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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니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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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의상 북아프리카도 포함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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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어 يڭيچرى
튀르키예어 Yeniçeri
아랍어 إنكشاري
영어 Janissary

1. 개요2. 창설 배경3. 모집4. 특징
4.1. 편제
5. 몰락6. 메흐테르7. 기타8. 기타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14세기부터 생긴 오스만 제국군의 최정예 부대 겸 술탄 근위대. 예니체리란 본래 튀르크어 예니센에서 유래한 것으로, 새로운 군대를 뜻하는 말이다. 영국의 신식군(New model army), 19세기 중국의 신군 등과 대응하는 단어라 봐도 된다.

흔히 오스만 베이국[1]의 3대 술탄 무라트 1세 때에 창설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일부 학자들은 2대 술탄인 오르한 1세 때에 창설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근대 이전의 오스만 전성기에는 황제의 직속 부대 겸 치안을 유지하는 부대로 엄청난 명성을 떨친 군사 조직이었으나 오스만이 유럽에 뒤쳐지고 군사적 우위를 인정해 유럽식 군대를 창설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는 18세기 말에 들어서는 오히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반발하여 오스만군 근대화의 걸림돌이 되었다.

결국 마흐무트 2세 시대인 1826년에 신식 군대 창설에 반대하여 이스탄불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마흐무트 2세에게 모두 진압된 후 부대가 해체되었다.

2. 창설 배경

예니체리 창설 배경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크게 군사적 배경과 사회적 배경으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96px-OttomanJanissariesAndDefendingKnightsOfStJohnSiegeOfRhodes1522.jpg
16세기 쉴레이만 1세의 일대기인 쉴레이만나메의 삽화에서 구호기사단 로도스 성채를 공격하는 예니체리 부대.
먼저 군사적인 측면을 보면, 오스만 제국의 창건자인 오스만 1세 당시의 오스만군은 오스만이 거느린 여러 유목민 집단들로 이루어진 군대로 체계화된 조직을 갖춘 군대라고 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먼저 술탄의 명령 한마디에 출동하기는커녕 '이번에 어디어디를 쳐야 하니 모여라!' 라고 소집부터 먼저 해야 했고, 투르크인이 본래 유목민족들이다 보니 그렇게 모인 병사들도 거의 대부분 경기병들이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이렇게 되다 보니 야전은 몰라도 공성전에서는 애로가 꽃피었는데, 실제로 니케아 니코메디아를 함락하는 데 무려 30년 가까이 걸리기도 하였다.[2] 따라서 오스만 베이국으로서는 상비군이. 그것도 보병의 형태로 필요했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예니체리 부대였다.

한편 사회적인 측면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오스만 1세 시대의 오스만 베이국에 대해 짧게 알아보아야 한다. 당시 아나톨리아 반도에는 오스만 베이국과 마찬가지로 투르크인들이 세운 여러 소국들이 난립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유독 오스만 베이국이 두각을 드러내었던 것은 적절한 기회가 주어졌고 그것을 충분히 활용했던 덕이었다.

칭기즈 칸의 출현으로 몽골이 급속도로 세력을 확대, 바그다드를 함락[3]하고 룸 술탄국을 사실상 멸망시키면서, 아나톨리아 바깥과 동부 아나톨리아에서는 대규모 난민이 발생했다. 이들은 몽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군사적으로 유능한 오스만이 통치하는 오스만 베이국이었던 것. 특히 이 난민들 가운데에서는 고향을 잃어 새로 정착할 땅을 찾는 성직자와 학자는 물론 몽골이 미쳐 날뛰고 있어서 일단 후퇴하긴 하지만 이슬람의 세력을 확대하는 것이야말로 자신들의 소명이라고 믿는 가지(Ghazis)들[4]도 많았는데, 이들의 입장에서 동로마 제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데다 동로마를 주적으로 선포하고, 또한 군사적인 재능도 훌륭한 오스만이야말로 받들 만한 주군으로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오스만 베이국 군주의 입장에서, 성직자와 학자, 가지들이 합류해오는 것은 반가운 일인 동시에 곤란한 일이기도 했다. 지금 당장은 이들의 지원이 강력한 힘이 되지만, 오스만 입장에서도 가지들이 원하는 전쟁을 일으키기엔 부담이 심했으며, 이들이 세습적으로 권력을 갖다 보면 군주의 지위를 흔들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오스만 베이국은 세습되지 않는 관료층과 장교층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그 결과 등장한 것이 예니체리와 데브시르메 제도[5]였던 것이다.

