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ruby(決號作戰, ruby=けつごうさくせん)][1]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군이 일본 열도와 제주도의 절대사수를 위해 수립한 작전 계획. 이른바 본토 대결전을 위한 방어 전략이었다. 결과론적으론 방어 전략 수립 및 준비만 하고 미군의 상륙 이전에 항복해서 무의미한 일이 되었다.
2. 배경
1942년에 있었던 미드웨이 해전에서 해군항공대의 정예인 제1항공전대와 제2항공전대가 박살나고 나서 ANZAC과 연합군의 연결을 끊기 위해 벌였던 1943년 과달카날에서 작전의 대실패, 그리고 1944년 사이판 전투의 패배로 인한 절대방위선의 붕괴와 대만 항공전, 필리핀 해 해전과 레이테 만 해전의 참패로 인한 연합함대와 일본 해군의 붕괴라는 악재 속에 일본은 1945년 초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자신들이 패전할지도 모른다는 현실을 인식하게 되었다.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후였으나 어쨌든 미군은 본토 턱 밑까지 밀고 들어와서 이오지마까지 치고 들어온 상태였고[2] 전쟁이 지속될 경우 미군이 본토로 직접 상륙할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대본영으로선 현실화된 미군의 상륙 위협에 맞서 상륙군을 격퇴하고 본토를 사수하기 위한 방어 전략을 시급히 수립해야 했다.
1945년 1월 20일, 대본영은 제국 육해군 작전 계획 대강을 수립하고 우선적으로 천호 작전을 수립했다. 이는 제국 본토 바깥에 다시 하나의 방위선을 구축하는 것으로 쿠릴 열도와 대만 섬, 하이난 섬, 인도차이나 반도, 중국 연안 등지에서 예상되는 연합군의 공세를 최대한 지연시키고 출혈을 강요하여 연합군이 본토 상륙을 하겠다는 의지를 꺾어 버리고 설사 상륙하더라도 그 투입 전력을 조금이라도 더 줄여보겠다는 의도에서 계획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이 설정한 주요 방위 구역을 죄다 비켜나가 곧바로 오키나와로 들이닥쳤다. 일방적이면서 압도적인 제해권과 일본이 상상조차 못한 사이판에서 일본 열도를 직접 때릴 수 있는 엄청난 항속거리와 작전 반경을 가진 전략폭격기 B-29를 개발할 수 있는 역량, 그리고 이를 몇천 대나 뽑아댈 가공할 기술력과 물량,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보급 능력을 가진 미군은 굳이 모든 거점을 공략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사이판이 떨어지자 일부러 대만을 거쳐가는 선택을 할 필요 없이 단번에 일본 본토 코 앞까지 쳐들어온 것이다. 여기에다 보급을 경시한 대본영의 방치 때문에 굳이 대만을 점령하지 않더라도 사이판에서 잠수함만 꾸준히 띄워 절반 이상의 수송선단을 수장했다.
미국은 원래 대만을 통해 중국 대륙에 상륙해서 한반도를 통해 일본 본토에 상륙하려고 했지만, 일본의 대륙타통작전으로 중국 본토에 상륙할 여력을 상실하자 오키나와를 교두보삼아 일본 본토에 상륙하는 안으로 작전을 변경했다.
아래에 나오는 지도에서 보이듯이 1945년 시점에서 일본 본토가 공격 받기 직전인데도 중국과 동남아시아 지경의 일본군 점령지가 겉보기엔 아직 넓게 확보된 상태인 건 이 때문이다. 물론 이 시점에서 일본의 식민지와 점령지는 전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사이판이 미군에게 넘어가면서 사이판에 건설한 해군기지를 통해 점령지에서 일본 본토로 수송할 식량이나 철광석, 석유 수송로를 미 해군이 잠수함, 구축함, 항공모함 등으로 다 끊어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육군항공대는 육군항공대대로 해군과 합참의 명령을 받아서 일본의 해안에 폭격기로 기뢰를 도배해서 배 한 척도 제대로 나가지 못하게 봉쇄하는, 일명 '기아 작전'을 펼치고 걸리는 일본군 선단과 항공기를 격멸하고 있었다.
