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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08:44:21

사라예보 사건

<colbgcolor=#b03><colcolor=#fff> 사라예보 사건
Assassination of Archduke Franz Ferdinand
파일:Postcard for the assassination of Archduke Franz Ferdinand in Sarajevo.jpg
발생일 1914년 6월 28일
유형 살인
발생 위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 사라예보 라틴 교 근처
가해자 가브릴로 프린치프
범행 동기 극단적 민족주의
피해자 <colbgcolor=#b03> 사망 프란츠 페르디난트, 호엔베르크 여공작 조피
영향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언어별 명칭[1]
{{{#!folding [ 펼치기 · 접기 ] <colbgcolor=#b03><colcolor=#fff> 영어 <colbgcolor=#fff,#222><colcolor=#000,#fff>Assassination of Archduke Franz Ferdinand of Austria[2]
보스니아어
세르보크로아트어
Сарајевски атентат
Sarajevski atentat[a]
프랑스어 Attentat de Sarajevo[b]
스페인어 Atentado de Sarajevo[c]
독일어 Attentat von Sarajevo[a]
헝가리어 Szarajevói merénylet[a]
러시아어 Сараевское убийство[d]
중국어 萨拉热窝事件[e]
일본어 サラエボ事件[e]
}}} ||

1. 개요2. 배경
2.1. 대세르비아주의의 대두2.2. 제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민족자유적 성향
3. 경과
3.1. 암살 당일3.2. 1차, 2차 암살 시도3.3. 3차 암살 시도의 성공3.4. 우연의 연속
4. 여파5. 관련자들의 이후 행보6. 여담7. 매체에서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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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작금(昨今)의 유럽은 화약고이고, 지도자들은 무기고 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뿐이야. 작은 불씨 하나가 우리 모두를 집어삼킬 전쟁을 일으킬 거야. 언제 그 폭발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서 일어날지는 말해줄 수 있지. 발칸에서 벌어질 저주받을 바보짓이 폭발을 일으킬 거야.
오토 폰 비스마르크[11]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추정상속인[12]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부인 호엔베르크 여공작 조피 세르비아 민족주의 단체 「젊은 보스니아」(Mlada Bosna)에 속한 19세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사라예보[13]에서 총격을 받아 암살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7월 위기가 촉발되었으며 그동안 각종 곪아 있던 외교 및 정치적인 문제가 연쇄적으로 터져나오면서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게 만든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2. 배경

2.1. 대세르비아주의의 대두

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끝나고 패배한 오스만 제국은 1878년 베를린 회의로 슬라브계 민족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발칸 지역을 잃었다. 기존에 오스만의 봉신국이었던 세르비아 공국, 루마니아 왕국, 불가리아 공국[14]은 완전히 독립했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역은 형식상 오스만의 영토로 남았으나 실질적으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이라는 이름으로 합병되었다.

당대 여느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세르비아 왕국은 때마침 민족주의의 열기가 꽃피기 시작했다. 문제는 세르비아뿐만 아니라 보스니아는 물론이고 헝가리 남부의 보이보디나에도 세르비아인들이 살았다는 점이었다. 세르비아인들의 입장에서 형제 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 보슈냐크인들과 크로아티아인들, 더 나아가 슬로베니아인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남서부에 넓게 분포했다. 범슬라브주의의 영향을 받은 대세르비아주의자들은 이들 남슬라브인들의 영역 모두를 남슬라브의 종주국인 세르비아가 차지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 결과는 세르비아의 대대적인 확장으로 이어졌다. 세르비아는 두 번의 발칸 전쟁을 거치며 1913년에는 마케도니아(현 북마케도니아)도 병합하여 크기를 두 배로 불렸다. 여기에는 범슬라브주의의 종주국인 러시아 제국이 뒷배를 봐주고 있었다. 원래 친오스트리아적이었던 세르비아 정계는 1901년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 국왕이 친러파들에 의해 암살되면서 점차 러시아로 기울어졌다. 이때 국왕을 암살한 이들이 바로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암살에도 관여된 검은 손이다.

세르비아 본국의 이러한 확장 열기는 오스트리아령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계 주민에게도 전달되었으며 세르비아 왕국은 러시아 제국과 함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양면에서 서서히 포위하는 형태가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느끼는 위기감은 나날이 커져 갔다.

