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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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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 ~ 663년
백제부흥운동 ( 도침 / 귀실복신 / 부여풍 / 흑치상지 & 사타상여 / 지수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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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제32대 어라하
풍왕 | 豊王
<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출생
(음력)
연대 미상
백제 사비성
(現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즉위 660년 9월 1일[A]
백제 임존성, 주류성 일대
(現 충청남도, 전라북도 추정)
사망
(음력)
668년 이후[2]
장안 영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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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묘 미상
재위 제32대 국왕 (백제부흥운동)
660년 9월 1일[A] ~ 663년 음력 9월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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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豊) / 풍장(豊璋) · 규해(糺解)(?)[4]
부모 부왕 무왕 (?) / 의자왕(義慈王)
왕후 오오씨(多氏)[5]
자녀 부여사[6]
왕호 풍왕(豊王)
별호 풍장왕(豊障王) }}}}}}}}}

1. 개요2. 생애
2.1. 백제부흥운동2.2. 고구려 망명
3. 여담4. 같이보기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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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의 왕족. 휘는 풍(豊) 혹은 풍장(豊璋)이다. 왕호를 붙여 '풍왕(豊王)', '풍장왕(豊障)'이라고도 한다.

2. 생애

의자왕의 5남으로 알려졌다. 무왕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으나, 현재는 의자왕의 다섯 번째 아들이란 것이 정설이다. 의자왕 아들설은 속일본기에 '부여풍장과 부여선광은 의자왕의 아들'이라고 명시돼 있기 때문이며, 무왕 아들설의 근거는 일본서기에서 '왕자 부여풍'을 일본에 보낸 게 ' 조메이 덴노 3년'이라고 돼 있는데, 조메이 덴노 3년이 서기로는 631년이고 백제 무왕 32년이기 때문에, 부여풍이 무왕 시기에 왕자였으면 무왕의 아들이란 것이다. 다만 무왕 아들이란 설이 맞는다면 속일본기 기록이 틀렸거나 혹은 삼촌과 조카가 이름이 같다는 무리한 가정을 해야 하기 때문에 보통 의자왕의 아들로 본다.

일본서기》에 부여풍의 다른 이름으로 추정되는 '규해(糺解)'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부여규해가 또 다른 백제 왕자라는 설도 있지만 동일 인물이 맞다면 그 이름이 초명(初名)이거나, 자(字), 호(號)로 추정된다.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에서 교차검증으로 왜국으로 보내진 인질로 서술되었다.

다만 이는 《일본서기》 특유의 윤색이나 거짓말일 가능성이 크다. 거의 동시대 사람인 김춘추도《일본서기》에서 인질이라고 서술되는데, 642년 고구려로 외교사절로 파견되었고, 647년에 왜국으로 갔으며, 1년도 채 안 돼서 다시 648년 당나라로 건너갔다. 당시 김춘추가 신라 내에서 차지한 입지를 보면, 인질로 파견될 인물도 아니고, 인질이 되었다면 1년도 채 안 돼서 빠져나와 당나라로 파견될 리도 없다.[7][8][9] 부여풍은 김춘추와 비슷한 시기인 조메이 덴노 3년 즉, 631년에 인질로 파견되었다고 적혔지만, 후에 백제가 멸망하고 왜왕이 백제로 송환하며 준 왜군 5천 명과 수하에 왜국 장군들을 거느리고 재건 운동에 투신한 상황을 짐작하면, 인질이라는 표현은 윤색이나 과장일 가능성이 크다.[10]

형으로는 의자왕의 장남 부여융, 차남 부여태, 3남 부여효, 4남 부여연이 있었으며, 동생으로는 《일본서기》에만 전해지는 부여충승(忠勝)과 부여새성(塞城)이 있었다.[11][12] 660년 백제 멸망(사비성 함락) 당시에는 왜국에 머물고 있었으며, 장남도 아니었으니 시대가 평안했다면 왕이 될 일은 없었겠지만 백제의 급속한 붕괴 이후 의자왕과 태자 부여효, 부여융 등을 비롯해 의자왕의 왕자들이 당나라로 끌려간 뒤 국왕이 없어진 백제의 옛 대신들이 왜국에 요청해, 왜 왕실의 협조를 받아 귀국, 백제부흥운동에 나섰다.

