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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14:44:25

우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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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왕 위만조선왕 2세 우거왕
' 기자'의 재위 및 ' 기자조선'의 존재는 학계에서 인정되지 아니함.
' 한후'는 고조선 군주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음.
}}}}}}}}}}}}

위만조선 제3대 국왕
고조선 말대 국왕
우거왕 | 右渠王
<colbgcolor=#820000><colcolor=#ffd400> 출생 기원전 2세기 추정
고조선?
사망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 왕검성
재위기간 위만조선 제3대 국왕
기원전 128년 이전 ~ 기원전 1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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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20000><colcolor=#ffd400> 위(衛)[1]
우거(右渠)
조부 위만
조모 불명
부왕 위만조선왕 2세
모후 불명
왕후 불명
왕자 태자 | 장항
왕호 우거왕(右渠王) }}}}}}}}}

1. 개요2. 생애3. 가족4. 우거왕 대의 인물5. 관련서적6. 대중매체에서7. 기타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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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위만조선의 제3대 군주이자 마지막 군주이며 고조선 마지막 군주이다. 이름은 우거(右渠). 성이 위씨라면 위우거(衛右渠).

다만 성이 정말 위씨인지는 논란이 있다. 위만의 '위'가 성이 아니라는 주장들이 있기 때문이다. 예시를 들자면 조타의 별명 위타의 경우처럼 '위'는 성이 아니라 진나라, 한나라 무관 관직명 '()'의 동음이의라는 주장이 있다. 또한 우거왕의 성이 '위씨'라는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휘에서 따온 왕호가 '만왕'이 아니라 '위만왕'이라고 부르는 것도 '위'가 성이라면 한자문화권의 왕호로써는 매우 비전형적인 경우이다.

조승복 교수는 우거왕의 이름 우거가 씨족의 생활 공동체를 다스리는 우두머리를 지칭하는 보통 명사였다는 설을 제기한 바 있다.[2] 고구려 왕족 박위거, 동천왕의 이름 우위거, 부여의 국왕 간위거와 대사 위거 등의 인명에서 나타나는 '위거(位居)'와 동계어라는 것인데, 실제로 당시에 사용된 후기 상고한어 재구음을 살펴보면 우거(右渠)는 /*ɦwɨʔ ga/ '우으가'였으며 위거(位居)는 /*ɦwi ka/ '위가'였으므로 유사성이 있다.[3] 삼한 중 진한 변한의 군장 호칭으로 우거수(右渠帥)[4]와 거수(渠帥)가 있었다는 점도 우거가 보통 명사였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2. 생애

기원전 2세기에 위만의 정변으로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 왕위에 오른 위만의 고조선은 한반도 북부와 요동을 차지하여 예, 맥과 남쪽의 진국 한나라의 중계 무역을 독점하여 동방의 패자로 군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거는 이 때 즉위하여 중국에서 몰려오는 망명자를 받아들이고 남쪽의 진나라 한나라와 직접 교역하는 것을 막고 교역할 때 반드시 고조선을 통해서 하게 하는 정책을 펼친다. 이에 한나라는 기원전 109년 사신 섭하(涉何)를 보내 달래려 했으나 우거왕을 달래지 못했다.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가게 된 섭하는 처벌이 두려워[5] 패수에서 배웅을 나온 위만 조선의 비왕(裨王)[6] (長)을 죽였다. 그러고는 돌아와서는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뻥을 쳤다.[7] 이에 분노한 우거왕은 군사를 보내 섭하를 죽였다. 이 소식을 들은 한무제는 기원전 109년 고조선 정벌을 명했다. 한무제는 이미 기원전 111년에 베트남에 있던 남월[8] 멸망시켰을 정도로 해외 원정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거칠 것이 없었다.

