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43대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Diocletia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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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 |
출생 | 242/245년 12월 22일 |
로마 제국 달마티아 | |
사망 | 311/312년 12월 3일 (향년 68세) |
로마 제국 달마티아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284년
11월 20일 ~
305년
5월 1일 (20년 16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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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자 | 카리누스 |
후임자 |
갈레리우스 동방 콘스탄티우스 1세 서방 |
배우자 | 아우렐리아 프리스카 |
자녀 | 갈레리아 발레리아 |
종교 | 로마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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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능한 지도자와 야만족의 침략으로 곤경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던 제국을 구출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일리리아 지방 출신 농민들[1]이 그 일을 해냈다.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의 제43대 황제이자
사두정치 체제(테트라키아, Tetrarchia)의 창시자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테오도시우스 대제를 로마 제국 분할의 아버지로 친다면, 그는 군인 황제 시대와 혼란을 끝낸 황제였다.[2]- 에드워드 기번
그외에도 콘스탄티누스 1세 시기 ~ 마우리키우스 시기에 해당되는 여러 군사, 정치, 사회 제도는 그 근본을 찾으면 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시초였던 것이 많다. 다만 일구어낸 업적은 콘스탄티누스 1세, 테오도시우스 1세, 유스티니아누스 1세를 가리키는 3대제 이상임에도 제대로 평가받진 못했고, 그 이유는 당대에도 혼란을 끝냈다는 평가 외엔 그렇게 많이 인기 좋은 황제는 아니었기도 하거니와 그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황제[3]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업적과 내용이 구체적으로 재조명된 것은 체제적, 유물론적 연구가 활성화된 근대의 이야기였다.
2. 생애
2.1. 황제 이전 시기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에 의하면, 황제가 되기 전 이름은 디오클레스(Diocles) 또는 디오클레스 발레리우스(Diocles Valerius)였다고 한다.서기 244년에 지금의 크로아티아 지방인 달마티아 지방의 스플리트[4] 근처의 살로나[5]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하층민 출신이었던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왜냐하면 콘스탄티누스 2세부터 테오도시우스 1세까지 고위관직을 지낸 《약사》의 저자인 에우트로피우스[6]에 따르면,
"(후세) 대부분의 작가들은 그가 서기의 아들이라고 말했지만, 어떤 이들에 의하면 아울리누스라는 원로원 의원의 해방노예의 아들이었다."
고 말하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하층민 출신임에 더 무게를 뒀기 때문이다. 이는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콘스탄티누스 왕조 및
발렌티니아누스 왕조를 찬사한, 익명의 저자가 라틴어로 적은 《황제의 전형》(에피토메 데 카이사리부스)에도 비슷하게 적혀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여러 이야기와 달리 전임 황제인
카루스는 나르보 태생의 로마 귀족이었다고 하며,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원로원 의원인 아울리누스의 노예 부부가 낳은 아들로서 달마티아인이었고, '디오클레스'라는 이름의 뜻은 '디오클레아'라는 도시에서 따온 이름이며, 디오클레스의 부모는 그를 낳은 뒤에야 자유를 얻었다고 한다.《황제의 전형》의 기록 역시 신빙성이 떨어지나, 적어도 위서로 분류될 정도로 신빙성이 크게 떨어진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와 달리, 조작된 흔적은 적다는 평이다. 《황제의 전형》 주장을 간접적으로 지지하듯이,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즉위 전 삶과 즉위 이후 삶 모두에서 해방노예 부모를 둔 하층민 출신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도움을 준 사람은 부모의 옛 주인 아울리누스의 아들 가이우스 안니우스 아울리누스였다.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안니우스 아울리누스는 이탈리아 혈통으로 아프리카 속주에 본적을 뒀던 로마 귀족이었다. 그는 클리엔텔라 관례에 따라 옛 파트로누스로 아버지와 함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카루스, 누메리아누스 아래에서 경호대장까지 오르는데, 힘을 썼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즉위한 뒤에도 그를 지지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7] 특히, 그는 302년 7월 1일부터 305년 7월 1일까지 아프리카 속주에서 총독으로 있으면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탄압 칙령을 따랐던 것으로 유명하다.
하층민 출신임이 확실한 만큼, 초기 행적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젊은 시절 직업군인의 길을 선택하고, 일반 병졸을 시작으로 하급 장교까지 가는 내내, 그에게 막대한 도움을 주면서 중앙 정계까지 길을 터준 쪽은 확실히 부모의 옛 주인 부자인 듯 하다.[8] 하지만 이 역시 그가 어떤 삶을 보냈고, 군단에서의 경력이 어땠는지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물론, 조작된 기록이 많아 신뢰받지 못하고 있는 《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로마 황제 열전)에서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갈리아에서 복무했다고 하는데, 아우렐리아누스나 프로부스 같은 군인 출신 황제들과 달리 구체적이지 않고, 이 기록 홀로 주장하는 탓에 수많은 연구자들에게 무시를 받고 인정되지 못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이름이 등장한 것은 대략 프로부스 황제의 뒤를 이은 원로원 의원 출신의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 대장 카루스가 제위에 오른 이후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카루스 황제의 은덕과 안니우스 아울리누스의 후원 등으로 38세의 나이에 카루스의 차남인 누메리아누스 황제를 경호하는 프로텍토레스의 기병 지휘관으로 있었다. 이후 그는 카루스와 누메리아누스 부자를 따라 동방의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쟁에 참전했다. 카루스 황제의 로마군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셀레우키아를 점령하고, 티그리스 강을 건너 수도인 크테시폰마저 장악하면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283년 8월 벼락이 황제의 막사에 떨어져 카루스 황제가 즉사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따라서 원정군은 혼란에 빠졌고, 젊은 누메리아누스 황제는 망연자실해 어쩔 줄 몰라했다.
2.2. 황제 즉위
283년 여름 이후 서방은 카리누스, 동방은 누메리아누스가 맡았는데, 정황상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누메리아누스 밑에서 동방에 머물렀던 것이 확실했으며 누메리아누스는 원정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한 듯 하다. 고대기록들에 따르면, 누메리아누스는 최고사령관으로 맡아야 할 의무나, 다른 어떤 조치를 하지 못한 채 아버지의 죽음으로 의욕을 완전히 잃고 말았던 터라, 철군을 지시했다.이때까지 누메리아누스는 확실히 건강했는데,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귀국하던 중, 그는 눈병에 걸리게 됐다. 그런데 이때 프라이토리아니 친위대장으로 젊은 황제의 장인인 아리우스 아페르(Arius Aper)는 새 황제가 병에 걸렸으니 마차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이 인물은 후세 로마인들에게 카루스를 암살했다는 의혹이 있는 사람인데, 이 사람 외에는 어떤 병사들도 황제가 탄 마차 근처도 접근하지 못했다. 그리고 원정군과 황제가 탄 밀폐된 마차는 시리아의 에메사를 시작으로 북쪽의 비티니아까지 질서정연하게 올라갔다.
