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20 19:46:19

황제선거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color=#000,#e5e5e5><colbgcolor=#FAED7D,#514f36> 역사 <colcolor=#000,#fff> 역사 · 프랑크 왕국( 중프랑크 · 동프랑크) · 부르군트 왕국 · 랑고바르드 왕국 · 독일 왕국 · 이탈리아 왕국 · 합스부르크 제국 · 오스트리아 제국
현대 국가 독일 · 이탈리아 · 오스트리아 · 스위스 · 벨기에 · 네덜란드 · 룩셈부르크 · 리히텐슈타인 · 이탈리아 · 모나코 · 산마리노 · 바티칸 · 체코 · 슬로베니아 · 크로아티아 · 프랑스 · 폴란드
주요 가문 카롤루스 가문 · 오토 가문 · 잘리어 가문 · 호엔슈타우펜 가문 · 벨프 가문 · 룩셈부르크 가문 · 비텔스바흐 가문 · 합스부르크 가문 (합스부르크- 로트링겐 가문)
왕국 독일 왕국 · 이탈리아 왕국 · 부르군트 왕국 · 보헤미아 왕국
선제후국 <colcolor=#000,#e5e5e5><colbgcolor=#fff8b4,#514f36> 초기 부족 공국 프랑켄 공국 · 슈바벤 공국 · 바이에른 공국 · 로렌 공국 · 초기 작센 공국
1356년~1623년 마인츠 선제후국 · 쾰른 선제후국 · 트리어 선제후국 · 작센 선제후국 · 팔츠 선제후국 ·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 보헤미아 왕국
16세기 추가 바이에른 선제후국 · 하노버 선제후국
1803년 이후 추가 레겐스부르크 선제후국 · 잘츠부르크 선제후국 · 뷔르츠부르크 선제후국 · 뷔르템베르크 선제후국 · 바덴 선제후국 · 헤센 선제후국
정치 역대 황제 · 로마왕( 독일왕) · 황제선거 · 선제후 · 금인 칙서( 1356년판) · 제국의회 · 제국대법원 · 제국추밀원 · 제국추방령 · 저지대 국가 · 변경백 · 방백 · 팔츠 · 궁정백 · 주교후 · 제국백 · 자유도시 · 부족 공국 · 영방국가
주요 종교 가톨릭( 국교) · 발도파 · 후스파 · 개신교( 루터교회 · 개혁교회)
관련 유물 레갈리아/신성 로마 제국 · 롬바르디아 철관 ·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 · 금인 칙서 ·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관
군사 제국군 · 황제군 · 란츠크네히트 · 도펠죌트너 · 슈바르체라이터
주요 사건 카노사의 굴욕 · 십자군 전쟁 · 대공위시대 · 이탈리아 전쟁 · 후스 전쟁 · 종교 개혁 · 독일 농민전쟁 · 슈말칼덴 전쟁 · 30년 전쟁( 베스트팔렌 조약) · 7년 전쟁 · 나폴레옹 전쟁(제국의 해체)
오해 오해와 반박 }}}}}}}}}


1. 개요2. 선제후
2.1. 17세기 이후 새로 추가된 선제후
3. 역대 황제 선거4.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신성 로마 제국 독일왕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출은 일반적으로 두 단계에 걸쳐 이루어졌다. 황제가 사망하면 마인츠 대주교가 황제선거를 소집하였고, 독일왕 선제후들의 투표로 선출[2]되면 아헨에서 쾰른 대주교의 주관으로 독일왕 대관식을 치른 후 로마에서 교황이 주관하는 대관식을 받는 구조였다. 그러나 막시밀리안 1세가 황제의 선출은 교황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면서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 페르디난트 1세는 아헨에서 독일왕 대관식을 거행하는 것으로 퉁쳤고, 막시밀리안 2세부터는 대체로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의 대성당(Kaiserdom Sankt Bartholomäus)에서 선거가 끝나면 바로 마인츠 대주교의 주관으로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1356년 황제 카를 4세 금인 칙서를 공표하여 황제를 선출하는 7명의 선제후를 확정하였고 이는 이후의 독일왕-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선출하는 기본법이 되었다. 1508년 이후 선출자들은 대체로 첫 대관식 이후 "선출된 로마인들의 황제"(Electus Romanorum Imperator, Erwählter Römischer Kaiser)로 인정되었다.

