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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8-02 01:42:58

태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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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d400>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태조 정종 태종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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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 고종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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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bf1400> 일생 <colbgcolor=#fff,#1f2023> 생애
조선 건국 관련 정몽주 암살
왕자의 난 제 1차 왕자의 난, VS 이방석 지지파 · 2차 왕자의 난
조선 왕조 기틀 완성 사병 혁파 · 관제 정비 · 공신 숙청 · 지방 행정 · 대명 외교 · 여진 정벌
파일:다른 뜻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태종(조선)/생애 문서의 4번 문단 참고.
경제 정책 일종의 지폐를 통용하기 위해 화폐 개혁을 실시, 그리고 대실패
외척 말살 신덕왕후 · 여흥 민씨 · 광산 김씨 · 청송 심씨
세종 왕세자 책봉 태종의 업적 중 가장 잘했다고 평가받는 업적 중 하나. 양녕대군 대신 충녕대군 인 세종을 왕세자로 책봉한 것.
가족관계 가족관계
일화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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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black,#ddd> 태조 <colbgcolor=#fff,#1f2023> 생애 | 건원릉 | 왕씨 몰살 | 이성계 여진족설 | 조선태조어진 | 전어도 | 종계변무 | 평가 | 여담 | 대중매체
<rowcolor=black,#ddd> 태종 생애 | 평가 | 헌릉 | 태종우 | 일화 | 가족관계 | 대중매체
<rowcolor=black,#ddd> 세종 업적 | 비판과 반론 | 특이한 기록들 | 한양 대화재 | 가족관계 | 영릉 | 대중매체
<rowcolor=black,#ddd> 세조 생애 | 광릉 | 어진 | 대중매체
<rowcolor=black,#ddd> 성종 생애 | 선릉
<rowcolor=black,#ddd> 연산군 생애 | 연산군묘
<rowcolor=black,#ddd> 선조 평가 | 목릉
<rowcolor=black,#ddd> 광해군 생애 | 대동법 | 평가 | 광해군묘 | 대중매체
<rowcolor=black,#ddd> 인조 평가 | 대중매체
<rowcolor=black,#ddd> 영조 인물(성격) | 대중매체
<rowcolor=black,#ddd> 정조 정조 어찰첩, 정조 한글어찰첩 | 가계 | 정조 어진 | 대중매체
<rowcolor=black,#ddd> 고종 생애 | 즉위 배경 | 홍유릉 | 평가 |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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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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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국왕 · 역대 왕세자 · 익조 ~ 연산군 왕녀 · 중종 ~ 고종 왕자 · 중종 ~ 철종 왕녀
※ 작호가 있거나 성년까지 생존한 사람만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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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대 정종 대 태종 대
이방석
(의안대군)
이방과
(정종)
이방원
(태종)
이제
(양녕대군)
태종 대 세종 대 문종 대 세조 대
이도
(세종)
이향
(문종)
이홍위
(단종)
이장
(의경세자)
왕세손

이홍위
(단종)
세조 대 성종 대 연산군 대 중종 대
이황
(예종)
이융
(연산군)
이고
이호
(인종)
명종 대 선조 대 광해군 대 인조 대
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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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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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소현세자)
인조 대 효종 대 현종 대 숙종 대
이호
(효종)
이연
(현종)
이순
(숙종)
이윤
(경종)
왕세손

이연
(현종)
경종 대 영조 대
왕세제

이금
(영조)
이행
(효장세자)
이훤
(사도세자)
왕세손

이정
(의소세손)
왕세손

이산
(정조)
정조 대 순조 대 고종 대
이순
(문효세자)
이공
(순조)
이영
(효명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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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왕세손

