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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30 19:41:41

석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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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량 後梁
<rowcolor=#ece5b6> 초대 제2대 말대
태조 폐제 말제
후당 後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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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 초대 황제
고조 덕황제 | 高祖 德皇帝
파일:석경당상상화.png
석경당 상상화[1]
출생 892년 3월 30일
하동도 태원부 분양리
(現 산시성 뤼량시)
사망 942년 7월 28일 (향년 50세)
후진 업성
(現 허베이성, 허난성 인근)
능묘 현릉(顯陵)
재위기간 초대 황제
936년 11월 28일 ~ 942년 7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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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283ab><colcolor=#ece5b6> 성씨 석(石)
경당(敬瑭)
부모 부황 헌조
모후 효원의황후
형제자매 5남 중 2남
배우자 황후 이씨
자녀 7남 1녀 (양자 2남)
작호 개국백(開國伯) → 개국공(開國公)
→ 조국공(趙國公)
묘호 고조(高祖)
존호 영무명의황제(英武明義皇帝)
시호 성문장무명덕효황제
(聖文章武明德孝皇帝)
연호 천복(天福, 936년 ~ 942년)
절일 천화절(天和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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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초기 행적3. 첫 번째 배반을 일으키다4. 석경당이 쏘아올린 작은 공5. 치욕의 재위6. 평가7.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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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오대십국시대 후진(後晉)의 건국자.

2. 초기 행적

튀르크 사타족(沙陀) 출신으로 태원 출생이었다. 본래는 후당 장종 이존욱을 도운 개국 공신이었다가, 명종 이사원(李嗣源)의 가장 충실한 부하가 되어 그를 도와 많은 일을 하였다. 이사원은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 부마로 삼을 정도로 그를 신임했다.

그 후 금군장관(禁軍長官)이 된 그는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와 북경유수(北京留守)를 겸하게 되었는데, 청렴하고 일을 잘해 많은 신망을 얻었다. 여기까진 꽤 괜찮은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겠다.

3. 첫 번째 배반을 일으키다

문제는 장인인 명종의 사후부터 시작되었다. 명종의 아들 이종후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노왕(潞王) 이종가(李從珂)의 반란으로 몹시 위태로운 처지가 되었다. 이종후는 기병 50기만을 거느리고 간신히 도망쳐 위주(魏州)를 지나다가, 마침 그곳을 지나던 석경당과 마주치게 되었다. 석경당은 명종 이사원의 사위고, 이종후는 이사원의 아들이라 자형과 처남 사이가 되니, 위급한 처지에 빠진 이종후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은 순간이었다.

그런데 석경당은 사정을 듣자 한숨을 쉬면서 영 불안하게 굴더니, 위주 자사 왕홍지(王弘贄)와 상의해보고 말을 올리겠다며 우선 그 자리를 떴다. 둘이 만난 자리에서 왕홍지는 이렇게 말했다.
옛적에 파천하던 천자들은 병력 아니면 돈이라도 많았지요. 그런데 당금 천자가 가진 것이라곤 고작 졸병 50명 뿐인데 우리가 충성한들 무슨 득이 있겠습니까?

솔깃해진 석경당은 이 말을 그대로 이종후의 심복인 궁전 고사 사수영(沙守榮)과 황가 시위 분홍진(奔弘進)에게 전했다. 화가 난 분홍진은 석경당을 매우 꾸짖었다.
황상께서는 선황 폐하의 아드님이고 그대는 선황 폐하의 사위가 아닌가! 지금 황상께서 천하에 믿고 의지하는 이가 그대뿐인데 배신을 하겠다는 것인가!

