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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13 07:47:48

부비(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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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 4대 황제
哀平帝 | 애평제
<colbgcolor=#483D8B> 묘호 없음
시호 애평황제(哀平皇帝)
연호 태안(太安, 385년 ~ 386년)
성씨 부(苻)
비(丕)
영숙(永叔)
생몰 기간 ? ~ 386년
재위 기간 385년 ~ 386년

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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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오호십육국시대의 16국 중 하나인 전진의 제4대 황제로 시호는 애평제(哀平帝)였고, 자는 영숙(永叔)이었다.

2. 생애

부비는 제3대 세조 선소제 부견의 서장자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총명해 맹장 등강으로부터 병법을 교육받았다. 357년, 부견이 황제에서 천왕으로 스스로를 낮추면서 장락공에 봉해졌다. 이후 368년, 부견은 반란을 일으킨 옹주자사 부무를 죽이고(5공의 난) 부비를 옹주자사로 임명했다.

378년, 부견은 부비에게 명령해 구장(苟萇)과 함께 동진의 양양을 점령할 것을 명령했다. 양양의 외성을 순식간에 함락시켰으나 양양태수 주서[1]가 내성의 문을 단단히 걸어잠그고 지키니 쉽게 함락시키지 못했다. 부견이 모용수 등을 보내 부비를 돕게 하니 시간이 지날수록 형세가 불리해질 것이라 판단한 양양독호 이백호(李伯護)가 주서를 배신하고 양양성 내에서 부비에게 호응했다. 결국 내외로 동시에 공격받게 된 주서는 항복하고 양양을 바쳤다. 이리하여 부비는 양양을 거진 10개월 가까이 포위하고 나서야 겨우 함락시킬 수 있었다.(양양 공방전)

383년, 부견 동진 원정을 준비할 때 부비는 정동대장군 기주목에 임명되어 업성에 주둔하며 하북을 수비했다. 하지만 부견이 동진과의 비수대전에서 최악의 패배를 당하자, 전진의 각 지역에서 이민족의 반란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이것은 부비가 진수하고 있었던 하북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튀르크계 정령족(퇼레스)의 수령 적빈이라는 인물이 반란을 일으키자 부비는 모용수에게 적빈을 토벌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모용수의 배반을 우려하여 견제하는 차원에서 일부러 그에게 오합지졸인 2,000명과 낡아빠진 병장기를 주고, 감시역인 부비룡에게 저족 기병 1,000여 명을 주어 모용수를 따르게 했다. 그러나 모용수의 교활함은 부비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으며, 결국 모용수는 부비룡을 암살하는 데 성공하고 전진을 배반하여 384년 후연을 건국했다.

비록 수중에 열악한 병장기와 오합지졸 밖에 없었지만 모용수는 적빈을 설득해 정령족과의 연합을 이끌어냈고, 업성을 공격하니, 미리 모용수의 지령을 받고 대기하고 있었던 모용농과 모용해 등이 군사를 일으켜 성 안에서 호응했다. 부비는 모용농 등을 토벌하기 위해 명망 높은 장수인 석월을 보냈으나, 석월이 도리어 패배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부견의 측근으로 오랜 기간 활약하며 명성이 높았던 석월이 전사하자 업성의 민심은 크게 동요했다. 기세등등해진 모용수는 부견과 부비에게 편지를 보내 이해관계를 따지면서 업성을 포기하라고 권했지만, 둘 다 화를 내며 거절했다. 그 뒤로 부비는 당시 병주에서 5,000명의 우림군을 이끌고 있었던 명장 장자와 병주자사 왕등에게 원군을 청하면서 6개월 간 안팎으로 모용농과 모용수의 공격을 막아내며 버텼다. 하지만 처절한 사투 끝에 들려오는 소식이라곤 자신들도 군사가 적어 원군을 보낼 수 없다는 장자와 왕등의 거절뿐이었다. 심지어 동진의 사현이 사안의 명령을 받아 북벌을 단행하면서 북부군의 명장 유뢰지가 20,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기주를 노리는 형세까지 되자, 결국 부비는 업성을 버리고 장안으로 향했다.(업성 공방전)

부비가 장안으로 향하던 도중, 후연군을 피해 호뢰관으로 향하던 유주자사 왕영의 군대를 만났다. 그리고 노천(潞川)에 도달했을 때 장자와 왕등이 부비 일행을 영접했고, 이들은 군사들이 연이은 전투와 강행군에 모두 지쳐있어 서연군의 포위망을 당장 뚫기는 힘들테니 일단 진양으로 갈 것을 조언했다. 부비는 이를 받아들여 군사를 이끌고 진양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때 부황 부견은 이미 신평의 사찰에서 강족의 요장에게 교살되었고, 장안은 선비족 손에 넘어가 말그대로 무정부 상태였다.

부비는 진양에 들어가고 나서야 장안 함락과 부견의 사망 소식을 들었고, 그곳에서 발상하여 제4대 황제로 즉위했다. 부비가 즉위한 시기, 전진은 모용수의 후연, 걸복국인 서진, 서연, 요장 후진, 동진과 모두 대적해야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부비는 아직 전진을 따르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왕영에게 명령해 모용씨와 요씨를 토벌하자는 공문을 서쪽의 관중과 농우 지방에 뿌리도록 했다.

386년, 왕영의 공문 덕에 전진을 따르는 무리들이 모용씨의 통치를 거부하고 관중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부비는 잔존세력의 지지에 힘입어 진양에서 나와 40,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평양으로 향했다. 서연의 모용영은 요장의 위세에 눌려 장안을 버리고 후연으로 도망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전진의 군사가 평양에 주둔해 길을 막자 급히 화친을 청하며 길을 빌려달라고 했다. 부비가 화친을 단칼에 거절하고 우장군 구석자 및 좌승상 왕영과 함께 모용영의 서연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양릉을 쳤다. 그러나 부비는 오히려 서연군에게 역전당해 대패했으며, 왕영, 구석자 등 여러 장수들을 잃었다.(양릉 전투) 모용영이 기세를 타고 진양까지 진공해오자, 부비는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졸지에 떠돌이 신세가 된 부비는 패잔병을 수습한 후 낙양을 함락시키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남은 병력으로 낙양을 향해 진군하던 중, 섬성에서 동진의 장수 풍해에게 포착당해 동진군과 전투를 벌였다. 사기가 바닥난 전진군은 풍해의 공격에 궤멸당했고 부비는 전사했다.(섬성 전투)

부비가 붕어하자 상서 구유는 부비의 아들인 발해왕 부의, 제북왕 부창을 모시고 남안에서 세를 떨치고 있었던 부등에게로 도망갔다. 부의와 부창 모두 나이가 너무 어려 부등이 제5대 황제로 즉위했으며, 전사한 부비를 '애평황제'로 추존했다.

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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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의 역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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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적인 비수대전에서 동진군의 기적적인 대승에 크게 일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