3. 모집

처음에는 전쟁 포로 노예 등으로 만들었으나, 곧 데브시르메(Devşirme) 제도를 만들어 점령지의 기독교 가정에서 남자 아이를 징집해서 충원했다. 그리스어로는 아이 모으기라는 뜻의 페도마조마(Παιδομάζομα)라고 부른다. 원래 발칸 반도 일대에서 징집했으나, 오스만의 점령지가 늘면서 징집을 하는 지역도 늘어났다.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의 세계사 교과서를 비롯한 일부 책들에서 데브시르메란 "기독교도 가정의 아이를 납치하는 것"이라고 써놓기도 했다. 실제 징집은 선발 담당 관리가 각 마을을 돌면서 마을마다 10 ~ 20세 사이 소년들을 모두 모아놓고 가장 뛰어난 소년을 선발해서 데려가는 방식으로 이뤄졌다.[6] 출세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방법이라 자기 자식을 보내기 위해 뇌물을 바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인간 세금"이라 부르며 혐오하거나 자식을 숨기는 등 반발도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납치 모병이나 노예로 구매하는 징집 방식은 이슬람 왕조들의 맘루크 제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재밌게도 맘루크의 이름을 계승한 이집트 맘루크 왕조는 맘루크 제도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예니체리에게 마르즈 다비크 전투에서 패하면서 멸망하게 된다.

이렇게 징집된 아이는 이슬람 개종은 기본이고, 튀르키예어를 배우면서 각종 훈련과 교육을 받았다. 자신의 부대원을 가족 같이 생각하며, 술탄을 자신의 아버지 같이 생각하듯이 추종하도록 교육을 받기도 했다. 데브시르메는 단순히 예니체리만 징집하는 제도가 아니었으며, 가장 성적이 좋은 자는 황궁 직속으로 편입되거나 고위 관료로서의 커리어를 밟아 나갔다. 그 다음 군사 부문에서 성적이 좋은 자는 카프쿨루 시파히, 예니체리가 되며 다른 부문의 교육을 받은 자는 관료나 성직 분야로 빠지는 식이었다 개종하고 터키어를 배운 소년들은 황궁에 딸린 아제미 오을란(acemi oğlan)이라는 학교[7]로 보내지는데, 이때 군인에 적합한 자, 관료에 적합한 자, 예술가에 적합한 자 등등이 나뉘어진다.

데브시르메 출신자는 명목상 술탄 노예였으며, 오스만 제국이 강성해지는 과정에서 튀르크멘 부족장, 귀족들을 대체하는 새로운 지배 계급으로 육성되었다. 이 데브시르메 출신자들은 쉴레이만 1세처럼 술탄 개인이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하고 정복 전쟁이 활발했던 15 ~ 16세기에 가장 강성했으나, 제국의 확장이 둔화되고 전쟁보다는 통치 기술이 중요해진 17세기 이후로는 수도 코스탄티니예를 기반으로 한 관료 귀족들에게 점차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사실 이 관료 귀족들도 기원은 데브시르메 출신 관료들이었으나, 고위직에 오른 뒤 재산과 인맥, 기술 등을 쌓고 이를 세습하면서 점차 귀족 가문처럼 변질된 것이다. 비슷한 시기 예니체리도 지원제로 바뀌며 점차 세습되기 시작했고, 데브시르메를 통한 징집은 유명무실해진 끝에 1703년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발칸 반도에서는 야니차리라고도 불리었다. 이스탄불차리그라드라 불렀고, 징집되어 납치된 소년들이 성장하여 오스만 제국의 군인이 되어, 고향 땅을 관리하는 관리자가 되어 돌아오게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에 '차리그라드에서 돌아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야니차리'라 불렀다고 한다.

