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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8 02:35:14

막시밀리안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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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2세 }}}
[대립왕]: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가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점령하고 오스트리아 대공위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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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트반 3세 벨러 3세 임레 라슬로 3세
언드라시 2세 벨러 4세 이슈트반 5세 라슬로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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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드라시 3세 벤첼 오토 1세·벨러 5세 카로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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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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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조 제5대 황제
막시밀리안 2세
Maximilian II
파일:Nicolas_Neufchâtel_002.jpg
<colbgcolor=#ffcc20><colcolor=black> 제호 막시밀리안 2세 (Maximilian II)
출생 1527년 7월 31일
오스트리아 대공국
사망 1576년 10월 12일 (향년 49세)
레겐스부르크
재위기간 신성 로마 황제, 오스트리아 대공
1564년 7월 25일 ~ 1576년 10월 12일
로마왕
1562년 11월 28일 ~ 1576년 10월 12일
보헤미아 국왕
1562년 9월 20일 ~ 1576년 10월 12일
헝가리 크로아티아의 국왕
1563년 9월 8일 ~ 1576년 10월 12일
서명 파일:막시밀리안 2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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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c20><colcolor=#000> 배우자 스페인의 마리아 (1548년 결혼)
자녀 안나, 루돌프 2세, 에른스트, 엘리자베트, 마티아스, 막시밀리안 3세, 알브레히트 7세, 벤첼, 마르가레타
아버지 페르디난트 1세
어머니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
형제 엘리자베트, 안나, 페르디난트 2세, 마리아, 카타리나, 엘레오노라, 바르바라, 카를 2세[1], 요하나
종교 가톨릭 }}}}}}}}}

1. 개요2. 생애3. 스페인과의 관계4. 가족 관계
4.1. 조상4.2. 아내와 자녀
5. 여담

[clearfix]

1. 개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의 왕.

합스부르크 왕가의 군주들 가운데 유일하게 개신교[2]에 호의적이었다.

2. 생애

페르디난트 1세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의 맏아들로 어린 시절 백부 카를 5세가 통치하는 스페인으로 보내져 교육을 받다가 1548년 카를 5세의 장녀인 사촌 마리아와 결혼했다. 본래 카를 5세는 자기 아들 펠리페에게 모든 합스부르크 영토를 물려주고 싶어했으나 자신만의 입지[3]를 다졌던 페르디난트 1세의 세력의 반대에 부딪혔고, 이에 카를 5세 세력과 페르디난트 세력이 크게 대립하였다. 1552년에 막시밀리안은 갑자기 아픔을 호소하며 자리에 누웠다. 펠리페 지지 세력의 독살 의혹이 있었던 이 사건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결정적인 분열을 일으켰다. 결국 펠리페가 스페인 국왕이 되고 막시밀리안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것으로 일은 일단락되었다.
슈말칼덴 전쟁에서 작센-마이센 공작 모리츠와 친해졌다. 모리츠는 비록 개신교도였지만 막시밀리안의 아버지 페르디난트 1세와 동맹을 맺고 개신교파 제후의 대표인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를 공격했다. 모리츠 군영에서 개신교도 제후들과 친해진 막시밀리안은 전쟁 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자신도 개신교로 개종하려고 마음을 먹기도 했다. 그러나 부왕으로부터 상속권 박탈로 협박을 받자 개종을 포기하고 가톨릭 신앙을 지키기로 맹세했고 이를 인정받아 교황과 아버지에게 여러 번의 약속 끝에 결국 1562년 황제선거에서 독일왕으로 선출되었다. 이 때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와 천문학자 튀코 브라헤 요하네스 케플러를 중용했다. 1563년 헝가리 크로아티아 국왕으로, 1564년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앞서 모리츠를 비롯한 신교도 제후와 친했고, 자신도 신교도 신학에 더 마음이 끌리는데다가 에 있을 때도 루터교 전도사 제바스티안 파우저와 친하게 지냈는데 이 때 파우저의 영향을 받아 개신교도들을 호의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페르디난트 1세는 이런 막시밀리안의 행동을 좋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 2세는 얼마 되지 않아 파우저를 해임하고 미사에 열심히 참례하는 등 겉으로는 가톨릭을 열심히 믿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개신교를 탄압한 것도 아니었다. 특히 제국 내에서도 개신교는 루터파 신앙만이 공인되었음에도 자신의 영지 오스트리아나 보헤미아 왕국, 모라바 변경백국에서 당시 이단 취급을 받던 재세례파[4]들은 자유로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처럼 막시밀리안 2세는 종교적 중립을 유지했다. 막시밀리안은 임종 직전 다시 루터파로 개종하려고 시도했으나 선대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유언에서 절대로 개종치 않는다고 맹세했기 때문에 결국 개종하진 못했다.

