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아대륙에 성립된 맘루크 왕조에 대한 내용은 노예 왕조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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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루크 술탄국 سلطنة المماليك Salṭanat al-Mamālīk |
|||||
국기 | 국장[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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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3세기경의 최대 강역 | |||||
1250 ~ 1517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아이유브 왕조 | 오스만 제국 | ||||
위치 | 이집트, 서아시아, 아라비아 반도, 북아프리카 | ||||
수도 | 카이로 | ||||
정치체제 | 전제군주제 | ||||
국가원수 | 술탄 | ||||
주요 군주 |
샤자르 앗 두르 이즈 앗 딘 아이바크 바이바르스 투만 베이 2세 |
||||
면적 | 1,564,220km² | ||||
인구 | 6,800,000명~7,300,000명 | ||||
민족 |
이집트인 아랍인 튀르크인 유대인 체르케스인 |
||||
언어 |
아랍어 튀르크어 체르케스어 |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
통화 | 디나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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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이유브 왕조에 이어 시리아와 이집트를 통치한 제국.십자군과 몽골 등 외세의 침공에 효과적으로 맞섰고, 형식적이긴 하지만 아바스 칼리파까지 다시 옹립하여 기존의 이슬람 문화를 보전했다. 비록 맘루크 왕조의 집권 엘리트는 체르케스인, 튀르크계 노예 군인 이었지만 튀르크계 유목 전사들이 득세한 당시 페르시아-튀르크 문화가 발달했던 중동의 여타 제국과는 달리 아랍어와 아랍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킨 역사적 의의가 있다.
9세기 이후 알레포, 다마스쿠스 등 지방 왕조들과 십자군, 아사신 등 외세로 점철되었던 시리아를 완전히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경제적으로도 중계 무역을 통해 번영했고, 이에 경도된 서유럽 국가들이 원양 항해에 나서게 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비록 술탄의 평균 재위 기간이 6년에 그칠 정도로 권력 투쟁이 심했지만 일본의 바쿠후(막부)처럼 지극히 내부 다툼이었기에 민중의 삶을 크게 악화시키지는 않았다. 십자군과 몽골의 침공이 모두 잦아든 14세기 초반부터 도시 문화와 제조업, 상업이 융성해졌고, 마드라사와 모스크 등 다양한 건축물이 지어졌다. 특히 술탄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장기 집권하에 번영하던 맘루크 왕조는 이후의 권력 투쟁과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 감소로 쇠락하게 되었다.
15세기 후반 술탄 카이트베이[2]의 안정적인 통치하에 힘을 회복하여, 킬리키아를 두고 벌어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중흥기를 맞았으나 16세기에 들어 대항해시대를 맞은 포르투갈의 인도양 무역 잠식으로 심각한 경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3] 그러다가 결국 1516년 신무기와 근대적 군대를 앞세운 오스만 술탄 셀림 1세에게 정복되었다. 다만 왕조는 멸망했어도 맘루크 군부 자체는 건재했으며, 오스만 지배에 협력하면서도 종종 소요를 일으키다가 19세기에 알바니아계 총독 메흐메드 알리 시대에 와서야 소멸했다. 여담으로 원조 맘루크 왕조는 1250년보다 약 반세기 앞서 세워진 북인도의 노예 왕조였다. 둘 다 원주민들과 매우 다른 태생의 맘루크 출신 군부가 통치했고, 이슬람 왕조였으며 창건자 역시 '아이바크'로 동명이인이었다. 심지어 티무르의 침공을 받아 쇠퇴하고, 약 270여 년간 존속하다가 포병을 앞세운 제국에게 멸망한 것도 비슷하다.