4.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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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술을 비롯한 각종 무기들을 능숙하게 다루도록 훈련받았다. 초기에는 활을 주 무기로 하고 할버드, , 도끼 등을 부무장으로 사용했으나, 머스킷을 도입한 뒤에는 활 대신 머스킷을 주 무기로 사용하게 되었다. 유럽 국가보다 훨씬 빠른 1440년경에 머스킷을 제식 채용[8]했다고 한다. 유럽 군대와는 달리 화망을 짜서 사격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적을 조준해서 쏘는 방식을 사용했다. 또한 수류탄이나 대형 화포도 일찍부터 많이 사용했고, 17세기 말이 되면 유럽 군대와 마찬가지로 플린트락으로 무장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총검은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병사 개인의 무용을 중시하였던 예니체리들은 검을 선호하였다.

주 임무는 전장에 친정하는 술탄의 호위. 다가오는 적을 활이나 총으로 격퇴하거나, 또는 아군 기병이 뒤로 빠진 이후 달려오는 적병을 막아서는 역할도 했다. 훈련 기간이 긴것 답게 싸움 실력도 좋고 사기 역시 매우 높았다고 한다. 또한 폭파나 기술자, 굴파기 부대나 공병, 지정 사수 등의 특수 임무를 맡은 소규모 조도 운영했다. 아예 군의관에 요리사, 예니체리 전용 물자 보급반까지 딸려 있을 정도. 지극히 비효율적인 짓이긴 하지만, 순수 예니체리 부대만으로 군사원정을 벌이는 것도 가능했다는 이야기다. 그 외에도 평상시에는 헌병 겸 황궁 호위병, 소방관 노릇도 했다. 오스만 제국의 대규모 원정에는 반드시 참여했고 전공도 많이 세워서 오스만 제국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예니체리도 서유럽에서는 ' 악마의 군단'이라는 식으로 악명을 떨쳤고, 제국 내에서도 정예병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고위급에 올라서 제대로 퇴직을 하는 일부를 제외하면 결혼도 못 하고 평생 군대에 붙잡혀 있는 인생을 살았기에 개인적인 삶이 별로 좋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직업군인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만큼 그에 따른 보상이 철저해야만 군대에 붙잡아둘 수 있었으므로, 보수와 사회적 지위도 상당했지만 처자식도 없는 군인이 돈 잘 벌어 봐야 무슨 재미로 인생을 살겠는가?

후술되듯 정부 입장에서는 어지간한 인재가 아니고서는 결혼시켜서 그렇게 좋을 거 없긴 하다. 최하층 집단에서 자질만 보고 뽑아와서 충성심으로 기른 집단인데 후손을 남기게 되면 예니체리로 인한 신분상승자와 새로운 예니체리가 점점 쌓이는 신분 적체현상이 생기거나, 예니체리 자손들에서 예니체리를 뽑으므로 여러 표본 집단에서 자질과 의욕이 뛰어난 젊은이들만을 가려뽑아 입맛대로 훈련시킨다는 근본적 강점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하층민인 기독교인 짐미로 사는 것보다야 나은 셈이고, 전근대 사회에서 출세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방편이라는 의의는 있었다. 이 항목의 제목이 예니체리다 보니 예니체리에 대해 중점적으로 서술했지만, 상술했듯이 데브시르메로 뽑히면 군인뿐만 아니라 기술자나 예술가, 관료가 될 수도 있었다. 즉, 머리만 좋다면 자신의 고향에 총독 각하로 부임하거나 아예 재상까지 승진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4.1. 편제

