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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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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트 왕국
Regnum Gothorum

서고트 왕국
Regnum Visigothorum | Hispania Visigothica
파일:Visigothic_Kingdom.png
갈리아를 지배하고 수에비 반달족을 몰아내지 못했던 시절의 강역
(일명 톨로사( 툴루즈) 왕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Hispania_700_AD.png
우마이야 왕조에게 점령되기 직전의 강역
(일명 톨레툼( 톨레도) 왕국).
418년~720년
라틴어 Regnum Visigothorum / Hispania[1]
고트어 𐍅𐌹𐍃𐍄𐍂𐌰𐌲𐌿𐍄𐌹𐍃𐌺 𐍂𐌴𐌹𐌺𐌹 / 𐌷𐌴𐌹𐍃𐍀𐌰𐌽𐌾𐌰
(Wistragutisk Reiki / Heispanja)
스페인어 Reino visigodo
프랑스어 Royaume wisigoth
위치 프랑스 남부 및 이베리아
수도 톨로사 바르치노 톨레툼
정치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주요 국왕 알라리크(395~410)
테오도리크 1세(418~451)
알라리크 2세(484~507)
리우비길드(568~586)
언어 고트어, 라틴어
종교 아리우스파 기독교→칼케돈파계 가톨릭
종족 고트족, 로마인
주요 사건 410년 로마 약탈
418년 서고트 왕국 건국
585년 수에비 왕국 병합
720년 멸망
성립 이전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우마이야 왕조, 아스투리아스 왕국

1. 개요2. 역사3. 문화4. 경제5. 정치/사회상
5.1. 왕위 계승5.2. 법률5.3. 행정
5.3.1. 중앙행정
5.3.1.1. 관직
5.3.2. 지방행정
6. 대유대인 정책7. 군사8. 외교9. 언어10. 종교11. 스페인인, 포르투갈인과의 관계12. 역대 서고트 왕국의 왕13.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5세기부터 8세기까지 프랑스 남서부와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했던 게르만 고트족 왕국.

5~6세기 프랑스의 패권을 놓고 서로마 제국, 프랑크 왕국, 부르군트 왕국 등과 맞붙었던 시기에는 툴루즈(톨로사) 왕국이라 불리고, 프랑크 왕국에게 아퀴타니아를 빼앗긴 후 밀려난 뒤 수에비 왕국. 동로마 제국 등을 꺾고 이베리아 반도의 패권을 장악한 뒤에는 톨레도 왕국으로 불린다. 한때 고대말 중세초의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손꼽혔지만, 잦은 내전과 기근, 전염병 창궐로 인한 인구 감소로 쇠락하다가 711년부터 시작된 이슬람 제국 우마이야 왕조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2. 역사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서고트 왕국/역사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문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Tesoro_de_Guarrazar_%28M.A.N._Madrid%29_01.jpg
서고트의 왕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F%C3%ADbula_aquiliforme_%28M.A.N._Madrid%29_01.jpg
서고트 브로치. 같은 시기에는 동로마 정도밖에 만들지 못했던 붉은 채색 유리를 사용해 만들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Erwig_tremissis_680_612197.jpg
서고트가 자체적으로 발행한 트레미스.

서고트족은 로마제국 내에서 가장 로마화가 잘 이루어진 대표적 속주 중 하나인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남부를 정복했기에 서고트의 문화적 수준은 여타 게르만계열 국가에 비해 굉장히 높은 면이 많았다. 서고트의 통치하에서 로마인들은 서고트에서 높은 대우를 받고 관직과 재산을 보호받을 수 있었고 그들의 기술과 문화를 서고트에게 온전히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톨레도에는 로마인으로 구성된 회의가 만들어져 왕국의 법을 제정할 수 있었고 동로마 이외의 지역에서 실전되어 버린 채색 유리 제조 기술이라든가[2] 버트레스와 돔,[3] 말굽 아치 등을 포함한 발전된 건축 양식, 산모를 제왕 절개해 아이를 꺼낼 수 있는 높은 의료 기술 등에 대한 기록과 유물이 지금까지 남아 있고 비스고트 건축물과 서적들이 무어인들에 의해 소멸되었다시피 할 정도였다는 걸 생각하면[4] 실제 수준은 더 높을지도 모른다.