2.2. 제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민족자유적 성향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위 계승자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1906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복잡한 민족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당시 관점으로는 상당히 진보적인 ' 대오스트리아 합중국'론을 제창했다. 이는 제국 내의 여러 민족에게 광범위한 주권을 부여해 독일계, 헝가리계와 동등한 대우를 보장하는 연방제 형태였다. 이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재정, 국방, 외교를 제외하면 사실상 별개의 국가나 마찬가지인 이중제국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이를 각 민족 단위로 확대하는 안이었다. 이는 독일(오스트리아)계와 헝가리계 민족의 기득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제국 내에서 특히 헝가리계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지만 반대로 루마니아계, 이탈리아계, 슬라브계 민족들에게는 당연히 큰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정책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있어서 제국을 존속시키는 데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였다. 당시 제국의 인구 분포를 보면 실질적인 지배 민족이었던 독일계의 인구는 25%를 넘지 않았으며 여기에 헝가리계를 합쳐도 50%가 안 되었다.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촉발되기 시작한 유럽의 민족주의 바람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온 유럽에 퍼진 지 오래였으며 이미 제국에서도 1848년 혁명의 영향으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일부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동등한 주권을 원하며 크고 작은 민족주의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독자적인 종교적 역사를 가진 체코 지역은 오스트로-슬라비즘[15]의 주축이었고 1848년 혁명 당시 제국에 충성하여 헝가리를 진압하는 데 앞장선 대가로 제한적으로나마 동등한 주권을 가지고 있던 크로아티아인들은 자신들의 주권 신장을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크로아티아 제국 방안을 지지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합중국론은 주류 민족인 독일계, 헝가리계 사람들에겐 그다지 달갑지 않은 제안이었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필수불가결한 선택과도 같았다.

그러나 세르비아 왕국의 입장에서 합중국론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세르비아는 오헝 제국 내부의 남슬라브계를 규합하여 자국으로 포함하기를 원했는데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합중국론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부 영토의 슬라브계가 제국에 우호적으로 돌아섰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당시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가 고령이었기 때문에[16]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황제로 즉위하는 것이 임박한 상황이었다. 이미 계승 1순위의 지위로도 이렇게까지 여론을 조성하였는데 정식으로 황제가 된다면 합중국론은 단순히 안건을 넘어 정식으로 실현될 것이라는 점은 불 보듯 뻔했다. 따라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페르디난트 대공을 저지할 필요가 있었다.

3. 경과

3.1. 암살 당일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군사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의 수도인 사라예보를 방문하기로 했는데 문제는 하필이면 그 날을 1914년 6월 28일로 잡은 것이었다. 이 날은 세르비아인들에게 치욕인 동시에 영광의 날로 1389년 1차 코소보 전투에서 패배하여 세르비아 왕국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한 날이자 제2차 발칸 전쟁에서 세르비아 군대가 튀르크인들에게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어 과거의 패배를 갚아준 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비도브난(성 비투스의 날)'이라고 부를 정도로 세르비아 사람들은 가슴 깊이 기억하고 있는 날이다.[17]

'젊은 보스니아'는 이때를 노려 그를 암살하기로 했고 검은 손이 그들의 공작을 도와주기로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날은 또 대공의 결혼 14주년 기념일이었다. 그리고 진정한 함정은 민족 불균형 문제 해결을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민족/언어권에 따라 행정 구역을 분할한 연방국가로 만들려 한, 즉 독일계와 황실의 기득권도 내놓는 대인배스런 발상을 한 장본인이 바로 이 사건으로 암살당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었다[18]는 것이다. 아래 항목을 보면 알 법하지만 위급한 상황에서 무한한 자비심을 보이는 등 페르디난트 대공은 굉장히 대인이었다.

1914년 6월 28일 대공 부처는 9시 20분 사라예보 역에 도착했다. 이후 황태자와 조피는 보스니아 총독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육군 대장과 함께 레오폴드 로이카(Leopold Lojka)가 운전하는 자동차에 올랐다. 한편 가브릴로 프린치프 등 검은 손 단원들도 권총 수류탄, 그리고 자살용 청산가리를 챙겨서 각자 자신의 위치에 배치되었다.

이날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아내인 조피와 굳이 동행한 것은 프란츠 본인의 강력한 의지에서 비롯하였다. 왕족 출신이 아니었던 조피는 엄격한 귀천상혼 제도로 인해 오스트리아 황실 내에서 큰 차별을 받았다. 공식석상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마주할 수도 없었을 정도였다. 프란츠는 이런 아내의 정치적인 위신을 높여주기 위해서 조피와 함께 참석했던 것이었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총감찰관[19]'이기도 했고 군사훈련 참관에 동석한다는 명목으로 아내도 참석할 수 있던 것이다. 참관 날짜가 결혼기념일인 것에는 이 점 또한 있었다.

