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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3 12:01:12

을지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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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수 전쟁
高句麗・隋戰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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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년 개벽에서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설문한 10개 부문별 위인의 선정자 및 차점자 명단이다.
<rowcolor=#ffffff> 사상 정치 군사 문학 미술
이황 이이 이순신 최치원 솔거
- 을파소 을지문덕 박지원 담징
<rowcolor=#ffffff> 종교 과학 산업 교육 사회개선
최제우 서경덕 문익점 최충 유길준
원효 정약용 흘간(屹干) - -
※ 응답수 100명 미만의 차점자는 공개하지 않음.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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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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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
乙支文德
과거 삽화{{{#!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을지문덕 (대한제국 초등 대한역사, 1908년).png

1908년 대한제국 역사 교과서《초등 대한역사》수록 삽화
파일:을지문덕 (대한제국 신문 만세보, 1907년).png

1907년 천도교 신문 《만세보》 '삼한 24걸' 수록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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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을지문덕 표준영정.jpg
을지문덕 표준영정
주군 영양왕(嬰陽王)
직위 대신(大臣)[1] / 국상(國相)[2]
출신지 고구려 평양(?)[3]
을지(乙支) / 을(乙)[4]
이름 문덕(文德)
출생 6세기[기록없음]
사망 7세기 전반 추정[기록없음]
사당 청천사(淸川祠)[7]
삼국사기》 제44권 <열전> 제4 을지문덕
파일:을지문덕석상1보존급제746호_정면.jpg
을지문덕 석상[8]
1. 개요2. 출신에 대하여
2.1. 정체에 대한 논란2.2. 이름에 대한 논란
3. 생애4. 평가
4.1. 김부식의 평가4.2. 신채호의 평가4.3. 안창호의 평가
5. 기타6.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을지문덕은 영양왕 대의 고구려-수 전쟁 당시 고구려를 지켜낸 장수이다.

그에 대해서는 많은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으나, 수나라와 고구려가 국가의 존망을 걸고 맞붙었던 2차 고구려-수 전쟁에서 고구려군을 지휘하여 살수대첩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대승리를 거둔, 고구려를 구해낸 불세출의 명장이자 전쟁 영웅으로 부르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다. 이 승리로 위진남북조시대를 최종적으로 평정하고 중국 대륙을 통일했던 수나라가 멸망했다는 점에서 당시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 큰 영향을 미치기까지 했던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2. 출신에 대하여

조선시대의 지리서인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을지문덕은 평안도(平安道) 평양부(平壤府)의 인물이었다. 이 기록이 맞다면 을지문덕은 평양 출신이었던 셈이다. 현 행정구역으로는 대한민국 이북 5도 기준 평안남도 강서군 적송면[9] 석삼리, 북한 행정구역상 증산군 석다리에 비정된다.

국내에서 을지문덕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 삼국사기》에서는 을지문덕의 출생지 가문의 계보 등이 불확실해서 알 수 없다고 쓰여 있다. 《 수서》에 기록될 만큼 위대한 전쟁 영웅인 을지문덕의 선대 계보 및 이후 행적이 기록에 없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기는 하나 고대 한국의 남은 기록은 정책은커녕 임금의 이름조차 기록이 뜸할 정도로 부족한 실정이다. 알다시피 고구려의 역사서는 현존하는 것이 없으니 불가피하게 중국의 역사서를 검토해 봐야 하는데 중국의 역사가들이 일부러 을지문덕이라는 인물을 배제시킨 것은 아닐 테고 또한 수 양제가 우문술 우중문에게 영양왕이나 을지문덕이 찾아오거든 잡아두라는 밀지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수 양제는 이미 을지문덕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추론이 성립된다.

연남생묘지문에 의하면 연개소문의 아버지는 막리지를 역임한 것으로 확인된다. 막리지가 당시 고구려에서 정치,군사적 실세였음을 생각하면 살수대첩에서 대규모 고구려군을 이끌고 회전을 치룰 수 있는 것과 단독으로 협상권을 가지고 수나라 사령부와 담판을 짓는 것 그리고 그 이름이 수 양제에도 알려진 것들을 모두 조합해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고구려의 막리지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그런 명망과 중책을 가질 수가 없다. 을지문덕이라는 이름이 을지(乙支)와 문덕(文德)으로 비교해서 볼 때 을지는 대신과 동급의 의미 즉 삼국사기에서 기록된 의미처럼 큰 신하 정도의 의미로 해석할 수가 있고, 문덕 또한 여수장우중문시를 근거로 붙인 칭호 같은 단어로 해석할 수 있다 종합적으로 을지문덕이라는 이름은 본명이 아닌 나라를 떠받드는 문재가 있던 대신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실제 본명이 정황상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태조였을 확률이 매우 높다. 이렇게 되면 연개소문이 정변 이후 영류왕의 시체를 분시한 이유가 합리적으로 설명이 된다. 대중국 강경노선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아버지와 자신 및 자신의 가문을 배척하는 영류왕의 태도에 대한 답변으로 보면 충분한 인과성이 있다.

그렇다면 을지문덕에 대한 중국의 기록이 이처럼 간략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마도 중국인들 입장에서는 굳이 자신들을 대파한 이민족의 영웅 을지문덕에 대해 자세히 기술할 이유도 뜻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10] 하여튼 을지문덕의 생애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탓에 그의 출생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기는 힘들다. 이는 대단히 아쉬운 일이라 할 수 있겠다.

