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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5 12:36:45

사담 후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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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21><colcolor=#FFF> 이라크 공화국 제5대 대통령
사담 후세인
صدام حسين | Saddam Hussein
파일:군 제복 후세인 .png
본명 사담 후세인 압드 알마지드 알티크리티
(صدام حسين عبد المجيد التكريتي)[1]
출생 1937년 4월 28일
이라크 왕국 티크리트
(現 이라크 살라딘 주 티크리트)
사망 2006년 12월 30일 (향년 69세)
이라크 바그다드
재임 기간 이라크 부통령
1968년 7월 17일 ~ 1979년 7월 15일
이라크 대통령
1979년 7월 16일 ~ 2003년 4월 9일
서명
파일:사담 후세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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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21><colcolor=#fff,#000> 신체 186cm, 95kg[2]
직업 군인, 정치인
정당

[[바트당|
바트당
]] ( 이라크)
종교 이슬람( 수니파)
부모 아버지 후세인 압둘 마지드(알 마지드)
어머니 수브하 탈파
배우자 본처 사지다 탈파
사미라 샤반다르
애인 니달 알함다니
자녀 슬하 2남 3녀[3]
우다이 후세인 (1964~2003)
쿠사이 후세인 (1966~2003)
라가드 후세인
라나 후세인, 할라 후세인
약력 이라크 부통령
제5대 이라크 대통령
복무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4]
1968년 ~ 1968년
최종 계급 원수
주요 참전 이란-이라크 전쟁
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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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일생3. 가족4. 평가5. 대중매체에서6. 여담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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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PresSaddam2002Getty-56a043293df78cafdaa0b9a5.webp
파일:170601-saddam-hussein-feature.jpg
<rowcolor=#FFF> 대통령 시절 모습 말년

이라크의 정치인이자 전직 국가원수로 제5대 이라크 대통령이자 독재자.

부통령 재직 시절에는 석유국유화를 주도면밀하게 시행하고 유가 부양에도 앞장서서 고유가로 얻은 수익을 바탕으로 사회인프라를 대대적으로 정비시켜서, 쿠데타와 잦은 내부 분란으로 바람 잘날없었던 이라크의 정국을 안정시켜 이라크의 1인당 국민소득을 중상위권 국가로까지 성장시킨 매우 유능한 인물이지만 막상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독재자로 흑화하더니[5] 부통령이었을 때와는 정반대의 판단력과 능력을 보이며 이란-이라크 전쟁 걸프 전쟁 등 두 차례에 걸쳐 이란 쿠웨이트 상대로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나라를 거덜내버렸고, 쿠웨이트 강제점령에 분노한 미군 영국군을 포함한 다국적군의 국제사회의 개입으로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 인물이다. 특히 전자는 이란의 개입을 사전 억제, 예방하겠다는 의도라도 있었으나 후자는 아무런 이유없이 돈에 미쳐 쿠웨이트를 군사력으로 합병하는 만행을 벌여 팽창주의를 추구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후세인이 축출된 이후에 집권한 아흐마드 찰라비나 이야드 알라위, 이브라힘 알 자파리, 누리 알 말리키 같은 이라크의 역대 지도자들이 여러가지 실정과 헛발질들을 일으키고, 이로 인해 치안 악화와 IS의 준동과 같은 정치적 혼란들이 지속되다니 이라크 전쟁과 IS 격퇴전 이후로 이라크 국민들 사이에서도 후세인과 바트당 통치 시기가 더 좋았다고 재평가하며 하소연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물론 이라크 국민들도 후세인 정권이 저지른 폭정의 피해자와 그 후손들과 후세인 정권 시기에 극심한 학살과 억압을 당했던 이라크내 쿠르드족들은 그와는 별개로 최소한 후세인을 옹호하지 않고 그를 비난한다.

