장황제
소종 말황제

15. 대중매체에서

16. 기타

17. 같이보기


[1] 여진 통합은 1113년이고 칭제건원은 1115년. [2] 압카이 허허(ᠠᠪᡴᠠᡳ ᡥᡝᡥᡝ, Abka-i Hehe)라는 하늘의 여신을 섬겼다. 여진의 후예 중 하나인 만주족은 남성화된 천신인 압카이 한을 섬기게 된다. [3] 여진 문자로는 다음과 같다. 참조 [4] 《동아시아의 역사II 북방민족-서민문화》, 동북아역사재단 엮음, 25쪽. [5] 여진 문자로는 참조 [6] 여진 문자 표기 참조 [7] 다만 실제 요나라의 국호는 딱히 강철을 의식하고 붙인 것이 아니라 그냥 거란족이 살던 강인 요하에서 따왔다는 말도 있다. 강 이름이 (遼)이다. 허나 강의 명칭에서 나왔다는 것은 좀 더 연구해봐야 하는 것인데, 이전 시기에 나오는 '遼河'나 '遼水'라는 곳이 지금의 '라오하'와 반드시 동일한 곳이라는 확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비교적 오래된 기록에서 '遼'라는 명칭은 '遼山'을 기준으로 한다. 어찌됐든 이 '遼'(요)라는 국호는 제2대 황제인 태종 야율요골이 화북으로 진출하면서 기존의 국호였던 '거란'을 한화한 것으로, 이후에도 병용되긴 했지만 사실 정식 국호는 대거란국이었다. 이렇게 보면 금태조가 착각한 것이다. [8] 《흠정금사어해》를 보면 청대 만주어로 황금은 '아이신'(Aisin)이었다. 물론 금나라와 청나라가 같다고 볼 수는 없지만. [9] 본래의 요나라는 이때 멸망했지만 요나라의 황실 일부는 서쪽으로 넘어가 서요를 세워 명맥을 이어간다. [10] 만주에 철이 풍부해서 생산량이 많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고구려가 다른 2개 국가( 신라, 백제)보다 영토 확장을 더 많이 할 수 있었던 것도, 비록 3번째에선 멸망했지만 동아시아 강국인 당나라를 상대로 2차례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만주의 철광 때문이다. 현재도 선양 인근 안산-번시 일대의 철광은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규모다. [11] 말을 쇠사슬로 연결하는 이유는 한 명이 도망치려고 해도 도망을 못치게 하겠다는 전의의 표현이었다고 한다. 실제로는 느려터진 중장기병이 투사무기에 타격당해 대열이 흐트러지는 것을 방지하려는 시도였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 이렇게 할 거면 애초에 전차를 만드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오히려 저정도로 중무장시킨 말로 전차를 끌게 만들면 속도가 더욱 안나왔을 것이다. 지형 문제도 있고 속도가 느려 전차 특유의 충격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백병전에서도 위력을 장담할 수 없다. 일부 학자들은 실제로 말을 쇠사슬로 연결했을 경우 3마리 중 1마리가 전사하면 다른 2마리도 죽은 말의 시체 때문에 행동불능에 빠진다는 점을 들어, "쇠사슬로 연결했다"라는 문구는 실제로 쇠사슬로 연결한 게 아니라 단지 말 세 마리가 한 조를 이루어 일사불란하게 행동한다는 점을 비유한 문구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12] 중세 기사들의 경우에도 돌진할 때 기수들의 무릎과 무릎이 닿을 정도류 밀집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는데 이 정도면 사슬로 연결했다는 비유가 나올만하다. [13] 송사 三朝北盟會編 卷36, 靖康 원년 2월 조. [14] 기관총이 등장하는 19세기 중엽 이전까지 대부분의 전투에서 기병은 보병보다 우위를 차지했다. 예를 들어 젬블루 전투(1578년)에서는 대포와 화약을 지닌 네덜란드 독립군 2만 5천 명이 불과 1200명의 스페인 기병대의 돌격에 놀라 도망치다 무려 8천~1만 명이 전사하여 어처구니없이 패배했다. # [15] 금태종 문서 참조. [16] 다만 이미 장종 때부터 쇠퇴는 드러난 상황. 