사수영은 석경당을 죽이려고 칼을 뽑아 달려들었고, 석경당의 위사 역시 칼을 뽑아들고 달려들어 싸우다 둘 다 죽었다. 이 모습을 본 분홍진은 몹시 노해 자결을 택했다. 석경당은 곧바로 심복인 유지원(劉知遠)[2]을 보내 50명의 병사들을 단숨에 정리해버렸고, 본인은 낙양으로 달려가 이종가에게 항복했다. 그 사이 왕홍지는 이종후를 잡아다 가두었고, 이종가는 이종후는 물론이고 이종후의 아내와 아들들까지 학살했다. 석경당은 자신을 믿어준 황제의 후손을, 자기 손으로 죽게 만든 것이다.[3]

4. 석경당이 쏘아올린 작은 공

이종가는 석경당이 먼저 굽히고 들어와서, 이종후를 죽이고 황제가 되는 데 성공했지만, 사실 석경당과는 이전부터 사이가 영 좋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석경당의 군사들에게 조서를 내려서 위문하였는데, 석경당의 부하들이 석경당에게 만세를 외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의 만세는 황제에게만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종가 입장에서는 불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석경당을 천평군 절도사로 좌천시켰다.

하지만 석경당은 석경당대로 이종가를 위협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종가의 주변에 심복을 많이 만들어놓아서 그의 동태를 두루 살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전국에 흩어진 재산을 모으고, 군비를 확충하며 만만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가, 자신에게 인사 좌천의 명령이 떨어지자 심복 유지원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유지원은 말했다.
우리에겐 정예부대가 있으니 지형을 점하고 싸우면 반드시 대업을 이룰 것입니다.

하지만 모사인 상유한(桑維翰)은 의견이 달랐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거란과 가깝습니다. 만약 우리가 거란 군주를 대왕으로 모시고 구원을 청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저녁이면 지원군이 올 터이니, 어찌 근심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석경당은 그게 좋겠다고 생각하고는 스스로 요나라에 칭신하는 것을 넘어서 요태종 야율요골의 아들이 되기를 간청하는 상주문을 거란에 보내는 짓을 벌인다. 그때 석경당은 47세, 요태종은 37세였다.(...) 아들보다 열 살 어린 아버지가 탄생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 심지어 석경당은 후대에까지 악영향을 끼칠 엄청난 선택을 하고 마는데, 만리장성 이남 연운 16주를 거란에게 무상으로 넘겨주기로 한 것. 이에 유지원은 어이가 없어 참다 참다 석경당한테 간언을 올려 이를 만류했다.
신하의 예도 모자라서 아들과 아버지의 예를 맺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더구나 도움을 원한다면 재화와 보물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어찌 땅까지 내주시려고 하십니까?

하지만 석경당은 그 간언을 전부 무시했고, 자신의 제안을 그대로 강행했다. 전부터 연운 16주를 노리던 요태종은 석경당의 제안에 신이 나서 가을이 되면 군대를 이끌고 가서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과연 가을이 되자 요태종은 약속대로 무려 5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남하해왔다. 당시 석경당은 이종가와의 싸움에서 몹시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 있었는데, 요태종의 요군 5만이 이종가의 군대를 격파하면서 단숨에 전세를 뒤바꿔버렸다. 특히 상황이 불리해지자 이종가 휘하의 장군들과 병사들도 모두 황제를 배신하고 석경당에게 투항했을 정도. 결국 패배한 이종가는 가족들과 함께 누각에 불을 질러 분신 자살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4] 후당도 그렇게 멸망하고 말았다.