1979년 고고학자 김원용 교수는 <전해종 박사 회갑기념논총>에서 을지문덕의 가계가 이주민 계통의 귀화 가문일 것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이에 따르면 먼저 을지문덕의 성씨인 '을지(乙支)'가 선비(鮮卑) 귀족의 성씨 가운데 하나인 '울지(尉遲)'와 음가가 비슷한 데서 그가 귀화인이거나 귀화인의 자손일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는데 울지씨는 본래 선비족 탁발부(탁발선비)와 함께 북위를 건설하는 데 공헌한 울지부의 성씨이다. 실제로 중국의 위진남북조시대에 울지 성씨를 가진 이들의 활약은 뒤떨어지지 않았다. 이 시대를 다룬 중국 역사서에 울지씨는 울지해, 울지강(尉遲鋼), 울지형(尉遲逈), 울지경덕 등 여럿이 보이는데 을지문덕의 집안인 울지씨 가문은 580년에 수문제 양견이 찬탈을 꾀할 당시에 울지형이 이를 막다가 죽자 화를 피하기 위해 고구려로 망명해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원용은 을지와 울지의 발음이 비슷한 점, 《자치통감》 <고이> 8권의 주석에 을지문덕을 울지문덕(尉支文德)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고 했던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11]

이에 대한 반론으로, 고구려의 귀족 가문이었던 을(乙)씨에 고대 한국어에서 존칭사로 쓰이는 지(支)를 붙여[12] 을지문덕의 이름이 이루어진 것이라고도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몇몇 야사에서는 을지문덕이 고구려의 국상이었던 을파소의 후손이라고 적혀있기도 하다.[13] 그 외에도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는 을지문덕의 후손인 목천 돈씨 가문의 기록인 《목천 돈씨 가보》에 의하면 원래 을씨였다가 을지문덕 전후로 을지씨로 바꾸었으며, 이후로 을지씨를 계속 쓰던 후손들이 고려 시대에 묘청 서경천도운동 때 의병으로 공을 세워 평양 근처 돈산 일대를 식읍으로 받은 후 돈씨로 성을 바꿨다고 한다. 이처럼 을지문덕의 출자에 대해서는 견해가 충돌하는 편이다. 근본적으로 한자의 음가가 비슷하다 하여 乙과 蔚을 동일시 하는 것 자체에는 무리가 따른다.

한편 조선 후기의 문인 홍양호는 자신의 저서인 《해동명장전》에서 을지문덕이 평양 석다산(石多山)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혈혈단신으로 자랐다고 한다. 다만 홍양호가 《해동명장전》을 쓴 시기는 《삼국사기》가 편찬된 지 한참 후인 조선 후기였으며, 참고한 자료가 쓰여있지 않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 아무래도 평양 일대에 전해지던 을지문덕에 대한 전설을 옮겨 적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규보의 《 동국이상국집》에서는 명나라의 장일규가 찬(撰)한 《요산당외기》(堯山堂外紀)에 을지문덕의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면서, 고구려의 대신(大臣)이라고 확언하였다고 하나, 고려가 몽골과 싸우던 시절 인물인 이규보가 명나라의 장일규의 책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누군가가 가필한 것일 것이다.

또한 《 삼국사기》 <본기>에도 을지문덕을 고구려의 대신(大臣)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대신이란 관직명이 아니다. 《신당서》에 따르면 “고구려 왕은 오색 무늬의 옷을 입고 흰 비단(白羅)으로 관(冠)을 만들며 가죽띠에는 모두 금테를 둘렀다. 대신(大臣)은 푸른 비단관(靑羅冠)을 쓰고, 그 다음은 진홍색 비단관(絳羅冠)을 썼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고구려 후기 귀족 계급의 관모는 소골(蘇骨)에서 발전한 관모로서, 왕(王)과 대신(大臣) 그리고 신(臣) 등 계급 간의 구별을 좀 더 명확히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을지문덕의 관직은 자세하지 않으나, 그가 대신이라 했으니 고위귀족 가문에서 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평안도 일대에서 구전돼 온 야사로 을지문덕의 이름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을지문덕의 아버지가 을지문덕이 태어났을 즈음 명망 높은 도인에게 아이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를 물었는데, 그 이름을 '문덕'이라고 지으라 하자 그 아버지가 '제 미천한 아들에게 어찌 문덕 선관[14] 님의 이름을 붙인단 말씀입니까'라며 거절했고, 이에 도인이 '이 아이는 훗날 고구려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아이이니 반드시 아이의 이름을 문덕이라 하되, 자라면 무예를 가르치라'고 말해, 아버지는 결국 도인의 뜻에 따라 아이의 이름을 문덕이라 지었는데 정말로 고구려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었다는 것. 그러나 이는 전형적인 '후대 각색'의 형태를 띤 야사로서 신빙성은 0에 수렴한다.

2.1. 정체에 대한 논란

을지문덕은 그 엄청난 활약상에도 불구하고 출생과 전쟁 이후의 삶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전무하여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알 길이 없다.[15] 한마디로 어느 날 갑자기 수나라와의 전쟁에 나타나 수군을 끔살시키고 종전 뒤에는 다시 종적을 감춘 것이다.

국내에는 을지문덕에 대한 독자적인 전기조차 전하지 않는다. 《 삼국사기》에 <열전>이 있긴 하지만 《 수서》의 < 우중문· 우문술전>과 《 자치통감》의 관련 내용을 조합하여 만든 것에 불과하다.[16]

그래도 귀족연립정권 체제 내에서 한 나라 군대의 최고통수권자이자 외교 협상권을 갖출 정도였으면, 당시 귀족 내부에서도 최고위 직책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수양제가 수하 장수들에게 을지문덕을 반드시 사로잡으라고 밀명을 내린 걸 보면 외국에서도 그 이름이 잘 알려졌을 것으로도 추정된다.