3. 진행
대본영은 비교적 정확하게 미국의 본토 공격 시기를 예측하고 있었다. 대본영은 겨울이 오기 전 빠르면 1945년 9월, 늦어도 11월에는 미군이 본토로 직접 상륙해올 것이라고 내다봤는데 몰락 작전의 1단계인 올림픽 작전이 실제로 1945년 11월에 예정되어 있었다.침공 시기를 예측한 대본영은 즉시 결호작전을 구상하고 총 7개의 방어전선을 설정하고 담당 부대를 새로이 편제했다.
- 결1호: 홋카이도 - 제11방면군
- 결2호: 동북부( 도호쿠- 고신에쓰) - 제12방면군
- 결3호: 간토 - 제36군 및 제6항공군
- 결4호: 도카이, 호쿠리쿠 - 제13방면군
- 결5호: 간사이, 시코쿠, 주코쿠 - 제15방면군
- 결6호: 규슈 - 제16방면군
- 결7호: 남선[3] 및 제주도 - 제17방면군 및 제58군
이 중 1944년 7월에 편제된 제36군 및 제6항공군을 제외하면 모두 1945년 2월 1일자로 변경된 편제에 따라 새로 편제된 부대들이다. 아울러 이들 부대는 각 제1총군, 제2총군으로 나뉘어 제1총군이 11, 12, 13방면군을 맡아 동일본 전역의 방위를, 제2총군이 15, 16방면군을 맡아 서일본의 방위를 담당했다.[4] 수도 도쿄와 이를 포함하는 간토 일대는 수도권의 특수성상 1, 2총군이 맡지 않고 사실상 대본영 및 육군 수뇌부의 직접 지휘하에 있었다.
제주도의 경우는 좀 미묘한데, 명백히 본토 결전 계획인 결호작전에 포함되었지만 일본 본토가 아니었으며, 그 소속도 조선주둔군의 후신인 제17방면군에 속한 58군이었다. 이는 제주도가 본토는 아니지만 조선, 중국과의 해상 교통의 요지인 만큼 본토 침공 이전에 선제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제주도 방위 계획인 결7호 작전을 본토 결전의 범주에 포함하지 않는 편이다.
해군은 항공 세력을 크게 셋으로 나누었고 본토 외 지역을 맡은 제10항공함대를 제외한 나머지 전력을 본토에 결집하여 동일본의 제3항공함대와 서일본의 제5항공함대로 재편했다.
만약 일본이 항복하지 않고 저항을 계속했다고 가정할 경우 위의 7개 작전 중 연합군과 교전이 예상되는 작전은 총 4개다. 1945년 11월에 올림픽 작전에 맞서야 하는 결6호의 제16방면군, 1946년 봄에 조공 작전인 파스텔 작전을 상대해야 하는 결5호의 제15방면군, 그 직후인 코로넷 작전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결3호의 제36군, 그리고 소련군의 남하에 맞서야 하는 결1호의 제11방면군이 그 대상이다.
대본영은 이를 위해 육해군 총합 500만 명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결론 내렸지만 결호작전이 논의되기 시작할 무렵에 본토 내 제국군은 50만 명도 안 되었으며, 나머지 300만은 다 중국과 만주와 태평양/ 동남아 점령지에서 소모되고 있었다. 때문에 결호작전에 있어 최우선적 과제는 작전 수행을 위한 충분한 병력 확보였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해외 점령지에서 병력을 후퇴시키거나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본토로 돌리겠지만 그럴 능력이 없었다. 1944년 중후반 마리아나 제도 및 필리핀으로의 증원을 마지막으로 일본은 사실상 중국, 남방 전선의 병력을 재배치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가장 큰 이유는 당연히 해군 전투력이 1944년에 완전히 개발살나서 수송선단을 호위할 전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일본 열도는 대륙과 연결되지 않은 섬이며, 그나미 대륙과 가장 가까운 곳이 한반도 동남해안과 접한 규슈 북부 및 혼슈 서부이다. 중국 전선은 고사하고 조선의 식량자원도 제대로 수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병력 재배치는 언감생심이었다.
