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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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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宗 光緒帝
덕종 광서제
파일:813px-Emperor_Guangxu.jpg
광서제의 어진
묘호 <colbgcolor=#ffffff,#2d2f34> 덕종(德宗)
시호 만주어: 암발링우 황디(ᠠᠮᠪᠠᠯᡳᠩᡤᡡ ᡥᡡᠸᠠᠩᡩᡳ)
한자: 동천숭운대중지정경문위무인효예지단검관근경황제
(同天崇運大中至正經文緯武仁孝睿智端儉寬勤景皇帝)
한호 바다랑아 도로 한(ᠪᠠᡩᠠᡵᠠᠩᡤᠠ ᡩᠣᡵᠣ ᡥᠠᠨ᠌)
칸호 바다르굴투 토로 칸(ᠪᠠᠳᠠᠷᠠᠭᠤᠯᠲᠤ ᠲᠥᠷᠥ ᠬᠠᠭᠠᠨ)[1]
연호 만주어: 바다랑아 도로
한자: 광서(光緒)
중국어: 아이신줴뤄 짜이톈(愛新覺羅 載湉)
만주어: 아이신교로 자이탼(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ᡯᠠᡳ ᡨᡳᠶᠠᠨ)
한국식 독음: 애신각라 재첨
영문 Guangxu Emperor
출생 음력 1871년 8월 14일 청나라 직예성 북경 공왕부
사망 음력 1908년 11월 14일[2] 청나라 직예성 순천부 중난하이 영대 함원전
능묘 숭릉(崇陵)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신장 161~164cm[3]
재위기간 음력 1874년 2월 25일 ~ 1908년 11월 14일 (34년 263일)

1. 개요2. 즉위 후
2.1. 즉위 배경2.2. 꼭두각시 황제2.3. 청일 전쟁2.4. 변법자강운동2.5. 의화단 운동2.6. 광서신정2.7. 사망
3. 평가4. 여담5. 창작물에서

[clearfix]

1. 개요

청나라의 11대 황제이다. 청나라 최초의 방계 혈통 황제이며, 원래대로라면 계승권 자체가 없어 황실의 방계로서 죽을 때까지 배를 통통 두드리며 놀고 먹어도 될 운명을 타고났으나 서태후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 옹립되어 사실상 서태후의 꼭두각시로 살아가다가 결국 독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한편으로는 쓰러져가는 청나라를 지키려고 무술변법을 시도하는 등 마지막까지 발악했던 안타까운 군주이기도 하다.

그의 시기 청나라는 이미 멸망의 조짐이 보이던 시기였다. 계속된 민란으로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졌고, 일본을 포함한 열강 세력들은 갈수록 더 많은 이권들을 요구하며 대륙 진출을 가속화하고 있었다. 광서제 말기에 이르렀을 때 즈음, 청 중앙정부는 더이상 지방에 권력을 행사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고, 대신 각자 힘을 키운 군벌 세력들이 점차 활개를 치기 시작하였다. 한편 광서제가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선통제가 즉위했으나, 약 2년 만에 강제 퇴위당하며 청나라도 결국 멸망했다.

2. 즉위 후

2.1. 즉위 배경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uangxu_Emperor.jpg [4]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Emperor_Guangxu.jpg
도광제(道光帝)의 일곱째 아들 순현친왕(醇賢親王, 혹은 순친왕) 아이신교로 혁현(愛新覺羅 奕譞)의 아들. 어머니가 서태후의 여동생인 예허나라 완전(葉赫那拉 婉貞)이기 때문에 모계로 보나 부계로 보나 동치제의 사촌동생이 된다.

청나라의 종법상 원래는 황제 계승 자격이 사실상 없었다. 청나라의 황제 계승 원칙은 1개 항렬에 1명의 황제가 원칙이었는데 광서제는 전 황제인 동치제와 항렬이 같았기 때문에, 원칙대로라면 그 다음 항렬인 부(溥)[5]인 사람이 제위에 올라야 했다. 그러나 서태후는 정치적으로나 혈통적으로나 그가 즉위하는 게 자신에게 더 나으리라고 판단, 항렬을 무시하고 세 살의 어린 조카를 양자로 삼아 그를 황제로 세운다. 이 때문에 즉위한 후, 광서제는 평생 서태후의 횡포에 시달려야만 했다.

