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30 13:03:14

공군 야전사단

파일:external/www.flamesofwar.com/Luftwaffe-03.jpg 파일:external/www.flamesofwar.com/Luftwaffe-06.jpg 파일:external/www.flamesofwar.com/Luftwaffe-08.jpg

독일어: Luftwaffen-Felddivision (줄여서 LwFD)
영어: Luftwaffe Field Division

1. 개요2. 창설 배경3. 편성4. 복장과 장비5. 편제6. 행보7. 사단 목록8. 미디어
8.1. 게임8.2. 예능/텔레비전 프로그램8.3. 만화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루프트바페 내에 창설되었던 지상전투를 위한 일종의 보병 사단. 헤르만 괴링 공수 기갑 사단과 공수사단( 팔시름예거), 그리고 지역 방공부대의 성격을 띠는 방공사단 등과는 다르다.

2. 창설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때의 독일 공군은 그 수장인 헤르만 괴링 제국원수 덕분에 인력과 물자 등을 전 군에서 가장 풍족하게 받은 편이었으나, 그로 인해 타군 특히 육군으로부터의 갖은 견제에 시달렸다. 함정/항공기의 숫자를 확보하고 그것에 맞추어 인원을 편성하는 장비 중심의 해군과 공군과 달리, 사람 수가 곧 전력으로 직결되는 육군(특히 보병 계열)은 타군에 비해 인력 수요가 더 많고 또 확보 문제가 시급했는데, 늘 그렇듯이 사람은 항상 모자랐다. 그런 와중에도, 괴링은 특유의 정치적 욕심 때문에 공군을 자신의 세력 유지 수단으로 삼았고, 쓸데없이 큰 규모로 세를 불려왔다. 덕분에 TO가 항상 미달되던 육군에 비해 공군은 정수보다 무려 30만명에 가까운 인력을 더 뽑아 굴리고 있었으며, 열불 터진 육군은 틈날 때마다 이들을 육군으로 전환시킬 것을 요구하곤 했다.

1942년 초에 모스크바 코앞에서 소련군에게 한 방 먹은 뒤로, 히틀러의 무리한 계획인 청색 작전 때문에 사단별 대대 정수를 줄여가며 편제상의 사단만 잔뜩 늘리며 버티던 육군의 이러한 요구는 더욱 심해졌으며, 총통 빽으로 계속 육군의 요구를 쌩까던 괴링도 더 이상 이들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괴링은 자기 부하들 중 단 한 명도 육군으로 보낼 의향은 없었기에, 타군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기형적인 타협안을 내놓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공군 야전사단의 시작이었다.

3. 편성

1942년 10월, 괴링은 공군 각 부대에서 TO 이외의 인원들을 중심으로 20~25만의 병력을 차출, 일종의 보병 사단들을 편성토록 했다. 항공 관련 분야가 아닌 기지 경비 등의 업무를 수행하던 경계병이나 방공포병, 그리고 육군 출신으로써 공군으로 전군되었던 인원 위주로 차출, 구성됐다. 각종 장비 등도 육군의 일반적인 보병 수준으로 지급되었다. 일부 사단에는 돌격포 같은 장비도 주어졌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ugen_Meindl.jpg
야전사단들을 지휘/감독하기 위해 창설된 공군 제1야전 군단 지휘관 공군 소장 오이겐 마인들 장군
이들 야전사단은 원칙적으로 공군 제1야전군단 소속으로 하되, 부대를 육군의 군단 이상의 상위 제대에 파견해 이들의 지휘를 받도록 했다. 소속이 공군이라는 점 때문에 보급이나 행정, 지휘 계통에 혼선이 없진 않았으나, 작전시엔 공군이 아닌 육군의 상급 사령부에서 직접 굴릴 수 있게 되었으므로 육군도 더 이상 별 말을 하진 않았다. 육군 입장에선 공군 예산으로 부대 하나 차리고 병참까지 도맡는 부대를 자신들에게 지휘하라고 내어 준 것이니 생각하기에 따라선 득일 수도 있었다.가장 좋은 건 그냥 그 공군 예산을 자기들한테 주는 거겠지만

