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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4 19:59:41

펠로폰네소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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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전몰자 추도 연설을 하는 페리클레스.

파일:Pelop_war_en.png
붉은색이 델로스 동맹, 파란색이 펠로폰네소스 동맹, 회색은 중립 도시.

1. 개요2. 전쟁의 성격
2.1. 양극체제적 국제전2.2. 귀족정 vs 민주정2.3. 이이제이
3. 전쟁 이전
3.1. 발단: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대립 시작3.2.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60~기원전 446)과 일시적인 평화
4. 전쟁 전기
4.1. 에피담노스 분쟁과 휴전협정 파기4.2. 초기 전개(기원전 432~기원전 427)4.3. 전략의 변경과 아테네의 공세(기원전 427~기원전 421)
5. 전쟁 중기
5.1. 니키아스 평화 협정과 스파르타의 위기(기원전 421~기원전 416)5.2. 시칠리아 공격과 아테네의 재앙(기원전 415~기원전 414)
6. 전쟁 후기
6.1. 아테네의 위기(기원전 413~기원전 411)6.2. 아테네의 반격과 전쟁의 패배(기원전 411~기원전 404)
7. 전쟁 이후
7.1. 평화 협정7.2. 전쟁 이후
8. 육상의 스파르타 vs 해상의 아테네?9. 기타

1. 개요

Πελοποννησιακός Πόλεμος
Peloponnesian War

기원전 431년부터 기원전 404년까지 아테네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는 폴리스들이 맞붙은 전쟁.

실증 사학의 아버지 투키디데스가 저술한 역사서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로 유명하다.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의 지역 사령관 중 하나였는데, 암피폴리스를 상실한 책임을 지고 추방된 뒤 그리스 전역을 돌며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썼다고 한다. 그러나 기원전 411년에서 기록이 끊겨 그 후의 전개는 크세노폰의 헬레니카에 의지한다.

본 전쟁은 크게 3단계로 구분하는데, 전기는 '아르키다모스 전쟁', 중기는 '시켈리아 원정', 후기는 '데켈레이아(혹은 이오니아) 전쟁'이다.

2. 전쟁의 성격

2.1. 양극체제적 국제전

신흥세력 아테네와 구체제의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지중해 세계가 두개로 나뉘어 붙은 전쟁이었다. 이 특징 때문에 냉전기에 외교정치 분야에서 중요한 참고사례로 연구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거의 모든 폴리스들이 전쟁에 휘말렸고 그리스 본토뿐 아니라 마케도니아, 헬레스폰토스, 이오니아, 시칠리아 등 넓은 영역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그야말로 고대 지중해 세계의 세계대전이라 할 수 있다. 각각의 도시들은 모두 자체적인 주권을 가지고 외교와 전쟁을 했다.

2.2. 귀족정 vs 민주정

고대 그리스에서 시민 계급은 지주계급을 의미했다. 대략 스무 명이 먹을 식량을 생산하는 토지를 소유했는지 여부로 참정권이 주어졌다. 이에 반해 아테네는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자들에게도 참정권을 점차 확대했다. 이 점은 그리스 세계의 많은 피지배층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는데, 특히 경제적으로 상업 비중이 높은 섬나라들에서는 계속해서 귀족파와 민중파 간 내전이 나타났다. 여기에 스파르타는 귀족파를 지지하고 아테네는 민중파를 지지하는 개입이 이루어진다.
라케다이몬인(=스파르타)들은 민중이 권력을 잡으면 로도스 섬 전체가 아테네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는 반면에 부자들이 집권하면 자신의 편이 될 것입을 알았다.
<헬레니카>, 크세노폰
민중파의 반란에 대한 불안감은 스파르타 동맹들에게서 광범위하게 나타나는데, 나폴레옹 전쟁의 대 프랑스 동맹이나 냉전의 공산권에 대한 공포감에 필적하는 것이었다.

2.3. 이이제이

한편 강 건너 불 구경하던 페르시아는 양쪽을 번갈아 가면서 지원하면서 자신들의 이득을 챙기려고 했다. 아테네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이 페르시아 제국을 상대로 전쟁에서 최종승리를 거두면서, 페르시아 제국의 대 그리스 정책은 직접적인 군사 충돌에서 강력한 패권을 가진 폴리스를 견제하면서 실리를 챙기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스파르타, 아테네, 테베 등의 폴리스들이 이따금 패권을 잡을 때 마다 페르시아 제국은 패권을 견제할 수 있는 폴리스들에게 지원을 해주면서 이오니아 지방을 장악해나갔다. 이런 방식은 마케도니아의 패권 장악과 동방원정을 하기 전까지 고대 그리스 세계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3. 전쟁 이전

3.1. 발단: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대립 시작

전쟁의 발단은 페르시아 전쟁 이후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까지 약 20년간 아테네의 급성장과 이에 위협을 느낀 스파르타의 반발이라 하겠다.

아테네의 급성장은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때 그리스 국가들 중 중심이 될 만한 크기와 힘을 지닌 국가는 스파르타와 아테네 두 나라였다. 물론, 그 밖에도 테베와 아르고스 정도가 상당한 힘을 지녔었지만 이들은 페르시아 편을 들었었기 때문에 중심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동맹을 맺고 이후 전쟁을 수행해 나가고자 했다. 페르시아의 두 번째 침공을 바다와 육지에서, 각각 살라미스 해전(기원전 480년)과 플라타이아 전투(기원전 479년)에서 격퇴한 그리스 동맹군은, 후퇴하는 페르시아 패잔병을 완전히 제거하고 소아시아 지역의 그리스계 도시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오히려 바다를 건너 역공에 나섰다. 그리스 원정군이 비잔티온을 비롯한 몇몇 도시를 성공적으로 공략하는 동안, 전쟁을 더 키우고 싶지 않았던 스파르타와 세력 확장을 원했던 아테네 사이에 분쟁은 격화되었다. 결국 스파르타는 기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도시국가들과 함께 그리스 동맹에서 탈퇴해 버렸고, 남은 도시국가들은 아테네를 중심으로 델로스 동맹을 결성했다. 스파르타의 강력한 군사력이 없어도 아테네는 계속 성공적으로 소아시아의 항구도시들에서 페르시아의 세력을 몰아내었다. 아테네 해상 제국의 급성장은 이러한 일련의 원정으로 확보된 해상 무역로뿐만 아니라 동맹 도시에서 반강제로 걷어들인 공납금이 기반이 되었다.

아테네의 국력이 급속도로 신장되는 광경을 보고 스파르타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뿐만 아니라 아테네의 성장과 함께 아테네의 민주정이 그리스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소수의 엘리트들이 다수의 헤일로타이[1]를 억압하는 사회구조를 유지하던 스파르타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성벽 재건을 반대했지만[2], 반 스파르타 파였던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시민을 설득하여 성벽을 만들었고 성벽이 완성되자 스파르타의 헤게모니를 공식적으로 부정했다. 기원전 470년 反스파르타 정책을 펼치던 테미스토클레스가 도편추방되고 친스파르타 정치인인 키몬이 정권을 잡으면서 잠시 평화 분위기가 일어나나 했지만, 키몬 역시 나중에 도편추방되었다.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분쟁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에 떠오른 것은 기원전 465년 헤일로타이의 반란이었다. 스파르타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동맹군을 소집하였는데, 다른 동맹군은 모두 받아들이면서 키몬이 인솔하고 온 아테네의 중장보병 4천 명만은 돌려보냈다.[3] 표면상 이유는 아테네군이 스파르타인에게 모욕감을 주었다는 것이지만, 실제 이유는 아테네가 배신을 하여 오히려 헤일로타이를 지원할 수도 있다는 의심병이었다. 이러한 스파르타의 노골적인 적대감은 반대로 아테네에서도 스파르타에 대한 큰 적대감을 불러일으켰고, 이에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동맹국과 적국에 모두 손을 내밀어 자신의 동맹으로 끌어들였다. 이뿐만 아니라 스파르타가 마침내 헤일로타이의 반란을 진압하고 반란자들을 추방하자, 아테네는 이들을 받아들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코린트 만 북쪽 나우팍토스에 정착시켜서 스파르타를 견제하는 용도로 삼았다.

기원전 460년 스파르타의 두 동맹국, 코린트(그리스 본토 발음으로는 코린토스)와 메가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자, 아테네는 이에 개입하여 메가라와 동맹을 맺고 코린트 지협에 진출하였다. 아테네와 코린트의 전쟁은 이후 15년간의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시작이 되었다.

3.2.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60~기원전 446)과 일시적인 평화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가 코린트와 분쟁 중이던 메가라와 동맹을 맺으면서 시작되었다. 메가라는 코린트 지협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어서,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이 육로로 오는 것을 봉쇄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4] 한편 기원전 460년 아테네는 페르시아가 지배하고 있던 이집트의 반란을 지원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군을 보내었기 때문에 전력이 분산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테네는 일련의 해전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메가라를 공격해온 코린트를 격퇴하기 위해 너무 어리거나 나이가 많은 시민들까지 긁어모은 군대를 파견하여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렇지만 아테네 해군의 군사 행동에 위협을 받은 아이기나가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가담하였다.

스파르타의 본격적인 개입은 기원전 458년부터였다. 스파르타군은 코린트 만 건너 동맹국인 도리스를 지원하기 위해 바다를 건넜는데, 원정은 성공하였지만 아테네 해군에게 해로가 차단되어 스파르타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스파르타군은 오히려 보이오티아[5] 지역의 타나그라까지 진격하였다. 스파르타의 이러한 대담한 진격이 가능했던 것은 아테네 내부에서 민주정의 전복을 원했던 일부 세력과의 연대, 그리고 보이오티아를 통합하고자 하였던 테베의 지원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예상과 다르게 스파르타군이 아테네로 접근하자 깜짝 놀란 아테네는 군대를 탈탈 털어모아서 결전에 나섰는데, 비록 타나그라 전투에서 스파르타가 승리를 거두었지만 심각한 피해를 입었기에 육로로 철수하였다.