아버지 순현친왕(1840년 ~ 1891년)은 공친왕과 함께 함풍제 사후의 동치제 정국을 이끌어간 양무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다. 광서제를 서태후의 양자로 준 것도 그의 정치적 거래라고 볼 수 있었을 것이다.[6] 그는 광서제가 즉위한 직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고 아들인 광서제의 교육에만 힘쓰고 있었지만, 공친왕의 계속된 삽질로 점차 실권을 얻어가기 시작했다. 서태후 또한 국가 대사를 우선 그와 상의하라고 지시하기까지 했다. 사실상 순현친왕의 권력 뒤에는 서태후의 묵인이 있었다.

2.2. 꼭두각시 황제

1881년, 동태후가 석연찮은 이유로 사망하면서 독살설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이 사건을 전해들은 순현친왕은 바짝 쫄아서 북양 해군 지휘권을 1885년에 돌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891년에 죽을 때까지 서태후의 비위를 계속 맞추었다. 심지어는 이화원 건립 등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홍장에게 힘을 실어주어 1885년 11월, 독일로부터 정원과 진원을 입수하여 청불전쟁 중 박살난 복건함대를 대신하여 북양함대를 증강하는 등 대대적인 건함경쟁에 나섰다. 북양함대의 위세를 과시하는 과정에서 나가사키 청국수병 폭동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나마 좀 낫다는 아버지도 이러한 판국이니, 무늬만 황제였던 광서제가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1887년, 광서제는 16살로 성년이 되었지만 서태후는 섭정을 계속 연장했다.

2.3. 청일 전쟁

1890년대 동아시아의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특히 일본 제국이 메이지 유신 이후 힘을 키우고 아시아 유일 열강으로 떠오르며 기존의 중화 중심 질서를 위협하고 있었기에, 이를 두고만 볼 수 없었던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통제력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온갖 애를 쓰고 있었다. 이와중에 조선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고, 청나라와 일본은 각각 반란을 진압해준다는 명분으로 조선 내부로 들어왔다. 조선 조정과 동학군은 외세 침략을 막기 위하여 전주 화약을 맺었으나, 청나라와 일본은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했고 계속 조선에 주둔했다.

일본은 점차 조선을 먹어버리겠다는 야심을 드러내며 경복궁을 점령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청나라에 선제공격을 퍼부으며 본격적인 전투에 들어갔다. 그러나 무기만 서구식이었지 훈련과 기강은 바닥이었던 청나라 군대는 대대적인 근대화를 거친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결국 1894년 6월부터 1895년 5월까지 벌어진 청일전쟁 이홍장이 체결한 시모노세키 조약(下關 條約)을 끝으로 청의 완패로 끝났다. 청은 일본에게 1년 예산의 2.5배나 되는 배상금과 함께 타이완 섬과 펑후(澎湖) 섬, 요동 등을 할양했다. 특히 이 전쟁에서 청나라가 심혈을 들여 키워온 북양함대가 전멸했다는 점에서 그동안 진행되었던 양무 운동이 사실상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청일 전쟁의 패배는 청나라 국민들과 조정에게 단순히 승패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동안 서양 열강들에게 당했던 것은 듣도보도 못한 서구 오랑캐들에게 역습당한 것이라고 치더라도, 전통적으로 해적 근거지 정도로 취급해오던 일본 따위에게까지 패했다는 것이 더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이때문에 청나라는 청일전쟁의 패배 이후 심각하게 개혁을 고려하기 시작했고, 한편 한족이 대다수인 국민들의 민심을 갈수록 들끓어만 갔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Guangxu-Emperor.jpg

2.4. 변법자강운동

이에 당시 막 성인이 된 광서제는 꼭두각시 노릇에서 벗어나기 위해 캉유웨이(康有爲, 강유위), 량치차오(梁啓超, 양계초), 담사동(譚嗣同) 등의 소위 '변법파'를 중심으로 메이지 유신을 모방한 변법자강운동(變法自强)을 적극적으로 실시했다.[7] 일시적으로 서태후의 협력을 얻어 헌법 제정, 국회 개설, 과거제 개혁과 서양식 학교 설립, 산업의 보호/육성 등 100가지가 넘는 정책들을 진행하였으나, 이같은 급진적인 개혁은 당연히 보수파의 반발을 불러올 수 밖에 없었고, 서태후도 이를 인식하여 점차 변법자강운동에 부정적이게 된다. 결국 궁지에 몰린 광서제는 강력한 힘을 가진 군벌 위안스카이를 끌어들여서 보수파를 억누르려 했지만...

