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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 시의 시가지. 하단의 건축물은 수양제 시절 지어져 최근 복원된 딩딩먼 (定鼎门, 정정문)이다.
중화인민공화국 허난성의 지급시 | |||||
[ruby(洛阳, ruby=Luòyáng)][ruby(市, ruby=Shì)] 뤄양시 | Luoyang Cit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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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부 소재지 |
허난성 뤄양시 뤄룽구 카이위안다다오228호 河南省洛阳市洛龙区开元大道228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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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중난 | ||||
면적 | 15,229.15km² | ||||
하위 행정구역 | 7구 7현 | ||||
시간대 | UTC+8 | ||||
인문 환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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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6,922,200명 (2020) | |||
인구밀도 | 450명/km² | ||||
HDI | 0.727 (2016) | ||||
서기 | 장링(江凌) | ||||
시장 | 쉬이셴(徐衣显) | ||||
GRDP | 전체 | $780억 5000만 (2020) | |||
1인당 | $10,232 (2020) | ||||
상징 | 시화 | 모란 | |||
시목 | 버즘나무 | ||||
차량번호 | 豫C | ||||
행정구역 약칭 | 洛 | ||||
행정구역코드 | 410300 | ||||
지역전화번호 | 0379 | ||||
우편번호 | 471000 | ||||
ISO 3166-2 | CN-HA-03 | }}}}}}}}} | |||
홈페이지 |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구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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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허난성의 도시. 한국에서는 한국 한자음을 한국식으로 읽은 낙양(洛陽)이란 이름으로도 많이 알려져있다.[1] 그외의 지명으로 낙읍, 동도 등이 있다. 동주 ~ 후당까지 13개 왕조가 도읍으로 삼고 8개 왕조가 제2의 수도로 삼은 역사 도시로, 중국 7대 고도 중 하나이다. 수도 역할이 아닐 때에도 관중과 하남 지방을 잇는 전략적 거점으로써 중시되었다. 지리적으로 싼먼샤와 정저우 사이, 황하의 지류인 뤄허 강의 양안 평야에 자리한다. 인구는 약 710만으로, 허난성 제5의 도시다.[2] 2021년 허난성에서 정저우에 이은 두번째 도시철도인 뤄양 지하철이 개통되어 관광이 한결 수월해졌다. 철도 교통이 원활하며, 시가지 북서쪽 외곽에 뤄양 베이자오 공항이 있다.유구한 역사를 증명하듯, 중세와 현대 시기 수많은 전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유적이 남아있다. 수당시대 낙양성에 위치한 현대의 도심에는 뤄양박물관, 세계문화유산인 실크로드: 창안-톈산 회랑 도로망의 일부인 낙양성 및 딩딩먼 (定鼎门 정정문) 유적, 주공묘 (周公庙), 관우의 머리가 묻힌 관림 (关林)이 있고 그 남쪽 외곽에는 주요 관광지이자 세계유산인 룽먼(용문) 석굴이 있다. 동북쪽 10km 지점 바이마스 진에는 중국 최초의 사찰인 백마사와 한때 유라시아 최고층 탑이 있던 영녕사, 후한-북위 시절 낙양성[3] 유적이 있다. 북서쪽 공항 근처에는 북망산의 일부인 북위 선무제의 능과 그 옆에 들어선 낙양예술박물관[4]이 있다. 그외에 동남쪽 35km 지점의 숭산과 소림사, 서북쪽 15km 지점 신안현의 함곡관 (한관) 등의 유적이 있다.
2. 지명의 유래
황하의 지류인 낙수(洛水)가 남쪽에 흐르고 있기 때문에 원래는 '낙(洛)'이라고만 불렸다. 수로를 이용한 교통이 편리하고, 사방이 평야였기 때문에 농업생산력도 뛰어났는데, 이렇게 좋은 입지조건들로 인해 고대부터 유명했다. 중원의 중심으로 예로부터 구주지복지(九州之腹地, 중화 9주 중에서도 배에 해당하는 지역)이라고 불렸다. 이후 주나라( 서주) 때 수도인 호경(鎬京)의 별칭인 '종주(宗周)'에 버금가는 도시가 되어 '성주(成周)'로 불리다가 동주 때 수도가 되면서 낙읍(洛邑)으로 개명되었다.그리고 전국시대에 이르러 강의 북쪽 지역에 붙는 접미사인 양(陽)이 붙게 되면서 현재의 이름이 되었다. 심수(瀋水)의 북쪽이라 이름이 지어진 심양이나 한강의 북쪽 한양 등의 다른 도시들도 이와 같은 작명법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또한 강의 남쪽 지역에 붙는 접미사는 음(陰)이다. 때문에 회수(淮水)의 이남은 회음(淮陰)이라는 지명이 붙는데, 유명한 한신의 작위 회음후는 이 지역을 분봉받은 데서 온 것이다. 강은 산 사이의 골짜기, 고지대 사이의 저지대에 형성되는데, 중국이 위치한 북반구에서는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남쪽 하늘을 거쳐 서쪽으로 지기에, 일반적으로 강의 남쪽(산의 북쪽)은 산의 그림자가 생겨 음지가 되고 강의 북쪽(산의 남쪽)은 양지가 되기 때문.
사방 토지의 중앙이라는 뜻으로 '토중(土中)'이라는 별칭도 있었다.
여러 중국 왕조에서 가장 크고 번성한 도시이자 수도였기 때문에 한국에서 서울(서라벌)이라는 단어 처럼 낙양 자체가 수도를 상징하는 단어가 되어서 특히 고전 한시나 고전 작품등 에서 낙양이 매우 번성한 대도시의 대명사으로 쓰인다. 대박난 베스트셀러 책을 일컬어 "낙양의 지가(紙價)"를 올린다는 표현도 쓰일 정도. 즉 책이 많이 팔려서 많이 찍어내다보니 종이값이 오른다는 뜻. 국악 민요인 성주풀이도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아" 로 시작한다. 특히 인기높았던 중국의 시성 두보와 이백의 한시에 그들의 활동시기인 당나라 시대에 가장 번성한 도시인 낙양이 수도인 장안과 함께 자주 등장하고 또한 인기높은 삼국지연의에서도 후한과 위나라의 수도로 등장하여 지명도가 높다. 현대 한국에서 미국 ' 뉴욕'이란 도시 이름이 가진 위상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비슷하게 현재의 시안시(西安)인 장안(長安)도 '번영하고 큰 도시' 이라는 뜻을 가지게 되어 '장안의 화제(話題)가 되다'라는 말도 있다.
