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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2 15:44:27

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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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구(四盜寇)
이각 곽사 장제 번조

후한의 대사마, 거기장군
지양후
李傕
이각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00px-Li_Jue_and_Guo_Si_sack_the_capital_at_Chang%27an.jpg
<colbgcolor=#232323><colcolor=#BDBDBD> 작위 <colbgcolor=#ffffff,#191919>지양후(池陽侯)
최종 관직 대사마(大司馬) 겸 거기장군(車騎將軍) 겸 가절(假節) 영 사례교위(領 司隷校尉) 겸 개부(開府)
성씨 (李)
이름 (傕)
치연(稚然)
생몰 ?~198년
고향 양주(凉州) 북지군(北地郡)
가족 조카 이리(李利)


[clearfix]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로, 동탁의 수하 장수이자 군벌이다.

2. 정사 삼국지

정사 삼국지에서는 첫 등장이 이렇다. 손견 호진을 발라 버리고 화웅을 참살하자 동탁이 이각을 사신으로 보내서 손견과 화친을 맺도록 조치했다. 그 조건은 아들들에게 자사나 태수의 직책을 준다는 것. 그러나 손견은 역적과 같은 편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동탁과의 화친을 거절했다.

동탁 장안으로 천도한 이후 낙양에 남아 주둔하던 주준 원술과 내통하던 것이 발각되어 형주로 도망쳤는데, 형주에서 세력을 키운 뒤 다시 낙양을 공격해 동탁이 임명한 하남윤 양의[1]를 죽이고 사예에 주둔하고 있었다. 주준은 서주자사 도겸이 정병 3천여 명을 보내주어 물자의 보급을 약간 받게 되었다. 도겸은 주준을 추대하고 거기장군의 직무(행 거기장군)를 행하게 했다. 동탁은 이것을 듣고 부장 이각·곽사 등 수만 명에게 하남을 지키고 주준을 막게 했다. 주준은 요격하지만, 이각·곽사에게 패했다. 주준은 자신의 군대가 이룰 수 없음을 깨닫고, 관 아래에 머무르며 굳이 전진하지 않았다. 이각은 주준을 격파한 뒤 형, 예주 일대의 백성들을 대량으로 학살하고 일대를 완전히 초토화시켰다. 진류를 노략질하고 영천 여러현의 남녀를 사로잡거나 죽였기에, 지나가는 곳마다 남아나는 것이 없었다.

또 당시 동탁에게 살해된 소제의 황후이던 폐황후 당희가 고향인 영천으로 돌아가던 중 영천군에 쳐들어온 이각의 청혼을 받았는데 당희가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당희는 다행히 이각에게서 살아남았고 훗날 헌제에 의해 보호받아 천수를 누렸다고 한다.

동탁이 죽었을 때 채옹 등이 왕윤에게 살해당했지만 이각은 그나마 동탁이 본의 아니게 물려준 병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왕윤에 의해 압송당하는 것만은 모면했다.

동탁이 죽자 잘못을 빌며 사면을 청하지만, 왕윤의 강경한 태도로 인해 사면이 어렵게 되자 군사를 해산하고 도망치려 했다가, 어차피 죽을 거 반격이라도 해보자는 가후의 제안을 받자 생각을 바꿔 양주인들을 선동하며 돌아와 장안성(長安城)을 공격했다. 여포가 이를 막지 못했고 마침내 이각 등은 장안으로 들어왔다. 왕윤이 소식을 듣고, 이에 동탁의 옛 장수 호진, 서영을 신풍으로 보내 공격하였다. 호진의 무리는 항복하였고, 서영은 호진와 양정에게 배신당해 전투 중에 사망하였다. 이각은 길마다 병사를 거두어, 이에 장안에 이르자 그 무리가 십여만명이 되었으며, 더불어 동탁의 옛 부곡인 번조, 이몽 등과 합하여 장안을 포위한다. 성이 높아 공격이 불가능하여, 지키길 8일이 되니, 여포군의 수병(叟兵)이 내부에서 반란하여, 위위 충불 등을 살해했고 이각의 무리를 성안으로 들어오도록 하였다. 결국 장안은 성이 무너지고, 병사들이 노략질하여, 죽은 사람만 1만여명이 되었다. 여포와 성 안에서 싸웠는데 여포가 패해 달아났다.[2] 여기서 이각 등은 멈추지 않고 오히려 군사를 풀어 장안의 노소(老少)를 약탈하고 모두 죽이니 죽은 자들이 넘쳐나고 유혈이 낭자했다. 동탁이 죽은 후 60일이 지나 여포 또한 패하여 추방되었고 왕윤도 죽었으며 이각과 곽사 헌제를 옹립하여 권력을 잡았다. 그 후 거기장군, 개부, 영사예교위, 가절, 지양후의 관직을 얻고 그걸로도 부족했는지 대사마까지 얻었다.

