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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4 08:39:28

정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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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휘잡의 자녀들이 혼인권을 보장받았다는 기록이 있음.
명 황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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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제10대 황제
무종 의황제 | 武宗 毅皇帝
파일:Ming_Wuzong.jpg
출생 1491년 10월 26일
사망 1521년 4월 20일 (향년 29세)
능묘 강릉(康陵)
재위기간 제10대 황제
1505년 6월 19일 ~ 1521년 4월 20일
(16년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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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성씨 주(朱)
후조(厚照)
부황 효종 경황제
묘호 무종(武宗)
시호 승천달도영숙예철소덕현공홍문사효의황제
(承天達道英肅睿哲昭德顯功弘文思孝毅皇帝)
연호 정덕(正德) }}}}}}}}}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간신 유근의 총애2.3. 시대를 앞서간 부캐놀이2.4. 유언
3. 평가와 반론 - 정말 암군인가?4. 기타5. 대중매체에서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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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6%98%8E%E6%AD%A6%E5%AE%97.jpg

중국 명나라 제10대 황제. 묘호는 무종(武宗), 시호는 승천달도영숙예철소덕현공홍문사효의황제(承天達道英肅睿哲昭德顯功弘文思孝毅皇帝). 휘는 후조(厚照). 홍치제의 장남.

2. 생애

2.1. 초기 생애

주후조는 1491년(홍치 4년) 홍치제와 효성경황후 장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장남의 탄생은 홍치제 부부에게는 너무나 큰 기쁨이었다. 홍치제는 황제로 등극한 이후에도 자신의 황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어서 마음고생이 심했던 때었다. 만약 홍치제가 효성경황후 이외에 다른 여자들을 탐했다면 부황 성화제처럼 여러 아들을 두었을 것이다. 그들 중에서 성군이 자질이 보이는 아들을 태자로 책봉하여 후계 구도를 미리 짤 수 있었을 것이다.[1] 하지만 홍치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는 장황후에 대한 애정 표현과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는 성품에서 비롯되었겠지만 대명천하를 다스리는 후계자를 결정하는 일에서는 심각한 문제였다. 다행히도 홍치제와 효성경황후 부부가 주후조를 낳는데 성공해서 이런 문제가 일거에 해결되었다.

그는 8세 때부터 당대 최고의 학자들의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유가 경전을 암송하고 제자백가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스승들을 놀라게 했다. 홍치제와 조정 중신들은 태자를 하늘에서 낸 진명천자라고 여기고 기뻐했다. 홍치제 사후에 주후조가 황위를 계승하면 명나라는 태평성대를 구가할 거라는 확실한 믿음이 조정 안팎으로 퍼졌다. 이처럼 태자 주후조가 명실상부한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을 때 뜻밖에도 황궁에 해괴한 소문이 퍼졌다.

그가 효성경황후의 소생이 아니라 무성위의 병졸 정왕의 딸 정금련이 낳은 아들이라는 충격적인 얘기였다. 이 소문이 순식간에 퍼지게 된 까닭은 정왕이라는 자 때문이다. 그는 찢어지게 가난하여 어린 딸 정금련을 남의 집 하녀로 팔아 먹었다. 그 후 딸이 궁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딸과 연락할 방법을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마침내 황궁의 환관 유산과 선이 닿아 그를 통해 딸에게 온갖 먹을거리를 보냈다. 딸도 궁중에서나 입을 수 있는 호화로운 의복을 아버지에게 몰래 보냈다. 정왕은 딸이 보낸 옷을 입고 사방을 돌아다니며 딸이 황제의 은총을 입어 아들을 낳았다고 허풍을 떨었다. 사람들은 정왕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그를 정황친이라고 불렀다. 만약 정왕의 말이 사실이라면 일개 병졸에 불과한 그가 어느 날 황제의 장인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그에게 아부한 것이다.

홍치제와 효성경황후는 오랫동안 후사를 얻지 못하여 마음고생이 심했다. 홍치제 부부는 아들을 얻기 위하여 목욕재계하고 천지신명에게 여러차례 제사를 지냈지만 효험이 없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정왕이 허풍을 떨고 다니고 있었고, 효성경황후가 갑자기 아들을 낳았던 것이다. 그리고 효성경황후가 정금련의 아들을 빼앗아 자기 아들로 삼았다는 소문이 급기야 꼬리를 물고 퍼졌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황후를 능멸하는 이런 요언이 이미 황궁 안팎에 널리 퍼졌는데도, 조정 대신들 가운데 누구도 진상을 밝히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주후조의 출생 비밀을 밝힌다는 것은 국본을 세우는 데 실로 엄청난 영향을 주기 때문에, 누구도 목숨을 걸고 진실을 규명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황제가 유언비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는 이유가 정왕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라고 백성들이 믿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황제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으므로 대신들도 감히 긁어부스럼을 낼 필요가 없었다. 헌데 태자의 나이 14세 때인 홍치 17년에 홍치제가 느닷없이 정왕, 유산 등 이른바 정왕요언안에 연루된 자들을 잡아들이라는 어명을 내렸다. 원래 이 사건은 사법기관에서 다루어야 할 소임이었지만 효종이 친국했다.