3.2. 1차, 2차 암살 시도

대공 부처가 아펠 강둑[20]에 도착했을 때 첫 번째 단원인 무하메드 메흐메드바시치(Muhamed Mehmedbašić)[21]가 암살에 실패했다. 이후 10시 10분경 두 번째 단원인 네델코 차브리노비치(Недељко Чабриновић)가 기어코 수류탄을 던졌지만 차를 맞고 튕겨 나갔다.[22] 이때 수행원 2명과 구경꾼 10명이 다쳤다. 황당한 것은 네델코는 암살에 실패하자 자살하려고 바로 독약을 삼킨 후 옆의 강으로 뛰어들었는데 독약은 유통기한이 지난 물건이라 효과가 없었고 강은 말라서 깊이가 10센티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덕분에 바로 생포되고 곧이어 자백했는데 나머지 단원들은 폭탄 투척이 실패하자 암살을 포기했다.

이후 암살 시도에 분노한 대공은 시청에서 페힘 추르치치(Fehim Čurčić) 사라예보 시장에게 이 도시는 나를 폭탄으로 환영하냐고 따졌지만 아내 조피가 말려서 그만두었다. 이후 영접행사가 끝나고 그와 동승한 포티오레크 총독은 빨리 군사지역으로 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갑자기 대공이 폭탄 테러로 다친 수행원의 위문을 위해서 그들이 입원한 병원에 가 봐야겠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주변에서는 말렸지만 대공이 이를 강행했는데 아마 암살 시도로 인해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간의 갈등이 커지는 것을 막을 목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기에 의도는 좋았다. 하지만 이것이 대공 부처의 목숨을 앗아가고 말았다.

3.3. 3차 암살 시도의 성공

파일:Postcard for the assassination of Archduke Franz Ferdinand in Sarajevo.jpg
사라예보 시청에서, 대공 부처가 암살 몇 분 전에 찍은 마지막 사진
결국 포티오레크 장군은 암살을 피하기 위해 지름길로 가기로 했지만 정작 운전기사에게는 지름길로 가야 한다는 말을 알리지 않았다. 운전기사는 예정된 길로 갔고 포티오레크 장군은 길을 잘못 들었다고 운전기사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길이 V자 모양으로 되어 있는 밀랴츠카(Miljacka) 강의 라틴 다리에서는 반드시 서행을 해야 했고 후진을 하던 차에 멈추게 되었다. 그런데 그 때까지 작전에 아무런 참여도 하지 못하고 있던 프린치프가 하필 자기가 자주 가던 모리츠 실러(Moritz Schiller) 카페 주변을 서성거렸는데 갑자기 눈앞에서 대공 부처가 탄 자동차가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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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7월 12일 발행된 이탈리아 신문 삽화(La Domenica del Corriere)
결국 이 기회를 노려서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준비해 둔 FN M1910 자동권총을 꺼내서 자동차 앞에 뛰어들며 대공 부처를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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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당시 사용된 FN M1910. 현재 오스트리아 빈의 군사(軍史) 박물관(Heeresgeschichtliche)에 있다.
사실 당시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380ACP를 막을 수 있는 실크 방탄조끼를 입고 있었으며 이 방탄조끼는 1901년에 이미 알폰소 13세의 목숨을 살리면서 효용성을 입증한 바 있었다. 하지만 프린치프의 총탄은 방탄조끼가 아니라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목에 명중해 경동맥을 끊어 버렸기 때문에 이 방탄조끼는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프린치프의 첫 발은 대공을, 두 번째 발은 조피를 맞췄으며 피격 직후 대공 부처는 시청으로 옮겨졌다. 당시 운전기사 로이카의 증언에 따르면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조페를[23]! 조페를! 죽으면 안 되오! 아이들을 위해 꼭 살아주시오!”[원문]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조피는 시청에서 죽었고 프란츠 페르디난트도 몇 분 뒤에 승하하였다.

사실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두 번째로 노린 사람은 조피가 아니라 같은 차에 동승했던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보스니아 총독이었고 프린치프는 조피가 죽었다는 말에는 유감을 표명했다. 포티오레크 총독은 발칸 전쟁 이래 오스트리아에서 세르비아에 대한 위기감이 증가하자 이에 호응하여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 공동체 여럿을 탄압했기 때문이다.

