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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15:57:16

그레이트 게임

식민제국들의 대외정책과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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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그레이트 게임 | 세계 대전 | 대침체 | 대봉쇄
※탈냉전 종식 및 신냉전 시작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레이트 게임
The Great Game | Большая игра
파일:5d9afc6b15e9f936f610a3d4.jpg

1. 개요2. 역사
2.1. 결과
3. 영국과 러시아의 격차4. 영향5. 영국 vs 독일6. 이후
6.1. 냉전으로의 연결6.2. 신냉전으로의 연결
7. 연관 국가8. 발생 사건9. 허구의 개념이라는 비판10. 여담11. 대중매체12.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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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그레이트 게임.webp
그레이트 게임 전황
파일:그레이트게임당시 풍자화.jpg
"Save me from my friends!"
"내 친구들로부터 나를 구해줘!"
사자 사이에 끼어 있는 아프가니스탄 토후국[1]의 상황을 풍자한 만평.
19세기 내내 영국의 정치가들을 악몽에 시달리게 한 것은 러시아라는 거인에 대한 공포였다. 러시아의 남하는 오스만 제국 페르시아 영국 의 인도 지배에 대한 위협이 가중됨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제프리 브룬, 《19세기 유럽사》[2]
"영국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는 다른 국가가 인도로 접근하는 것을 막는 것, 즉 수에즈 지협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영국은 오스만 정부를 통제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인도로 향하는 또 다른 육로가 있다. 수에즈 지협을 통과하는 것보다는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오직 러시아만이 이 길을 이용할 수 있다. 실제로 이 길을 이용하지 않고 단지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 등의 부족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만으로도 러시아는 영국령 인도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보리스 치체린(Boris N. Chicherin. )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 Большая игра[3], 1813~1907) 1813년( 러시아-페르시아 굴리스탄 조약)부터 1907년( 영러협상)까지 94년간 이어진 대영제국 러시아 제국 사이의 전략적 경쟁이다. 작게는 중앙아시아와 인도에서, 크게는 흑해 연안에서 극동을 아우르는 유라시아 전역의 패권을 두고 벌어졌다. 러시아에서는 그림자의 토너먼트(Турниры теней[4] / Tournament of Shadows)라고 부른다. 게임의 목적은 러시아에는 중앙아시아로 남하해 인도양 부동항을 확보하는 것, 영국에는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남하를 저지하는 것이다. 게임의 우승 경품은 바로 모든 제국이 갈망하는 보물인 인도.[5] 현대에는 19세기판 냉전이라고 할 정도로 세계 정세에 큰 영향력을 미친 사건으로 보고 있으며 일각에서는 되려 '냉전이 그레이트 게임의 연장전이다.'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동유럽에서는 나이팅게일의 활약으로도 유명한 크림 전쟁이 일어났고 중동 중앙아시아에서는 쇠락해진 오스만 제국 이란 숭고국, 아프가니스탄 토후국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으며 티베트 위구르 인도에 자리잡은 영국과 북쪽에서 간을 보는 러시아 양대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고 지구 반대편인 동아시아 캄차카 반도에서도 직·간접적으로 대결했다.

작게나마 엮인 곳들을 모두 따져보면 유라시아를 넘어 전세계이다. 러시아 제국은 한때 하와이 왕국에 영향력을 확장하려고 했고 러시아령 알래스카 미국에게 팔아넘긴 것도 결국 대영제국( 영국령 캐나다)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일본 제국의 메이지 유신과 조선에서의 거문도 사건 제주성 위협사건이나 영일동맹, 러일전쟁, 한일합방 역시 크게는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6]

그레이트 게임이란 용어는 영국 동인도 회사 육군 웨일스 기병대 정보 장교, 탐험가였던 아서 코놀리(Arthur Conolly, 1807 ~ 1842)의 말에서 따왔다. 군인 출신 언론인 겸 역사가인 피터 홉커크가 쓴 책 《그레이트 게임》[7] 역시 이 주제를 다룬다.