결국 유산은 궁궐 밖의 일에 간여한 죄로 처형을 당했고, 정왕은 유언비어를 날조한 죄와 황족의 친척을 사칭한 죄로 감옥에 갇혔으며, 정금련은 황실의 의복 세탁을 담당하는 완의국의 궁녀로 쫓겨났다. 홍치제는 이미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이 사건을 제기하여 처리했는데 그는 이 사건을 처리한 후 1년 만인 홍치 18년에 세상을 떠났다. 아마도 그는 죽기 전에 아들 주후조의 출생에 대한 의혹을 말끔히 해소함으로써 주후조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하려고 했던 듯 싶다. 만약 홍치제가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면 황위를 이은 주후조의 정통성 문제를 놓고 분란이 일어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정덕제 주후조는 어릴 때만 해도 학문을 좋아했고, 특히 불교에 대해 잘 알았고 성군의 자질을 보여 부황의 총애를 받았지만 점차 성장하면서 경전 읽기를 게을리하고 놀기를 아주 좋아했다. 동궁의 환관들은 훗날 황제로 등극할 어린 태자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진귀한 애완동물이나 온갖 완구를 헌상하여 그를 즐겁게 했다. 또 기발하고 흥미로운 놀이를 통하여 그로 하여금 종일토록 노는 일에만 정신을 팔게 했다.

주후조는 특히 말을 몰고 교외로 나가 전쟁놀이 하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태자 자신이 대장군이 되어 호위 무사와 환관으로 편성된 군사를 거느리고 직접 작전을 수립하여 적진을 돌파하는 놀이를 즐겨했다. 홍치제는 태자가 홍무제 주원장처럼 문무를 겸비한 황제가 되기를 바랐으므로 전쟁놀이를 좋아하는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하지만 태자가 날이 갈수록 공부를 등한시하고 야생마처럼 거칠게 뛰어 노는 모습을 보고 크게 우려했다.

다른 아들이 있었다면 태자를 폐위할 수도 있겠지만 아들이 주후조 한 명뿐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홍치제는 홍치 18년 임종 전날에 유건, 사천, 이동양 등 조정 중신들을 건청궁으로 불러 어리고 놀기 좋아하는 아들이 성군이 될 수 있도록 잘 보좌해 달라는 유언을 했다. 임종을 앞둔 홍치제는 태자의 결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충직하고 정의로운 원로 중신들에게 태자를 잘 보필하여 성군이 되게 하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같은 해 정덕제 주후조는 15세의 나이로 황제에 등극했다.

그런데 정덕제는 황제가 된 후엔 방탕한 생활을 즐기게 된다.

2.2. 간신 유근의 총애

어릴 적부터 그의 몸종이었던 환관 유근(劉瑾)은 그의 마음을 꿰뚫어보았다. 황제의 방탕한 기질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1507년(정덕 2년) 유근은 어린 황제를 꼬드겨 황궁의 서안문 밖에 웅장하고 화려한 별궁을 짓게 했다. 정덕 2년부터 7년에 이르는 기간에 정덕제는 은자 24만 냥을 들여 200여 채의 호화로운 전각들을 지어 오직 자신만의 별궁을 건설했다. 그 즐비하게 늘어선 모습이 표범의 무늬를 닮았다고 하여 별궁의 이름을 표방이라고 했다.

정덕제는 정덕 3년에 거처를 표방으로 옮긴 후 정덕 16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금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줄곧 그곳에서 살았다. 표방은 사치와 향락을 즐기기 위하여 특별히 만든 일종의 아방궁이었으므로 정덕제가 더욱 애착을 느끼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머물렀다. 정덕제는 유근, 위빈, 곡대용, 구취, 장영, 마영성, 고풍, 나상 등 환관의 무리인 팔호의 농간에 놀아났다. 팔호는 정덕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충신들을 몰아내고 조정을 농락하기 시작했다.

팔호 가운데 유근이 정덕제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고 조정을 마음껏 농락한 환관이다. 그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당시 사람들은 그를 입지황제라고 불렸다. 정덕제가 태자였을 시절부터 몸종 노릇을 했으므로 그의 방탕한 기질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정덕제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해결해주는 수완을 발휘했다. 유건과 사천 등 조정대신들은 유근의 전횡에 분노하여 유근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라왔지만 무종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천문과 역법을 관장하는 오관감후 양원은 별자리를 관찰하고 간신 유근을 당장 처단하지 않으면 큰 변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정덕제에게 아뢰었다.

당시 사람들은 별자리의 변화가 역적이 반란을 일으킬 조짐으로 생각했는데 정덕제도 긴장히지 않을 수 없었다. 매일 탄핵을 요구하는 상소가 끊임없이 올라왔지만 자기 수족이나 다를 바 없는 유근을 쉽게 처단할 수 없었는데 그가 없으면 환락을 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태감 왕악을 내각으로 보내 대신들과 상의하여 유근을 남경으로 귀양 보내 여론이 잠잠해지면 다시 부를 생각이었다.

궁지에 몰린 유근은 마영성, 곡대용 등 측근을 거느리고 정덕제에게 달려가 에워싸고 왕악이 내각대신들과 결탁해 황상이 자유롭게 출궁 하시는것을 통제하여 황상이 좋아하시는 수렵 활동을 저들이 못하게 하려고 한다며 눈물로 호소했다. 툭하면 궁궐 밖으로 나가 엽색 행각을 벌이고 사냥을 즐기는 일이 취미인 정덕제는 진노했다. 그는 즉시 유근에게 사례감을 관장하게 하고 마영성은 동창을 곡대용은 서창을 장악하게 했다. 유근을 처단하려고 했던 유건과 사천은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했으며 왕악은 남경으로 귀양가는 길에 피살되었다.