문제는 왜 이 정도의 인물에 대해 생몰년도는커녕 당대 인물들을 언급할 때 대부분 적시하는 출생지마저 기록이 없냐는 점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을지문덕이 전쟁 당시 높은 벼슬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문이 정말 한미했거나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곳이었다는 설이 제기되어 상당수 연구자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는 위의 타국, 타민족 출신이라는 설과 일부 통하는 점이 있다. 대귀족 가문들이 언제나 득세하고 관직을 차지하던 당대 고구려에서 관리가 출신 '부(部)'를 표기하지 않는 것도, 생몰년도도 기록되지 않은 것도 집안 배경이 워낙 없었던 탓이라는 것. 집안 대대로 높은 관직에 있었으며, 그 출신과 연고지에 대해 상당 부분 추적이 가능한 연개소문과는 비교되는 부분이다.[17]

그렇다면 이런 인물이 어떻게 귀족이 아니면 대접 못받는 세상에서 그 정도의 지위에 올랐는가? 이에 대해서는 평원왕대부터 고구려 왕들이 추진한 신진세력 등용 정책 덕분이었다는 추측이 있다. 그러한 정책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자 수혜자가 바로 온달.[18] 그러나 이 설 또한 확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기록이 없는 걸 어쩌리.

목천 돈씨(頓氏)의 《돈씨 가보》에서는 고구려의 명문가인 을씨(乙氏)가 을지문덕의 대에 와서 을지로 성이 바뀌었다가 묘청의 난 때 을지수(乙支遂). 을지달(乙支達), 을지원(乙支遠) 삼형제가 반란 진압에 공을 세워 돈산백(頓山伯)에 봉해지고, 돈뫼(頓山)를 식읍으로 하사받아 그곳에 정착해 살면서 돈씨를 성씨로 쓰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해당 인물에 대한 다른 기록이 없고 《 동국여지승람》에는 돈씨의 연원이 다르게 기록되어있으며 족보에만 나오는 가문의 연원은 부풀려지는 경우가 흔하기에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본다. 단 반론도 있다. 참고.

단재 신채호는 이 족보 기록과 일본인 사학자 시라토리 쿠라키치의 " 퉁구스어로 사자(使者)를 '일치'라고 한다"는 지적을 근거로 을지문덕의 '을지'는 관직명이고, 고구려 때의 관직인 울절(鬱切)이나 삼한의 읍차(邑借)와 서로 통하는 것으로 주장했다.

2.2. 이름에 대한 논란

이름인 을지문덕에서 성으로 여겨지는 을지(乙支)는 논란이 좀 있다. 乙(을)은 고대어에서 '이리'라고 읽혔으며 '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19] 그리고 支(지)는 관직명인 대막리지(大莫離支), 막하하라지(莫何何羅支)[20], 막하라수지(莫何邏繡支)[21]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오늘날의 '씨'와 같이 일종의 존칭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22] 그러므로 을지는 '대단하신 분'이라는 존칭을 의미한다는 설이 있다. 지(支)를 '이공순신(李公舜臣)' 공(公)과 비슷하게 쓰인 것으로 보고 성을 을(乙)씨로 추정하는 설도 있다.[23] 몇몇 야사에서는 을지문덕이 고구려의 재상이었던 을파소의 후손이라고 적기도 한다.

支(지)의 발음의 경우에는 중국에서 그 자음이 c 혹은 ch로서 당시의 자음에는 없던 발음이라 ㄱ, ㅅ, ㄷ 등으로 한국에 전래되었다. 그래서 을지의 원래 발음은 '이리기' 혹은 '이리시(이리씨)'로 읽혔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서기》에서는 "백제의 왕"을 쿠다라노 코니키시(くだらのこにきし)라 불렀는데, 이 중 코니키시라는 말이 건길지(鞬吉支)의 당대 발음인 것으로 추정되어 백제에서는 접미어 "지"가 시로 읽혔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백제의 곤지(昆支)와 직지왕(直支王)의 경우 코니키, 토키오우로 훈하고 있어 지(支)가 시로 읽혔다고 확정할 순 없다.[24] 신라, 가야 지도자층의 호칭인 간지(干支)의 이표기로 한기(旱岐)가 있으므로 支(지)는 기로 읽혔다고 볼 수 있다.[25]

3. 생애

삼국사기》에서 그와 관련된 기록이 처음 나오는 것은 제2차 고구려-수 전쟁 당시다. 고구려의 총지휘관으로서 맹활약하며 수나라군을 대파해 고구려를 승리로 이끌었다. 고구려-수 전쟁 당시 을지문덕의 활약상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살수대첩 항목 참고.

612년 기세좋게 출전하였으나 맥철장[26]이 전사하고 한 달이 넘도록 요동성조차 함락시키지 못하자 겨울을 앞두고 조급해진 수양제는 30만 병력의 별동대를 평양성으로 보내 함락시킬 전략을 짰다. 일단 수나라의 별동대는 요동성-압록강 방어선을 돌파해 평양 인근까지 육박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문제는 별동대에게 100일 분의 식량을 짊어지도록 하여 그 무게를 버티지 못한 병사들이 식량을 내버린 탓에 보급이 바닥나 버렸고 평양성에 접근하는 동안 고구려군의 집요한 게릴라전에 시달려 도착했을 때는 고구려군을 당해낼 여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고구려군의 게릴라전은 별동대가 압록강 인근에 도달했을 때 항복을 위장하고 적진을 정찰한 을지문덕이 이러한 사정을 이미 파악하고 계획한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보급을 해 줘야 할 내호아[27]의 수군은 이미 패배한 상태였다.