2. 성립
맘루크는 후기 아이유브 왕조의 군사력의 핵심이었다. 1240년 당시 술탄이었던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흔들리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맘루크의 권한을 강화시켜 사병으로 썼다. 이들은 바흐리 맘루크 혹은 바흐리야로 불렸는데,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그들의 거점으로 카이로 인근 나일 강의 루아드 섬에 '칼라트 바흐르 앗 닐' (나일 강의 성채)을 지어 제공한 것에서 유래된 것이었다.한편 1250년 카페 왕조 프랑스 왕 성 루이 9세의 제7차 십자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하면서( 알 만수라 전투) 맘루크의 정치적 권한이 매우 강력해졌다. 당시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병사하고, 군권을 이양받은 그의 심복 파크르 앗 딘이 알 만수라 전투에서 십자군과 싸우다 전사하면서 맘루크의 득세를 제어할 사람이 없어진 것도 큰 요인이었다. 그리고 맘루크들은 앗 살리흐 아이유브의 후계자인 알 무아잠 투란샤가 자지라(메소포타미아 북부) 출신의 측근들을 요직에 임명하며 자신들을 견제하자 1250년 5월 그를 무참히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쿠데타에 성공한 맘루크들은 우선 아이유브 왕가의 알 아슈라프 무사를 술탄으로 옹립했으나 실제 권력은 맘루크 대장인 아이바크가 독차지했고, 선왕 앗 살리흐 아이유브의 애첩이었던 샤자르 앗 두르와 결혼하여 이를 정당화했다. 몇 년 후에 아이바크는 허수아비 술탄 알 아슈라프 무사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술탄이 되었다. 이로써 맘루크 왕조가 성립되었다. 한편 앗 살리흐 아이유브의 사후 이집트가 혼란을 겪는 틈에 시리아를 통일한 알레포의 아미르 앗 나시르 유수프는 이집트의 맘루크들과 싸웠으나 패배했고, 1260년 몽골군에게 시리아가 정복되면서 자연스레 맘루크의 경쟁자는 사라져버렸다. 그 사이에 아이바크는 부인 샤자르 앗 두르와 대립하다가 목욕중에 그녀에게 암살되었고, 15살이었던 그의 아들 알 만수르 알리[4]가 옹립되었다. 이때 아이바크의 부관이자, 호라즘 왕가 출신 맘루크였던 쿠투즈가 섭정을 했으나 이내 술탄 알리를 쫓아내고 자신이 술탄이 되었다.
1260년 여름 훌라구 칸이 몽케 칸 사후 몽골 내전의 추이를 지켜보기 위해 주력 병력을 이란으로 옮기고, 그의 부관 키트부가 노얀 휘하 10,000여 명의 비주력 병력만 시리아에 남겨두었는데, 미리 힘을 비축해둔 맘루크군은 그때를 틈 타 북상하여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을 궤멸시키고 시리아를 정복했다. 그리고 맘루크군의 선봉장이었지만, 술탄 쿠투즈와 불편한 주종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바흐리 맘루크의 바이바르스는 이집트로 돌아오는 길에 그를 암살하고 자신이 술탄이 되었다.
3. 십자군 축출
아크레 공방전
셀주크 제국, 파티마 왕조, 장기 왕조, 아이유브 왕조 시대를 거치며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었던 십자군 전쟁을 종결지은 것이 바로 맘루크 왕조였다.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퇴시킨 뒤 1260년대부터 십자군을 상대로 대대적인 공세를 가했다.[5] 1268년에 안티오크 공국, 1289년에 트리폴리 백국, 1291년에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켜 서방 그리스도교 세력을 194년만에 레반트 해안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4. 일 칸국과의 전쟁
맘루크 왕조는 사실상 1260년 9월 2일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계 일 칸국의 군대를 격파한 승리를 기점으로 등장했기 때문에 일 칸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 이 전쟁은 아인잘루트 전투 이후로도 약 43년 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일 칸국도 시간이 흐르면서 주력 병력이 점점 현지 차출 병력으로 대체됐고 과거 몽골군의 색채가 옅어졌다. 결국 맘루크 왕조와 약화된 일 칸국의 전쟁은 1299년의 3차 홈스 전투를 제외하고는 1 모두 맘루크 왕조의 승리로 끝났고, 아인잘루트 전투 당시 몽케 칸이 사망했다는 이유로 주력군을 후방으로 빼버린 치명적 실수 때문에 최적의 타이밍을 놓친 일 칸국은 최대 10만 명의 대군을 동원했음에도 창시자인 훌라구의 서방 정복 야망을 접어야 했다, 2. 반면 승리한 맘루크 왕조는 몽골군의 침략으로부터 이집트를 비롯한 아프리카 지역을 지켜내는데 성공하면서 이슬람 세계의 수호자라는 명성까지 얻으며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일 칸국과의 전쟁에서 맘루크가 사로잡은 몽골인 포로가 맘루크 왕조의 술탄이 된 적도 있었다. 11대 술탄 알 아딜 자인 앗 딘 키트부가인데, 신기하게도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훌라구 칸의 부관으로서 대신 전투에 임했던 키트부가와 동명이인이었다. 키트부가는 1294년에서 1296년까지 맘루크의 술탄으로 군림하며 자신의 조국이었던 일 칸국과도 싸웠다. 키트부가가 술탄이 된 과정을 보자면, 8대 술탄 칼라운에게 노예로 팔려갔으나 능력이 출중하여 에미르로 임명되었고, 칼라운의 아들인 9대 술탄 칼릴이 암살되자 어린 나이에 10대 술탄이 된 무함마드의 섭정으로서 권력을 잡았다. 그 후 재상이었던 알 슈자이와의 권력 다툼에서 승리하여 맘루크를 완전히 장악했고, 1294년에 무함마드를 카라크로 추방하여 스스로 11대 술탄이 되었다. 그러나 키트부가의 통치 기간에 전염병이 창궐하고 식량도 부족하여 백성들의 불만이 커졌으며, 설상가상으로 몽골인과 유사한 오이라트 난민들을 받아들여 기존 에미르들의 반발을 샀다. 그렇다고 키트부가는 적극적인 이슬람화 정책을 펼치지도 않았기에 맘루크 왕조를 몽골화한다는 의심을 받았고, 그렇게 쌓이고 쌓인 불만이 터져 결국 반란이 일어나 키트부가는 라긴에게 술탄직을 넘겨주었고 본인은 다마스쿠스로 쫓겨났다. 이후 시리아의 하마에서 맘루크 술탄의 대리인으로 지내다 1299년에 사망했다.