5. 몰락

나중에 결혼이 허가되고 무슬림도 지원이 가능하게 바뀌며 예니체리 지위가 세습되고 수도 크게 늘어나는 등[13] 여러 가지 변화를 거쳤는데, 그 결과 예니체리들은 강력한 군사집단에서 기득권을 지키는 데 혈안이 된 이익집단으로 변모해 버렸다. 심지어 상공업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거의 마피아나 다름없는 짓거리를 보이기도 했다. 사실 예니체리들이 이권을 지키기 위해 단체행동을 하거나 반발하는 것은 그전부터 있었던 일이었으나, "세습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 때문에 문제가 심각해졌다. 특히 1637년에 비(非) 무슬림 백성 중에서 소년들을 차출하여 엘리트 병사로 훈련시키는 데브시르메 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자 예니체리는 세습과 지원으로 충원되기 시작해 세습화가 더욱 심해진다. 나중에는 그 결과 전투력은 갈수록 떨어졌고, 1621년 호틴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맞설 때 12만 대군을 동원하고도 졸전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하필 상대가 키르홀롬의 영웅 얀 카롤 호드키에비치였다는 것과 총사령관 오스만 2세가 너무 어려서 성급했다는 것도 한몫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당시 예니체리가 쓸 만했던 것도 아니다.

이러한 예니체리들의 추태를 보고 열받은 오스만 2세는 예니체리 제도를 개혁하려 했으나 예니체리들은 선수를 쳐서 오스만 2세를 살해해 버렸고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오스만 2세의 삼촌인 무스타파 1세를 복위시켰다. 이후 예니체리들은 술탄도 무시하는 군사력과 제국의 내정까지 주무르는 정치력을 가진 강력한 집단이 되었고, 오스만 제국의 자랑이자 술탄의 적들에게 공포를 안겨주던 존재에서 술탄에게 공포를 안겨주는 존재로 변질되었다. 1622년과 1631년에는 아예 낮은 임금에 불만을 품은 예니체리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이들에 대한 신뢰는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14] 이런 예니체리들은 때로 이스탄불을 약탈하는 짓까지 서슴치 않을 정도로 타락해 군인으로서의 신념도 완벽하게 잊어버렸다.

19세기 초에 보다못한 셀림 3세가 이들을 없애려 했지만 실패해서 오히려 폐위, 암살당했다. 셀림 3세의 사촌 동생인 마흐무트 2세가 즉위한후 18년을 기다려셔야 예니체리를 해체하게 된다. 당연히 예니체리들이 가만히 있진 않고 1826년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신식 군대가 교전에서 그들을 압도해 코스탄티니예 내 병영으로 몰아넣고 신식 대포 15문의 막강한 화력을 퍼부어 예니체리 상당수를 학살했다. 이 사건을 '상서로운 사건'이라 부른다. 그 후 2년여에 거친 잔당 토벌 끝에 살아남은 예니체리들 수천 명이 처형당했고, 일부는 유배되거나 신식 군대에 편입됐다. 예니체리의 라이벌이었던 시파히는 유혈사태 없이 순순히 해산되어 신식 군대로 편입된 것과는 대조적이다.[15]

6. 메흐테르

예니체리에 속해 있었던 군악대메흐테르는 세계 최초의 군악대로 인정받고 있다. 왜 그렇냐면, 이들은 그때까지의 다른 군악대처럼 신호를 주고받기 위해서 악기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사기를 북돋기 위해 음악을 연주한 최초의 군악대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선에서도 연주했다고 하며, 가끔은 유럽 군주들이 초청해서 그 앞에서 연주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예니체리는 해산되었지만 이들 메흐테르 군악대는 명맥을 유지해서[16] 이스탄불의 신시가지인 하르비예에 있는 군사박물관(아스케리 뮈제시 Askeri Müzesi)[17]에서 매일 3~4시 동안 연주를 한다.


2010년엔 한국에도 왔었다. 사실 원주 따뚜에도 그렇고 한국을 여러 차례 찾아왔었다.