그런데 소아시아에서 트라키아로 향하는 보스포루스 해협에 당도하기 직전인 284년, 숙박 예정지인 비티니아에 도착한 상황에도 누메리아누스는 병사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원정군 병사들 사이에는 북쪽으로 향하는 동안 이상한 냄새가 났다는 이야기도 돌던 터라, 황제 호위 경호대장이던 디오클레스(훗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가 탄 마차 안을 열게 했다. 이때 일에 관해 에우트로피우스와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등은 디오클레스와 그 부하들이 마차를 연 순간 시체가 부패한 냄새가 났고, 커튼이 외부에서 마차를 볼 수 없도록 가려져 있었는데, 커튼을 걷어내자 침상 위에 칼에 찔린 뒤 죽은 채로 누워 있는 황제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누메리아누스가 암살된 채 발견되자, 장군들은 사태 수습 및 황제 승계 여부를 위한 긴급회의를 니코메디아에서 그해 11월 열었는데, 황제의 장인 아페르는 지지를 호소했다. 그러나 장군들은 서방의 카리누스나 아페르에게 충성을 선언하지 않고, 누메리아누스의 경호대장으로 이번 사태와 무관한 디오클레스를 황제로 선정하고 그를 옹립했다. 이때 로마식이고 세련된 이름인 디오클레티아누스로 개명하였다. 새 황제가 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보라색 망토를 입은 뒤, 누메리아누스 암살범과 자신이 무관함을 다시 선언했다고 하며 자신의 칼을 태양에 비추어 맹세를 한 뒤, 아페르를 황제 암살죄로 단칼에 베어 죽였다.[9]
누메리아누스의 형 카리누스와 모에시아에서 전투를 벌여, 초반에는 지고 있었지만[10] 카리누스가 부하에게 암살되어[11] 죽은 후, 싸움은 흐지부지되었고 그에 따라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면서 단독 황제가 되었다.
2.3. 황제 시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로마 제국 황제에 올랐을 당시의 로마 제국은 3세기의 위기라는 미증유의 혼란 상태에서 헤매던 시기였다.규모와 세력, 체제 측면에서 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해진 게르만족과, 파르티아보다 강력한 국력을 구축하고 동방 일대의 안전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한 사산조 페르시아로 대표되는 외부의 위협 및 날로 더해지던 재정난 그리고 빈번한 내전으로 대표되는 내부의 문제가 이미 심각해질 대로 심각해져 있던 것이 3세기 당시의 로마 제국의 상태였다.
다행히 로마군은 세베루스 왕조의 황제들과 갈리에누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오랜 노력 끝에 제국을 수호할 만한 힘을 확보하고 있었고, 그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당면한 제국 방위를 수행했다.
이때의 로마 제국 군대는 종래의 레기온 체제에서 탈피한 지 오래로, 페르시아식 군사 제도와 야만족의 군대 양상을 취사 선택 및 개조한 상태였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때에 본격적으로 중장기병대인 클리바나리의 아이디어가 적극적으로 차용되기 시작했고[12], 카라칼라 황제 때에 종심방어에 필수적인 기동타격대 아이디어가 도입되었다. 갈리에누스 황제는 북부 이탈리아에 기지를 둔 상설 예비대를 창설했고 기병의 비율을 세 배 가까이 높였으며 무어인 경장 기마 투창병과 달마티아 외인 기병 부대, 강력한 복합궁을 사용하는 오리엔트 궁수 부대, 페르시안 장창병대, 쐐기꼴 대형으로 전투하는 게르만계 보병, 낙타부대 등을 적극적으로 도입했고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중장기병대인 클리바나리가 대폭 확대되어 이후 동로마 제국이 천 년을 더 버티게 한 새로운 군대의 원형이 갖추어진 상태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이러한 새로운 군대를 이끌고 내우외환을 진압해나가기 시작한다. 서방에서는 동료였던 막시미아누스를 285년에 부제로, 286년에 공동 정제로 올려[13] 서로마 일대로 파견, 갈리아 일대에서 일어난 바가우다이[14] 반란을 287년에 강경 진압하고 제국 해군을 확충, 볼로뉴[15]항에 해군 기지를 건설해 프랑크 해적들의 공세를 저지하게끔 한다. 그런데 얼마 안 가 그 사령관으로 발탁했다가 비리를 저질렀는데 그 규모가 커서 사형밖에는 답이 없어[16] 도망가 브리타니아에서 독립을 기도한[17] 카라우시우스 또한 사두정치 이후 이 지역을 관할하게 된 서방 부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에게 진압된다.
동시기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 외의 반란 세력인 카르타고의 율리아누스, 알렉산드리아의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도미티아누스와 아우렐리우스 아킬레우스를 모두 강경 진압, 내부의 문제를 정리하고 사산조 페르시아 또한 부제 갈레리우스의 활약에 힘입어 승리, 외적의 침공도 저지한다.[18] 아르메니아의 쫓겨난 왕자[19] 티리다테스 3세를 287년 바흐람 2세와의 조약으로 왕위에 올리는 등 대외 영향력도 뻗쳤다.[20] 289년에는 동북방 유목민이었던 사르마티아족과 싸워 승리했다. 291년에는 오늘날 에티오피아 지역의 악숨 왕국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후 그는 전면적인 체제개혁을 수행하여 전제정을 구축하고는 서기 305년, 돌연 은퇴한다.
2.4. 은퇴와 그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03년 11월 20일 세 명의 황제와 함께 로마시에서 그동안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때 로마 시민들이 디오클레티아누스를 군주나 황제로서 대하기보다 그저 귀족적인 지도자로서 친근하게 대하려 하자, 일반 시민은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절대적인 권위를 추구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매우 심기 불편해했고, 결국 303년 12월 20일에 로마를 떠났다. 이후 304년 1월 1일 라벤나에서 집정관 취임 의식을 거행한 뒤 도나우 강으로 향한 후 갈레리우스의 대 카르피족 원정에 참여했다. 이때 걸린 가벼운 병이 악화되자, 늦여름에 니코메디아로 돌아갔다. 304년 11월 20일 니코메디아 궁전 인근에 열린 서커스 개막식에 참석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후 궁궐 깊숙한 곳에서 나오지 않았고, 니코메디아 전역에 그가 이미 죽었으며 갈레리우스가 권력을 온전히 장악할 때까지 그의 죽음을 비밀에 부쳤다는 소문이 퍼졌다.305년 3월 1일,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대중 앞에 모습을 다시 드러내면서 소문이 거짓이라는 게 확인되었지만, 몸이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그해 5월 1일,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들과 근위대 장교들, 군단 대표자들을 소집한 뒤 유피테르 신전의 조각상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군중들에게 자신의 약함과 휴식의 필요성, 은퇴 의지를 표명한 후,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퇴위하고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와 갈레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로 선임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20년간을 통치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자진하여 퇴위한 것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물론 그 개인적으로는 건강이 많이 상한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렇다고 자진해서 제위에서 물러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로마 제정이 성립된 후 사두정 시기까지 자진 퇴위한 황제는 사실상 그밖에 없었다.[21] 그래서 나중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죽었을 때 황제의 관례대로 사후 신격화가 되면서, 죽기 직전에는 일개 로마 시민일 뿐이었음에도 신격화된 사례가 되었다.
당대의 일부 역사가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갈수록 줄어드는 정치적 영향력과 갈레리우스의 압박에 못이겨 반강제적으로 은퇴했다는 설을 제기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영향력은 306년에도 건재했기에 현대의 연구자들은 이걸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는다. 그가 은퇴하면서 서방 정제였던 막시미아누스도 같이 은퇴시킬 정도로 권력이 막강했음은 이런 정황을 다시 입증한다.
스팔라툼[22]에다가 바다에 접한 개인 궁전을 건설하고, 그곳으로 은퇴해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지금도 스플리트에는 궁전의 흔적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306년에는 제위에 복귀해 달라는 막시미아누스의 전갈에 이렇게 대답했다.