3.4. 우연의 연속

원체 극적인 사건이었고 정말로 우연의 연속이라고 할 만한 사건이라 갖가지 역사적 가정(假定)이 가능하다. 당장 사건 당일에도 암살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분기점이 5가지가 있었다.
역사에 우연이 없다고는 하지만 어이없게도 이 5가지의 우연이 완벽하게 겹쳐져서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목숨을 잃었다 보니 만약 이 5가지의 우연들 중 단 하나라도 불발되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궁금해진다. 뿐만 아니라 당시는 이미 방탄조끼가 등장했던 시기였고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방탄조끼를 입고 있었다.[25] 하지만 공교롭게도 두 발의 총탄은 방탄복을 절묘하게 피해서 급소에 박히고 말았는데 하필 대공을 맞힌 한 발은 목을 맞혀 경동맥을 끊었다.[26]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암살하려고 모인 단원은 7명이었는데 그 중 단 두 명만이 시도했고 한 명이 성공시켰다. 그 한 명인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최후 위치. 한마디로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실패했더라면 그냥 그날 대공은 살았을 것이고 어쩌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어도 연기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암살 성공에 대해서도 대공 부처에겐 이보다 재수가 없을 수 없던 것이, 처음으로 암살을 시도한 네델코 차브리노비치가 투척한 폭탄에 부상을 당한 수행자 에리크 폰 메리치 중령을 보려고 대공은 진로를 바꿔[27] 병원으로 가자고 했는데 아무도 이걸 기사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다. 때문에 갈림길에서 지나쳐 버린 기사는 후진했는데 공교롭게도 마침 후진한 곳이 바로 프린치프 정면이었다.

역사가 존 키건 제1차 세계 대전불필요한 전쟁으로 규정했을 정도다. 존 키건처럼 극단적으로 말하는 이는 적지만 신두병 전 유고슬라비아 주재 한국대사는 "사라예보 사건이 세계대전까지 유발할 이유는 없었다."고도 말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가 사라예보 사건이 아니라면 다른 문제로 참전하려 했을지는 의문이다.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친독일 성향이긴 했지만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달리 국력에 제약이 있었고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발언권은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강하긴 해도 그도 많이 늙었고 프란츠 페르디난트 외에 후계자가 없었기에 황태자의 발언권 역시 무시할 순 없다. 만약 사라예보 사건이 아닌 다른 쪽으로 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면 오스트리아의 운명이 많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암살 사건에 의문과 의혹이 넘쳐나서 "혹시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전쟁을 빨리 일으키기 위해 일부러 이 암살을 계획한 것이 아닌가?" 하는 자폭 음모론이 생겼고 그걸 토대로 독일에서는 '사라예보'라는 드라마를 제작했다. EBS에서 사라예보 사건 발생일에 이걸 방영했다.

4. 여파

파일:hmw_039034.jpg
세르비아는 죽어야만 한다!
Serbien muss sterbien!
▲ 사건 이후 배포된 선전 엽서.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 널리 퍼졌던 반세르비아 구호를 담았다. 거대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단도와 폭탄을 든 유인원처럼 그려진 세르비아인 암살자를 주먹으로 내려치고 있다. Serbien(세르비아)와 sterben(죽다)의 발음상의 유사성을 이용해 각운까지 맞췄다는 점에서[28] 그 선동성이 잘 드러난다. #
대공 부처의 유해는 테게토프급 전함 SMS 비리부스 우니티스가 운구하여 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제위 계승자를 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당연하게도 격노했다.

사건이 일어난 당일 대공 부처의 죽음에 대한 분노와 민족적인 문제가 같이 터졌다. 당시만 해도 합스부르크 황실에 호의적이었던 사라예보의 보슈냐크인 크로아티아인들은 자체적으로 반세르비아 폭동을 일으켰다. 사라예보 성심 성당에 운집한 크로아티아인과 보슈냐크인 수백 명은 세르비아인들을 "독사", "야만적인 늑대 놈들"이라고 비난한 이반 샤리치(Ivan Šarić) 사라예보 대주교[29]를 비롯한 오스트리아 인사들의 강론에 격앙되어 곧 성당을 박차고 나가 세르비아계들이 운영하는 상점과 호텔 여러 곳을 파괴했다. 이 폭동은 다음날일 29일까지 이어졌으나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총독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 병력을 투입함에 따라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사라예보 외의 다른 도시들에서는 여전히 격앙된 반응이 주였으며 곳곳에서 반세르비아 폭동이 벌어졌다. 사라예보 사건으로 인해 세르비아인을 더욱 증오하게 된 제국 정부는 신민들의 분노를 방임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avrilo_Princip_captured_in_Sarajevo_1914.jpg
▲ 주범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가 체포되어 끌려가는 모습을 찍은 사진.[30]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avrilloprincip.jpg
▲ 프린치프의 머그샷. 얼굴을 보면 상처투성이인데 붙잡힌 직후 너무 많이 구타당했기 때문이다.

