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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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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제23대 국왕
순조 | 純祖
대한제국 추존 황제
순조 숙황제 | 純祖 肅皇帝
파일:순조추정어진..jpg
순조 익선관 추정 어진
출생 1790년 7월 29일
(음력 정조 14년 6월 18일)[1]
한성부 창경궁 집복헌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즉위 1800년 8월 23일 (10세)
(음력 정조 24년 7월 4일)
한성부 창덕궁 인정문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사망 1834년 12월 13일 (향년 44세)[2]
(음력 순조 34년 11월 13일)
한성부 경희궁 회상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능묘 인릉(仁陵)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
1800년 1월 25일 ~ 8월 23일
(음력 정조 24년 1월 1일 ~ 7월 4일)
조선 제23대 국왕
1800년 8월 23일 ~ 1834년 12월 13일
(음력 순조 즉위년 7월 4일 ~ 순조 34년 11월 13일)
서명 파일:순조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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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홍(玜)[3]
부모 부왕 정조 선황제
생모 현목수비, 모후 효의선황후
형제자매 2남 1녀 중 차남
왕비 순원숙황후
후궁 숙의 박씨
자녀 1남 4녀(양자 1남)[4]
종교 유교 ( 성리학)
공보(公寶)
순재(純齋)
전호 효성전(孝成殿)
묘호 순종(純宗) → 순조(純祖)
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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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덕현도경인순희체성응명흠광석경
(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
계천배극융원돈휴의행소륜희화준열
(繼天配極隆元敦休懿行昭倫熙化峻烈)
대중지정홍훈철모건시태형창운홍기
(大中至正洪勳哲謨乾始泰亨昌運弘基)
고명박후강건수정계통수력건공유범
(高明博厚剛健粹精啓統垂曆建功裕範)
시호 조선: 문안무정헌경성효대왕
(文安武靖憲敬成孝大王)
대한제국: 문안무정영경성효숙황제
(文安武靖英敬成孝肅皇帝)
: 선각(宣恪)[5]
섭정 세자 이영 ( 1827년 ~ 1830년) }}}}}}}}}
파일:순조 어필.jpg
순조의 어필
1. 개요2. 생애
2.1. 갑작스러운 즉위2.2. 난세의 시작2.3. 세자 대리청정과 그 후2.4. 능묘
3. 평가4. 묘호 시호5. 어진6. 여담7. 가계8. 대중매체9. 관련 문서10.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조선의 제23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묘호는 순조(純祖), 시호는 숙황제(肅皇帝), 휘는 홍(玜), 자는 공보(公寶).

정조의 차남으로, 모친은 박준원의 딸이자 정조의 마지막 간택 후궁 수빈 박씨이다. 대한제국 건국 당시 고종의 양조부로서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로 격상됐다.

2. 생애

2.1. 갑작스러운 즉위

파일:순조임금이 쓴 '팔천세구오복(八千歲九五福) 국립중앙박물관 수정.jpg
<colbgcolor=#bf1400> 순조가 6살 때 쓴 구오복팔천세: 1795년(정조 19)

1800년 정조가 갑자기 승하해 11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는 바람에 조선 역사상 두 번째로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이는 당대에 최연소이다.[6] 순조는 어린 왕의 대명사인 단종보다도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또한 순조는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이 있었던 세종 재위기를 제외한다면 가장 짧은 세자 시절을 보낸 임금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그가 서장자였기 때문이다. 세자 책봉조차도 정조의 건강 악화에 의해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다. 1800년 2월 세자로 책봉되고 6월에 아버지인 정조가 승하하자마자 왕위에 올랐으니 4개월 동안만 세자 시절을 보낸 셈이다. 부왕 정조가 세손임에도 13년 동안 동궁 생활을 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순조보다 세자 생활이 짧았던 왕으로 겨우 2달의 세종이 있으나 세종은 아버지 태종이 스스로 계획적으로 왕위를 넘기고 상왕이 된 후에도 군사권을 갖고 외척들을 견제하는 등 막강한 뒷배가 되어줌으로써 아들이 무사히 안착할 수 있도록 도왔기 때문에 순조와는 완전히 상황이 다르다.

즉위 당시 조선 왕실에서 가장 큰 어른이었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7]가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했다. 수렴청정기간 동안 신유박해와 같은 천주교 박해 사건을 크게 일으켜 은언군과 그의 배우자인 상산군부인 송씨까지 역모죄로 몰아서 처형했다.[8] 이때 이미 몰락해 소수만 남아있는 남인은 나락으로 떨어졌고,[9] 남아있던 노론 시파도 타격을 입었다.

사학(邪學)에 대한 정순왕후의 탄압적 태도와 전국적인 오가작통법 시행은 순조실록에서 찾을 수 있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하교하기를,

"선왕(先王)께서는 매번 정학(正學)이 밝아지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종식될 것이라고 하셨다. 지금 듣건대, 이른바 사학이 옛날과 다름이 없어서 서울에서부터 기호(畿湖)에 이르기까지 날로 더욱 치성(熾盛)해지고 있다고 한다.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나라가 나라 꼴이 되는 것은 교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른바 사학(邪學)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교화에 배치되어 저절로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지경에 돌아가고 있는데,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점점 물들고 어그러져서 마치 어린 아기가 우물에 빠져들어가는 것 같으니, 이 어찌 측은하게 여겨 상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감사와 수령은 자세히 효유(效惟)하여 사학(邪學)을 하는 자들로 하여금 번연히 깨우쳐 마음을 돌이켜 개혁하게 하고, 사학(邪學)을 하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두려워하며 징계하여 우리 선왕(先王)께서 위육(位育)하시는 풍성한 공렬(恭列)을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와 같이 엄금한 후에도 개전(改展)하지 않는 무리가 있으면, 마땅히 역률(逆律)로 종사(從事)할 것이다. 수령은 각기 그 지경 안에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닦아 밝히고, 그 통내(統內)에서 만일 사학(邪學)을 하는 무리가 있으면 통수(統首)가 관가에 고하여 징계하여 다스리되, 마땅히 의벌(劓罰)을 시행하여 진멸(鎭滅)함으로써 유종(遺種)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이 하교(下敎)를 가지고 묘당(廟堂)에서는 거듭 밝혀서 경외(京外)에 지위(知委)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서양국(西洋國)에서는 이른바 야소(耶蘇)의 천주학(天主學)이 있었는데, 대개 천당(天堂)과 지옥(地獄)의 이야기로 현혹시켜, 부모를 존경하지 않고 윤리(倫理)를 업신여기며 강상(綱常)을 어지럽혔으니[10], 이교(異敎) 가운데 가장 윤기(倫紀)가 없는 것이었다. 그 책이 중국에서 우리 나라에 유전(流傳)되었는데, 더러 빠져들어 어그러지는 자가 있었으므로, 정조조에서 법으로 엄금하였었다. 그러나 아직도 법망에서 빠져 나간 여얼(黎孼)이 사람들을 불러 모아 강습(講習)하여 점차 서로 오염시켜서 포청(捕廳)에 붙잡히는 자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이러한 하교가 있었던 것이다.[출처]

