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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23:29:22

스파르타

파일:스파르타.jpg
현대 스파르타 마을 풍경
파일:스파르타 지도.jpg
스파르타 지도
1. 개요2. 역사
2.1. 성립2.2. 리쿠르고스 체제의 탄생2.3. 페르시아 전쟁2.4. 펠로폰네소스 전쟁2.5. 패권 속의 어둠2.6. 몰락
2.6.1. 군사적 원인2.6.2. 경제적 원인
2.7. 헬레니즘 시대2.8. 로마 제국 시대와 그 이후2.9. 현대
3. 고대 도시국가 시절
3.1. 사회
3.1.1. 계급 제도
3.1.1.1. 노예 계급: 헤일로타이
3.1.1.1.1. 인간 사냥3.1.1.1.2. 차별 대우3.1.1.1.3. 저항
3.1.1.2. 그 외 특수 계급
3.2. 정치
3.2.1. 일반적 인식에 대한 반론
3.3. 성인들의 생활3.4. 공동 식사3.5. 여성3.6. 스파르타식 교육: 아고게(Agoge)3.7. 배타적 순혈주의3.8. 종교3.9. 기타
4. 서구권에서의 역사적 평가5. 이야깃거리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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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케다이몬인들의 도시가 폐허가 되고 신전과 건물의 기초만 남게 된다면,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사람들은 아마도 그들에게 과연 명성만큼의 실력이 있었는지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라케다이몬 인들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5분의 2를 차지하고 있으며, 펠로폰네소스 인들 전부와 수많은 외부 동맹군을 이끈다. 그들은 한 도시에 모여 살지도 않고, 값비싼 신전이나 물건도 없고, 그리스의 옛 관습에 따라 여러 마을에 흩어져 살기에 외견상 초라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일이 아테네에 일어난다면, 사람들은 외관만 보고 이 도시가 실제보다 두 배나 더 강했다고 추측할 것이다.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1.10.2, 천병희 번역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부에 있는 도시. 고전기 그리스에서는 아테네와 함께 가장 강력한 폴리스였다.

스파르테(Σπάρτη)라고도 부르지만 이는 아티카 방언이며, 도리아 방언으론 스파르타(Σπάρτᾱ)이다. 참고로 오늘날에는 '스파르티'라고 읽는데 Η/η 모음 읽는 법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는 건국왕 라케다이몬의 아내인 스파르타의 이름을 딴 것이며, 당시 폴리스의 공식 명칭은 라케다이몬(Λακεδαίμον = 라케대몬), 혹은 라케다이모니아(Λακεδαιμονία=라케대모니아)였다.[1] 때문에 스파르타 전사들의 방패에는 '라케다이몬'의 첫 글자인 대문자 ' 람다(Λ)'가 그려져 있었고 라케다이몬과 스파르타라는 이름은 서로 통용되었다.

고대 스파르타 특유의 군인 양성방법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유명하여, 동시대 그리스인들도 스파르타의 특유의 가혹한 사회 시스템에 기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스파르타인들의 절제있는 생활을[2] 존경했다. 현대에도 혹독하고 자비심 없는 비인간적인 단련 과정을 이야기할 때 흔히 인용하곤 한다. 과거의 스파르타식 교육에 비하면 시대가 지나오면서 형태는 많이 변했지만 현재도 세계적으로 엄격한 공교육, 사교육을 의미할 때 그렇게 부르며, 서양에서도 엄격하고 건실한 사람을 언급할 때 "스파르타인 같다"라는 말을 한다. 사실상 '스파르타식'이란 말은 여기서 유래된 것. 그러나 스파르타식 교육 말고도, 시민의 정치 참여와 안정성을 적절하게 타협시킨 혼합정 시스템으로도 유명하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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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성립

청동기 시대 미케네 문명 시기에는 펠로폰네소스에서 아카이아 인의 도시로 강력했다. 우리가 아는 트로이 전쟁에 나오는 메넬라오스 헬레네가 스파르타 출신으로, 그리스 군의 맹주였던 미케네와 더불어서 주요한 역할을 하는 국가로 나온다. 하지만 도리아 인의 남하와 바다민족의 침략 등으로 미케네 문명이 멸망하면서 여타 그리스의 도시들과 같이 쇠퇴하여 암흑시대로 접어들었고 중심 세력이 아카이아 인에서 도리아 인으로 교체된다.

다만 완벽히 폐허로 전락한 미케네와 달리, 스파르타는 이전의 전통과 문화를 꽤 보존할 수 있었는데, 특유의 집단 전사 문화와 자유로운 여성 문화가 미케네 문명 시대의 그리스 전사 문화의 흔적이다. 암흑시대 당시에 스파르타 지역에는 정착촌 4곳이 있었는데 그 중 2곳이 동맹을 맺어 다른 2곳을 멸망시키면서 탄생한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스파르타의 기원으로, 스파르타 특유의 이중왕(Dual King) 제도도 이 동맹에서 기인했다고 여겨진다.

2.2. 리쿠르고스 체제의 탄생

기원전 8세기 무렵에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던 스파르타는 이웃 폴리스 메세니아와 라코니아를 정복하고 시민들을 노예로 삼았다. 그러나 이렇게 세를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양극화가 극심하게 벌어지고 제2계층과 제3계층들이 대규모로 반란을 일으키는 등 사회 혼란이 일어났다. 이 혼란을 극복하고자 독특한 사회 체계로 알려진 리쿠르고스 체계가 성립됐다고 전한다.

비록 리쿠르고스의 존재에 대해서는 그에 대해 기록한 플루타르코스도 그의 존재를 두고 논쟁이 되지 않는 것이 없다고 기록할 정도며 그가 사실은 신이었다고 주장한 학자들도 있을 정도로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기록에 의하면 개혁을 시작할 당시 리쿠르고스는 당시 스파르타 왕의 조카로서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여러 정치체제를 터득하였고[3] 돌아와서는 왕의 신뢰에 힘입어 개혁정책을 밀어붙였다. 그 과정에서 기득권층의 반발을 사 구타당하기까지 했지만 결국 개혁에 성공한다. 리쿠르고스의 개혁은 다음과 같다. 이상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리쿠르고스의 개혁은 우리가 아는 스파르타의 체제와 동일하다. 즉 우리가 아는 스파르타의 체제가 이때 완성되었다. 물론 리쿠르고스의 개혁으로 성립된 체제는 당대 기준으로 봐도 충격적인 교육 제도를 갖추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를 바탕으로 군사 강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사 육성 특화식 교육과는 다르게 페르시아 전쟁 이전까지는 대규모 확장에는 주저했는데, 후에 스파르타가 확장 정책을 펴다가 쇠락의 길을 걸었음을 생각하면 현명한 선택이었다.[6][7][8]

2.3. 페르시아 전쟁

스파르타가 후세까지 이름이 남은 이유는 페르시아 전쟁 중에서 벌어진 테르모필레 전투가 이후 그리스를 비롯한 많은 유럽 국가에서 군인의 애국심을 강조하는 수단이 됐기 때문이다. 정작 전투 자체는 그냥 사흘을, 유명한 스파르타 300명+1000명의 군대로는 몇 시간밖에 버티지 못한 국지전에 불과했다. 거기에 레오니다스 1세가 끌고 간 300명은 대를 이을 자녀가 있는 전사들이었는데, 스파르타의 특성상 그 정도로 오래 살아남은 전사들은 대부분 지휘관급 장교들이다. 이 때문인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스파르타는 이후 별 활약을 못해, 테르모필레에서 살아 돌아온 스파르타 군인 아리스토데무스가 온갖 왕따를 당하면서도 1년 넘게 큰 전투가 없어서 싸우지도 못했다.

스파르타가 페르시아 전쟁에서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바로 플라타이아이 전투로, 그리스 본토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스파르타가 주도한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이 주력이 된 그리스군은 페르시아군을 크게 물리치며 페르시아를 내쫓는 데 성공했다. 스파르타의 페르시아 전쟁은 여기서 마무리가 된다. 이후 아테네는 이오니아 해와 에게 해 등에서 세력 확장을 위해 페르시아와 추가적인 전쟁을 벌였지만, 스파르타는 소극적으로 나서며 손을 뗐다. 그래도 왕이 전사자 명단에 들었다는 사실과, 막판 숟가락 얹기에 성공한 덕분에 페르시아 전쟁에서 아테네와 공적을 나란히 했다.

2.4. 펠로폰네소스 전쟁

페르시아를 격퇴한 뒤,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놓고 다퉜다. 스파르타는 우호적인 폴리스들을 모아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만들었고, 아테네도 마찬가지로 우호적인 폴리스를 모아 델로스 동맹을 만들었다. 점차 격화된 충돌은 마침내 격렬한 전쟁으로 발전했다.

전 그리스 세계를 휩쓸고 간 오랜 전쟁 끝에 마침내 승리한 것은 스파르타였다.[9]

그러나 이 과정에서 소모된 전쟁비용과 물자를 동맹관계에 있던 폴리스들에게 전액 부담시키자, 타 폴리스와 동맹관계가 금이 갔다. 스파르타가 강력한 군사력에 비해 장기전에 필요한 전비와 물자 생산 능력이 부족했고 식민지 메세니아에서 조달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타 폴리스를 스파르타 아래로 보는 스파르타 특유의 선민의식과 패권주의 사상도 주된 원인이었다.

2.5. 패권 속의 어둠

그러다 보니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멸망시킬 수도 있었으나, 테베 코린토스가 치고 올라오는 것을 걱정해 완전히 멸망시키진 않았다. 대신, 친스파르타 정치인들로 이루어진 과두정을 패배한 아테네와 그 동맹국에게 강요했다.

아테네 밑에서 민주주의를 맛보다 느닷없이 친스파르타 정치가들의 독재를 겪어야 했던 시민들은 이에 심하게 반발했다.[10] 게다가 친스파르타 정치가들은 민주주의자를 죽이는 테러를 저질렀기 때문에 반감은 더욱 심해졌다.[11] 그래서 아테네는 항복한 뒤, 단 1년 만에 스파르타에게 반기를 들어 스파르타가 세운 30인의 독재정부를 엎어버리고 민주주의로 되돌아갔다. 아테네를 따라 곳곳에서 과두정이 붕괴됐으나, 스파르타는 쉽게 손을 쓸 수 없었다.

패권국 스파르타가 가진 문제는 이렇게 각처에서 반기를 드는 폴리스들을 진압할 수 있는 충분한 군사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스파르타군은 분명 당시 그리스 최강이었으나 숫자가 1만 남짓[12]으로 너무 적어서 산발적으로 발생하는 시비에 대응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대규모 원정도 내부의 헤일로타이라는 노예 계급 때문에 불가능했다.[13] 이는 아테네라는 명백한 적수만 상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마치 현대 미군이 소수의 보병으로 이라크 전쟁을 이긴 뒤 전후 처리에 골머리를 썩혔던 것과 매우 흡사하다. 그나마 미군은 돈도 많고 규모도 크며 확장할 방법도 존재하지만 스파르타는 국가체제에서 기득권을 유지하는 방식이나 국부를 모으는 방식의 한계가 명확해서 규모의 도약이 사실상 불가능하고, 오히려 도시국가 규모의 군사력에서 장기적으로는 감소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를 커버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펠로폰네소스 동맹군 전체를 움직였지만, 스파르타군처럼 마음대로 장기 주둔시킬 수는 없었다.

일각에서는 전장에서 스파르타군이 좌익에 서고 우익에 동맹군을 몰아넣어 피해를 강요했다고 주장했었는데 이는 스파르타에게 억울한 일이다. 당장 좌익이 상대하는 것은 적의 정예병인 우익이다.[14] 즉, 좌익에 당대 그리스 최강 육군으로 대표되는 스파르타군이 있다는 건 적이 우익을 함부로 움직일 수 없게 된다는 뜻이 되고 이는 아군 우익의 포위 위험은 줄어들고 우익은 더 수월하게 적의 좌익을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설사 밀리더라도 좌익의 자신들이 적의 정예를 붙들며 버틸 테니 그 사이에 우익의 동맹군은 철수하라는 신호가 된다. 그리고 전장에서 공을 더 세울 수 있는 건 당연히 공격을 하는 우익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동맹군에게 공을 어느 정도 양보하겠다는 의도도 있기에 스파르타가 좌익에 섰다는 것으로 까는 건 적당하지 않다.

하지만 스파르타가 자신들의 외교적 실책으로 동맹의 신뢰를 잃은 건 사실인데 아테네를 이기기 위해 페르시아와 연합해 해군을 편성하기 위한 자금을 조달받았기 때문. 이는 페르시아의 위협에서 서로를 보호한다는 그리스 연합의 명분을 망각한 짓이었고 이것 때문에 스파르타가 주도하는 그리스 연합의 존재 이유가 불분명해졌으므로 그리스계 폴리스들은 스파르타가 단지 그들의 야욕 때문에 그리스 연합을 유지하고자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과거의 펠로폰네소스 동맹, 델로스 동맹처럼 자발적인 연합이 불가능했다. 아테네가 패배한 뒤, 스파르타 휘하의 그리스 연합은 매우 불안정했다.

델로스 동맹을 이끈 아테네는 동맹국 중 가장 인구가 많고[15] 부유했으므로 동맹에서 무슨 일이 나면 직접 문제를 처리하는 등[16] 맹주 노릇을 확실하게 할 수 있었지만, 스파르타는 오직 중보병 군사력(그나마도 지속적으로 줄어들던[17])에만 의존하던 가난한 국가였기에 이런 일에 손을 쓸 여지가 없었다. 특히 함선 건조와 유지 및 노수(櫓手) 인건비 등으로 비싸기 그지없던 해군을 보유하기는 커녕, 사치를 배척하며 독선적인 데다가 인구를 늘릴 생각도 안 하고 강한 전사만 키우려고 아기를 절벽으로 떨어뜨리거나 내다버리는 스파르타가 뭘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다른 폴리스들은 스파르타의 능력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더불어 스파르타의 무용담이 무색하게도 정작 중요한 전투에는 불리하다 싶으면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발뺌하기 일쑤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마라톤 전투 테르모필레 전투였다. 둘 다 그리스 동맹국들은 페르시아의 강력한 군대를 막기 위해 육군 최강국인 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정작 스파르타는 종교적인 이유를 들먹이며 마라톤 때에는 단 한 명도 보내지 않았고, 테르모필레 전투 때는 국왕이 주전파라 그나마 300명이나마 온 것이다. 그들이 자랑하던 라코닉(Laconic) 화법도 제일 잘 써먹을 때가 군사적 책임을 회피할 때였다. 그렇다고 스파르타가 딱히 종교적인 국가라고 보기도 힘들다. 그리스에서 올림피아 제전 기간에는[18] 그리스 모든 폴리스가 휴전하는 것이 규칙이었는데, 이를 어긴 유일한 국가가 스파르타다.[19] 즉, 자기 아쉬운 대로 몸을 사리던 것. 이런 행보 때문에 다른 그리스 동맹들까지도 스파르타에 불만을 품었다.[20] 또한 전과에서도 스팍테리아 전투나 레욱트라 전투 등 굴욕들이 있다.

게임에 비유하자면 스파르타의 전투력은 '조건이 비등하다면 보다 안정적인 전과를 낼 수 있는 엘리트 병종'이지, '수적 열세나 조건의 불리함을 씹어먹고 적에게 비장의 카드로 일격을 날릴 수 있는 영웅급 전력'이 아니다. 그리스의 다른 폴리스 병사들이 잘 싸우는 자가 있고 상대적으로 못 싸우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에 비해 스파르타의 전사들은 아무리 못 싸우는 자라도 최소 타국의 숙련병 정도의 역량을 보여줄 수 있었지만, 팀워크와 그에 복종하는 정신무장을 훈련하는 것이지 무슨 단독무쌍 초인 양성 훈련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스파르타나 그리스의 다른 폴리스들이나 최상급의 전사들로 가면 별 차이가 없었다. 실제로 역사를 찾아보면 스파르타가 이름값을 그다지 못 하고 패배한 전투들도 흔하다.

