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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왕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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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제22대 국왕
문주왕 | 文周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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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출생 (음력) |
450년 이전 추정[1] | ||
백제
위례성 (現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일대) |
|||
사망 (음력) |
477년 9월 | ||
백제
웅진성 (現 충청남도 공주시) |
|||
능묘 | 미상 | ||
재임기간 (음력) |
백제 상좌평 | ||
연대 미상 | |||
재위기간 (음력) |
백제 제22대 국왕 | ||
475년 9월 ~ 477년 9월 (3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성씨 | 부여(扶餘) | |
휘 |
문주(文周) / 문주(汶洲)[2] / 문명(文明)[3] / 모도(牟都)[4] / 도(都)[5] / |
||
부왕 |
|
||
형제자매 | 부여경사, 부여곤지 | ||
태자 | 부여삼근 | ||
종교 | 불교 | ||
왕호 | 문주왕(文周王) | ||
관등 | 상좌평(上佐平)[10] | ||
직위 | 보국장군(輔國將軍) | }}}}}}}}} |
[clearfix]
1. 개요
백제의 제22대 군주이자 건길지. 《 삼국사기》에는 개로왕의 아들, 《 일본서기》에는 개로왕의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무래도 《 백제신찬》을 비롯한 백제계 사서를 직접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일본측 기록이 사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이기동 교수가 <中國史書(중국고서)에 보이는 百濟王牟都(백제왕 모도)에 대하여>(1974년)라는 논문에서 중국측 기록과 《일본서기》, 《삼국사기》 등을 정치하게 비교, 분석하여 문주왕이 개로왕의 동생임을 고증했다고 하나 실제로 가장 먼저 밝힌 것은 일본의 나카 미치요(那珂通世)의 《외교역사》(外交繹史)(1915년)였다. 또한 1974년에 가사이 와진(笠井倭人)이 이를 부연설명한 적이 있으므로 단순히 이기동 교수 단독 업적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어찌되었든 이후 학계에서도 대체적으로 이것을 따르고 있다.
2. 생애
457년 중국 남조 유송에 보낸 서신에서는 성명이 '모도(牟都)' 혹은 '여도(餘都)'[11]로 나타난다. 이미 개로왕 시기 때 상당한 위치에 올라 있었음이 여러 기록에서 나타난다. 개로왕이 유송에 사신을 보냈을 때 보국장군이라는 직책을 받았으며 이후에는 상좌평을 역임했었다. 다만 지위나 조정에서의 능력적 평가로는 동생 부여곤지한테 다소 밀렸었고 이러한 평가는 다름아닌 개로왕이 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성품이 부드러웠지만 우유부단했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백제 역사상 최대의 국난을 수습해야 하는 막대한 임무를 맡은 왕으로서는 어울리지 않았다고 여겨지지만 능력과 야심을 고루 갖춘 부여곤지가 영향력을 키우며 도성 내 귀족들과 간혹 마찰을 빚다가 찍혀서 일본으로 보내진 것과 비교하면 형 개로왕에게는 바로 그 성품 덕분에 더욱 의지가 되는 동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 백성을 사랑하였고 백성 또한 그를 사랑했다'라고 되어 있는데 능력이나 야심은 부여곤지에 비하면 딸렸지만 인망이 없는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면에서 보면 수도 함락과 망국의 위기라는 초유의 국난 상황에서 나머지 세력을 추스르는데는 오히려 부여곤지보다 적격인 인물이었을지 모른다.
백제의 도성 및 궁궐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한성백제 | ||
하남위례성[a] | 하북위례성[b] | ||
풍납토성 | 몽촌토성 |
||<-3><tablebgcolor=#fff,#1f2023><tablewidth=100%><bgcolor=#008080> 사비백제 ||
사비성 |
별도
금마저
|
|
부소산성 / 관북리 유적 | 부여 나성 / 청산성 | 왕궁리 유적 |
||<tablewidth=100%>[a] 어떤 성곽이 위례성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b] 하북위례성 또한 존재만 전할 뿐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았다. ||
[b] 하북위례성 또한 존재만 전할 뿐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았다. ||
||<tablewidth=100%><tablebgcolor=#008080>
백제의 왕릉 ||
}}}}}}}}} ||고구려의 장수왕은 남진 정책을 꾸준히 밀어붙였고 백제는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어 겨우 막아내고 있었다. 475년 고구려가 한성으로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개로왕은 최악의 상황을 예감하고 동생 혹은 태자[12] 부여문주를 신라에 보내 자비 마립간에게 가서 10,000명의 구원병을 얻어오라고 보낸다. 그러나 부여문주와 신라 구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백제는 한성을 함락당하고 개로왕과 왕족은 학살당했으며 한강 유역은 고구려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일본서기》에서는 이 때 백제를 '망했다'고 표현할 정도로 큰 타격이었다. 최근 역사학계에서도 한성백제의 멸망이라는 표현을 직접적으로 쓰고 있다. 신라의 지원군을 이끌고 북상하던 도중에 한성 함락 소식을 들은 부여문주는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한성으로 치고 올라갔었고 역시나 고구려군은 일단 점령한 위례성을 포기하고 한북으로 물러갔다.
