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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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Ἡ Ἱστορία τῶν Ῥωμαίω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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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왕국
REGNVM ROMANV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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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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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로마
공용어 고대 라틴어
정부 형태 선거군주제
입법 원로원
역대 군주 로마 국왕
주요 국왕 로물루스
종교 고대 로마 다신교
민족 라틴인, 사비니인[1], 에트루리아인
멸망 이후 로마 공화국
파일:external/mrpsmythopedia.wikispaces.com/fighting.jpg
로물루스·레무스 형제

1. 개요2. 건국 신화3. 역사4. 왕정의 붕괴와 공화정으로의 변화5. 국력6. 역대 국왕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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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왕국(REGNVM ROMANVM, 현대식 철자로 Regnum Romanum)은 로마 공화국 이전 로마 국왕들이 통치하던 고대 로마의 왕정 시기를 말한다. 고대 로마 최초의 시대로, 기원전 753년경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기원전 509년 로마 공화국이 들어서기까지 이어졌다.

2. 건국 신화

로마의 전설에 따르면 로마의 건국자는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라고 한다.

형제의 외가는 알바 롱가의 왕가이며 아버지는 군신 마르스(또는 아레스)였고, 알바 롱가의 왕은 트로이 전쟁에서 살아남은 트로이 측의 영웅 아이네이아스의 후손이고, 로마가 위치한 라티움 지방은 라틴족과 트로이 출신들이 결합한 곳으로 이해되었다. 때문에 훗날 로마인들은 스스로의 조국을 '재건된 트로이'로 여겼다. 물론 고증상으로는 별 의미가 없고, 자신들의 역사가 그만큼 유구하며 문명의 역사도 오래되었다는 선동에 가깝다. 정복한 지역으로만 따지면 후대의 로마가 훨씬 더 거대했다. 다만 로마가 라틴인은커녕 그리스인도 아닌 트로이인의 후계를 자처했다는 점에서, 훗날 게르만인들이 로마의 후계를 자처하고, 슬라브인 로마의 후계를 자처하고, 튀르크인 로마의 후계를 자처하는 사태는 그 나름대로 로마의 유구한 전통(?)이라고는 할 수 있다.[2]

리비우스에 따르면 트로이가 망한 뒤 살아남은 두 트로이의 왕자들이 포로로 잡혔고 이 두 왕자가 그리스에 우호적이었던 것을 기억했던 그리스인들은 이 두 왕자를 이탈리아에 정착하도록 도와주었다. 이 두 왕자 중 하나는 아이네이아스였는데 그는 중부 이탈리아에 오게 되었고 이때 알바롱가라는 도시의 왕이었던 라티누스가 아이네이아스의 인품에 감복하여 그를 사위로 삼은 뒤, 자신이 죽게 되자 왕좌를 물려주었다고 한다. 알바롱가의 왕 라티누스는 라틴족이었는데 라틴이라는 명칭이 이 사람에게서 기원했다.

그 뒤 라티누스의 후손이 대대손손 왕위에 앉았다. # 이후 프로카라는 왕이 사망했을 때, 그의 아들들인 누미토르와 아물리우스가 내분을 일으켰는데 아물리우스는 누미토르를 내쫓은 뒤 그의 아들들을 모두 죽이고 그의 딸인 레아 실비아를 결혼을 못 하는 여사제로 만들어 버렸다. 그런데 레아 실비아의 미모에 반한 마르스가 그녀를 취해 레아 실비아는 두 쌍둥이를 낳게 되었고 그녀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여 분노한 알바롱가의 왕 아물리우스는 그 두 형제를 강가에 ' 노출'을 시켰다.[3]
파일:external/media1.britannica.com/188255-004-C5C00F03.jpg
카피톨리노의 늑대, 늑대(11~12세기), 쌍둥이(15세기)[4]

그러던 중, 그곳을 지나가던 어미 늑대가 형제를 발견하고 젖을 물림으로써 그들은 목숨을 구한다. 이윽고 두 형제를 양치기가 발견하여 두 형제를 자식으로 삼아 키웠는데 그 둘을 각각 로물루스, 레무스라고 이름 짓는다.