금인 칙서에 따른 황제선거 순서는 트리어 선제후 -> 쾰른 선제후 -> 보헤미아 국왕 -> 팔츠 선제후 -> 작센 선제후 ->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 마인츠 선제후로 끝맺었다.[3]

2. 선제후

2.1. 17세기 이후 새로 추가된 선제후

3. 역대 황제 선거

연도 위치 피선거인 왕조 비고
983년 베로나 오토 3세 오토 왕조
1002년 하인리히 2세 오토 왕조
1024년 캄바(Kamba)[10] 콘라트 2세 잘리어 왕조
1028년 아헨 하인리히 3세 잘리어 왕조
1051년 트레부어(Trebur) 하인리히 4세 잘리어 왕조
1075년 고슬라어 콘라트[11] 잘리어 왕조
1077년 포르히하임(Forchheim) 라인펠덴의 루돌프 대립왕
1051년 옥센푸르트(Ochsenfurt) 잘름의 헤르만 대립왕
1106년 마인츠 하인리히 5세 잘리어 왕조
1125년 마인츠 로타르 3세 주플린부르크 왕조
1127년 뉘른베르크 콘라트 3세 호엔슈타우펜 왕조
1147년 레겐스부르크 하인리히 베렝거[12] 호엔슈타우펜 왕조
1152년 프랑크푸르트암마인 프리드리히 1세 호엔슈타우펜 왕조
1169년 밤베르크 하인리히 6세 호엔슈타우펜 왕조
1196년 프랑크푸르트암마인 프리드리히 2세 호엔슈타우펜 왕조 1211년 오토 4세의 대립왕 재선출.
1198년
3월
뮐하우젠(Mühlhausen) 슈바벤의 필리프 호엔슈타우펜 왕조
1198년
6월
쾰른 오토 4세 벨프 왕조 필리프의 대립왕
1208년 황제 선출.
1220년 프랑크푸르트암마인 하인리히 호엔슈타우펜 왕조
1237년 콘라트 4세 호엔슈타우펜 왕조
1246년 하인리히 라스페 루도빙거 가문 콘라트 4세 대립왕
1247년 홀란트 백작 빌럼 2세 게룰핑어 가문 콘라트 4세 대립왕
1257년
1월
콘월의 리처드[13] 플랜태저넷 왕조 대립왕
1257년
4월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 이브레아 왕조 대립왕
1273년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루돌프 1세 합스부르크 왕조
1292년
5월 5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아돌프 나사우 왕조
1298년
7월 27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알브레히트 1세 합스부르크 왕조
1308년
11월 27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 하인리히 7세 룩셈부르크 왕조
1314년
10월 19일
프랑크푸르트-작센하우젠 프리드리히[14] 합스부르크 왕조
1314년
10월 20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루트비히 4세 비텔스바흐 왕조
1346년
7월 11일
렌스(Rhens) 카를 4세 룩셈부르크 왕조
1349년
1월 30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슈바르츠부르크의 귄터 대립왕
날짜: 6월 10일
장소: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참석 선제후: 마인츠 선제후 마이센의 루트비히[15], 트리어 선제후 쿠노 2세 폰 팔켄슈타인, 쾰른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폰 자르베어덴, 팔츠 선제후 루프레히트 1세, 작센 선제후 벤첼 1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벤첼, 보헤미아 국왕 카렐 1세
당선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벤첼

금인칙서 제정 이후 최초의 황제선거였으며, 카렐 1세는 자신의 아들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벤첼을 뽑을 것을 강제하였다.
