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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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는 트리폴리타니아 지역, C는 키레나이카 지역, F는 페잔 지역, 붉은색은 튀니지 방면 세력(오스만, 영국 제외), 녹색은 이집트 방면 세력(이탈리아 제외) |
제1차 리비아 내전
First Libyan Civil W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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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
기간 | |||||
2011년 2월 17일 ~ 10월 23일 | |||||
장소 | |||||
리비아 전역 | |||||
결과 | |||||
반카다피- NATO 연합군의 승리, 국민합의정부 집권 | |||||
교전 국가 및 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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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https://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Flags_of_the_2011_Libyan_civil_warالحرب الأهلية الليبية (2011)
First Libyan Civil War
2010-2011 아랍권 민주화 운동 중 발생한 리비아의 민주화 시위에서 촉발된 리비아의 내전.
내전의 원인은 카다피 가문과 부족들 중심의 1인독재, 불평등한 부와 자본에 대한 분배 및 경제적 이득 독점 때문에 나타났다.
무아마르 알 카다피의 정부군과 서방세계의 지원을 받는 시민군 및 반군 간의 전쟁에서 결국 시민군이 카다피를 사살하며 승리했다.
2. 전쟁 이전
자세한 내용은 2011 리비아 민주화 운동 문서 참고하십시오.전쟁 이전인 2011년 2월 15일 벵가지 등 동부 키레나이카에서 시위가 본격적으로 불 붙기 시작했다. 카다피가 먼저 무장해서 강경적으로 시위대에게 대응한 점 및 시민들을 학살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리비아 정부군 역시 시위가 시작된 2월 15일부터 2월 17일 이전까지는 다른 아랍 독재 국가들처럼 무장하지 않고 실탄, 최루탄, 고무탄 정도로만 진압했다. 이조차 일부 시민들이 시위가 시작되면서 화염병이나 돌을 던졌다 #, #.[4]
3. 전쟁의 시작
3.1. 2월
피로 물들어가는 옛 리비아 국기 포스터. 내전을 의미한다. |
2월 20일 쯤에 본격적으로 반군과 무장한 정부군들이 언급되었다 #. 동시에 19일, 정부군이 장례식을 치룬 시위대와 조문객들에게 총을 쏘아서 15명이 사망했다 #.
2월 20일은 차량 자폭 공격으로 벵가지 병영을 없애면서 벵가지가 시위대의 손에 들어갔다. 기사 민주화 시위가 시작되고 3월 초순에 이르러 시위대의 기세는 절정에 달해 수도 트리폴리, 카다피의 고향 시르테 등을 제외한 거의 전 영역이 시위대의 손에 떨어졌다. 당시까지만 해도 카다피 역시 호스니 무바라크나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처럼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3.2. 3월
3월 초순 시위대의 기세가 절정에 달했을 무렵의 세력도. 이후 일시적으로 진압되어 기세가 줄어들었지만, 최종적으로는 국제 사회의 지원을 받아 전국을 제압하였다. Iyad El-Baghdadi가 제작하였다. |
하지만 3월 18일 UN 안전보장이사회가 뉴욕 시간 17일에 15개국 중 중국, 러시아, 독일, 인도, 브라질 등 5개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의 찬성으로 리비아에 비행 금지 구역이 선포했고 그에 따라 프랑스군의 라팔이 정부군에 대한 폭격을 시작했다. 카다피는 이에 시민을 보호한다며 정전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손바닥 뒤집듯 벵가지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였고 결국 서방세계는 오디세이 새벽 작전을 선포하며 프랑스의 첫 폭격을 시작으로 카다피군에 대한 공습을 개시하였다. 반전의 계기를 마련한 시민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시위는 내전으로 발전하였다.