그의 이름이 한글 표기로는 ' 후세인(حُسَيْن‎ / Ḥusayn)'이라서, 중동붐이 지나간 이후로 후세인에 대해 접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후세인(後世人, 후세의 인물)이라는 뜻으로 통했던 적이 있었다. 막상 또 널리 알려지니 '이름에 후세인이 들어가는 인물들은 모두 아랍계'라는 말이 널리 퍼져서, 2008년 미국 대선 당시에도 본명에 '후세인(Hussein)'이 들어가는 버락 오바마를 꺼림직하게 여긴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후세인이라는 이름은 사담 후세인의 삼촌인 하산 알마지드가 지어준 것으로 '멋진, 아름다운'의 의미를 지닌다.[6]

2. 일생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사담 후세인/일생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2.1. 후세인 정권의 말로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사담 후세인/재판 문서
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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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알리 하산 알 마지드 아비드 하미드 마흐무드

독가스로 사람을 마구 죽여대고, 할리브자에서만 5천 명 이상을 죽인 후세인의 사촌, "케미컬 알리" 알리 하산 알 마지드 2010년 1월에 사형당했다. 원래 2003년 이라크 전쟁이 터진 직후, 영국군은 자신들이 알리 하산 알 마지드를 죽였으며 시체도 확인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는데, 어이없게도 그는 멀쩡히 살아서 체포되어 2010년 교수대에 섰다.

후세인의 경호실장이자 비서실장을 지냈고, 후세인의 신임을 받아 쿠사이 후세인과 함께 공안기구의 담당자였던 아비드 하미드 마흐무드는 2003년에 체포되어 2012년에 처형되었다.

사담 후세인과 함께 재판을 받은 피고인들은 후세인 치하에서 부통령을 지낸 타하 야신 라마단과 후세인의 이복동생 바르잔 이브라힘 알 티크리티, 혁명 법원의 전 수석 판사였던 아와드 하메드 알 반다르였다. 그 밖에도 시아파 학살에 연루된 압둘라 카젬 루이드와 미즈하르 압둘라 루에이드, 알리 대엠 알리, 그리고 무함마드 아자위 알리로 이들은 1982년, 두자일 마을에서 일어난 학살의 고위 관계자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았다. #
사담 후세인 타하 야신 라마단 바르잔 이브라힘 알 티크리티
아와드 하메드 알 반다르 알리 대엠 알리 무함마드 아자위 알리
후세인 치하에서 부통령을 지낸 타하 야신 라마단은 2005년에 체포되어, 처음에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에서 사형으로 뒤집혀서 처형당했다. # 후세인의 이복동생 바르잔 이브라힘 알 티크리티 2007년에 사형 당했는데 목이 잘려서 참혹하게 죽었다. 교수형이었음에도 처형 도중 목이 잘렸는데, 이라크는 다른 중동국가들과 달리 세속 국가들처럼 집행 시작과 동시에 사형이 바로 끝나지만 대신 목뼈가 부러지는 수하식 교수형을 집행하기에 꽤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라고 한다. 이라크 혁명 법원의 수석 판사였던 아와드 하메드 알 반다르도 혐의가 모두 인정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바트당의 관료, 압둘라 카젬 루이드 미제르 압둘라 루이드 부자는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알리 대엠 알리는 1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사망했다. 무함마드 아자위 알리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외무장관이자 부총리를 지냈고, 후세인 정권의 유일한 기독교도였으며, 후세인이 가족이라고 불렀던 타리크 아지즈는 바그다드가 함락된 후에 체포되었는데, 워낙에 순순히 붙잡혀서 후세인을 배신하여 투항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고, 지금은 2010년에 사형을 선고받고 수감 생활을 하다가 2015년 6월 5일 옥사했다. 사형이 확정되는 대로 바로바로 처형을 하던 이라크 정부였으나, 만 74세에 사형을 언도 받았기에 만 70세를 넘긴 상태라는 이유로 이라크 형법상 사형이 집행되지 않았다. 영문 Wikipedia 이라크 형법