설사 호위할 전력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수십만 대군을 재배치할 수송선단도 없었다. 일본의 수송선단은 1942~1944년 미국 잠수함들의 공격에 의해 거의 궤멸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조선소들은 안 그래도 자재가 부족한 상황에서 수송선 대신 전투함 건조에 집중하고 있었다. 설사 수송선이 충분했다 하더라도 동해까지 출몰한 미국 잠수함들이 일본 본토로 향하는 수송선들을 구경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덕분에 한때 일본군의 남방 최대 거점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던 라바울 본영에 배치된 정예병 20만 대군은 1945년 시점이 되면 아무런 전략적 가치도 없어진 섬에 짱박힌, 그러면서도 본토 소환도 못 하는 그림의 떡 신세가 되었고 이런 식으로 남양군도, 남방 점령지, 중국 전선 등에 배치되어 쓸모 없이 고사해 가는 병력이 한가득했다. 그래서 대본영은 1945년 2월 28일 제1차 병비를 발표하고 4월 2일 제2차 병비, 5월 23일 제3차 병비를 발표하여 총 54개 사단을 신설하고 징병제를 강화하여 병력을 충당했다.
해군도 본토 결전 준비에 착수했으나 사실 이 시점에 이르면 제대로 된 전함이나 항공모함 한 척조차 없었고, 그나마 간신히 살아남은 주력함들도 미 해군에 대한 두려움과 기름의 부족으로 제대로 된 해상 작전이 불가능했다. 이에 해군은 수상 전투함 대부분을 해안에 좌초시켜 고정 포대로 활용하고, 기동성 좋은 소형함들을 위주로 상륙 함대에 대한 게릴라식 공격을 시도할 계획이었다.
또한 상륙 함대에 대한 카미카제 공격도 해군이 맡기로 되어있었다. 이를 위해서 해군은 신요, 가이텐, 카이류, 후쿠류 등의 자폭 병기를 연달아 개발했다. 그러나 해군의 이 최후의 작전마저 구레 군항 공습으로 거의 모든 잔존 주력함들이 가라앉음에 따라 무산되었고, 제국 해군은 와해되었다.
한편, 해안에 가까운 수도 도쿄가 미군의 직접적 침공 위협에 노출됨에 따라 유사시 황실과 정부, 대본영 등 군 지휘부를 옮기기 위해 나가노현 산악지대에 대규모 지하 요새를 건설하니 이것이 마츠시로 대본영이다. 마츠시로 대본영은 항복 당일까지 완성되지 못했으나, 안 그래도 없는 물자와 인력을 마츠시로 대본영 공사에 투입하는 중이었으니 미군이 침공해올 시점인 1945년 11월 즈음이면 기본적인 완성은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5]
4. 전략
결호작전의 핵심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상륙하는 미군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이는 것이었다. 최대한의 출혈을 미군에 강요하여 자기들이 원하는 최소한의 항복 조건을 관철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 최소한의 항복 조건이 ' 천황제 유지', ' 조선을 포함한 개전 이전 식민지 유지', '일본 자체적인 전범 처벌 및 무장 해제' 등 천황제 정도를 제외하면 허무맹랑한 요구인지라 당장 패전을 앞두고 있는 나라에서 내밀 만한 조건은 절대 아니었다.[6]결호작전은 철저하게 카미카제와 결사항전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그마저도 준비가 여의치 않았다. 자살 특공 병기를 대량생산하는 것도 한계에 부딪쳐서 제대로 된 타격을 가할 만큼의 자살 병기를 배치조차 못했으며, 징병제를 강화하여 병력을 확보하였으나 결호작전에서 요구하는 500만의 병력도 서류상으로나 확보했지 실제로는 100만 명 내외에 불과했다. 더불어 국민의용대라는 이름으로 2800만 명의 민간인을 전장에 내보내려 한 계획도 있었다. 이것이 보통 이른바 1억 옥쇄라고 부르는 계획으로, 일본 본토의 전 국민과 식민지인들을 모두 전장에 내보내 산화시키겠다는 미친 계획이었다.
그 총알받이들에게 쥐어줄 무기라는 것들도 학교 책걸상을 잘라서 쇠파이프를 박아 만든 조총과 깡통에 화약이랑 쇳조각 넣고 도화선 심은 깡통폭탄에 조잡한 투석기와 활과 화살인 데다 그 급조 무기들조차 부족해서 상륙한 미군한테 칼 들고 덤비라고 미귀필살검 - 키리코미 도법(米鬼必殺剣-斬込刀法)이라는 간편하게 배워 당장 쓸 수 있게 일본도 기술 1개, 착검하지 않은 총검이나 부엌칼로 가능한 기술 1개, 접근법 1개로 구성된 국민의용대용 간단 검술[7]까지 신문지상에 발표되고, 여기에 쓸 날붙이조차 부족해서 죽창을 깎고 있는 지경이었다. 그마저도 일본에는 죽창으로 사용할 대나무조차 군에서 구명튜브 대용으로 가져다 쓰느라 모자란 상황이었다.