5. 경제적 번영
맘루크 왕조 시대 카이로
맘루크 왕조는 유럽과 인도양을 잇는 중계 무역에서 거두는 수수료를 챙기며, 눈부신 번영을 누렸다. 14세기 무렵, 맘루크 왕조 치하의 이집트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여러 기록들을 보면, 당시 맘루크 왕조가 얼마나 풍요로운 환경을 누렸는지가 드러난다. 1341년, 맘루크 왕조의 제14대 술탄 앗 나시르 무함마드 (재위 1310~1341)는 11명의 딸들을 시집보내면서 한 명 당 800,000 디나르의 금화를 지참금으로 주었다.
또한 1356년 맘루크 왕조의 제23대 술탄인 바드르 압딘 하산(Badr ad-Din Hasan 재위 1354~1361)은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졌던 제21대 술탄의 이름을 딴 ‘하산 모스크’를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3년 후에 완공된 이 하산 모스크는 유럽에서 수입해 온 제각기 다른 색깔을 가진 27개의 대리석들로 지어졌으며, 45m의 미나렛(첨탑)이 세워졌고, 건물 안에 약 7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기숙사가 들어갔으며, 머무르는 사람들에게 모두 공짜로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했다. 아울러 모스크 안의 기도실 벽에는 전부 황금과 은을 발라 실로 눈부시게 빛이 났다.
군주가 아닌 상인들도 세계 각지에서 몰려오는 무역에 손을 대며 엄청난 재산을 쌓았다. 한 예로 ‘나시르 알딘 발리시’란 상인은 인도와 예멘 및 에티오피아에서 수입한 향신료를 베네치아, 피렌체, 제노바 같은 이탈리아 도시 국가에 팔아서 큰 돈을 벌었다. 또한 그는 향신료를 파는 무역상인들이 만든 조합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나시르는 1373년에 죽었는데, 아들에게 무려 1,000,000 디나르의 금화를 유산으로 남겼다. 이처럼 나시르 같은 향신료 대상인들이 쌓은 재산이 얼마나 많던지, 때로는 술탄들조차 그들에게 돈을 빌릴 정도였다.
아울러 맘루크 왕조 치하의 이집트를 방문한 외국인들은 모두 이집트를 가리켜 놀라운 번영을 누린다며 찬양했다. 14세기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를 방문한 페르시아인 칼릴 알자히리는
“페르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 10개를 합쳐도 카이로보다 더 작다.”
라고 탄식했으며, 1384년 카이로를 방문한
피렌체인 레오나르도 프레스코발디는 “피렌체 인구 전체를 합쳐도 카이로 시내 한 곳의 사람들보다 더 적다.”
라고 감탄했다. 20년 동안 카이로에서
비단과 “카이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어떠한 도시들보다 부와 번영에서 뛰어나다.”