해석을 하자면, 정순왕후가 쇠락하는 조선을 지탱하기 위해 나날이 번성해가는 사학(천주교)을 바로잡고 인륜(人倫)을 모르는 천주교 신자들을 개종하게 하며, 안 따르면 강력히 처벌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오가작통법 관련해서도 조선 내 질서를 다잡기 위해서 다시 시행했다. 동시에 유화책도 펼쳐서 66,000명의 공노비를 해방하고 서얼허통(庶孼許通)을 시행해서 기존 신분제도의 변화를 추진했다. 다만 해당 하교를 기록한 순조실록 부분을 보면 선조(先朝) 즉, 정조 대에 시행하려고 했으나 미처 하지 못한 일들을 지금 시행한다고 되어 있어, 정순왕후가 온전히 주도해 추진한 일이라 보기엔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수렴청정이라는 제도 자체가 주로 선왕의 유지를 발언의 근거로 내세우기는 하지만.

한편 배우자인 순원왕후는 부왕 정조가 직접 간택한 왕비로써,[12] 1800년 음력 2월 26일 비공식적으로 세자빈이 되었다. 4월 29일 재간택되어 비공식적으로 왕비가 되었지만, 정조가 혼례를 치르기 전 승하하는 바람에 정식으로 혼례를 못 치렀다. 순조 즉위 원년( 1800), 세자빈이 아닌 왕비를 새로 뽑자는 건의가 있었으나 결국 이 문제의 끝은 계증조모 정순왕후가 이 역시 선왕이 간택했다며 대혼(大婚)을 밀어붙여 순조 즉위 2년 뒤 정식으로 중전(中殿)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순조의 장인이자 한때 정조의 충신이었던 노론의 온건 시파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가 점차 조정을 장악해 60년 장기 집권의 서막을 연다. 이른바 세도정치의 시작이다. 이후 세도정치는 무너져가던 조선의 멸망을 가속화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2.2. 난세의 시작

순조의 치세는 난세의 시작이었다. 1811년 평안도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으며 1816년에는 탐보라 화산 분화로 발생한 대기근으로 인한 인구 급감소, 1832년에는 영국[13] 상선 암허스트호가 최초로 조선에 와 무력으로 통상을 요구하기도 했다.[14] 물론 이전에도 다른 이양선이 왔지만 교역을 청한 것은 처음이었다.[15]

순조는 뒤에 즉위하는 헌종, 철종과는 달리 나이나 혈통으로나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으므로[16] 순조 본인의 권한은 강한 편[17]이었으며 정치적인 판단 능력도 뛰어났다고 한다. 또한 수렴청정을 받던 초기 3년 정도까지의 인사 등은 선왕 정조의 스타일과 최대한 유사하게, 나름 균형있게 유지되었다. 순조는 친정 초까지만 해도 노론 벽파 숙청에 앞장서는 등 상당히 의욕적이었고 순조 11년( 1811)에 홍경래의 난이 터지기 전까지는 열심히 정사를 보았다.[18]

그러나 홍경래의 난이 터진 다음에는 엄청난 충격을 받아 우유부단함과 무기력함을 보였고, 김재찬·남공철·심상규·이시수 등 신료들이 있는 비변사에 국정의 대부분을 맡겨 세도 가문들이 국정을 마음대로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나마 김조순이 살아있던 시절엔 김재찬 등 안동 김씨면서도 입김이 닿는 대신들을 통한 간접적 막후 통치를 할 수 있었으나 순조 32년( 1832) 김조순 사후 김조순의 아들과 조카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점차 안동 김씨가 아예 모든 것을 다 씹어먹어버리는 우리가 아는 방식의 세도 정치가 된다.[19]

순조조에는 안동 김씨로 대표되는[20] 척신들을 중심으로 한 일당 독재 구도가 등장하는데, 순조가 선왕들과 달리 신하들을 단속하는데 신경쓰지 않았던 탓이 크다. 영조 초기에는 숙종부터 경종까지 이어진 과열된 붕당( 노론 소론/ 남인)으로 조정이 거의 피바다가 되었는데 이를 완론 탕평책으로 제어해서 영조 후기에는 척신 정치로 귀결되었지만 영조는 그 덕분에 정치 안정을 이루었고 『천의소감(闡義昭鑑)』으로 왕위에 관한 정당성도 크게 확보했다. 정조는 준론 탕평책으로 남인, 시파 벽파의 정쟁이 이어졌지만 정조가 채제공 김종수 등을 동시에 우대하면서 지속적 관리를 하여 조정의 균형이 일신에 무너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숙종에서 영조로 이어지는 지속적인 왕권 강화와 한 당파의 일당전제화로 인한 당파 정치의 붕괴[21]는 왕 한사람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한이 몰리게 만들다 보니 왕이 조금이라도 관리를 안 하면 문제가 생기게 된다. 후대에 유능한 임금으로 평가받는 영조와 정조는 바로 이런 점에 상당히 신경을 써서 권세가 강한 신하들이 나오기는 했어도 왕이 그때 그때 선 넘는 신하들을 제어해 더 큰 사고를 막았다. 하지만 순조에 이르러 관리에 손을 놓자 붕 뜬 통제가 드디어 일개 세도 가문들에 넘어가면서 조선 정계는 소수 가문간 암투와 비리가 난무하는 개막장으로 변했다.

2.3. 세자 대리청정과 그 후

아들 효명세자가 매우 영특해 아버지인 순조가 기대를 걸고 있었으며, 신하들 앞에서 스스로 무능한 임금임을 자처하며 세자에게 양위 선언을 여러번 하기도 하였다. 한 가지 재밌는 것은 대개 양위니 대리청정이니 소리가 나오면 온 나라가 뒤집혀서 전교를 거두어달라는 결사반대를 외치곤 하지만,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온 신하들이 종사(宗嗣)의 무궁무진한 복이라고 침이 마르게 칭찬을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영조 시절 순조의 아버지 정조의 대리청정를 극렬히 반대하다 죽은 홍인한을 크게 의식해서인듯 하기도 하고, 대신들이 순조가 진짜로 통치에 별 의지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 듯도 하다. 여러가지로 봐서 순조는 그의 아버지 증조할아버지에 비하면 통치욕이 그리 있던 사람은 아니었으며, 적당히 은퇴하고 좀 쉬고 싶었던 모양이다.