이런 개판 5분 전의 준비 과정의 문제는 둘째치더라도 당장 어떤 식으로 미군에 맞서냐는 것부터가 논의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논의는 했는데 이오지마, 오키나와와 같은 섬과 달리 후방의 공간이 있는 본토에서 어떤 전략을 쓰냐를 두고 극심한 의견 대립으로 인해서 결론이 도무지 나지를 않았던 것이다.
이오지마, 오키나와에서 효용성이 입증된 내륙에서의 지연전을 제창하는 부류가 있던 반면, 제국 본토에 한 발자국도 내딛게 해선 안 된다며 사이판에서 사장된 해안선 사수론이 나왔다. 그나마 수도 도쿄와 천황을 보호해야 하는 간토의 제36군을 제외하면 나머지 지역의 방위태세는 최악이었다. 차라리 각지의 일본군을 불러올 수도 없는 일본 본토를 포기하고 아예 천황을 관동군으로 거동해서 저항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다.[8]
본토 결전을 하겠답시고 실시한 3차례의 병비 계획도 항복 당일 기준으로는 택도 없었다. 신설한 54개 사단 가운데 편제 정원을 갖춘 사단이 단 1개도 없었다. 그나마 1차 병비 때 창설된 사단은 편제라도 정상적이었지, 오키나와 전투의 긴박함 중에 이뤄진 3차 병비 때의 신설 사단은 축소 편제로 이루어져 보병 연대 3개로 전부에 포병이 없어서 투석기를 포병으로 쓰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다. 그나마도 편제 인원의 반도 못 채웠고 소총 등 개인화기나 군복 등 피복류마저 턱없이 부족했다.[9]
사실 이 병비 계획에 따른 창설사단들의 역할과 전력도 원 계획과는 반대가 되어버렸다. 1차 병비로 창설한 18개 사단은 처음에는 워낙 장비와 편제가 부실하여 일본군 내에서도 허수아비 사단으로 불렸고, 이들은 미군의 본토 상륙시 해안선에서 옥쇄하며 미군에게 출혈을 강요하고 시간을 지연시키는 역할이었다. 그 다음에 약화된 미군이 내륙으로 진격해오면 2차, 3차 병비로 편성된 부대들이 이른바 기동타격사단의 역할을 하여 격파한다는 개념이었다. 그런데 위 문단에서 설명했듯 워낙 장비가 부족해서 역으로 1차 병비로 편성된 허수아비 사단들이 그나마 멀쩡했고 적에 대한 타격을 목표로 한 2차, 3차 병비로 편성된 사단들의 전력이 더 열악했다. 그리고 이렇게 총 세 차례의 병비로 창설한 54개 사단 중 3개 사단은 또 일본 본토에 없어서 제외해야 했으니 실제 본토에 있는 건 51개 사단 뿐이었다.[10]
기갑 세력의 열세도 심각했다. 미군은 유럽 전선에서 독일의 전차들을 상대로 성능이 입증된 신형 전차들을 몰락 작전에 다수 투입할 계획이었지만 일본은 구식 전차들도 수량이 부족하거나 있어도 연료가 없어 고정 토치카로 운용하였다. 치하조차 없어서 치로로 기갑여단을 창설하고 있었고, 이들은 상륙군에 대한 기동타격을 목적으로 창설한 기갑여단들이었으나 연료 부족으로 전차전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다.
연료의 경우 남방 점령지에서의 운송도 차단된 지 오래여서 본토에서는 소나무에서 나오는 송근유 따위를 쓰고 있었다. 얼마나 막장인지 잠수함을 이용해 남방 점령지에서 소량의 원유라도 들고오는 것을 고민했을 정도. 물론 일본의 대표적인 원유 공급지인 보르네오 섬의 브루나이 일대가 1945년 6월 오보에 작전으로 공격받아 빼앗겼기 때문에 잠수함을 이용한 원유 공급이라는 망상조차 제대로 실현할 수 없었다. 남은 건 보르네오 섬보다 거리가 더 먼 수마트라섬의 팔렘방 유전이었는데 그나마 남은 이곳조차 세력을 회복한 영국 동양함대가 1944년 말~1945년 초에 걸친 항모 함재기 공습으로 타격을 준 상황이었다. 더구나 동시기 일본 본토의 정유 공장들은 최우선적으로 폭격받고 있었다.