날짜: 5월 22일
장소: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참석 선제후: 팔츠 선제후 루프레히트 3세, 작센 선제후 루돌프 3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프스트
당선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1세
벤첼은 보헤미아 왕국의 불안정과 교회 대분열을 해결하지 못했고, 대관식을 치르지 못해 이에 불만을 품은 세속 제후 3인이 독단적으로 황제선거를 열었으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1세는 돌아가던 길에 암살당했다.
날짜: 8월 21일
장소: 렌스
참석 선제후: 마인츠 대주교 요한 2세 폰 나사우, 트리어 선제후 베르너 폰 팔켄슈타인, 쾰른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폰 자르베어덴, 팔츠 선제후 루프레히트 3세
당선자: 팔츠 선제후 루프레히트 3세
1400년 5월에 열린 황제선거는 불참했던 선제후들의 인정을 받지 못했으나 벤첼의 폐위가 필요하다고 여긴 나머지 선제후들이 황제선거를 열어 벤첼을 폐위하고 팔프 선제후 루프레히트 3세를 선출하였다. 벤첼은 자신의 투표가 없었다며 폐위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아헨시도 루프레히트의 진입을 불허하였기 때문에 루프레히트는 쾰른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벤첼은 1402년 이복동생인 헝가리- 크로아티아 국왕 지그몬드에게 체포되어 유폐되었다.
날짜: 9월 20일
참석 선제후: 트리어 선제후 베르너 폰 팔켄슈타인, 팔츠 선제후 루트비히 3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대리인 뉘른베르크 성관백 프리드리히 6세
당선자: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지그몬드
루프레히트 사후 황제선거에서 3인의 선제후가 모여 전임 독일왕 벤첼의 이복동생인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지그몬드를 선출하였다.
날짜: 10월 1일
참석 선제후: 마인츠 대주교 요한 2세 폰 나사우, 쾰른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폰 자르베어덴, 작센 선제후 루돌프 3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프스트
당선자: 모라비아의 요프스트
1410년 9월 황제선거에 참여하지 못한 나머지 선제후들은 9월 황제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고, 요프스트는 지그몬드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을 자신에게 저당잡혔기 때문에 자신에게 투표권이 있음을 주장하며 황제선거에 참여하였다. 이 황제선거는 독일 역사에서 마지막 대립왕을 선출한 선거로 남았다.
날짜: 7월 11일
참석 선제후: 마인츠 대주교 요한 2세 폰 나사우, 트리어 선제후 베르너 폰 팔켄슈타인, 쾰른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폰 자르베어덴, 팔츠 선제후 루트비히 3세, 작센 선제후 루돌프 3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겸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지기스문트,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4세
당선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겸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지그몬드
1410년 2회의 황제선거로 2명의 독일왕이 대립하였지만 요프스트가 1411년 1월 18일 의문의 급사를 하면서 지그몬드가 단독 후보자가 되었다. 선제후들은 만장일치로 지기스문트를 선출하였고, 지기스문트의 이복형이자 폐위당한 전임 독일왕 바츨라프 4세는 보헤미아 왕위를 유지하는 대가로 이복동생에게 표를 던졌다. 지기스문트는 1410년 9월 황제선거가 무효임을 암묵적으로 시인한 꼴이 되었지만 이때 도움을 주었던 뉘른베르크 성관백 프리드리히 6세를 1415년 4월 30일 콘스탄츠 공의회 도중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로 임명하였고, 훗날 독일을 통일하는 호엔촐레른 가문 프로이센 왕국의 전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16]에 입성하였다.