사실 금 세종 때가 제대로 된 전성기였지만 화북 왕조인 데다 전성기가 워낙 짧았다. [17] 정확히는 최대로 잡아도 장강 이북이고, 사실상 회수 이북 지역만 차지했다. [18] 진회가 포로에서 탈출해 남송에 복귀하는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19] 제나라가 폐지된 뒤 유예는 촉왕(蜀王)으로 봉해졌다가 그 일가가 임황(臨潢)으로 옮겨진 뒤엔 조왕(曹王)으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1146년 10월 18일 사망했다. [20] 이미 요나라 때부터 전연의 맹으로 인해 막대한 세폐를 갖다바치다시피 했고 금나라가 들어서자 강남 개발에 주력하여 더 많아졌다. 더군다나 남송 때는 금나라한테 화북 지역을 빼앗겨 영토도 인구도 줄었지만 그럼에도 남송은 나름 멀쩡했다. 특히 남송의 추정인구만 해도 무려 8천만에 달한다. [21] 조공을 바치러 올 때 사무역을 통해 재미를 보는 것은 조공국 입장에서의 일종의 권리 비슷한 것이며 상국은 이를 적당히 눈감아주면서 선심을 쓰는 것인데, 조공은 조공대로 바치라면서 사무역을 막아버리면 조공국 입장에서도 몹시 언짢아지며, 아랫사람에게 지나치게 쩨쩨하게 구는 높으신 분들마냥 위신도 안 서고 당연히 조공 바치는 나라의 상국 노릇을 하기 어렵다. 그래서 고려는 금나라에 명목상으로만 칭신했을 뿐 실제로는 금을 제대로된 상국으로 모신다기보단 화친 국가 정도로 취급했으며, 금 또한 고려가 자신들을 제대로 섬기질 않고 명목상 칭신하는 것을 알지만 모른척하며 조공을 바치면서 적대적이지 않은 것만 확인하며 넘어가고 고려에 그 이상으로 간섭하지 않았다(혹은 못했다). [22] 남송같은 부국(富國)을 무너뜨리려면 대등하거나 상회하는, 하다못해 상대의 80%라도 되는 생산력과 인구수를 보유해야하는데 기본적인 체급 차이가 큰 상황에서 남송에게 받는 세공/세폐 등을 국력 신장에 투자하기는 커녕 무역으로 다시 되돌려주는 꼴이었으니 금나라의 철기병이 아무리 막강하더라도 5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뒤에는 오히려 남송이 막강한 경제력과 압도적인 인구수로 금나라를 압박해서 화북 지방을 되찾는게 가능했을 수도 있다. 물론 역대 최강 유목 제국인 몽골 제국한테 금나라랑 같이 쓸려나갔지만. [23] 어쨌든 나라 하나를 멸망시키는 건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예를 들어 통일 중화 제국의 황제들은 고구려, 신라 같은 한반도 왕국들을 멸망시키는게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쉽다고 허장성세를 보였으나 실제로는 온 국력을 쏟아부어도 오히려 실패하고 물러났으며 더 오래전인 한(漢)나라 시기에도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얼마 못가 영향력을 상실했다. 당장 금나라를 세우기 전 여진족은 송나라의 10분의 1에서 20분의 1밖에 안되는 고려와의 전쟁에서 오히려 송나라와의 전쟁보다 더 어려움을 겪었다. 호적에 잡힌 인구가 400만 남짓한 고려가 17만이라는 대군을 동원했을 정도다. [24] 공(貢)이라는 글자의 뜻이 짐작되다시피 조공을 바친다, 공녀를 바친다 할 때 그 공 자인 만큼 강한 수직적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25] 경제적인 요건도 있지만, 그 밖에도 해릉양왕이 저질러 놓은 문제들이나, 거란족의 반란 등으로 금의 사정이 급했다. [26] 인구 조사에 의하면 여진족 인구는 600만인데, 한족이 (금나라 영토니 당연히 화북에만) 4400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여진족 인구는 이것보다 훨씬 더 적은 약 70만 정도일 가능성도 있다. # [27] 그나마 금나라는 이 정도나마 여진족의 비율이 있었지 후대인 원나라, 청나라의 경우에는 더 심했다. 이들은 화북뿐만 아니라 강남까지 중국 전체를 다 차지해 인구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28] 그러나 남송의 사신이 한탄할 정도로 화북의 한족들 역시 여진족의 의복이나 풍습을 많이 받아들였다. '오랑캐와 다름없어졌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니 문화가 반드시 한 방향으로만 흐른 건 아니었던 것이다. [29] 청나라의 만주족은 문명과의 거리가 가까운 서만주 베이스였기 때문에 중원의 경제체제에 상대적으로 쉽게 적응하는 편이었다. [30] 중원 관내에서 유목이 가능했던 환경이 한때 있었으나, 이는 주나라 때 끝났다. [31]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땅을 가진 여진족과 땅을 가지지 못한 여진족이 나타난 것이다. 