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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Deutschla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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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국의 군정청 | ||
상선기[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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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5월 23일 ~ 1949년 10월 7일 | ||
연합군 점령 이전 | 주권 회복 이후 | |
플렌스부르크 정부 | 독일연방공화국 | |
독일민주공화국 | ||
자르 보호령 | ||
역사 | ||
1945년
5월 23일
플렌스부르크 정부 해산 1945년 6월 5일 4개국의 분할 통치 1949년 5월 23일 독일연방공화국 건국 1949년 10월 7일 독일민주공화국 건국 1955년 5월 5일 파리 조약 발효 |
||
지리 | ||
위치 |
구
바이마르 공화국의 오데르-나이세 선 이서 지역 |
|
수도 |
서베를린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바트외인하우젠 바덴바덴 자르브뤼켄[2] 동베를린 |
|
인문환경 | ||
인구 | 66,000,000명(1945년) | |
언어 | 독일어, 영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 |
정치 | ||
정치체제 | 군정체제 | |
국가원수 | 연합군 수뇌부 사령관 | |
주요 사령관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미국) 조지 S. 패튼(미국) 게오르기 주코프(소련) 버나드 로 몽고메리(영국) |
|
경제 | ||
통화 |
라이히스마르크·
렌텐마르크( ~1948) 프랑스 프랑(자를란트, 1947~1949) 서독 마르크(1948~ ) 동독 마르크(1948~ ) |
|
언어별 명칭 | ||
독일어 |
Deutschland / Alliierten-besetztes Deutschland |
|
영어 | Allied-occupied Germany | |
러시아어 | Германия в 1945—1949 годах | |
프랑스어 |
Occupation de l'Allemagne après la Seconde Guerre mondiale |
[clearfix]
1. 개요
연합군 점령하 독일(Alliierten-besetztes Deutschland(독), Allied-occupied Germany(영))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에 의해 약 4년 동안 분할 통치되던 시기이다. 연합국의 독일 점령은 사실상 1949년에 종료했지만, 점령체제(occupation regime)가 완전히 종료되는 기점은 파리조약 시행 전(~1955년까지)까지로 본다. 1955년 발효된 파리조약으로 인해 서독은 서유럽동맹[3], 북대서양 조약 기구(나토)에 가입하게 되었으며, 기존의 점령 규약도 완전히 폐지되었다.2. 독일
베를린 공방전 중 나치 독일의 총통인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함으로써 히틀러의 유언에 따라 카를 되니츠를 위시한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성립되었다. 이 당시 독일군은 이미 궤멸된 상태였고, 플렌스부르크 정부는 서방 국가에는 항복하되 소련과의 전쟁(동부전선)은 지속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연합군은 테헤란 회담부터 얄타 회담에 이르는 여러 회담을 통해 전후 독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이미 논의를 끝낸 상태였다. 이에 플렌스부르크 정부는 반발하였으나, 당시 유럽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였던 아이젠하워는 이런 반발을 일축하고 플렌스부르크 정부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다. 1945년 5월 8일 플렌스부르크 정부는 소련을 배제한 채 연합군에 항복한다. 그리고 이를 인정하지 않은 소련의 요구에 의해 5월 9일 베를린에서 한번 더 항복 서명을 한다.비록 플렌스부르크 정부는 항복했지만 얼마간 유지될 수 있었다. 플렌스부르크 정부는 자신들이 독일의 정부로서 존속하기를 바랐으나 소련은 이런 플렌스부르크 정부의 바람을 깨고 5월 20일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후에도 플렌스부르크 정부에 대한 소련의 비난은 계속되었다. 결국 5월 23일에 플렌스부르크 정부는 연합국에 의해 즉각 해체되고, 구성원들은 체포되었다. 나치 독일은 이렇게 멸망했다.
전승국인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4개국은 1945년 6월 5일 베를린에서 연합국 관리위원회(Control Council)[4]를 설치한 뒤 얄타 회담에 의거, 독일 분할통치 및 4개국의 베를린 공동 관리에 관한 공동 선언을 발표하였다. 4개국의 분할 점령이 시작됨과 동시에 동프로이센을 포함한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 지역이 폴란드와 소련에게 귀속되었다.
