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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6 13:33:09

잉글랜드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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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왕국
Kingdom of Eng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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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1] 국장[2]
파일:잉글랜드 왕국 지도.svg
[3]
<colbgcolor=#cf091f><colcolor=#fff> 927년 ~ 1649년[4]
1660년[5] ~ 1707년
<rowcolor=#fff> 성립 이전 노스햄프턴 조약 이후
칠왕국
웨식스 왕국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면적 151,058km²
위치 잉글랜드, 웨일스,[6] 아일랜드[7]
국교 가톨릭 성공회
언어 영어, 기타[8]
종족 잉글랜드인( 앵글로색슨, 노르만족), 웨일스인, 콘월인
수도 윈체스터 런던[9]
국가원수
정치체제 봉건 군주제(927~1215)
절대군주제(1215~1689)
입헌군주제[10](1689~1707)
주요 국왕 애설스탠[11]
윌리엄 1세
에드워드 1세
헨리 5세
헨리 8세
엘리자베스 1세
찰스 1세
윌리엄 3세
통화 파운드 스털링
언어별 명칭
영어 Kingdom of England
고대 영어 Engla rīce / Englaland
프랑스어 Royaume d'Angleterre
라틴어 Regnum Angliae / Anglia
기타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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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트어 Ingland
스코틀랜드 게일어 Sasainn
웨일스어 Lloegr
콘월어 Pow Sows
아일랜드어 Sasana
중세 게일어 Saxain
네덜란드어 Engeland
덴마크어 England
고대 노르드어 Ęngland
독일어 England
스페인어 Inglater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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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어 Inghilterra
그리스어 Αγγλία (Anglía)
헝가리어 Anglia
아랍어 إِنْجِلْتِرَا‎ (ʾingilter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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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0세기에 웨식스 왕조가 잉글랜드 전역을 통일하고 세운 왕국으로 927년에 웨식스 왕국이라는 국호를 잉글랜드 왕국으로 바꾸었다. 1707년에 스코틀랜드 왕국 통합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되었다.

한국의 도서에서는 이 나라를 그냥 '영국'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영국을 소개할 때 잉글랜드를 포함한 네 나라로 구성되었다고 이야기해놓고선 정작 역사를 설명할 때는 영국이라고 부르며,[12] 이 때문에 스코틀랜드나 웨일스가 등장하면 이들이 영국이 아닌 것처럼 되어 상당히 아스트랄해진다. 아예 국기를 연합의 상징인 유니언 잭으로 묘사해 놓은 학습만화도 상당하다(...).[13] 영국이 잉글랜드의 음역어이긴 하나, 그렇게 된다면 영국(=잉글랜드)하고 나머지 나라들이 모인 나라는 '연합왕국'이나 '그레이트브리튼'과 같이 영국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려야 할 것이다. 물론 여기 나무위키에서는 가급적 잉글랜드라고 부른다.

2. 역사

2.1. 웨식스 왕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07px-Anglo.Saxon.migration.5th.cen.jpg
브리튼 섬에 유입된 앵글로색슨인들은 브리튼인들을 컴브리아와 웨일스 등지로 몰아내고 8~9세기에는 부족마다 왕국을 성립해 최종적으로 칠왕국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서로 반목해 다투다가 8세기 후반즈음에는 웨식스, 머시아, 노섬브리아, 동앵글리아로 대략 네 개의 왕국으로 정립된다.[14] 이때 브리튼 섬에 바이킹들이 침략하게 되고, 이를 이교도 대군세라고 부른다.

