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삼충신 | ||
성충 | 흥수 | 계백 |
<colbgcolor=#a52a2a><colcolor=#ffffff> 성충 成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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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충 영정 | |
이름 | 성충 |
이명 | 정충(淨忠), 선중(善仲) |
성씨 | 미상[1] |
출생 | 미상 |
사망 | 656년 3월 |
관등 | 좌평(佐平) |
국적 | 백제 |
1. 개요
16년 봄 3월에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이 적극 말렸더니, 왕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하려는 자가 없었다. 성충은 옥에서 굶주려 죽었는데, 그가 죽을 때 왕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마디 말만 하고 죽겠습니다. 제가 항상 형세의 변화를 살펴보았는데 전쟁은 틀림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전쟁에는 반드시 지형을 잘 선택해야 하는데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군사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방어해야만 방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은 이를 명심하지 않았다.
《 삼국사기》권 제28 <백제본기> 제6 의자왕
《 삼국사기》권 제28 <백제본기> 제6 의자왕
백제의 관료. 사망 직전까지 백제와 의자왕을 걱정하다 죽은 충신이었다. 정충(淨忠)이라고도 하며 일본 등씨가전에서는 선중(善仲)으로도 기록되어 있는데, '성(成)'과 '정(淨)', '중(仲)'과 '충(忠)'이 바꿔 쓰인 것은 고대 한국어에서 치경 마찰음~ 치경 파찰음 계열(이후 시대 한국어 자음으로는 ㅅ, ㅈ, ㅊ)의 음운이 거의 변별되지 않았던 흔적이다.[2]
2. 생애
656년 3월을 전후해 의자왕이 정사는 멀리 한 채 사치와 향락에 빠진 상황에서 문헌에 등장한다. 이때 최고 관직이었던 좌평 자리에 있던 성충은 이를 적극적으로 말렸지만, 이에 의자왕이 분노해 끝내 투옥되면서 조정에서 의자왕에게 충언을 하는 자들은 전부 사라지게 된다. 끝내 옥중에서 굶주려 죽기 전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간언을 올렸으나, 의자왕은 새겨 듣지 않았다.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말씀 아뢰고 죽겠습니다. 신이 항상 형세의 변화를 관찰하였는데 반드시 전쟁은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전쟁에서는 반드시 지형을 잘 살펴 선택해야 하는데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다른 나라 병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지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의 언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야만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는 의자왕 개인의 향략이라는 요소가 구체적으로 언급되기는 하지만, 현대적으로 이는 의자왕 개인의 문제 이전에 국가 외교적으로 반당 정책에 대한 반발로 평가된다. 당시 백제는 652년 이후 당과의 교류를 진행하지 않고 655년 고구려와 연합해 당이 해당 방향으로 군사 활동을 자제하기를 주문한 신라를 공격하는 등 노골적으로 당과 대립했으며, 이에 655년 8월 당에 귀국한 왜국의 견당사가 신라를 도와 백제와의 전쟁에 나서라는 당고종의 명령을 전달하는 등 외교 구도가 급격히 재편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 이 상황 속에서 의자왕은 스스로의 대외 정책을 고집했고, 성충은 이에 반대했으나 투옥돼 죽으면서 '전쟁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하여 마지막 간언을 남긴 것이다. 물론 전근대 동아시아를 기준으로 문헌상 보이는 13만 명의 상륙전은 임진왜란을 제외하면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유별난 사례였던 만큼 의자왕의 판단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만은 아니었지만, 결국 그 우려는 660년 실제의 것으로 다가왔다.
실제 전쟁이 터지자 이 성충의 발언은 고마미지현(현재의 장흥군)에 유배되어 있던 흥수에 의해 거의 같은 형태로 다시 인용되는데, 이 조언에 대해 대신들은 백강과 탄현의 길목에서 나당연합군을 막으라는 흥수의 조언에 대해 '흥수는 오랫동안 갇혀 있었기에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백강과 탄현을 통과시키면서 길목에 들어오는 병력을 깨부수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어 따랐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백제는 중과부적으로 패배했는데, 결과적으로 보아 이는 병력 규모의 계산 자체가 잘못된 전략인 만큼[3] 명백한 실패였으며, 의자왕은 사비성 함락 직전 "성충의 말을 따르지 않다가 이렇게까지 된 것을 후회한다(悔不用成忠之言以至於此)."며 웅진성으로 도피해야 했고, 끝내 나라의 멸망을 맞이했다.
