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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18 16:59:11

성충(백제)


백제 삼충신
성충 흥수 계백
<colbgcolor=#a52a2a><colcolor=#ffffff> 성충
成忠
파일:성충.jpg
▲성충 영정
이름 성충 
이명 정충(淨忠), 선중(善仲)
성씨 미상[1]
출생 미상
사망 656년 3월
관등 좌평(佐平)
국적 백제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에서

1. 개요

16년 봄 3월에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이 적극 말렸더니, 왕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하려는 자가 없었다. 성충은 옥에서 굶주려 죽었는데, 그가 죽을 때 왕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마디 말만 하고 죽겠습니다. 제가 항상 형세의 변화를 살펴보았는데 전쟁은 틀림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전쟁에는 반드시 지형을 잘 선택해야 하는데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군사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방어해야만 방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은 이를 명심하지 않았다.
삼국사기》권 제28 <백제본기> 제6 의자왕

백제의 관료. 사망 직전까지 백제와 의자왕을 걱정하다 죽은 충신이었다. 정충(淨忠)이라고도 하며 일본 등씨가전에서는 선중(善仲)으로도 기록되어 있는데, '성(成)'과 '정(淨)', '중(仲)'과 '충(忠)'이 바꿔 쓰인 것은 고대 한국어에서 치경 마찰음~ 치경 파찰음 계열(이후 시대 한국어 자음으로는 , , )의 음운이 거의 변별되지 않았던 흔적이다.[2]

2. 생애

656년 3월을 전후해 의자왕이 정사는 멀리 한 채 사치와 향락에 빠진 상황에서 문헌에 등장한다. 이때 최고 관직이었던 좌평 자리에 있던 성충은 이를 적극적으로 말렸지만, 이에 의자왕이 분노해 끝내 투옥되면서 조정에서 의자왕에게 충언을 하는 자들은 전부 사라지게 된다. 끝내 옥중에서 굶주려 죽기 전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간언을 올렸으나, 의자왕은 새겨 듣지 않았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말씀 아뢰고 죽겠습니다. 신이 항상 형세의 변화를 관찰하였는데 반드시 전쟁은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전쟁에서는 반드시 지형을 잘 살펴 선택해야 하는데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다른 나라 병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지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의 언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야만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는 의자왕 개인의 향략이라는 요소가 구체적으로 언급되기는 하지만, 현대적으로 이는 의자왕 개인의 문제 이전에 국가 외교적으로 반당 정책에 대한 반발로 평가된다. 당시 백제는 652년 이후 당과의 교류를 진행하지 않고 655년 고구려와 연합해 당이 해당 방향으로 군사 활동을 자제하기를 주문한 신라를 공격하는 등 노골적으로 당과 대립했으며, 이에 655년 8월 당에 귀국한 왜국의 견당사가 신라를 도와 백제와의 전쟁에 나서라는 당고종의 명령을 전달하는 등 외교 구도가 급격히 재편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 이 상황 속에서 의자왕은 스스로의 대외 정책을 고집했고, 성충은 이에 반대했으나 투옥돼 죽으면서 '전쟁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하여 마지막 간언을 남긴 것이다. 물론 전근대 동아시아를 기준으로 문헌상 보이는 13만 명의 상륙전은 임진왜란을 제외하면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유별난 사례였던 만큼 의자왕의 판단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만은 아니었지만, 결국 그 우려는 660년 실제의 것으로 다가왔다.

실제 전쟁이 터지자 이 성충의 발언은 고마미지현(현재의 장흥군)에 유배되어 있던 흥수에 의해 거의 같은 형태로 다시 인용되는데, 이 조언에 대해 대신들은 백강과 탄현의 길목에서 나당연합군을 막으라는 흥수의 조언에 대해 '흥수는 오랫동안 갇혀 있었기에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백강과 탄현을 통과시키면서 길목에 들어오는 병력을 깨부수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어 따랐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백제는 중과부적으로 패배했는데, 결과적으로 보아 이는 병력 규모의 계산 자체가 잘못된 전략인 만큼[3] 명백한 실패였으며, 의자왕은 사비성 함락 직전 "성충의 말을 따르지 않다가 이렇게까지 된 것을 후회한다(悔不用成忠之言以至於此)."며 웅진성으로 도피해야 했고, 끝내 나라의 멸망을 맞이했다.