효명세자는 똑부러진 일 처리로 무너져 가던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으며 신하들과 순조의 기대를 한몸에 샀지만 불과 2년 좀 넘어서 병에 걸려 일찍 죽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순조의 두 딸도 사망했는데, 이로 인한 충격 탓인지 다리에 난 종기가 악화되어 순조도 얼마 후에 사망했다. 이 때문에 왕위는 순조의 장손이자 효명세자의 아들인 8살 헌종이 이었다. 사실 이전에도 병으로 건강은 좋지 않은 상태였는데, 한의학자들은 순조의 증세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화병[22]이라고 본다. 이때 재야에 있던 정약용을 불러다가 치료를 하려 했으나 정약용이 미처 오기도 전에 사망했다. 효명세자가 위독할 때에도 너무 늦어서 정약용이 오기 전에 사망한 적이 있었다.

순조 말년엔 안동 김씨가 그들에게 거슬리는 노론 벽파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시작하는데 대표적인 대상이 추사 김정희 아버지인 김노경 등이다. 이에 순조는 "우리가 백성들 먹여살리려고 정치하는데 오늘 나는 어찌 죽이거나 탄핵하는 말 말곤 한마디도 들은 게 없냐?"라고 탄식하기도 했고 막판에 왕권을 휘둘러 김노경 등을 석방하고 안동 김씨 세도가의 반대파들을 대거 풀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조가 안동 김씨를 제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순조 32년 이후의 실록은 김조순의 장남 김홍근이 군국의 사무를 비롯한 전권을 맡았다는 말이 나오는 판국이었으며, 다음 해 음력 11월 28일에는 창덕궁 대조전을 포함한 궁 전체가 인조반정 이래 최초로 깡그리 불타버렸다. 1803년 이미 인정전이 소실되어 다음 해 복구한 상황이었다. 1820년에 그려진 동궐도는 이 불타기 전의 창덕궁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순조 개인은 국정을 위한 연감인 『만기요람(萬記曜覽)』을 편찬하는 등 아주 무능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름대로의 부지런함과 물려받은 재능에도 불구, 의욕을 꺾는 악재를 많이 만났고 무엇보다 세도 가문에 적극적인 견제를 할 의지가 없었다.

또 그동안 축적되었던 삼정의 문란과 같은 제도적 모순이 순조 치세에 이르러 한꺼번에 폭발하여 곡산 민란, 홍경래의 난, 쌀 폭동을 비롯한 농민 봉기가 자주 일어나게 된다. 순조 시기가 조선의 쇠퇴가 대폭 명확해지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쌀 폭동은 순조 말년에 한양의 쌀 상인들이 쌀을 가져다놓고도 없다면서 팔지 않으며 쌀값으로 농간을 부리다가 분노한 한양 주민들이 쌀 폭동을 일으켜 싸전(쌀가게)들을 약탈한 사건이다. 이에 순조는 분위기가 하도 흉흉해서 폭동 주모자 7인과 함께 폭동의 원인제공을 한 여각 상인 2명도 처형하여 민심을 달래야 했다.[23]

말년에는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고 하며, 원래 있던 지병들이 자식들의 연이은 사망으로 더 깊어진 뒤 소화불능 등의 여러 질병을 앓다가 1834년 오랜 숙환으로 끝내 승하했다.

2.4. 능묘

순조의 능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인릉(仁陵)으로 근처에 16대조 할아버지인 태종 원경왕후의 능인 헌릉(獻陵)이 있어서 헌인릉(獻仁陵)이라고 불린다. 헌인릉 묘역을 나오면 주차장을 사이에 두고 왼편으로 어떤 건물이 보이며 건물로 들어가는 길에 표지도 없고 안내 표석 같은 것도 없는데 그 건물이 다름아닌 국정원(NIS)이다. 처음에 순조는 죽은 후 파주 지역에 묻혔지만 철종 때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고 천장 이듬해 순원왕후가 죽자 합장되어 현재 인릉을 가보면 합장릉의 형식을 띄고 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인릉에서 함부로 사진을 촬영하면 제지받으며 능침이나 정자각 등은 찍어도 상관없는데 국정원이 있는 방향으로 카메라를 함부로 돌려서 찍지 말 것. 까딱하다가는 국정원 직원들에게 보안 이유로 트집잡혀 코렁탕을 찰지게 먹을 수 있다.

그런데 같은 능역으로 묶은 태종의 헌릉에서는 인릉처럼 제지를 하지 않으므로 헌릉은 자유롭게 촬영해도 되고 인릉에서만 보안상에 유념해서 사진을 촬영하면 된다. 헌릉과 함께 능침 앞까지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어서 능을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기는 한데 위치가 위치라서 그런지 헌릉처럼 앞에서 감상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며 약간 멀리 떨어져서 능을 볼 수 있는 수준.

3. 평가

정조의 무기력한 어린 아들 이미지와 병약했다는 이유로 존재감이 매우 옅지만, 연구가 계속되면서 박약한 의지로 조선의 멸망을 가속화한 암군(暗君)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게다가 순조는 중흥군주(영조-정조) 뒤의 수성군주의 입장에 있었다는 점에서도 그의 무기력함이 가지는 부정적 의미는 커진다.

순조는 로부터 (심지어 증조할머니에게도) 물려받은 강력한 왕권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세자 수업 기간이 없다시피하게 너무 어린 나이(10세)에 왕위에 올랐다. 정순왕후의 수렴과 본인 스스로의 역량으로 이를 극복하는 듯 하였으나, 결국 청년기를 넘기면서부터 급격히 쇠약해졌다. 이에 아들 효명세자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효명세자도 건강이 좋지 않아 단명한 뒤 사실상 국정을 방치했다. 그리고 이는 결국 19세기 조선을 좌지우지한 세도정치를 낳았다.

30년 넘게 통치한 선왕 두명의 케이스와 비교하기도 한다. 바로 세종대왕 중종. 세 군주 모두 30년 넘게 권좌를 유지한 수성형 군주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평가는 극도로 큰 차이가 있다.

