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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2 21:22:46

북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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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창설3. 핵심 전력4. 극동 무적함대5. 실상6. 말로7. 청일전쟁 당시 북양함대 전투력8. 군가
8.1. 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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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양수사의 제독기(提督旗)
파일:1280px-Flag_of_Fleet_Commander_of_the_Beiyang_Fleet.png 파일:1280px-Flag_of_the_Admiral_of_the_Beiyang_Fleet.png
1871 ~ 1890 1890 ~ 1912
北洋艦隊
북양함대

청나라 말기 서구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창설되었던 4대 서양식 함대인 북양, 남양, 복건, 광동 함대 중 최대, 최강의 전력을 자랑했던 함대로 기함은 정원급 전함 1번함 정원함.

한때 동양 최강의 함대로도 불리며 위세를 떨쳤지만 1894년 사실상 첫 실전이었던 청일전쟁 당시 일본 제국 연합함대에 패하면서 허무하게 궤멸당하고 만다.

2. 창설

1871년부터 청나라는 연안 방위를 위해 새로 편성된 4개 수사를 운용하고 있었다. 이들 이른바 4대 수사 중 가장 강력한 함대는 상하이에 본진을 두고 있던 남양수사였지만 어차피 4개 다 서양식 수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에 일본의 류큐 병합을 기점으로 청조는 대규모의 해군, 특히 원양작전이 가능한 함대 육성의 필요성을 체감하였다. 그에 따라 1874년 이홍장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해군 육성이 시작되었고 해군은 초기에는 남양, 북양 균형적 발전을 시도할 계획이었으나 청불전쟁으로 남양해군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 1885년부터는 북양해군을 집중적으로 육성시켰다. 그 덕분에 1888년에는 서양식 '해군'이라고 통일되어 서술될 정도의 규모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3. 핵심 전력

4. 극동 무적함대

북양함대가 다른 3개 함대를 능가하는 최강의 함대로 불렸던 이유는, 다른 3개 함대와는 달리 군함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비를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공업국이자 해군국이었던 영국과 그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던 독일로부터 직도입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1885년 11월 북양함대가 연이어 직도입한 작센급 방호순양함의 개량판인 정원(定遠)과 진원(鎭遠)은 7천톤급의 배수량과 30센티미터가 넘는 두께의 측면 장갑, 그리고 무장으로 12인치 구경 2연장 포탑 2기, 6인치 구경 포탑 2기를 장비한 거함으로, 영국 다음가는 대해군을 건설하고 있던 기술 선진국 독일에서 건조된 전함답게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사실상 이 배들에 맞설 전함이 존재하지 않았다.

비록 1891년부터 정부의 재정지원이 중단되어서[1] 정체 상태에 이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점에서 청조의 해군력은 총 척수 78척, 총 톤수 83,900톤에 이르러 최소한 동양에서는 근대적 군비를 갖추고 있던 일본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특히 정원과 진원의 존재감은 대단해서, 일본은 심지어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황해에서 북양함대와 맞붙을 때까지도 동급의 전함이 없었다. 황해 해전 당시 일본 연합함대의 기함이었던 마츠시마는 배수량 4,277t밖에 안되는 순양함이었다. 카탈로그 상의 스펙으로는 청일전쟁 시점에서 북양함대가 일본해군보다 월등한 우위였던 것이다. 총 배수량으로도 우위였고 개별함선 배수량으로도 북양함대가 일본해군보다 우위였다. 때문에 청일전쟁 발발시 청나라의 패배를 예상한 국제여론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은 당시 보유한 함포들로는 정원과 진원에게 이빨도 안 들어간다는 것을 깨닫고 구경 32cm의 대형 함포를 4천톤급 순양함에 달아버리는 무리수를 감행했는데 이들이 마츠시마를 비롯한 3척의 삼경함 시리즈였다. 게다가 달아놓은 방식도 순양함의 선두나 선미에 32cm 구경의 함포를 아무런 방어 장갑 없이 딱 1문만 달았는데 당연히 밸런스가 개판이었으며 장전 속도나 선회 속도가 바닥을 기었다. 여기에 더해서 위력도 신통치 않았는지 32cm 포탄이 정원에 단 한 발 명중하긴 했는데 큰 데미지를 주지 못한 걸로 판명됐다. 즉 완벽한 뻘짓. 그나마 3경함은 일본의 독자 아이디어가 아니라 북양함대의 거함에 대응하려는 일본의 오더를 받은 프랑스가 독자적인 아이디어를 넣어서 만든 함선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일종의 세트 플레이를 노렸다고도 할 수 있는데, 당대 일본 해군도 이런 컨셉에 불안을 느껴 4번함은 취소해버리고, 이후 프랑스가 아닌 영국이나 미국에 신형함을 주문하게 된다.

5. 실상

하지만 이러한 위세 이면에는 여러 문제점이 숨어 있었고, 그 문제점이 끝내 북양 함대의 파멸을 이끌어내고 만다.

요컨대 겉보기로는 비서구권에서 비교할 대상조차 없는 최강의 하드웨어를 갖춘 함대였지만, 실상은 운영 소프트웨어의 부재로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었다.