암살범인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그 자리에서 수행원에게 붙잡혀서 그야말로 완전히 초주검이 되도록 심하게 구타 당한 뒤 군 영창으로 보내졌고 이후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수사 과정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정부는 세르비아와 프린치프가 속해 있던 검은 손의 관계를 알고 세르비아 정부에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건 직후 곧바로 전쟁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사라예보 사건부터 오스트리아의 선전포고 발표까지는 정확히 한 달이 걸렸다. 훗날 7월 위기라고 불리는 이 한 달 간의 안보 위기에서 열강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발칸의 갈등은 전 유럽과 세계를 집어삼키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번졌다.

전쟁이 벌어지자 오스트리아 제국 정부는 곧바로 보슈냐크인들로 구성된 보안대를 조직하여 세르비아인들에 대해 인종 청소를 벌였다. 주로 한데 모아 단체로 목을 교수대에 매달아 버리는 방식이었다. 대전 말까지 오스트리아군 불가리아군의 대량 학살로 인해[31] 최소 100만의 세르비아인들이 살해된다.

5. 관련자들의 이후 행보


이 사건의 주범이었던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전 세계의 수백만 명이 전쟁터로 끌려가서 죽어 가는 끔찍한 비극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 테레진슈타트[32] 교도소에서 지냈다. 오스트리아 정부도 가브릴로를 사형시키고 싶었지만 당시 오스트리아의 법에 따르면 만 20세가 넘어야만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할 수 있었는데 가브릴로는 범행 당시 만 20세에 27일이 모자라서 미성년자인 관계로 사형을 선고할 수가 없었다. 대신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감형 사유를 적용하고 징역 20년이 확정되었다.

가브릴로는 체포 과정에서 입은 상처를 잘 치료하지도 못한 채 독방에 감금되었고 외부와 단절된 환경을 버티지 못하고 허약해져 지독한 결핵과 함께 합병증으로 피부궤양까지 앓게 되면서 결국 자살극을 벌이기까지 하다가 1916년 정신과 의사와 면담을 하게 되었다. 가브릴로는 세계 대전이 일어날 줄은 알았다고 하지만 그 대전을 자기가 일으켰다는 사실에는 동요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특히 면담 당시 세르비아는 붕괴하여 전 국토가 점령을 당하는 국난을 겪는 중이었고 이 소식을 접한 가브릴로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가브릴로는 1918년 교도소 안에서 유대인 의사의 치료를 받다가 끝내 병사했다.

가브릴로 말고도 다른 공범 4명이 더 있었고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증언에 따라 주동자들이 하나 둘 체포되면서 재판으로 넘겨졌는데 이들 역시 암살 계획에만 가담했고 피살자가 없다는 이유로 모두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암살을 저지른 프린치프가 사형이 아닌 판국에 이들을 처형하는 것 자체가 무리수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네델코 차브리노비치도 가브릴로 프린치프처럼 1916년 교도소 안에서 21살에 병사했으며 다른 3명도 교도소에서 갇혀 지내야만 했다. 차브리노비치는 죽기 전에 암살자들 중 유일하게 심경 변화를 일으켜 암살을 후회하고 사죄한다고 밝혔고 그 소식을 들은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유자녀들이 그에게 편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 1명인 바소 추브릴로비치(Васо Чубриловић)는 16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차 대전이 끝나고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 들어서면서 살아서 석방되었고 1939년 베오그라드 대학 교수를 지냈다가 나치에 의해 수용소로 끌려가기도 했지만 공산혁명이 일어나자 유고 연방에서 영웅으로 칭송받으면서 유고슬라비아 정치인으로 활동했고 농업장관과 삼림장관까지 지냈다. 이후 60년이나 더 살다가 1990년 6월 11일 향년 93세로 병사하면서 범인들 가운데 가장 장수했다. 본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유고슬라비아 전쟁만큼은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33] 아이러니하게도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말년에는 청년 시절의 이념들과 거리를 뒀고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암살을 후회하는 말도 했다고 한다.