이제 조정에는 유근의 농간을 막을 대신들이 없었다. 정덕제는 또 유근에게 단영을 총지휘하게 했는데 단영은 경군의 정예병 10만명을 보유한 군사조직으로서 북경 황궁을 보위했다. 황제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장하고 경군의 병권을 장악한 유근은 공개적으로 매관매직을 자행했는데 도성의 관리들이 바친 뇌물의 액수에 따라 품계를 결정했다. 전국의 지방관들이 황제를 배알하고자 황궁에 입성하려면 사전에 반드시 유근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다.

당시 그런 관행을 배면례라고 칭했다. 유근이 만나주는 것에 대한 예의로 뇌물을 준다는 뜻이다. 그를 한번 만나는데 최소한 은자 1,000냥이 필요했으며 많게는 5,000냥이 들었다. 상경한 관리들 가운데 돈이 부족한 자는 도성의 부호에게 돈을 빌려 상납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사람들은 그런 행위를 경채라고 칭했다. 유근은 또 승진한 관리들에게 자신이 힘을 써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하인전을 요구했다. 요구에 응하지 않는 관리가 있으면 즉시 다른 구실을 잡아 파면시켰다. 죄천되거나 파면된 자들도 뇌물을 바치면 원래의 관직을 회복할 수 있었다.

관직이 유근에게는 기본적으로 돈을 받고 파는 상품에 불과했다. 경향 각지에서 유근에게 바친 뇌물이 산처럼 쌓였이니 유근의 권세와 부귀는 황제에 버금갔다. 재위 초반에 일어났던 유육유칠의 난도 유근의 부하 양홍이 유근을 믿고 가혹하게 농민들을 쥐어짜다 일어난 결과였는데, 이후 유근은 황제의 권위를 등에 업고 온갖 못돼먹은 짓을 자행하다가 자신이 내친 양일청, 장영 등에 의해 모반을 획책한 일이[2] 사전에 발각되어 능지형에 처해졌다. 다만 유근이 능지형을 받은 것은 역적모의를 했을 뿐만 아니라 갑질을 넘어 범죄를 저지르는 수준까지 갔기 때문이었기 때문에 이후 실세가 된 환관도 백성들이 견딜 수 있는 수준으로 수위를 조금 완화했을 뿐 여전히 갑질을 했다.

황제가 자금성으로 돌아가 국사를 다스리지 않고 표방에서 여색과 향락에 빠지자 자연히 간신배와 환관들이 표방에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그들 가운데 금의위 도독동지 우영이라는 자가 있었다. 색목인 출신인 그는 방중술에 대단히 뛰어났다. 황제의 음란한 성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회족 여자는 흰 살결이 비단처럼 부드럽고 옥처럼 청결하니 중원의 여자들은 감히 비교할 수 없다고 아뢰었다. 우영의 말에 정덕제가 호기심을 보이자 우영은 즉시 가무에 능하고 자태가 요염한 서역의 무희 12명을 선발하여 표방으로 보냈다. 우영의 예상대로 정덕제는 회족 무희들이 갖은 교태로 아양을 떠는 모습에 그만 넋이 나가고 말았다. 우영은 이에 그치지 않고 금의위 가운데 색목인 출신 관리의 아내나 딸을 빼앗아 정덕제의 수청을 들게 했다. 정덕제가 회족 여자들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장안에 퍼지자 간신들은 다투어 회족 미희들을 진상하였고, 표방은 서역 출신의 궁녀들로 넘쳐났다.

그러나 정덕제는 많은 미희들과 그처럼 많은 엽색 행각을 벌었는데도 정작 후계자를 얻는 데는 실패했고 사망할 당시 아들도 형제도 없어서[3] 제위는 사촌동생 주후총에게 넘어간다.

2.3. 시대를 앞서간 부캐놀이

파일:external/pic.baike.soso.com/20111020144253-269314459.jpg
한동안 여러 놀이들[4]에 심취하여 그렇게 보내다가 싫증이 난 그는 이후 그 유명한 혼자놀기를 시작했다.

자신에게 '주수(朱壽)'라는 제2의 이름을 붙인 다음 스스로에게 대장군의 직위를 내린 것이다. 정덕제는 군대를 끌고 갈 때면 주수의 이름으로 출정하였으며, 대장군인 본인이 황제인 본인에게 글을 올리기도 하고 상찬을 하기도 하는 등 혼자놀기의 진수를 보여주게 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정덕제는 위무대장군이란 거창한 작위를 자신에게 내렸고, 진국공에 봉하였다. 1519년에는 주수를 태사에 임명하고 이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투옥시키기까지 하였다.

그렇게 법률적으로는 '정덕제 주후조'와 '위무대장군 진국공 주수'가 동시에 각각 존재하게 된다.

다음은 황제 주후조가 대장군 주수에게 내린 조문이다.
"총독 군무 위무대장군 총병관 주수는 몸소 육사를 이끌고 변경을 조용케 하였으므로 특별히 진국공에 봉하고 매해 5,000섬을 녹봉으로 주도록 한다."

