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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초대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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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71796> 출생 | 1934년 12월 24일 ([age(1934-12-24)]세) | ||
유고슬라비아 왕국 오라호비차 | |||
재임기간 | 초대 총리 | ||
1990년 5월 30일 ~ 1990년 8월 24일 | |||
제2대 대통령 | |||
2000년 2월 19일 ~ 2010년 2월 18일 | |||
역임 |
크로아티아 대통령 (2000–2010) 사보르 의장 (1992–1994) 크로아티아 총리 (1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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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71796><colcolor=#ffffff> 부모 |
父: 요시프 메시치 母: 마그달레나 메시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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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밀카 두두니치(Milka Dudunić) | ||
자녀 | 2명 | ||
소속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00–현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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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로아티아의 제2대 대통령.2. 생애
1934년 12월 24일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오라호비차에서 태어났다. 1941년 나치 독일의 유고슬라비아 침공으로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공중분해되자, 메시치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에 입대하여 파르티잔 활동을 전개했다.[3]1955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에 입당했고 자그레브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여 1961년 졸업했다. 1966년 무소속 시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경력을 시작했고 이후 오라호비차 시장, 의회 의원을 역임했다. 메시치는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했다가 투옥되었다. 이후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에 입당하여 1990년 의원으로 당선되었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프라뇨 투지만에 의해 총리로 임명되었으며, 비동맹 운동의 의장을 맡았다.
1991년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터진 직후인 1991년 7월 1일 메시치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대통령 위원회의 최후의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사실, 이 연방 대통령이란 자리도 크로아티아인인 그의 임명에 세르비아 측에서 엄청 방해하였으나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인해 가까스로 임명된 것이었다. 메시치는 내전이 터진 유고슬라비아를 어떻게든 통합시키려고 노력했으나, 불행히도 유고슬라비아의 정치 주도권과 군 주도권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를 비롯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이미 넘어간 지 오래였다. 메시치나 이들이나 겉으로는 똑같이 유고슬라비아의 통일을 외쳤지만, 전자는 민족 간 평등과 화합을 주장했고, 후자는 다른 민족들을 밟아버리자는 대세르비아주의를 원했다는 점에서 실상은 완전히 달랐다. 1991년 가을 시점에는 대세르비아주의자들이 정치와 군을 더욱 좌지우지했기에 메시치는 명목상으로만 연방 대통령이었지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예를 들어 크로아티아에 주둔한 인민군 병력들에게 기지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한 그의 명령부터 가볍게 씹혔으며, 부코바르 등지에는 세르비아계 민족주의 민병대들이 활개치고 있었다. 심지어 1991년 10월 7일에는 크로아티아 대통령 프라뇨 투지만과 당시 크로아티아 대통령궁인 반스키 드보리에서 회담하는데 인민군이 폭격으로 그들 모두를 암살하려다 실패하는 사건도 있었다. 결국 1991년 12월 5일, 유고슬라비아는 이미 끝났다는 것을 깨달은 메시치는 대통령 직을 사임하고 크로아티아로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92년 크로아티아 사보르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1994년까지 재임했으며, 같은 해에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을 탈당하여 크로아티아 독립민주당을 창당했다. 메시치는 프라뇨 투지만과 갈등을 빚다가 결국 투지만의 탄압을 받았고 투지만의 전쟁에 대해 비난하였다.[4]
투지만 사후 2000년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크로아티아 사회자유당의 드라젠 부디샤와 맞붙었고 결선투표까지 간 끝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메시치는 재임기간 동안 크로아티아의 북대서양 조약 기구와 유럽연합 가입 협상을 진행했고[5] 2005년에 재선되었으며, 2010년에 퇴임하였다.
[1]
혼전 성씨는 페르나르(Pernar).
[2]
크로아티아 대통령은 2000년 이후 헌법에 따라 당적을 보유할 수 없다.
[3]
단, 당시에는 나이가 어려서 전투원으로 싸운 것은 아니고, 가족들을 따라 같이 들어간 것에 가깝다.
[4]
투지만과 메시치의 성향은 매우 달랐다. 투지만은 진작에 배타적인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로 갈아탔지만, 메시치는 끝까지 유고슬라비아에 남아 민족 간 갈등을 봉합시키려다 실패하자 차선책으로 크로아티아 독립이라도 시키자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과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에 대해서도 투지만은 이참에 보스니아 땅도 일부 가져가자는 생각으로 적극 찬동했지만, 메시치는 보스니아한테 뒤통수를 후려치는 행위라며 비판적이었다.
[5]
북대서양 조약 기구 가입은 스테판 메시치의 임기 중인 2009년에 성사되었으며, 유럽연합 가입은 퇴임 이후인 2013년에 성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