암살에서 겨우 목숨을 구한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총독은 대공 부처의 암살을 막지 못한 죄책감에 계속 괴로워했고 제국 정부에서 주전파로서 세르비아에 대한 전쟁을 주장했다. 이후 술에 의존하다가 제1차 세계 대전 패배 이후 군직에서 완전히 물러나 낙향한 뒤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죄책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던 이유가 포티오레크 본인이 이 사라예보 방문을 실무적으로 추진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대공 부처의 위신도 살려주고 본인도 대공에게 '점수'를 딸 겸 행한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보니 대공 부처를 프린치프 앞으로 데려가 버린 운전사인 레오폴드 로이카는 어디까지나 명령에 따라 운전을 한 것 뿐이라서 따로 처벌을 받지 않았다. 대신 도의적인 책임으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가족, 빌헬름 2세에게 사과문을 썼다. 이후 프린치프의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했다. 카를 1세에게 퇴직금을 받고 은퇴했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는 독립한 체코슬로바키아 브르노(Brno)에 황제에게 받은 퇴직금으로 여관을 차려서 살았다. 가끔 여관 손님들에게 사라예보 사건 때 우연히 구한 조피와 페르디난트의 유품을 구경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1926년에 병으로 겨우 향년 39세로 요절했다. Leopold Lojka(영어 위키백과 문서)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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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시절에 사건 장소에 있던 명판의 모습이다. 사진은 1987년에 촬영되었다. 명판의 내용은 "1914년 6월 28일 이곳에서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사격으로 폭군에 대한 인민의 항쟁과 수 세기에 걸친 우리 인민의 자유를 향한 열망을 드러내었다."이다. 프린치프가 대공을 저격할 때의 발자국 모습까지 본을 떠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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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명판과 발자국은 보스니아 전쟁 때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파괴되었고 새 명판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글자도 키릴 문자 대신 라틴 문자로 바뀌었으며 명판의 서술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이 자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대공 부처를 암살했다는 사실관계만 적어 중립적으로 바뀌었다. 티토 사후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이 유고슬라비아 권력을 독점하고 각 민족들을 억압하면서 사라예보가 속한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인들의 보슈냐크인 대학살을 한 것이 주 원인으로 당연히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이 벌인 사라예보 사건의 평가도 박해진 것.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전쟁으로 유고슬라비아가 여러 국가로 사분오열되면서 인식이 더 나빠졌다.

20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 10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구 유고슬라비아와 세르비아인들 중에는 주범 프린치프를 영웅으로 기리는 쪽도 있지만 반세르비아 감정이 강한 크로아티아인 보슈냐크인 쪽에선 테러범으로 비하하는 인식도 있는 듯하다. 기사 기념식의 일환으로 이날 오스트리아에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프란츠 벨저-뫼스트가 초빙되어 암살 장소 근처에 있는 사라예보 국립 도서관 로비에 마련된 특설 무대에서 공연을 가졌고 이 실황은 2015년 5월에 소니 클래시컬에서 DVD로 발매되었다. 관련 사이트

사건 100주년인 2014년을 맞아 동사라예보[34]에서는 프린치프의 동상이 제막됐다. # 모습 그리고 2015년에는 "스릅스카의 세르비아인들이 세르비아에 보내는 선물"로서 베오그라드에도 프린치프의 동상이 세워졌다. #

7. 매체에서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사건이라 매체에 등장이 제법 된다.

이케다 리요코의 만화 오르페우스의 창에서도 짧게 지나가듯이 등장하는 사건이다.

소설 워 호스에서 주인공이 조이에게 어디 늙은 공작이 총 맞아 죽었는데 그것 때문에 전쟁을 한다고 짧게 언급된다.

2014년 덴마크 만화가 헨리크 레르가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삶에서 사라예보 사건까지를 조명한 그래픽 노블 <가브릴로 프린치프>를 내놓았으며 한국에도 정발되었다. 만화 자체는 대단한 수작인데 이원복 교수가 서평을 쓰면서 이를 단순히 제국주의 수괴에 대한 식민지 청년의 통쾌한 의거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바람에 역덕후들에게 한소리 들었다. 책 내용부터가 그런 내용이 아닌데...

티미의 못말리는 수호천사에선 과거에 코스모 완다가 맡았던 아이들중 하나인 메리앤이라는 소녀가 빈 소원때문에 벌어진 사건으로 나왔다. 당연히 이런 대형 사고를 저지른 메리앤은 그대로 그 둘과 강제로 헤어지게 된다.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에서는 원래는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폭탄으로 죽일려고 했으나 콘래드 옥스포드의 활약으로 실패한다. 그런데 가브릴로가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하려고 할 때, 하필 그 앞을 대공 부처가 차를 타고 지나가게 되었고, 이때를 놓치지 않고 실제 역사대로 총으로 쏴죽인 것으로 나온다.

역사저널 그날 등 역사 채널에서도 이 사건에 대해 방영했고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에서도 방송했다.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주인공의 개입으로 폭탄만 터지고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면서 암살미수로 그친다. 그러나 가브릴로 프린치프 역시 살아남아 얼마 후 보스니아 총독 오스카르 포티오레크를 암살하는데 성공한다. 보스니아 총독이 아무래도 프란츠 페르디난트보다는 급이 떨어져서인지 전쟁을 일으켜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덕분에 원래 역사와 달리 전쟁이 7주 늦춰진다. 전후에도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살아남아 도나우 연방을 만드는 등 역사의 변화가 생겼다.