4왕국은 이교도 대군세에 처참한 패배를 당하고, 동앵글리아와 노섬브리아는 완전히 멸망, 머시아는 영토의 절반인 동부를 모조리 빼앗겼다. 웨식스는 알프레드 대왕의 기치 아래에 단결하여 에딩턴 전투에서 바이킹을 물리쳐 국체를 보존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후 데인로 시대가 시작되어 잉글랜드인과 데인인의 불안정한 평화가 유지되다가, 알프레드가 죽고 그 아들 대 에드워드가 웨식스 왕으로, 에드워드의 누나인 애설플래드가 머시아의 영주[15]로 즉위하며 상황은 급변한다. 당대의 여걸 애설플래드는 무시무시한 공세로 머시아 동부를 수복해 나갔고, '데인로의 다섯 도시'라 불리는 동부의 영토 중 세 개의 도시를 정복했다. 이후 애설플래드가 노섬브리아의 전쟁 중 사망하자 에드워드는 조카딸 앨프윈을 수녀원으로 보내버린 뒤 머시아를 장악해 나머지 영토의 정복을 마치고, 파죽지세로 진격해 동앵글리아까지 멸망시켰다.

잉글랜드를 통일한 것은 에드워드의 아들 애설스탠이다. 애설스탠은 즉위하자마자 북진을 개시해 노섬브리아를 정복했다. 노섬브리아는 그때까지도 독립심과 바이킹 성향이 매우 강한 국가였어서, 정복 이후에도 바이킹의 침략이 다수 있었으나 여하튼 애설스탠은 마침내 잉글랜드 통일을 완수하고, 잉글랜드 왕국을 선포했다. 이때 웨식스 왕국이 잉글랜드를 통일하고 그 왕통을 이어나갔기에 체르디치 때부터 이어지는 이 계보를 웨식스 왕조라 한다.

애설스탠이 잉글랜드를 통일하자 위기를 느낀 바이킹과 브리튼인, 스코트인은 서로 연합해 잉글랜드를 공격하기로 했다. 더블린의 왕 올라프, 스코틀랜드의 왕 카우산틴 2세, 스트라드클라이드의 왕 오와인은 군대를 이끌고 남하해 잉글랜드 북부의 브루난버에서 애설스탠과 맞붙었다. 애설스탠은 연합군을 처절하게 도륙했고[16] 카우산틴 2세를 붙잡아 잉글랜드 왕의 신하가 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애설스탠의 영광은 당대에 그쳤다. 그가 죽자 즉위한 동생 에드먼드 1세은 애설스탠 정도의 능력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애설스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올라프는 재차 노섬브리아를 침략해 결국 요크 일대를 정복하는 데에 성공했고, 같은 시기 스코틀랜드의 침략과 약탈도 이어지다가 에드먼드 본인은 외출 중 도적의 칼에 맞아 죽었다.

에드먼드의 뒤를 이은 이드리드는 올라프를 무찌르고 재차 노섬브리아를 정복했으나, 이후 잉글랜드의 통일은 불안정했다. 여러 국가로 쪼개지지는 않았지만, 몇 명의 왕 또는 왕자들이 각자의 영지를 삼아 분할통치를 행했다.

이드리드가 죽자 즉위한 이드위그는 머시아와 노섬브리아 귀족들의 신임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잉글랜드는 다시 머시아-노섬브리아의 북부와 웨식스-켄트의 남부로 분열되었다. 북부를 지배하던 이복동생 에드거 1세는 이드위그가 죽자 그의 영지까지 흡수해 잉글랜드를 다시 통일했지만, 에드거 사후 순교왕 에드워드 애설레드 2세 사이의 왕위계승분쟁까지 일어나 불안한 정국이 이어졌다.

이는 에드워드가 어린나이에 독살당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결국 '준비 안 된 자' 애설레드가 왕위에 오른다.

2.2. 크누트 왕조

애설레드 2세는 잉글랜드에 존재하던 데인인 정착촌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하는 실정을 저질렀다. 기록에 의하면 1002년 11월 13일이었고, 그는 잉글랜드 내의 모든 데인인을 죽이라고 명령했으며, 이를 성 브라이스 축일의 학살이라고 한다.