『삼국사기』에는 이처럼 스스로가 죽음을 맞을 무렵과 그로부터 머지않아 백제가 멸망할 때에만 언급되어 구체적인 활동에 대한 기록이 적으나, 8세기 중엽 일본의 『등씨가전(藤氏家傳)』에서 ' 당나라에는 위징, 고구려에는 개금(蓋金), 신라에는 짐순(鴆淳)[4], 백제에는 선중(善仲)'이 있어 '이름을 만리에 진동시켰다.'고 언급된다. 이 또한 구체적인 내용이 부족하고 이 글의 맥락은 '그런 인물들보다도 일본의 나카토미노 카마타리가 뛰어나다'는 것으로 순수한 칭찬으로 보기는 애매하나, 어쨌든 근세 이전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자료 교환이 활발하지 않던 시기에도 그 이름이 일본에 알려져 100년가량 뒤까지 전해질 만큼 백제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에서 대군을 이끌고 상륙전을 펼친다는 전례 없는 상황을 예측하는 혜안을 지녔던 인물이자, 수화불상용 관계에 있는 정책의 대립 속에서 국왕과 대립해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나라를 위한 간언을 남긴 충신으로서 신라에 의해 가감되었을 수밖에 없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도 그 인물됨이 뚜렷이 드러난 인물이었다. 때문에 이후 시대에는 한국 역사 속 이름난 충신의 한 명으로서 기려지기도 했다.
3. 기타
-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성충은 백제의
왕족인 부여씨(夫餘氏)로,
윤충이 그의 친동생이라고 한다.
연개소문에게 편지를 보내 설득시켜
김춘추를 난처하게 하는 등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지만, 이후
임자의 참소를 받아 의자왕에게 박대당해 뜻을 펴지 못했다고 전한다.
조선상고사에서 소개하는 일화로, 동예에서 선물로 음식을 보내자 사람들이 기뻐하며 열어보려는데, 적 기지에서 갑자기 선물을 보낸 게 뭔가 수상하다고 여긴 뒤 다 불태우라고 지시하자 그렇게 했는데, 안에는 많은 양의 무서운 땡삐( 땅벌)들이 불에 타 죽어 있었고, 그 다음에 선물이 또 오자 속을 줄 아냐며 불 속에 집어던지려고 하자 이번엔 그냥 열어보게 했는데, 거기엔 폭발물인 유황과 염초들이 들어있었다. 그 다음에도 선물이 오자 이번에는 톱으로 켜게 했는데, 그러자 그 안에서 사람의 비명소리와 함께 핏자국이 나왔다. 그 안에 있던 선물의 정체는 칼을 쥔 자객으로, 톱질로 인해 허리가 끊어져 죽어 있었다고 한다. 만일 멋 모르고 열었다면 성충과 그 군사들은 그 자에 의해 몰살당하고도 남았을 일. 물론 고려 말 최무선의 이야기에서나 이름을 들어봤을 '유황과 염초'라는 조합에서 보이듯 이는 조선시대의 심성을 반영해 형성된 민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5]
4. 대중매체에서
백제 최후에 활약한 신하이자 마지막 충신다운 모습을 보이고 사망했기에 당대를 그린 작품에는 거의 빠짐없이 등장한다.- 1992년 KBS 드라마 < 삼국기>에서는 배우 김갑수가 연기했다. 당대 귀족답게 칼을 잘 쓸줄 알면서도 백제의 지략가 역할을 잘 표현했고 연개소문과 직접 만나 여제 동맹을 성사시키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김유신이 준비한 미인계와 이간책에 당하며 감옥에서 숨을 거두는 것으로 묘사된다. 극 후반에 성충이 투옥된 것을 확인하고 군사를 몰고 오려는 계백( 유동근 분)을 말리는 충신의 모습을 보였으며 그가 옥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의자왕( 길용우 분)이 무척 슬퍼하는 장면이 등장한다.[6]
- 2007년 SBS 드라마 < 연개소문>에서는 배우 맹상훈이 연기했다. 흥수, 윤충과 함께 전성기 시절의 총기를 잃고 역신 임자와 요녀 은고에 빠져 국정을 팽개치고 방탕하게 살아가는 의자왕에게 여러 차례 충언을 올리다 관직을 박탈당하고 투옥된다. 얼마 뒤 흥수도 하옥되고 윤충은 유배된다. 이때 사신으로부터 성충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나 그의 마지막 상소를 보고는 크게 비웃는다.
폐하... 신 성충 마지막으로 폐하께 아뢰옵나이다. 신라의 김춘추는 백제에 원한이 많은 인물이옵니다. 머지 않아 그 자는 당나라의 세력을 업고 우리 백제로 올 것이옵니다. 우리 백제는 육지로는 탄현과 바닷길로는 백강의 기벌포를 지키면 능히 한 사람이 일만의 대군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부디 지금이라도 고구려와 동맹을 재삼 확인하며 굳건히 하시고 탄현과 기벌포를 지키시오소서. 그 길만이 9백년 대백제의 사직을 온전하게 보전하는 길이 될 것이옵니다. 폐하! 신 성충이 마지막으로 드리는 말씀이옵니다. 부디... 부디... 다시 성군의 길을 찾으시오소서!