타나그라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아테네는 기원전 457년 오이노피타에서 테베를 상대로 압승을 거두었고, 테베를 제외한 보이오티아의 대부분을 친 아테네 계열로 바꿔버리는 데 성공한다. 또한 아테네는 도시 성벽을 무너뜨리고, 해군을 해체하며, 델로스 동맹에 가담하는 조건으로 아이기나에게 항복을 받아내었다. 이 시기에 아테네와 아테네의 외항인 피라이오스 사이에 장벽이 건설되었다. 이 장벽은 스파르타의 강력한 육군으로부터 물자의 반입로를 보호함으로써, 아테네의 해군력이 유지되는 한 식량 등의 주요 자원의 수송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게 해주었다. 일련의 군사적 성공으로 고무된 아테네는 함대를 파견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스파르타의 아픈 곳을 여기저기를 찔러대었고, 이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동시에 벌어진 이집트 원정(기원전 460~기원전 454)이 참패로 끝나자 아테네의 공세는 둔화되었다. 그리스군이 처음 반란을 지원하기 위해 이집트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이미 페르시아군이 반란군을 격퇴한 뒤였고, 어물쩡거리던 그리스군은 결국 페르시아군에게 18개월 동안 포위된 끝에 분쇄되었다. 이집트 원정의 참혹한 실패는 델로스 동맹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아테네는 이후 몇 년을 외부 원정보다는 동맹이 이탈하지 않도록 내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해야 했다. 기원전 451년 친 스파르타 정책으로 도편추방되었던 키몬이 돌아오자, 아테네 시민은 키몬에게 스파르타와의 휴전협상을 맡겼고, 결국 기원전 446년까지 5년 간의 휴전 조약을 조인하였다. 그리스의 분쟁에서 해방된 아테네는 페르시아와 전쟁을 재개하여 키프로스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함대를 지휘한 키몬이 전사하였다.

휴전 기간에도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직간접적인 분쟁은 계속되었고, 그 와중에 기원전 447년 테베가 다시 일어나 코로네아 전투에서 아테네에 승리, 보이오티아 전체를 수복하였다. 코로네아 전투 이후 전황은 도미노처럼 아테네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는데, 먼저 코로네아 전투의 결과로 용기를 얻은 에우보이아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에 아테네가 대응하기 위해 북진한 사이 이번에는 메가라에서 반아테네 쿠데타가 일어났다. 코린트 지협을 틀어막았던 길이 열리자 스파르타군이 아테네로 진군했고, 아테네군은 본국을 지키기 위해 에우보이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메가라를 통과한 스파르타군은 아티카 지역을 휩쓸었지만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는 않고 스파르타로 돌아갔는데, 이는 페리클레스가 스파르타의 플레이스토아낙스 왕의 조언자 클레안드리다스를 뇌물로 매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6] 스파르타의 위협이 없어지자 페리클레스는 에우보이아로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 잔혹하게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후 기원전 446년에서 기원전 445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협정이 타결되어 30년 간의 평화조약을 맺었다.

이때의 평화조약은 기본적으로 양측의 세력권을 인정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서로 협의해서 풀어나가자는 것이었다. 이후 양국은 서로 상대방의 세력권이나 동맹국을 건드리지 않고 15년을 지내게 된다. 예를 들어, 기원전 440년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은 사모스섬에서 델로스 동맹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 아테네가 위기에 빠졌을 때,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이 반란이 아테네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알았지만 회합을 열어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조약상으로는 30년의 평화였지만 실제로 평화는 15년밖에 지켜지지 않았고, 이후 기원전 431년부터 벌어지는 본격적인 전쟁은 27년간 이어졌는데, 흔히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고 하면 이 27년 전쟁을 뜻한다. 27년 간 전쟁을 하고도 뒤이어 일어난 코린트 전쟁까지 치르자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몰락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4. 전쟁 전기

4.1. 에피담노스 분쟁과 휴전협정 파기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된 계기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휴전 협정이 깨진 것인데, 그 원인으로 에피담노스 분쟁(기원전 436~기원전 433)을 들고 있다. 에피담노스( 디라키움, 현 알바니아의 두러스)는 이오니오스만 서북쪽 변방에 위치한 식민시로 약간 특이한 역사가 있었다. 에피담노스는 케르키라의 식민시였지만 식민시의 건설자는 코린트인인 팔리오스였고 처음 정착민들 중 코린트인도 몇몇 있었다. 이 때문에 코린트인은 에피담노스를 자신들의 식민시로 여겼다. 이런 상황에서 에피담노스는 민중파와 귀족 사이에 분쟁이 벌어졌다. 여기서 에피담노스의 민중파가 귀족을 추방했고 반대로 귀족이 에피담노스 주변에 비헬라스인과 연대했다.[7]

에피담노스의 민중파는 케르퀴라에 지원을 요청하는 사절단을 보냈으나 거절당한다. 이 때문에 에피담노스 민중파는 이번에는 델포이 신탁[8]을 명분으로 코린트에게 도시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는데, 코린트는 때마침 케르퀴라와 갈등이 있었기 때문에 에피담노스의 민중파의 요구를 수용해서 군대를 육로로 자신들의 식민시이자 케르퀴라와 에피담노스 사이에 있던 아폴로니아로 파병했다. 반대로 케르퀴라에는 추방당한 귀족들이 도움을 요청했고 때마침 코린트가 군대를 파병하자 즉시 함선 25척을 보내어 코린트의 군대를 다시 돌리고 에피담노스에는 추방했던 귀족들을 다시 수용하라는 요구했다.[9]

양 도시는 에피담노스를 두고 처음에는 협상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기원전 435년에 충돌하였다. 코린트는 선단 75척과 중무장보병 2천을 에피담노스로 보냈고 이에 케르퀴라는 선단 80척으로 맞서서 악티온 곶에서 싸웠다. 이 해전에서 케르퀴라가 코린트 선박 15척을 파괴하며 승리했는데, 이를 기념하고자 레우킴메 곶에 승전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후 케르퀴라는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해서 코린트의 식민시 레우카스와 동맹국인 엘리스의 퀼레네 항구를 공격했다. 그렇게 1년간 대치하던 중 코린트가 대대적으로 전쟁준비를 시작하자 비록 전에 승리하기는 했지만 동맹국이 없던 케르퀴라는 아테네에 동맹을 요청하고 이에 코린트도 아테네에 도움을 요청한다.[10]

이런 상황에서 아테네는 민회를 2번 열어 논의한 끝에 케르퀴라가 직접 침공을 당할 때에만 돕는 조건부 동맹을 맺기로 하고, 앞의 조건대로 활동할 아테네 함대 10척을 파견했다. 이후 코린트와 동맹국은 150척에 달하는 대규모 함대를 케르퀴라 앞바다에 파견했고 이에 케르퀴라도 140척의 함대로 대응해서 대규모 해전이 벌어졌다. 여기서는 코린트가 70척을 파괴해서 매우 우위에 있었는데 이 상황을 지켜보던 아테네의 10+10척(나중에 증강된 함대)의 함대가 전투에 개입하고 갑작스러운 제3자의 개입에 코린트는 후퇴했다. 이후 코린트가 아테네 함대에 사절을 보내 개입한 이유를 묻자 민회에서 결정된 동맹을 설명해주었고, 코린트도 아테네와 전쟁을 벌이기란 무리라고 여겼는지 퇴각하여 승패가 정해지지 않고 해전은 끝이 난다.(기원전 432년)[11]

당연히 코린트는 아테네에게 원한을 품게 된다. 코린트와 다시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고 본 아테네는 본격적으로 전쟁준비를 시작하는데 우선 코린트의 식민시였던 포테이다이아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당시 포테이다이아 주변에는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 소속이었던 식민시로 마케도니아가 있다. 마케도니아의 국왕인 페르딕카스는 과거에는 아테네와 우호적인 관계였으나 아테네가 자신의 정적인 동생 필리포스와 데르다르와 동맹을 맺자 적대하게 되었다. 그래서 페르딕카스는 라케다이몬과 코린트에 사절을 보내는 한편 트라케 지방의 칼키디케인들과 봇티아인들에게 반란을 유도하는 상황이었고, 아테네 입장에서 포테이다이아는 마케도니아와 트라케 지역을 견제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때문에 코린트와의 해전 직후, 아테네는 포테이다이아에게 (팔레네 방향의) 해안 성벽의 해체와 인질, 그리고 코린트 감독관을 추방할 것을 요구하면서 함선 30척과 병력 천여 명을 파견했다. 포테이다이아는 아테네에 사절을 보내 협상을 하는 한편 스파르타에 구원을 요청한다. 여기서 포테이다이아가 아테네의 공격을 받을 경우 스파르타가 반격해주겠다는 확답을 받는다.[12]

아테네와의 협상도 아무 성과가 없게 되자 포테이다이아는 결국 아테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고 여기에 페르딕카스의 지원으로 칼키디케인들도 포테이다이아의 반란에 참여했으며, 코린트도 중무장보병 1600여 명과 경보병 400명을 보내 포테이다이아 반란을 후원했다. 이에 아테네 인들은 이전에 보낸 병력 천여 명을 마케도니아로 보내 필리포스와 데르다르와 함께 테메르 시를 함락하고 추가로 병력 2천과 함대 40척을 지원했다. 결국 퓌드나 시까지 포위되자 마케도니아의 왕 페르딕카스는 아테네와 휴전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고[13] 이후 아테네 군사 3천여 명은 올륀토스 지역에서 포테이다이아군을 이기고 포테이다이아 시를 포위했다.[14]

상황이 이렇게 되자 코린트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수장국인 스파르타에 동맹국을 소집해서 회담을 연다. 이 자리에 아테네를 배신했던 보복으로 금수조치를 당해서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탈퇴해야 했던 메갈라 등도 참여해 아테네에 불만을 표시했다. 결국 스파르타의 왕 아르키다모스 2세와 에포로스 스테넬라이다스가 이 동맹국 회담에 참여해서 본격적으로 개입, 아테네에 이러한 조치를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아테네는 이를 거부하고 결국 기원전 432년 스파르타는 다시 전쟁을 결의했다.