당시 덴마크는 크누트 왕조의 사실상 개창자 하랄 1세 블로탄[17] 정책으로 지배계층의 일부가 기독교로 개종한 상태였는데, 그의 아들 스벤 1세가 아버지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이때의 덴마크는 더 이상 야만족 '바이킹'이 아니라, '덴마크'라는 이름 아래에 통일된 왕국이었다. 스벤은 애설레드의 학살을 구실삼아 잉글랜드를 대대적으로 침공했고, 1013년 애설레드를 쫓아내고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해 크누트 왕조는 잉글랜드마저 차지했다. 애설레드는 처가인 노르망디 공국으로 도주했는데, 이것이 훗날 노르만족의 정복을 부르는 화근이 되었다.

다음해 스벤이 갑작스럽게 급사하자 잉글랜드인들은 아직 군세를 수습하지 못한 스벤의 아들 크누트를 공격했고,크누트는 할 수 없이 잉글랜드 변방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영주들은 노르망디에 가 있던 애설레드를 불러와 복위시켰고, 한동안은 평화가 이어졌다.

1016년 애설레드가 죽자 아들 '굳건한' 에드먼드( 에드먼드 2세)가 왕위에 올랐다. 크누트는 우선 에드먼드와 나라를 나누어 통치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에드먼드가 죽자 잉글랜드 전역을 차지했다. 이때 에드먼드의 사인은 정확하지 않으나, 재밌는 야사로 그 유명한 변소 암살설[18]이 있다.

이후 크누트 왕조는 대략 한 세대 정도 잉글랜드를 지배했는데, 이때 애설레드 2세의 아내였던 노르망디의 엠마가 크누트와 재혼했다.

크누트 왕조의 지배 동안 고드윈이라 불리는 귀족이 크누트에게 신종한 대가로 웨식스 백작 작위를 얻어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렸다. 그는 잉글랜드에서 왕 다음가는 권력자였다.

크누트는 엠마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하레크누드에게 덴마크와 잉글랜드, 노르웨이 모두를 물려주려 했으나 그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통치하기 위해 스칸디나비아로 가 있던 사이 이복형 산토끼발 해럴드( 해럴드 1세)[19]를 잉글랜드 섭정으로 보냈다. 그러나 해럴드는 절반이 색슨족이었던 덕에 잉글랜드인들의 지지를 등에 얻을 수 있었고, 그대로 왕위를 찬탈했다.

해럴드가 죽고 나서야 하레크누드는 잉글랜드로 돌아와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레크누드는 겨우 잉글랜드 즉위 2년만에 요절했는데, 이때 그가 그때까지도 여전히 노르망디에 남아있던 이복형 에드워드를 불러들여 왕위를 넘겨주니, 그가 참회왕 에드워드다.

2.3. 노르만 왕조

에드워드는 자신이 왕이 될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으나 하레크누드가 자식이 없었던 점, 또 에드워드는 그와는 이복형제가 된다는 점에서 행운이 작용해 얼떨결에 웨식스 왕조를 부활시켰다. 그는 아버지 애설레드 2세가 노르망디로 피신을 와 있다가 다시 복위하러 돌아갔을 때도 여전히 노르망디에 남아 있었는데, 당시 노르망디 공작인 기욤 2세가 그를 잘 돌봐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화근이었다. 노르만인들과 함께 부대끼며 지낸 에드워드는 잉글랜드로 돌아가서도 노르만인들을 초청해 중용했는데, 잉글랜드인들은 이에 종종 반발했다. 그래서 산발적인 내분이 일어났고, 앞서 말한 권신 고드윈과의 대결도 피할 수 없었다.

최종 승자는 고드윈이었고, 이때문에 말년의 에드워드는 정치에 의욕을 잃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지은 후 종교생활에 몰두하다가 죽었는데, '고드윈의 아들' 해럴드( 해럴드 2세)가 재빨리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노섬브리아의 데인인 귀족 토스티그가 노르웨이 왕 하랄 3세 하르드라다에게 잉글랜드를 칠 것을 사주했고, 그는 실제로 잉글랜드를 쳤다.