3. 지형
뤄양과 주변부의 지형 |
일단 지형의 조건이 상당히 특이하다. 도시와 평원을 둘러싼 산악지대가 원형의 성벽처럼 둘러싸고 있다. 북쪽의 산악 지역을 '망산', 또는 ' 북망산'이라고 불렀는데, 이 지역에 과거 공경이나 왕후의 무덤이 많이 만들어져 훗날 저승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된다.
북쪽에는 황하, 남쪽에는 낙수와 이수가 흐른다. 게다가 서쪽 방면의 산악지대는 대규모라서 통로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다. 서쪽에 통로라고는 신안과 의양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알다시피 신안은 그 유명한 신안대학살이 일어난 장소이며 의양에서는 전국시대 진나라의 뤄양 진출을 막기 위해 저항하던 한나라 군대와 백성들이 몰살당했다. 이러한 지리조건때문에 주변지역에서 뤄양으로 오려면 황하를 타고 낙수로 진입하든지, 아니면 동쪽 산악지대에 있는 호로관 (사수관) 같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서쪽은 함곡관으로, 여기서 중원과 관중이 구별된다. (참고로 함곡관은 두 개가 있다.)[5][6] 한마디로 말해서 방어하기 편리한 곳 치고는 교통사정도 좋다는 이야기다.
4. 역사
얼리터우 유적 박물관
중국의 여러 도시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곳이다. 선사 시대부터 중원 지방의 주요 신석기 문화 중 하나인 얼리터우 (二里头, 이리두) 문화의 중심이었다.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때는 전설적인 하나라 시기이며, 그 후로 장안과 함께 중국의 양대 도시로 성장했다. 그래서 역사가 4천 년 정도 될 정도로 굉장히 오랜 도시다. 역사가 사마광은 이렇게 말했다. '고금의 흥망성쇠를 알고 싶다면, 낙양성에 한 번 가보라'.
4.1. 화려한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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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주(雍州) |
옹주(雍州)→경조군(京兆郡)* · 동주(同州)→풍익군(馮翊郡)48 · 기주(岐州)→부풍군(扶風郡) · 경주(涇州)→안정군(安定郡) · 영주(寧州)→북지군(北地郡)49 · 부주(鄜州 또는 敷州)→상군(上郡) · 수주(綏州)→조음군(雕陰郡)50 · 연주(延州)→연안군(延安郡)51 · 경주(慶州)→홍화군(弘化郡)52 · 원주(原州)→평량군(平涼郡) · 하주(夏州)→삭방군(朔方郡)53 · 염주(鹽州)→염천군(鹽川郡) · 영주(靈州)→영무군(靈武郡) · 승주(勝州)→유림군(榆林郡) · 풍주(豐州)→오원군(五原郡) · 진주(秦州)→천수군(天水郡) · 위주(渭州)→농서군(隴西郡) · 난주(蘭州)→금성군(金城郡) · 하주(河州)→포한군(枹罕郡)54 · 곽주(廓州)→요하군(澆河郡) · 선주(鄯州)→서평군(西平郡) · 양주(涼州)→무성군(武威郡) · 감주(甘州)→장액군(張掖郡) · 과주(瓜州)→둔황군(敦煌郡) · 선선군(鄯善郡) · 차말군(且末郡) · 하원군(河源郡) · 이오군(伊吾郡) 48 옹주 내의 화주(華州) 영토 일부와 합쳐졌다. 49 옹주 내의 빈주(豳州) 영토 일부와 합쳐졌다. 50 옹주 내의 은주(銀州) 영토 일부와 합쳐졌다. 51 옹주 내의 단주(丹州), 하주(夏州) 영토 일부와 합쳐졌다. 52 옹주 내의 홍주(弘州) 영토 일부와 합쳐졌다. 53 옹주 내의 장주(長州) 영토 일부와 합쳐졌다. 54 옹주 내의 민주(岷州) 영토 일부와 합쳐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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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각주 | |||||||||
→ | 수나라 전기 대업 이전까지는 주현제였다가 이후 군현제로 바뀌었다. | ||||||||
※ | 수나라 후기 3수도제(삼경)에 속한 도시 중 하나였다. | ||||||||
* | 남북조시대부터 있었으며 수나라 초기에도 유지되었다. | ||||||||
** | 무주(武州)는 형주와 량주 모두 해당되었으며, 무도군(武都郡)은 량주(梁州)에 속했다. | }}}}}}}}} |
후한 명제 11년 (서기 68년)에 세워진 백마사. 중국 최초의 사찰로, 뤄양에서 과거의 모습이 온전히 남은 몇 안되는 유적 중 하나다.
룽먼석굴의 봉선사동. 당나라 대에 조성되었다.
일단 워낙 입지 조건이 좋아서, 무려 13개 왕조가 1,586년 간 이곳에 도읍을 정했다. 주요 왕조로는 9개이기에 "9조고도(九朝古都 -9개 왕조의 도읍)"라고도 한다. 대충만 따져봐도 일단 (전설 속의)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동주), 후한, 위, 서진, 북위, 수나라[7], 5대10국의 후량 등이 된다. 여기에 측천무후의 무주(주나라)와 오대십국시대의 후당도 뤄양을 수도로 삼았다. 제2수도 격이 된 것도 서주, 전한, 전진, 후진, 수나라( 수문제), 당나라, 송나라 등 무려 여덟 왕조가 있었다.[8]
뤄양의 '뤄'은 낙수에서 따온 말인데, 주공단이 낙읍을 경영하던 시기부터 낙수 락(洛)과 부엉이 락(雒)은 혼용되고 있었다. 지금 洛으로 고정되는 변천 과정은 오행설에 따른 것이다. 진나라는 오행 중 수덕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천하를 통일한 후에 낙수 락 洛陽을 정식 명칭으로 둔 반면, 화덕을 숭상한 한나라는 물수변이 들어간 洛을 떼고 뤄양(雒陽)으로 개명해서 사용했다.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은 위나라는 토덕을 받들었기에 물이 흙을 살려준다는 오행상생설에 따라 도로 洛으로 되돌리고 이를 고정시켰다.