대표 군가 중 하나인 ''그대의 조상, 그대의 할아버지, 그대의 세대, 그대의 아버지(Ceddin Deden Neslin Baban)'.[18] 문명 5에서 오스만이 등장했을 때 배경 음악으로 사용되었던 곡이기도 하다. 2010년대 후반들어서 으로 유명해졌다.

가사를 보면 오스만 제국 시대 곡이라기에는 지나치게 근대 민족주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사실 원래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가사 없이 기악으로만 연주되던 곡이었고, 가사는 20세기 초 튀르키예 독립 전쟁 시기에서나 쓰인 것이다.
가사:

1절
Ceddin, deden, neslin, baban (X2)
젯딘 데덴 네슬린 바반 (X2)
네 선조도, 네 할아버지도, 네 동세대도, 네 아버지도 (X2)

Hep kahraman Türk milleti
헵 카흐라만 튀르크 밀레티
언제나 용맹한 튀르크인이니

Orduların, pekçok zaman (X2)
오르둘라른 펙촉 자만 (X2)
그대의 군대는 몇 번이나 (X2)

Vermiştiler dünyaya şan. (X2)
베르미슈틸레르 뒤냐야 샨 (X2)
세계에 명성을 떨쳤도다. (X2)


2절
Türk milleti, Türk milleti (X2)
튀르크 밀레티, 튀르크 밀레티 (X2)
튀르크인이여, 튀르크인이여 (X2)

Aşk ile sev milliyeti
아슈크 일레 세브 밀리예티
사랑하는 민족이여

Kahret vatan düşmanını (X2)
카흐렛 바탄 뒤슈마느느 (X2)
조국의 적을 패배시켜 (X2)

Çeksin o mel'un zilleti. (X2)
첵신 오 멜룬 질레티 (X2)
흉악한 그들에게 절망을 안겨주어라. (X2)


돌격명령이 내려졌을 때 연주하는 '돌격 행진곡'(Hücum Marşı). 16세기에 이미 연주되었다고 하며, 오스만 제국군의 위력을 알고있는 혹은 전해들은 이들은 이 음악만 들려도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갈라타사라이의 응원가 중에는 이 곡에 가사를 붙인 Hücum Zafer Marşı라는 곡이 있다. #

현대적으로 어레인지한 예시 01. 튀르키예 사극 드라마 위대한 세기 위대한 세기 : 쾨셈의 OST 곡 중 하나인 Savaş(전쟁)
현대적으로 어레인지한 예시 02. 비엔나전투 1683의 OST 곡 중 하나인 The Great Tournament.

세계 군악제 등의 행사에서 거의 다 유럽식 군악대가 나오는 반면에 한국의 전통 군악대와 함께 전통 복식과 음악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거의 유일한 군악대이다.