그리고 정덕제는 여색만 밝힌 게 아니었다. 그의 성적 취향은 아주 유별났다. 마음에 드는 미소년이 있으면 즉시 양아들로 삼았다. 재위 16년 동안 공식적으로 100여 명을 양아들로 삼았다. 정덕 7년 한 해 동안에는 무려 미남 127명의 성씨를 주씨로 바꾸는 기행을 벌었다. 이처럼 남색을 즐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양아들 가운데 전녕과 강빈 두 사람이 정덕제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다. 전녕의 성씨는 원래 전씨가 아니었다. 어렸을 적에 태감 전능의 아들로 팔려가 성씨를 전씨로 바뀌었다. 그는 성질이 교활하고 활을 잘 쏘는 타고난 아첨꾼이었다. 자신을 황제의 서자라고 자칭하며 정덕제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정덕제는 잠시라도 그가 곁에 없으면 불안해 할 정도로 그를 총애했다. 표방에서 만취하면 그를 베개 삼아 잠에 곯아 떨어지기 일쑤였다. 황제가 일개 환관의 품에서 자는 추태를 보인 것이다. 훗날 전녕은 영왕 주신호의 반란 사건에 연루되어 가정제가 즉위한 직후에 저잣거리에서 사지가 찢기는 형벌을 당했다.

강빈은 원래 변방을 지키고 있었던 장수였다. 정덕 5년 유육 유칠의 난 때 강빈은 몸에 화살 세 발을 맞고 그중 한 발은 얼굴에 맞았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다. 이 농민 반란을 평정하는 데 혁혁한 전공을 세운 업적으로 정덕제를 알현할 수 있었다. 그가 어전에 나가 병법을 아뢰자 정덕제는 크게 기뻐하며 그를 곁에 머물게 하고 총애했다.

전녕과 강빈은 정덕제의 총애를 놓고 서로 질투하고 두려워하는 관계였다. 전녕은 황제의 그림자나 다름없는 환관이었으므로 언제라도 정덕제에게 강빈을 모함할 수 있었다. 강빈은 일개 환관 따위가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변방의 장수 출신이라 그의 휘하에는 수족처럼 부릴 사병이 없었다.

전녕이 음모를 꾸며 공격하면 꼼짝없이 당할 처지에 놓인 강빈은 계책을 냈다. 변방의 용감한 병사들과 북경의 경군을 주기적으로 상호 주둔지를 바꾸어 지키게 하면 명군이 더욱 강해질 것이라고 정덕제에게 아뢰었다. 그는 자신의 사병이나 다름없는 변방의 병사들을 북경으로 끌어들여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런 계책을 냈다. 하지만 명나라의 법률에 따르면 변방의 군사와 경군은 서로 주둔지를 바꿀 수 없었다. 만약 변방 군사가 약하면 몽골군이 침략할 수 있고 경군이 약하면 변방 군사가 반란의 화근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황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제도였다. 그런데 정덕제는 대신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변방 군사를 북경으로 이동시키고 난 뒤 강빈에게 지휘권을 부여했다.

정덕제는 부황 홍치제와 다르게 인덕 정치로 나라를 통치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강한 무력만이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반란이 일어나면 자기가 친히 진압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가진 황제였다. 강빈을 총애한 까닭도 그의 무용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정덕 12년 어느 날 강빈이 '선부의 악공 중에는 미녀들이 많으며 그곳에서 우리 군사와 오랑캐들이 싸우는 모습을 즐길 수 있다. 순식간에 천리 밖으로 갈 수 있는데 왜 황상께서는 궁궐에서 답답하게 지내면서 조정대신들의 간섭을 받고 있느냐'며 무종을 꼬드겼다.

삘받은 정덕제는 미복을 입고 강빈 등 측근 몇 명만을 대동한 채 몰래 표방을 빠져나와 선부로 향했다. 황제 일행이 거용관에 이르렀을 때 어사 진흠에게 황제의 신분이 노출되었다. 진흠은 너무 놀랐다. 황제가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 불쑥 나타났으니 놀랄 수밖에. 정덕제는 그의 간곡한 만류에 어쩔 수 없이 환궁했다. 그리고 며칠 후 밤에 몰래 도성을 나와 다시 선부로 달려갔다(...).

신하들 몰래 가출을 감행했다는 얘기다. 이를 안 대신들이 서둘러 쫓아가 환궁을 간하였으나, 정덕제는 간단히 무시해 버렸다. 열받은 궁궐 관리들과 신하들이 몰려와 다소 강한 어조로 "궁궐에 머물러 황제의 위엄을 지키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그 말에 화가 치민 정덕제는 근위병들을 시켜 150여 명의 관리들에게 태형 30대씩을 내리고 그대로 자기 갈 길을 갔다. 이때 노쇠한 신하들 중 십수 명이 곤장을 맞고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강빈은 진국부를 설치하고 표방의 미녀들과 진귀한 보물들을 전부 그곳으로 옮겼다. 무종은 진국부에서 환락에 젖었다. 요염한 궁녀들과 시침도 재미없을 때는 저녁에 민가로 잠입하여 부녀자들을 겁탈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마음에 드는 부녀자가 있는 집이면 며칠 동안 나오지 않고 그곳을 자기집이라 징했다.

사실 그가 자신의 영지를 선부로 정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조정 대신들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서다. 황제가 친히 변방에 나가 외적을 토벌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 대신이 골치아픈 나랏일을 황제에게 일일이 보고 할 수 있겠는가? 둘째 황음무도한 생활을 즐기기 위해서는 수많은 이목이 있는 황궁보다는 변방이 훨씬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셋째 홍무제 주원장과 영락제 주체처럼 몽골족을 제압하여 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세우려고 했다. 선부는 몽골이 중국으로 쳐들어오기 위한 첫 번째 루트였던 셈. 즉 자신을 최전방 지휘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몽골군이 응주로 쳐들어왔을 때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맞서 싸웠다. 전투의 내용은 불분명하지만 양쪽의 군대는 수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부족해 진실 여부는 불확실하다. 한 기록에서는 승리라고도 하고 다른 기록에서는 패배라고도 한다.[5] 어쨌든 황제 본인이 직접 전투에 참가했다는 걸 생각하면 야전사령관으로서의 능력이 어느 정도 있었거나 아니면 운빨이 기가 막히게 좋았을지도 모른다.