동주 멸망 후 한고조 유방도 처음에 이곳에 도읍을 정하려다 장안으로 정했다. 한고조가 낙양을 수도로 정하려다 장안을 수도로 정한 경위는 유경 문서 참조. 그러다 후한 시절 광무제가 이곳에 도읍해 2백 년을 지낸다.
하 ~ 수·당 시대 도시 유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현대 도심인 수당시대 도성, 백마사 관광지인 후한-북위 시대 도성
후한대 낙양성의 성벽 유구
당시의 낙양성은 현 뤄양 시가지의 동쪽에 있었다. 크게 동주, 후한-위, 수-당의 낙양성이 각각 구분된다. 지금의 낙양은 마지막 수당시대의 낙양성. 후한 당시의 낙양성도 지금의 뤄양의 일부지만 지금의 중심지보다는 약간 동북쪽에 있었으며(위의 지도상으로는 뤄양 시와 옌스 시 사이), 지금의 뤄양 자리에는 하남현이 있었다고. 비슷한 예로 왕십리와 신촌(무악)이 지금이야 서울이지만, 과거엔 도시의 구획이 더 작았다.
후한 말기 동탁이 반동탁연합군을 피해 뤄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뤄양은 초토화가 된다. 거기다 조조가 도성을 허도로 옮겼지만, 허도는 임시수도였을 뿐 곧 뤄양 복구를 시작했다. 이후 조조는 자신의 말년을 뤄양에서 보내다가 사망하였고 조비가 즉위해 위나라가 세워지자 다시 뤄양을 도읍으로 잡았으며, 허도는 허창이란 이름으로만 우대받았을 뿐 수도의 기능은 상실되고 모두 뤄양으로 이주되었다. 조비와 조예가 낙양에 화려한 전각들을 세우면서 뤄양은 곧 수도의 위엄을 되찾았다. 이 때문에 아직까지도 이곳 주민들은 동씨를 매우 싫어하는 반면에, 조씨는 대우해 준다.
파일:중국 관우 3.jpg
관우의 수급이 묻힌 관림 (關林). 관묘의 원조격으로, 매년 수많은 삼국지 매니아 및 관우 숭배자들이 찾는다.
뤄양은 위나라 멸망 후 통일 왕조 서진의 수도가 되었으나, 회제 때 침략을 받아 불태워졌다. 당시 낙양은 전조의 유총과 그 부하들에 의해 약탈되었는데, 2만명이 학살되었고 황궁은 전소하였으며 황릉은 도굴되었다. 이로써 조위 ~ 서진 시기 한세기간 재건되었던 뤄양은 또다시 잿더미가 되었다. 이어진 5호 16국 시기 뤄양은 수차례 전장이 되었다. 328년 석륵이 낙양 전투에서 유요를 격파하여 그를 사로잡은 후, 더 나아가 전조를 멸하고 후조를 세운다. 3세기 후반 뤄양은 염위 (冉魏), 전연, 전진을 거쳐 후진의 영토가 되었다.
416년 겨울 유송의 북벌 당시 부관 단도제의 활약으로 한세기 만에 한족 왕조가 수복했으나 422년 북위의 명원제 탁발사가 점령했다. 430년 유송의 우장군 도언지가 뤄양을 재차 수복했으나 439년 태무제 탁발도가 다시 점령했다. 이로써 화북 지방은 북위에 의해 통일되었고, 493년 한화 정책의 일환으로 효문제는 수도를 산서의 평성에서 하남의 낙양으로 천도했다. 북위 수도가 된 뤄양에는 성내에 1367개의 사찰이 세워지는 등 문화적으로 크게 번영했다. 그중에서도 영녕사의 목탑은 비록 18년에 불과하긴 했지만 기자의 대피라미드와 함께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로 명성을 날렸다. 북위 시기 재건되었던 뤄양은 532-34 영희 연간의 내란으로 다시 파괴되었다. 북위의 분열 후 뤄양은 본래 서위에 속하였으나 543년 망산전투 (邙山之戰)로 동위가 점령하여 북제 정권으로 이어졌으나, 577년 북주에게 점령되었고 얼마후 북주는 수나라로 개편되었다.
수나라 대에 건국문 (建國門)으로 세워져 당나라 대에 정정문 (定鼎門)으로 개칭된 딩딩먼.
수·당시대 황궁( 자미궁) 재현 단지
수문제가 중국을 통일한 뒤부터 뤄양은 '동도(東都)'로 불리며 수도 장안 다음으로 큰 도시가 된다. 이 시기에 뤄양이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수양제가 뤄양을 동쪽의 수도로 만들면서 현 위치에 화끈하게 토목 공사를 벌여 지은 것. 이때가 뤄양의 전성기라고 할 만하다. 수·당 시기 황제들은 장안과 뤄양을 오가면서 통치를 했다. 당시 세워진 시가지가 현재의 도심으로 이어진다.
특히 중당 시기 중국의 유일한 여자 황제에 오른 측천무후는 일시적으로 당을 폐하고 무주를 건국하며 뤄양을 수도로 삼았다. 이로써 뤄양은 한세기 반만에 제1수도가 되었지만, 705년 신룡정변으로 당이 복원되며 다시 장안에 수도 지위를 내어주었다.
측천무후가 지냈던 궁궐 만상신궁(萬象神宮)의 명당(중앙)과 천당(좌측)
현재는 수·당시대 황궁 재현 단지 내에 이렇게 재현되어있다.
현재는 뤄양- 시안(장안)에 고속철도가 깔려 있어서 4시간 남짓한 거리로 갈 수 있다. 약 500km 정도의 거리이다. 고속철도를 타고 가다보면 온통 평야지대임을 알 수 있는데, 고대에 뤄양과 시안을 잇는 이 지역은 엄청난 생산력을 바탕으로 중국의 중심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후 기후 변화, 과도 경작으로 인한 황폐화, 지속적인 전란의 피해, 지력의 상실, 본격적인 강남의 개발 등으로 인해 송대 이후 중심 지역에서 밀려나 변두리로 전락하게 된다.
