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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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羊琇(? ~ 282)
서진의 인물. 자는 아서(雅舒). 연주 태산군 남성현 출신. 태상 양탐의 아들로 어머니는 신헌영이며, 상서우복야 양근(洋瑾)의 동생. 양호의 종제. 학문을 두루 섭렵했고, 계산도 빨랐으며, 어릴 적부터 사마염과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2. 생애
낭중을 지내다가 촉 정벌 전에 종회가 양수를 참군으로 삼을 것을 요구했는데, 신헌영이 "종회가 밖으로 나갈 때 나는 국가가 걱정되었는데, 오늘 그 걱정이 우리 집안까지 미치는구나. 이번에 종회가 반드시 반란을 일으킬 것 같구나."라면서 "조심해서 가거라. 옛부터 군자는 집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서는 나라에 충성을 맹세하고, 일자리에 있어서는 그 의무를 생각하고 도의에 관해서는 가져야 할 태도를 생각하고,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는 것을 유의했다. 군대 안에 있어 필요한 것은 오로지 자비심이 깊고 마음이 어질어 마음쓰는 것 뿐이니라. 그것을 명심해라."라고 했다.이에 양수는 사마소에게 사퇴를 신청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하며, 신헌영과 양호의 대화를 알고 있으면서 신헌영의 충고를 들었기에 양수는 종회를 경계했다. 촉 정벌 이후 종회가 강유와 합심해 반란을 도모하자, 양수는 고충을 무릅쓰고 간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반란이 일어나 다수의 장병이 살해되었으나, 상황이 금방 종료되어 무사히 귀국했고, 조정에서 공을 인정받아 관내후에 봉해졌다.
양호가 양수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변경을 안정시킨 후에 머리에 두건을 쓰고 동쪽으로 가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 자신의 관을 묻을만한 땅을 준비해달라고 하면서 보통 사람의 신분으로 높은 자리가 되었으니 부귀함과 풍족함을 구해 어려운 일을 실행하도록 꾸짖음과 권하는 것을 받을 수 있겠냐면서 소광[1]이 자신의 스승이라는 내용이었다.
후에 양수가 무제 사마염에게 양호의 평소 의향을 얘기해 양호를 선조의 묘소에 안장하길 청했지만 황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성에서 10리 이상 떨어진 황릉과 가까운 땅 1경을 내려 매장하게 하면서 양호의 시호를 성(成)이라 했다. 이후 진나라에서 중호군, 산기상시를 지내다가 황제의 총애를 믿고 교만하면서도 사치해 자주 법을 어겼기 때문에 유의의 탄핵을 받아 사형될 뻔 했는데, 죄상이 밝혀지자 면직되었다가 다시 중호군이 되었다.
석숭, 왕개, 왕제처럼 엄청난 부자라 이에 대한 일화로 유명한데, 술을 만들 때 항아리에 든 술을 발효시키기 위해 하인들을 시켜 술동이를 교대로 안게 했다고 하며, 이 일화는 세설신어에 실려있다.
282년에 사마준, 이희, 양수, 왕제, 진덕 등과 함께 사마유를 봉지인 산동으로 돌려보내라 청하는 것을 반대했으며, 북군중후 성찬과 함께 양요를 만날 때 칼로 죽이자고 모의했다가 이를 안 양요가 몸이 아픈 것을 핑계로 나가지 않고 몰래 양수를 탄핵하는 상주문을 올리면서 태복으로 좌천되자 분하고 원망하다가 병이 나서 죽었다.
[1]
전한의 학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