물론 그렇다고 스파르타의 군사력이 아주 거품이라거나 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투퀴디데스 등 동시대인들은 스파르타군을 분명히 헬라스 최강의 강군으로 인식하고 있는 마당에, 2500년 후의 후대인들이 스파르타의 군사적 굴욕들을 채굴해서 거품이라 하는 것도 부당한 일이다.[21] 그리고 마라톤 전투 테르모필레 전투 페르시아 전쟁에서 보인 소극적 대응 및 외교적 신뢰를 저버린 행보들 역시 그 교활함에 대한 비판으로써 "겁쟁이 같은 모습을 보였다" 라는 비판이 가능할 수야 있겠지만 이는 '스파르타의 정치외교적 노선에 대한 비판'이다. 당연히 스파르타의 군사적 역량, 특히 군인들의 용감함이나 싸움 실력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의 영역에서 다뤄져야 하는 것이다. 풀어서 말하자면 스파르타의 군대가 전장에서 보여준 모습이 대단히 강력하고 용감했음은 동시대인의 기록을 비롯한 온갖 출처에서 분명히 확인되는 것이다. 다만 그 군사력을 마음껏 행사할 수는 없는 것이 스파르타의 국력이 가진 한계였기에 국가의 정치, 외교, 대전략적 행보는 어찌보면 교활하고 비겁해보일 때도 있을 정도로 조심스러웠던 것도 맞다. 하지만 국가적 행보에 대한 평가를 그대로 군사력, 전사들의 용맹성에 대한 평가에 적용할 수는 없다. 물론 영화 300 경우는 워낙 터무니없는 과장이니 굳이 진지한 논의에서 꺼낼 필요가 없는 이야기다. 소극적 대응도, '외교'라는 면에서 보면 차라리 교활하다고 욕할 순 있어도 겁쟁이라 욕할 순 없는 것이다.[22] 상식적으로, 국제 전쟁에서의 소극성은 외교적 신뢰의 문제이지 용감하고 겁 많고의 문제는 당연히 아니다. 요컨대, 영화 300 같은 과장된 스파르타 전사 이미지는 분명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동시대인들이 스파르타군에 보낸 찬사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비록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하기는 했으나, 그들이 맹주 노릇을 하며 일군 문화와 사상, 사치에 버금갈 재산 등이 축적되어 퍼지자 경제적인 사치를 오랫동안 접하지 않았던 스파르타는 오히려 아테네의 문화에 점점 빠져들어 초심을 잃었다. 특히 아테네가 민주정을 계속 나아갔던 반면, 스파르타는 과두정이라는 정치체계와 동맹국들 간 신임을 깨뜨리고 아테네보다 더한 행패를 부렸다. 결국 동맹국들도 반발하여 등을 돌리는 것도 모자라 오랫동안 문제시되었던 메세니아와 같은 지배한 국가 시민들에 대한 불평등이라는 내부적인 문제로 멸망을 자초했다.

2.6. 몰락


결국 스파르타가 패권국이 된 뒤 1년 만에 아테네는 민주정을 복구했고 스파르타가 패권을 쥔 지 고작 11년 만에 보이오티아의 맹주이자 오랫동안 스파르타의 동맹이었던 테베,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2인자였던 코린트가 손을 잡고 민주정 복구 이후, 제국까지 되돌리고자 했던 아테네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여 스파르타에 대항해 코린토스 전쟁을 일으켰다.

이는 스파르타가 패권국이 되면서 기존의 동맹국들까지 차별하자 반발했기 때문이었다. 스파르타는 이때에도 어쨌든 지상전에서는 우위를 점했지만, 돌아온 아테네에게 해상전에서 다시 완패를 맛보고 패권국으로 거느리던 여타 폴리스들이 아테네에게 붙어 2차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는 것을 막지 못해 페르시아에게 중재를 간청했다. 이후에도 스파르타에 반기를 든 세력은 곳곳에서 나타났고 이에 각지에서 정신없이 싸우다가 끝내 스파르타는 테베군에게 완패했다.

그 절정은, 여기서 써먹은 사선대형전 부대원이 동성애자로 이뤄진 것으로 유명한 신성부대(Sacred band)[23]가 나선 것으로 유명한 에파미논다스 레욱트라 전투. 테베군이 우익 대신에 좌익 병력을 두텁게 한 방진에 스파르타군 우익은 말 그대로 궤멸적 피해를 입고 말았다. 직후 반 테베 세력과 힘을 합쳐 반격을 시도했으나 에파미논다스의 군단에 야습을 허용해버려 1만의 보충병과 잔여 병력마저 모두 날아갔다.

사실 신성부대의 파워 외에도 더욱 중요한 것은 테베군이 무식하게 그 당시 정공법으로 덤비던 스파르타의 전술을 역이용한 전법을 썼다는 것이다. 레욱트라 전투에서 스파르타는 중보병들을 12겹으로 평평하게 배치하고 정예를 우익에 놓는 그 시대의 일반적인 진형으로 전투를 했는데 테베군은 이걸 타파하기 위해 거꾸로 좌익을 50겹으로 짜고 신성부대에 기병까지 곁들이는 동시에 약한 쪽이 적과 부딪히는 걸 늦추고자 우익으로 갈수록 뒤쪽으로 기울어진 사선대형을 선보였다.[24] 스파르타의 정예 병력이 모여 있는 우익을 뚫기 위해 전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발상까지 뒤집었던 것. 이것이 혁신적인 전술인지, 아니면 당시 전술을 잘 활용한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나 어쨌든 테베의 전술적인 시도는 성공적으로 먹혔다. 테베 신성부대를 포함한 스파르타의 우익을 깨기 위한 의도로 몰빵된 강력한 좌익이 스파르타의 우익을 먼저 해치워버리자 상대적으로 약한 중앙과 스파르타의 좌익도 함께 우수수 무너져내려 버렸다. 이것이 바로 상술된,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테베의 명장 에피메논다스의 사선대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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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 군사적 원인

시대가 지나면서 점점 기존의 중보병 개개인의 전투력보단 전술의 중요도가 커지면서 스파르타처럼 굳이 모든 것을 희생하며 병사 하나하나를 인간병기로 만들 필요성이 없어져 갔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고집스럽게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다가 결국 레욱트라 전투에서 그 대가를 치렀다.

당시 테베인들은 스파르타식의 훈련과는 거리가 먼 시민들이었기에 개개인의 전투력 수준은 스파르타인들에 비해 떨어졌다. 하지만 단지 좌익에 물량을 집중한다는 간단한 아이디어로 테베군이 스파르타군의 우익을 붕괴시키고 배후로 돌아 협공함으로써[25] 스파르타군을 무너뜨린 것이었다. 테베도 신성부대만큼은 스파르타에 필적할 정도로 훈련을 받았지만, 그 숫자는 최대 300명에 불과했다.[26] 하지만 에파미논다스가 고안한 사선진에 의해 최정예 부대가 순간적인 물량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붕괴되고, 이것이 결국 스파르타 진영에 모랄빵을 일으켜 스파르타군이 패배하는 원흉이 됐다.

사실 이 전투는 정상적으로 진행됐다면 오히려 스파르타가 이길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상술한 각주에서 나오듯이, 사선진은 결국 주어진 병력을 한쪽에 몰빵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만약 스파르타의 좌익과 중군이 테베의 우익과 중군을 박살내고 혼자 돌출된 좌익을 애워싸 박살내버렸다면 개개인의 숙련도는 여전히 스파르타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정예인 우익이 물량차로 밀려나는 것을 본 좌익과 중군은 자기들끼리 도망치는 추태를 보였고, 결국 전쟁의 패배로 직결됐다.

더구나 이 전투에서 스파르타군은 왕인 클레옴브로투스(Cleombrotus)가 죽든지 말든지 지들끼리 도망치는 추태를 보이기까지 하는 등 이미 몰락하고 있었다. 본래 스파르타의 법률이면 이들을 다 처형해야 했으나, 극심한 인구 감소에 시달리던 당시 스파르타는 도망자 처형 법률을 시행하지 못할 정도로 막장이었다. 이미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남은 시민이 3000명인 수준이니 100명의 목을 쳐도 전 시민의 3%의 목을 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처했다.

게다가 고대 이래로 스파르타의 성인 남성 인구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폐쇄적이고 가혹한 사회구조를 유지하다 보니 외부에서 들어오는 이주민은 없고, 받아주지도 않았고[27], 영아 살해와 유기도 빈번하게 벌어지고, 끝없는 전투로 계속 인적 자원이 소모되며, 워낙 비싼 아고게 비용을 감당 못해서 두눈 시퍼렇게 뜨고 시민권이 박탈되어버리는 일도 빈번했기 때문에 시민의 수가 갈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테베에 패배할 무렵, 스파르타 중보병의 핵심인 '스파르타 완전시민(스파르티아티코스)'의 숫자는 페르시아 전쟁시의 10분의 1 정도인 1천여 명 정도에 불과했다. 이미 전설적인 스파르타인들은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 나머지는 이런저런 편법으로 끼워넣은 다른 계층의 구성원들이었다. 주로 스파르타 완전시민(스파르티아티코스)에서 몰락한 반자유민(페리오이코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2.6.2. 경제적 원인

2.7. 헬레니즘 시대

이런 식으로 그냥 쇠퇴해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헬레니즘 시대엔 아기스 4세와 클레오메네스 3세가 고대 스파르타 체계의 복구를 위해 복고적 개혁을 시도했다. 시민의 숫자를 채우기 위해 일정 액수 이상의 돈을 낸 제2계급이나 노예들을 시민으로 삼는 식으로 스파르타 제1계급의 수를 채우려고 했다. 재산 공유, 공동식 등 전통적 풍습의 부활을 내건 이 개혁은 일시적으로 성과를 올렸지만 결국 귀족들의 반발과 마케도니아의 개입으로 실패했고 아기스 4세는 폐위된 후 사망했다. 클레오메네스 3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치하의 이집트로 망명 갔다가 그곳에서 일어난 내분에 휩쓸려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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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스파르타의 왕들은 아직 그 명성이 자자했던 스파르타 군대의 전통을 살려 외국의 부유한 군주들이 주는 돈을 받고 자국민들을 외국에서 용병으로 일하게 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이런 스파르타의 용병 정책은 주로 이집트 같은 부유한 나라에서 자주 쓰였다. 스파르타의 아게실라오스 왕은 이집트로 군대를 이끌고 파견되어 이집트의 넥타나비스 왕을 도와 이집트의 반란군 10만 명을 쳐부수어 넥타나비스 왕으로부터 230탈렌트를 받았다. 참고로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1탈렌트는 노 200개가 달린 삼단 노선의 노꾼들을 1개월 동안 고용할 수 있는 큰 돈이었다. 이 방법은 그럭저럭 효과가 있었는데, 실제로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스파르타인 용병 대장인 크산티푸스는 카르타고가 주는 돈을 받고 카르타고 군사들을 훈련시켜 로마군을 쳐부수고 집정관인 레굴루스를 사로잡는 전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렇게 국력이 다시 강성해진다 한들 그리스 폴리스 국가들과는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의 자릿수가 다른 헬레니즘 국가들에겐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헬레니즘 시대의 스파르타는 기껏해야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지역 강국에 불과했으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마케도니아 사이에서 줄타기하면서 연명하는 게 한계였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점은 마케도니아 필리포스 2세 알렉산드로스 3세가 정복 활동을 벌일 때 스파르타를 굳이 정복하려 하진 않았다는 점이다.

왜 그랬는지는 확실치는 않으나, 정복 군주들이 소위 생각하는 굳이 정복해보았자 나오는 게 없어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스파르타는 군사들이 정예병이었다는 것만 빼고는 지나치게 검소한 생활만 추구한 나머지 문화적으로도 후진적이었고, 농업을 메세니아에 의존해버린 탓에 그들이 독립한 뒤에는 농업 기술도 형편이 없었다. 거기다 스파르타를 정복해서 군사로 쓴다고 한들 이미 인구 수가 적은 데다가 개개인의 전투력은 뛰어나도 집단으로 움직이는 훈련도 부족했다. 알렉산드로스와 필리포스 2세와 같은 정복 군주 입장에서도 '변두리에 있는 작은 나라인데 먹어보았자 나오는 게 없고 그냥 놔두자.'라는 식이었을 것이다. 굳이 병사들을 희생해 가면서 볼품없는 땅을 빼앗아 보았자 헛수고인 셈이다.

아무튼 이때의 개혁 때문에 공동 식사 등의 리쿠르고스 체계가 복귀하고 잔존하는 데 성공했고 로마 시대까지도 이어졌다.

2.8. 로마 제국 시대와 그 이후

마케도니아 전쟁 당시 스파르타도 다른 그리스 폴리스들과 함께 로마 공화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통치에 반발한 코린트를 철저히 말살해 본보기를 보였지만,[35] 한때 페르시아를 상대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패권을 다투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역사를 높이 평가했으며 이들 두 도시에게는 속주세 면제라는 혜택을 주었다.[36] 이 혜택은 그리스 애호가였던 네로가 그리스 전역으로 확대하나 베스파시아누스가 원상복귀 시켰는데 그때도 이들 두 도시는 꾸준히 제외됐다.

로마 치하에서 클라우디우스 가문 클리엔테스였던 스파르타는 클라우디우스 가문 소속이었던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를 통해 동방에서 거의 유일하게 아우구스투스를 지지했기 때문에 기존의 역사적 명성에 더해 황가의 가장 친밀한 맹방 중 하나로 대우받았고 스파르타를 지배하게 된 에우리클레스 가문은 당시로서는 드물어진 동맹국 왕가로 깍듯이 존중받았다. 군사력 전통도 장식품이 된 건 아닌지라 스파르타는 꾸준히 로마군에 보조병을 공급했으며, 카라칼라 황제 같은 경우 아예 스파르타 보조병으로 구성된 '라코니아 대대'를 따로 편성했을 만큼 스파르타의 인재들은 우수한 병력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스파르타인들은 다소 굴욕적인 처지에 놓이기도 했는데, 스파르타가 '특이한 생활 양식을 보존하고 있는 관광지'로도 각광받은 것이다. 예를 들어 아고게 문서에서 언급하는 소년들의 채찍질 버티기 대회 같은 것이 로마 제국 시대에는 명물 구경거리 취급을 받았다.

3세기의 위기를 극복한 4세기 초의 스파르타는 일반에 흔히 알려진 스파르타의 이미지인 가혹한 사회 풍습과 무예로 유명한 폴리스가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의 종교 문화를 온전하게 유지하면서 거기에 더해 로마 제국의 영향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유입된 문화와 학문, 부의 지역적 거점이기도 했다고 한다. 비록 어마어마한 대도시는 아니지만 문무 다방면으로 발전한 도시가 된 스파르타를 두고, 스파르타 출신자인 아우소니우스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이런 기록들을 남긴 소피스트 리바니우스[37]는 '과거로부터의 덕망 높은 도시'라는 표현을 쓰며 제법 후히 평가했다.

하지만 4세기 말 이런 스파르타의 마지막 불꽃은 끝이 나고, 동로마 제국 시대가 되자 동로마를 도와 서고트족과 싸우다 396년 알라리크에게 도시가 약탈당하며 스파르타는 몰락하고 만다. 7세기에 슬라브인들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이르자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어 소규모 마을로 전락했고, 주민들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다른 대도시들로 이주한 듯하다. 가까운 곳에 위치한 중세 시대 펠로폰네소스 반도(모레아)의 수도 미스트라스가 성장하면서 거의 버려진 상태까지 갔다가, 후술하듯 그리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1834년에 재건됐다.

2.9. 현대

Σπάρτη(스파르티)

현대의 스파르타는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 후 1834년 그리스 초대 국왕이었던 오톤 왕의 칙령으로 고대 스파르타가 자리잡고 있던 터에 재건된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주 라코니아 현[38]의 현청 소재지로 인구는 3만 5천 명이고 이 중 읍내(?)에 1만 7천 명 정도가 거주한다.

옛 라이벌 아테네가 지금도 그리스의 수도이자 최대도시인 것과는 달리[39] 현대 스파르타는 그냥 지방 중소도시, 아니 사실상 마을 수준이 됐다. 전 세계인이 알고 있는 스파르타임에도 불구하고 관광지로도 그다지 각광받지도 못하고 있는데 현재의 스파르타에는 가도 딱히 구경할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40] 이는 고대 스파르타인들이 지나치게 검소해서 대규모 건축물이나 기념비를 거의 만들지 않았으며 구경거리가 될만한 문화유산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읍내는 그럭저럭 볼거리가 좀 있는데 올리브 박물관도 있고 사진 찍기 좋은 레오니다스의 동상도 있다. 그리스답게 아크로폴리스에 고대 극장 등의 유적도 좀 있는데, 이 유적들은 모두 로마 시대에 세워진 것들로 아테네나 페르시아와 싸우던 그 시절 스파르타에서 만든 유적은 아니다.

현대 스파르타 인근에 동로마 제국 당시의 요새인 미스트라스 성채(Μυστράς)와 콘스탄티노스 11세 시절에 부흥했던 모넴바시아(Μονεμβασιά)의 유적이 자리 잡고 있어 이 유적들을 구경하려는 관광객들이 스파르타에 숙소를 잡는 경우가 많다.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지키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하고 동생들을 모레아로 보내 분조(分朝)를 경영하게 했기 때문에 이 시대에 모넴바시아가 번영했던 것이다. 그러나 동생들인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 토마스 팔레올로고스는 제국이 멸망한 후 서로 싸웠고 형인 디미트리오스가 오스만 제국을 불려들어 1460년 모레아도 점령되어 동로마 제국은 이때 완전히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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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 사람들은 자신들이 끝까지 동로마 제국의 명맥을 이었다고 자랑스러워한다.