사담 후세인의 아들 우다이 후세인 쿠사이 후세인, 쿠사이의 아들인 무스타파 후세인은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자 모술에서 농성전을 벌이다 결국 2003년 7월 22일 미군과의 전투 중 폭사했다.
이자트 이브라힘 알 두리
후세인이 집권한 모든 기간 동안 이라크 혁명지휘위원회 부의장이자 이라크 부통령을 역임한 이자트 이브라힘 알 두리는 후세인의 오른팔로 불렸던 인물이었는데 초등 교육만 받고[7] 얼음 장수로 살아오다 현지 고등학교 교원으로 일했으나 아랍 민족주의에 감명을 받고 당시 비합법 정당이던 바트당에 가입해 1959년과 1962년에 투옥된 적이 있다. 1963년 2월 쿠데타에 참여한 알두리는 1963년 11월 쿠데타 미수 사건에 참여했다가 구금된 후 감옥에서 후세인을 만나 그때부터 친구로 있었고 1967년에 출옥한 후 1968년 쿠데타에 참여한 덕분에 출세가도를 달렸다. 알두리는 후세인의 2인자였던 만큼 후세인의 악행들에도 핵심적인 역햘을 했는데 이라크가 이란과 쿠웨이트를 침공하는 것을 결정하는 데에 참여했고,[8] 안팔 캠페인 때에는 사린 가스 사용 지시를 내리고 쿠르드족 반란 유혈 진압에도 참여했으며 시아파 탄압을 주도한 인물이었다보니 1998년 11월 22일에는 시아파의 성지 카르발라를 방문했다가 암살당할 뻔했을 정도였다. 그러면서 알두리는 자신의 고향 출신 인사들을 당, 치안·정보기관, 군 간부에 앉혔고 1995년에는 자신의 딸을 우다이 후세인과 결혼시켰다.[9] 후세인의 축출 이후에는 차 3대에 현금 3천만 달러를 채우고는 사담 후세인의 딸 및 측근들과 함께 시리아 다마스쿠스로 도망쳤고 1000만 달러의 현상범이 되었으면서도 이라크 바트당 조직들을 재편성하고 구정권 잔당 세력들이 이끄는 반미 게릴라들을 지원했으며 후세인이 처형된 2006년 12월 30일에는 구 바트당/구 이라크군 출신들을 규합해 반미 무장 조직인 낙쉬반디 교단군을 만들고 최고 지도자에 올랐고 후세인의 처형 후인 2007년 1월 3일에는 이미 금지된 바트당의 최고 지도자에 오른다. ISIS의 활동 초창기에는 반시아파, 반이라크 정부 성향을 공유하던 ISIS를 지원하기도 했으나 ISIS가 너무 극단적이고 사상적으로도 낙쉬반디 교단군과 대립했기에 얼마 안 가 ISIL과 전투 상태에 들어갔고,[10] 예멘 내전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군사 개입을 지지했다고 한다. 2005년 이후로 여러 번이나 사망설이 도는 와중에도 간간이 연설 테이프와 녹화를 공개하며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과시해오다가 2020년 10월 25일에 사망했다.

후세인의 아들 둘은 죽었지만, 그보다 수가 훨씬 많은 딸들도 아버지의 복수를 외치며 다에시 지지를 천명한 상황이다. 특히 집안의 장녀인 라기드 후세인은 이라크 저항세력과 다에시에게, 아버지가 남긴 막대한 재산을 그대로 퍼다 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라크 지역에서의 다에쉬 세력 확장은 사실상 이들의 공이라고 봐도 무방한 상황. 미국이 후세인을 절대 죽이면 안 된다고 경고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는데, 그 경고를 무시하고 자기들 꼴리는 대로 마구 저지른 대가를, 이라크 정부는 지금 몇 곱절로 치르고 있는 셈이다.

이라크 전쟁 당시 서방에게 독설을 여러 차례 날려 유명해진 외무장관 무함마드 사이드 알-사하프는, 이라크가 미국에 의해 함락된 뒤 잠적했다가 미군에게 자수, 체포됐다. 자살설이 돌기도 했지만, 포로로 잡히고 얼마 뒤 석방되어 2008년 3월에 아랍에미리트로 이주해 조용히 살고 있다. # 이 양반은 후세인의 측근 치고는 딱히 전쟁범죄 같은 건 저지른 적도 없는 평범한 외교관 출신인 데다, 유명세를 탄 이유도 허세 쩌는 공보활동 정도가 전부라 죽이거나 빵 보낼 만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전쟁 당시 허세를 부린 이유를 이라크 군에서 잘못된 정보를 줬고 자신은 그걸 토대로 언론에 발표했기 때문이라 주장했다.

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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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의 인물.
왼쪽과 오른쪽 인물은 각각 우다이 후세인 쿠사이 후세인

자녀들로는 장남 우다이 후세인과 차남 쿠사이 후세인 외에 3명의 딸들을 두었다. 그리고 손자로 쿠사이의 외아들 무스타파 후세인이 있었다. 우다이와 쿠사이는 부친 사담이 잡히기 전에 미 육군 제101공수사단 병력과 교전 중 험비에 장착된 TOW AH-64 아파치 공격헬기의 AGM-114 헬파이어 세례를 맞아 죽었고, 무스타파는 항복을 거부하고 교전을 계속하다가 미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죽을 당시 우다이는 39세, 쿠사이는 37세, 무스타파는 14세였다.

