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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06:05:17

노르만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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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무장


Norman Knight

1. 개요

노르드인 바이킹 집단이 북프랑스에 정주하고 라틴화하면서 탄생한, 노르망디 공국 출신의 노르만족 기사들을 일컫는 말이다.

2. 역사

예로부터 스칸디나비아 반도 유틀란드 반도에 거주하던 노르드인들은 9세기~10세기 인구 증가 추세와 인구부양력 한계가 맞물리면서 외부로의 대침략과 이주를 개시하였다. 그 중 롤로의 집단은 센 강 하구 루앙에 거점을 마련하고 프랑스에 대한 약탈을 자행하였는데, 서프랑크 국왕 샤를 3세는 이들과 직접 싸우기보다는 회유하기로 하여 조약을 맺고 그를 루앙 백작으로 임명, 그 일대를 봉토로 주었다. 그 결과 롤로 집단은 프랑스 내에게 무조건적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기보다는 자기 신민을 보호하면서 현지 사회로 융화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으며,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프랑스의 언어와 문화를 받아들였다.

이들은 기사도와 가톨릭에 심취하면서도, 그것을 특유의 공격성과 정복욕, 약탈 성향에 접목하였다. 최초에는 프랑크 왕국의 혼란상을 틈타 주변부를 합병하여 오늘날의 노르망디 영역을 완성하는 쪽으로 표출되었고, 그 작업이 마무리되자 바다 건너 잉글랜드 왕국을 향해서 공격성을 폭발시켰다. 당시 앵글로색슨족이 지배하던 잉글랜드는 덴마크 왕, 노르웨이 왕의 공격을 받고 있었는데, 앵글로색슨계 해럴드 고드윈슨이 왕위에 즉위하자, 윌리엄은 자신에게도 왕위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교황청에 로비를 하여 지원을 약속받고 사람과 물자를 모았다. 늘상 봉토보다 그 수가 많았던 기사들로서는 곧 봉토를 얻을 기회로 여겨졌다.[1][2]

잉글랜드 왕위를 건 싸움은 노르만족의 승리로 끝났지만,[3] 노르만인의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왕국의 수도 런던부터 시작하여 특히 북부로 갈수록 앵글로색슨인의 저항이 심하였으므로, 노르만 기사들은 스스로 봉토를 쟁취해야 했다. 노르만 기사들이 만족할 만한 각자의 봉토를 확보했을 때, 2천 명이 넘던 앵글로색슨 영주들은 자신의 땅을 포기하거나 살해당했고 그 자리를 300여 명의 노르만 기사들이 대신 채웠다. 이 때 봉토를 얻은 기사들은 영주로 클래스 체인지를 해서 잘 살았지만, 여전히 가신 신세인 기사들이 많았다.

이후로도 노르만 기사들은 명예와 재산, 신앙심을 충족하고자 유럽 전역을 전전하였다. 로베르 기스카르를 비롯한 모험가들은 교황을 정치적 배경으로 삼아 시칠리아의 무슬림 아미르국과 남부 이탈리아의 동로마 제국령을 정복하였다. 많은 이름없는 자들도 이베리아 내 무슬림을 상대로 벌인 레콩키스타나 예루살렘을 목표로 하였던 십자군 전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 와중에 일부는 바랑인 친위대에 입대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중세 내내 벌어진 각종 크고 작은 전쟁마다 제후들에게 고용되어 전투를 수행했다.[4]

3. 무장

역사적으로 유명한 병종이었던 바, 구글 이미지 검색에 "Norman Knight"라고 쳐 넣으면 풍부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대표적인 특징은 눈물 모양의 방패, 그리고 후드가 달린 사슬 갑옷(mail)이나 찰갑(lamellar armour), 골무형 몸체에 코가리개가 붙은 노르만 투구(norman helmet).[5] 이 모습은 초기 모습이고,[6] 십자군 전쟁을 거치고 후기로 갈 수록 얼굴을 많이 가리게 되면서 결국 다른 국가의 기사들의 풀 헬름과 다를 바 없게 된다. 또한 그들의 무장이었던 노르만 소드(noman sword)는 옛 바이킹 소드가 점점 크로스 가드가 길어지고 폼멜이 둥글어지며 직검이던 형상이 삼각형 꼴로 변하면서 아밍 소드가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결과 베기와 내려치기 위주였던 검술에서 찌르기 기술을 강조하게 된 것도 노르드인이 어떻게 다른 문화 속으로 녹아 없어졌는지 보여주는 부분.