2. 역사

파일:바라크자이 왕조.png
그레이트 게임이 본격화된 1860년의 중앙아시아 정세

나폴레옹 전쟁 이후 반(反)프랑스 동맹군의 승리를 이끈 주역인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의 소위 '4대 전승국'이 형성되었다.[8] 이들 중에서도 영국과 러시아 제국이 전쟁에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나폴레옹 1세의 패망 이후에는 영국과 러시아 제국간의 대결구도가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특히 영국은 자국의 안보를 위해 유럽 대륙에서 패권국가가 출현하는 것을 저지해 왔기 때문에 러시아 제국의 팽창에 대응해야 했다.

러시아 제국으로서는 지리적인 이유로 해양 진출이 제한적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국방과 전쟁수행에 있어서 병력의 이동은 내선 전략에 의지해야 했다. 이 점은 유럽 대륙의 다른 강대국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러시아 제국은 국토가 워낙 광대한 데 반해 영토가 고위도에 있어 부동항 확보가 어렵고 험난한 자연환경으로 인해 수송에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의 러시아는 철도 같은 교통수단의 발달과 함께 공군이나 공수군과 같은 신속대응 부대로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있지만 19세기의 러시아 제국에서는 병력을 재배치하는 데만 해도 몇 개월에서 심지어는 연 단위로 시간이 소요되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 제국은 광대한 국토를 커버해야 하는데 해양력이 제한적이니 유사시 병력을 신속하게 재배치하거나 집중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외국, 특히 영국과의 분쟁에 있어 전략적 방어자라는 부담을 가져야 했다.

크림 전쟁에서는 이같은 취약점이 극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크림 전쟁 당시 러시아 제국은 러시아 남부가 직접 위협받던 위기상황에서도 곳곳에 병력의 분산 배치를 강요받았다.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 근해의 발트해에도 침공 위협 때문에 300,000명이나 되는 병력이 배치되었고 동시기 카프카스에도 200,000명에 달하는 병력이 묶여 있었으며 뿐만 아니라 프로이센 왕국이나 오스트리아 제국의 참전 가능성까지 대비해야 해서 폴란드 방면으로도 상당한 병력을 할애해야 했다.[9] 여기에 추가적으로 앞선 곳들보다 규모는 작아서 수 천~수 만 정도이지만 국내 곳곳에 치안을 위해 병력을 주둔해야 했다.

크림 전쟁의 결과 세력 균형의 유지를 중시하는 유럽의 외교적 전통을 따라 영국의 주도(혹은 강압)아래 다른 강대국과 함께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하려 들면서 러시아 제국이 생각보다 몹시 취약하다는 점이 새삼스레 확인되었다. 1870년 당시에 러시아 전쟁성(국방부)은 여기저기에 고정적으로 배치해야 되는 병력을 제외하고 러시아 제국이 유럽 방면에 가용가능한 병력은 600,000명 정도로 결론지었다. 분명 적은 규모가 아니지만 같은 시기 유럽 대륙의 다른 열강들도 단독으로 그 이상의 병력을 동원 가능하다고 평가되었다. 영국이 주도하는 잠재적인 연합을 상대한다고 상정했을 때 상당히 암울한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정리하자면 러시아의 지리적인 특성, 즉 유라시아 대륙 북반부에 걸쳐 있는 광대한 국토는 일단 침략을 받을 때는 방어에 이점이 되었지만 동시에 방위전략을 수립할 때나 외부로 세력을 투사할 때에는 반대로 러시아에게도 족쇄로 작용했다. 크림 전쟁 이후인 19세기 중반 무렵부터는 러시아가 처한 이 지정학적 딜레마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타개책으로 제시된 것이 인도 공격이었다. 당시 러시아 지도부는 인도를 진짜 정복하기보다는 영국에 군사적 압박을 가함으로써 유럽 방면의 부담을 해소하고 겸사겸사 중앙아시아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전략이었다. 즉, 일종의 무력시위였다.