이후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의 급사와 이후의 혼란을 정리하고자 복귀한 막시미아누스, 정제로 즉위한 갈레리우스와 함께 308년에 회담을 열기도 했지만 310년에 막시미아누스가 처형된 이후에는 정치 문제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죽은 정황은 그리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당시가 내전 때문에 혼란스럽기도 했고, 그의 영향력이 완전히 소멸되었기 때문에 자세한 기록을 남길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전해지는 야사에 따르면 자신이 구축한 체제가 내전을 초래했다는 점, 그렇다고 자의로 물러났는데 복위할 수도 없게 된 점으로 실의에 빠져 자살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는 언급했다시피 공식적인 기록은 아니다. 그렇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말년에 참담한 심정이었다는 말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그의 영향력이 소멸된 대표적인 사례는 그의 아내인 아우렐리아 프리스카와 그의 외동딸이자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의 아내였던 갈레리아 발레리아의 죽음에서 드러난다.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갈레리우스 정제의 조카로 부제에 있다가 갈레리우스의 사망 이후 동방의 정세를 장악했다. 그러나 서방의 정제로 올라선 콘스탄티누스 1세와, 서방의 정제였다가 슬금슬금 동방으로 넘어가[24] 라이벌 관계가 되어버린 리키니우스가 공동의 적에 대처하기 위해서 혼인동맹을 맺게 되자 여기에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발레리아에게 청혼을 했으나 거절당했다. 여기에 화가 난 그는 발레리아와 그녀를 보기 위해 와있었던 프리스카를 감옥에 넣어버렸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에 항의하여 서한을 보냈고,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발레리아와 프리스카를 석방했으나, 재산을 몰수하고 오리엔트로 추방시켰다. 이후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리키니우스에게 패배하자 발레리아와 프리스카는 리키니우스에게 의탁하려고 했는데, 리키니우스는 그녀들에게 오히려 군대를 보내 살해하고 말았다.[25]
즉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마지막으로 회담을 연 지 5년 만에 그는 자신의 아내와 하나뿐인 딸도 지키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교를 조직적으로 박해했던 이답지 않게, 의외로 권력의 속성과 사람의 심리에 지나치게 순진하고 이상주의적이었던 듯하다. 사두정치는 설계부터 지속 가능성이 떨어졌다. 물론 나중에 콘스탄티누스 1세가 복수는 해 주지만 그마저도 그가 살아 있을 때가 아니라 죽은 뒤였고, 경쟁자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어쩌다가 복수해준 셈이 되었을 뿐이었다.
자진 퇴위는 비록 디오클레티아누스 스스로 내린 정치적 선택이었을지는 몰라도, 그가 구축해놓은 체계는 물론이고 그의 가족도 비극적으로 최후를 맞는 결과를 야기했다. 수 많은 정책을 멀리 내다보고, 강한 결단력으로 밀어붙여 성공했으나, 후계자 지명에서 갈레리우스의 정치적 이익에만 맞게 비상식적으로 안배하는 바람에 초래된 안타까운 결과였다. 갈레리우스의 오랜 부하긴 했어도 능력은 검증된 세베루스야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으나, 갈레리우스의 생질에 불과한 막시미누스 다이아를 선정한 건 큰 실수였다. 오히려 아버지 막시미아누스보다 정치적인 자질과 인격, 자제력이 뛰어났던데다가 갈레리우스의 사위기도 했던 막센티우스를 부제로 선정했다면 이렇게까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위안은,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그가 실시한 정책을 거의 대부분 그대로 계승할 만큼 사회적 필요성이 인정되었고, 훗날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1,100여년의 기간을 지탱해준 것은 그의 제도적 개혁에 의해서라는 것을 현대 학자 거의 모두가 인정하고 있음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라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제국 체제를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 만든 건 아니었지만, 그간 행해진 개혁 조치들과 비상 조치들을 집대성하여 체계적으로 배치하고, 시대 상황에 맞게 없앨 건 없애며 전국화할 것은 전국화한 조치들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었다. 즉 본인의 결말은 좋지 못했지만 무너지던 대제국을 재건하여 1,000년을 더 지속시키는 큰 업적을 남긴 황제였다. 체제 개혁에 대한 기여라면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비견할 만한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26]
3.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정책과 개혁
3.1. 도미나투스 체제의 성립
도미나투스는 전제정이라는 뜻이며 실제로 동양의 전제정과 일치한다.[27]270 ~ 275년까지 제국을 통치한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아래에서, 도미나투스 체제는 황제와 신하 사이의 용어로 확고히 예고된 일이었다. 물론 디오클레티아누스 집권으로부터 2세기 전 황제인 도미티아누스가 로마 역사상 공식적으로 '도미누스 에트 데우스(주인님이시자 신)', 즉 "폐하"라는 용어를 만들어 본인을 칭송하고 절대복종하라고 요구하긴 했다. 그렇지만 도미티아누스의 요구는 아우렐리아누스처럼 구체적이지 않고, 전제적이고 독단적일 뿐, 공식 문서에 서면 형식으로 보장받는 형태와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
그럼에도 과거 로마 황제들은 프린키파투스(원수정) 체제가 가진 단점을 보완하고자 자신들의 권한을 향상시키는데 주력했다.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도미티아누스,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황제자문회의, 사법부, 행정관료 계서제, 조폐발행권 장악, 속주 총독 임면권 강화 조치를 통해 황제권 강화와 '프린켑스=임페라토르'로 대변되는 황제 지위의 일원화에 힘을 쏟았다. 이 결과, 세베루스 왕조, 특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아래에서 원시적 도미나투스라고 할 수 있는 황제를 중심으로 한 프라이토리아니와 로마군, 황제 자문회의의 계서제가 사실상 완성됐다. 하여 군인황제시대 이전인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통치기부터 황제를 최정점으로 하는 계서제 아래에서의 관료제는 거진 완성된 상태였다. 즉,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없던 것을 만들어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원수정기 황제 중 도미나투스 체제의 뼈대를 만든 황제로 평가받는 황제로는 상술한 황제 중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우렐리아누스가 거론된다.[28] 이중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지극히 프린키파투스 아래에서 뛰어난 법률가이자 행정가, 장군이었던 자신의 경험을 살린 능수능란한 통치술을 사용한 황제에 가까웠다고 평가받는다. 왜냐하면 그는 냉혹하고 비열한 황제였던 현군였고, 그가 추진한 개혁 역시 자신의 두 아들과 가문의 영속을 위한 방법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여러 조치는 원시적 도미나투스라는 단어 그대로 전제정의 뼈대였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조치가 빠르게 자리잡은 것은 세베루스의 개혁이 없었다면 사실상 불가능했다.
3세기의 아우렐리아누스는 확실히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에 그 청사진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는 로마 황제였고, 모체라고 해도 좋다. 갈리에누스 개혁 이후 집권한 순수군인 출신 황제 중 아우렐리아누스는 여러 부분에서 공화정 말의 카이사르가 연상되는 군주였다. 사실상 전임자인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갈리에누스의 개혁 조치를 이전 상태로 되돌리는 시도를 하면서, 원로원과 황제의 공존을 추구했고, 이후의 타키투스, 프로부스, 카루스 역시 비슷한 자세를 취하며 프린키파투스 아래에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식의 방법을 추구했다면, 아우렐리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국제 자체를 뜯어고치고 공식적으로 '도미누스 에트 데우스'를 내세워 제정 전체를 바꾸려고 했다. 그는 3등분된 제국을 274년 재통일한 다음, 제국의 군대 계급 편제와 로마인들의 가정 내 '주인과 노예'/'가부장과 가족원' 관계를 그대로 일반행정에 접목해 태양신과 동일시된 황제 자신을 도미누스(주인님)으로 명하게 하고 대대적인 1인 전제정 개혁을 시작했다.