땅없는 여진족은 남의 땅을 빌려 농사짓건 아니면 그냥 부랑민이 되건 해야 할 텐데 양쪽 모두 결국 부유하지 못한 건 사실이다. [32] 아이러니하게도 상술한 것처럼 한족들에게 자신들의 옷과 변발을 정착시키는 데 성공했던 만주족의 청나라가 그러한 혼란을 더욱 심하게 겪었다. 청나라는 금나라와 달리 중국 남부 지역까지 완전히 장악했으며 금나라의 여진족보다도 더욱 오랫동안 중원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33] 이 점은 독특하게도 비슷한 입장이었던 북위와는 다른 점인데, 북위도 화북왕조+한화라는 점에서는 금나라와 유사했지만, 한화에 있어서만큼은 북위는 중앙정부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그에 따른 반발도 많았던데 비해, 금나라는 중앙정부는 막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는 것, 그리고 이 때문에 북위는 선비족이 세운 국가면서도 한족 위주로 돌아갔다는 것 때문에 북위는 선비족이 세운 나라이면서도 결국 선비족의 반발을 샀고 금나라는 한족의 반발을 샀다. 그나마 금나라는 이게 멸망의 원인은 아니었는데 북위는 이것이 멸망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34] 적어도 거란족은 여진족처럼 북방 유목민족이란 데서는 여진족이 한족보다 더 가깝긴 했다. 원래부터가 국경 하나 넘으면 있기도 했고. 물론 그런 점이 금나라 치하 거란족의 반여진족 감정을 완전히 커버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가까운 정도로 따지면 훗날 금나라 치하의 거란족이 대거 투항하게 되는 몽골 제국 몽골족이 더더욱 거란족과 가까웠다. [35] 여진. 금사에서는 여직으로 기록되어 있다. [36] 결혼. 즉 여진-거란 간의 통혼 혼혈을 의미한다. [37] 이때 금나라 치하 거란족들은 동요(국가), 대요수국을 세위 일시적으로 자립했으나 몽골에게 복속되거나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을 일으켰다. [38] 특히 금나라가 오랜 세월 몽골을 핍박한 터라 몽골은 금나라에 그동안 당했던 원한을 갚아주기 위해 독기가 올라 있었다. [39] 후신격 국가인 청나라는 중원 입관 전에도 요동의 한족을 복속시키고 투항해온 한족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유학을 받아들였기에, 중원 입관 후에도 유교 사당을 훼손하지는 않았다. [40] 과거 제도를 실시해 관리들을 선발했지만 과거 제도로 등용된 한족 사대부들은 중간직 위주로 등용되었고 최고위직에 등용되기 힘들었다. 최고위직은 10여 개 성씨의 여진족 귀족들이 계속 해먹었다. 금나라 말기까지 한족 사대부들을 중하게 쓰지 않았던 점은 국정의 전문성 향상에 지장을 줬을 뿐 아니라 민족 화합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41] 가령 금인들이 기호품으로 사용하던 의 수입이 크게 늘어나 돈이 남송으로 흘러가자 적자를 줄이기 위해 자체적으로 차를 재배해봤지만 품질이 좋지 않아서 외면 받고 차 재배를 포기했다. [출처] 요 금의 역사<이계지 저> [43] 다만 금나라 여성 의복은 한참 철지난것 처럼 보이는 것만 제외하면 남송과 그다지 차이가 없어보인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44] 전통적인 한족 의상은 우임이다. [45] 원시적 수렵 생활을 하다가 금나라를 세운 생여진과 달리 거란은 금이 세워지기 한참 전부터 이미 중원의 문화를 수용하고 그것을 응용함으로서 수준 높은 불교 문화를 꽃피우고 유학을 장려하고 있었다. [46] 농경민이었던 한족과 발해인을 다스리던 곳. [47] 장종의 경우 그 솜씨가 북송 휘종과 버금간다는 소리를 들었다. [48] 단, 여기서 칭하는 '고려'가 북흑수가 신하를 청한 고구려였다는 설과 금나라의 시조 완안함보가 한반도에서 나온 것을 가리킨다는 이설이 있다. 