이환
(헌종)
순종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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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패 존령 · 선원선계 · 국왕 · 대군주
조선의 왕자(목조 ~ 연산군) / (중종 ~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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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d400> 정종조 태종조 세종조
태종 양녕대군 태종 문종
<rowcolor=#ffd400> 중종조 선조조 광해군조 인조조
인종 광해군 이지 효종
<rowcolor=#ffd400> 숙종조 경종조 영조조
경종 영조 장조 정조
<rowcolor=#ffd400> 순조조 고종조 순종조
익종 흥선대원군 순종 의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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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개국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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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392년 8월 20일 태조에 의해 책록
좌명개국공신 (1등)
김사형 <colbgcolor=#ffffff,#1f2023> 남 은1, 2 <colbgcolor=#ffffff,#1f2023> 남 재 <colbgcolor=#ffffff,#1f2023> 배극렴
오몽을1 이 제1, 2 이지란 이 화
장사길 정도전1, 3 정 총 정 탁
정희계 조 박 4 조인옥 조 준
김인찬5 이방간6, 7 이방원6 이방의6
협찬개국공신 (2등)
박 포8 유 창 윤 호 이민도
장 담9 정용수10 조 기 조 반
조영규 조 온 홍길민 조 견11
황희석12
익대개국공신 (3등)
고 여 김 균 김 로 손흥종13
심효생1 안경공 오사충 유원정
이 근1 이백유 이 부 이 서
이 직14 장지화1 함부림 황거정13
민여익11 임언충11 장사정11, 15 조영무11
한상경11 한 충11
1 1409년 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한 제명
2 1421년 태종 때 복권
3 1865년 고종 때 복권
4 1409년 친척의 아들을 정종의 아들로 속인 혐의로 인한 제명
5 1392년 9월 16일 태조에 의해 책록
6 1398년 2월 15일 정종에 의해 책록
7 1416년 2차 왕자의 난으로 인한 제명
8 1400년 2차 왕자의 난으로 인한 제명
9 1422년 2차 왕자의 난으로 인한 제명
10 1418년 조사의의 난으로 인한 제명, 1437년 세종 때 복권
11 1392년 9월 27일 태조에 의해 책록
12 1392년 11월 19일 태조에 의해 책록
13 1411년 이숭인, 이종학을 죽인 혐의로 인한 제명
14 1415년 민무회, 민무휼의 옥으로 인한 제명, 1422년 세종 때 복권
15 1417년 회안군의 첩과 간통한 혐의로 인한 제명
}}}}}}}}} ||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정사공신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398년 9월 17일 태조에 의해 책록
정사일등공신
김사형 <colbgcolor=#ffffff,#1f2023> 이거이 <colbgcolor=#ffffff,#1f2023> 이 무1 <colbgcolor=#ffffff,#1f2023> 이방간2
이방원 이방의 이 애 이 화
조 박 3 조영무 조 준 하 륜
정사이등공신
김 로 민무구4 민무질4 박 포5
신극례 심 종 이복근 이숙번6
이양우 이지란 이천우 장 담7
장사길 장사정8 장 철 정 탁
조 온
1 1409년 민무구, 민무질의 옥으로 인한 제명, 후에 신원
2 1416년 2차 왕자의 난으로 인한 제명
3 1409년 친척의 아들을 정종의 아들로 속인 혐의로 인한 제명
4 1407년 민무구, 민무질의 옥으로 인한 제명
5 1400년 2차 왕자의 난으로 인한 제명
6 1416년 불충, 불경죄로 인한 제명
7 1422년 2차 왕자의 난으로 인한 제명
8 1417년 회안군의 첩과 간통한 혐의로 인한 제명
}}}}}}}}} ||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역대 집권자 · 집권 붕당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조선의 역대 권력자
태조 정종 태종 세종 / 문종
정도전 이방원 정사공신
( 하륜, 조영무 등)
관학파, 종친
( 황희, 맹사성 등)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안평대군, 고명대신
( 김종서, 황보인 등)
정난공신
( 수양대군 등)
훈구파
성종 연산군 중종
대신 vs. 대간 대신 궁중파
( 임사홍, 신수근)
반정공신
( 3 )
사림파
( 조광조 등)
反김안로계
( 남곤, 심정, 이행, 이항 등)
김안로
(허항 등)
인종 명종 선조
대윤
( 윤임 등)
소윤
( 윤원형, 이기 등)
윤원형 vs. 이량 사림파 동인 vs. 서인 서인 동인
선조 광해군 인조
연립 ( 서인, 남인) 북인 탁소북 청소북/ 대북 대북
( 이이첨 등)
서인, 반정공신
( 이귀, 김류)
공서 낙당/ 원당( 서인)
효종 현종 숙종
산당( 서인)
( 송시열, 송준길 등)
서인 vs. 남인 남인 일부 서인
( 김석주 등)
서인
( 송시열 등)
탁남
숙종 경종 영조
소론 노론 소론 노론 온건 소론 노론
영조 정조 순조
완론 탕평 홍봉한 vs.
청명당 vs.
홍인한 정후겸
홍인한 정후겸 외척
( 홍국영 등)
소론
( 서명선 등)
준론 탕평
( 벽파, 시파)
벽파
( 심환지 등)
시파
( 김조순 등)
순조 헌종 철종
안동 김씨 세도가문
(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등)
고종
흥선대원군
(+ 풍양 조씨, 안동 김씨, 남인, 소론, 북인)
여흥 민씨
(+ 개화파)
흥선대원군 여흥 민씨
(+ 온건 개화파)
고종 순종
급진 개화파 여흥 민씨 김홍집
(+ 친일파, 친미파, 친러파)
근왕파 친일반민족행위자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color: #6700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고려|{{{#670000 고려왕조}}}]]
태조 혜종 정종定宗 광종
성종 정종靖宗 숙종 우왕
[[조선|{{{#ffd400 조선왕조}}}]]
태조 정종 태종 중종
선조 광해군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d0730, #1b0e64 20%, #1b0e64 80%, #0d0730); color: #ffd4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정종조 태종조 세종조 세조조
태조 태조 | 정종 정종 | 태종 단종
예종조 인종조 순종조
세조 중종 고종
조선 국왕 }}}}}}}}}