1년 간의 짧은 기간동안 아우렐리아누스는 놀라울 정도로 도미나투스로 불릴 전제정을 제시했다. 여기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추진했던 국가 주도 식량 배급정책, 고정가격제, 체계적인 관료제 완비, 화폐 개혁을 비롯해 뛰어난 장군이자 전략가였던 아우렐리아누스 주특기를 살린 군제 개혁 추진이 있었고, 로마 전통 종교를 황제가 조직화시킨 체제 아래 그 수장으로 확고히 하는 종교 개혁도 포함됐다. 따라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도미나투스 체제과 내정, 체제 개혁은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개혁을 모티브 삼아 그대로 이어받은 격이라고 해도 무방했고, 아우렐리아누스의 개혁과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은 상당히 유사했다. 다시 말하면, 집권 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프린키파투스의 장점을 살려 운영을 꾀한 갈리에누스, 프로부스 방법 대신 권위적이지만 효율성을 극대화한 아우렐리아누스처럼 개혁을 추진했고 용어 사용 역시 아우렐리아누스스러웠다. 다만, 아우렐리아누스의 개혁이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과 동일하다고 결론내리면 곤란하다. 이는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의 개혁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고 해도, 달랐던 것과 비슷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아래에서 진행된 도미나투스(전제정)에서, "황제 = 절대적인 군주이자 신과 같은 존재"였다. 따라서 절대자인 황제는 살아있는 신이며 대리인이었고, 로마의 전통을 수호하는 수호신 그 자체였다. 쉽게 말하면, 이전에도 로마인의 종교적 관습에 따라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경우들은 있었으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것을 아우렐리아누스의 것 그대로 공식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이 결과, 황제의 권위는 과거 프린키파투스 아래에서의 황제와 달리 그 권위가 대단했다.[29] 황제는 로마 제국이라는 하나의 집안에서 국가 전체의 가장이며, 전통의 수호자이자, 제국의 구심점이 됐다. 황제의 권위, 위엄, 자유는 절대적이며, 원로원의 권위, 위엄, 자유와는 그 격이 다른 것이었다. 애당초 로마 제국에서 로마인들이 강조하는 권위, 위엄, 자유라는 3가지 절대 가치 자체가 "나는 너를 존중하지만 나는 너보다 훨씬 권위있다"는 의미와, 연장자와 연소자의 그것은 명확히 구분됐기 때문에 이 개혁은 황제를 제외하면 모두 신민에 불과하다는 것을 뜻했다. 쉽게 설명하면 이전의 황제들을 만나려면 찾아가서 문 두드리면 비서관이 응접실에 대기시킨 다음에 황제가 직접 나와서 만나줬다면,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는 만나기 위해 찾아가면 파트르누스와 클리엔테스 관계처럼 약속이 잡혀 있지 않는 이상 면담 기회조차 갖지 못하게 됐다.
3.2. 최초의 분할통치( 사두정치)( 293년)
가장 상징적인 것 중 하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의 권위를 높이는 것만으로는 단독으로 제국 방어를 수행하는 것은 어렵다고 보고 이를 넷으로 늘린다. 사실 로마 제국에서 '공동 황제' 체제는 이전에도 자주 있었던 일이지만, 이전에는 '후계자 지명' 혹은 임의적인 체계였던 반면 사두정치 제도는 상설화되고 체계적인 제도라 할 수 있다.구체적으로는 동방 정제와 서방 정제를 하나씩 두고 그 아래 동방 부제와 서방 부제를 임명, 각자 맡은 관할구역에서 군사 분야에 대부분의 권한을 가지고(부제는 상대적으로 권한이 딸린다.) 방어에 임한다고 보면 타당하다. 또한 두 정제는 일정기간 이후 은퇴하며 두 부제가 정제 직위로 올라가 새로운 부제를 임명하는 방식으로 보인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시기 각 황제들의 담당구역은 다음과 같다.
- 동방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 (본부: 니코메디아)
- 아나톨리아, 오리엔스, 폰투스, 이집트
- 동방 부제: 갈레리우스 (본부: 시르미움)
- 판노니아, 모이시아, 트라키아, 일리리아
- 서방 정제: 막시미아누스 (본부: 메디올라눔)
- 이탈리아, 가까운 아프리카, 먼 아프리카, 히스파니아
- 서방 부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본부: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
- 브리타니아, 갈리아, 비네엔시스[30]
이러한 제도의 목적은 아래와 같다.
- 제위계승에 군대 개입 방지. 이전 군인황제시대의 혼란상을 학습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를 방지하고자 했다. 황제 유고시에 부황제가 자동적으로 이를 승계하는것이 원칙이다.
- 방어의 효율성 증가. 황제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여러 대책을 동시에 수행해 방어의 효율성을 높인다. 즉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이 들어와도 즉시 대처가 가능하다.
- 내란의 조기진압. 네 명의 황제가 상대적으로 좁아진 자신의 관할구역을 철저히 감시해 내란의 가능성을 줄이고 내란이 일어난다 해도 이를 조기에 진압한다. 종합하자면 내란이 단순한 소란으로 끝나며, 내란이 길게 이어지거나 확대돼서 내전이 되는 것을 막는다.
- 능력 위주의 황제 즉위. 방어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하여 임명되므로 다른 건 몰라도 군사적 능력 하나는 우수한 인물들이 혈통에 관계 없이 황제위에 오를 수 있다. 이에 따라 로마군의 전투능력을 높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군사적인 측면으로 내정이나 외교 등 다른 국가적인 측면에서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단독으로 전체 권리를 움켜쥐고 있었으며, 최소한 1차 사두정치 기간에는 동서방 정제/부제의 진퇴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권한이 컸다. 이 당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썼던 정식 명칭 중 하나엔 세니오르 아우구스투스, 즉 "선임(先任) 황제"도 있었을 정도.
당장 이 시기에 동방 부제였던 갈레리우스는 페르시아에게 패했을 때 황제보다는 일개 장수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다. 막시미아누스는 서방 정제이면서도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반강제로 끌려 같이 은퇴할 수밖에 없었기도 했고. 그러나 그가 은퇴한 뒤에는 그처럼 다른 황제들을 억누를 권위와 권한이 있는 황제가 없었고[31], 제위 계승에서 제외된 황제들의 자식들(콘스탄티누스, 막센티우스)이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며 들고 일어나면서 결국 무너지게 된다.
공동 정제의 방식은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살아남았지만[32] 이것이 상설화된 제도로 유지되기엔 역시 문제가 많았다.[33]
3.3. 내정 및 정치개혁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종심방어체제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일단 민정과 군정을 분리시킨다.이후 그는 체계적인 관직제도를 구축하는데, 그 세부적인 사항은 다음과 같다.
- 황제와 부제가 정점에 서고, 그 밑으로 각 황제들의 관할구를 크게 나누어 4개의 "대관구"(Praefectura Praetorio)와 12개의 "관구"(Diocese)를 두고, 관구의 장을 신설한다. (일명 대리인 = 비카리우스Vicarius) 그 밑으로 110개 속주(province)의 장들이 위치하며, 이전의 대대장이었던 트리부누스 밀리툼은 이들과의 위계 체제에서 동급 혹 밑에 서면서 이들과 같은 체계 안에 편입된다. 프라이펙투스 같은 경우엔 중요 대도시를 담당하면서 일부는 비카리우스와 대등한 위치에도 섰고, 일부는 군권을 계속 쥐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대표적인 경우가 프라이펙투스 프라토리오(로마 근위대 대장). 이때까진 계속 근위대에 대한 군 통수권을 쥐고 비카리우스나 군 통수권을 쥔 둑스보다도 권한이 높았다.)
- 이전엔 군단들 여럿을 지휘하던 군사령관인 둑스는 이때부터 단일 군단을 지휘하는 군단장의 호칭이 된다. 이들 위에 이들을 통솔하는 코메스가 존재한다.
이런 식으로 이전과는 다른 좀 더 체계적인 제도를 구축한다. 이것이 후기 로마제국 관료제의 시초가 된다.
입법기능에도 관심을 가져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원로원의 입법기능을 박탈한다. 그는 집정관을 자신이 임명하도록 하고 법안을 원로원 의결이 아닌 황제의 칙령으로 바꾸면서 이를 보좌할 관료제도를 도입하였다. 이로서 행정업무는 전문화되고 체계화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관료의 숫자 증가, 속주와 총독 수 증가에 따른 막대한 재정 팽창, 군대 규모의 확대와 법제화된 황실행정 등장에 따른 재정 고갈 위기 등은 그렇지 않아도 로마 제국의 방대한 민간 관료 체계 등장으로 살림살이가 많아진 로마 제국의 재정에 악영향을 발생시켰다.