별동대를 지휘하던 우중문[28] 우문술[29]은 어쩔 수 없이 퇴각하기로 결정한다. 조효재[30], 위문승[31], 장근[32] 등 수나라군이 물러나자 고구려군은 태세를 전환하여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선다. 그러다 지금의 청천강 일대인 살수에 다다랐을 때 고구려군이 전력을 다해서 총공격을 가하였다. 강을 건너느라 수군이 반으로 나뉘었던 시점에서 고구려군이 맹공을 가했고 수나라의 군대도 이를 예견하고 방진을 치고 저항하였지만 지친 수나라 군대는 고구려군의 맹공에 얼마 견디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설세웅[33]은 고구려군에게 포위되었다가 간신히 탈출하고 왕인공[34]이 일시적으로 고구려군을 격퇴했지만 제대로 부대를 추스려오지는 못했고 30만 5,000명 중 압록강에 다다른 병사는 겨우 2,7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나마 살아남은 2,700명도 건제를 유지하고 철수한 것이 아니라 '하루만에 살수에서 압록강까지 도망쳐왔다'는 사서의 기록을 볼 때 갑옷이고 창검이고 다 팽개치고 "걸음아 나 살려라"하고 도망친 오합지졸 패잔병 수준. 특히 수나라의 제8군은 전사한 지휘관 신세웅을 포함하여 모두 전멸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기록이 현전하지 않는 관계로 고구려-수 전쟁 이후에 을지문덕이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 이전의 사서들이 그렇듯이 고구려의 사서들이나 기록물들이 이후의 전란에 의해 평양성과 국내성 일대가 황폐화되면서 대부분 불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신라에 다수의 고구려인들이 유입되었고, 고구려의 후신을 자처한 발해에서도 당연히 구국의 영웅으로 여겼을 만큼 구전으로 전해져내려오는 증언을 바탕으로 기록해놓은 역사 기록들이 어느 정도 있었을 테지만 이마저도 후삼국시대 여요전쟁 등 여러 전란을 겪으면서 상당수의 역사 자료가 소실되었고 결국 을지문덕에 대한 구체적인 삶의 궤적에 대해서 영영 알 수 없게 되었다. 《 삼국사기》가 편찬되었을 당시에 이미 당대의 기록들이 부실하고 특히 고구려 후기는 더 부족해서 중국 측 사서를 빌려써서 조공 기록이 많이 나오는데 이처럼 을지문덕도 기록이 거의 없었던 듯하다.

그래서 을지문덕의 출생과 마찬가지로, 수나라와의 전쟁 이후로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고구려-당 전쟁 당시의 대단한 활약상에도 불구하고, 생애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는 안시성주와 비슷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키자 을지문덕은 신라 설인귀 거란으로 망명했다는 설화도 전해지고 있다. 물론 설화는 설화일 뿐이다.[35]

애초에 댓구가 되는 설인귀부터 강주 용문 사람으로 원래 오리지널 중국인으로 당나라에 그냥 임관한 것이므로 망명하고 말고할 문제가 아니었으니, 을지문덕 역시 이야기의 아귀가 안 맞다. 무엇보다 을지문덕 정도 되는 인물이 신라이건 망명을 했다면 그건 무조건 기록된다. 그러나 남아있는 기록 자체가 매우 부족한 실정이라 알 길이 없다.

현재로서는 연개소문의 정변 이전에 사망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그나마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된다.

4. 평가

후세 사람들이 만약 그의 머리털 하나만큼만 닮더라도 그 나라의 독립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며, 그의 한두 마디의 말만 잘 거두어 간직하더라도 그 나라의 역사를 채워 넣을 수 있을 것이니, 을지문덕이란 사람은 우리 대동국(大東國) 4,000년 역사에서 유일한 위인일 뿐만 아니라 또한 전 세계 각국에도 그 짝이 드물도다.
신채호

을지문덕은 수나라라는 당대 동아시아 최강대국의 압도적인 군세를 맞아 그냥 물러가게 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회전에서 적군의 야전 병력을 싸그리 전멸시켜 고구려의 대승을 이끌었다. 불세출의 전쟁 영웅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해내지 못할 군공이자 업적이다. 현대 대한민국 미국의 침공을 받았을 때 대한민국의 어느 장군 미군 중에서도 최정예로서 선별된 미군들을 맞아 싸워서는 그저 막아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아예 전멸시켰다고 생각해 보라. 당시 중국이 고구려를 포함한 동아시아 일대에서 가지는 위상은 현대 미국에 버금가는 정도였고 동시대 다른 지역의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압도적인 국력[36]을 가지고 있었으며 당시 수나라 주변의 다른 세력들은 수나라에 의해 일거에 무너져 내린 상황이었다. 이 나라가 괜히 천자를 운운하는 천조국이었던 게 아니다. 을지문덕 장군은 그런 나라의 군대를 말 그대로 전멸시키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는데 이건 의심할 여지도 없이 몇 번이고 찬탄받아도 부족함이 없는 엄청난 업적이다. 이순신 장군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고 국군의 무공훈장도 강감찬까지 포함한 세 인물에서 따왔다.[37][38]

수나라군에게 항복하겠다면서 혈혈단신 적진에 들어가 정찰을 하고 나오는 생사를 넘나드는 일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고 나오는 강심장인 데다가[39] 뛰어난 지략을 발휘해 적을 무찌르는 혜안도 가지고 있었으며 < 여수장우중문시>를 지어서 수나라군을 농락할 정도의 문장력도 지니고 있었던 명장이었다. 종합하면 적을 기만하고 조롱하는 고도의 심리전, 적의 수가 많음에도 확실히 이길 수 있을 때라고 판단하고 과감하게 야전을 거는 판단력, 보급이 전쟁 승패의 본질임을 파악한 정확한 진단, 목숨걸고 적의 정보를 직접 캐내려고 하는 용감함을 갖춘 희대의 걸물이라 일컫기에 손색이 없다. 조선의 이순신과 더불어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라고 할 수 있겠으며 역사적 기록이 너무 부족한 것이 아쉬울 따름. 세계 전쟁사에서 한민족이 세계에 내놓고 자랑할 수 있는 명장이었기 때문에 훨씬 후대인 조선시대 숙종도 숙종 33년(1707) 을지문덕에게 '청천(淸川)'이라는 호를 내리고 사우(祠宇)에 향사(享祠)하도록 지시하였다.[40] 호를 받고 사우에 향사된 것은 이순신, 최윤덕, 이원익, 김덕함 등과 함께였으나 조선 이전의 시대 인물은 을지문덕이 유일하다.[41]