쌍둥이 형제는 장성하여 양치기 집단의 두목이 된다. 어느 날 왕위에서 쫒겨난 누미토르가 정착한 땅을 약탈하러 온 레무스를 생포하게 되는데 이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누미토르는 이들이 자신의 외손자임을 알게 되었고[5] 누미토르가 자신의 할아버지임을 알게 된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자신의 원수 아물리우스를 죽이기로 하고, 누미토르의 도움으로 궁전에 침입하여 아물리우스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 누미토르는 아물리우스의 뒤를 이어 알바롱가의 왕이 되었으며, 누미토르의 도움으로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자신들이 정착할 도시를 찾아 떠나게 되었고 로마 시를 건설하게 된다. 이때가 기원전 753년이라고 한다.
파일:Albe_planlatium.jpg
로마(커다란 분홍색)와 알바롱가 유적(C-3 동남쪽의 붉은 글씨)의 위치.

3. 역사

그러나 이러한 신화와는 달리 고고학적으로는 난민들이 모여 살다가 점점 유입되어 도시화되었다고 보고 있다. 땅을 파보니까 로마에는 소규모 촌락의 흔적이 기원전 800년 이전에도 있었고 이것이 로마인들의 뿌리라는 것이다. 이때 로마인들은 초가집과 같이 과 밀짚을 엮은 에서 살았는데, 당시에는 이것보다 못한 지역도 많았지만 이미 거대한 성을 짓고 국가 단위의 대규모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와 같은 오리엔트의 도시들에 비하면 한 줌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로마인들은 거창한 신화와는 달리 부랑자, 난민들이 모인 집단이었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를 사비니의 여인 노략 신화가 보여준다. 사비니의 여인 노략 신화는 로마인들에게 마땅한 배필이 없자 로물루스가 꾀를 내어 사비니족[6][7]의 가족들을 초청하여 파티를 벌인 틈을 타 무방비가 된 사비니족 여자들을 보쌈해 배필로 삼아 버렸다는 신화다. 이것이 신화에 지나지 않으나 실제 역사에서도 로마에 정착한 사람들은 각 도시에서 흘러나온 부랑아, 난민들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로마 시가 주변의 도시들에 비해 상당히 건국 시점이 늦은 점, 또한 시의 발전이 강력한 집단의 조직적인 도시 건설 계획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밖에서 유입된 인구 증가에 맞춰 그때그때 필요한 시설을 건설한 것으로 보여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로마와 인근 도시 국가들과의 차이점이나, 그들의 신화나 기록과도 제법 그럴싸하게 맞아떨어진다. 이를테면 로마인들은 대단히 초창기 역사 때부터 상당히 많은 내부 공동체나 혈족 집단을 보유했는데, 일반적인 정주민들이 소수의 대가족들이나 동성촌을 중심으로 해서 성장함에 따라서 소수의 권력자 집안이 그 지역 공동체를 권위와 텃세를 무기삼아서 지배하는 케이스가 흔했다는 것에 비하면 꽤 특이하다. 당장 로마 공화정의 상징인 원로원은 왕정 초기 때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만 봐도 최소 수십~백명 정도에 해당하는 유력자가 한 공동체에 우르르 모여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도시 하나 크기가 겨우 될까말까한 속된 말로 촌놈들 모인 깡촌 수준일 때도 말이다. 이는 그만큼 로마에 모인 사람들의 출신지가 불분명하고 그야말로 각기 다른 사람들이 뭉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시사하는 점이기도 하다. 물론 당장 당대 그리스만 봐도 빠르게 초기 공화정이 설립될 정도로 과거 도시 국가들의 정치나 통치 체계가 다른 부분이 있지만, 로마는 그 점에서 따져봐도 꽤 유별난 케이스인데, 이것은 특정한 부족이나 같은 선조나 신앙/관습을 공유하는 느슨한 민족 관념이 애초부터 적용되지 않았다고 하면 말이 된다.