왕국시대(1832-1923, 1935-73) 그리스 왕세자(디아도코스 διάδοχος)의 칭호가 바로 스파르타 공(Duke of Sparta)이었다. 그러나 스파르타 공이라는 작위의 유례가 없었고 당시 그리스 법은 왕 이외의 그리스 시민에게 작위를 수여하는 일에 법적 근거를 제공하지 않았으므로 영국의 웨일즈 공 등과 달리 단지 관례적인 칭호에 그쳤다.

정치적으론 그리스에서 가장 보수색이 짙은 도시로, 좌파 시장이 한 번도 배출되지 않은 곳이며, 1974년의 국민투표 당시 군주제 유지 결과가 더 많이 나왔던 도시이기도 했다. 2012년 총선에서도 신민주당 황금새벽당 득표율이 전국 최고를 기록했다. 하지만 2015년 총선에서도 변함없이 황금새벽당이 10%의 득표율을 올리긴 했고, 신민주당이 1위를 하긴 했지만 신민주당의 득표율은 32.7%에 그쳐서 전국 최고 득표율을 기록한 동네는 아니다. 한편으로 사회당의 득표율이 11.6%를 차지해서 가장 높은 득표율이 나왔는데 그만큼 전국적으로 사회당이 몰락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 전에 후보조차 내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나은 편이다. 또 스파르타가 속한 라코니아 현은 2015년 그리스 구제금융 국민투표에서도 구제금융 찬성표 비중이 가장 높게 나왔다.

3. 고대 도시국가 시절

3.1. 사회

다른 무엇보다도 스파르타의 이름이 역사에 남은 것은 그 제정신이라고 할 수 없는 독특함과 잔혹함으로 악명 높은 사회 체계이다. 이런 정신 나간 제도는 리쿠르고스에 의해 확립됐는데 그에 대한 전기를 쓴 플루타르코스조차도 워낙 전설적인 인물이라 실제 인물인지도 의심스럽다고 할 정도다. 현재까지도 그 혹독한 훈련 방식과 강인한 정치력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예를 들어 '스파르타식 교육'은 혹독하고 집중적인 교육을 의미하는데, 주로 현대 대한민국 사교육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영어로 Spartan은 스파르타인을 가리키지만, 스파르타인들이 사치를 멀리하고 검소하게 생활했다는 데에서 검소하고 엄격한 의미도 있다. Spartan lunch라고 하면 과일 샐러드 우유 정도의 간소한 점심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전통적으로 고령자들을 우대했다. 고령자란 끊임없이 전쟁이 반복되는 스파르타인의 삶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만큼 강하고 지혜로운 전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일화로는, 올림피아 경기 때 한 아테네 출신 노인이 자신이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을 때 이미 자리에 앉아 있던 시민들은 그 노인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거나 야유를 보냈다. 이야기에 따라서는 '누가 자리 좀 양보해줘라.'라는 말이 관중석 곳곳에서 나오고 있었지만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노인이 스파르타인들이 앉은 응원석에 갔을 때 그곳에 앉아 있던 스파르타 젊은이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서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심지어 나이든 사람들 가운데서도 일부가 일어나기까지 한 이 상황에서 자리에 앉아 있던 모든 시민들이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노인이 말하기를, "모두가 올바른 행동이 무엇인진 알지만, 그것을 실천할 줄 아는 사람은 스파르타인들뿐이구나." 이 장면은 THREE라는 그래픽 노블에서 그대로 언급된다. 영화판에서 사신의 팔을 자르던 바로 그 장면에서 한쪽에 있던 스파르타인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비슷하게 전사를 중요시했지만 고령자는 이미 늙고 쇠약해 싸울 수 없다며 천시했던 흉노와는 반대라고 할 수 있다. 농경에 종사하는 대규모의 노예로 경제적 부양을 받을 수 있었던 스파르타와는 달리, 흉노는 유목만이 겨우 가능한 거칠고 척박한 황무지가 생활권이었기 때문이다.

3.1.1. 계급 제도

파일: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인구구성.png
기원전 5세기 중엽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기.[41]
스파르타는 1계급의 완전시민 스파르티아타이(Spartiates), 2계급의 주변인과 항복한 자들인 페리오이코이(Perioeci), 3계급의 노예 헤일로타이(Helots)로 유지됐다. 그 유명한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는 스파르타 시민 계급은 전체의 5~10% 정도밖에 없었으며 이들은 오로지 정치와 군사에만 참여하고 헤일로타이들의 봉양으로 먹고 살았다.

2계급인 페리오이코이는 시 외곽지에 사는 피지배민들로 1계급에겐 금지된 일인 상공업에 종사하며 시민권이 없고 예비군으로서 군역을 졌다. 헤일로타이처럼 대놓고 업신여김을 받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유년 시절부터 치열하게 교육받을 의무도 없었다. 그래서 스파르타 내에서는 그나마 인간답게 살았던 계급이기는 하지만 참정권은 없었다. 물론 완전시민이라 해도 돈이 없다거나 하는 이유로 제2계급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스파르타 입장에서는 헤일로타이와는 다르게 유사시 병력으로 쓸 수 있고 반란의 위협도 적었던 데다가 상공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무기 공급 등에 있어서 중요한 계층이었다. 그래서 제3계급 헤일로타이에게 잔혹한 억압을 자행했던 거와는 다르게 나름대로 자치권을 주었고 해외로 여행갈 수 있는 특권도 주었다. 그래서 스파르타이아이의 수가 급속히 줄면서 이들이 사실상 스파르타의 병력 공급원 역할을 했다. 스파르타 입장에서는 단련도가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헤일로타이를 내보내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이들은 메세니아가 떨어져 나가면서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던 헤일로타이가 해방된 이후의 스파르타를 떠받친 계층으로, 메세니아가 떨어진 이후로도 스파르타가 이름값이라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들 덕택이었다.[42]

3계급인 헤일로타이는 농업에 종사하며 스파르타인들을 위해 토지 경작의 의무를 졌다. 이들 헤일로타이는 모두 국가 소유였으며 스파르티아타이에게 분배됐다. 이들 헤일로타이는 가정을 꾸릴 권리가 있었으며 국가로부터 생산물을 바치거나 지급받아 그걸로 삶을 영위했다. 2계급과 3계급의 숫자가 많았기 때문에 스파르타는 지속적으로 이들의 숫자를 갖은 술수를 통해 줄이려고 탄압을 가했다. 밑에 나오는 스파르타의 사회는 당연히 1계급인 스파르티아타이 얘기들이다.
3.1.1.1. 노예 계급: 헤일로타이
이러한 극단적인 군국주의적 사회 제도는 스파르타의 사회에 기반을 두는데, 기회만 된다면 들고 일어날 생각을 하는 노예들인 헤일로타이의 숫자가 스파르타 시민들의 몇 배를 넘었다.[43] 다른 지역의 폴리스인들과 만난 헤일로타이들은 "스파르타인들의 살점을 뜯어 먹고 싶다!"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들을 억압하는 스파르타인들을 증오했다. 그 사정을 알고보면 충분히 그럴 법도 하다. 헤일로타이의 나라 메세니아(Μεσσηνία)[44]는 스파르타 서쪽에 있는 이웃나라였으나, 기원전 7세기에 스파르타에 정복 당했다. 그리고 그 뒤로 수백 년 동안 스파르타에게 말도 못 할 학대를 받게 된다. 가장 많은 비중이 메세니아(Messenia)이기 때문에 메세니아만 언급되나 헤일로타이에는 라코니아(Lakonia)라는 도시국가도 포함되어 있다.

스파르타는 형식상 메세니아-라코니아를 완전히 멸망시키진 않았으나, 폴리스 전체를 노예로 삼아서 스파르타의 예속 하층민 계급인 헤일로타이로 만들었다. 헤일로타이들은 토지 생산물의 절반을 세금으로 바쳤으며, 스파르타인들은 이 세금 덕에 농사나 상업 대신 군사 훈련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는 그리스 전체를 놓고보더라도 극히 특이한 사례였는데,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 노예는 어디까지나 외부인이었고, 같은 그리스인들은 서로를 노예로 삼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는데, 스파르타는 동족을 사실상의 노예로 삼았기 때문.[45]

하지만 스파르타에게 점령된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단순한 경제적 착취 뿐만이 아니었다.[46]
3.1.1.1.1. 인간 사냥
심지어 스파르타 청년들의 전투훈련 일환으로 헤일로타이 가운데 힘센 이들을 학살하게 했다. 이런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해 최고 관직인 에포르는 해마다 취임 시에 헤일로타이에 대한 선전포고를 했는데, 이는 전쟁 시의 살육은 죄가 아니라 오히려 전공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스파르타의 노예제는 그리스에서 가장 가혹했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노예는 주인의 재산이었으나 헤일로타이는 국가의 소유물이었기에 국가에 의해 개개의 주인에게 할당되었으며 주인은 그들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었다. 특히 다른 폴리스의 경우 노예라 하더라도 때때로 자유를 얻을 수 있었으나 헤일로타이에게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 김진경 교수 저술) 고대 그리스의 영광과 몰락 84쪽.
'형식상으로는' 멸망하지 않았기에 스파르타의 신년 행사는 헤일로타이의 나라 메세니아에 대한 전쟁 선포식이었다. 이를 '크립테이아(고전 그리스어:κρυπτεία, 라틴어: Krypteia)' 라고 했다. 형식상 전쟁 상태였기 때문에 수시로 스파르타인들이 몰래 들어가서 헤일로타이를 이유 없이 죽였다. 소설 1984에서 당이 피지배 계급인 프롤을 관리하는 방식처럼 주로 반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는 강인하고 똑똑한 헤일로타이만 골라 죽였다고 한다.

한번은 용기가 뛰어나다고 인정받은 2천 명이 넘는 헤일로타이들에게 해방의 상징으로 화관을 씌우고 여러 신전으로 행진을 시킨 적이 있었는데, 그 뒤 그 헤일로타이들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거기다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 등 국가적 위기 상황 때[47] "우릴 도와 열심히 싸워주면 메세니아를 독립시켜 주겠다." 약속을 하여 헤일로타이들은 독립을 위해 스파르타를 도와주었으나 정작 전쟁이 끝난 후에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전쟁에 큰 활약을 한 헤일로타이 부대를 기습하여 전멸시키는 등 추잡한 짓을 하였다.[48] 너무 힘이 세다던지, 특출한 리더십을 보여서 반란을 획책할 우려가 있어 보이는 헤일로타이를 밤중에 몰래 급습해서 죽여버리는 일도 잦았다. 골 때리는 점은 이러한 '급습'이 보병 양성 과정에서 두각을 드러낸 일부 스파르타 젊은이들에게 일종의 '수월 교육'을 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실제로 스파르타가 그리스 폴리스들 중에서도 최강급의 중보병 전력을 보유하고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과실을 독점하지 못한 채 결국 빼앗기고 나라마저 망국의 길로 가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이 헤일로타이 학살이라고 봐도 될 정도. 아래의 차별 대우나 곡물 수탈 정도는 고대~근대에 이르기까지 드물지 않은 식민 지배 정책 중 하나였으나, 그중에서도 거의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수시로 식민지의 불특정 다수를 향한 테러(!)를 저지른 경우는 후의 무수한 식민 제국이나 정복 국가 중에서도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일단 대부분의 정복 국가가 이런 짓을 하지 않는 이유는 정치의 정자만 알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부작용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보통 식민지인에 대한 살인이나 약탈을 동반한 공격 행위는, 기본적으로 공포에 기반한 통치 전략의 일부다. 즉, '너희들이 반항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같은 경고성 행위이며, 다른 당근이나 공격의 수위가 조절되면 의외로 꽤나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불구대천의 원수마냥 절멸에 가까운 대규모 살육을 해서 아예 반란의 기반조차 못 되게 세력을 극단적으로 축소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 또한 심각한 부작용이 뒤따르고, 결국 그 대가를 비싸게 치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스파르타 마냥 어설프게 전멸도 아니고 사람들이 빡돌게 일부만 주기적으로 죽여버리는 것에 비하면 매우 잔인하고 비인간적이긴 해도 효과적이라는 평가가 가능할 정도였었으니 말 다 했다.

실제로 스파르타는 외부에 대한 효율적인 대규모 군사력 투사가 불가능했을 정도로 상시적인 반란 위협에 시달렸고, 나라가 망하고 두눈 뜨고 자기네 땅과 국가 기반을 날려먹고 그 데미지를 반영구적으로 안고 가야 했으니, 통치 전략으로서 이딴 짓거리가 얼마나 막장인지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거의 다루지 않지만, 과연 이런 식의 불특정 다수를 향한 살육이 곡물 생산이나 경제 시스템에 끼친 보이지 않는 악영향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실제로 동시기의 아테네가 부강한 국력과 교역을 통해 몇십만 단위의 인구수를 보유한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고 마케도니아의 대두 이전에 몰락 상태에서 화려하게 부활까지 했던 것에 비하면 스파르타는 전성기 시절에도 인구수나 경제력 측면에서 우위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은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스파르타는 지배계층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인구수가 크게 늘지 않고, 오히려 전쟁이 지속되면 될 수록 줄어들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아고게 같은 막장 교육 정책 + 수시로 반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식민지 진압과 당연히 비슷하게 박살날 수밖에 없는 생산력 저하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금이 아닌 강철 화폐라고 해도, 전통적인 화폐 이론의 영역에서도 충분히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고대 경제가 화폐 자체의 지불 능력보다는 교환 경제나 신용을 바탕으로 한 경제가 차지하는 영역이 컸다는 점을 봐도 그렇다. 즉 각 국가가 얼마나 금이 많이 함유된 화폐를 지녔나보다는, 그 국가가 가진 생산력과 그로 인해 생성된 재화를 얼마나 넉넉히 보유하고 있으며, 또 타국과의 거래 활동에서 거래의 대가를 보증할 수 있는 경제력과 신용도를 갖췄는가도 생각해야 한다.[49] 아테네는 그런 의미에서 후에 신대륙 이전까지 유럽 최대의 교역로였던 지중해의 해상권을 한시적으로나마 장악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발달한 해군력과 상업력을 보유해 경제력은 물론이고, 각 국가 간 무역에서의 신용도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스파르타는 전통적인 내륙 국가로서 아테네에 비빌 정도의 경제력을 위해서는 농업 경제의 발달과 생산력, 곡물 보유, 혹은 말, 철과 그 외의 상품들을 생산할만한 여력을 발휘해야만 했을 텐데, 모든 것이 군사력에 몰빵되었다시피 한 극단적인 군국주의, 그리고 그 군사력조차도 유지하기 힘들 정도 내분이 심한 정치적인 상황, 그리고 여기에 뒤따르는 농업 생산력에 대한 피해, 상업 및 교류의 부족이 미친 영향력이 실로 어마어마했을 것이다.[50]

교역이 가능한 상태에서 국가가 충분히 잉여 생산물을 생산할 여력이 있으면 군비 확충과 재정비는 물론이거니와, 교역과 외교 등에도 넘치는 생산력을 바탕으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데 스파르타가 그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은 이런 식민지 내부의 반감이 생산력 저하로 연결되었을 공산이 크기 때문.
3.1.1.1.2. 차별 대우
스파르타인과 헤일로타이를 구분하기 위해서 헤일로타이들은 개가죽으로 만든 우습게 생긴 모자를 쓰고 다녀야 했다. 혼혈을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헤일로타이와의 결혼도 엄격히 금지됐다. 이는 외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헤일로타이를 교육에 활용하기도 했는데, 일부러 헤일로타이를 잡아오고 나서 을 잔뜩 먹여 취해서 정신을 못 차리고 비틀거리는 헤일로타이를 놀려댔다고 한다.[51] 그리고 '술을 너무 마시면 이렇게 추악하게 되니 마시지 마라'라는 교훈을 얻는 것이다. 또한, 천박하고 우스꽝스러운 춤과 노래를 강요하는 등 온갖 굴욕을 줬다. 그래픽 노블 THREE에서 나온 모습(위에서 6번째)
3.1.1.1.3. 저항
그리스내 다른 폴리스들도 이러한 속주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스파르타 사회의 이러한 차별과 인간 사냥 등은 도를 넘을 대로 넘은 짓이었다. 이따위 짓을 당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지배를 당하던 메세니아 인들도 치를 떨었고 수백 년 동안의 지배에도 끝끝내 굴종하지 않고 몇 번이나 스파르타에 항거했다.[52] 기원전 650년경 제2차 메세니아 전쟁의 지도자로 알려진 전설적인 영웅 아리스토메네스가 한 예다. 하지만 가난한 노예의 도시국가가 도시의 삶 전체가 전쟁 준비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사실상 주민 전체가 전투 참여가 가능한 인간 병기들인 스파르타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고[53] 그때마다 무참하게 진압당했다. 하지만 스파르타가 코린토스 전쟁에서 테베에 참패하자, 승리한 폴리스들은 스파르타의 국력을 깎아낼 목적으로 메세니아를 스파르타에서 떼어내서 독립시켰고, 마침내 독립한 메세니아는 타 폴리스 지원 아래 스파르타에 대한 모든 식량과 물자 운송을 중지했다.[54]

그동안 메세니아 착취와 군사력에만 신경 쓴 스파르타는 메세니아가 독립하자 본토 농지들도 소수의 귀족들이 독점했고 농사나 기술 개발에 무관심한 결과, 식량 생산은 타 폴리스에 비해 형편 없었고 돈이 없다 보니까[55] 무역을 통한 식량 조달도 어려워졌다. 자연히 스파르타는 만성적인 식량 부족과 양극화로 인해 분열과 대규모 기아 사태에 직면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장점인 강력한 중장보병 양성도 어렵게 됐다. 이는 당연히 군사력 약화로 이어졌고, 그 이후로도 스파르타의 국력은 두 번 다시 코린토스 전쟁 이전의 상태를 넘어서지 못했다.[56]

이후로 자체적인 개혁과 제2계층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국력을 회복했지만 메세니아와 코린도스가 떨어져나간 이상 한계가 명확했고, 때문에 스파르타는 마케도니아와 로마가 각각 그리스 전역을 제패하기 이전까지 수백 년 간 메세니아를 다시 정복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메세니아의 강력한 저항으로 모두 실패했다. 특히 메세니아는 스파르타에 쌓였던 원한이 워낙 컸던 터라 독립 이후에는 로마에 병합되기 전까지 계속 스파르타를 적대하며 스파르타가 참여하는 동맹에는 절대 참여하지 않았다.