의자왕은 아들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적자인지 서자인지 불명이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모두 '인질'이라 명확히 표기된 인물임을 고려하면 서자일 수도 있으나, 아무리 부여풍이 5남이고 위의 형 4명이 당나라에 잡혀갔다지만 정황상 안 잡히고 은신에 성공한 아들들이 더 많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굳이 각종 수고를 감수하고 왜에 완전히 정착하다시피 했던[13] 부여풍을 불러들여 왕으로 옹립하려 한 것으로 보아 적자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

2.1. 백제부흥운동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가 660년 7월 18일 의자왕의 항복으로 멸망했으나 웅진성~사비성 주변의 수도권[14]만 나당연합군에게 기습적으로 점령당했고, 지방 영토의 대부분과 지방군은 건재한 상황이었다.[15] 백제의 변방에서는 귀실복신 흑치상지, 지수신, 사타상여, 승려 도침 등이 임존성[16] 주류성[17]을 근거지로 세력을 넓히며 백제부흥운동을 이끌었고, 의자왕과 대부분의 왕자들이 당에 끌려가 왕위가 비어 있었으므로 당시 31년간 왜국에서 질자로 지내고 있었던[18] 왕자 부여풍을 백제로 보내달라고 660년 10월 왜국측에 사신을 보내 요청했다. 이에 부여풍은 동생(혹은 아들?) 부여선광[19]을 왜국에 남겨두고 1년이 지난 661년 9월 옛 백제 땅에 귀국했다.

파일:external/67.media.tumblr.com/tumblr_obwi1cKeHN1sqk8veo4_1280.png

660년 8월, 전격적으로 봉기한 백제 부흥군은 순식간에 200여 개의 성이 호응[20]하며 군을 몰아냈다. 당군은 13만 명에 달하는 대군이 상륙하여 일거에 백제의 웅진성과 수도 사비성을 점령했지만, 잔당 처리에는 적은 병력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벌써 대부분 병력이 본국으로 귀환한 상황이었다.[21][22]

그리고 여세를 몰아 9월 23일 옛 도읍 사비성을 포위하고, 또한 웅진성도 공격하며 옛 백제 땅을 거의 되찾는 듯 했으나, 신라군의 급습으로 백제 부흥군은 성 20여 개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때부터 내분의 조짐이 보였는데, 《일본서기》에는 도읍을 정하는 과정에서부터 분열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겨울 12월 병술(丙戌) 초하루: 백제왕(百濟王) 풍장(豊璋), 그 신하 좌평(佐平) 복신(福信) 등은 사이노 무라지(狹井連)[23], 에치노 타쿠츠(朴市秦 田来津)[24]와 의논하기를 “이 주유(州柔)[25]는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며, 이곳은 방어하기 좋아 싸울 만한 곳일 뿐이다. 여기에서 오래 머문다면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니 이제 피성(避城)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피성은 서북쪽으로는 띠를 두르듯 고련단경(古連旦涇, 충남 당진군 신평면에 흐르는 신평천)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둑으로 된 제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땅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랑을 터트리면 물이 쏟아진다. 꽃과 열매가 있는 나무에서 얻는 토산물은 삼한(三韓)에서 가장 기름질 것이며, 옷과 음식의 근원은 천지 사이에 숨어 있는 곳일 것이다. 비록 낮은 땅(평지)이라고 하지만 어찌 옮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에치노 타쿠츠가 혼자 나아가 “피성과 적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서로 이렇게 매우 가까우니 만약 예기하지 못한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굶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않는 것은 주유가 산이 험한 곳에 있어 모두 방어물이 되며,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은 땅에 머물면 어찌 굳건히 살겠으며 흔들리지 않음이 오늘날에 미치겠습니까?”라고 간하였다. 끝내 (백제왕은) 간하는 말을 따르지 않고 피성에 도읍하였다.
일본서기》 권 제27 < 덴지 덴노>

이렇게 부여풍은 복신과 왜군 장수 타쿠츠의 의견을 묵살하고 자기 뜻대로 피성을 부흥운동의 새로운 수도로 정했지만, 천도한 직후 김흠순 천존이 이끄는 신라군이 백제 남부로 쳐들어와 지금의 전라북도 일대인 거열성, 거물성, 사평성, 덕안성을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26] 《일본서기》에 의하면 이 4개 성을 신라에 빼앗긴 후 피성과 국경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져 위험했으므로 결국 두 달만에 다시 주류성으로 환도하게 되었다. 이런 의견 충돌과 잘못된 판단이 후술할 백제부흥군의 내분과 연결되었을 수 있다.