군사-외교뿐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에서도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파탄난 경제가 전통이라 할 정도로 여러모로 맛이 간 나라였고 농업과 산업 전반 면에서 빈약한 입지에 있었지만 (비록 당시엔 제대로 개발하진 못했어도) 천연자원은 많았다. 하지만 러시아에는 당시 돈 잘 벌리는 물품들(, 커피, 담배, 고무 따위의 환금작물 Cash Crops)에 접근할 수 있는 신대륙이나 동남아시아 쪽으로 진출할 방도가 없었다. 발트해 어느정도 진출하긴 하였으나 그 쪽 항구는 겨울이면 얼어 버리기 십상인 데다 발트해 넘어가 봐야 나오는 건 영국(...)[10]이었다.

지금이야 바렌츠해 쪽에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부동항인 무르만스크가 있지만 이곳은 지리적 위치상 신대륙이나 동남아 방면으로의 진출이 쉽지 않고 이 시기만 해도 무르만스크 일대는 거의 개발되지 않은 오지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반쯤은 있으나마나 한 땅이었다.[11]

한편 크림 반도를 통해 장악한 흑해도 결국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지 못한다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12] 그걸 건너도 지중해를 지나 지브롤터를 거처 대서양으로 나온다는 것도 무리였다. 심지어 지브롤터는 영국 땅이다.(...) 나온다 처도 신대륙은 어떻게 가고 희망봉은 또 어떻게 돌아가겠는가? 수에즈 운하가 생긴 후엔 이야기가 좀 다르지만 그건 프랑스가 만들고 영국이 관리했다.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며 발칸 반도로 진출해서 갈망의 도시를 점령하는 것도 방책이지만 바로 그 갈망의 도시를 러시아가 낼름하게 가만히 둘 유럽 나라들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방법은 아예 지중해와 발트해, 대서양을 안 거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캅카스 산맥을 넘어서 페르시아로 밀고 들어가는 방법이 있었는데 그 험준한 캅카스 산맥을 넘어서[13] 어떻게 페르시아까지 갈 것이며, 가는 길에 만나는 오스만 제국은 또 어찌할 것이며, 페르시아도 더럽게 넓고 험준한데 그건 또 어떻게 다 먹을지 답이 안 나왔다.

결국 눈길은 중앙아시아로 쏠리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중앙아시아는 희대의 척박한 동네였다. 당장 구글 지도 구글 어스만 봐도 카자흐스탄-러시아 국경 아래는 녹지를 찾아보기도 힘들고 사막이 대부분이다. 러시아가 중앙아시아에 설치한 투르키스탄 총독부는 러시아령 중앙아시아를 사실상 외부로의 출구(특히 남쪽으로)가 없는 거대한 분지로 보았다. 러시아령 중앙아시아는 일부 비옥한 오아시스나 황토지대가 포함되긴 했어도 서부는 사막지대, 동부는 산악지대 그리고 소금 스텝 지대로 구성되었으며 그 바로 남쪽에는 제국의 무덤으로 악명 높은 평균 해발고도 수 천 미터의 아프가니스탄이 러시아와 인도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총독부 당국은 1914년에 관할구역의 약 1/5 정도(655,427 평방마일)만이 개간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14] 헌데 그 1/5 면적이 한반도의 여섯 배도 넘는 것이 함정 그래도 어찌저찌 여길 통해 남하한다면 바로 인도양에 도달할 수 있지 않겠는가?[15] 아니면 신장-위구르 지역을 뚫고 내려가서 버마를 거쳐 동남아시아를 뚫고 말라카 해협에 갈 수도 있을 노릇이었다.[16]

한편 이런 러시아의 행보를 보는 영국은 "저 커다란 러시아 놈들이 중앙아시아 고속도로를(?) 타고 인도로 쳐들어온다!"는 공포에 시달렸다. 아무리 당대 수준으로 중앙아시아를 유의미하게 통행하는 것이 불가능했다곤 하지만 인도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있기는 하다는 것 하나만으로 충분한 골칫거리일 수밖에 없었다.[17]

당시 대영제국은 해군 규모에서 세계 최강의 열강이었으나 육군 규모에서 최강인 데다 지하자원이 많고[18] 땅도 넓고[19] 인구도 많은[20] 러시아 제국은 언젠가 영국의 식민지 중 핵심과 같은 인도를 위협하는 가상의 적대국으로 꼽혔다. 러시아의 영향력 확장을 영국은 전 세계 각지에서 필사적으로 방해했다.