이 때 28살 리비아 기자였던 모하메드 나부스는 인터넷을 우회하여 시위와 내전의 심각성을 위성 사진들로 세계에 보여줬으나 정부군에 총을 맞아 목숨을 잃었다. #
4. 전황
4.1. 3월 공세
전열을 가다듬은 시민군은 3월말이 되자 벵가지의 입구라 할 수 있는 아즈다비야를 향해 공세를 개시하였다. 21일 밤부터 계속된 미군의 공습으로 아즈다비야의 정부군이 타격을 받자 24일 시민군은 박격포 등의 지원을 받으며 아즈다비야 시내로 공격을 개시했다. 도시의 절반을 장악한 시민군의 공세는 정부군의 기갑 전력이 반격에 나서면서 주춤하였고 밤이 되어 나토군이 다시 공습을 개시하자 RPG와 로켓을 동원해 공격을 재개하여 결국 26일에 이르러 아즈다비야를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한때 대부분을 빼앗겼던 제3의 도시 미스라타에서도 식량, 물, 전기 부족에 시달리는 판국에서도 싸움은 계속되었다.3월 28일, 시르테를 사이에 두고 정부군과 시민군 사이에 대규모 교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29일부터 시작된 정부군의 반격으로 인해 시민군은 빈 자와드와 라스 라누프에서 밀려나며 주춤하기 시작했다. 무장과 훈련이 부족한 시민군에게 한계가 보였고 시민군은 어떻게든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이집트에서 RPG-7 등 중화기를 구입하고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무기 공장을 건설하였으며 항공기용 로켓 포드나 장갑차 포탑 등을 이용해 각종 테크니컬을 만들어내 전선에 투입했다.
4.2. 전선의 교착
3월 말부터 시작된 브레가에 대한 공세 와중에 나토군이 시민군에 오폭을 가해 27명의 사망자가 나오는 사건이 벌어졌다. 나토군이 시민군이 전차를 운용하는 줄 모르고 그대로 때려부순 것. 강력한 정부군의 화력과 나토군의 오폭으로 인해 기세를 잃은 시민군은 4월 7일, 브레가에서 철수하였다. 이후에도 브레가에 대한 공격이 계속되었으나 시민군은 더이상 눈에 띄는 성과를 내지 못했고 오히려 정부군의 반격으로 아즈다비야가 함락될 위기에 빠졌다. 시가지까지 밀고 들어온 정부군에 대항해 나토군과 시민군의 반격이 계속되었고 결국 14일 하루종일 계속된 전투 끝에 정부군이 아즈다비야 서쪽으로 밀려나며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트리폴리와 가까운 미스라타는 또다시 정부군의 공격을 당했으나 시민군이 방어에 성공하면서 4월 23일 정부군이 철수하였다. 그러나 정부군은 튀니지와의 국경까지 확보하며 리비아 서부 대부분을 손에 넣었다.
전선이 브레가와 아즈다비야 사이를 경계로 한 교착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자 더이상의 눈에 띄는 진전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미스라타는 5월 내내 주구장창 공격이 계속되었다. 결국 5월 15일 카다피군은 미스라타 공격을 포기했다.
유럽 국가들의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인해 더 이상의 깊은 개입이 힘들어지면서 실질적인 군사적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상태가 되자 미국을 중심으로 서방세계는 전쟁의 주도권을 시민군에 넘기기 위해 군사고문단 등 간접적인 도움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4월 초부터 미국, 이집트 등이 시민군을 훈련시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4월 19일 영국은 시민군에 군사고문단 파견과 통신 장비, 보병 전투 장비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4월 20일 미국은 연료와 의료 장비, 트럭 등 2,500만 달러 규모의 물자 지원을 결정하고 이탈리아와 프랑스도 군사고문단 파견을 결정하였다. 카타르도 대전차 미사일과 트럭 등을 지원하였다. 동시에 서방 각국은 5월 들어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NTC)를 리비아의 합법적인 대표로 인정하며 정치적으로 힘을 실어주었다.
4.3. 나푸사 산맥 전투
6월 4일부터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공격헬기를 동원한 공습을 시작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리비아 서부 나푸사 산맥[7] 지역에 은거한 시민군이 정부군에 대해 공격을 개시하였다. 나푸사 산맥의 시민군은 3~5월에 걸친 정부군의 공격으로 인해 많은 힘을 잃었으나 6월 들어 반격을 개시하였고 프랑스와 영국은 나푸사 산맥에 소화기와 전투복, 통신 장비 등을 공수해 이들을 지원하였다.[8]6월 7일에 이르러 시민군은 주요 거점인 야프란을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다. 정부군은 8일 반격을 위해 또다시 미스라타를 공격하였다. 이 공격은 한달 내내 계속되었다.