부여문주는 그 상황에서 다름아닌 위례성에서 즉위했었고 1달 동안이나 고구려군과 대치했는데 아무래도 위례성을 포기하는 것이 영 쉬운 선택은 아니었던 듯. 이후 결국 위례성을 포기하고 남하하여 475년 10월 금강을 끼고 있는 천혜의 요새인 웅진성(현 충청남도 공주시 공산성)에 방어 성곽을 구축하며 새 도읍으로 정하고 왕위에 즉위한 후 즉각적인 대고구려 항전 태세에 돌입했다.
늦게나마 백제 지방 귀족들의 지원군이 도착하여 힘을 보탰고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일단 개로왕이 부여문주를 후계자로 확실하게 선언해놓았기 때문에 백제의 고질병이던 왕위 다툼은 벌어지지 않았다.[13]
3세기 중반경 당당한 고대 국가로 발돋움한 백제는 약250여 년 동안 수도였던 한성을 잃으면서 큰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부여씨의 왕권[14]이 크게 실추되었고 귀족 세력이 강성해졌다. 한성백제 시절부터 권세를 휘둘렀던 해씨, 진씨 세력이 강성해져 웅진 시기에는 왕권이 유명무실해지고 해씨나 진씨 가문 출신의 권신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하게 되었으며 아울러 웅진 인근의 현지 지방 세력(구 마한 세력)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사씨, 백씨, 연씨, 국씨 등의 권력이 증대되면서 기존의 해씨, 진씨, 목씨와 함께 대성팔족이라는 최고 귀족층을 이루게 되었다.
476년 2월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해 대두산성을 수리하고 아직 고구려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한수 이북 백성들을 남쪽으로 이주하도록 했다. 3월에 바다 건너 유송에 사신을 보냈는데 고구려의 방해로 못 가고 되돌아왔으며 4월에 탐라국이 조공을 바쳐오자 문주왕이 기뻐했다. 한성을 함락한 장수왕은 남진을 계속하여 현재의 경기도 성남시, 용인시, 안성시, 충청북도 진천군을 지나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에 남성골산성, 지금의 대전광역시 서구에 월평동산성을 쌓았고, 다름아닌 한성백제가 금강 일대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먼둔 세종 새롬동, 나성동 일대의 행정 타운을 송두리째 접수하며 역시 그 자리에 있던 백제산성 또한 점령하고 군대를 주둔시켜 웅진백제의 수도 웅진성을 포위해 압박했다. 그러나 북방의 침략 등을 우려해 돌아가고 말았는데 웅진성을 둘러싸고 고구려와 백제의 직접적인 군사대결이 있었는지는 아직까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고구려가 서쪽으로는 현 공주와 충청남도 천안시, 동쪽으로는 신라가 눌지 마립간의 반란 당시 고구려에게서 빼앗은 현 충청북도 괴산군과 대전 동부에서 압박당하는 상황이었는데도, 이후 얼마되지 않아 신라에게 공격을 퍼부어 괴산을 도로 빼앗고 신라를 대전 일대에서 아주 몰아내면서 백제를 도우려는 신라의 공세를 오히려 역으로 맞받아쳐 밀어내버렸다. 그러니 웅진성과 고구려가 장악한 세종 새롬-나성동 백제산성 사이의 거리가 20km도 채 안되는 상황에서 백제에 대한 고구려의 강렬한 공격이 없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문주왕이 새로운 땅에서 다시 시작하기는 했지만 475년 큰 패전으로 도망온 부여씨 왕실의 권위는 바닥까지 추락하고 지배층 내부의 갈등까지 겹쳐서 웅진백제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고구려가 세종-대전 축선까지 장악한 시점에선 한성백제 때보다도 더 수도와 국경선이 가까워지고 만 것으로, 그나마 고구려군을 동대전으로부터 공격하며 도와주던 신라군이 고구려군에게 패배해 더욱 동쪽으로 밀려나고만 시점에선 정말이지 상황이 절망스러웠을 것은 어렵지 않게 예측해볼 수 있다. 이쯤되면 부여씨 왕실의 왕권 운운이 문제가 아니라 문주왕 또한 형 개로왕 같이 되어버릴 순간이 목전에 가까웠던 순간이었다. 한국사에서 천도는 여러 번 있었지만 이 경우는 준비되지 않은 강제적으로 쫓긴 상황이었으므로 웅진 지역에서 기반을 갖추기 급급했다. 결국 재위 3년째 되는 해 사냥을 나가 외부에서 묵었다가 병관좌평(지금의 국방부 장관, 국왕의 최측근.) 해구의 사주를 받은 도적에게 시해당했다.