다만 메세니아의 독립 후에도 헤일로타이 계급은 잔존하였는데 메세니아는 해방되었지만 라코니아는 해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메세니아가 해방돼서 스파르타가 몰락했다기 보다는 라코니아라도 재확보했기 때문에 스파르타가 국체라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57]
3.1.1.2. 그 외 특수 계급

3.2.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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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의 정치 체제
스파르타식 교육에 가려지긴 했지만, 오히려 이쪽이야말로 진정으로 위대한 유산일 것이다.

흔히 아테네의 민주정과 비교되어 스파르타는 과두정이라고 설명되고, 실제로 스파르타인 스스로도 민주정이라 자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스파르타의 정치체제는 비교적 많은(최소한 당대의 국가 치고는 높은 비율의) 인민들의 정치 참여가 유도되면서도 높은 안정성을 지닌 체제였다.

스파르타의 권력은 크게 3가지로 쪼개져 있었는데, '과 집정관', ' 원로원', '민회'가 그것이다. 왕은 그 자신부터가 원로원의 일원이며, 특이하게도 2개의 왕가에서 2명의 왕이 뽑힌다. 따라서 서로를 견제하게 되어 참주정으로의 폭주를 막는다. 왕의 권한은 민회에서 뽑히는 다섯 명의 집정관(에포로이)에게 견제되다가, 시대가 지나면서 차츰차츰 집정관에게 권력이 넘어간다. 원로원은 실질적으로 가장 발언력이 강하던 곳으로, 민회에서 종신직으로 뽑힌 60세 이상의 의원 30명으로 구성된다. 예외는 그 자신부터가 의원인 왕들이다. 민회는 법안을 인준, 거부, 동맹, 전쟁 선포, 조약 체결을 결정하는 곳으로, 원로원 의원을 선출하며, 매년 집정관을 뽑는다.

이렇게 하여 스파르타는 왕정의 요소(왕과 집정관), 귀족정의 요소(원로원), 민주정의 요소(민회)가 혼합되어 서로를 견제할 수 있게 되어, 인민의 정치 참여와 정치적 안정성을 동시에 갖추게 되었다. 물론 아테네에 비하면 인민의 정치 참여는 떨어졌지만, 후대의 로마인들도 스파르타와 유사한 혼합정 체제로 '안정성'과 '인민의 정치 참여'를 모두 누린 것을 본다면, 스파르타의 체제는 결코 무시당할 성질의 것이 못 된다.[58] 참고

3.2.1. 일반적 인식에 대한 반론

크세포논의 "라케다이몬 인들의 헌법"과 아리스토텔레스 "정치"에 따르면 에포로이는 결코 현대인이 생각하는 집정관(내각/행정부 각료)가 아니었다. 이들의 핵심 권한은 왕의 결정을 비토하는 것과 감사권, 그리고 왕을 두 명 이상 상시 따라다니면서 공증인 겸 감시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막강한 권한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힘을 못쓴 것으로 서술되는데, 민회에서 후보 중에서 추첨을 통해서 뽑혔기 때문이다. 후보의 숫자가 몇 배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많은 "가난한" 인물들이 뽑혔다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엘리트 중에서 뽑힌 것은 확실히 아니다. 임기가 1년에 불과하고 재임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전문성을 쌓을 시간도 없었고, 대다수는 경제적으로 취약했기 때문에 쉽게 세력가들에게 휘둘렸다고 한다.[59]

또한 스파르타에서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점은 소수의 부유한 여성들의 권력이 매우 강력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스파르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의 상당 부분은 아테네 출신의 철학자 크세노폰의 기록이다. 그에 따르면 당시의 스파르타는 소수의 불과 다섯 명의 여성이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들이 여성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스파르타의 상속 제도 때문이다. 스파르타는 다른 그리스 국가와는 달리 남자가 죽으면 그 아내가 유산을 상속했다. 만약에 과부가 죽을 때 아들들도 모두 이미 죽었으면,[60] 상속했다. 결과적으로 딸에 대한 상속을 몇 번 대를 거치면서 엄청난 부를 가진 손녀나 증손녀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61] 이러한 부유한 여성들은 스파르타의 토지 절반 가까이를 소유했다. 그리고 이 부를 이용해서 스파르타 왕조차 쥐고 흔들 수 있었다. 당시에는 중요한 정치 전투의 결정을 점을 쳐서 결정해야만 했는데, 자연히 제물로 바칠 가축이 많이 필요했다. 제사장의 역할을 했던 스파르타 왕으로서는 전쟁터에 한번 나가면 염소 100마리를 끌고 나가야 할 지경이었다. 자연히 왕 혼자서는 이러한 지출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이것을 부유한 지주 여성들이 대어주면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크세노폰은 물론 그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조차 이 점을 당시의 이웃 그리스인들이 얼마나 괴상하고 끔찍하게 여겼는지 서술했다.

3.3. 성인들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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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스파르타 경보병[62] 스파르타 중보병[63]
스파르타 남성들은 20세에 아고게를 졸업하면 30세까지 군대에 복무해야 했다. 30세가 지나면 가정을 이룰 권리가 주어지지만 그래도 저녁식사는 꼭 부대에서 해야 했다. 스파르타 남성들은 50세까지 전투에 참가해야 했다.[64]

결혼은 신랑과 신부의 가족들 간 중매로 이루어졌다. 결혼식은 형식적으로 약탈혼과 비슷하게 흘러갔다. 신랑이 혼담을 넣어 신부 집안이 이를 받아들이면, 신부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남자 옷을 입은 다음 어두운 방에서 신랑이 데리고 가길 기다렸다. 이 국가는 성인이 독신으로 사는 것을 금지했을 뿐, 누구하고 결혼하라고 상대를 지정해주지는 않았다.

일부일처가 기본이었으나 가끔 일부다처가 허용되었던 흔적이 보인다. 혼외 관계를 부정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훌륭한 전사의 피를 받기 위해 남편이 씨내리(대리부)를 구해오기도 했다.[65] 자식을 충분히 둔 늙은 남편에게는 아내를 젊은 남자와 이어주도록 권장했다고도 한다.

그리스 중보병 방진 중 그나마 전술적 기동이 가능했던 군대가 스파르타군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실제로 그렇기도 했다는 기록도 있는 걸 보면[66] 전술기동이 가능한 숙련된 병사를 길러내는 데는 성공한 것 같다. 즉 단순히 평균적으로 뛰어난 전사와 군인을 양성하는 시각보다는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을 신체적 정신적 금욕과 고행을 강제하는 교육으로 억제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주변국과의 지속적인 마찰을 버티는 것은 물론, 수적으로 비교할 수 없이 우월한 노예들을 실질, 정신적 공포 양면으로 끊임없이 억압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대신에 피정복민과의 동화를 끊임없이 거부하고 고립을 유지하며 교육을 천시하던 폐해는 결국 훗날의 몰락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로마군과는 완전히 정반대로서, 로마군이 처음부터 개개인이 다 전사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평범한 시민이 간단한 군사 훈련을 받은 뒤 군인이 되는 것을 상정하고 작전 계획을 짰기에 체계적인 군단 제도를 완성한 것은 물론, 전술과 전략도 최대한 연구했으며, 패배하면 그 책임은 적전도주나 명령거부 등 명백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이상 지휘관에게 있었으므로 지휘관들이 자신들의 무능력을 병사 탓으로 돌릴 수 없었다. 더군다나 로마는 군단병에게 보급을 최대한으로 해주었기 때문에 스파르타군은 트로이 전쟁[67]이나 테르모필레 전투 등에서는 대활약을 했지만 훗날 전술과 전략이 좀 더 발달하면서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게 됐다. 즉, 하나의 도시국가로 남아가기에는 스파르타 정도의 문명도 나름대로는 성립했다고 할 수 있으나, 다른 방식으로 거대한 문명을 일구는 로마와 비교하면 그 한계가 명확하다고 할 수 있다.[68] 또 하나의 도시국가가 아니라 패권국가를 지향하기에도 한계가 명확했다.

하지만 스파르타의 체제를 변호해주자면, 국가는 무장한 시민들의 공동체라는 개념은 스파르타인들만의 독특한 생각은 아니다. 아테네에서도 로마에서도 이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개념이다. 때문에 아테네의 자유로운 시민이란 스스로 무장할 수 있는 성인남성을 의미하였을 정도이다.[69] 심지어 미국은 지금도 헌법으로 시민의 무장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따라서 스파르타가 국가적 단위에서 성인 남성 한명 한명을 훌륭한 전사로 키워내려고 했던 것 자체는 틀린 판단이라고 매도하기가 힘들다. 이 개념 자체는 차라리 오늘날의 공교육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스파르타의 교육이 당대 기준으로도 가혹했다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70] 21세기의 관점에서 본다면, 공교육에서 문학, 수학, 외국어, 과학, 사회학, 예체능 등등을 가르치는 것은 올바를 수 있지만,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두들겨패면서 가르치고 낙오자를 사회적 불구자로 낙인 찍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결국 스파르타가 가진 결정적 문제점은, '무엇을 가르쳤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가르쳤느냐'의 문제였다.

3.4. 공동 식사

스파르타인들의 독특한 풍습 가운데 하나가 공동 식사다. 경제적 여건이나 지위를 가리지 않고[71] 15명이 한 조(피디티온(Phidition)이라고 한다)를 이루어 식사를 했는데, 이것은 단순한 식사 조가 아니라 함께 싸우는 전투 조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결원이 생겨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여야 할 때는, 기존의 조원들이 만장일치로 승인해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앞으로 밥도 같이 먹고 싸움도 같이 해야 할 테니.[72] 식사의 질은 복불복이었는데, 형편없는 빵과 검은 선짓국[73]으로 때울 때가 잦았으나 어떨 때는 괜찮게 먹기도 했다. 피디티온의 각 일원은 매달 납부해야 하는 물건이 있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보리가 약 73 kg, 포도주가 약 35 L, 치즈가 3 kg, 무화과가 1.5 kg 등이었기 때문[74] 그리고 식사 조에 이런 걸 낸다는 건, 당연히 이런 것들을 먹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검은 선지국은 워낙에 맛이 없기로 유명했는데[75] 어느 아테네인[76]이 먹어 보고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테네의 돼지가 먹는 게 이것보다는 낫겠소. 스파르타인들이 그렇게 용감한 이유를 알겠소! 이런 걸 먹고 사느니 죽겠다고 싸울 테니까!"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스파르타인이 "아테네의 돼지도 그 국을 10년만 먹으면 용감한 군인이 될 것이오!"라고 응수했다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다른 이야기로는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니소스가 이 유명한 요리의 맛이 궁금해서 스파르타에서 초빙한 요리사에게 만들게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디오니소스가 맛을 보고 역겨워서 뱉어버리자, 요리사가 "이 국을 맛있게 먹으려면 스파르타식으로 운동한 뒤, 에우로타스 강에서 목욕해야만 합니다, 전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검은 선지국은 어디까지나 평소의 식단이었고, 전쟁에 나가게 되면 오히려 살아 있는 산양과 닭 등을 끌고 가서 매일 직접 도살해 신선한 고기를 공급해 줬다고 한다. 곧 전장에 나갈 사람의 사기와 기운을 북돋아주기 위한 특식이라고 볼 수 있다.

3.5. 여성

군복무를 하지 않았고 가정을 지킨다는 이유로 역할이 다르다고 해서 신체 단련을 극한까지 하지는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스파르타 여자들 역시 건강한 몸으로 건강한 전사를 낳아 나라에 바치는 것이 의무였으며[77], 또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해서 창던지기 같은 군사 훈련이 포함된 신체 단련을 할 의무가 있었다.[78] 이렇게 운동으로 단련된 덕에, 스파르타 여성들은 미인으로 유명했다.[79] 여자들의 신체 단련은 첫 아이를 얻거나 폐경이 될 때까지만 의무였다. 그 다음엔 자유.

여자아이들이 입는 옷은 매우 짧았다. '페플로스'란 옷은 엉덩이를 간신히 덮을 만한 높이에 몸을 한바퀴 두를 수 있는 너비의 장방형 천 한 조각으로 이뤄져 있었다. 이 옷을 입는 방법은 자신의 왼쪽 어깨로 팔을 뺀 다음, 오른쪽 어깨 부분에 옷 양쪽을 이어서 매듭을 짓고 나머지 부분은 허리띠로 묶어 고정시키는 식이었다. 결국 자연스럽게 오른쪽 부분은 가슴부터 허리까지 노출되는 것. 당시 그리스인의 의복은 거의 이런 식이었는데, 페플로스는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단순하고 짧았던 것.

여성들의 의상(노출이 있으니 후방주의)
이 옷은 그나마 상당히 긴 편이다. 노출이 심한 것은 상단은 가슴, 하단은 허벅지에서 놀 정도로 짧다.

아테네인들이 스파르타 문화에서 가장 기겁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아테네에서는 여자들을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게 꽁꽁 가둬두고 있는데, 스파르타에서는 숫제 거의 다 벗고 길거리에서 돌아다니고 있으니.[80]

남자들은 군에 종속돼 살아가기 때문에 스파르타의 여자들은 고대 그리스 기준으로는 상당한 자유를 보장받았다. 아테네는 물론 다른 그리스 국가들의 경우 부인은 물론이고 특히 미혼 여성은 종교 축제일이나 장보기 아니면 집 밖으로 나올 수 없었지만, 스파르타에선 여자들이 마음대로 바깥에 돌아다닐 뿐만 아니라 운동 경기도 할 수 있었다. 에드가 드가 소년들에게 도전하는 소녀들(Petites filles spartiates provoquant des garçons)이 그런 상황을 묘사(상상)한 것.

사회가 이렇게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편이다 보니 여성의 발언권도 아테네 등 완전히 시궁창인 나라들과 비교하면 큰 편이었다. 참정권을 비롯해 몇 가지 제한은 있었지만 이것도 언제까지나 여성이라서 제한된 게 아니라 군복무를 하지 못해서 제한된 것이었다.[81] 그래서 남성들이 여성들 사이의 평판에 흠이 갈까 무척 노력했다고 한다. 사회적 영향력은 동시대 다른 폴리스 여성들에 비해 높은 편이었다고 봐야 한다. 일부러 잘못한 남성이 있으면 그에 대한 처벌로 여자들 사이에 세워 놓고 수치스러운 놀림을 듣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마초적 사회다 보니 꽤나 수치스러웠을 것.[82]

스파르타 여성들의 결혼 적령기는 성적 완숙기가 시작되는 18세부터였다고 추측된다. 이는 아테네 등 다른 그리스 국가들의 여성이 14세부터 결혼을 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스파르타인에게 결혼이란 가족과 가족, 재산과 재산의 결합이 아니라 건강한 시민(아기)를 낳을 수 있는 남녀의 결합이었기 때문. 임신과 출산을 시도할 몸과 마음의 준비가 되고 나서 결혼을 하는 편이 효율적이라고 간주되었던 듯하다.

결혼은 약탈혼/납치혼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현대적인 의미의 납치라기보다는 양측의 암묵적 동의하에 신랑이 신부를 몰래 취하는 형식을 띠고 있었다. 신부가 머리를 바싹 깎고 남자 옷을 입은 채로 어두운 방 안에서 기다리면, 밤에 남자가 방으로 들어와 신부의 허리띠를 풀고 신부를 안았다. 볼 일을 다 보면 신랑은 다시 막사로 돌아가고, 이후 낮에 신부를 신부 가족의 집에 데려다 주어 결혼을 완성했다고 한다.

