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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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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11월 독일의 공영TV인 ZDF가 독일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독일인 1백인’을 발표한 명단이다.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콘라트 아데나워 마르틴 루터 카를 마르크스 한스, 죠피 숄 남매 빌리 브란트
6위 7위 8위 9위 10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오토 폰 비스마르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1위~100위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아돌프 콜핑 루트비히 판 베토벤 헬무트 콜 로베르트 보쉬 다니엘 퀴블뵈크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콘라트 추제 요제프 켄테니히 알베르트 슈바이처 카를하인츠 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헬무트 슈미트 레진 힐데브란트 알리체 슈바르처 토마스 고트샤크 허버트 그로네메이어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미하엘 슈마허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 귄터 야우흐 디터 볼렌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얀 울리히 슈테피 그라프 사무엘 하네만 디트리히 본회퍼 보리스 베커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프란츠 베켄바워 오스카 쉰들러 네나 한스 디트리히 겐셔 하인츠 뤼만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하랄트 슈미트 프리드리히 대왕 임마누엘 칸트 패트릭 린드너 하르트무트 엥겔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힐데가르트 폰 빙엔 하이노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마를레네 디트리히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로베르트 코흐 요슈카 피셔 카를 마이 로리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루디 푈러 하인츠 에르하르트 로이 블랙 하인츠 하랄트 프렌첸 볼프강 아펠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알렉산더 폰 훔볼트 피터 크라우스 베르너 폰 브라운 디르크 노비츠키 캄피노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세바스티안 크나이프 프리드리히 실러 리하르트 바그너 카타리나 비트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프리츠 발터 니콜 프리드리히 폰 보델슈윙흐 오토 릴리엔탈 마리온 돈호프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로미 슈나이더 스벤 하나발트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빌리 밀로위치 게르하르트 슈뢰더 요제프 보이스 프리드리히 니체 루디 두치크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카를 레만 베아테 우제 트뤼머프라우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헬무트 란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알브레히트 뒤러 막스 슈멜링 카를 벤츠 프리드리히 2세 라인하르트 메이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하인리히 하이네 게오르크 엘저 콘라드 두덴 제임스 라스트 우베 젤러
출처
같이 보기 :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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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
[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ucas_Cranach_d.%C3%84._-_Martin_Luther,_1528_(Veste_Coburg).jpg
출생 1483년 11월 10일
신성 로마 제국 만스펠트 백국 아이슬레벤[A]
사망 1546년 2월 18일 (향년 62세)
신성 로마 제국 만스펠트 백국 아이슬레벤[A]
직업 목사, 가톨릭 수사 · 신부, 신학자, 작곡가, 교수[4]
학력 에어푸르트 대학교 (철학 / 석사)
비텐베르크 대학교 (신학 / 박사)
배우자 카타리나 폰 보라 (1525년 결혼 / 1499~1552)
자녀 요하네스 (1525~1576)
엘리자베트 (1527~1528)
마크달레나 (1529~1542)
마르틴 (1531~1565)
파울 (1533~1593)[5]
마르가레테 루터 폰 쿤하임 (1534~1570)
종교 가톨릭 개신교 ( 루터교회)
서명 파일:마르틴 루터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전반생 (1483~1516)
2.1.1. 사제 시기
2.2. 종교 개혁 시기 (1517~1525)2.3. 후반생 (1526~1546)2.4. 루터 사후의 종교개혁
3. 독일어에 미친 영향력4. 마르틴 루터의 가족
4.1. 아내 카테리나4.2. 독신과 결혼 가정관4.3. 개인적 일화들
5. 저작과 어록
5.1. 저작5.2. 어록
6. 루터와 동시대인들7. 평가
7.1. 개신교7.2. 가톨릭7.3. 정교회7.4. 성서학7.5. 기타
8. 비판9. 루터를 다룬 도서들10. 기타11.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clearfix]

1. 개요

독일의 신학자, 종교개혁가. 본래 로마 가톨릭 수도회 아우구스티노회 소속 수도 사제였으나, 가톨릭 교리에 반발하여 끝내 파문당하고 독자적인 노선에 투신한 인물이다. 현존하는 모든 개신교 교파들이 루터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루터의 가르침을 직접적으로 계승하는 교파로는 루터교회가 있다.[6]

성공회에서는 10월 31일을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가들의 기념일로 기념한다. 루터회에서는 2월 18일.

2. 생애

2.1. 전반생 (1483~1516)

1483년 11월 10일 만스펠트 백작령 아이슬레벤[7]에서 아버지인 한스 루더(Hans Luder, 1459 ~ 1530)[8]와 혼전성이 린더만(Lindermann)인 어머니 마르가레테 사이에서 7남매(혹은 9남매) 중 장남(혹은 차남)으로 태어났다.

마르틴 루터가 태어난 다음 해, 루터의 가족은 만스펠트 시로 이사했다. 아버지 한스 루더는 원래 튀링겐의 농부 집안 출신으로, 15세기와 16세기 독일에서 한창 수익이 높았던 광산업에 투신하여 단순 노동자에서 제련업자가 되고 광산조합의 출자자까지 되는 사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마르틴은 평민 집안의 태생이지만 집안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1490년 만스펠트 시립학교에 다녔고, 7년 후 마그데부르크의 돔슐레 기숙학교에 진학했으며, 1년 후 아이제나흐 라틴어 학교에 진학했다. 학교에 다니면서 당시 학풍에 따라 상급학교에서도 예외 없이 매질을 많이 당했는데 훗날 교육이론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1500년경 만 16세에 라틴어 실력을 인정받고 후원자의 추천을 받아 에어푸르트 대학교에 진학하였다. 대학 기초과정을 시작하여 1년여 만에 예과 과정을 철학 학사학위(Bakkalaures der Philosophie)를 받고 졸업했고, 1505년 초반 석사학위(Magister)를 받고 졸업했다. 당시 중세 대학은 박사학위를 개설한 과정은 신학, 의학, 법학 단 세가지 학위 뿐이었고[9] 루터의 아버지는 자식의 세속적인 출세를 열망했기에, 루터는 아버지의 강권으로 억지로 다시 법대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다니게 된다. 마르틴 루터의 아버지는 자식이 법학 박사 학위를 따서 출세하는 것을 꿈꿨다고 한다. 이 시기 평민들의 전형적인 출세 코스는, 법대를 나와서 법관이 되든가 고급 관료로 임용되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이상의 관직에 오르면 당대에는 귀족과 같은 신분으로 대우받기에. 이미 지역 유력가 집안에서 며느릿감까지 구해놓을 정도로 열성이었다.

루터는 법대에 진학한 지 몇 달 후인 7월 2일 에어푸르트 근처를 지나는중에 강한 벼락이 내리치자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이에 성모 마리아와 광부들의 수호자인 성 안나[10]에게 도움을 청하며 맹세했다.[11] 루터는 "성 안나여, 저에게 힘을 주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저는 수도자가 되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다고 한다.

그리고 2주 후 자신의 맹세를 지켰다.

한스 루더는 비싼 돈 들여 교육시킨 아들이 수도자가 되겠다는 소리에 벌컥 화를 냈고, "그딴 건 벼락이 아니라 사탄의 소리다!"라며 반대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입회하여 수사[12]가 되었고 사제로 서품된다. 그 결과 아버지와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고 몇 년간 의절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루터의 남동생 둘이 나란히 돌림병으로 죽자 아버지의 마음도 약해졌고, 루터가 1507년 사제로 정식 서품되고 나서 첫 미사에 참례했다.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 화해는 했는지, 한스가 큰돈을 써서 잔치를 벌여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루터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제가 되었다고 하자 아버지 한스는 " 십계명의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을 어겼기에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며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이 말은 루터의 마음에 오랫동안 비수처럼 박혀서, 훗날 환속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된다.

다행(?)히도 한스는 상당히 장수하여 1530년까지 살며, 아들이 (비록 법관은 되지 못했지만 다른 방면으로) 거물이 되고 환속 후 결혼(1525년)해서 손주까지 보는 복을 누렸다.

다만 이런 체험만으로 수도자가 되기로 작정한 것은 아니었다. 루터는 소년 시절부터 수도생활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고, 높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탁발수도자로 살아가는 안할트 후작 빌헬름( 프란치스코회 탁발 수도자) 같은 사람에 대해 경건한 마음이 들었으며, 속세에 있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 했다고 전해진다.

루터의 증언으로도 대학 시절에도 사고로 칼에 찔려 다리 동맥을 다쳐서 거의 죽을 뻔한 체험도 있었고, 에어푸르트 시절 종교적인 번민으로 우울함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수도생활을 동경했다고 회고했다.

수련기가 끝나고 마르틴 루터는 1505년 수도서원을 했고, 1507년 정식으로 사제로 서품되었다[13].

2.1.1. 사제 시기

루터는 '청빈, 정결, 순명'[14]이라는 전통적인 수도생활에 전력했다. 오히려 규율을 너무 철저히 지켜서 문제가 되었다. 철저하고 엄격하기 그지없는 수도생활을 하면서도 "이 정도론 구원받기에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고민에 빠졌고, 근심과 걱정이 계속되었다. 사흘 동안 빵 부스러기도 먹지 않는 금식기도를 하거나, 1주일 동안 밤잠을 안 자고 철야기도로 밤을 지새울 정도였다.

루터에게는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느냐 하는 큰 고민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 루터의 장상이자 고해신부였던 요한 폰 슈타우피츠(Johann von Staupitz,1460년- 1524년) 신부는, 악마에 사로잡혔다는 악몽에 고생하는 루터에게 "자네의 하찮은 죄는 그냥 두게! 하느님께서 자네에게 벌주는 게 아니라, 자네가 하느님께 화를 내는 게 아닌가!"라며 루터를 진정시키기는 한편, 다른 방법으로 루터에게 신비주의 서적과 성경을 연구해 볼 것을 권했다. 슈타우피츠의 권유에 따라 신비주의 서적에는 잠시 공감을 표했다가 신학적 방향이 다름을 깨닫고 멀어졌고, 루터는 사도 바울의 서간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510년 11월 수도자 신분으로 수도회의 업무 처리를 위해 6개월간 여행했고, 그 와중에 로마 순례도 했다. 4주간 로마에 머무르며 당시 순례객들이 행하던 대로[15] 바티칸 교황청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의 일명 ' 본디오 빌라도의 계단'이라 불리는 28계단을 주기도문을 외우며 무릎을 꿇고 기어오르기도 했다.[16] 그러나 계단에 오르면서도 "이것이 진짜일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라 생각했고, 마지막 계단 위에 오르고서도 아무런 것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여기서 훗날 발표하게 되는 신학적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17]

그러던 중 로마서의 1장 17절, " “복음에는 하느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구절을 수년간 붙잡고 늘어진 끝에 그의 갈증은 일거에 해결되었다.[18] 점점 "인간이 어떤 선행을 한다거나 자신의 힘으로 죄를 씻고 하느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는다[19]."는 생각을 점점 굳혀나갔다.[20]

루터는 에어푸르트를 떠나기 싫었으나 스승이자 상관 슈타우피츠가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요청에 따라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기에 같이 따라서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신학과정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역시 슈타우피츠와 대학의 요청으로 1508년부터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강사로 임용되어 강의를 하게 되었다. 에어푸르트 대학교 시절에도 철학학위가 있기에 수사학, 라틴어, 그리스어의 학문적인 기초는 있었고 이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1509년부터는 성서학 박사(Doktor der Heiligen Schrift) 과정을 이수했고, 1512년에는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다음 해에는 교수로도 임용된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노회 수사들 중에서도 고학력에 속했기 때문에, 다른 사제들로부터 루터의 사제서품과 진급이 너무 빠르다는 불평이 나올 정도였다. 실제로 부제에서 사제서품까지 겨우 2달 만에 될 정도.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사제 시절, 루터의 장상이자 고해신부였던 요하네스 폰 슈타우피츠 신부는 개혁 성향이었기 때문에, 루터는 슈타우피츠 신부의 지원을 받아 수도회 내에서도 많은 지지를 받았고 대학에서도 신학적으로 존경받았다.

1515년 루터는 자신이 몸 담은 '검은 수도원'을 비롯해 독일 내 아우구스티누스 은둔자 수도회의 학문연구 책임자 겸 11개 수도원을 감독하는 직위에까지 올랐다. (슈타우피츠는 아우구스티노회 독일관구 전체를 총괄하는 주교대리였다.)

2.2. 종교 개혁 시기 (1517~1525)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 재물 명예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새찬송가 585장, 마르틴 루터, 1529

루터의 일생과 유럽 역사를 바꿀 사건의 전조는 1515년, 독일[21]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중세 교회의 면죄부( 대사)였다.[22] 루터는 당시 작센 선제후국의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신학교수이자 수도사제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근처 마그데부르크에서 면죄부 판매 행렬이 있었고 작센 선제후국의 신자들까지 소문을 듣고 면죄부를 사러 다니는 형편이었다. 당연히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건은 이유가 있었다.

루터는 평소 동료 수도자들과 신학 교수들에게 면죄부에 대해 신학적으로 비판했고, 대체적으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루터는 면죄부의 유효성은 인정하였으며 대사 논쟁의 의의는 '은총의 무상성'이라는 종교개혁의 핵심 논쟁의 도화선을 제공했다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루터 뿐만이 아니라, 후대의 개신교 역시도 가톨릭과의 교의적 차이는 '대사'가 아니라 은총론, 성사론, 교회론이 핵심이었다. 1516년부터 루터는 면죄부의 위험성을 지적했고, 1517년 2월 설교에서도 대중들에게 면죄부에 대해 비판했지만, 이때는 별 반응이 없었다. 4월부터 작센 근처에서 면죄부가 팔리자, 본격적인 아우구스티노회 수사들과 동료 신학교수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지지를 얻어냈다. 9월에는 97개조의 ≪스콜라신학에 대한 논박, Disputatio pro declaratione virtutis indulgentiarum≫을 저술하여 자신의 주장에 대한 이론적인 근거도 제시했다.

브란덴부르크 주교 제롬(1490 ~ 1565), 마그데부르크 대주교 알브레히트, 마이센과 프랑크푸르트 자이츠의 주교들에게도 파렴치한 신성모독을 중지할 것의 내용의 항의 편지를 보냈지만 원흉인 알브레히트는 이를 넘겨버렸고, 요하네스 테첼(Johannes Tetzel, 1465~1519)은 소식을 듣자 논문을 통해 루터를 이단으로 간주했다.[29] 결국 이 편지 내용을 바탕으로 모든성인대축일(11월 1일) 전날인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 앞에 있는 '모든 성인 성당'의 문에 팩트체크의 역할을 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다.[30] 굳이 교회 문에 내건 이유는 '교회에 정면으로 도전하겠다' 따위의 상징적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당시 교회의 문은 일종의 게시판 역할도 했기 때문이다.

교회 문에 때려박은 반박문은 당시 지식인의 언어인 라틴어로 되어 있었다. 당시 교황청에서는 당시 사태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고 일단은 무시했으나, 때마침 50여 년 전 발명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인쇄술 덕분에 이 반박문의 번역본이 불과 14일 만에 비텐베르크에서 제국변경 알자스 스트라스부르 스위스 바젤은 물론 제국 너머 독일 기사단국 쾨니히스베르크까지 독일어권 전역에 퍼졌다.[31]

당시 교황청은 매우 복잡한 사정들을 가지고 있었다. 1517년 레오 10세가 사랑하는 조카 로렌초를 우르비노[32] 공작으로 꽂아주려고 전쟁을 벌여서 2년 간 전비로 80만 두카트를 지출하여 파산 직전에 몰렸고, 재정난 타개를 위해 7월에 한꺼번에 31명의 추기경을 서임할 정도였다.(당연히 메디치 가문의 친족도 꽂아 넣었다.)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내건 날에는 교황 암살스캔들이 번져서 더 정신이 없었다.[33]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교황청에서 루터에게 손대기 난감한 점이 있었다. 당시 황제였던 합스부르크 가문 막시밀리안 1세는 노환으로 오늘내일 했고, 곧 황제 선거가 가까웠는데 레오 10세는 그동안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막시밀리안 1세의 장손자[34]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 대신 루터에 공감하던 베틴 가문의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를 새 황제로 점찍었기 때문이다.

해를 넘겨서 1518년이 되었고, 도미니코회와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는 루터가 이단이라고 교황청에 고발했다. 교황청은 먼저 아우구스티노회에서 자체적으로 수습하길 바랐으나, 1518년 4월 팔츠 선제후국의 수도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린 아우구스티노회 총회에서조차 루터의 주장에 찬성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35] 루터는 하이델베르크에서 기존 중세 스콜라 철학과 면죄부 판매에 오염된 가톨릭 견해를 반박하는 28개조 논제를 제시했고 독일 아우구스티누스회 대부분의 수도사제와 남독일 지역 다른 수도회나 교구 사제들마저 대부분 루터에 찬성하는 의견으로 돌아섰다. 28개 논제는 다음과 같다.

교황청에서는 사건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레오 10세는 칙령을 내려 '대사의 효력과 판매 권한'에 대한 논쟁을 금지하고 어기는 자는 파문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와중에도 1518년 4월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는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루터는 이에 불복했고 파문당했다. 신학적으로 면죄부의 효력에 대해 부정했기 때문에 면죄부의 효력을 오인한 일반 신자들이 면죄부에 의존하면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을 테고, 그렇다면 죄는 그대로인 채 신자가 죽게 되면 진짜 심판에서는 지옥행일 텐데, 성직자가 되어서 양심상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논리였다.

교회에선 일단 분란의 책임을 물어서 회개와 순명을 명했으나, 루터가 교회에서 명한 회개 자체를 거부하자 교황은 그를 로마로 잡아와 종교재판에 회부하려 했다. 루터가 로마로 소환되면 죽을 것이 뻔했으므로 비텐베르크를 다스리는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이 조치를 무시했다. 선제후는 비록 루터의 신학적인 면은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37] 그럼에도 루터를 끝끝내 보호했는데, 이는 중세 대학이 광범위한 자치권을 누리고 있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루터가 재직했던 비텐베르크 대학교는 프리드리히 3세가 설립한 학교였고, 통치자의 입장에서 루터를 보호할 책임이 존재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책임이 있다 해도 작센 선제후 정도 되는 고위귀족인 프리드리히 3세 입장에서 귀족도 아니고 평민 출신인 루터를 황제와 교황의 압박에도 보호한 것은 당시 기준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고, 때문에 후대 개신교인들은 프리드리히 3세를 매우 높게 평가한다. 결국 프리드리히 3세의 중재로 로마에 가는 대신 남독일의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교황의 특사인 카예탄(Cajetan) 추기경[38]에게 심문을 받는 것으로 대체하기로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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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의 심문에서 카예탄은 추궁과 번복을 요구했으나, 루터는 거부하고 토론을 요구했다. 루터는 " 95개조 반박문의 문체와 어투가 정중하지 못한 건 사과하지만, 내용이 성경적 진리에 벗어나지 않는 한 철회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카예탄은 95개조 반박문의 내용을 반박했고 대사의 권한이 사도전승과 가톨릭교회의 전통에서 비롯되었다는 교황의 권위를 앞세운 반면, 루터는 공의회와 성경의 권위가 교황보다 더 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3차례의 심문은 평행선을 달리며 입장차이만 확인했고, 이런 이견들은 교황청에서 용납할 수 없는 주장이었기에 더 이상의 심문은 불가능했다. 심문 후 루터의 반대자들이 살해 음모를 꾸몄고, 추종자들이 알려주자 루터는 밤중에 아우크스부르크를 탈출했다. 비텐베르크로 가는 도중 뉘른베르크에서 카예탄 추기경이 자신의 체포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듣는다.

결국 루터의 체포에 실패한 카예탄은 교황 레오 10세의 친서와 교황청이 세속제후에게 내리는 최고의 선물인 황금 장미장(Golden rose)[39]을 프리드리히 3세에게 보내며 원하는 인물을 추기경으로 밀어주겠다는 제안과 "루터를 로마로 넘기거나 작센에서 추방하라"고 편지를 보냈지만, 프리드리히 3세는 교황의 친서를 무시했고, 루터를 보호했다. 이후 교황의 특사로 온 밀티츠 추기경은 루터의 보호자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에게 루터를 로마로 넘길 것을 설득했다가 실패했고, 결국 루터를 직접 만나 대화한 끝에 상호 간에 공적으로 침묵하는 걸로 넘어가려 했다.[40]

하지만 잉골슈타트 대학교의 신학교수인 요하네스 에크(Johann Maier von Eck, 1486년~ 1543년)[41]가 ≪단검표(Obelisci)≫라는 논문으로 루터를 이단으로 기소했고, 1519년 7월 라이프치히에서 에크와 루터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루터는 토론 와중에 1세기 전 보헤미아 왕국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의 주장을 근거로 사용했고, 상대편에서 후스는 이단으로 화형당했음을 경고 했다.[42] 그러자 루터는 "교황의 권위뿐만 아니라 공의회조차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면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중심이 된다고 주장했다.

사실 라이프치히 대학교 신학부는 15세기 보헤미아 얀 후스 시기 프라하 대학교에서 밀려난 독일인 교수들이 주축이 되었기에 얀 후스의 견해에 극도로 격앙되었고, 라이프치히의 지배자는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사촌이긴 하지만, 영지 문제 등으로 충돌을 벌여 갈등 관계였던 작센 공작 게오르크(Georg der Bärtige 1471~1539)의 영지였기 때문에 루터는 선제후가 보낸 20명의 무장병력이 아니었으면 무사히 빠져나오기 어려울 정도였고, 실제로 토론장에서 공의회 교황무류성을 부정하자 죽이라는 함성이 거세졌고 더 이상의 토론은 불가능해졌으며 황급히 라이프치히에서 탈출해야만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루터는 점점 가톨릭교회와 멀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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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에크는 라이프치히에서 벌인 논쟁의 보고서를 통해 교황으로 하여금 루터를 파문하도록 했다. 결국 1520년 6월 24일, 교황 레오 10세는 정죄 교서 <Exurge Domine(주여 일어나소서!)>를 발표해, "60일 이내에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선포하였다. 이 교서는 기도문의 형식을 빌려서 "주님의 포도밭에 멧돼지 1마리가 날뛰고 있나이다!!"로 시작하는데, 이 멧돼지는 물론 루터를 뜻한다. 이에 맞서 루터는 교황의 교서와 가톨릭교회 법전을 불태우며 로마 교회와 완전히 결별을 선언한다.

루터는 또한 자신의 신학관을 명확히 정리하여 초기 3대 저작으로 꼽히는 ≪독일 기독교인 귀족에게 고함≫, ≪교회의 바벨론 유수≫,,≪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를 발표하여 전통주의가 복음을 막고 있다며 교황의 수위권 등을 부정하고 나아가 사제제도까지 폐지를 주장한 만인사제론, 7성사 세례성사 성체성사를 제외한 나머지 5개를 폐지할 것 등을 주장하여 가톨릭과 전혀 다른 독자적인 체제를 선포한다.

이듬해인 1521년 1월 3일, 레오 10세는 교서 <Decet Romanum Pontificem(로마 교황은 이렇게 말한다)>를 발표해 루터를 파문했다. 루터를 지지한 작센 선제후는 루터가 파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보름스에서 열리는 제국의회에 설 수 있도록 주선했다. 카를 5세는 황제선거 때 자신에게 투표한 작센 선제후의 체면을 존중해서 루터의 신변을 보장하겠다고 했지만, 이미 파문당한 루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이미 1414년 독일왕 지기스문트[43]의 신변보장을 받은 얀 후스도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했다가 재판 끝에 이듬해 화형당한 선례가 있어, 루터의 주변에서도 보름스에 가는 것을 말렸다. 루터도 이 여행에 확신이 별로 서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교회와 로마교황청에 반감을 가진 독일 민중들 사이에서 루터는 이미 시대적 영웅이 되었고, 여행 도중 루터의 방문지마다 열광적인 지지자들이 나타나면서 개선 행렬이 되었다.

특히 루터가 수학했던 에어푸르트에 나타나자, 대학학장이 선두에 나타나서 루터를 영접했다.

루터는 지지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저는 사람들이 이것을 잘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진실을 말할 것이며, 이를 반드시 행해야만 합니다!!"라고 설교했다. 실내에서 설교 중, 많은 사람들이 모인 탓에 2층 골마루가 삐걱거리자 사람들은 공포에 질렸다. 루터는 이것은 악마의 장난질에 불과하다고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루터는 에어푸르트에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선제후 궁정에 "기왓장 밑에 있던 악마들보다 보름스에 훨씬 더 많은 악마가 기다린다 해도 가겠다!"고 답장을 썼다.

1521년 4월 16일 루터는 보름스에 도착했다. 도착시간이 저녁이었지만 도시 인구보다 많은 2만 명의 인파가 운집했다고 한다. 다음 날 출석을 앞두고 당시 루터와 뜻을 같이 했던 에라스뮈스의 지지자들이 타협을 권했지만 루터는 거부했다. 다음 날인 4월 17일, 루터는 보름스 제국의회에 출석했다. 낯선 사람들의 앞에서 루터는 매우 수줍어하며 떨었다고 청중들은 전한다. 그러나 면전의 높은 관리들 앞에서는 당당하였다고 한다.

선제후 트리어 대주교[44]의 고문관이 루터에게 첫 질문으로 "책의 저자가 맞는가??"를 물었고, 2번째로 "책의 내용을 철회할 뜻이 있는가??"를 질문했다.

루터는 첫 번째의 질문에는 "내가 쓴 저작이 맞다. 다른 저작들도 더 있다."고 대답하였고, 책의 내용들을 설명했다. 2번째 질문에 대해선 "입장을 정리하게 하루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밝혔다.[45] 심문자들은 분노했지만, 공정한 재판으로 보이기 원했기 때문에 상의 끝에 구두로 직접 답변할 것을 조건으로 허락한다.

다음 날인 4월 18일, 루터는 전날 답변하지 못한 2번째 질문에 답했다.[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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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er stehe ich, ich kann nicht anders.
여기에 서 있는 저는, (양심과) 달리 행동할 수 없습니다. (짧은 탄식 후에)
Gott helfe mir! Amen.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 아멘.
보름스 회의의 공식 기록은 이상의 2마디이나, 청중[47]들은 다음 연설을 들었다고 전한다.
폐하께서 분명한 답변을 원하시니 다음과 같이 공손히 대답하겠습니다. 나는 성경의 증언을 통하여, 또는 분명한 이유에 의하여 승복되기를 원합니다. 교회나 공의회는 자주 실수하고 자가당착에 빠져 있는 것이 확실하며, 이들만으로는 믿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서나 명백한 이성적 근거라는 증거를 통해 제가 설득될 수 없다면, 그렇다면 저는 저로부터 나온 말을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제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는 한, 저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을 거스르는 일은 위험하고 불행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저를 도우소서. 아멘.