당장 같은 이탈리아 반도에 살았던 에트루리아들이 반도 여기저기 흩어져 산 것도, 혈족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마치 벌들이 분봉하는 것처럼 혈족간 갈등, 유산 분배, 상속권 제외 등으로 인해서 새로이 개척지를 따라 흩어진 것으로 봐야할텐데 로마는 그런 식의 부족 공동체의 분열로 생성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당장 초대 왕인 레물루스만 봐도 혈통을 증명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트로이의 후예로 지칭되며, 늑대에 의해 키워졌다는 신화도 애시당초 당장 공동체 내에서 출신성분도 불분명하고, 신분도 미천했음을 은연 중에 드러내는 증거인데, 이런 사람이 실력과 명성, 명분을 무기삼아 왕 노릇을 해도 무리없이 받아들여졌을 정도로, 초기 로마는 혈통이나, 부족, 계급이나 신분에 의한 공동체 내부의 차별이 적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출신성분도 대단히 다양하고 서로 신분 따질 여가도 여유도 없는 어중이떠중이들이 공동체 대다수를 차지했다면 충분히 납득 가능한 내용이다.

또한 로마의 초기 역사는 이들이 애초에 특정한 종교, 부족, 관습을 계승하면서 발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여타 도시 국가등을 통해서 이러한 것들을 배워서 옮겨온 기록들로 가득한데, 이 또한 애시당초 뿌리가 될만한 공통의 선조가 없었다면 이 역시 맞아떨어진다. 즉 처음부터 무언가를 계승한게 아니라 공동체의 덩치가 커지다보니까 그런 관습이나 종교의 필요성을 느꼈고, 또 로마 고유의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 다른 도시 국가들에게 내세울 뭔가가 있어야만 했던 상황 등에 의해 의도적으로 다른 도시 국가나 부족 국가들로부터 이런 저런 것들을 수입한 것이다.

또 사비니의 여인 노략 신화는 로마의 성비가 대단히 불균형했음을 시사하는데, 이 또한 흥미롭다. 일반적인 국가의 기본 단위인 마을 단위 공동체는 혼인으로 만들어진 대가족들과 그와 연을 맺은 여러 가족들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고로 자연스레 어느 정도 성비가 맞춰진 상태에서 성장하게 된다. 설령 남아선호 등을 이유로 남아를 많이 낳는다고 할지라도, 다른 공동체와의 갈등, 사냥, 농업 및 여러 고된 생산 활동 등에서 항상 일선에 나서야 하는 남자는 여러모로 죽거나 다치기 쉽고, 상대적으로 보호를 받는 여성이 조금 더 오래 생존하는 까닭에 이런 마을 단위 공동체는 생각보다 쉽게 여자가 더 많은 여초 환경이 되기 싶다. 그런데 로마는 옆 동네에 가서 여자들을 한 두명도 아니고 거의 떼거지로 보쌈해야 겨우 돌아갈 정도로 남초였고, 그것은 심지어 레물루스의 즉위 후 더 잦아진 전쟁이나 전투로 인해 남자 사상자가 발생했는데도 그랬다. 이는 가족이나 아이들을 데리고 탈출할 수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린 난민이나 부랑자, 탈주자로 로마가 시작되었다면 제법 앞뒤가 맞는 말인 이야기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하필이면 많고 많은 부족과 국가 중에서 멸망과 학살로 인해 흩어져버린 트로이인들을 자기 선조로 삼은 것도 일종의 동질의식을 느낀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로마는 7개 언덕이 있었는데 로마로 이주한 사람들은 언덕 꼭대기에서 살게 된다. 당시 사람들은 방어적인 측면에서 언덕 꼭대기에서 사는 것을 선호하였고 로마인들도 그리한 것이었다. 게다가 로마 옆을 흐르는 테베레강은 로마를 빙 둘러 지나가면서 물난리를 자주 일으켰기에 배수시설이 잘 갖춰지지 않는 이상 저지대에 거주하기란 어려웠다. 처음부터 7개 언덕에 이주한 것은 아니고 다른 부족을 통합하면서 그 부족에게 언덕을 하나씩 내 주게 된다. 나라를 세운 로물루스, 레무스 두 형제는 이후 로물루스가 경계를 침범한 레무스를 죽이고 나라를 통합하였다. 로물루스는 팔라티움 언덕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 야산 로마인으로 불리던 퀴리날레 로마인을 통합하였다. 이후 사비니족 등을 통합하였고 카피톨리노 언덕과 밸리안 언덕의 사이에 있던 늪지대의 물을 뺀 다음 땅을 다지고 그곳에 포룸 로마눔을 건설한다. 이 두 언덕은 로물루스, 레무스가 이주했다는 곳으로 이 두 언덕 사이에 있던 부족들이 가장 최고참이었으므로 이 두 언덕 사이의 땅에 이 포룸 로마눔을 건설한 것이었다. 이 포룸 로마눔에선 모든 종류의 공직 활동이 이루어졌다.