노르망디 공국의 기욤 2세 역시 해럴드의 즉위에 반발했다. 그는 자신이 에드워드를 보살펴 주었을 때 에드워드가 자신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이라 했다며 주장했다. 근거는 없었지만, 배에 싣은 창칼이 곧 근거였다[20].

양쪽에서 적을 맞은 해럴드는 우선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하랄을 죽이고 다시 남하해 기욤과 맞서 싸웠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헤이스팅스 전투이다.

하랄과의 싸움에서 지쳐있던 잉글랜드군은 노르만군과의 싸움에서 밀렸고, 갑작스레 해럴드까지 전사하자 군사의 사기는 바닥을 쳐 순식간에 와해됐다[21]. 해럴드를 격파한 기욤은 잉글랜드 내륙을 향해 파죽지세로 진격했고, 1066년 런던에 입성해 왕위에 오르니, 정복왕 윌리엄 1세의 즉위였다.

다만 그때의 윌리엄은 아직 잉글랜드 전역을 차지한 것은 아니었다. 에드먼드 2세의 손자인 에드거 애설링이 살아있었고, 실제로 잉글랜드의 반 노르만 귀족들은 그를 구심점 삼아 윌리엄에게 항거했다. 또 에드거 역시 반란에 호응해 몇 차례 윌리엄과 싸웠지만, 모조리 패배했고, 최후의 수단이었던 스코틀랜드의 도움을 받고서도 마찬가지로 또 패배해 결국 윌리엄의 지배를 인정하고 작은 영지를 받아 신하가 되었다.

윌리엄은 계속해서 북진을 이어나갔고, 마침내 노섬브리아 전역을 정복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통일 당시에도 항거했던 조상처럼, 북부인들은 이민족인 노르만족의 지배에 순종적이지 않았고, 산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모조리 진압당했다. 윌리엄은 이에 분노해 노섬브리아 일대를 마구잡이로 파괴하고 사람들을 학살하니, 이를 북부 대학살이라 부른다.

노르만 정복 이후 잉글랜드는 노르만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 예로 잉글랜드의 인구를 조사한 둠즈데이 북을 보면 정복 이전에는 2천명이 넘는 앵글로색슨 영주들이 있었는데 정복 이후에는 오로지 3백 명 내외의 노르만 영주들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노르만 문화는 잉글랜드 곳곳에 새롭게 지어진 성당과 대륙식 성채들을 기반으로 뻗어나갔고 이러한 노르만 문화의 전파는 북유럽 문화권에 속해있던 잉글랜드를 서유럽 문화권에 편입시켜 가기도 했다. 동시에 노르만족은 현지의 앵글로색슨인과 공존하면서 살아갔고 기존의 풍습, 문화, 법을 존중하고 다수 받아들이면서 그들을 지배했다. 학살을 통한 공격적 확장과 포용과 수용을 통한 현지민과의 공존이 동시에 존재하면서 발전해 나갔다.

윌리엄이 프랑스 왕의 신하였던 탓에 잉글랜드 왕의 위치는 애매한 관계에 놓였다. 노르만 왕조는 프랑스 왕국 내에서 봉토를 늘리는데 열중할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잉글랜드 본토를 지배하기 위해 노력했고 아일랜드 섬까지 쳐들어가 지배하기도 했다.

노르망디 공국이 건재할 당시의 잉글랜드는 공작이 지배하는 가난한 식민지(...)쯤의 위상이었다. 노르만 왕조에서 웨식스 왕조의 정통성을 잇는다거나 보존한다거나 하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아서 옛 왕들이 사용하던 순수 영어 이름이 전부 잊혀지고 넘버링도 초기화되어버렸다. 이렇게 시궁창이었던 잉글랜드의 위상이 올라간 건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인이 제일 싫어하는 왕인 존 왕 덕분이다. 노르만족의 본진인 노르망디가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에게 죄다 뜯겨버렸기 때문.