그리고 《 후한기》의 기록에 따르면 헌제는 자신의 이복형인 소제를 독살시킨 죄를 물어 이유를 참수형에 처하려고 했으나, 이각이 나서서 헌제를 윽박지르며 " 동탁의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잘못을 저지른 불쌍한 노인네를 왜 굳이 죽이려 한단 말입니까!"라고 일갈하며 이유의 참수를 막았다. 이유는 이각 덕에 목숨을 부지하긴 했으나 헌제의 권위는 더욱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여포를 격파해 장안을 장악한 후 이각은 장안에 쳐들어온 마등, 한수를 물리쳤고, 마등을 지원한 유언도 패퇴시키는 기염을 토한다. 당시 마등은 이각으로부터 사사로이 구함이 있었는데, 얻음이 없자 그에 성을 내어, 한수와 더불어 시중 마우, 우중랑장 유범(유언의 아들), 전 양주자자 충초, 중랑장 두품과 군사를 합하여 이각을 공격했으나 잇다른 전투에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각은 형의 아들 이리와 곽사, 번조가 함께 마등의 무리들과 장평관(長平觀) 아래에서 싸우도록 하였다. 여기서 한수와 마등은 패하여 겨우 살아돌아갔으며, 이각은 마등의 군사 1만여급을 참수하였으며, 충초, 유범 등도 모두 죽었다.

이때 자기들과 같이 왕윤에게 대항했던 번조가 고향 친구인 한수와 싸우다가 정 때문에 놔줬다는 이유로 번조를 주살한다. 세력 싸움에서 밀린 장제 역시 장안에서 나와 홍농에 주둔했으므로 장안은 이각, 곽사의 세상이 된다.

다만 이각은 원소가 세력을 키우는 것을 두려워하여 원술, 공손찬, 도겸, 장연 등에게 작위를 주는 회유책도 썼다. 장제가 홍농으로 간 이후엔 곽사와 함께 장안을 분할하여서 통치하였는데, 통치력이 전무한 수준이라, 병사들로 하여금 도적을 잡게 하기는커녕 마음대로 하게 놔둬서 사람들이 도적보다 이각의 병사를 더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기근까지 발생하며 여러 막장 행정으로 인해 결국 장안에서는 식량 가격이 폭등하여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등 장안의 상태는 막장으로 치달았다. 당시 장안에는 30만 호가 살고 있었는데 이각, 곽사가 다스리는 단 2년 동안 이 사람들의 대부분이 죽었다고 한다. 흠좀무...

이후 이각의 부인과 곽사의 부인이 서로 불구대천인 탓에 각자 자신들의 남편 사이를 이간질했다. 하루는 곽사가 이각에게 초대되어 이각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귀가했는데 곽사의 부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각이 음식에 독을 타서 곽사를 죽이려 했다고 말하고 이에 곽사는 이각의 집에서 먹고 온 음식을 토하기 위해 똥물을 마셨다. 이것 때문에 '원술=꿀물'처럼 '곽사=똥물'의 이미지가 생겨버렸다. 이 소식을 이각의 아내로부터 이각이 듣게 되었고 이 때문에 이각은 곽사와 사이가 틀어져서 곽사가 이각과 더불어 번갈아가며 서로 의심하다가 장안 내에서 전투했다. 이각이 공경들을 곽사에게 보내 화해를 청하게 하자 곽사가 거부하며 이들을 모두 붙잡아 두었고 여러달 동안 서로 공격하니 죽은 자가 1만명을 헤아렸다. 싸우던 도중 헌제가 도망치자 다시 화해하여 헌제를 쫓는다. 이에 헌제가 다른 군벌들에게 도움을 청하여 헌제를 중심으로 세력이 형성되지만, 이각, 곽사는 천자를 동쪽으로 보낸 것을 후회하고 있었고 장제와 함께 연합해서 추격하여 홍농군 동간현에서 크게 싸웠다.