화폐의 경우 초기에는 로마의 솔리두스나 트레미스 등의 화폐를 쓰다가 이후에는 자체적으로 제조하기 시작했다. 781개 가량의 주조소에서 화폐를 발행할 정도였고[5] 동유럽이나 반달과 지속적인 무역을 했다. 서고트의 합금[6]과 유리, 도자기는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포도와 같은 비싼 작물을 기르는 법이나 비단과 같은 고급 옷감이나 이것을 이용해 만든 의복을 생산하는 법을 몰라 동로마로부터 수입해야 했다.

7세기에는 가톨릭 주교 이시도루스 히스팔렌시스의 주도로 대규모 문화적, 학문적 르네상스가 일어나 문화, 예술, 건축 방면 뿐 아니라 학문적 영역에서도 고대 그리스, 로마 전통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고 이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흐름이 나타나게 된다. 특히 학문적 영역에서는 고전과 언어에 대한 교육을 부흥시키고, 고전을 보존, 연구하는 흐름이 널리 퍼져나갔다. 이러한 학문적 흐름은 저 멀리 아일랜드에까지 전파되어, 서고트 멸망 이후 약 11세기까지 한동안 아일랜드는 서유럽에서 고대 그리스어 교육이 보존된 유일한 지역으로서[7], 고전 교육 및 연구의 중심지로서 기능했다.

도시에는 주로 로마인들이 그대로 거주하고 있는 도시도 버려지며 주로 촌락이나 시골에 거주하는 것을 선호한 프랑크 왕국이나 앵글로색슨 7왕국 등 다른 나라들에 비해 서고트 왕국은 로마식 도시문화가 제법 잘 보존되었고, 고트인들도 도시에 거주하는 비율이 다른 게르만 왕국들에 비해서 훨씬 높았다. 이에 힘입어 서로마 멸망 이후 무려 도시가 4개(!)나 새로 만들어졌다. 겨우 4개라고 할수도 있지만, 중세 초기에는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동고트 왕국이나 랑고바르드 왕국도 도시를 새로 건설하기는 커녕 로마인들이 건설한 도시를 유지하는 데에 급급했던 시기라는 걸 생각해보자.[8] 참고로 이 4개의 도시는 현재도 남아있다.

이렇듯 서고트는 로마의 문화를 상당부분 수용했고 이슬람에 의해 파괴당하기 전까지 그 대부분을 보존하고 있었다.[9]

4. 경제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서유럽 세계는 약 200여년간 일시적으로 상당한 수준의 무역 감소를 맛보게 된다. 해상무역 자체가 타격을 받은 경우도 있었지만, 이 무역 기반 붕괴는 서로마 소멸로 인해 지중해 통합 무역 네트워크가 붕괴되면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결과물로, 무엇보다도 내륙 무역로가 붕괴했다는 점이 치명적이었다. 도시의 경우는 어느정도 버텨냈지만, 농촌의 경우는 이제 무역은 기대하지 못하고 스스로 먹고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약 6-7세기 즈음부터는 다른 국가도 마찬가지지만 무역 및 경제적 측면에서 어느정도 재건이 이루어지기 시작해, 해상무역 역시 재건되어 이탈리아부터 무려 아일랜드까지에 이르는 거대한 지중해-대서양 네트워크가 성립되었다.

이와 함께 로마 후기부터 벌어지기 시작한 토지의 집중화 및 장원화 경향은 더욱 가속화되어, 게르만 부족적 관습에 따라 토지 수여가 일반화되면서 다수의 로마인 및 소수의 고트인 대토지 소유자들과 이에 예속된 소작농, 그리고 새로 출현한 농노 계급으로 농촌 경제가 이원화되었다. 노예는 여전히 존재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점점 비경제적으로 여겨지면서 해방되어 농노가 되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났다.

서고트 후기로 갈수록 왕위를 둘러싼 귀족들 간의 투쟁이 격화되면서,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는 점점 더 느슨해졌고 이에 따라 봉건제적 경제의 성립이 가속화되었다. 도시의 경우 여러 상인들이나 장인들, 의사 등 전문직까지 자체적으로 길드 비스무리한 조합을 결성하였고, 이 조합들이 모여 도시 참사회를 결성해 도시 자치를 시행하게 되었다.