진승총(震乘總)
{{{#!folding [ 본기(本紀) ] 권1기
, 제1대 「태조기(太祖紀)」, , 제2대 「정종기(定宗紀)」, , 제3대 「태종기(太宗紀)」, , 제4대 「세종기(世宗紀)」,
이단 이경 이방원 이도
권2기
, 제5대 「문종기(定宗紀)」, , 제6대 「단종기(端宗紀)」, , 제7대 「세조기(世祖紀)」, , 제8대 「예종기(睿宗紀)」,
이향 이홍위 이유 이황
권3기
, 제10대 「연산기(燕山紀)」, , 제11대 「중종기(中宗紀)」,
이융 이역
권4기
, 제12대 「인종기(仁宗紀)」, , 제13대 「명종기(成宗紀)」,
이호 이환
권5기 권6기 권7기
, 제14대 「선조기(宣祖紀)」, ,제14대 수정기, , 제15대(중초본, 정초본) 「광해기(光海紀)」,
이연 이혼
권8~9기
, 제16대 「인조기(仁祖紀)」,
이종
권10기
, 제17대 「효종기(孝宗紀)」, , 제18대( 개수록) 「현종기(顯祖紀)」,
이호 이현
권11~12기 권13기
, 제19대( 보궐정오) 「숙종기(肅宗紀)」, , 제20대( 수정록) 「경종기(景宗紀)」,
이순 이윤
부록
금상(今上) }}}{{{#!folding [ 평전(評傳) ] 평전
이용 · 김종서 · 황보인
,「부록 사육신(死六臣)」, ,「부록 생육신(生六臣)」,
성삼문 · 박팽년 · 하위지 · 이개 · 유성원 · 유응부 김시습 · 원호 · 이맹전 · 조려 · 성담수 · 남효온 }}}{{{#!folding [ 부록(評傳) ] 저자 · 부록
이민보,저자, · 당파원론 · 국조연대 · 선원록 · 호송 금부도사의 작가 · 김지남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제3대 국왕
태종 | 太宗
파일:태종.jpg
태종 상상화[1]
출생 1367년 6월 13일
고려 동계군 함흥부 귀주동 이성계 사저
(現 함경남도 함흥시 함흥본궁)
즉위 1400년 12월 7일
조선 개성 수창궁 정전
(現 경기도 개성시 수창동)
사망 1422년 6월 8일 (향년 54세)
조선 한성부 수강궁 별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능묘 헌릉(獻陵)[2]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
1400년 3월 8일 ~ 1400년 12월 7일
조선 왕세자 | 조선 국왕 대리청정
1398년 ~ 1400년
제3대 국왕
1400년 12월 7일 ~ 1418년 9월 19일
조선 상왕 | 조선 국왕 대리청정[3]
1418년 9월 19일 ~ 1421년 10월 17일
조선 태상왕 | 조선 국왕 대리청정[4]
1421년 10월 17일 ~ 1422년 6월 8일
서명
파일:태종 이방원 수결.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방원(芳遠)[5]
부모 생부 태조 고황제
생모 신의고황후
양부 정종
양모 정안왕후[6]
형제자매 8남 5녀 중 5남
배우자 원경왕후
자녀 12남 17녀[7]
종교 불교 유교 ( 성리학)
유덕(遺德)
작위 정안군(靖安君) → 정안공(靖安公)[8]
전호 광효전(廣孝殿)
묘호 태종(太宗)
별호 성종(聖宗)
존호 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
(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9]
시호 조선: 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
(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10]
: 공정(恭定)
}}}}}}}}}
1. 개요2. 묘호와 시호3. 이름과 작위4. 생애5. 평가6. 일화7. 기타8. 가족관계9. 대중매체에서10.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업)을 성취할 사람은 반드시 일 것이다.
태조실록 총서

조선의 제3대 국왕. 묘호태종(太宗), 시호공정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恭定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 방원(芳遠)[11], 자는 유덕(遺德).

아버지 이성계와 어머니 신의왕후의 5남으로 태어났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려에서 관료 생활을 처음 시작하였으며 이후 아버지의 조선 개국을 누구보다 더 적극적으로 도왔다. 하지만 포은 정몽주를 살해하면서 아버지에게 큰 노여움을 샀고, 조선 건국 뒤에는 정안군(靖安君)에 책봉되었을 뿐, 정도전[12], 심효생, 남은과도 갈등하며 왕세자로 책봉되지는 못했다.[13]

이에 1398년(태조 6년)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을 일으켜 계모 신덕왕후의 소생이자 이복 막내동생인 왕세자 이방석과 이방석의 친형인 이방번[14], 세자를 지지하던 개국공신 정도전 남은 일파를 모두 숙청하고 권력을 모두 장악하였다. 이어 태조가 둘째 아들 이방과[15]에게 왕위를 넘기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남에 따라 사실상 차기 왕의 자리를 공고히 하였으며, 1400년(정종 2년)에 태조의 4남이자 동복형인 이방간이 일으킨 2차 왕자의 난마저 진압하고 그의 일파까지 모조리 숙청함에 따라 형인 정종에 의해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후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의 제3대 국왕, 태종으로 즉위하였다.

