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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 Θεσσαλονίκη
라틴어: Thessalonica
영어: Thessaloniki
튀르키예어: Selanik
불가리아어, 세르보크로아트어 : Солун
[clearfix]
1. 개요
그리스 중마케도니아 주의 주도이자 그리스 제2의 도시.
마케도니아를 비롯한 그리스 북부의 중심지이다. 살로니키(Σαλονίκη)로 불리는 경우도 있고, 라틴어 명칭인 테살로니카(Thessalonica)나 살로니카(Salonica)로 불리기도 한다. 의미는 테살로스의 승리.
현대 그리스어 발음으로는 '세살로니키'(Θεσσαλονίκη), '테살로니키'는 국립국어원에서 정한 표기이며 이는 코이네 그리스어의 발음을 따른 것이다.[3]
별칭은 공동 수도(the co-capital, Συμπρωτεύουσα, 심브로테부사)이다. 테살로니키가 동로마 제국 시대에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이어 두 번째로 크고 중요한 도시였기 때문에 제국 공동 수도(Συμβασιλεύουσα, 심바실레부사)라는 별칭이 있었다. 1912년 그리스가 마케도니아를 수복한 이후 테살로니키가 수도 아테네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가 되자 이 별칭이 유지되었다. 게다가 그리스 왕국 시절에는 1960년대 짧은 시간이나마 팔라타키 궁이라는 국왕의 행궁도 있었다.
수도인 아테네처럼 광역 행정구역인 테살로니키 도시권(Thessaloniki Urban Area)과 시급 행정구역인 테살로니키 시(Municipality of Thessaloniki)가 있다. 2011년 기준으로 테살로니키 시의 면적과 인구는 19㎢, 32만 명이고 테살로니키 도시권의 면적과 인구는 112㎢, 79만 명이다. 보통 테살로니키 시라고 하면 테살로니키 도시권을 가리킨다.
테살로니키가 있는 마케도니아 지방의 위치 |
테살로니키 자체만 본다면 국경선에 가까운 데다가 그리스 북동부에 너무 치우친 감이 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보면 발칸 반도 남부에 위치한 국가들이 튀르키예가 통제하는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거치지 않고 직접 지중해로 접근할 수 있는 적절한 위치에 있다. 그래서 북마케도니아 등 여러 나라들의 화물이 집중되는 국제 항구의 성격을 띄는 곳이다.
2. 역사
기원전 315년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을 지배하던 카산드로스가 처음 도시를 건설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누이이자 자신의 부인이었던 테살로니케(테살로니키의 고대 발음)의 이름을 붙였다. 그 뒤 중요한 항구 도시로 성장했으며, 기원전 146년 마케도니아 왕국을 멸망시킨 고대 로마에 의해 마케도니아 속주의 주도가 되었다. 로마 제국 시대에는 라틴어로 테살로니카라고 불렸으며, 이탈리아에서 제국 동방으로 가는 중요한 도로인 에그나티아 가도(Via Egnatia; Egnatian Way)의 중간 기착지 중 하나였다.
콘스탄티노플 건설 이전, 즉 고대 로마 시절 에그나티아 가도의 지도. 이를 보면 왜 테살로니키가 요충지가 되었는지 알 수 있다.
해안선으로 볼 때 에게 해의 유럽 쪽(그리스 및 트라키아) 해안선이 테살로니키를 기점으로 하여 남북축과, 에그나티아 가도와 거의 일치하는 동서축으로 갈려 있다. 다시 말해 테살로니키는 남쪽 끝에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둔 남북축과, 서쪽 끝에 디라키움[4] 및 동쪽 끝에 비잔티움을 둔 동서축의 결절점이다. 한편 지도를 잘 보면 테살로니키 인근의 바다가 안으로 쑥 들어가 있는 만이라 이 자체로 이미 천연 항구의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바로 동쪽에 삼지창처럼 생긴 할키디키(Χαλκιδική) 반도가 있어서 바다로부터의 외침에 방파제 역할을 해 주기 때문에, 바다를 향해서 너무 탁 트인 항구들에 비해서 안보적으로 훨씬 좋은 조건이다.