그러나 전자의 설을 따른다 해도 윤관의 인식이나 고려도경의 인식에서 나타나듯이 그냥 고구려-고려를 왕조 교체만 일어난 연속체로 보았기에 고려측에서도 여진이라 하면 대체로 원래 자신들에게 복속되어 있던 민족으로 보았다. [49] 금사 고려전에는 고려 측에서 화친을 구걸했다고 되어 있으나, 고려사에는 여진 측에서 "땅만 돌려주시면 진짜 기와 하나 안 던질게요. 약속 어기면 우리 후손까지 다 죽어 없어질 겁니다." 맹세하고, 화친이 성사되자 9성 지역에 이주한 고려 백성들을 한 명도 해치지 않고 소와 말들을 내어 고려로 돌아가는 것을 도와줬다."고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50] 희대의 폭군이었던 해릉양왕은 제외한다. [51] 남송과 몽골이라는 적들과 싸우는 상황에서 고려를 건드려 전선을 늘리지 않는 게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몽골과 싸우던 와중에도 남송을 치려던 금이었던 만큼 여러 전선을 무조건 피하기만 한 건 아니었지만, 남송은 이기면 경제적으로 막대한 보상이 들어오는 나라이니 한탕주의로 생각해 볼 여지가 있었으나 고려는 그 정도의 이익이 달린 나라도 아니었다. 해릉양왕처럼 그냥 대국이 되고 싶으니 고려도 먹고 싶다는 식의 정신병자가 아니고서야 남송이나 몽골과의 전선과는 멀리 떨어진 고려까지 군사를 파견하기란 어렵다. [52] 얼마 전까지 신하였던 금나라를 상국(上國)으로 인정하기란 명분상 어려웠다. [53] 되려 예종은 재위 14년(1119년) 8월에 금나라 사신을 보내서 상술한 요구에 대한 답변을 적은 국서에 금 황제를 "너(彼)"라고 칭했고, 당연히 금나라는 사신을 거부했다. [54] 1124년에 고려가 금의 침입에 대비, 천리장성을 쌓는 등 긴장감이 고조되긴 했다. [55] 금사 외국열전 고려조 수국 원년 11월. [56] 사실 당시 성들을 지키던 요나라 관리는 잠깐 성들을 맡기는 것에 불과하니 상황이 진정되면 돌려달라고(...) 하고는 탈출한다. 물론 그 이후 요나라는 아예 멸망해버렸지만... 당시에는 차마 아예 나라가 망해버릴 것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자세한 경과는 의주군 항목 참조. [57] 금사 외국 열전 고려조 천회 2년. [58] 이전까진 서로 호칭 때문에 계속 국서를 거절해왔다. 인종 3년 5월 임신일 조에는 고려가 보낸 국서엔 표문이라 하지도 않고 신하라고 칭하지도 않았다고 해서 거부했다고 한다. [59] 특히 고려가 금에 숙인 이듬해 1127년 정강의 변이 발생하며 금은 송으로부터 개봉을 비롯한 화북 지역을 탈취하는데 이 과정에서 금나라의 체급은 이전의 요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 요와 금은 비슷한 이미지와 달리 체급의 차가 무척 컸는데 요의 인구는 400~500만 수준으로 고려에 비해서도 그닥 우위를 점하지 못한 반면 북송의 절반을 차지한 금의 인구는 4000~5000만 수준으로 정주 인구에서조차 남송에 아주 큰 열세가 아닌 나름 대등한 수준이었다. [60] 제후가 천자를 만나러 가는 것을 이른다. [61] 북쪽 요새. 금나라를 비꼬는 것. [62] 고려는 금의 제후이니 금 황제의 신하이다. 그러니 제후가 보낸 신하는 신하의 신하, 배신(陪臣)이다. 하지만 고려는 무시하고 그렇게 쓰지 않은 것. [63] 당시 금나라 형편으론 그 3국 중 한 곳도 복속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64] 고려사절요 권십일 의종 장효대왕 을유 19년. [65] 하필이면 의종의 생일을 축하하러 보낸 사신이었다. [66] 고려에서도 사정을 얘기해선 될 일이 아니라고 여겼는지 사신으로 간 유응규는 아예 단식농성을 했다. 처음에는 명종의 정당성을 묻던 금세종도 제후국의 사신이 굶어죽으면 쪽팔릴 일이라 3일째에 책봉을 약속해줄테니 일단 뭐라도 좀 먹으라고 설득했지만 그래도 요지부동 7일째에 유응규가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자 결국 GG치고 승인해줬다. 