4.2. 초기 전개(기원전 432~기원전 427)

전쟁의 시작은 테베의 플라타이아 기습 공격에서 시작되었다. 테베는 오랫동안 플라타이아를 점령하고자 노력했지만 매번 실패해 왔는데, 동맹인 스파르타가 전쟁을 결의하자 다시 시도했다. 테베는 플라타이아이를 포위하였고 플라타이아이는 아테네로 구원군을 요청하고 결사항전한다. 허나 아테네의 구원군은 늦어졌고 플라타이아이는 함락되고 말았다. 함락 후 테베군과 스파르타군이 시내에 진주하자 플라타이아이 시민들의 처리를 둘러싸고 논쟁이 크게 벌어졌는데, 테베와 플라타이아이가 서로의 입장을 이야기하고 스파르타가 결정하는 구도였다. 플라타이아이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페르시아에 빌붙었던 테베를 비꼬면서) 자신들은 신의를 지키는 국가였고 아테네가 페르시아 전쟁 당시 자신들을 도와줬던 걸 잊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항복할 수 없었노라고 자신들을 변호했다. 이에 테베는 신의를 저버린 것은 네놈들을 말하는 것이라며 (테베는 플라타이아이의 모도시) 플라타이아이 주민들을 전부 죽이라고 요구했다. 결국 스파르타는 전부 죽이되 우리에게 도움을 줬던 전력이 있었던 사람들은 살려준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대부분 플라타이아이 시민들은 처형당하고 말았다. 아테네는 포위 직전에 혹은 포위를 뚫고 도망치는데 성공한 플라타이아인들을 수용하여 보호했다.

이후의 전투들은 스파르타와 아테네 양쪽 모두 결정적인 승기를 가져가지 못하는 채로 진행되었다. 애초부터 무적에 가까운 지상군을 가진 스파르타와 지중해 최강의 해군을 보유한 아테네의 상성이 서로에게 최악이라, 스파르타는 바다로 함부로 나가지 못했고 아테네는 지상전을 회피하였기 때문이다.[15]

스파르타는 거의 매년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의 대군까지 모아서는 정기적으로 아테네가 있는 아티카 반도로 레이드를 뜨러왔다. 그러나 아테네는 육지에서 강력한 스파르타군을 상대하려고 하지 않았고, 이에 스파르타는 아테네 인근 농지를 유린하고 황폐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대부분이 올리브나무 포도나무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반복적인 공격으로도 쉽사리 황폐화되지 않았다. 올리브나무와 포도나무의 자생력은 상상을 초월하게 강한 데다가 숫자도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1차 침입 당시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은 약 6만에 달하여 당시 그리스 세계로서는 놀라운 숫자였으나, 빅터 데이비스 핸슨이 저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추산한 바에 따르면 그럼에도 아티카의 농장을 완파하기 위해서 병사 1인당 올리브나무와 포도나무 205그루 이상을 망가트려야 했다. 대략 세 번째 침공 때는 이전에 훼손했던 나무들이 다시 자라나는 중이라 그것들을 파괴하다 왔다는 기록이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까지 그리스의 전통에서 시민군이 생업을 떠나 복무를 하는 기간은 몇십 일 정도로 제한적 것이었고, 특히 스파르타의 경우 숫적으로 우세한 헤일로타이(스파르타의 국유 노예)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감시해야 했기 때문에 더더욱 본진을 오래 비울 수 없었다. 그래서 스파르타군의 아티카 원정은 가장 길었을 때도 고작 40일 정도에 불과했다.

한편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는 시민들을 설득하여, 스파르타의 공격이 있을 때마다 모든 농민을 아테네 성벽 안으로 피신시키고 대신 델로스 동맹의 함대를 대규모로 동원하여 펠로폰네소스의 해안지역을 유린하기로 하는 전략을 세웠다. 비록 스파르타군이 아테네 주변의 농지를 약탈했지만, 강력한 아테네 해군이 해운을 통한 식량 공급선을 지켜주었고, 또한 항구에서 하역된 식료품은 항구부터 아테네시까지 세워진 장벽을 따라 안전하게 운반되었기에,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초토화 작전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이때는 성벽을 공략하는 공성 전술의 발전이 미비해서, 아테네쯤 되는 부국이 작정하고 세운 성벽을 공략하자니 답이 안 나와서 약탈하다가 돌아감이 한계였다.

그러나 많은 인구가 좁은 시내로 몰리자 위생 상태와 영양 상태가 모두 안좋아지면서, 기원전 430년부터 아테네에 수차례 대역병이 돌았다.[16] 이 결과 아테네는 주민의 1/3 가까이(대략 7~8만 명)를[17] 상실하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기원전 429년 역병에서는 지도자 페리클레스마저 잃었다. 이뿐만 아니라 전쟁의 교착상태가 지속되면서 아테네의 재정상황도 점차 영 좋지 않게 되었다. 비록 역병과 재정문제로 인해 아테네 해군의 규모도 축소되었지만, 숙련된 아테네 함대는 기원전 429년 나우팍투스 해전에서 40척 대 77척의 숫적인 열세에서도 대승을 거두는 등, 바다에서 활개를 치고 다녔다. 한편 페리클레스가 역병으로 죽은 이후 아테네의 정권은 급진적인 주전파인 클레온에게 넘어갔고, 이제 아테네의 전략은 보다 적극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4.3. 전략의 변경과 아테네의 공세(기원전 427~기원전 421)

아테네는 역병으로 인해 다수의 시민과 지도자인 페리클레스를 잃었고, 소모전의 결과 재정 상황도 점점 악화되었다. 마침 공격적인 전쟁을 주장하던 클레온이 정권을 잡으면서 아테네의 전략은 적극적인 공세로 나서는 대신, 작전을 경제적으로 수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아테네는 이전처럼 대규모 함대를 운용할 자금과 인력이 부족했고, 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소규모 함대를 이끌고 작전 지역의 토착민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이려고 시도하였다.

한편 아테네는 에게해 섬들 중 유일하게 아테네 제국에 종속되지 않았던 멜로스에 공격을 가했으나 실패했다. 이와 동시에 소규모 함대를 펠로폰네소스반도 서쪽으로 보내 그 지역의 스파르타 동맹국들에 타격을 가하고 아테네의 동맹국들을 돕고자 한다. 데모스테네스가 지휘한 이 부대는 보이오티아를 후방에서 타격하려던 작전에는 실패하나 그 일대의 주요 스파르타 동맹국들에 타격을 입혀 전선에서 이탈시키는데는 성공한다. 또한 아테네는 기원전 427년 시칠리아에 원정군을 보내었으나 3년간의 노력에도 아무런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일단 목표가 소박하긴 했으나 12년 후에 있을 대규모 2차 시칠리아 원정의 1/4 규모라 병력이 부족하기도 했다.

기원전 425년 일단의 아테네 함대는 시칠리아로 보낼 지원군을 싣고 항해하다가 우연히 폭풍을 피해 스파르타 인근의 필로스라는 이름의 곶에 들리게 되었다. 이 함대에는 예전부터 필로스를 침공하여 요새를 세울 것을 구상하고 있던 데모스테네스가 조언자로서 타고 있었는데, 때마침 필로스에 정박하게 되자 그는 할일이 없어 심심해 하는 병사들을 잘 구슬려 곶의 입구에 방어 성벽을 쌓았다. 그리고 며칠 만에 완성된 이 요새는 대박이 되었다. 위치 자체가 스파르타에서 군대를 보내기에는 적당히 멀지만 요새에서 출동한 아테네군이 스파르타의 후방을 괴롭히기에는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해역을 제압하기에도 적절했던 것이었다.

기회를 잡은 데모스테네스는 원래의 작전에서도 빠지고 갤리선 5척 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이 기지에 엎어져 버렸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놀란 스파르타가 아테네 본토에 대한 원정까지 중지하고 급히 돌아와 반격에 나섰지만, 데모스테네스는 이미 소수의 원군과 함께 방어태세를 단단히 굳히고 있었다. 데모스테네스가 해군까지 동원한 스파르타의 전방향 공격을 하룻동안 적절히 잘 막아내는 동안, 대규모 아테네 해군이 도착해 다음날 스파르타 함대를 쫒아내었다. 그리고 이때 스파르타 해군이 물러서자, 이로 인해 필로스 곶을 후방으로 우회해서 공격하려던 스타르타군 440명이 근처의 스팍테리아 섬에 갇히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400명이라니 별 것 아닌 듯 보이지만, 그중에서 백여 명은 스파르타의 정규시민이었고 당시 스파르타의 정규 시민은 3500명에 불과했으니 이들은 스파르타가 함부로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충격과 공포에 빠진 스파르타가 평화 협상을 원했지만 아테네의 강경 주전파 클레온이 훼방을 놓으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한편 아테네 역시 막강한 스파르타군을 육지에서 상대할 방법은 없었고, 스팍테리아 섬으로의 식량 공급을 완전히 저지할 수도 없었기에[18], 함대로 스팍테리아 섬을 포위한 채로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마침내 식수 공급 문제로 아테네 해군이 포위를 지속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어지자, 클레온은 전황이 지지부진한 것이 온건파 탓이라고 비난하면서 자기가 지휘하면 20일 안으로 끝낼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는데[19], 어이가 없어진 온건파의 수장 니키아스가 여론을 움직여 직접 원군을 이끌고 가서 해결하도록 만들었다. 군경험이 전무했던 클레온은 울며 겨자먹기로 여론에 떠밀려 갔는데... 다행히 이미 데모스테네스가 공격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스팍테리아 섬에 있는 스파르타군의 경계 상황을 파악한 데모스테네스는 밤중에 중보병 800명과 경보병 1만 명 이상을 성공적으로 섬에 상륙시켜[20] 스파르타군을 다수 죽였고, 마침내 292명을 완전히 포위한 뒤 협상을 통해 포로로 잡아 버렸다.

필로스 전투 이후 전황은 전반적으로 스파르타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필로스 요새에 주둔하고 있는 아테네군은 계속해서 스파르타에게 등 뒤의 칼과 같은 존재였고, 탈주한 헤일로타이(스파르타의 국유노예)를 받아들이고 보호함으로써 노예제로 부양되던 스파르타의 경제적 기반을 위협했다. 반대로 스파르타는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완전시민 120명이 인질로 잡히는 바람에 예전처럼 아테네 근방에서 파괴행위를 할 수 없었다. 또한 테르모필레 전투 등 임전무퇴로 널리 알려진 스파르타군이 집단으로 항복한 사실 자체가 그리스인들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이제 다른 그리스 폴리스들은 스파르타와 한번 싸워볼 만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아테네의 행운은 계속 되지 못했다. 스파르타의 주요 동맹국인 테베를 굴복시키고자 했던 작전은 기원전 424년 델리온 전투에서 참패로 끝났다.[21] 한편 기원전 424년 스파르타의 브라시다스가 헤일로타이와 동맹군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끌고 트라케 일대로 침투하여 암피폴리스를 포함한 인근 지역의 도시들을 제압하는데, 아테네에게 중요한 은광이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성공한 것이었다. 이때 트라케 지역의 아테네 사령관 투키디데스는 제때 브라시다스를 저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추방을 당했고, 이후 역사 저술가로 변신하여 유명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집필했다.

