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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룩셈부르크 왕조 제2대 황제
카를 4세 Karl 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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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c20><colcolor=black> 제호 | 카를 4세 (Karl IV) | ||
출생 |
1316년
5월 14일 보헤미아 왕국 프라하 |
||
사망 |
1378년
11월 29일 (향년 62세) 보헤미아 왕국 프라하 |
||
재위기간 | 신성 로마 황제, 이탈리아 국왕 | ||
1355년 ~ 1378년 11월 29일 | |||
로마왕 | |||
1346년 7월 11일 ~ 1378년 11월 29일 | |||
보헤미아 국왕 | |||
1346년 8월 26일 ~ 1378년 11월 2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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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c20><colcolor=#000> 배우자 |
발루아의 블랑쉬 (1329년 결혼 / 1348년 사망) |
|
팔츠의 안나 (1349년 결혼 / 1353년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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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바이트니츠의 안나 (1353년 결혼 / 1362년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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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메른의 엘리자베트 (1363년 결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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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마르가레테, 카타리나, 엘리자베트, 바츨라프 4세, 아나[1], 지기스문트, 요한, 마르가레테 | ||
아버지 | 얀 루쳄부르스키 | ||
어머니 | 보헤미아의 엘리슈카 공주 | ||
형제 | 마르가레테, 유타, 오타카르, 아나, 요한 하인리히 | ||
종교 |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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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어: Karl IV. (카를 4세)체코어: Karel IV. (카렐 4세)
이탈리아어: Carlo IV (카를로 4세)
라틴어: Carolus IV (카롤루스 4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며 보헤미아 왕국의 왕. 체코어로는 카렐 4세로 부른다. 역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과는 달리 다소 이색적으로 보헤미아 왕국을 기반으로 했던 황제. 당시 유럽의 가장 강력한 가문 중 하나였던 룩셈부르크 가문의 전성기를 이끈 군주로 평가받는다.
카를 4세는 부계 혈통으로 체코인[2]이 아니기 때문에 혈통상 완전한 체코인으로 보기에는 애매할 수 있지만, 어쨌든 본인이 보헤미아 왕국을 기반으로 통치했고, 스스로 보헤미아에 애정을 갖고 체코 문화에 동화된 인물이었기에 체코인으로 보는데 큰 무리는 없는 편이다.
2. 생애
2.1. 전반기
백년전쟁중 발발한 크레시 전투에서 전사한 보헤미아 국왕 겸 룩셈부르크 백작 얀과 보헤미아 공주 엘리슈카의 맏아들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7세의 손자이다. 어린 시절 프랑스로 보내져 교육을 받았으며[3] 5가지 언어[4]를 읽고 쓸 줄 알았는데 그 실력이 매우 유창했다. 1331년에는 아버지와 함께 이탈리아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가해 경험을 쌓았다.1333년에 그는 아버지가 자주 자리를 비우고 시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에[5] 보헤미아 왕국을 실질적으로 대리통치하게 되었다. 1334년에는 모라비아의 변경백이 되었다. 모라비아의 변경백은 카를이 왕세자로서 반드시 가져야 하는 작위였다. 2년 뒤에는 원래 모라비아의 변경백이었던 요한 하인리히를 대신하여 티롤의 통치권을 맡게 되었다. 곧 이 나라에 대한 소유를 확실히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졌다.
2.2. 독일왕과 통치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의 황제 루트비히 4세에 대항해 카를의 아버지와 교황 클레멘스 6세 간에 맺어진 동맹으로 말미암아 1346년 카를은 렌스에서 열린 황제선거에서 선제후들에 의해 대립 독일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347년 사전에 클레멘스 6세에게 광대한 양보를 하는 굴욕적인 약속을 했다. 넓은 영토를 소유하기 위해 교황의 지위를 확정하고, 클레멘스 6세에 대항하는 루트비히 4세의 행동을 취소시키며 이탈리아 문제에 상관하지 않고 교회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다.카를 4세는 처음에 독일 왕국에서 매우 약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선출권을 위해 갚아야 할 빚이 있었기 때문에 일부에게 사제왕이라고 조소적으로 불렸다. 많은 주교들과 태반의 제국 도시들은 루트비히 4세에게 충성을 다했다. 설상가상으로 백년전쟁에서 이기지 못할 자를 지지해서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아버지와 아버지의 많은 기사들을 잃고 카를 자신도 상처를 입은 채로 패주했다.
독일에서 내전을 방지했지만 루트비히 4세가 곰을 사냥하던 중에 뇌일혈로 쓰러져 1347년 10월에 죽었다. 1349년 1월 비텔스바흐 가문의 추종자들은 귄터 폰 슈바르츠부르크를 안전하게 독일왕에 선출하려고 시도했다.[6] 그러나 귄터는 지지자가 거의 없었으며 몇 달 뒤에 슬퍼하는 사람없이 쓸쓸하게 죽었다. 그후에 카를은 제위를 요구하는 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위협을 받지 않았다.