5. 정치/사회상

5.1. 왕위 계승

명목상 모든 권력이 왕에게 집중되었지만 구체적인 왕위 상속법이 없었고 세력이 있는 서고트 귀족이라면 누구나 왕위에 도전할 수 있었다. 과거에는 이를 게르만 부족적 전통이라고 규정하기도 했으나, 그보다는 로마 제국 시절부터 이어진, 군대나 시민의 지지를 받아 누구나 황제를 자칭하며 내전을 벌이던 공화국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교회의 주도로 7세기 초에 통치자 선출의 절차 규정을 법문화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겨우 그 정도로 복잡한 후계 문제를 끝낼 수는 없었다.

또한 형제인 토리스문드를 통수친 테오도리크 2세는 형제인 에우리크에게 통수를 얻어맞아 왕위를 빼앗겼고, 장군이었던 친다수윈트는 의회로부터 지지를 얻어 선왕인 툴가에게 쿠테타를 일으켜 왕위를 빼앗았다. 테우디스는 미친 척 다가온 암살자에게 암살당했다.

이슬람 제국의 침략을 받았을 때도 왕위 계승 문제로 서고트 왕국 내에서 분쟁이 있었을 정도였다. 멸망 직전 이슬람 세력을 끌어들인 자들이 바로 서고트 왕국의 국왕에 반대해 들고 일어난 귀족들이었다.

빈번한 내전과 외부와의 전쟁은 인구 감소를 불러왔고 이러한 인구의 감소는 제일 먼저 군사, 그 다음은 농업에 악영향을 미쳤다. 서고트는 일반적으로 식량이 부족해서 수입해야 했다는 기록이 있다.

5.2. 법률

아타울프부터 시작해 서고트의 통치자들은 대체로 로마 문화를 동경했고 로마법을 반영한 법전을 편찬했다. 물론 로마법을 그대로 고트족에게 적용할 수는 없어서 여러 차례의 수정을 거쳐 결국에는 게르만 법과 로마 법이 적절히 섞인 포룸 루디쿰을 만들었다.

포룸 루디쿰은 동시대의 다른 국가나 로마와 비교해도 발전된 부분이 많았다. 여성의 상속권을 제한하는 등 여성 차별이 보였던 로마법[10]이나 여성의 증언이 남성의 증언에 비해 절반의 효력만 있는 이슬람법( 샤리아)과는 달리 여성의 권리를 나름 보장했고[11] 가정 내에서의 폭력을 엄격히 처벌했다.[12]

포룸 루디쿰은 법학자들과 의회에 의해 법을 사회에 맞게 수정하고 개정하고 성문화했다. 렉스 로마냐 비스고트룸에서부터 시작해 테오도시쿰, 렉스 고트룸 등의 개정을 거쳐 포룸 루디쿰까지 도달한 법전은 선민족 로마와 침략자 게르만의 가치를 융합하려 한 노력이 들어 있다. 이 노력들 덕에 일단 왕이 세워지면 서고트의 관료제는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었고 재정와 군대를 비롯한 국력 전반을 효율적으로 성장시키고 사용할 수 있었다.

5.3. 행정

5.3.1. 중앙행정

중앙의 중대사는 의회에서 결정되었다. 이 의회의 정확한 명칭은 왕실 자문회로 7세기경 왕실 위원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자문회는 왕이 지방에 파견한 공작들과 그와 동등한 권한을 가진 관리만이 참석할 수 있었고 입법과 사법권을 행사했다.

한편 왕이 소집권을 행사하는 톨레도의 산 타 레오카디아 성당에서의 종교 회의 역시 적지 않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이들은 이단문제 같은 단순한 종교적 문제뿐만 아니라 국왕의 선출과 폐위에 영향을 행사할 수 있어 내전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5.3.1.1. 관직
서고트 왕국의 관직은 동고트 왕국과 동일한데 이는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리크 대왕이 죽기 전까지 서고트 왕국의 섭정을 겸하고 있었기에 동고트 왕국의 관직을 그대로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서고트 왕국의 관직은 아래 다음과 같다,

5.3.2. 지방행정

서고트 왕국 지방 행정의 중추는 여러 개로 나뉘어진 와 그러한 주를 통치하는 중앙의 왕이 파견한 공작(duque)이었다. 이러한 공작 밑에는 작은 지역과 도시를 통치하는 백작(conde)과 도시 참사회가 유지되었다.