세 임금 모두 똑똑한 세자(문종/인종/효명세자)는 요절하면서 왕실은 어린 계승자( 단종/ 명종/ 헌종)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들 역시 단명하는 바람에 방계 중의 방계( 세조/ 선조/ 철종)의 인물이 즉위하게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24]

우선 세종대왕의 경우 순조와 비슷하게 세자기간이 매우 짧았고 피를 싫어해 옥사도 벌이지 않았지만, 황희처럼 신뢰가 있는 대신은 비리가 있어도 중용하였다. 또 세자( 문종)에게 오랫동안 실권을 준 대리청정을 맡겼다.[25] 문종의 요절로 단종이 승계한 것도 효명세자의 요절로 헌종이 승계한 것과 유사하다.

물론 차이점도 있는데, 우선 세종은 선대에 이미 소헌왕후의 장인인 심온을 숙청해 외척의 싹을 잘라놨고[26] 또 세자기간이 짧았다고는 하나 태종이 승계 후에도 사실상 상왕 통치를 3년 정도 했기 때문에 통해 세종은 국왕이지만 사실상 대리청정과 유사하게 국정 경험을 다졌던 시간적 여유도 있었다. 당초 스물이 다 되어 즉위해 한국사 최대의 명군으로 남은 세종대왕과, 고작 10여살 때 임금에 올라 암군에 그친 순조를 단순 비교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중종의 경우 반정이란 이유 때문에 부득이한 측면도 있지만 순조와 비슷하게 신하들에게 꽤 휘둘렸으며,[27] 말년에는 인종에게 대리청정을 거쳐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점이 공통 된다.[28]

중종과 순조 모두 조선이 융성기를 지나 매너리즘에 빠진 시대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중종 이후로도 조선은 300년 넘게 유지되었는데, 순조는 불과 사후 76년 후인 1910년에 망국을 겪었다는 점.

중종과 순조의 시대가 결정적으로 달랐던 점은 바로 새로운 세력의 부상이 없었던 점이었다. 중종의 경우에는 옥사 정치 혼란을 방기하면서 이에 실망한 많은 신하들이 사직을 하거나 과거에 들어가도 관직을 거부하는 일이 속출했다. 그러나 전화위복이란 말마따나 사림들은 이 때를 노려 성리학을 고도로 발전, 학파를 형성해 문하에 제자들을 양성하며 세력을 늘렸다. 명종 초중반[29]부터 옥사가 잦아들면서, 사림들은 중앙 정계에 대한 진출이 쉽게 이루어졌고 선조 시기가 되면 사림 세력은 조선에서 주류 세력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반면에 순조는 이를 대체할 새로운 세력이 마땅히 존재하지 않았다. 영조 대 당시 양대 붕당이었던 노론 삼수의 옥, 소론 이인좌의 난 나주 괘서 사건으로 당파색은 완전히 사라져서 탕평당이라는 당파로 유지되었다. 정조는 붕당 정치를 복원하기 위해 이른바 의리 탕평을 통해 벽파(청명당)가 주요 세력이 되고 남인도 다시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준론 탕평'은 깨지게 된다. 벽파는 즉시 남인을 신유박해 천주교 신자들과 같이 몰아냈으나, 벽파도 역시 버팀목이었던 정순왕후가 사망하고 순조가 친정(親政)을 하게 되면서 김한록의 '팔자흉언'이라는 죄명을 씌어서 몰락하게 된다. 시파(구 탕평파)의 영수 격인 김조순은 치열한 권력투쟁보다 권력 분점과 그에 기반한 정치적 입지 유지에만 주력했다. 더불어 순조의 느슨해진 외척에 대한 경계는 기어이 세도정치의 서막이 되었다는 평가. 임상옥 등으로 대표되는 중인, 상인계급 또한 공명첩을 통해 기성질서에 편입되며 새로운 시대를 주도할 세력화에 실패 하였다.

4. 묘호 시호


처음 올린 묘호는 순종(純宗), 시호는 성효대왕(成孝大王). 이후 철종 때 묘호가 순조(純祖)로 개정되었고, 대한제국 고종 때 양할아버지 및 2대조로서 황제로 격상(추존)되면서 시호가 개정되어 최종적으로 '순조 숙황제'가 되었다.

원래 묘호는 '순종'이었으나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고 서학( 천주교(가톨릭))을 탄압해 이단을 물리쳤다는 이유로 철종 8년(1857)에 순조로 묘호가 격상되었다. 영조와 정조의 묘호도 원래는 영종·정종으로, 영조는 고종 때 여러 공이 많다는 이유로, 정조 고종 대한제국을 수립・선포하면서 자신의 3대조라는 이유로 묘호를 황제로 재추존해 바꾸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특이한 일이다. 이는 철종이 헌종의 아저씨뻘이지만 순조의 양자가 되어 왕통(王統)을 이었으므로, 양아버지를 높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종 역시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文祖翼皇帝)의 양아들로 들어갔기에, 순조는 여러모로 인조 이래 종(삼종)- 영조- 정조로 이어지는 유일한 직계(직통) 계승자로서 큰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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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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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부산 용두산 대화재 당시 반소된 순조의 어진들
일제강점기 당시 순조의 어진은 원유관본 2점, 익선관본 대본, 소본 각각 1점으로 총 4점이 전해져오고 있었지만 1954년 12월에 발생한 대화재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순조 어진의 경우도 다른 어진들과 동일하게 돌돌 말려진 상태에서 화마에 휩싸였으며 불을 끄려고 물을 끼얹은 탓에 위 어진들을 자세히 보면 표제의 붉은 부분이나 색소 등이 다른 곳으로 번진 걸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어진이 얼굴을 포함해서 반 이상이 타버리는 바람에 완벽한 복원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불운은 아예 없어져버린 아버지부터 먼저 저세상으로 간 아들 손자에게까지 이어지고 말았다.

왼쪽 어진은 이후에 모사된 고종 황제의 어진과 유사하게 원유관에 강사포를 착용한 형태로 1830년 당시 41세였던 순조를 모사한 것이다. 표제 바로 앞에는 고종에 의해 황제로 추존된 직후 부가된 붉은 비단이 보인다. 가운데 어진은 경운궁 내 선원전의 화재의 영향으로 1900년에 왼쪽 어진을 그대로 모사한 이모본이다. 전체적으로 큰 차이점은 없지만 강사포의 색상이 더 붉게 표현되었고 음영도 강하게 처리되어 있다. 얼굴 부분이 완전히 없어진 왼쪽 어진과는 달리 이 어진은 그나마 구레나룻 부분만큼은 남아있다.

오른쪽 어진은 훼손 상태가 훨씬 더 심각해 화문석의 일부만 남아있으며 표제도 중간중간이 타버려서 일부만 판독할 수 있다. 그러나 남아있는 표제부분과 1935년에 작성된 관련 서류를 검토한 결과 이 어진은 순조의 익선관본 대본이라는 것을 최종 확정할 수 있었다.