즉위 후에는 왕권의 강화를 위해 정적 뿐 아니라 자신의 집권에 기여한 공신들과 외척들을 냉정하게 숙청하였으며, 자신의 후계자인 세종의 선정(善政)의 바탕이 되었다. 그 외에도 사실상의 2대 군주로서 막 건국된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등 태종이라는 묘호에 어울리는 업적을 길히 쌓았다.

2. 묘호와 시호

"고애자(孤哀子) 사왕(嗣王) 신(臣) 【휘(諱).】[16]는 삼가 재배(再拜) 돈수(頓首)하고 상언(上言)합니다. 삼가 큰 덕(德)과 높은 공(功)은 전고(前古)에 뛰어나니 큰 이름을 시책(謚冊)에 나타내어 후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삼가 떳떳한 전장(典章)에 따라 휘호(徽號)를 올립니다. 공손(恭遜)히 생각하건대, 황고(皇考) 성덕 신공 태상왕(聖德神功太上王)께서는 총명(聰明)하고 신성(神聖)하며 용감하고 지혜로우며 너그럽고 어질어서 고려의 국운(國運)이 이미 다한 때를 당하여 천심(天心)의 돌아가는 바를 알고 태조(太祖)를 도와서 만세의 터전을 비로소 개척(開拓)하였습니다.

중국에 들어가 고황제(高皇帝) 를 뵈올 때 세 번이나 접견(接見)하는 총영(寵榮)을 받았습니다. 일이 기미(幾微)[17]가 아직 나타나지 않을 적에 환하게 알아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길이 평안(平安)하게 하였습니다. 천부(天賦)의 사랑이 오직 어버이에게 깊어 승안(承顔)[18]의 효(孝)에 지극히 독실(篤實)하였고,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우애(優愛)하여 이에 양덕(讓德) 의 빛을 내려 주었습니다.

무위(武威)는 바람과 우레보다 엄숙(嚴肅)하고 문치(文治)는 해와 달보다 밝았습니다. 교린(交隣)하는 데 도(道)가 있고 사대(事大)하는 데 정성(精誠)으로 하니, 덕화(德化)가 먼 데나 가까운 데나 흡족하여 은혜가 동물이나 식물에까지 미쳤습니다. 외람되게 큰 왕통(大王統)을 이어받은 것을 생각하여 나이가 오래되시도록 영화롭게 봉양(奉量)하리라 기약하였더니, 어찌 갑자기 승하(昇遐)하여 이에 말명(末命)[19]을 남기십니까?

울부짖고 통곡하는 마음을 견디기가 어려워 이에 현양(顯揚)의 의식을 거행합니다. 삼가 옥책(玉冊)을 받들어 존시(尊謚)를 ‘성덕 신공 문무 광효 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라 올리고, 묘호(廟號)를 ‘태종(太宗)’이라 하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밝으신 령(靈)이 충감(沖鑑)을 굽어 내리어, 길이 다복(多福)을 주시어 자손(子孫)을 무궁한 앞날에 보호하시고, 국가의 계책(計策)을 그윽이 도와주어 하늘과 땅과 더불어 구원(久遠)하게 하소서. 삼가 말씀드리옵니다."
태종실록 36권, 태종 18년( 1418) 11월 8일 갑인 4번째기사

我馬帶矢 于廐猝來 願陪聖宗 九泉同歸
말이 화살을 맞아 마구에 들어오거늘, 성종[20]을 모셔 구천에 가려 하시니.
용비어천가 권제10 제109장

태종(太宗)이란 묘호 자체가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공에 버금갈 임금에게 바치는 최고의 묘호이다. 사후에 업적을 인정받아 묘호가 태종으로 정해졌고 신하들의 찬사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21]

또한 용비어천가에서는 태종을 달리 불러 성종(聖宗)[22]이라 칭하였다. 일종의 '별호'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의 별호는 ' 성조(聖祖)'였었다.