고종, 군밤의 왕에서는 사건이 몇 년 일찍 벌어졌는데,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도착하기 전 니콜라 테슬라의 '자해공갈 겸 즉흥적인 신상 호신용품 판매 쇼케이스'로 인해 흑수단이 단상에 난입하다 테슬라의 호신용품에 맞고 줄줄이 나가떨어지며 와해되어 버리는 바람에 페르디난트 암살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한편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행진 도중 행진일의 의미를 깨닫자 사라예보 시민들에게 사과하고 시민들도 페르디난트의 사과를 받아들이면서 성 비투스 축일은 그럭저럭 잘 마무리되었다. 때문에 전쟁의 도화선은 러시아 혁명 러시아 내전이 되었다.

화약고 제국의 천재 대공에서는 주인공 카를 1세가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동행하다, 먼저 가브릴로 프린치프를 쏘아 암살당하는 사건은 없었지만 다른 이가 폭탄을 던졌고,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카를을 구하려다 둘 다 부상을 입었다. 치명적이지는 않았지만 프란츠 페르디난트에게 흉터와 후유증이 남아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즉위 이후 몇 년만에 카를에게 양위하는 계기가 된다. 한편 세르비아는 제국의 차기 계승자인 대공을 두 명이나 암살하려 했다며 분노한 오헝에게 얻어터지고, 1차 세계 대전으로 확대된다. 대전 이후 오헝과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발칸 동맹국에게 사방으로 두들겨맞고 패전한 세르비아는 오헝과 루마니아, 불가리아에게 분할된다.

카이저를 구했다에서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아니라 무려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죽었다. 작중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실제 역사보다 더 사회 활동을 열심히 했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황제가 대신 사라예보에 갔다가 죽은 것. 합스부르크 가의 프란츠가 예정대로 사라예보에서 죽긴 했는데, 그 프란츠가 아닌 셈.

2014년 사건 100주년을 맞아서 독일, 체코, 오스트리아가 합작 제작한 영화인 '사라예보'에서는 이 사건의 배후에 독일, 오스트리아 정부가 개입했다는 설정을 담고 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정부는 배경이 어떻든 간에 처음부터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었고 여기에 마침 흑수단이 사건을 일으킨 것.