리믹스 버전

7. 기타

특이하게도 부대 용어가 주방 관련이다. 부대원 하나하나는 숟가락(Kaşık), 부대장의 호칭의 뜻이 수프 요리사라는 뜻의 초르바즈(Çorbacı)이고, 소대 깃발은 거대한 솥이다. 같은 솥에 음식을 끓여 먹는 동지들(= 식구)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즉, 함께 먹고, 자고, 싸고, 죽는 동지들이라는 뜻.[19] 그리고 술탄이 예니체리 전용으로 내려주는 식사를 거부하면 그것이 항명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이를 " 솥을 엎는다."라고 말했다. 현대 튀르키예어로도 관용구로 살아남아서 "OO가 솥을 뒤집었다."(OO kazan kaldırdı)라고 하면 "OO가 반발했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예니체리들은 울루페(ulûfe)라고 불리는 매 3달마다 한 번씩 나오는 봉급을 받았는데, 이 월급날과 라마단달 15일에는 술탄으로부터 바클라와를 하사받았다. 바클라와는 톱카프 궁전의 부엌에서 만들어서 배포되었는데, 먼저 예니체리 총사령관이 두 쟁반을 들고 그 뒤로 분대별로 두 사람이 나와 한 쟁반씩 들고 막사까지 이동했다. 이때 바클라와 쟁반을 들고 가는 병사들은 초록색으로 칠한 나뭇가지에 쟁반을 끼워서 거리를 행진했는데, 이것이 이스탄불 시민들의 볼거리가 되었다. 이른바 바클라와 행진(Baklava Alayı)이라고 하는 행사인데, 예니체리가 해산되기 바로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이 행렬에 대한 전설이 있는데, 여기에 따르면 예니체리가 해산되던 해 라마단 15일에 있던 바클라와 행진에서 한 난쟁이 노인이 손자를 데리고 이 행렬을 구경하다가 실수로 예니체리 병사들과 부딪혔고, 병사들이 거칠게 그를 밀치자 "이 신성한 달에 기도는커녕 이딴 행진이나 볼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이냐! 알라여, 저 망할 놈의 행진을 다시는 볼 수 없게 하소서."라고 저주를 했고, 그 때문인지 바로 그 해에 예니체리가 해체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예니체리는 이슬람 신자임에도 다른 신자와는 달리 콧수염을 제외한 수염을 기르는 것을 금지했다. 또 결혼도 못 했다. 높은 직위에 오른 뒤에 퇴직하면 결혼도 할 수 있으며 퇴직금도 상당히 받았다.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후기에는 이런 금지조항들이 다 사라지거나 유명무실화되었다.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하나 있으니... 예니체리들이 믿었던 종단은 제도권 수니 이슬람과는 거리가 먼 알레비파 계열의 벡타쉬파였다. 벡타쉬파는 시아 계열의 신비주의 종파로, 이들이 교조로 모시는 하즈 벡타쉬(Hacı Bektaş)부터가 "경전이나 십자가가 아닌 인간에게서 구원을 찾으라." 라고 말하는 등 인본주의적인 종단이었으며, 모든 종교에 관대했기 때문에 기존에 기독교인들의 성인들이나 성지를 마찬가지로 존중하고 순례까지 했다. 오늘날 튀르키예인들에게 남아있는 성인 공경의 풍습 같은 것들이 바로 벡타쉬파의 흔적이다.[20] 또한 라마단 금기 같은 것도 대놓고 무시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는 등 기존 이슬람과는 거리가 조금 있기 때문에 이맘들은 예니체리들을 영 탐탁지 않게 여기거나 심지어 이단자라며 혐오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 시기 박해받은 알레비파와는 달리 벡타쉬파는 오스만 제국에 협조적인 입장이었고, 애초에 오스만 제국의 군주들부터가 일부 몇몇을 제외하고는 종교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21]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이들은 45cm의 매우 길고 술이 많이 달린 접힌 뵈르크라는 모자를 쓰는데, 어느 술탄이 자신의 옷에서 잘라 하사한 소매를 모자로 쓴 것이 그 시초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머리도 꼭대기 한뭉치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깎아버리는 헤어스타일을 하는데, 전장에서 전사해 목이 잘릴 때 잡고 치켜올리라고 남겨둔 손잡이라고 한다.

자신들이 정예병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 때문에 어쩌면 당연히 '자신들과 똑같은 교육 과정'을 거치면서도 더 성적이 높은 것으로 간주된 카프쿨루 시파히를 싫어했다고 한다. 예니체리가 마피아 비슷하게 세력을 확장하다가 티마를르 시파히의 영지를 잠식하자 티마를르 시파히와도 사이가 나빠졌다. 이래서인지 예니체리가 횡포를 부리던 시절에도 시파히는 술탄에게 충성해서 '기병들은 반역하지 않는다.'는 말까지 생겼을 지경이며, 예니체리 해산 때도 시파히가 활약했다고 한다. 시파히도 이후에 해산당했으나, 예니체리와는 달리 과정 자체는 꽤 온건해서 티마를르는 각자의 영지로 돌아가 은퇴하게 하고 카프쿨루는 새로 개편한 서구식 기병부대에 편입하는 형태로 소멸했다.