3. 이름과 작위

파일:태종 이방원 수결.svg
태종의 수결(手決, 서명)

개국 전에 태어나 원래 왕족이 아니어서 피휘를 염두에 두고 이름을 짓지 않은 왕족이 왕이 되면 피휘 문제 때문에 개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태종은 승하할 때까지 개명 없이 흔히 쓰이는 꽃다울 방(芳)멀 원(遠)자를 휘로 계속해서 사용했다.[23] 사실 피휘에 대한 규칙을 담고 있는 예기 단궁 하(檀弓 下)편에는 공자의 모친 안징재의 예를 들면서, 피휘할 이름이 두 글자로 이루어진 경우에는 그중 한 글자만 쓰는 것은 허용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두 글자 이름도 실질적인 피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위 규칙을 따라 개명과 피휘를 모두 하지 않은 대표적인 사례는 중국사의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인데, 그가 죽은 뒤 낱글자 피휘 금지가 후손에 의해 뒤집히면서 책 한 권에 100번은 나올, 방원보다 더 흔해빠진 한자들인 세(世)와 민(民)이 따로 쓰이는 경우까지 모두 피휘되고 말았다. 그 바람에 이 두 글자의 형태가 변형되거나 아예 뜻이나 모양이 비슷한 다른 한자로 대체되는 바람에 복잡한 한자로 된 문서들이 당나라 때 잔뜩 생겨났다. 이런 사례를 의식해서인지 아버지 이성계는 왕이 되고 '이단'(李旦)으로 개명했고, 형인 정종 이방과는 '이경'(李曔)으로 이름을 바꾸었음에도, 정작 자기 아들들의 이름은 전부 외자로 지어놓고도 본인만은 원래 이름을 고집한 이방원이 독특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현재에는 아버지 이성계처럼 본명인 '이방원'으로도 유명하다. 위의 수결(手決, 서명)도 이름자인 '방원'을 갈겨 쓴 것이다.

자기 이름에 대한 애착이 있긴 했었겠으나, 피휘는 왕의 권위에 훨씬 더 중요한 예의였음에도 불구하고 선비와 양민들 불편하지 말라고 피휘 관리를 과감히 포기한 걸 보면 시원한 인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24] 아니면 단순히 자신의 권위에 자신감이 넘쳐 후대가 감히 자신의 결정을 뒤집지 못하리라는 생각에서 나온 과시적 행위일 수도 있다. 실제로 같은 시기 이전 왕조들에 비해 강력한 군주권으로 유명했던 명나라 황제들은 이전 시대와 달리 역시 흔한 한자로 된 이름을 가진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을 시작으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한자가 들어간 두 글자 이름을 여러 세대에 걸쳐 잘만 썼고, 이에 따른 낱글자 피휘 금지도 잘 지켜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방원은 자기 아들들의 이름은 비교적 흔하지 않은 부수를 사용한 외자로 지음으로써 본인의 사례를 관행으로 만들지는 않았고, 이 때문에 조선에서는 이방원이 독보적인 사례가 되었다.

왕자였을 때 받은 작위는 '정안군', '정안공(靖安公)'이다. 정안대군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조선왕조실록 원문에는 정안군 또는 정안공이라고 적혀있다. 태조 시절에는 정안군으로 기록되어 있고, 정종 시절에는 정안공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건국 직후 태조 대에는 고려 말기의 왕자 봉작제를 따랐다. 따라서 태조 대의 이방원의 호칭은 정안군이었다. 이후 1398년 9월 제1차 왕자의 난 직후 왕친의 봉작이 개정되어 임금의 친왕자의 호칭이 공(公)이 되었다. 이에 정종 실록에는 이방원의 호칭이 정안공으로 기록된다. 이후 태종 본인이 임금으로 즉위한 직후 태종 1년( 1401) 1월 공(公)이라는 호칭을 부원대군(府院大君)으로 개정했고, 이후 다시 대군(大君)으로 변경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 최초로 대군(大君)이 된 사람들은 이방원의 친형제들이었다. 태종의 아들들인 효령대군, 충녕대군은 관례를 마친 후인 1412년에 대군으로 봉해졌으며, 1414년 태종은 여덟살의 아들을 성녕대군으로 봉하며 왕의 아들로서 적비 소생은 대군(大君), 빈 소생은 군(君)으로 호칭을 완전히 법제 확정하였다.[25] 따라서 이방원은 '정안군', '정안공'이었던 적은 있으나 '정안대군'이었던 적이 없었다. 반면 이방원의 친형인 이방의와 이방간은 1401년 태종의 호칭 개정에 따라 각각 익안대군, 회안대군이 되었다. 그들도 이방원과 마찬가지로 태조 시절에는 익안군, 회안군이었고, 제1차 왕자의 난 이후에는 익안공, 회안공이었다.