2.4. 플랜태저넷 왕조

노르만 왕조의 헨리 1세는 하나뿐인 적자인 아들 윌리엄이 죽자 유일한 적장녀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5세의 황후인 마틸다를 여왕으로 즉위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잉글랜드에는 여왕이 없었기에 다른 왕족이나 귀족이 반발할 가능성이 컸고 헨리 1세도 그걸 우려해서 자신의 생전에 귀족들에게 마틸다에 대해 충성 서약을 시켰다. 여기에는 스티븐 역시 포함되어 있었으나 헨리 1세가 사망하고 앙주 백작과 재혼한 마틸다가 국외에 있을 때를 틈타 스티븐이 그냥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해버렸다.

왕위를 찬탈당한 마틸다 공주는 남편인 앙주 백작 조프루아 플랜태저넷의 군사를 빌려 이복 형제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와 손잡고 내전을 개시했다. 사촌 간의 내전으로 잉글랜드 국내는 봉건 영주인 힘있는 가신들이 힘의 공백을 틈타 분열되고 스코틀랜드 웨일스의 침공까지 받았다.

이후 1153년 1월부터는 어머니 마틸다를 돕기 위해 아들 헨리가 군을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해 전쟁이 재개되었다. 내전이 계속되던 중 스티븐은 왕위를 물려주려고 생각했던 아들 외스타슈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자 실의에 빠져 헨리와 윌링포드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조약 내용은 스티븐의 왕위 승계는 인정하되 마틸다의 아들 헨리를 공동왕으로 삼아 다음 왕좌를 물려준다는 것이었다. 이듬해 스티븐은 켄트 주의 도버에서 사망했고 윌링포드 조약에 따라 마틸다의 아들 헨리가 단독 통치자로서 즉위해 플랜태저넷 왕조가 시작되었다.

헨리 2세는 앙주 백작의 직위를 물려받고 아키텐 공작령의 상속녀 아키텐의 엘레아노르와 결혼함으로서 프랑스 왕국 내에 막대한 봉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후 잉글랜드 왕에 오르자 헨리 플랜태저넷의 영지 역시 잉글랜드 왕실의 영지로 포함되면서 잉글랜드 왕실이 프랑스 내부에 막대한 영토를 거느리게 되었다. 이로서 명목상 프랑스 왕의 신하였던 잉글랜드 왕이 가진 영토가 프랑스와 맞먹을 수준이 되었다.

리처드 1세 시기에는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해 맹활약했으나 결국 성지 탈환에 실패한데다가 내정도 어려워졌다. 그 다음 왕이었던 존 왕결지왕, 실지왕, 무영토왕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프랑스 왕국 내 플랜태저넷의 영지를 대부분 상실한다. 이런 존 왕의 실정에 귀족과 백성이 존 왕을 협박해 마그나 카르타(대헌장)를 받아냈다.

이후 에드워드 1세 시기에는 의회가 최초로 소집되고 웨일스를 복속시켰다.[22] 스코트인들의 망치라는 별명답게 스코틀랜드도 정복해 잉글랜드 왕인 그가 스코틀랜드 왕까지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 로버트 1세에게 패배해 결국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에서 쫓겨났다.

에드워드 3세 시기가 되면 플랜태저넷이 가진 프랑스 내 잔존 영토에 대한 지배권과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 등이 겹쳐 백년 전쟁이 일어났다. 초반에는 장궁을 앞세워 승리를 거듭했지만 잔 다르크를 앞세운 프랑스의 반격에 밀려나 칼레를 제외한 모든 대륙 영토를 상실하고 쫓겨난다.

백년전쟁이 끝나고 2년 후인 1455년 장미전쟁으로 불리는 플랜태저넷 왕가의 분파인 랭케스터와 요크의 대결이 30년간 벌어졌고 결국 헨리 튜더가 왕이 되었다.

2.5. 튜더 왕조

헨리 7세는 왕이 되었지만 정통성 문제로 반란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나 그 반란들을 진압하고 왕실의 땅을 엄청나게 늘렸고 그의 치세에 세무 행정을 엄격하게 집행해 재정적으로 매우 풍족해졌다.