도리어 위안스카이가 X맨으로 드러났다. 위안스카이가 서태후에게 광서제가 서태후를 비롯한 보수파를 밀어내려 한다고 밀고한 것이다. 변법자강운동은 좌절되었고, 광서제는 이후 죽을 때까지 자금성에 유폐되는 신세로 전락했다. 변법 자강 운동의 주도자인 담사동은 사형되었고, 캉유웨이, 량치차오 등은 국외로 망명했다. 이를 일컬어 100일 천하라고 한다.

2.5. 의화단 운동

상황이 이렇게 되고 세계 최고라고만 생각했던 청나라가 계속 서구 세력들에게 털리기만 하자 국민들 사이에서 서구에 대한 반감은 극에 달하고 만다. 결국 이같은 반감은 대대적인 폭동으로 터져나왔고, 민중들은 닥치는 대로 백인들을 잡아죽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영사관을 포위하여 잔인한 방법으로 선교사들과 외교관들을 살해하였으며, 단순한 상인들도 잡아 학살하고는 했다. 게다가 그리스도교를 믿는 같은 중국인조차 비슷한 떼거리로 취급, 모두 잡아죽였다. 이때 서양 선교사 188명에 중국인 4만 5천여 명이 죽었는데, 이를 의화단 운동이라고 칭한다.

중국인들이 서양인들을 보이는 대로 잡아 족치자, 분노한 서구 세력들은 연합국을 결성하여 중국과 전쟁을 할 것을 다짐한다. 이와중에 서태후는 의화단 세력과 힘을 합쳐 서구를 몰아낼 생각을 하고 있었고, 이들의 만행을 암묵적으로 묵인해주었다. 청나라는 1900년 6월 21일에 서구 세력들과의 전쟁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고, 서구 세력들은[8] 이에 대항하여 4만 8천 명에 달하는 대군을 조직하여 중국으로 쳐들어갔다.

서구 세력들이 전력을 다해 중국을 공격하자, 안그래도 망해가는 청나라는 연전연패했고 결국 선전포고 후 두 달도 되지 않은 그해 8월에 화친 조약을 체결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전쟁으로 청나라는 호구를 넘어 아예 반쯤 식민지 상태로 전락했고, 서구 세력은 중국에 대한 침탈을 점점 더 가속화했다. 그리고 마침내 1901년, 열강 연합군과 의화단에 협력한 청나라 정부 사이에 신축조약이 성립되었고, 광서제는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유폐 생활이 계속되었다.

2.6. 광서신정

신축조약으로 사실상 청 왕조는 열강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권력을 잡은 서태후와 보수파 대신들은 3년 전에 실패로 돌아갔던 개혁을 다시금 시행하기에 이른다. 이를 신정이라 하며 광서제 시기의 신정이라 하여 광서신정이라 부른다.

1901년 4월 설치한 독판정무처(督辦政務處)를 중심으로 각종 개혁들을 내세우게 되는데 우선 헌법 편찬 작업에 나서 각국의 헌법을 연구하게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907년에는 의회성격을 지닌 자정원이 설치가 되었고, 1908년 8월 흠정헌법대강이 반포된다. 여기에는 제한적이나마 삼권 분립의 원칙이나 언론 저작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등이 보장되는 근대적인 내용들이 많이 담기게 되었다. 또한 지방자치를 위해 자의국을 설치하기도 한다.