백제 부흥군은 나당연합군에 3년(햇수로는 4년)간 저항했으나 부흥군의 주요 세력인 복신 도침간의 주도권 다툼으로 내분이 일어나 결국 도침이 복신에 의해 살해당했고, 복신이 풍왕마저 죽이려 하자 풍왕이 선수를 쳐 복신을 살해했다.
“당시 복신이 그 병권을 오로지 한 뒤 부여풍과 점차 서로 시기하였다. 복신이 병이 들었다고 하고 굴실(窟室)에 누워 있으면서 장차 부여풍이 문병오면 습격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부여풍이 이를 알고 그가 믿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불의에 습격하여 죽였다”
신당서》 권 제220 <동이 열전> 제145

여름 5월 계축 초하루 이누카미노 키미(견상군, 犬上君)[27]가 달려가 군사에 관한 일을 고려(高麗)에 알리고 돌아왔다. 석성(石城)[28]에서 규해(糺解)를 보았는데 규해가 복신의 죄를 말했다.
6월 전장군(前將軍) 카미츠케노노 키미 와카코(上毛野君 稚子) 등이 신라(新羅)의 사비기노 강(沙鼻岐奴江)[29] 근처 2개의 성을 빼앗았다. 백제왕 풍장은 복신이 모반하려는 마음을 가졌다고 의심하여 손바닥을 뚫고 가죽으로 묶었다. 이 때 스스로 결정하기 어려워, 할 바를 알지 못했으므로 여러 신하에게 “복신의 죄가 이미 이와 같으니 목을 베는 것이 좋겠는가 아닌가”하고 물었다. 이에 달솔 덕집득(德執得)이 “이 악한 반역 죄인은 풀어주어서는 안됩니다”고 하였다. 복신이 곧 집득에게 침을 뱉으며 “썩은 개와 같은 어리석은 놈”이라고 하였다. 왕이 시종하는 병졸들로 하여금 목을 베어 머리를 소금에 절이도록 하였다.
일본서기》 권 제27 < 덴지 덴노>

복신은 뛰어난 지휘관으로서 초기 부흥운동을 지도했고 백제부흥군이란 것도 복신이 쌓아올리고 부여풍은 외부에서 영입한 인사였으므로 복신의 공백은 부흥군의 사기에도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렇게 내분에 빠져 전력을 소진한 백제부흥군은 663년 9월에 3만여 명에 달하는 왜군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아 분위기를 쇄신하려고 했다. 그리고 백강에서 당군과 대치했는데, 알고보니 당군을 이끄는 장수는 부여풍의 친형 부여융이었다.[30] 백제부흥군이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내세우자 당나라는 부여풍보다 직계 왕족인 부여융을 전향시켜 내세운 것이다.
파일:external/67.media.tumblr.com/tumblr_obwi1cKeHN1sqk8veo5_1280.png
백강 전투

결국 백제 - 왜국 연합군은 백강 전투에서 부여융을 포함한 신라 - 당 연합군에 의해 대패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안정복 등을 비롯해 학자에 따라선 왜국의 지원군을 포함한 백제 부흥군이 백강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부여풍이 고구려로 도망간 시기를 백제라는 국가의 멸망으로 보기도 했다. 660년에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고, 웅진성에서 예식진의 매국 행위로 의자왕이 끌려갔지만 사실 200년 전에도 개로왕이 전사하고, 위례성이 털리며 한성백제가 멸망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31] 660년의 멸망은 두 번째, 풍왕의 몰락이 실질적인 멸망이라고 본 것이다.