대부분의 자료에서는 허리에 칼을 차고 있지만, 누가 바이킹 혈통 아니랄까봐 개인무장으로 도끼도 사용한다는 것 역시 강조된다. 특히 초기에는 창기병으로서 기술적 발전이 완료되기 이전 시대라 랜스를 들지는 않고 2m 정도의 창을 사용하였는데, 대대적인 랜스차지를 한다기보다는 그냥 보병이든 기병이든 막 쓰던 각개전투용 무기였고, 이 창이 부러지면 도끼나 칼을 뽑아들어서 싸웠을 것이다. 이들이 대거 참전했던 헤이스팅스 전투를 묘사한 바이외 태피스트리에서 그들의 무장과 전투 방식을 잘 살펴 볼 수 있는데, 이들이 쓴 폴액스 형태의 장병기인 데인 액스(Dane axe)도 등장한다.[7] 이러한 양상은 잉글랜드 왕국과 노르망디 공국을 아우르는 앵글로-노르만 문화가 성립하고 기술적 발달이 이어지면서, 소지하는 창검이 점차 기병용으로 적합한 형상으로 변하고 충격기병으로서 편대를 나누고 치밀한 계산 하에 이루어지는 시간차 돌격 전술을 구사하는 방향으로 이어진다.[8]

[1] 기사들은 유사 집단이었던 후스카를과 마찬가지로, 본래 그 숙식을 전적으로 군주에게 기대하였다. 특히 기사는 값비싼 군마도 부양해야 하므로 경제적 부담이 여느 전사계급보다 더 컸다. 그 결과 늘상 인적 자원 수요에 비해 줄 수 있는 봉토는 한정적이었다. [2] 이 원정의 주축은 단연 노르만족 출신이었으나, 인근 플랑드르 브르타뉴, 기타 북프랑스 지역에서도 기회를 노리는 기사들이 몰려들었다. [3] 이 전쟁의 경과에 대해서는 해럴드 2세 하랄 3세 하르드라다, 윌리엄 1세 등 관련 문서를 참고. [4] 설령 땅을 보유하더라도, 군주의 봉신인 (영역)제후가 아닌 이상 먹고 살면서 장비와 군마 유지비를 마련하고도 축재까지 하기에는 불충분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봉신의 봉신, 즉 배신(陪臣. vavasour)들이 그러한데, 그래서 영세한 영주나 기사들은 부를 축적하고자 용병으로서 종군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장 윌리엄 1세도 자기 허락 없이 레콩키스타에 참여하고자 떠난 기사의 봉토를 몰수한 바 있다. [5] 일반적으로 중세 기사의 무장이라 생각하는 판금 갑옷(plate armour)은 중세 말에나 등장하는 물건이고, 그나마 쇄자갑(mail)과 판금(plate)을 혼용하는 트랜지셔널 아머조차 14세기나 되어야 등장한다. 이전 시기에 사용된, 고대 로마군 로리카 세그멘타타(Lorica Segmentata)는 얼핏 비슷해보이지만 판금갑이 아닌 판갑(laminar armour)이거니와 로마군 사이에서도 한정적으로 쓰였던 바, 바이킹들이 이걸 운용한 적은 없었다. [6] 특히 11세기 중반 헤이스팅스 전투 전후. [7] 사실 이건 전형적인 무장일 뿐이고, 상술하였듯 실제로는 윌리엄 1세가 사방에서 온갖 잡다한 병력을 모아다가 브리튼 섬으로 건너간 터라 무장이나 무기의 개인 차는 꽤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8] 전술이나 무기 상의 변화는 랜스, 아밍소드, 롱소드, 기사(역사) 등 관련 문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