시리아의 아사드 일가와 마찬가지로 이 쪽도 장신 집안으로 유명하다. 사담 후세인의 키도 약 186cm이고, 다른 가족들도 모두 컸다. 그것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집안이 심각한 콩가루 집안이라는 것이다.

사담 후세인의 일족들 중에서 남자들은 사위를 포함해 전부 다 죽어서 현재 대가 완전히 끊어졌으며, 현재 살아 있는 사담 후세인의 집안 사람들은 딸 라가드와 아내 사지다 등 전원 여자들밖에 안 남았다. 그나마 여자 일족들조차 요르단 어딘가에 숨어 있을 뿐 정확한 위치는 불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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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카멜 후세인 카멜

4. 평가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중 한명으로 손꼽힌다. 내치 면에서만 보아도 국민들과 관료들의 공포를 조장하는 방식의 강압적인 통치를 즐겼으며, 대외적으로는 문자 그대로 중동의 깡패로 불릴 정도로 외교적인 악행을 저질러 전세계적으로 북한에 비견되는 최악의 독재자로 평가받으며 국제사회로 부터 엄청난 질타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모국인 이라크에선 평가가 엇갈린다.

일단 걸프전쟁 당시 이라크와 전쟁을 벌였고, 이라크에게 강제합병까지 당한 쿠웨이트는 국민에서부터 왕가까지 사담 후세인을 매우 증오한다. 실제로 걸프전쟁이 끝나고, 이라크에서 후세인 정권이 건재하던 1990년대 중후반까지 쿠웨이트에서는 엄마가 자식이 말을 안 듣거나 잘못을 하면 ' 너 자꾸 그러면 사담이 너 잡아간다!'라는 말까지 하며 야단을 칠 정도였으며, 후세인 정권이 이라크 전쟁으로 전복되고 2006년 후세인이 사형당할 당시에 쿠웨이트 정치권과 쿠웨이트 국민들은 후세인의 사형에 찬성하는 입장을 보이다 못해 당연히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민족과 언어, 종파가 서로 다르고 이라크와 8년간 벌인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피폐해졌던 이란의 입장에서 사담 후세인은 그야말로 절대악, 파괴신 그 자체나 다름없다. 애초에 전쟁 자체가 이라크의 기습으로 시작된 데다 군/민간인 사망자가 너무 많아 지금도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가족이나 친지를 잃고 자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이라크를 증오하는 국민들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다. 특히 걸프 전쟁 당시 쿠웨이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후세인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이란 인민전사기구같은 이란 내부 테러 조직을 후원해서 뒤끝을 보였다.

또한 이란 혁명으로 정권을 쟁취하여 현재 이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이란 지배층들의 입장에서 사담 후세인은 시아파 이슬람 혁명 수출을 좌절시킨 장본인에다가 후세인 집권 시기 8년간이나 이라크와 치뤘던 이란-이라크 전쟁을 겪고 난 후 이란이 현재 미국과 서방 등 국제사회의 반발과 우려에도 핵개발과 핵무기 보유에 집착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사담 후세인을 싫어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2006년에 후세인이 사형되었을 때 이란 여론과 정치권에서 후세인 사형에 대해 찬성하는 반응을 보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같은 수니파 국가였음에도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사담 후세인을 싫어한다. 걸프전 당시 쿠웨이트 사바흐 왕족들은 사우디로 도피했고 이라크군은 사우디에도 포탄을 발사했다. 자국 영역인 카프지에서는 카프지 전투까지 발생했다. 그리고 사우디는 미군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으로 걸프전에 참전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우디를 비롯한 아랍의 왕정 국가들은 이란 이슬람 혁명에 대항하는 대리전을 후세인 당시 이라크에게 사주하고 치르게 한 장본인들이지만, 그 결과로 이라크가 부도 위기에 몰리자 채무 상환을 독촉하며 전쟁을 초래하였다는 사실은 깔끔하게 잊어버리고, 이라크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자신들을 배신한 천하의 개쌍놈으로 여기는 수준. 당연히 이라크 측은 이뭐병 취급. 이라크가 전통적 앙숙관계인 이란과 쿠웨이트 못지않게 사우디아라비아와 사이가 안 좋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게다가 심지어 이라크는 사담 후세인 정권이 이라크 전쟁으로 붕괴된지 수 년 뒤인 2017년에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 에미리트, 바레인, 리비아, 이집트 등 아랍의 수니파 국가들이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하던 카타르에 대해 단교 보복 조치를 가할 때도 이에 동참하지 않고 카타르와의 정식 수교 관계를 유지하여 카타르를 지지했다.