연료와 탄약의 재고도 최악으로 치달았지만, 무엇보다 병력에게 가장 필요한 식량조차 바닥 상태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래로 적게 먹는 것이 건강을 위한 길이고 근로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수신'은 먼저 식사를 억제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우리 무사도서 연마된 식생활의 몸가짐은 '무사는 먹지 않아도 유유히 이를 쑤신다.'거나 '배가 고파도 배고프지 않다.'고 말하며 식욕을 억제하는 데서 구축되어 왔다.[11]
- 부안구락부 1944년 6월호 중. 스기 야스사부로(1996~2002)[12]
사이판 함락 전인 1944년 6월부터 이런 글로 소식, 절식, 심지어
금식을 권유하는
프로파간다를 하는 판국이었다. 우리 무사도서 연마된 식생활의 몸가짐은 '무사는 먹지 않아도 유유히 이를 쑤신다.'거나 '배가 고파도 배고프지 않다.'고 말하며 식욕을 억제하는 데서 구축되어 왔다.[11]
- 부안구락부 1944년 6월호 중. 스기 야스사부로(1996~2002)[12]
수입이 안 되면 국내 생산이라도 해야 하는데 일본 국내의 식량 생산력은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다. 중일전쟁 내내 징병을 한 데다 조선을 비롯한 식민지에서의 수입만을 믿고 농지 상당수를 군수 시설로 바꾼 판국이라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그나마 생산된 식량의 물류 이송 능력도 사실상 마비 상태였다. 철도 등 육상 수송 능력은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지 오래였고, 연안 해운의 경우 미군이 잔뜩 깔아놓은 기뢰들로 일본 연안이 가득찬 상태여서 선박 운항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1945년 6월 9일, 만주와 중국을 시찰하고 돌아온 우메즈 요시지로 참모총장은 천황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불과 사흘 후, 천황의 특명을 받고 일본 본토의 병기창들과 요코스카, 구레, 사세보, 마이즈루의 해군 및 항공기지를 석 달 동안 시찰하고 돌아온 하세가와 기요시 해군 대장도 이런 보고를 하게 된다.
자동차의 낡은 엔진을 떼다 붙여서 만든 작은 배가 특공병기라며 몇백 몇천씩 준비돼 있습니다. 이런 사태 자체가 벌써 걱정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간단한 기계들을 조작하는 나이 어린 대원들은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훈련이 부족하다고밖에 말씀 드릴 수가 없습니다. 동원계획 그 자체도 정말이지 엉성하기 그지없습니다. 계획은 치밀하지 못하며 중복된 것이 많습니다. 게다가 기동력은 공습이 올 때마다 악화되고 감퇴되어 전쟁 수행 능력은 매일같이 떨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결호작전을 단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렇게 평할 수 있다.이건 마치 12세 소녀에게 애를 낳으라는 거나 마찬가지다.
- 당시 대본영 기밀일지 기록 중 (출처: 쇼와사, 한도 가즈토시 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서일본 방위를 총괄하는 제2총군은 사령부가
히로시마에 있었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
리틀 보이에 의해 제2총군은 수뇌부 및 사령부 기간 요원이 괴멸 당했고, 총군 사령부에서 함께 훈련 중이던 2만여 예비 병력도 모조리 전멸당했다. 서일본 지역이 공격 받을 때 이를 방어할 부대의 수뇌부가 무너진 것이다. 그나마 제2총군 사령관 하타 슌로쿠는 기적적으로 핵 공격을 피했으나, 직후 만주를 시찰하러 갔다가
소련군에게 붙잡힌다.- 당시 대본영 기밀일지 기록 중 (출처: 쇼와사, 한도 가즈토시 저)
5. 실행되었다면?
45년 8월 초 제해권을 보여주는 지도. 8월 15일 지도 추가. 연한 갈색이 당시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이 제해권을 장악한 해역이다. 그나마 이것도 100% 안전하게 장악한 제해권을 기준으로 한 거지, 실제로는 일본은 일본 본토와 점령지 해안도 제대로 지키지 못할 상황이었다. 지도만으로는 의외로 전력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항복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실상은 도쿄만과 대한해협에 미국산 기뢰가 잔뜩 떠 있을 정도로 일본군의 해상 진출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결호작전 수행시 일본이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으나 미군이 입었을 피해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이오지마 전투나 오키나와 전투의 사례를 볼 때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했다면 일본 측은 매우 큰 피해를 입었을 수도 있지만 미국 역시 수십만 명의 전사자를 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있으며, 실제 미국 정부는 이러한 예측을 토대로 원폭 투하를 결정했다.