막시밀리안 2세는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평신도도 성사를 집전할 수 있게 하는 정책을 추진했으나 교황 비오 5세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1568년에는 오스트리아의 루터파 개신교도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1566년 막시밀리안 2세는 오스만 헝가리로 쳐들어갔다. 이에 오스만 제국 쉴레이만 1세가 10만의 오스만 제국군을 이끌고 헝가리에 왔고 시게트바르(Szigetvár)가 함락되었다. 하지만 71세의 고령이었던 쉴레이만 1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 쉴레이만 1세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계속되었고 1568년 오스만 제국과 아드리아노플 휴전 조약을 체결했다. 조건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헝가리 서부 영토의 관할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서부 헝가리는 이미 합스부르크 가문이 다스리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에게 이런 조건을 내세울 필요가 없었기에,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의문을 샀다. 더불어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에게 3만 두카트의 연공을 바치기로 했기에 실질적으론 굴욕이나 다름없었다.

1570년 동헝가리 왕국 야노시 2세로부터 성 이슈트반 왕관을 양도받아 단독 헝가리 국왕이 되었다. 그리고 헝가리 왕위를 양도해준 대가로 야노시 2세를 에르데이 공작으로 인정해 줌으로써 에르데이 공국이 성립되었다.

1575년에는 폴란드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선출되었으나 가톨릭교도라는 것 때문에 폴란드 칼뱅파 개신교도 귀족들의 반발을 사 결국 폴란드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5] 폴란드를 침공하던 준비를 하던 중 1576년 10월에 레겐스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다음 제위는 합스부르크 군주 중 사실상 최악의 군주인 루돌프 2세가 승계했다.

3. 스페인과의 관계

막시밀리안 2세는 아버지인 페르디난트 1세가 스페인의 인판테였고, 큰아버지인 카를 5세, 사촌인 펠리페 2세는 스페인의 국왕이었으며, 심지어 아내 마리아까지 스페인의 인판타였음에도 반스페인 성향을 지녔다.

그의 반스페인 성향은 큰아버지인 카를 5세와의 경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막시밀리안 2세는 성인이 된 후부터 통치 경험을 쌓기 위해 카를 5세를 따라 제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는데, 그 과정에서 카를 5세와는 다른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다. 카를 5세는 자신과 자신의 아들이 주축이 되는 보편제국을 만드는 데에 전념했지만, 이는 막시밀리안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카를 5세가 추구한 보편제국은 종교 개혁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중부 유럽의 현실적 상황과 크게 동떨어진 개념이었고,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녔던 막시밀리안에게는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독일의 문화와 관습을 침범하는 행위로까지 다가왔다.

심지어 카를 5세는 동생인 페르디난트에게, 더 나아가 그의 아들인 막시밀리안에게 약속한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마음을 바꿔 펠리페에게 물려주고자 한다는 의사마저 내비쳤고, 그 전까지 우호적이었던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의 사이는 냉각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펠리페의 지지 세력이 막시밀리안을 독살하려 했다는 의혹까지 번지면서 막시밀리안은 카를과 펠리페, 스페인에 대해 극도로 강한 반감을 키웠다.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는 아버지 페르디난트 1세의 후손들이 대대로 선출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지만 막시밀리안과 펠리페의 관계는 불안했다. 두 사람은 거의 대부분의 요소에서 상충되는 성격이었다. 펠리페는 스페인인이었지만 막시밀리안은 독일인이었으며, 펠리페는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으며 엄숙한 성격이었지만 막시밀리안은 같은 이름의 증조할아버지처럼 외향적이고 카리스마가 있으며 쾌활하고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다. 펠리페는 개인적으로 군대를 지휘하는 것을 꺼렸지만 막시밀리안은 군대 지휘에 익숙했다. 결정적으로, 펠리페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나 막시밀리안은 루터교회 성향이 강했다. 막시밀리안은 종교적 관용책을 통해 제국의 분열을 막고자 했지만 펠리페는 네덜란드에 강경한 가톨릭 정책을 펼쳤다. 반발하는 네덜란드의 신교도들을 진압하기 위해 펠리페는 군대 동원을 요청했으나, 이는 신교도들을 대놓고 탄압하라는 뜻으로 막시밀리안의 정책에 반하는 일이었다. 막시밀리안은 펠리페에게 신교도들과 타협할 것을 권유했지만 펠리페는 이를 거부했다.