이러한 장점들이 제정 초기까지는 그리 중요하게 대두되지 않았는데(물론 신약성경 테살로니카서의 무대가 되었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절대 시골은 아니었다), 3세기의 위기로 국방소요가 폭증하면서 너무 후방에 있지 않았고 다뉴브 전선 및 동방 전선과의 교통 통신이 수월하여 사두정치 때에 이미 발칸 지역의 중심지가 되었던 데다가, 위에서 서술한 동서축의 동쪽 끝 비잔티움이 콘스탄티노플로 새단장하면서 완전히 만개했다. 이는 곧 콘스탄티노플 건설 이전에 그리스 지역을 대표했던 아테네, 스파르타 등으로부터 역할을 뺏어왔다는 이야기도 되어서, 고대 후기 이후로 원 그리스(아티카, 펠로폰네소스 등) 지역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제법 거리가 있었던 점 + 이슬람의 발흥으로 지중해의 제해권을 잃어버린 후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 근거지를 둔 이슬람 해적의 공격을 당하기 쉬웠던 점 등으로 쇠퇴했다.
동로마 제국이 서기 7세기에 거대도시인 안티오키아와 알렉산드리아를 잃고, 에게 해 연안의 주요 대도시들이었던 에페소스, 스미르니, 아테네 등이 쇠락하면서 테살로니키가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다. 사실 같은 7세기에 동방에서 페르시아 및 이슬람 세력과 사투를 벌일 때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졌던 발칸 반도는 다소 방치되었고, 그리하여 아바르 및 슬라브족의 침략에 해안지역 몇 곳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침탈되었다. 테살로니키도 이 때 동로마가 가까스로 지켰던 곳 중 하나였는데, 610년대에 이르면 시가지 자체가 성내로 쪼그라들고 주변의 슬라브인 정착지들에 둘러싸여, John V. A. Fine이라는 관련 사학자에 의하면 '사실상 슬라브의 바다에 떠 있는 로마의 섬과 같았다'고 할 정도였다.[5] 영어 위키백과 Battle of Thessalonica에 따르면 이 시기에만 테살로니카 및 그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공성전이 5번이나 된다. 586년 혹은 597년, 604년, 615년, 617년, 676-678년. 특히 맨 뒤의 676-678은 시간대를 잘 보면 알 수 있지만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과 동시에 일어났는데, 중앙정부가 당연히 수도 콘스탄티노플 방어에 몰두해 있는 틈을 타 슬라브인들이 기회를 포착했다고 한다.[6] 즉 제국의 제1·제2의 도시가 동시에 공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 이전 604, 615, 617년도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틈타 아바르인 및 슬라브인이 배후를 노렸던 것이다.
여하튼 중세 초기 인구는 대략 수만 명, 중기와 말기에는 대략 10만~15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904년에는, 원래 동로마 출신의 전향자였으며 아바스에서는 트리폴리를 연고로 하여 그 지명이 붙었고 반쯤은 사략 해적의 수장이었던 트리폴리의 레오가 일시적으로 점령 및 약탈했었던 적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동시대에 같은 부류의 인물로서 활동했던(동로마 출신 전향자, 911년 키프로스 일시 점령 및 약탈) 타르수스의 다미아노스도 참고하면 좋다.
중세 테살로니키는 위에서 접했듯 그리스-발칸 반도 지역의 육로와 에게해로 통하는 해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바로 다음으로 크고 중요한 도시였다. 이 때문에 앞서 개요에서 언급된 제국 공동 수도라는 별칭도 생겼다. 다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크기와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컸기 때문에 그리스어로 그냥 도시(Η πολή, 이 폴리)라고 하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다른 도시들은 모조리 마을(η χώρα, 이 호라)로 불렸으며 테살로니키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안나 콤니니는 그의 저서 알렉시아스에서 테살리아(θεσσάλια)의 마을(χώρα)이라는 표현을 썼다.