2.1. 결과

결국 크림 전쟁에서 양측이 정면충돌하게 되자 기술력과 산업력이 열세하고 전략적 방어자로 전력이 분산되어 있는 러시아 제국이 패배하고 강력한 해군력과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전세계 대양을 연결짓는 식민지의 항구를 다수 보유한 영국이 승리했다. 자타공인 유럽의 경찰국가였던 러시아가 패배하면서 러시아는 큰 충격에 빠지고 본격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한편 영국은 방심하지 않고 곳곳에서 러시아의 진출을 견제하기 위한 군사-외교적 공작을 벌이고 다녔다.

그나마 베이징 조약으로 청나라로부터 외만주를 떼어가서 마침내 제대로 바다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저 멀리 서쪽에서 연해주까지 함대가 날아서 갈 수도 없었고 당시엔 북극항로 같은 것이 없었으며 지금도 북극항로는 말로만 존재하는 전설 속 무언가 취급받는 수준의 개노답 뻥 항로 상태를 못 벗어나고 있지만 지구 온난화 때문에 점점 눈길을 끌고 있긴 하다. 심지어 연해주를 통한 확장도 러일전쟁에서 깨지면서 처참히 박살났다. 결국 러시아는 2차대전 이후 쿠릴 열도를 획득하면서 대양 진출에 성공하게 되었다. 물론 이미 캄차카 반도를 통해 부동항을 얻었지만 위치가 위치인지라 있으나 마나한 지역이었다. 거기다 아편전쟁 이후 청일전쟁 이전까지는 영국이 청나라 편을 들고 오히려 일본과 협력해 러시아를 막는 입장이었다.덕분에 조선은 청일 양국에 끼여 숨도 제대로 못 쉬게 되었지만

물론 당대 열강 중 산업화면에서 제일 후발주자였던 일본 제국 혼자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고 실제로 인명피해도 매우 많았으나 영국의 엄청난 지원 덕에 승리할 수 있었다.[21] 러시아 제국의 최강 발트 함대를 비롯한 해군력은 일본에 완전히 박살난 상황이었고 더 이상의 해양 진출을 노릴 수단조차 사라졌다. 반면 영국은 큰 피해 없이 일본을 통해 러시아의 해군력과 극동의 거점을 박살낼 수 있었으므로 실제론 영국의 완승이었던 셈.

한편 독일 제국이 엄청나게 팽창하고 있었으며 페르시아에선 민중 봉기가 일어나던 상황이었다. 영국과 러시아는 독일 제국을 견제하고 페르시아 지역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 결국 1907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양 측이 영러협상을 맺게 되었고 양 측이 프랑스와 더불어 동맹을 체결하면서 그레이트 게임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의 전개를 보면 영국과 달리 러시아가 국력을 상당부분 보존했다고 할 수 있다. 후속국가인 소련은 러시아 제국의 강역의 대부분을 보존하였고 소련 붕괴라는 심각한 상황[22]에서도 러시아 연방은 끝내 소련의 강역의 75%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반면 영국은 러시아와 달리 그레이트 게임 시기의 대영제국의 영토를 보존하는 데 실패했고 전성기 기준으로 99%에 가까운 영토를 죄다 상실하고 말았다. 사실 그레이트 게임 기간에도 대영제국을 비롯한 식민제국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고 세계적인 민족주의의 발흥 이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오죽하면 같은 영어권인 캐나다마저도 자치권을 허용하면서 통제력을 상실했을 정도이다.

3. 영국과 러시아의 격차

러시아 제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넓은 영토를 통치하는 나라였다. 19세기 초반 나폴레옹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유럽의 경찰 국가 비슷한 위상까지 얻었지만 대영제국에 비하면 속 빈 강정이었다. 더불어 당시의 대영제국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최전성기를 달리던 황금기였다. 애초에 좋게 말해야 영-러 패권경쟁이지 실질적으로 따지면 영국은 러시아에 대해서 일방적인 우위에 있었다.