하지만 미군 측이 압도적인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상기 두 전투 같은 경우 이오지마와 오키나와라는 협소한 지형에 대규모 상륙을 할 수 밖에 없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고, 압도적인 교환비를 내며 일본군을 제대로 털어버린 필리핀 탈환전은 지역이 넓어서 상륙한 미군이 전차 등의 기갑 장비를 제대로 굴릴 수 있어서 가능했다는 것이 주 논점이다. 이러한 의견에 따르면 자잘한 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전장이 넓은 일본 본토라면 전자보다는 후자의 전개가 일어날 가능성이 더욱 높았다. 또한 일본이 압도적으로 밀린 필리핀에 투입된 일본군은 결호작전에 동원될 예정이었던 신편 부대와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정예부대였고, 상대인 미군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했지만 정규군이었던 포병과 전투 지원 부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에서도 그런 결과가 나왔는데 본격적으로 중전차를 상륙하여 대규모로 굴릴 예정이었던 몰락 작전은 오히려 미군 측이 예상보다 적은 사상자를 냈을 가능성도 있다. 결국 이 작전이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군의 예상 피해는 추론의 영역으로 남게 되었다.
또한 당시 소련군 또한 일본 본토 진공을 예정하고 있었기 홋카이도를 비롯한 일본 북부 지역에 소련군이 진입했을 가능성 또한 무시할 수 없다. 특히 미국과 달리 소련은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된 나라였기 때문에 이 경우 독일에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도호쿠 일대에는 꼭두각시 공산 국가인 북일본이 들어서고 홋카이도는 쿠릴 열도, 남사할린과 마찬가지로 아예 소련 영토로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슘슈 섬 전투를 통해 드러났듯 육군 국가인 소련 특성상 1945년 시점 대규모 상륙 작전을 전개할 소련 해군의 역량은 굉장히 떨어졌다. 개다가 몰락 작전과 결호작전이 시행되는 상황을 가정하면 일본군은 태평양에서 그랬듯 소련군을 상대로도 만주, 남사할린, 쿠릴 열도에서 치열하게 전투에 임했을 것이며 그렇다면 원 역사처럼 슘슈 섬을 제외한 다른 지역 역시 소련군이 쉽고 빠르게 접수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소련군이 해당 지역에서 일본군의 저항을 분쇄하고 후방의 홋카이도와 혼슈 북부에 진입하여 일본이 분단되는 시나리오는 몰락 작전과 결호작전이 꽤 오랫동안 시행되고 그 동안 소련이 미군의 원조( 훌라 프로젝트) 및 자력을 통해 해군을 크게 증강하는 시점, 최소 1946년 이후에야 가능했을 것이다.
한편 당시 미군에는 일본을 봉쇄해 일본 전 국민을 굶겨죽이는 선택지도 있었다. 몰락 작전 중에는 식량 운송을 막기 위해 해군과 육군 항공대의 폭격기 부대가 담당한 기뢰 부설 작전이 있는데, 이를 기아 작전(Operation Starvation)이라 한다. 실제로도 일본 본토 공습을 진행하면서 해군의 요청을 받은 육군 항공대 폭격기 부대가 일본의 항구 일대에 기뢰를 엄청나게 뿌렸다. 당시 미국 국민들이 전쟁이 길어지는 것에 염증을 내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강한 반일/반 추축 정서와 프로파간다 선전 등으로 버틸 만했고,[14] 구레 군항 공습 이후로 일본의 해양 진출력은 소멸했으므로 미군으로서는 적당히 군 규모를 줄이고 해상 봉쇄에 필요한 전력들만 남기면 국민의 부담감도 덜고 군비도 아낄 수 있었다. 이 작전은 실제로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 이후 미국 내에서 진지하게 검토하기도 했다. 어차피 전쟁의 승패는 결정난 상황인데, 뭐하러 저런 광신도들이 득실대는 곳에 직접 들어가서 헬게이트를 여냐는 주장이다. 기뢰로 일본 열도 주변 해역을 도배하고, 1~2달 뒤에는 쌀 수확철이니 수확하기 전에 농약을 대거 살포해서 일본 내 모든 농작물을 말려 죽이고 독가스를 전 일본에 뿌리자는 계획까지 제안되었다. 하지만 당장 전국적으로 전쟁이 곧 끝난다는 희망에 휩싸인 상태였고, 미 정부도 굳이 금방 끝낼 전쟁을 질질 끌어서 장병들의 사기를 꺾고 지지율을 박살내느니 신속하게 일본 도시 전역을 공습하고 극비리에 개발해낸 슈퍼 폭탄을 투하해 전쟁 수행 능력과 의지를 꺾는 방식을 택했다.