가운데 어진을 제외한 나머지 어진들은 훼손 상태가 심각한 탓에 보존처리만 마치고 그동안 국립고궁박물관의 지하 수장고에 보관되어왔다가 2019년 하반기에야 부분적으로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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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순조 추정 어진
위 어진은 반신상의 어진으로 순조의 익선관본 소본으로 추정되는 어진이다. 신원미상의 어진으로 남은 까닭은 당연히 대화재의 영향으로 표제가 타버린 탓에 (다만 순조의 어진일 가능성은 크다.) 만약 이 어진이 순조의 어진이라면 아직 수염이 많지 않은 얼굴로 미루어 보아 채 스무 살도 안 된 1808년경에 모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위 어진이 순조의 어진으로 최종판정된다면 순조의 어진은 다른 조선왕들과는 달리 추존왕인 원종과 함께 유이하게 결본(缺本)이 없는 어진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상기했듯 대화재 직전까지 순조의 어진 수는 총 4본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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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선원보감》에 실린 순조 초상화 <colbgcolor=#bf1400> 《열성어진》에 실린 순조 초상화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에서 실린 초상화가 있다. 그러나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의 초상화는 대체로 실제 외모와 괴리가 크다.

《순조실록》에서 순조의 용모를 묘사한 대목을 보자.
상(上)은 자표(姿表)가 특이하여 넓은 이마와 높은 콧마루에 네모난 입과 겹턱을 가졌는데 용안(龍顔)은 불그레하고 체상(體相)은 풍만하고도 장대(莊大)하였다. 그리하여 바라보면 엄연(儼然)한 위엄이 있어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는데, 앞으로 나아가면 온화(溫和)하게 덕(德)이 있어 친근함을 느끼게 하였다.
《순조실록》, 순조대왕 묘지문(誌文).
기록을 토대로 볼 때 순조는 일반적인 미남상은 아니지만 나이 들수록 멋들어지고 푸근해지는 그런 외모인 것 같다. 또한 기록을 보면 정조와 닮은 얼굴일 가능성이 크다.[30]

6. 여담

공충 감사(公忠監司) 홍희근(洪羲瑾)이 장계에서 이르기를,

"6월 25일 어느 나라 배인지 이상한 모양의 삼범 죽선(三帆竹船) 1척이 홍주(洪州)의 고대도(古代島) 뒤 바다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영길리국(英吉利國)의 배라고 말하기 때문에 지방관인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민회(李敏會)와 수군 우후(水軍虞候) 김형수(金瑩綬)로 하여금 달려가서 문정(問情)하게 하였더니, 말이 통하지 않아 서자(書字)로 문답하였는데, 국명은 영길리국(英吉利國) 또는 대영국(大英國)이라고 부르고, 난돈(蘭墩) 흔도사단(忻都斯担)이란 곳에 사는데 영길리국· 애란국(愛蘭國)· 사객란국(斯客蘭國) 이 합쳐져 한 나라를 이루었기 때문에 대영국이라 칭하고, 국왕의 성은 위씨(威氏)이며, 지방(地方)은 중국(中國)과 같이 넓은데 난돈(蘭墩)의 지방은 75리(里)이고 국중에는 산이 많고 물은 적으나 오곡(五穀)이 모두 있다고 하였고, 변계(邊界)는 곤련(昆連)에 가까운데 곧 운남성(雲南省)에서 발원(發源)하는 한줄기 하류(河流)가 영국의 한 지방을 거쳐 대해(大海)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북경(北京)까지의 거리는 수로(水路)로 7만 리이고 육로(陸路)로는 4만 리이며, 조선(朝鮮)까지는 수로로 7만 리인데 법란치(法蘭治)· 아사라(我斯羅)· 여송(呂宋)을 지나고 지리아(地理亞) 등의 나라를 넘어서야 비로소 도착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 선재(船材)는 이목(桋木)을 썼고 배의 형체는 외[瓜]를 쪼개 놓은 것같이 생겼으며, 머리와 꼬리 부분은 뾰족한데 길이는 30파(把)이고 넓이는 6파이며 삼(杉)나무 폭을 붙인 대목은 쇠못으로 박았고, 상층(上層)과 중층(中層)은 큰 것이 10칸[間]이고 작은 것이 20칸이었으며, 선수(船首)와 선미(船尾)에는 각각 건영귀(乾靈龜)를 설치했고, 배 안에는 흑백의 염소[羔]를 키우며 오리와 닭의 홰[塒]를 설치하고 돼지 우리도 갖추고 있었으며, 선수와 선미에는 각색의 기(旗)를 꽂고 작위(爵位)가 있는 자의 문전에 있는 한 사람은 갑옷 모양의 옷을 입고 칼을 차고 종일토록 꼿꼿이 서서 출입하는 사람을 제지하였으며, 급수선(汲水船) 4척을 항상 좌우에 매달아 놓고 필요할 때에는 물에 띄워 놓았습니다. 전(前)·중(中)·후(後)의 범죽(帆竹)은 각각 3층을 이루고 있고 흰 삼승범(三升帆)도 3층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사용하는 그릇은 화기(畵器)이고 동이[樽]와 병(甁)은 유리였으며 숟가락은 은(銀)으로 만들었고, 배 안에 실은 병기(兵器)는 환도(環刀) 30자루, 총 35자루, 창 24자루, 대화포(大火砲) 8좌(座)이었습니다.

또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은 총 67인이었는데, 선주(船主)는 4품(品) 자작(子爵) 호하미(胡夏米: Hugh Hamilton Lindsay)이고, 6품 거인(擧人)은 수생갑리(隨生甲利) 출해리사(出海李士)이며, 제1과장(第一夥長)은 파록(波菉)이고, 제2과장은 심손(心遜)이고, 제3과장은 약한(若翰)이고, 화사(畵士)는 제문(弟文)이며, 사자(寫字)는 노도고(老濤高)이고, 시종자(侍從者)는 미사필도로(米士必都盧)이며, 과계(夥計)는 벽다라마(辟多羅馬)·행림이(行林爾)·임홍파(林紅把)·가파지(加巴地)이고, 수수(水手)는 가타(嘉他)·랍니(拉尼)·야만(耶熳)·주한(周翰)·명하(明夏) 및 마흥(馬興) 6인이며, 진주(陳舟)에 10인, 손해(遜海)에 20인이고, 주자(廚子)는 모의(慕義)와 무리(無理)이며, 지범(止帆)은 오장만(吳長萬)이요, 근반(跟班)은 시오(施五)·시만(施慢)·시난(施難)·시환(施環)·시섬(施譫)·시니(施尼)·시팔(施八)이었습니다.