독일왕 카를 5세는 아이러니하지만 독일어가 짧았기에[48] 추기경에게 " 공의회가 틀렸다고 한 것인가??"라고 물어봤고, 루터가 끼어들어 "예."라고 답변했다. 이에 황제는 발언 시간을 요구한 후 "루터는 공공연한 이단"이라며 그의 신학적 주장에 대해 반박하는 열변을 토했지만, 이미 청중들은 루터를 연호하며 상황이 기운 상태였다. 결국 루터의 주장을 철회시키려는 의도는 실패했지만, 당초 약속대로 루터의 신변을 보장하겠다고 말하며, “3주 내로 비텐베르크로 돌아갈 것이며, 도중에 설교나 연설을 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고, 3주 후에는 다른 조치가 있을 것이라 예고했다. 황제 측은 루터에게 즉각 떠나길 명령했고, 작센 선제후는 3일간의 토론 시간을 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루터는 동료들과 은밀히 보름스를 탈출했고, 카를 5세는 "루터는 법 밖에 있다!!"고 선언했다. 이어서 루터와 루터의 추종자에 대한 제국시민의 공민권을 박탈하는 명령인 제국 추방령이 내려졌고[49], 루터에게 숙식과 안전을 제공하는 것도 칙령으로 금지했다. 이는 루터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누구든 루터를 죽여도 살인죄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루터는 행방불명되었다. 독일 내 많은 이들이 루터가 죽었다고 생각했으며,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추모했다.

그러나 사실은 루터가 밤중에 탈출하자,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루터가 살해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부하들을 시켜서 루터를 뒤따르게 했고, 명령을 내려서 복면을 쓴 수하들이 루터를 납치하여 바르트부르트 성으로 데리고 가게 한 것.[50] 그곳에서 루터는 하인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소문이 나지 않게 기사 게오르크로 신분을 위장하여 수도복을 벗고 긴 수염을 길렀다. 루터는 10개월 동안 성 안 요새에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다.[51]

성서는 다음 해인 1522년 9월 라이프치히에서 초판으로 출판되었고, 독일어 성경 루터번역판은 전 독일에 퍼지며 종교 개혁의 불길을 들불처럼 번지게 만들었다. 바르트부르크에서 지내는 동안 수도서원도 철회하고, 아버지에게 사과 편지도 썼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제가 된 불순종에 사과하며, 그렇지만 소년 시절의 맹목적인 순종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밝혔다.

1521년 겨울 비텐베르크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다른 신학교수 안드레아스 칼슈타트, 츠비카우의 예언자들, 토마스 뮌처라는 급진 개혁가들이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성경도 필요 없고 직통으로 하늘의 계시를 받는다는 신비주의적 이론 등을 주장하였고, 사제계급은 인간의 제도로 없어져야 된다는 주장에 더 나가서 루터가 주장한 설교자이며 교육자( 목사)의 존재도 필요 없다고 주장하게 된다. 루터의 추종자이자 동료였던 필리프 멜란히톤은 우물쭈물해서 사태를 수습하지 못하고 있었다.[52] 비텐베르크의 혼란을 전해 듣고, 루터는 선제후에게 "나를 보호하려는 의도는 고맙지만, 황제의 칙령대로 체포당하는 것을 막지 말고 순종하라"며 석방을 요구했고, 1522년 3월 9일 다시 비텐베르크에 나타났다.[53]

루터는 비텐베르크 말고도 2가지 위협에 직면했다. 자신의 거주지인 작센 선제후국은 다행히 선제후가 자신을 지지해주었기 때문에 종교 개혁이 탄압받지는 않았지만, 근처 브란덴부르크와 마그데부르크에서는 시민과 농민들의 종교개혁 요구를 제후와 영주들이 탄압하고 나섰고, 그에 반발한 급진적 성향의 개혁가들이 오히려 힘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평화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오히려 필리프 멜란히톤과 느긋하게 맥주를 퍼먹으며 주적인 교황을 칭찬(?)하면서 원칙을 세웠는데, 실질적이고 독자적인 개혁을 구상했다. 먼저 '교회의 개혁은 온건해야 하고 폭력을 배제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비텐베르크에 오자 8일간의 설교로 급진주의자들을 자제시켰는데, '교회는 사랑이 있어야 하고, 급진적인 개혁은 믿음이 약한 형제들을 흔들리게 할 수 있다 는 점을 고려해야 된다'고 역설했다.

과격주의자들의 논리에 반박하여 다음 해인 1523년 ≪정부에 대한 글 (obrigkeitsschrift)≫을 발표하며 구체적으로 두 정부론(두 왕국론)에 대한 이론서를 출판했다. 구체적으로 세속정부에 대해, 그들에게 어느 정도 복종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영적인 세계와 세속적인 세계 모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이며 급진개혁파와 재세례파가 주장하듯이 세속적 영역은 악마나 사탄이 통치하는 왕국이 아니다.[54] 하나님이 먼저 교회를 만들어 영의 정부를 만들었고 여기에선 만인이 평등하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모두 선한 자가 아니고 국경밖엔 이교도들이 있기에, 인간 세상의 세속정부는 여러 분쟁을 조정하고 외부로부터 기독교 문명을 보호하기 위해 법과 검으로 통치해야 하며, 여기에서 인간은 세속정부의 불평등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때 루터의 추종자였던 토마스 뮌처와 많은 농민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농민들의 반란에서 처음에는 영주들과 농민들의 상호 양보와 포용을 요구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과격한 양상을 보이자 “ 광포한 독일 놈들은 패야 말을 듣는다”며 강력한 진압을 찬성했다.[55] 이 때문에 당시와 현재까지 비판을 많이 받았다. (자세한 것은 비판 항목에서.)

결국 영적인 정부와 세속적인 정부와의 구분은 독일 제후들에게 지지까지는 아니지만[56]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고, 훗날 루터교회로 개종하는 제후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루터는 칼슈타트와 토마스 뮌처, 츠비카우의 예언자들에 대한 반대 입장이 확고했다. 먼저 칼슈타트를 논쟁 끝에 추방했다. 혼란으로 무정부 상태 타령은 과장된 소리였다.[57], 7성사에서 세례성사 성체성사를 제외한 5개 성사 폐지는 농민들과 시민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사제들이 성사를 집전하면서 부당한 금전수취를 많이 했기 때문.[58] 성찬과 전례의 개혁은 시간을 두고 진행했는데, 화체설(성변화)이니 공재설이니 하는 것은 기존의 신자들에게 시민계층이야 알아먹겠지만, 대다수를 차지하는 무지한 농부들은 새로 가르친 독일어 주기도문이 너무 길다고 불평했으며, 기존의 사제들이 라틴어로 중얼중얼 하는 것을 주술적 효과가 있다고 믿었었다. 기존의 잘못된 관행으로 가톨릭교회에서 성체성사 때 준 성체(밀떡)를 입에서 몰래 꺼내서 집에 귀신 쫓는 용도로 쓰는 등, 기존의 미신적 관행에 대한 전통이 깊었기 때문이다.

수도원 수도자들이 자진해서 나가는 바람에 텅 비는 경우가 많았고, 기존의 남녀 수도자들을 처리(?)하기 위해 루터가 많이 한 것이, 수사들을 취직(대부분 목사로)시키고 수녀들을 시집보낸 것이었다. 나이 든 수도자들은 갈 곳도 없고 해서 수도원에서 그대로 지내게 되었고, 자연스레 그들이 죽으면 수도원은 학교나 새로운 교회의 장소로 활용했다. 비텐베르크에서의 종교 개혁은 차츰 자리를 잡았고, 새로운 교회의 예배 의식과 목사 양성은 루터가 후반 생애에 중점을 두고 시행했다.

츠비카우의 예언자들과 토마스 뮌처에 대해서는 더욱 단호했는데, 루터는 이들에 대해 "사회ㆍ정치적으로 실현될 수 없는 꿈을 추구하는 자들로, 영적인 평등이라는 명분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루터는 "이들 광신도 집단은 교회와 세속 국가를 동일시함으로써 종교와 사회를 해체시킨다"고 여겼다. 특히나 영적계시 타령하면서 하나님께 직통으로 계시를 받았다며 예언자 드립하는 이들은 자신이 자주 공격한 교황과 다름없는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이들을 놔둘 경우 교황의 복제판이 출몰할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토마스 뮌처는 초반에 루터의 명성보다 지지받지 못하자 1524년부터 남독일 슈바벤 지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봉기가 일어난 독일 농민의 봉기 와중에 뮌처도 합류했고 튀링겐과 프랑켄 지역을 돌며 농민들을 선동했고, 이 파급력은 퍼져나갔다. 1525년 교황청 정벌과 가톨릭교회 공격, 영주ㆍ지주들 살해와 사유재산 폐지, 무신론자 척살 등의 기치를 내걸고 영주들에 대항하다 패망한다.

남은 과격 재세례파[59]이 세속 정부를 부정하며 반란을 일으키고, 영주들을 가나안인으로 농민들을 선택받은 백성으로 선동하며, 살인을 비롯한 모든 수단을 합리화하여 도시를 점거하여 지상에서 천년왕국을 건설한다며 일부다처제 신정국가[60]를 만들려는 행태를 보였고 루터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네덜란드의 인문학자이며 당시 최고 석학이던 에라스뮈스와는 한때 학문적으로 가까운 사이였다. 루터보다 앞서서 유럽의 지성으로 칭송받았던 에라스뮈스의 인문주의 성향과 원전 연구가 루터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했으며, 루터의 가톨릭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에라스뮈스가 변호하는 일도 있었다. 에라스뮈스 판 그리스어 원어 신약성서는 루터가 독일판 번역을 할 때도 다수 참조할 정도이다.

하지만 종교개혁보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가진 가능성을 긍정하며 가톨릭교회를 온건하게 개혁하기를 바랐던 에라스뮈스와 달리, 루터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가진 가능성을 부정하며 가톨릭교회의 중세 신학을 정면으로 파괴하기를 원했다. 결국 두 사람은 학문적 반박에서 시작하여 점점 오고 가는 말이 험악해지더니, 글과 발언으로 서로 진흙탕 싸움을 벌이다가 학문적으로 결별하게 된다.[61]

2.3. 후반생 (1526~1546)

1525년 이후의 루터의 행적은 일반 역사서에서나 종교개혁을 다룬 서적에서까지 거의 나오지 않는다. 1525년 농민반란이 진압되고 민중의 지지를 잃자 거의 역사에서 퇴장한 취급이다. 그러나 루터는 20여년을 더 살면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먼저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자신이 거주하는 작센 선제후국의 비텐베르크에서 새로운 교회의 기초를 다지는 일이었다.

새로운 교회를 위해서 ≪독일 미사와 예배규정≫을 저술했고, 작센 선제후국에 개신교 지방교회(Landeskirche)를 설립하는데 주력했다.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가의 사명을 받아들였다. 종교개혁을 한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 당연한 게, 작센의 새 교회는 예수- 12사도- 사도 바울-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지는 올바른 옛 교회의 전통을 그대로 전승한다고 생각했고, 기존의 가톨릭에 대해선 사도전승과 교회전통이 끊어진 거짓된 새 교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를 근거로 루터교회라는 명칭 자체는 거부한 게 맞다. 가톨릭교회의 명칭인 보편교회[62](가톨릭)이란 용어도 쓰지 않았다. 앞서 농민전쟁 때 비판받았던 '두 정부론 (두 왕국론)'의 연장선상으로, 교회는 교황청처럼 중앙집권적 조직이 아니라 각 제후와 영주들이 다스리는 지방 또는 지역 교회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루터교회라는 명칭에 대해 루터의 의견은 이렇다.
사람들이 제 이름을 언급하지 않기를…
형제들은 자신을 루터적이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적이라고 하기를 바랍니다. 루터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교리는 절대 제 것이 아닙니다. 저는 누군가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자녀가 제 이름으로 말해지는 것을, 이 가련하고 냄새나는 사멸한 육신인 제가 어떻게 견딜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니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친애하는 친구들이여 우리 편파적인 이름을 버립시다.
우리를 그리스도 교도라고 부릅시다. 우리는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지지자와 교회는 반대편에게 '루터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 '루터 추종자(Lutheran)'란 말로 불렸고, 루터와 그의 지지자들 역시 가톨릭 신자들을 로마와 교황의 숭배자라며 '로마 추종자', '교황 추종자'라고 부르면서 각자 '루터교도'와 ' 로마교도'로 불리게 된다.

루터는 오늘날 작센과 튀링겐 지역의 설교자로도 활약했다. 7년여 동안 하루 평균 1.5번의 설교를 했는데, 당시 교통수단은 도보나 마차였고 엄청난 양의 저술, 교회활동, 각국 신학자들과의 편지 왕래,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수직도 계속 했기 때문에, 격무를 견디지 못하고 설교 중단을 선언한다. 그 후로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특별한 날이 아니면 직접 설교를 하지 않았다.

종교개혁으로 남독일과 스위스 지역까지 루터의 의견에 공감하여 개혁 노선이 생겨났는데, 스위스의 울리히 츠빙글리가 대표적이다. 이들 남독일 제국도시들과 스위스 동맹은 츠빙글리로 대표되는데, 초기 루터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체적인 노선이 생겨났고, 1527~1529년 루터는 성만찬 관련 논쟁에서 이들 개혁세력들과 일치를 보지 못했다. 1529년 마르부르크에서 헤센 방백 필리프 1세의 주선으로 츠빙글리와 루터파 신학자들이 모여 종교개혁 시기 당시 개신교의 단일화를 추진했으나, 성만찬에 대한 루터와 츠빙글리 상호의 완강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또한 성경에 명시되지 못한 전통(아디아포라)을 어디까지 수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도 벌어졌다. 다만 잘못 알려진 사실로, 루터가 성상 철거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도리어 루터는 초기 구약시대 유대왕국 히스기야 왕이 모세가 만든 구리뱀을 작살낸 것처럼 성상도 철거할 수 있다 보았는데, 그렇다고 츠빙글리나 칼뱅처럼 성상을 적극적으로 금지한 것도 아니고 성상이 성경말씀을 대체하여 남용되는 것을 경계한 것에 가깝다.[63] 그리고 현재 루터교회에 성상을 사용하는 전통이 일부 남은 것은 아우크스부르크 회의 등에서 황제에게 이단 논란을 피하려고 한 정치적 타협의 성격도 컸다. 루터는 성화를 어디까지나 미술품의 가치만 있을 뿐이지, 그것이 미신적 공경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단지 교회에는 사랑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무기를 들고 파괴하는 것은 아직 구습에 물든 믿음이 약한 형제들의 반발을 부르는데다가 상해와 재산피해가 동반되기 때문에 교회에서 이런 행동을 자제해야 한다고 말린 것이다. 특히 성상의 핵심중의 핵심인 예수 십자고상을 공공연히 반달하는건 일반 대중에게 사탄숭배자로 몰리기 딱 좋은 짓이라 성모마리아 형상을 치를 떨면서 혐오하는 오늘날 강경 개신교도들도 쉽게 하지 못할 일이다. 따라서 교인들이 고상을 망치나 도끼로 박살내기 보다는 교회에서 위원회를 구성하여 단계적으로 순서를 정해 철거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 때문에 급진적 개혁을 바라는 스위스와 남독일의 의견과는 일치하지 못했다. 그래도 제단에서 감실이 사라지거나 어느 정도 예배당 공간이 가톨릭보다는 간소화되는 등의 성과가 분명히 있었다.


성만찬에 관한 입장은 실질임재설(Realpräsenz)[64] 혹은 '공재설'(Konsubstantiation)[65]로 불리는 해석을 주장하여 기념설을 주장한 츠빙글리파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루터는 앞서 빵이 몸으로 변한다는 화체설(성변화)은 13세기 스콜라 철학의 영향이라고 비판했다. 당연히 인정하지 않았다. 루터든 츠빙글리든 "빵과 포도주 자체가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하지 않는다"는 주장까지는 어느 정도 일치를 보았다. 그런데 루터의 경우, 이에 빵을 들어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최후의 만찬 말씀을 들었다. "빵과 포도주는 모양도, 맛도 분명 그대로지만 축성하는 순간부터는 완전한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임재하신다고 했는데. 루터는 축성한 순간 '이미 승천한 예수님이 사도들의 다락방에 내려오셨듯이' 빵에도 깃든다는 설명이었다.

종교 개혁 당시 츠빙글리 등으로 대표되는 스위스 지역의 개혁세력들은 네덜란드 인문학자 코르널리스 훈(Cornelis Hoen)의 기념설을 받아들여서, 아예 '변화'나 '임재' 자체를 부정하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는 증표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66] 츠빙글리는 "내 몸이다."를 '나는 포도나무다'에서 예수가 자신을 포도나무에 비유한 것처럼, 몸 이다도 비유에 불과하다는 해석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츠빙글리의 해석을 까면서 해석의 잘못됨을 거론했다. 라틴어 성경의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Hoc est Corpus Meum 을 따서 일명 '이다(est)' 논쟁이라고 하는데,[67] 문구를 그대로 받아들일지 비유로 볼 것인지는 당사자들에겐 단순 해석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신학이론의 기본적인 전제를 부정해야 하는 문제였다. 루터와 츠빙글리는 이 문제에서 서로 양보할 기색이 없었다.[68]

지금이야 합리주의 사조와 성서비평학 때문에 비유설이 우세하지만, 당시의 비유설은 스위스 부르주아 선진 식자층 자유시민들이나 이해할 것이었지 루터가 주로 상대하는 미신적인 농민들과 봉건제후들에게는 도저히 어필하기 힘들었다. 루터는 기본적으로는 보수적인 사람이었고 성상 배척도 성서를 근거로 겨우 해내는 판국에 영성체론 해석까지 급진적으로 할 여유가 없었다. 결국은 est 논쟁은 교리투쟁문제라기보다는 시대적 한계에 따른 어른의 사정과 정치적 입장차이의 문제였던 것이다. 애초에 츠빙글리부터가 숙박업과 용병업을 교리로 금지하는 등 지나치게 급진적이어서 스위스 내부에서부터 심한 반발에 직면한 반면, 루터는 괜히 급발진하다가 반동세력에게 종교개혁을 방해할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아하는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제국 내 개신교 종교 개혁은 둘로 양분되었다. 다만 루터파와 츠빙글리파는 서로 비판하긴 했지만 토마스 뮌처나 재세례파에게 적그리스도 취급하며 원색적으로 비난한 것과 달리 완전히 관계가 끊어지진 않았다. 대부분의 신학적 견해에선 일치했기 때문. (루터 지지자들과 신교도 제후들은 정치적 연합을 위해 일치를 보려 했고, 루터의 완고한 태도에 매우 답답해했다.)

츠빙글리는 1531년 스위스에서 스위스 내 가톨릭 세력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는데,[70] 루터는 "그들이 우리를 식인종[71]이라 한 것에 대해 심판으로 훈계를 받았다"며 씁쓸해 했다. 성경과 복음에 대한 입장이 동일한 츠빙글리와 루터는, 바로 이 성만찬으로 인해 영원토록 틀어지게 된 것이다. 그만큼 의식 측면에서 중요한 문제기도 했다. 훗날 루터의 지지자였던 필리프 멜란히톤은 루터와 츠빙글리 사이에 서서 영적 임재를 주장했고 스위스 쪽의 츠빙글리의 후학 칼뱅도 '영적 임재설', 그러니까 예수가 빵과 포도주에 '영적 상징'으로 그 안에 임재한다는 설을 제시했다. 자세한 것은 성만찬 참고.

츠빙글리가 죽고 나서 1536년 츠빙글리 진영의 마르틴 부처, 루터 진영의 필리프 멜란히톤, 헤센 방백 필리프 1세의 주도로 두 진영 사이에 비텐베르크 신조(Wittenberg Konkordie)가 성립되었다. 서로 간의 견해 차이는 존중한다는 미봉책 수준의 신학적 견해 일치는 이루었으나, 양 진영은 신학적 문제뿐만 아니라 여러 정치적인 문제로 말미암아 다시 벌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스위스 독일의 종교 개혁은 다른 길을 가게 된다.[72]

한편 가톨릭과 루터교의 양측 온건파는 최소한 1530년까지는 재일치를 위해 이를 악물고 타협하려고 노력했다.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는 멜란히톤은 적어도 두 논점(평신도의 성혈 배령[73]과 사제의 결혼)만 가톨릭이 양보한다면 재일치의 길에는 아무런 방해가 없을 것이라고 언명했고, 가예티노 추기경은 “공의회에서 결정해야 한다”고 단서를 달기는 했으나 원칙적으로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두 논점이 신앙과는 관련이 없고 다만 규율의 문제[74]라는 이유로 말이다. 그러나 루터의 반대("나는 교리의 일치에 관한 토의에 대해서는 도무지 좋아하지 않습니다"[75])와 가톨릭의 30년 넘은 느릿느릿한 대응[76]을 하면 재일치가 실패했다. 이쯤부터 신교도 제후들은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하여 가톨릭 제후와 황제와 교황에 대적했고, 종교개혁은 신앙의 문제가 아닌 정치적 사건으로 루터의 영향력을 떠나게 된다.[77]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제국의회에 제출할 목적이었기 때문에 제국추방령을 받은 루터가 아니라 멜란히톤이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초반 강목은 루터주의 신학과 가톨릭교회의 교리 중 같은 부분을 강조했고, 교황권과 7성사, 교회 제도를 공격하지 않은 온건한 내용이었다. "멜란히톤이 주도한 이 신앙고백에 대해 루터도 적지 않은 불만을 지녔으나 코부르크를 벗어날 수 없었기에 개입할 수는 없었다."[78]

다만 1532년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의 결렬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과 루터파 진영에서 협의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1537년 황제와 교황의 사절들은 새로운 공의회에 루터파를 초청했지만, 이탈리아 반도에서 열리는데다가 개신교 참석인원은 가톨릭의 절반 이하로 제한당했고, 황제 또한 가톨릭 편에 기울어서 실효성에 의문이 있었기 때문에, 제안을 거절했다. 1540년 필리프 멜란히톤이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가톨릭의 콘타리니 추기경을 만나 상당한 신학적 합의를 이루었으나, 양측의 강경파들이 반발했고 루터와 교황도 이를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물거품이 되었다.[79] 특히나 가톨릭에서 종교개혁에 대응하여 9인 위원회를 결성하였는데, 온건파 콘타리니 추기경이 사망하고 강경파 카라파 추기경이 바오로 4세로 즉위하자 트리엔트 공의회는 초기 목적과는 달리 기존 가톨릭의 교리를 재확인하고 개신교 탄압을 결의하는 것으로 끝난다.

비텐베르크에선 또 한 번 신학적 논쟁이 일어났는데 아이슬레벤 대학 교수였던 요한 아그리콜라가 가톨릭과 논쟁을 벌이고 와서 자신의 입장을 재정리하여 율법은 필요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 루터는 오랜 동료였던 아그리콜라에게 율법이 필요 없으면 "간통을 하든 도적질을 하던 어디 해보슈. 어디 당신이 구원받나 봅시다"라 응수했고, 또 한번 격렬한 논쟁 끝에 요한 아그리콜라는 지지를 잃고 근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궁정의 목사가 되었다.[80] 루터는 율법폐지론자들을 교황추종자와 다름없다며 경멸했는데, 재세례파 일부가 율법 폐지를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더라도 율법상으론 여전히 우리는 죄인이며 완전히 의인인 동시에 완전히 죄인이라는 신학적 입장을 고수했다.

루터는 작센 선제후국에서 교회 설립, 신학서적 저술, 목사 교육 등에 힘쓰는 한편 독일과 독일 밖의 여러 지방에서의 제후와 학자들의 편지 응답으로 종교개혁에 대한 자문과 신학적 대화와 교육 논박 등을 이어 나갔다. 초기에 뜻을 함께 했던 비텐베르크 인사들이 종교개혁이 퍼져나가며 각지로 파송되자 루터의 업무량은 비례하여 늘어났고, 이미 한계치에 다른 업무량은 종교개혁이 일어난 1517년부터 격무에 시달렸기 때문에 나이까지 들어서 건강에 치명적이었다. 1530년쯤 나중에 사인이 된 심장발작이 일어났고, 딸 둘이 돌림병에 걸려 죽자 충격으로 몸져누웠다. 루터는 점점 쇠약해져갔다. 몸과 함께 마음도 시들어갔다.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에서 공인이 무산되었기 때문에 루터파 탄압은 독일 각지에서 이어졌고, 재세례파의 봉기, 오스만 제국의 위협들을 바라보며 점점 말세가 온 것으로 느꼈다고 한다.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그는 교황추종자, 재세례파, 유대인, 신비주의자들을 상대로 격렬하게 '모두 까기'를 시전했고, 개신교에 호감을 느끼나 황제를 두려워하여 종교개혁에 미적거리는 제후들도 신랄하게 까기 시작한다. 특히나 자신의 주적 로마추종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 1546년 ≪악마에 의해 세워진 교황 지상권에 대하여≫라는 지금까지의 비판 수위보다 더 높은 원색적 수위의 글을 발표했고,[81] 만스펠트 백작 가문의 영토 문제를 조정하고 화해를 주도하기 위해 여행하던 중에 1547년 1월 조용히 사망한다.

죽기 전 자신의 지지자이자 루터파 신학자 유스투스 요나스가 "선생님은 지금까지 주님의 가르침을 선생님이 전한 것에 대해 확신하십니까?" 물었고 루터는 "예."라고 짧게 대답하고 조용히 사망했다. 63년 동안 평범치 않은 삶을 살았지만 그의 묘비에는 '신학박사 마르틴 루터 여기에 잠들다'란 간단한 글만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가 주도했던 종교개혁이 결실을 맺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있기 불과 9년 전이었다.

2.4. 루터 사후의 종교개혁

황제 카를 5세는 그의 숙적들인 루터가 1546년에 사망하고, 헨리 8세와 프랑스 프랑수아 1세가 차례로 사망하자 오스만과 화해하고, 그동안 미뤄둔 독일 내 개신교 탄압을 시작했다. 그동안 루터에 공감한 신교도 제후들은 늘어났고, 거주민들이 개신교로 개종한 지역도 많았다. 하지만 황제에 맞선 신교도 제후 동맹 세력은 여전히 듣보잡을 제외하면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와 헤센 방백 필리프 1세가 거의 전부였고,[82] 황제는 우선 교황에게 1만 2천명 병력분의 무장자금도 지원받았고, 스페인에서 4만 병력[83]과 자신의 고향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에서 1만 7천명을 동원하여 종교 일원화에 반대하는 신교도 제후와 도시 토벌에 나섰다. 신교도 제후들의 세력이라곤 헤센 방백 필리프 1세[84] 대장을 맡아서 겨우 1만명 수준.

