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53대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 VALENTINIANVS I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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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플라비우스 플라키디우스 발렌티니아누스 (Flavius Placidius Valentinianus) |
출생 | 419년 7월 2일 |
로마 제국 라벤나 | |
사망 | 455년 3월 16일 (향년 35세) |
로마 제국 로마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425년 10월 23일 ~ 455년 3월 16일 (30년) | |
전임자 | 요안네스 |
후임자 |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
부모 |
아버지 :
콘스탄티우스 3세 어머니 : 갈라 플라키디아 |
배우자 | 리키니아 에우독시아 |
자녀 | 에우도키아, 플라키디아 |
종교 | 기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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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제53대 황제. 호노리우스와 공치제이다.2. 생애
2.1. 출생에서 즉위까지
호노리우스의 여동생인 갈라 플라키디아와 공동 황제 콘스탄티우스 3세[1]의 아들이며, 콘스탄티우스 3세가 죽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모후, 여동생 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와 함께 동로마로 망명해서 지내던 중 호노리우스가 후사를 두지 못하고[2] 423년에 병사하자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아 귀국, 황제를 참칭하던 요안네스가 아스파르의 동로마군에게 죽자 425년에 황제로 즉위했다. 하지만 요안네스의 지시로 훈족에게 병력을 구하러 갔던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는 휘하 병력+훈족 용병을 이끌고 무력시위를 했고, 당장 아에티우스를 어떻게 할 상황이 아니던 황제 모자는 그를 서로마 군사령관(마기스테르 밀리툼)으로 임명해 회유할 수 있었다.그리고 발렌티니아누스가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황제의 모후인 갈라 플라키디아가 섭정을 맡게 되었고, 군사령관인 아에티우스와 보니파키우스의 활약으로 한동안 서로마는 조용히 굴러가는 듯했다.
2.2. 북아프리카 상실과 내전
황제 모자의 의심을 사고 아에티우스와 대립하던 보니파키우스가 보신책으로 안달루시아 지방에 정착했던 반달족에게 병력 지원을 요청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이때 이베리아 반도는 수에비족, 서고트족, 반달족의 삼파전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는 보니파키우스의 요청을 북아프리카에 진출할 기회라고 판단해 부족을 이끌고 북아프리카로 쳐들어왔던 것이다. 보니파키우스는 반달족의 공격을 막아내려 했으나 가톨릭과 아리우스파, 도나투스파[3]의 종파 분쟁으로 인해 혼란스러웠던 데다 반달족의 침공까지 겹쳐 북아프리카를 지키지 못하고 이탈리아로 도주해야 했다. 아에티우스를 몰아내려던 황제 모자에 의해 복권된 보니파키우스는 아에티우스 토벌군을 이끌고 싸우다 전사했고, 경쟁자가 없어진 아에티우스는 그대로 서로마의 군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 후 갈라 플라키디아는 실권을 잃은 채 450년에 사망했다.2.3. 아틸라의 서로마 침략
한편 443년에 형 블레다의 뒤를 이어 훈족의 왕이 된 아틸라는 동로마를 공략하다가 공격 목표를 서로마로 잡았는데, 그 이유는 황제가 여동생 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를 원로원 귀족에게 정략결혼을 시키려 하자, 뿔난 호노리아가 아틸라에게 "나와 결혼하면 서로마의 절반을 지참금으로 주겠다"는 편지를 보내서 아틸라에게 명분을 줬고 테오도시우스 2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마르키아누스가 훈족에 대한 강경책으로 나왔기 때문이었다.어쨌든 아틸라는 서로마령 갈리아로 쳐들어왔고 아에티우스는 서고트족의 왕 테오도리크 1세, 알란족의 왕 상기바누스와 함께 451년에 벌어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아틸라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듬해인 452년에 아틸라는 다시 쳐들어와서 북이탈리아를 공략하다가 교황 레오 1세와의 협상 끝에 물러났고 453년에 급사했다.
2.4. 죽음
아틸라가 죽은 후 아에티우스는 그의 아들을 황위에 올리려 했다는 발렌티니아누스의 의심을 받아 황제에게 암살당했지만 발렌티니아누스도 오래 살지 못하고 455년에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의 사주를 받은 아에티우스의 잔당에게 암살당했다.3. 기타
테오도시우스 2세의 딸인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와 결혼해 두 딸 에우도키아와 플라키디아가 있었다. 리키니아는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와 재혼했다가 막시무스도 암살당한 후 반달족의 로마 약탈 때 가이세리크에이 의해 카르타고로 이송된 뒤 7년간 체류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 여생을 조용히 보냈다.제라드 버틀러가 주인공 역을 맡았던 영화 훈족의 아틸라(Attila The Hun, 2001)에서는 현실과 마찬가지로 암군으로 묘사되었고, 마지막에 아틸라가 죽자 알현을 온 아에티우스를 직접 단검으로 찔러 죽인다.[4]
바바리안 라이징에서도 아에티우스가 고트족을 비롯한 이민족들과 동맹을 맺는 전갈을 보내자 자기 허락도 없이 보내냐고 화를 내거나 아에티우스가 다시 동로마에 지원을 요청하자고 건의하자 감히 자신의 명에 거역하냐며 제국이 망한게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거냐며 분노하면서 아에티우스를 찔려 죽이는 등 상황파악도 제대로 못하는 암군으로 등장하며 여기서는 그 본성이 한층 더 강화되어 어머니 갈라를 한동안 자기 마음대로 통치도 못했다는 이유로 처형한다.[5] 이후로는 역사대로 아에티우스의 부하들에게 암살당한다.
[1]
브리타니아에서 휘하 서로마군을 데리고 갈리아로 내려온 참칭황제 콘스탄티누스를 죽이고 서고트족과의 싸움에서 활약한 장군 출신이다.
[2]
호노리우스는
플라비우스 스틸리코의 장녀
마리아와 결혼했지만 마리아가 자녀 없이 죽자 차녀
테르만티아와 재혼했다가 스틸리코를 역모죄로 몰아 죽인 후 이혼했고 역시 자녀가 없었다.
[3]
배교했다가 다시 교회로 돌아오려는 배교자들에 대한 엄격한 취급을 주장했던 기독교 종파.
[4]
작 중 묘사되는 한심함이 보통이 아니다. 훈족, 게르만족으로 엉망인 제국의 방비 상황을 아에티우스가 열심히 브리핑 하는데 고작 한다는 질문이 "훈족 여자들은 옷을 벗고 다닌다는데 사실이오?"
[5]
실제로는 이런 패륜을 저지르진 않았으며 갈라 플라키디아는 자연사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