한편 외부의 침략이 거세지고 왕국 내에서도 내전이 발생하면서 대토지 소유주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국왕의 선출과 형벌의 면제라는 특혜를 받았고 나중에는 자신이 소유한 토지를 자식에게 상속할 수 있는 특권까지 향유하게 된다.

6. 대유대인 정책

참고로 초기의 유대인에 대한 처우는 로마의 법을 그대로 따랐다. 다시 말하면 차별은 있었지만 심각하진 않은 정도.[13] 하지만 아리우스파 가톨릭의 내전에서 (반삼위일체론이라 유대인에게 호의적이였던) 아리우스파를 이긴 가톨릭파(유대인에게 적대적인)가 집권하면서 유대인을 심하게 차별하고 탄압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서고트 왕국에 대해 강한 적개감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이슬람 제국의 침공 당시 유대인들의 배반을 초래하게 되었다.[14] 이후 후우마위야 왕조 때도 유태인들은 치안 유지를 담당하는 등 아랍 정복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7. 군사

남아있는 기록들이 단편적이다. 일단 4세기 이전에는 여느 게르만족과 같이 경무장한 보병 중심이었고 점차 로마화가 진행되면서 게르만과 로마 양식이 혼합된 미늘 갑옷을 착용한다.

편제는 대개 서로마 제국과 비슷했다. 잘 무장한 로마병과 서고트 병사간의 장비 차이는 거의 없었다. 기병을 육성했지만 수가 적었고[15] 전술적인 부분도 (다른 게르만 부족과 같이) 어느 정도 서로마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역시 서로마와 비슷하게 주무장은 라멜라 갑옷, 창, 방패, 검이었다. 이 중 검과 갑옷은 패턴 웰딩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마보다 견고했거나 비슷했지만 창날은 무지하게 약했다.

해군은 규모가 작았지만 로마를 바다에서 공격했다는 기록 정도는 있다. 비스고트 문헌이나 유물은 없지만 동로마 기록에 '우리 해군이 반달과 서고트의 연합군을 몰살시켰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서 최소 수송을 위한 해군 정도는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아랍 해적에 대한 대응은 하지 못한 걸로 봐서 이 패전 이후로 해군이 해체되었을 수도 있다.

8. 외교

이탈리아 반도 동고트 왕국과의 관계는 매우 돈독해서 동고트의 테오도리크 대왕(서고트의 테오도리크 1세, 테오도리크 2세와는 다른 인물이다.)은 서고트의 왕 알라릭 2세와 결혼 동맹을 맺었고 알라릭 2세가 프랑크 왕국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한동안 서고트 왕국의 섭정으로 서고트 왕국까지 통치하면서 실질적으로 고트 왕국을 통일하여 프랑크 왕국의 침략을 막아내기도 했다.

서고트는 일단 명목상 서로마 황제의 수하로서 카탈라우눔 전투 같은 전투에 종군하고 서로 중요한 무역 파트너였지만 서로마 제국이 군주들의 실정과 반달족, 프랑크족, 색슨족 등 다른 게르만족들의 압력으로 워낙 내우외환을 거치다 보니 가끔 무리하게 하사금을 요구하거나 기분 나쁘면 한 대씩 치고 윽박지르는 그야말로 형식적인 상하 관계였다.

반달족과의 관계는 초기에는 험악했지만 이후 공적이 된 동로마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친밀해졌다.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수에비 왕국, 바스크족과는 끊임없이 전쟁을 치렀고 이 중 수에비 왕국은 리우비길드 왕에게 결국 정복되었지만 바스크족은 끝까지 독립을 유지했다.