로마는 정착 생활을 하며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어가기보다는 이리저리 떠돌이 생활을 하는 집단이 그 시작이었기에 외부의 인재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상대적으로 적극적이었고 그 때문에 그리스, 에트루리아의 많은 건축술과 정치 체계를 본뜬다. 특히 에트루리아인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어서 로마인들은 이름 - 씨족 - 가문 이름으로 나뉜 작명 방식도 카피하게 되고 또한 건축술, 종교, 정치제도의 모든 면에서 에트루리아인들을 따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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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티움 도시들

로마인들은 건국 이후 전쟁을 통해서 조금씩 주변 작은 마을들을 점령한 뒤 이들을 로마에 강제 이주 시키는 방식으로 인구를 불리게 된다. 그 결과 기원전 600년 즈음엔 인구가 3만 명 정도로 증가하게 되는데 이에 맞춰 로마는 세르비우스 성벽이라는 7개 언덕 전체를 두르는 커다란 성벽을 축성한다. 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철거할 때까지 로마의 성벽이 된다.
파일:1481px-Map_of_ancient_Rome.svg.png
파란 선 <colbgcolor=#FFF,#000>기원전 4세기에 지어진 세르비우스 성벽
빨간 선 기원후 3세기에 지어진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로마 신화에 따르면 기원전 750년부터 500년의 250년 동안 7명의 왕이 통치하였다고 보는데 고고학 발굴에 따르면 당시 왕이 살았던 것은 확실하다고 한다. 7명의 왕 중 첫 번째는 로물루스였다.

은 100명으로 구성된 원로원과 상의해 일을 처리하였는데 원로원은 100개의 로마의 유력 부족의 수장들이 한 데 모인 강력한 집단이었다. 이 원로원은 훗날 300명으로 구성된 로마 원로원의 모태가 된다.

5대 왕으로 '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가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로마인이 아니라 그리스인 혼혈 에트루리아의 유력자였다. 혼혈이라는 점 때문에 본국의 지위 획득은 힘들다고 평가한 그는 로마로 건너와서 선거 운동을 벌여 왕이 되었다. 그런데 이후 7대까지의 왕이 모조리 에트루리아인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를 에트루리아가 로마를 지배한 시기로 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로마를 특정 부족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 부족이 화합하는 것을 보여준다고 보기도 한다.

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로마의 정치제도를 확립시키고 앞서 언급한 세르비우스 성벽을 축성한다.

7대 왕은 '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라고 하는데 왕이었던 자신의 장인인 세르비우스를 죽이고 왕이 된 사람으로, 원로원을 무시하고 자신 멋대로 통치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가 군사 원정을 하는 동안 그 왕의 아들인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 루크레티아라는 명문 귀족의 안주인을 강간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 일의 발단은 루크레티아의 남편과 섹스투스가 누구의 부인이 더 예쁜가 내기를 하였고 따라서 두 젊은이가 자신의 부인을 서로에게 보였는데, 이때 루크레티아의 모습을 본 섹스투스는 흑심을 품고 며칠 뒤 남편이 없는 사이에 집을 방문, 잘 대접받은 뒤 그날 밤 침실로 침입해 단도를 가지고 협박하여 강간한 것이었다. 섹스투스가 떠난 뒤 루크레티아는 하인을 시켜 전장에 나가있던 남편과 시아버지, 그녀 집안의 친척이자 왕의 사위인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를 부른 뒤 복수를 맹세시키고 자결을 하였고, 이에 분노에 끓은 브루투스가 로마 시민들을 선동하여 타르퀴니우스를 쫓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했다.