헨리 8세가 즉위하면서 잉글랜드는 큰 변화를 맞게 된다. 헨리 8세의 결혼 문제와 잉글랜드 교회-로마 가톨릭의 대립 등의 문제가 겹쳐 헨리 8세가 가톨릭과 연을 끊고 잉글랜드 국교회[23]를 창설해 자기가 그 수장을 하겠다고 한 것이다. 뜬금없이 국교회를 선포한 것은 아니어도 가톨릭에서는 엄청난 반발을 보였지만 헨리 8세는 무력 탄압과 수도원 재산 몰수로 대응했다. 그러나 성공회가 바로 확고한 주류에 올라서는 것은 불가능해 메리 1세가 다시 국교를 가톨릭으로 돌렸다가 엘리자베스 1세가 다시 국교회를 국교로 지정하는 등 종교 문제로 갈등이 심각했다.

그 와중에도 튜더 왕조는 당시 스페인 포르투갈의 독무대였던 아메리카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엘리자베스 1세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시켜 스페인의 상선을 약탈하고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했고 본격적으로 북미 개척에 나섰다.

2.6. 스튜어트 왕조

엘리자베스 1세는 후사 없이 죽었고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던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 제임스 1세라는 이름으로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이로써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 동군연합을 이루었다.

왕이 영향력이 강했던 잉글랜드와 달리 스코틀랜드는 제임스 1세가 직접 베네치아 도제만도 못하다고 할 정도로 권력이 보잘것 없었을 뿐더러 네덜란드의 부상으로 해상 제국으로의 팽창에 제동이 걸림에 따라 재정이 악화되어 왕권도 약화되기 시작했다. 헨리 7세가 귀족을 견제하겠다고 등용한 요먼 젠트리들은 왕에 맞서기 시작했고 제임스 1세는 비록 이들과 대립을 벌였지만 그럭저럭 타협하면서도 안정적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다스릴 수 있었다.

하지만 찰스 1세에 이르면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 찰스 1세도 재정적으로 쪼들리기는 마찬가지였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만큼의 타협 능력이 없었다. 그는 의회를 장악한 요먼, 젠트리 청교도들과 정치적, 종교적, 재정적 이슈로 극심한 대립을 벌였고 결국 잉글랜드 내전이 일어났다. 찰스 1세는 잉글랜드 내전에서 패배했고 결국 목이 잘려 왕의 권위는 큰 타격을 받았다.

찰스 1세를 처형한 올리버 크롬웰은 잉글랜드 왕국[24] 스코틀랜드 왕국의 왕정을 폐지하고 잉글랜드 연방을 선포했으나 그가 죽자 얼마 못가 왕정복고가 이루어져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즉위했다. 크롬웰의 통치에 질린 잉글랜드 백성들은 찰스 2세에 강력한 지지를 보냈고 찰스 2세도 찰스 1세보다는 정치적으로 유연하게 대처해 의회와 타협하면서도 의회에 우위를 점하면서 다스릴 수 있었다. 제임스 2세는 찰스 2세만큼 유연하지는 못했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소수파로 밀린 가톨릭 신자였다. 결국 의회는 명예혁명으로 제임스 2세를 몰아냈고 메리 2세 윌리엄 3세가 공동 왕으로 즉위했다. 두 왕의 즉위와 함께 권리장전이 승인되어 왕의 권한에 큰 제약이 가해졌다.

한편 크롬웰 시기부터 해상 패권을 장악하는 데 노력했던 덕분에 다시 네덜란드를 밀어내고 해상의 패자로 등극할 수 있었다. 이 때가 되면 유럽에서 강대국으로 인정받아 당시 유럽 최강국이었던 프랑스 왕국을 견제하는 등 유럽의 세력 균형 유지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2.7. 영국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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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잉글랜드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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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관직

잉글랜드 왕국의 관직의 시발점은 칠왕국 샤이어 리브로 거슬러 올라간다.그뒤 중세 중기인 12세기가 되면서 점차 왕권 강화와 맞물려 여러 관직들을 신설하기 시작했다. 1644년에는 내각 제도가 만들어지면서 각 부처간의 의견 조율이 가능해지게 된다.