재정개혁으로는 상공업 진흥을 바탕으로 하는 이른바 식산흥업 정책을 펼쳤으며, 교육개혁으로는 1905년에 과거제를 폐지시키고 서양식 학교제도를 받아들이는 근대식 신식 교육을 시행, 군사개혁에서는 기존의 군체제를 개편하여 육군과 해군을 설치하는 등 신식 군대를 양성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신정은 1908년 광서제가 사망하고, 서태후 또한 곧바로 죽게 되자 사실상 개혁의 주체들이 사라지게 되면서 흐지부지되었고, 이후 각종 혼란이 발생하게 되어 청 왕조는 무너진다.

2.7. 사망

1908년, 광서제는 37살 나이에 사망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급사를 두고 청나라 정부는 광서제가 오랫동안 앓아왔던 지병[9] 때문에 사망했다고 공식발표했지만 사망 당시부터 독살설이 널리 퍼졌다. 그가 죽은 지 백 년이 지난 2008년에 중국에서 광서제의 능을 공식적으로 발굴해 광서제의 유골과 머리카락 일부를 X선 투과법으로 조사해 본 결과 다량의 비소 성분이 발견되어 사인이 독살로 확인되었다. 독살의 배후로는 서태후 위안스카이가 유력한데, 당시 서태후가 이질에 걸려 오늘내일 하는 몸이었기 때문에 광서제에게 독을 보낼 여력이 없었다고 보고 위안스카이를 많이 의심하는 추세이다. 특히 위안스카이가 훗날 한 행동을 보면 정말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다.

어쨌든 광서제가 사망하자 서태후는 광서제의 3살짜리 조카 푸이(광서제의 이복동생인 순친왕 재풍의 아들)를 다음 황제로 지목했고, 광서제가 죽은 지 이틀 만에 자신도 죽었다. 이 아이가 선통제가 되었다. 아버지가 살아있는 어린아이를[10] 황제에 앉히고 계속 수렴청정을 할 생각이었으나 갑자기 죽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으나, 전술했듯이 당시 서태후는 수렴청정을 염두에 둘 정도로 몸이 건강하지 못했다. 아마 본인의 죽음을 예감했을 터이다. 게다가 항렬의 순서대로 계승권을 부여하는 법도에 따르면 오히려 순친왕 재풍이 아닌 푸이를 즉위시킴이 맞는 행동이었다.[11]

광서제는 붕어한 후 숭릉(崇陵)에 안장되었다. 후임 황제 선통제는 묘호[12]도 비공식적으로 받았으므로, 공식적인 절차에 따라 묘호를 받고 황릉에 안장된 중국의 황제는 광서제가 마지막이다.

광서제의 재위기간은 조선 대한제국 고종(高宗,1864~1907)과 순종(純宗,1907~1910)의 재위기간과 겹친다.

3. 평가

서태후 때문에 대국의 황제라기엔 삶이 불행했던 인물이다. 무려 34년 간 청나라의 황제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37년 짧은 인생을 살고 요절했다. 특히 모든 것을 서태후에게 통제당하며 산 데다 황제가 되었어도 실권을 서태후한테 거지반 다 빼앗긴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변법자강운동 외에는 없었다. 나중에는 변법자강운동이 실패하자 여생을 갇혀 살다가 죽었다. 게다가 그가 즉위할 때 그나마 눈꼽만큼이라도 가망이 있었던 청나라는 그가 죽을 무렵에는 사실상 멸망 직전에 놓였다. 광서(光緒), 즉 '빛나는 후계'라는 연호가 무색하다. 하지만 변법자강운동 등을 보면 결코 의지가 없진 않았으며, 당대의 평가를 보면 총명하고 당시 정세파악도 정확히 하는 등 유능한 군주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꼭두각시여도 동치제와 다른 점은 그 부분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런 청나라 개혁의 의지 때문에 누군가에게 독살되었다. 그래서 청국의 마지막 명운을 지키려던 광서제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이들도 많다.

물론 변법자강운동이 완벽한 근대화의 성공을 보장할 순 없었겠지만, 적어도 청나라의 멸망을 늦추고 최소한 신해혁명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강력한 보수파의 거두인 서태후가 살아있는 한, 청나라의 근대화는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또 비슷하게 비유되는 갑신정변이 그렇듯, 위로부터의 근대화라는 큰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중국보다 적은 인구와 영토를 가진 조선만 해도 극심한 반발과 혼란으로 나라가 요동쳤던 판인데, 다민족에다가 당시 이미 수억 인구와 넒은 영토를 자랑한 청나라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서태후가 처음엔 지지했지만, 이후 철회한 것도 이런 무리한 개혁의 위험성과 실각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란 말도 있다.