4.1. 김부식의 평가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도 <을지문덕 열전>에서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낸 을지문덕을 칭송하면서 엄청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삼국사기》 <열전>에서는 첫 번째를 차지하고 있는 < 김유신 열전> 다음이 바로 <을지문덕 열전>이다.[42]
을지문덕은 자질이 침착하고 굳세며 지략이 있었고, 아울러 문장을 짓고 해석할 수 있었다.

양제가 요동의 전쟁에서 동원한 군대의 규모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대단했다. 고구려는 한쪽 지역의 작은 나라였지만, 이를 막아냈다. 스스로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그 수나라 군대를 거의 섬멸하였으니, 이것은 을지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 춘추좌씨전》에서는“군자(君子)가 있지 않으면, 그 어찌 나라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옳은 말이다.
또한 《삼국사기》의 편찬자들은 기록의 부재로 인해, 을지문덕과 관련된 기록을 《 수서》에서 그대로 옮겨왔으나 어떻게든 을지문덕에 대해서 좋게 평가하고자 포장했음을 알 수가 있다.

4.2. 신채호의 평가

단재 신채호의 <을지문덕전>은 “땅의 넓이는 그 십분지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인구는 그 백분지 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고구려가 저 수나라를 대적하여 하였으니, 그 기개는 비록 장하나 그 방도는 심히 위태로웠다. 그 당시에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들려 한다’는 국외자(局外者)들의 비판을 면하기 어려웠을 텐데도, 을지공은 홀로 의연히 그러한 비판을 못 들은 척하고 적국에 대항하였으니, 과연 무엇을 믿고 그러하였던가? 말하자면, 오직 독립정신(獨立精神) 단 한 가지였다”면서 을지문덕을 자주의식(自主意識)의 상징적 인물로 표현하였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후세 사람들이 만약 그의 머리털 하나만큼만 닮더라도 그 나라의 독립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며, 그의 한두 마디의 말만 잘 거두어 간직하더라도 그 나라의 역사를 채워 넣을 수 있을 것이니, 을지문덕이란 사람은 우리 대동국(大東國) 4,000년 역사에서 유일한 위인일 뿐만 아니라 또한 전 세계 각국에도 그 짝이 드물도다”라고 칭송하면서, 당시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으로 국체(國體)를 보존할 수 없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조선시대의 사대모화사상(事大慕華思想)에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신채호에게 있어 을지문덕이란 역사인물은 민족자존(民族自存)독립정신(獨立精神)의 표상이었고, 일본인들이 한국에 대한 식민지화 정책을 합리화하려고 내세운 한국인들의 타율적(他律的) 종속성(從屬性) 이론을 논파하는데 롤 모델이 되었던 것이다.

4.3. 안창호의 평가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는 《을지문덕전》의 <서문(序文)>에서 “내가 해외 각국을 여행해보니, 그 나라 영웅이 칼을 휘두른 곳에서는 수십만의 사람들이 그를 노래하고, 그 영웅이 피를 흘린 곳에서는 수천만의 사람들이 춤을 추는데, 몸이 있는 자는 그 몸을 영웅에게 바치고, 재주가 있는 자는 그 재주를 영웅에게 바치며, 학문이 있는 자는 그 학문을 영웅에게 바쳐서 한 나라 전체가 영웅을 부르면서 같이 나아가기 때문에 영웅이 배출되어, 워싱턴 이후에도 허다(許多)한 워싱턴이 나왔고, 나폴레옹 이후에도 허다한 나폴레옹이 나왔던 것이다”고 했다. 이는 을지문덕을 본받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 그와 같은 영웅들이 많이 나와주길 간절히 바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안창호에게 있어 을지문덕은 모든 이가 표상으로 삼아야 할 영웅의 대명사였던 것이다.

5. 기타

을지문덕의 위대함을 기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을지문덕의 이름을 기리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을지"란 이름이 붙은 것들은 전부 을지문덕에게서 유래했다고 보면 된다.

한편 살수대첩의 무대가 되었던 청천강이 자리잡은 평안남도 안주시에는 을지문덕이 수군을 유인하기 위해 일곱 명의 승려들로 하여금 거친 살수를 건너게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43] 일곱 승려들이 먼저 강을 건너자 수군이 이를 보고는 안심하여 급히 살수를 건너다가 을지문덕의 계략에 휘말려 몰살당했다는 전설이 바로 그것이다.[44] 목숨을 걸고 수군을 살수로 유인한 승려들을 기리기 위해 그 지방 사람들이 청천강 근처에 칠불사(七佛寺)라는 절을 세우고 그곳에 일곱 승려의 상을 세웠다고도 하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모양이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을지문덕의 조각상도 있는데 1932년에 현진건이 쓴 기행문인 《단군성적순례》에도 등장하며, 북한의 문화재 보존급 제746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만들어진 시기는 현진건의 기행문에 따르면 '숭정기원(崇禎紀元) 220년 을미'로 조선 헌종 13년(1847년)으로 보이며, 원래는 을지문덕의 사당에 모셔져 있었는데 사당이 없어지고 땅에 파묻혔다가 다시 파내 백상루 밑에 갖다 둔 것이라고 한다.