당연히 황제군은 파죽지세로 신교도 지역을 접수했고, 신교도지만 중립이었던 작센 선제후의 6촌 동생 작센-마이센의 모리츠[85]는 황제의 동생인 독일왕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와 동맹을 맺고 친척이자 가문의 종손인 요한 프리드리히 1세를 공격했다.[86] 결국 작센 선제후는 영지 거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 위해 GG를 치고 비텐베르크에서 항복했으며,[87] 패전 소식을 전해들은 헤센의 필리프도 자진출두하여 네덜란드에 수감되었고, 독일 지역은 카를 5세의 뜻대로 종교 일원화가 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아직 저항 중이던 마그데부르크의 공략을 모리츠에게 맡기고 카를 5세는 인스브루크로 철수 했는데…

모리츠가 한 번 더 배신을 때렸다.[88] 황제군을 이끌고 인스브루크를 공격한 것. 황제는 놀라서 이탈리아 반도로 도망쳤고, 트리엔트 공의회 중이던 가톨릭교회 인사들도 나란히 줄행랑을 쳤다.

모리츠의 행동은 예상 밖이긴 하나 명분은 있었다. 마그데부르크를 모리츠의 영지로 준다고 낚았다가 원래 다스리던 브란덴부르크 호엔촐레른 가문 방계에 돌려줬고, 헤센의 필리프 1세는 그의 장인어른이었고, 항복하면 풀어준다고 황제가 약속했다가 나중에 씹었기 때문. 그리고 황제의 무리수도 한 몫을 했다. 애초에 모리츠는 차기 황제 독일왕 페르디난트 1세와 동맹을 맺었는데 황제는 갑자기 노망이 들어 독일어도 못하는 자기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시도해서 동생과 가톨릭 제후들의 반발을 샀다. 동생과 가톨릭 제후들은 소 닭 보듯 황제의 줄행랑을 방관했고, 1552년 파사우 협약으로 페르디난트와 모리츠가 협상하면서 '영지 내에서의 루터회 신앙 인정'이라는 루터파 제후들의 숙원이 이뤄졌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재확인한 것으로, 공식적으로는 제국에서 공식적으론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이 공인되어 루터파 탄압은 금지되었고, 기존의 가톨릭교회와 공존이 허용되었다. 황제는 승인을 거부했지만 스페인으로 도망친 이상 뒤집을 여력은 없었고, 1556년 10월 자진 퇴위를 선언한다. 1558년 3월 선제후 회의에서 황제의 은퇴를 수용하고 동생 페르디난트 1세가 등극했다.

페르디난트 1세는 동부 에르데이 지역의 헝가리인 귀족들이 자신의 헝가리 왕위를 인정하지 않아서 그들이 주로 믿던 개신교회에 대해 강압적인 정책을 쓴 반면, 독일에서는 비교적 온건한 종교정책을 폈다.[89] 문제는 페르디난트의 후계자 막시밀리안 2세[90]는 모리츠를 따라서 종군했는데, 신교도 제후들이랑 친해져서 자기가 루터교회로 개종하려고 했다. 충공깽한 페르디난트는 상속권 박탈을 내세워 막시밀리안을 협박했고, 1562년 가톨릭 신앙을 유지한다는 맹세를 하고 2년 후 자리를 이어받았다. 막시밀리안은 이 때문에 루터파에 호의적이었고, 오스트리아 내에서도 신교도 귀족들을 박해하지 않고 권리를 보장했다. 죽기 전에 신교도로 다시 개종하려 할 정도.

이러한 영향으로 루터 사후 독일의 많은 지역이 개신교 지역으로 변했다. 16세기 후반 독일 인구의 90% 가량으로 추산하는데, 70%는 루터파, 20%는 칼뱅파와 재세례파,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이 신교도가 뿌리를 내렸으나, 16세기 후반 남독일 지역에서 예수회 주도의 마녀사냥으로 남독일 지역에서 개신교는 극심한 타격을 받았고, 다음 세기 30년 전쟁으로 많은 지역이 다시 가톨릭화되며[91] 남부독일 대부분과 라인란트 지역, 체코는 다시 가톨릭 우세지역으로 선회한다. 오스트리아의 신교도는 요제프 2세가 관용칙령을 내리기 전까지 헝가리 왕국으로 추방당했고 이들은 도나우 강 주변 독일인 공동체를 형성했다. 바이에른 지역과 잘츠부르크 지역에서는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는데 잘츠부르크 대교구에선 카를 6세 시기에 1만 5천명이 집단이동할 정도. 어쨌든 독일의 종교 지역이 구분이 되고 종교전쟁을 거치면서 현재의 분포와 비슷한 분포가 되었다. 대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는 기존의 루터파는 물론이고 칼뱅파까지 공인되어 제국 내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3. 독일어에 미친 영향력

루터의 독일어는 그 순수함과 엄청난 영향력으로 인해 현대 독일어의 기초를 제공했다.
야코프 그림[92](Jakob Grimm), 독일의 언어학자, 동화 수집가
그 어떤 것도 마르틴 루터의 위대함에 반대 할 수 없다! 그는 성서 번역이라는 엄청난 작업을 통해 처음으로 독일어를 제대로 만들었다. 이 언어를 괴테 니체가 완성했다.
토마스 만, 192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루터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1521년 12월 21일, 신약성경 독일어로 번역하기로 결단했다. 루터가 독일어 성경 번역을 시작한 지 11주 만에 220쪽에 달하는 신약성경을 모두 번역했다. 그는 1522년 3월 번역한 성경 원고를 몸에 지닌 채 바르트부르크를 떠났다. 그 후 몇 달 동안 수정 작업을 거쳐 1522년 9월, 3천부의 신약성경을 인쇄했으나 금방 모두 판매되었으며, 엄청난 수요 때문에 3개월 후 다시 인쇄에 들어가야 할 정도로 루터의 성경 번역본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1522년부터 1546년까지 비텐베르크 (wittenberg)에서만 신•구약성경이 10판 인쇄되었으며, 신약 성경만은 따로 80판이 인쇄되었다. 같은 기간에 독일 전역에서는 260판의 성경이 인쇄되었으며 1712년부터 1883년까지 할레(Halle) 지역에 있는 성경 인쇄소에서만 거의 580만 부의 성경이 인쇄되었다. 수치상으로만 본다면 독일의 거의 모든 계층에서 성경을 읽게 된 것이다.

그러자 루터는 구약성경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모두 배운 루터였지만, 혼자서 성경을 번역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번역가는 절대로 혼자 일해서는 안 된다. 혼자 번역하면 적절한 최상의 단어를 찾을 수 없다.” 그래서 루터는 '산헤드린'이라고 명명한 번역위원회를 꾸렸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번역위원회라는 개념은 필리프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유스투스 요나스(Justus Jonas), 요하네스 부겐하겐(John Bugenhagen), 카스파르 크루시거(Caspar Cruciger) 같은 학자들이 루터가 만든 번역위원회에 합류해 선례를 만든 덕분이라고 보면 된다. 이 위원회의 학문성에 필적할 만한 것은 그 전에도 없었고, 이후로도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루터는 번역의 최고 책임을 맡았다. 그는 산헤드린에 동기를 부여하고 이들을 이끌며 번역을 진행했는데, 원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지 않았다. 그는 학문적이거나 문어체가 아니라 독일 말을 생생하게 살린 번역을 원했다. 어떤 단어나 구절이든 옮겨 적기 전에는 반드시 루터의 눈이 아닌 귀부터 통과해야 했다. 들었을 때 거슬리지 않고 잘 이해돼야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독일어 성경이 가진 가장 최고의 자산인데, 이것은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문자 하나하나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해석하려 했던 루터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93]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외국어의 표현을 모국어로 온전히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절한 번역 방법론은 원서의 어법에 따라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을 고르는 것이다. 번역을 제대로 하려면 외국어가 담고 있는 의미를 우리말의 표현이 되게 해야 한다. 나는 시장 통에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처럼 말하기 위해 노력한다. 모세를 소개하면서 누구도 그를 유대인으로 보지 않도록, 꼭 독일인처럼 만들려고 한다.”

번역자들은 기본 언어로 궁정 언어를 채택했지만, 제국의 갖가지 방언들에서 최상의 표현을 찾아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루터는 철저한 완벽주의자로, 꼭 맞는 단어 하나를 찾아내기 위해 각기 다른 방언을 쓰는 노인들과 아주 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모세의 율법에 나타난 제의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푸주한을 데려다 양을 도살해서 그 내장을 연구하기까지 했다. '새 예루살렘'에 나오는 '보석'을 번역할 때는 도대체 그것이 어떤 돌인지 알지 못해 고민이 되자, 선제후의 수집품 중에서 그것과 비슷한 돌을 빌려와 한참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루터는 히브리어 원문을 최대한 독일어답게 표현하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말할 수 없이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94]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산헤드린은 신속하게 그렇지만 정확하게, 과학적이라기보다는 변증적인 어조로 번역을 해 나갔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태어난 독일어 성경은 이보다 나중에 나온 < 킹 제임스 성경>보다도 문학적으로 더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데 손색이 없을 정도다. 또한 이 성경은 읽을 때 뿐 아니라 낭독할 때도 자연스럽게 들리기 때문에, 운율과 가독성에서 탁월해 지금까지도 독일에서 가장 인기를 끌고 있다

루터가 살아있을 당시 이미 독일에는 15개의 독일어 성경 번역본이 있었으므로, 성경의 독일어 번역 자체는 그리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루터는 성경을 단순히 단어별로 번역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시 사람들이 쓰는 말, 의미가 정확한 말을 고르기 위해 애썼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루터는 성경을 번역하면서 관용적인 표현을 많이 썼는데, 이로써 독일어 표현이 더욱 풍부해졌다. 또한 시적인 표현을 즐겨 썼는데, 이를 통해 독일어가 아름다워지는 데 기여했다. 예를 들어 “ 아베 마리아, 그라시아 플레나 (Ave Maria, gratia plena)”는 말 그대로 번역하면 “마리아는 은혜가 꽉 찼더라.”이다. 그러나 당시 평민들은 '꽉 차다'라는 말을 '배가 꽉 차다', '맥주통이 꽉 차다'라는 뜻으로 연결시켰다. 당시 루터는 이 말을 “마리아는 은혜로 충만하더라.”로 번역했다.
이러한 루터의 작업으로 인해 독일어 어휘에도 변화가 생겼는데 한 예로 독일어로 '직업'을 의미하는 '베루프(beruf)'는 루터 당시에는 목사들에게만 사용되는 어휘였다. 그러나 루터는 돈을 받고 일하는 모든 직종에 이 단어를 사용했으며 지금도 독일에서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루터가 살아있을 당시 독일에는 20개 정도의 지역어가 존재했다. 이들은 크게 북독일어, 남독일어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루터는 두 지역의 경계인 비텐베르크에 살았기 때문에 두 언어를 모두 사용할 줄 알았다. 합스부르크-룩셈부르크 제국의 황제들이 궁정에서 평소 사용하던 말이 이런 독일어였다. 루터는 두 지역 언어의 요소를 모두 지닌 단어로 성경을 번역하고자 했다. 또한 남독일에서 발간된 루터 번역본에서는 남독일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북독일어를 찾아볼 수 있도록 했다. 예를 들어 '눈물'을 의미하는 단어를 남독일에서는 '트레넨 (Tränen)'[95]이라고 했고 북독일에서는 '체레 (Zähre)'[96]라고 했는데 이 두 단어를 서로 찾아볼 수 있도록 했다. 이뿐만 아니라 당시 지배층, 피지배층, 남녀노소 등 다양한 세대가 성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하고자 했다. 이로 인해 루터 성경 번역본은 독일어의 통일에도 기여를 했다. 당시 독일은 잉글랜드 런던이나 프랑스 파리와는 달리 지방 분권적 제후국이었던 탓에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없었고, 독일 전역을 아우르는 집권자나 집권 세력도 없었다. 그러나 루터의 성경 번역본의 출현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독일인들은 통일된 언어로 말하게 되면서 비로소 연대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루터가 번역한 성경에 쓰인 독일어가 모든 독일인의 언어가 되기까지는 약 3~4백 년이 걸린 것으로 보고 있다. 루터 성경은 독일에서 5가정마다 1권씩 비치하고 있을 정도로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소수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맹이라서, 사람들은 저녁이 되면 동네의 공터에 모여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읽어 주는 성경을 들었다. 이에 루터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각 도시의 시장이나 지배층에게 학교를 세워 달라고 했고, 루터의 독일어 성경은 오랫동안 독일 내 개신교 지역 학교에서 유일한 교재로 사용되었다.
또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에서, 목사들은 설교에서 루터 성경본을 인용하였다.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하인리히 하이네 등 루터의 독일어를 칭송한 독일 작가들은 말할 수 없이 많다. 그 결과 19세기에 들어서 루터가 쓴 독일어는 비로소 일반적으로 쓰이는 언어가 되었다. 루터는 1534년 성경 번역본에서 명사의 첫 글자를 대문자로 쓰기 시작했다. 명사의 첫 글자를 대문자로 쓰는 것은 17세기 들어 다른 유럽어에서는 사라졌지만 독일어에는 지금까지 남아있다(커피-coffee(영)-café(프/에)-Kaffee(독))
성경이 가진 보편성이 호소력을 가진 셈이었고, 독일어의 범위 전체를 온전히 포용해 결국 현대 독일어를 형성하는 언어적 계기가 된 것이다. 또한 독일 문학과 공연 예술의 형식적 재건에도 도움이 됐다.

루터는 독일사뿐 아니라 독일어사에도 큰 영향을 미친 존재였고 루터는 독일어를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현대 독일어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언어학자들이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몇몇은 루터역 성경에 대해 특히 가톨릭계나 에큐메니컬 진영에서는 “루터 개인의 취향에 의해 정확성이 훼손되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로마서 3장 28절에는 "믿음"에 "오직"이라는 단어를 루터가 삽입하여 "오직 믿음"으로 번역했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구원이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건 루터의 관점으로든 가톨릭의 관점으로든 동일하다고 보지만, '원문 그대로의 정확한 번역'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오직'을 추가한다고 민중의 가독성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가톨릭 교회가 루터를 배격함에도 불구하고 독일어권 내의 가톨릭 교회에서 쓰이는 모든 표준독일어는 루터역 성서독일어에 기반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가톨릭 교회가 루터를 언어적으로 영원히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은 그만큼 마르틴 루터의 언어적 파급력이 범종파적, 범국가적으로 막대함을 의미한다.

4. 마르틴 루터의 가족

루터의 할아버지 하이네 루터는 농부였고 아버지 한스 루터도 농부 출신이었으나, 튀링겐 지역 상속법에 따라[97] 농장이 작은아버지에게 상속되자 광산업에 투신하였다. 자수성가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고, 1530년 사망 시에는 1,350굴덴[98]을 남겨, 큰 농장 2개를 사도 될 정도로 상당한 재산을 남겼다. 수도원에 입회한 것 때문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무척이나 좋지 않았다는 건, 하술된 현대 20세기 미국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의 평전에서 나온 오류다.[99] 직업 선택 문제로 갈등이 있었지만 후술되어 있다시피 한스 루더는 루터가 사제서품을 받자 아들 기 세워준다고 첫 미사[100]에 무려 20명의 하객들이나 탈 말을 대여해서 찾아온 팔불출 아버지였고, 루터 본인이 가족에 대해 남긴 기록이나 발언들만 봐도 엄격하지만 사랑 많으신 부모 밑에서 자랐다고 여러 차례 가족에 대한 애정을 표했다.

어머니 마르가레테 린데만의 친정은 원래 루터의 친가처럼 평범한 농민 집안으로 여겨졌는데, 현재의 연구 결과로는 중산층 이상 탄탄한 시민계층의 집안으로 밝혀졌다. 우선 루터의 외사촌 형제 요한 린데만은 법학 박사로 선제후의 고문이었고, 또 다른 외사촌 카스파르 린데만은 라이프치히와 프랑크푸르트-오데르에서 공부하고 이탈리아 볼로냐까지 유학을 가서 의학을 공부한 후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선제후의 주치의가 되었고, 마르틴 루터도 종종 치료해 주었다고 한다.

1525년 알려지듯이 16세 연하의 카테리나 폰 보라와 결혼하였다. 카테리나는 상당히 진취적인 인물인데, 알려졌듯이 수녀 출신이다. 작센 지역에서 몰락한 지주의 딸로 태어났고, 5세의 어린 나이에 수녀원으로 보내졌는데 당연히 본의로 들어가지 않은 건 확실하다.[101] 알려지기론 캐테의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재혼하자 어린 딸을 수녀원으로 보냈다고 한다.

1523년 종교개혁 초기 시기 루터의 추종자 중에서 수도원에 납품하는 청어 장수가 있었는데, 수녀원에서 나올 때 청어 상자에 수녀들을 감춰서(?) 수녀 10여 명을 탈출시켰다. 루터는 당시 청어 장수의 행위를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탈출시킨 모세의 행적에 비견하며 매우 칭찬했다. 이들 수녀들은 비텐베르크로 도망 와서 선제후 궁정 유력가의 집에서 머물렀고, 캐테는 비텐베르크 전 시장이자 궁정화가인 시의원의 집에 보모로 있었다. 결혼 전 구애에 적극적이었던 쪽은 루터가 아니라 카테리나였다. 환속 수녀 시집보내기 열풍으로 두어 차례 선을 봤으나, 캐테의 집안은 몰락했고 미모도 뛰어나지 않고, 나이도 어린 편이 아니라 조건이 좋지 않았다. 루터가 중매한 2곳의 혼담 중에서 1곳은 그녀가 수녀 출신이라는 이유로 무산되었고, 카테리나가 결혼하고 싶어하던 다른 남자는 부잣집 딸에게 장가갔다. 이에 빡쳐서 책임지라고 찾아간 것이 루터였다고 한다.

1525년 결혼 시에는 혼전 임신이라 결혼했다는 카더라가 나돌았다. 그리고 사제 수도자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면 머리가 2개 달린 괴물이 태어난다는 당시 미신도 있었는데, 1년이 지나고 건강한 남자아이가 태어나자 무지몽매한 이들이 충공깽하여 종교개혁 열기가 파급되었다는 소리도 나왔다.

루터는 카타리나(케테)와의 사이에서 3남 3녀를 두었다. 장녀와 차녀는 성인이 되기 전에 사망했고, 장남은 법률가가 되어 선제후 궁정의 참사관으로 활약했다. 차남은 신학공부를 하였으나 목사는 되지 않고 30대에 사망, 3남은 의학을 공부하여 역시 선제후 궁정의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3남 파울루스는 화학자이자 연금술사이기도 하다. 막내딸은 프로이센 귀족과 결혼하여 그 지역에 정착했다고 한다.

4.1. 아내 카테리나

나의 아내는 비텐베르크의 샛별입니다. 아침 일찍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부지런히 일하고, 밭을 갈고, 가축을 먹이고, 거래하고, 맥주를 만드는 등의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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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아내 카테리나 폰 보라는 결혼 후 루터린(Lutherin)으로 개명했다.)

루터가 캐테라고 부른 카테리나는 5살 무렵부터 수녀원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수녀원 탈출을 시도할 만큼 드센 여성이었다. 루터를 기어이 설득시켜서 결혼한 것도 캐테였다. 루터도 신학을 한 사람이라 성서적인 여성상을 이상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런 배우자에게 불만이 있었는데, 남편에게 순종적이지 않은 것을 유감스러워했고, "만약 내가 결혼을 다시 한다면 내가 직접 돌을 조각해서 만든 순종적인 여인의 상과 결혼할 것이오"라고 할 정도였다. 아내 카테리나는 16살이나 연하인데도 사회적으로 대단한 거물인 루터를 별로 어려워하지도 않았다. 일화로 1525년 결혼 시 면죄부 판매의 원흉이자 루터의 정적이나 다름없는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 추기경(1518년부터)이 20굴덴[102]의 축의금을 보내자, 루터는 적의 돈을 받기 싫어서 되돌려보내려고 했으나 캐테는 ”주님의 선물이라 여기고 빚부터 갚자”[103]고 주장했고, 결국 첫 부부싸움(?)에서부터 캐테가 이겼다.

하지만 캐테는 단순히 성격이 드센게 아니었고, 평생 동안 수녀원에 갇혀 지냈던 한을 풀기라도 하듯 결혼과 동시에 엄청난 생활력과 경제적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보통 루터처럼 수도자 생활을 오래 하면 경제관념이나 사회성을 키우기가 힘든게 상식인데 캐테는 그런 상식을 비웃기라도 하듯 진취적으로 집안을 일으키고 살림을 꾸리는 등 남편에 대한 내조를 해나갔다. 안 그래도 루터는 교황이라는 당대의 가장 강대한 권력자들 중 하나를 정적으로 두었다보니 사회적으로 체면을 유지하기 매우 어려운 처지였지만, 캐테 덕분에 경제적 근심을 완전히 덜게 되었으며 사실상 캐테 또한 종교개혁의 거대한 동력을 제공한 공로자였다 할 수 있겠다. 사실 이 정도 멘탈이 되니까 루터의 마누라로 살 수 있던 거겠지만. 그래서 루터도 결국 이렇게 자신을 지원해주는 아내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져 결혼한 것은 아니라고 인정했지만, " 프랑스 베네치아를 준다 해도 캐테와 바꾸지 않겠다"는 팔불출 드립도 쳤고, 공공연히 설교에서 "아내는 주군이고 나는 신하", "아내가 모세고 나는 아론"[104]이라고 우스갯소리로 공처가 인증도 했다. 그리고 독립적이고 활동적인 아내에게 이런 편지도 남겼다.
캐테,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는 경건한 남편을 가졌소 당신은 여왕님이오. 그러니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붕 꼭대기만 봐도 기뻐하는 당신의 남편에게 굴복하지 마시오.

물론 루터도 수입이 없는 건 아니어서, 작센 선제후로부터 이전에 몸 담았던 검은 수도원과 부속 토지를 제공받았고, 면세 혜택과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수직 봉급과 선제후국 교회의 설교자였기 때문에 많은 사례금[105]이 있었다. 보통은 금전이 아니라 농산물 같은 현물로 받았다고 한다. 출판업자나 선제후나 귀족들에게는 귀금속 등을 선물 받았는데, 당시 풍속은 아무리 정치자금이라도 그냥 현찰로 주는 건 천박해서라고. 영화 <아마데우스>를 봐도 모차르트의 쌈짓돈은 소싯적 왕실에서 하사받은 담뱃갑 모양의 금덩이.

하지만 루터의 집에는 6명의 자녀들과 캐테의 과부 숙모까지 모여 살았고, 고아가 된 루터의 조카 6명까지 맡아 길렀으며, 그에 따라 대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유모, 집사, 하녀, 가정교사, 마부, 돼지치기, 식모, 머슴 등을 직접 고용하여 부렸고, 추종자[106]들도 20명에서 많게는 30명이 눌러앉아 살았다. 때문에 루터가 버는 수입보다 거의 2배는 지출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루터의 명성을 보고 찾아오는 손님들도 많았기에, 이런 손님들이 오면 당연히 융숭한 대접을 해야 했고, 떠날 때도 한보따리 싸서 노잣돈을 챙겨줘야 했다. 기본적으로 루터는 노랭이라 욕 듣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기 때문에 늘 적자였다.

당연하게도 루터는 40년 동안 초반 생애를 학생과 수도자로 살았기 때문에, 금전관념이 없었으며 살림살이에 대해서도 완전히 무지했다. 그런데 루터도 행복한 의문을 가졌던 것처럼, 루터가 벌어들이는 돈보다 더 지출하면서 사는데도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았던 비결은, 아내 덕분이었다. 캐테는 루터가 세속 일에 대해 서툴렀기 때문에, 집안 살림은 물론 대가족을 먹여 살릴 사업까지 스스로 해야 했다.

카테리나는 선제후에게 맥주공장 허가를 받아서 맥주공장을 운영, 맥주를 생산, 판매했고, 품질이 좋아서 선제후 궁정에도 납품을 할 정도로 장사가 잘 되었다. 맥주뿐만 아니라 양조용 포도 농장도 운영했고 포도주 저장고까지 갖추었다고 한다. 농사도 농장을 사들여 크게 지었으며 , , 돼지, , 도 기르고 오리들을 키우려고 연못까지 만들었다. 연못을 만든 김에 양어장까지 만들었다. 수도원에서 하숙하는 학생들에게는 소정의 하숙비도 받았다.

사업이 확장됨에 따라 루터의 집은 점점 커져 갔고, 루터의 집은 북적북적한 대가족 수준을 뛰어 넘어 50여 명이 살았으니 거의 오늘날의 자영업소나 주상복합 수준이었다. 그래서 조용하고 검박한 수도자의 생활에 익숙했던 루터는 이런 집 꼴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경제활동을 주특기로하는 베네딕토회 소속이었으면 어떨까? 옛 수도원 부지를 선물해준 선제후에게 불평했는데, "다시 집을 얻는다면 이딴 돼지우리는 사양하겠다"고…

루터는 사망 당시 많은 재산을 남겼고, 죽기 전 유언장에 직접 아내 카테리나를 단독 상속자로 지명했지만, 당시 풍습과 다른 일이었기 때문에 후견인들이 이러한 결정을 무시했다. 루터가 죽고 남긴 농장이 슈말칼덴 전쟁으로 초토화되자, 카테리나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다고 한다. 결국 자식들과 함께 영지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던 중 폐렴에 걸려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시신은 자식들이 거두어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4.2. 독신과 결혼 가정관

앞서 루터보다 아내가 적극적이었던 이유가 있었는데, 루터는 원래 결혼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 이유로 첫째는 어쨋건 신부로 살아오며 오랜 독신 생활에 이미 익숙해져있었고, 둘째로 자신이 황제와 가톨릭의 원수가 되어 살해협박을 받는 상황에서 가족을 만들 경우 피해를 줄 수 있는데다, 셋째 종교개혁 열기가 자신의 결혼으로 수그러들까봐 우려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추종자들은 매우 반대했고, 추종자이자 동료교수이며 루터에 이어 오른팔이라 할 만한 필리프 멜란히톤은 결혼을 극구 반대해서 결혼식에 초대받지도 못 했다.[107] 결혼 당시 적어도 추종자들이나 지적 동료들 중에선 아무도 환영하지 않고 아버지만 후사가 끊어지지 않게 되었다고 덩실덩실 좋아했다고.