나푸사 산맥의 시민군은 26일 트리폴리와 80Km 떨어진 비르 알 가남을 향해 공세를 개시하였다. 그러나 정부군의 로켓 포격으로 인해 시민군의 공세는 7월 1일 좌절되었고 시민군은 방향을 바꿔 7월 6일 알 콰왈리쉬를 향해 공격을 가하였다. 나토군의 공습을 신호로 시민군은 공격을 개시해 몇 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알 콰왈리쉬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정부군이 무차별 로켓 포격을 가하며 반격에 나서면서 시민군은 더이상의 공세에 나서지 못하였다. 이어 7월 한 달 동안 알 콰왈리쉬를 두고 정부군과 시민군의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알 콰왈리쉬의 시민군은 13일 탄약이 떨어져 일시 후퇴하였지만 곧장 동부에서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그 날 저녁부터 알 콰왈리쉬 서쪽을 장악한 정부군과 5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정부군을 몰아냈다.
24일 다시 정부군이 알 콰왈리쉬를 향해 공격을 가하였으나 시민군의 반격으로 무산되었다.
4.4. 트리폴리 진격
7월 16일 동부지역의 시민군은 브레가를 향해 공격을 개시해 4일만에 브레가를 장악하였다. 이로서 시민군은 리비아 동부지역의 유전 전체를 연결하는 공급망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 그러나 정부군은 브레가에서 물러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브레가 탈환을 위해 한 달 넘게 공격을 가하며 저항하였다.한편 나푸사 산맥의 시민군은 8월 6일 다시 한 번 비르 알 가남을 점령하기 위해 야프란을 시작으로 공세에 나섰다. 엄청난 포병 화력을 동원해 정부군을 몰아붙인 시민군은 드디어 8월 15일 비르 알 가남을 점령하였다. 시민군은 기세를 몰아서 지중해안까지 진출하기 위해 진격에 나섰다. 브레가 일대에서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있는 동부 시민군과 달리 나푸사 산맥 시민군은 나토군의 공습 지원을 받으며 순조로이 진격하였고 8월 16일부터 트리폴리 일대의 주요 거점을 장악하여 트리폴리로 통하는 보급선을 차단하는 작전에 나서 18일 트리폴리 서쪽으로 40Km 떨어진 위성도시 알 자위야를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시민군의 공세로 트리폴리까지 위기에 처하자 정부군은 13일 스커드 미사일을 동원해 시르테 인근의 시민군에 공습을 가하며 반전을 꾀하였으나 사상자는 나오지 않았다. 끝까지 시민군을 인정하지 않던 중국까지 18일 시민군에 물자를 지원하며 이미 대세가 뒤집혔음을 반증했다.
8월 20일 '인어의 새벽 작전'[9]으로 명명된 시민군의 트리폴리 공격이 개시되었다. 나토군의 공습을 신호로 시민군은 트리폴리 전방향에서 공세를 개시하였다.
카다피측은 잠시 소수의 부대가 들어왔지만 격퇴했다고 주장했지만 22일 카다피의 삼남이 시민군에 붙잡히고 장남이 시민군에 투항하고 카다피의 최정예 부대인 카마스 여단이 주둔한 기지까지 장악당했다. 트리폴리시의 두 개 공항은 시민군이 점령했지만 카다피는 거미줄 같은 지하 땅굴을 통해 트리폴리를 탈출했다.
한편 카다피의 차남이 체포당했다는 초기의 소식은 오보였고 장남은 억류된 곳을 습격한 정부군의 도움으로 탈출했다.
2011년 8월 23일 시민군은 공식적으로 승리를 선언[10]했지만 카다피파는 시르테를 거점으로 강력한 저항 의지를 내비쳤다. 내전의 향방은 시르테로 옮겨갔다.