오스만 제국의 숙적이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에도 예니체리가 있었다. 17세기 중반 무렵 폴란드의 슐라흐타(귀족)들이 포로로 잡힌 예니체리들에게 "너네 노예로 팔려갈래? 아니면 내 부하 할래?" 하면서 이들을 경호원으로 고용한게 시초다. 이들은 폴란드 예니체리(polish janissary)라고 하였으며 당시 슐라흐타들 사이에선 이들을 데리고 다니는게 잠시 유행하기도 했었다. 왕도 예외는 아니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최후의 먼치킨 얀 3세 소비에스키 제2차 빈 공방전에 참전했을 때 사로잡은 예니체리들로 부대를 만들어서 다녔다. 다만 직접 전투에 투입되거나 하진 않았고 그냥 슐라흐타의 위엄을 돋보이게 해주는 이국적인 퍼레이드용 부대 의장대 역할을 하였다. 초기에는 튀르크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원년 멤버들은 전부 늙어서 사망하고 나중에는 그냥 폴란드인들이 예니체리 복장 입고 코스프레 하는 부대가 됐다.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등 오스만 제국에게 크게 데였던 동유럽 일부 국가에선 '예니체리'라는 단어가 배신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았던 세르비아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앞잡이로 세르비아인들에게 횡포를 부렸던 예니체리들에 대한 반감으로 그들을 실컷 혼내주거나 물리치는 민담들이 많다. 대표적인 예로 세르비아에서 영웅시되는 실존인물 마르코 크랄리예비치 왕자(1335~1395)는 현실에서는 오스만에게 패배하고 물러나서 그다지 큰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지만, 민담에서는 그야말로 300살은 살았다느니 아주 전설로 내려지며 온갖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오스만에게 패배하고 반란에 시달려 고생하다가 죽은 현실과 달리 전설에서는 예니체리들을 그야말로 파리떼 수준으로 통쾌하게 박살낸다(...) 마르코 왕자의 전설.