4. 왕정의 붕괴와 공화정으로의 변화

그렇지만 250년에 걸친 왕정이 앞에서 서술한 한 번의 사건으로 뒤엎어지고 공화정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고, 일반적으로는 그리스계 도시와 마찬가지로 왕정 붕괴 - 귀족에 의한 공동 통치 - 시민들에 의한 민주정 수립의 수순으로 점차 민주정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실질적으로 시민들의 대표에 가까웠던 많은 귀족들은 시민들과 영합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려고 했고 여기에 성공한 귀족들의 영향력은 왕권을 능가했다. 로마 역사에 나오는 공화정을 수립했다고 하는 브루투스도 여기에 해당했고 아테네에서도 솔론과 같은 사람이 있었다.

로마의 경우에는 로마 국왕 존재감이 점차적으로 희미해지게 되었다. 유력 귀족에 의한 과두정을 거쳐 시민들이 투표로 정치 현안을 결정하는 민주정이 나타났고 결국 기원전 500년쯤엔 왕정이 붕괴되고 만다.

로마는 귀족들이 계속 영향력을 유지하였는데 로마 특유의 파트로누스(영어 patron(후원자)의 어원), 클리엔테스(영어 client(고객)의 어원)의 씨족 연맹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파트로누스, 클리엔테스의 관계는 유력 귀족 집안이 그들에게 충성을 바치는 평민들의 뒤를 봐주면 그 평민들은 이러한 귀족 집안에 충성을 바치는 방식이었다. 이 귀족을 파트로누스, 평민을 클리엔테스라고 부른다. 이 파트로누스는 최대한 많은 평민을 클리엔테스로 삼고자 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곧 그들의 영향력과 비례하기 때문이었다. 한편 평민들은 최대한 강력한 을 가진 귀족을 파트로누스로 삼고자 하였는데 이는 다른 평민들과의 분쟁에서 어떤 파트로누스가 개입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당시 로마에선 거의 모든 평민들은 뒤를 봐주는 파트로누스 집안을 가지고 있었고 때문에 비록 공화정으로 바뀌어도 이 파트로누스 노릇을 하는 귀족 가문의 영향력은 막강하였다. 이는 귀족과 평민의 구분이 거의 소멸하다시피 했던 그리스와는 구별되는 특징이었다.

이러한 강력한 귀족의 존재 때문에 로마에서는 공화정이 수립된 이후에도 강력한 귀족 집단이 존재하였고 때문에 귀족과 평민의 반목이 끊임없이 있었다. 그러한 반목 중 가장 중요한 이슈는 전리품과 획득한 영토의 배분 문제였는데 귀족들은 그들의 특권을 사용하여 전리품 가운데 가장 값나가는 것과 기름진 땅은 자신들이 갖고 평민들에겐 나머지만 분배할 뿐이었다. 또한 귀족은 평민들에게 고이자로 돈을 꿔주어 그들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황폐해진 농토를 복구하는 데 필요한 자금으로 쓰게 하고 돈을 못 갚으면 그들의 영토를 몰수한 뒤 노예로 삼는 짓도 하였다.

이러한 귀족의 횡포에 맞서 로마 평민들은 전쟁 수행을 거부하는 파업을 벌이는 방법을 써서 그들의 권리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귀족과 평민의 대립은 끝까지 로마의 문제가 되어 로마 멸망에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평민이 빠진 로마군 켈트족 에게 성이 함락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후에는 평민의 권리를 수호하는 호민관이라는 직책과 평민 집회가 생겼으며, 이후 법적으로 평민 귀족의 차이점을 없애버렸다. 평민도 호민관을 역임하면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나 실질적으로 평민은 들어갈 수 없었다. 여성이나 외국인의 법적 지위는 낮았고 노예제가 있었으므로 평등 국가였다고 할 수는 없지만 평민과 귀족 사이의 계급 장벽이 일단 법적으로는 절대적이지 않았다.