4. 영향

러시아 제국이 여러 모로 대영제국, 프랑스 3공, 독일 제국 등의 서방 세계보다 뒤쳐진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제국, 카자르 왕조 페르시아, 청나라, 조선보다는 매우 막강한 국가여서 이들 국가들에게 틈만 나면 군사력으로 압박하거나 진출해서 영국을 긴장하게 만들었는데 이 때문에 영국이 긴장을 잠시라도 안 할 수 없었다. 오스만 제국은 경제와 산업, 행정, 부패도 면에서 러시아 제국보다 훨씬 열세에 있는 국가였고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 제국과 전쟁을 벌일 때마다 엄청난 손해만 본 채 모두 패했다. 청나라는 당연히 러시아 제국 상대로 게임이 안 되는 국가였고 그래서 1858년 아이훈 조약으로 아무르 강 이북 지역 일대가 러시아로 할양된 것은 물론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 일대마저 넘겨야 했다. 조선도 러시아와 수교를 맺을 시 불평등 조약으로 맺어야 했으며 러시아 해군 함대가 제주성 위협사건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조선은 해금정책으로 인해 해군 육성도 지지부진한 상황이었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낙후된 판옥선으로는 중유&석탄 증기 추진식 장갑순양함과 보로디노급 전함 같은 배수량 1만 4천톤급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으로 무장한 러시아 제국 해군을 상대할 수도 없었다. 이후 고종은 생존을 위해 적극적인 친러 외교 정책을 펼치면서 러시아에 의존했으나 러일전쟁 과정에서 영국이 일본을 지원하면서 이러한 발상은 무참히 깨지고 경술국치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5. 영국 vs 독일

위에서 보듯 영국과 러시아는 경쟁 관계이기는 했지만 여러 모로 영국이 우위에 있었다. 영국과의 실질적인 패권경쟁을 벌인 것은 보불전쟁 보오전쟁을 통해서 신성 로마 제국의 잔해에서 프로이센 주도의 통일을 이룩해낸 독일 제국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 제국은 낙후되고 분열되었던 독일 정치를 오토 폰 비스마르크 재상의 철혈정치로 통일시켰고 이를 기반으로 독일의 통일에 반대하는 주위 국가들과 전쟁을 벌여 일방적인 출혈전을 강요했으며 전쟁들이 끝난 후 독일은 다른 식민제국들과 수준이 다른 튼튼한 내수 경제를 기반으로 영국을 가장 근접하게 추격하는 국가로 성장했다. 이후 빌헬름 2세 식민주의 열망은 영국이 가졌던 독일에 대한 의심을 확정적으로 바꾸었다. 역사 문단에서 보듯 그레이트 게임을 끝낸 것도 독일이나 다름없다.

6. 이후

6.1. 냉전으로의 연결

1930년대에도 영국은 러시아 제국의 뒤를 이은 소련을 견제했다. 백군 망명자들은 자신들이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겪은 일들을 과장시켜 곧 레닌주의의 위협을 러시아의 위협이자 서방에 대한 위협으로 탈바꿈시켰다. 네빌 체임벌린을 비롯한 영국의 보수당 출신 총리와 각료들은 반공, 반러 감정이 상당했던 데다 혁명과 러시아 내전의 혼란기를 극복하고 낙후된 농업국가였던 소련을 금방 세계 2위 경제대국이자 공업 대국으로 성장시킨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한 경계심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

그렇기 때문에 네빌 체임벌린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과 손을 잡고 소련의 진출을 견제하고자 했다. 당시에는 나치와 히틀러에 대한 인식이 전세계적으로도 나쁘지 않았던 데다 영국 입장에선 베르사유 조약을 어기고 재무장하는 히틀러를 잘 이용한다면 소련의 진출을 견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기 때문에 라인란트 재무장 오스트리아 병합을 묵인했으며 뮌헨 협정을 통해 체코슬로바키아를 배신하고 히틀러의 주요 요구 조건을 모조리 들어주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영국의 행동은 히틀러를 자만하게 만들었고 결국 영국이 독립 보장을 걸고 있던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영국은 원하지 않았던 독일과의 전쟁에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독일과의 외교 파탄과 여러가지 악화된 전황으로 인해 네빌 체임벌린은 사퇴해야 했고 강경론자였던 윈스턴 처칠이 새로운 총리로 취임했다.