연려실기술처럼 후대에 쓰인 책들에서 즉위 이전의 태종을 언급할 때 '정안대군'이라는 호칭을 쓰며, 조선왕조실록이 번역되기 이전의 예전 사극이나 소설 등[26]에서도 정안대군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정안대군이 틀린 표현이라며 이를 비난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후에 확립된 표기를 따라 관례적으로 대군이라 칭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 자체도 옳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이성계의 왕자들은 조선시대의 야사집이나 사적인 자리에서 옛날 일을 말할 일이 생기면 대군이라 호칭되었을 것이다. 왕과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친아들을 대군이라고 하는 것이 후대에는 자연스럽게 여겨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이성계의 직계 선조들이 싸그리 임금으로 추존되는 판에 나머지 왕자들을 대군으로 호칭하는 것은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공적으로는 이미 왕이 된 정종과 태종을 대군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었다. 이는 이미 더욱 높은 자리인 왕이 된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일반적으로 아무개 임금이라고 하지 아무개 왕자라고 하지 않는 데다, 어쩌다 왕자 시절의 호칭을 언급하더라도 대군 호칭 사용 이전의 과거 발언이나 표현을 인용하는 과정에서만 나왔기 때문이다.

4.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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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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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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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기타

8. 가족관계

총 12남 17녀 (9명 조졸)
원경왕후 신빈 신씨 의빈 권씨
장녀 정순공주
차녀 경정공주
아들(조졸)
아들(조졸)
아들(조졸)
3녀 경안공주
장남 양녕대군
차남 효령대군
3남 충녕대군
4녀 정선공주
6남 성녕대군
왕자(조졸)
5남 함녕군
6녀 정신옹주
7남 온녕군
7녀 정정옹주
8녀 숙정옹주
9녀 소신옹주
11녀 숙녕옹주
13녀 숙경옹주
16녀 숙근옹주
왕자(조졸)
5녀 정혜옹주
정빈 고씨
9남 근녕군
숙의 최씨
10남 희령군
숙의 최씨
11남 후령군,숙순옹주
선빈 안씨 소빈 노씨
8남 혜령군
12남 익녕군12녀 소숙옹주
14녀 경신옹주
10녀 숙혜옹주
효빈 김씨 김씨
4남 경녕군 15녀 숙안옹주
알 수 없음 이씨
왕자 2명(조졸), 옹주 2명(조졸) 17녀 후령군, 숙순옹주(숙의에게 양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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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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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관련 문서