왕조의 직계 혈통이 단절되어 즉위한 방계 출신 군주이며, 실권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강제로 군주가 되어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못하고 요절했다는 점에서 청나라 철종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강한 개혁의 의지를 가졌지만 외세의 침탈과 이미 망조가 든 상황으로 인해 제대로 뜻을 펼치지 못했다는 점에서 고종도 많이 떠오르는 인물이다. 재미있는 점은 광서제와 고종은 동시대에 살았다는 것이다. 다만 고종은 실권을 가지게 된 후에 본인의 실책으로 나라를 말아먹은 면도 있다는 점에서 광서제와 동일선상에 놓기는 어렵다.

4. 여담

광서제는 개인적으로도 매우 불행한 황제였다. 광서제는 서태후의 압박때문에 그녀의 조카인 융유황후 예허나라씨(隆裕皇后 葉赫那拉氏)[13]와 결혼해야 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불행했는데 광서제는 고집 세고 성격도 나쁜 황후를 싫어해서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면서 애정을 주지 않았다. 특히 융유황후는 후비들을 괴롭히고 남편인 광서제를 감시하는 역할도 했기에 광서제가 더욱 미워했다. 서태후를 모셨던 궁녀의 증언에 따르면, 문안 인사를 온 황후가 이제 나가보라는 광서제의 말을 듣고도 침전에서 나가지 않고 버티자 격노한 광서제가 황후의 머리채를 잡고 침전 밖으로 끌어냈을 정도였는데, 이게 광서제가 붕어하기 10일 전의 일이었다.
파일:external/img.tv.cctv.com/IMAG1239844275894863.jpg
진비
결국 애정 없는 결혼에 지쳐가던 광서제는 후궁인 각순황귀비 타타라씨(恪顺皇贵妃 他他拉氏), 즉 진비(珍妃)를 총애하게 된다.[14] 진비는 서태후가 정해준 후비로, 처음엔 뛰어난 재능으로 서태후의 총애를 받았지만 광서제에게 강한 황제가 되라고 부추기는 등 서태후와 갈라지면서 미움을 받게 되었다. 서태후의 그녀에 대한 미움은 엄청나서, 조카인 융유 황후를 시켜 진비의 뺨을 서슴없이 때리는가 하면, 나중에는 아예 창문 하나 외에는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곳에 감금시켰다. 게다가 매달 초하루와 15일, 그리고 축제 분위기로 온통 들떠있는 명절 점심 시간에 태감들을 보내 그녀를 욕하고 괴롭혔다. 특히 진비를 증오하는 융유 황후도 같이 괴롭혔다. 또한 진비는 하도 어른스러워서 "진비 할망구"라는 조롱을 서 태후에게 들었을 정도. 남장을 자주하는 여장부이기도 했다. 사진 찍기를 좋아했으며, 황제가 외국어를 배우거나 개혁을 추진하는데도 많은 부분을 조언했다. 광서제는 그런 진비를 더욱 총애했고, 그녀에게 "천자인 내가 있으니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라며 큰소리를 뻥뻥 쳤다고 한다(...).

광서제는 1900년 의화단 운동으로 열강 연합군이 베이징을 습격할 때 잠시 시안(西安)으로 탈출했지만, 그 사이에 진비가 서태후에게 주살된다. 이 때 진비 역시 유폐되어 있었는데, 서태후는 "너무 예뻐서 함께 탈출하다가 외적에게 강간을 당할 수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진비에게 자결을 종용했다. 향년 24살. 일설에는 진비가 황제를 자금성에 남겨 연합군과 협상을 통해 서태후 일당을 일소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하며, 이를 우려한 서태후가 "너 먼저 우물에 빠지면 나도 따라서 빠지 마"라고 설득한 다음 유유히 피난길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말이 설득이지, 실제로는 진비가 자살 강요를 거부하자 빡친 서태후가 쟤 죽여버리라며 고함을 지르자 반항하는 진비를 환관 최옥귀가 강제로 우물에 밀어넣어 죽였던 것. 후일 서태후는 "내가 화낸 건 맞지만 죽이라고 했던 건 아님'ㅅ' "이라며 딱 잡아뗀 뒤, 최옥귀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으나 정작 최옥귀는 처벌하지 않고 그를 출궁시키는 것으로 끝냈다(...). 가족들이 그녀의 시신을 건져올릴 때도 광서제는 차마 나타나지 못했다(...). 진비가 생전에 썼던 낡은 휘장 하나를 슬쩍 가져와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이 광서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고.