4.1. 궁정 관직

4.2. 군사 관직

5. 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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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 조지의 십자가기. 1189년 제3차 십자군 원정 때부터 사용. 다만 백년전쟁 당시에는 프랑스 왕위 주장을 위해 왼쪽의 문장에 기반한 왕실기(Royal Banner)를 전쟁터에 들고다녔다. [2] 파일:800px-Royal_Arms_of_England_(1399-1603).svg.png 소형 문장. 1399년부터 스코틀랜드와 동군연합 직전인 1603년까지 사용했다. 다른 시대의 국장은 이곳 참조. [3] 1190년의 잉글랜드 왕국 [4] 찰스 1세를 처형한 올리버 크롬웰은 왕정을 폐지하고 잉글랜드 연방을 선포했다. [5] 올리버 크롬웰이 죽자 얼마 못가 왕정복고가 이루어져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즉위했다. [6] 13세기 말부터 웨일스 공국 편입으로 간접지배. 16세기 중반 폐지 및 합병. [7] 잉글랜드 왕국의 영토는 아니고 아일랜드 영지로 간접 지배. [8] 노르만 왕조, 플랜태저넷 왕조 시대의 왕실과 고위 귀족들은 노르망디 방언의 중세 프랑스어를 구어(口語)로 사용했고 중세 성직자들과 지식인들은 라틴어를 문어(文語)로 사용했다. [9] 윌리엄 1세 때 천도 [10] 엄밀히 말하면 불문헌법 군주제로,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입헌군주제와는 조금 달랐다. [11] 잉글랜드 왕국의 초대 국왕이다. [12] 다만 편의상 영국이라고 부르겠다고 양해를 구하는 작가들도 있다. [13] 엄밀히 말해 12세기 중반 플랜태저넷 왕조부터 사용한 국기인 성 조지 십자기나 로열 배너인 붉은 바탕의 노란 사자 셋이 그려진 깃발을 그려넣는 것이 합당하다. [14] 다른 국가들은 명목상의 속국 형태로 존속하기도 했다. [15] 머시아의 마지막 왕은 그녀의 시아버지인 체올울프 2세이다. 남편이자 체올울프의 아들인 애설레드부터는 왕이 되지 못했고, 따라서 남편을 계승한 그녀 역시도 왕이 되지 못했다. [16] 앵글로색슨 연대기에서는 이전까지 그 전투보다 더한 살육은 없었다고 기록한다. [17] 하랄의 아버지인 고름 가믈리가 기록상 실존이 확인되는 최초의 덴마크 왕이므로 그가 개창자라고 할 수 있지만, 덴마크를 통일한 것은 그 아들인 하랄이다. [18] 변기 속에 숨은 암살자가 똥을 누던 에드먼드의 항문을 찔러 죽였다는 설이다(...) [19] 어머니인 앨프기푸가 잉글랜드인이다. 스벤 1세는 정복 당시 북부 잉글랜드의 충성을 확인하기 위해 잉글랜드 귀족 여인과 아들 크누트의 결혼을 주선했는데, 그때의 여인이다. [20] 그는 해럴드가 즉위하기 이전부터 진즉에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즉 에드워드의 말이 진실이건 아니건 잉글랜드를 노리고 있었다는 의미. [21] 반대로, 노르만 진영에서는 기욤의 전사 소식이 퍼졌다가 기욤이 나타나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자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22] 이미 웨일스는 잉글랜드에 복속되어 있었으나 명목상의 복속에 불과했고 사실상 웨일스 유력자들의 자치가 이루어졌다. 이들을 실질적으로 복속시키기 위해 전쟁을 벌인다. [23] 훗날의 성공회 [24] 아일랜드 왕국이 병합되어 있었다. [25] 인장 반지 [26] 중세 중기가 되기까지 중세 유럽인들에게 성씨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