라고 찬탄했다. 1348년 카이로의 인구는 500,000명에 달했는데, 이는 인구 200,000명의 파리나 50,000명의 런던보다 2.5배에서 10배나 많은 숫자였다.[7]6. 왕가 교체
1503~1504년에 건설된 카니 베이 알 라흐마 모스크 |
1250년의 왕조 수립때부터 맘루크 왕조는 킵차크(쿠만, 폴로베츠) 중심의 튀르크계인 바흐리 맘루크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그들을 경계하기 위해 술탄 칼라운이 육성하기 시작한 체르케스계 부르지 맘루크 세력은 1377년 시리아에서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고, 1382년 이들의 대장격인 알 말리크 바르쿠크가 술탄을 칭하면서 바흐리 왕조가 문을 닫았다. 그래서 바르쿠크 이후의 왕조를 부르지(Burji) 왕조라고 칭한다. 다만 바흐리 왕조와 부르지 왕조를 싸잡아 구분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체르케스 맘루크 중에서도 바흐리 왕조의 술탄이 된 경우가 있었고, 부르지 왕조에서도 간혹 비 체르케스계 술탄이 즉위하기도 했다. [8]
부르지 왕조는 티무르 제국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고, 오스만 제국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을 때 이들의 관계는 최고조에 달했으나, 그 후 카라만 공국의 문제[9]로 인해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다.
한편 왕조 말기에는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을 돌아 인도 아대륙으로 가는 신항로를 열면서 홍해의 제해권 통제가 어려워졌다. 평소 사이가 좋았던 베네치아 공화국으로부터 간접적인 지원을 받아 포르투갈의 홍해 봉쇄를 막으려고 했으나, 참패하여 아덴을 지켜낸 것을 제외하면 맘루크의 앞바다인 인도양에서의 제해권을 빼앗겼고, 포르투갈은 인도양을 들쑤시고 다니면서 맘루크의 상선을 견제해 맘루크가 중개하는 향신료 무역이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10]
16세기에 와서는 페르시아에 새로 들어선 쉬아 계열 12이맘파 제국인 사파비 왕조와 손을 잡고, 수니파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파비 제국의 시조인 이스마일 1세가 1514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인 셀림 1세와 벌인 찰디란 전투에서 무참히 패배하면서 맘루크 왕조는 수세로 전환했고, 양면전선을 해결한 셀림 1세는 그 다음해인 1515년 맘루크의 보호국이자 맘루크와 오스만 사이의 완충국이었던 둘카디르 공국을 공격했다. 1516년에는 셀림 1세가 본격적으로 오스만 대군을 이끌고 맘루크령 시리아를 침공하면서 오스만-맘루크 전쟁이 발발했다. 그러면서도 포르투갈에 대해서는 맘루크와 오스만이 오월동주마냥 협력했고, 1517년 12월 오스만군은 메카의 관문이자 홍해 무역의 중심지인 제다에 주둔한 맘루크군을 도와 제다를 침공한 포르투갈군을 격퇴하기도 했다.[11]
7. 멸망과 부흥운동
경제적•군사적으로 쇠락해가는 맘루크 왕조는 '정복자' 메흐메트 2세 이래 한창 최전성기를 누리던 오스만 제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1516년 8월 24일, 시리아 북부의 다비크에서 일어난 마르즈 다비크 전투에서 맘루크가 자랑하던 기병은 오스만군의 최정예였던 예니체리와 화약무기에 의해 2년 전 찰디란 전투에서 이란의 사파비군이 당했던 것처럼 무참하게 패배했다. 이 한 번의 전투로 맘루크는 시리아를 통째로 오스만에게 빼앗겼으며 술탄인 아슈라프 칸수흐 알 구리(الأشرف قانصوه الغوري)까지 전사하는 치욕을 당했다.[12] 상승세를 몰아 오스만군은 이집트까지 내려왔고, 후임 술탄인 투만 바이 2세(طومان باي)는 최대한 군대를 긁어모으고, 화약무기까지 어느 정도 구해 어떻게든 오스만군에 맞서싸우려 했으나 너무 늦었고[13] 1517년 1월 22일, 카이로 코앞인 리다니야에서 벌어진 리다니야 전투에서 또다시 완패를 당했다. 며칠 후 셀림 1세는 맘루크 왕조의 수도 카이로에 입성했고 포로로 잡힌 투만 바이 2세는 목이 잘린 후, 카이로의 성문에 효수되었다. 그리고 맘루크 왕조 밑에서 더부살이를 하던 아바스 왕조의 마지막 칼리파 알 무타와킬 2세(المتوكل على الله الثالث)가 정식으로 칼리파 칭호를 셀림 1세에게 바치면서 오스만 제국은 중동 대부분을 정복하고, 칼리파 칭호까지 획득하여 명실상부한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으로 등극하게 되었다.[14]오스만은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키고 이집트를 속주로 편입했으나 지배층인 맘루크들로 하여금 이집트를 계속 지배하도록 했다. 다만 통치 초기 시리아와 이집트는 다소 불안정했는데, 1520년에는 셀림 1세가 서거하고 쉴레이만 1세가 즉위한 것을 기회로 여긴 시리아 총독 잔비르디 알 가잘리가 술탄을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가 곧 진압되었으며 1524년에는 이브라힘 파샤에게 밀려 재상이 되지 못하고 이집트 총독으로 좌천된 아흐메드 파샤가 역시 술탄을 칭했다가 곧 진압되었다. 이에 이브라힘 파샤가 재상 겸 이집트 총독으로 친히 이집트에 부임하여 통치 체계를 정비한 후 귀환했다. 이로써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의 평범한 일개 속주가 되었으나...[15] 그로부터 200년이 넘게 지난 1768년, 오스만 제국의 쇠퇴를 틈타 맘루크 장교 알리 베이 알-카비르(علي باي الكبير)가 독립을 선포하고 술탄을 칭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관리들을 추방하고 오스만 제국 파디샤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들을 없애려고 했다.