용모(容貌)는 더러는 분(粉)을 발라 놓는 것처럼 희기도 하고 더러는 먹물을 들인 것처럼 검기도 하였으며, 혹자는 머리를 박박 깎기도 하였고 혹자는 백회(百會) 이전까지는 깎고 정상(頂上)에서 조그만 머리카락 한 가닥을 따서 드리운 자도 있었으며, 입고 있는 의복은 혹은 양포(洋布)를 혹은 성성전(猩猩氈)을 혹은 3승(升)의 각색 비단을 입고 있었는데 웃도리는 혹 두루마기 같은 것을 입기도 하였으며 혹 소매가 좁은 모양을 입기도 하고 혹 붉은 비단으로 띠를 두르기도 하고, 적삼은 단령(團領)을 우임(右袵)하고 옷섶이 맞닿은 여러 곳에 금단추(金團錘)를 달았으며 소매는 좁기도 하고 넓기도 하였는데 작위(爵位)가 있는 사람이 입는 문단(紋緞)은 빛깔이 선명하였습니다. 머리에 쓴 것은 호하미(胡夏米)는 푸른 비단으로 족두리처럼 만들었는데 앞쪽은 흑각(黑角)으로 장식하였고, 그 외의 사람은 붉은 전(氈)이나 흑삼승(黑三升)으로 더러는 감투 모양으로 더러는 두엄달이(頭掩達伊) 모양으로 만들었고 혹 풀[草]로 전골냄비 모양으로 엮기도 하였습니다. 버선[襪子]은 흰 비단으로 만들기도 하고 백삼승(白三升)으로 만들기도 하였으나 등에 꿰맨 흔적이 없었고, 신[鞋]은 검은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은 발막(發莫)과 같았습니다.

배에 실은 물품은 파리기(玻璃器) 5백 개, 초(硝) 1천 담(担), 화석(火石) 20담, 화포(花布) 50필, 도자(刀子) 1백 개, 전자(剪子) 1백 개, 납촉(蠟燭) 20담, 등대(燈臺) 30개, 등롱(燈籠) 40개, 뉴(鈕) 1만여 개, 요도(腰刀) 60개인데, 아울러서 값으로 따지면 은화(銀貨) 8만 냥(兩)이라 하였습니다.

나라의 풍속은 대대로 야소교(耶蘇敎)를 신봉해 왔으며, 중국과의 교역은 유래(由來)가 2백 년이나 되었는데 청국(淸國)과 크기가 같고 권세가 비등하였으므로 조공(朝貢)도 바치지 않았고 그 나라에서 북경에 가도 계하(階下)에서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 하였으며, 대청 황제(大淸皇帝)는 먼 나라 사람을 너그럽게 대해 주려 하였으나 요사이는 관리들이 황제의 뜻을 잘 받들지 않으므로 황은(皇恩)이 외국인에게는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또 외국 상인은 관리의 횡포로 인하여 많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교역하고 있는 나라는 우라파국(友羅巴國)·법란서국(法蘭西國)·아임민랍국(阿壬民拉國)·자이마미국(者耳馬尾國)·대여송국(大呂宋國)·파이도사국(波耳都斯國)· 아비리가국(亞非利加國)·식력국(寔力國)·영정도국(伶仃都國)·대청국(大淸國)이며, 교린(交隣)하는 나라는 아라사국(我羅斯國)·법란치국(法蘭治國)· 하란국(荷蘭國)·파려사국(波呂斯國)이라 하고, 영국(英國)의 지방은 구라파(歐羅巴)에 있는데 사람을 귀히 여기고 있으며, 지방이 또 아미리가(亞未利加)에 있는데 그 역시 크고 좋은 땅이고, 또 서흔경(西忻慶)에도 있어 섬들이 많으며, 아비리가의 극남단(極南端)에 있는 호망(好望)의 갑(甲)은 수위(垂圍)의 속지(屬地)이고, 또 태평양의 남쪽 바다에도 영국에 소속된 허다한 미개한 지방이 있으며, 그 끝은 아서아주(亞西亞州)에 있는데 섬들이 많고, 또 흔도사단(忻都斯担)·고위(古圍) 각 지방도 모두 영국의 판도(版圖)에 들어왔다고 하였습니다. 최근에 중국에서 영국으로 소속된 미개한 지방으로는 익능부(榏能埠)·마지반부(馬地班埠)· 마랍가부(馬拉加埠)· 선가파부두(先嘉陂埠頭)라 하였습니다.

그들은 ‘금년 2월 20일 서남풍을 만나 이곳에 와서 국왕의 명으로 문서와 예물을 귀국의 천세 계하(千歲階下)에 올리고 비답이 내리기를 기다리기로 하였으며 공무역(公貿易)을 체결하여 양포(洋布)·대니(大呢)·우모초(羽毛綃)·유리기(琉璃器)·시진표(時辰表) 등의 물건으로 귀국의 금·은·동과 대황(大黃) 등의 약재(藥材)를 사고 싶다’고 하였는데, 이른바 바칠 예물은 대니(大呢) 홍색 1필, 청색 1필, 흑색 1필, 포도색 1필과 우모(羽毛) 홍색 1필, 청색 1필, 포도색 1필, 종려색(棕櫚色) 1필, 황색 1필, 양포(洋布) 14필, 천리경(千里鏡) 2개, 유리기 6건(件), 화금뉴(花金紐) 6배(排)와 본국의 도리서(道理書) 26종이라 하였습니다.

또 7월 12일에 모양이 이상한 작은 배 한 척이 서산(瑞山)의 간월도(看月島) 앞 바다로부터 태안(泰安)의 주사창리(舟師倉里) 앞 포구(浦口)에 와서 이 마을 백성들을 향하여 지껄이듯 말을 하면서 물가에 책자(冊子)를 던지고는 바로 배를 돌려 가버렸는데, 던진 책자는 도합 4권 중에서 2권은 갑(匣)까지 합하여 각각 7장이고 또 한 권은 갑까지 합하여 12장이었으며 또 한 권은 갑도 없이 겨우 4장뿐이었다 하기에, 고대도(古代島)의 문정관(問情官)이 이 일로 저들 배에 다시 물으니, 답하기를, ‘금월 12일 묘시(卯時)에 종선(從船)을 타고 북쪽으로 갔다가 바다 가운데에서 밤을 새우고 13일 미명(未明)에 돌아왔는데 같이 간 사람은 7인이고 책자 4권을 주었으나 받은 사람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저들이 식량·반찬·채소·닭·돼지 등의 물목 단자(物目單子) 한 장을 써서 내면서 요청하였기 때문에, 소 2두, 돼지 4구(口), 닭 80척(隻), 절인 물고기 4담(担), 갖가지 채소 20근(斤), 생강(生薑) 20근, 파부리 20근, 마늘뿌리 20근, 고추 10근, 백지(白紙) 50권, 곡물 4담(担), 맥면(麥麵) 1담, 밀당(蜜糖) 50근, 술 1백 근, 입담배 50근을 들여보내 주었습니다.