결혼을 한 후에도 신랑 신부가 붙어 있을 시간은 없었다. 평생 군인으로 살아야 하는 스파르타 남자에게 가정은 잠깐 들르는 곳이고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거처는 군대 막사였기 때문이다. 국왕이라도 예외는 아니라, 왕비가 아닌 자기 조원들과 시간을 보내야 했다. 스파르타에서도 부부가 가끔씩만 성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장려했다. 부부가 가끔씩만 동침해야 아이가 생길 가능성도 높아진다고 보았기 때문. 반대로 잦은 성생활은 군인의 기력을 크게 떨어뜨린다고 간주하여 일부러 집에 안 보내는 것도 있었다. 허나 웃프게도 현대 의학으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오히려 성생활이 잦은 편이어야 아이가 생길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한다. 스파르타인의 생각은 완전히 틀렸던 셈. 거꾸로 생각해볼시 피임을 유지하는데에 있어 가장 위험한게 잦은 횟수의 질내사정 성행위라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스파르타 완전시민의 인구가 적었던것은 비효율적인 사회문화 이외에도 성관계 횟수가 너무 적었던게 무시 못할 정도로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얼핏 보면 무정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제도가 사회를 안정화시키는데 도움이 됐는데, 우선 혼기가 차면 결혼을 하니 생계는 보장이 된다. 그리고 안 맞는 부부 사이라고 해도 젊은 시절엔 배우자를 자주 보지 않아도 되므로 결혼 생활을 참아줄 수 있었다. 나이가 들면 같이 살아야 하지만 당대에는 평균 수명이 짧고 스파르타 특성상 남성들은 항상 전사 노릇을 하다 보니 평시에도 더 험하게 살아서 보통 병역이 끝나기 전에 골로 가는 일이 많고, 운 좋게 만기를 맞았다고 해도 얼마 안 가서 영원히 볼 일이 없게 되니까 머지않아 해방이라는 생각으로 참아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날 서로 안 맞는 부부가 각방 쓰면서 혼인 관계만 유지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스파르타 사회가 극도로 남성적이면서도 의외로 남녀 모두 큰 반발 없이 안정적이었던 이유로 이 제도를 꼽는 사람들도 있다.

덤으로, 나이가 많아 제대로 부인을 상대할 수 없는 전사는 젊고 강한 전사를 씨내리로 삼아 아내와 동침하게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것도 명목은 튼튼한 아들을 얻기 위해서이지만 성욕 충족 목적도 어느 정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런 식으로 몰래 간통이 이뤄졌을 가능성도 높다. 선술했듯 스파르타의 결혼 방식 자체가 남편이 집에 없을 때는 신부를 통제할 수 없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어찌 됐건 스파르타 남녀는 사회 참여 능력만 충분하다면 결혼 및 출산이 보장됐다.

여성이 16살이 되도록 초경을 못하거나 기준보다 유방이 작거나 불임이면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이행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스파르타 여성의 의무는 전사를 낳는 모체[83]가 되는 것이었다. 스파르타의 여성들이 남성들과 비슷하게 운동하고 자유로이 외출하며 발언권도 가질 수 있던 것은, 건강한 모체에서 건강한 아들(=전사)이 태어나므로 여자 역시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신체를 단련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에서 기인한 것이다. 사회 전체가 군대를 중심으로 돌아가기에 역설적으로 남녀 모두 '평등'하게 국가와 군대의 부품으로 취급받았던 것.

3.6. 스파르타식 교육: 아고게(Ago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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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육 평생교육을 실현한 국가로, '공동 식사' 문단에 소개한 피디티온이 그것. 물론 1차적인 기능은 식사 조인 동시에 전투 조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기능이 바로 교육수단이었다. 젊은 사람들과 나이든 사람들이 같이 밥을 먹다 보면, 자연스럽게 교육이 이뤄지는 것이다. 실제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것도 걸러들어야 할 것이 공교육은 공교육이었지만 완전시민들만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었고 교육비는 국가의 지원 없이 가족들이 전액 부담하는 구조였다. 만약 교육비를 낼 수 없으면 시민자격을 박탈당하는 사실상 세금이나 다름없는 교육이었다, 평생교육도 사실상 노인까지 군인 혹은 예비군으로 부려먹는 과정에서 군사 훈련을 시킨것을 평생교육이라고 칭송하는 구조였다. 쉽게 말하자면 군역+세금을 징수당하는 과정에서 군사 훈련을 받는 것을 두고 귀족주의자들이 칭송한 것에 불과하다.[84]

다만 여성 교육은 확실히 선진적인 분야로 여자들을 집 안에만 몰아넣었던 아테네와 달리 스파르타는 여성들도 예외 없이 군사 훈련과 체력 훈련을 제공했다. 이 시대에서는 매우 획기적인 선택이었다.[85]

다만, 이런 교육법으로 중점적으로 가르치고자 한 것이 고작(?) 싸우는 방법이었단 게 흠이다. 스파르타는 고대 경제에 필요한 농업과 기술 교육같이 생산적 교육은 소홀히 했기에, 코린토스 전쟁 이후에 메세니아가 독립하면서 스파르타는 초라하게 몰락한다. 그리스 폴리스들이 하나같이 선민사상이 강했다지만 스파르타는 그 정도가 너무 심했고, 군사 원정을 제외하고는 해외여행이나 유학을 금지시켰기 때문에 타지에서 들어오는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어려웠다. 사실상 우물 안 개구리인 셈.[86]

이런 군사 교육도 대부분 개인 능력 향상과 오래된 진법 훈련이 전부였기에, 시대가 바뀌면서 개인 능력보다는 전술(&쪽수)이 그리고 새로운 진법 전략, 신무기 개발 등이 중시되면서 스파르타의 무장보병 전술은 군사적 우위에서도 서서히 몰락해 갔다. 물론 스파르타 전사 개개인의 역량은 당연히 20년 복무한 로마 군단병에 비해서도 크게 앞선다지만, 애초에 로마군은 전사 개인이 아닌 조직 자체가 강하고 숫적으로도 비슷한 데다 조직력도 어느 정도 갖춘 게르만족 세력 그리고 중장기병만 몇만 명을 데리고 제국 동부를 수시로 유린한 사산조 페르시아에 맞서 일반인들을 군인으로 만든 군대로 수백 년을 버텨온 군대다. 숫적으로 압도적 열세에 개개인만 강한 스파르타군이 상대가 될 리 없었고, 결국 로마 제국의 정복 때 그나마 저항한 건 그래도 외부인을 데려와 써먹을 줄 알았던 마케도니아 왕국이나, 외부 상대로는 폐쇄적이어도 내부적으로는 그럭저럭 수준 안 맞음을 용납해줘 항상 시민의 수가 스파르타의 최소 5~10배였던 아테네 정도지[87], 정작 스파르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테귀라 전투는 펠로피다스가 무방비 상태의 오르코메누스를 포위하려고 신성부대와 소규모 기병대를 이끌고 진격하다 스파르타 본국에서 대규모의 증원군이 온다는 소식에 다시 철군하던 중 원래의 오르코메누스 수비대를 만나 벌어진 전투이다. 흔히들 오해하는 것이 스파르타 군대는 전원이 인간 병기로 단련된 스파르티아타이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 즈음해서는 정예 병력인 스파르티아타이의 수가 얼마 안 되었고 전쟁의 방식도 페리오이코이 등 일반 병력과 동맹군의 병력으로 전쟁을 운영한 지 오래되었다. 그리고 스파르타군의 수는 1,800명이 아니라 부대 단위를 봤을 때 1,000명에서 1,800명 사이로 추정되는 것이고 보이오티아 도시 오르코메누스를 수비하던 스파르타 수비군이었다. 전투 양상 측면에서도 신성부대가 용맹성 그 자체보다는 비정상적인 부대 운용을 통해 스파르타의 전선을 깨어버린 게 승인이었다. 테베군은 종심을 비정상적으로 두텁게 하여 얇은 스파르타 전선을 뚫은 후 양 측면을 기병대와 함께 들이쳐서 스파르타군은 패주하였다. 테베군이 추격하였으나 오르코메누스가 가까워 전과는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신성 부대 300명이 스파르타군 1800명을 전멸시켰다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오류이다. 스파르타군의 구성을 오해하게 한 점, 즉 스파르티아타이가 전멸당했다고 오해하게끔 한 왜곡이 있는 점, 사료 부족으로 스파르타군의 규모를 정확하게 추정할 수 없는데 근거 없이 1,800명으로 확정한 점, 게다가 오르코메누스가 가까워 테베군이 추적했으나 전과가 제한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스파르타군이 전멸당했다고 한 점에서 모든 팩트가 틀렸다. 전투 양상에 관한 점에서 보더라도, 신성부대가 종심을 뚫은 후 스파르타 수비군에는 없었던 기병대와 함께 측면을 공격한, 뛰어난 전술에 의한 전과를 신성부대라는 단일 부대가 특별히 용감해서 다수의 인간 병기 스파르타군을 박살낸 것인양 전투 양상을 단순히 도식화 해버렸다.

레욱트라 전투는 우익의 소수 스파르타군이 다수의 테베 연합군에게 포위되어 붕괴된 전투이다. 그리고 스파르타군 전원이 스파르티아타이가 아니다. 일부만이 스파르티아타이였다. 마찬가지로 테베군에서 신성부대 300명만이 스파르타군과 싸운 게 아니다. 여러 연합체 중 하나가 신성부대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사료에서는 왕이 전사하기 전까지 소수의 스파르타인이 다수의 테베인들을 상대로 우위를 점했음을 암시하기까지 한다. 헬레니카 VI.4.10.

여기에 스파르타의 인적 자원 고갈은 매우 심각했다. 애초에 주로 전쟁에 의존하여 전성기를 구가하였는데, 너무 폐쇄적이라 이겨도 1계급 구성원들이 조금만 죽어도 사실상 제 살 깎아 먹기인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런 상황에서 여자들에 대해 딱히 좋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막상 최고 전사들은 상대적으로 의무를 덜 준수해도 되어서 열심히 자손을 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1계급 숫자가 처음부터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고 폐쇄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어 근교계수에 의해 점진적으로 근친의 부작용이 일어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아주 안전하려면 대체로 1/512가 되어야 가능한 편이라 여기에 생식이 가능한 구성원 숫자 등을 고려하면 생각보다 인구가 상당히 많아야 한다.[88] 까놓고 세계사에서는 스파르타보다 더 숫자가 많았던 사람들도 폐쇄적이면 근친에 의한 고통을 받기도 했다. 사실 하층 계급을 제외한 스파르타인들보다 훨씬 숫자가 많았던 유목민들도 근친에 의한 폐해를 피하기 위해 노력했던 일을 생각해보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덧붙여, 아고게 방식이 사실상 구 일본 제국과 같은 똥군기 그 자체라 병사들이 명령 복종은 잘해도 스스로의 의사나 사고를 많이 억눌린 나머지 제대로 싸웠을지도 의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아고게의 단면만 보고 스파르타인들이 무서워 보였을지는 모르겠으나 사실상 겪어보면 전쟁 판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못했다.

3.7. 배타적 순혈주의

스파르타를 이상적인 국가로 봤던 플라톤은 '국가'를 저술했는데, 그럼에도 스파르타로 이주하지 않았던 점을 주목해 보세요. 스파르타에는 한계가 있었지요. 이주민을 끌어들이지도, 이들에게 온갖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지도 않았습니다. 스파르타인들은 자신들끼리만 뭉쳤어요. 매우 배타적이었습니다.
칼 갈린스키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고전학 교수 "강대국의 비밀 1부 로마 시민권"
우리의 조상들은 로물루스의 선례를 따라 이민족에게 계속 시민권을 내주었다.
로마 정치인 키케로
스파르타의 인적 자원 고갈 문제는 줄곧 지적되는 문제인데 앞에서 설명한 이유 외에도 스파르타의 외국인에 대한 배척과 적대적 태도에도 그 원인이 있다. 물론, 이는 스파르타보다는 조금은 더 낫다고 해도 아테네 등 수많은 그리스 폴리스들의 고질적인 모습이였다.[89]

3.8. 종교

스파르타인들은 매우 종교적이었다. 거의 '광신적'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종교에 대한 믿음이 강했다. 특히 신탁을 중시해 무슨 일이 있어도 신탁을 받은 것은 반드시 지켰다. 심지어 전투나 원정을 나가기 전에 점을 쳐서 길흉을 알아보고 나쁜 결과가 나오면 절대 움직이지 않을 정도였다.

스파르타 역시 다른 폴리스처럼 제우스를 주로 섬겼다. 헤라클레스 또한 중시됐는데 이는 헤라클레스가 스파르타 왕가의 조상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미케네 문명 시절의 스파르타의 지배자로 전해지는 메넬라오스 헬레네도 부부 신으로서 신격화됐다.

그 외에도 젊은이들이 아레스에게 강아지를 제물로 바치기도 했으며, 도시 동쪽에는 전쟁에서 항상 승리하기를 기원하고자 사슬에 묶인 아레스의 상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3.9. 기타

4. 서구권에서의 역사적 평가

제2차 세계 대전부터 냉전 시기를 경험한 현대인들은 아테네의 민주정만을 현대 정치 이론 및 체제의 모태로 보며, 전체주의적이며 군국주의적인 모습이 강조되는 스파르타는 철저한 반면교사가 되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지나치게 현대적인 시각으로 스파르타를 바라본 결과이다.

고대 그리스 시기에도 아테네 내부에서 소크라테스 플라톤처럼 스파르타의 체제가 훌륭한 시민을 양성하는데 최적이라고 보며 흠모하는 인물들이 존재했다.[97] 게다가 로마 공화정의 몰락 이후 17세기 중후반 계몽주의가 대두되기 전 무렵까지만 하더라도 부정적으로 평가받으며 역사 속에서 잊혀진 정치 체제는 스파르타의 과두정이 아닌 아테네의 민주정이었다. 군국주의적인 문화와 별개로 스파르타의 정치/사회 체제는 유럽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베네치아 공화국의 귀족 과두정이 바로 스파르타를 롤 모델로 한 것이었으며 영국의 입헌군주제 역시 처음 등장했을 당시에는 스파르타 체제를 당대 영국 사회의 현실에 맞게 손질한 결과였다.

이튼과 같은 영국의 명문 사립 학교들의 커리큘럼 역시 스파르타의 교육법을 모방하고 있다. 물론 현대에 와서는 영국 사립 학교들의 이런 커리큘럼이 대차게 까이고 있긴 하다. 어쨌든 19세기 당시 학교 측에는 스파르타의 교육법을 모방한 것은, 당대 사회가 스파르타식 교육을 올바르고 건전한 시민을 육성하는 방법이라고 보았다는 방증이다. 또한 계몽주의 사상가들 역시 스파르타의 공평한 토지 분배, 시민군, 공동체 생활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당연히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던 세력들 내에서도(특히 생 쥐스트) 스파르타를 가장 이상적인 평등주의 사회로 찬양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초기 시오니즘을 주장한 유대인들 중에서도 스파르타 사회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 유명한 이스라엘의 집단 농장인 키부츠도 스파르타 모델의 영향이 없지 않았다.[98] 그밖에도 긍정적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전체주의, 파시즘,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영감을 주었다. 나쁜 의미로 평등하지만 어찌되었든 투쟁을 위한 구조라는 측면에서는 그 특수성이 종종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결국 스파르타를 긍정적인 국가라고 보는 시각이 주류라고 보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스파르타는 그리스 전체에서 매우 비옥하고 좋은 영토를 지닌 국가였음에도, 경제/사회/문화를 모조리 퇴보시키는 당시의 그리스를 기준으로도 낡은 노예제 병영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서 구성원들이 군인이 되어 서로를 폭력으로 감시하는 폐쇄적인 체제를 벗어나는 발전에는 실패했다는 것이 고대 그리스의 역사를 관통하는 교훈이다.[99]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후대에는 스파르타가 강력한 국가였다는 것을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평가했으며, 로마 시대에는 서커스의 동물마냥 스스로 고문하는 스파르타의 어린 소년들을 구경할때나 찾아오는 시골 깡촌으로 몰락해버렸다.

심지어, 근대까지는 스파르타에 대한 지식이 낮았기 때문에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에 어이없이 자멸하는 현실이 비교적 현대에야 알려졌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20세기 초에 발간된 역사 서적들은 스파르타의 몰락에 대해선 유야무야 넘어가려는 면이 있었는데, 현대인들은 스파르타를 특수한 목적으로 분석하는 전문가를 제외하면 스파르타의 현실적인 모습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호평을 하는 경우가 꽤나 많았다는 것이다.[100]

스파르타는 노예들을 잔혹한 폭력으로 관리하는 '전사 군인'들을 육성하기 위한 군사 제도를 자랑스러워했지만 나중에는 대규모 총력전에 더욱 적합하면서 낡은 귀족 체제에 얽매이지 않는 '전문 군인'을 육성하는 다른 그리스 국가들의 효율적인 사고 방식에 추월당하면서 군사적으로도 평범한 국가가 되고 몰락했다.[101] 고대의 역사적 평가에서도 스파르타는 호방하며 자유를 중시하는 아테네, 야심이 넘치는 테베, 통합 그리스 제국을 완성하는 마케도니아처럼 미래를 보았던 이웃 도시들에 비교하면 자신들의 터전에서 영원히 노예들을 때려죽이고 동네깡패 행세를 하며 통합 제국이 아닌 느슨한 협박을 이용하는 연맹이라는 낡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육체는 고생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안락한' 퇴보주의를 벗어나진 못한 국가였기에 특수한 목적 이외에는 긍정적인 해석을 주류로서 보는데는 무리가 있다.