독신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했는데 첫 번째론 태어나면서 고자인 경우, 2번째론 하나님에게 특별한 소명을 받은 경우 즉 선지자 예레미야 사도 바울처럼 소명을 받은 경우에나 죄를 짓지 않는 것이요, 나머지는 사탄적 독신 생활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자의 경우는 독신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일정한 나이가 되어서 결혼하지 않으면 육욕 때문에 반드시 죄를 짓는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루터가 아니더라도 그 당시 의학 지식은 19세기까지 체액설이 주류였으며, 여자는 남자보다 체액이 많아서 배출해주지 않으면 자궁에 즙이 쌓이고 위로 올라와서 히스테리가 발작한다고 봤다.

결혼의 경우 가톨릭 7성사를 1519년까지 그대로 받아들이다가 곧 1520년 입장을 바꿨다.[112] 남녀의 교합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막아서는 안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가족을 부양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밥을 짓고 집안일을 하는 것은 세속적인 영역이지 영적인 영역이 아니라는 논리다. 혼인성사를 교회에서 성사를 받는다고 해서 죄가 씻기는 것도 아니고, 그 혼인 중에 죄를 짓지 않는 자도 없다는 논리도 있었다. 혼인은 성사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 일부러 집에서 결혼했다.

혼인은 부모의 허락을 꼭 받으라고 주장했는데, 부모 또한 자녀에게 원치 않는 결혼을 강요하거나 자녀가 원하는 결혼을 막지 말 것도 같이 권했다. 부모가 아들이 많을 경우 분할상속을 꺼려서 혹은 딸일 경우 지참금이 아까워서 수도원에 보내거나 하는 짓은 중죄라고 선언했다. 이 경우 남녀는 부모의 허락 없이 결혼을 해야만 한다.

기존의 가톨릭교회의 입장과 달리 이혼[113]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기독교 사회에서 최초로 이혼이 가능함을 주장한 셈인데, 간통의 경우 구약에서 율법으로 돌로 때려죽이라고 되어 있는데(죽이자는 건 아니고) 간통한 자는 죄로 인해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것이오, 이혼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단 습관적이며 의도적이고 공공연한 간통이 아닌 경우에는, 간통을 하더라도 이혼보다는 화해를 권고했다. 이 부분에서는 남녀 모두 동일했다.

남편이 고자일 경우에도 여자가 능동적으로 이혼 청구가 가능하다고 봤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여성 최대의 권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따라서 고자가 이혼을 거부하면 남편은 더 이상 남편이 아닌 동거인일 뿐이며, 아내는 비밀리에 다른 남자의 씨를 받아서[114] 남편의 이름으로 키우는 것도 가능하다고 보았다.[115] 이것은 종교개혁 시대 다른 개신교 신학자들과 다른 루터 고유의 의견으로, "이혼보다 중혼이 낫다(?)"는 주장의 근거로 인용 되었다.

이외에도 배우자를 유기하거나, 배우자의 생명에 대한 적개심, 악의적 기만, 결혼 전 알려지지 않은 사생아를 발견하거나 혼인 후 다른 자의 아이를 밴 경우에도 이혼이 가능하다고 했다. 지금의 기준으로 봐도 지극히 상식적이고 19세기 영국의 상대적 윤리주의자들에게서도 재평가받기도 했다.

자식의 경우 다산을 강조했고, 남성의 경우 20세, 여성은 16~18세에 결혼하여 닥치고 많이 낳는 걸 권했다. 16세기는 독일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시기고, 한편으론 전근대 영아 사망률도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터 본인도 자식을 많이 낳았다.

루터는 "가정 일은 캐테의 뜻을 따랐고, 다른 모든 일은 성령을 따랐다"고 했다. 다른 남자들에게도 “가정 일에 대해선 아내한테 많이 위임하라”고 권유했다. 그 이유는 여자들은 검소하고 절약하고 짜내(?)는데 남자보다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며, 자신이 40년간 학생과 수도자로 학자로 살아와서 세속의 일에 무지했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루터는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인격적으로 다루길 바랐다. 어릴 적 호두 하나를 몰래 먹었다가 부모로부터 등짝에 피가 나도록 채찍질을 당했고, 학창시절에도 중등교육을 받던 시절은 물론 대학에서도 기숙사 사감들에게 몽둥이질 권한이 있을 정도로 체벌이 곧 교육이던 시절이었는데, 훗날 루터는 자식교육에는 체벌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고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어린이들의 체벌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당시엔 유아 사망률이 높아서 어느 정도 크기 전에는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정을 붙이지 않았는데, 루터는 늦게 얻은 자녀들을 애지중지 했다. 루터가 여행 중에 4살짜리 아들 한스에게 보낸 편지가 훗날 독일 교과서에 오래 실리기도 했고 어린이들이야말로 신앙생활에 모범이라 생각하여 이런 글도 남겼다.
어린이들은 어릿광대이자 재미있는 친구들이다. 어린이들은 매우 진실되고 자연스럽게 행동한다.
그들은 순수하고 순박하게 살아간다. 믿음에서 우리 늙은 바보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논쟁이나 의심을 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비하시다는 것을 믿는다. 이렇게 사는 것이 영생이리라. 그들은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셔서 돈을 세는 것보다 버찌 먹는 것을 좋아하며, 금화를 쌓아놓는 것보다 아름다운 사과 먹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곡물 값이 얼마냐 묻지 않고, 진심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을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성서나 속담이 우리에게 "어린이가 많을수록 더 많은 행복이 있다"고 말해주는 바와 같이 어린이에게는 세상에 물들기 이전의 소박한 모습이 있다.

4.3. 개인적 일화들

5. 저작과 어록

5.1. 저작

나는 빠른 손과 정확한 기억력을 갖고 있습니다. 글을 쓸 때면 글이 거침없이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글을 짜낼 필요가 없습니다.
루터는 엄청나게 많은 저작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저술 양이 성경 번역에서부터 종교개혁 이후 평균 매일 5페이지, 연간 1,800페이지씩 저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1523년에는 독일 전체에서 편찬된 출판물이 900여편이었는데 그중 346편이 루터의 저작일 정도였다. 또한 생전 혼자서 독일 내 모든 가톨릭 저작자의 저술의 5배를 썼다!

그중에 성경 번역은 루터 저작 중 최대 업적으로 불릴 만한데, 이 언어학적 성과가 현대 독일어의 기반을 닦았다. 후대 독일 내 가톨릭 학자들이 루터를 비판할 때조차도 루터의 언어로 생각하고, 루터의 언어로 반박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 정도로 독일어에 끼친 그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루터 이전에도 고지독일어판 성경이 14본, 저지독일어판 성경이 4본 있었지만 라틴어판 불가타 성경의 원본을 해치지 않을 의도로 거의 그대로 직역한데다가 따라서 문장도 꼬여서 이해하기 어려운 편이었다. 루터는 불가타를 바탕으로 하되 히브리어 사본과 그리스어 사본을 대조하면서 민중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단어를 만들었다. 역설적으로 루터는 번역을 위해 새로운 단어를 만든다는 표현을 거부하는데. 민중들이 어떤 말을 쓰는지 관찰하고 그것이 가진 뜻으로 옮겨야 된다는 것. 지식인들이야 라틴어나 그리스어 단어를 이해하겠지만 글을 모르는 이들[133]이 이해 할 수 있도록, 집안의 어머니가 하는 말과 시장 바닥의 아이들이 떠들며 노는 말, 쓰는 말, 상인들이 경제 활동을 하는 말을 관찰하며 길게는 한 단어를 찾으려 3~4주씩이나 고민했다고 한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직업 전문 용어를 번역하기 위해 실제로 푸줏간 백정 대장장이나 새잡이들에게 직접 물어보고 그들의 언어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렇게 평민들이 실제 생활에 쓰는 단어를 바탕으로 당시 독일어에는 없었던 단어를 새로 만들어 냈기 때문에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대표적으로 루터는 앞서 불가타본의 난해한 번역 중 하나로 기존 불가타본의 독일어 번역은 "사슴이 맑은 물을 달라고 울부짖음과 같이" 같은 어색한 표현을 독일 남아가 누가 그렇게 말하냐!라고 비판했는데 이런 표현을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아 헤메이듯이" 식으로 번역했다. 직독직해의 한계상 라틴어 같은 로망스계 언어와 게르만어의 구조상 차이 때문에 단어=단어의 이식은 라틴어 특유의 문학성도 이미 죽어버린 데다가 중의적 의미를 살리기 어렵다고 보고 아예 새로운 번역을 시도한 것이다.
그렇다고 루터의 성경이 민중들의 구어만을 수록한 것은 아니다. 루터는 스스로 문체를 작센 선제후 궁정의 공문서에 쓰이는 필법을 따랐다고 밝혔다. 이런 격식은 표준 독일어의 형식의 전통이 되었다. 그리고 루터의 거주지 작센 지방은 고지독일어와 저지독일어의 경계점으로 루터와 그 부근 사람들은 두 언어를 알아 들을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일부는 차용하고 일부는 소개하는 식으로 두 언어의 통합을 이뤘다. 결국 이 과정에서 루터는 온갖 게르만 방언의 집합소에 불과했던 게르만어를 독일어로 정리해낸 것이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은 발매되자마자 엄청나게 팔려서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은 나중에 번역된 저지독일어 판까지 합쳐서 살아생전 100만부가 팔렸다. 당시 식자층 인구와 구매력을 감안하면 엄청난 수치이다. 1500년경 신성 로마 제국 인구는 1600만 독일어권은 900만명 정도로 추산하는데 식자층은 10%~15% 정도로 살만한 사람은 다 샀다는 것. 루터의 지지자는 물론 루터의 적대자조차 궁금해서 다 사봤다고 한다.

저작권의 개념도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당연히 만연했던 무허가판이나 복사판을 뺀 수치다. 불가타판 필사본이 500굴덴, 기존의 고지독일어 판이 10굴덴인거에 비하면 1.5굴덴에 팔린 영향도 있다. 그렇다고 돈을 번 것은 아니었다. 루터는 성경이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원고료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성경뿐만 아니라 팜플렛은 200만부가 팔렸는데, 이런 종교개혁 저작들은 급속도로 퍼지면서 독일 내 종교개혁의 성패를 결정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일어 성경의 영향은 제국의 국경을 넘어 멀리 퍼졌다. 네덜란드 스웨덴, 아이슬란드 덴마크 등지의 성경에 직접적인 자료가 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수많은 나라들에서도 그 영향력을 느낄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하게는, 이 성경이 영어 성경 번역가에게 인상을 남겼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종교개혁 운동의 일원중의 하나, 최초로 영어로 성경을 번역한 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 1494 ~ 1536)은 루터가 독일어 신약 성경을 출판할 무렵 잉글랜드에서 피신해 유럽 대륙으로 건너왔다. 그 역시 원어 사본을 놓고 성경을 번역했는데, 아마도 비텐베르크에서 루터와 만났던 것 같다.

틴들에게 강렬하게 영향을 준 루터의 업적 중 한 가지는 신약 성경의 배열 순서였다. 이전의 성경전서들에는 성경을 배열하는 표준이 없었다. 번역자들이 임의로 순서를 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루터는 “그리스도가 어떻게 가르치셨나”를 기준으로 사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와 사도행전, 서신서(구세주가 드러나는 강도에 따라 순서를 정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순으로 성경을 배열했다. 틴들은 루터가 정한 이 순서를 따랐으며, 이후로 사실상 모든 성경 번역자들이 동일한 순서를 따랐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구절들이 루터에게서 틴들을 통해 전해진 것이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 나오는 “육에 속한 사람”(natural man)에 나오는, 틴이 쓴 'natural'은 루터의 독일어 성경의 'natürlich'에서 왔다. 마태복음 2장 18절의 “소리가 들리니(was a voice heard)”는 루터가 쓴 'auf dem gebirge'(산에서의 외침/편주)라는 표현에서 왔다. 틴은 요한복음 19장 17절의 “해골(히브리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the place of dead men's skulls)과 고린도후서 6장 12절의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라”(Ye vex yourselves off a true meaning), 디모데전서 1장 7절의 “율법의 선생”(Doctors in the Scripture)”과 마태복음 21장 15절의 “ 호산나”(hosianna)라는 표현도 <루터역 성경>에서 옮겼다.

저작이 아닌 출판물 중에 그의 설교는 루터가 초반에는 원고를 썼으나 곧 매번 즉흥적으로 해서 자작으로 남은 것은 거의 없고, 청중들이 들은걸 복원해서 3,000여개중 2,000여개가 전한다고 한다. 에라스뮈스나 츠빙글리 같은 인물들과 서신으로 논쟁을 했고 현재도 연구에 쓰이는데 루터는 편지를 잘 보관 하지 않았다고. 그래서 연구자들이 현재에도 애를 먹고 있다.

노래 가사에도 갑툭튀한 재능을 드러냈는데 나이 40살이 넘어서 42곡을 작사했다. 이중에 36곡은 개신교 찬송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전부 단 1년 사이에 다 쓴 것이다. 그중에 바르트부르크성에서 지은 <내 주는 강한 성>은 아직도 개신교 찬송가에서 유명곡이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 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릴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아멘.
마르틴 루터 작사, <내 주는 강한 성이요>(Ein feste Burg ist unser Gott)[134]

루터는 많은 저작을 남겼지만 저작에는 별 미련이 없었다고 한다. 말년에는 자신의 저작을 평가해보라는 질문에 “≪대소교리문답≫, ≪노예 의지론≫ 2개만 있으면 다른 건 다 태워 없어져 버려도 된다”란 말을 남겼고, "책에 충분히 쓰긴 했다만 모든 것이 다 감동을 주긴 어려울 것"이라며 “미련 없이 썼지만 사람들이 이걸 보고 바뀔지는 별 기대 안 한다”는 투로 말을 남겼다. 루터의 전집은 탄생 400년 기념으로 1887년 출판된 바이마르본이 가장 유명한데, 약 100여권 분량이라고 한다. 현재 한국어로도 번역이 진행 중인데, 남은 것만 두꺼운 책으로 75권 정도로 예상한다고.

루터가 자신의 역작이라고 꼽은 ≪노예의지론≫은 에라스뮈스의 자유의지론에 논박하여 1525년 쓴 것인데, 5년 전 1520년 발표한 초기 3대 저작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와 이어지는 논리 구조이다. 제목만 들으면 '우린 노예처럼 닥치고 믿으라 된다'로 오해될 소지가 있는데, 루터 핵심 사상인 이신칭의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이중명제인
그리스도인은 만물에 대하여 자유로운 주인이며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Christianus homo omnium dominus est liberrismus, nulli subiectus)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
(Christinus homo omnium servus est offciosissimus, omnibus subiectus)

의 두 모순된 논제의 변증법적 발전이다. 한편 이신칭의는 역시 잘 모르는 측에서 선행을 할 필요없다는 투로 비난하는데 루터는 선행을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 기존 가톨릭교회에서 보속을 바라는 선행은 진정한 선행이 아니고, 선행은 어디까지나 '이웃 사랑의 결과'로 나와야 된다고 한 것이다.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 사람은 선행을 할 수밖에 없다. 이를 거슬러 가보면 선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의롭지도 않고 진정한 믿음도 없다는 뜻이다. 결국 구원론과 선행을 분리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에라스뮈스는 1524년 자유의지론을 발표하여 루터의 신학에 반박했다. 그에 다시 반박하여 1525년 노예 의지론을 발표한 것이다. 이 두 대가의 논쟁은 천년 전 교부시대 아우구스티누스 펠라기우스의 신인 협동설 논쟁의 연장으로[135] 현재까지도 자유의지 논쟁은 전체 기독교의 떡밥이다. 대략적인 소개는 예정설 항목으로. 자세한 건 역시 전문 서적을 참조 바람.

5.2. 어록

만일 교황이 면죄부 판매자들의 공갈 행위를 안다면 그는 그의 양떼들의 가죽과 살과 뼈로 베드로 성당이 세워지는 것보다는 불태워 재로 만드는 것을 더 원할 것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95개조 반박문에서
"우리는 '권위에 대한 믿음'을 '믿음의 권위'로 대체한다."
종교개혁에 대한 가장 상징적인 문구로 평가 받는다.
"진리는 교황의 주인입니다."
1518년 성경의 해석 권한은 교황에게 있으며 그 해석은 틀릴 수 없다는 카예탄 추기경의 주장에 반박하며
Verbum Dei manet in aeternum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도다.)
루터의 어록은 아니나 1526년 슈파이어 제국회의에서 루터파 제후와 도시들의 구호
왜 자기들은 신발에도 안 바르는 저질 올리브유를 우리에게 강요하는가? 고기, 우유, 버터만 안 먹는 게 과연 금식인가? 그리고 버터를 먹는 것이 도둑질이나 신성모독보다 더한 죄악이라는 엉터리 교리를 그만 가르쳐라.
1520년, 가톨릭의 금육재 교리를 비판하면서 남긴 말
나는 술을 많이 마십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나를 따라해선 안됩니다.(…) 저처럼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죽어있는 것에는 술을! 살아있는 것에는 물을! 이것은 물고기에 해당하는 말이다.
노동은 삶이다. 그러나 절반의 삶이다. 우리는 7살까지는 먹고 자고 놀고 싸기만 한다. 일생 중에 일한 것은 겨우 10년일 뿐이다. 내가 오늘 무얼 하고 지냈나? 2시간은 똥을 싸고, 3시간은 밥을 먹고, 4시간은 빈둥거렸다.
보헤미아인들은 먹어대고, 벤트인(서슬라브계 소수민족)은 도둑질하며, 독일인은 기운차게 마셔댑니다.

이상 먹는 것에 매우 민감(?)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실제로 1518년에 루터를 관찰한 사람은 '수도생활에 얼굴뼈의 개수를 셀 수 있을 정도로 말랐다'고 표현했는데, 훗날에 전하는 루터의 중장년 그림은 죄다 뚱보다.
설교자들은 설교단에서 "젖을 꺼내서 민중에게 젖을 먹여야 한다."
설교자는 입속에 이빨을 갖고 있어야 하며, 깨물고, 소금치고, 모든 사람에게 진리를 말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을 공격한다면 분쟁을 일으키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저는 긴 설교를 싫어합니다. 그것은 경청하려는 청중들의 욕망을 없애버리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강한 자를 억누르고, 복음은 약한 자를 위로합니다.
제가 믿음을 그토록 강조하며 그러한 신앙 없는 행위를 질책하면. 그들은 제가 선행을 금지했다면서 제게 책임을 씌웁니다. 제가 당신에게 믿음의 진정한 선행에 대해 가르쳐 주려고 했음에도 말입니다.
≪선행에 대한 설교 ''Sermon vondem guten Werken(1520)≫
Wenn ich wüsste, dass morgen der jüngste Tag wäre, würde ich heute noch ein Apfelbäumchen pflanzen
내일 이 땅에 심판이 날이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것이다.[136]
전쟁은 많은 것을 얻지 못하며, 많은 것을 잃고 모든 것을 겁니다. 그러나 온순한 성품은 아무 것도 잃지 않으며, 별로 많은 것을 걸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얻습니다.
동료 멜란히톤과 함께 작센 선제후에게 전쟁하지 말 것을 촉구하는 공동 탄원서
가장 힘든 유혹은 행복과 불행의 원인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왜? 라는 질문은 모든 성자를 괴롭힙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죽음 그 자체일 뿐 그 무엇도 아니다.
탁상 담화
우리는 거지같은 존재입니다. 이것은 진실입니다.
죽기 전 마지막 메모

루터 어록들은 생전부터 워낙에 달변이었고 직설화법과 모순화법 욕설도 마다하지 않고 돌직구를 매번 날렸기 때문에 추종자들과 안티들이 서로 퍼다 나르기 바빴다. 탁상담화라 하여 루터의 어록들을 모아놓은 책도 곧 출판 되었는데 대부분은 출처의 신빙성은 약간 의심스럽지만 당대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진 5종 정도의 탁상담화본은 루터의 저작만큼이나 신뢰도가 높다고 한다.

대부분의 어록은 루터의 본모습을 보여준다. 루터는 평민출신이었고 엄숙함과 고리타분한 예법을 무시했다. 실제로 루터 전집의 예배와 설교 때 한 말들을 읽어 보면, 문자 그대로 교황이나 가톨릭의 관습, 혹은 악마의 유혹 등에 대해서 "내 똥이나 처먹어라"라면서 온 가지가지 상스러운 말과 비유, 육두문자를 쏟아 내고 있다. 루터의 (좋게 말해서) 서민적이고 털털한 모습을 보여주며, 그 당시 무지몽매했던 대부분 신자들이 잘 알아먹을 수 있도록 일상적인 언어로 이런 저런 욕까지 섞어 가면서 설교를 했던 그의 모습을 상상하자면 상당히 충격이 클 법도 하다. 2003년에 개봉된 영화 <루터>에 보면 루터의 서민적인 면모를 아주 잘 엿볼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종교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유럽 지식, 문화사 전반적인 궤도에서 마르틴 루터라는 인물이 가지는 의미가 중세 말 인문 르네상스의 세계에서 16세기, 17세기의 종교 대립의 시대를 끌어내는 역할을 했다는 건데, 위의 유대인 관련 일화만 해도 볼 수 있듯이 중년 이후 본격적인 신학자의 길을 걸으며 인문 르네상스의 유연하고 관용적인 태도야 사라졌지만, 루터 또한 학문적인 토대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문헌 해독학과 신앙적 세계관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위의 문맥 없이 발언 자체로만 보면 반지성주의적으로 보이는 발언들도 저런 학문적 배경에서 지나치게 논리학적, 수사학적 과정에 중점을 두는 아리스토텔레스식 철학에 기반한 중세 스콜라 신학을 비판하는 내용이고, 루터의 총괄적인 자세는 즉, 이성을 동원하여 열심히 독서와 학문을 통해 지식을 얻되, 그 지식이 마음 자체로 느끼는 신앙, 즉 '벼랑에 몰렸을 때 눈 딱 감고 믿고 뛰어들 만한' 원초적인 믿음을 가지는 데 방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루터의 신학관 또한 르네상스 전반의 금욕에 대한 경멸과 삶의 쾌락을 악이 아닌 하나님과 인생의 선물로 보는 태도 또한 이어받았으며, 무엇보다 본인의 성격 또한 엄숙함이나 절제, 금욕주의와 거리가 먼 호탕한 동네 형님에 더 가까웠다. 루터, 칼뱅, 츠빙글리 등이 공유하는 종교개혁 당시 개신교 신학관의 핵심적인 전제가 ' 교황이고 주교고 나발이고 우리 전부 다 원죄 때문에 똥밭에서 뒹구르고 있는 똑같은 돼지 새끼들일 뿐이고, 이 똥밭의 유일한 구세주가 예수이며, 나머지 교회 구조 교리 이딴 건 다 잡스러운 옵션일 뿐이고, 원죄를 지고 태어난 인간이 이에 대해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와중에서 음악이나 음주, 결혼에 대한 루터의 발언들을 읽어 보면 '어차피 주님 없이는 우리 전부다 다 이 무한한 똥밭(즉, 찌들고 더러운 속세의 유한한 삶)에서 영원히 갇혀 있으니 주님의 구원을 받기 전에는 걍 그러려니 하고 똥밭을 받아들이는 게 차라리 낫다'라는 식의 의견을 피로하고 있다. 종교개혁의 다른 한 축인 칼뱅과 칼뱅주의가 “금욕과 절제를 통해 저 똥밭에서 최대한 그나마 똥칠 덜 돼 있는 구석자리를 찾아서 거기서 버티자”는 성향이라면, 루터는 “그래봤자 똥밭이니 주님이 꺼내주시기 전까지 최대한 자세라도 편히 하고 누워 있자”는 느낌이다.

" 방귀 트림을 왜 참냐?" 같은 개혁적인(?) 발언을 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잠이 안 오면 기도를 하고, 기도를 하다 또 잠이 안 오면 방귀 한방을 날리십쇼. 그럼 악마는 기겁해서 도망갑니다."라며 방귀 유용성을 역설했고, 비텐베르크에서 본격적으로 개혁 활동을 펼 당시 멀리 로마 교황이 루터의 주장을 듣고 노발대발했다는 소문을 듣자 "여러분, 제가 비텐베르크에서 방귀를 뀌면 그 냄새가 로마까지 풍기나 봅니다."라고 말했다. 기사, 기사 2

5.2.1. 모두 까기


루터의 언행은 돌직구가 많았고 가톨릭교회와 신자들에게 많이 공격당한 것과 비례로 과격한 면도 많았다. 그리고 특징이라면 비속어나 모순화법을 많이 썼다. 에라스뮈스는 루터와 편지를 많이 교환했는데 상스럽고 거친 농담과 외설적인 표현, 조롱, 험담, 비아냥을 불쾌해 했다.

카를 5세에겐 처음에 기대했다가 실망해서 깠고, '큰 엉덩이와 좁은 어깨를 가진 피조물은 아이를 낳기에 매우 적합하게 생겼다.' 라며 지금 기준으로면 여성비하도 쳤다.

그의 주 까임 대상은 당연히 교황과 가톨릭교회와 신자였고 이들을 악마, 적그리스도, 교황(로마) 추종자[138]였고 과격한 언행은 작센 선제후조차 정치적인 이유를 들어 자제를 시킬 정도. 신학적 이유로 토마스 뮌처와 재세례파도 악마와 교황추종자(?) 반열에[139] 들어섰고, 역시 죽을 때까지 교황과 로마 교회 급으로 죽어라고 깠다. 다음 적은 오스만 제국이었는데 영적인 적그리스도는 로마 교황이고 세속 정부를 파괴하는 적그리스도는 오스만인이라는 것[140]. 그리고 말년에 들어 유대인까지 추가되었다.

그럼에도 다른 대상과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교황과 로마교회 그리고 가톨릭 신자에 대한 욕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자신과 자신의 지지자들이 욕을 먹는 강도에 비례하여 디스와 비난의 수위는 높아졌다. 예시로 하나만 적어보자면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지만, 적그리스도 교황은 추기경들의 밀실회의에서 탄생한다.
그리스도는 환전상을 성전에서 쫓아내셨지만, 적그리스도는 면죄부를 팔아댄다.
그리스도는 과부의 헌금 두 렙돈을 귀히 받으셨지만 , 적그리스도는 돈을 갈퀴로 긁어모은다.
그리스도는 걸어 다니셨지만, 적그리스도는 사람을 짐승처럼 메어 커다란 가마를 타고 다닌다.
그리스도는 가시면류관을 쓰셨지만, 적그리스도는 삼중관을 쓴다.
그리스도는 천국에 오르셨지만, 적그리스도는 최후에 지옥에 떨어진다.