이후 이미 진압이 끝난 친척 영왕의 반란을 자신이 직접 잡았다고 하기 위해서 " 풀어줬다 잡는" 개그쇼를 벌이는데,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반란 진압을 위해 난징까지 내려왔다가 중간중간 머무르는 곳에서 낚시와 뱃놀이를 했다. 그러다가 북경에 돌아오는 중 한 호수에서 뱃놀이를 했는데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 되었다. 뱃놀이 도중 물에 빠지고 말았는데 신하들이 건져내었으나 그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30살에 숨졌다.

2.4. 유언

유언만큼은 옳은 소리였는데 "지금까지 짐이 한 짓들은 전부 짐에게 책임이 있다. 그러니 너희는 짐의 행동을 보고 근신하며 이후 경거망동하지 말거라"는 내용이었다. 루이 14세의 유언에 필적하는 참회의 말씀. 그러나 그가 죽은 곳은 자금성도 아니었고 그가 내내 유흥을 즐겼던 거처, 표방(豹房)이었기에 도무지 유언과 매칭이 되지 않는다. 죽기 직전까지 표방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당사자와 측근만이 알 것이지만.

사실 저 유언처럼 정덕제가 놀러만 다닌 것은 아니었고, 주수라는 이름을 갖다붙여서 몽골인들을 토벌하기도 하고, 환관 유근을 숙청하기도 하는 등 할 일은 해가면서 놀았다. 후세에는 무난한 수준인데 인물상이 워낙 특이해서 전근대 기준으로 비판받은 황제로 분류된다.

그래도 후대 황제들인 가정제 만력제, 천계제보다는 백 배 나은 인간이었으며 본격적인 암군들의 시대가 시작되니 그가 죽은 이후 명나라는 본격적으로 삐걱대기 시작한다.

3. 평가와 반론 - 정말 암군인가?

명나라는 정통(正統) 연간 이래로 나라의 기세가 점차 약해졌다. 의황제(毅皇帝)는 직접 역신 유근을 제거하고 몸소 변방의 적을 막았으며, 분연히 무공을 세워 스스로 승리하려고 했다. 하지만 향락에 빠지고 노닐며 소인들을 가까이 했으며, 스스로 관호에 서명하기까지에 이르렀고 머리에 모자를 쓰고 발에 신발을 신는 구분이 방종하였다. 다행히 사람을 쓰는 권력을 자신이 직접 부렸고 정권을 잡은 신하들이 결함을 보충하고 바로잡아 구원하였으니, 이로써 조정의 기강은 어지러워졌지만 위험한 지경까지 이르지 않았다. 만일 효종이 남긴 덕택을 이어받아 절약하고 자제하며 예법을 엄수하며 보통의 자질을 가진 군주의 절조가 있었다면, 나라는 편안해지고 명성은 온전했을 것이니, 어찌 후세 사람들의 큰 비판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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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옥, 『 명사}}}

장렬한 최후로 추켜세워지던 숭정제가 시간이 지날수록 평가가 떨어지는 것과 반대로 정덕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평가가 올라가고 있다. 전근대 역사학의 선악 이분법식 역사 연구방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연구방법론이 개발되면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연구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보면, 먼저 비록 제멋대로 행동하고 환관을 중용하기는 했어도 결코 어리석은 황제는 아니었다. 좋은 황제의 첫번째 조건은 좋은 신하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덕제 시기에 재상을 지냈던 인물이 이동양, 양정화 등으로 이들은 모두 명재상으로 꼽히는 인물들이다. 정덕제는 이 사람들이 하는 조언 중에서 "놀지 말라"는 조언은 빼고 대부분 받아들였다. 또한 자신에게 반대한다고 해서 신하를 처형하는 일이 없었고 쓴소리를 한다고 해서 쫓아내거나 처형하지 않았다.[6] 이 때문에 신하들과 갈등은 있었지만 정덕제가 다스리던 시절에는 그 다음 황제인 가정제 만력제 시절과 같은 황제와 신하 사이의 정면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정덕제는 놀러다니기는 했지만, 그가 황제로서 해야 할 일에 게을렀다는 뜻은 아니다. 궁 안에 붙어있지 않았을 뿐. 신하들의 보고는 꼬박꼬박 처리하고 국가의 중요 정책 및 중대사는 자신이 직접 결정했다. 다만 황제가 주관해야 하는 의례 행사는 자주 빠지고 친척 또는 자신의 아바타(...)를 보냈다. 게다가 정덕제는 바깥에 싸돌아다니기는 했어도 상주문은 꼬박꼬박 받아서 일은 했다. 영왕의 반란을 풀어줬다 잡는 개그쇼라고 욕을 먹는 남순 시기에도 수보를 데리고 내려가서 꾸준히 정사에 관한 논의를 계속했다. 물론 북경으로 돌아가자는 요구만큼은 씹었지만…… 그리고 선부로 이동해서 돌아다닐 때도 신하들은 절대 자기가 사는 선부로 오지 못하게 했지만 무조건 상주문은 크건 작건 간에 전부 보내라고 했던 것을 보면 후일 등장하는 암군의 끝판왕 만력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리고 환관에게 휘둘렸던 한나라 당나라 시대의 황제와는 다르게 환관을 중용했을지언정 권력만은 죽을 때까지 놓지 않았다. 따라서 환관들도 황제 눈치를 봐서 갑질을 하더라도 나중에 이정도는 괜찮을 줄 알았다고 변명이 가능한 수준으로만 했다. 물론 유근처럼 갑질수준을 넘어 아무 생각 없이 선을 마구 넘는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도 있었지만, 뒤에서 그걸 다 보고받고 기록해 놓아서 잘 알고 있던 황제가 일부러 방관하다가 불시에 그의 숙청을 결정하는 순간 그게 다 유죄 판결 내리는 근거가 됐고, 그의 만행이 갑질 수준을 넘어 거의 국가를 말아먹기 직전까지 간 것을 알자 능지형 처분을 내려서 과하게 만행을 저지르면 대가를 치른다는 걸 가르쳐 줬다.[7]