[1] 현재 효령대군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실제 어진은 이미 조선시대에 소실되어 헌릉 봉향회에서 2013년도에 새롭게 제작된 상상화 어진이다. 아버지 이성계나 셋째 형 익안대군, 차남 효령대군, 그리고 손자인 세조의 얼굴을 통해 태종과 세종의 얼굴을 가늠해 볼 수 있다. 특히 태종 이방원의 친형인 익안대군의 초상화는 아버지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의 아들이나 손자 얼굴의 중간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에 태종 이방원의 용모를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 다만 태종까지는 곤룡포가 청룡포였다. [2] 서울특별시 서초구 헌인릉길 36-10 [3] 상왕 및 태상왕 신분으로 4년 동안 병권 등 일부 분야를 대리청정 하였다. [4] 세종이 즉위한 이후 부왕인 태종을 태상왕으로 높히려 계속해서 시도하였으나 태종이 극구 사양하였고 결국 태종은 마지못해 승하하기 1년 전인 1421년에서야 태상왕이 되었다. [5] 조선시대 중에서 묘호 대신에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군주이며, 끝까지 피휘와 외자 이름을 쓰지 않은 조선 사상 유일한 군주다 [6] 태종(조선)/생애 문단 참고. [7] 조선 군주 중 가장 자녀가 많다. [8] 왕의 적자를 대군으로 봉하는 작위 제도 개정은 태종이 왕이 된 이후이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진안대군과 달리 대군 작호 소급 적용 대상이 아니었다. 자세한 것은 대군 또는 후술 문단으로. [9] 굵은 글씨는 1871년 고종이 추가로 올린 존호이다. [10] 굵은 글씨는 1683년 숙종이 추가로 올린 시호이다. [11] 조선의 역대 왕 중에서 아버지인 이성계와 함께 묘호보다 본명이 더 유명하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왕위에 오른 뒤보다 오르기 전 행적이 더 유명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군주 중에는 매우 희귀하게도 피휘를 안 했던 것도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위 후 피휘를 위한 개명을 안 하는 대신 피휘 관리(처벌)도 안 하겠다는 관대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12] 아이러니하게도 정도전의 경우 이방원도 세자가 될 가능성을 열어놓은 입장을 취하기도 했지만 태조가 이방원을 배제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그 역시 신덕왕후 소생 자식들 중 이방석 쪽을 세자로 추천했다. [13] 이방원의 성격이나 정몽주 살해 등 과격한 행태에 이성계가 반감을 품었다는 추측 이외에 이방석이 이방번까지도 제치고 세자로 책봉된 것에 대해 철원 최씨, 안동 권씨, 황려 민씨 같은 고려 구 외척 세력과의 연결고리가 적은 편이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 조선왕조실록>에는 단지 이방번의 성격 문제로 이방석이 세자가 되어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 외에도 왕후 역시도 조선 개국에 많은 도움을 준데다 태조에 미치는 영향력이 지대했다는 점에서 그 소생인 이방석이 세자에 책봉되었다는 것 역시도 자연스러운 해석이다. [14] 방번은 원래 방원이 세자 문제와 관련 없었고 살릴려고 했으나, 태종 이방원 바로 위의 형인 회안대군이 " 역적은 하나라도 살려둬선 안된다"고 하면서 상의도 없이 성밖을 떠나는 방번을 길거리에서 그대로 죽여버렸다. 그 이후 갈등이 고조되어 제2차 왕자의 난이 초래되는 큰 불씨를 남겨놓게 된다. [15] 태종은 형 정종에게 묘호 대신 공정왕(恭定王)이라는 시호만 올렸으며 이로 인해 정종은 오랫동안 그 지위가 애매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정종(定宗)이라는 묘호는 300년이 지난 숙종대에 다시 올린 것. [16] 세종이 승하한 부왕(태종)에게 올리는 글이므로, 여기에 들어갈 휘는 세종의 본명인 '이도(李祹)'가 된다. 그러므로 비록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에는 뒤에 오는 조사가 '은'으로 쓰여 있지만, '이도'를 적용하면 뒤에 오는 조사는 '는'이 맞는다. [17] 낌새 [18] 즐거운 얼굴로 부모를 뵘. [19] 마지막 유언 [20] 聖宗, 이방원을 지칭함 [21] 또한, 종묘불천위(不遷位)[43]로 지정, 존재되어 종묘에서 신주를 별전인 영녕전(英寧殿)으로 내보내더라도 세실로 정함으로써 아버지 태조와 함께 영원히 종묘 정전에 모시는 크나큰 혜택을 누리게 된다. [22] 조선 9대 왕인 성종(成宗)의 묘호와는 한자 뜻이 다르다. [23] 이것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 중국사 대표 피휘 사례 중 하나인 한나라의 고조 유방이다. 이름이 '邦' 자인데, 건달에서 황제가 된 뒤에도 이름을 바꾸지 않아서 이 글자를 갑자기 못 쓰게 되어 버렸고, 그래서 그때까지 '수도' 라는 뜻으로 쓰이던 '' 자가 나라를 뜻하는 글자로 대신 쓰이게 되었다. [24] 태종이 쓸데없는 관습에 얽매인 사람이 아닌, 깨어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일화는 그 외에도 수없이 많다. 조선이 대역죄인에게 형식적으로는 능지형을 내리나, 실제로는 극히 비윤리적인 능지형을 안하고 거열형만을 하게 된 부분(물론 거열형도 끔찍하지만 능지형은 비교도 안되게 죽음의 고통을 너무 길게 가져간다)도 기록상 이방원이 언급하였기에, 이방원의 영향인 것으로 알려진다. 또한 왕이 죽으면 그 자식들은 음식을 가려 먹는게 당시 지극히 당연한 법임에도, 그 중에 제일 중요한 아들인 세종 고기를 좋아했다는 것 때문에, 자신이 죽어도 상중에 고기를 마음껏 먹으라고 유언을 그렇게 남기고 죽은 인물이기도 하다. [25] 효(孝)령, 충(忠)녕, 성(誠)녕의 군호는 돌림자 '-녕'을 제외하고 의도적으로 유교의 중심 가치인 효와 충성을 의도하여 작명되었고, 이후 왕자들은 원래대로 명목상 봉토로서 땅 이름으로 군호를 삼았다. [26] 조선왕조실록과 연려실기술을 같이 활용한 드라마 용의 눈물에선 정안군, 정안공, 정안대군 3가지 호칭을 모두 들을 수 있다. [27] < 맹꽁이 서당>에도 이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이 대성일갈을 들은 메뚜기가 "무식한 말씀 마시오. 메뚜기는 초식 곤충이라 곡식 외에는 안 먹소이다."라고 대꾸했다. [28] 이 둘은 서로 비슷한 점이 많은데 아버지를 도와 국가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경쟁자였던 형제를 제거했고 후계자를 세울때 문제가 많은 첫째아들을 폐하고 셋째아들에게 넘겨주었다. [29] 송충이가 크게 번져 사도세자 묘 근처의 소나무가 모두 말라죽는 일이 일어났다. 