4.2. 중세 : 쇠퇴의 시작
618년 이밀의 낙양 포위 당시 왕세충이 세운 주공묘. 주공 단의 수호 덕분인지 왕세충과 양통 정권은 수성에 성공한다.[9]
수나라 말기에 봉기한 양현감과 이밀은 후술할 낙양 방어의 단점을 과신해서 장안 공략의 중요함마저 내팽개치고 낙양을 공격하는 데 집착하다 실패하고 천하를 건 쟁패에서의 기선 잡기까지 놓쳐서 몰락하였다. 오래 버티기 힘들다고 해도, 역대 왕조의 수도 후보지로서의 입지는 괜히 얻어진 게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송나라 때는 서경(西京) 혹은 경락(京洛)이라고 부르며 우대하였다. 다만 송나라의 경우 수도를 대운하와 직결되며, 평야지형이지만 그물 같은 수로로 보호받을 수 있는 카이펑부를 선택한 것이다. 이에 따라 오대십국시대 때에 후당 왕조의 수도였던 것을 끝으로 송나라 이후부터는 수도로 된 적이 없었고, 여기에 정강의 변으로 인해 송나라가 경제력이 풍부한 강남 동부 해안으로 옮기면서 역사상에서의 비중은 줄어들었다.
요, 금, 원, 청을 비롯한 북방계 왕조들이 중원 대륙 진출의 요충지인 베이징을 본거지로 삼았다. 그래서 이 때부터 중국의 정치적 중심은 카이펑을 지나 동쪽으로 점차 옮겨가 관중-중원의 내륙 지대에서 베이징 일대에 정착했으며, 경제적 중심은 강남 동부 해안 일대로 옮겼다. 이렇게 된 이유는 정강의 변 이후 도시 파괴 및 축소, 인구 감소, 인근 섬서, 산서의 건조화로 인한 기후환경의 변화가 주된 원인이지만, 기후환경이 심각하게 변해서 농사가 힘들어진 장안에 비해서는 변화가 크지 않아 별 타격을 안 입은 낙양이 중심지에서 벗어난 가장 큰 이유는 내부 면적이 미묘하게 좁았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낙양은 보호받는 경지면적이 의외로 좁다. 장안의 것과 비교하면 1/5도 안 된다. 이는 만일 전쟁에서 포위당했을 때는 식량을 자체적으로 대량 조달하기 어려우므로 성 안에서 오래 버티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형상 주변의 평야지역에 돌출된 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이 주변 지역을 장악하기도 쉬운 편이다. 당장은 안전하지만 오래 버티기 힘든 곳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 수도로서의 역사도 길어서 주변 지형이 널리 알려진 탓도 크다. 수도권에 속하는 데다가 주요 관문이 평시에는 통행량이 많을 수밖에 없으므로 지형에 빠삭한 사람을 굳이 현지 주민에서 찾지 않더라도 쉽게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세에는 낙양을 차지하기 위한 전략이나 전술을 누구나 한 번씩은 연구하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도 정성과 심혈을 기울인 공격이 가해지므로 수비군이 버티기가 더 힘들어진다. 뤄양성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성에 대한 모든 정보, 군사적으로는 성의 첩보가 중국인들 전체에게 상시로 노출된 곳이었다는 점이다. 주로 외침을 받은 평양성이나 전략적 요충지에 성을 쌓은 대야성과 달리 뤄양은 주 나라 시절부터 시작하여 수나라, 당나라 시절까지도 중요 도시였기 때문에 지리적 이점으로 방어하기에는 너무 잘 알려진 도시가 되어버렸다. 전술적으로도 약점 하나만 파고들면 되는 공격측과 달리 수비측은 가능한 모든 약점을 철저하게 대비해야하기에 수비가 어려웠다. 공성전에서 공격측이 방어측 병력의 몇 배가 필요하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정공법의 이야기이며, 공격측이 성의 특징과 약점을 모두 파악한 상태에서 공격 방법을 골라잡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세 번째로, 남쪽 지형에 큰 틈이 있다. 다른 방위선은 강이나 관문으로 차단되지만, 남쪽 통로는 제대로 된 관문을 설치할 수 없을 정도로 통로폭이 넓다. 이 때문에 남쪽에서의 공격에 취약하므로 남북조시대에는 유유나 진경지처럼 명장이 이끄는 남조의 병력이 종종 낙양을 탈환해서 한동안 유지한 적이 많다.
네 번째로, 의외로 수비하는 데 병력이 많이 들어간다. 낙양은 낙양성만 수비하면 전부가 아니며, 앞서 말한 관문을 수비하는 데 상당한 병력을 할당해야 한다. 흔히 알려진 관문이 호로관 정도, 추가적으로 함곡관 신관 정도지만, 낙양에는 이 관문들 말고도 관문이 상당히 많다. 오히려 황하쪽 출입구인 맹진도 장악해야 하고, 맹진 등에 배치할 수군도 필요하다. 그리고 산맥 사이를 넘어올 군대에 대비하기 위한 예비군도 갖추어야 한다. 이런 것을 소홀히 하면 관문과 거점이 몽땅 함락되면서 낙양성이 포위당하는데, 이렇게 전개되면 구원군이 낙양으로 올 통로가 한정되는 데다가 적군이 점령한 관문 등을 활용해서 구원군을 차단하기 때문에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기 딱 좋다. 서진의 멸망 시에도 이런 약점이 작용했으며, 남조가 북조에게 낙양을 빼앗길 때에도 비슷한 과정이 전개되었다.