5. 이야깃거리

프랭크 밀러 그래픽 노블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300은 스파르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스파르타 시민군이 협곡 테르모필레에서 그리스를 침략하는 페르시아 제국과 전투를 벌이는 내용. 그것이 테르모필레 전투이다. 도중에 레오니다스는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에게 "우리는 무자비한 전체주의 제국이라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울 거요. 그리고 역사는 웬 폭군이 지배하는 전체주의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외세와 맞서 싸운 집단이 있었음을 기억해 줄 거요."라고 말하는 내용이 나온다. 상영 내내 스파르타와 페르시아 양국이 대치하는 구도를 보아 동서의 대립이 배경인 듯하다. 그러나 현실의 스파르타는 독재 국가이면서 노예들을 부려먹는 국가이고 무자비한 전체주의 국가였다. 오히려 문화력으로 따진다면 동시대의 페르시아가 문화적으로 더 발달된 국가였다. 원작을 더 뒤틀어 이라크 전쟁의 영향으로 인한 지독한 서구 우월주의와 마계 수준으로 왜곡된 오리엔탈리즘 장애인 비하로 점철된 페르시아 진영 묘사는 두고두고 까인다. 앨런 무어는 300을 " 동성애 공포증 인종차별과 멍청한 마초 작품"이라고 깔 정도였다.

무한도전 하하가 해당 영화를 패러디한 특집에서 스파르탄 옷을 입고 미션을 수행할 때 "스파르타!"를 외치기도 했다. 이 구호를 우려먹다가 소집해제한 후엔 안 쓰지만.

게임 갓 오브 워 시리즈의 주인공 크레토스가 바로 이 스파르타의 장군이었다.[102] 우리가 알고 있는 스파르타에 대한 이미지보다는 신 살해자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악무도한 주인공이다. 이명으로 스파르탄이나 스파르타의 망령이라고도 불린다. 갓 오브 워 3에서는 망명의 블레이드를 이용해서 마법, 스파르타의 분노를 사용할 수 있다. 공중에서 밀집 방진을 한 망령들이 나타나 방패로 방어를 한 뒤 창으로 찌른다. 다만 그리스의 멸망 이후 북유럽의 시간대로 넘어가서는 본인의 잘못을 모두 인정하고 예전의 잔혹한 성격을 전부 버리며 제대로 된 인격을 갖춘 신이자 인간이 되었다. 막판에 아트레우스에게 스파르타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걸 보아, 스파르타에 대한 추억은 남아 있는 걸로 보인다.[103]

게임 어쌔신 크리드: 오디세이에서 주요 세력으로 등장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배경인 만큼 아테네와 함께 양대 세력으로 등장하며, 그리스 전역을 아테네와 양분하여 전면전을 치르고 있다. 주인공 미스티오스도 일단 스파르타 출신이고 대중적 의미의 스파르타적 색채가 강하지만, 스파르타 군 소속은 아니다. 게임 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스파르타 도시가 구현되어 있는데, 현존하는 건물과 기록이 꽤나 남아 있는 아테네와는 달리 전적으로 상상에 의존해 구현되어 있기에 판타지적인 느낌이 없지 않다.

로마: 토탈 워에서는 스파르탄 홉라이트라는 유닛으로 등장, 위력은 게임 내 모든 보병들을 통틀어 최상위권으로 정면에서는 이길 유닛이 없다. 다만 스파르타와 시라쿠사에서만 뽑히는 지역 제한이 있는 것이 단점. 이후 토탈 워: 로마2에서는 그리스 DLC로 플레이어블 팩션으로 추가되었다.

강현준의 만화 캣에 나온 개 이름이 스파르타이다. 주인인 H가 허세를 부리고자 멋지게 지은 이름인데 정작 개는 똥개. 하지만 똥개임을 부정하고 가혹한 훈련을 하며 명견이라고 자랑하는 주인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다. 대조적으로 널럴한 주인 K를 가진 고양이 K를 부러워할 듯. 외전에서 거대화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크면서도 주인 말을 잘 듣는 멋진 개라고 부러워할 뻔했으나 역시나 거대하게 나온 고양이 K 때문에 똥개임이 드러나자, 인간들에게 외면당하면서 굳어버렸다. 사실 순종이란 인간이 억지로 만들어낸 것에 가깝고, 흔히 잡종이라 불리는 동물들이 훨씬 건강하고 유전적으로 결함이 없다.[104] 무엇보다 좋은 개가 되고 말고는 주인 역량에 달린 일이다.

중국의 진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다. 사회가 전체적으로 무를 숭상하고 군국주의적이다. 진나라는 전쟁 노래를 평시에도 불렀고 적의 목을 얼마나 베어서 가져오느냐에 따라 계급이 올라가고 전쟁에서 도망가면 처벌했다. 진나라와 스파르타 둘 다 강한 군사력으로 패권을 차지했지만 그 패권은 너무 억압적이고 가혹한 체제 때문에 오래가지 못했다.

도미네이션즈에서 스파르타인과 레오니다스가 전술성 병력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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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모라가 사는 허름한 아파트를 본 뒤)
Carl Van Loon: You don't really live here, do you?
카를로스 밴 룬: 자네 정말 여기서 사는 건 아니겠지?
Eddie Morra: Well ah…the Spartans weren't really big on amenities?
에드워드 모라: 뭐…스파르타인 들도 좋은 집에서 살지 않았잖아요?
Carl Van Loon: yeah, and they eventually got their asses kicked.
카를로스 밴 룬: 그래 맞아. 결국엔 걔들은 졌지.
영화 〈 리미트리스〉 중