동로마 제국과는 초기에는 소 닭 보듯 하는 관계였으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기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의 일환으로 서고트 왕국의 내전에 개입해 핍박받던 정통 기독교인의 지지에 힘입어 이베리아 반도 남부 일대를 점령하고 히스파니아 속주를 설치하면서 서로 전쟁을 치르게 된다. 동로마-페르시아 전쟁이 한창이던 624년에는 마침내 카르타고 노바(현 카르타헤나)에서 이베리아 반도 본토[16]의 동로마 세력을 완전히 쫓아내 버려, 마침내 칸타브리아를 정복한 아우구스투스 초기 기원전 1세기 말부터 5세기 초까지의 고대 로마 다음으로 이베리아 반도 통일을 이루었다. 하지만 동로마가 7세기 내내 페르시아-이슬람 제국이라는 동방의 강적과의 사투에 전념해 있을 때 예전 반달 왕국처럼 이베리아 반도를 넘어, 방어가 매우 취약했던[17] 세우타 이상 북아프리카 이탈리아의 후방 지역을 치지는 않았고 딱 이베리아 반도에만 만족했다. 북아프리카나 이탈리아를 침공하려면 해군이 필수였는데, 귀족들 간의 내부 분쟁이 치열했기 때문에 해군까지 동원한 대외원정을 도모하기에는 무리였다고 볼 수도 있으며, 오히려 이슬람이 북아프리카에까지 출몰해 오는 7세기 중후반에는 순망치한의 원리로 동로마의 아프리카군에 서고트가 군대를 파견해서 동맹해서 함께 싸우기도 했다.

프랑크 왕국의 경우 지리적인 이유로 딱히 외교관계가 없었지만 갈리아를 평정하고 다양한 분파로 나뉘어진 프랑크족을 통합하고 전 갈리아 통일 전쟁을 일으킨 클로비스 1세에게 부예 전투에서 참패하고 알라리크 2세가 전사하는 수모까지 겪으며 셉티마니아 해안가 이외 국토의 절반인 아키텐, 갈리아 영역을 잃으면서 수세에 몰리게 된다.

9. 언어

서고트인들은 게르만어 동게르만어파 고트어를 사용하였지만 곧 로마화되어 히스파니아 로마인들의 라틴어를 썼고 고트어는 7세기에 완전히 사멸했다. 그러나 현 스페인어 포르투갈어에는 약간이나마 서고트어의 영향이 있어 현 에스파냐, 포르투갈의 지명, 인명에 알바로, 페르난도(프리데난드), 로드리고(로데릭), 로센도(루데신드), 아르기미로, 엘비라(겔로비라), 알폰소(아드폰스, 알폰스, 일데폰스), 곤살로(군디살브), 라미로, 갈린도, 고메스(구마즈) 등 서고트족에서 유래된 이름이 상당수 나타난다.

10. 종교

서고트 왕국의 국교는 서고트인들이 믿고 있던 기독교 아리우스파였으나 레카레드 1세 시대 589년 서방 칼케돈파( 로마 카톨릭& 정교회의 전신)으로 개종했다.

11. 스페인인, 포르투갈인과의 관계

전성기 시절 서고트 왕국은 이베리아 반도에 흩어져 있던 다수의 로마인 라틴족들을 복속시키고 게르만족인 반달족, 수에비족 및 선주민인 바스크, 칸타브리아인을 쫓아내거나 복속시켰다. 서고트 왕국의 복속 전후 수많은 게르만족들이 히스파니아, 루시타니아로 내려와서 눌러앉아 살았는데 시대를 거치며 원주민 및 라틴인- 아랍인과의 혼혈로 인해 오늘날 그들의 흔적을 보기는 어려워졌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들의 영향인지 몰라도 금발벽안, 하얀 피부 스페인인, 포르투갈인도 흔치는 않지만 가끔씩 보인다.[18]