막시밀리안에게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관용책을 통해 제국의 분열을 막을 필요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군주로서 스페인 합스부르크라는 혈맹에 맞춰야 할 의무가 동시에 존재했다. 따라서 행동의 폭은 상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펠리페의 장남인 돈 카를로스의 건강 상태와도 무관하지 않았는데, 장애를 지닌 돈 카를로스가 계승을 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이 온다면 당시로는 펠리페의 여동생인 마리아, 그리고 마리아의 남편인 막시밀리안에게 스페인의 계승권이 주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한 쪽은 포기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만일의 상황에 스페인을 계승해야 하는 막시밀리안으로서는 가문의 이익으로 무게추가 기울었고, 그의 반스페인 성향을 기반으로 한 종교적 독자노선 정책은 스페인 측의 압박으로 한계를 맞아 점점 친스페인 및 친가톨릭 정책으로 점점 기울었다. 막시밀리안 본인은 본토인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의 귀족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고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종교 문제가 터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그의 개인적인 성향에 따른 관용에 의존한 정책이었고 종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했다. 결국 그가 죽은 후 아들 루돌프 2세 마티아스를 거치며 합스부르크 제국[6] 신성 로마 제국의 종교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고, 조카 페르디난트 2세 대에는 30년 전쟁으로 이어진다.

4. 가족 관계

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막시밀리안 2세
(Maximilian II)
<colbgcolor=#fff3e4,#331c00> 페르디난트 1세
(Ferdinand I)
<colbgcolor=#ffffe4,#323300> 펠리페 1세
(Felipe I)
막시밀리안 1세
(Maximilian I)
부르고뉴의 마리
(Marie of Burgundy)
후아나 1세
(Juana of Castile)
페란도 2세
(Fernando II)
이사벨 1세
(Isabel I)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
(Anna of Bohemia and Hungary)
울라슬로 2세
(Vladislaus II)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
(Casimir IV)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7]
(Elisabeth of Austria)
푸아캉달의 안
(Ann of Foix-Candale)
캉달 백작 푸아의 가스통
(Gaston of Foix)
푸아의 카트린
(Catherine of Foix)

4.2. 아내와 자녀

파일:Maria of Spain.jpg
<colbgcolor=#ffd700><colcolor=black> 스페인의 마리아

1548년 9월 13일 백부 카를 5세의 장녀이자 친사촌인 스페인의 마리아( 1528년 6월 21일 ~ 1603년 2월 26일)와 결혼했다. 결혼 이전에는 방탕한 생활을 했던 막시밀리안 2세였지만, 결혼 후에는 마리아에게 충실하였다. 이후 마리아의 아버지인 카를 5세, 오빠인 펠리페 2세와 대립하면서도 마리아와는 친밀한 사이를 유지하였다. 막시밀리안과 마리아는 1548년부터 1551년까지 스페인의 섭정을 맡았다. 마리아는 오빠인 펠리페 2세와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하였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동시에 스페인의 이익을 대변하였기 때문에 남편의 종교적 관용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 막시밀리안 사후 스페인으로 돌아가며 '이단자가 없는 나라'에 살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다. 이후 마리아는 마드리드의 라스 데스칼사스 레알레스 수녀원에 정착하여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스페인의 왕비 아나
(Anna, Queen of Spain)
1549년 11월 1일 1580년 10월 26일 펠리페 2세[8]
슬하 3남[9]
1남 루돌프 2세
(Rudolf II)
1552년 7월 18일 1612년 1월 20일
2남 에른스트 대공[10]
(Archduke Ernst)
1553년 7월 15일 1595년 2월 12일
2녀 프랑스 왕비 엘리자베트
(Elisabeth, Queen of France)
1554년 7월 5일 1592년 1월 22일 샤를 9세
슬하 1녀
3남 마티아스
(Matthias)
1557년 2월 24일 1619년 3월 20일 오스트리아티롤의 안나[11]
4남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3세[12]
(Maximilian III, Archduke of Austria)
1558년 10월 12일 1618년 11월 2일
5남 오스트리아 대공 알브레히트 7세[13]
(Albrecht VII, Archduke of Austria)
1559년 11월 13일 1621년 7월 13일 스페인의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14]
6남 벤첼 대공
(Archduke Wenzel)
1561년 3월 9일 1578년 9월 22일
3녀 마르가레타 여대공
(Archduchess Margaretha)
1567년 1월 25일 1633년 7월 5일