하지만 윈스턴 처칠도 매우 완고한 반공주의자였다. 처칠은 다름 아닌 철의 장막을 언급한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소련의 바쿠 유전지대에 대한 폭격 작전도 검토했다. 이후 독소전쟁이 터지면서 양 측은 공동의 적인 나치를 막기 위해 협력했고 영국은 소련에 적지 않은 랜드리스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처칠은 소련에 대한 경계는 늦추지 않았고 전쟁 막바지에는 독일을 항복시킨 후 독일군을 연합국에 포함시켜 소련군을 동구권에서 몰아낼 생각도 했다. 그러나 소련은 독소전쟁의 어마어마한 피해를 이겨내고 유라시아 일대를 장악한 새로운 패자이자 미국과 더불어 세계를 양분하는 초강대국으로 부상했고 막대한 전쟁 피해를 입은 영국은 더 이상 이런 강력해진 소련을 견제할 힘이 없었다.

이것이 제대로 증명된 것이 1957년 수에즈 전쟁이다. 수에즈를 침공하는 영국을 향해 소련의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는 영국을 향해 핵공격을 하겠다며 위협했고 제3차 세계 대전을 우려하는 미국으로부터도 압박이 있었다. 결국 미소 양국의 위협을 이겨낼 국력도 없었고 핵무기도 없었던 영국은 굴욕적으로 수에즈 운하를 완전히 상실해야 했으며 이후 영국은 자국을 지키기 위해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고 미국과의 동맹 관계에 더더욱 매달리게 되었다.

거기다가 1960년대 이후 소련의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해군 총사령관 세르게이 고르시코프가 해군력을 크게 증가시켜 소련 해군은 세계 2위 대양 해군으로 성장해 그 천하의 영국 해군을 앞지르기에 이른다. 이때 영국은 복지를 위해 군비를 계속 삭감한 데다 1970년대에 복지병으로 인한 경제침체까지 겪어서 해군 투자가 상대적으로 침체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영국 역시 해군 투자를 포기한 것은 아니어서 NATO 내에서 해군력 2위를 차지했지만 소련과의 전력 차이는 확연했다.

6.2. 신냉전으로의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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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중국 미국, 유럽연합 사이에 벌어지는 신냉전이 그레이트 게임과 유사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영국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우크라이나 편을 든 나라 중 하나이며 러시아의 확장을 막기 위해 스웨덴 핀란드 북대서양 조약 기구 가입을 적극 밀어붙이고 러시아와 접경 국가들인 발트 3국, 폴란드, 우크라이나의 안보보장에도 적극 관여하고 있어 향후 유럽에서 영국의 영향력이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서로에 대한 발언 수위가 오히려 미국보다 훨씬 심한 모습을 보여 그레이트 게임 시절을 연상시킨다. 러시아가 핵을 날리겠다는 소리를 하자 너만 핵 있냐고 대답할 정도다. # 21세기에 그레이트 게임의 재림이라고 할 정도로 대치하고 있다. 신냉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가 2008년이니 1907년 영러협상 이후 101년 만에 다시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한 셈이다. #

7. 연관 국가

8. 발생 사건

9. 허구의 개념이라는 비판

실제로 그레이트 게임과 같은 대결이 있었는지에 대한 비판이 있다. 그레이트 게임은 19세기 초 인도 전역을 식민지화시키고 산업혁명에 돌입하고 산업혁명에 없어서는 안 되는 거대한 원자재와 소비시장 역할을 하는 인도의 식민지 보존에 대한 경각심이 담긴 시대적 배경에서 19세기 초의 영국 장교가 만든 단어가 소설가 키플링에 의해 널리 퍼진 것이다. 즉, 세계사적으로 객관적인 시대 배경이라기보단 영국 중심적 시대 인식이라는 견해가 있다. 오히려 19세기 러시아 제국의 주요 외교 관심사는 발칸과 흑해 연안에서 이슬람 세력 오스만 제국을 격퇴시키고 슬라브 민족을 해방시켜 범슬라브주의로 통합시키는 것, 쇠락한 청나라 침탈이였고 영국령 인도에 대한 야욕을 직접적으로 보여준 적은 없다. 즉 영국 혼자 편집증적 노이로제에 걸려있었던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 그레이트 게임 기간에도 영국 왕실과 러시아 왕실은 1874년 알렉산드르 2세의 차녀와 빅토리아 여왕의 차남이 혼인하여 사돈관계를 형성하고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차르인 니콜라이 2세의 이종사촌이 조지 5세이며 황후도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다. 국익 차원에서 견제와 경쟁 그리고 소규모 국지전은 했을지언정 크림 전쟁을 제외하면 전면전까지 치달은 적은 없다. 혼인관계로 얽혀 있는 만큼 삼국협상을 성사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10. 여담