기원전 422년 아테네 강경파의 수장 클레온이 다시 트라케 지방을 되찾고자 파견되어 상당한 지역을 회복하지만, 결국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이 전투에서 클레온과 브라시다스가 모두 전사해 버렸고, 아테네와 스파르타 양측의 최대 강경파들이 함께 사망하면서 평화의 분위기가 찾아 오게 되었다.

결국 기원전 421년 아테네의 온건파 정치인인 니키아스의 주도로 50년 간의 평화협정(니키아스 화약)이 체결되었다. 이 평화 협상에서 양측은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서로가 점령한 영토를 돌려주기로 하였는데, 특히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스팍테리아 섬에서 잡았던 인질을 돌려주고, 스파르타는 아테네에게 암피폴리스를 돌려주기로 하였다. 또한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동맹이 되어서, 스파르타에서 헤일로타이가 반란을 일으킬 경우 아테네가 원군을 보내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전쟁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시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이것으로 전쟁이 완전히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5. 전쟁 중기

5.1. 니키아스 평화 협정과 스파르타의 위기(기원전 421~기원전 416)

기원전 421년 아테네 스파르타는 50년 간의 평화협정을 맺고 동맹까지 맺었지만, 양측 감정의 골은 지워지지 않았다. 평화협정은 어디까지나 표면상이었고, 양측은 자신이 얻은 성과를 포기하고자 하지 않아 협정 내용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이후 기원전 414년 공식적으로 협정이 깨질때까지 7년간 두 세력은 20세기의 냉전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물밑에서 서로를 약화시킬 기회만 찾고 있었다. 한편 약 24년 전에 30년 간의 평화협정을 맺었을 때와는 정반대로 이번 니키아스 평화협정은 스파르타의 열세 속에서 맺어졌으며, 필로스에서 당한 결정적인 패배로 인해 스파르타 육군은 더 이상 무적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때마침 아르고스가 스파르타와 맺었던 30년 평화협정이 끝이 나면서 새로운 변수로 등장하고, 아테네 강경파의 새로운 지도자로 나타난 알키비아데스는 이를 기회로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개입하고자 하였다.

펠로폰네소스 반도 중부에 위치한 아르고스는 전통적으로 반도 내에서 스파르타와 대립하는 사이었음에도 지난 전쟁 동안에는 방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제 아르고스는 아테네의 지원을 받아 주변의 만티네아, 엘리스 등의 다른 도시국가들을 끌어모아 새로운 동맹을 만들어 스파르타를 무력화시키고자 하였다. 스파르타는 무력시위를 하면서까지 이를 막아보려고 했지만 아기스 왕의 우유부단한 지휘로 인해 실패하였고, 아르고스 동맹이 반도의 중부를 잘라먹으면서 스파르타는 반도 북쪽의 다른 동맹국들과 고립되는 위기에 처한다.

이제 간이 커진 아르고스 동맹은 군대를 일으켜 스파르타의 코앞에 있는 테게아를 포위하였다. 이때 명목상으로라도 스파르타와 동맹인 아테네는 적극적인 지원을 할 수 없었고, 알키비아데스는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아테네 '의용병' 약 천 명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스파르타는 싸울 수 있는 전 병력을 박박 긁어모아 반격에 나섰고, 이에 대응하여 아르고스 동맹군은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가고자 하였다. 단기결전을 원했던 스파르타의 아기스 왕은 적군을 끌어내기 위해 만티네아로 밀고 들어가 수공까지 하면서 분탕질을 쳤고, 이를 방관할 수 없던 아르고스 동맹군이 요격에 나서면서 기원전 418년 만티네아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 초반에는 아기스 왕이 무리한 기동을 벌이면서 스파르타 전열에 발생한 틈을 아르고스 동맹군이 파고 들어 승기를 잡나 했지만, 난전이 벌어지자 스파르타의 좌익에 배치되어 있던 엘리트 보병들이 미쳐날뛰면서 도미노처럼 아르고스 동맹군을 무너뜨리고 개발살을 내버렸다. 이 전투의 승리로 스파르타는 펠레폰네소스 반도 내의 패권을 되찾았고, 스파르타군의 무적 전설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한편 이 전투에서 아르고스 동맹의 평민군과 아테네군이 스파르타 엘리트 보병과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는 추태를 보이면서, 펠로폰네소스에서 싹이 트던 민주정은 사실상 끝나버렸다.

기원전 416년 멜로스 섬에 대한 아테네의 재공격이 있었다. 멜로스는 스파르타와 같이 도리아인 계열의 도시였으며, 비록 중립을 표방했지만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함대가 자유롭게 기항하여 보급을 받았다. 예전에 멜로스를 제대로 손봐주지 못했던 원한을 기억한 아테네는 동맹국을 모아 레이드를 뜨러 갔는데, 스파르타가 구원을 망설이면서 아테네는 반년간의 포위 끝에 멜로스를 점령하고 생존자를 모두 죽이거나 노예로 팔아버렸다. 이때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언급한 멜로스 협상단과 아테네인의 멜로스의 대화는 오늘날에도 무력과 정의에 대한 글 중 상당히 유명한 글이다. 멜로스인들은 만인에게 공유되는 불변의 정의에 의거 아테네의 항복 요구에 응할 수 없다고 했고, 아테네인들은 "정의는 힘 있는 자가 정하는 것'이며, 약자는 힘 있는 자가 만든 정의에 순응할 때 행복과 안정을 얻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5.2. 시칠리아 공격과 아테네의 재앙(기원전 415~기원전 414)

이탈리아 남서부의 큰 섬 시칠리아는 초반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비껴나 있었지만, 점차 전쟁과 관계가 깊어갔다. 시칠리아의 작은 도시들은 아테네와 같은 이오니아인들이 세웠지만, 가장 강력한 도시인 시라쿠사는 스파르타와 같은 도리아인이 세웠다. 시라쿠사에게 위협을 받던 작은 시칠리아 도시들은 강력한 아테네를 끌어들여 시라쿠사를 견제하고자 하였고, 아테네에게 있어서도 시라쿠사는 언제든지 스파르타와 연계될 수 있는 잠재적 적국이었기에, 아테네가 전쟁 중에 이곳에 진출할 이유는 충분했던 셈이다. 뿐만 아니라 시칠리아의 자원은 아테네가 군침을 흘릴 만한 것이었다.

1차 시칠리아 원정(기원전 427~기원전 424) 때 아테네는 시칠리아로 배 스무 척을 보내 시라쿠사에 맞서 동맹국들을 지원하였으나, 아무런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기원전 425년 아테네는 증원군 40척을 보내지만, 가던 길에 필로스에서 스파르타와 싸우느라 늦어버렸고, 그 사이 시칠리아의 아테네 동맹국들은 "시칠리아인을 위한 시칠리아"를 천명하는 평화협정을 맺어 버렸다. 이로 인해 아테네는 시칠리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아테네는 시칠리아를 집어삼킬 요량으로 시라쿠사와 다른 도시국가들간의 분쟁이 생길 때마다 계속 집적거렸는데, 기원전 416년 세게스타라는 작은 도시국가가 아테네에 구원을 요청해왔다. 세게스타는 이웃 도시 셀리누스와의 전쟁에서 패하자 아테네를 끌어들일 생각을 하였는데, 자신들이 모든 전쟁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제안해왔다. 실제로는 그만한 재력이 없었던 세게스타는 아테네를 속이기 위해 우선 60탈란트(1560 kg)어치 은화를 제공했고, 아테네의 사절이 왔을 때 그들이 가진 모든 금과 사치품을 싸그리 모아 보여주면서도 보여주지 못한 재산이 더 많다고 과장하였다.

당시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사망 이후, 평화주의자 니키아스의 주장으로 기원전 421년 스파르타와 휴전을 맺었으나(니키아스 평화조약), 주전파의 젊은 지도자 알키비아데스가 다시 주전론에 불을 활활 지피고 있던 상황이었다. 아테네 민회는 격론 끝에 전함 60척과 경보병만 파견하고, 알키비아데스, 니키아스, 라마코스에게 지휘를 맡기기로 하였다. 사령관이 3명이나 선출된 것은 주전파의 지도자인 알키비아데스와 온건파의 지도자인 니키아스를 모두 포함시키고, 여기에 군경험이 많은 노장 라마코스를 포함시켜 조화를 꾀하고자 한 것이었다. 니키아스는 이후의 민회에서도 계속 알키비아데스를 까대면서 원정을 반대해 봤지만, 이미 원정으로 기울어진 민심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시칠리아의 부와 국력을 과장해 아테네 시민들에게 겁을 주어 이 원정을 취소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테네 민회는 오히려 원정대의 규모를 두배로 늘려, 전함 134척에 중장보병만 해도 5천 이상, 함대 운용인력을 계산하면 2만 이상이라는 대규모 전력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여기엔 아테네뿐만 아니라 아르고스 등 동맹국 병력도 상당수 존재했다.