5. 치욕의 재위

후당을 멸망시킨 석경당은 즉위식을 거행하여 정식으로 황제가 된다. 요태종은 석경당을 중원의 황제로 만들어주겠다며 신하들과 함께 그의 즉위식에 참석하여 손수 책봉식을 거행했다. 이 책봉식에서 요태종은 직접 석경당에게 옷을 입혀주었는데, 당연히 거란식 의복이었다. 중국의 황제가 다른 나라, 그것도 이민족 황제에게 굽실거리며 거란옷을 입고 책봉되는 상황이었는데, 당나라 때 이미 황제가 책봉 간섭을 받거나 아우 나라 노릇을 한 적은 있으나[5] 이런 전례는 없었다.[6] 황제가 된 석경당은 약속대로 요나라에 세공을 바쳤다.
천복 연간에 서역西域의 중 말라襪羅가 진에 와서 조회朝會하였는데 화복火卜을 잘하였다. 얼마 후 고조高祖에게 하직하고 고려에 유람하기를 청하였다. 고려 왕 왕건은 그를 심히 예우하였다. 이때 거란이 발해의 지역을 병탄한 지 몇 년이 되었다. 왕건이 조용히 말라에게 말하기를, “발해는 본디 우리의 친척 나라인데, 그 왕이 거란에게 잡혀갔다. 내가 중국 조정을 위하여 거란을 쳐서 그 지역을 취하고 또 묵은 원한을 갚고자 하니, 대사는 돌아가서 천자에게 말해 기일을 정하여 양쪽에서 습격하게 해달라.” 하였다. 이에 말라가 돌아가서 낱낱이 아뢰었으나 고조는 회답하지 아니했다.
속통전續通典 중
처음 고려 왕건이 군사를 써서 이웃나라를 멸망시키고 자못 강대해졌다. 호승胡僧 말라襪羅를 통하여 고조(석경당)에게 말하기를 “발해는 우리와 혼인한 나라입니다. 그의 왕이 거란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조정과 함게 그들을 치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고조는 회보하지 않았다.

출제出帝가 거란과 원수가 됨에 이르러 말라襪囉가 다시 말하였다. 출제가 고려로 하여금 거란의 동쪽 변경을 어지럽혀 거란의 세력을 나누고자 하였으나, 마침 왕건王建이 죽고 아들인 왕무王武가 스스로 권지국사權知國事라 칭하며 표表를 올려 상喪을 알렸다.

11월 戊戌에 왕무를 대의군사 고려왕大義軍使 高麗王으로 삼고, 통사사인 곽인우通事舍人 郭仁遇를 고려에 사신으로 보내어 거란을 공격하도록 조지詔指로서 깨우쳤다. (거란이 이를 알까 두려워하여 조명詔命의 형태를 띠지 않고 조지詔指로서 이를 깨우쳤을 뿐이다)

곽인우郭仁遇가 그 나라에 이르러, 고려의 군사가 매우 약하여 지난번 말라襪囉의 말이 단지 왕건王建의 과장일 뿐이며 사실은 감히 거란과 적수가 되지 못함을 알았다. 곽인우가 돌아가자 왕무는 다시 다른 이유를 들어 해명하였다.
자치통감 #

사실 거란이 쳐들어오기 전에 왕건 발해 멸망 후 거란 견제를 위해서 석경당에게 함께 거란을 양면에서 치자는 제안을 했지만 석경당이 그냥 무시해버렸다. 물론 고구려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왕건의 야심을 고려할 때 그 의도를 경계했을 수도 있지만 석경당의 행보를 볼 때 그냥 거란에 대적할 생각 자체를 안 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석경당 본인의 조카 대에 괜히 거란에게 저항하다 망한 걸 생각해보면, 그리고 고려도 당시 갓 통일된 터라(석경당이 황제로 즉위하던 해에 고려는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후삼국시대를 마감시켰다.) 내정을 정비해야 했으며 후진도 당시 남쪽에 오월, 남당, 남한 등의 십대 국가들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에 무엇을 해볼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애초에 거란 견제는 석경당과는 비교도 안되는 후당의 이존욱조차도 그저 거란의 침공을 물리친 정도로 끝냈지 거란을 역으로 침공하는 건 못했다. 실제로 왕건의 아들 왕무 때 이런 고려의 군사력도 사실은 뻥이라는 게 그대로 후진의 사신에게 드러나서 '오랑캐가 힘도 없으면서 뻥친다'고 중국 사관에게 욕을 푸짐하게 먹는다.(...)