다섯 번째로, 하북지방과 관중지방에 각자 독자적인 정권이 수립될 경우, 위치상 끼어버리는 형태가 되어 전쟁터가 되기 딱 좋다. 당장 관중지방의 입장에서는 경계선인 동관이나 함곡관에서 조금만 더 전진하면 낙양을 차지할 수 있으며, 낙양을 점령하면 하북지방이나 다른 곳으로 갈 교두보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하북지방의 입장에서는 낙양을 차지하면 관중지방의 입구인 동관이나 함곡관을 공격할 수 있으며, 대치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상당수의 적 병력을 해당 방면에 묶어두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전조와 후조가 격돌할 때나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나누어질 때 같은 사태시 낙양이 전장터로 변해서 폐허로 변하는 일이 많았다. 동주 시절만 하더라도, 걸어서도 지척인 거리에 정(鄭)나라가 있고 진(晋)나라가 이웃해 있어 정나라와 진나라가 강성할 시기에 낙양은 그 사이에 끼어 위급한 상황이 되었다. 춘추시대에는 형식적으로나마 주나라를 천자국으로 존중해줬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주 천자의 권위가 결정적으로 떨어지게 된게 지척에 있던 정나라가 주나라 영토를 찝쩍거리다가 주 천자가 모은 연합군을 흠씬 두들겨 패주고 주왕에게 화살까지 맞춰버린 사건이었다. 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후한 말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동탁은 아예 낙양을 버리고 장안으로 천도하였고, 조조 또한 허도를 수도로 삼고 관도대전을 통해 원소의 세력을 분쇄함으로써 하북을 평정한 이후에야 세력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강남과의 접근성 문제가 있다. 당송 시기를 거치며 강남 지역의 경제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게 되는데 뤄양과 시안은 베이징이나 카이펑 등 후대의 수도에 비해 경제와 농경의 중심지인 강남과의 교통이 안좋았기 때문에 송대 이후로는 중요성이 많이 떨어져 일개 지방으로 전락했다.
금나라 대에 세워져 최근에 복원된 여경문
1175년 금나라 시절 세워진 백마사 제운탑
송대에 낙양은 창건자 조광윤의 출생지로, 서경(西京) 혹은 경락(京洛)이라 불리며 삼경(三京)[10] 중 하나로 중시되었다. 한편으로 낙양은 인종(송)~ 신종(송) 연간 사마광과 정호 정이 형제 등 보수파 사대부들 및 이학자들의 문화 중심지로 번성했으며, 왕안석 등 개혁파 사대부들의 거점이 된 수도 변량과 라이벌 구도가 있었다. (거자오광, 2013)
정강의 변으로 금나라 영토가 된 후로도 중경(中京)으로 지정되어 중요한 도시로 남았다. 다만 몽골-금 전쟁을 거치며 폐허가 되었고, 단평의 입락 시에 송나라 장수 서민자가 한세기 만에 무혈 수복했을 당시에는 굶주린 수천 인구만이 남아있었다. 인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한 1만 3천의 송나라 군대 역시 곧 군량미가 바닥나 쑥과 밀가루로 연명하였다. 이에 1만 5천의 제2군이 구원에 나섰으나, 용문에 매복하던 몽골군에게 기습당하여 대패하였다. 이후 낙양성 내에 있던 제1군 역시 성을 나와 낙수에 배수진을 치고 결사 항전했으나 식랑이 고갈되자 포위를 뚫고 도주하였는데, 도중 몽골군의 추격과 황하 제방의 붕괴로 인해 수백여 병사만이 남송 영토로 생환할 수 있었다. 그후 몽골 제국은 낙양을 완전 장악한 후 이어진 몽골-남송 전쟁의 기지로 활용하였다.
4.3. 근대
명청대에 세워진 고루와 옛 거리
놀랍게도 20세기에도 중국의 수도가 된 적이 있다. 1932년 1월 28일, 일본군이 마옥산 사건을 구실로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일으키자 1932년 1월 30일에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장기 항전을 위해 수도를 난징에서 뤄양으로 옮겼다. 5월 5일 송호정전협정이 체결되어 일본군이 철병한 후 12월 다시 난징으로 환도했으며 이것이 아마도 뤄양이 중국의 수도가 된 마지막 사건일 것이다. 경제 중심이 전부 장강 이남과 동부 해안으로 옮겨간 지금은 수도를 옮길 일이 있어도 아마도 충칭으로 갈 것이므로 뤄양으로 갈 일은 없을 것이다. 중일전쟁 시기에는 대규모 전투가 벌어져 중국군과 일본군은 뤄양에서 싸웠다. 그 과정에서 뤄양을 위시한 허난성 일대에 대기근( 허난 대기근)이 들어 350만 명 가량의 아사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이 사건을 다룬 영화가 중국에서 만든 "1942"(영문명 Back to 1942)라는 영화다. 막장의 극치를 느낄 수 있다. 펄 벅의 대지 1부에 나오는 대기근도 이 기근을 묘사한 것이다.[11]
4.4. 현대
뤄양 신시가지
구도심과 신도심 전경 |
2009년 복원된 딩딩먼 (定鼎门, 정정문)의 야경
현재 인구는 650만. 과거와 같은 정치적인 힘은 없어졌고 과거의 유산들이 많이 쇠잔해서 흔적을 찾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지만, 지금도 강을 이용한 경제적인 도시로서의 역할은 계속하고 있다. 구도심인 뤄허 강 북쪽은 개발이 미미하지만, 남쪽인 룽먼지구는 개발사업이 한창 진행중이다.
5. 교통
뤄허강 연안의 소분지로, 예로부터 화베이평원[華北平原]과 웨이수이[渭水]분지를 잇는 교통요지를 이루었다.5.1. 철도
성회인 정저우시(郑州市)로부터 140㎞로 교통의 요지로서 쑤저우시(苏州市)와 시안시(西安市)를 잇는 룽하이철도(陇海铁道)와 자오즈철도(焦枝铁道)가 교차하고 있다.5.2. 도시철도
자세한내용은 뤄양 지하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5.3. 도로
310·207국도와 고속도로가 경유한다.5.4. 공항
멍진현에 뤄양 베이자오 공항이 있다.6. 특산품
당삼채가 유명하다. 중국 당나라 전기( 7세기 말~ 8세기 초)에 만들어진 백색 바탕에 녹색, 갈색, 남색 등의 유약으로 여러 무늬를 묘사한 도기인데, 뤄양이 생산지라서 질 좋고 큰 당삼채도 싼 값에 살 수 있다. 문제는 운반이다.중화TV에서 방영했던 차이나피디아에 따르면, 중국 10대 화훼축제 중 하나인 모란꽃제가 이곳에서 열릴 만큼 모란의 특산지이다. 그래서 현재 뤄양시는 모란꽃으로 만든 장식품 및 모란으로 만든 술, 과자 등을 제작하여 관광객에게 판매중이다.