노예는 상당히 많이 존재했고, 극히 일부의 경우는 해방노예라는 신분을 거쳐서 시민이 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가내 여노예의 자식이 대부분이고,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 등은 전혀 해당 없다. 귀족의 경우, 공식적으로는 오로지 명예로운 가문의 일원이라는 뜻일 뿐 직접적인 특권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권력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특권 및 로마의 계속되는 정복 전쟁으로 인한 전리품, 그리고 정치적 유력자로서 주변에 모이는 사람 등을 활용해서 결과적으로는 거대한 일문의 정치 집단이 된다. 이후 일부 평민 계층이 호민관 - 원로원 - 집정관 - 군단 사령관 테크를 타서 유력 가문이 돼버리는 이른바 평민 귀족이라는 것까지 등장한다. 이 평민 귀족은 (새로)함께하는 자 라는 의미의 노빌리스(Nobilis)라고 불렸으며, 이것이 후에 귀족을 의미하는 말인 노블의 어원이 되었다. 참고로 귀족은 파트리키, 평민은 블레브스, 기사계급 에퀴테스라 불린다.[8]

5. 국력

건국 직후인 왕정 시대 때도 로마는 끊임없이 전쟁을 수행하였는데 로마의 지리적인 특성에도 기인했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고 이탈리아에서도 비옥한 이탈리아 서부 평야 지역에 있었다. 여기에 테베레강(라틴어: 티베레/Tiberis)까지 끼고 있어서 이탈리아를 가로지를 때 강을 따라 이동하는 부족들, 육지를 따라 이동하는 부족들은 반드시 로마 근처를 거쳐야 했다. 로마를 우회하려면 이탈리아의 정중앙을 가르고 있는 아펜니노 산맥(Monti Appennini)을 거쳐 가야 해서 로마를 통하는 것보다 훨씬 불편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으로 로마는 끊임없는 외세 침략이나 동맹 제의에 노출되었고 로마인들은 건국 초기부터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전쟁을 수행하여야 했다.

그 결과 거기에 구성원들 대다수가 특정 신앙, 부족, 민족을 중심으로 성장하지 않았기에 에트루리아의 문화적 영향과 라틴인들과의 접점에도 불구하고 유난스러울 정도로 주변국들에게 배타적이었다. 애시당초 촌동네 로마였던 시기의 레물루스 왕 시절부터 주변 마을들을 군사적으로 복속시킴으로서 국가로 발돋음했고, 내부의 정치적 갈등과 문제를 전쟁으로 해결해온 경험 탓인지 주변국과의 문제를 풀고자 할 때 군대를 보내는 것으로 해결했으니 지리적 요인 + 정치/사회적인 문제까지 겹쳐 로마인들은 하나의 전투민족으로 발돋움했고, 이것은 각 소국들이 이해관계에 따라서 전쟁을 벌이는게 흔했던 당시 기준으로도 유별났던 것은 분명했고, 상무정신/대단히 보수적인 가부장 문화는 오랜 기간 로마 문화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실제로 로마인들의 특징을 보통 개방성으로 보는 이들이 많지만 로마 왕국시절부터 실제로 로마인들의 대외정책은 배타성과 개방성이 혼재된 것이었다. 일단 적이 되고 나면 상대방이 완전히 망하거나 복속 될 때까지 휴경기의 전쟁 타이밍에 맞춰 끈질기게 전쟁을 벌이면서 니네가 죽나, 우리가 죽나 끝을 보자! 식으로 나왔다. 당장 로마사에서는 당시 대표적인 주적이었던 베이, 삼니움, 볼스키 등을 비록한 부족국가들과 해마다 전쟁을 벌였던 기록이 즐비하며, 적당히 타협하거나 교류하지 않고 끝도 없이 약탈 및 전쟁 캠페인을 벌였던 것이 로마인이었다. 물론 로마의 기록들은 상대방이 우리 동네를 자꾸 털어먹었으니 우리의 전쟁은 타당하다는 식으로 서술하지만, 로마인들은 상대방에게 거의 일방적인 대외정책을 펼쳤고, 상대 입맛에 맞는 적절한 유화책을 쓰지 않았다. 그러다 간혹 정말 어쩔 수 없을때만 평화조약을 걸고 휴전을 했다. 반면 일단 로마에 완전히 복속되었을 경우에는 복속된 유력자들에게는 지위를 보장하고, 부족간의 차등을 두지 않고 시민권을 보장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적과 아군의 구분이 대단히 분명했고 일단 로마인이 되었을 경우에는 그 대우가 확실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다만 로마 왕국 ~ 로마 공화국 시기에 이르기까지 특정 국가나 영역에 한해서는 속주화하는 대신에 일단은 겉보기에는 동맹 형태로 그러나 실제로는 속국화하면서 그들의 자치나 정치를 보장하면서 세력을 키웠고, 당연히 시민권과 세금, 병역 등에 차등을 뒀다. 그리고 이로 인한 갈등이 누적되어 공화국 시기에는 동맹시 전쟁으로 격화 되는 등 일부 사람들이 가지는 외부인에게 개방적인 이상국가 모델과는 당연히 차이가 있었다.