현재 대한민국에 '을지'라는 성을 쓰는 사람은 없다. 을지문덕의 후손의 성씨는 목천 돈(頓)씨. 드라마 나인룸의 주인공으로 '을지해이'가 등장한 적은 있지만... 그런데 북한에 놀랍게도 을지씨를 쓰는 사람이 있다. 2018년 1월 6일 로동신문 기사에 국가과학원산하 기계공학연구소 실장인 '을지기호'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이 사람이 한 번도 아니고 같은 달에 우리민족끼리 기사에도 나오니 오타는 아닌 것 같은데[45] 어떻게 을지라는 성이 존재하는지는 불명. 족보가 사실상 사라진 북한 특성상 을지문덕의 후손으로 알려진 목천 돈씨를 을지씨로 바꿔버린 게 아닐까 생각된다.[46]

을지문덕과 관련된 기록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그는 한국사를 통틀어 단 한번의 전투로 적군에게 가장 많은 병력 손실을 일으킨 장군이었다.

6. 대중매체에서

6.1. 소설

6.2. 음악

6.3. 드라마

초반부의 수나라 파트에서도 벌써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대모달 벼슬을 직책하고 있었으며 고구려에 쳐들어온 수나라 군대를 박살냈다. 5화부터 시작되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영양왕과 함께 출전하며 한왕 양량의 군대를 대파했으며 영류왕이 태제 자격으로 정사를 관할하기 시작하자 강이식과 함께 잠시 물러나 향후 수나라와 전쟁을 대비하였다. 막리지였던 연태조가 극에서 퇴장한 시점인 왜국으로 떠난 이후 재상직인 막리지를 맡게 된다. 살수대첩이 무슨 수공으로 수나라 군대를 쓸어버린 것처럼 묘사되었는데 살수대첩 당시에 수공으로 수군을 물리쳤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는 강이식 대장군과 더불어 조정 내 강경 주전파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퇴각하는 수나라 군대를 굳이 추격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태제인 영류왕[52]에게 "왜 추격하지 않았느냐"며 불만을 대놓고 드러낸다.

이후 수나라의 4차 침입 때 곡사정을 돌려보내며 수나라와 화친하려는 영류왕에게 화친하지 말 것을 간언하다 그 자리에서 쓰러져 분사(忿死)한다. 영류왕에게 마지막까지 한 말은 작중 초반에서 한 "역사에 죄를 짓지 마십시오."였다. 을지문덕이 분사한 이후 요동성에서는 강이식, 양만춘, 온사문 등의 장군들이 슬퍼했고 강이식은 항복을 전하러가는 사신들의 얼굴도 보기 싫다고 말하였다. 곡사정을 서부 욕살 사비류가 수나라 군영으로 데리고 가 을지문덕의 죽음 등을 거짓 항복의 이유로 내세웠고 수양제는 그의 죽음을 듣고 강이식처럼 보고 싶은 인사였다며 안타까워하면서도 회군할 명분을 얻게 되었고 이를 끝으로 고구려-수 전쟁도 마무리로 접어들며 1부에서 영양왕이 승하하는 장면을 제외하면 고구려 파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장면이다.