타이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제일 유명한 유물 중 하나인 취옥백채가 광서제의 결혼 때 혼수품으로 들어온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다만 국립고궁박물관 측에서는 해당 전설을 소개하면서도 청조의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며 후대에 창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한다.

참고로 청나라 황제 중 선통제와 함께 사진을 찍은 황제다. 레지널드 존스턴의 <자금성의 황혼>에 쓰인 문서 최상단의 사진을 포함해 꽤 사진자료가 남아있는 편.

파일:광서황제.png

광서제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자료이다. 출처를 참고하면 사진 아래에 '광서황제형상'이라는 설명이 적혀있다.

파일:3307_RZHAnM_YI833ES.jpg!r800x0.jpg

마찬가지로 광서제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자료로, 미국 유타 주 오그던(Ogden)에서 1894년부터 1907년까지 판매된 담배 카드 (Ogden's 'Guinea Gold' Cigarette Cards) 등에서 광서제의 것으로 사용되었다. 다만, 해당 카드에서는 앉아 있는 인물이 아닌 좌측의 어린 인물을 광서제로 적시하였다. 어린 광서제 옆에 앉아있는 인물은 광서제의 친부인 순현친왕 혁현이라고 한다. 출처 이 사진이 광서제 일 수가 없는것이 광서제는 3세에 황제가 되었다. 아무리 부자간의 정과 의리가 있다고 하나 아버지는 친왕, 아들은 무려 황제인데 친왕 따위가 앉고 황제를 선채로 사진을 찍게할 일이 있을수가 있겠는가?

5. 창작물에서


[1] Badarɣultu Törö. 현대 몽골어로 Бадаргуулт төр хаан (Badarguult Tör Khaan) [2] 양력 1908년 12월 7일 [3] 161cm는 학자들의 연구결과 164cm는 유골 조사의 키이다. 그러나 키에 대한 정보가 차이가 있는데 사진을 보면 광서제의 키는 160cm대 초반에서 160cm대 중반으로 보인다. [4] 이게 광서제의 사진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저건 사진이 아니고 초상화이다. [5] 다음 황제인 선통제가 이 항렬이다. [6] 어떻게 보면 바로 12년 전에 있었던 이하응과 조 대비의 거래( 이명복은 효명세자의 양자로서 즉위했다.)와도 흡사하다. 물론 역량은 12년 앞선 흥선대원군이 훨씬 컸다. 서태후보다 조 대비가 권력욕이 덜했던 탓도 있지만. [7] 이 운동은 1898년(무술년)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무술변볍(戊戌變法)이라고도 한다. [8] 대영제국, 미국, 영국령 호주, 영국령 인도, 독일 제국, 프랑스 공화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9] 실제로 광서제는 몸이 약해서 그와 관련된 처방이 182가지에 달할 정도로 잔병이 잦았다. [10] 푸이의 생부 순친왕은 1951년까지 살았다. [11] 더군다나 광서제의 다른 조카들도 모두 어렸기 때문에,(가장 나이가 많았던 푸궁이 1904년생) 계승 원칙을 지키려면 어린 황제를 세우는 선택지밖에 없었다. [12] 1967년에 대만에 있던 종친들로부터 헌종(憲宗)이라는 묘호를, 2004년에는 공종(恭宗)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능호는 헌릉이다. [13] 1868년 ~ 1913년. 본명은 예허나라 징펀(葉赫那拉 靜芬). 서태후의 조카로, 광서제에게는 사촌 누나가 된다. 광서제 사후 태후로 봉해졌고 선통제 때 섭정을 맡았다. [14] 1876년 ~ 1900년. 본명은 타타라 서설(他他拉 瑞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