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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5-20 20:00:11

모용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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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91F92><colcolor=#ece5b6>
서연 초대 국군
숙종 열문제 | 肅宗 烈文帝
출생 연대 미상
모용부 창려군 극성현
(現 랴오닝성 진저우시 이현)
사망 384년 6월
서연 장안
(現 산시성 시안시)
능묘 미상
재위기간 초대 국군
384년 4월 ~ 38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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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91F92><colcolor=#ece5b6> 성씨 모용(慕容)
홍(泓)
부황 열조
형제자매 8남 1녀 중 7남
도명(道明)
작호 제북왕(濟北王)
묘호 숙종(肅宗)
시호 열문황제(烈文皇帝)
연호 연흥(燕興, 3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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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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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서연(西燕)의 초대 황제.

묘호는 숙종(肅宗), 시호는 열문황제였으며, 휘는 홍으로 전연의 제2대 열조 경소제 모용준의 7남이었다. 384년 반란을 일으켜 세력을 키웠으나 황제를 칭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거병한 시점부터 서연의 건국으로 보며 그를 서연의 초대 황제로 본다.

2. 생애

359년, 전연의 열조 경소제 모용준의 7남으로 태어나 제북왕(濟北王)에 봉해졌다. 370년에 전연이 전진에게 멸망당한 후, 모용홍은 다른 전연의 모용씨 황족들과 마찬가지로 부견에 의해 관중으로 이주했다.

전진의 황제 부견 비수대전(383. 11)에서 참패한 후 숙부 모용수 후연을 건국한 후 구도 업성을 쳤다. 당시 북지군에서 장사(長史)를 지내고 있었던 모용홍은 숙부 모용수의 궐기 소식을 듣고는 관동으로 가 선비족들을 모으니, 그 무리가 수천 명이었다. 모용홍은 이들을 거느리고 홍농군의 화음(華陰)에 주둔했는데, 부견의 장수 강영(强永)이 기병대를 이끌고 공격하자 이를 격파했다. 전진의 토벌군을 무찌른 모용홍의 세력은 강성해져, 모용홍은 대도독섬서제군사, 대장군, 옹주목, 제북왕을 자칭했고, 숙부 모용수에겐 그를 승상, 도독섬동제군사, 영대사마, 기주목, 오왕(吳王)에 삼겠노라고 통보했다.

한편 부견이 아들 광평공 부희(苻熙)를 도독옹주잡융제군사, 진동대장군, 옹주자사에 임명해 포판(蒲阪)을 진수하도록 했다. 그리고 옹주목, 거록공 부예(苻叡)를 도독중외제군사, 위대장군, 사예교위, 녹상서사로 삼아 50,000명의 군사를 배속시키고, 좌장사 두충(竇衝)을 장사로, 용양장군 요장( 강족)을 사마로 주어 모용홍을 토벌하도록 명령했다. 모용홍의 동생인 평양태수 모용충이 평양에서 20,000명의 군사를 일으켜 형 모용홍에게 호응해 포판을 쳤다. 그러자 부예는 두충에게 군사를 나눠주고 부희를 돕도록 했다.

384년 4월, 모용홍은 부예가 들이닥친다는 보고를 듣고는 몹시 두려워하며 관동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부예는 용맹하지만 적을 얕잡아보는 성격을 가지고 있어, 그대로 병사를 몰아, 도망치려는 모용홍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격파하고자 했다. 요장이
"선비족은 모두 관동으로 돌아가려는 뜻을 품고 있으니, 괜히 꼬리를 붙잡지말고 관 밖으로 그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라고 조언했지만 부예는 듣지 않았다. 부예는 화택(華澤)에서 선비족 무리를 이끌고 도망치는 모용홍과 교전했는데, 물러날 곳이 없어진 모용홍의 선비족들은 필사의 각오로 싸워 전진군을 대파하고 부예를 참살했다.(화택 전투) 요장은 황제 부견으로부터 문책을 받을까 염려해, 위수를 건너서 부견을 배신하고 후진을 건국했다.

한편, 포판을 공격했던 모용충은 요격하러 온 두충의 전진군과 황하(黄河)에서 격전을 벌였으나, 완패하여 남은 선비족 기병 8,000명만 이끌고 형 모용홍에게로 갔다. 모용홍의 무리가 100,000여 명에 도달하자, 기세등등해진 모용홍은 부견에게 사자를 보내 말했다.
"진나라는 무도하여 예전에 우리 나라를 멸망시킨 바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하늘의 인도를 받아 진군을 무찌르고 대연(大燕)을 부흥시켰다. 오왕 모용수가 이미 관동까지 평정하였으니, 어서 우리의 형제와 종실들을 돌려주도록 하라. 그리한다면 나 모용홍은 관중의 연인(燕人)들을 거느리고 업성에서 황제에 올라, 진나라와 무뢰(武牢)를 경계로 천하를 분할통치하며 영원히 우호적인 이웃 국가로서 더이상 진나라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노라. 거록공 부예를 죽인 것은 그가 우릴 얕잡아보고 급히 공격하였기에 방어했을 뿐, 나 모용홍의 본의가 아니다."
부견이 이를 듣고 길길이 날뛰며 전연의 마지막 황제였던 모용위를 질책하자, 모용위는 이마에 피가 나도록 머리를 조아려 겨우 용서를 받았다. 부견은 모용위로 하여금 모용수와 모용홍에게 지금이라도 군사를 물리고 장안에 와 사죄한다면 반역죄를 용서하겠다는 회유의 서신을 쓰도록 했다. 모용위는 부견이 말하는대로 서신을 썼지만 모용홍에게 보내는 서신에는 비밀리에
"나는 새장에 갇힌 처지로 돌아갈 가능성이 없으니 너는 힘써 대업을 이루고, 만약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그때 황제에 올라라."
라는 말을 덧붙였다.

서신을 받은 모용홍은 순순히 가족들을 돌려받을 생각을 접고, 장안으로 진군하면서 연호를 연흥(燕興)으로 개원했다.

동년 6월, 모용홍의 부하들인 고개(高蓋)와 숙근숭(宿勤崇) 등이 모용홍의 덕망이 그의 동생 모용충만 못하다고 여겼다. 이에 모용홍을 시해하고 모용충을 황태제로 옹립했다. 제위에 오른지 겨우 3개월만에 붕어한 셈이었다.(연흥정변)

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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