6.4. 만화

6.5. 게임


[1] 삼국사기》. 구체적인 관직명은 아닐 가능성이 크다. 신채호의 《 조선상고사》에서는 그 직책이 서부 총관(西部 摠管)이었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근현대의 서술이기 때문에 그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고 봐야 한다. [2] 통전 권162 병(兵)15의 기록. # 국상이 아니라 대대로를 지칭한게 아니냐는 설도 있다. [3]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조선시대의 기록이라 근거는 거의 없다. [4] 삼국시대에는 지(支)가 존칭으로 쓰였고 또 고구려에서 이미 을씨가 있었던 걸로 확인되는 반면 을지씨는 을지문덕만이 유일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위대한 업적 때문에 당대에 존칭으로 을지라 불린 게 아닌가 하는 견해가 있다. 게다가 을지문덕이 을파소의 후손이라는 구전까지 있다. 후예를 자처하는 목천 돈씨에서는 원래 을씨였다가 을지문덕대부터 을지씨로 분성했다고 기록해놨다. [기록없음] 을지문덕은 <을지문덕 열전>이 있는《삼국사기》 등 어떤 사서에도 출생과 사망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기록없음] [7] 1707년에 숙종에 의해 세워졌다. [8] 평안남도 안주시 등방산동 안주성에 위치. 1847년 건립. [9] 구한 말까지 평양부 적석면과 적연면이었다가 1906년 증산군에 편입됐고 1914년 다시 증산군이 강서군에 병합되면서 두 면이 병합돼 강서군 적송면이 됐다. [10] 이런 주장은 《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이 수차례 얘기했다. < 진삼국사기표>에는 (중국의 역사서들은) 중국의 일만을 자세히 기록하고 외국의 일은 간략히 하여 갖추어 싣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을 기록했고, 주필산 전투의 결과를 다루며 고구려가 패배하기는 했으나 당나라의 피해도 무척이나 컸다는 주장과 함께 신당서》·《 구당서》나 사마광의 《 자치통감》에 이를 기록하지 않았으니 나라의 체면 때문에 말하기를 꺼린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사관의 평을 실으며 중국 측의 기록 축소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11] 한편 야사와 평안도 지방 구전에 의하면 을지문덕이 전통적인 고구려 귀족이었고, 을파소의 후손이라고도 하여 결론을 내기가 더 어렵다. 당대 역사서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한국의 역사 현실상 그 지역에서만 대대로 내려오는 구전을 무시하기는 어렵고 실제 유물로 맞아떨어진 사례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12] 다만 뒤에 지를 붙여서 존칭사로 쓰는 건 고구려보다는 주로 신라, 가야 쪽에서 많이 나타난다. 김알지, 도설지왕 등등. 신라어와 고구려어가 가까운 계통이었다면 비슷한 표현이 쓰였을 것이므로 이렇게 추론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도 이름에 붙은 게 아니라(그랬으면 문덕지가 되었을 것이다) 성씨 뒤에 붙긴 했다. 또한 고구려의 경우 지 형태의 존칭은 이름보다는 주로 관직명에서 많이 나타난다. [13] 만약 정말 을파소의 후손이고 을씨였다면 존칭사인 지를 붙였다는 식으로 이어질 수는 있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14] 당시 고구려에 '문덕이라는 이름의 신화적인 선인'의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졌고, 자신의 아이에게 그런 존재의 이름을 함부로 붙일 수 없다는 것이 거절의 이유였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이야기 내에서의 설정일 뿐, 실제로 고구려에서 문덕 선관에 대한 전설이나 민간신앙이 존재했는지는 학문적으로 전혀 입증된 바 없다. [15] 출생 부분에서 언급했듯이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해동명장전》에서 그의 출생지가 평양이라고 기록했지만 이는 모두 한참 후대인 조선시대의 기록이라 근거는 거의 없다. 물론 고구려의 고위 관료였기 때문에 평양 출신이었을 확률은 높지만 단정짓기는 힘들다. [16] 이 때문에 위에 나온 것처럼 귀화한 선비족 출신일지도 모른다는 가설까지 나오는 것. [17] 다만 연개소문 또한 고조부 이상으로 올라가면 그리 대단한 가문이 아닌, 어떤 의미에서는 신진 세력이었다는 추정도 있다. 그리고 연개소문의 경우 아들인 연남생 당나라로 투항해 당나라에서 죽었기에 뤄양 근처에 묻히면서 묘비에 자세한 가계도를 적어 놓아 연개소문의 자세한 가계도를 알 수 있었다. 평생 고구려인으로 살았던 을지문덕과는 다른 편. [18] 즉 어디 듣보잡인 '바보 온달'이 공주와 결혼하고 실력으로써 전쟁에 나가 공을 세워 출세한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온달 또한 설화와는 달리 실제로는 귀족이었다고도 해서 단정할 수 없다. 덧붙이자면 온달의 출신성분이 낮았다고 보는 견해에서도 그가 생판 평민은 아니었을 것으로 본다. [19] 현대 한국어의 '으리으리'하다 등의 표현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20] 한자로는 태대형(太大兄). [21] 한자로는 대모달(大模達). [22] 이름 끝에 존칭접미사를 붙이는 것은 백제, 신라의 기록에도 자주 나온다. 주로 支(지)나 知(지)로 음차되어 있다. 물론 당시에도 '지'라고 읽혔을 가능성은 낮다. [23] 을밀이 을지문덕의 아들이라고 하여 을지문덕의 성을 을씨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을밀의 실존여부가 의심된다. [24] 곤지는 곤지(昆支 ; 코니(무)키) 군군(軍君 ; 코니키시) 곤지군(昆支君 ; 코니키시) 곤지 왕자(琨支 王子 ; 코니키세시무)로 사서에 나타나 있다. [25] 신라에서도 支의 兄의 대응이 보인다. 독지차(䔍支次) 독형(䔍兄) 근오형변(斤烏兄邊) 근오지(斤烏支) [26] 남조 진나라의 협객, 대도 출신, 하루에 500리를 주파하고 만큼 빨리 달릴 수 있었음, 수나라 양소 휘하에서 왕문진, 고지혜, 심현증 등을 격파하면서 무쌍, 양소 휘하에서 서돌궐 격파, 고구려와의 전쟁 중 요하에서 전사. [27] 하약필을 따라 강남에서 종군하여 계책으로 이름을 날림, 남조 진나라를 멸망할 때 행군총관으로 공을 세움, 고지혜의 난에서 양소를 구원하고 난을 진압, 천주자사로 재직 중 반란군 진압, 이관을 따라 종군하여 왕문진 격파, 평양성에서 고건무에게 패배. [28] 태수로 명성을 날림. 