8. 기타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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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스만 공국이라고도 한다. 당시의 오스만을 제국이라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못 하다. 오스만의 군주는 황제는 물론 술탄(왕)을 칭하지도 못 했으니. [2] 다만 니케아와 니코메디아 모두 당시 동로마 제국 유수의 대도시들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으며, 오스만군은 이 30년 동안 포위를 풀었다 몇 년 후 다시 공격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3]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이지만, 바그다드가 함락된 1258년이 바로 오스만 1세가 태어난 해다. [4] 물론 차이가 있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이슬람판 십자군이다. [5] 아래에서 소개되지만, 데브시르메 제도 = 예니체리 징집 제도라고 보면 곤란하다. 중요 인재 징집 제도라고 보면 몰라도. [6] 데브시르메 제도에는 선발에서 면제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민족적으로는 보슈냐크인을 제외한 무슬림, 유대인, 집시, 아르메니아인은 선발에서 제외되었다. 직업, 계층 별로는 결혼한 자, 목동, 수염이 없는 자, 대머리, 터키어를 구사할 수 있는 자, 장인이나 예술가의 자제, 키가 너무 크거나 작은 자, 고아나 집안의 외아들, 대도시에 거주하는 자들 역시 면제되었다. [7] 실상은 수도원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규율이 엄격했다. [8] 아르퀘부스는 15세기 말, 머스킷은 16세기부터 쓰기 시작했으니 아마 이때 예니체리들이 사용한 화약 무기는 핸드 캐논이 아닌가 싶다. [9] 본래 셀주크 투르크의 멸망 이후 아나톨리아 반도에 난립했던 수많은 투르크계 국가들을 칭하는 말이었다. [10] 추장을 의미하는 오스만어. [11] Orta, 오스만 제국의 부대 단위. 쉴레이만 1세 시절에는 196명의 예니체리를 1개 오르타로 규정하였다. [12] 애초에 Bostancı가 정원사란 의미이다. [13] 정예부대인 만큼 당연하지만 제도가 문제 없이 돌아가고 있었을 때는 수가 많을 수가 없었으며, 실제로도 16세기 전반까지 전체 수가 1만 명도 되지 않았다. 이러던 것이 16세기 중엽에 처음으로 만 명을 넘더니 16세기 말에는 2만 명을 넘었으며, 17세기 초엽에는 3만 8천, 17세기 중엽에는 5만을 찍었다. 수가 가장 많았던 17세기 말에는 6만 8천으로 7만을 내다보는 수준이었는데, 17세기 말의 오스만 제국이 16세기 중엽보다 일곱 배 더 강했느냐 하면 글쎄올시다... [14] 반란 자체는 쉴레이만 1세 때부터 일어났었는데, 16세기 후반 이후 서유럽발 가격혁명으로 인해 오스만의 경제가 악화되어 화폐가 평가절하되면서 예니체리 뿐 아니라 관료들도 매관매직을 일삼는 등 동요하기 시작한다. 봉급의 액수 자체는 변화가 없지만 봉급으로 받는 은화에 불순물이 대량으로 섞이기 시작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봉급이 삭감된 것이기 때문이다. [15] 여담으로 시파히들은 예니체리 해체 때도 상당히 활약했다. [16] 정확히 말하자면 예니체리 부대와 함께 해체되었다가, 튀르키예 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문화적,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부활한 것. [17] 이 박물관은 그야말로 튀르키예의 군사자료를 총 망라할 만큼 방대한 곳이라 하루종일 봐도 다 볼 수가 없을 정도로 유물이 많다. 과거 오스만 제국이 확장하면서 노획해온 유물들도 이곳에 있으니 관심있다면 꼭 가보시라. 신시가지의 중심가인 탁심 광장(Taksim Meydani)에서 하르비예 방향(북서쪽) 대로로 10분정도 걷다보면 병영이 나오는데, 이곳을 지나면 나온다. 사진촬영을 금하는 다른 박물관과는 달리 추가요금을 내면 플래시를 쓰지 않는다는 전제로 사진촬영도 가능하다. [18] 원래 해당 제목의 뒷부분인 Hep kahraman Türk milleti까지 합쳐서 읽어야 해석이 되는데 노래 첫 소절이 저거라 저렇게만 통한다. 뒤의 가사를 합치면 "그대의 조상, 그대의 할아버지, 그대의 세대, 그대의 아버지, 튀르크 민족은 모두 영웅이로다."라는 문장이 된다. 즉 "Ceddin"이나 "Neslin"은 고유명사가 아니고, 널리 알려진 "젯딘 할아버지, 네슬린 아버지"라는 이름도 맞는 번역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19] 참고로 고대 스파르타에서도 피디티온이라고 해서, 같이 식사하고 같이 싸우는 공동체가 있었다. [20] 현대 튀르키예인들에게 성인 공경의 풍습이 남아있는 또다른 이유로는 정교회의 영향을 들 수 있다. 오스만 제국 시절 튀르키예인들과 그리스인들은 종교와 언어로만 구별이 가능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구별조차 힘들 만큼 혈통적, 문화적으로 섞여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와 튀르키예가 별개의 나라로 갈라진 현재까지도 두 나라에 서로의 문화적 영향이 많이 남아있는 것이다. [21] 명색이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라는 칼리파 칭호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셀림 2세 무라트 4세처럼 거리낌없이 술을 마셔댄 군주가 의외로 많으며 최후의 칼리파인 압뒬메지트 2세는 심지어 직업화가 수준으로 그림을 잘 그렸다. 사실 민족주의가 발흥하면서 오스만이 쇠락하여 이슬람이라는 가치를 강조할 필요가 생겨나기 전까지 칼리프는 오스만 황제가 보유한 여러 칭호들 가운데 하나로만 인식되었을 뿐 특별히 중시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