4. 복장과 장비

파일:external/i480.photobucket.com/Airman-LuftwaffefieldDevision.jpg 파일:external/s7.postimg.org/FD1.gif 파일:external/s7.postimg.org/FD2.gif
공군 야전사단 경보병을 묘사한 그림 해외의 공군 야전사단 재현자
독일 공군 특유의 청회색 전투복(Fliegerbluse)[1]을 기본으로, 기본적인 개인장구류는 구성이나 형태에서 육군과 동일한 것을 사용하였으나, 신발류를 제외한 벨트나 탄입대, 가죽부속들의 색상이 모두 공군식으로 갈색이었고, 각반이나 잡낭(빵주머니) 등의 색상도 전투복과 비슷한 공군 특유의 청회색을 사용하였다. 텐트 우의 등으로 쓸 수 있는 위장천인 첼트반(Zeltbahn)은 육군의 위장무늬와 동일한 것이 지급됐다. 모자류도 역시 공군식 청회색으로 도색된 철모, 공군용 정모나 전투모를 착용하였다. 그외에도 피복류에 부착하는 계급장이나 국가문장 등의 부착물들도 모두 공군용이었으며, 특유의 청회색 색상이 야전에서 비교적 눈에 띄는 편인지라 여기에 추가로 위장무늬가 들어간 덧옷(Kittel) 혹은 첼트반을 추가로 착용하기도 했다. 애초 파란색이 아닌 위장성 높은 색상의 옷을 채택했으면 될 일이었지만, 전세계적으로 육군 외 군대에선 개인 위장 개념이 없다시피한 건 똑같았기에 딱히 독일군이 시대에 뒤쳐진 것은 아니었으며, 도리어 덧옷 등을 추가 지급했다는 것 자체가 타국 대비 위장을 더 철저히 고려했다고 볼 수도 있다.

나중에 전쟁 상황이 급박해지면서 공군만의 별도 물자 생산 및 지급이 어려워지며 육군용 장구류를 납품받아 지급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후기로 갈수록 다양한 색상의 장구류가 뒤섞이게 되어 육군계급장이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에서 견장같이 탈부착이 쉬운 견장만 공군것으로 바꿔사용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다른 공군 장병들처럼 이들도 목깃 계급장과 견장을 부착하고, 목깃 계급장 바탕색과 견장 테두리의 색상으로 소속 병과를 표시했다. 야전사단의 경보병들은 녹색을 썼고, 포병이나 의무, 헌병 등 기타 병과는 자기 고유의 것을 사용했다.

5. 편제

"사단"이라는 이름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육군의 정규 보병 사단들에 비하면 규모가 작았다.

육군 1개 보병사단은 보병 연대 3개(1개 연대는 3개의 보병 대대) 즉, 1개 사단은 9개 보병대대와 1개 포병연대 그 외 정찰이나 대전차, 공병, 통신 등을 담당하는 대대 1개씩으로 구성되나, 공군 야전사단은 오직 4개 경보병대대와 1개 포병대대, 그리고 정규 육군 사단의 각종 지원대대들이 방공포병대대와 대전차대대를 제외하고는 중대들로만 구성되었다.

방공포병대대에는 8,8cm FlaK 18이 배치됐다. 그리고 육군보다 차량화 수준이 높았다는 이점이 있었는데, 을 한 마리도 보유하지 않고 전 병력과 장비를 차량을 통해 움직였다.
파일:external/www.flamesofwar.com/Luftwaffe-09.jpg
드물지만, 일부 부대에는 돌격포도 배치됐다. 다만 사진은 마르더 II 대전차자주포이다.

6. 행보

녹색 악마라고 불리며 여러 전선에서 맹활약을 펼친 공수부대인 팔슈름야거[2]나 독일 국방군 정예사단 못지 않게 잘 싸운 헤르만 괴링 기갑척탄 사단과 달리 이쪽 공군 야전사단은 아예 공이 없다. 아니 삽질을 해서 육군과 무장친위대에게 피해를 주기만 했다. 공군 야전사단은 말 그대로 공군 인원들을 강제로 차출해 옷만 공군인 육군을 만들어 버린 셈이었고, 자연히 육군이나 SS 사단들에 비해 사기도 의욕도 매우 낮았다. 공수부대나 헤르만 괴링 사단같은 경우 정예라는 이미지가 있어서 구성원들의 사기와 의욕이라도 올려줄 수 있었고, 심지어 대전 말기에 비행기가 없어 갈 곳 없는 항공기 승무원과 정비원들을 공수 훈련 한 번 못 받은 채 편성한 짝퉁 공수사단들조차 그런대로 잘 싸웠지만, 일반 야전사단들은 그런 것도 없었기 때문에 애초부터 높은 전투력을 발휘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육군의 전차 에이스인 오토 카리우스의 회고록에서, 그는 어느 날인가 공군 제복에 총 맨 땅개 녀석들이 번쩍번쩍한 MG42 같은 최신 새 장비로 온몸을 두른 채[3] 의기양양하게 전선으로 향하며 자기 부대 옆을 지나가는 걸 봤는데, 다음날 총이고 장비고 다 패대기치고 도망가는 꼴을 보고 "공군 야전사단은 소련군용 무기 셔틀이나 마찬가지"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심지어 소련군이 저들에게서 노획한 공군 복장으로 아군 행세를 하며 스파이질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아, 아군에게 총맞고 죽거나 다친 공군 장병이 여럿 나왔다고 한다. 비단 그의 기록 말고도, 육군이나 SS의 회고록 중 이들을 좋게 평가하는 내용이 실린 것을 찾기 힘들다.