4.5. 시르테 공방전
시르테가 마지막 결전지로 떠오르면서 완전히 승기를 잡은 시민군은 카다피군에게 항복을 권고하면서 협상 시한을 제시했다. 이와중에 카다피의 아내 사피아 파르카시와 딸 아이샤, 두 아들 무하마드와 한니발은 알제리로 도피했다. 반군 측에선 당연히 반발했고 카다피 가족에게 피신처 제공한 건 "적대행위"라며 알제리 측에 송환을 요구하겠다고 했다.[11]시르테는 카다피 지지세가 강한 지역이라 무혈입성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카다피는 리비아 시간으로 2011년 9월 4일 반군이 무장을 해제하고 자신의 점령지인 바니 왈리드에 오라는 조건을 내걸며 항복을 거부했다. 결국 시민군과 나토 연합군은 카다피의 마지막 거점 시르테를 향해 총공세에 나섰다.
2011년 9월 16일(현지 시각) 유엔 총회에서는 표결을 통해 시민군 대표인 과도국가위원회(National Transitional Council)가 리비아의 유엔 회원국 지위를 넘겨받는 것을 승인했고[12][13] 2011년 3월부터 까지 98개의 UN 회원국이(과반수) NTC를 리비아의 합법 정부로 공식 인정했다.[14]
시르테는 치열한 교전 끝에 시민군에게 함락되었고 2011년 10월 20일 도망치던 카다피는 나토군 무인기의 공습을 받고 하수도에 피신했다가 시민군에게 붙잡혀 끌려나와 이동 중 머리와 복부에 총상을 입고 숨졌다. 그리고 같은 날 국가과도위원회는 카다피의 넷째 아들 무타심도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시민군은 2011년 10월 23일(현지 시각. 한국 시각으로 10월 23일 오후 11시~24일 자정 무렵) 공식적으로 리비아가 해방되었음을 선언해 내전 종식을 발표했다.
5. 내전 이후
한편 카다피 축출 이후 꾸려진 새 정부는 살라프파 테러리스트 단체 무슬림 형제단 계열 인사들이 주축에 보편 인권과 여성 인권을 극도로 탄압하는 샤리아 법을 헌법화해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 # #서방 세계로부터 지원받은 무기류, 특히 대공 미사일 류가 마구잡이로 불출되어 이후 테러 행위에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를 낳고 있다. 미국이 예전에도 소련을 견제한답시고 무기를 뿌렸다가 그 덕을 본 알 카에다가 후에 총부리를 미국으로 돌린 적도 있는 것처럼 이러한 문제가 단순한 우려로 그치지 않고 현실화될 가능성은 높다.[15] 일단 반군들은 공식적으로 리비아 국군이 창설되기 전에는 무기를 넘기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리비아의 이후 행보에 대해선 많은 우려가 있다. 리비아는 부족주의가 강하고 시민군도 통일된 세력이라고 부르기는 힘들다. 자잘한 세력을 제외하면 크게 시민군은 벵가지파와 나푸사 산맥에서 싸우던 서부파 둘로 나뉜다. 이미 내전 기간 중 벵가지에서 시민군 총사령관이 반대파에게 암살당하면서 불안한 정황을 드러냈고 카다피 사후에 반군끼리 중화기를 대거 동원하여 교전을 했다가 일시 휴전을 맺기도 했다. 기사
결국 이후 무슬림 형제단 계열 국민합의정부의 이슬람 극단주의 독재 시도에 완전히 파탄난 리비아는 통합된 정부를 꾸리지 못하고, 다시 무장세력들간의 내전이 터져서 지옥의 땅이 되고 말았다. 제2차 리비아 내전 항목 참조.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점은 과정이 복잡하고 길었지만 2020년대 기준으로 치안 개선만은 약간 이뤄졌다는 점이다.[16] 독재 체제가 와해되었다는 유럽연합의 자기만족과는 다르게 그 대가로 무슬림 형제단이라는 또다른 이슬람 원리주의 극우 테러단체의 독재에 리비아의 절반에선 샤리아법의 압제 아래에서 여성들과 아동들은 신음하고 있다. 그리고 카다피 정권 붕괴 후에 세워진 신정권이 이슬람 테러단체 살라프파 무슬림 형제단 주도에 서구 세계의 입맛에 맞게 세워진 정권이라는 지적도 있었지만 적어도 괴뢰정권은 아니었다. #
6. 서방의 개입과 반군
리비아는 목적부터 민주화보다는 체포된 인권운동가 석방과 인권 개선 및 민생고나 부족 갈등 문제 해결이었으며,[17] 카다피 정권 멸망 외에는 계획을 세우지 못했고 다른 나라들과 달리 외세의 지원을 받은 내전으로 변했기에 이들에 비해 더 이질적이긴 했다.[18]리비아 민중들도 어디까지나 카다피 퇴출만을 원했을 뿐 그렇다고 모든 반군들의 행동을 동의한 건 아니었고, 더욱 외세의 개입은 처음부터 찬성한 것도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반군을 도운 반카다피, 반체제 투사들도 카다피의 독재와 학살을 반대했기 때문에 반군을 도운 거지, 설령 어쩔 수 없이 외세의 도움을 원했다고 해도 외세의 폭격을 지지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리비아 시민들은 카다피 체제 하에 호의호식했던 옛 반군들에 대해서 배신자, 변절자 취급을 하기도 했었다.[19]