그런데 출항 전날 밤, 누군가가 행운의 표시인 헤르마[22]를 다수 파괴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기회를 틈타 알키비아데스의 정적들은 가짜 증인을 내세워 알키비아데스파의 행위라고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군대의 지지를 받고 있던 알키비아데스는 원정 이전에 재판을 열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이 탄원은 기각되었고 알키비아데스는 원정군과 함께 출항하였다. 원정이 시작되어 군인들의 표가 없어질 때까지 기다렸던 알키비아데스의 정적들은 궐석재판을 열고 신성모독 혐의로 알키비아데스를 소환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알키비아데스는 적국 스파르타로 망명을 해버렸는데, 이후 몇 년간 그는 마치 관도대전 중에 조조에 망명한 허유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시칠리아로 도착한 아테네 원정군은 사실 세게스타에 약속한 돈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황당한 상황에서 원래 온건파였던 니키아스는 세게스타의 적국에게 무력 시위만 하고 돌아가자고 주장했지만, 결국 다른 사령관 2명의 의견을 따라[23] 이렇게 된 이상 시라쿠사를 공격하기로 했다. 아테네 원정군은 시라쿠사군을 야전에서 격파하였고, 시라쿠사를 포위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소극적인 니키아스는 애초에 그 자신이 원치 않던 원정에 때마침 병까지 앓았다. 설상가상으로 알키비아데스는 도망가버리고 라마코스는 포위망 건설 즈음에 전사하여 소극적이고 몸도 아픈 니키아스가 전권을 쥐고 지휘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한편 아테네군에게 포위당한 시라쿠사는 사방으로 원군을 구하러 다녔다. 때마침 스파르타로 망명해 온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에게 시라쿠사까지 원군을 보내야 하는 이유를 역설하면서, 또한 아테네 근처의 데켈레아를 점령하고 요새화하도록 조언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스파르타는 명목상으로는 아테네와 휴전 중이었으나, 아테네의 시라쿠사 원정을 휴전 협정의 파기로 간주하였고 전쟁을 재개했다. 그러나 시라쿠사에 대한 스파르타의 초기 지원은 매우 작은 규모였는데, 스파르타와 코린트 각 2척으로 구성된 함대에 스파르타 완전시민 병사는 한 명도 없었고 지휘관 귈립포스마저 완전시민이 아닌 모타케스(열등자) 출신이었다.[24] 그런데 놀랍게도 이 볼품없는 병력이 봉쇄를 뚫고 상륙에 성공하여 시칠리아 전역에서 지원병을 모으고 아테네군의 포위망 건설을 저지하기 시작했다. 결국 포위벽 건설은 실패로 돌아가고, 원래부터 열의가 없었던 니키아스는 아테네에 원정군이 위기에 빠졌다고 서신을 보내 철수 허가를 받고자 했다.

그러나 아테네의 답변은 정반대였다. 에우리메돈과 데모스테네스 지휘하에 비슷한 규모의 2차 원정군을 파견한 것.[25] 도착한 데모스테네스는 니키아스의 지휘가 너무 무기력하고 소극적이기 때문에 위기가 왔다고 판단하고 적극적인 공세를 가했다. 그러나 시라쿠사 성벽에 대한 야간공격 와중에 서로를 오인하고 전투를 벌여 실패하였고, 많은 아테네군이 절벽이나 경사에서 떨어져서 사망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테네군의 영채는 습지에 있어서 질병이 만연해 있었다.

나중에 왔던 에우리메돈과 데모스테네스는 이제 철수를 원했지만, 이제는 오히려 원래 반원정파였던 니키아스가 철수에 반대하고 나섰다. 원정 실패에 대한 책임 추궁[26]과 아테네의 명성에 금이 가는 것을 두려워했을 뿐만 아니라, 시라쿠사의 재정이 소진되면서 친 아테네 세력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기대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아테네군이 밍기적거리는 동안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지원군이 도착했고, 이제 아테네에게 철수밖에 남은 대안이 없어졌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때마침 월식이 일어나면서, 이를 불운함의 징조로 받아들인 신관들이 '아흐레씩 3번'을 기다릴 것을 조언했고, 니키아스는 이 예언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철수할 기회를 놓쳐버렸다.[27][28]

그 사이 시라쿠사 해군은 아테네 해군을 격파하고 출구를 봉쇄했으며, 절망적 상황에 몰린 아테네 함대가 며칠에 걸쳐 결사적으로 돌파를 시도했지만 유리한 지형을 선점한 시라쿠사 해군이 방어에 성공하면서 아테네 원정군은 시라쿠사에 완전히 고립되었다. 아테네 원정군 약 4만 명은 이제 둘로 나누어져 육로를 통해 주변 동맹국으로 탈출하고자 했지만, 추격에 나선 시라쿠사군이 허둥대던 원정군을 차례로 덮쳤고, 원정군은 괴멸되었다. 스파르타의 장군 귈립포스는 니키아스와 데모스테네스를 포로로 잡아가려고 했지만 시라쿠사군은 그들을 처형시켰고, 포로 약 7천 명은 이후 대부분 노예가 되어 채석장에서 가혹한 강제노동을 당하다가 죽었다.

이 원정에서 델로스 동맹은 아테네의 직속 함선 160척을 포함하여 함천을 총 216척 잃었고 도합 4만에 달하는 인력을 모두 상실, 그외에 원정군에 투입되었던 비용 4500탈란트를 고스란히 날러버렸다. 전쟁 이전에 아테네의 연 수입이 1천 탈란트였으므로 거의 5년치 예산이 한순간에 없어진 것이다. 게다가 데모스테네스, 라마코스, 니키아스, 에우리메돈 등이 전사하거나 사망하였고, 알키비아데스는 망명해 버리는 등 경험 많고 유능한 인물들도 다수 잃었다.[29] 스파르타로 망명한 알키비아데스는 시라쿠사에 원군을 보냄과 동시에 아테네 근처 데켈레아를 점령하고 요새화할 것을 조언하였는데, 아테네의 육상 식량수송로를 제압할 수 있는 데켈레아 요새는 신의 한 수가 되어 이후 계속 아테네를 괴롭혔다. 이뿐만 아니라 시라쿠사는 이후 아테네에 맞서 스파르타에 대규모 함대를 제공하였다.

그런데 당시에는 시칠리아가 꽤 먼데다 탈출한 사람이 거의 없었던 관계로 아테네는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났어도 패전 사실 자체를 몰랐다. 아테네인들이 이 소식을 들은 건 여행자가 "시칠리아에서 아테네군 전멸했는데 아테네는 괜찮아 보이네?" 하는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이발사에게 얘기하자, 혼비백산한 이발사가 손님도 내버려두고 광장으로 나가서 이 소식을 전한 뒤에야 시칠리아 원정군이 전멸했음을 알았을 정도다. 저 소식을 전해준 여행자는 법정에 소환되었는데, 누구에게 들은 말이냐는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자 유언비어를 퍼트리려는 수작이라 모함받아 전령이 소식을 전하러 올 때까지 오랫동안 바퀴에 묶여야 했다.[30]

6. 전쟁 후기

6.1. 아테네의 위기(기원전 413~기원전 411)

시칠리아에서의 돌이킬 수 없는 패배는 아테네를 심각한 위기로 밀어넣었다. 아테네의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고, 인적 자원 역시 극심한 타격을 받아 중장보병으로 복무할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을 가진 아테네 시민은 전쟁 전 2만 5천 명에서 9천 명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한 때 지중해를 호령했던 해군은 이제 겨우 100척 남짓으로 쪼그라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마저도 노잡이들에게 지불할 임금이 부족하여 한 번에 동원할 수 없었다. 재정 위기 때문에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도시 국가들에게서 걷어들이는 공납금을 올렸는데, 이 조치는 이미 강제로 오랫동안 전쟁에 끌려들어왔던 동맹국의 불만에 불을 지폈고, 결국 여러 동맹국이 반란을 일으키고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했다.

또한 아테네의 시칠리아 원정은 스파르타를 자극하였고, 스파르타는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하였다. 스파르타는 시칠리아로 군대를 보냄과 동시에 아테네 근처의 데켈리아를 확보하고 요새화하여, 아테네가 주변의 땅을 1년 내내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육로를 모두 제압당하자 아테네는 모든 식량을 해상으로 수입해와야 했고, 이는 아테네의 재정에 막대한 부담을 안겼다. 이뿐만 아니라 스파르타군은 아테네 근처의 은광들을 황폐화시키고 노예 2만 명을 탈출시켰다. 여기에 지금까지 참전하지 않았던 페르시아마저 아테네가 지배하는 이오니아 해안 지역을 탈환할 목적으로 스파르타를 지원하려고 하였다. 이제 거의 모든 그리스인들은 아테네의 멸망이 가까워졌다고 여겼다.

그러나 아테네는 빠르게 충격에서 회복하였다. 스파르타는 아직 해전에서 미숙했고, 스파르타 함대의 다수를 차지하는 동맹국 코린트와 시라쿠사 해군의 집결이 늦어졌을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의 지원은 제때 이루어지지 않았다. 스파르타가 해상에서 소극적으로 나오는 동안, 아테네는 가능한 해상 전력을 긁어모아 반란 지역으로 급파했다. 이런 아테네의 신속한 대응으로 레스보스와 사모스의 반란은 저지되었다. 두 폴리스 모두 섬에 있거니와 델로스 동맹에서 몇 안 되는 자체 함대 보유국들이었기에, 아테네의 해상 무역로에 위협이 될 만한 폴리스가 동맹에서 이탈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 이후 아테네는 키오스를 포위했지만, 키오스와 밀레투스가 떨어져 나가는 것은 끝내 막지 못했다. 이러한 전황에서 페르시아가 스파르타 함대에 대한 재정과 지상군 지원을 시행했고, 스파르타는 다시 힘을 얻어 로도스 등 새로운 반란세력을 합세시켰다.

이 과정에서 기원전 411년 아테네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민주정이 전복되고 400인 과두정이 잠시 실권을 잡았다. 아테네 상류층은 민주정이 들어선 이후 100년간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를 보여왔는데, 그나마 상류층 출신인 페리클레스 등이 죽은 이후 하층민 출신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전쟁 기간 동안 자산가에 대한 세금 부담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불만이 폭발한 것이었다. 쿠데타의 결과로 무보수로 일하는[31] 400명이 권력을 독점하였는데 이는 하층민의 정치 참여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권력의 집중도를 두고 과두파 내에서 의견 차이가 발생하여, 소수에 의한 통치를 고집하는 급진파와 대중의 정치 참여 확대를 원하는 중도파로 분열되었다. 한편 당시 아테네의 가장 강력한 군사 세력이었던 사모스 섬의 함대는 쿠데타 소식을 듣자 민주정을 지지하고 스파르타와 계속 전쟁을 수행할 것을 결의하였다. 비록 아테네 함대가 본토로 쳐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스파르타를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중도파가 힘을 얻었다. 상황이 영 좋지 않게 돌아가자 급진파는 스파르타에 평화 협상을 제안하는 동시에 항구에서 농성을 했는데, 결국 중도파에게 격파되어 추방당했고, 이로 인해 짧았던 400인 과두정은 막을 내렸다. 한편 아테네의 배신자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로 망명을 가 있으면서 과두정의 쿠데타를 지원했지만, 쿠데타 이후에는 오히려 사모스의 아테네 함대에 합류하여 이후 기원전 406년 노티온 해전까지 아테네 함대를 지휘하였다. 카멜레온

이런 혼란 속에서 아테네에게 중요했던 에우보이아와 헬레스폰토스의 도시까지 반란에 가세했다. 이건 매우 심각한 사태인데 에우보이아의 경우 전쟁 초기부터 아테네의 재산과 가족을 상당수 옮겨놓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고, 헬레스폰토스의 도시들의 경우 아테네는 흑해 연안에서 식량을 수입해 먹고살았기 때문에 중요한 식량공급로라서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탈취당하면 굶어죽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정문제로 인해 아테네 해군의 작전에는 많은 애로사항이 꽃피고 있었다. 결국 아테네는 심각한 위기에 빠진다.