그래도 전쟁이 지속될수록 독일 공군이 점점 공군스러운 작전은 하기 힘들어지면서 어쩔 수 없이 야전에 투입되는 일이 늘게 되었고, 야전에서의 실전 경험이 쌓이며 나름 베테랑들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제국의 2인자를 자처하던 괴링의 입김 덕에 비교적 좋은 장비와 물자를 보급받아 그럭저럭 육군의 무명 사단 정도의 전투력은 내기 시작했다고 한다.[4]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11px-Bundesarchiv_Bild_101I-395-1513-30%2C_Russland%2C_Luftwaffensoldat%2C_Offizier.jpg
그리고 위 사진의 중위와 같이[5], 전쟁 말기로 갈수록 육군이나 SS와 마찬가지로 병력의 평균 연령이 확 올라가는 등 인적 자원의 질이 떨어졌다.

종전시까지 총 21개의 사단이 창설되었고, 이 가운데 2개의 사단이 전쟁 말기에 통째로 육군으로 전군되었다.

조종장교들처럼 민간인 폭격에 연루될 일도 없고 야전전투 병과도 아닌 의욕없는 공군병들이었으므로 공군야전사단은 독일의 전쟁범죄에는 연루되지 않았다. 물론 괴링이 잔혹행위를 엄격히 금지시킨 것도 있었다. 막나갔던 SS가 현재 어떤 취급받는지 생각해보면 이들로선 그나마 다행이다. 모자라지만 착한 친구들

7. 사단 목록

사단 번호 앞에는 육군 및 SS와 구분하기위해 "공군"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8. 미디어

8.1. 게임

8.2. 예능/텔레비전 프로그램

8.3. 만화



[1] 직역하면 비행복. 원래 이 전투복은 항공기 승무원들을 위해 고안된 것이기에 전투복, 전투모 등의 피복을 비행복, 비행모라고 불렀다. 하지만 옷의 구조나 디자인에서 기능적인 부분들이 많아 편리했기에 비단 승무원들 뿐만 아니나 전 공군 내에서 인기가 있었다. 때문에 곧 보직에 관계없이 모든 공군 장병들에게 지급되었다. 공수부대원도 역시 공군 소속답게 이 피복을 착용하였다. [2] 팔슈름야거의 경우 크레타 섬 전투에서 큰 손실을 보고 나서 히틀러의 작전 제한 명령 때문에 대규모 공수작전에 투입되지 않았고 각 전선에서 정예 보병부대로 굴렀다. [3] '전쟁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고 묘사할 정도로. [4] 비교적 잘 알려진 부대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캉 방어선에 투입된 제16공군야전사단, 아르덴 대공세에 투입된 제18공군야전사단(공세 당시에는 국민척탄병 사단으로 개편)가 있다. [5]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철십자 훈장들과, 역시 제1차 세계 대전 때의 육군 항공대 시절의 조종사 휘장을 단 걸로 보아 예비역임을 알 수 있다. 단 위의 사진은 옆에 써있듯 전쟁 말기가 아닌 중기(1942년 3월)에 찍힌 사진이다. [6]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전멸했다고 잘못 아는 사람이 많은데, 9야전사단은 1944년에나 창설됐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전멸한 것은 제9방공사단(사단장 볼프강 피케르트(Wolfgang Pickert))으로, 해외에서도 혼동하는 사례가 많다. [7] 전쟁 말기 육군으로 전군, 제16공군보병사단(공군 출신임을 밝히기 위해 이렇게 명명했다.)으로 개칭되었다가 제16국민척탄병사단으로 한 번 더 이름이 바뀌었다. [8] 후에 공군 제19돌격사단으로 개칭되었다가 육군으로 전군, 제19공군보병사단으로 개칭되었다가 제19국민척탄병사단으로 한 번 더 이름이 바뀌었다. [9] 후에 공군 제20돌격사단으로 개칭. [10] 일명 마인들 사단. 제1야전군단 예하의 자원 관리 부대를 전투사단으로 개편한 것. [11] 실제로 창설되지 못한 페이퍼 사단. 배속 예정이던 부대들은 타 사단으로 보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