6. 관련 문서


[1] 라케다이몬, 라케다이모니아는 고전식 발음. 라케대몬, 라케대모니아는 코이네식 발음. [2] 물론 현대인 입장에선 노예들을 깔고 앉은 경제 시스템 때문에 "절제? 노예 위에서 군림하고 자기들 선민의식에 취해 마초이즘만 남발하는 근육 머저리들이?"라는 소리가 나오겠지만, 실제로 스파르타에 살지도 않았고, 뭣보다 페르시아를 상대로 인상깊은 전투를 여럿 보여준 만큼 동시대 그리스인들은 그렇게 인식했다. 그리고 거대한 노예제를 깔고 앉은 경제 시스템은 아테네 등의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3] 후술하겠지만 스파르타의 정치체제는 의외로 그 당시로서는 발달된 편인데 리쿠르고스가 이렇게 많은 경험을 쌓은 끝에 만들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4] 여담으로 비슷한 시기, 솔론 역시도 이와 비슷한 조치를 취했지만 리쿠르고스와는 달리 전면적인 시행이 아니었던 지라 결국 빈민이건 귀족이건 둘 다에게 불만만 사고 끝났다. 이는 그래도 왕족이고 왕의 신임까지 얻는 리쿠르고스와 달리 솔론은 그저 중산층 시민 중 하나라 반대파를 찍어누르면서까지 실행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5] 참고로 실제 공산주의 정권들은 집단농장 체제를 운영했다. 그렇지만 그 전에는 일단 토지를 빈농에게 나눠준다는 토지개혁을 먼저 했다. [6] 다만, 이건 그 당시에 스파르타가 다른 그리스 도시 국가들에 비해 그만큼 내정이 불안했다는 반박도 된다. 메세니아와 여러 노예 계층이 시도 때도 없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도 스파르타의 불평등한 차별 때문이었다. 다른 영토 확장을 한 국가들은 행정력을 확대하고 정복지의 주민들을 포섭하기 위해 노력이라도 해서 그나마 그럭저럭 살았지만, 스파르타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마라톤 전투같이 아테네가 페르시아를 이기는 등 선전했는데도 지원군을 섣불리 보낼 수 없었다. 당시 치안까지 담당하던 1계층 사람들이 국내에 줄어들면, 메세니아와 같은 나라가 계속 저항하므로 자칫 스파르타의 멸망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7] 고대에는 아직 사람이 살지 않는 무주공산의 땅도 다음 시대에 비해 훨씬 많았고, 고대에 인구수를 확보해놔야 성장 속도가 가팔라지는 고대 이후를 대비할 수 있었기 때문에 확장이 특히 더 중요했다. 확장을 주저했거나 확장 과정을 제대로 통제 못한 나라들은 자기보다 훨씬 크게 영토를 확장하고 안정화시킨 이웃 나라들에게 멸망당하고 흡수되었다. 당장 옆 동네 아테네는 명실상부한 그리스 최대 국가로 거듭났지만, 스파르타는 안정적인 확장을 통해 영토와 인구수를 늘리지 못했기에 로마 시대에 이르기까지 몰락과 중흥을 반복하다 결국 초라한 지방 마을 하나로 남게 되었다. 이를 생각하면 고대국가가 확장을 주저한다는 점에서 이미 그 국가 체제의 한계점이 명확한 것이었다. 다만 리쿠르고스 체제의 문제점은 단지 스파르타가 확장해야 할 시기에 맞지 않다는 것으로 당대의 스파르타 입장에서는 분명히 효과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원래 개혁이라는 게 몇백 년을 내다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기준으로 고쳐야 할 것을 고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국가의 시스템이라는 게 한번 정해지면 고치기 어려운 것이기는 하나 그 자체는 어쩔 수 없다. 즉 리쿠르고스 체제는 확장을 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땐 맞았지만, 다들 슬금슬금 외부로 확장하는 시기가 되자 맞지 않게 된 것이다. [8] 정작 그리스는 산지가 많고 평야가 적다보니 도시의 확장이 어렵다. 고만고만한 크기의 도시들만 난립하다 보니 전성기의 아테네조차도 다른 폴리스 위에 군림할 수는 있었지만 지배하지는 못했다. 스파르타도 인근의 메세니아와 라코니아를 정복하기는 했지만 그 이상의 확장은 무리였다. 스파르타 식민 도시들도 있었지만 이들도 스파르타가 지배하는 도시들은 아니었다. [9] 전투보다는 당시 아테네를 휩쓸었던 전염병이 더 큰 문제였다. 이로 인해 아테네의 수장이었던 페리클레스가 사망하면서 아테네에서는 고만고만한 자들이 통치하는 중우정치화가 이루어진 덕에 결국 스파르타에게 패배하였다. 다만, 스파르타도 제대로 이겼다고 보기에는 매우 어려웠었다. 그리스에 퍼진 하층민들은 아테네의 민주정을 선호했고, 귀족층들은 과두정을 선호했다. 결국에는 모든 국가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스파르타의 과격한 과두정에 치를 떨어서 겨우 1년도 안 되어 민주정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10]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 당시 때, 아테네 제국이라며 깠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나 실상은 달랐다. 각 도시 국가들의 귀족층들이 스파르타의 과두정을 지지했어도, 그 밑의 중산층과 하층민들은 아테네가 만든 민주정을 흠모했다. 이는 현대 사람들이 포퓰리즘의 원조라고 까는 페리클레스가 하층민들에게 출세의 길을 열어주었기에 지지층이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거기다 비록 아테네가 패배했어도 아테네가 남긴 민주정은 중하층민들에게는 여전히 흠모의 정치체계였다. [11] 아테네에서 민주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대중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해버렸다. 그런데 이 친스파르타 정치가들은 애초 전쟁 내내 트롤짓을 일삼으며 아테네의 발목만 잡아댄 작자들이었다. [12] 그나마도 핵을 이루는 스파르타 완전시민의 숫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에는 3천 명, 레욱트라 전투 당시에는 1천 명 정도만 남았다. 나머지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편입시킨 여타 계급. [13] 스파르타 제1계급의 10배 가까운 노예가 있는 데다가, 이들 노예들은 온갖 학대와 억압을 받았기 때문에 스파르타를 증오하여 기회만 되면 들고 일어나려 했다. 더욱이 이미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자유를 약속해놓고 뒤통수를 쳤으니 헤일로타이들이 스파르타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14] 우익에 주력군이 오는 것은 인간의 대부분이 오른손잡이이기 때문이다. 장난치는 말이 아니라 인간 대부분은 오른손잡이이며 역사적으로 왼손잡이는 차별 받았다. 때문에 모든 군대의 물건들은 오른손에 기준이 되어있었으며 당연히 진형을 구축할 때도 무기를 오른손에 들어야 진형이 흐트러지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는 왼손이 취약하다는 뜻이기도 하며 항시 오른손을 내지르므로 무게중심 역시 오른쪽에 쏠린다. 또한 왼손엔 방패를 들 경우 왼쪽 군사가 우측 아군의 방패를 활용하기 위해 오른쪽으로 붙는다. 즉, 과거의 냉병기 전쟁에서 회전이 벌어지면 대형이 맞붙었을 때 반시계로 빙빙 돌게된다. 이때 공격하는쪽이 우익이므로 우익이 빨리 적을 돌파하고 좌익이 버텨주어야지 포위망 형성이 가능하다. 즉, 우익의 중요도가 훨씬 높다.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만들어진 진형이 바로 사선대형으로, 좌익에 주력군을 상대보다 많이 배치하여 적 우익의 주력군을 섬멸하고 좌익에서 포위망을 형성하는 전술이다. [15] 전성기 아테네의 인구는 30만~35만 명이었다. [16] 전성기 아테네는 단독으로 함대를 최대 200여 척 이상, 또는 중보병 2~3만을 움직일 수 있었다. [17] 단독으로 1만여 명을 동원할 수 있다던 중보병 중에서도 순수 스파르타 시민들은 이 무렵엔 3천 명 이하로 떨어졌다. [18] 운동 경기로 유명했지만 원래 목적은 제우스에게 바치는 종교 행사다. [19] 출처: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20] 다만 스파르타의 내외 사정을 생각하면 이런 어정쩡한 태도는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인데, 일단 정치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스파르타는 왕조차 온갖 견제와 간섭을 받는, 특정한 개인 또는 세력이 독단으로 결정을 내리기 힘든 구조였다. 좋게 말하면 견제와 균형의 정치체제지만 나쁘게 말하면 비상시에 과감한 결단을 내리기 힘든 나라이다.(이 때문에 민주주의의 상징인 아테네조차 페르시아와 싸우기 위해 스트라테고스 아우토크라토르라는 최고사령관에 해당하는 직위를 만들어야 했으며, 로마도 독재관이라는 제도로 비상시에 대처했다.) 게다가 스파르타의 지리적 위치도 작용하는데, 후대의 이미지와 달리 보통 북쪽에서 시작되는 페르시아의 진격 루트에서 남쪽에 있는 스파르타는 상대적으로 후방의 안전한 위치였다. 실제로 북쪽의 폴리스들은 페르시아에게 굴복 또는 항전의 선택에 직면했고 아테네조차 파괴되고 불탔지만 스파르타는 그럴 일이 없었다. 이러니 다른 폴리스와는 위기감과 절박함이 달라서 행보에 온도 차이가 생길만도 했다. 게다가 후방이라 군대의 이동 거리가 다른 폴리스들보다 길기에 더더욱 소극적이고 굼뜨게 보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스파르타의 정체성에서 오는 문제, 즉 스파르타 시민이 많지 않고 보충도 힘들다는 점이다. 과감히 전력을 투입했다가 한번 크게 패하면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기에, 호전적인 이미지와 달리 큰 전투는 스파르타군에게는 위험한 선택이라는 아이러니가 생긴 것이다.(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일어나게 된다.) [21] 이런 식으로 기록들을 채굴하면, 천하의 미군도 희대의 당나라 군대로 왜곡할 수 있다. [22] 아무리 페르시아 전쟁이 범헬레네스 민족 의식을 고취시켰다고 하더라도, 폴리스는 엄연히 하나하나가 국가이다. [23] 300여명 정도의 소수 정예 부대였는데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유명한 인권 따윈 나 몰라라 수준의 아고게와 달리 이쪽은 부대 병사들이 서로 연인 겸 사제 관계라는 점을 이용해서 군부대 내의 전우애를 극대화하여 전투력 향상을 노렸다. 물론 이쪽도 소수 정예 부대인 만큼 전력을 단련시키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으나 최소한 스파르타식 아고게만큼 비인도적이고 무의미한 희생 강요를 하지는 않았다. [24] 참고로 한 곳에 미친듯이 우겨넣은 결과, 당연히 다른 두 진영은 평소보다 훨씬 얇은 대형으로 존재했었다. 때문에 만약 스파르타가 모랄빵이 나지 않았으면 오히려 테베군의 측면이 노출되어 그대로 패배할 위험성도 있는 리스크 높은 전술이었던 셈이다. [25] 원래 사선대형이 가진 장점이자 단점이 한쪽에 병력을 몰빵한 것이다. 사선대형임을 간파당하지 않았을 때는 강한 진영을 통해서 상대의 한쪽 진영을 박살내고 약한 진영과 협공해 적을 무찌를 수 있지만, 적이 이 사선대형을 간파하면 오히려 이를 역이용해서 약한 진영부터 무너뜨리는 전략을 들고 나올 수 있다. [26] 의외로 테베도 자신들을 용에서 나온 전사들의 후손이라고 생각하여 군사적인 면이 있었고, 아테네도 강력한 해군과 해적질, 식민 도시 건설로 이름 높았다. [27] 스파르타 역사상 스파르타 시민권을 얻은 외국인은 고작 5명에 불과했다. [28] 이 문서의 첫 부분에 상술되었던 식초로 담근 화폐가 이것이다. 한마디로 그냥 쇠 막대기도 아니고 녹여서 다른 물건으로 만들수도 없도록 일부러 녹을 슬어버리게 한 완벽한 쓰레기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걸 화폐로 쓰고 있었던 거다. 그나마 스파르타 내에서야 공권력으로 억지로 화폐로 통용되게 할 수 있었겠지만 스파르타의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타 폴리스에서는 먹힐 리가 없었다. [29] 참고로 이것도 문제인데 전근대에는 농업의 생산성이 곧 인구부양능력이었다. 물론 아테네처럼 상업을 키워준다면 농업생산량보다 웃도는 인구를 부양할 수 있지만 스파르타는 상업이 발달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나마 농업 생산력이라도 높여 부양할 수 있는 인구의 한계를 올려야 하는데 이걸 안 하니 스파르타라는 나라는 근본적으로 인구가 늘어날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 [30] 메세니아와 라코니아의 차이는 지리적인 점에서 짐작해볼 수 있는데 둘 다 스파르타와 가까운 편이라 이해가 가기 쉽지 않으나 메세니아와 스파르타 사이에는 산지라는 천연 방어벽이 존재하지만 라코니아와 스파르타 사이에는 그런 게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스파르타와 라코니아에는 모두 그 사이로 강이 하나 흐르는데 스파르타쪽은 상류 라코니아 쪽은 하류다. 즉 뻥 뚫린 라코니아는 설사 잃더라도 다시 정복하는 게 어렵지 않겠지만 메세니아는 산지를 넘어가며 진격하거나 그게 싫으면 해군으로 재정복하든가 둘 중 하나인데 둘 다 라코니아보단 어려울 것이다. [31] 라코니아 도시는 기원전 2세기 초까지 스파르타의 지배를 받다가 기원전 195년에 스파르타가 로마와 전쟁했다가 로마군 지휘관인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에게 패배하면서 해방된다. [32] 비용이 꽤 되긴 했어도 헤일로타이들이 농사를 지어 그 절반을 바쳐야 했기에 경제적인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아도 되었다. [33]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를 기점으로 보면 토지를 소유한 가문이 고작 전 시민의 3% 정도였다는 소리다. [34] 이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 키나돈의 반란모의 사건이다. [35] 코린트의 아카이아 동맹 전쟁은 시기적으로 정말 운이 없었다. 아케디아 전쟁이 발발한 때 하필이면 대외 유화책을 선호하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물러나고 대외 강경파인 대 카토가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로마에 반발하는 이들에게 교훈을 주고자 하였으며 그 희생양이 바로 카르타고 였다. 헌데 카르타고를 본보기로 말살시키기로 한 시점에서 코린트가 아카이아 전쟁을 잃으켰고 로마는 카르타고와 세트로 말살시켰다. [36] 재밌는건 로마의 내전 동안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처신은 매번 갈렸다. 특히 아테네는 편을 더럽게 못섰는데 술라 내전 때도 술라한테 반기를 들었다가 술라가 '내가 느그 역사 자랑 들으러 온 사람인줄 아니? 난 느그 정복하러 온 사람이야라는 말을 들었고 카이사르 내전때도 폼페이우스 편을 들었다가 카이사르에게 니들은 매번 죽을 죄를 짓지만 조상 덕에 사는줄 알아라라는 말을 들었다. [37] 교부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수사학 스승이었던 인물이다. [38] 라코니아는 고대에 스파르타의 지배를 받던 지역으로 메세니아와 비슷한 신세였던 지역이었다. [39] 사실 아테네도 고대 이후에 시간이 흐르며 결국 아크로폴리스 언덕 아래의 작은 마을 수준까지 몰락했다가 그리스 독립 전쟁 후 계획도시로 부활한 시절이 있었다. [40] 펠로폰네소스 반도 자체도 대도시가 없는 변방 시골에 가깝다. 나라에서 3번째로 큰 도시 파트라가 있지만, 스파르타에서 멀리 북쪽에 있어서 차라리 아테네가 더 가까울 정도. [41] 그 시기에 이 정도였으니 스파르타의 시민이 얼마나 적었는지 알 수 있다. [42] 2계급은 주변국에 용병으로도 많이 활약했는데 아마도 간접적으로 경험한 스파르타의 군사 훈련과 삶에서 나오는 유연한 사고가 그들의 명성을 높여주었을 것이다. 실제로 제1차 포에니 전쟁 때 바그라다스 전투에서 지휘관도 스파르타 출신 크산티푸스였다. [43] 앞에 나온 스파르타이아이들은 전 스파르타 인구의 5~10%였다. [44] 현대식 발음으로는 메니아이다. [45] 엄밀히 따지자면 헤일로타이들의 조상들은 도리아인들이 침공해오기 이전의 원주민이고 스파르타는 도리아인들이 세운 국가이니 완전히 같은 민족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이미 기원전 5세기부터 '그런거 상관없이 우리는 같은 그리스인이다'라는 인식이 뿌리내린 상황이었다. 단, 메세니아 역시 그리스 기록으로는 도리아인들이 지배하던 땅이었다. 도리아인의 조상인 헤라클리드(Heraclid)의 왕조가 그리스를 정복한 후 정복지를 왕자들에게 분배하였는데, 스파르타나 메세니아나 똑같은 정복지로 차이가 없었다. 고대의 그리스인들도 지금처럼 하나의 민족이 아닌 여러 민족들이 있었는데, 서로 다르다고 여긴 민족들은 서로 노예로 삼기도 했다. 근데 스파르타는 다른 그리스 민족들이 보기에도 같은 동족인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면서 노예로 삼은 것이다. 허나 비록 스파르타만큼은 아니지만 자신들끼리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이거나 노예로 만들어서 내로남불이라고는 할 수 없는게 아테네만 해도 멜로스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멜로스에 쳐들어가 성인 남자들은 다 죽이고 성인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팔아버렸다. [46] 단순한 경제적 착취는 어차피 전근대에서 많이 벌어지던, 아니 심지어 근대나 현대에서도 지구 어디에서는 자행되는 일이다. 그나마 현대에서는 이를 명백히 비인도적으로 보고 있어 줄었을 뿐이었다. [47] 그 중에서도 용맹한 스파르타 전사들의 장렬한 최후라며 그리스에서 징하게 우려먹는 그 테르모필레 전투였다. [48] 영화 300이 비판을 받는 이유 중 하나가 마치 스파르타인 300명만 싸우다 전멸한 것으로 연출해서인데 이때 2천 명의 헤일로타이도 메세니아 독립을 위해 싸우다 죽은 것을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9] 그러나 화폐 자체의 가치 또한 무시하지 못한다. 그 자체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지폐가 등장한 배경은 상업의 발달과 그로 인한 거래의 확대 등으로 번거롭게 무거운 돈을 많이 주는 것보다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쓰여진 지폐를 주고받는게 더 편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으며 실제로도 지폐는 동전보다 늦게 등장했다. 철막대 화폐는 이쪽에 가까운데 문제는 금은 화폐는 그 자체로도 가치가 있어서 해당 국가에 대한 신뢰가 없더라도 화폐 자체의 가치는 있어서 일단 유통이 가능한거다. 당시에는 자유무역 같은 개념도 없었으니 경제는 정치적 요소에 의해 변동되는 것이 당연하고 그렇기에 불확실성이 너무 크다. 이런 상황에서는 지폐나 철막대 화폐처럼 그 자체로는 아무 가치도 없는 화폐보다는 금은처럼 아무리 발행한 국가의 상태가 막장이 되더라도, 설령 그 국가가 망해서 화폐 자체의 가치는 0이 되더라도 화폐를 만드는데 쓰인 재료 자체의 가치는 보전되는(그런 경우 화폐를 녹여서 재료를 추출해 쓰면 된다.) 그런 화폐가 더 낫다. [50] 위에서도 언급된 바 있지만, 스파르타는 해군력과 제해권을 바탕으로 한 상업에도 상당히 무지했고, 그 영향력은 아테네와 비교하는 게 미안한 수준으로 뒤쳐져 있는 나라였다. 또 한편으로는 쇄국에 가까울 정도로 타국과의 문화적, 경제적 교류도 적었으니… [51] 그 외에도 술 취한 여성과 노예를 잡아다 거리를 끌고 다니며 망신을 주었다고 한다. [52] 그리스에서 여러 전쟁이 일어날 때도 아테네가 다른 도시들에게서 지원을 요청할 때 군사력 최강인 스파르타가 매번 지원을 못한 적이 많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메세니아인들의 저항을 진압하는 데 군사들을 돌려야 해서였다. 스파르타가 왜 군사들이 뛰어난데도 정복 활동을 많이 못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며, 그만큼 정치 체계가 아테네보다 못했다는 소리다. [53] 특히 메세니아인들의 무기 소지와 군사 훈련 자체가 금지였다. 게다가 메세니아인들은 절대 전쟁에 동원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중장갑으로 제대로 무장하고 전투 훈련에 이골이 난 스파르타군을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실전 경험도 부족하며 열악한 무기로 무장한 메세니아인들이 이길 리가 없었다. 여러모로 고트족과 비교하긴 하지만, 사실은 그 당시 고트족을 지배한 로마는 수탈만 했지 그들이 무기를 감추는 것을 모르고 있었고 이들을 볼모지 땅에 살도록 내버렸기에 그냥 넘어갔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그들을 계속 경계해서 무기를 가질 수 없도록 철저하게 탄압했기에 메세니아인들이 봉기할 때도 대부분 농기구나 바위 등으로 싸워야 했다고 한다. 거기다 로마는 원래 타민족에게 어느 정도 자비로운 정도였지만, 하필이면 고트족을 담당하던 로마 귀족이 부정부패와 사리사욕으로 찌든 인물인지라 이로 인해 고트족에게 강한 반발을 사서 그랬지, 로마는 타 국가에 비해서 이민족들이 로마에 충성하면 잘 대해주던 편이었다. 사실 로마의 정책은 의외로 현대 사회에서도 그럭저럭 납득이 갈 수준으로 관대한 케이스가 꽤 있다. [54] 그리고 메세니아는 스파르타의 침입에 대비해 국경선에 요새와 성을 쌓았고 스파르타는 다시 되찾으려고 맹공을 퍼붓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고 한다. 애당초 도시국가가 난립하고 분쟁이 생겼을 때 굳이 평지에서 회전을 치른 게 바꿔 말하면 이 시대 공성술이 수성술보다 많이 떨어졌다는 얘기와 같다. 메세니아 측이 스파르타를 굶겨 죽이기 위한 방어선을 축조하는 데 성공한 순간 스파르타가 이를 타개하려면 평소 방식의 정면 돌파로는 어렵고 앞선 공성 기술을 도입하거나 방어선 외부의 강력한 동맹의 도움이 필요했겠지만 그런 일을 해내기엔 스파르타의 한계가 너무 명확했다. [55] 철 막대기 화폐가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군사력에 의존한다는 것들이 군사력도 제대로 유지 못 할 행정 체계와 정치 수준을 보이고 자체 생산력도 떨어지다 보니 국가에 대한 신용 가치가 있을 리 없고 그것이 화폐 가치도 떨어뜨린 것이다. 