5. 여담

오스만 제국과의 굴욕적인 조약으로 황제로서의 권위가 떨어졌는데, 막시밀리안 2세가 떨어진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주세페 아르침볼도에게 초상화를 그리라고 명령했다. 그 결과...
파일:주세페 아르침볼도.4계절.jpg
<colbgcolor=#ffd700><colcolor=black> 사계 연작
파일:주세페 아르침볼도.4원소.png
<colbgcolor=#ffd700><colcolor=black> 4원소 연작

당연히 기괴한 모습을 본 신하들은 크게 놀랐으나, 막시밀리안 2세는 오히려 궁정이 떠나갈 정도로 폭소를 했다. 그리고 궁정 연회에서 초상화처럼 꾸미고 나왔다고 한다. 링크 이 부분은 2015년 7월 5일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코너인 Surprise Secret에서 다뤘다.

쇤브룬 궁전의 터를 닦은 인물로 알려졌다. 또한 슬로베니아어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프리모시 트루바르(Primož Trubar 1508~1586)의 신약성서 슬로베니아어 번역을 후원하기도 했다.

처음으로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대성당(Kaiserdom Sankt Bartholomäus)에서 대관식을 거행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브라티슬라바에서 대관식을 거행한 헝가리 국왕이다.[15]


[1]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아버지. [2] 더 정확히는 루터파. 칼뱅파를 신봉한 팔츠 선제후국은 탄압하고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에게 공개적으로 경고를 날렸다. [3] 1531년에 이미 독일왕으로 선출된 페르디난트 1세는 사실상 차기 황제의 입지였다. [4] 30년 전쟁 후 완전히 박멸되어 에르데이 공국이나 오스만 제국 산하 왈라키아 공국이나 몰다비아 공국으로 탈출했고 나중엔 신대륙으로 이주했다. [5] 현재 폴란드 국민은 2011년 기준으로 87.5%가 가톨릭을 믿고 있다. 현재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동유럽에서 합스부르크 왕가를 견제하려는 의도가 더 컸다. [6] 오스트리아의 루터교회, 보헤미아의 후스교회, 헝가리의 개혁교회 등. [7] 알브레히트 2세의 딸이다. [8] 어머니 마리아의 오빠로 외삼촌이다. [9] 펠리페 3세 [10]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이었다. [11] 숙부 외지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2세의 딸로 친사촌이다. [12]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으로 선출은 되었으나 지그문트 3세 바사와 얀 자모이스키에게 밀려 대관식을 치르지 못했다. [13] 아내 이사벨과 함께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주권자였다. 부부의 공동 통치 기간 동안 스페인령 네덜란드는 일시적으로 주권 국가였으나 알브레히트 7세의 사망 후 다시 스페인의 총독령으로 돌아갔고, 홀로 남은 이사벨은 주권자에서 총독이 되었다. [14] 당숙부 펠리페 2세의 장녀로 육촌이다. [15] 뒤집어서 말하면 아버지 페르디난트 1세는 마지막으로 아헨에서 대관식을 거행한 독일왕이자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대관식을 치른 헝가리 국왕이 된다는 말과 같다. 독일왕-신성 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의 경우 마인츠 대주교보다 서열이 낮은 쾰른 대주교가 대관식을 주관하는 것이 말이 되냐는 마인츠 선제후의 태클이 들어와 프랑크푸르트에서 황제선거가 끝나면 바로 마인츠 대주교의 주관으로 대관식을 하는 것으로 변경되었으며, 헝가리 국왕 대관식의 경우 세케슈페헤르바르 오스만 제국령이 되어버려 불가피하게 빈과 지척인 브라티슬라바(당시에는 독일어인 프레스부르크)의 성 마르틴 성당(Katedrála svätého Martina/Szent Márton-dóm)에서 대관식을 치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