이라크 전쟁만큼은 아니지만 이 내전도 자유화를 핑계로 군사개입하는 프랑스와 영국,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를 비판하는데 쓰인다. 차이점이라면 이번엔 독자적인 군사력으로 사태를 수습할 역량조차 없으면서 군사개입부터 지른 서부 유럽이 훨씬 무책임했다. 일단 카다피로부터 시민들을 지키려고 리비아에 비행금지, 제재를 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문제는 폭격이었다. 특히 프랑스는 말만 거창하게 리비아의 자유화를 외치며 리비아를 가장 선제적으로 공습했는데 프랑스군 혼자서 리비아군 따위도 제압이 불가능하자 NATO 군까지 끌어들여 카다피 정권을 기어이 결딴내 리비아를 무정부상태로 만들었다.[20]
니콜라 사르코지[21]와 프랑수아 올랑드의 프랑스는 시리아 내전에서도 전혀 달라지지 않은 무책임하고 오만한 태도를 시종일관 유지하다가 결국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부상이라는 참극에 일조하고 수백만명이 강제로 난민이 되어 조국을 등지게 만들었다. 또한 프랑스가 시작한 아랍권 군사개입은 북아프리카와 레반트 전체가 대혼란에 빠져들어 수백만 명이 난민으로 내몰린 유럽 난민 사태 및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와 알 누스라 전선의 부상,이로 인해 나타나선 안 될 파리 테러라는 유럽 전체의 위기도 초래하게 된다.
리비아가 나중에 다른 나라들에 비해 더 강경적으로 진압한 것도 맞지만 무장 반군이 나오기 전까지는 정부군도 다른 나라들처럼 박격포나 미사일로 무장하진 않았기에 민중들의 무장저항으로 변해야 할 정도에 대한 명분이라 보기 힘들다는 지적도 있었다. 물론 동시에 비무장 시위대까지 공격한 점과 정전협정을 깨고 리비아 동부를 다시 점령하려 했던 점 등 카다피의 잘못과 책임도 엄연히 존재하지만[22] 카다피를 잡겠다고 리비아를 폭격한 NATO 역시 잘한 점이 없다는 비판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 #. 다만 링크들을 어느 정도 일부분 걸러서 볼 유의점도 있는게, 리비아 사태가 단순한 폭동으로 폄하받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튀니지나 이집트, 예멘 등 스스로 혁명이 성공된 다른 나라들의 민주화 운동과 동급으로 둘 수 없고,[23] 특히 나중에는 외세에 의존했던 점도 논쟁의 대상이었다.[24] 설령 전쟁을 일으킨 게 어쩔 수 없었다고 치더라도 외세의 군사적 개입과 폭격만큼은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리비아 내전이 처음부터 서구가 계획했다는 건 반서방적 괴담이지만 반군들의 행보도 한계, 확대해석과 미화된 게 적지 않다. 일부 반군들도 처음부터 서방의 폭격을 반대했지만 어디까지나 많아도 일부였다는 걸 감안할 필요가 있다. 물론 살라프파 이슬람 극단주의 무슬림 형제단에게 끝내 주도권을 넘겨준 반군들도 잘한 점은 없지만 카다피가 권력욕을 지키겠다며 민간인들에게조차 성폭행 및 학살을 일으킨 것도 정당화 될 수 없다. #[25]
7. 여담
체포 당시 살아있던 카다피가 순식간에 누군가의 총격을 받고 숨지자 그 정황에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시민군 측은 호송 과정에서 교전이 벌어져 카다피가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흥분한 시민군 병사의 우발적 총격, 카다피 경호원의 사살, 심지어 카다피와 그렇고 그런 거래를 해오던 서방 국가들이 카다피가 입을 열 것을 우려해 미리 제거했다는 설까지 나오고 있다.그동안 글라놀러지라 불리며 해괴한 웃음거리로 취급 받던 테크니컬 등 게릴라들의 무기 제작 방식이 시민군들을 취재한 서방 기자들을 통해 널리 선보인 전쟁이었다. 오히려 기존의 이미지가 과장으로 보이지 않는 정도다. 링크 이 내전에 주도적으로 역할을 했던 영국과 프랑스는 윈윈을 했다. 