거기에 에트루리아계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고, 역대 왕 중에서 3명이나 에트루리아 출신 왕을 배출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원로원 스스로가 에트루리아계의 영향력에 대단히 민감했고, 그들과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 결과 문화/관습/종교 등을 따왔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들과 로마인은 다르다는 믿음이 상당히 뚜렸했다. 특히 이것은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를 축출한 이후 축출당한 왕의 일가가 같은 에트루리아계 부족 국가들의 지원을 받아 왕정복고를 시도함으로서 완전히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네게 되었는데, 결국 공화정기에 이르면 역으로 에트루리아계 국가들을 복속하고 지배하는 것으로 마무리 됐다.

왕정 시대의 로마는 건국 시기가 수백 년 앞선 에트루리아에 속해 있었던 것에 가까운데 로마의 7명의 역대 왕 중 마지막 세 명이 에트루리아계였고, 에트루리아계 왕이 더 많았다는 기록도 있다. 로마는 건축 양식, 도시 건설, 작명, 점술관을 겸직하는 행정관 등 모든 문화 곳곳에서 에트루리아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에트루리아의 도시들은 로마를 군사적으로 직접적으로 지배하려는 시도를 한 적은 없었는데 에트루리아의 도시들은 북쪽에 위치하여 끊임없는 갈리아족의 위협을 받았기 때문에 정복할 여유가 없던 것도 있고 실질적으로 영향력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로마의 왕정 시대에 등장하는 왕들은 한결같이 군사적으론 유능하였으며 지휘한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서술이 나오지 않는다. 폭정을 해서 왕위에 쫓겨났다는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조차 주변의 수많은 도시들을 정복했다고 리비우스가 서술한다. 로마인들이 그들이 받은 패배를 고의로 누락했는지 아닌지는 모르나 실제로 로마인들의 군사적인 능력이 주변국들을 압도한 것은 사실로 보이며 왕정이 무너진 해인 기원전 500년쯤엔 이미 라티움 지역의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각되었다.

이렇듯 로마의 지속적인 성장에는, 로마가 테베레강을 낀 비옥한 라티움 지역에 위치하였으므로 농사가 모든 것이었던 고대 사회에서 비옥한 토지의 유리함을 갖추고 있었던 점, 그리고 외항 오스티아를 쉽게 확보하여 바다를 통한 무역이 용이했다는 점이 주요했다. 또한 로마인들이 외국인들 혹은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던 것도 이러한 성장에 한몫을 하였다. 로마에 인구가 적었던 초기엔 타 도시 죄수들의 피난처를 자처하기까지 한다.[9] 또한 로마인들은 왕정 시대의 7왕 중 세 명이 라틴족이 아닌 에트루리아인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로마인들은 그들의 왕, 또는 지도층이 그들의 일족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도 그다지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개방적인 모습은 로마가 그들이 점령한 도시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거나 완전 라틴 시민권을[10] 수여하여 그들과 동화시키는, 그 당시로선 이례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이로써 로마는 꽤 충성도가 높은 우방국들을 거느릴 수 있었다.