2.2. 고구려 망명

백강 전투에서 부흥군과 그를 돕던 왜군이 당의 수군에 그야말로 박살이 나자 풍왕은 차고 다니던 보검도 떨군 채[32] 측근 몇 명과 함께 북쪽의 고구려로 도주했다. 아직 주류성이나 임존성의 지수신 등 부흥군이 일부 남아있었지만 수만명의 본대가 전멸한 이상 패배는 시간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을 잃고도 일주일 넘도록 주류성을 지키던 충승, 충지도 더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는지 남아있는 백제군, 왜군을 거느리고 9월 8일 항복, 임존성도 흑치상지 사타상여의 배신으로 2달 뒤인 663년 11월에 곧 함락되면서 백제 부흥운동은 사실상 끝났다.[33]

고구려로 달아난 뒤의 행적은 당나라의 장군 유인궤의 상소문에 "부여풍이 고구려로 도망가서 왜국에 있는 자기 동생 부여용과 내응하고 있다"고 한 것이 유일하다.

이후 고구려도 연개소문이 죽고, 연씨 집안내에서 내전이 일어나 666년, 대막리지 연남생이 당나라에 항복하면서 위기에 빠지는데, 노태돈 교수는 《 속일본기》의 기록에 근거해 이 당시 고구려가 일본에 저자세로 병력 지원을 요청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일본서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666년 정월, 10월, 그리고 말 그대로 멸망하기 일보 직전인 668년 7월에 일본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 당시 고구려가 일본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협상해볼만한 일은 지원 요청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 고구려에는 일본과 연줄이 있는 부여풍이 망명해 있었고, 일본은 663년 백제부흥군의 백강 전투에 지원군을 실제로 보낸 전례도 있었으므로 고구려 역시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했다는 주장. 하지만 일본은 이미 백강 전투에서 병력을 날려먹은데다 지리적인 거리도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를 도울 처지가 아니었다. 백제부흥군이 몰락한 이후 한반도에서 발을 빼서 나당연합군이 일본 열도에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 신라에 우호적인 태도로 전환했고, 한편으로는 성을 쌓고 방어 태세를 갖추는 중이었다.

결국 부여풍은 자신이 이끌던 백제부흥군의 패망 5년 뒤인 668년 9월 21일에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는 바람에 결국 포로로 잡혀서 당나라에 압송되었고, 영외(嶺外)로 유배를 갔다. 이후의 생애는 전해지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부여풍이 다시 도주해 일본에 갔다는 가설도 제기되었다.