6.2. 아테네의 반격과 전쟁의 패배(기원전 411~기원전 404)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아테네는 최후의 힘을 동원해 반격에 나선다. 가장 중요한 식량공급로를 다시 되찾기로 결의한 아테네는 모든 함대를 동원해 헬레스폰토스로 파견해 스파르타와 맞선다. 페르시아의 자금 지원으로 확대된 스파르타 해군을 상대로 기원전 411년 키노세마 해전과 기원전 410년 아비도스 해전에서는 아테네가 승리를 거두었지만, 페르시아 지상군이 해안가로 밀려온 스파르타 해군을 지원해 주면서 결정적 피해를 입히지 못하였다. 스파르타 해군이 페르시아의 자금으로 계속 다시 살아나자 기원전 410년 키지코스 해전에서 소수의 함대로 꾀어낸 뒤 포위 공격하여 전멸시키고 전투 후반에는 다시 스파르타를 지원하러 온 페르시아 육군까지 몰아냈다. 이후 이 지역의 반란국을 다시 제압해 식량수송로를 수복했다. 그리고 이오니아 일대를 남하하면서 대부분의 반란국을 제압하여 아테네 해상 제국의 판도를 거의 되살려 내었다. 그러나 아테네의 영역이 회복되면서 공납금 수입이 늘어났다고 해도, 이미 탈진 상태에 있던 아테네의 국력은 계속되는 전쟁 속에 소진되어 갔다. 한편, 아테네 해군의 거듭된 승리로 인해 1년 전부터 쿠데타를 통해 아테네를 지배하고 있던 400인 과두정은 힘을 잃었고, 망명에서 돌아와 해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알키비아데스의 정치적 영향력은 강화되었다.

키지코스에서의 대패 이후, 스파르타는 평화 협상을 원했지만 아테네는 이를 거절하였다. 기원전 407년이 되자 스파르타는 리산드로스를 해군 사령관에 임명하여 함대의 재건을 맡겼다. 리산드로스는 함대를 끌어모으며 에게해를 건너 지금의 터키 지역에 있는 에페수스로 갔는데, 여기서 그는 이 지역의 페르시아 사트라프와 키로스 왕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하였다. 페르시아의 아낌없는 자금 지원을 받은 리산드로스는 함대를 90척 규모로 복구함과 동시에 돈으로 아테네 측의 우수한 뱃사람들을 끌어들여 질적으로도 향상시켰다. 이에 아테네 함대는 스파르타 함대를 감시할 수 있는 노티온으로 이동하여 계속 싸움을 걸었지만, 스파르타는 때를 기다리며 전투를 회피하였다. 결국 아테네는 4년 전 키지코스에서처럼 소수의 함대로 스파르타를 꾀어 내어 포위 공격을 해보려고 했는데... 오히려 스파르타 함대가 일제히 벼락같이 튀어나와 공격을 가하자 패주하였다(기원전 406년 노티온 해전). 이 전투의 패배로 아테네 함대 지휘관 알키비아데스는 두 번째 망명을 떠나게 되는데,[32] 이후 정치적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로 돌아오지 못하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직후 도피처에서 암살된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제도상 리산드로스는 1년밖에는 지휘할 수 없고 재임도 불가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령관에서 물러났고, 칼리크라티다스가 후임으로 들어왔다. 비록 연임에 실패하고 화가 난 리산드로스가 남은 군자금을 페르시아에게 돌려주는 만행을 저질렀지만,[33] 그래도 칼리크라티다스는 리산드로스에게 넘겨받은 170척에 달하는 대함대를 거느렸기에, 압도적인 전력으로 아테네의 새로운 지휘관 코논의 70척 함대를 격파하고 미틸레네 항으로 몰아넣었다. 또다시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쳐오자 아테네는 신전 지붕의 금을 긁어모아 배를 만들고 노잡이로 자유를 약속한 노예들을 대규모로 탑승시켜가면서까지 100척 이상인 함대를 급조하였고, 동맹군 함선을 포함한 155척 규모의 아테네 마지막의 대함대를 이끌고 코논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갔다. 이에 칼리크라티다스가 코논을 견제하기 위해 남겨둔 일부의 함선을 제외하고 함천 120척을 이끌고 대응에 나서면서 기원전 406년 아르기누사이 해전이 발생했다.

리즈 시절 때와는 달리 이제 아테네 해군은 질적으로 열세였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지휘권을 장군 8명에게 나누어 각자의 전역에서 유기적으로 적을 상대하게 하고, 스파르타 함선이 기동성을 발휘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함대를 2열 횡대로 두텁게 배치하였다. 그런데 수적 열세에 있던 스파르타 해군이 이런 아테네 전술에 닥돌해 주면서, 아테네는 고작 25척을 잃으면서 적함 70척 가량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어 일시적으로 다시 해상 지배권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전투 직후 폭풍이 몰아치면서 아테네 해군은 생존자 구조와 시신 수습마저 포기하고 철수해야 했고, 이로 인해 스파르타의 잔존 병력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 사회의 전통에서 전투 이후 생존자 구조와 시신 수습은 필수불가결한 것이었고, 이를 방기했다는 사실에 분노한 아테네 시민들은 재판을 열어 장군 8명 중 6명을 처형해버렸다. 이때 처형당한 이들 중에는 페리클레스의 아들인 페리클레스 2세도 있었는데[34], 첫 전투를 승리로 마치고 나자마자 이렇게 사형당했다. 이 조치가 상당히 문제였던 것이, 스스로 유능한 지휘관들을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아테네 지휘관들은 큰 책임을 질 만한 일을 하지 않으로 소극적으로 굴었기 때문에 패전에 일조하였다.

한편 이 전투의 패배에 놀란 스파르타와 동맹국 내에서 리산드로스를 복귀시키라는 여론이 강해졌는데, 리산드로스의 정적들은 그의 복귀를 막기 위해 좋은 조건으로 아테네에 휴전을 제안하였으나 아테네는 이를 거절하였다. 결국 리산드로스는 실질적 지휘권을 차지하는 '부'사령관으로 복귀하였고, 페르시아의 키로스 왕자의 후원을 통해 해군을 재건시켰다. 스파르타 함대는 아테네의 무역로를 끊는 동시에 위협적인 아테네 함대를 사모스 섬의 기지에서 끌어내기 위해서 에게해 연안의 아테네 동맹시들을 공격하여 파괴하였고 심지어는 아테네 근방에 상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테네 해군의 지휘관들은 아르기누사이 해전 이후 소극적으로 행동하였고, 계속해서 리산드로스보다 한발 늦었다. 이를 이용해 리산드로스는 아테네 해군을 교묘히 따돌리고 아테네 식량 공급선의 목줄을 쥐고 있는 헬레스폰토스 해협까지 안전하게 내달릴 수 있었고, 이를 뒤늦게 알고 놀란 아테네 해군이 이를 쫒아 아이고스포타모이로 오게 되었다. 기원전 405년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아테네 해군은 나흘간 스파르타 해군에게 싸움을 걸었으나 리산드로스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리고 닷새째 되던 날, 스파르타군이 전투 의지가 없다고 지레짐작한 아테네군이 분산되자, 이 틈을 타고 리산드로스는 신속하면서도 전면적인 기습을 가해서 우왕좌왕하는 아테네 해군을 괴멸시켰다. 이 전투에서 아테네는 168척의 함선을 잃었고 고작 12척만이 코논의 지휘하에 탈출하였다. 아테네 해군이 완전히 붕괴된 것이었다. 이때 알키비아데스가 리산드로스의 전략을 간파하고 적절한 전략을 제시했는데 아테네 지휘관들이 거절한 것도 원인이 됐다.

이제 아테네의 패전은 피할 수 없게 됐지만, 전쟁에서 패배할 경우 10여 년 전 자신들이 멜로스에서 했던 대로 스파르타가 아테네에 인종청소를 자행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 아테네는 수륙으로 포위된 상황에서도 6개월을 더 버텼다. 애초에 아테네인들이 자발적으로 저지른 학살이라 똑같이 당해도 할 말도 없었고, 테베와 코린트도 명분이 있으니 갈아버리자고 했다. 그러나 장기전에 지쳐 있던 스파르타는 테베 견제도 겸해서 아테네를 존속시키기로 결정. 항복하고 패권을 넘기면 대신 아테네의 국체와 국민들의 안전은 보장하겠다고 약속하자 기원전 404년 마침내 항복하였고 27년에 걸쳐 벌어졌던 전쟁이 막을 내렸다.

7. 전쟁 이후

7.1. 평화 협정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이 아테네를 완전히 초토화하고 노예로 팔려갈 것을 두려워했고 테베와 코린트 등은 실제로 그렇게 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애초에 국체와 국민은 지켜준다는 조건으로 항복을 받아냈으므로 이런 요구를 거절했고, 대신 아테네에 다음과 같은 요구를 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가 보유했던 제국을 손아귀에 거머쥐어 그리스 세계의 슈퍼파워로 등극하나, 스파르타의 특성상 페르시아의 지원 없이는 대규모 함대를 유지할 수 없었고, 페르시아의 영향이 세져 버렸다. 이를 무리한 공물 징수로 극복하려 하였으나 반발을 사서 결국 제국을 상실했다.

결론적으로 승리하고도 손해를 본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동맹 입장에서는 사실상 피로스의 승리다.[35] 그리고 스파르타가 승리함으로써 페르시아는 이오니아 일대의 지배권을 다시 얻는 데 성공했다. 산중 농사지어 고라니 좋은 일을 했다는 속담처럼, 어찌 보면 페르시아만 앉아서 덕을 본 셈이다. 그 이익은 이후 페르시아와 스파르타 모두를 정벌하러 들어올 마케도니아에게로 고스란히 넘어갔다.