6. 역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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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관련 문서



[1] 라틴인과 친척뻘 되는 오스크움브리아계 민족이었다. [2] 다만, 고대 로마 트로이의 후예를 자처한 것을 에트루리아인의 기원과 결부시켜서 설명하는 가설은 있다. 출토된 에트루리아인의 유골을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미토콘드리아 DNA의 분석 결과로는 이탈리아 반도의 선주민이라는 결과가 나왔으나, Y염색체 하플로그룹 분석으로는 아나톨리아에서 이주한 민족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때문에 에트루리아인은 중부유럽에서 기원한 이탈리아 선주민들이 아나톨리아에서 온 이주민들과 혼혈하여 형성된 민족이라고 보인다. 가설에 의하면, 이를 후대의 로마인들이 자신들이 복속해있던 에트루리아의 영향과 더불어, 아나톨리아에 존재했던 트로이의 존재와 결부시켜서 자신들의 설화로 둔갑한 것이라고 한다. [3] 이는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영아를 살해하는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지금의 낙태와 비슷한 개념으로 원치 않은 임신으로 낳은 아이를 햇볕에 죽을 때까지 노출시키는 방법이었다. 이런 방식은 정부에서 묵인하였고 따라서 불법이 아니었다. 그러나 로마 인구를 늘리고자 한 아우구스투스가 법으로 금지하였고 훗날 기독교 국교로 채택되면서 살인으로 간주되기 시작한다. [4] 루파 카피톨리나(Lupa Capitolina) 즉 카피톨리누스 언덕 늑대 상이라고 불리운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늑대상은 AD 11~12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15세기 후반에 조각가 안토니오 델 폴라이우올로에 의해 쌍둥이가 추가되었다. [5] 실제 역사라고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6] 라틴족 친척뻘 되는 민족인 오스크움브리아족에 속한 민족 중 하나로,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 역시 사비니족의 일원이었다고 추정하는 학자들이 있다. 고대 로마 시대의 파트리키(전통귀족) 중 로마 건국 당시부터 함께한 발레리우스 가문, 2대 왕 누마를 시조로 둔 칼푸르니우스 가문, 4대 왕 안쿠스 마르키우스를 시조로 둔 마르키우스 가문, 종신 독재관 카이사르의 외가인 아우렐리우스 가문과 공화정 초에 귀순한 클라우디우스 가문이 모두 사비니계 로마 귀족들이며, 공화정기 노빌레스(명망가;평민귀족) 중 칼비시우스 등도 사비니인들이다. 여담으로 이 부족 출신들의 후손들은 대개 성씨(노멘) 뒤에 사비니 출신을 뜻한 사비누스를 자신들의 지파성씨(코그노멘)으로 삼고 이를 대대로 물려줬다고 하며, 로마에 귀순한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공화정 말까지 사비니 전통을 지켜나갔다고 한다. [7] 동맹시 전쟁 당시 로마에서 발행한 주화들의 문구와 로마 기록에 따르면, 로마-사비니인들 중 추방 내지 경쟁에 밀려 남이탈리아로 간 사비니인들이 삼니움이라고 한다. [8] "신참자"는 Novicius. 영어 Novice의 어원. nobilis는 함께하다(~with us)라는 뜻의 nosco 에서 나온 말로 아예 다른 단어다. # [9] 고대 사회에선 범죄자가 피난처로 지정된 도시로 가면 그에게 죄를 묻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비슷한 예로는 삼한 소도가 있다. [10] 완전 라틴 시민권은 투표권을 제외한 모든 로마인의 권리를 부여하는 시민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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