날짜: 5월 22일
장소: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참석 선제후: 마인츠 선제후 디트리히 셴크 폰 에어바흐, 트리어 선제후 라반 폰 헬름슈타트, 쾰른 선제후 디트리히 2세 폰 뫼르스, 팔츠 선제후 루트비히 4세,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 보헤미아 국왕 알브레히트[17]
당선자: 보헤미아 국왕 알브레히트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5세는 보헤미아 국왕의 자격으로 자신에게 투표하였으나 선거에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다. 이후 1806년까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 단 한번의 예외를 제외하면 모든 황제 선거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후보자가 선출되었다.
날짜: 1월 2일
장소: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참석 선제후: 마인츠 선제후 디트리히 셴크 폰 에어바흐, 트리어 선제후 야코프 폰 지어크, 쾰른 선제후 디트리히 2세 폰 뫼르스, 팔츠 선제후 루트비히 4세,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
당선자: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5세
전임왕 알브레히트 2세의 유복자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는 2월 22일에 태어났기 때문에 보헤미아 왕위가 공석인 채로 진행되었다.
날짜: 2월 16일
장소: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참석 선제후: 마인츠 선제후 베르톨트 폰 헤네베르크, 트리어 선제후 요한 2세 폰 바덴, 쾰른 선제후 헤르만 4세 폰 헤센, 팔츠 선제후 필리프, 작센 선제후 에른스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알브레히트 3세 아힐레스, 보헤미아 국왕 블라디슬라프[18]
당선자: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1세
막시밀리안 1세는 만장일치로 선출되었으며 1493년 부황 프리드리히 3세가 사망으로 정식 독일왕이 되었다.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대립으로 대관식을 위해 로마로 가지 못했던 그는 1508년 2월 4일 트리엔트에서 '선출된 로마 황제'(Electus Romanorum Imperator)를 자처하였고 2월 12일 교황 율리오 2세의 승인을 받았다.
날짜: 6월 28일
장소: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참석 선제후: 마인츠 선제후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19], 트리어 선제후 리하르트 폰 그라이펜클라우 추 볼라르즈, 쾰른 선제후 헤르만 5세 폰 비트, 팔츠 선제후 루트비히 5세,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1세 네스토어, 보헤미아 국왕 루드비크[20]
당선자: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
주요 후보자는 전임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였다. 카를로스 1세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통치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이었지만 문제는 저지대 지방에서 태어나 프랑스어 네덜란드어의 방언인 플람스어를 모어로 삼았으며 선거 당시에는 카스티야 왕국에서 일어난 코무네로스 반란을 진압하고 있었던터라 프랑수아 1세만큼 외국인 후보로 간주되었다. 이때문에 카를로스 1세는 선제후들에게 자신을 "혈통에 따른 독일인"으로 소개하며 외국 국왕들을 선출하지 말아달라고 선전했다. 독일 문제에 대한 외국의 간섭을 우려한 선제후들의 의중을 찌른 카를로스 1세의 선전은 효과적이었고, 고모 마르가레테 폰 외스터라이히의 힘을 빌려 푸거 가문과 벨저 가문의 주머니를 이용해 트리어 선제후, 마인츠 선제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팔츠 선제후의 환심을 샀다. 교황과 일부 선제후들은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를 후보자로 고려했지만 프리드리히 3세가 거절했기 때문에 카를로스 1세는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카를 5세가 된 카를로스 1세는 1530년 볼로냐에서 교황 대관식을 치렀으며, 마지막으로 교황에게 대관식을 치른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었다.
날짜: 1월 5일
장소: 쾰른
참석 선제후: 마인츠 선제후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 트리어 선제후 리하르트 폰 그라이펜클라우 추 볼라르즈, 쾰른 선제후 헤르만 5세 폰 비트, 팔츠 선제후 루트비히 5세, 작센 선제후 요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1세 네스토어, 보헤미아 국왕 페르디난트 1세[21]
당선자: 보헤미아 국왕 페르디난트 1세
혼자서 여러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 어렵다고 여긴 카를 5세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물려주어 종교 개혁 문제를 위임했고. 1526년 보헤미아-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루드비크가 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페르디난트 1세는 보헤미아-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으로 3국에서 각각 선출되었다.[22] 자신이 공석일 때의 권력 공백을 우려한 카를 5세는 동생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생전에 선거를 치러 동생을 독일왕으로 선출시켰다.