다만 2020년에는 사우디와 이라크가 걸프 전 이후에 폐쇄했던 국경검문소를 다시 열며 양국 관계를 개선하고, 이듬해인 2021년에 카타르에 대해 단교 보복을 가하던 사우디가 카타르에 대한 보복 조치를 풀고 재수교를 맺으면서[11] 이들 나라의 관계가 앙숙이던 것도 이제는 옛 말이 되었다. 사우디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라크를 배척했다가는 레반트 등 중동 북부 지역으로 외교적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이란을 견제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이란과 인접한 이라크와의 외교관계 개선에 무척 신경쓴다.

이웃나라이고 당시 이라크와 똑같이 바트당 체제인 시리아에서도 인식이 좋지 못하다. 바트당의 분열을 고착화시켰다는 점도 있고, 물밑으로는 첩보전을 비롯해 대립관계가 심각했기 때문. 어느 정도냐면 똑같이 바트당 지도자임에도 하페즈 알아사드 당시 시리아 대통령과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서로 정상회담 한 번 한 적이 없었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사담 후세인도 종파적으로 수니파에 속했고 친이라크 바트주의자들과 연합했다는 점 등을 이유로 하마 학살 당시 무슬림 형제단의 봉기를 지원하는 등 시리아 안보에도 위협을 끼친 바가 적지 않다. 그래서 시리아는 이란-이라크전 당시에는 적극적으로 이란에 무기를 제공하는 중간 상인 역할을 수행했고, 걸프전 당시에는 이라크를 공격하는 미국, 서방 주도의 다국적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기도 했으며, 이라크가 무너진 이후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 협력하면서, 난민을 수용하고 저항세력에 대한 첩보를 제공하기도 했다.[12] 하지만 시리아 국민들은 사담 후세인과 같은 이슬람 수니파가 대다수이고 반미정서가 매우 강한 편이어서 후세인을 어느 정도 동정하는 정서가 있으며, 사담 후세인이 잡히지 않았을 때 그를 사칭하는 저항방송을 송신했을 정도였다.

이집트 모로코에서도 반 후세인 정서가 크다. 이들은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란과 싸우던 이라크를 지지했으나 1988년에 이란-이라크 전쟁이 종전되고, 이란과의 전쟁이 끝난지 약 2년 뒤인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걸프 전쟁을 일으키자 사담 후세인을 적으로 돌리고, 걸프 전쟁에서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으로 참전해 이라크를 공격하면서 걸프 전 이후에는 사이가 나빠졌다. 그나마 리비아는 똑같이 반미를 외치면서 껄끄러운 사이는 아니었으나 주변정세가 이라크 왕따였으니 대놓고 친하게 지내지는 못 했다.

한편 다른 북아프리카의 국가인 튀니지 알제리의 경우 반미도 친미도 아니었고, 당시 알제리의 대통령이었던 리아민 제루알과 튀니지의 대통령이었던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가 한 쪽으로 치우치려고 하지 않으며 미국을 위시한 서방세계와 친하게 지내면서도 후세인 정권의 이라크와 카다피 정권의 리비아 등 아랍의 반미국가들과도 국교관계를 유지하며, 교류를 하기도 했지만 그 당시 중동정세의 상황이 반미를 하건 말건 문제만 일으키는 이라크와 리비아는 철저히 왕따였던지라 이들도 후세인 치하의 이라크와는 대놓고 친하게 지내지는 못하였다.[13]

요르단 키프로스, 레바논의 경우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과는 대립하지 않았고, 양국간 사이는 나쁘지 않았지만[14] 그래도 걸프 전 이후의 당시 국제정세가 미국의 일방 패권주의 일변도로 거의 돌아가다 보니 이들도 미국의 눈치 덕에 후세인 치하의 이라크와는 친하게 지내지는 못했다.