카를 4세는 처음에 세력 기반을 안전하게 다지려고 했다. 보헤미아는 중세 흑사병에 훼손되지 않은 상태였다. 프라하가 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그는 프랑스 파리를 모델로 재건축하여 프라하 안에 신도시를 지었다.[7] 1348년에 자신의 이름을 따 중부 유럽의 첫 대학교인 카를 대학교를 세웠다. 이곳은 관료들과 법률가들의 훈련장이 되었으며 곧 중부 유럽의 지식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카를은 반대자들의 어려움을 잘 활용해서 1349년 7월 아헨에서 대관식을 치렀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확실한 지배자가 되었다. 그리고 라인강 지방과 슈바벤 사람들의 마을에 선물을 주고 약속했으며 합스부르크 가문과 친분을 다지기 위해 딸 카타리나와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4세를 결혼시켰다. 비텔스바흐 가문의 팔츠계인 라인 궁중백 루돌프 2세와는 1348년에 그의 딸 안나와 결혼해 결속을 다졌다.
1350년 카를 4세는 프라하에서 로마의 호민관 콜라 디 리엔조의 방문을 받았다. 콜라 디 리엔조는 카를 4세에게 시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와 플랑드르의 시민들이 있는 이탈리아 반도로 가도록 설득했다. 이 애원을 무시한 카를은 그를 감옥에 가두었고, 죄수로서 취급해 아비뇽의 클레멘스 6세에게 보냈다. 프라하 밖에서 카를은 보헤미아 왕국의 영토를 넓히려고 시도했다. 자신의 권한을 이용해 슐레지엔, 오버팔츠, 프랑켄의 영지를 손에 넣었다. 이 지역은 라인 지방에 있는 룩셈부르크 가문의 영지, 그리고 보헤미아와 연결되어 뉴 보헤미아를 구성했다. 그러나 보헤미아는 이런 카를 4세의 모험을 지원하지 않았다. 그는 1355년 보헤미아의 법률을 성문화하려고 했을 때 급격한 저항에 부딪쳤다. 이후 카를은 중앙 집권 정책을 축소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2.3. 황제와 금인칙서
1354년에 카를 4세는 군대 없이 알프스를 통과해 1355년 1월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 대성당에서 롬바르디아 철관을 받았으며, 4월에는 로마에서 황제로 대관식을 치렀다. 카를의 유일한 목적은 제위를 평화롭게 받는 것이었으며, 교황 클레멘스 6세와 이전에 한 약속에 따라서 로마인들의 소원에도 단지 몇 개의 도시만을 가졌다. 사실상 이탈리아 반도에 있는 모든 제국의 것을 상실하고, 카를 4세는 많은 재산을 잔뜩 싵고 알프스를 건넜다. 이에 대해 페트라르카는 경멸하는 언어를 썼다. 카를은 돌아와서 제국의 내치에 신경썼으며, 페스트로 인한 피해를 복구했다. 그리고 1356년에 독일왕을 선출하는 방법을 규정한 금인칙서를 발표했다.모라비아를 형제인 요한 하인리히에게 주었으며, 룩셈부르크는 맏아들 바츨라프에게 주었다. 카를 4세는 그의 영토를 안정시키는 데에 온 힘을 다했으며, 보헤미아 왕국을 강하게 만들었다. 이것을 위하여 1353년 라인 궁중백령의 오버팔츠를 구입했으며, 1367년에 니더라우지츠를 보헤미아에 합병했고 독일 각지의 많은 사유지들을 샀다. 1363년 오버바이에른의 공작이자 티롤과 크라인 백작 및 케른텐 공작 마인하르트 3세가 죽자, 루트비히 4세의 아들들이 오버바이에른을 요구했으며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4세는 티롤을 요구했다. 카를 4세는 만약에 합스부르크 가문이 멸문되면 룩셈부르크 가문이 이 영지들을 차지하는 조건으로 요구를 승낙했다.[8] 같은 시기에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이 가지고 있던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을 빼앗아 바츨라프에게 주어 황제 선출권을 확보했다. 1365년 아비뇽의 교황 우르바노 5세를 만나 로마로 가는 것을 호위했으며, 부르고뉴의 왕이 되었다.