저들이 주문(奏文) 1봉(封)과 예물 3봉을 전상(轉上)하기를 간청하였으나 굳이 물리치고 받지 아니하니, 저들이 마침내 물가에 던져버리고 또 작은 책자 3권과 예물의 물명 도록(物名都錄) 2건(件)을 주었다고 하기에, 서울에서 내려온 별정 역관(別定譯官) 오계순(吳繼淳)이 달려가서 문정(問情)하였는데, 그의 수본(手本)에 의하면 문서와 예물을 저들이 끝내 되돌려 받지 않으려 하여 여러 날을 서로 실랑이를 하다가 17일 유시(酉時)에 이르러 조수(潮水)가 물러가기 시작하자 저들이 일제히 떠들면서 우리 배와 매 놓은 밧줄을 잘라 버린 뒤에 닻을 올리고 돛을 달고 서남쪽을 향하여 곧장 가버려 황급히 쫓아갔으나 저들 배는 빠르고 우리 배는 느리어 추급(追及)하지 못하고 문서와 예물은 결국 돌려줄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이 배는 필시 바다 가운데에 있는 나라들의 행상(行商)하는 배일텐데, 우연히 우리 나라 지경에 이르러 주문(奏文)과 예물(禮物)을 가지고 교역을 시도해보려 하다가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자 저들도 물러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나, 다만 그 주문과 예물을 그대로 두고 간 것은 자못 의아롭습니다.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의 속셈을 비록 헤아리기는 어려우나 우리의 처리에 있어서는 의당 신중히 해야 하겠으므로, 문정관(問情官)과 역관 등으로 하여금 일일이 수량을 확인하여 궤(櫃)에 봉해 두게 하고 우리들에게 준 책자를 빠짐없이 모아 함께 봉(封)하여 본주(本州)의 관고(官庫)에 보관하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공충 수사(公忠水使) 이재형(李載亨), 우후(虞候) 김형수(金瑩綬), 지방관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민회(李敏會)가 문정할 때에 거행이 지연되고 처리가 전착(顚錯)된 죄는 묻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도신(道臣)이 논감(論勘)한 대로 파직의 율로 시행하소서."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번의 영길리국은 비록 대국(大國)에 조공(朝貢)을 바치는 열에 있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바친 책자로 보면 민월(閩越)과 광주(廣州) 등지로 왕래하는 상선(商船)이 1년이면 6, 70척에 밑돌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번에 우리 나라에 와서 정박한 사실이 혹 대국에 전해질 염려도 없지 않으니 우리 나라에서 먼저 발설(發說)하여 후환을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괴원(槐院) 으로 하여금 사실을 매거(枚擧)하여 자문(咨文)을 짓게 하여, 형편에 따라 예부(禮部)에 들여보내야 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 32권, 순조 32년 7월 21일 을축 4번째기사
이 시기에는 이양선들이 들어와서 통상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단순 통상 요구일 뿐 무력 시위도 없었기 때문에 조선에게도 개화하기 가장 좋은 골든 타임이기도 하였다는 평가도 있다.[31] 그러나 순조와 고관대작들은 이 기회를 기회라고 여기지도 못했으며 이 점도 순조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한 수 보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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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현효대왕 도정궁 사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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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혈통이 아닌 족보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며 왕족 / 황족으로서 정식 봉호가 있는 사람만 기재
※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후사를 이었으나 당시에는 장조 의황제의 아들로 간주하여 그 후손들에게 황족 작호를 수여함
† 대한제국 수립 전에 사망했으나 사후 황족 작위를 추증받은 사람
‡ 대한제국 수립 이후에 사망했으나 사후 황족 작위를 추증받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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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친할머니 혜경궁 홍씨와 음력 생일(일자)이 똑같은데, 당시 실록을 보면 이런 경우가 조선 왕조에서 유일했던 것 같다. 1791년 6월 18일에는 혜경궁의 생일과 순조의 첫 돌을 맞아 잔치도 크게 열고 백성들에게까지 떡을 돌렸다고 한다. [2] 당시 평균 수명이 40~50세 정도이긴 했지만, 전근대 사회의 평균수명은 낮은 의학 수준과 환경으로 인한 영유아사망률에 크게 영향받기 때문에, 당시 사회 기준으로도 '20~30대에 죽는 요절'까진 아니나 한창일 나이에 단명한 측에 든다. 조선보다 천년도 전인 로마의 기준으로도 40~49세에 사망하는 것은 한창일 나이에 죽은 것으로 여겼고, 동아시아에서는 당나라 때도 60세는 되어야 노인 소리를 들었을 만큼 40대면 아직 살 만큼 산 나이로 취급받진 않았다. 단, 원래도 후계 안정이 국가의 안정에 직결되던 왕정이라 왕의 자녀생산을 중요하게 여기던 조선인 데다, 순조 본인이 11살의 어린 나이에 부왕인 정조를 잃은 탓에 이쪽으로 꽤 신경을 써서(?) 이르게 죽었음에도 손자까지 보았다. [3] 발음은 《열성어휘》(c.1898)에 따르면 ‘공’이지만,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800년에 아버지 정조가 직접 이름을 지어주면서 음이 홍(洪)이라고 밝혔다. 뜻은 아름다운 옥이다. [4] 헌종 사후 철종을 아내인 순원왕후가 양자로 들였다. [5] 1899년 황제 추존과 동시에 폐지 [6] 이 기록은 바로 다음 국왕 때 깨지는데, 기록을 깬 사람은 순조의 손자인 헌종이다. [7] 순조에게는 계적증조모. [8] 주문모, 이가환, 이승훈, 정약종 등을 처형했고, 이미 사망한 채제공 남인의 거물 중 한 명인 정약용을 삭탈관직했다. [9] 남인은 숙종의 환국 후 서서히 몰락해 소수만 중앙 정계에 남아있었으며 대부분은 지방에 있었다. 