반면 모국인 이라크의 국민들 사이에서는 후세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는데, 우선 직접적으로 후세인과 같은 이슬람 교파 출신이었던 이라크의 수니파 무슬림들과 바크르와 후세인 정권 시절 우대를 받았던 이라크내 집시족들은 후세인에게 동정적이거나 우호적인데 비해, 사담 후세인 정권 치하에서 탄압과 학살을 겪었던 이라크내 쿠르드족과 시아파 무슬림 국민들은 후세인을 여지없이 증오하거나 원수취급을 하고 있다. 그리고 사담 후세인의 시아파 탄압이 워낙 악랄했다 보니 이라크내 시아파들 사이에서는 후세인과 마찬가지로 자신들과 교파가 다른 시아파와 앙숙지간인 수니파 출신이었지만 후세인의 전임이자 1970년대 이라크의 대통령을 역임했던 아흐메드 하산 알 바크르가 최소 사담 후세인보다는 훨씬 온건했다며 바크르 전 대통령을 고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바크르가 성향적으로는 사담 후세인보다는 온건했고, 내치 뿐만 아니라 외교에서도 이란, 쿠웨이트 등 주변국 및 서방권과의 관계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렇듯 걸프전 이후로는 주변 국가들에 국경까지 패쇄당하고 여러 각국으로부터 항공 직항편까지 정지당하는 등 그야말로 고립을 당했다. 걸프전 이후 유일하게 정상회담을 한 해외 국가원수는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대통령뿐이었고, 그나마도 유가부양에 협조하려고 권한 수준이었다. 초기에는 친소련 성향이었음에도 당시 소련의 후신인 러시아는 자국 내 문제처리에도 바빴으니 신경 쓸 여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랍, 이슬람권 국가들뿐만 아니라 당연히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 서방세계 국가들에서도 독재자, 전쟁범죄자로 지탄을 받고 있다. 다만 후세인이 축출 뒤 이라크의 혼란상이 지속되면서 그의 통치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재평가가 되기도 했다. 또한 재판 과정에서 변명을 하거나 자신의 결정을 회피하는 짓 따위를 하지 않고 당당하게 소신을 밝힌 점. 카다피처럼 목숨을 구걸하거나 차우셰스쿠처럼 끝까지 현실회피용 정신승리를 하거나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처럼 독실한 무슬림을 자처하면서 정작 잡히는 게 무섭다고 율법에 어긋나는 자살을 하지 않고, 자신의 행동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한 점은 역시 한때나마 영웅이었던 인물이라고 할 만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후세인과 같이 형장으로 끌려간 다른 고위 군인, 관료들 중에도 죽음의 순간 겁먹은 모습을 보인 자는 없었으며, 기개 있는 모습으로 죽음을 맞았다 한다. 비록 독재자의 측근이자 전범들이라지만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스리랑카에는 사담 후세인 마을이 있다. 지역 무슬림들이 거주하는 이 마을은 1978년 홍수피해를 입었을 때 이라크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했더니 사담 후세인이 통크게 재건을 해줘서 사담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스리랑카에서 극소수인 무슬림들은 대다수인 불교도나 2번째로 수가 많은 힌두교도 타밀족과도 사이가 나빠서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한 터에 이런 은혜를 입었기에 당연히 이 마을 주민들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크게 비난하였다. 후세인 이상으로 악랄하던 폴 포트조차도 지원을 받고 큰 도움이 되어 존경하며 더 나아가 신성시하던 소수 민족들이 있듯이.