그밖에도 자신의 변함없는 후원자 작센 선제후도 깠고, 이웃 제후들도 깠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141]은 이해할 수 없는 멍청이다. 공작은 자신의 저작보다 가치가 높은 <늙은 돼지의 방귀 소리>를 들어보고 배워야 한다.[142]

자신의 민족 독일인도 깠다.
내 이야기 좀 그만하고 성경을 봐라! 이 무식하고 상스러운 독일 놈들아!
추종자들이 자신을 영웅으로 떠받들자
우리 독일인들은 거칠고 상스러우며, 광포(狂暴)한 민족이라 이들과 뭔가를 시작하는 것은 쉽지 않다. 따라서 다른 나라 사람들은 우리 독일인에 대해 하는 바가 없다.
우리는 먹고 마시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독일 짐승으로 온 세상에 알려졌다.[143]

츠빙글리도 성찬례 교리로 틀어지자 "그 맹인 바보는 더러운 암퇘지 같은 짓거리로 다른 개념을 섞어버린다"며 무식하다고 깠다.

비텐베르크 대학 강사 시절엔 중세 후반부터 The Philosopher 로 불린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도 쓰레기라고 깠다![144]

아내를 사랑했지만 동시에 이런 말도 남겼다.
내가 다시 결혼한다면 돌로 순종적인 여인을 조각해서 결혼할 것이오.
아내들은 한결같이 눈물과 거짓말과 설득으로 남편을 사로잡는 기술을 가질 수 있다.

까는 대상에 자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르틴 루터는 상스러운 녀석이다. (본인의 평가)
너 이 못된 얼간이, 방귀쟁이, 암퇘지, 야비한 놈, 잔악한 인간, 뚱보, 사이비 성직자, 거지같은 놈, 염소, 멍청한 놈, 바보, 처녀 능욕자, 포주, 오물로 더럽히는 자, 아첨꾼…
루터가 자신을 욕할 때 사용해도 된다고 허락한 장문의 욕 리스트.

자신이 죽어갈 때는 몸이 극도로 아파서 걸어 다니는 송장 수준이었고, 고통에 못 이겨 아내 카테리나에게 이런 편지도 보냈다.
뚱보박사의 몸을 어서 빨리 구더기들 밥으로 내주고 싶소. 나는 세상에 지쳤다오.

6. 루터와 동시대인들

7. 평가

현대 독일에서 독일인들에게 존경받는 위인 중의 하나다. 독일의 공영TV인 ZDF가 2003년 11월 가장 위대한 독일인 100인을 조사한 명단에서 2위를 차지했다.[169]

세계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종교개혁 이후의 기독교 역사는 루터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고 또 루터 같은 많은 논쟁과 연구의 대상이 된 인물은 현재까지에도 없으며 앞으로도 계속 논쟁의 대상일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이 성공함으로 기독교계를 새롭게 했음은 물론 서양사의 새 시대를 도래케 했다. 종교 개혁은 중세를 끝장내고 근대 유럽을 형성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타임지는 "그의 스승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면, 역사상 어느 누구보다도 마르틴 루터에 관한 서적이 더 많이 쓰였다고 한다.”라고 평가했다. 19세기 비평가 토머스 칼라일은 “루터가 없었으면 프로테스탄트, 독일의 분열, 프랑스 혁명, 미국의 독립도 없었다”는 대체역사 형식의 책을 써서 유명해지기도 했다.[170]

7.1. 개신교

개신교에서는 교파를 가리지 않고, 직접적으로 종교개혁의 주인공이라 루터의 공적에 대해서 매우 존경하고 있다. 루터교회가 아닌 다른 개신교 종파에서도 교리 차이는 둘째치고 루터에게서부터 본격적인 종교개혁 이념의 개신교가 출범했기 때문에 매우 상징적이고 영웅으로 생각하는 인물. 다만 교리적인 면에서는 다른 개신교 종파는 물론 루터교 신학자까지도 루터의 견해가 모두 옳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두 정부론'과 '자유의지' 논쟁은 루터의 주장이라 해서 다 지지받는 건 아니다. 이는 마찬가지로 장로회에서 칼뱅의 신학도 무조건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개신교에서 유일하게 본을 삼는 것은 성경뿐이고 루터나 칼뱅 등의 종교개혁자의 저작이나 신학도 참고 대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개혁의 상징적인 인물과 선구자일 뿐, 가톨릭이나 타종교인은 루터를 개신교의 창시자로 보지만 정작 개신교에서는 그런 말을 쓰지 않는다.

개신교 신학계에서 루터는 지금도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강해는 목사나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중요하게 거론되며, 특히 로마서 강해는 존 웨슬리가 루터의 로마서 강해를 듣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며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고, 20세기에도 어지간한 목사들이라면 다 소장하고 있는 칼 바르트의 1920년 로마서 주석에서도 루터의 주석을 받아들였다. 칼 바르트는 신정통주의에서 자신의 스승들을 자신의 학맥에서 제외한 반면 루터나 칼뱅 같은 초기 종교개혁가들의 연구를 자신의 학맥으로 여겼다. 또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루터의 과거 저작과 기존 19세기 바이마르판에서도 제외된 루터 저작까지 추가되어 편찬 중이며, 그동안 루터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집필한 시편 강의와 창세기 강의까지 최근 신학계에서 활발히 연구 중이다. 사실 현대 신학자 하인리히 보른캄(Heinrich Bornkamm, 1901 ~ 1977)은 루터가 현재에 신학교수로 강의한다면 신약이 아니라 구약학 교수가 어울린다고 할 정도다.

한국 개신교에서는 루터를 본받자 드립은 많이 치지만 그다지 루터에 대해 대접이 영 좋지 않다. 한국 루터교회는 소수 교파인데다가 장로회 감리회가 한국 개신교의 대부분인지라 루터보다는 장 칼뱅, 존 녹스, 존 웨슬리 계보 위주로 연구하기 때문이다. 목사나 신학자들마저 "루터는 그냥 개척자일 뿐이고, 칼뱅이 다 했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독일 개신교계에서는 교회사 수업에서 칼뱅은 2~3주 정도고 루터는 한 학기급을 배운다고 한다. 칼뱅도 자신이 루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본인이 인정했다.

7.2. 가톨릭

1520년의 교황 교서에서는 루터를 '하느님의 포도밭을 파헤치고 다니는 야생 멧돼지'에 비유했으며, 19세기 시인이자 예수회 사제인 제라드 맨리 홉킨스(Gerard Manley Hopkins)는 『독일의 난파The Wreck of the Deutschland』에서 루터를 폐목재 짐승(beast of the waste wood)에 빗대었다. 요하네스 얀센은 "중세 후기 교회는 당시 성서 번역 작업과 종교예술의 만개, 경건한 서적의 출판 등으로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충분한 동력을 갖추고 있었다"면서 "루터의 결정적인 오류는 이러한 자원들이 이미 작동하고 있음을 보지 못한데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루터는 교회의 전통을 무자비하게 공격하며 중세 문화를 파괴했다고 정도로 비판한다.
다만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루터 개인의 평가는 많이 사라졌기 때문에 루터의 신학에 대해서 주로 비판적인 연구가 진행했고, 루터, 루터파 신학에 대한 평가는 16세기와 종교분쟁 시절 같은 극단적인 반응은 아니다. 20세기 신학 연구들의 성과로 마르틴 루터에 대한 평가는 많이 달라졌으며, 1965년 미국 가톨릭계 정기 출판물에선 이렇게 평가 했다.["The Charm of Melody," Priest 12 (July 1965):585.]
우리는 오늘날 어제의 편협한 용어로 루터를 비난하는 것이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마르틴 루터란 인물도 예외 없이 역사 속에서 희미하게 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가톨릭 인사들은 루터 개인과 루터주의를 구분하고 있으며, 일단 가톨릭 교리에 맞서서 루터의 교리 자체는 옳지 않지만 의도했든 그러지 않았든 결과적으로 가톨릭교회에 자극을 주었고 가톨릭교회 변화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까지는 인정하고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위대하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거대하다고는 말하는 셈이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역사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루터를 읽어 볼 것을 권하는 가톨릭 사제와 신학자들은 있다. 개신교의 주장에 맞서서 가톨릭교회 역시 교리와 논리를 정비하여 치열한 반박으로 교회 신학이 발전했기 때문에, 가톨릭 신학자들은 루터의 인용이 많고 그러기 위해선 많이 읽을 수밖에 없다.

온건한 평가를 내린 다른 신학자론 조셉 로츠가 있는데, 그는 루터가 토마스주의보다는 오컴주의 전통에서 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중세 후반 기성 교회 안에 만연한 부패현상을 가톨릭 정통 신앙과 동일시한 것에서 비극이 생겼다면서 "루터가 주장한 대로 과연 중세 교회가 그렇게 타락한 요소를 교회의 본질로 삼고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171]

20세기에 접어들어 루터 평가 또한 전향적으로 변화했다. 현대에 스위스 출신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Hans Küng)은 루터의 파문 해제와 공적을 인정해달라 주장하기도 했다.[172]

가톨릭교회는 1960년대 개신교내 여러 교단들과 대화에 나서 특히 1999년 루터교회와 의인(義認)[173] 교리에 대해 상당한 합의를 이루기도 했다.

이렇듯 현재 서구 기독교계에서는 개신교와 가톨릭이 함께 세속화와 탈종교화 흐름에 공동으로 맞서 싸우고 있는 형편이기 때문에 가톨릭 수뇌부에서도 생각보다 루터에 대한 평가가 적대감은 상당히 희석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의 가톨릭교회가 루터를 마냥 긍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아니며,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넘어간다.

루터 당시에는 400년 이상 이어질 분열이 기정사실이 아니었으며, 가톨릭의 에라스뮈스, 가예타노(Gaetano) 추기경, 루터의 동료이자 친구인 멜란히톤(Melanchiton) 등 온건파는 얼마든지 있었고, 심지어 1530년의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는 이러한 온건파들의 정신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터가 강경함과 가톨릭의 너무나 늦은 대응이 찬물을 끼얹었다.
이렇게 화해적인 자세는 재일치를 위한 좋은 토대처럼 보였다. 황제 자신도 비타협적인 교황주의자는 아니고, 그의 마음의 밑바탕에는 에라스뮈스적인 뜻에서의 개방적인 인문주의자였기에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는 구 신앙인과 신 신앙인 신학자들로 2개의 위원회를 임명하였다. 그들의 대변인은 멜란히톤과 에크였다. 가톨릭에서는 에크·파베르·코흘레우스에 의하여 완성되고, 8월 3일에 낭독된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의 반박서」가 심의의 기초로 결정되었다. 협의에서 양측은 서로 양보하였다. 에라스뮈스의 정신이 모든 참가자들에게서 생동하고 있었다. 즉, 누구보다도 황제가 변호하고 있던 표어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일치를, 타협하겠다는 최대한의 각오, 자신의 요구를 최소한으로 줄이자는 것이었다. 결국 5가지만이 논점으로 남았는데, 그것은 평신도의 성혈 배령, 사제의 결혼, 수도서약, 그동안 프로테스탄트 영주들로부터 약탈당한 교회 재산의 반환, 미사의 희생적 성격 ― 미사 전문에서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이었다.

처음 4가지 논점은 교회의 규율과 관련된 것이었고, 마지막 논점만이 신앙과 관계된 것이었다. 가톨릭에서 양보의 용의가 얼마나 컸는지는, 황제가 1530년 9월 14일 캄페조 교황사절에게 위에서 지적한 마지막 논점들도 프로테스탄트에게 동의해 주기를 바란다는 청원과 함께 대리를 파견한 사실에서 가장 잘 확인된다. 교황사절은 거부하였다. 그러나 그가 보고를 보낸 로마에서는 기대를 걸었다. 교황 글레멘스는 당시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하나인 가예티노 추기경에게 조언을 청하였다. 추기경은 평신도의 성혈 배령과 사제의 결혼에 대해서는, 그것이 다만 규율의 문제이고 신앙과는 관련이 없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긍정적인 대답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결정은 앞으로의 공의회에서 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 두 문제는 그때부터 공개토론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멜란히톤은 만약 적어도 이 두 논점에서 양보한다면 재일치의 길에는 아무런 방해가 없을 것이라고 언명했기 때문에, 황제는 이 2가지의 양보를 로마로부터 얻어내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 그러나 트리엔트 공의회는 1563년에 가서야 그것들을 다룰 시간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어 적어도 평신도의 성혈 배령은 허용되었으나 때는 이미 30년이 늦은 후였다.

1530년 아욱스부르크에서는 일치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때 그곳을 지배하고 있던 정신은 멜란히톤과 에라스뮈스의 정신이었고, 루터의 것은 아니었다. 루터는 파문된 자로서 제국의회에 참석할 권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코부르크 요새로부터 토의 과정을 대단히 정확하게 지켜보았고, 계속된 서신교환으로 자신의 신봉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멜란히톤의 양보에 대하여 그는 신랄한 비난만 하였다. 또한 그는 어떠한 대화도 근본적으로 거부하였다. 그는 8월 26일 아욱스부르크로 작센 선제후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는 교리의 일치에 관한 토의에 대해서는 도무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 August Franzen·Remigius Bämer·Roland Fröhlich. 2001. 《세계 교회사》.[174] 천주교 서울대교구 최석우 안드레아 신부( 몬시뇰)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312-313쪽

또한 《Kleine Kirchengeschichte》는 루터가 가톨릭 교리를 자주 왜곡하여 이해하여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범했음을 지적한다. 여기에는 중세 가톨릭의 구조적인 미흡함도 한 몫을 하는데, 중세 가톨릭은 교통·통신·행정력의 문제 때문에 근대의 가톨릭보다는 신학적인 명료함이 부족했다. 이는 각 지역 신학자들의 자율성을 높여준다는 장점은 있었지만,[175] 훗날 루터(그리고 개신교)와의 논쟁에서 많은 신학적 차이들이 실제보다 과장되고 프레임화되고 슬로건화되는 원인이 된다.[176]
루터의 가톨릭적인 모습은 데니플레의 저술(1904~1909) 그리사르의 저술(1921~1930) 이래 근본적으로 변하였다. 불쾌한 논쟁은 이 종교개혁가를 그의 시대와 그의 의도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노력에 굴복하였다. 우리는 중세 후기 교회의 불쾌한 상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려던 그가 지녔던 관심사의 정당성과 함께 그의 개혁 의도의 순수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 자신도 사실은 교회 안에서 현저하게 시작한 개혁 의지의 하나의 대표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원기왕성하게 출현한 그가 교회 안에 머무르지 않고, 교회를 거슬러 종교개혁가가 된 것, 바로 그것이 비극이다.

루터가 1517년에 테첼의 대사大赦 거래를 반대하였을 때, 그는 교회의 순수한 가르침의 대변자로서 거룩한 것들을 정말로 부끄러운 방법으로 거래하고 있는 남영을 반대하는 것으로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도미니코회원과의 대결은 신학적 학설의 대립으로 빛을 잃어버렸다. 루터의 유명론적·오컴주의적 견지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테첼이 대표한 토마스주의적인 후기 스콜라학적인 입장과는 다르게 나타났다. 종교개혁 이전의 신학에서는 많은 문제들이 교회의 교도직에 의하여 해명되지 않고 있었다. 트리엔트 공의회가 비로소 그 불확실성들을 제거하였다. 그동안은 그 문제들이 학파에서 자유롭게 토의될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테첼이 자신의 의견을 교회의 가르침으로 주장하고, 재판관처럼 루터의 대답을 도발시켰다. 루터의 대답은 그 자신의 전 기질에 상응하게 역시 일방적이고 험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학파의 논쟁에서 근본원리적인 대결이 생겨났는데, 그때 토마스주의적 입장이 순수하게만 가르쳐졌더라면 그 입장이 더 우세하였을 것이라고 우리는 오늘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만일 종교개혁 이전의 가톨릭 신학이 더 명확하였더라면,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루터의 공격 중에서 많은 것이 무용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대사大赦문제만이 아니고 몇 개의 핵심문제만 들더라도 의화론, 미사와 성사에 대한 이해, 교회, 특히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가르침 같은 데에서 마찬가지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이 모호성에 대해서는, 그 주요 책임이 유명론적인 신학에 있다. 루터는 그 안에서 자라고, 그것으로 생활하고, 그 신봉자임을 엄숙하게 고백하였다. 그는 올바른 토마스주의적 스콜라학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 그 자신은 모든 것을 유명론적인 입장으로 봄으로써, 실제로는 전혀 가톨릭적이 아니고 유명론적이었던 많은 것이 그에게는 가톨릭 교리로 보였다. 이렇게 그는 여러 가지로, 실제로는 가톨리시즘이 아닌 것을 자신 안에서 격투하여 쓰러뜨렸다.(Lortz).[177] 나아가 그는 가톨릭 교리를 자주 크게 왜곡하여 서술함으로써, 그 불명료성을 확대하는 데 현저하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객관적인 비판은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종교개혁 본래의 비극적인 근거가 있다. 그것이 루터의 신학적인 자세와 그의 개성과 강하게 결합되었다.
- August Franzen·Remigius Bämer·Roland Fröhlich. 2001. 같은 책 293-294쪽.

루터의 위기에 특히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펠라기우스를 반대하여 전개·발전시킨 예정론과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에 대한 이해였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용하기 전의 초기 스콜라 신학과 중기 스콜라 신학의 할레스의 알렉산더와 보나벤투라에게 결정적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토마스 아퀴나스와 그의 학파에게, 그리고 (크게 밀려나긴 했으나) 중세 말엽에도, 소홀한 대접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연속성은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 뿐만 아니라 은총론에서도, 루터 자신이 의식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이 점은 루터를 종교개혁으로 내몬 결정적 계기가 된 로마서 1장 17절[178]이, 그 앞에서는 어떤 죄인도 빠져나갈 수 없는 가차없이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의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거저 선사하시는 의에 관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분명히 입증된다. 그런데 이러한 입장은 루터가 생각했듯이 아우구스티누스만이 주장한 것이 아니라, 가톨릭 학자들이 뚜렷이 밝혀준 바와 같이[179], 중세 신학 거의 대부분이 그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한스 큉Hans Küng, 『그리스도교: 본질과 역사』Das Christentum: Wesen und Geschichte, 이종한 옮김, 분도출판사, 2002, pp.659-660

7.3. 정교회

정교회의 경우, 마르틴 루터 자신이 적통으로 이어받았다고 하는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을 애초에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신학적으론 가톨릭보다 더 루터에 대해 강경한 자세다. 한때 17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였던 키릴로스 1세가 루터와 칼뱅을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의 신학에 큰 영향을 받아 정교회의 교리를 바꿔보려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교리적인 문제를 떠나서 당대 정교회권은 오스만 제국 치하에 있었고 가톨릭 국가와의 관계 등 복잡한 문제가 많았다.

현재 한국 정교회의 암브로시오스 대주교는 "가톨릭 사제 루터가 당시 성직자의 부패에 반발한 것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렇지만 이때 루터가 새로운 교회를 세우지 않고 초대 교회로 돌아왔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치해야 하니까요."라고 평가한 바 있다. 여기서 그가 말한 초대 교회란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으로 인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간의 신학적 이견이 발생하기 전을 의미한다.

7.4. 성서학

야고보서에 대한 관점은 새로운 연구에서 부분적으로는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문학적 평가만이 아니라 신학적 평가에도 해당된다. 이 서간의 '복권'도 종종 논의된다. 이것은 야고보서에 대한 (특히 루터파 신학에서의) 전통적인 평가절하에 대한 반동反動을 의미하거니와, 오늘날 많은 주석자의 판단에 따르면, 루터는 야고보서를 공정하게 평가하지 못했다. … 1522년 『9월 성경』 서문에 들어 있는 그의 말은 유명하다. 야고보서는 '온통 짚으로 된 서간'이니, '복음적인 성격의 것이라곤 전혀'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WA,DB 6,10).
마티아스 콘라트Matthias Konradt, "야고보서", 마르틴 에브너Martin Ebner·슈테판 슈라이버Stefan Schreiber(Hrsg.) 《신약성경 개론》Einleitung in das Neue Testament 765쪽, 777쪽
마르틴 루터는 … 6장과 10장의 속죄 신학에 대한 날카로운 의구심을 표명했다. 루터는 히브리서를 거리를 두고 대해야 할 문서들 안에 자리매김했고, 자신의 독일어 성경에서는 아주 뒤에 (요한의 편지들과 야고보서 사이에) 배치했다.
마르틴 카러Martin Karrer, "히브리서", 마르틴 에브너Martin Ebner·슈테판 슈라이버Stefan Schreiber(Hrsg.) 《신약성경 개론》Einleitung in das Neue Testament 729쪽

루터의 성서학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책은 로마서이다. 1516년에 나온 루터의 로마서 주석이 종교개혁의 출발점으로 여겨질 정도로, 루터에게 있어서 로마서는 "모든 책의 심장이며 정수"였다.

다만 루터는 자신의 신학적 호오에 따라서 성경의 책들을 편향해서 독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를 매우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가 야고보서 히브리서에 대한 루터의 평가인데, 바울로 신학과 이루는 긴장 관계를 이유로 야고보서를 '짚으로 만들어진 서간'(Stroheme Epistel)으로까지 비유했으며, 히브리서의 순서를 아예 신약의 뒷부분으로 밀어버렸다.[180] 물론 신앙적인 관점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신약의 책들에 대해서 비판을 할 수는 있지만, '오직 성경'이라는 슬로건을 생각하면 내로남불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가톨릭은 물론이고 개신교에서도, 야고보서에 대한 루터의 극단적 비판과 독자적 신약 순서는 통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181]

게다가, 최근 바울로 신학에 대한 연구성과가 축적되며 루터가 바울의 로마서에 나타난 구원관을 오독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루터는 바울로의 구원관을 ‘믿음으로써 의롭게 한다’는 이신칭의로 요약했다. 즉 ‘믿음’과 ‘행동’, 즉 실천을 분절적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바울로 신학에서 ‘믿음’과 ‘행동’을 루터처럼 엄격하게 구별하기는 힘들다는 것이 중론이다. 왜냐하면, 바울로가 ‘믿다’ 또는 ‘믿음’으로 쓴 그리스어는, 단순히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종교를 믿다, 또는 그리스도를 믿다라는 뜻과는 다소 결이 다르다. 바울로가 사용한 ‘믿음’이란, 곧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그를 의지하는 단순한 믿음을 넘어,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듯 자신의 생활이나 행동까지 철저히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고린도전서 10:31의 유명한 구절인 ‘ 그러나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일을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시오.’나, 갈라디아서 2:20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는 그의 구원관이 곧 믿음이 행동과 생활, 인생의 전면적인 변화를 상정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루터가 파악한 것처럼 ‘믿음에 의한 구원’과 ‘행위에 의한 구원’으로 이분법적으로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포괄적이고 나눌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바울로에게는 믿음이 곧 행위이자 실천이요, 행위가 곧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현대 개신교에서는 일반적으로 루터의 로마서에 대한 이해를 야고보서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주장과 절충시켜, 믿음이 배제된 선행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지만,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에는 반드시 선행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7.5. 기타

그 어떤 것도 마르틴 루터의 위대함에 반대할 수 없다! 그는 성서 번역이라는 엄청난 작업을 통해 처음으로 독일어를 제대로 만들었다. 이 언어를 괴테 니체가 완성했다. 그뿐만 아니라 루터는 스콜라적 속박을 분쇄하고 양심을 새롭게 함으로써, 연구, 비판, 철학적 사변에서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그는 인간의 신에 대한 관계의 직접성을 복구함으로써 유럽의 민주주의를 촉진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만의 사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민주주의다.
토마스 만
루터의 교리는 신성하지만 비인간적이다. 그렇다. 야만적이다. … 그러나 그의 교리는 처음에만 비인간적이다. 전제만 그럴 뿐, 결과에선 그렇지 않으며, 수단만 그럴 뿐, 목적은 그렇지 않다. … 인간의 모습으로 루터가 취한 것.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루터는 100배로 다시 보상한다.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von Feuerbach)[182]의 <루터 연구>

프리드리히 대왕은 루터를 가리켜 독일 민족정신의 화신이라고 칭했다.

루터의 평가는 신학계보다 독일 내셔널리즘과 결합하여 후대의 독일인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당시 세인과 후학들인 역사가, 정치가, 철학자는 물론 훗날 공산주의 진영이던 동독에서조차 루터와 관련된 공휴일이 있었을 정도. 당시 동독에서 구시대 인물 중에 긍정적으로 평가한 인물 중의 하나이다.[183]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루터를 종교개혁의 창시자로, 종교개혁을 봉건체제에 대항한 유럽 시민계급 최초의 결전이라고 평가했다.
동시에 그들은, 혁명적 노동자운동을 특별한 의무로 느꼈던 농민전쟁과 토마스 뮌처는 루터가 제공한 동기에서 유발된 필연적 결과를 구체화했다고 말했다.
1983년 루터 탄생 500주년 기념, 동독 사회학자 그룹이 제시한 《마르틴 루터에 대한 논제, Thesen Über Martin Luther

물론 루터는 자신이 고백한 대로 결점 많은 사람이었고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이에 대해 그를 존경하는 후학은 이렇게 말한다.
루터를 찬양하라! 우리의 가장 고귀한 신을 구해준 그를. 우리가 오늘 까지도 살 수 있도록 선을 베푼 그를 영원히 찬양하라!
그의 견해가 편협하다 비판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는 난쟁이는 당연히 거인보다 멀리 볼 수 있다. 특히 난쟁이가 안경을 썼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높이 바라보기는 하나 고귀한 감정,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없는 거인의 심장은 결여되어 있다. 거인의 실수에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이러한 실수는 미덕으로서, 수많은 다른 것보다 우리에게 훨씬 이롭다. 때로 마르틴 형제의 지독한 야만성은 우리를 그렇게 멀게 가게 만들었다. 에라스뮈스의 고상함과 멜란히톤의 부드러움은 절대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인리히 하이네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관하여 Zur Geschichte der Religion und Philosophie in Deutschland

기독교의 강한 비판자였고 루터를 혐오한 프리드리히 니체 조차 루터의 공적을 인정했다.
루터는 인류에게 불운이었다. 그는 르네상스가 교황권을 공격하고 묵묵하게 기독교를 제거하려고 할 때 등장했다. 그리고 루터는 교회를 다시 세웠다.
아, 독일인들이여! 기독교는 우리에게 파멸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독일인들의 소행이었다.
그들은 천 년 이래로 애써 지켜온 모든 것을 엉클어지게 했고 어지럽게 만들어 놓았다. 그들은 불완전한 양심을 갖고서 유럽을 병들게 했다. 그들은 깨끗하지 못한 형태의 기독교를 갖고 있다. 이것은 가장 고치기 어렵고, 가장 반박할 수 없는 것인데, 이는 프로테스탄트에 책임이 있다. 우리가 기독교를 말끔히 처리하지 못한다면 독일인은 유죄 판결을 받을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루터는 호불호가 갈리는 기독교의 인물이라, 출처 불명의 갖가지 설이 인터넷에 난무한다. 그러니 루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인터넷에만 의지하지 말고 전문서적을 참조하도록 하자.