날짜: 11월 28일
장소: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참석 선제후: 마인츠 선제후 다니엘 브렌델 폰 홈부르크, 트리어 선제후 요한 6세 폰 데어 라이엔, 쾰른 선제후 프리드리히 4세 폰 비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2세 헥토어, 보헤미아 국왕 페르디난트 1세[23]
당선자: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2세
날짜: 10월 27일
장소: 레겐스부르크
참석 선제후: 마인츠 선제후 다니엘 브렌델 폰 홈부르크, 트리어 선제후 야코프 폰 엘츠, 쾰른 선제후 잘렌틴 폰 이젠부르크,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보헤미아 국왕 막시밀리안 2세[24]
당선자: 오스트리아 대공 루돌프 2세
날짜: 6월 13일
장소: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참석 선제후: 마인츠 선제후 요한 슈바이크하르트 폰 크론베르크, 트리어 선제후 로타르 폰 메테르니히, 쾰른 선제후 페르디난트 폰 바이에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1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 보헤미아 국왕 마티아스[25]
당선자: 보헤미아 국왕 마티아스
쾰른 선제후 페르디난트는 자신의 형인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를 후보자로 내세웠으나 막시밀리안 1세는 사양했고, 이미 보헤미아-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으로 선출된 오스트리아 대공 마티아스가 선출되었다.
날짜: 8월 28일
장소: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참석 선제후: 마인츠 선제후 요한 슈바이크하르트 폰 크론베르크, 트리어 선제후 로타르 폰 메테르니히, 쾰른 선제후 페르디난트 폰 바이에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1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 보헤미아 국왕 페르디난트 2세[26]
당선자: 보헤미아 국왕 페르디난트 2세
황제 선거가 열리기 2일 전,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 왕관령 국왕에서 폐위당했고 보헤미아인 귀족들은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새로운 국왕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선제후들은 페르디난트 2세를 적법한 국왕으로 인정하여 황제 선거에 참여시켰으며,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를 선출하려던 프리드리히 5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선제후들은 페르디난트 2세에게 투표했다. 결국 프리드리히 5세의 대리인조차도 페르디난트 2세를 황제로 선출하였고, 30년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날짜: 12월 22일
장소: 레겐스부르크
참석 선제후: 마인츠 선제후 안젤름 카지미어 밤볼트 폰 움슈타트, 트리어 선제후 필리프 크리스토프 폰 죄테른, 쾰른 선제후 페르디난트 폰 바이에른,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1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빌헬름, 보헤미아 국왕 페르디난트 2세[27]
당선자: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4세
1621년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가 제국추방령을 당하고 그 자리를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가 채웠다.
날짜: 5월 31일
장소: 아우크스부르크
참석 선제후: 마인츠 선제후 요한 필리프 폰 쇤보른, 트리어 선제후 카를 카스파 폰 데어 라이엔, 쾰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하인리히 폰 바이에른, 팔프 선제후 카를 1세 루트비히,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1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바이에른 선제후 페르디난트 마리아
당선자: 보헤미아 국왕 페르디난트 4세[28]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팔츠 선제후의 직위가 복권되었다. 선제후가 8인으로 늘어나 동점 투표를 막기 위해 황제 페르디난트 3세는 자신의 아들 페르디난트 4세가 보유한 보헤미아 국왕의 선거권을 포기시켰다.