1770년 알-카비르의 이집트 군대는 아라비아 반도 서부의 히자즈와 북부의 시리아 지방을 탈환해 이전 맘루크 왕조의 광대한 강역을 대부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이 당시 유럽 및 러시아와의 전쟁 때문에 대규모 병력을 이집트에 파견할 여유가 없었던 오스만 제국은 이간책을 사용했다. 알-카비르는 티그리스 지방의 민족주의자인 자히르 알 우마르와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이들 사이에 금이 가 결국 알-카비르는 1772년에 살해되었다[16].
오스만 제국의 계속된 공세와,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1공화국군이 이집트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맘루크들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1800년쯤 되면 카이로 근방의 한 줌밖에 안 되는 영토를 제외한 대부분의 강역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은 멈추지 않았고, 계속 싸웠다. 혼란한 국내 정세와 오스만 제국의 가혹한 통치로 인해 1805년 대규모 민중봉기가 일어났지만, 맘루크는 내부 분열로 정권을 되찾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1805년의 시위로 등장한 신임 이집트 총독인 메흐메드 알리에 의해 이집트는 반 독립국가가 되었으나, 맘루크들은 권력을 잡지 못하고 1811년 메흐메드 알리에 의해 거의 모두 학살당했다. 소수의 맘루크들이 세나 술탄국[17]으로 흘러들어가 정권을 탈취하고 복수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다가 1820년에 이집트를 공격했으나 역공당해 이제는 맘루크의 씨가 마르게 되었다. 이로써 맘루크는 아예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8. 여담
맘루크들은 뛰어난 기마전사들이었으나 총과 대포 같은 화약 무기에 대해서는 거부 반응이 심했다. 이는 중세 유럽의 기사들이 석궁에 대해서 보였던 반응과도 같은데, 오랫동안 힘들게 승마와 각종 무술들을 배우는 기마병들인 자신들과는 정반대로 아무런 무술 훈련도 받지 않은 여자나 아이들도 그저 방아쇠만 당기면 갑옷으로 무장한 전사를 간단히 죽일 수 있는 무기인 총이 자신들을 위협한다고 여겨서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18]내 말을 듣고 귀를 기울여라. 그리하여 그대와 다른 이들은 우리 가운데 운명과 붉은 죽음의 기사들이 있음을 알게 되리라. 우리 가운데 단 한 사람만으로도 그대의 모든 군대를 패배시킬 수 있다. 만약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한번 시험해보라. 그러나 다만 그대의 군사들에게 제발 총만은 쏘지 말라고 명령해다오. 그대는 여기에 모든 인종으로 이루어진 200,000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대의 자리에 서서, 그대의 병사들에게 전투대형을 갖추게 하라. 우리 편에서는 단 세 사람만이 그대와 맞서기 위해서 나서리라… 그대는 두 눈으로 이 세 기사가 이루는 위업을 목격할 것이다… 그대는 황급히 온 세상에서 군사를 끌어모았다. 기독교인들과 그리스인들과 그밖에 여러 민족들을. 그리고 그들이 전쟁터에서 무슬림의 기사들을 대적할 수 없게 되자, 유럽의 기독교도들이 고안한 정교한 무기를 가지고 왔다. 이 무기는 설혹 여인이라고 해도 그것을 쏘기만 하면 그토록 많은 숫자의 남자들을 죽일 수 있는 총이었다… 그대에게 저주가 있으라! 어떻게 그대가 감히 무슬림들에게 총을 쏠 수가 있단 말인가![19]
《세계전쟁사》, 존 키건 지음, 유병진 번역, 까치, 68쪽
《세계전쟁사》, 존 키건 지음, 유병진 번역, 까치, 68쪽
게다가 1497년에 어린 술탄인 사다트 무하마드가 흑인 노예들로 이루어진 화승총 부대를 만들고 이들 중 자신이 총애하던 흑인 노예인 파라잘라흐한테 맘루크 처녀를 시집보내자, 다른 맘루크들이 분노해 반란을 일으켜 파라잘라흐를 비롯한 50여 명의 흑인 노예들을 죽여버릴 정도로 총이라는 무기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여겼다.[20] 물론 전쟁의 새로운 패러다임인 화약무기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옛 전투 방식에 집착한 대가는 상술했듯 그 화약 무기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활용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일어난 마르지다비크와 리다니야에서의 참패, 그리고 맘루크 왕조의 멸망이었다.