8. 비판

루터의 업적은 많은 이들이 인정하지만 생전부터 열렬한 지지자들보다 안티들이 훨씬 많기 때문에 행적은 물론 신학적인 면조차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일단 신학적인 면에서는 가톨릭교회와 다른 개신교 교파뿐만 아니라 현대의 루터파 신학자들에게 조차도 비판을 받는다.
철두철미한 반유대주의자이며 유대인 절멸까지도 악질적으로 옹호했다. 루터는 1543년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대하여>를 저술 했는데 내용을 보면 첫째 그들의 회당 학교를 불사르고, 둘째 그들의 집을 파괴하고, 셋째 탈무드를 뺏고, 넷째 랍비들이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고 다섯째 노상에서 유대인의 통행권을 폐지를 권고 했다. 이는 저작자 이름만 가리면 20세기 나치 독일의 유대인 탄압을 연상할 만큼 충공깽할 만한 내용이고[184] 나치 독일도 이런 구절을 정치적으로 적극 이용했다. 거기에 뒤의 내용을 보면 여섯째 유대인의 고리대금업을 금지하고 은금을 뺏어 보관할 것, 일곱째 젊고 튼튼한 유대인 남녀들의 손에 도리깨, 도끼, 괭이, , 실감개 대, 물레가락을 주어 이마의 땀으로 빵을 벌게 할 것을 권고.[185] 앞의 조항들과 연결하여 보면 이것은 유대인에게 그들의 종교를 부정하고, '독일인'보다 열등한 권리를 부여하고 재산마저 강탈하며, 한 곳에 가둬 놓은 채 노예 노동을 시키자는 주장이다. 게다가 이 저서를 발표한 목적은 "이토록 유해한 유대인의 활동에 반대하며, 그리스도인에게 유대인을 경계할 것을 경고하고자 이 소책자를 썼다"고 대놓고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으며, 심지어는 “그들을 도륙한다고 해서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는 등, 미래의 홀로코스트를 예견한 듯한 발언까지 하였다.[186]

루터의 생각으론 유대인들이 옹고집으로 기독교를 거부하고, 신성모독 무신론에 물든 것은 고리대금업에 손대서 타락한 생활을 하기 때문이라고 봤다. 그래서 당시 금지했던 유대인의 토지소유와 길드 가입 허용을 주장했다. 이 주장은 유대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유대인 랍비들은 “유대인의 계율은 농업과 공업에 종사하는 것을 명하고, 대금업은 부정적이다. 만약 유대인들의 경제활동이 허용된다면 고리대금업을 금하겠다.”고 화답했다.[187][188]

그리고 루터는 처음에는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관심을 가졌고, 루터가 성경 정경 기준으로 선택한 것도 유대교 회당의 구약성서의 범위에서 선택한 것이었다. 또한 반유대주의가 만연한 유럽에서 그는 오히려 "유대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이며 제자들이니 박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을 내세웠고 그에 감격한 독일 내 유대인들이 당시 종교재판의 광풍으로 개종 아니면 화형 크리로 위협받는 에스파냐의 세파라딤(Sepharadim) 형제들에게 "그리스도인 중에도 이런 사람이 있다"라며 희망을 잃지 말자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는 나름대로 '기독교를 개혁하면 유대인들을 루터파로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당시 유대인들은 ' 기독교와 유대교가 양립할 수 있다'는 주장에 공감하며 종교의 통합의 가능성까지도 열어 두었지만, 그 해결책이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완전히 개종해야 한다'는 의견에까지는 공감하지 못했다. 결국 루터가 유대인들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어마어마하게 과격한 발언들을 쏟아낸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다.

상기 문단을 인용한 진보성향 기독교인인 로드니 스타크 미국 베일러 대학교 교수이자 세계 종교사회학 연구소 소장에 따르면, 많은 개신교 학자들이 억지로 루터를 옹호하고, 그의 반유대주의를 축소하거나 아돌프 히틀러와의 연관성을 '단절' 시키려는 시도를 하였으며 '루터의 반유대주의에 침묵'한 것에 경악스러울 지경'이라고 그의 저술에 적고 있다.[189] 스타크 교수의 결론은 루터는 반유대주의자가 맞으며, 나치 독일은 루터를 계승한 것이다[190]. 그가 개신교인이자 자신의 저술 서문에서 '종교개혁은 결과적으로 기독교 입장에서 이로운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함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명백한 반유대주의자이자 유대인의 노예화, 학살 옹호자라고 결론지었다.

다만 개신교, 특히 루터교 신학계에서 루터의 반유대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아돌프 히틀러의 국가교회 체제를 거부하고, 오히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가담했다가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순교한 디트리히 본회퍼도 루터교 목사였다. 현대 루터교회는 대부분 반유대주의를 거부한다. 루터는 반유대주의가 보편적이었던 근대 이전의 사람이었으므로 크게 놀랄 것도 아니다.
토마스 뮌처 등의 시민들이 교회 왕권의 수탈과 억압에 못 이겨 일으킨 독일의 농민 봉기에 대해서 농민들의 편에 서지 않았던 탓으로, 위선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토마스 뮌처는 한때 루터의 지지자였으나 루터와의 신학적 견해가 엇갈리자 루터를 “종이 쪼가리에서 하나님을 찾는 멍청이이고 악마”라며 비난했고, 루터는 최대의 욕인 “로마 추종자”라는 욕을 먹고 절연했는데, 사실 여기에 어느 정도 루터의 책임도 있다. 루터가 주장한 만인사제론은 농민들에게는 새로운 구원의 메시지로 여겨졌으나, 루터는 만인사제론을 신앙의 관점으로만 언급한 것이라 하여 농민봉기에 반대했다. 루터는 무식하고 상스러운 무리들이 자신의 두 정부론을 이해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에 속한 영적인 정부 아래에선 만인이 평등하지만, 세속정부에서는 엄연히 질서가 있고 순종해야 된다”는 주장이었다.

루터는 처음에 ≪ 슈바벤 농민들의 12개조에 답하여≫라는 글로 농민들이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으며 그들의 주장은 매우 타당하다고 평가했다. 다만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며 폭력적 수단은 사용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어떠한 명분이라도 폭력이 동반되면 그들의 명분은 변질되고 폭도로 돌변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데, 영주들이 수탈한 것은 한두 해 일도 아니고 루터가 권고한다고 들어먹을 일도 아니어서, 루터가 할 수 있는 방향은 도덕적 권고에 그칠 뿐이었기 때문에 실효성은 전무했다.[191]

물론 토마스 뮌처는 다른 선동자와 급이 달랐다. 뮌처는 훗날 다른 사이비들이 자신들이 성령을 직통으로 받았다며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보다 우위에 있다하여 예언드립치며 계시를 무기삼아 사람위에 군림하고, 농민들의 무지함을 이용하여 시한부 종말론을 내세워 신정국가를 만들고 자신들은 하늘의 계시에 따라(?) 6처, 9처, 15처씩 아내를 두고 금방 특권층이 되어 영주행세를 하다 진압된 데 비해, 뮌처는 단순 농민반란이 아니라 진정한 사회개혁을 구상하고 추진했다. 초기의 사유재산 폐지와 농노제 폐지 공동생활들을 주장한 것을 실제로 이행했다. 뮌처는 탁월한 설교가이기도 하여 예수의 산상수훈을 바탕으로 '고난 받는 자가 선택된 백성'이라는 가르침은 농민들에게 깊이 파고들었다.

루터는 뮌처의 급진적인 가르침에 대해 “하나님의 백성은 고난을 받는다, 그러나 고난 받는 이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은 아니며,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지는 하나님만 아신다.”라며 신비주의적 예언과 선택받은 백성과 받지 못한 백성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구분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뮌처는 지주와 지배계급을 구약시대 가나안 주민으로 농민들을 고난 받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비유했고 자신을 기드온의 검이라며 무력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지배계급을 처단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포했고, 이 파급력은 결국 농민들의 불만에 불을 붙였고 활활 타오르게 된다. 각지에서 뮌처에 호응하는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러다 루터가 작센 지방에서 설교 중에 야유를 받으며 설교단에서 끌어내려지고, 비텐베르크 주변에서 농민들이 아이가 보는 앞에서 어머니의 가슴을 도려내고 항복한 지주 15명을 벌거벗겨 고문하고 죽인 사건이 소문이 퍼지자 루터는 농민들을 맹비난한다. 루터는 ≪살인과 강도를 일삼는 농민들에 반대하여≫라는 글을 써서 그동안의 관용을 버리고 이들이 봉건질서를 무시한 반역자들이며 죽어야 하는 이유가 이단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단이며 반란자이기 때문에 죽어 마땅하다 선언했다. 그리고 광신도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신의 무리가 살인 약탈을 일삼으며 기존 지주뿐만 아니라 루터파와 가톨릭 신자까지 무신론자라며 척살하고 자신들이 폭력행위가 기드온의 칼로 가나안 주민들을 학살하는 것이며 지상에 새로운 시온왕국과 새 예루살렘, 천년왕국 타령을 하는 것을 비난했고 전쟁질, 폭동질을 하려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떼라고 일갈했다. 결국 토마스 뮌처는 5천의 농민들을 이끌고 2만의 병력의 진압군과 전투 끝에 잡혀 처형당하고, 이번엔 영주와 지주들의 피의 보복이 이어졌다. 반란농민 뿐만 아니라 진압과정에서 무고한 농민과 노약자들까지 무참히 죽었다. 농민 전쟁이 일어난 지역은 초토화되었고, 봉건적인 구속은 다시 원위치로 돌아갔다. 농민들은 자신들을 배신한 루터에게 '비텐베르크의 교황'[192]이라며 저주했다.

루터는 나중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영주들이 농민에게 관대하게 대할 것을 촉구했지만 이미 토마스 뮌처가 패망하며 5천여명의 농민들이 2만여명의 진압병력에 토벌 당하고 뮌처는 추종자 53명과 나란히 처형당한 후였다.[193]

이후 쏟아지는 비난에 "제가 농부들을 다 때려죽였습니다. 농민들이 흘린 피는 내 책임입니다."라고 책임을 인정했지만 자신의 신학적 주장의 당위성은 굽히지 않았다. 농민들은 루터에 대한 지지를 완전히 거두었으며 정치적으로 루터의 영향력은 급속히 줄어들었다.

루터는 성경대로 행하기 위해서 바울과 베드로의 서신인 로마서 베드로전서에 나온 '권력에 복종하라'는 말씀에 충실했다는데, 토마스 뮌처를 비롯한 비판자들은 루터가 제후들의 보호를 받아 종교개혁을 성사시키고 있던 루터가 농민들의 편에 서게 되면 결국 영주들이 루터를 버리게 될 것이고 종교개혁이 실패할 것이라는 정치적 계산하에서 움직였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리하여 당시 급진 혁명론자들과 토마스 뮌처를 높이 평가하는 사회주의계열의 영향으로 "루터가 사실 정치적으로는 비열한 위선자!!"라고 비난한 이들도 있다. 그리고 루터는 사도 바울과 베드로의 성경 문구대로 세속권력에 저항하지 말라고 주장했는데 이 두 사도의 서신은 로마시대 기독교인들이 세속권력에 반대하는 것은 기독교 공동체가 완전히 파괴되기 때문에 말린 것이고 1500년 후의 유럽은 기독교 문명 사회였기 때문에 루터의 세속권력 복종 타령은 성경의 의도를 오히려 반대로 해석하는 것이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무엇보다 두 정부론 자체가 가톨릭교회의 세속 간섭과 그로 인한 병폐를 비판하기 위한 도구로 태어났기 때문에 반대로 종교가 세속과 분리될 경우의 문제점이 발생할 가능성은 간과했다. 그러니 태생적으로 루터가 예상치 못한 사회변혁에 대안이 되기 어려웠다.

그런데 정치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루터가 농민들을 저버렸다는 비판은 무리가 따르는 게, 작센 선제후에 납치되어 1521년 바르트부르크 성에 있을 때도 선제후에게 청원하여 선제후가 황제에게 거역하지 말고 자신을 석방하여 명령을 따르라고 권유했다. 제국 추방령이 떨어진 상태에서 법의 보호도 못 받고 루터의 추종자들이 가톨릭 우세 지역에서 고문 살해당하는 형편이었고, 본인조차도 살해 협박에 시달렸는데, 신교도 선제후를 보고 가톨릭의 수호자인 황제에게 세속적으로 거역하지 말 것을 주장한 것과 1522년 기사들의 난 때에도 지지하지 않은 것을 보면 최소한 일관성은 있었다. 루터가 세속적인 혹은 영적인 지도자 지위를 원했다면 루터에게 인정받으려고 노력한 츠빙글리와의 교리논쟁을 비타협적으로 매몰차게 거절할리가 없지 않은가.[194]루터는 다른 문제는 몰라도 신학과 교리에선 꽉 막힐 정도로 고집불통이라 지지자들이 갑갑해 할 정도였다. 제자이자 가까운 지지자이며 동료 교수인 필립 멜란히톤(Philip Melanchthon)은 루터에 대한 존경심은 잃지 않아도 꽉 막히고 비타협적인 루터 대신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루터의 허락 없이 멋대로 타협했고, 선제후조차 루터보단 유연한 멜랑히톤을 선호할 지경 이었다.

2차 대전이후 루터의 두 정부론이 독일 개신교회에 영향을 미쳐 국가의 세속권력에 무조건 복종하라는 논리가 되었고, 아돌프 히틀러의 등장과 나치 독일에 순종한 루터파 교회의 무기력함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른 게, 가톨릭교회에서도 1933년 나치와 맺은 정교 협약을 준수해서 나치에 대한 비판을 자제했고, 13,000명의 개신교 목사 중 대부분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고 나치에 호의적인 성향의 <독일인의 교회> 가입한건 3천여명이고 그나마 그 조직도 금방 와해되었다.[195] 반나치 성향의 <고백교회> 소속 목사는 2,000명이었는데 이들은 700명이 수용소로 끌려갔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대부분의 목사들도 루터파의 신학인 세속 정부엔 복종하되 교회를 정치에 이용하는 것은 배격하는 루터의 입장에 충실해서 방관적이었다.

20세기 중반에 들어 마르틴 루터가 독일 농민전쟁에 지지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비판이 쏟아져 내린 것은 어느 정도 동독시절 토마스 뮌처를 띄워주려는 의도도 작용했다. 토머스 뮌처는 구 동독의 5마르크 지폐의 주인공이고 마르크스-레닌처럼 동독 공산당에서 혁명가로 숭상 받았는데, 루터의 보수성과 대비되는 혁명가로 토마스 뮌처를 필요 이상 띄워주려니 상대적으로 혁명의 동기를 제공한 루터를 깎아 내릴 필요성이 있었다. 그리고 뮌처의 혁명성도 지금 기준에서 보면 상당히 반봉건적인 여부를 떠나서 종교적 선동 요소가 다분했고[196] 루터 또한 전후단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동독 공산당과 사회주의 학자들에게 비난만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루터는 상대적으로 구체제와 기독교인 인물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동독에서 높이 평가받는 인물이었기에.

루터의 두 정부론은 세속군주에 세속적인 명을 복종하라는 것이지 영적인 면에서 침해를 당하면 저항권을 인정했다. 1523년 저서 <<교회에 대하여>>를 통해서 그리고 세속군주는 자신의 영토 내 교회를 보호해야 할 의무는 있지만 영적인 면에서 교육하거나 간섭할 의무는 없다며 선을 그었고, 비슷한 시도에 대해서는 반대를 분명히 했다. 세속적으로도 1528년까지는 작센 선제후에게 까지 황제에게 거역하지 말 것을 당부했지만 1529년 슈파이어 제국회의에서 카를 5세가 다시 루터파를 이단척결 명목으로 제국 추방령을 재확인하자 1531년 생각을 바꿔서 세속적 정부보다 하나님의 영적인 정부가 우위에 있으므로 신교도 제후들에게 행동으로 나설 것을 승인했다.

결론적으로, 루터의 두 정부론이 기독교인의 사회참여를 저해하고 위정자들에게 방어논리를 주었다는 비판은 가능하다 이것은 2차대전 이후 루터파 고백교회에서도 나왔다. 루터파에서는 고백교회의 디트리히 본회퍼, 다른 개신교 신학자로는 스위스의 칼 바르트가 루터를 매우 비판했다. 그러나 세속 권력에 무조건 복종하라 했다는 주장은 그 당시 시대와 루터의 주장을 잘 이해하지 못한 반응이다.[197]

한편으로 루터는 농민전쟁 뿐만 아니라 그 후 보여준 보수성 때문에 루터파의 사회적 입장은 매우 보수적이었다. 이전까지 가톨릭교회에서 맡았던 가족과 사회질서를 종교개혁 이후 가부장에게 위임하여 북독일 루터파 개신교 지역은 가부장제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는 평을 받는다. 당연히 이런 입장은 가부장뿐만 아니라 사회안정을 원하는 지배계층과 국가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한편 반기독교 계열에서는 루터를 반지성주의자의 표본이라고 생각하고 규탄하고 있다. 개신교 내에서도 감리교를 세운 잉글랜드 존 웨슬리 또한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의를 보고 루터의 이성드립을 비판했는데, 올바른 이성이든 그릇된 이성이든 싸잡아 다 비난했다고 비판했다.[198] 그 대표적인 사례로, "신앙을 위해서는 이성의 눈을 뽑아 버려야 한다"는 주장을 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그와 꽤 비슷한 주장을 여러 차례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예를 들어 1546년 1월의 비텐베르크 설교 중에는 "이성은 악마가 가진 최대의 창녀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고, 《탁상담화》에서는 "이성은 신앙의 최대의 적이다, 그것은 영적인 것을 돕기 위해 오는 일은 절대로 없고, 오히려 신성에 맞서 싸우며,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을 경멸한다"[199] 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인간이 계몽되었을 때, 이성은 신앙에 적대하지 않으며, 도리어 더 발전시키고 진보시킨다"[200] 고 정반대로 말하기도 했다.

이상 루터의 상반된 이성에 대한 입장은 이처럼 루터의 이성과 신앙의 관계는 상당히 모순적이어서 루터를 처음 배우는 신학생들조차 매우 혼란스러워 한다. 이는 루터, 그리고 기독교, 또는 개신교를 반지성주의로 몰아가는 측에서 상당히 왜곡하여 악용된 측면이 있는데[201] 이를 인용한 사람들이 중세 철학 논제나 역사 신학 철학에 대해서 상당히 무지했기에 의도를 거꾸로 인용한 참사이다.[202] 일찍이 루터가 자신의 학맥으로 인정한 오컴의 윌리엄은 중세 스콜라 철학의 보편주의에 반기를 들어 새로운 길(via moderna) 노선을 주장하며 이성의 영역과 신앙의 영역의 분리를 주장했고 이는 중세시대 철학이 신학의 시녀의 위치에서 탈피하여 독립적 연구를 시도한바 오컴을 근대 철학의 선구자급으로 인정하는 견해도 있을 정도다. 따라서 오컴의 학맥을 계승한 루터는 한때 오컴의 열렬한 추종자로 새로운 길 노선의 철학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받아들였고[203] 고대 그리스 철학 이론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는 루터와 반기독교 주의자들의 비판과는 달리 이성과 신앙의 영역의 분리를 주장하는 오히려 지성주의적 주장이다. 오늘날에 신앙에 이성을 들이대거나 이성에 신앙을 들이대는 대표적인 예까 자유주의 신학과 창조과학이다. 정치가 종교와 분리되어야 함과 같이, 과학 또한 종교와 분리되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인 것이다.

한때 중세 스콜라 신학은 보편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신을 알려는 노력을 하면 신에게 가까워질 수 있다" 또는 "그분께서 보상을 베푼다"는 견해가 통설이었다. 이는 열심히 공부하면 신앙에 도움이 된다, 또는 열심히 연구하거나 행하면 신앙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과 가까웠다. 그러나 이는 앞서 면죄부와 관련된 중세 교회의 타락에 영향을 준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에[204] 이에 대해서 루터가 열렬하게 비판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루터는 열심히 공부한다고 노력에 비례하여 은혜를 받지 못하며,[205] 열심히 선행을 하는 것은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못 한다는 신학이론으로 맞섰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성이라는 수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다가가야 하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이성이 믿음의 영역을 넘어서 숨겨진 하나님의 섭리를 모두 이해하려는 것은 멍청이가 자꾸 태양을 관찰한다며 쳐다보면 장님이 된다며 비유한 것이다. 전술한대로 루터는 거의 최초로 남녀 모두에게 공교육과 무상교육을 주장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현실 세계에서는 어디까지나 세상은 법과 검으로 통치해야 한다며 교회의 영역을 상당히 좁게 해석한 신학자 였다. 이는 모든걸 모르는게 없으며 검열하고 판단해주는 교황청 비판에서 나온 논지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다른 논제일 것 같은 자유의지론 논쟁도 이 연장선에 있다. 루터는 에라스뮈스와 편지로 논쟁을 한 것도 알려졌다. 그러나 루터와 에라스뮈스는 그 시대 이전과 그 이후의 기독교계의 만년떡밥인 단독설과 신인협력설의 주장을 각자의 논리로 첨예하게 반박했고 이는 현대 신학자들까지 주목하는 업적이다. 두 대가의 논쟁은 종교개혁 이후 여러 사정으로 벌어지자 둘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오갔고, 공식적으로 에라스뮈스가 루터와 절연한 것은 1525년 루터가 결혼하고 나서지만 에라스뮈스의 자유의지론에 반대하여 루터는 노예의지론을 발표하여 논박한 것이 시초다. 사실 루터의 '노예의지론'은 1520년 저작 '기독교인의 자유'와 이어지는 내용으로 얼핏 보기엔 상당히 모순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루터 사상의 정수로 꼽히면서 한편으로는 에라스뮈스뿐만 아니라 가톨릭, 다른 개신교, 루터파 신학자까지도 반박할 정도의 폭탄급 파급력을 지닌 저작이다. 이 자유의지 떡밥은 현재도 전체 기독교의 단골논제다.

9. 루터를 다룬 도서들

루터의 신학에 대해서는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 루터 평전으로는 예일 대학교 교수 롤란드 베인턴의 <마르틴 루터 HERE I STAND>, 박흥식 교수의 《미완의 개혁가, 마르틴 루터》[206] 등이 있다.