6. 관련 문서
- 결7호 작전
- 몰락 작전
- 이 세상의 한 구석에: 당대 일본 소시민들의 삶을 배경으로 한 만화. 쌀알 불려먹기, 방공호 파기, 배급지원에 지쳐가는 시민들의 모습이 묘사된다.
[1]
신자체로 쓰면 決号作戦이 된다.
[2]
이것도 순수하게 육상과 해상에서만의 이야기다. 미 해군 항공대는
대만 항공전으로 제공권을 잡고 나서
대만과
필리핀을 털고 있었고 미 육군 항공대는
도쿄를 포함한 일본 본토 각지를 두들겨 패고 있었다. 나중에는 미 해군이 항공대는 물론, 전함까지 동원해서 일본 본토의 항구지대들에 포탄의 불벼락을 퍼붓는다.
[3]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반도. 이북 지역은
관동군 관할이었다.
[4]
1총군 사령관은
스기야마 하지메가, 2총군 사령관은 하타 슌로쿠가 맡았다.
[5]
마츠시로 대본영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주로 건설했는데, 이들은 패전 직후 대부분
우키시마호 사건에서 희생되었다.
[6]
특히 천황제 유지에 대한 집착은 엄청나서, 실제 무조건 항복 선언 전까지 다른 조건들은 차례차례 포기하면서도 물 밑 외교 접촉에서 끝까지 요구한 게 천황제 유지였다. 그나마 천황제 유지는 간신히 성공했지만 이는 일본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했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의 정치적인 의도 덕분이었다.
[7]
사사모리 준조(笹森順造)라는 민간인 검도사범이 창안한 도법으로 장검과 단검도법으로 나뉘어 있었다. 장검도법은 비스듬히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두 차례 빠르게 벤 뒤
심장을 찌르는 3단계의 구조였으며, 단검은 상대에게 뛰어들어 껴안고 심장을 찌르는 다소 무식한 방식이었다. 또한 적에게 들키지 않고 구부려 앉아 접근하는 방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8]
이 때는
소련이 소-일 중립조약을 파기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소련의
태평양 전쟁에 대한 입장은 중립이었다. 소련은 1945년 8월 8일에 조약을 깨고
만주로
진격했다.
[9]
러일전쟁 시기에조차 구식화되어서 후방부대용으로 돌려졌던
무라타 소총마저도 부족해서 위에 언급한것처럼 책걸상 잘라서 개머리판 만들고 쇠파이프를 총신으로 쓰는
화승총이 이 부대들에 지급되던 판국이었다.
[10]
나머지 3개 사단은 조선에 있었다. 1차 병비 때 창설된
전남 해안 방어를 맡은 150사단,
전북 해안 방어를 맡은 160사단, 3차 병비 때 창설되어
대구에 주둔, 예비 부대로 운용된 320사단이다. 이들 3개 사단 소련 참전 후
함경도 지역으로 침공해온 소련군과 맞서기 위해 급히 이동하다가 종전을 맞이한다.
[11]
이는
귀족 계층인
사무라이의 품위 유지를 위해 만들어진 격언으로, 굶을 만큼 상황이 힘들어도 그 긍지와 품위는 잃으면 안 된다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것이지 진짜 식욕을 억제한다느니 금식을 미덕으로 여긴다느니 같은 의미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12]
출처 : 하야카와 타다노리 저, 송태욱 역. <신국 일본의 어처구니없는 결전생활> (2019) 213p.
[13]
병력의 단순 머릿수를 말하는 게 아니라 실질적인 전투력을 말한다. 만주의
관동군+만주군 병력만 해도 70만이 넘는 대병력이었지만 장비와 훈련 수준 등을 감안하면 미군에 비해선 껍데기 수준이었다는 뜻이다.
[14]
애초에 미국 여론이 전쟁을 완강히 거부했다면
루스벨트의 4선은 실패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