말린 대추 또한 최근 특산품으로 내세우고 있다.
7. 관광지
- 백마사 : 중국 최고의 고찰
- 용문석굴 : 중국 최고의 불교 유적 중 하나
- 영녕사지 : 중국 최대의 목탑이 있었던 사찰의 유적
- 북망산 : 한대 ~ 당대의 여러 황제들과 공경대작이 안장되어 있는 묘원
- 숭산 : 중국 선종 불교의 성지. 유명한 소림사도 이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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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위 낙양성 유적 :
실크로드: 창안-톈산 회랑 도로망의 일원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조예 시절 세워진 태극전 유지가 복원 중이다.
- 수·당대 낙양성 복원 단지
- 수·당시대 황궁 재현 단지 내 천당과 명당
- 여경문 (리징먼) : 금나라 대에 세워져 최근에 복원된 낙양의 남문
8. 삼국지 시리즈에서
후한 말과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만큼 언제나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도시다. 또한 아직 옥새가 미발견 상태인 경우 낙양을 수색하거나 탐색하다 보면 옥새를 얻을 가능성이 생긴다. 초기 시나리오의 낙양에서는 서황같은 인재들도 나오고 있으며 몇몇 시리즈 한정으로는 198년경에 낙양에서 사마의가 나온다. 군웅할거 시나리오같은 194~195년 시나리오를 주로 하는 유저들에게는 중요한 거점. 그리고 매번 반동탁 연합 시나리오에서는 거의 불타는 이벤트가 후기 시리즈들어 자주 나오며, 군웅할거 시나리오에서는 그 영향으로 낙양의 상태가 개판인 채로 시작한다.삼국지 2에서는 일명 10번 이라고 불렸으며 낙양 대신 Xi(사례) 라고 표시된다.[12] 이 지역은 점령할 때마다 보물을 주는 특징이 있어서 점령 후 일부러 비웠다가 AI가 땅을 채우면 또 쳐들어가고 하는 식으로 모든 인게임 보물(옥새, 적토마, 대교 소교 등등)을 빼먹는 플레이가 유효하다.
삼국지 3에서는 시리즈 처음으로 관이라는 개념이 생겼는데, 호관과 호뢰관(호로관)으로 각각 업과 허창으로부터의 공격을 1차 방어해 낼 수 있는 곳이라서 비교적 내정수치들을 떨어뜨리지 않고 수비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초반 시나리오로 낙양 먹고 정치력 높은 문관을 무한 내정 돌려서 상업치 9999만들기도 도전할 수 있다. 아직 동탁이 태워먹지 않은 시나리오 1에서는 인구가 시작부터 거의 80만에 육박하므로 일단 먹기만 하면 재정상황은 확 펼 수 있다. 이후 시나리오에서도 나름 40~50만을 유지하기 때문에 각잡고 키우면 양양과 함께 100만을 넘기기 좋은 도시이다.
삼국지 4에서는 허창을 통해 들어오는 루트를 제외하고는 반격지가 모두 관문으로 막혀있어서 수비하기 매우 편리하며, 후반 시나리오에서는 인구 100만도 손쉽게 초과할 수 있을 정도. 다만 동탁의 장안천도 직후 시나리오에서는 도시를 불태워버렸다는 것을 반영해서 규모가 쪼그라들거나 초토화되어 내정수치가 완전히 바닥인 공백지 상태로 나오기도 한다. 여러모로 헌제와 많이 엮이며 이벤트 발생조건으로 낙양 점유가 조건인 경우가 많다.
삼국지 5에서는 유일하게 상업치의 최대치가 990인 도시다. 낙양의 주변 도시인 업, 허창, 장안 등도 상업치가 900대 이상으로 높지만 990인 도시는 낙양이 유일하다. 상업 요충지답게 교통의 요지이기도 한데, 그 덕에 동서남북에서 공격받을 수 있다. 동탁이 장안 천도 이벤트로 낙양에 불을 지르면서 공백지로 만들고 떠나버리기 때문에 조조나 허창에서 시작하는 신군주는 금방 비어있는 낙양을 거져먹을 수 있다. 초기 시나리오에서는 하진이 낙양을 차지하고 있고 세력 자체도 막강하지만 익주, 형주, 양주를 비롯한 서남쪽의 땅들이 죄다 공백지라서 이 지역들을 모두 접수하면 하진은 충분히 멸망시킬 전력을 갖추니 손쉽게 낙양에도 입성하고 하진도 멸망시켜서 옥새도 거머쥘 수가 있다. PK 추가 시나리오인 방랑의 현성에서는 특수무장 선인들이 군주로 나오지만 전부 도시를 하나씩만 가지고 있어서 영토 대부분이 공백지에 낙양도 공백지라서 낙양과 가장 가까운 선인들이 빠르게 무혈입성하여 차지할 수도 있고 원하는 공백지에서 시작하는 신군주에게는 그야말로 호랑이가 날개를 달 정도로 캐사기 세력으로 만들어주는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나리오에서는 가장 사기 세력인 조조의 영역이라서 함부로 넘보기가 어렵다.