연개소문 95화 中
연개소문 95화 中
- 2011년 MBC 드라마 < 계백>에서는 배우 전노민이 연기했다. 가잠성의 신라군에게 포로가 되어 있던 모습으로 처음 등장한다. 사택 가문과 맞서는 의자왕 친위 그룹의 역할을 감당했으며 주변 인물들간의 충돌을 잘 조율하는 진중한 성품으로 등장한다. 은고의 세작 혐의를 조사하던 중 그녀가 반역을 도모했다는 것을 밝혀냈으나 이를 의자왕에게 고하기 전에 살해당하며 퇴장한다. 첫 등장부터 퇴장까지 MBC 사극답게 실제 역사적 고증과는 거리가 멀다.
- 2012년 KBS 드라마 < 대왕의 꿈>에서는 배우 김원배가 연기했다. 김춘추와 연개소문의 회담에서 등장했지만 이 사료에서 보여준 조목조목 단점을 지적해 연개소문이 신라와 결렬시키는 것은 안 나오고 먼저 와서 동맹 이야기를 선수를 했지만 말빨이 뛰어난 김춘추에게 정면 승부에서는 밀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밝혀진 사실과도 많은 괴리가 있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 대체역사물 <백제의 이름을 잇다>에서는 역시나 무시당하고 사망하는건 똑같으나 주인공이 신라 및 당나라와의 1차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2차 전쟁에서 그의 계책을 채택해 당나라 수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하면서 죽어서나마 그 뜻을 이루게 되었다.[7]
[1]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는 백제 왕족과 같은 부여씨로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 사료와 교차되지 않는 부분이라 불명. 다만 좌평에 올랐으므로 왕족 혹은
대성팔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2]
대표적으로
미추 이사금이 미조(味照)·미조(未祖)·미소(未召) 등으로 달리 표기된 사례가 언급된다. 그 밖에도 중상(仲常)-
충상(忠常),
흠순(欽純)-흠춘(欽春),
대성(大城)-대정(大正) 등의 사례가 있다.
[3]
『
손자병법』에서는 병력 규모에 따른 전략에 대해 "10배의 병력이면 포위하고, 5배의 병력이면 공격하고, 2배의 병력이면 적을 분리시킨 후 차례로 공격하고, 맞먹는 병력이면 최선을 다하여 싸우고, 적보다 적은 병력이면 도망치고, 승산이 없으면 피한다."고 하였다. 마지막 두 방법은 백제가 따를 수 없는 방법이었고 포위섬멸에 자그마치 10배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지나치다고 하더라도, 길목을 넘어오는 병력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려고 하면 적어도 그 길목 양 방향으로 병력을 나누어 공격해야 하는 만큼 '2배의 병력이면 적을 분리시킨 후 차례로 공격'한다는 『손자병법』의 말과 같이 적어도 상대보다 병력 규모가 부족하지 않은 상황에서 실행해야 하는 것이 정석적이었다. 그러나 백강 방면의 병력은 문헌에서 정확히 그 수가 보이지 않더라도 당의 13만 명을 뛰어넘는 병력을 백제가 갖추는 것은 상식적으로 단연코 불가능했으며, 되레
당군은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기반으로 양동작전과 후방 침투까지 벌이는 등 백제군은 규모 이전에 전략적으로도 완패했다. 더 나아가 문헌에 따르면, 황산 방면의 병력은 오히려 신라가 백제를 포위섬멸하기 좋다는 10배였다.
[4]
그 지위상
김유신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견도 있다.
[5]
곽재우가
임진왜란 당시 이런 비슷한 작전을 썼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 단재 신채호가 참고한
야사의 저자가 곽재우의 전설을 차용하여 성충의 일대기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신채호는 열정과 달리 가난한 형편으로 인해 정밀한 사료 비평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 후기나 구한말에 발간된 야사들이 대거 조선상고사 등에 실리게 되었다.
[6]
의자왕 역의
길용우와 성충 역의
김갑수는 현재 같은
후너스엔터테인먼트 소속이다.
[7]
언급을 보면 몇 년 동안의 수위나 장마로 인한 변수까지 싹 다 고려한 철두철미한
방어 계획이었다.
권력 불안이라는 이유로 채택 안한 의자왕과 당시
왕당파들이 한심해 보일 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