1080년대 알렉시오스 1세 시대 초기에 노르만족이 디라키온을 함락시키고 테살로니키에서 100여km 정도 떨어진 라리사까지 진출했으나 결국 테살로니카까지는 못 치고들어왔다.[7] 하지만 100년 지나고 나서 1180년대에는 달랐다. 영어 위키백과 Sack of Thessalonica (1185)에 의하면, 시장을 맡고 있던 다비도스 콤니노스가 방어를 소홀히 했고, 심지어 공성 준비를 하는 시칠리아(노르만)군이 공성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성 안에서 급습하는 것도 엄금했다.[8] 또한 외부에서의 구원군도 제대로 조율이 안 되어서 동쪽 성벽에 균열이 나 손쉽게 함락당했다.[9] 이후 수습 과정에서 발견된 시신만 7천여 구라고 할 정도로 대참극이 벌어졌다.[10] 몇 년 전 1182년 안드로니코스 1세의 라틴인 학살에 대한 보복 성격도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시칠리아 왕국의 노르만족 또한 카톨릭을 받아들인 지 백 년이 넘어서 저 '라틴인'의 범주에 당연히 포함되었다)[11], 어디 변방 도시도 아니고 제국 제2의 도시가 이렇게 어이없게 털리고 주민들도 많이 죽은 이 사건으로, 안 그래도 폭군이면서 동시에 암군이라 제위 유지가 위태위태하던 안드로니코스 1세는 직격탄을 맞아 반란으로 험한 꼴을 당하며 죽었다.[12]
1204년 4차 십자군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고 얼마 되지 않아 테살로니키도 함락되었으며, 십자군 봉건 국가 라틴 제국의 봉신 영지인 테살로니카 왕국이 되었다가 1242년 니케아 제국에 의해 수복되었다. 이후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고 동로마 제국을 부활시키면서 다시 제국 제 2의 도시가 되었지만, 제국의 국력이 예전 같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다. 1342년에는 열심당원(Zealots of Thessalonica)이라고 자칭한 도시 하층민들의 반란으로 공화정부가 수립되어 8년 동안 독립을 유지하다가 패망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는 요안니스 5세와 요안니스 6세 간의 팔레올로고스 내전 과정에서 6세가 임명한 시장을 몰아내고 5세의 편을 들며 일어났으며, 여기에 4차 십자군 이후 콘스탄티노플의 절대적인 제국 내 권위가 일단 한 번 무너지자 테살로니카 내부에서 생긴 독자의식(언제까지 콘스탄티노플에 치여만 살 거냐)이 합쳐졌다고도 한다.[13] 그래서 요안니스 5세와 6세의 내전이 1347년에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테살로니카는 콘스탄티노플의 명령을 무시하고 1350년까지 독자행보를 했었다.[14] 1389년에는 오스만 술탄국의 포위를 견디지 못하고 항복했고, 이후 동로마와 오스만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가 1423년 베네치아 공화국에 양도되었다. 베네치아의 힘으로 그나마 좀 더 버텨 보려는 심산이었으나, 오래 버티지 못하고 1430년 무라드 2세의 군대에 의해 최종적으로 정복되었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셀라니크(Selanik)라고 불렸는데, 테살로니키를 살로니키라고 줄여 부르던 것이 튀르키예식 발음으로 변형된 것이다.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 제국과 같은 지역을 중심지로 삼은 지정학적 후계 국가인 만큼 테살로니키는 오스만 제국 시대에도 번영하는 주요 대도시 중 하나로 남았다. 16세기에는 스페인에서 레콩키스타 종료 이후 추방된 유대인들이 유입되어 1519년에는 유대인 인구 비중이 절반을 넘길 정도가 되기도 했다.
19세기 말에는 철도, 전등, 전차가 도입되는 등 근대화되었으며, 그리스와 발칸 국가들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20세기 초반까지도 테살로니키는 오스만 제국의 일부로 계속 남아있었다. 1908년 청년 튀르크당의 혁명이 여기서 발발했으며, 튀르키예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케말 아타튀르크도 테살로니키에서 태어났다. 아타튀르크는 오스만 제국의 대표적인 대서방 교역창으로서 국제적이고 근대 문물로 가득했던 이 도시를 깊게 사랑했으며, 훗날 젊은 장교 시절 테살로니키가 그리스로 넘어가자 동료 장교들을 다그칠 때 "우리의 고향 셀라니크가 적에게 넘어갔는데 아직도 술탄의 녹을 먹고 있는 자네들은 여기서 뭐하고 있는가?" 라는 식으로 책망하곤 했다.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이 터지면서 그리스와 불가리아는 이 도시를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당시 그리스 수상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마케도니아 방면으로 진격하는 그리스군이 테살로니키와 마나스트르[15] 중 어느 도시로 진격할 것인지 결정해 줄 것을 요청해오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테살로니키를 점령하라!(Θεσσαλονίκη με κάθε κόστος!)"고 지시했다. 1912년 11월 8일 결국 그리스군이 입성하여 오스만 제국군의 항복을 받았고[16], 1913년 3월 국왕 요르요스 1세(Γεώργιος Αʹ)가 이 곳을 방문했다가 암살되는 사건이 있었으며, 같은 해 8월 부쿠레슈티 조약에 따라 완전히 그리스 영토가 되었다.
