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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0 15:19:44

샤밀 바사예프

<colbgcolor=#2b7338><colcolor=#fff>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망명정부 부통령
제2대 카우카즈 전선 아미르
샤밀 살마노비치 바사예프
Шамиль Салманович Басаев
파일:Shamil_Basayev.jpg
출생 1965년 1월 14일
소련 러시아 SFSR 체첸-인구시 ASSR 디시네베데노
사망 2006년 7월 10일 (향년 41세)
러시아 인구셰티야 공화국 에카제보
국적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틀:국기|]][[틀:국기|]]
학력 모스크바 국립토목관리연구소 (퇴학)
직업 군인, 정치인
최종 계급 대장
경력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총리
1998년 1월 1일 ~ 7월 3일
카우카즈 에미르
2005년 3월 10일 ~ 2006년 7월 10일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망명정부 부통령
2006년 6월 27일 ~ 7월 10일
참전 압하지야 전쟁
제1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체첸 내전
제1차 체첸 전쟁
다게스탄 전쟁
제2차 체첸 전쟁


[clearfix]

1. 개요

체첸의 군인, 정치인.

뛰어난 군사력을 지닌 체첸의 독립 영웅이라는 평가와 끔찍한 학살와 인질극을 벌인 이슬람 극단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 생애

1965년 1월 14일 소련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체첸-인구시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디시네베데노에서 태어났다.

1982년 중등학교 졸업 후 볼고그라드주 악사이스키 국영농장에서 일했으며 1983년 소련 공군에 징집되어 비행장의 지상부대에서 복무했다. 전역 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공부했으나 여러 차례 입시에 실패한 뒤 1989년 컴퓨터 판매원,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겨우 모스크바 국립토목관리연구소에 진학했다. 그러나 잦은 결석과 학업 부진으로 인해 퇴학되었다.

2.1. 소련 붕괴

1991년 8월 8월 쿠데타로 소련의 붕괴 조짐이 보이고 고향 체첸에서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이 건국되자 소련군 장성 출신 체첸 초대 대통령 조하르 두다예프의 경호를 맡았다. 동년 11월 미네랄리예 보디 공항에서 다른 두 명의 테러리스트와 함께 앙카라 Tu-154 납치에 성공하여 대통령 조하르 두다예프가 상훈으로 특수부대 중대장직을 주었다.

제1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서 부대를 이끌고 아르메니아군과 교전했다. 1992년 5월 초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요충지인 슈샤에서 아르메니아군과 교전 중 부대가 전멸했으나 탈출에 성공하고 아제르바이잔을 떠났다.[1] 압하지야 전쟁에도 참전해 조지아군과 교전했다. 체첸으로 돌아온 후 체첸군의 지휘관으로 부임했다. 그의 부대는 체첸 반군에서도 정예부대였다고 한다.

2.2. 체첸 전쟁

1995년 6월 14일 160명을 이끌고 스타브로폴 지방 부됸놉스크 병원에서 환자와 직원 1,500~1,800명을 인질로 생포하였다. 러시아측은 병원에 진입하려고 하였으나 테러리스트들이 인질들을 인간 방패로 사용해 병원 진입을 불가능하게 했고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포스터를 걸어 러시아 측에 경고했다. 러시아는 바사예프 일당에게 체첸에서의 적대행위 중지( 휴전) 및 부됸놉스크 병원에서의 안전한 철수 보장을 조건으로 내세웠고 그는 이를 수락한 뒤 체첸으로 돌아와 여단장에 진급했다.

1997년 1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는데 아슬란 마스하도프에 패배했지만 대신 총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체첸에서 성장하던 와하브파의 성장을 제지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름을 부어서 향후 러시아와 전쟁이 재발하는 단초를 만들었다.

1999년 부대를 이끌고 러시아 영토 다게스탄 공화국을 침공해 제2차 체첸 전쟁이 발발했다. 2000년 포위된 그로즈니에서 철수하는 과정에서 지뢰를 밟아 오른쪽 발가락 세개를 잃고 포탄 파편을 맞아 한쪽 다리를 절단하였다.

2004년에 베슬란 학교 인질사건을 일으켰고, 2006년 7월 10일에 러시아령 인구셰티야 공화국에서 러시아군의 공작으로 추정되는 폭발 사고로 사망했다.


[1] 바사예프는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전쟁이 자기가 고대하던 이슬람-기독교간 지하드가 아니라 종족분쟁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회의적으로 변했다. 게다가 당시 개판 5분 전이었던 아제르바이잔군의 지리멸렬함에 학을 뗀 것으로 보인다. 바사예프는 후일 슈샤 전투를 두고 "100명의 병사가 1년간 버틸 수 있는 요새가, 허세에 불과한 아르메니아군 700명의 공세에 무너져버렸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