1368년에 이탈리아 반도로 건너가 비테르보에서 교황 우르바노 6세를 접견하고 1369년에 다시 제국으로 귀환했다. 말년에 카를 4세는 바츨라프의 안전한 독일왕 선출에만 골몰해 국정을 거의 돌보지 않았으며 1378년에 슈바벤인들과 평화 교섭을 했다. 그리고 아 들들에게 영토를 배분한 이후 통풍에 걸려 1378년 11월 프라하에서 사망했으며, 프라하 성 비타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3. 평가
오늘날 카를 4세는 보헤미아 왕국의 군주로서 체코인에게 매우 높이 평가받는다. 체코의 아버지, 체코의 정신적 지주라 불리며 체코 100코루나 지폐에도 들어가 있고 2012년 체코인으로부터 가장 위대한 체코인으로 뽑히기도 했다.반면 보헤미아를 제외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 그의 치세는 긍정적이진 않았는데, 그가 1356년 발표한 금인칙서로 인해 선제후들이 사실상 독립한 군주와 같은 권한을 가지게 되면서 황권이 약화되어 명목상의 신성 로마 제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독일인보다 체코인들에게 더 좋은 평을 듣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셈이다.[9]
4. 대중문화에서
징기스칸 4에서는 정치, 전투, 지모 순으로 74/54/72에 적성 BCCE이다. 그나마 이게임에서 정, 지가 70대 이상이면 그정도면 준먼치킨이다. 다만 전투력이 매우 낮아서 문제. 게다가 도시는 쾰른 하나만 있고, 가끔식 잉글랜드 왕국이나 프랑스 왕국, 폴란드 왕국, 헝가리 왕국이 쳐들어 온다.[10]킹덤 컴 딜리버런스 에서 이미 승하한 후에 아들 바츨라프가 왕위를 이어받은 상태로 작중 배경설명으로 등장한다. 체코 개발사인 워호스 스튜디오에서 만든 게임으로 대한민국으로 본다면 세종대왕급의 극찬을 받는다. 이후 단명해서 치세가 길지 않았던 문종, 예종, 단종을 제외하면 바츨라프 4세, 세조(조선), 지기스문트[11], 연산군의 경우 확 꺾였던 것도 비슷하다...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도 등장하며 1337년 시나리오에서 만나볼 수 있다. 역사대로 보헤미아 왕 얀의 아들로 모라비아 공작으로 나오며 여기서는 그의 이름이 Wenzel(벤첼/바츨라프)로 되어 있는데 이는 그가 이후에 카를로 개명하기 때문이다.
[1]
잉글랜드 왕
리처드 2세와 결혼했다.
[2]
어머니 엘리슈카 공주가 이전 프르셰미슬 왕조의 마지막 혈손이었으나, 아버지 얀 루쳄부르스키는 저지 독일어를 사용하던
룩셈부르크인으로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애매하게 걸쳐있는 사람이었다. 할아버지 하인리히 7세는 거의
프랑스인에 가까웠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될 수 있었다.
[3]
본래 이름은 그의 외조부
바츨라프 2세의 이름을 따 바츨라프였으나, 고모부인
프랑스 국왕
샤를 4세를 동경하여 샤를/카렐로 개명하였다. 이는 그가 어린 시절 고모인 룩셈부르크의 마리를 따라 샤를 4세의 궁정에서 생활했던 것이 크다.
[4]
체코어,
라틴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5]
그래서 아버지 얀은 맹인왕 얀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6]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후보자는 대개 독일왕으로 선출되고, 그 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는 과정을 거쳤다. 따라서 재위중인 황제가 후계자의 앞길을 다져주기 위해서 독일왕이나 로마왕으로 선출되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
[7]
중세 서유럽에서는 고정된 수도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당시 일반적인 도시의 생산력으로는 군주와 가족들, 그를 보좌하는 귀족들과 그 가족들, 그 아래의 수많은 시종들과 군인들까지 먹여살리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군주가 영지의 여기저기를 순회하며 머무르는
팔츠 제도가 발달한 맥락도 이때문이다.
[8]
정작 룩셈부르크 가문이 먼저 멸족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이 끝까지 살아남았기 때문에 이 조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배만 불려준 꼴이 되었다.
[9]
비슷하면서도 정반대인 케이스에 해당하는 또다른
독일어권 군주로는
하노버
선제후와
영국 국왕을 겸했던
조지 1세(게오르크 1세)가 대표적인데, 이쪽은 반대로 독일인(특히 하노버 주민들)들에게 평가가 좋은 반면
영국인에게는 평가가 나쁘다.
[10]
프랑스의
샤를 5세가 카를 4세의 조카로 설정되어 있어서 카를 4세가 직접 사신으로 가면 샤를 5세가 “숙부님 오셨습니까?”라면서 반겨준다. 여기서 카를 4세가 적정 금액만(최소 금 2000개 이상) 내밀어도 샤를 5세가 동맹에 응해줄 확률은 높다.
[11]
다만 지기스문트는 이복형 바츨라프 4세와 달리 암군은 아니었고 폭군은 더더욱 아니었다. 10대에 헝가리 공주
마리어와 결혼하여
헝가리-
크로아티아 국왕으로 즉위하기 위해 건너가면서 보헤미아와 멀어졌는데, 이복형 바츨라프 4세 사후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되면서
후스 전쟁에 휘말린 탓에 보헤미아 왕국의 국력은 쇠약해지고 왕권은 약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