여기서 동승, 양봉의 천자군은 맞서 싸웠으나 이각, 곽사, 장제 연합군에게 크게 패하고 만다. 천자군은 백관사졸이 죽은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고, 모두 그들의 아내와 딸, 치중을 버리고, 임금이 쓰는 물건, 임명장을 엮은것, 법전이 빠짐없이 노략당한다. 이각, 곽사, 장제 군은 부녀자의 의복과 이부자리를 약탈하고 시간을 끌다가 불시에 해제하여 곧 베고 찔렀으며, 아름다운 머리털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잘라서 취했다. 이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젖먹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빠져죽거나 얼어죽어 물에 떠다녔으며, 다른 사람들은 언덕 옆을 기어가거나, 황제를 따라 스스로 아래로 몸을 던져 죽거나 심하게 다쳤고, 서로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하였다. 게다가 서로 배에 오르려 다투며 넘어지니, 통제하지 못하고, 동승은 창(戈)으로 내리쳐 헤치니, 배 안에 손가락이 잘린 사람들이 참혹하게 있었다. 궁녀들은 모두 이각의 병사들이 노략하여 빼앗았고, 얼어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헌제가 가까스로 추격에서 벗어나 황하를 건너 달아나자 장제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고 이각, 곽사도 그다지 추격할 의지를 보이지 않았고 헌제가 사절을 보내 강화를 제의하자 약탈품 몇 개를 돌려보내기도 한다. 정치적 식견이라곤 먹고 죽을래도 없던 이각, 곽사의 생각에서는 "아늑한 장안 놔두고 우리가 뭐가 아쉬워서 밖에서 이 고생을 하고 있지??" 정도의 계산이었던 듯.[3]

그렇게 장안으로 돌아가지만 황제가 없는 이상 대사마니 대장군이니 하는 걸 인정해줄 사람은 없었고, 황제라는 구심점을 잃고 내부의 반란이 들끓어 부하들이 배신하고 이탈하기 시작하여 점점 세력이 약해지자 이각은 결국 도적으로 전락하고 만다. 나중에는 알자복야 배무 단외등 관중의 장수들을 설득해 이각을 토벌하러 왔다. 이각은 그들과 맞서 싸웠으나 패하고 붙잡혀 가족과 함께 처형되었으며 삼족이 멸해졌다.

후한기에 따르면 그의 아들인 이식(李式)은 어머니 하씨가 이식을 지나치게 좋아해 곽사가 인질을 요구하자 거절하면서 이식의 자매를 보냈고 이각이 토벌될 때 언급은 없지만 삼족이 살해당했다고 했으므로 이 때 죽었다.

여기까지 벌어진 일을 삼보의 난이라 칭한다. 당초 헌제가 관중으로 들어갔을 때, 삼보의 호구는 늘 수십만이었으나 이각, 곽사가 서로를 공격할 때부터 천자가 동쪽으로 돌아간 이후 장안성이 40여일간 비었으며, 건강한 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나약한 자들은 서로를 잡아먹었으니, 2~3년 동안에는 관중으로의 사람의 왕래가 없었을 정도라 한다.

3. 삼국지연의

연의의 피해자 중 한 명으로 연의에서는 휘하 장수들보다 무당 미신을 중시하는 바람에 인망을 잃은 걸로 묘사된다.[4]

또한 정사에서의 군사적 능력도 아예 없는 걸로 나와 여포에게 털리다 가후의 계책으로 승리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나중에는 황제를 추격하다 조조에게 간단히 패배해 쫓겨나기나 한다. 정사에서는 황제가 황하를 건너자 추격 의지를 보이지 않았고 조조와 싸우지도 않았기에 이 역시 연의와 다른 부분.

4. 평가

흔히 동탁이 죽고 권력쟁탈전에서 싸우던 곽사와 함께 찌질한 장수 세트로 취급되고 실제로 이각이나 곽사나 정치에 대한 개념이 뇌 속에 전혀 들어있지 않은 듯 찌질 행보가 극을 달리지만 군사적 능력만큼은 진짜로 뛰어났고 동탁이 중용한 이유 중 하나이다. 연의와 연의를 바탕으로 한 요코야마 미쓰테루가 그린 전략 삼국지이 전략 삼국지의 디자인을 차용하는 등의 영향을 받은 코에이 삼국지의 영향력으로 평가 절하되는 경우가 많지만 동탁은 그 시기에 가장 강력한 군벌이었고 그 휘하 핵심 무장은 양인 전투 패배의 원흉 여포가 아니라 이들이었다.