3. 독일 분할 및 군정기 시작
7월 26일에는 미국, 영국, 소련 정상들이 모여 포츠담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전후 독일에 대한 처리 문제가 논의되었다. 포츠담 회담에서는 독일의 무장 해제, 비무장화, 탈나치 및 민주화라는 네 가지 원칙을 수립하였다.이 회담은 한국에도 의미가 깊은데, 미국, 영국, 소련, 중국의 주도로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어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일본 제국에게도 독일과 같은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다. 물론 알다시피 일본 제국은 이를 거부하였고 그 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 공격을 맞고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하여 일본에서도 군정기가 시작된다. 차이점이 있다면 독일과 달리 일본은 1946년 2월 26일 11개 국가가 극동위원회라는 일본 관리 정책에 대한 최고 의사 기구를 발족시키고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일본 정부를 사실상 산하 기관으로 두는 방식으로 일본을 통치했다.
3.1. 독일 분할 계획안
4분할, 그리고 동독-서독 2분할 이전에 독일을 분할할 여러 계획들이 있었다. 물론 안슐루스로 합병한 오스트리아는 당연히 합병이전으로 독립시킬 계획이었다.-
모겐소 계획
미국의 제52대 재무부장관 헨리 모겐소 Jr.가 제시한 계획. 독일 분할 외에도 루르 지방의 모든 산업시설 파괴, 독일의 완전한 농업국가화 등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해당 계획을 안 나치 독일은 이를 프로파간다에 써먹었다고 한다...
-
웰스 계획
당시 미국 국무부 차관 웰스가 제시한 계획. 모겐소 계획처럼 독일을 3개로 나누지만 '북독일'이 너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3개의 독일이 서로 엇비슷한 영토와 인구수를 가지도록 해 독일의 중앙집권화를 막고자 했다. 모겐소 계획과 엇비슷한 3분할안이라 크게 알려지지 않은 계획안. - 남독일은 에센 일대까지 북서쪽으로 뾰족하게 뻗어나간다.
- 국제지대를 대신하는 서독일은 라이프치히 직전까지 뻗어나간다.
- 땅을 왕창 뜯긴 동독일은 대신 실레시아 지역을 보존한다.
-
루스벨트 계획
미국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제시한 계획. 독일 호칭을 없애버리고 무려 7개로 찢어놓아 독일이었던 것으로 만들다 못해 1871년 독일 통일 이전으로 돌려버리는 막대한 구상이었다.
-
처칠 계획
영국의 제61-63대 총리 윈스턴 처칠이 제시한 계획. 너무 과격한 발상으로 유명하다.
무려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부활시키고 좀 쪼그라든 바이마르 공화국을 만들겠다는 발상을 했다. 처칠 입장에서는 신생 독일들이 소련에 대항할 힘은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만든 플랜인데, 저대로 분할해놓고 독일이 다시 통일되어버렸다면 범접할 수 없는 유럽의 1인자가 되었을 안건.
점령국 중 하나인 미국은 모겐소 계획의 실현을 위해 독일의 공업을 해체하고 농업국가로 바꾸려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당시 동유럽을 적화시키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소련을 미국은 경계하기 시작했고, 소련 견제 겸 전쟁으로 피폐해진 유럽 지역을 재건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1947년부터 미국은 자신들의 정책을 180도 선회하여 독일 지역, 나아가 유럽을 재건시키기 위한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독일을 약화시키려는 정책들이 어느정도는 반영이 되어 자를란트는 프랑스 보호국 자르 보호령이 되고 루르 공업 지대는 국제 기구 산하 루르 국제 통치령이 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다. 또한 동서독의 분할을 시행했고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의 구 독일령을 아예 독일의 판도에서 지우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산업 시설을 차지하거나 지리적인 이유로 미국·영국령과 소련령 영토 교환이 일어나기도 했다. 물론 독일 정부 같은 건 없었을 때였기 때문에 주민들의 의사는 대부분 반영되지 않았고, 이 시기의 영토 교환은 극히 드문 예외를 제외하면 독일 통일 이후에도 유효하다.