날짜: 7월 18일
장소: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참석 선제후: 마인츠 선제후 요한 필리프 폰 쇤보른, 트리어 선제후 카를 카스파 폰 데어 라이엔, 쾰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하인리히 폰 바이에른, 팔프 선제후 카를 1세 루트비히,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2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바이에른 선제후 페르디난트 마리아
당선자: 보헤미아 국왕 레오폴트 1세[29]
1657년 4월 2일 페르디난트 3세가 사망한 후 치러진 선거였으며 이는 대공위시대 이후 가장 긴 공백이었다. 프랑스 왕국 추기경 쥘 마자랭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제위 계승을 방해하기 위해 루이 14세 페르디난트 마리아를 선출시키고자 방해공작을 펼쳤지만 레오폴트 1세는 형처럼 자신의 선거권을 포기했음에도 무난히 선출되었다.
날짜: 1월 23일
장소: 아우크스부르크
참석 선제후: 안젤름 프란츠 폰 잉엘하임, 트리어 선제후 요한 후고 폰 오르스베크, 쾰른 선제후 요제프 클레멘스 폰 바이에른, 팔프 선제후 필리프 빌헬름,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3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당선자: 오스트리아 대공 요제프 1세[30]
날짜: 10월 22일
장소: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참석 선제후: 마인츠 선제후 로타르 프란츠 폰 쇤보른, 트리어 선제후 카를 요제프 폰 로트링겐, 팔츠 선제후 요한 빌헬름,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보헤미아 국왕 카렐 2세,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루트비히
당선자: 보헤미아 국왕 카렐 2세[31]
레오폴트 1세는 1692년 브라운슈바이크칼렌베르크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를 선제후로 임명했으나 이는 제국의회의 반대에 부딪혔다. 1701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며 바이에른 선제후와 쾰른 선제후는 프랑스의 가담한 죄목으로 제국추방령을 당해 1706년 선거권을 박탈당했고, 1708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이 정식으로 하노버 선제후로 임명되었다.
날짜: 1월 24일
장소: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참석 선제후: 마인츠 선제후 필리프 카를 폰 엘츠, 트리어 선제후 프란츠 게오르크 폰 쇤보른, 쾰른 선제후 클레멘스 아우구스트, 팔츠 선제후 카를 3세 필리프,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4세, 바이에른 선제후 겸 보헤미아 국왕 카를 알브레히트,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당선자: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도중에 벌어진 황제선거로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를 위시한 팔츠, 쾰른, 작센과 브란덴부르크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보헤미아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6:3으로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가 황제로 선출[32]되었으나 본진 뮌헨이 탈탈 털린채 방랑생활을 하다 3년 만에 사망했다.
날짜: 9월 13일
장소: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참석 선제후: 마인츠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카를 폰 오슈타인, 트리어 선제후 프란츠 게오르크 폰 쇤보른, 쾰른 선제후 클레멘스 아우구스트, 팔츠 선제후 카를 4세 테오도어,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4세, 보헤미아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당선자: 토스카나 대공 프란체스코 1세[33]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토스카나 대공 프란체스코 1세가 7표를 받아 프란츠 1세로 선출되었다. 팔츠 선제후 카를 테오도어는 셀프 투표를 했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를 겸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 역시 카를 테오도어에게 투표했다. 다만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후 체결된 드레스덴 조약으로 프란츠 1세의 선출을 인정했다.
날짜: 3월 27일
장소: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참석 선제후: 마인츠 선제후 에메리히 요제프 폰 브라이트바흐 추 뷔레스하임, 트리어 선제후 요한 필리프 폰 발더도르프, 쾰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 폰 쾨니크제그-로텐펠스, 팔츠 선제후 카를 4세 테오도어,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4세, 보헤미아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당선자: 오스트리아 대공 요제프 2세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의 장남 요제프가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날짜: 9월 30일
장소: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참석 선제후: 마인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카를 요제프 폰 에어탈, 트리어 선제후 클레멘스 벤체슬라우스 폰 작센[34], 쾰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란츠 폰 외스터라이히[35], 팔츠-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테오도어,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보헤미아 국왕 레오폴트 2세,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당선자: 보헤미아 국왕 레오폴트 2세[36]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베스트팔렌 조약에 따라 팔츠 선제후 카를 4세 테오도어가 바이에른 선제후국을 상속받되 선거권은 1표로 제한되었다. 요제프 2세의 동생 레오폴트가 만장일치로 레오폴트 2세로 선출되었다.