흔히 이들의 승리는 책사 가후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오해하지만 정사에서 가후는 왕윤과 싸워야 한다고 했을 뿐 전투 중 이각을 위해 계책을 내 준 적이 없다. 그렇다고 대전 상대인 왕윤, 마등이 약했던 것도 아닌데 왕윤은 황건적 토벌에 공을 세운 장군이며, 마등도 흉노와 도적 장백기를 물리치는 등 군사적으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각은 전투 능력은 뛰어났지만 그 외의 능력이 너무 형편없었고 인성도 말그대로 막장이라서 악행을 일삼아 황제랑 대신들, 백성들의 증오를 받았으며 자기 분수도 모르고, 사람들을 다스릴 줄도 몰라 눈 앞의 욕망에만 탐닉하다 패망하고 말았다. 만약 이각과 곽사가 뛰어난 군사적 재능은 둘째치고 적어도 최소한의 통치 능력을 갖추고 서로 의심하며 사람들을 약탈하고 학살하는 막장 짓만 안했어도 삼국지의 판도는 완전히 변했을 것이다.[5] 적어도 동탁은 자기가 즉위시킨 헌제에 대해서는 눈꼽만큼의 피해조차 입히지 않았고 휘하 병사들을 장악하고 인심을 얻은 통솔력은 한 수 위였다. 또한 청류파 인사들과 황보숭, 손견 같은 인재들을 어떻게든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애쓰기까지 했지만[6] 이각은 그런 거 없이 자기 마음에 눈꼽만큼이라도 안들면 일단 죽여놓고 봤다. 이 때문에 당대 최고의 대도시 중 하나인 장안은 이각이 하도 사람을 죽여대는 통에 거의 허허벌판에 가까운 상태로 전락하고 말았다. 연의의 영향으로 장제 번조를 합쳐서 4인 세트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질적인 힘이나 발언권은 이각, 곽사가 훨씬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점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헌제를 손에 넣은 후 관직을 요구하는 부분인데 이각, 곽사가 각각 대사마, 대장군 직을 요청한 것과 달리 장제와 번조는 그보다 격이 낮은 표기장군과 우장군 직위를 원했다.

다만 이들의 전적은 병력의 질과 양에서 우위에 있어서 그랬다는 시각도 있다. 당시 이들이 가진 병력은 하진의 중앙 금군과 서량에서 날고 기던 병력들이 합쳐진 것인데 수도 많으니 깽판을 쳐도 누가 막겠느냐는 것이다. 특히 하진의 군대는 말 그대로 후한 황제의 친위대였으니 그 병력의 질적수준은 설명조차 필요없는 후한 전토 최강 수준이었다. 저 당시에 관동 군웅들 중 어느 세력도 그만한 병력이 없었다.[7] 하지만 그만한 병력을 갖추고도 보급과 운영을 제대로 못 해 병력이 흩어지고 세력을 카리스마로 묶어 앞으로 나아가질 못했으니, 용맹만을 가진 자가 운 좋게 많은 병력으로 패악을 부리다 망했을 뿐이라는 것.

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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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촉한 양의와는 동명이인이다. [2] 이때 곽사가 여포와 현피를 떴지만 쳐발렸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이각은 곽사의 패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투를 치렀다. [3] 한편 그렇게 이각 무리로부터 벗어난 헌제는 우여곡절 끝에 동탁이 장안으로 튀면서 박살냈던 낙양에 돌아가서 자리를 잡게되고, 이를 조조가 자신의 근거지인 허창으로 천도시키고 옹립하면서 천자를 등에업고 세력을 크게 성장시키는 발판이 만들어진다. [4] 단, 전투 능력 한정. 아래 읽어보면 알겠지만 연의에서의 그냥 찌질이가 알고보니 싸움은 잘했던 찌질이였다 정도다. 오십보백보 [5] 당장 헌제와 대신들이 야반도주했던 원인이 이 둘이 그들을 대놓고 무시하며 깽판을 친 것이란 것을 생각하면 간단하다. [6] 물론 황보숭은 동탁의 휘하로 등용되었지만 손견은 동탁을 불구대천으로 인식하고 있어서 실패했으며 동탁이 포섭한 청류파 인사들마저 외지로 부임하자 마자 반동탁 연합군을 일으켜 제대로 뒤통수를 쳤다. [7] 그래도 군략에서는 적어도 전투현장 내에서의 전술 측면만으로만 보면 기본은 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비슷한 질적 수준의 병력 혹은 금군과 동탁 친위대의 분열 자체가 부재했기에 더 나은 질적 수준의 병력일 가능성이 크던 동탁 생존시의 동탁군을 이끌고서도 쓸모없이 병력을 휴식 없이 몰아다가 정작 전투 현장에서는 본인의 멘탈이 깨진 상태로 겁을 먹어 오인보고를 하며 양인 전투에서 손견에게 스스로 무너지며 패배했던 여포도 있다. 물론 그 병력을 갖고서 전투에만 능했고 권력 장악 후 내분으로 스스로 몰락하다가 보급문제를 약탈에 전적으로 의존한 정치력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한 마디로 제일 크게 성공해봐야 전방 사령관 정도의 역량만을 가진 사람이 싸우는 재주 하나로 군주가 되며 생긴 한계의 극단적 사례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