현재 독일을 보면 알겠지만, 위 제안 중 뭐가 채택되더라도 현재 독일 영토보단 넓다(...)
4. 나치 체제 청산
나치 체제의 청산은 승전국에게 있어 큰 문제였다. 나치체제를 청산해야 한다는 대전제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시점으로 청산해야 하는지가 문제였다. 예를 들어 나치의 법 질서의 경우 나치의 집권 시점부터 무효로 보고 청산할 것인지 아니면 나치의 붕괴 시점부터 무효로 보고 청산할 것인지 기준이 문제였다. 나치법의 경우만 해도 일괄무효론, 일괄폐지론, 개별무효론, 개별폐지론 등 크게 네가지 의견이 나왔는데, 연합군 관리위원회는 1945년 9월 20일 관리위원회법률 제 1호를 통해 개별폐지론을 적용하였다. 이후에는- 1946년 1월 30일 관리위원회법률 제 11호 - 나치에 의해 훼손된 형법 수정
- 1946년 3월 1일 관리위원회법률 제 16호 - 혼인법 재정리
- 1946년 5월 4일 관리위원회법률 제 24호 - 등기열람권에 대한 제약 해제
- 1946년 7월 1일 관리위원회법률 제 31호 - 정치사찰을 담당하는 경찰기구 해체
- 1946년 8월 20일 관리위원회법률 제 34호 - 군사법원과 군대 해체
- 1946년 10월 10일 관리위원회법률 제 36호 - 행정법원법, 간소화에 관한 총통지령 폐지
- 1946년 10월 30일 관리위원회법률 제 37호 - 유대인의 상속을 제한하는 규정 폐지
- 1947년 1월 1일 관리위원회법률 제 40호 - 국민근로규율법 폐지
- 1947년 3월 20일 관리위원회법률 제 49호 - 국가교회법 폐지
- 1947년 7월 20일 관리위원회법률 제 55호 - 형(刑)면제에 관한 국가대통령규정 폐지
- 1947년 6월 30일 관리위원회법률 제 56호 - 공무 및 공기업에서 근로를 규율하기 위한 법률 폐지
- 1947년 12월 24일 관리위원회법률 제 60호 - 영화법 폐지
전범 처리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었던 1943년에 미국, 영국, 소련 연합국 3개국이 '모스크바 선언'을 통해 잔혹행위에 대한 아돌프 히틀러의 추종자들의 책임을 추궁하기 위한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후 나치 패망 즈음하여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4개국이 '런던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이 런던협정의 부속서로서 '국제군사재판소설치헌장'이 채택되었다. 나치수괴급전범 22명이 이 국제군사재판소설치헌장에 따라 처단되었다. (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5. 군정기 종료
동서독 수립 |
1948년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였던 조지 마셜은 마셜 플랜을 제창하였고, 이에 따라 미국은 본격적으로 유럽을 재건시키기 위한 지원을 시작했다. '유럽부흥계획'이라고도 불리는 이 계획은 1951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이를 위해 미국은 서유럽에 무상으로 약 130억 달러를 원조하였다. 이 계획에는 독일에 대한 지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1948년 2월 5일부터 2월 23일까지 미국, 영국, 프랑스 점령 하 독일이 통합되어 훗날 우리가 아는 서독이 형성된다. 반면 이런 미국과 서방의 움직임에 반발한 소련은 자신들의 점령 치하 독일에 대한 관리와 규제에 더욱 열을 올리는데 이 독일이 훗날 동독이 된다. 애초에 미국의 유럽 지원에는 소련 견제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소련이 반발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는 자신들의 점령 지역을 통합하고 난 뒤 점령 지역에 새로운 화폐인 서독 마르크를 도입하였는데 소련은 이러한 개혁에 반발하여 1948년 6월 18일부터 6월 21일까지 서베를린에 대한 통행, 지원을 모두 통제했으며( 베를린 봉쇄), 그리고 6월 22일에는 동독 마르크 도입을 발표했다. 이로써 동서독의 화폐가 서로 통용되지 않게 되었는데, 이는 훗날 독일이 통일될 때 적잖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게 되었다. 소련의 베를린 봉쇄에 대해 연합군은 당황하였으나 미국을 중심으로 서베를린을 공수하였고 미국의 압도적인 물량 앞에 소련의 베를린 봉쇄는 실패로 끝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서방과 소련 간의 관계는 냉각되었다.