반란이 성공하자 해구의 세력이 강대해져서 문주왕의 아들 삼근왕이 즉위한 후에도 권세를 휘둘렀다가 몰래 세력을 키우던 동성왕파의 세력이 커지자 권력 다툼을 일으켰으나 진로에 의해 결국 처형당하고 말았다. 삼근왕 또한 반란을 진압한 직후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데 삼근왕의 죽음에 동성왕이 개입했다는 설이 있다.
3. 기타
- 동생(으로 보이는) 부여곤지가 475년 한성 함락 이후에 일본에서 백제로 귀국하여 내신좌평에 임명된 것을 보면 전왕 개로왕처럼 부여씨 왕실 인사들을 등용해 왕권을 강화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보이는데, 문제는 두 사람 모두 해구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것이다.[15]
- 일본 측 기록인 《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문주왕의 후손들이 좌경(左京) 제번(諸蕃)의 백제 출신인 쿠다라노키미(百濟公)씨가 되었다.[16] 그런데 같은 책의 우경(右京) 제번(諸蕃)의 백제 출신인 쿠다라노키미(百濟公)씨는 시조가 백제국의 귀실집사라고 기록되어 있다. 귀실씨는 귀신의 감화를 받은 일을 계기로 만든 성씨라 한다.[17] 귀실씨의 인물로는 백제부흥운동에 중추적으로 참여했던 귀실복신, 그의 아들 혹은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 만약 거주지가 다른 두 쿠다라노키미씨가 먼 조상이 같은 집안이었다면 귀실씨는 문주왕의 후손일 수도 있다. 물론 딱히 문주왕의 후손이 아니라도 마찬가지로 방계 왕족이라 그냥 같은 성씨를 주었을 수도 있고, 귀실씨가 왕족 출신이 아님에도 부흥운동 당시 큰 공이 있었음을 감안해 줬을 가능성도 있다.[18]
- 한편 무왕의 출신 성분이 불분명한데, 이에 대해 귀실복신이 방계 왕족 출신이 맞고, 무왕의 조카였던 신복(信福)과 동일인물이었으며, 이에 따라 무왕도 본래 귀실씨였으나 국왕의 자리에 오른 뒤 부여씨로 환원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있다. 이 설이 사실이라면 상기 가설과 종합해 무왕은 문주왕의 후손이 될 수도 있다. 다만 신복과 귀실복신이 동일인물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기 때문에 자세한 건 귀실복신 항목 참조.
- 《 신찬성씨록》에서는 문주왕의 출신에 대해 이상한 점이 하나 발견되는데, 문주왕의 후손을 자처한 씨족들이 왜에서 사케노키미(酒君/酒王)라 불린 백제 왕족의 후손으로도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케노키미와 문주왕의 제사를 문주왕의 후손이라 자처한 씨족이 동시에 행했다는 건 문주왕이 왜국에서 사케노키미의 후손으로 여겨졌다는 뜻이 되는데, 문주왕은 《 일본서기》에서 명백히 개로왕의 동생이자 곤지의 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주왕의 이름이 '맏이'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되고, 동생 곤지가 '큰'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되며, 《신찬성씨록》에서 곤지는 비유왕의 아들임을 강조하여 같은 가문에서 추앙하고 있기 때문에 문주왕이 왕자 시절 모종의 이유로 사케노키미의 양자가 되거나 봉사손 비슷한 처지가 되어 사케노키미의 '맏'이 되었고, 곤지는 비유왕의 '큰'아들로서 비유왕의 제사를 이어받았다는 가설이 있다. 다만 이 가설이 사실일 경우 이들의 형인 개로왕은 누구의 제사를 물려받았냐는 문제가 생긴다.[19]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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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열전(列傳) ]
}}} ||《삼국사기》 <문주왕 본기>
一年秋九月 문주왕이 즉위하다
一年冬十月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다
二年春二月 대두산성을 수축하고 민가를 이주시키다
二年春三月 송에 예방이 고구려의 방해로 실패하다
二年夏四月 탐라국에서 토산물을 바치다
二年秋八月 해구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다
三年春二月 궁실을 중수하다
三年夏四月 곤지를 내신 좌평으로 임명하고 삼근을 태자로 책봉하다
三年夏五月 흑룡이 웅진에 나타나다
三年秋七月 내신좌평 곤지가 사망하다
三年秋八月 병관좌평 해구가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하다
三年秋九月 문주왕이 죽다
탐라국( 제주도)이 한국사에서 기록상 최초로 등장했다.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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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성왕 | ─ | ─ |
동명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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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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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덕좌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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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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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근초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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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근구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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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신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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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구이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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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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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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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타태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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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법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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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좌태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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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교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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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선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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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문사 | 부여문선 | 부여덕장 |
부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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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창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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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례] 실재 혈통 기준 세로선(│) 부자, 부녀, 사위관계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
}}}}}}}}} |
[1]
아들인 삼근왕의 출생년도에서 역산한 추정값
[2]
《
일본서기》에서도 이렇게 나온다.