1912년 전쟁으로 테살로니키를 비롯한 그리스 북부, 크레타가 새로 그리스 왕국으로 편입되기는 했지만 아테네 등 중남부 지역과는 이미 80년이나 다른 나라로 살아온터라 그리스는 테살로니키에 마케도니아 총독부를 설치했고, 1955년 북부그리스부(部)로 개편될 때까지 총독부가 남아있었다. 이 부서는 지금도 그리스 내무부 산하 부처로 격하되어 존재한다. 홈페이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연합군이 불가리아 방면으로 진격하기 위한 교두보가 돼서 50만이라는 상당한 숫자의 군대가 모인 적도 있었다. 비록 진격 자체는 전쟁 끝에 가서야 제대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1917년에는 대화재로 도시 중심부가 홀랑 타버리기도 했다. 1923년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 때는 16만이 넘는 피난민을 받아들였다. 반면 튀르키예로 떠난 무슬림은 2만 명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이탈리아 왕국의 폭격을 받았으며, 뒤이어 개입한 나치 독일의 그리스 침공을 맞은 그리스가 이 도시와 주변 지역을 포기할 수 없어서 이 도시와 동부 영토를 보호하는 메탁사스 방어선에 상당한 병력을 투입했고, 결국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방어선을 지키려다가 독일군이 방어선의 빈틈을 노리고 파쇄공격을 하는 통에 순식간에 함락(1941년 4월 8일)된 역사도 있다. 이 당시만 해도 테살로니키는 유대인이 많은 도시였지만 나치 독일이 그리스를 점령하면서 수용소로 끌고 갔다.
3.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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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
1986년 밧새의 아폴로 에피큐리우스 신전 Ναός Επικουρίου Απόλλωνα των Βάσσες |
1987년 델포이 고고 유적 Αρχαιολογικός Χώρος Δελφών |
1987년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Ακρόπολη Αθηνών |
1988년 테살로니카의 초기 기독교 및 비잔틴 기념물군 Παλαιοχριστιανικά και βυζαντινά μνημεία της Θεσσαλονίκης |
1988년 에피다우루스의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Αρχαιολογικός τόπος Επιδαύρου |
1988년 로도스 중세 도시 Μεσαιωνική Πόλη της Ρόδο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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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미스트라스 고고 유적 Αρχαιολογικός Τόπος Μυστράς |
1989년 올림피아 고고 유적 Αρχαιολογικός Τόπος Ολυμπίας |
1990년 델로스 섬 Δήλο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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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다프니 수도원, 호시오스루카스 수도원, 키오스 섬의 네아모니 수도원 Μονή Δαφνίου, Μονή Οσίου Λουκά και Νέα Μονή Χίου |
1992년 사모스 섬의 피타고레이온과 헤라 신전 Πυθαγόρειο και Ηραίο Σάμου |
1996년 아이가이(베르기나) 고고 유적 Αρχαιολογικός χώρος Αιγών (Βεργίνα) |
||
1999년 미케네 ・ 티린스 고고 유적 Αρχαιολογικοί Χώροι των Μυκηνών και της Τίρυνθας |
1999년 성 요한 수도원과 파트모스 섬의 요한 묵시록 동굴 Ιστορικό Κέντρο (Χώρα) της Πάτμου με τη Μονή του Αγίου Ιωάννου του Θεολόγου και το Σπήλαιο της Αποκάλυψης |
2007년 코르푸 옛 시가지 Παλαιά Πόλη της Κέρκυρα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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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필리피 고고 유적 Αρχαιολογικός Χώρος Φιλίππων |
||||
복합유산 |
1988년 아토스 산 Άγιον Όρος |
1988년 메테오라 Μετέωρα |
||<-2><tablewidth=450><tablealign=right><tablebordercolor=#000><tablebgcolor=#FFF,#1F2023><bgcolor=#000>
유네스코 세계유산 ||
유네스코 세계유산 ||
<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
[[그리스어| |
||
[[영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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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
|||
[[한국어| |
|||
국가·위치 |
그리스
중앙마케도니아주 테살로니키 북위 40° 38′ 17.988″ 동경 22° 57′ 54.0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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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88년 | ||
등재기준 |
(ⅰ)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
||
(ⅱ)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할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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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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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456 | }}}}}}}}} |
테살로니키 항구를 위한 요새인 레프고스 피르고스. 12세기부터 요새가 있던 곳에 오스만 제국 때 다시 세운 것이다. 색이 하얗게 되어 백탑(White tower)로도 불린다.