8. 관련 문서


[1] 보통 이 사건을 부를 때 영어권을 제외하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보다는 ‘사라예보 사건’으로 부르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당사국인 보스니아나 세르비아는 물론, 영어를 제외한 대다수 언어권에서 피살 대상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보다는 사건 발생지인 사라예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자문화권에서는 일본에서 サラエボ事件으로 부르던 것이 한국, 중국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2] 영어 위키백과의 사라예보 사건 문서명이다. 번역하면 ‘오스트리아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사건’. [a] 사라예보의 암살 [b] 사라예보의 테러 [c] 사라예보의 총격 [a] [a] [d] 사라예보의 살인 [e] 사라예보 사건 [e] [11] 비스마르크의 시대가 끝난 이후 유럽의 미래를 내다본 예언으로 비스마르크는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나기 16년 전인 1898년에 사망했다.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어록" 문단에 들어가 있으며 독일어로 된 기록은 있지도 않은 것 같다고 하며, 윈스턴 처칠은 알베르트 발린이 비스마르크가 죽기 1년 전에 "언젠가 유럽의 대전쟁은 발칸의~"라는 좀 더 간략한 버전으로 했던 말이라고 했다고 주장했고, 위의 전문은 안드레이 나브로조프가 1878년 베를린 회의 때 한 말로 인용했다고 서술되었다. [12]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공식적인 황태자는 아니었다. 오스트리아의 황태자였던 루돌프가 자살하면서 황위 후계자 자리가 공석이 되었고 그 자리를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승계하지는 않았지만 황위 계승 서열 1위였으므로 추정상속인이 된 것일 뿐이다. 게다가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사이가 극악이었기 때문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황제로 즉위하기 이전에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미리 손을 써 뒀을 것이라는 말도 있고 일부 음모론자들은 사라예보 사건이 바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뒷공작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13] 당시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으며 1918년 독립 이후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속했다가 1990년대의 유고슬라비아 전쟁 이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영토다. [14] 이후 1908년에 왕국으로 국체를 변경했다. [15] 제국 내에 소속된 슬라브족들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 내에서 동등한 민족적 주권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사상. 1917년까지 체코인들의 다수는 헝가리의 견제와 독일계의 무시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로-슬라비즘을 지지했다. [16] 1914년 당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나이는 무려 84세로, 당시뿐만 아니라 21세기 기준으로도 초고령으로 간주될 만한 연령이었다. 얼마나 오래 즉위하였는지 당시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50대였을 정도. 실제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제1차 세계 대전 도중 사망했고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황제인 카를 1세가 즉위하였다. [17] 노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페르디난트 대공은 이중제국을 대오스트리아 합중국으로 개편해 민족/언어권에 따라 행정권 분할을 위해 헝가리 쪽 인사들과 씨름 중이었기 때문인데 당연히 이 계획은 세르비아계 주민들에게는 큰 호재였지만 오히려 극단주의자들을 자극하는 역효과 역시 낳고 말았다. 결국 결과가 정말 나쁘기 그지 없었지만 말이다. [18] 알렉산드르 2세의 경우처럼 온건파가 오히려 양 극단의 공격을 받기 쉽다. [19] Generalinspektor der gesamten bewaffneten Macht [20] Appel quay. 아펠 키로 발음된다. [21] 이후의 인생이 기구한데 암살 시도 이후 탈옥을 실행했다가 몬테네그로 왕국에서 붙잡혔다. 1919년에 사면받았지만 1943년 우스타샤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22] 여기에 또 다른 설이 있는데, 단순히 운전수가 폭탄을 알아채고 급가속하여 빗나갈 수 있었다고 하는 설과 대공이 폭탄을 도로 던져 무사할 수 있었다는 설이 있다. [23] 조피의 애칭 [원문] "Sopherl! Sopherl! Stirb nicht! Bleib' am Leben für unsere Kinder!" [25] 현대적인 케블라 방탄복은 아니었고 비단 재질이었다.(천연섬유 중에서는 비단이 제일 튼튼하다.) 소총탄이나 고위력 권총탄은 막을 수 없었지만 이 암살에 사용된 .380 ACP와 같은 호신용 권총탄 정도까지는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26] 뇌로 혈액이 통하는 혈관인 만큼 끊어질 경우 몇십 초도 버티지 못한다. [27] 대공을 수행하던 포티오레크는 이미 암살 시도가 벌어졌으니 빨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주둔지로 몸을 피해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문병을 가겠다는 대공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대공이 어리석었다기보다는 위의 일화들을 볼 때 지나칠 정도로 대인배적인 성품이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28] 독일어 동사 '죽다'의 옳은 표기는 'sterben'이지만, 여기서는 sterbien이라 적음으로써 앞의 세르비아(Serbien)와 운율을 맞추었다. [29] 크로아티아인으로, 훗날 우스타샤에 협력했다. [30] 맨 오른쪽에 보이는 제복 입은 사람들에게 양팔을 잡혀 있는 사람이 프란치프이다. [31] 불가리아 왕국의 경우에는 그토록 원했던 마케도니아를 발칸 전쟁에서 세르비아에 빼앗긴 후 이를 갈았다. 세르비아는 새로 얻은 마케도니아에서 강압적인 세르비아화 정책을 폈고 이는 불가리아계 주민들 역시 대상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당시 불가리아 국왕 페르디난트 1세는 공공연히 '나의 소망은 세르비아의 파멸'이라고 외치고 다니면서 복수를 부르짖었다. 불가리아군은 1차 대전 당시 세르비아 점령구역에서 국왕의 바람을 그대로 실현한다. [32] 지금의 체코 북부에 있는 테레진(Terezin). 테레진슈타트(Theresienstadt)는 독일식 이름이다. [33] 사망한 지 고작 1년도 채 안 된 1991년 3월 31일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을 일으킴에 따라 유고 전쟁이 발발한다. 추브릴로비치 등 사라예보 사건의 주도자들은 세르비아인보다 더 큰 단위의 남슬라브족을 모두 아우르는 민족국가를 원했다. 유고슬라비아는 그들이 지향하던 남슬라브인의 민족국가에 아주 근접하는 데 성공했던 국가였고 따라서 추브릴로비치 일행의 입장에서는 유고슬라비아야말로 본인들의 조국이라고 여길 만한 나라였다는 것. 남슬라브 민족주의의 정착 실패에 대해서는 유고슬라비아 문서나 유고슬라비아 전쟁 문서에 설명되어 있으며 세르보크로아트어 문서 등도 참고할 만하다. 또한 요네자와 호노부 안녕 요정 역시 남슬라브 민족국가운동의 처참한 말로를 소재로 삼고 있으니 흥미 있는 사람이라면 봐도 나쁘지 않다. [34]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땅이지만 세르비아계 구성체인 스릅스카 공화국 소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