'무(武)'종이란 묘호를 받았던 것처럼 정덕제는 태자 시절부터 군사적인 면에 대한 관심이 상당했다. 문신들뿐만 아니라 무관을 총애했고 자주 변방을 순찰하는 걸 좋아했다. 병사들에 대한 포상도 자주 내리고 군대 문제에 신경을 많이 쓰고 어려움을 해결해주는데도 관심을 쏟았다. 또 자신이 직접 갑주를 입고 무장을 하여 무예를 익히거나 지휘를 했으며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8] 그만큼 국방에 관심이 많았고 실제로 야전사령관으로서의 능력도 꽤 봐줄만 했다는건데 중국은 당나라 이후부터 황제의 전제권이 차츰 강해져 명나라 때부터는 황제 한명의 능력에 따라 나라가 좌지우지되는 정치체계가 고착화되었는데 황제가 군사적인 면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은 그만큼 국방력이 탄력을 받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9] 특히 수양제나 후대의 건륭제처럼 대규모 원정에 꽂혀 나라에 부담을 주지 않았다는 것도 긍정적인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정덕제가 아바타 놀이를 했다는게 과연 비판받을 일인지에 대한 수정주의적인 시각도 있다. 이러한 견해는 서양사의 군주들 중에는 왕이나 황제직 이외에도 여러 작위나 호칭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으며, 심지어는 이를 정무에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10]. 또한, 유사하게 원간섭기 고려왕이 고려국왕과 정동행성의 승상을 겸하는 경우도 있었다.[11] 하지만, 서양사 또는 다른 사례에서 유사한 사례가 발견되는 것이 정덕제를 옹호하는 근거로 사용될 수는 없다. 또한, 고려의 사례는 당시 고려가 사실상 원의 속국이었다는 점에서 독립국의 군주와는 거리가 먼 사례이므로 정덕제에 대한 평가의 근거로 직접적으로 사용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도, 정덕제가 스스로에게 벼슬과 작위를 내린 것이 국정에 효과적으로 활용된 사례를 찾기 어려우며, 오히려 이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투옥하는 등 신하들에 대한 불필요한 탄압과 조정 내 분란을 낳았다는 점에서 아무리 수정주의적인 접근을 하더라도 이것이 군주로서 적절한 행위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덕제 시기부터 명나라의 상업이 급속히 성장하였고 양명학이 등장하는 등 사상과 문화의 발전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정덕제 역시 유목 민족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자금성에 살기보다는 표방이라고 하는 유목민족식 천막을 치고 살았고 평소에도 이민족의 옷을 즐겨 입었다고 한다. 티베트 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고 일상생활에서 산스크리트어 몽골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서역 인물들과 자주 접견을 하며 교류를 추진했던 것도 명나라 황제 중에서 가장 적극적이었다. 특히 정덕제 때 포르투갈 사절단이 명나라를 방문했고 명나라는 포르투갈과 교류를 시작했다. 좀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면 국제적인 감각을 가진 황제라고 평할 수도 있다.

종합하면 4대 암군으로 꼽히기엔 나름의 업적도 상당하고, 신하들과의 관계도 대체로 무난했으며 정덕제 자체가 어리석고 못난 황제라고 보긴 많이 어렵다. 그래도 연구가 계속되며 평가가 상당히 반등했으나, 성군이라 부를 정도는 못된다. 그렇다고 무작정 암군이라 욕할 정도는 더더욱 아니었지만. 어디까지나 다른 성에 있으면서 혼자놀기를 했다는 점 정도를 제외하곤 평범한 황제 수준이었다. 그 제외한 부분이 워낙 어처구니없는 경우라 후세에 저평가를 많이 받았을 뿐이다. 즉, 나랏일과 교류, 정복같은 명 업적을 남길 정도로 일을 잘 했으나, 놀기도 거의 그만큼 잘 놀고 지냈다. 휴식 및 여흥의 비율을 조절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호평을 내릴 때 발목을 잡힌 황제라 할 순 있을 것이다.

온전히 그의 잘못만을 치부할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의 가장 큰 잘못은 사고로 인한 요절로 후사를 남기지 못한 것이다. 이 때문에 그가 죽은 후 명나라에 본격적으로 암운을 드리운 암군들, 가정제 만력제, 천계제가 잇따라 즉위하고 말았다.

4. 기타

5. 대중매체에서

명군은 아니지만 등장하는 중화권 작품이 수십개가 넘는다. 악역으로 그려지는 작품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2004년 드라마 봉림각에 등장한다. 장난기가 있다. 궁궐밖에 나갔다가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연인이 죽자 국정에 매진한다.