[clearfix]
역사가 오랜 도시인만큼 유적도 많다. 고대 로마 유적으로는 포룸(Forum= 아고라), 갈레리우스 개선문 등이 있다.
특히 테살로니키의 초기 기독교 및 동로마 양식 건축물군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들인데, 아야 소피아, 아요스 디미트리오스, 아야 에카테리니, 나오스 프로피티 일리아 등의 성당들과 테살로니키 성벽, 동로마 시대 목욕장 등이 있다. 한편 오스만 제국 시절의 건물로는 도시의 상징인 백탑(Λευκός Πύργος)이 유명하다.
갈레리우스 개선문. 갈레리우스 황제가 사산 제국을 상대로 거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마찬가지로 테살로니키 내에 있는 로톤다(Ροτόντα)와 더불어 세웠다. 로톤다는 원래 갈레리우스의 무덤으로 쓰려고 지어졌으나 빈 공간으로 방치되었고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성당으로 개조되었다가, 오스만 제국 시기 모스크로 쓰였고 미나레트가 덧붙여졌다. 그 후 1912년 테살로니키 수복을 계기로 다시 성당으로 복구되었지만 미나레트는 철거하지 않은 채 오늘날로 이어지고 있다. 내부에는 동로마 시절의 모자이크가 일부 보존되어 있다.
아야 소피아.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와 같은 이름의 정교회 성당으로 원래 성당이 있던 자리에 8세기에 지어진 복제품이다. 4차 십자군에 의해서는 가톨릭 성당으로, 오스만 제국에 의해서는 모스크로 사용되었던 역사도 있다.
튀르키예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자 튀르키예 독립 전쟁의 영웅인 아타튀르크의 생가. 주 테살로니키 튀르키예 영사관 바로 옆에 있으며 그리스 땅에 있는 튀르키예의 양외지(讓外地)이다.[17] 1881년에 아타튀르크가 이 집에서 태어나서 자랐으며, 아타튀르크의 가족들은 1912년까지 이 집에서 거주하다가 테살로니키 함락 이후 추방되어 한동안 일반 가정집으로 사용되다가 튀르키예와 그리스가 우호협정을 맺은 1933년, 테살로니키 시에서 이 집앞에 "아타튀르크 생가"라는 팻말을 붙인 것을 계기로 테살로니키 시가 이 집을 구입해 1937년에 아타튀르크에게 선물했다. 아타튀르크는 다른 튀르키예인에 비해 어려서부터 서구 근대 문물과 접촉하고 교육을 받을 기회를 준 고향 셀라니크의 국제적인 분위기를 깊게 사랑했고, 이곳이 그리스에게 넘어간 것이 큰 한으로 남아 실향민이 된 이후에도 고향과 생가를 방문하고 싶어 했다. 아타튀르크가 1938년 사망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아타튀르크 생가에서 같이 자란 아타튀르크의 여동생인 마크불레 아타단(Makbule Atadan, 1885-1956)의 자문을 받은 1953년에 튀르키예 정부가 아타튀르크가 살던 시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현재 이 집은 박물관이 되어 튀르키예 의회 소유로 튀르키예 정부가 관할하고 있으며, 내부 직원들도 그리스인과 튀르키예인으로 되어있어 튀르키예어도 잘 통한다. 테살로니키를 찾는 튀르키예인 관광객들은 거의 무조건 찾는 명소이다.