우습게도 그렇게 원하던 황제가 된 석경당은 유지원이 자립하고 토욕혼이 이반한 후에 조덕균, 안중영 등의 번진들의 반란에 시달리다가 그들의 반란을 진압못하는 것을 요나라 조정에게 책망을 받게 되자[7] 근심하다 승하하고 만다. 황제가 된 뒤 고작 6년 만이었다. 후계자 아들 석중예는 어리다는 명분으로 형의 아들 출제 석중귀에게 찬탈당하고 이어 석중귀조차 거란에 적대하다 패함으로써 후진은 멸망한다.

6. 평가

대사를 꾀하는 초기에 오랑캐를 불러 원조를 받아, 이때부터 오랑캐의 기세가 강해졌고, 백성들이 이로 인해 재앙에 빠졌다. 후사에게 이르러, 전쟁이 오랫동안 계속되어 좀처럼 끝나지 않고, 군대를 부려도 지키지 못하였으며, 온 겨레가 사로잡혔다.
구오대사(舊五代史) 중

자기를 믿어준 황제를 무려 두 번이나 배신한 데다 즉위 이후도 별다른 치적을 남기지도 못했고 무엇보다 기병 양성의 요충지인 장성 이남의 연운 16주를 거란족에게 통째로 넘겨 진시황 이래 북방이민족의 침략을 막는 최전방의 보루인 만리장성 방어선을 무력화시킨 것 때문에 전통적인 한족 중심 사관에서는 항상 평가가 박했다.[8]

다른 오대십국시대의 군주들(특히 개국군주)은 후세에 귀감이 될 만한 면이 한두 개쯤은 있었다.

요나라에 넘긴 연운 16주는 거란이 중원에 진출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요충지를 잃은 중원은 내내 거란에 시달리며 송나라 시기까지도 그중 2개 주만 간신히 되찾는데 그치고 만다. 송나라는 건국 당시부터 요나라라는 강국 때문에 기를 펴지 못하였는데 거기에 상당한 책임이 있는 인물. 이러한 한족 문명의 열세는 비단 요나라 시기에 끝난 게 아니라 금나라, 원나라까지 이어졌다. 금나라의 발흥 이후 북송의 몰락 및 칭기즈 칸, 원나라의 흥기까지 생각하면 그야말로 중국사 전반을 한족의 입장에서는 나쁜 의미로 바꿔놓은 인물이다. # 연운 16주는 이후 명나라가 몽골을 초원으로 내쫓는 과정에서 되찾게 된다.

유주(계, 탁 등), 삭주 등의 연운16주가 얼핏 보기에는 중원 전체의 입장에서 결정적인 면적의 영토가 아닌 것 같지만, 중요한 것은 넓이가 아니라 그곳의 지형이다. 원래 중국의 한족 왕조들은 험준한 방어 요충지를 성벽으로 이어서 건설하였는데 이게 바로 만리장성이었고, 이후로 이 만리장성을 의지해 북방의 유목민족들을 방어해 왔는데 연운 16주는 그 만리장성 바로 이남에 위치한 곳들이다. 즉, 하북 평야 지대를 방어하는 노른자로 비유될 정도의 중요한 지정학 요충지, 지형적 방어물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 지역은 당시로서는 가장 중요한 군수물자인 말의 집산지로 이곳을 잃음으로써 유목 민족의 대규모 기병 편제에 보병 중심으로 불리한 위치에서 대응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요, 금, 원 등 유목민족 국가들이 이후로 아무런 저항 없이 중원으로 쳐내려올 수 있었을뿐더러 이 지역에서 나는 물자를 바탕으로 이전까지의 유목 연맹 국가의 한계를 넘어선 중앙집권화까지 가능하게 해준 지역이다.

거기에 더해 진시황 이후로 1,000년 넘게 중국 고대사를 관통하며 내려 온 보물 중의 보물인 전국옥새까지 사라지게 만들었다.