날짜: 7월 5일
장소: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참석 선제후: 마인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카를 요제프 폰 에어탈, 트리어 선제후 클레멘스 벤체슬라우스 폰 작센, 쾰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란츠 폰 외스터라이히, 팔츠-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테오도어,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보헤미아 국왕 프란티셰크 1세,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당선자: 보헤미아 국왕 프란티셰크 1세[37]
마지막 황제선거로 레오폴트 2세의 맏아들이 만장일치로 프란츠 2세로 선출되었다.

4. 관련 문서



[1] 엄밀히는 독일왕 선출이었기 때문에 Königswahl이다. [2] 선제후 본인이 직접 가서 투표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선제후 대리인이 투표했다. [3] 9명으로 정착된 이후에는 트리어 선제후 -> 쾰른 선제후 -> 보헤미아 국왕 -> 바이에른 선제후 -> 팔츠 선제후 -> 작센 선제후 ->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 하노버 선제후 -> 마인츠 선제후 순. [4] 독일어로는 Engern. 앵글로색슨의 앵글로가 여기서 유래했다. 브레멘 남부로 길게 이어진 역사적인 지역이다. [5] 작센, 베스트팔렌, 하노버 등. [6] 프랑켄, 슈바벤, 라인란트 등. [7] 직역하면 황제에게 술을 올리는 자리. [8] 보헤미아 왕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는 날까지 선거군주제였다. 다만 페르디난트 2세 이후로는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만 후보자가 나오는 것이 관습처럼 되었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 보헤미아인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보헤미아 국왕으로 등극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1749년 보헤미아 왕관령을 사실상 해체시켜버리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만 후보자가 나오는 것이 공식화되었다. [9] 1714년부터 1806년까지 하노버 왕조 영국 국왕들이 동군연합으로 통치하였다. [10] 헤센주 오펜하임(Oppenheim) 근처의 마을. 현재는 수몰되었다. [11] 하인리히 4세의 장남. [12] 콘라트 3세의 장남. [13]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의 동생. [14] 알브레히트 1세의 차남. [15] 베틴 가문 출신. [16] 세간의 인식과 달리 프로이센 공국- 동프로이센은 프로이센 왕국의 중심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주변부에 불과했기 때문에 프로이센이라는 이름으로 국왕을 자처할 수 있었다. [17] 오스트리아 대공,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겸임. [18]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겸임. [19]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1세 네스토어의 동생. [20]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겸임. [21] 오스트리아 대공,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겸임. [22] 페르디난트 1세는 루드비크의 누나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와 결혼했고, 루드비크는 페르디난트 1세의 여동생 오스트리아의 마리아와 결혼했다. [23] 오스트리아 대공,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겸임. [24] 오스트리아 대공,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겸임. [25] 오스트리아 대공,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겸임. [26] 오스트리아 대공,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겸임. [27] 오스트리아 대공,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겸임. [28]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겸임. [29] 오스트리아 대공,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겸임. [30] 오스트리아 대공,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겸임. [31] 오스트리아 대공,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겸임. [32] 카를 알브레히트는 쾰른, 보헤미아, 팔츠, 바이에른, 작센, 브란덴부르크의 6표를,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랑수아 에티엔은 마인츠, 트리어, 하노버의 3표를 받았다. [33] 오스트리아 대공 겸임. 전 로렌 공작. [34]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의 동생. [35] 요제프 2세와 레오폴트 2세의 동생. [36] 오스트리아 대공,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겸임. [37] 오스트리아 대공,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