파일:영국황실과 러시아황실 가계도.jpg

서로 그레이트 게임을 벌일 정도로 사이가 안 좋았지만 역시 유럽 황실인 만큼 서로 혼맥이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이 무너진 뒤 영국 왕실은 황실 일원들이 영국으로 오는 것에 호의적이었지만[26] 황후였던 알렉산드라가 독일계였고 당시는 1차대전 중이었기 때문에 영독관계가 엄청 험악해서 독일계 출신인 영국 왕실이 성까지 갈아엎어야 했을 정도였고[27] 당시 대신들도 강력하게 반대해서 결국 러시아 황실이 영국으로 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러시아가 딱히 부동항을 추구하지는 않았다는 설도 있다. 부동항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러시아는 부동항을 갖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대륙국가답게 동서남북으로 되는 대로 영토를 확장하려고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경쟁 강대국을 대륙에 가둬 놓는 것을 국시로 삼고 있던[28] 영국이 '국익을 얻기 위해서 당연히 부동항을 원할 것이며 바다로 진출할 것이다' 라고 자기들의 상식에 맞추어 가정하고 러시아의 확장 시도를 온갖 방식으로 방해하면서 대립이 과격화되었다는 논리. 말하자면 장대한 섀도 복싱이었다는 것인데 애초에는 러시아가 부동항에 관심이 없었다고 해도 부동항을 얻고 나면 영국의 국익과 본격적인 충돌이 일어날 것은 당연한 일이긴 하다.