7.2. 전쟁 이후

기원전 404년 전쟁에서 패배한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강요로 함대, 제국, 장벽, 민주정을 잃었다. 그러나 아테네는 딱 1년 만에 스파르타를 견제하고자 했던 테베의 은밀한 지원 하에 민주정을 복구했다. 이후 코린트 전쟁(기원전 395~기원전 386) 동안 페르시아의 지원 속에 함대, 제국, 그리고 장벽을 되찾고 다시 강대국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테네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페르시아가 아테네의 지나친 확장을 저지하였고, 한편으로는 돌아온 아테네 제국에 반발한 동맹국들이 들고 일어나서 동맹시 전쟁을 겪어야 했다. 전쟁 이전 아테네 민회에 참석할 수 있었던 시민 4만여 명은 전쟁 직후 1만 5천 명으로 감소했고, 코린트 전쟁 이후에도 고작해야 2만 5천 명 정도까지 복구되었을 따름이었다. 민회에 참석할 수 없는 일반인들의 피해도 컸다고 한다. 그나마 본토가 전쟁터가 되지 않아서 여성 인구 감소는 크지 않았으나 한번 상실한 패권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지역강국으로 제자리 걸음을 하다가 로마 제국이 들어오자 자치권 유지를 조건으로 항복했다.

스파르타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과거 아테네의 영역을 흡수하여 제국을 구성했지만, 이는 스파르타 입장에서는 오히려 독이었다.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군대가 필요했고, 스파르타 완전시민 수천 명으로는 어림도 없었기 때문에 대군을 육성해야 했다. 그리고 대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제력이 필요했는데 스파르타 자체적으로는 한계가 명백해서 여기저기서 잔뜩 상납을 받았다. 이렇게 거두어들인 공물은 제국 구성원의 반발을 샀고[36], 제국에서 들어오는 부는 스파르타의 내부의 계층 분화를 가속화시켜 국가체제에 상당한 위기를 안겨 주었다. 이에 더해 기원전 398년 과도한 확장욕으로 벌인 이오니아 원정은 초반에는 페르시아를 상대로 계속된 승리를 거두면서 성공하나 했지만, 위기에 몰린 페르시아가 코린트, 아르고스, 테베, 그리고 아테네를 설득하여 그리스 본토에 반 스파르타 동맹을 결성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기원전 395년부터 9년간 벌어진 코린트 전쟁에서 스파르타는 지상전에서는 적을 압도했으나 해전에서는 초반부터 대패를 당해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했고, 결국 이오니아 전역을 포기하는 것을 대가로 페르시아를 끌어들여 평화를 간청해야 했다. 원래 그리스의 동맹은 페르시아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이루어졌던 것인데, 스파르타가 이렇게 이오니아 지역의 그리스계 도시들을 페르시아에 넘기면서 그리스 동맹의 수장으로서의 대의명분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그 뒤에 또 다시 테베와의 전쟁이 발발하였고, 기원전 371년 레욱트라 전투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하면서, 스파르타는 패권을 상실하였다. 이후 테베가 남하하여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여러 차례 원정을 오는 것은 아테네가 이번에는 스파르타와 손을 잡으면서 막아냈으나, 테베가 스파르타에 헤일로타이로 종속되어 있던 메시니아를 해방[37]시켜 스파르타를 반조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만큼은 저지하지 못하였다. 그래도 자체 역량도 상당해서 아테네처럼 역시 버티기에 성공했지만, 이로 인해 이후의 역사에서 스파르타는 지역 강국 정도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아이러니한 건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이렇게 주목받는 짓을 안해서 오히려 이후 무사할 수 있었다는 거지만.

그러나 테베도 그리스 전체의 패자가 되진 못했다. 기원전 362년 테베의 펠로폰네소스 원정 중에 벌어진 만티네아 전투에서 에파미논다스를 비롯한 다수의 장군들이 전사하면서[38], 에파미논다스 개인의 능력에 의존하던 테베로서는 패권을 유지할 수 없었다.

한편 북쪽에서 기회를 엿보던 마케도니아 왕국 필리포스 2세가 왕위에 오르자, 군제개혁을 통해 강력한 군대를 육성한 뒤, 몰락해가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차례차례 짓누르더니 마침내 기원전 338년 그리스 연합군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대파하면서 그리스 전체를 손에 넣었다. 필리포스 2세가 죽자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마지막 저항이 일어났지만, 필리포스 2세의 후계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분쇄되었고, 테베는 본보기 삼아 기원전 335년 완전히 파괴되며 다시는 예전처럼 번창하지 못했다.

페르시아는 코린트 전쟁으로 이오니아 일대의 지배권을 수복하나, 크세르크세스 1세 사후에 일어난 정치적 혼란에 빠져 그 이상 나아가지 못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정복당했다.

8. 육상의 스파르타 vs 해상의 아테네?

흔히 이 전쟁을 두고 육상 전투력이 강력한 스파르타가 해군력이 강력한 아테네를 정복했다는 해석이 대중적으로 크게 유행하는 편이지만, 이 전쟁의 흐름은 그런 마초적인 픽션들과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현대의 냉전 및 민족 내전과도 유사하게도 더 온건한 외교를 성공하고 민주적인 방향성으로 사회를 개혁하는 국가만이 승리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이 전쟁의 초반에는 스파르타가 육상 전투에서 아테네한테 쳐발리는 상황이 많았다. 심지어는, 그리스 최강이라는 스파르타의 완전시민(스파르티아이) 군인들이, 그것도 아테네의 정예 보병들이 아니라 가난한 경보병 따위한테 치욕적인 패배를 경험했다. 스파르타는 이 전쟁의 초반에 완전시민으로 구성된 중보병들이 아테네 경보병에게 패배할 때마다 국가 내부에서 사회적인 위기와 노예들의 반란이 벌어졌기 때문에, 스파르타가 자랑했던 육군들은 완전시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 전투 자체를 회피하는 상황도 종종 벌어졌다. 이와 반대로, 아테네는 경보병들이 전투 경험을 쌓으면서 기존처럼 중장보병이 될 수 있는 부자들이 아닌 가난한 시민들도 전쟁으로 돈 맛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자, 신흥 경보병 계급들이 민첩한 페르시아식 전술에 익숙해지고 그리스식 보병 전술에도 뛰어난 베테랑 전사로서 성장하면서 스파르타의 느려터진 완전시민 보병들을 상대로 번번이 이기는 상황까지도 종종 펼쳐졌다.

스파르타의 군인들은 패배하면 무조건 죽어야 했다. 그런데, 스파르타가 자랑했던 완전시민 보병들은 아테네가 페르시아에서 약탈 전쟁을 벌였던 시절에 경험을 쌓으며 살인 머신으로 성장했던 아테네 경보병들의 민첩한 전술을 만나면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여러 번 털렸다. 이 때문에, 본래의 법률대로라면 패배했던 스파르타 완전시민들은 포로로서 사로잡혔다는 죄목으로 집단 처형을 해야 했지만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스파르타 완전시민 계급의 특권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발생했고, 스파르타에게 인간 가축으로서 사육당했던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노예 도시들의 반란이 발생하며 스파르타 사회 전체가 개판이 되었다.

애초부터 스파르타의 군대는 전면전에서 싸우는 군인을 육성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들이 사는 식민 도시의 민간인들을 학살하면서 깡패국가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한 전사 중심의 육성 시스템이었다. 즉, 스파르타 군대가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전까지 그리스 최강의 육군이라는 위상이 드높았던 이유는 이러하다. 스파르타는 중세 아메리카의 아즈텍 제국처럼 다수의 노예 식민 도시들을 무력으로 잔인하게 통치해야 하는 사회구조였고, 다른 그리스 국가들과는 달리 평소에도 전문적인 육군 체제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병영국가라서 단순히 가용병력이 많았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페르시아 전쟁과 펠레폰네소스 전쟁 이후에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스파르타처럼 대규모 육군을 보유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전쟁 시점부터 스파르타의 실질적인 전투력은 다른 그리스 국가들과 차이가 없는 상태였다. 도리어, 아테네의 저렴한 경보병 전술에도 자주 깨진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스파르타의 군대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 규모가 상향 평준화된 다른 그리스 국가들과의 전투에서 유리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정상적인 군대를 만나면 허약했던 모습이 많았다. 스파르타 쪽이 이긴 전투는 대부분 인구수가 많은 동맹이 승리했을 뿐이라서, 스파르타의 변태적인 군대 제도는 전면전에서의 효율성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봐야 한다. 심지어 이 전쟁에서 스파르타가 이기기 시작한 것은, 전통적인 스파르타 전사 육성 방식과 보수적인 정치를 버리고 가난한 경보병 계급을 대접해주면서 국제 무역을 시작하고 병사들의 봉급을 올려주는 등, 실질적으로 아테네의 선진적인 시스템을 흉내내는 대대적인 사회제도 개혁을 시작했던 이후였다.

결과적으로, 이 전쟁의 승패는 (1) 페르시아라는 적대적인 거대 제국과의 경제 교류 (2) 그리스 도시들과의 친목질 외교 (3) 해군의 지속력 같은 전형적인 외교력 요인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즉,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모두 주변 국가들과의 경제 무역을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느냐, 누가 더 많은 친목질을 유지할 수 있느냐 라는 외교력 전쟁이었다.

문제는, 똑같은 외교력 vs 외교력 싸움이 되자, 오히려 아테네 쪽이 더 돈이 많은 페르시아와의 적대관계를 유지하느라 장기적으로는 더 큰 손실[39]이 났고,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와의 대규모 무역을 성공하고 아테네에게 괴롭힘을 받은 그리스 동맹국들을 달래주면서 친목질 외교에서 더 큰 경제 이득을 보았다. 즉, 해양 국가 아테네 쪽이 국제 무역 및 외교에서 일방주의적 횡포를 일삼자 경제적으로 더욱 큰 피해를 입고 자멸했던 것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실체였다.

이처럼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육상국가 스파르타는 육상전투에서 아테네의 수많은 경보병 계급에게 박살난 충격으로 아테네의 장점이었던 해군 및 무역 전성기를 열심히 흉내내며 승리했다. 이와 반대로, 해양국가 아테네는 육상전투에서 스파르타를 쫓아낸 이후 유아독존식 해양제국으로 돌변하여 본인들의 장점이었던 국제 무역과 외교를 말아먹고 경제적 왕따가 되면서 스스로 자멸했다. 즉, 일반적으로 퍼진 각 국가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행동 및 결과로 끝난 전쟁이다.