12. 역대 서고트 왕국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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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빙기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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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티 왕조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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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티 왕조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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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티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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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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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국왕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시세부트 레카레드 2세 수인틸라 시세난드 친틸라
가톨릭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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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가 친다수윈트 레케스윈트 왐바 에르위그
가톨릭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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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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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가
아르기문드
유딜라 프로이아 힐데리크
플라비우스 파울루스
수니프레드
반왕
vs 로데리크, 아길라 2세 - - - -
오파스 - - - - }}}}}}}}}}}}
라틴어 이름 고트어 이름 재위 기간
족장 시대
프리티게르누스 프리투게른스 376년 – 380년
발티 왕조
알라리쿠스 1세 알라릭스 1세 395년 – 410년
아타울푸스 아타울프스 410년 – 415년
시게리쿠스 - 415년
왈리아 왈리야 415년 – 419년
테오도리쿠스 1세 티우다릭스 1세 419년 – 451년
토리스몬두스 토리스문다 451년 – 453년
테오도리쿠스 2세 티우다릭스 2세 453년 – 466년
에우리쿠스 에와릭스 466년 – 484년
알라리쿠스 2세 알라릭스 2세 484년 – 507년
게살레이쿠스 게살렉스 507년 – 511년
동고트 왕국 테오도리쿠스 대왕의 섭정시대 (511년–526년)[19]
아말라리쿠스 아말라릭스 526년 – 531년
발티 왕조 이후의 왕조
테우디스 티우디스 531년 – 548년
테우디기셀 - 548년 – 549년
아길라 1세 아길라 549년 – 554년
톨레도의 아리우스 기독교 왕조
아타나길두스 아타나길드 554년 – 567년
리우바 1세 리우프스 1세 568년 – 573년
리우비길두스 리우비길드 568년 – 586년
톨레도의 가톨릭 왕조
레카레두스 1세 레카레트스 1세 586년 – 601년
리우바 2세 리우프스 2세 601년 – 603년
비테리쿠스 위티릭스 603년 – 610년
곤데마루스 군티메르스 610년 – 612년
시세부투스 - 612년 – 621년
레카레두스 2세 레카레트스 2세 621년
수인틸라 스윈틸라 621년 – 631년
시세난두스 - 631년 – 636년
친틸라 킨틸라 636년 – 640년
툴가 툴가 640년 – 641년
킨다스빈두스 킨타스윈트스 641년 – 649년
레케스빈두스 레카스윈트스 649년 – 672년
밤바 왐바 672년 – 680년
에르비기우스 에르위흐 680년 – 687년
에기카 에기카 687년 – 701년
비티자 위티자 701년 – 710년
로데리쿠스[20] 흐로다릭스 710년 – 711년
아길라 2세[21] 아길라 2세 711년 – 714년
아르다바스투스[22] - 714년 – 721년