11. 대중매체

12.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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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확히는 아프가니스탄의 아미르 시르 알리 칸. [2] Geoffrey Bruun ,Nineteenth Century European Civilization: 1815-1914., 118pp (Oxford University Press, 1960.) [3] Bol'shaya Igra로 발음 [4] Turniry teney로 발음 [5] 세계 최초의 대제국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 때 인도의 일부인 인더스 강 유역을 점령했는데 20개의 속주 중 인더스 속주에서만 전체 세수의 32%를 거둬들였다. 그 다음가는 메소포타미아 속주에서 거둬들인 세수는 9%로 인더스 속주의 1/3도 되지 않았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보면 인도를 '모든 제국이 갈망하는 보물'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절대 과하지 않다. 다만 인도 입장에서는 자국을 물건 취급하는 표현이기 때문에 기분이 상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 같은 것도 마찬가지. 단, 후자는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6] 일본 제국 대영제국 챔피언(대전사,代戰士) 역할을 수행했다. [7] 대한민국에 번역, 출판되었다. 부제는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숨겨진 전쟁' [8] 프랑스는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한동안 보호관찰 신세였지만 3년 뒤 점령군이 철수하고 신성 동맹에 가담하면서 강대국 지위에 공식적으로 복귀했다. 이들 5개국이 당시의 강대국 반열에 있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오늘날에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다. [9] 특히 오스트리아 제국은 러시아 제국에게 빨리 강화협상 안 하면 참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상태라 대비를 안 할 수가 없었다. [10] 그나마 덴마크가 열심히 뜯던 발트해 관세는 짭짤한 수익을 자랑했다. [11] 무르만스크에 철도가 부설된 것은 제1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15년의 일이다. [12] 유럽의 환자 소리 듣던 퇴물 오스만 제국이지만 어쨌든 갈망의 도시를 쥐고 있는 한 보스포루스 해협을 오스만 협조 없이 러시아가 건너는 것은 꿈 같은 이야기다. 그리고 이렇게 잘 써먹던 길막용 환자는 처칠 군함 도둑질로 내던져졌다 수 만명 안작군은 덤으로 [13] 옛 페르시아 속담에 "왕이 미치면 캅카스로 전쟁하러 간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 [14] David MacKenzie, Turkestan's Significance to Russia (1850-1917), The Russian Review, Vol 22, Nr2 (1973), pp 173. [15] 그런데 이게 현대에도 별로 실현 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중앙아시아 쪽은 대책 없는 황무지다. 하물며 당대 수준으로는 거길 넘어서 유의미한 통행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자동차는 갓 생겨난 상태라 이용하기 어려웠고, 철도를 부설하려 해도 이런 황무지에 철도 부설이 만만한 일은 아니고 설령 부설한다고 쳐도 증기 기관차 운용에 필요한 물을 구하는 것부터가 난제였다. 물론 이것은 러시아나 러시아를 상대하는 영국이나 별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지도로 얼핏 보기에는 인도행 고속도로니까. [16] 이것 또한 현대에 와서도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판명났지만 역시나 당시에는 알 게 뭐야 취급. [17] 흥미롭게도 오늘날에도 인도와 맞닿은 지역은 여전히 분쟁 지역으로 남아 있다. [18] 석탄, 철 같은 산업혁명의 필수자원이 풍부하다. [19] 대영제국 세력권의 절정은 아프리카 종단 정책이 완성된 1890년대 이후이며 오히려 이전에는 더 작았다. [20] 현재까지 러시아가 계속 유럽 인구 1위를 차지한다. 1815년 러시아 제국의 인구는 4,200만명이었고 1907년에 이르면 인구가 1억 5100만명으로 1세기도 안 돼서 거의 4배 가까이 증가했다. [21]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사용한 전함들은 당시 영국 조선소에서 만들어 일본에 판매했던 최신형 전함들이었고 일본 해군의 장군들 대부분도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다. 거기에 전비 조달을 위해 발행한 일본 국채도 영국계 자본이 매입해 준 건 덤. [22] 동/중부 유럽 국가들의 독립 요구 외에도 러시아내 소수민족들의 거센 독립 요구가 여러 곳에서 터져나왔다. 이 중 유명한 것이 러시아의 캅카스 지방에서 일어난 체첸인들의 무장 독립운동인 체첸 전쟁이 있다. [23] 아이러니하게 일본 제국의 성장은 2차 대전에서 말레이 해전, 자바 해전, 실론 해전에서 처참하게 깨지고 재해권 상실과 대영제국 해체에 영향을 끼쳤다. [24] 동아시아로 한정하면 그레이트 게임의 최대 피해자가 된다. 그레이트 게임 때 일본 제국과 대영제국이 동맹 관계를 맺으면서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 통치권을 묵인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대한제국은 경술국치로 해체되고 해당 국가의 국민이었던 한민족은 35년 동안 식민지의 지옥을 맛보게 되었으며 해방 직후에도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남북분단을 맞이하고 대한민국과 북한 수립 이후 6.25 전쟁, 독재(남한 한정 1987년까지), 주변국들(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정치 및 외교적 개입을 비롯한 온갖 풍파를 겪는 등 그 여파는 21세기에도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25] 그레이트 게임의 끝을 알린 협상. [26] 당시 영국 왕이었던 조지 5세가 니콜라이 2세를 아꼈고 그래서 케렌스키 정부와 협상하여 니콜라이 2세 일가를 영국으로 들여오려고 했다. 물론 후술할 반대에 막혀서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그 일과 이후 니콜라이 2세 일가가 잔혹하게 총살당한 일 때문인지 알렉산드르 3세(니콜라이 2세의 아버지)의 황후였던 마리야가 영국에 망명하고자 하자 HMS 말버러 호까지 보내어 맞이했다. [27] 본래는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였지만 독일식 이름이라 윈저 왕조로 바꿨다. [28] '해전에서 승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경쟁국을 육상 위협에 골몰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