설상가상 행정제도 확립과 관료제 도입, 군사제도 개편 등으로 인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던 중,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도미나투스 선전과 황제권 강화 등을 이유로 거의 모든 속주와 군사시설, 제국에 새롭게 설치될 황제가 머물 4개 도시의 화려한 궁전 및 각종 시설 건립과 대규모 리모델링으로 재정 긴장을 초래할 정도로 많은 돈을 일시금 가깝게 소비했다. 이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의 사업들과 야심차게 밀어붙인 대대적인 개혁을 위해, 로마 제국 전체의 화폐 및 재정 체계 재편을 목적으로 286년 화폐개혁을 단행한다.
단,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화폐개혁은 본인의 실책을 가리기 위해 벌인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오현제 치세부터 시작된 로마 제국의 재정 혼돈과 끝없는 재정 긴장 위험도를 종식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고, 실제 그는 금과 은의 새로운 화폐 체계를 장기적 관점으로 만들어 정착케하려고 노력했다. 이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기존의 아우레우스 금화를 새로운 아우레우스로 한 금화로 대체시킨다. 이는 표준금화의 금 1파운드의 60%에 해당된 새로운 아우레우스였다. 아울러 표준 은화 1판운드의 96% 비율의 새로운 은화 '아르겐테우스'도 발행한다. 아르겐테우스는 대략 네로 시대의 데나리우스와 비슷한 새로운 은화였다. 여기에 더해 그는 소액 주화의 필요성이 급증하는 로마 사회를 위해, 3가지의 은 도금 청동주화들을 발행시킨다. 이는 '폴리스'로 알려진 주화인데, 가장 가벼운 것이 은이 도금된 데나리우스로 이 화폐는 대략 1/20 폴리스 정도였다.
그가 취한 화폐개혁은 익히 알려졌듯, 성공도 실패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근간이 된 아우레우스는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 아래에서 무게가 준 솔리두스로 바뀌었고, 이는 이후의 동로마 제국과 중세 유럽 사회에도 천년 이상 수명을 유지한 화폐 중 하나가 됐다.[34] 하지만 단기적으로 봤을 때, 기축통화인 데나리우스 은화를 폐지하고 새로운 은화와 동화를 발행, 인플레이션을 잡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그는 301년 가격통제칙령을 공포하고 모든 물품과 용역의 상한선을 정해 이를 어길 경우 엄벌에 처한다는 제도를 도입한다. 이것은 인류역사상 최초의 가격통제제도로 보인다. 여기에 군인 충당을 목적으로 직업세습제까지 시행하나 이건 재능의 문제라 얼마 가지 않아 사문화되었다.[35]
이 가격통제칙령이 마치 실패라도 한 것처럼 로마인 이야기를 비롯한 옛날 서적들은 묘사하고 있지만 이것도 사실 이미 90년대에 타파되어 극복된 학설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가격통제칙령은 반포하기 전에 각계각층 전문가와 조사관을 통해 면밀한 검토를 거쳤고, 실제 시중에서 통용되는 가격보다 2~3배인 경우도 있었으며 늘 높았고 어디까지나 상한이었다. 게다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가격통제령에서 상인들의 탐욕에 대해 도덕적으로 질타하는 부분을 마치 그가 경제원리를 제대로 이해못하고 한 말인 것처럼 잘못 이해되고 있는데, 당시의 로마 제국은 대한민국처럼 공정거래처가 있지 않았기 때문에 상인들이 대단히 위급한 상황에서도 매점매석을 자행하고 소상공인들을 폭리로 괴롭히는 일이 잦았다. 이 가격통제령은 적어도 307년까진 기능을 잘 발휘했으며, 유명무실하게 된 후에도 율리아누스 또한 안티오키아의 매점매석 현상 및 그로 인한 경제위기를 해소하고자 재발굴하여 일시적으로 활용할 정도로 유효했던 정책이었다.
이렇게 그는 화폐개혁을 단행해 이를 장기적으로 정착시키면서 재정 긴장 상태 만성화 방지를 위해, 세금제도에도 손을 댄다. 이는 3세기의 위기동안 난립하는 임시세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불규칙적인 긴급 세금과 강제 청구 제도를 폐지하는 조치와 함께 진행됐다. 그러나 3세기 난립한 여러 강제 세금 징수제를 폐지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국가 재정을 만성적 긴장 상태로 몰아넣을 위험성이 높아, 이 조치와 함께 새로운 세제 개혁 아래 생산물에 정규적 소득세를 대체 부과하는 신설 부과세가 도입된다. 아울러 이탈리아를 포함한[36] 제국 전역에 새로운 세금제도의 제정까지 발표되고 시행된다. 이때부터 이탈리아는 본국의 특권을 잃고 일반 속주와 동등해지게 되었다.[37]
이 제도의 특징은 아래와 같다.
- 필요한 재정의 액수를 황제가 1년에 한 번씩 결정한다. 즉, 국가의 필요에 따라서 세액을 결정한다.
- 결정된 세액은 실질적인 수익과 관계없이 납세자에게 부과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개인 사정 따위는 감안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모든 세무는 중앙정부가 통합 관할한다. 이로써 지방자치단체는 독자적인 재정을 사실상 보유할 수 없게 된다.
- 세금은 크게 농경지에 부과하는 '토지세'(jugatio)와 사람에게 부과하는 '인두세'(capitatio)로 이분화하며, 구체적인 액수는 5년에 한 번씩 사정한다. 즉, 일단 결정된 세금은 5년 후에나 세금액이 재결정된다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볼 때 흉년이 찾아와도 세금은 FM대로 거두다 보니까 납세자들 입장에서는 고문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국가의 예산이 어느 정도일지에 대해 예상 가능하며, 고정적인 수입이 들어올 것을 예측가능하게 하므로 높으신 분들이 사치와 향락을 위해 고액의 세금을 내라고 강요하거나 비상식적인 복지체제를 구축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서는 세금 및 국채 발행의 남발을 막고 체계적인 세제를 수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디오클레티아누스 이전에는 임시세를 전쟁을 직접 수행하던 속주에 부과할 때가 잦았다. 즉 납세 자체가 대단히 불공평하게 되고 있었다는 것으로 내내 로마 제국 인민이 문제삼던 부분이었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전쟁을 상시로 하지 않는 평온한 내부 속주들에게 제국 방어 비용을 균등히 부담시킨 것이다.
그의 업적 중 '황제'의 위상을 과시하고, 신성화하기 시작하는데 황제의 명칭에 도미누스(Dominus)를 썼던 게 있는데, 사실 황제가 도미누스 호칭을 대놓고 쓰기 시작한 건 아우렐리아누스가 처음이었다. 다만 아우렐리아누스는 본격적인 내정 개혁을 시도하기 전에 죽어 거기서 그쳤을 뿐. 다만 법제에 정식으로 이 호칭을 도입하고, 페르시아식 궁정 의식을 도입한 건 디오클레티아누스였으니 의의를 낮춰볼 순 없다. 해서 이로 인해 동방 일대에서 로마 황제는 바실레우스(Βασιλεύς)[38]란 호칭으로 더욱 많이 불리기 시작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제도개혁은 좀 더 많은 세율을 좀 더 효율적으로 많이 걷고 운용 또한 효율성을 극대화하고자 함을 알 수 있다. 과도한 세금을 내지 못한 많은 중소 자영농들이 토지를 버리고 도망가거나 소작인으로 몰락하는 등 부작용이 굉장히 컸다고 하지만 이는 말기 로마 제국의 전반적인 경향을 말한 것이지 디오클레티아누스 때 일어난 일로 퉁칠 수 없는 현상이며, 디오클레티아누스 개혁 전의 세금이 오히려 대단히 자의적이었던데다 예고 없이 마구 징발되는 때도 잦고 원칙도 없어 납세자들 입장에선 더 견디기 힘들었다.