1948년 7월 1일 서독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3개국이 서독 주 수상들에게 헌법제정권을 허용하는 프랑크푸르트 문서를 전달함으로써 독일은 긴 공백기를 깨고 중앙정부를 수립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일의 군정기가 시작된 이후 독일을 점령한 전승국들의 의지에 의해 점령 기간 동안 하나의 경제 단위로 취급되었으나, 그 대신 독일 중앙정부의 수립은 보류되어 있었다. 동독의 경우 1949년 10월 7일 임시 인민회의에 의해 헌법이 선포되었다. 이후 1949년 연합군 통치가 종료되자 서독과 동독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단, 베를린의 경우, 주권이 동서독으로 반환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연합군의 점령지로 간주되어 연합군 및 소련군 병력이 계속 '점령군' 성격으로 독일 통일 시까지 주둔했다. 때문에 미군에서 점령군 부대에서 일정 기간 주둔하면 주는 훈장이 1990년까지 계속 수여됐다.
그러나 1949년에 네덜란드가 무력 점령했던 엘텐 지방은 1963년까지 네덜란드가 실효지배하였다. 63km² 규모의 이 지역을 네덜란드는 전후 배상 차원으로 합병하여 네덜란드화시키려고 하였지만 추후 서독으로부터 배상금을 받고 3km² 정도만 남겨 놓고 반환하게 된다.
6. 국가
6.1. 서독
Ich hab' mich ergeben Mit Herz und mit Hand이라는 곡으로, 독일의 군정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인 1949년에 서독 지역에서 임시로 사용된 국가이다.
6.2. 동독
반면 소련 군정 치하 동독에서는 1949년부터 폐허에서 부활하여를 국가로 사용하였다.
7. 여담
- 당시 한 영국 만평에서는 이 상태의 독일을 "하나의 민족, 두개의 나라, 총통없음(One Volk, Two Reich, No Führer)"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 # 나치 독일의 선전 문구였던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총통(Ein Volk, Ein Reich, Ein Führer)"를 패러디한 만평.
- 영국의 점령지 중에 묘하게 과거 하노버 왕조의 영지인 하노버 왕국 일대가 포함되어 있다.
8. 참고 자료
9. 관련 문서
- 플렌스부르크 정부
- 얄타 회담
-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 마셜 플랜
- 베를린 봉쇄
- 연합군 점령하 일본
- 연합군 점령하 오스트리아
- 서독-동독 관계
- 오데르-나이세 선
- 전후 독일인의 추방과 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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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식 국기는 사라졌으나 국제법상 독일 선박은 깃발을 달아야 했으므로 이 기가
연합국에 의해 승인되었다.
[2]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프랑스는
자르 보호령을 프랑스 본토로 편입시려 했으나 결국 실패한 후 1956년 서독에 반환한다.
[3]
영문으론 Western European Union로, 1948년에
브뤼셀 조약에 따라 1954년 유럽 방위를 목적으로 창설됐었지만, 자체적인 군사력이 없어서 분쟁 발생시 군사행동에 나서지 못하는 등 군사동맹기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반쪽짜리 기구였다. 2010년 3월 31일에 브뤼셀 조약의 효력이 정지되었고 2011년 6월 30일에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4]
연합국 통제위원회 등으로도 번역된다. 관리위원회는 1945년 6월 5일 베를린 선언과 동시에 설치되었고
1945년
7월 30일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화합하였다.관리위원회는 4개국 연합군사령관으로 구성되었다.
1948년
3월 20일 주독 소련군 사령관인 바실리 소콜롭스키가 관리위원회에서 이탈하고 그 해 여름
서독 마르크화가 도입되면서(통화개혁) 독일분단이 가시화되었다. 이로써 관리위원회는 운명을 다했다. - 이재승, 연합국의 독일점령과 사법정책에 관한 연구 2005, 297쪽 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