일단 본인들이 차기 정권을 세우는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석유수입이나 리비아 경제에 대해 좀더 이득을 취할 수도 있고 게다가 군축으로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중국 러시아에게 무시당했으나, 오히려 미국보다 먼저 주도적으로 공습에 나가면서 카다피군을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박살내는 모습을 보이며 본인들이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2011년 당시 리비아 시민들의 저항이 광주 민주화 운동과 비슷하다고 보는 시각도 일부 있으나 #1, #2, 오히려 1980년 5월 광주는 목적이 국가전복이 아닌데다가 내전을 일으켰다고 볼 수 없는 반면(심지어 한국의 경우, 계엄군이 먼저 시위와 관련없는 민간인들에게조차 폭력을 저질렀다)[26] 리비아는 2월 후기부터 외세의 지원을 받은 내전으로 변했기에 더이상 순수 반독재 및 민주화를 원했던 민중항쟁으로 보기 어렵기에 오히려 리비아 내전을 광주 민주화 운동과 비교하기엔 광주의 사례와 차이점이 너무 크다 #. 물론 당시 리비아의 사정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던 점과 카다피가 민중들에게 저지른 행동들이 부각되었을 시기였기에 이런 비교, 동일선상과 대입이 나온 거지만. 다만 내전 이전에 있었던 이틀 간의 반정부 시위는 비무장 시위였고[27], 카다피의 말년 행보와 전두환의 만행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8. 관련 문서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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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마르 카다피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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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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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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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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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분쟁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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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정치위원회 |
[1]
위의 사진들은 카다피 충성군 세력, 밑의 사진들은 반카다피 세력들이다. 반카다피 세력 중 일부가
T-55 전차를 노획한 사진도 보인다.
[2]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의 탈영병도 자유 리비아군 소속으로 참전했다.
[3]
육군, 해군, 공군, 준군사조직 동원
[4]
물론 경찰 및 군인과 민간인 간 충돌로 인한 사망자 수는 리비아가 더 많았다.
[5]
영어 위키백과에서도 시위가 "
반란(rebellion)"으로 확대되었다고 언급된다.
[6]
하지만 무기들이 상대적으로 정부군에 비하면 무기가 여전히 부족했기 때문에 카타르에게 지원요청을 하기도 했었다.
[7]
트리폴리 광역권과 사하라 사막 사이에 동서로 뻗어 있는 산지. 중세 시기
카와리지 세력의 근거지였다
[8]
이 과정에서 프랑스 정부는 소화기와 탄약만 공급했다고 밝혔으나《르 피가로》지는 로켓 발사기와 대전차 미사일도 지원했다고 보도하였다.
[9]
목표인 트리폴리의 별명인 지중해의 인어에서 따온 이름이다.
[10]
이날부터 대사관의 기도 리비아 시민군기로 변경되었다.
[11]
# 이 기사에 의하면 내전 기간에 알제리가
카다피 측에 용병 지원도 했다고 한다.