6. 말로

황해 해전에서 패배한 후 일본군에게 나포되거나 격침된 함을 제외한 나머지는 위해위에 있는 본거지인 유공도로 피신하였으며, 곧 일본군이 산동 반도에 상륙해서 위해위 주변을 몽땅 장악한 후 포위전을 벌였다. 결국 이 과정에서 대다수의 함선이 탈출도 못해보고 교전 중에 좌초나 침몰하거나 항구에 정박한 채 나포당해서 북양함대는 사실상 소멸한다.

정원과 진원도 유공도까지 피신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정원은 유공도 주변에서 섬을 포위하려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일본 어뢰정의 야습으로 대미지를 입고 좌초되어 노획을 피하기 위해 자침해버렸고 진원은 노획당하고 마는 최후를 맞이한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간 후, 북양함대에서 아직 쓸만한 함선은 모조리 일본이 압수해서 배상함이라는 명목으로 일본 연합함대에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의 다른 함대가 명목상 지원해 준 몇 척의 함선도 북양함대 소속에서 싸우다가 역시 나포되었는데, 이 함선을 돌려달라고 해당 함대의 제독들이 일본군에게 탄원한 사실이 밝혀져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그리고 북양해군에서 빼앗은 함선은 일본군이 오랫동안 써먹지는 못했다. 불과 10여년 후인 러일전쟁 무렵에는 무적 전함이라던 진원은 이미 2등 전함으로 분류되어 2선급 전력이 되어 있었는데 불과 10년 사이에 일본은 일등 전함으로 배수량이 두배인 15,000톤급을 보유하고 있었다. 미칠듯한 속도로 발전하던 당시의 군사 기술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일화다. 이것도 모자라서 진원은 1908년에는 훈련용 함선이 되고 1911년에는 아예 제적 당한 후 연습용 표적으로 전용되어 파괴당했다. 1912년에는 매각되어 고철로 스크랩처리됐다. 무적의 전함으로 공포의 대상이었던 함선이 준공 후 불과 13년만이자 노획 후로는 불과 3년만인 1898년에 2선급이 되고 진수 30년째에는 아예 고철로 분해되는 기막힌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7. 청일전쟁 당시 북양함대 전투력

8. 군가

당시 북양함대(북양수사)의 군가로 북양수사군가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당시에 부른 기록의 녹음본은 남아 있지 않고, 가사와 악보만이 발견되어 중화인민공화국 인민해방군이 부른 버전만이 남아있다.


송룡기와 매우 유사한 것이 특징이다.

8.1. 가사

寶祚延庥萬國歡
景星拱極五雲端
海波澄碧春輝麗
旌節花間集鳳鸞
보조의 평안을 비니 만국이 기뻐하고
경성 북극성을 돌아다니니 다섯 구름이 가지런하다.
바닷물결 맑고 푸르니 봄의 반짝임이 곱고
중국통조화 사이에 봉황 난새가 모인다.
바오주어 양시우 왕궈 환
징싱 궁지 우 윤 돤
하이보 청비 청헐 리
징지에 화젠 지 펑루안.


[1] 서태후가 국가재정을 개인적으로 유용했다는 주류적 해석에 대해, 이는 전쟁의 패배를 서태후 개인에게 전가하려는 왜곡이며 1890년부터 만주지역의 철도부설 및 육군 증강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소수 견해도 있으나 실상은 서태후에게 중대한 책임이 있음이 팩트다. 이화원같은 대규모 토목공사에 청 왕조 1년 예산의 30%인 은화 3천만냥을 꼬라박은 행동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전운이 감돌고 서구 열강이 마구 침공해오는 상황이라 군비를 증강해야 할 시기에 대규모 토목 공사까지 일으켜 돈을 낭비하는 상황은 과거 수양제 한무제가 저질렀던 실수와 똑같다. 둘 다 강적에 맞서기 위해 군비를 마구 쓰고 있던 상황에서 대운하 같은 대규모 공사를 벌여 국가 재정에 큰 타격을 입혔으며, 양광은 아예 이로 인해 근위대의 반란과 함께 붙잡혀 처형되기까지 했다. [2] 비슷한 시기 일본이 막부 말부터 네덜란드 교관단으로부터 1년 반 동안 공부한 인원들을 교관으로 삼아 다음 기수를 가르치는 식으로 오랫동안 해군 장교를 체계적으로 양성해나가기 시작한 것과 크게 대비된다. [3] 대구경 함포의 후폭풍은 작용 반작용의 법칙 때문에 크면 클 수록 후폭풍 역시 강력하기에, 보통은 안전지대 대피를 확인한 다음 쏘는데, 도대체 사령관이란 작자가 함교 같은 지휘하기 좋고 안전한 내부공간에 얌전히 있지 않고 어디서 뭘 하다가 포의 반동으로 부상을 당한 걸까? [4] 죽어가던 수병이 옆의 부장에게 '정원은 아직 가라앉지 않았습니까' 라는 말을 남겼고 부장은 전투 불능이 됐다며 안심시켰다. 이에 그 수병은 옅은 미소와 함께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가 군가의 줄거리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마츠시마를 대파시킨 건 진원인데 왠지 정원이 일본인들의 어그로를 끌며 유명세를 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