10.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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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파일:external/pbs.twimg.com/CyRBBDAWQAAikie.jpg 파일:external/www.goethe.de/Luther-Playmobil-695.jpg
파일:ute-dornbach-nensel-dietrich-denker-burkhard-173936859.jpg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여 플레이모빌로 출시되었다.
파일:루터(미하엘 콜하스의 선택).png
* '미하엘 콜하스'라는 실화기반의 독일 소설에서 등장한다. 이 소설은 2013년 매즈 미켈슨이 주연인 미하엘 콜하스를 연기하였고 마르틴 루터로는 프랑스의 연기파 배우 드니 라방이 분하여 프랑스에서 영화화가 되었는데[215] 작중 루터는 영주의 부당한 횡포를 못 이겨 봉기를 일으킨 작센지방의 상인 콜하스[216]를 제어하고자 한다. 교회 개혁의 대표주자인 마틴 루터는 콜하스를 비난하는 격문을 쓰고 심지어 소설에서는 비밀리에 콜하스를 찾아가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실제 역사에서도 루터는 세상의 권력, 왕에 복종하라고 콜하제를 설득하여 콜하제와 권력 사이에서 중재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루터는 근대적이고 개혁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지만, 민중이 일어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이중적인 면모가 있다. 결국 미하엘 콜하스는 세력을 해산 시키나 기득권 세력에 의해 참수[217]를 당함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1] [ˈmaʁtiːn ˈlʊtɐ\] [A] 독일 작센안할트 주 아이슬레벤 [A] [4] 비텐베르크 대학교 신학 교수 [5] 아버지와는 달리 의사, 의료 화학자 및 연금술사를 직업으로 삼았다. [6] 참고로 대한민국의 루터교회 및 개신교회에서는 그를 말틴 루터라고 표기한다. [7] 당연히 루터는 이 도시의 최고 아웃풋. 아이슬레벤 주민들의 루터 사랑은 그야말로 각별하다. 당장 여기 도시의 정식 명칭부터가 루터의 도시 아이슬레벤(Lutherstadt Eisleben)이다. 여담으로 도시의 정식 명칭에 루터의 도시라는 명칭을 붙인 도시는 독일 전역에 총 2곳이 있는데 2곳은 바로 루터가 태어나고 사망한 아이슬레벤, 루터가 인생의 대부분을 살았으며 신학 교수로 재직하며 종교 개혁의 포문을 연 비텐베르크이다. [8] 마르틴 루터가 이름을 루더에서 루터로 바꾼 건 1512년 내지 1518년이다. 1518년 사도 바울이 사울에서 회심으로 바울로 개명한 것처럼 바꾸었다는 설도 있지만 부정하는 측도 있다. [9] 그중에 신학박사는 박사 중의 박사로 불렸고, 철학은 신학의 하위 학문으로 인식 [10]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아버지는 요아킴. [11] 친구와 함께 길을 가다가 친구가 번개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자기 바로 앞의 바위 혹은 나무에 벼락이 떨어졌다고도 한다. [12] 남성 수도자를 수사(修士), 여성 수도자를 수녀(修女)라고 함. 수사 중에는 사제로 서품되지 않은 평수사와, 사제로 서품된 성직수사(수사신부, 수도사제라고도 함)가 있다. 마르틴 루터의 경우는 후자였다. [13] 이렇게 수도자 신분으로 사제서품을 받은 사람을 수도 사제라고 한다. [14] 이 3가지를 복음삼덕이라고 한다. [15]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에는 40여구의 교황들의 유해와 사도 베드로, 사도 바울를 비롯한 7만 4천여 구의 순교자의 성유물,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신하고 제사장으로부터 받은 은화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레오 10세는 유해마다 4,000년, 은화는 1,400년의 면벌효과가 있다고 선언했다. [16] 지금도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이런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17] 당시 로마 교황은 율리오 2세였는데 세금 안 내고 교황령을 점령한 신자(베네치아)들을 갑옷 입고 말 탄 채로 친히 정벌 중이라서 먼발치에서라도 보진 못했다. [18] 일명 탑 체험이라고 하는데, 시기에 따른 논란은 있는데 1505년, 1512년, 1518년설까지 있다. 보통은 1512년으로 본다. [19] 이를 ' 이신칭의' 또는 의인(義認)라고 한다.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에게 의롭다고 칭해진다 또는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20] 가톨릭 역시 구원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는 것이라고 가르치지, 스스로의 선행이나 수행의 결과로 얻는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용어와 개념 특히 인간론에서 차이가 있다. 개신교나 가톨릭이나 라틴어로는 justificare, 영어로는 Justification으로 한국어 번역은 개신교에선 이신칭의는 가톨릭에선 의화로 번역한다. 자세한 건 이신칭의, 로마서 항목 등 참조. [21] 당시 독일은 지리적인 명칭이었고,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느슨한 연방 체제 국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황제는 자신의 직할지에서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는데, 합스부르크 가문 기준으로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이 끝이었다. [22] 가톨릭이 대사, 면벌부라 번역하는 것과는 다르게 한국루터교회와 다른 개신교 교파에서도 역사성을 고려해서 면죄부로 번역한다. [23] 37대 튜튼 기사단장이자 1525년 루터교회로 개종한 초대 프로이센 공국 공작 알브레히트와는 동명이인으로 심지어 둘은 사촌이었다. [24] 유력 가문의 자제들을 고위 성직자로 임명하는 것은 당시 흔한 일이었다. 레오 10세도 13세에 추기경이 되었다. [25] 황제 선거시의 마지막 투표 권한이 있어 캐스팅보드의 자격이 있고, 독일 왕국 재상이라는 명예직도 있다. 그 외에 알프스 이북의 교황의 대리인으로 불릴 정도로 강한 권력을 지녔다. 물론 마인츠 대주교 자리를 노린 것은 기회만 되면 호엔촐레른 가문에서 황제를 한번 배출해 보겠다는 요아힘 1세의 정치적인 계산도 있었다. [26] 십자군 전쟁 시기부터 성직제후들에게 부과한 세금으로 첫해 수입을 모두 바친다. 이후에도 관례화되어 십자군 전쟁이 끝나고도 폐지되지 않았다. [27] 1502년부터 조반니 메디치 추기경의 수하로 폴란드 왕국에서 종교재판 이단심문관을 역임했고, 티롤 지방에서 간음 등의 엽색행각으로 황제 막시밀리안 1세에게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교회의 탄원으로 풀려난 전적이 있는 막장인물이었다. [28] 연옥에서 고통 받는 영혼의 구원 목적의 면죄부는 교황 갈리스토 3세 시대인 1457년부터, 1476년 식스토 4세의 교서 <우리의 구원(Savator Noster)>에서 죽은 자는 후손이나 친척이 대신 면죄부를 사도 효력이 있다고 선언했기 때문. 교회 밖에선 당연히 이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29] 요하네스 테첼은 학식이 없었기에 본인이 직접 쓴 것은 아니었고, 루터의 대적자인 비아드리나 대학교 신학교수들이 쓴 것을 테첼의 명의로 발표했다. [30] 가톨릭에서는 그저 지역 성직자에게 항의 서한을 보낸 것이라고 본다. 근거는 1960년대 가톨릭 교회사가가 기존의 16세기 중반 필리프 멜란히톤의 책을 보고 그는 그 자리에 없어서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한 것, 개신교 교회사가 중에서는 절충으로 10월 31일에 항의 편지를 보내고 11월 중순에 반박문을 내건 거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31] 다만 일부 학자들은 이 당시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자체는 아직 가톨릭과의 완전한 단절까진 가지 않았다고 본다. 단 여기서 말하는 것은, 루터가 아직 가톨릭교회의 개혁에 희망을 걸었고 가톨릭에서 교육받은 신학관을 바탕으로 내걸었다는 것이지, 95개조 반박문 내용 자체가 당시 가톨릭교회에서 수용 가능한 범위는 아니다. 사실 현재도 수용 불가능하다. [32] 이탈리아 중부 마르케 지방 페사로에우르비노 주에 있는 도시 [33] 동성애 성향의 레오 10세가 자신의 동성애인으로 추정하는 페트로치 추기경에게 살인죄를 물어 참수형에 처하고, 연루된 다른 추기경들은 심문 끝에 속죄하고(돈을 바치고) 풀려났다. (<교황 연대기> -존 줄리어스 노위치-) [34] 막시밀리안 1세의 유일한 아들 필리프는 일찍 죽었다. [35] 이 자리에서 도미니코회 수도자 마르틴 부처(Martin Bucer, 1491 ~ 1551)와 헤센 방백 필리프 1세(1504 ~ 1567)는 루터에 감화되어 종교개혁가로 돌아섰다. 남독일에서도 종교개혁이 퍼지게 되었고, 부처와 필리프는 훗날 츠빙글리와 루터 사이를 다니며 중재하려고 노력했다. [36] 이하 루터가 설명한 기독교인의 자유의지는 1525년에 저술한 노예의지론(De Servo Arbitrio)에서 구체화 된다. 단편적인 소개는 나무위키 예정설, 이신칭의, 항목과 자유의지 항목 중 신학/기독교 목차 참조 바람. [37] 루터의 설교를 전해 듣고 그동안 애지중지하던 성수(聖水)는 버렸지만, 2만 9천여점의 성유물은 죽을 때까지 보관했다. [38] 생몰은 1469 ~ 1534년생으로 본명은 토마스 드 비오(Thomas de Vio)로, 도미니코회,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의 전문가. [39]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금, 보석 따위를 박은 장미 꽃잎 모양의 장식으로 로마의 교황이 교황청에 대해 공로를 한 국가나 도시에 사순절의 넷째 일요일에 이를 축성하기 때문에 선물 받는 개인 및 가문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40] 이미 이전에 밀티츠는 알프스를 넘으면서 "독일 내에 반교황청 분위기가 심각하게 퍼지고 루터가 광범위하게 지지받고 있어서 체포는 불가능하다"고 로마에 보고했다. [41] 원래 요한 에크와 루터는 친분이 있어서 막역한 사이로 자주 서신을 교환한 사이였다고 한다. [42] 사실 이는 요한 에크의 유도 심문으로 에크가 이전 루터 주장과 후스의 주장이 비슷하단 걸 간파하고 다시 토론에서 유도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토론 이후 에크는 토론 승리를 직감했고 루터는 후스가 누군지 잘 몰랐기 때문에 속으론 아연실색했으나 토론 내용이 알려지면서 독일 민중들이 더 열광해버리는 기적(?)이 생겨난다.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난 것 [43] 콘스탄츠 공의회가 열릴 시점에서는 아직 황제로 대관식을 치르기 전이었다. [44] 트리어 대주교는 마인츠 대주교처럼 대교구뿐만 아니라 세속적으로 제후령을 통치하는 신성 로마 제국 선제후 이다. 당시 트리어 대주교 리하르트 폰 그라이펜클라우 추 폴라츠(Richard von Greiffenklau zu Vollrads 1467~1531)는 종교 개혁에 참가하진 않았지만, 루터의 신학적인 지식에 대해 개인적인 호감이 있었다고 한다. [45] 루터를 지지하는 청중들은 이 대답을 듣고 동요했다. 이런 대답을 한 것은 작센 선제후의 부탁 때문이었다.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루터가 소환된 자리는 토론의 자리가 아니라, 지정된 질문에 대해 진술만 허용된 자리였다. 때문에 루터가 대답하면 가톨릭교회와 황제에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을 주기 때문에, 선제후는 작센 대표들을 보내 막후 협상을 진행하려고 일정을 질질 끌려고 했다. 그래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다음날 더 드라마틱한 답변이 나왔다. [46] 훗날 토머스 칼라일은 농부 출신 신학박사 마르틴 루터가 황제와 추기경의 앞에 서서 떨린 목소리로 답변하는 장면을 유럽 역사상 최대의 사건이라 평가했다. [47] 이 청중들 가운데는 당시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총독으로 있던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1세의 맏아들 크리스티안 왕자가 있었고, 루터의 연설에 감화된 그는 덴마크 노르웨이 국왕 크리스티안 3세로 즉위한 후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 종교개혁을 시행한다. [48] 카를 5세는 어린 시절을 플랑드르에서 보냈기 때문에 프랑스어 네덜란드어가 모어였다. [49] 2년 전 카를 5세는 황제 선거 투표 전 여러 공약으로 제국추방령 남발 자제와 적법한 기소절차가 아니면 행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고, 대관식 이후에도 재차 서약했지만, 보름스 회의에선 400여 명의 제국회의 구성원 대부분의 지지를 얻지도 않고 제국추방령을 내렸다. 이는 개신교 신자들뿐만 아니라 독일 제후들의 반발로 이어졌다. 이와 비슷하게 훗날 자신에 반대하는 제후들에게도 제국 추방령을 남발하여 결국 독일 가톨릭 제후들에게도 외면당하며 몰락을 자초한다. [50] 도중에 루터를 추종하던 기사들이 자신들이 지지하고 보호하겠다고 제의하지만, 루터는 이들이 자신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의도를 꿰뚫어보고 거절한다. 이들은 다음 해 기사들의 난을 일으켰고 토벌당했다. [51] 이 시기 나온 건 신약 성서이고, 1516년 발간된 에라스뮈스판 헬라어 성서를 참조했다. [52] 멜란히톤은 원래 언어학자라 신학교수 칼슈타트에게 토론에서 완전히 박살났다. 칼슈타트는 37세였는데 자신은 결혼하라는 계시를 받았다(?)며 15세 소녀를 아내로 맞았다. 신학적으로 루터에게 비판받자 다른 곳에서도 크게 지지를 못 받았고 결국 떠돌다가, 그나마 가장 온건했기 때문에 루터에게 용서를 빌고 비텐베르크에 다시 정착했다. 칼슈타트의 딸은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가 대녀로 삼았다고 한다. [53] 레오 10세가 사망하고 개혁성향의 교황 하드리아노 6세가 즉위한데다가, 카를 5세는 프랑스와 전쟁을 준비하러 이탈리아를 거쳐 스페인에 가있었기에 루터에 신경 쓸 겨를이 없기도 했다. [54] 사실 3가지 정부(왕국)이 있다고 설명하는데 과격혁명론자들은 세속왕국과 사탄의 역사로 보고 적대시 한 반면, 루터는 세속정부는 사탄의 왕국이 아닌 별개의 세계로 본 것. [55] 다만 루터도 신학적인 측면에서 가톨릭 교도권과 대립했던 것이지 무슨 민중혁명을 바라고 잇던 건 아니었을 것이고, 루터를 보호하던 제후들도 귀족이었기 때문에 농민반란을 지지하거나 동조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56] 종교 개혁 초기에는 헤센 방백국과 작센 선제후국,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국을 제외하면 유력 제후들은 아직 종교 개혁을 전면적으로 실시하지 못했다. 1531년 당시 루터 쪽은 5개 제후와 14개 제국도시였는데 이 정도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스페인 국왕 나폴리 시칠리아 국왕이었던 카를 5세에 저항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고, 후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2세 헥토어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처럼 개인적으로 루터교회로 개종한 제후들도 있긴 하지만 루터가 죽기 전 통치령 자체에 종교개혁을 시행한 유력 제후국은 작센 선제후국, 헤센 방백국,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국,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 넷 뿐이었다.(군소제후들도 많은 편도 아니었다.) [57] 비텐베르크는 선제후의 궁정이 있고 군대가 있었는데 무법천지 폭도 떼가 점령하는 건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선제후국의 통치자는 선제후이긴 하고 관료제는 자리 잡진 않았지만 실제적으론 법률가, 학자 등의 참사회가 통치했었다. 농민 반란을 이끈 토마스 뮌처도 초기 시절엔 대놓고 막나가진 않았다. 츠비카우에서 설교 내용으로 물의를 빚자 가볍게 추방당하는 정도로 끝났다. 그 후 과격화 된 것. [58] 예를 들어 병자성사에 돈을 내지 않으면 교회에서 관리하는 묘지 자리를 팔지 않았다. 가난한 이들은 뒷산이나 밭에다 부모를 묻어야했다. 이런 폐해 때문에 종교개혁 시기 묘지 관리권을 세속적인 일로 보고 교회에서 시 자치위원회로 이전했다. [59]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는데, 과격혁명론자들과 재세례파는 동의어가 아니다. 물론 이들이 모두 유아세례를 부정하긴 했지만, 재세례파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졌으며 농민전쟁을 이끈 토마스 뮌처, 한스 뎅크, 뮌스터에 신정국가를 건설한 '라이덴의 얀' 등의 과격노선이 있는 반면, 오스트리아 대공국에서 비폭력 무저항의 후터파, 츠빙글리와 결별한 스위스 형제단 등은 이들과 연결점도 없고 같은 노선도 아니다. [60] "디모데전서(3:2)에 감독(장로)는 한 아내를 두며" 구절의 해석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장로나 감독이 아니면 구약시대 족장처럼 일부다처제로 해도 된다.'라고 보고 우두머리들은 10명이 넘는 아내를 두었고, 거절하는 여성은 살해했다. [61] 다만 이 둘이 주로 서신을 통해 논쟁을 벌였고, 그때의 서신이 현재도 남아 있어 에라스뮈스와 루터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62] 그리스어 katholos의 '일반적', '포괄적'이라는 의미서 유래 [63] 베른하르트 로제, 《마르틴 루터의 신학》 참조 [64] 지금도 루터교 측에서는 이 표현을 선호한다. [65] 주로 가톨릭이나 칼뱅파 등 다른 개신교 교파에서 쓰는 표현 [66] 그러니까 "밀가루 덩어리와 발효된 과일즙은 결코 혈액과 근육조직이 될 수 없다."는 것. 흔한 인식과 달리 개혁주의 개신교는 현대 기준으로도 꽤나 이성적이고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편이다. [67] 독일어로는 Das ist mein Leib [68] 루터뿐만 아니라 츠빙글리도 이 부분의 해석에 완고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최근 연구로는 이전부터 개념 해석상 신학적 문제로 둘 사이는 필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69] 미사 중에 사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할 때 하는 말. [70] 스위스는 1499년 슈바벤 전쟁으로 사실상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에서 독립했는데, 스위스 일부 주(가톨릭)에서 그동안 원수급으로 치를 떨던 합스부르크 가문에 SOS를 쳐서 카를 5세가 지원군을 보낸 게 컸다. [71] 츠빙글리가 1531년 <신앙 해설>을 통해 루터가 '내 몸이다'를 근거로 빵이 그리스도의 육체라고 한 것을 비꼬아서, "그럼 기독교인은 식인종이냐??"라고 했고, 스위스의 츠빙글리 지지자들도 "빵도 십자가에 못 박혀야 되냐?"라고 비꼬았다. [72] 현대에도 스위스 개신교단(SEK)은 한국처럼 개혁교회와 감리교 위주로 되어있는데, 루터파를 거부했던 전통이 그대로 남았기 때문이다. [73] 미사 사제만 성체와 성혈을 모두 영하고, 평신도들은 성체만 영한다. 다만 특별한 경우 평신도들도 성혈까지 영할 때도 있다(이것을 '양형영성체'라고 한다). [74] 규율의 문제라는 가예티노의 답은 가톨릭 입장에서 교과서적인 답변이다. 흔히 오해가 많지만 사제 독신은 가톨릭교회의 교의가 아니라, 가톨릭교회 내부의 '라틴 교회'가 행하는 예법이다. 또한 중세 가톨릭 평신도들이 양형 영성체를 하지 않았던 것은 '빵의 형상에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현존하신다'는 신학을 드러내기 위한 '관습'이었다. [75] 8월 26일 작센 선제후에게 보낸 편지 [76] 1563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야 평신도의 성혈 배령을 다룸 [77] 다만 카를 5세가 워낙에 바쁜 몸이라 다시 10년간 독일에 나타나지 않았고, 1532년 합의로 새로운 공의회가 열리기 전 까지는 루터파의 제국추방령을 유보했다. [78] 박흥식, 『미완의 개혁가, 마르틴 루터』 [79] 개신교 가톨릭 사이의 가장 큰 교리차이였던 이신칭의 문제는, 현대 들어 1999년 루터교회와 가톨릭이 의인(義認)에 대하여 상당한 접근을 이루었고 상징적인 발표도 했으나, 여전히 루터교회와 가톨릭 내부에서 모두가 승복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점은 계속 대화가 지속되고는 있다는 것. [80]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은 1539년에 선제후 요아힘 2세 헥토어가 개인적으로 루터교회로 개종하기는 했으나 카를 5세의 눈치를 보느라 공식적으로 가톨릭교회와 절연하지는 않았고 영지내에서도 가톨릭 전통은 유지했다. 브란덴부르크에서 종교개혁이 마무리된 것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루터파가 공인된 이후 요아힘 2세의 아들 요한 게오르크가 통치한 1560년대의 일이다. 다만 후술할 호엔촐레른 가문의 방계 사람들은 이 시기 개신교로 많이 돌아섰다. [81] 다만 욕설만 써있는 게 아니라 루터의 중요한 신학적 주장도 실려 연구가치가 있다고 한다. [82] 군소제후들과 제국도시들도 있었지만 군사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세력은 적었다.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가 초반에 도움을 주긴 했으나 카를 5세에게 발리고 바로 이탈했다. [83] 이것은 황제 선거시 독일 내 분쟁시 타국 병력을 동원하지 않기로 한 자신의 공약을 위반한 것이었다. [84] 필리프도 중간에 중혼 문제로 신교도 동맹을 탈퇴하고 황제에게 굴복해서 그닥 미더운 상대는 아니었다. 이혼보다 중혼이 낫다며 중혼에 찬성해서 루터의 흑역사가 된다. [85] 베틴 가문의 종가는 에른스트 계열로 작센 선제후 집안이고 방계 알브레히트 계열은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등을 분할 받았다. [86] 이 일로 신교도들은 모리츠를 '마이센의 유다'라고 불렀다. [87] 황제는 직접 항복을 받기 위해 제국 추방령을 유보하고 사형을 면제하는 아량(?)을 베풀었다. [88]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의 재정지원으로 나머지 신교도 제후들이 전력을 복구했다. 앙리 2세는 대가로 제국 내 프랑스어권 지역인 아라스와, 메츠, , 베르됭 교구를 영향권에 포섭했다.(제국의 지배권 하에서라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89] 비교적이라는 뜻은 다른 지역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지, 자신의 영지인 오스트리아 대공국, 보헤미아 왕국에서는 신교도들을 탄압했다. 신교도 제후들에게만 관대했다. 신교도로 개종한 뷔르템베르크 공작 울리히를 쫓아냈다가 헤센 방백 필리프와 싸워서 다시 빼앗기는 등, 신교도 제후랑 타협만 한 것도 아니다. [90] 스페인 궁정에서 골수 가톨릭 교육을 받았고 사촌인 카를 5세의 딸과 결혼했다. 다만 스페인으로 건너가기 전, 어린 시절에는 루터의 영향을 받은 가정교사들의 교육을 받았다. [91] 물론 강제력이 따랐다. [92] 그림 동화로 유명한 그림 형제중 형이며 독어독문학의 창시자다. 언어학자로서 근대 언어학을 개척하였다. 언어학에서 과학적인 방법을 실시하여 음운 변이에 관한 '그림의 법칙'을 수립하여 이 방면에서 획기적인 공적을 올렸다. 또 '독일 문법'에 의해 게르만 어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93] 영어로 치면 직역 위주의 KJV, ESV, RSV, NRSV보다는 의역과 직역을 절충한 NIV처럼 번역하려고 했던 것으로 비유될 수 있다. [94] “우리는 선지서를 독일어로 옮기느라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고 그는 기록했다. “오, 주여. 이 저자(선지자/편주)들이 독일어로 말하게 하는 게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요. 이들은 그럴 마음이 없는데 말입니다. 이들은 히브리어를 포기하고 야만적인 우리 독일어를 따라할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이것은 마치 누군가 지빠귀로 하여금 아름다운 선율을 거두고 경멸해 마지않는 뻐꾸기의 재미없는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욥기 전편에 흐르는 격한 감정을 표현한 말들을 번역하느라 애를 먹고 있습니다. 심지어 욥은 친구들에게서 위로를 받는 것보다도 우리가 욥기를 번역하려드는 게 더 고통스러운 것 같아 보입니다. 우리의 번역을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재 위에 드러눕겠다고 할 것 같습니다." [95] 현대독일어에선 Träne이다. [96] 영어의 tear와 동일 어원. 원래 남독일에서 쓰이는 고지독일어에서 유래됐지만 루터가 성경을 번역할 당시에는, 이미 북독일의 중세 저지독일어에 흡수돼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때 당시의 철자는 zâhē였다. [97] 튀링겐 지역 농민들의 상속법은 특이하게도 말자상속제였다고 한다. [98] 현재 화폐가치로 십수 억 원 이상에 달한다. [99] 이 책은 심리분석학계에선 나름 중요한 저서지만, 해당 주제가 본업인 역사학자들 사이에는 굉장히 평이 안 좋은 편이다. 영국의 종교개혁 사학자 앤드류 페티그리의 2015년 루터 평전, Brand Luther의 말을 빌리자면 "루터 본인의 심리보다 20세기 60-70년대 심리학자들의 편견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책" [100] 가톨릭에서 새 사제의 첫 미사는 큰 경사이며 잔치이다. 새 사제는 출신 본당뿐 아니라 인연이 있는 본당이나 기관, 수도원 등을 다니며 첫 미사를 집전하며 많은 축하를 받고, 참석한 신자들에게 안수를 해 준다. [101] 중세 유럽에서는 가난한 하급 귀족과 평민들이 먹을 입을 덜려고 자녀를 수도원에 보내는 게 흔했다. [102] 현대 화폐가치로 억 단위의 상당한 거금이다. [103] 루터는 금전관념이 부족하면서 워낙 씀씀이가 컸고 인심이 후해, 캐테와의 결혼 전까지 늘 경제적으로 쪼들렸고 빚이 많았다. [104] 모세의 형이지만 동생은 이스라엘의 지도자였고 형 아론은 밑에서 대제사장을 한다. 누나 미리엄도 예언자로 모세보다 연상이었으나 아론과 함께 대들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일이 있다. [105] 오늘날에도 목사의 수입은 월급이 아니라 목회 활동에 대한 사례금이라고 표현한다. [106] 대부분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조교들 [107] 루터의 지지자들 중 사제 출신들은 대부분 루터보다 빨리 결혼했다. 문제는 당시 농민전쟁 중이었는데 농민전쟁을 이끌던 토마스 뮌처가 2년 전 16세의 전직 수녀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고, 이 때문에 가톨릭 측에서는 루터가 뮌처를 따라서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고 비난했기 때문이다. [108] 르네상스 때만 그랬다는 주장과 알렉산데르 6세 시절만 유독 심했다는 쉴드글들이 간간히 있는데 르네상스 시대가 중세보다 덜한 것은 아니다. 10세기 창부정치 시기 교황 요한 12세 충혜왕이나 해릉왕급이다. 인문주의의 영향으로 식자층이 늘어나면서 교회의 권위가 추락하여 비판이 심해진 것이다. [109] 다만 성직자의 성적 방종이나 축재는, 당시 교회에서도 떳떳한 것은 아니지만 결정적인 결격 사유는 아니었다. 대놓고 첩을 두고 사생아를 낳는 경우도 있었지만, 점잖게(?) 가정부를 집에 고용하는 정도(물론 정체는 모두가 알지만 묵인)도 있었고, 사생아의 경우 공식적으론 '조카'라고 부르는 경우가 일반적이었고, 이 경우 모친의 가문의 성씨와 성직자의 개인적 재산은 물려받을 수 있었다. 한편 개신교 측 츠빙글리조차 과부와 동거하다 아이를 낳기 직전에야 비밀결혼을 인정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당시의 성직자의 성생활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110] 사유는 고아거나, 가난한 집에서 입을 덜거나, 귀족이나 부유한 집안에서는 시집보낼 지참금을 아끼기 위해서 등. [111] [자유주의 노선의 신문과 잡지는 가톨릭 신자들을 (자유로운 양심을 가진 남성 납세자의 가치관에 기반을 둔 사회적 자유주의 세계와 반대되는) 비굴한 꼭두각시 집단으로 묘사했다. 이뿐만 아니라 정형화된 반교권적 이미지로 가득한 동물우화집이 나올 정도였다! 자유주의 잡지에 실린 풍자화 중에는 교활하고 마른 예수회원과 호색하고 살찐 사제들 그림이 많았다.(성직자의 새까만 옷은 만화가들이 기교를 부리기 쉬운 대상이었다). 이런 그림은 교구사제가 고해성사를 맡는 걸 비난하거나 수녀들의 성적 예의범절을 의문시함으로써 가부장적 핵가족을 신성시하는 자유주의의 믿음을 표현했다. 새로운 가톨릭 질서의 여러 분야에서 여성이 맡은 중요한 지위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과 사제의 독신(혹은 비독신) 생활에 대한 그들의 호색적인 관심을 통해서, 자유주의자들은 반가톨릭 운동의 형성에 결정적이라고 할 '남성성'에 대한 (늘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뿌리 깊은 집착을 드러냈다.] 크리스토퍼 클라크, 《강철왕국 프로이센》, 박병화 옮김 (서울: 도서출판 마티, 2020), 764-765쪽 [112] 1516년 에라스뮈스 헬라어 신약성서의 견해도 수용했는데, 혼인이 성사라고 번역된 불가타 판이 오역으로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루터도 이런 선배 학자의 연구를 기쁘게(?) 