3.4. 군제 개혁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내우외환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군대의 힘을 많이 빌렸으나 동시에 3세기의 위기에는 이 군대 문제가 컸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고, 군제 개혁을 통해 군사반란의 가능성을 줄이고 좀 더 효율적인 종심방어를 구축하고자 노력한다.우선 각 군단, 즉 레기오들을 벡실라티오란 파견대들로 쪼개서 야전 지역에 자주 보내도록 해놓고, 레기오 본부엔 병력을 약 천 명씩만 남겨놓았다. 그리고 쪼갠 벡실라티오들을 합쳐서 임시 편성했으며 때에 따라 분리 합체를 반복했다. 이런 식으로 하다보니 "파견대"들이 실제론 점점 야전 부대로서 상설화되어가는 반면 주로 국경 지역에 남은 본대는 점점 질이 떨어져갔다.
여기서 군단들을 쪼갠 방식에 대해 생각을 해봐야 하는데, 예컨대 공화정-원수정기의 군단A를 쪼개면 대강 5~6개가 나온다. 그러면 이 신생 군단들에 전부 A가 연상되는 이름을 붙인 게 아니라 그중 하나만 종전 이름을 계승시키고 다른 군단들에는 각기 다른 명칭을 부여했던 것 같다. 이렇게 해서 1000명 단위보다 더 큰 단위가 필요하면 편의대로 여럿을 긁어모아 새로운 편제를 만든다. 아직 디오클레티아누스 때는 레기온보다 큰 편제라곤 황제 네 명이 직접 지휘하는 엑세르키투스 코미타텐세스 외엔 없었고 이것도 상설 편제라고 보긴 어려웠다.
그리고 군대 전체를 증가시키는데, 이미 3세기의 위기 기간동안 이리저리 임시로 창설됐던 군대를 상설화하고 부족한 부분을 약간 더 채우는 정도였다고 한다. 이 시기의 로마군은 45~50만 선으로 추정된다. 다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선방어" 사상을 포기한 바 없었고, 몽고메리 장군 표현을 빌리면 그야말로 국경선에 이전보다 더욱 요새들을 촘촘히 거미줄처럼 깔아놓는 전략으로 대응했다고 한다. 때문에 적어도 이 시기까진 황제들이 데리고 다니는 특별 사단인 엑세르키투스 코미타텐세스 외에는, 다들 종전처럼 국경 방어를 수행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프라이토리아니에서 부대를 유지하는 기간병 외엔 전투 병력 자원을 죄다 빼내서, 제5요비우스 군단과 제6헤르쿨리아 군단을 편성한 다음 요비우스 군단은 디오클레티아누스 자신이, 헤르쿨리아 군단은 서방 정제 막시미아누스에게 배속시켜줬다. 이들이 아마 임시 편제인 엑세르키투스 코미타텐세스의 핵심을 형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군단명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요비우스'라고 자칭했고, 막시미아누스에게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헤르쿨레스'라는 칭호를 주었다.[39]
3.5. 이교 금지 정책
로마 제국 체제의 효율성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그 자신이 로마 제국에 있어 위험요소라 생각한 사상이 로마 제국으로 침투하는 것을 파괴하고자 했다. 그 대상이 된 것은 그리스도교, 그리고 마니교였다.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세에 그리스도교는 비록 로마제국의 다수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초창기부터 체계적으로 조직과 교리를 정립하여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4세기 초 그리스도교도들은 로마제국 전체 인구의 최소 10% 이상[40]을 차지했으며, 로마제국의 동부지역에 집중해 있었기 때문에[41] 일부 지역에서는 다수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 시기 황제들은 그리스도교를 무시하지 못했고, 박해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던 갈리에누스 황제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 이전까지 그리스도교는 세력을 꾸준히 늘려 유력한 사회집단으로 자리매김했다. 드러내놓고 교회를 짓는 도시와 마을이 늘었으며, 주교는 지역사회 유력자 계층의 일원으로 대접받을 정도였다. 실제로 니코메디아의[42]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황궁 바로 옆에도 교회가 하나 존재했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 그리스도교가 제국을 뒤흔드는 위협 세력이라는 생각은 거의 사라졌고, 공무를 수행하는 데 종교는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디오클레티아누스도 초기 십수 년간은 그다지 박해하려는 뜻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본심은 그렇지 않았다. 철저한 중앙집권적 전제정권을 수립하고 이를 통해 로마제국의 효율성을 증대시켜 위기를 극복하고자 추구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스스로를 신성화했는데, 심지어는 제우스가 직접 지명했다는 말에 자신이 곧 신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다녔다. (이 시기 기록에는 왕권신수설 저리 가라 할 만한 내용이 많다.) 그런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체제개혁과 정반대에 있는 강력한 적대세력이므로 당연히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로마 역사상 마지막이 될 대규모 박해를 실시했다.
시작은 297년이었다. 이 해 그는 나라 안의 모든 공무원들과 병사들에게 제단에 제물을 바침으로써 충성심을 증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일부는 사임했고, 시늉만 하는 사람도 있었다.[43] 이 명령에 극렬히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던 일부는 처형당했다.
드디어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는 조직적이고 치밀해졌다. 사위이자 후계자 갈레리우스를 내세워 니코메디아의 황궁에 발생한 화재를 그리스도교 탓으로 돌리고, 그리스도교를 제국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규정하여 탄압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성당을 철거하고 성물을 파괴하며[44] 소유한 재산은 전부 압류해 국고에 집어넣었다. 특히 그는 일반 신자들을 일일이 잡아넣기보다는 사제, 주교들을 체포해 개종시키거나 처형하고자 노력했는데, 이는 그가 그리스도교의 조직체계를 파괴하고자 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교도인 관료와 군인 등이 면직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세가 강했던 제국 동방에서 강한 저항이 일어났고, 소아시아처럼 대규모 봉기가 일어난 곳도 있었으나 군대를 보내 진압했다.
304년에 공포한 마지막 칙령은 상대가 그리스도교인이라면 고발이 없어도 추적하여 고문할 수 있도록 하였고, 모든 사람이 로마 신의 제례를 거행해야 하며, 이를 어기면 사형이나 강제노동에 처하겠다고 명령했다. 더 나아가 배교냐 죽음이냐의 이지선다를 강요했다. 이로 인해 순교자와 배교자가 잔뜩 발생한다. 다만, 이 칙령은 지역에 따라 적용강도가 들쑥날쑥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관할한 땅에서는 박해가 강력했지만 막시미아누스와 갈레리우스는 좀 덜했고, 콘스탄티우스는 성당 건물만 파괴하고 신도들을 처형하는 일은 드물었다고 한다. (제국 서방지역 중에서도 가장 서쪽이었기에 신자의 숫자가 적었던 것도 한몫 할 것이다.[45]) 교회 자료에는 순교자가 약 3천-3천 5백 명 정도라 하지만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리스도교 박해는 대략 309년까지 지속되었고 311년에는 잦아들었다. 313년에는 신앙의 자유를 선포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가 공포한 밀라노 칙령으로 박해가 완전히 끝났다.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마니교도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마니교는 로마 제국의 제1적국인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종교이므로 박해할 이유를 찾기 쉬웠고, 그 세가 그리스도교보다는 덜하므로 제거하기도 쉬웠다. 302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마니교를 두고 페르시아에서 뻗어온 흉물스런 집단이며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판하는 칙령을 내리고 강력하게 탄압했다. 마니교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 이후에도 꾸준히 탄압받아 결국 소수종파로 연명했을 뿐 크게 성장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4-5세기의 저명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생전에 마니교도가 된 적이 있다고 술회하였던 만큼, 지역에 따라서는 나름대로 마니교가 세가 강했던 곳도 있던 듯하다.