13. 관련 문서


[1] 서고트의 왕은 이베리아 점령 후 히스파니아와 셉티마니아(남프랑스)의 왕을 자처했다. [2] 아랍권도 동로마에서 청색이나 녹색 유리를 만드는 법 등은 배워왔지만 빨간색, 갈색 유리 등은 만들지 못했다. 서고트의 유리는 특별히 '서고트(visigoth) 유리'라고도 불리면서 중세 서유럽의 귀중품 취급을 받았다. [3] 제대로 된 돔은 남아있는 게 없지만 소형 돔과 돔을 만들기 위해 필수적인 반원통 볼트 형태가 중기 유적에 있다. [4] 서고트의 도시였던 톨레도, 코르도바 등에 남은 유적이 없다. 남아있는 건 시골 구석의 조그마한 교회 건물들 정도. 다만 톨레도와 코르도바가 후우마이야 왕조의 대도시로서 무슬림들이 많이 거주해 오고 그 때문에 교회들이 점차 사라지고 모스크가 들어서면서 없어진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5] 주조소의 개수에 비해 발견된 동전은 3500개 정도로 적다. 귀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서고트의 다른 유산들과 마찬가지로 이슬람 정복 이후로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귀금속 유물은 귀금속 특성상 살아 남기 힘들다. 대표적인 예로 아즈텍, 잉카를 들 수 있는데 아즈텍의 경우는 아주 조금 남아 있고 잉카의 경우 귀금속 유물을 보기조차 힘들다. 스페인인들이 가져가 금이나 은이 아닌 다른 귀금속들은 떼어 내고 금이나 은은 녹이는 등의 일을 했기 때문이다. [6] 구리와 철로 만든 제품이 유명했다. [7] 서로마 멸망 이후 고대 그리스어 교육은 광범위하게 쇠퇴했지만, 동고트 왕국 서고트 왕국에서만큼은 보존되었고, 이들이 보존한 그리스 고전은 13세기 이전까지 (아일랜드 수도사들이 보존, 번역한 것을 제외하면) 서유럽인들이 찾아볼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책들이었다. 동고트 왕국은 동로마 제국에게 멸망하고 이탈리아가 황폐화되면서, 서고트 왕국은 하필 이슬람 세력에게 정벌당하는 바람에 아일랜드를 제외한 서유럽 전역에서 고대 그리스어 및 그리스 고전 교육은 대가 끊기게 된다 [8] 다만 반달 왕국은 로마 도시가 버려지는 경우가 왕왕 일어났기에 반달족들이 새로 도시를 건설한 경우도 존재했다. 그런 거 없이 순수히 도시문화의 발전을 보여준 경우는 서고트 뿐이다. [9] 얼마나 파괴당했는지 남은 고트어 문헌은 20개도 안 될 지경이었다. 포룸 루디쿰 정도는 그라나다의 도서관에 남아있었다고 한다. 부부왕 이사벨라와 페르난도는 이 포룸 루디쿰을 경쟁적으로 카탈루냐어 카스티야어로 번역했다. 이렇게 파괴가 된 것은 의도적인 파괴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전쟁으로 사회가 혼란하면 일어나는 일이고 교류가 끊기면 문화가 유실되는 사례는 많다. 어쨌든 현대 스페인인들의 입장에서 서고트 왕국의 문화재가 이슬람 세력에 의해 대거 파괴된 건 매우 뼈아픈 일이다. 더군다나 이슬람 세력은 같은 기독교도 서고트족에 비하면 이교도여서 이베리아 반도 기독교 라틴 문화에 대한 포용력이 영 부족했기 때문에, 라틴족의 정체성을 가진 현대 스페인인들의 입장에선 당연히 서고트족의 지배를 받던 때가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던 때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다. [10] 프랑크족 살리카법에서도 보인다. [11] 강간당한 여성은 납치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강간을 증명할 수 있었고 그 대가로 가해자 재산의 절반을 요구할 수 있었다. [12] 그래도 노예제가 있었고 유대인을 차별하기는 했다. [13] 일부는 정부의 높은 위치에 있었고 일부는 군대의 높은 위치에 있었다. 일부는 군에 모집되어 수비를 맡았다. 물론 대부분은 낮은 위치였지만. Jane S. Gerber, The Jews of Spain: A History of the Sephardic Experience (New York: Free Press, 1992), p. 9. [14] 이슬람 군대에게 서고트 왕국에 대한 정보를 주며 침략하라고 부추겼다. [15] 다만 서고트 왕국의 조상인 고트족들은 원래 동유럽 대평원에서 살았기 때문에 기병 전술에 능숙했고, 스페인에 정착하고 나서도 한동안 계속 기병을 군대의 주력으로 삼을 만큼 기병에 오래 집착했다. [16] 발레아레스 제도 및 지브롤터 건너의 세우타, 탕헤르 등 지역은 반독립상태였지만 어쨌든 우마이야 제국이 698년 카르타고를 점령하고 나서 더욱 서진한 8세기 극초반까지는 동로마령이었다. [17] 당시 동로마는 서방 영토의 군부대까지 상당히 차출해서 동부전선의 전쟁을 치렀다. [18] 비교적 금발벽안 하얀피부의 게르만인들은 고트족인데, 대부분 당시 대도시였던 브라가, 톨루즈, 톨레도, 바르셀로나와 같은 이베리아 반도 북부 지역인 대도시에서 몰려 살았다. 그래서 이들의 영향으로 유전자 배합에 따라 스페인인, 포르투갈인 중 옛 게르만적 모습을 더 강하게 지닌 사람들도 종종 나타나게 된 것이다. 또한 바이킹의 대침략기에 이들 또한 북부 지대에 일부 정착했기 때문에 그 영향도 있다. [19] 이때 동고트와 서고트 왕국이 일시적으로 통일되었다가 테오도리쿠스 사후 재분열된다. [20] 킨다스빈투스 왕의 아들. 사실상 서고트 왕조의 마지막 정식 군주로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온 압둘 아지즈에게 톨레도와 왕비 에길로나를 빼앗기고 살해당했다. [21] 711년 톨레도 함락 후 사라고사를 거점으로 아랍군에 대항했다. [22] 서고트의 마지막 군주. 무슬림 왕조에 패사했는데 일부 사학자들은 아르도의 패사를 레콩키스타의 효시로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