스파르타가 알보병 빼고 뭐라도 있는 국가였다면 철 막대기 화폐라도 가치를 인정받았을 것이다. [56] 현대도 그렇지만 국가의 역량 자체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고대의 도시국가는 아무리 군사 훈련에만 몰두하는 인간흉기들이 모인 국가라 해도 충분한 농업 생산력이 갖춰지지 않으면, 즉 농촌의 지원을 받지 못하면 생존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무역과 해운이 농업을 대체할 수 있을 만큼 발달한 것도 아니었다. 이처럼 메세니아의 생산력이 스파르타의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기 때문에 메세니아를 상실한 스파르타는 다시는 이전의 위상을 누릴 수 없었다. [57] 위에 경제분야 몰락 항목에서도 서술되어있지만 지리적 문제로 라코니아는 메세니아와 달리 해방되기가 어려웠다. 오히려 재정복된게 맞다. [58] 당장에 그리스권만 벗어나면 닥치고 복종이었다. [59] 사실 이는 아테네, 로마 등에서도 보이는 문제로 명목상의 국가원수인 집정관은 임기가 짧고 그보다 짬 많은 선임들이 정계에 많거나(로마) 아니면 제도 자체가 집정관들에게 권력이 몰아지지 않는 체제(아테네)라서 집정관은 그렇게 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하다못해 비그리스권 국가인 카르타고도 공화정을 하면서 집정관을 두었지만 그리스와 로마와 비슷하게 원로원, 백인회, 민회를 또 두었다. [60] 전쟁이 끊이지 않는 시대에 종종 있는 일이었다 [61] 물론 이렇게 된 것에는 스파르타 남성들이 특히 사망할 확률이 높아서였을 가능성이 컸다. [62] 주로 2계급 시민들이었던 페리오이코이가 주축을 이루었다. [63] 이들 구성이 바로 완전시민 계급이다. [64] 다만 이 시기 스파르타처럼 무조건 50세까지 병영 생활을 할 의무가 있지 않았을 뿐, 신체 노화가 본격화되는 50세 이전까지는 지적장애나 중증 정신질환, 신체적 결손 혹은 이나 심각한 당뇨, 고혈압 등의 질병이 없는 모든 일반 남성에게 전시 병역 의무가 주어진 건 폴리스 대부분이 똑같았다. 당장 소크라테스만 해도 40대 중반의 나이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끌려간 바 있으며, 이 시기의 경험을 토대로 아테네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65] 태어나는 아이의 부계 혈통을 따지기보다는 여성의 임신 가능성을 높이는 것에 더 집중한다는 발상에서 나온 것. 인구밀도가 너무 낮아 외부인의 피를 받아야 근친 풀을 벗어날 수 있는 환경이거나 스파르타같이 극단적인 교육 제도로 가정 생활을 제대로 못 하는 상황인 경우에 성행했다. [66] 저 위의 테르모필레 전투의 경우, 스파르타군이 방진을 흐트러뜨리고 뒤로 도망치는 척 했다가 순식간에 방진을 다시 짜고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나중에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의 만티네아 전투의 경우, 방진을 현장에서 재배치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참고로 전장에서 한번 흩어진 방진을 다시 수복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67] 전쟁의 원인이 된 헬레네의 남편 메넬라오스가 바로 스파르타의 왕이다. 그런데 일리아드의 시대엔 스파르타가 도리아인의 나라도, 어딘가 맛이 간 군사 국가도 아니었다. 이때의 스파르타는 미케네 계열, 쉽게 말해 아테네와 비슷한 성격의 그리스 국가다. 다만, 미케네 문명 시기는 청동기로 무장한 이륜 전차 전사들이 중심이었으므로 아테네도 스파르타도 고전기 그리스 문명과는 상당히 성격이 다르다. [68] 그래도 개인차는 좀 있어서, 제1차 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의 용장 레굴루스를 쳐부순 카르타고군 지휘관이 스파르타 출신의 용병대장 크산티푸스였다. 다만 이쪽은 어디까지나 용병대장이었고 지휘관으로서 싸운 것일 뿐 지휘한 부대는 카르타고에서 고용한 용병들이었다. [69] 아테네가 모든 자유인 성인 남성에게 참정권을 주었던 것도 아테네는 해군을 대규모로 운영했기 때문이다. 무기를 살 돈이 없어 보병이 될 수 없는 아테네의 무산자들은 갤리선에서 노를 저었는데, 노잡이는 배에 동력원을 제공하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이라 이들도 시민의 의무를 수행한 것으로 간주해 참정권을 준 것. 이 개념은 상당히 오랫동안 존속해서 20세기 중반까지도 그 영향력이 남아 있었는데, 서구권에서 여성이 유색인종보다 참정권을 늦게 인정받았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전쟁에 참가해 국가에 기여할 수 없는 사람은 국가에게 자신의 권리 역시 주장할 수 없다는 것. 여성 참정권 운동이 사회적으로 크게 불붙은 것도 제1, 2차대전 시기 여성들이 후방 보급 등의 보조 역할로 전쟁에 참여했고, 이것이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70] 심지어 당대의 스파르타인들 스스로도 이런 위험하고 무자비한 교육을 받다가 사람이 죽어 나가기 십상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스파르타에서 왕위 계승 순위가 높은 왕족은 아고게를 면제받고 가정교사에게 1:1로 별도의 교육을 받았는데, 왕위 계승자가 아고게를 수행하다 사망할 가능성을 그들 자신도 인지하고 있었으며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질 경우 여파를 감당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역대 스파르타 국왕 중에 아고게를 수료하고 왕위에 오른 이는 레오니다스 1세 아게실라오스 2세 단 둘뿐이라고 알려져 있다. 둘 다 원래 계승자가 아니었다가 맏형이 재위 중 적법한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서 본인이 얼떨결에 계승자가 된 사례로, 출생 당시에는 형이 있는 만큼 본인들은 왕위 계승 순위가 낮았다. 덤으로 아게실라오스 2세의 경우, 선천적인 장애인으로 태어나서 입지가 불안했기에 스스로 권위를 세우기 위해 자청해서 아고게를 수료했다고 한다. [71] 스파르타의 왕일지라도 일반 시민들과 똑같은 식사를 했다. [72] 노예가 빈 냄비를 들고 돌아다니면, 조원들이 빵 조각을 넣어 의사를 표시했다. 제대로 넣으면 승인, 찌그러뜨려 넣으면 반대라는 뜻. [73] 그리스어로 멜라스 조모스(μέλας ζωμός) 영어로 Black Soup, 혹은 Black Broth라 불리며, 돼지의 다리, 돼지의 피와 식초, 소금을 넣고 푹 우려서 만들었다. 영문 위키에 따르면 식초를 첨가한 이유는 유화제 용도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고 쓰여 있다. [74] 이걸 못 내면, 시민권 박탈이다. 다만 정상적인 시민이라면 다 헤일로타이가 경작해주는 농경지가 있었으므로, 어지간해선 못 낼 일이 없었다. [75] 뭐, 그래도 많은 스파르타인들은 그냥 먹었는데 학생 때 식사로 먹었지만 그마저도 마음껏 먹질 못해서 성인이 되면 먹을 만했다는 듯. 만들어지는 걸 보면 맛이 없을 만하다. 일반적으로 돼지피는 굉장히 비린데 그 스파르타에서 향료를 첨가해 감추려고 할 리가 없고, 간도 소금과 식초뿐이었다. 이러면 맛이고 자시고 굉장히 비리고 시큼한 괴악한 요리가 튀어나온다. 다만 상기 영상의 재연 결과를 봐도 알 수 있듯, 아주 못 먹고 토할 맛은 또 아니었을 것이다. 유튜버 본인도 생각만큼 끔찍하지는 않다면서, 못 먹지는 않겠지만 굳이 만들어 먹을 맛은 아니라는 의외로 무난한 평을 내렸으니까. 실제로는 거의 무(無)맛에 비린내가 좀 섞인 음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76] 다른 판본엔 향락으로 유명했던 이탈리아 남부의 도시인 시바리스의 사람이라고도 한다. [77] 이런 이유로 스파르타에서는 아이를 낳다 죽은 여성은 전쟁터에 나갔다 전사한 군인과 똑같은 예우를 받았다. 스파르타 못지않게 상무정신이 강했던 아즈텍 제국에서도 아이를 낳다 죽은 여성은 여신으로 숭배를 받으며 훌륭한 대접을 받았다. [78] 스파르타 여성을 묘사한 청동상을 보면, 남자 운동선수 같은 전라가 아니라, 짧은 치마 차림이다. 사실, 그리스어 γυμνός는 한국어의 '벌거벗은'이나 영어의 naked보다 의미범위가 넓다. [79] 테스토스테론의 영향으로 근육이 잘 붙는 남성과 달리, 여성은 운동을 많이 해도 우락부락한 모습이 되긴 힘들다. 대신, 발달한 근육이 신체부위를 잘 잡아주는 것은 마찬가지이므로, 탄력 있고 매끈한 체형이 된다. [80] 플라톤의 《국가론》에도 '여자도 운동을 하는 것이 합리적이기야 하지만, 여자가 허벅지를 드러내고 남자들과 함께 운동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우스꽝스럽기는 하다'라는 주장이 나온다. 당대 아테네인들의 여성의 노출에 대한 사회통념을 반영하는 발언일 것이다. 그나마 플라톤은 처음에는 우스꽝스러워보여도 적응되면 당연하게 여겨질 것이니 여자도 운동을 해야 한다는 맥락에서 말한거고, 여성 교육을 주장하는 등 당시 아테네 사회에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성관념의 소유자였는데도 이러하니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안 봐도 뻔할 것이다. 영화 300의 영향으로 스파르타의 남성들은 팬티만 입고 망토만 걸치고 돌아다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스파르타의 남성들도 천으로 된 옷을 입었고 전시에는 갑옷도 착용했다. [81] 스파르타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민의 기준을 '전쟁에 나갈 수 있는 국민'으로 쳤기 때문이다. [82] 여담이지만, 인간과 공동조상에서 갈라진 침팬지도 연구에 의하면 집단의 우두머리 자체는 수컷이지만 암컷들에게 평판이 좋지 못하면 자리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83] 열등하지 않은 전사들은 마음에 드는 여성을 거의 마음대로 임신시킬 수 있었으며 우수한 전사라면 이는 남편에게도 영광이었다. [84] "노인들이 '한때 우리는 용맹을 날리는 건장한 청년이었지'라고 노래하면 청년들이 '우리가 지금 그러하니, 원한다면 직접 와서 보시지' 라고 화답하고, 그러면 소년들은 '우리 곧 누구보다도 훨씬 강건하게 되리니’라고 받아서 합창하였다.", 플루타르코스, 『리쿠르고스』. "리쿠르고스는 스파르타의 연령 집단을 섞어놓았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자기들보다 더 경험이 많은 연장자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공동 식사를 할 때에는 시내에서 행해진 고귀한 행동들이 거론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결과 거기에는 무례함이나 폭음, 사악함이나 음담패설 같은 것은 거의 있을 수가 없었다. 여러 사람이 식사하는 관습은 더 유익한 결과를 가져왔으니, 30세가 넘은 사람들은 집으로 걸어갈 때 술에 취해 비틀거리거나 밤길을 헤매지 않도록 조심하게 되었다. 그들은 밤중에도 낮처럼 걸어야 했으며, 60세 이하의 병역 의무가 있는 자는 횃불조차 밝힐 수 없었다.", 크세노폰, 『라케다이몬 인의 국가 제도』. [85] '리쿠르고스는 여성에게 훈련을 가하였다. 경주, 씨름, 쇠고리, 창던지기 따위로 처녀들의 몸을 단련하여 튼튼한 모체에서 자녀들이 나며, 또 순산하게 되기를 도모하였다. 여자들이 부자연스럽게 안방에 숨어 있는 풍습을 버리고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몸을 노출시키고 행렬 속에 끼며, 제례를 드릴 때는 남자들이 있어도 춤을 추고 노래도 부르게 하였다. 남자들의 행동이 바르지 않을 때에 여자들의 야유는 질책으로서 큰 가치가 있었다. 장한 일을 해 여자로부터 칭찬받는 남자는 친구들의 축하를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물러갔으며, 여자들의 농과 야유에는 심각한 꾸중의 칼날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장소에는 연장자뿐만 아니라 왕과 원로들도 임석해 있었다. 처녀들이 이와 같이 나체를 보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추잡하지 않고 점잖으며 순박한 기질을 양성하고 건강의 가치를 가르쳐 주며, 남자 못지않게 영예와 용기를 사랑하기를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 『리쿠르고스』 [86] 그 예중 하나로 리디아 왕이 전쟁에서 이기려면 그리스의 가장 강한 도시의 도움을 받아야 된다는 신탁을 받았는데, 스파르타는 그 가장 강한 도시가 자신들을 뜻하는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리디아는 결국 페르시아에게 망했고 스파르타는 이에 분개하여 사신을 보냈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가 스파르타라는 말만 들어도 두려워할 것이라 생각하고 '이오니아 지방을 건드리지 말 것이며 이오니아를 건드릴 시 스파르타에 해명해야 할 것' 이라 주장했다. 문제는 이를 들은 페르시아 왕이 이오니아인 시종에게 "스파르타가 어디 있는 나라냐?"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이때 페르시아 왕은 알면서 모른 척한 게 아니라, 진짜로 몰랐다고. 분명 당시 스파르타는 그리스 최강국 반열에 있었다. 하지만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대륙에 영토가 걸쳐 있고 당시 서아시아에서 일어났던 국가 중 가장 넓은 강역을 차지한 페르시아 입장에서는 스파르타가 듣보잡이었을 만도 하다. 게다가 그때 페르시아 왕은 그 유명한 키루스 2세였다. [87] 당장 아테네의 시민들을 보면 상당수는 스파르타에서는 제2계급으로나 있을 이들이 많았다. [88]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옛날에 뛰어난 혈통의 후손이 조상들과는 달리 뛰어난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이유가 의외로 그런 부작용 때문일 수도 있다. 뛰어난 사람들의 후손인 유럽 왕가만 해도 시간이 좀 흐르자 죄다 서로 어느 정도는 연관되어 있었고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귀족들끼리는 생각보다 가까운 경우도 흔했다. [89] 아테네 역시도 무려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에서 20년이나 활동했음에도 시민권을 주진 않았다. 그래도 아테네는 나은 것이 페르시아 전쟁 당시 아테네와 스파르타 모두 자국의 노예에게 참전 대가로 시민권을 약속했고 스파르타는 약속을 어겼지만 아테네는 지켰다. [90] 다만 이게 처음부터 의도된 건 아닌게 원래 잭 스나이더 감독은 전형적인 라코닉 어투를 제라드 버틀러에게 주문했고 오케이 사인까지 받았으나 제라드가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본인이 다시 촬영을 요청했고 그 결과 나온 것이 300하면 흔히 떠오르는 그 명장면이다. [91] 아르고스인이 "당신네들 몇번이고 우리 땅을 밟더니(침략) 죽던데?" 식으로 자랑하려는 것이었다고 가정한다면 스파르타는 한술 더 떠서 "그래도 우리는 당신네 땅을 밟기라도 했지 당신들은 우리 땅을 밟지도 못했잖아?" 식으로 응수했다고 볼 수 있다. [92] 스파르타 입장에서는 거부할만도 했는데 시칠리아 원정 이후 아테네는 종속국들의 반발,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은 스파르타의 재전쟁, 자국내의 부유층들에 의한 쿠데타로 완전히 어수선해졌는데 이때에 사모스 섬에 주둔하고 있던 아테네 함대와 아테네 내의 중도파가 합작하여 쿠데타 세력을 몰아내고 3차례의 해전을 통해 제해권과 종속국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았다. 비록 곧장 리산드로스에 의해서 다시 반격을 받고 패전 직전으로 몰리긴 했지만 페르시아의 지원까지 받으면서 싸웠는데도 사모스 섬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일이 질질 끌렸으니 빡치긴 했을 것이다. [93] 사실 필리포스가 스파르타에 대한 공격을 단념한 것은 그때 즈음에 스파르타가 이미 몰락할 대로 몰락한지라 굳이 힘을 들여서 굴복시킨들 별 이득이 될 만한 것이 없는 깡촌에 불과했던 탓도 있다. 실제 이 주장은 친스파르타적인 플루타르코스의 주장이고 아리아노스는 필리포스 사후에 전 그리스가 마케도니아에 반기를 드는 상황에서 스파르타를 두고 (반란에 동참도 못하고) 조용히 분개하고 있었다고 표현했다. 결국 '만약에' 같은 무슨 패기 넘치는 상황이 아니라 힘이 없어서 반란에 동참도 못하고 찌그러진 채 입으로 까불어봐야 무시나 당하는 게 당시 스파르타의 현실이었다. [94] 다만, 스파르타인들이 건설했다던 이탈리아의 타란토는 이런 사고 방식이 확립된 리쿠르고스 체제 이전에 건설된 경우라 위의 예시에 대한 반례로 상관없는 듯하다. [95] '이곳에서 그는 크레오필로스의 후손들이 보존해온 것으로 보이는 호메로스의 시들을 처음으로 보고…열심히 이것을 베끼고 정리하였다. 그것이 스파르타에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본국에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호메로스의 이 서사시들은 이미 그리스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다소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의 시를 일부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다. 그러나 호메로스의 시를 최초로 만천하에 알려 유명하게 한 것은 바로 리쿠르고스였다.', 플루타르코스, 『리디아』 [96] Plutarch, Lacaenarum Apophthegmata(스파르타 여인들의 격언들), 241f. 영어로 직역하면 "Either this or upon this,"라는 뜻. 300(그래픽 노블)에서는 레오니다스 1세의 왕비 고르고가 이 대사를 하지만,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이 발언을 한 사람은 무명의 여인이라고. [97] 다만 소크라테스의 경우에는 그렇게까지 친스파르타적인 인물은 아니었는데, 제자 플라톤으로 인해서 친스파르타적인 이미지가 덧칠해졌다는 견해가 오늘날 들어와서는 대두되고 있다. 진정으로 스파르타를 흠모한 인물은 플라톤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는 스파르타 사회 제도의 군국주의적인 요소들을 혹독하게 비판한다. [98] 《The Making of Israeli Militarism》 By Uri Ben-Eliezer, Indiana University Press, 1998 [99] 스파르타는 농촌 연맹에서 도시 국가로서 규모가 확장되는 이후에도 '전사' 풍습을 탈피하는 것이 매우 늦었으며 자신들의 구식 이념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철학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구식 그리스 문화를 대표하는 스파르타에서 '전사 군인'들을 육성했던 것은 국가의 발전이 아니라, 노예들을 잔혹한 폭력으로 짓밟으면서 폐쇄적인 권력을 영원히 유지하기 위한 이유 때문이었다. 스파르타 시민들은 노예들을 열심히 때려죽일 수 있는 전사가 되는 방식 이외에는 경제적/기술적으로 구성원들의 분업화를 통하여 발전을 이룩하는 솔루션을 완성하지는 못했다. [100] 스파르타는 원시적인 전사 문화를 벗어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정치적 외교적 이유 때문에 그런 구식 문화를 벗어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했던 사회였기 때문에 주변 국가들이 발전을 이룩하는 시대에도 자신들의 결점을 보완하는데는 실패하고 몰락했다. 스파르타도 나중에는 페르시아한테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 아테네라는 신흥 그리스 세력의 장점을 배우는 뒤늦은 개혁을 시작했지만, 결국에는 아테네와 테베가 보여주는 빠르고 유연성 있는 사고방식과는 달리 자신들의 퇴보적인 가치관을 개선하지 못하고 사회적 진화를 실패했기 때문에 몰락해버렸다. [101] 스파르타의 군사력은 그리스 폴리스들의 초기 전쟁에서는 명성이 높았지만, 대규모 전쟁이 일상적인 시대에는 예상외로 효율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특히, 아테네에서는 페르시아 지역으로 진출하는 전문적인 그리스 약탈 용병들의 등장하고, 경무장 아테네 보병들이 스파르타 귀족 보병들을 엿먹일 수 있는 다양한 전략 전술을 개발하는 상황에서도 스파르타는 아테네가 스스로 자멸하기 이전에는 군사적인 발전에서 도리어 역전당하고 휘둘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즉, 아테네 마케도니아처럼 그리스 제국의 토대를 만들 수 있는 역량을 갖추기 시작하는 이웃 국가들이 새로운 전쟁을 경험하는 동안, 스파르타는 자신들의 앞마당에서 자신의 노예들을 때려죽이는 되는 수준의 '깡패' 목작에 만족하면서 스파르타의 군사력은 수백년 동안 미리 쌓아놓은 규모를 제외하면 점점 평범한 것이 되어갔다. [102] 사실 크레토스는 스파르타로 유입된 이민자이므로 실제 스파르타의 사회 구조상 장군이 될 수 없었을 거라고 한다. [103] 하지만 갓 오브 워 북유럽 사가의 두번째 작품인 갓 오브 워 라그나로크에서 크레토스도 아고게만큼은 굉장히 차갑게 평가했다. 아들은 스파르타인이 아니니 그런 식으로 자라서는 안 된다고. 그리고 아들의 이름인 아트레우스도 "스파르타 전사들 중에서 웃을 줄 아는 전사였기에 아들의 이름으로 삼았다"라고 말했다. [104] 당장 지구상에 현재 남아 있는 모든 사람들은 유전학적으로 잡종만이 남아 있다. 그리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순혈들도 결국 결과물들은 근친혼으로 인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례 정도이다. 또한 실상은 이들마저도 선대부터 이미 피를 마구 섞어왔던 '잡종'들이 그저 당대에 변덕을 부려서 최대한 피를 안 섞고 근친혼 한 것에 불과하다. 일부 차별주의적인 사람들이 순혈을 선망하지만, 현실은 순혈이 잡종보다 실용적으로 좋은 점은 단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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