비록 한국이나 이외 다른 아시아권 나라에선 후세인으로부터 직접적인 피해를 받지 않아서 서방이나 아랍권보다는 악감정은 덜하지만, 이쪽에서도 그닥 멀쩡하지 않던 나라를 전쟁, 가난으로 더욱 말아먹은 독재자인 이상 평판은 영 좋지 않다. 특히 한국에선 2002년에 미군 여중생 압사 사고가 발생한 이후 전국적 반미 분위기로 인해 후세인을 옹호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했지만 한국은 이라크의 후세인 독재정권을 초월하는 최악의 독재꼴통집단 북한과 휴전, 대립하는 정치적인 상황으로 인해 객관적으로 그의 업적을 인정하는 수준을 넘어 후세인을 적극 옹호하는 것 자체가 그야말로 비상식적이고 정신병자 취급 받기 십상이다. 한국 언론도 이랬지만 조선일보 월간조선을 통해 대대적으로 후세인의 과오만을 보도하며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는 데 노골적이었기에 한겨레로부터 후세인이야 당연히 악랄하지만, 그런 후세인을 이득에 따라서라고 하지만 미국이 지원하던 건 쏙 빼먹냐며 비판하기도 했다. 물론 한겨레도 후세인의 악랄함을 인정했으니 한국인들도 결과적으로는 좌우파를 막론하고 사담 후세인을 욕한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동남아시아 국가인 베트남에서도 후세인이 호의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사담 후세인 정부는 북베트남 시절부터 강력한 관계를 유지했고 많은 원조를 제공해왔으며 그 어떠한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2002년에 응우옌토빈 부주석이 이라크를 방문했을 땐 베트남의 모든 빚을 탕감해주었다. 후세인 정권이 타도되자 베트남 정부는 미국 주도의 전쟁을 비판했었다. 최근 몇 년간 베트남 정부는 과거 지원에 대한 보답으로 이라크의 전후 재건에 상당한 원조를 하고 있다. 다만 해외에 거주하는 남베트남 유민들 및 구 남베트남 영토의 반공 성향 베트남인들은 후세인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며, 이들은 후세인이 처형되었을 때 원수의 아군이 죽었다며 기뻐하기까지 했다.

우습게도 미국이 과거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후세인 편을 들어줬고, 럼즈펠드 전 미국 국방장관이 손수 이라크로 가서 후세인과 반갑게 악수하면서 우애를 과시하던 적도 있다. 이는 이란을 견제하기 위함이었지만. 이 사진이나 영상은 이라크 전쟁 당시 럼즈펠드를 비난하는 측에서 쓰면서 실컷 럼즈펠드를 놀렸다.

하지만, 후세인이 죽고, 이라크에 남은 기독교 같은 소수 종교인들 #이나 집시들은 지금은 애절하게 후세인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들이 따르기만 하면, 그들의 종교를 인정하고 경제적 기초나 치안을 보장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후세인이 죽은 뒤, 미국은 여러 계산과 입장 때문에 나서지 않고 있고 현 이라크 정부는 이들에게 일절 무관심이라서, 이들은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온갖 집단에게 학살과 약탈을 당하는 등 여러 끔찍한 일들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랍의 세속주의 독재자들이 일관적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알 아사드도 기독교도와 알라위파를 비롯한 소수 종파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호스니 무바라크, 사다트 등의 이집트의 독재자들도 콥트 교도들을 보호했다. 다만 현 이라크 정부도 종교 배타주의때문에 일어난 정말 끔찍한 일을 한바탕 겪은 이후 최근에는 기독교도, 야지디 등 소수 종교인과 집시들을 마냥 홀대하는 것도 아니어서 전쟁으로 파괴된 교회를 재건하고 소수 종교인들에 대해 보호, 경호까지 하고 있기에 이조차 의미가 없어졌다.

총평하면 후세인은 어떻게든 조금만 더 도망을 다녔거나 최소한 재판 절차를 잘 이용했으면 살 수 있었으며, 후세인 본인도 이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후세인 본인이 이를 스스로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게다가 처형 영상이 공개됨으로써 역설적으로 사형장에서조차 겁을 집어먹기는커녕 담담하게 유언을 남기고 용수조차 거부하는 등 독재권력에 의지해 반대파를 학살하기만 했던 무아마르 카다피 같은 겁쟁이가 아니라 실제로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강골이었다는 걸 스스로 입증했다. 이 때문에 권력을 잃은 후세인이 스스로 당당한 죽음을 택함으로써, 이라크 시아파 정부를 약화시키고 수니파를 결집시키려 했다는 추론도 있다. 권력도 잃고, 대를 이을 아들도 다 죽고, 딸은 옆나라인 요르단으로 도망쳤고, 측근들도 사형장 직행이 예정되어 있고, 그렇지 않은 작자들은 다 배신자들이고, 남은 가족들의 삶을 그나마 지키자면 누군가의 후원이 있어야 하고, 이 과정에서 한때 권력을 잡았던 폭군답게 당당하게 죽어서 영웅으로 남자고 스스로 죽음을 결정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살아서 감옥에 갇혀 있으면, 그가 한 악행에 비해 이라크 정부가 관용을 베푼 게 되어, 그만큼 후세인에 대한 동정론도 옅어지지만, 덜컥 죽는 바람에 이라크 정부가 개인적인 감정으로 후세인을 신속하게 죽이고 나라를 망쳤다고 기억되어 지금까지의 악행이 대부분 잊히고, 오직 시아파 보복의 희생자로만 기억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사담 후세인과 달리 90세까지 장수하며 자신이 생전에 저지른 악행에 비해 노년기를 편안히 보낸 한국의 전두환조차 말년에 조비오를 모욕한 혐의로 수사를 받다가 죽은 것 때문에 한국의 극우세력들에게 순교자 대접을 받고 있는데[15], 사담 후세인 같이 무려 사형에 처해지기까지 한 독재자라면 그렇게 순교자 대접을 받는 정도가 더더욱 강해지는 것이다.