3.6. 개혁의 결과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개혁의 방향을 최대한의 수입을 뽑아내 최대한의 효율을 내 국가 방위를 수행하고, 그 다음 안전이 확보된 상황에서 경제를 성장시킨다는 쪽으로 잡고 정책을 수행했다. 그 결과 주거 및 직장선택의 자유가 어느 정도 제한되는 등 여러모로 서민이 살기엔 힘든 정책이 수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그러나 목표였던 로마제국 방위의 임무에는 완벽하게 성공했으며, 그 결과 제국 전체의 경제력은 계획경제 체제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회복된 것으로 추산된다. 자유시장 경제고 나발이고 살인자 수천 명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상황에서 경제라는 단어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때보다는 통제경제가 나으니까 말이다. 제국 내의 건축활동이 다시 활발해지고 인도 등지에서 발견되는 교역 유물이 양과 질 측면에서 다시 회복되는 것 그리고 새로운 마을 건설 등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되는 등, 이 시기의 제국 전체 경제가 회복되어 가고 있다고 볼 만한 근거는 충분하다.
이러한 부활이 단기적 성과에 머무르고 말았다는 말이 있으나, 훨씬 후대인 4세기에도 건축 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었으며 경제 활동의 활기도 여전한 것이 고고학적 성과로 확인되고, 3세기의 위기란 것도 과장되었다는 말이 현재 나오고 있는 추세다.[46] 당대 로마인 본인들의 심성을 추적해 보아도 짧게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 이후 1-2세대, 길게는 테오도시우스 1세 치세 때 까지는 세계가 온전히 재건된 것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강압적으로 경제 정책을 폈다곤 하지만, 활기찬 상업이 다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고 그의 이후의 갈레리우스나 리키니우스 등이 이를 책임감을 가지고 계속 밀어붙인 바는 없다. 그 이전 원수정 시대의 화폐 경제보다는 상당히 현물 경제화했으나 이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정책이 원인이 아닌, 누적된 체제 역량 악화의 연장선상에 불과하다. 제국이 그의 개혁으로 인해 엄청나게 늘어난 행정비용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넓은 게 문제였다는 말도 근거가 없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운용했던 동부 제국의 예산은 후대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정복 사업을 운용할 때보다도 대단히 적었다.[47] 이에 대해서는 워랜 트레드골드의 비잔티움 국가 체제와 사회 참조.
서로마 제국이 황폐화되었다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 개혁과는 무관한 일로, 오히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이 아니었다면 서로마 제국 영역의 국경은 훨씬 더 빨리 무너졌을 거란 예상이 지배적이다. 오히려 서로마 제국 재정을 보조해주느라 동로마 제국 영역이 상당한 부담을 겪어야 했던 게 진상. 서로마 제국이 결국 무너진 건 게르만 계열 국가들의 정치사회경제적 역량이 계속 꾸준히 성장해가는 데, 서로마 제국쪽은 몇 가지 우발적인 정치적 상황으로[48] 제대로 된 대응을 못하게 된 것이 근본 원인이다.
[1]
사두정의 황제들과 잠깐의 중흥을 이뤄낸 그 이전의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아우렐리아누스,
프로부스 황제의 출신은 모두 일리리아(
발칸반도 서부)였다.
[2]
분할을 잘못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지만 이는 학계에서 진지하게 제시하는 의견이 아니며, 대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왕권신수설을 꺼내들었고, 완전 세습의 길을 열었다는 얘기 또한 그러하다. 로마 제국의 제위 세습 관행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위에서 세습이 테오도시우스 1세 이후에 유일한 관행으로 굳어진 바 없다.
동로마 제국 시대의 황제 목록을 보면 참 정신이 없는데, 친인척이나 장군, 고관 등을 공동황제로 세운 탓이다.
[3]
직접 통치했던
이집트에서 대대적인 그리스도교 박해를 행한 결과, 순교자가 많이 나왔다.
콥트 정교회에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즉위한 서기 284년을 순교자기원 원년으로 삼는다.
[4]
당시 이름은 스팔라툼(Spalatum: 라틴어)/아스팔라토스(Aσπάλαθος: 그리스어). 나중에 자진 은퇴한(?) 후에도 여기서 살았다.
[5]
(이)Salona(e),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솔린(Solin)
[6]
종종 유트로피우스라고도 번안되어 언급된다.
[7]
동시에 그는
프라이펙투스 우르비 시절
세베루스 2세를 지지했다가 대세가
막센티우스를 지지하자 막센티우스를 지지해주면서도, 막센티우스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결전이 다가오자, 영리한 자세로 처신해, 콘스탄티누스 군이 승리한 뒤에도 대제에게 "국가를 위한 봉사를 지금처럼 계속 해주십시오."라는 요청까지 받았다. 여기에는 그가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12명의 원로원 의원 동료와 함께 각자 400,000 세스테르티우스를 기부해, 방치된 로마 시가지의 여러 공공 건축물 개보수에도 힘을 쓴 인물이었고, 디오클레티아누스 집권 전부터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대제 일가와 친분이 있었던 배경 때문으로 추정된다.
[8]
하층민 출신들은 그 능력이 특출나더라도 자신을 끌어줄 추천자가 없다면 로마 중앙 정계는커녕 지방정부 군관자리 역시 제대로 오르기 힘들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보다 신분이 그나마 좋았고, 하급 장교 시절부터 야전에서 군공을 숱하게 세웠던,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퀸틸루스 형제나
아우렐리아누스,
프로부스만 하더라도
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 부자의 후원과 추천이 신흥 군인귀족으로 신분이 상승될 때 매우 결정적이었다. 그러니 이들보다 객관적으로 군사적 역량이 떨어지고, 즉위 전까지는 뚜렷한 군공조차 없던 디오클레티아누스 역시 이 점을 배제하기 어려웠고, 부모 옛 주인 일가의 지원은 누구보다 절실했다. 당장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비슷한 배경을 뒀던, 2세기 말의
페르티낙스 황제 역시 그랬다. 그는 일반 병졸로 입대한 뒤, 백인대장으로 승진하고 이후 대대장까지 오르는 과정 속에서 부모의 옛 주인이었던 주인 부자와 그 일가의 추천을 받았다. 페르티낙스의 성공이 곧 보호자의 임무이자 보호자 일가 전체의 명예와 밀접했으며, 클리엔테스가 높은 자리에 갈 경우 얻게 될 현실적인 이익도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9]
혹은 전 군대에게 연설을 한 뒤, 아페르에게 자결을 명했다고 한다.
[10]
카리누스가 전투력은 좋았으나, 인망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원로원 의원, 총독 등 여러 인사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내응했거나 그로 전향했다고 하는데, 그 중에는
달마티아 속주 장관이었던
플라비우스 콘스탄티우스도 있었다. 그 전향은 결국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11]
이 사람은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로서, 일반 중하급 장교는 절대 아니었고, 오히려 관구
총독직(Praetorian Prefect)과 그해의
집정관직을 겸직하고 있었던 중요인사였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로부터 포상으로 그 두 직을 유임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고 한다.
[12]
역설적이게도 이 아이디어는 내전에서 가장 효과적이었다.
[13]
공동 정제 자체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후
3세기의 위기를 거치며 상당히 일반화된 방식이었다.
[14]
Bagaudae,
갈리아어로는 '전사'라는 뜻인데 이때는 그냥 갈리아의 일반 농민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리잡았다.
[15]
Boulogne, 이탈리아의
볼로냐와는 위치상 전혀 무관하고,
갈리아(프랑스)
북부 해안가의 도시이다.
칼레와 멀지 않다.
[16]
할당받은 지역인 도버 해협을 프랑크 해적이 통과해서 노략질을 하도록 일단 방임한 뒤, 재물과 사람을 싣고 돌아가려 하면 그제야 출동해서 해적 소탕을 하고 재물도 모두 빼앗아 자기 것으로 취하는 기막힌 재테크 능력을 발휘하였다.
[17]
처음에는
막시미아누스가 격퇴에 실패해서 독립인정을 몇 년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문서 참조.