아타튀르크 시절 그리스와 튀르키예는 서로 치열한 전쟁도 많이 치르고, 현대까지 양국 간의 감정의 골이 되는 사건들이 많았지만 의외로 아타튀르크 본인과 그의 그리스 측 라이벌격이었던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총리는 서로 깊이 존경하는 사이였다. 양쪽 모두 혼란스러운 오스만 제국 말기에 태어나[18] 자국의 후진성을 한탄하며 반동적인 자국 내 종교 세력과 크게 싸워야 했고, 근대 민족 국가의 건설이라는 이데올로기 아래 혁명가이자 정치인으로 경력을 펼쳤으니 국가 대 국가라는 입장을 벗어나 개인으로서는 충분히 동질감을 느낄만도 했다. 베니젤로스가 그리스 정계에서 몰락하는 30년대 쯤에는 아예 두 나라가 모두 인구 교환 등을 통해 형식적으로 분쟁 거리를 청산한 이후 상호 평화 조약을 맺으면서 두 나라 정가에 한동안 화해 무드가 감돌았으며, 1934년 베니젤로스는 노벨 평화상 후보로서 아타튀르크를 추천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둘 다 당장은 근대 민족 국가로서 그리스와 튀르키예의 성장을 지상과제로 두면서도 장기적으로는 그리스와 아나톨리아는 역사적으로 한 번도 분리된 적이 없는 운명 공동체로서 다시 하나의 나라
4. 교통
과거 노면전차가 있었으나 1957년 폐선됐다. 그리고 1918년부터 지하철 건설에 대한 논의가 나왔고, 2006년이 되어서야 테살로니키 지하철이 착공에 들어갔다. 2024년 완공을 목표로 공사 중이다. 원래는 2018년까지 완공할 예정이었으나 그리스 경제위기로 인한 경제난에다 지하철 예정 부지를 파헤치니 유물과 유적이 쏟아지는 바람에 심각한 지연(遲延)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테살로니키의 교통 문제가 심각해서 공사 자체는 중단되지 않고, 원안보다 30m 더 깊은 심도에 공사하는 방식으로 꾸준히 진행되고 있었다. 우선적으로 2개 노선, 18개 역이 들어설 예정이고 장기적으로는 34개 역으로 늘릴 계획이다.2024년 11월 30일 1단계 사업이 13개 역만으로 개통했다. # 건설 중 유적, 유물로 고역을 치른 지하철 답게 세계 최초로 역 내에서 유적을 볼 수 있는 역도 있다. 관련 게시글
5. 기타
- 불가리아에서는 테살로니키를 솔룬(Солун)이라고 부른다. 사실 솔룬이나 셀라니크도 궁극적으로는 그리스어 Σαλονίκη에서 유래되었다.
- 2010년부터 부산광역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 개신교 신약성경 데살로니카전서, 데살로니카후서에서 나오는 지명인 "데살로니가"가 현재의 테살로니키이다. 개신교의 개역성경이 나왔을 당시에는 외래어 음역에 거센소리 대신 예삿소리로 자주 표기해서 이렇게 되었다. 천주교 성경에서는 테살로니카서라고 부르며, 공동번역성서에서는 이를 절충하여 데살로니카서라고 부른다.
- 2004 아테네 올림픽 남자축구종목에서 한국올림픽축구대표팀이 그리스와 조별예선 첫 경기를 이곳에서 벌였다. 결과는 2:2 무승부였다.
- 테살로니키 국제영화제가 유명하다.
- 그리스의 대통령인 카테리나 사켈라로풀루가 태어난 곳이다.
- 프랑스의 세계적인 식품회사인 다논의 설립자 이삭 카라소와 그의 아들 다니엘 카라소가 이 곳 출신이다.
- 이곳을 연고로 하는 축구단으로 PAOK FC와 아리스 테살로니키 FC가 있다.
- 학교폭력 논란으로 국내 여자 배구 리그에서 제명 된 이재영, 이다영 자매가 2021년부터 뛰었던 PAOK 테살로니키가 이곳을 연고지로 하고 있다.
6. 창작물
[A]
테살로니키 단독
[B]
테살로니키, 칼라마리아, 네아폴리-시키에스, 파블로스 멜라스, 코르델리오-에보스모스, 암펠로키포이-메네메니, 필라이아 지역
[3]
코이네 그리스어에서는
θ가 무성 치 마찰음(/θ/)이 아닌 유기음(/tʰ/)였으며 중세를 거치며 /θ/로 변해갔다.