왜국에 있었다는 풍왕의 동생 부여용에 대해서는 부여선광[34]과 동일인이라는 설도 있고, 혹은 다른 백제 왕족이라는 설도 있다.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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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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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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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음력 7월 18일, 율리우스력 8월 29일 [2] 668년 고구려 멸망 때까지 살아있었다가 당으로 압송된 이후 행적을 알 수 없다. [A] [4] 일본서기》, 《 일본세기 [5] 오오노 오미 코모시키(多臣蔣敷)의 누이 [6] 일본 신사 측 문헌인 《비목대명신록기》에만 등장한다. 일본서기 등에는 전혀 나오지 않아서 실존 인물인지는 의문이다. [7] 고구려와 당나라에서 수행한 그의 행적들을 보면 다분히 외교사절의 성격이 강하지, 절대 인질로 파견될 인물도 아니거니와, 동북아시아 당대 최강자였던 고구려와 당나라에서도 인질 취급을 안 받았는데 왜국에서 인질 취급을 받을 리가 없다. [8] 다만 후대의 각색에 의해 연개소문에게 억류되었다는 소리가 있지만, 정사는 아니고, 연개소문과 보장왕은 융숭히 대접했으나, 신라와 연합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무리한 조건을 내세워 돌려보냈다. [9] 친백제파 일색인 왜국 조정에서 일부러 신라의 사신인 김춘추를 하대했을 거라는 견해도 있는데, 친신라파를 자처하는 소가 집안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무렵이었고, 또 7세기 초반이면 이미 왜국은 외교 다각화를 꾀하며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 물론 쇼토쿠 태자의 망상이 가득 담긴 편지를 보고 수양제는 분노했고, 또 받은 답신은 도중에 백제인에게 빼앗겼다고 《일본서기》가 전하지만.. [10] 참고로 《일본서기》에서 인질이라고 서술하는 백제 왕자는 백제 역사상 부여풍과 그의 동생의 경우 밖에 없다. 삼국사기에서 인질이라고 말하는 전지왕이나 부여곤지도 인질이라는 소리는 없다. [11] 다만 부여새성(塞城)은 부여풍의 동생으로 전해지지만 《일본서기》의 다른 기록에서는 부여풍의 숙부, 즉 의자왕의 동생이자 무왕의 아들로 전해진다. 일각에서는 동명이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12] 부여새성(塞城)은 후에 부여풍과 함께 백제로 귀국하여 백제부흥운동에 투신했다. [13] 부여풍의 아내는 왕후 오호노오미씨로, 오호노오미(多臣)씨는 일본 귀족이지만 대왕가조차 아니다. 백제인 아내가 없었다는 건 위의 형이 넷이나 되어 계승권에서 배제되다 보니 백제 내에 기반(혼맥)이 없었고 부여풍도 여생을 일본에서 보낼 거라 생각하고 굳이 대성팔족과 혼맥을 만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4] 지금의 충청남도 일대. [15] 따라서 백제의 멸망을 의자왕이 붙잡힌 660년이 아니라 풍왕의 통치가 끝나는 663년이라고 주장하는 소수설도 있다. [16]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군으로 추정. [17] 지금의 전라북도 부안군으로 추정. [18] "부여풍은 왜국에서 인질로 지내고 있는 자이다(扶餘豊, 甞質於倭國者)." 이것은 《 삼국사기》의 표현이다. 《 일본서기》에도 조메이(舒明) 덴노 3년에 풍이 인질로 보내졌다고 나오긴 한다. 부여풍의 경우에는 선례와 다르게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에서 교차검증으로 인질이라고 확인되고 있다. [19] 부여선광은 일본 귀족으로 편입되어(쿠다라노 코니키시 요시미츠) '황족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20] 애초에 백제 지방군은 의자왕이 항복을 하건, 백제가 멸망을 하건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가 부여풍을 왕위에 올리는 과정에서야 합세했다는 견해도 많다. 지방 귀족 세력의 병력 합류가 기록으로 나오지 않은 백제의 멸망 과정을 보면 심히 설득력이 있다. [21] 굉장히 묘하게도 1400여 년 후 이라크 전쟁의 상황과도 매우 흡사하다. 빠르게 주요 지도부를 포함한 수도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자 주요 전투 병력 대부분이 철군하고, 남아있던 잔병들이 저항 세력을 형성하여 게릴라전을 포함한 비정규전이 벌어지는 향상이었다. [22] 사실 이는 참수작전의 양날의 검과 같은데 빠른 전쟁 종결을 가져온다는 이점은 있으나 지방군이 건재하여 이들을 회유하지 않아 저항세력으로 변하게 되면 전면 침공을 하는 것 보다 못한 상황을 가져온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발해부흥운동이 있다. [23] 이름이 누락됐다. 풀네임은 사이노 무라지 아지마사(狹井連 檳榔). [24] 풀네임은 에치노 하타노미야츠코 타쿠츠(朴市秦造 田来津). 아지마사와 타쿠츠는 백제인이 아닌 왜국에서 파견한 사람들이었다. 타쿠츠는 훗날 백강 전투에서 전사했다. [25] 주류성(周留城)을 가리킨다. [26] 백제부흥군의 4개성을 신라군이 점령한 것은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모두 나온다. [27] 이름은 누락됐다. [28] 현재의 부여군 석성리로 추정 [29] 학자마다 해석이 달라 어디인지 확실하지 않다. [30] 부여융은 660년 사비성 함락으로 아버지 의자왕과 함께 붙잡힌 직후 당에 투항했다. 이후에도 부여융은 신라에 의해 쫓겨날 때까지 당나라가 설치한 웅진도독부의 수장인 웅진도독으로 재직했다. [31] 《일본서기》는 이때 "백제가 멸망했었다."라고 기록했으며, 실제로 운좋게 개로왕의 동생인 부여문주가 신라에 원군을 구하러 간 상황이 아니었다면 왕족이 전멸해 아예 부활이 불가능했을 가능성이 높다. [32] 구당서》 <유인궤 열전>에 백강 전투 이후 당군이 풍왕의 보검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33] 나당연합군에 투항하지 않았던 부여자신, 목소귀자, 억례복류, 곡나진수 등의 백제부흥군 잔당들은 패퇴한 일본 수군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34] 일본에서 백제 왕족에게 부여된 쿠다라노코니키시씨의 선조. [35] 부여사의 망명은 일본 미야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 측 문헌에서만 나온다. 부여사 망명 기록 이후 정가왕이 나오기 때문에 부여사 - 정가왕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게 아니냐는 추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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