깃발을 위로 세우면 어몽어스 캐릭터처럼 생겨서 서양에서 밈이 되기도 했다.
9. 역대 군주
맘루크 왕조 이집트 술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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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 | 살리흐 왕조 | |||
민족: | 아르메니아인 · 튀르크 | 투르크멘 | |||
대수: | - | 초대 | 제2대 | ||
칭호: | 말리카 알 무슬리민 알 무스타사미아 | 알 말리크 알 무이즈 | 알 말리크 알 만수르 | ||
술탄: | 샤자르 앗 두르 | 이즈 앗 딘 아이바크 | 누르 앗 딘 알리 | ||
살리흐 왕조 | 바흐리 왕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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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21] - 라카브 - 이름 | 재위 | 비고 |
이스마트 앗 딘 움 칼릴 ( 샤자르 앗 두르) | 1250 | 아이유브 왕조의 섭정 (1249.11 ~ 1250.2) 출신, 이집트 초대 술타나 |
알 무이즈 이즈 앗 딘 아이바크 | 1250, 1254~1257 | 첫 맘루크 술탄. 샤자르 앗 두르의 남편, 1250.7 ~ 1254.1 섭정[22] |
알 만수르 누르 앗 딘 알리 | 1257~1259 | 아이바크의 아들 |
알 무자파르 사이프 앗 딘 쿠투즈 | 1259~1260 | 호라즘계, 아인잘루트 전투 승리 |
앗 자히르 루큰 앗 딘 바이바르스 | 1260~1277 | 안티오크 정복, 엘비스탄 전투 승리 |
앗 사이드 나시르 앗 딘 바라카 | 1277~1279 | 바이바르스의 장남 |
알 아딜 바드르 앗 딘 살라미쉬 | 1279 | 바이바르스의 차남 |
알 만수르 사이프 앗 딘 칼라운 | 1279~1290 | 2차 홈스 전투 승리, 트리폴리 정복 |
알 아슈라프 살라흐 앗 딘 칼릴 | 1290~1293 | 칼라운의 장남, 아크레 정복 |
앗 나시르 나시르 앗 딘 무함마드 | 1293~1294 | 칼라운의 차남, 1차 재위 |
알 아딜 자인 앗 딘 키트부가 | 1294~1296 | 몽골 포로 출신 |
알 만수르 후삼 앗 딘 라진 | 1296~1299 | 체르케스계 |
앗 나시르 나시르 앗 딘 무함마드 | 1299~1309 | 2차 재위, 마르즈 앗 사파르 전투 |
알 무자파르 루큰 앗 딘 바이바르스 | 1309~1310 | 체르케스계 , 바이바르스 2세 혹은 바이바르스 앗 자샨키르 |
앗 나시르 나시르 앗 딘 무함마드 | 1310~1341 | 3차 재위 |
알 만수르 사이프 앗 딘 아부 바크르 | 1341 |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차남 |
알 아슈라프 알라 앗 딘 쿠주크 | 1341~1342 |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육남 |
앗 나시르 시하브 앗 딘 아흐마드 | 1342 |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장남 |
앗 살리흐 이마드 앗 딘 아불 피다 이스마일 | 1342~1345 |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삼남 |
알 카밀 사이프 앗 딘 샤바안 | 1345~1346 |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사남 |
알 무자파르 사이프 앗 딘 하지 | 1346~1347 |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오남 |
앗 나시르 바드르 앗 딘 하산 | 1347~1351 |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칠남, 1차 재위 |
앗 살리흐 살라흐 앗 딘 살리흐 | 1351~1354 |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팔남 |
앗 나시르 바드르 앗 딘 하산 | 1354~1361 | 2차 재위 |
알 만수르 살라흐 앗 딘 무함마드 | 1361~1363 | 하지의 아들 |