7.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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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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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홍조 · 양빈 · 왕장 · 이홍건 · 염진경 · 섭문진 · 후찬 · 곽윤명 · 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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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권 ~ 150권은 志에 해당. 구오대사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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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숭 · 이린 · 가위 · 단희요 · 장윤 · 왕송 · 배호 · 왕인유 · 배우 · 왕연 · 마중적 · 조연의
{{{-2 (1) 구오대사 진서에서는 심빈(沈贇)으로 표기되며, 신오대사에서는 심빈(沈斌)으로 표기된다.
}}}}}}
[ 세가(世家) ]
||<-2><tablewidth=100%><tablebgcolor=#000000><width=50%> 61권 「오세가(吳世家)」 ||<-2><width=50%> 62권 「남당세가(南唐世家)」 ||
양행밀 · 서온 이변
63권 「전촉세가(前蜀世家)」 64권 「후촉세가(後蜀世家)」
왕건 맹지상
65권 「남한세가(南漢世家)」 66권 「초세가(楚世家)」
유은 마은 · 유언 · 주행봉
67권 「오월세가(吳越世家)」 68권 「민세가(閩世家)」
전류 왕심지
69권 「남평세가(南平世家)」 70권 「동한세가(東漢世家)」
고계흥 유민
※ 71권은 譜에 해당. 신오대사 문서 참고
[ 부록(附錄) ]
||<tablewidth=100%><tablebgcolor=#000000> 72·73권 「거란전(契丹傳)」 ||
거란
74권 「외국열전(外國列傳)」
· 토혼 · 달단 · 당항 · 돌궐 · 토번 · 회골 · 우전 · 고려 · 발해 · 신라 · 흑수말갈 · 남조만 · 장가 · 곤명 · 점성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tablebgcolor=#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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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나라 시기의 간행본 삼재도회(三才圖會)에 실린 그림. 시대상에 맞게 그리면 명나라의 익선관을 쓴 모습이 아니라 절상건이나 전각복두를 쓴 모습이어야 한다. [2] 후한(後漢)의 고조(高祖)가 된다. [3] 이게 뒤늦게 마음에 걸리기라도 했는지, 훗날 석경당은 황제가 되고 나서 이종후를 민황제(閔皇帝)로 추존했다. [4] 원래는 성 전체에 불을 지르려 했으나 황후가 만류하여 누각에만 불을 질렀다. [5] 한나라의 건국자 한고제 백등산 전투에서 패배한 후 흉노의 아우가 된 바 있다. [6] 심지어 이후에도 없었다. 가장 초라할 때가 남송 초기, 남송 황제가 금나라와 군신관계 맺고 책봉 받으며 세공을 바치던 때이긴 한데 그렇다고 해서 금나라가 남송 황제에게 여진족 의복 입히고 책봉식 하지는 않았다. 그나마도 해릉양왕의 개뻘짓과 그 뒤에 남송의 공격 기타 이런저런 문제들로 인해 새로 즉위한 금세종은 군신관계를 숙질관계(숙부-조카관계)로 완화, 세공을 세폐로 변경(세'공'의 공은 바친다는 의미다.) 세폐 감축 등을 내세워 남송와 화평을 맺었다. [7] 토욕혼은 요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저항하는데 유지원이 그들과 내통한 것을 알게 되어 요나라 측이 유지원을 처벌하라고 항의한 것이다. 문제는 석경당이 다른 번진들의 반란을 진압한다고 유지원의 세력까지 제압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8] 중국어 위키백과에서는 아예 매국노를 뜻하는 ' 한간'(漢奸)으로 규정하며 맹비난한다. [9] 이존효, 강군립, 설아단. [10] 이존욱도 아버지의 뒤를 이은 후 후량이 침공하자 이를 막기 위해 거란을 끌어들인 적이 있었는데 석경당과는 달리 본인이 나서서 제대로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야율아보기가 하늘이 내가 여기에 이르지 못하게 하려는 거냐며 한탄했을 정도. [11] 당시 아들이 모두 죽어서 직계에게 물려줄 수는 없는 상황이었지만 자기 처조카의 그릇을 알아보고 망설임 없이 후계자로 삼았다. 시영을 후계자로 삼은 곽위의 유언은 "아무런 걱정도 없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