[12]
관련 기사
[13]
114개국이 찬성하고 17개국이 반대, 15개국이 기권했는데 반대한 17개국과 기권한 15개국이 어디인지는
여기의 ANNEX II에서 볼 수 있다. 왠지 눈에 띄는 국가들 이름을 보면서 반대할 만한 나라가 반대했고 기권할 만한 나라가 기권했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14]
영어 위키백과의 관련 문서 참조
[15]
말리 내전을 시작으로 리비아 내전으로 인한 지하디스트 확산은 이미 서아프리카와 사헬 지역 전체에서 현실화됬다.
[16]
하지만 문제는 이조차 약 10년간 내전 및 준내전이라는 혼란이 있었다. 게다가 리비아의 절반은
샤리아로 철권통치하는
살라프파 테러단체
무슬림 형제단 독재 정권의 치하에 떨어졌고
하프타르 등의 군벌 문제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17]
그래서 한국의 옛 여러 민주화 운동들과 비교해도 성격이 다르다. 특히 리비아 내전이 국가전복을 향한 전쟁(옛 왕정기를 들면서 무장전쟁을 했다)에서 지역 감정과 부족 간의 내분으로 변했기 때문에 초심을 유지했던 한국의 옛 민주화운동들과 달랐다. 설령 카다피에 반대를 하는 목적으로 옛 왕정국기를 사용했다고 감안해도,
벨라루스나
이란 등 국기가 바뀐 독재 국가들의 사례처럼 보듯이 내전이 아닌 비폭력으로 저항했다면 그래도 민주화 운동으로도 분류되었을 것이다.
[18]
다만, 리비아 내전부터는 민주화 운동이 아니었지, 그 이전인
2011 리비아 민주화 운동은 그래도 짧긴 했지만 민주화 및 반독재 민중투쟁이 맞다. 게다가 리비아의 반카다피 체제 투사들은 반군을 돕되 반군은 아니었다.
[19]
출저: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911 테러 10년과 달라진 이슬람 세계(
이희수, 2011).
[20]
그래도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던 2003년 미국보다야 낫지만 이라크 전쟁은 딱봐도 명분이 부족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미국이 더 많이 비판받기라도 하였지, 리비아 내전은 그럴 듯하게 자유화를 빌미로 리비아를 폭격했으니 어떤 면에서는 리비아 내전도 결국 그럴 듯 하게 정당화된 유럽의 빌미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21]
프랑스 법원에서
무아마르 카다피에게 막대한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혐의가 임기 후 밝혀지면서 고작 정치자금 수수 은폐를 위해 북아프리카 전체의 위기를 초래하고
NATO군을 동원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
[22]
그 당시 리비아에서는 무장 반군과 비무장 시위대가 동시에 있었다.
[23]
물론 이들도 완전한 민주화가 목적이었다고 보기 애매하지만 적어도 외세가 들어간 내분으로 변한 건 아니었다. 내전으로 변한 리비아는 더욱 더이상 민주화 운동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리비아 민주화 운동과 1차 리비아 내전으로 분리해서 보는 것이다.
[24]
다만 카다피 역시 수많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용병을 고용했다.
[25]
단, 카다피가 군인들에게 비아그라를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는 과장된 루머로 밝혀졌다.
[26]
반대로 리비아는 시위대들을 강경 진압했어도 일부 반군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시위하지 않은 민간인들을 공격하진 않았다. 물론 내전이 시작되면서 무자비한 탄압이 시작되었지만. 그래도 리비아 반군들은
자유 시리아군이나
하마스 만큼 잔인하진 않았으나(물론 어디까지나 "이들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수준일 뿐이었지, 후술하듯이 이들도 폭력적인 건 비슷했다) 일부 반군들은 한 때 사회적 문제들을 일으키긴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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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급했듯이 이조차 리비아의 경우 시위 당일날부터 폭력 충돌이 있었다. 시위가 일어난지 며칠 지난 상태가 아니었으며 옛 한국, 튀니지나 이집트도 처음부터 시위 도중에 시민들이 군대나 경찰에게 돌이나 화염병을 던지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