각 전쟁 국가의 주요 흐름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9. 기타


[1] 스파르타의 국유 노예. 대대로 노예 신분을 물려받았고 농업에 종사하며 스파르타에 수확물을 바쳤다. 기원전 4세기 기록에 따르면 헤일로타이 인구는 스파르타인의 7배 수준이었다. 이런 헤일로타이의 거듭되는 반란은 스파르타가 군사국가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2] 성벽이 없다면 스파르타의 강력한 육군을 막아낼수 없으므로, 이는 스파르타의 패권을 인정하라는 뜻이다. [3] 이 사건은 친 스파르타 정치인이었던 키몬의 경력에 큰 오점이 되었다. [4] 사실 메가라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도 코린트 지협을 봉쇄할 수 있었을지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갈린다. [5] 지역 맹주로 테베가 있고, 플라타이아이 또한 이곳에 존재했다. [6] 이후에 클레안드리다스는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도주했고 왕은 망명하였다. [7] 투키디데스, 천병희(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1권 24~26장 [8] 에피담노스를 창건한 코린트인들에게 도시를 맡기고 그들에게서 도움을 구해야 하는가 하고 질문하자, 코린트인들에게 도시를 맡기고 그들을 길잡이로 삼으라는 신탁을 받았다. [9] 투키디데스, 천병희(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1권 24~26장 [10] 투키디데스, 천병희(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1권 29~31장 [11] 투키디데스, 천병희(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1권 44~55장 [12] 투키디데스, 천병희(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1권 56~57장 [13] 하지만 얼마 뒤 휴전조약을 깨고 포테이다이아군을 지원했다. [14] 투키디데스, 천병희(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1권 58~65장 [15] 비유를 하자면 한국군 vs 일본 자위대의 구도와 비슷하다 볼 수 있다. 다만 위에 적힌 건 통념이고, 많은 인구의 아테네 육군이나 페르시아의 자금지원을 받은 스파르타 해군 등도 강성했다. [16] 이 병은 소위 아테네 역병이라고 불린다. 참고 정체는 불분명한데 집단 무덤을 조사한 학자들은 티푸스로 추측하고, 이외에도 장티푸스, 천연두, 탄저병 등 다른 여러 질병들도 후보군에 올랐다. 대강 한 종류의 전염병뿐만이 아니라 서른 가지쯤 되는 다양한 전염병이 아테네를 강타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증상으로는 고열, 기침, 구토, 구토 반복 후 공복 상태의 위경련, 기력 저하, 재채기와 기침, 출혈과 구취로 이어지는 인후염, 음성 상실, 극도의 갈증, 나은 후에도 이어지는 실명 등의 후유증 등이 있었다. 아테네 역병의 창궐 시기를 저술한 투키디데스도 해당 시기에 이 역병을 앓았다가 살아남았으며 다른 사람들이 역병에 걸려서 어떻게 죽어가고, 역병 창궐 동안 아테네 사회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직접 체험했기에 그 기록을 현장에서 담아서 후대에 남겼다. [17] 학자에 따라 2/3까지도 추정하기도 한다. [18] 스파르타는 헤일로타이 중에서 자유와 상금을 주는 댓가로 지원자를 모집해서 조금이나마 계속 식량을 전달할 수 있었다. 헤일로타이들은 순풍이 불 때 펠로폰네소스 어디에서든 출항하여 아테네 삼단노선을 따돌리고 스팍테리아 섬으로 거의 돌격하듯 상륙하여 보급을 댔다. 몇몇은 아예 밀봉한 보급품들을 들쳐 매고 잠수하여 갔다고 한다. [19] 사실 클레온은 훌륭한 아가리 파이터였긴 했지만 전쟁 경험이 전무했다. [20] 당시 고대 그리스에서 중장보병이 수비하고 있는 해안가에 상륙하는 것은 숫적인 우세가 있다고 하더라도 매우 어려운 일로 여겨졌다. [21] 이 전투는 소크라테스가 병사로 참전한 전투이기도 하다. 40대 나이에도 전투에 참여해야 했던 경험이 소크라테스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22] 헤르메스 흉상이 새겨진 직사각형 돌기둥.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긴장과 헤르마 훼손이 어우러져 탄생한 아테네인들의 강박은 아테네인으로 하여금 소크라테스의 신성모독 사건에 크게 분개하게 하였다. [23] 이 때까지는 아직 궐석재판이 열리지 않아 알키비아데스도 망명하지 않고 사령관으로 있었다. [24] 참고로 귈립포스는 앞서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뇌물 수수로 사형을 선고받고 도주한 클레안드리다스의 아들이다. 이번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뒤 귈립포스는 해군 사령관 리산드로스의 명에 따라 남은 자금을 국가에 바치는 일을 맡게 되는데, 유혹을 참지 못하고 상당수를 착복했다가 발각되어 추방당했다. [25] 아테네 시는 데모스테네스의 지원군을 충당하기 위해 각 동맹국에도 지원 요청을 보냈는데 트라키아의 디오이족 경보병 1300여 명은 늦게 도착하여 시칠리아로 떠날 수 없었고 아테네에선 이들을 붙잡아 두면 자신들이 경비를 대줘야 하기에 디에이트레페스의 인솔로 돌려 보냈다. 이들은 귀환길에서 한 가지 범죄를 저질렀다. 내륙의 작은 도시 미칼레소스로 쳐들어가 약탈과 학살을 벌여 주민 대부분을 도륙해 버린 것이다. 남녀노소 구분이 없었고 학교까지 쳐들어가 아이들을 살육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테베에서 구원군이 달려와 이들을 쫓아냈지만 이미 미칼레소스는 완전히 파괴된 뒤였다. [26] 당시 아테네에서 패전한 지휘관이 처벌을 받지 않은 예는 매우 극소수에 불과했다. 많은 이들이 사형을 당하거나 운이 좋으면 추방을 당했다. [27] 이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장면인데, 플라톤의 대화편 중 < 라케스>에서 니키아스는 소피스트에게 교육을 받은 매우 교양 있고 논리정연한 사람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화편에서 그는 예언가들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어리석은 일이라며 비판한다. 플라톤 당대에는 니키아스가 미신에 의존하다 죽었음이 잘 알려졌을 터, 이렇게 이론과 교양을 중시하는 사람이 미신에 빠져 죽었다는 역설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묘사하려는 의도로 이렇게 캐릭터를 구성한 모양. [28] 당시 월식에 대해 역사가 필로코로스는 다른 해석을 했다. 도주하려는 자들에게는 달빛이 가려진 것이 오히려 길한 징조라는 것이다. [29] 알키비아데스는 이후 스파르타에서도 정적을 만들어 페르시아로 망명했다가, 아테네에 과두 정권이 들어서자 다시 아테네로 돌아갔다. [30] 플루타르코스-니키아스 전에서 발췌. [31] 월급 안 받고 정치를 한다는 건 본인이 부자라는 뜻이다. 공무원 월급은 가난한 사람이 공무만 보면서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다. [32] 알키비아데스에게는 억울한 것이 이 전투는 사실 알키비아데스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그의 부관 안티오코스에 의해 벌어졌다. [33] 이 행위 덕에 리산드로스는 덤으로 키로스의 호감도 얻었다. [34] 페리클레스와, 대단히 총명하기로 이름 높았던 그의 연인 아스파시아 사이의 아들이다. 아스파시아가 아테네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원래 페리클레스 2세는 아테네 시민권을 가질 수 없었다. 양친이 모두 아테네인인 사람에게만 시민권을 주도록 하는 법안을, 페리클레스 본인이 제정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리클레스가 자신이 만든 법을 스스로 거스르는 것을 감수하며 페리클레스 2세에게 시민권을 주었다. 이는 아테네 역병 시기에 페리클레스가 이혼한 전처와의 사이에서 뒀던 두 적자를 모두 역병으로 잃은 뒤의 일로, 마지막 남은 자식인 페리클레스 2세가 적법한 상속자가 될 수 있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페리클레스 본인 또한 이 조치를 취해 두고 오래 못 가서 역병으로 죽었다. [35] 다만 피로스의 승리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는 전투는 후대의 헤라클레아 전투이다. [36] 아테네가 거두어 들이던 양의 2배나 거둬들인 데다 아테네에서는 그나마 폴리스 시민들을 잘 설득이라도 할 여지가 있었지만, 스파르타 독재자들은 국민여론 따위 신경 안 썼다. 타 폴리스들 입장에서는 여우를 몰아내니 호랑이가 들어온 셈이다. [37] 스파르타가 메시니아를 멸망시키지 않고 명목상으로 존속시킨 게 이 때 함정으로 작용하는데, 테베는 스파르타의 영토를 강탈하는 게 아니라 스파르타가 독립국가 메시니아의 주권행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게 방해하므로 테베가 도와준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38] 전투 자체는 테베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스파르타의 전투 목표가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적의 지휘부를 사살하는 것이었기에, 스파르타도 전투의 승리를 선언하였고, 후일 테베의 몰락을 보면 결국 만티네아 전투는 스파르타의 전략적 승리가 맞았다고 볼 수 있다. [39] 초반에는 아테네가 제국주의 패권국마냥 페르시아와 다른 그리스 도시들을 약탈하여 돈을 엄청나게 많이 벌면서 그야말로 바다를 지배하는 최강의 아테네 제국이 탄생했다. 그런데 아테네가 군사력으로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몇 번씩 패배하여 인구수를 잃기 시작했고, 그때까지 당했던 피해 국가들이 군사력의 공백이 찾아온 아테네에게 집단적으로 경제적 보복을 하기 시작하여, 장기적으로는 국제 무역이 분쟁과 대립보다 훨씬 크고 안정적인 이득을 선물한다는 교훈만 남겼다. [40] 전쟁이란 것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반의 아테네처럼 육상과 바다 모두 최강의 군사력을 갖추더라도, 결국 언젠가 한번은 패배하여 군사력과 경제력에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다. 당연히 흔들리기 시작한 아테네의 경제와 군사를 결정적으로 돌이킬 수 없게 만든것은, 부유한 페르시아와의 단절된 교류 및 아테네가 이웃나라들에게 횡포를 일삼기 시작하자 각 국가들이 불만을 표시하며 비협조를 시작한 것이다. 사실상 초반에는 아테네 쪽이 압승을 거뒀지만, 장기적인 승리는 제3국들과 외교관계를 좋게 유지한 스파르타가 거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