사용했다. [113] 가톨릭에서는 '이혼'을 인정하지 않고, 몇 가지 경우에 '혼인무효'는 가능하다. 자세한 것은 혼인성사 참조. [114] 가능하면 남편의 형제나 사촌 [115] 교회의 바빌론 유수(Luther,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LW 36:103) (1520) [116] 19세기까지도 유럽의 학교들에서는 학생들한테 라틴어 문법을 가르쳤는데, 이게 매우 어려워서 학생들은 라틴어 배우기를 질색했다. 이 시기를 묘사한 소설들을 보면 하나같이 학생들이 라틴어 배우기를 얼마나 싫어했는지가 잘 묘사된다. [117] 사실 루터와 칼뱅 등 종교개혁가들도 문맹과 무지가 부패한 가톨릭 교리에 백성들이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원인이라는 것을 이미 간파한 상태였다. [118] 남프랑스 지역에서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살자며 사유재산 폐지와 스스로 재산헌납과 빈민구제 목적으로 공동생활을 한 개혁 운동. 이단으로 탄압받아 종교재판으로 수십만 많게는 100만 명이 척살된 후 산악지방에서 숨어 살다가, 종교개혁 시기 이후 개신교에서 원조 개신교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119] 그래서 루터를 그린 역사화 중 루터가 류트를 치고 있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는 것들을 볼 수 있다. [120] 다만 이 부분은 원래 독일인들이 유럽에서 대식가로 유명한 민족이었다는 사실도 감안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15세기 독일로 파견된 로마 교황청의 특사는 교황청에 보내는 보고서에서 독일인들을 가리켜 "그들은 돼지처럼 게걸스럽게 먹고 마신다."라고 조롱했고, 17세기 30년 전쟁이 벌어지던 무렵에도 독일인들은 그들 스스로 "우리는 1년 동안 번 모든 돈을 하루 동안 먹고 마시는데 다 쓴다."라고 자조적으로 말할 만큼, 많이 먹었다(…) [121] 이름을 바꾼 이유와는 별개로 이름의 의미는 엘레우테리우스(Eleutherius)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엘레우테리우스는 디오니소스의 별명으로 그리스어로 '해방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가톨릭교회의 속박에서 중세인들을 해방시킨 종교개혁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매우 적절한 이름인 셈이다. [122] 마틴이라는 이름 자체는 원래 성인 마르티누스에서 온 것으로 세례명이다. [123] 가톨릭 세계관으로 서술한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에서도,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현인들은 지옥에서 가장 널널한 곳에서 편히 지낸다. 말이 지옥이지 아무런 고문 같은 건 없고, 단지 하느님을 만나지 못해서 슬퍼(?)할 뿐 이라고. [124] 당시 독일의 대학들은 14~5세기에 세워진 대학들이어서 비텐베르크 대학교는 루터의 종교개혁 당시 기준으로는 신흥 대학이 맞긴 했다. [125] 15세기 초, 프리드리히 3세와 게오르크의 증조부인 베틴 가문의 초대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 후스 전쟁 당시 프라하 대학교에서 쫓겨난 독일인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대학교다. [126] 프리드리히 3세는 서자만 남기고 적자를 남기지 못 했다. [127] 역사학자 폴 존슨은 저서 <기독교의 역사>에서 가톨릭 지역에서 가장 탄압이 심했으며 신교도 지역은 덜했고, 칼뱅파 지역보다 루터파 지역이 종교적으로 가장 관대했다고 본다. [128] 실제로 야생동물 고기에서는 누린내가 많이 난다. [129] 심리학 등을 들으면 프로이트 다음으로 가장 처음 만나는 학자다. [130] 사실 이 시대의 맥주소비량은 현대 독일인들의 소비량보다 3배 정도 많았다. [131] 요로결석 환자들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진통제가 없으면 죽여 달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그런데 이 병은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단지 고통이 끔찍하게 심할 뿐. 다만 의학시술이 발달되지 않던 루터 당대에는 죽음까지 불러올 수있는 심각한 질병이기는 했다. [132] 그나마 알려진 게 나중에 독일 대통령이 되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133] 또는 독일어만 간신히 알아들을 학식의 수준의 이들 [134] 원 가사는 4절짜리인데, 우리말 가사는 원곡의 3, 4절을 합쳐서 3절을 만든 것이다. [135] 단 에라스뮈스가 펠라기우스 입장은 아니다. 펠라기우스, 반(半) 펠라기우스 주의는 가톨릭교회에서 예전에 이미 이단처리였고, 가톨릭교회의 입장은 온건한 아우구스티누스주의이나 중세 후기 더 온건해졌고, 루터의 입장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보다 더 강경한 아우구스티누스 주의이다. [136] 마르틴 루터가 한 말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근거가 확실치 않다. 2차대전 이후 루터의 지지자들 사이에서 루터가 했음직한 발언으로 추정한다. 어째서인지 한국에서는 바뤼흐 스피노자가 한 명언으로 알려져 있다. [137] 단순 동료라기엔 부족하고 루터의 가장 큰 조력자이며 동료 교수이며 신학적으론 제자나 다름없다. 멜란히톤은 원래 언어학자였다고. 루터와는 전혀 반대로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적을 좀처럼 만들지 않고, 언행이 부드러운 성격으로 유명했기에 성향이 정 반대인 이 둘의 파트너십은 지금까지도 역사학자, 종교학자들에게 흥미진진한 주제이다. [138]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 로마 교황을 믿는다 하여 [139] 토마스 뮌처와 재세례파는 신학적으로 루터보다 가톨릭에서 더 멀다! 그만큼 로마 드립이 루터에겐 욕이라는 것. [140] 다만 루터가 오스만 제국의 튀르크인 자체를 증오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기 동포인 독일인들이 음식을 마구 먹는 것에 비해 튀르크인들은 음식을 절제한다며 좋게 보았다. 또한 루터는 독일인으로는 최초로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출판하였고, 오스만 제국이 쳐들어오면 맞서 싸워야 하지만 이미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동유럽의 기독교 신자들을 상대로는 오스만 제국에 맞서 저항하지 말고 지배에 복종하라고 권유하였다. 출처: 마르틴 루터/ 린들 로퍼 지음/ 박규태 번역/ 복있는사람 [141] 원래 루터의 적대자였다가 루터 사후 20년 뒤 개신교로 개종한다. [142] <늙은 수퇘지의 방귀소리>는 다름 아닌 루터 박사의 저작이다! [143] 다만 이런 인식은 루터만이 아니라, 그 당시 대부분의 유럽인들이 독일인들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이었다. [144] 정확하겐 아퀴나스와 스콜라 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막 갖다 붙여서 오용한다는 비판. [145] 에라스뮈스 개인은 가톨릭교회의 타락상에 대해 평신도의 도덕적 회복과 자성이 중요하며 성서를 언젠가 자국어로 번역되어 읽힐 것을 바라긴 했다. [146] 춘추전국시대 경전드립이랑 한나라 때 고문이랑 당송팔대가 드립치는 조선 유학자들을 연상하면 될 듯. [147] 가톨릭교회에서는 유력자들 자제들에게 장학금 형태로 교육을 시켰고, 사제가 될지 여부는 강제가 아니었다. [148] 훗날 결혼으로 틀어진 그분 맞다. 루터가 7성사 중 5성사 폐지를 주장하자 이를 반박하는 글을 써서 교황에게 '신앙의 수호자'란 칭호를 받았다. [149] 선거는 교황 레오 10세가 밀고자 했던 작센 선제후는 불출마했고 헨리 8세는 출마 직전 포기,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의 대결이었으나 카를 5세가 만장일치로 당선되었다. 초반에는 교황의 압력으로 성직 선제후 3인이 프랑수아 1세로 기울고 팔츠 선제후 루트비히 5세마저 프랑수아 1세를 지지했으나, 선거자금에서 프랑수아 1세가 30만 두카트를 뿌린 반면 카를 5세는 야코프 푸거에게 50만 두카트를 대출받아서 85만 두카트를 뿌린 덕분이다. 대신 푸거 가문에게 티롤의 동광 은광 채굴권을 하사했다.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 [150] 최초의 인간 아담을 빚고 남은 흙, 빌라도가 손을 씻은 대야 따위를 진품이라며 고가에 팔았다고 한다. [151] 숙부 알브레히트를 매우 싫어했고, 오히려 종교개혁에 동참했던 안스바흐 분가 친척들의 영향을 받았다. [152]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자금이 모자라다는 설명이 많은데, 레오 10세의 사치가 더 큰 이유였다. 레오 10세의 7년 재위간 500만 두카트를 지출했고 죽기 전 80만 두카트의 채무를 남겼다. 이 정도의 금액은 세속왕국 하나를 여러 번 파산시킬 금액이었다. [153] 로이흐린은 히브리어 전문가였다. [154] 이는 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155] 트리엔트는 제국에서 독일 권역의 최남단이었다. 독일에서 하면 황제의 입김이 너무 강하다는 교회의 주장 때문에 합스부르크가 영지 코앞의 트리엔트에서 열린다. 교황청에선 중간에 트리엔트에 돌림병이 돈다는 핑계로 볼로냐로 옮기려다 카를 황제의 협박에 다시 트리엔트로 돌아갈 정도… [156] 황제가 독단으로 섞은 교리(사제 결혼 가능, 평신도의 양형영성체 허용을 선포하자 개신교 측은 가톨릭 교리와 다름없다고 여겼고 가톨릭교회에서도 경악할 내용이었고 나중에 서로 무산된 걸 다행으로 여길 지경. [157] 아라곤의 캐서린 [158] 종교개혁을 시도하다 주교들의 반발로 폐위되었는데 정작 후임 덴마크 왕도 쌩까고 종교개혁을 추진해서 루터파 국가가 되었다. 노르웨이도 덴마크 지배하여서 역시 루터파 국가로 변경. [159] 하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는 있었다고 한다. [160] 루터는 제국추방령이 유효한 상태라 어차피 참여는 불가능했다. [161] 선제후 직위는 1547년에 박탈당했지만 1554년까지 살았다. [162] 대신 아내로 맞은 게 헨리 8세의 4번째 왕비 클레베의 앤의 언니인 지빌레다. [163] 헤센의 필리프는 패전 소식을 듣고 자진 출두하여 감방동지(?)가 되었다. [164] 작센 선제후국은 선제후로서 금인 칙서에 따른 장자 단일상속의 특혜가 있었지만 다른 영토는 게르만족 전통대로 분할상속이고, 루터가 자식들을 차별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지키려고 분할상속했다. [165] 기존의 작센 선제후가 베틴 가문 종가인 에른스트 계열이고 선제후직을 탈취한 모리츠는 방계인 알브레히트 계열이다. [166] 선제후 직위를 뺏기고도 방계가문인 알브레히트 가문이 작센과 폴란드 왕위를 얻었기에 베틴 가문의 일원인데다가 최초의 신교도 제후이기에 신교도 제후인 브란덴부르크의 호엔촐레른 가문, 하노버의 벨프 가문, 팔츠 비텔스바흐 가문, 네덜란드 오라녀나사우 가문등과 잦은 혼인관계를 이어나갔다. 대표적으로 독일 제국 빌헬름 1세의 황후도 베틴 가문 에른스트 계열의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출신 아우구스타였다. [167] 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인 앨버트 공의 고손녀인데, 앨버트 공은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의 9대손이다. 그리고 빅토리아 여왕이 속한 하노버 왕조 또한 베틴 가문과 혼인이 잦았다. [168] 프로이센 공국 알브레히트의 조카. [169] 1위는 패전 독일의 경제부흥을 주도한 콘라트 아데나워 서독 수상, 3위는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 4위는 반 나치즘 청소년학생운동인 하얀 장미 운동을 주도한 한스, 죠피 숄 남매, 5위는 동방 정책을 펼친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 6위는 고전음악의 아버지 바흐, 7위는 파우스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작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 8위는 유럽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9위는 독일제국 초대수상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 10위는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다. [170] 하지만 현재는 이러한 영웅주의 사관은 사장되는 추세이다. 설령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키지 않았어도 츠빙글리나 칼뱅이 제2의 루터로 활약했을 가능성이 높다. [171] 개신교에서는 오컴주의 영향을 받은 것은 인정한다. 루터 본인도 오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루터의 신학은 오컴주의와 완전히 같지 않다. 루터의 오컴의 유명론의 방법론에 영향을 받았으나, 아우구스티누스주의 영향으로, 초기 받아들인 오컴주의까지 비판했기 때문이다. [172] 다만 한스 큉은 국교회 제도와 갈리아주의를 '어용 신학'이라고 말할 정도로(큉, 『교회란 무엇인가?』) 국교회스러운 형태를 매우 싫어하였다. 교황무류성을 반대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렇다고 큉이 개신교로 전향한 것은 아니다. 특히 관주도적 종교개혁에 의한 개신교 국교회 시스템(독일권 및 북유럽의 루터교, 영국 성공회, 제네바 개혁교회 등)은 큉의 교회론에선 '어용 신학'이었다. [173] Justification. 흔히 가톨릭에서는 '의화'로, 개신교에서는 '칭의'로 번역한다. 엄밀히 말하면 의인 역시도 개신교에서 선호하는 번역어이지만, 가톨릭에서도 간혹 쓰는 번역어(예: Joachim Gnilka 《신약성경신학》 한국어판)이므로, 그나마 중립에 가깝다고 보고 이를 택했다. [174] 원제: 《Kleine Kirchengeschichte》(2000년판) [175] 통념과는 달리 중세 가톨릭은 신학자들의 자율성이 후대의 가톨릭보다 높았다. 오히려 19세기 가톨릭 신학자인 聖 존 헨리 뉴먼은, 근대의 가톨릭 신학이 중세 가톨릭 신학의 자율성을 잃은 것을 한탄하였다. 중세에도 당연히 신학자에 대한 이단 논쟁이 있었지만 근대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이단자를 처벌할 행정력이 부족했으며, 더군다나 스콜라식 논리학은 '이단자'와 '이단 명제'를 구분했기에 이단 논쟁에 연루된 신학자라도 "내 발언을 A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건 오해이다. 당신이 A라는 의미로 이해하겠다면,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한에서는 내 발언을 철회하겠다."라는 논리로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21세기에 "네가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는 한에서는 내 발언을 취소하겠다"라고 하면 그건 싸우자는 소리지만, 스콜라학에서는 이게 통했다. 이 경우 A는 '이단 명제'로서 배척되지만 논쟁에 연루된 신학자는 '이단자'가 아니게 된다. [176] 안타깝게도 단순화와 프레임화는 오늘날에도 양측에서 계속되고 있다.(예: "너희는 행위 구원론"/"너희는 실천 없는 죽은 믿음") 그러나 가령 의인(義認)론만 하더라도, 양측의 차이는 생각보다 매우 미묘하다. 의인론은 기본적으로 사도 바울로가 주장한 것이고, 은총으로 의인된다는 것도 매우 아우구스티누스적인 관점이다. 과연 루터가 아우구스티누스를 온전히 잘 이해했냐고 말하면 가톨릭으로서도 할 말이 아주 많지만, 아무튼 간에 가톨릭 신자가 "오직 은총", "오직 믿음"을 외치고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공로가 없다"고 말하더라도 그건 분명히 가톨릭 신앙에 부합한다. 또한 가톨릭은 하느님 앞에서의 엄밀한 의미의 인간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다. 자세한 것은 가톨릭 문서 참고. 특히 가톨릭과 루터교의 의화 공동 선언은 꼭 참고할 것. [177] 참고 Joseph Lortz, Die Reformation in Deutschland, 2 Bde. Freiburg 61982; Joseph Lortz, Martin Luther, Grundzüge seiner geistigen Struktur, in: Reformata Reformanda, Festschrift f. H. Jedin, hrsg. von E. Iserloh u. K. Repgen, I, Münster 1965, 214~246 [178] 발췌자 주석: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성서에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살 것이다." 하지 않았습니까?](공동번역) [179] (책 속 주석) H.Denifle, Die abendländischen Schriftausleger bis Luther über Justitia Dei (R 1,17) und Justificatio, Mainz 1905. [180] 때문에 루터 성경에서는 필레몬-히브리-야고보-베드로-요한-유다로 이어지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통상적인 신약 순서와는 달리, 필레몬-베드로-요한-히브리-야고보-유다라는 독자적인 순서를 따른다. [181] 참고로 위에서 인용된 콘라트와 카러는 개신교 신학자이다. [182] 참고로 포이어바흐는 무신론자였다. [183] 북한에서 홍경래를 띄우듯, 동독에서 토머스 뮌처를 소련 볼셰비키 혁명보다 앞선 혁명의 선구자 취급하며 그 곁가지로 루터도 구시대 인물 중 나름 긍정적 평가한 것으로, 동독 공산당에서는 해방전쟁 당시 샤른호르스트나 그나이제나우를처럼 봉건시대에 종사한 인물도 띄워준 사례가 아예 없지 않다. [184] 실제로 ' 아돌프 히틀러의 사상적 아버지'라는 비판도 받았다. [185] 유대인들은 토지 소유 금지 등의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고리대금업이나 금융업 등에 종사했는데 이는 유대인을 사채업자 또는 사회적 기생충이라고 보는 인식을 낳아 반유대주의를 강화했다.( 베니스의 상인 샤일록이 그 예.) [186] 로드니 스타크, 손현선 번역, <우리는 종교개혁을 오해했다> 63~64p, 헤르몬, 2018 / 저자 로드니 스타크는 악질 반기독교주의자나 전투적 무신론자가 아니라 미국 베일러 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이자 동 대학 종교사회학 연구소 소장이며, 퓰리처상을 수상한 저서도 여럿 저술한 석학이자 개신교인이다. [187] 이스마 엘보겐, <독일 유대인의 역사> [188] 유대인들은 동유럽에선 현대까지, 서유럽에선 근대 이전 토지소유가 금지되었고, 기독교인이 아니기에 공무원 임용 길도 사실상 막혔다. 1918년까지 프로이센에서는 유대인의 장교 임용까지 금지했다. 유대인들에게 허가된 유일한 직업은 폐품 수집이었다. 또한 길드 가입도 금지되었다. 한편 이 때문에 길드와 무관한 사치품 수공업으로 개척하여 근대 이후 경제가 성장하자 많은 돈을 벌기도 했고, 공직이 허가되지 않았기에 교육받고 성공한 유대인들은 자유직업인 의사 변호사 선택비율이 높았다. [189] 로드니 스타크, 손현선 번역, <우리는 종교개혁을 오해했다> 64~65p, 헤르몬, 2018 [190] 로드니 스타크, 손현선 번역, <우리는 종교개혁을 오해했다> 65~66p, 헤르몬, 2018 [191] 현재는 '독일 농민 전쟁'이라는 용어 자체에 대한 비판이 있다. 독일에서만 그친 것도 아니고, 농민만 참여한 것이 아니라 광산의 광부 도시 하층민들의 참여가 더 많았으며, 몰락 기사와 일자리를 잃은 용병들까지 참여했다. 실제 무력충돌이 일어난 것은 후반 3달 정도다. 사실 크고 작은 규모의 농민의 난은 1523~1525년에 처음 일어난 것은 아니다. 14세기부터 다발적으로 전 유럽에서 일어났으나 종교개혁시 중남부 독일 지역 뮌처가 이끈 사건이 제일 알려져 있다. [192] 루터가 교황권을 공격한 이상으로 교황에 적대적이라, 뮌처는 초기에 독일 제후들에게 자신에게 병력을 지원해서 로마를 공격하고 교황을 없애자고 제의했다. 당연히 제후들은 무시했고, 미친놈 취급했다. 그 후 제후와 지배계급을 로마추종자들로 몰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193] 모든 독일 농민전쟁과 토벌이 토머스 뮌처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살인과 강도질을 일삼는 농민무리에 반대하여'라는 제목의 짧은 글은 원래 루터가 평화에 대한 권면이라는 책에 일부에 쓰인 글이었는데, 출판업자가 이것만 먼저 출판한 탓도 있다. 평화에 대한 권면 내용은 영주들을 비판하는 내용이 더 많았다. 영주들에게 “당신들을 반대하는 것은 농민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명심해라. 악명 높은 동물의 십일조와 농노들에게 상속세, 사망세, 수렵이나 고기잡이 같은 데서 세금을 걷는 것은 폐지하라.”고 주장했다. [194] 15개 교리 항목 중에 14개가 일치하였고, 나머지 15번 항목에서도 6개중에 5개가 일치하였는데, 죽어라고 타협을 거절한 것은 성찬 예식 하나였다. [195] 나치들이 침투해서 고위직을 차지하니 초기 반공 성향으로 나치에 호의적이었던 목사들도 정치질에 질려서 때려치고 나온다. [196] 대표적으로 라며 성령을 직통으로 받았다는 주장과, 무신론자를 척살하며 교황청을 토벌한다는 구호. [197] Steve Ozment(스티브 오즈멩), 'Protestants: The Birth Of a Revolution' ,NY: Doubleday, 1993. 국내명 '프로테스탄티즘 혁명의 태동' [198] 성공회는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중시하는 신학관을 가지고 있다. [199] 《탁상담화》, p.353 [200] 《탁상담화》, 〈On Justification〉, 원문은 "so it is with human reason, which strives not against faith, when enlightened, but rather furthers and advances it." 이상 모두 wikiquote 참조하여 작성함. [201] 또 하나로는 테르툴리아누스의 "불합리하기에 나는 믿는다" [202] 도킨스를 비롯한 신무신론자들이 애용(?)하나 정작 중세신학과 철학사에 대한 대가들에 대한 인용은 없고 대부분 18~19세기 찌라시 수준의 출처의 재인용이다. [203] 신학 부분에선 오컴을 비판하며 아우구스티누스 주의로 돌아갔기 때문에 신학 면에서는 많은 차이가 난다. [204] 교회에서 인정한 선행을 하면 보속 없이 천국 직행이라는 주장으로 면죄부 팔이에 이론적 기반이 됨. [205]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포도원 일꾼의 비유이다. 새벽부터 일한 일꾼이 있었으나 일자리를 찾지 못한 일꾼들을 위해 해질녘에 새로이 참가하지 못한 인부들을 고용했고 일찍 참가한 일꾼이나 동일한 삯을 받는다. 이에 열심히 일한 일꾼들이 불평한다. [206] 다만 박흥식 교수가 나름대로 중립성을 의식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서 3장 28절의 루터 번역에서 보듯 편파적인 부분이 있다. '가톨릭과 루터교의 의인(義認) 논쟁과 연관된 구절'에 루터가 '원문에 없던 것'을 임의로 추가한 것인데, 박흥식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루터의 번역은 앞선 시기의 번역들과 비교할 때 독창적이고 개선된 요소들이 많다. 우선 그는 번역문이 독일어의 고유한 문체와 언어적 특징을 잘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원문에 충실한 문자적인 번역을 고집하기보다는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원문에 적절한 단어를 추가하여 의미를 강조하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잘 알려진 사례는 로마서 3장 28절 번역에 '오직'이라는 단어를 삽입하여 '오직 믿음으로'라는 문구를 만든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207] 《유럽의 마녀사냥》 브라이언 P. 르박(Brian P. Levack)著, 한편 칼뱅의 경우는 루터보다 마녀 언급이 더 적었다. [208] : ≪마르틴 루터≫ -파울 슈레켄바흐(Paul Schreckenbach), 프란츠 노이베르트(Franz Neubert) 공저- 참조 바람. 1540년 첫 마녀사냥이라 분명히 나옴. [209] 여담으로 프로이센 왕국의 본체는 프로이센 공국이 아니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었다. 브란덴부르크 대신 프로이센이라는 이름을 쓴 이유는 신성 로마 제국에서 왕을 칭할 수 있는 것은 독일왕 보헤미아 국왕 딱 둘뿐이었기 때문이다. [210] 『독일에 중앙집권적 통제력이 공백이었다는 사실은 독일에서 교황들이 교회 직위를 임명하는 힘, 그리고 제후-주교들을 통해 서민층에게서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힘(언제나 울분의 비옥한 원천이었다)이 더 강했음을 뜻한다.』 (Peter Marshall. 2017. 《종교개혁》 [ebook]. 이재만 옮김. 파주: 교유서가) [211] 『Traditional religion had about it no particular marks of exhaustion or decay, and indeed in a whole host of ways, from the multiplication of vernacular religious books to adaptations within the national and regional cult of the saints, was showing itself well able to meet new needs and new conditions.(전통적 믿음은 쇠퇴했다거나 부패했다는 흔적은 없으며, 정녕 모든 경로에서, 토착어 신심 서적들의 증가에서부터 국가적, 지역적 성인 공경에 이르기까지, 전통적 믿음은 새로운 수요들과 상태들을 충족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Eamon Duffy. 2005. 《The Stripping of the Altars: Traditional Religion in England c.1400–c.1580》 [ebook]. 2판. New Haven & London : Yale University Press); 『Eamon Duffy shows that late medieval Catholicism was neither decadent nor decayed, but was a strong and vigorous tradition, and that the Reformation represented a violent rupture from a popular and theologically respectable religious system.』 (같은 책 Yale University Press 책 소개) [212] 『하급 성직자 영역에서는 중세 말엽의 전형적 현상인 "성직자 프롤레타리아"가 나타났다. 도시들 가운데는 사제 수도자가 전체 주민의 10분의 1에 이르는 곳도 있었다. 그중 대부분은 물질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 · 영적으로도 극히 수준이 낮았다. 중세 때의 일반적인 시골 신부 또는 도시의 평범한 " 교구 소속 신부"는 처지가 가련했고 교육도 거의 받지 못했다. 사제가 된 사람은 대개 한 사목자에게 "견습하러 가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배웠다. 대학에서의 신학 교육은 대개 수도회 소속 사제들만 받았는데, 그것도 항상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다. 게다가 도시의 매우 많은 사제들이 신자들의 영혼을 보살피는 사목 사제가 아니라 " 미사 집전 사제"였던바, 이들의 물질적 기반은 미사 예물과 그것에 관련된 부과금이었다. 독신제의 준수는 이 성직자 프롤레타리아의 대부분에게 문제 밖의 일이었음이 확실하다. 독신제가 실제로 어느 정도나 준수되었는지는 확실히 말하기가 어렵다. 나라마다 사정이 매우 달랐다. 15세기 독일(쾰른 또는 콘스탄츠)의 시찰 보고서들에 의하면 교구 사제의 3분의 1이 내연관계를 맺고 있었다. 정확한 통계는 나와 있지 않지만 그 정도만 해도 비교적 양호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 문제에서 그리고 민중들의 종교생활에서는 더더욱, 중세 말과 종교개혁 직전의 상황이 이른바 건전한 중세 전성기 때보다 나빴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 사실은 그 반대였다. 1500년 전후의 시기는 특히 독일에서 그 이전 어느 시대보다 "경건"했고 신앙이 뜨거웠다. 그러나 바로 그런 시기에 이상과 현실 사이, 종교적 이상과 당시의 사회 현실을 반영한 교회구조들 사이의 괴리는 더욱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그러므로 당시 개혁에의 외침은 전반적인 쇠락의 증거가 아니라 종교적 활력의 증거였다.』(Klaus Schatz. 2005. 《보편공의회사》. 이종한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12-213.) [213] 『반성직자주의—성직자가 누린 정치권력에 대한 반감—와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거부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모든 증거는 16세기 초에 독일이 경건한 정통 가톨릭 사회였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독일은 민족적·반교권적 분개로 가득했고, 그 분개는 루터의 목소리로 표출되었다.』 (Peter Marshall. 2017. 《종교개혁》 [ebook]. 이재만 옮김. 파주: 교유서가) [214] 빌헬름 2세는 거함거포주의에 빠져있는 상태고, 베토벤은 "승리의 클!갤" 하며 악보를 쓰고 있다. [215] 배경과 인물들은 독일 사람인데 왜 프랑스어로 대화를 하냐고는 묻지는 말자. 심지어 주연인 매즈 미켈슨의 국적은 덴마크이다. [216] 실제 역사 속 한스 콜하제 [217] 실제 역사 속에는 거열형을 당한다. 당시 참수나 교수형은 나름 특혜였다고 말한다. [218] 종교개혁 500주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