위지형의 장수 유자앙과 유욕덕 격파, 계책을 부려 위지형의 장수 단양의 수만 명의 대군을 격파하고 생포, 위지형의 장수 유자관을 물리치고 양군, 조주 함락, 위지형의 장수 이중강을 생포하고 성무 함락, 석비라의 10만 대군을 궤멸하고 생포, 수나라 건국 후 돌궐을 정벌하여 격파, 남조 진나라 정벌 때 행군총관, 고지혜의 난을 평정, 오골성을 공격하여 고구려군의 기습을 격파, 을지문덕에게 대패하고 홧병으로 사망. [29] 기마, 궁수에 능하고 체술에 능함. 북주 무제 우문옹 휘하에서 종군, 위지형의 난 진압, 남조 진나라 정벌 당시 석두성, 삼오 일대를 평정, 진나라 부흥운동 진압, 오주자사 소환, 원계, 장묵언 포획, 수 양제 양광을 옹립, 토욕혼을 정벌, 모용복윤을 격파하고 만두, 적수 2성 함락, 살수에서 을지문덕에게 대패, 양현감의 반란을 진압, 안문 일대에서 수 양제가 돌궐군 20만 명에게 포위되자 구원하여 격파. [30] 기마 궁술에 능통, 수 양제 양광을 옹립, 토욕혼을 정벌, 살수에서 을지문덕에게 패배. [31] 지방관으로 전전, 화주 일대에서 남쪽 이민족을 격파, 만리장성 공사 감독, 이민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단기로 돌격하여 적장을 격퇴, 10만 명이 항복하고 귀부함, 검남으로 옮겨서 다시 이민족을 진압, 살수에서 을지문덕에게 패배함, 양현감의 난 진압. [32] 돌궐 전선에서 활약이 확인됨, 살수에서 을지문덕에 패배 [33] 어릴 때부터 전쟁놀이에 심취함, 북제를 평정할 때 종군하여 공을 세움, 수나라가 건국할 때까지 공이 많아 진급함, 수양제가 즉위하고 변방에서 이민족 토벌, 토욕혼 정벌, 군율이 세고 지휘를 잘하여 수문제가 총애함, 사막을 횡단하여 이오를 정벌, 살수에서 을지문덕에게 대패. [34] 기마궁술의 달인, 양소를 따라 돌궐을 영무에서 격파, 촉 지방에 부임해서 이민족 격파, 수양제 즉위 후 양량의 난 진압, 급군태수로 부임하여 선정으로 명성, 살수에서 을지문덕에게 패배, 신성 외곽에서 고구려군 수만 명을 기병 1,000명으로 격퇴, 백의종군하여 돌궐의 침입을 격파, 마읍에서 돌궐 시필가한을 격파, 이듬해 시필가한의 침입을 재차 격퇴. [35] 설인귀는 어느 시점인지는 불명이나 경기도 파주 감악산의ㅜ산신으로 숭배되었는데 위 설화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높다. # [36] 국력의 요소 중 하나인 인구만 봐도 수 문제 때의 인구를 다시 복구한 시기가 100년 뒤의 '개원의 치'라 불리는 당 현종 때였다. 2009년 방영한 KBS 역사스페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편에서는 당시 수나라의 인구를 4600만(890만 호), 고구려의 인구를 400만(69만 호) 정도로 추산했다. 고구려가 수나라 주변국 중 강국임에도 불구하고 인구는 10분의 1도 안 되는 셈이다. [37] 2등급 을지무공훈장: 을지문덕, 3등급 충무무공훈장: 이순신, 5등급 인헌무공훈장: 강감찬 [38] 1등급 태극무공훈장은 대한민국을 상징하며 4등급 화랑무공훈장은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화랑들을 기념하는 훈장이다. [39] 이거는 본인도 진짜로 죽을 각오를 하고 들어갔을 확률이 높다. [40] 알다시피 살수는 지금의 청천강이다. [41] 굳이 따지면 강감찬 정도가 비길 수 있겠으나 조선시대는 의도적으로 고려시대 명장들에게 박했다. [42] 참고로 분량 차이는 세 권의 분량을 독식하고 있는 <김유신 열전>에 비해 너무 소략한데, 편찬 당시 이미 고구려의 기록은 거의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김부식 또한 《삼국사기》의 사론으로 "비록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지략과 장보고(張保皐)의 의롭고 용맹함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던들 흔적이 없어져 듣지 못하였을 것이다."라고 했을 정도.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의 경우에는 열전이 3권이나 되어서 굉장히 편파 아니냐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긴 한데, 실상은 글자를 모르는 아이들도 그 이름을 안다는 김유신과 관련된 기록이 부족해 《삼국사기》의 편찬자들이 허무맹랑한 기록들이 가득 담긴 김유신 가문의 <행록>을 추리고 추려서 만든 책이다. [43] 훗날 북한은 안주시의 일부를 떼어내서 을지문덕의 이름을 붙인 문덕군을 만들었다. [44]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관촉사 은진미륵에도 비슷한 전설이 있다. 여기서는 수군이 거란족의 요나라 군대로 바뀌었고 승려도 일곱 명이 아니라 한 명이라는 것이 다른 정도다. [45] 현재 합법적으로 우리민족끼리에 접속할 수는 없지만, 구글에 대충 검색어를 입력하면 텍스트 몇 줄 정도는 볼 수 있다. [46] 다만 북한 당국이 주민의 계급을 설정하기 위해 매우 상세하게 조상까지 인적 사항을 정리해두고는 있다고 한다. [47] 제목에서 보듯 김유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다. [48] 을지문덕에 대한 기록이 너무 적은지라 작가가 고충한 흔적이 꽤 보인다. [49] 사실상의 라이벌인 양광은 황제가 되기 전에는 그야말로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순박한 이미지로 나왔다. 다만 어머니 문헌황후가 죽은 뒤로는 실제 역사랑 비슷하게 묘사. [50] 1983년 KBS 드라마 <개국>에서는 이제현 역, 1983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추동궁마마>에는 최영 역. 2017년 2월 6일 향년 83세로 타계. [51] 가령 47회에서는 을지문덕이 피를 토하며 고건무에게 일갈을 하는데, 진작에 서토로 진격했다면 이미 탁군을 넘어서 장안에 도달했을 것이라 외친다. 저 시점에서 수나라는 또 다시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 3차 침공 시기 탁군에 30만 대군을 집결 시키고 있었다. [52] 영양왕이 중병에 걸려 영류왕이 태제 자격으로 정사를 맡고 있었다. 영양왕은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영류왕이 태제로 책봉되었던 것. [53] 양만춘이 그때( 고구려-수 전쟁)는 저 분이 계셔서 하나로 뭉칠 수 있었다고 한탄과 고민을 하지만 뒤에서 듣고 함께 있던 대중상이 그때는 저분이 계셔서 승리했지만 지금은 양만춘 장군이 계신다.라고 충언을 하는 모습으로 언급된다. [54] 작중 서술에서는 고구려 최고 엘리트들인 문무를 겸비한 인물들만 가는 부대로 신분고하의 상관없이 입대하며 고위귀족 자제들조차도 무예와 지략등이 뛰어난 자들만 입대가 허락되는 고구려 최정예 돌격부대로 언급된다. [55] 김유신 장군 모티브인 유신과 계백 장군 모티브인 계백에 비하면 운행 시간은 그나마 양심적인 기체 [56] 3기 전부 슬롯이 3개고 식별이 HCS로 공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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