[18]
이미 그 이전 황제들의 노력으로 게르만족은 이때에는 어느 정도 잠잠했다.
[19]
아르메니아는 원래 왕가가 파르티아 왕가의 방계였는데, 사실상 본국이었던 파르티아가 사산 페르시아로 교체되자, 이 속국의 왕위에도 기존 왕가를 쫓아내고
자기네 왕족을 앉혔다.
[20]
사실 페르시아와의 전쟁은 늘 주기적으로 있어왔던 상수였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 당대의 전쟁의 원인은
페르시아 내부의 집안싸움 + 아르메니아라는 중간지대 소국의 존재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21]
공화정 시기를 따진다면 독재관의 자리에서 물러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있고 동로마까지 넓혀서 본다면
미하일 1세 랑가베스가 자진퇴위한 바 있다.
[22]
현재
크로아티아의
스플리트.
[23]
그 이후에는 막시미아누스도 느끼는 바가 있었는지 퇴위하지만, 아들인
막센티우스와 엮이면서 번복했고, 그 결과 말년이 비참해졌다.
[24]
경쟁자가 서방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와 막센티우스 두 명인데, 동방에는 막시미누스 다이아 한 명뿐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더군다나 있었던 위치도 일리리아로 동방과 가까웠던 데다가, 원래 서방 정제의 영역인 이탈리아는 막센티우스가 꽉 쥐고 있었다.
[25]
모녀의 죽음은 디오클레티아누스 사후의 일이었다. 문헌의 기록과 연구를 종합해보면 모녀가 추방당한 직후, 또는 몇 달 후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죽었을 걸로 보인다. 슬프게도 그가 뭘 어찌 해보기에는 신체가 따라주지 않았을 것이다.
[26]
훗날 등장하는 콘스탄티누스 1세는 원수정 기준으로 따지면 티베리우스 포지션이었고, 나름 찌질한 인격 때문에 당대에나 지금이나 욕을 먹는 콘스탄티우스 2세는 클라우디우스 1세 정도라고 보면 된다.
[27]
그러나
왕조가 곧
국성(
남계혈족),
종묘,
사직,
국체 모두 하나로 통하는 것이 일반적인 동양과의 차이점은 여전하다. 유명한 동로마 학자인 Anthony Kaldellis의 저서 <The Byzantine Republic>에 의하면 동로마 황제의 제위는 세습이 가능한, '보장된'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가능할 뿐인 초강력 종신 대통령으로 보일 정도이다.
[28]
일부 학자들은 대놓고 도미누스 에트 데우스를 사용하면서 강요한 도미티아누스, 원로원 자체를 무력화시킨
갈리에누스를 거론한다. 그렇지만 이를 주장하는 학자들 역시 이 두명을 언급할 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우렐리아누스와 같지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들의 통치와 조치가 도미나투스 체제에 직접적 영향을 줬다고 할 수 없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29]
실제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공식적인 호칭으로 dominus et
deus를 사용했는데, 번역하면 주인이자 신이라는 뜻이 된다.
[30]
갈리아는 프랑스 북부, 비네엔시스는 프랑스 남부.
[31]
그나마 갈레리우스가 2세대를 주도하기는 했다. 정제노릇을 305~311로 얼마 못 하고 일찍 죽어서 그렇지. 콘스탄티우스도 305~306으로 정제는 1년 밖에 못 하고 병사했다. 이 둘은 부제로 있는 동안 동-서방에서 누구나 인정받을 만한 군공을 세웠다. 이 둘이 일찍 죽은 것과, 그 다음의 부제 선정 때문에 그렇지, 안 그랬으면 좀 더 갔을지 모른다.
[32]
그래서 동로마 황제의 계보가 매우 복잡하다. 재위기간도 마구 겹친다.
[33]
디오클레티아누스 생전에는 본인의 카리스마로 묶어두는 게 가능했지만, 그 이후에는 네 명의 황제가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울 여지가 있었고(4명의 황제가 중심지로 삼는 곳에 로마가 포함되지 않아서 어느 누구도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없는 구조였다.), 실제로 그렇게 됐다.
[34]
이탈리아의 솔도, 프랑스의 수가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의 아우레우스&솔리두스의 영향 아래 유지된 화폐들이었다.
[35]
단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는 엄격하게 수행된 것 같다. 실제로 퇴역군인 아버지를 둔 그리스도교도 청년
테베스테 (현재 알제리의
테베사)의 막시밀리아누스가 296년에 현역판정을 받고도 우상숭배를 금하는 그리스도교 교리를 근거로 입대를 거부한 죄로 사형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막시밀리아누스는 훗날 성인으로 시성되어 '테베스테의 성 막시밀리아누스(막시밀리아노)'로 불린다.
[36]
종전에는 카라칼라의 시민권 칙령이 있긴 했지만 여전히 본국으로서 면세지역이었다. 이탈리아는 세금을 징수하는 대상이 아니라 세금을 수취하는 주체였다고 보면 된다.
[37]
다만 로마 시는 여전히 면세였다. 그리고 이탈리아 내에서도 남이탈리아에 대한 세금이 좀 더 낮았는데, 그 이유는 거기에 원로원 귀족들의 부동산이 매우 많았기 때문이었다.
[38]
"왕"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이며 로마 제국 동방에서 이미 1~2세기부터 로마의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39]
요비우스(=유피테르=제우스)는 최고신이며, 반인반신인 헤르쿨레스(=헤라클레스)의 아버지인 점을 볼 때 막시미아누스보다 자기가 위에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실제로도 위에 있었던 게 맞고
[40]
출처: 에이드리언 골즈워디 저 <로마 멸망사> p239
[41]
유대인 다음으로 예수의 복음을 일찍 수용한 이들이 그리스인들이었다.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고 나아가 국교로 삼은 뒤에 임명된 다섯
총대주교 가운데 네 명이 동방 지역(
콘스탄티노플,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에 몰려 있었을 정도.
[42]
동방 정제의 치소
[43]
락탄티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니코메디아 황궁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이교 제사를 집전할 때, 참석한 기독교인 신료들이 성호를 그었다고 한다.
[44]
니코메디아의 갓 완공된 대성당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45]
비그리스도교 내지는 이교도의 의미로 쓰이는 Pagan이란 영단어는 라틴어 Paganus(시골 사람)에서 유래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대부분 도시인이었기 때문에 이와 대비하여 표현한 것이다.
[46]
램지 맥밀런의 로마제국의 위기 참조
[47]
물론 유스티니아누스 자체는 대단히 재정 관리에서 부지런한 황제였고 산업진흥책이나 외교에도 수완은 있었다. 또한 그의 정복 사업과 재정 관리가 무너진 건 그가 예측하지 못했던 전염병과 그 자신의 치세 말기 투병 생활에서 이어진 사망이 이유였기에 그를 낭비가로 낙인찍는 것 또한 이제는 반박된 과거의 학설이다. 다만 반란이 우려되어 본인이 투병 생활을 하는 와중에 그 일을 대신할 사람을 두지 않고 행정 관료들에게 그렇다고 업무를 위임한 것도 아니었기에, 제국 재정이 엉망진창이 되버리고 제국 곳곳에서 봉급 체불이 되버렸던 건 변명할 수 없는 잘못이지만(
왕망이 저질렀던 바로 그 행태였다.), 이는 의심병과 책임감에 중점을 둬서 비판할 부분이다.
[48]
그라티아누스가 자초한 3차례의 서방에서의 내전과,
테오도시우스의 삽질을 거치며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군대 재건 직후 (
A. H. M. 존스의 추산에 따르면) 동서로마 통틀어 군단병만 최대 280000명에 총 병력이 60만에 달하던 로마군이 서로마에선 3만명을 동원하기도 버거울 정도로 형편없이 쪼그라들었는데, 결정타로
호노리우스가 스틸리코를 처형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한줌 남은 정예병마저 아주 시원하게 말아드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