한무제는 우선 장군 양복(楊僕)과 순체(荀彘) 등에게 명하여 육군 5만과 수군 7천을 이끌고 수륙병진으로 고조선을 공격케 하였다. 이에 고조선군은 험난한 지형에 의지하여 대항했고 누선 장군 양복이 왕검성(王儉城)을 공격하자 이를 격파하고 좌장군 순체의 수군을 패수 서쪽에서 저지하였다. 고조선의 강력한 저항에 놀란 한무제는 위산(衛山)을 보내 우거왕과 교섭하였고 우거왕이 태자를 한나라에 볼모로 보냄으로써 전쟁이 종결되나 싶었으나 위산과 순체가 태자가 거느린 호위대에게 무장 해제를 요구했고 이에 위신의 위협을 느낀 태자가 불응하여 되돌아 와서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9]

한나라군은 고조선 수도 왕검성을 포위하였으나 왕검성의 수비는 튼튼했다. 이 때 우거왕이 계략을 세워 순체와는 싸움을 계속하고 양복에게는 몰래 사자를 보내 항복하겠다고 거짓 소식을 전달한 것이다. 계략이 적중하여 순체와 양복이 내분을 일으키는 바람에 결정적인 카운터 펀치를 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순체가 양복을 잡아 가두고 군대를 통합하는데 성공하면서 왕검성 공격에 박차를 가하였고 더 이상 버티는 것은 무리임을 느낀 고조선의 대신들은 우거왕에게 항복할 것을 종용했으나 우거왕은 이를 거부했고 이에 일부 대신들은 한나라에 항복해 버리고 말았다. 기원전 108년 여름 이계상(尼谿相) 삼(參) 자객을 보내 우거왕은 그에 의해 암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우거왕은 한국사에서 흥망성쇠한 많은 국가들 중에서 나라가 멸망할 때 함께 사망한 유일한 왕이다. 자세한 내용은 왕검성 전투 항목 참조.

한편 왕검성은 우거왕 사후에도 대신 성기(成己)의 지휘 아래 계속 항전하였으나 순체가 우거왕의 아들 장항(長降)과 재상 노인(路人)의 아들 최(最)를 회유시켜 성기를 암살함으로써 위만조선은 1년간의 끈질긴 저항에도 불구하고 내분으로 인해 86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3. 가족

할아버지는 위만이지만 아버지, 형제, 부인의 이름은 알 수 없다. 한 일본 사이트에는 우거왕의 아버지 이름이 '(悼)'라고 되어 있으나, 출처나 근거가 불분명하다. 아들의 이름이 장항(長降)이라는 것만 알려져 있다.

4. 우거왕 대의 인물

우거왕 본인과, 성기, 장, 역계경을 제외한 전부가 전한으로 항복한 자들이다.

5. 관련서적

6. 대중매체에서

7. 기타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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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가 정말로 성씨인지 논란이 있다 [2] 이 학설은 경향신문의 1987년 9월 11일자 기사에서도 언급되었다. [3] 흔히 알려진 Baxter-Sagart 상고한어 재구음으로는 각각 /*[ɢ\]ʷəʔ *[ɡ\](r)a/ '꿯 끄라', /*[ɢ\]ʷrəp-s *k(r)a/ '끄뤕스 그라'로 읽혀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이는 서주 시대의 문헌을 바탕으로 재구한 것이므로 기원전 2세기와 서기 3세기의 인명에 적용하기는 힘들다. [4] 서기 23년 이전 진한의 우거수였던 염사치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5] 실제로 무제는 신하들에게 무자비한 황제로 재위 기간에 죽인 신하들이 많았다. 섭하 이전에 사신으로 간 위산도 성과없이 돌아오자 무제는 바로 그를 처형했다. [6] 고조선의 왕작이다. [7] 이에 한무제는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섭하에게 요동 동부 도위 직위를 맡겼다. [8] 이 쪽 역시 건국자 조타(남월)가 위만과 비슷하게 군주로 즉위하고 나서 현지의 풍습을 받아들여 세운 나라라는 점에서 위만조선과 같다. 위만조선과 건국시기, 멸망시기도 거의 비슷하다. [9] 고조선 태자가 무장 해제를 거부하고 도로 돌아가버리자 기껏 마무리되어 가던 동방 문제가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였고 이에 분노한 한무제는 위산을 참수해 버렸다. 엄청난 전비와 인력을 들여 원정을 했고 접전 끝에 숙이고 들어오겠다던 고조선이 위산의 뻘짓으로 다시금 반목하는 상황이 된 것. 한무제가 분노하기에 충분한 상황이며 이후 결과를 보면 멸망의 위기를 회피할 호기를 놓친 고조선으로써도 안타까운 상황이다. [10] 또는 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