인부들이 잡아온 송충이를 집어 " 내 아비가 억울하게 죽어 이 곳에 누워 계신데 그 나무를 갉아먹는단 말이냐?"하고 호통을 치고 그 송충이를 씹어 삼켰다. 그러자 하늘에서 까치떼와 까마귀떼가 내려오더니 그 송충이들을 다 먹어치웠고 이후로 무덤 근처에 송충이가 싹 사라졌다는 전설. 당태종이나 조선 태종의 일화가 백성을 위한다는 면모를 강조한다면 정조의 일화는 효심을 강조하는 전개. [30] <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귀는 파초잎과 같고 눈은 작고 네 다리는 통나무, 코는 누에와 같다고 나온다. [31] 현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의 장도로, 현대에는 율촌산단을 조성하면서 매립해서 육지가 되었다. [32] 만약 1500여 년 전 로마에서 잡혔다면 코끼리는 황제 앞에서 글자를 쓰는 등의 재주를 익혀 나름대로 쓸만한 수준이 되었겠지만 조선은 코끼리 서식지와 멀리떨어져있고 중국 최남부지역이나 동남아 국가에서 사육사를 데리고오는게 만만치 않은 일이었고 그걸 감안해도 코끼리는 키우는데만 많은 비용이 소모되는 동물이었다. 오죽 비용이 많이 들면 아시아코끼리가 자생하는 남아시아 지역에서는 왕이 미워하는 신하에게 코끼리를 하사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코끼리를 키우려니 살림이 거덜나고 그렇다고 죽이거나 다른데 넘기려니 왕이 하사한 놈이라 불충이 되기 때문. [33] 무력의 관한 기록은 활을 잘쏘고 사냥을 활발히 했다고 언급되있다. [34] 취미가 사냥이었던 인물인만큼 진짜로 신체 능력이 빈약한 사람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애초에 그에게 '병약하다'란 평을 한 이성계가 고려의 무장 시절 패배를 모르는 장수이자 불세출의 신궁인걸 생각하면 걸러들을 필요는 있다. 거기다 태조가 이 말을 했던 시점이 이방원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기 직전이었는데 비록 정몽주를 죽인 미운 자식놈이긴 해도 나라를 위해 먼 거리를 가겠다고 하니 태조 입장에서는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조가 보기에 기특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을테니 이런 복합적인 마음 때문에라도 이런 말이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에는 명나라와의 사이가 좋은 편도 아니어서 자칫 잘못하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물론 당시 사정상 보낼 수밖에 없긴 했지만 이방원이 명나라에 가게 된 것은 자천타천이었는데 타천이 바로 정도전이었고 당연히 이는 남의 손을 빌어 죽더라도 좋지 않겠는가라는 차도살인의 심산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말이다. [35] 정도전에게는 아들이 넷 있었는데 1차 왕자의 난 당시 두 아들은 아버지를 구하려다가 죽었고 한 아들은 집에서 자살했다. 장남은 임금을 모시고 있어서 살아서 수군이 되었다가 태종 7년에 복직되었고 세종 시기 형조판서까지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36] 이방원이 이방간을 살려준 것에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는데 이미 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왕실 내에서 피바람이 몰아친 마당에 동복형제까지 죽였다가는 아무리 진압의 명분이 정당하다 해도 민심이 흉흉해질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앞으로 본인의 집권에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조선 왕실 전체의 정통성에도 흠집이 날 수 있었다. 그래서 책임을 박포에게 몰고 이방간의 목숨을 살려준 것. 이성계와 이방과가 동의한 것도 가족에 대한 애정뿐만 아니라 이 부분도 있었다. [37] 세종의 장인 심온의 경우 과민 반응이었다는 비판이 있다. 다만 이 경우 아들이 어떤 인물로 자라날지 모르므로 최대한 아들이 왕 노릇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내린 당시 기준으로는 나름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결과적으로 세종은 결단력과 총명함을 겸비한 명군이었지만 만약 세종이 능력은 뛰어나나 정에 약해 이리저리 휘둘리는 사람이었고 심온의 가족들이 권력욕이 있었다면 외척들에게 휘둘릴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 [38] 또한 심온 항목에도 보면 심온 본인은 몰라도 그의 집안 자체는 여러모로 자중하지 않고 태종의 심기를 꾸준히 건드렸다. 게다가 청송 심씨의 권력 역시 강력했기에 이미 태종이 숙청한 여흥 민씨에 못지않은 권력을 가진 가문이었기 때문에 태종의 숙청의 레이더에서 끝내 벗어날 수가 없었다. [39] 고려시대 과거는 진입 장벽이 조선시대에 비해 훨씬 높았다. 이유는 고려시대의 과거 제도는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무과를 치르지 않았고 문과와 잡과만 치렀기 때문이었다. 그러하니 경쟁률이 높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어려운 시험을 불과 17세(현재 고등학교 1학년, 당시 응시자 중 나이 기록이 있는 사람 중 최연소)에 해당하는 나이에 붙었으니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40] 정도전은 18세, 정몽주는 19세. 당대 여말선초의 제일 석학들과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는다. 특히 고려시대의 과거 시험은 족벌화가 매우 심해서 감독관의 제자들이 대부분 합격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더 고평가 받을 부분이다. [41] 1408년, 태종 8년. [42] 1433년, 세종 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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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옮겨지지 않는 존재, 세실은 종묘에 대대로 모셔도 5대의 대수에 포함되지 않는 큰 공덕을 쌓고 평가받은 왕에 한하여 정전(正殿)에 계속 모시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