이 일로 인해 유응규는 고려로 돌아가자 영웅이 되었고 금세종도 이런 유응규의 충성심에 감탄해 사신을 보낼때마다 유응규의 안부를 물었다(밥은 먹고 다니니?).금나라는 최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왕이 병에 걸려 물러난 것이 아니라 폐위된 것임을 알아낸다. 하지만 이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 끝에 고려 내부의 문제라고 판단, 명종의 왕위를 인정했다...로 알려져 있지만 금나라 기록에 따르면 유응규는 고작 책봉거절회신 만을 받고 돌아갔다. 유응규가 무신정권에 호의적인 인물이었음을 생각하면 위 기록은 미화된것일 수 있다. [67] 이 때는 아직 칭기즈칸의 통합 전이었긴 했다. [68] 1192년 하급 관원 김정(金挺)이 돌아가는 길에 평주(平州) 무녕현(撫寧縣)에 이르러, 역참에서 일하는 하첨아(何添兒)라는 자를 때려죽인 일이 일어났다. 이에 담당관서가 주청하기를 "고려 사신이 오고갈 때 적정한 숫자의 감시병을 붙여야 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금사, 권135 열전73 외국(外國)下』 [69] "下節金挺回至平州撫寧縣, 毆死當驛人何添兒, 有司請..." ☞ 원문은 분명히 고려 사신단 하급 관원이 금인을 때려죽인 것으로 나와 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데이터베이스는 거꾸로 고려 사신이 맞아 죽은 것으로 번역해 놓았다. 번역기까지 돌려볼 것도 없이 누가 보더라도 김정이 고려인 이름이고 하첨아가 여진인의 이름이다. [70] 그러나 금 내부의 식량이 부족했던 탓에 금나라 사람들이 압록강을 넘어와 식량을 구해가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그 탓에 북방에서 밀무역이 흥했다고 한다. [71] 만약 금나라를 도와줬다면 여몽전쟁이 일어나는 시기도 실제보다 더욱 앞당겨졌을 것이며, 고려가 여몽전쟁으로 입는 피해 또한 실제보다 더욱 심각해졌을 것이다. [72] 후손인 만주족이 휘말린 아편전쟁 또한 만약 실제 역사보다 더욱 장기화되어 청나라 조선에 파병을 요청했다면 청나라 초기의 나선정벌과는 달리 조선 조정에서 그냥 무시해버렸을 가능성이 높은데, 당시의 청나라는 병자호란으로 인한 조선인들의 악감정도 강했을뿐더러 금나라 말기만큼은 아니어도 그야말로 사방에서 서양 열강이 조여 들어오는 말 그대로 사면초가의 위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선정벌 당시의 청나라가 중원을 제대로 장악한 뒤였던 것과 달리 아편전쟁 당시의 청나라는 집권층 및 상층부의 부정부패와 계속된 전쟁으로 민심이 흉흉해진 탓에 잘못하면 사분오열되어 멸망할 위험성도 컸던 점 또한 감안해야 한다. [73] 또는 화릉(和陵) [74] 또는 민종(閔宗) [75] 또는 무령황제(武靈皇帝) [76] 내란 중에 피살. 금나라 최악의 폭군. 사후 서인으로 격하되었다. [77] 또는 위왕(衛王) 혹은 폐황제(廢皇帝). 정변으로 피살당함. [78] 允濟(윤제)에서 永濟(영제)로 바꿨다. [79] 또는 의종(義宗) [80] 정식 추승은 아니고 속자치통감에 따르면 그를 따르던 친족과 병사들이 올렸다고 한다. [81] 이 황제의 재위 기간은 하루도 되지 않았다. 중국 역사상 최단기간 재위한 황제. 항목 참조. [82] 여진족 추장 [83] 시나리오1 한정으로 야율초재가 연경의 인재로 나온다. [84] 단, 성조는 다르다. 晉은 4성이고 金은 1성이다. [85] 일본어 원제: 天上戀歌 金の皇女と火の藥師. [86] 저자: 아오키 토모. [87] 예전에도 금사 번역본이 있기는 했지만, 내용을 죄다 잘라먹은 것이어서 그리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88] 또한 진나라는 이름 앞에 대(大)자를 붙이지 않았으므로 Great Jin이라고 하면 금나라만을 의미하지만, 그렇게 많이 쓰이는 표기는 아니다. [89] 청나라 황제들의 비빈들 가운데 간혹 완안씨가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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