알 아슈라프 자인 앗 딘 샤바안 | 1363~1377 |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손자[23], 샤바안 2세 |
알 만수르 알라 앗 딘 알리 | 1377~1381 | 샤바안 2세의 장남 |
앗 살리흐 살라흐 앗 딘 하지 | 1381~1382 | 샤바안 2세의 차남, 1차 재위 |
앗 자히르 사이프 앗 딘 바르쿠크 | 1382~1389 | 체르케스계, 1차 재위 |
앗 살리흐 살라흐 앗 딘 하지 | 1389~1390 | 2차 재위 |
앗 자히르 사이프 앗 딘 바르쿠크 | 1390~1399 | 2차 재위 |
앗 나시르 나시르 앗 딘 파라즈 | 1399~1405 | 바르쿠크의 장남, 1차 재위 |
알 만수르 이즈 앗 딘 압둘 아지즈 | 1405 | 바르쿠크의 차남 |
앗 나시르 나시르 앗 딘 파라즈 | 1405~1412 | 2차 재위 |
알 아딜 알 무스타인 빌라( 알 무스타인(카이로 칼리파)) | 1412 | 아바스 왕조 칼리파 출신 |
알 무아야드 사이프 앗 딘 샤이크 알 마흐무디 | 1412~1421 | 체르케스계 |
알 무자파르 아흐마드 | 1421 | 샤이크의 아들 |
앗 자히르 사이프 앗 딘 타타르 | 1421 | 체르케스계 |
앗 살리흐 나시르 앗 딘 무함마드 | 1421~1422 | 타타르의 아들 |
알 아슈라프 사이프 앗 딘 바르스베이 | 1422~1438 | 체르케스계 |
알 아지즈 자말 앗 딘 유수프 | 1438 | 바르스베이의 아들 |
앗 자히르 사이프 앗 딘 자크마크 | 1438~1453 | 체르케스계 |
알 만수르 파크르 앗 딘 우스만 | 1453 | 자크마크의 아들 |
알 아슈라프 사이프 앗 딘 이날 | 1453~1461 | 체르케스계 |
알 무아야드 시하브 앗 딘 아흐마드 | 1461 | 이날의 아들 |
앗 자히르 사이프 앗 딘 쿠쉬카담 | 1461~1467 | 그리스계 |
앗 자히르 사이프 앗 딘 빌바이 | 1467 | 체르케스계 |
앗 자히르 티무르부가 | 1467~1468 | 그리스계 |
알 아슈라프 사이프 앗 딘 카이트베이 | 1468~1496 | 체르케스계 |
앗 나시르 나시르 앗 딘 무함마드 | 1496~1498 | 카이트베이의 아들 |
앗 자히르 아부 사이드 깐수 | 1498~1500 | 체르케스계, 깐수 1세 |
알 아슈라프 아부 앗 나스르 자나발라트 | 1500~1501 | 체르케스계 |
알 아딜 사이프 앗 딘 투만베이 | 1501 | 체르케스계, 투만베이 1세 |
알 아슈라프 깐수 알 구리 | 1501~1516 | 체르케스계, 깐수 2세 |
알 아슈라프 아부 앗 나스르 투만베이 | 1516~1517 | 체르케스계, 투만베이 2세 |
10. 역사보기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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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맘루크 술탄들이 실제로 사용한 문장은 아니고 중세 유럽인들이 부여한 '상상 문장(Attributed Arms)'이다. 문장과 귀족 가문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었던 중세 유럽인들이, 문장을 사용하지 않았던 12세기 이전의 고대인들도 당연히 썼을 거라 어림짐작하고 비슷한 느낌의 문장을 부여했던 것. 사실 맘루크 왕조와 동시대 국가들 중에는 문장만 있고 국기가 없는 나라도 많다. 이것은 1413년 제작된 '메시아 데 빌라데스테스' 지도에 맘루크 왕조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2]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자리에 본인의 이름을 붙인 성채를 세운 것으로 더 유명하다.
[3]
얼마나 심각했느냐 하면 맘루크 술탄들이 금화가 없어서 구리로 가짜 금화를 만들어 유통하다가 오히려 화폐 가치가 떨어져 물가가 더 올라갔고, 심지어 병사들한테 줄 월급도 없어서 오스만 군대가 쳐들어오는 와중에도 월급을 받지 못한 고참병들이 참전하지 않겠다고
파업을 벌일 정도였다(...)
[4]
샤자르 앗 두르 항목에도 있지만 알 만수르 알리는 샤자르의 친아들이 아니라 배다른 아들이었다.
[5]
바로 십자군이 몽골과 동맹을 맺은 것에 대한 복수였다.