2005년 드라마 정덕연의에서 주연으로 등장하며 허지옹이 정덕제를 맡았다. 황위에 대한 욕심이 없으며 예법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한다. 아버지의 관을 직접 만들고 싶어서 궁궐밖에 나가 신분을 숨기고 목공을 배웠다.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지만 신하들과 목수들은 황자의 효심에 감동했다. 국수식당에서 서빙을 하기도 했다. 대장군 주수라는 부캐로 북원과 전쟁을 했다.

2007년 드라마 대명제국지야래풍우에서는 임동림이 정덕제를 맡았다.

2010년 드라마 소삼전기에서는 조연으로 등장한다. 지방관아에 행차하여 주인공의 억울함을 풀어준다.

2010년 영화 용봉점에서는 주연이며 임현제가 정덕제를 맡았다. 정덕제가 거지가 됐다가 요리사가 되는 과정을 거쳐서 왕위찬탈계획을 저지하는 내용이다.

2012년 드라마 왕양명에서는 조연으로 등장하며 주일룡이 정덕제를 맡았다.

2014년 드라마 소림사전기장경각에서는 조연으로 등장하며 진호민이 정덕제를 맡았다. 놀기 좋아하고 국정에 뜻이 없어 보이지만 실권자인 환관들에게 제거당하지 않기 위해서 연기하는 것이다.

2014년 드라마 강남사대재자에서는 조연으로 등장하며 장효신이 정덕제를 맡았다. 감옥에 갇힌 주인공을 꺼내준다.

2018년 드라마 양릉전에서는 조연으로 등장하며 류예린이 정덕제를 맡았다. 국정에 관심이 없을 뿐 선량한 캐릭터이다. 호랑이를 잘 다룬다. 신분에 관계없이 유능하면 스승으로 모셔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에 주인공을 스승으로 삼는다[18]. 강간, 살인을 일삼는 외숙과 한 핏줄인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궁밖에서 우연히 만난 기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는데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를 황후로 삼아야 하는 현실에 슬퍼했다. 태자인 것을 숨기고 군영에서 병사로서 훈련에 참가하기도 했다.

어쌔신 크리드 크로니클즈에서는 템플러들인 팔호에게 좌지우지되는 것으로 나온다.

와룡생의 소설 비연경룡(한국판 비룡문)에 등장한다. 주인공 양몽환의 할렘 NO1이자 작중 최고수로 평가되는 주약란이 바로 무종의 딸 난대공주다. 어린 주약란은 아버지 무종이 양몽환 할렘 NO2(또는 NO3) 조소접의 어머니 궁녀 취접을 죽이려하자 몸을 감싸 취접의 죽음을 막는다. 그 댓가로 조소접의 아빠이자 취접의 남편이며 선제 효종의 호위무사였던 조해평으로부터 무공 전수를 받는다.