『삼국사기』에는 이처럼 스스로가 죽음을 맞을 무렵과 그로부터 머지않아 백제가 멸망할 때에만 언급되어 구체적인 활동에 대한 기록이 적으나, 8세기 중엽 일본의 『등씨가전(藤氏家傳)』에서 ' 당나라에는 위징, 고구려에는 개금(蓋金), 신라에는 짐순(鴆淳)[4], 백제에는 선중(善仲)'이 있어 '이름을 만리에 진동시켰다.'고 언급된다. 이 또한 구체적인 내용이 부족하고 이 글의 맥락은 '그런 인물들보다도 일본 나카토미노 카마타리가 뛰어나다'는 것으로 순수한 칭찬으로 보기는 애매하나, 어쨌든 근세 이전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자료 교환이 활발하지 않던 시기에도 그 이름이 일본에 알려져 100년가량 뒤까지 전해질 만큼 백제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에서 대군을 이끌고 상륙전을 펼친다는 전례 없는 상황을 예측하는 혜안을 지녔던 인물이자, 수화불상용 관계에 있는 정책의 대립 속에서 국왕과 대립해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나라를 위한 간언을 남긴 충신으로서 신라에 의해 가감되었을 수밖에 없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도 그 인물됨이 뚜렷이 드러난 인물이었다. 때문에 이후 시대에는 한국 역사 속 이름난 충신의 한 명으로서 기려지기도 했다.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백제 최후에 활약한 신하이자 마지막 충신다운 모습을 보이고 사망했기에 당대를 그린 작품에는 거의 빠짐없이 등장한다.
폐하... 신 성충 마지막으로 폐하께 아뢰옵나이다. 신라의 김춘추는 백제에 원한이 많은 인물이옵니다. 머지 않아 그 자는 당나라의 세력을 업고 우리 백제로 올 것이옵니다. 우리 백제는 육지로는 탄현과 바닷길로는 백강의 기벌포를 지키면 능히 한 사람이 일만의 대군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부디 지금이라도 고구려와 동맹을 재삼 확인하며 굳건히 하시고 탄현과 기벌포를 지키시오소서. 그 길만이 9백년 대백제의 사직을 온전하게 보전하는 길이 될 것이옵니다. 폐하! 신 성충이 마지막으로 드리는 말씀이옵니다. 부디... 부디... 다시 성군의 길을 찾으시오소서!
연개소문 95화 中

[1]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는 백제 왕족과 같은 부여씨로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 사료와 교차되지 않는 부분이라 불명. 다만 좌평에 올랐으므로 왕족 혹은 대성팔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2] 대표적으로 미추 이사금이 미조(味照)·미조(未祖)·미소(未召) 등으로 달리 표기된 사례가 언급된다. 그 밖에도 중상(仲常)- 충상(忠常), 흠순(欽純)-흠춘(欽春), 대성(大城)-대정(大正) 등의 사례가 있다. [3] 손자병법』에서는 병력 규모에 따른 전략에 대해 "10배의 병력이면 포위하고, 5배의 병력이면 공격하고, 2배의 병력이면 적을 분리시킨 후 차례로 공격하고, 맞먹는 병력이면 최선을 다하여 싸우고, 적보다 적은 병력이면 도망치고, 승산이 없으면 피한다."고 하였다. 마지막 두 방법은 백제가 따를 수 없는 방법이었고 포위섬멸에 자그마치 10배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지나치다고 하더라도, 길목을 넘어오는 병력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려고 하면 적어도 그 길목 양 방향으로 병력을 나누어 공격해야 하는 만큼 '2배의 병력이면 적을 분리시킨 후 차례로 공격'한다는 『손자병법』의 말과 같이 적어도 상대보다 병력 규모가 부족하지 않은 상황에서 실행해야 하는 것이 정석적이었다. 그러나 백강 방면의 병력은 문헌에서 정확히 그 수가 보이지 않더라도 당의 13만 명을 뛰어넘는 병력을 백제가 갖추는 것은 상식적으로 단연코 불가능했으며, 되레 당군은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기반으로 양동작전과 후방 침투까지 벌이는 등 백제군은 규모 이전에 전략적으로도 완패했다. 더 나아가 문헌에 따르면, 황산 방면의 병력은 오히려 신라가 백제를 포위섬멸하기 좋다는 10배였다. [4] 그 지위상 김유신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견도 있다. [5] 곽재우 임진왜란 당시 이런 비슷한 작전을 썼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 단재 신채호가 참고한 야사의 저자가 곽재우의 전설을 차용하여 성충의 일대기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신채호는 열정과 달리 가난한 형편으로 인해 정밀한 사료 비평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 후기나 구한말에 발간된 야사들이 대거 조선상고사 등에 실리게 되었다. [6] 의자왕 역의 길용우와 성충 역의 김갑수는 현재 같은 후너스엔터테인먼트 소속이다. [7] 언급을 보면 몇 년 동안의 수위나 장마로 인한 변수까지 싹 다 고려한 철두철미한 방어 계획이었다. 권력 불안이라는 이유로 채택 안한 의자왕과 당시 왕당파들이 한심해 보일 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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