[6]
사실 이슬람권에서도
술을 몰래 마시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이슬람 제국 초기의 장수들 중 많은 수는
술에 찌들어 살았고, 오늘날 엄격한 이슬람
율법이 지배하는 국가인 쉬아파
이란에서도 인기있는 직업이 바로 술 배달이다(...)
[7]
출처: 《지도에서 사라진 나라들》,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143~146쪽
[8]
특히 바흐리 왕조 시기에는 킵차크 튀르크와 체르케스 외에도 키토부카와 같은 몽골인처럼 다양한 출신의 맘루크 아미르들이 술탄위에 올랐다.
[9]
아나톨리아 반도 동남부에 위치했던 튀르크계 공국. 본래 아나톨리아 반도의 여러 튀르크계 국가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을 자랑했으나, 오스만이 뜨면서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후 오스만이 유럽 대륙으로 세력을 확장해나가는 동안에도 발목을 잡으려 했으나 오스만군이 마음먹고 쳐들어올 때마다 수도까지 밀리기가 일쑤였고, 15세기가 되면 맘루크 왕조에게 붙어서 오스만을 견제하는 처지가 되었다.
[10]
물론 맘루크 왕조가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았고, 해군을 보내 포르투갈 함대를 공격했으나, 디우 해전에서 패배하여 인도양 해상 무역의 제해권을 잃고 말았다. 애초에 맘루크 왕조는 권력의 기반이 맘루크로 대표되는 육군에 있었지, 해군은 거의 키우지 않아 무척이나 부실했던 반면, 16세기 포르투갈은 그야말로 세계 최강의 해군을 거느린 나라였으니 이길 수가 없었다.
[11]
여담으로 맘루크 본국은 이미 오스만의 침입으로 멸망해버린 상태였고, 제다에 주둔해있었던 맘루크군은 그저 잔당일 뿐이었다. 그리고 포르투갈군을 격퇴한 직후, 오스만은 제다를 자국 영토로 합병했다.
[12]
특히 인구에서도 오스만에게 열세였다. 이때 오스만의 인구는 1,100만명이었는데 맘루크 왕조의 인구는 그 절반도 안 되는 486만명에 불과했다.
[13]
이때 맘루크 왕조는 심각한 재정난으로 인해 병사들한테 월급조차 제대로 못주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월급을 받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상당수의 고참 병사들이 오스만 군대가 쳐들어오는 상황에서도 참전하기를 거부하여 투만 바이 2세는 당장 참전할 병사들을 모집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14]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칼리파를 자칭한 것은 세 번째 군주이자 처음으로 술탄을 칭한
무라드 1세 때부터였다. 하지만 이건 대부분의 무슬림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일종의 참칭이었다.
[15]
다만 오스만의 지배 기간인 17세기 와중에도 이집트에서는 툭하면 맘루크들의
반란이 연례행사처럼 계속 일어나 치안이 불안한 상황이었다.
[16]
여담으로 시리아에서는 1520년에 셀림 1세가 죽자마자 반란이 일어났다. 본래 맘루크 왕조의 신하로 오스만 제국에 항복하여 카이로 정복에 공을 세운 대가로 시리아 총독에 임명되었던 잔비르디 알 가잘리라는 인물이, 오스만 제국의 지방관과 병사들을 숙청하고 주민들이 오스만 제국식의 의복을 입는 것도 금지하는 등 제국에게 저항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반란에 협력해줄 것으로 기대했던 이집트가 아무런 동요도 일으키지 않았던 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셀림 1세의 뒤를 이은
쉴레이만 1세가
먼치킨이었기 때문에, 곧바로 진압되었다.
[17]
수단 북부에 존재하고 있었던 부족 연맹 국가이다.
[18]
군사적 측면 외에도 전쟁의 중심이 기병인 자신들에서 보병들에게 넘어가는, 기득권을 위협하는 상황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당시 총이 아직 불완전하기도 했고.
[19]
맘루크 역사가인 이븐 자불이 남긴 기록
[20]
출처: 《세계전쟁사》, 존 키건 지음, 유병진 번역, 까치, 69쪽
[21]
여성이기에 알 말리카인 샤자르 앗 두르를 제외하면 전부 앞에 알 말리크가 붙는다. 다만 여기선 생략. 볼드는 세습 왕조의 창건자이다.
[22]
아이유브 왕자 알 아슈라프 무자파르 앗 딘 무사를 허수아비 술탄으로 앉힘
[23]
즉위하지 못한 그의 아들 알 암자드 후세인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