세도정치로 붕당 정치가 무색해진 흥선대원군 때가 돼서야 등용되었다. [10] 귀신이 없다 하며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않고 양반부터 저 아래 천민까지 평등하다는 생각을 전파했던 당시 천주교인들에 대한 조선 조정의 반감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출처] 순조실록 2권, 1년 10일 정해 첫번째 기사 [12] 어린 세자를 걱정하던 정조는 안동 김씨 수장 김조순의 딸을 간택하기로 하는데, 장녀인 순원왕후가 뽑힌 것. 야사에는 아버지 정조와 함께 김조순의 집을 방문한 어린 순조가 순원왕후를 보고 한눈에 반해 "김조순의 딸이 아니면 장가들지 않겠다"고 생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13] 이때 이들은 자신들을 '영길리국'(英吉里國)이라 칭했다. 잉글랜드 한자로 음차한 것. [14] 하지만 조선은 청나라 속국이라는 핑계로 교역을 거부하고 그들이 요구한 물자와 식량을 제공하고서 빨리 내보내는데 급급했다. [15] 암허스트호의 선원들 중 1명이 한자를 잘 알아 글을 써서 대화할 수 있었지만 그 이전의 이양선에는 한자를 아는 사람이 없어 해당 지역 수령들은 이들에게 손짓과 발짓으로 떠나라고 암묵적으로 요구하였다. 이양선들 역시 교역 요구가 목적이 아닌 해양 탐사를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별다른 마찰이나 충돌 없이 빨리 철수하고 떠났다. [16] 헌종과 비교해보면 헌종이 혈통은 더 나았을지 모르나 나이는 헌종보다 많았고 혈통으로는 철종보다 훨씬 앞섰다. [17] 자기 가족들 및 종친들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목소리를 크게 냈고 관철시킨 것도 많다. [18] 다만 벽파 숙청 이후 열심히 정사를 본 기간에도 국정 장악엔 별 관심이 없어 조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거의 손을 놓고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19] 안동 김씨가 본격적으로 권력욕을 드러내는 것은 헌종조부터다. [20] 말은 '대표되는'이라고 썼으나, 사실 거의 모두 안동 김씨 가문이였다. [21] 신하들에게 꼼짝 못하는 임금들로 묘사되는 사극과는 달리 실제로는 조선 후기 왕들은 후견 세력이 미미했던 철종을 제외하면 지속적인 당파 싸움을 이용한 환국(정당교체)을 통해 왕권이 지속적으로 강해졌고, 영조 시절에는 아예 서슬 퍼런 태종 시절에도 왕에게 대들던 근성을 보이던 사관들이 임금에게 벌벌 기는 상황까지 연출된다. [22] 순조의 현조할머니, 즉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인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가 갖고 있던 화병이 유전으로 점차 이어지면서 숙종 영조 이후 철종까지의 모든 왕들과 왕족은 대대로 화병을 가지게 된다. [23] 원래는 주모자 7인만 죽였는데 형조가 들끓어오르던 민심을 파악하고 "쟤네들이 주모자도 죽었으니 원인을 발생시킨 놈들도 죽여야 한다고 난리랍니다!"라고 아뢰고 남공철도 "나라 사람들이 다 죽여야 한다고 하면 법조문에 없더라도 죽여야 합니다."라고 해서 강상 상인 1명과 시전 상인 1명을 본보기로 저잣거리에서 공개 처형했다. [24] 굳이 따진다면 세조보다는 그의 손자인 성종이 방계 승통에 가까울 것이다. [25] 세종의 사례는 대리청정의 첫 선례로, 조선 초기의 정치 혼란으로 인한 상왕제를 사실상 끝냈다는 점과 후대에 이어지는 전례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순조는 하늘도 무심하게 효명세자가 단명해버린다. [26] 물론 심온과 그 가족들 입장에선 말 그대로 단지 세자의 장인이란 이유만으로 억울하게 죽은거라 현대 기준으로 보면 정당한 행위라고 볼 순 없다. 당장 외척으로 준동 안하고 조용히 산 사람들도 많기 때문. 이미 정치적으로 막장이 된 시점 케이스이지만 저 사람이 가짜라는 것만 알리고 조용히 강화도에서 하인으로 살기로 한 철종의 진짜 외숙부 건도 있고. [27] 중종의 경우 조광조의 사례에서 보듯 우회적으로 정국을 주도한 면모도 있었다. 반면 김조순을 비롯한 순조를 모신 신하들의 경우, 무리한 욕심 없는 처신이라는 측면에서는 중종 때 신하들보다 나은 점도 있었다. [28] 물론 중종의 경우에는 죽기 하루 전날 인종에게 승계하였으니 실질적으로는 상왕제라 보기 어렵다. [29] 문정왕후의 숙청극은 보통 명종 5년 구수담옥사를 기점으로 이미 명종친정 3년 전에는 완화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즉, 적어도 명종친정기 만큼은 사실상 규모있는 옥사는 없었던 셈이다. [30] 실제로 정조의 외모를 묘사한 기록에는 높은 코와 네모난 입에 겹진 턱을 가졌다고 한다. [31] 이는 최근에 등장한 평가가 아니라 이동원 외교부 장관 등도 일찌감치 제기했던 주장이다. 이동원 장관의 경우 회고록에서 로드암허스트호를 직접적으로 거론했다. [32]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보기에는 다 똑같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 아래에 모든 존재는 그냥 백성이라는 전형적인 전제군주제 시각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만큼 순조의 영향력이 막강했음을 시사한다. [33] 아마도 얘기하고 싶던 것은 정조가 노비제에 부정적이었고 이를 공노비 혁파라는 방식으로 계승하는 척을 했다는 식인 것으로 보인다. 사노비를 혁파하자니 사대부들을 비롯한 노비를 가진 자들이 반대할테니 꼼수로 공노비도 노비니까 공노비를 혁파하자는 식으로 어차피 공노비는 국가 소유이니 그 국가를 이끌고 있는 자신이 결정하면 얼마든지 행할 수 있는 문제다. [34] 아내인 순원왕후도 자식복 없는 편에 속하는데, 순조 생전에 4명의 자녀를 먼저 떠나보냈고, 순조 사후 마지막 남은 딸마저도 본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며 자신의 자녀 5명 모두를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심지어 본인의 유일한 손자인 헌종마저도 본인보다 일찍 사망했다. [35] 심지어 반대하는 신하들을 여러가지 이유를 대며 줄줄이 유배보내기도 했다. [36] 홍경래의 난이 종료된 1812년부터 등장했다. 당시 순조의 나이는 2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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