[3]
《
삼국유사》.
[4]
《
남제서》, 《
양서》. 단
이병도는 '모도'가
동성왕의 이름인 '모대'의 다른 표기이며, 문주왕과 혼동된 것이라고 했다. 한편 모도-모대가 모두 맏의 음차 표기로 일반명사일 가능성이 있는데 그렇다면 이는 혼동이 아니며 문주는 모도와 같은 뜻이 된다.
[5]
《
송서》. 모도의 축약 표기.
[6]
오우치씨 족보. 문주(文周)의 오기일 가능성이 높다.
[7]
《신찬성씨록》. 다만 문주(汶洲)의 오기로 추정된다.
[8]
《
삼국사기》.
[9]
《
일본서기》. 다만 《일본서기》에서
비유왕은 등장하지 않고, 정확히 말하자면
개로왕의 동복동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0]
대좌평(大佐平)과 같은 관등으로 보인다.
[11]
'여(餘)'가 성이고 이름이 '도(都)'.
[12]
보통 동생쪽의 가능성을 더 높게 본다.
[13]
백제가
위기 상황에서 고질적인
권력 투쟁을 계속했으면
명나라 멸망 직후 얼마 안 가서 완전히 멸망해버린
남명 꼴이 났을 것이다. 다만 남명도 엄연히 태자가 있었으나
북경 함락 당시 실종된 것을 생각해보면 백제는 운도 좋았다고 할 수 있다. 남명은
나라를 수습하기 위해 지도자로 옹립한
홍광제가 미친 놈이어서 안 그래도 위기인 나라를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14]
그도 그럴 것이 개로왕이 참수당할 때 백제의
왕자와 왕족들도 대거 함께 죽었다. 또 부여곤지를 일본에서 다시 불러들인 이유를 봐도 알 수 있다.
[15]
다만 부여곤지의 경우, 해구가 암살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그러나 사망 시기나 그 당시 정치적 위치를 근거로 부여곤지 역시 해구에 의해 암살당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16]
"百濟公, 同王廿四世孫汶淵王之後也." 여기서 동왕(同王)이란 바로 앞에 적힌 백제국 도모왕(百濟國都慕王), 즉
동명성왕을 뜻한다.
[17]
百濟公, 百濟國鬼室集斯之後也. 因鬼神感和之義, 命氏謂鬼室.
廢帝
天平寶字三年, 改賜百濟公姓.
[18]
신찬성씨록에서 왕족인지 아닌지 확실히 기재해줬으면 아주 확실해졌을 텐데, 다른 성씨들의 경우 오래된 왕족의 후손이라도 일일이 적어놓은 반면, 귀실씨의 출자에 대해서는 왕족과 관련한 기록이 전혀 없다. 그런데 또 왕족들만 받았던 '쿠다라'가 들어가는 성씨를 사성받았기에 논란이 많을 수밖에 없어진 것.
[19]
구이신왕일 수도 있다. 이들의 아버지인
비유왕은
구이신왕의 아들 또는 서제(庶弟)로 기록되어 있는데, 정황상 동생이 유력시되기 때문이다. 비유왕은 급작스럽게 죽고 들판에 가매장되었다가 사후 21년 뒤에야 수습해서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개로왕이 즉위 초기에 큰아버지의 봉사손을 자처해도 이상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