5. 대중매체에서

걸프전 이후, 10여 년간 미디어에서 '아랍의 독재자' 이미지로서 수도 없이 후세인 본인이나 그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 등장했다. 죽은 뒤에는 관심이 줄어든 편이다.

6. 여담

파일:이라크 바빌론 1.jpg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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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Ṣaddām Ḥusayn ʿAbd al-Maǧīd al-Tikrītī [2] https://www.howtallis.org/saddam-hussein-height-weight-shoe-size/ [3] 이들은 본처인 사지다 탈파의 자녀들이고 이 외에 몇 명의 사생아들이 있다. [4] 다만 군사정부를 운영했던것은 아니다. [5] 주변인들을 모두 본인에게 충성하는 이들로 바꿨으며 서로 결혼을 시킨 한편 본인을 안 따르는 사람들은 수백명 단위로 숙청시켰다. [6] 통상적으로는 시아파의 성자인 이맘 후세인 이븐 알리의 비극적인 죽음을 기려 후세인이라는 이름을 쓰는데 무슬림이라면 종파에 상관없이 많이 사용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후세인이라는 인물 자체는 우마이야 가문이 시도하던 칼리프의 세습제 전환에 반대하며 저항하다가 죽음을 맞은 인물로 키케로 정몽주와 비슷한 인물이다. [7] 알두리는 코란 외의 책은 읽은 적이 없을 정도였다. [8] 특히 걸프 전쟁 때 사우디아라비아 침공은 알두리가 직접 지시한 거였다고 한다. [9] 하지만 얼마 후에 이혼했다. 사실 우다이 후세인의 실체를 보면 이혼한 것이 오히려 다행일 수밖에 없었다. [10] 2015년에 공개된 녹음 테이프에서 알두리는 '이슬람 국가와 이란은 아랍과 이라크의 적'이라고 말했다. [11] 사실 사우디의 대카타르 외교 관계 개선은 친미 동맹국인 카타르와 사우디 두 나라를 화해시켜 이란을 견제하게 하려는 미국의 외교적 계산과 중재도 작용했다. [12] 그래서 걸프전 이후 90년대에 하페즈 알아사드 빌 클린턴이 정상회담을 하고 국교 정상화를 하기도 했다. 물론 현재는 시리아 내전으로 도로 단교. [13] 아랍권에서 제일 세력이 큰 사우디와 이집트가 이 둘과 사이가 안 좋았던 것도 컸다. [14] 당시 요르단의 후세인 1세 국왕은 걸프 전쟁 당시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합병하자 이라크에 대한 무력 사용을 반대하고 대화를 중재해서 평화적으로 이라크-쿠웨이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미국과 서방세계, 주변 아랍 국가들, 아예 국권을 이라크에게 피탈당하고 사우디로 망명한 쿠웨이트의 사바흐 왕가 인사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15] 범죄 혐의로 수사를 받는 것 없이 평범하게 전직 대통령으로서 경호를 받으며(1997년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의 적용이 영원히 중단되었지만 특별사면 이후 다시 전직 대통령으로서 경호를 받게 되었으니) 편안히 세상을 떠났다면 전두환의 지지자들도 그의 죽음을 평범하게 애도했을 것이고 전두환에 대한 그나마 남아있는 동정여론도 실제보다 더더욱 없어졌겠지만, 말년에 받은 그 수사 때문에 전두환의 지지자들이 전두환을 순교자로 추앙하게 되었다. [16] 이때 사담이 "내가 어디로 갔을 거 같았어, 디트로이트?"라고 말한다. [17] 《사우스 파크》의 천국은 몰몬교도들만 산다. [18] 무아마르 카다피가 지원한 세력들은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아닌 좌익 적색테러 세력들이나 민족주의 테러 세력들이 훨씬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