삼국지 6에서는 상업치가 최대치인 200에 달하는 대도시이다. 제도를 건설할 수 있고 전투할 때의 지형이 방어가 쉬운 형태다. 나름 고증이 있어서 장안에서 쳐들어가면 함곡관이, 허창이나 완에서 쳐들어가면 호로관을 통과해야해서 야전에서도 성문 하나를 뚫어야 한다. 농성전에서는 대도시 치고는 특이하게 남문과 북문 2개 성문밖에 없는데 이로 인해 대도시 공격에서 성문 하나 열고 성 안에서 나머지 성문 3개 열어서 사기 떨어뜨리기 꼼수가 반감된다. 북문은 멀리 돌아가야 하고 시간을 잡아먹기 때문에 공격 측에서는 남쪽 문만 공격하려하고 보통 방어 입장에서는 남문만 지키면 된다. 다만 남문은 성문이 ㄷ자로 나있어서 성문 공격 시 공격 측 피해가 조금 더 크고 북문은 멀긴 하지만 정무청이 바로 옆이기 때문에 수비가 견고하다면 공격 입장에서는 오히려 북문을 찔러서 정무청을 점거하는 것도 방법이다. 한번 명령하면 3일동안 고정이라 남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발이 묶이는 것은 덤. 참고로 북쪽에는 오를 수 없는 높은 산과 절벽으로 막혀있는데 북망산을 나타내려고 만든 지형인 듯. 두 번째 시나리오인 189년 동탁의 야망을 선택해서 플레이하면 시작 후 얼마 안 되어 동탁 세력의 천도 이벤트가 일어나 초토화되고 불타는 낙양을 매번 볼 수 있으며 플레이어가 낙양을 점령한 뒤 회견에 임하면 낙양 복구하자는 회의안건이 매번 나오게 된다.
삼국지 9에서는 지형조건을 고증해서인지 몰라도 대도시임에도 농업 최대치가 중소도시 수준으로 매우 낮은데 사실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대대로 낙양의 농업 관련 수치가 그닥 높지 않은 편이었다. 다만 상업은 도시들 중 가장 높은 1000까지 올릴 수 있고, 상인이 상주하고 있어 언제든지 금으로 식량을 구입해 해결할 수 있다. 서황, 사마의 등의 장수들도 낙양에서 나오며 보물인 구석도 낙양에서 얻을 수 있고 왕윤이 사망한 이후의 시나리오에서는 낙양을 뺀질나게 탐색하다보면 무력+10짜리인 칠성검도 얻게 된다.
삼국지 10에서는 학술특화도시로 나오며 지력교습소와 태학이 동시에 있는 유일한 도시이기 때문에 일반 장수의 지력을 100까지 단련하는 것은 이곳만 가능하다. 다른 도시는 80까지만 가능하며 그걸 제외하고서라도 태학이 있다면 능력치단련의 효과가 올라간다. 단, 능력치 향상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시작부터 규모가 대인 것을 제외하면 딱히 좋을 건 없는 도시. 초기 시나리오에선 황제의 소재지라 낙양을 점령할 경우 황제가 손에 들어오지만 고정인 것이 아니고 황제를 옹립한 군주의 소재지 따라 황제도 이동하기 때문에 도시 자체의 효용이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다.낙양까지 가는길에 호로관, 함곡관, 동관등 관문이 많아 하내 쪽만 조심하면 방어하는 건 쉬운 도시라는 것은 장점이다. 그 외에는 상업 한도가 높아 자금이 비교적 쉽게 벌린다는 것 정도다. 그러나 군웅할거 등 상당수의 시나리오에서는 반쯤 폐허가 되어 방치된 상태라 본격적인 거점으로 쓰고자 한다면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인구를 한도로 병사를 징병할 수 있게끔 게임 설정을 해놓았다면 초창기 거점으로는 더 메리트가 없다. 쑥대밭이 된 낙양의 인구가 채 10만이 되지를 않기 때문이다. 특히 시작부터 대도시인 점 때문에, 징병이 불가능한 인구의 최소치마저 높고, 내정 상한도 많이 뚫려있어 정비하고 지키기가 매우 어렵다. 일단 차지하기는 하내쪽으로 접근하기 쉬운 원소나 진류에서 시작해 관문 하나만 넘으면 되는 조조가 쉽다. 원래 하내에 있는 장양은 낙양을 먹기는 쉬운데 세력이 보잘 것 없어 지키기가 쉽지 않다.
삼국지 11에서는 대도시로 분류되어 있고 낙양 소속의 관문 1곳과 항구 2곳을 보유하고 있다. 함곡관은 그냥 보면 마치 낙양 소속 관문 같지만 실제로는 장안소속의 관문이다. 즉, 낙양만 먹은 상태에서는 함곡관을 먹어도 함곡관에서는 금, 병량 수입이 들어오지 않는다. 낙양 소속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육로로는 낙양으로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방어하기가 쉽고, 내정 시설을 건설할 수 있는 빈터가 많은 데다 배치도 괜찮아 매우 좋은 도시다. 다만 상대방이 수군을 운용할 경우 항구를 통한 공격으로 낙양을 위협할 수 있고, 수상에서의 원거리 공격이 낙양 본성까지 닿지는 않지만 내정 시설이 공격받아 피해를 입거나 파괴될 수 있다. 이 때문에 낙양을 완벽하게 방어해 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수군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수군이 아니더라도 상륙을 저지할 노병[13]도 괜찮다. 방어시설 몇개를 낙양 도시 개발지 옆에 지어놓으면 컴퓨터도 황허를 건너 올라오기도 한다.
삼국지 12에서도 대도시고 병력징발에 보너스가 있다. 다만 같은 대도시라도 전차를 생산할 수 있는 장안과 호표기를 생산할수 있는 허창, 연노를 생산하는 성도와 달리 달리 일반 중장만 생산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또 초반부 시나리오 역사 이벤트를 켜두면 동탁이 바로 낙양을 불태우는데 부대시설이 하나도 안 남고 싸그리 전멸하기 때문에 낙양을 이후 점거하면 재건에 살짝 애로사항이 있다. 거기에 역사 이벤트가 켜진 상태에서 잠시만 진행하면 조조가 날로 헌제와 낙양을 접수하기 때문에 조조는 순식간에 게임에서 대도시 두 개를 보유한 유일한 군벌세력이 되어 질좋은 병력을 펑펑 양산한다.
삼국지 13에서도 동탁의 장안천도 이벤트가 뜨면 홀라당 불타버려서 농업이건 상업이건 문화건 내정도거 거의 100까지 곤두박질쳐서 도무지 여기가 사람 살 땅인가 싶어진다. 심지어 게임상에서도 유일하게 성 내부건 맵에서건 시꺼멓게 불탄 모습으로 구현되어 있다. 빡세게 내정을 다스리면 복구못할 건 없지만 아무래도 허창이나 업 같은 도시들에 비해 힘든 건 사실이다. 전투시 맵은 대형 3중 성곽으로 평시라면 내구도를 상승시켜 우주방어를 할 수 있지만 초반부 시나리오는 저놈의 동탁이 트롤질을 해놓아서 내구도가 폭망이다. 강력한 장수로 3부장 다 채워서 성 밖에 아군 부대를 배치하고 적 부대를 요격하는 게 최선이다.