[4]
에피루스 일대의 최대도시이며, 나아가
아드리아 해 및
이오니아 해와 접하는 발칸 반도 서해안 전체로 꼽아도 손꼽히는 거점이었다
[5]
영어 위키백과의
Siege of Thessalonica (676–678)에 'By the 610s, the city of Thessalonica was surrounded by large Slavic settlements, being reduced to itself within its wall, according to historian John Van Antwerp Fine, to "virtually a Roman island in a Slavic sea"'라는 대목이 나와 있다. 출처는
'The Early Medieval Balkans: A Critical Survey from the Sixth to the Late Twelfth Century'이고 이 책은 Florin Curta의 'The Making of the Slavs: History and Archaeology of the Lower Danube Region, c. 500–700' 및 ' Southeastern Europe in the Middle Ages, 500–1250'와 더불어 고대 후기~중세 전기의 발칸반도에 대해 다룬 괜찮은 책으로 인정받고 있다.
[6]
영어 위키백과
Siege of Thessalonica (676–678) 중, 'The Siege of Thessalonica in 676–678 was an attempt by the local Slavic tribes to capture the Byzantine city of Thessalonica, taking advantage of the preoccupation of the Byzantine Empire with the repulsion of the First Arab Siege of Constantinople.'
[7]
영어 위키백과
Byzantine–Norman wars 중, 'Led by the formidable Robert Guiscard and his son Bohemund of Taranto (later, Bohemund I of Antioch), Norman forces took Dyrrhachium and Corfu, and laid siege to Larissa in Thessaly (see Battle of Dyrrhachium).'
[8]
'David Komnenos, the governor of the city had neglected to make sufficient preparations for the siege, and even forbade sallies by the defenders to disrupt the Norman siege works.'
[9]
'The Byzantine relief armies failed to coordinate their efforts, and only two forces, under Theodore Choumnos and John Maurozomes, actually came to the city's aid. In the event, the Normans undermined the city's eastern wall, opening a breach through which they entered the city.'
[10]
'The conquest degenerated quickly into a full-scale massacre of the city's inhabitants, some 7,000 corpses being found afterwards.'
[11]
Sack of Thessalonica (1185) 중, 'Coming on the heels of the usurper Andronikos Komnenos's massacre of the Latins in Constantinople in 1182, the massacre of the Thessalonians by the Normans deepened the rift between the Latins and the East.'및
Byzantine Greeks 중 'The event and the horrific reports of survivors inflamed religious tensions in the West, leading to the retaliatory sacking of Thessalonica, the empire's second largest city, by William II of Sicily.'
[12]
'It also directly led to the deposition and execution of the unpopular Andronikos I Komnenos by the Latins and the rise to the throne of Isaac II Angelos.'
[13]
Zealots_of_Thessalonica 중, 'Wealthy and at almost populous as the capital, its people had already resented control from the far-off capital,'
[14]
Zealots_of_Thessalonica 중, 'In 1347 Kantakouzenos and the emperor John V reconciled, but the Zealots ignored the orders from Constantinople,'
[15]
Manastır. 현
북마케도니아의 도시 비톨라(Битола). 테살로니키와 더불어 마케도니아 지방을 대표하는 양대 도시였다. 여기는 세르비아군이 점령했다.
[16]
불가리아군은 11월 9일, 테살로니키가 그리스군에게 항복한 그 다음 날에 도착했다(...). 그리고 고작 하루 차이로 테살로니키가 그리스에게 넘어간 것에 대해 허탈해 한 불가리아군 인사들에게 테살로니키를 방어하던 오스만군 사령관이 한 발언이 일품인데 "미안하오만 내겐 테살로니키가 하나 밖에 없었다오."
[17]
양외지는 그 나라의 정부가 다른 나라 부동산의 소유주로서 소유한 것이라서 영유권을 넘겨 받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양외지를 소유한 나라의 정부가 양외지의 영유권을 가진 나라에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 물론 양외지는 역사적인 이유로 다른 나라가 소유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그 나라 정부로부터 면세 등의 특혜를 받는 경우가 많다.
[18]
베니젤로스는
크레타 섬의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으로 유년기 벌어진 1866년 반오스만 봉기의 실패 이후 그리스 본토로 망명을 갔다.
[19]
이상의 내용은 그리스 출신 튀르키예학자이자 그리스-튀르키예 연합주의 사상가인 드미트리스 키치키스(Δημήτρης Κιτσίκης)의 칼럼에서 발췌해 온 것이다. 실제로 고대부터 보스포루스 해협은 동로마 제국 말기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사방을 오스만 세력에 둘러싼 월경지가 된 시절 같은 일시적인 정치적 혼란을 제외하면 한번도 정치적인 경계지였던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