삼국지 14에서는 함곡관, 호로관을 사이에 두고 있는 좋은 수비여건을 두고 있으며 위로는 진양 인근인 평양, 포판 등을 점령할 수도 있다. 반동탁연합 시나리오에서는 동탁이 호로관과 낙양을 두고 장안으로 물러나나 함곡관부터는 멀쩡히 동탁의 영토로 남아있다.
9. 기타
낙양의 낙(洛)은 일본어에서는 뜻이 변해 수도, 즉 교토를 상징하는 말이다. 교토 시내의 번화한 모습을 그린 병풍 낙중낙외도(洛中洛外図)같은 문화재의 이름이나, 교토를 점령해 덴노와 조정을 손에 넣어 중앙 정치의 실권자로 올라서는 일을 일컫는 조라쿠(上洛) 같은 단어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헤이안 시대에 중국을 모방하여 수도 교토(당시의 이름은 헤이안쿄)의 서부인 우쿄(右京)지역을 조안(長安), 동부인 사쿄(左京)지역을 라쿠요(洛陽)라고 불렀는데,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서부지역은 쇠퇴하여 조안의 이름은 유명무실해지고 번성한 동부지역만 남아서 라쿠요가 교토의 대명사가 됐고 낙양의 낙 자가 교토를 뜻하는 한자가 되었다.한국에서는 장안이 수도를 시사하는 단어인데 이와 대비된다.[14] 조선시대 때 호서 지방(충청도)의 선비들과 한성의 선비들이 유교 사상과 관련한 논쟁으로 호락논쟁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여기서 락 자가 바로 낙양의 낙 자와 같은 글자이다.
위도는 34도 정도로 한국의 목포시나 거제시와 비슷한 위치이다.
코드기어스의 중화연방의 수도로 나온다. 황궁인 주금성이 위치해 있다고 한다.
상주시의 옛 이름이 낙양이며, 그 흔적은 낙양동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낙양의 동쪽'을 뜻하는 낙동강(洛東江)이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왔다. 낙양이라는 이름답게 임진왜란 전까지 경상도의 중심지 노릇을 했던 적도 있었다.
9.1. 우호 협력 도시
10. 출신인물
자세한 내용은 분류:뤄양시 출신 인물 문서 참고하십시오.
[1]
중국어 한글 표기법상 현존하는 중국 지명은 중국 한자음대로의 표기만이 원칙이지만, 낙양은 관용이 인정되어 뤄양과 함께 복수표준어이다.
[2]
도시 자체의 인구는 약 280만
[3]
정정문과 낙양성 역시
실크로드: 창안-톈산 회랑 도로망 세계문화유산 유적지 중 하나이다
[4]
북위 시대 왕릉들의 내부를 재현해 놓았다
[5]
하나는 흔히 알고 있는 함곡관으로 시안과 뤄양의 사이에 있으며 후한-삼국시대의 홍농에 있다. 지금 지명으로는 링바오 시의 북쪽. 사실은 이게 관중과 중원을 구분하는 경계로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후한시대 뤄양이 수도가 되면서 수도 방위용으로 옛 함곡관과 뤄양 사이에 함곡관을 새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킹덤에 나오는 전국시대 진나라의 함곡관과 삼국지의 함곡관은 위치가 다르다. 황하 지류변동으로 옮겼다고 한다.
[6]
史/正史/史記/書 凡八卷/卷三十 平準書第八 益廣關,置左右輔。【集解】徐廣曰:「元鼎三年,丁卯歲,徙函谷關於新安東界。」관關을 더 넓히고,좌우보左右輔를 설치하였다。【집해】서광徐廣이 이르길:「전한 한무제 원정元鼎 3년(기원전 114년),정묘丁卯때에,함곡관函谷關을 신안新安 동쪽의 경계로 옮기었다。」
[7]
수양제 때, 동도라고 불렀다. 하지만 하나라의 경우 존재 여부가 아직 확실치 않고 유력한 유적 역시 뤄양이 아닌
이리두 유적이다. 상나라의 수도 역시 뤄양이 아닌 안양이다. 따라서 주나라부터 셀 경우 도읍으로 삼은 기간에선 시안에게 밀리고 9조고도는 전통적 인식으로서의 상징성이 있을 뿐이다.
[8]
여담으로
타이위안도 억지로 끌어모으면 9조고도이다. 태원은 춘추시대
조나라, 남북조시대의
전진,
북제, 당과 무주, 후당의 제3수도, 5대10국시대의 후진, 후한, 북한을 영혼까지 끌어모으면 9주고도가 된다.
[9]
이 미담? 덕에 주공묘는 여러 왕조들에 의해 보수되었고, 마지막은 뤄양을 임시 수도로 삼은 중화민국이었다
[10]
동경 개봉부,
서경 하남부,
남경 응천부
[11]
작중 무대는 허베이 성인데 이름에서 보듯 허난 성 바로 옆이다.
[12]
사예라는 것은 한국으로 치면
경기, 즉 수도권을 의미한다. 조조의 젊은 시절 관직이 '사예 교위'였던 것을 참고해 보면 좋다.
[13]
늙은 병사가 아니고 쇠뇌병
[14]
고구려에서
평양성을 수도로 삼았을 때 우선 평양성 내의
안학궁을 수도로 삼았고 이후
장안성으로 천도하였다. 이후 보통 평양성이라 하면 장안성쪽을 가리킨다. 거리가 아주 가까워서 둘 다 현재
북한의 평양시 내에 있다.
[15]
북송의 명장으로,
범중엄의 밑에 있었다가 뛰어난 능력으로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고 이후 충악이 수주성을 점령하자 서하가 보안군을 공격해 많은 피해를 입혔는데, 수주를 내주자는 조정에 반대한다. 이후
송월희녕전쟁에도 참전하나, 병사를 잃은 게 많자 면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