6. 둘러보기

명사(明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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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성 · 설빈 · 오성(吳成) · 김충 · 이영 · 모승 · 초례 · 모충 · 화용 · 나병충
157권 「김순등전(金純等傳)」
김순 · 장본 · 곽돈 · 곽진 · 정진 · 시차 · 유중부 · 장봉 · 주선 · 양정(楊鼎) · 황호 · 호공진 · 진준 · 임악 · 반영 · 하시정
158권 「황종재등전(黃宗載等傳)」
황종재 · 고좌 · 단민 · 장창(章敞) · 오눌 · 위기 · 노목 · 경구주 · 헌예 · 황공소
159권 「웅개등전(熊概等傳)」
웅개 · 진일 · 이의 · 진일 · 이당 · 가전 · 왕우 · 최공 · 유자(劉孜) · 이간 · 원걸 · 팽의 · 모봉 · 하훈 · 고명 · 양계종
160권 「왕창등전(王彰等傳)」
왕창 · 위원(魏源) · 김렴 · 석박 · 나통 · 나기 · 장선 · 장붕 · 이유
161권 「주신등전(周新等傳)」
주신 · 이창기 · 진사계 · 응이평 · 임석 · 황종 · 진본심 · 팽욱 · 하시 · 황윤옥 · 양찬 · 유실 · 진선 · 하인 · 진장 · 장병 · 송단의
162권 「윤창륭등전(尹昌隆等傳)」
윤창륭 · 경통 · 대륜 · 진조 · 유구 · 진감 · 종동 · 장륜 · 요장 · 예경 · 양선(楊瑄)
163권 「이시면등전(李時勉等傳)」 164권 「추집등전(鄒緝等傳)」
이시면 · 진경종 · 유현(劉鉉) · 형양 · 임한 · 사탁 · 노탁 추집 · 익겸 · 황택 · 범제 · 요양 · 좌정 · 조개 · 유위 · 단우 · 장소 · 고요
165권 「도성등전(陶成等傳)」 166권 「한관등전(韓觀等傳)」
도성 · 진민 · 정선 · 왕득인 · 엽정 · 오기 · 모길 · 임금 · 곽서 · 강앙 한관 · 산운 · 소수 · 방영 · 이진 · 왕신 · 팽륜 · 구반 · 장우
167권 「조내등전(曹鼐等傳)」 168권 「진순등전(陳循等傳)」
조내 · 광야 · 왕좌 · 손상 · 원빈 진순 · 왕문 · 강연 · 진문 · 만안 · 유후 · 유길 · 윤직
169권 「고곡등전(高穀等傳)」 170권 「우겸전(于謙傳)」 171권 「왕기등전(王驥等傳)」
고곡 · 호영 · 왕직 우겸 왕기(王驥) · 서유정 · 양선(楊善) · 왕월
172권 「나형신등전(羅亨信等傳)」
나형신 · 후진 · 양녕 · 왕래 · 손원정 · 주감 · 양신민 · 장기 · 마근 · 정신 · 백규 · 장찬 · 공용 · 등정찬 · 왕식 · 유병
173권 「양홍등전(楊洪等傳)」
양녕 · 석정 · 곽등 · 주겸 · 손당 · 범광
174권 「사소등전(史昭等傳)」
사소 · 무개 · 허귀 · 주현 · 구신 · 왕새 · 노감 · 유녕 · 팽청 · 강한 · 안국 · 항웅
175권 「위청등전(衞靑等傳)」
위청 · 동흥 · 하홍 · 유옥 · 구월 · 신영 · 조웅 · 풍정 · 장준 · 양예
176권 「이현등전(李賢等傳)」 177권 「왕고등전(王翱等傳)」
이현 · 여원 · 악정 · 팽시 · 상로 · 유정지 왕고(王翱) · 연부 · 왕횡 · 이병 · 요기(姚夔) · 왕복 · 임총 · 엽성
178권 「항충등전(項忠等傳)」 179권 「나륜등전(羅倫等傳)」
항충 · 한옹 · 여자준 · 주영(朱英) · 진굉 나륜 · 장무 · 황중소 · 장창(莊昶) · 추지 · 서분
180권 「장녕등전(張寧等傳)」
장녕 · 왕휘 · 모홍 · 구홍 · 이삼 · 위원(魏元) · 강진 · 왕서(王瑞) · 이준 · 왕규 · 탕내 · 강관 · 강홍 · 조린 · 팽정 · 방반 · 여헌 · 엽신 · 호헌 · 장홍지 · 굴신 · 왕헌신
181권 「서부등전(徐溥等傳)」 182권 「왕서등전(王恕等傳)」
서부 · 구준 · 유건 · 사천 · 이동양 · 왕오 · 유충 왕서(王恕) · 마문승 · 유대하
183권 「하교신등전(何喬新等傳)」
하교신 · 팽소 · 주경(周經) · 경유 · 예악 · 민규 · 대산
184권 「주홍모등전(周洪謨等傳)」
주홍모 · 양수진 · 장원정 · 부한 · 장승 · 완성 · 부규 · 유춘 · 오엄 · 고청 · 유서
185권 「이민등전(李敏等傳)」
이민 · 가준 · 황불 · 장열 · 사종 · 증감 · 양경 · 서각 · 이개 · 황가 · 왕홍유 · 총란 · 오세충
186권 「한문등전(韓文等傳)」
한문 · 장부화 · 양수수 · 허진 · 옹태 · 진수(陳壽) · 번형 · 웅수 · 반번 · 호부 · 장태 · 장내 · 왕경(王璟) · 주흠
187권 「하감등전(何鑒等傳)」
하감 · 마중석 · 육완 · 홍종 · 진금(陳金) · 유간 · 주남 · 마호
188권 「유천등전(劉蒨等傳)」
유천 · 여충 · 조우 · 대선 · 육곤 · 장흠(蔣欽) · 주새 · 탕예경 · 허천석 · 장사륭 · 장문명 · 범로 · 장흠(張欽) · 주광 · 석천주
189권 「이문상등전(李文祥等傳)」
이문상 · 손반 · 호관 · 나교 · 엽쇠 · 대관 · 황공 · 육진 · 하양승 · 하준
190권 「양정화등전(楊廷和等傳)」 191권 「모징등전(毛澄等傳)」
양정화 · 양저 · 장면 · 모기 · 정이 모징 · 왕준(汪俊) · 오일붕 · 주희주 · 하맹춘 · 풍희 · 서문화 · 설혜
192권 「양신등전(楊愼等傳)」
양신 · 왕사 · 장충 · 유제 · 안반 · 장한경 · 장원 · 모옥 · 왕시가 · 정본공 · 장왈도 · 양회 · 장찬 · 곽남
193권 「비굉등전(費宏等傳)」
비굉 · 적란 · 이시 · 고정신 · 엄눌 · 이춘방 · 진이근 · 조정길 · 고의
194권 「교우등전(喬宇等傳)」
교우 · 손교 · 임준 · 김헌민 · 진금(秦金) · 조황 · 추문성 · 양재 · 유린 · 장요(蔣瑤) · 왕정상
195권 「왕수인전(王守仁傳)」 196권 「장총등전(張璁等傳)」
왕수인 장총 · 계악 · 방헌부 · 하언
197권 「석서등전(席書等傳)」 198권 「양일청등전(楊一淸等傳)」
석서 · 곽도 · 웅협 · 황종명 · 황관 양일청 · 왕경(王瓊) · 팽택 · 모백온 · 옹만달
199권 「이월등전(李鉞等傳)」
이월 · 왕헌 · 호세녕 · 이승훈 · 왕이기 · 범총 · 왕방서 · 정효
200권 「요막등전(姚鏌等傳)」
요막 · 장정 · 오문정 · 채천우 · 첨영 · 유천화 · 양수례 · 장악 · 곽종고 · 조시춘
201권 「도염등전(陶琰等傳)」
도염 · 왕진(王縝) · 이충사 · 오정거 · 방양영 · 왕광 · 왕월 · 서문 · 장방기 · 한방기 · 주금 · 오악
202권 「요기등전(廖紀等傳)」
요기(廖紀) · 왕시중 · 주기옹 · 당룡 · 왕고(王杲) · 주용 · 문연 · 유인 · 손응규 · 섭표 · 이묵 · 주연 · 가응춘 · 장영명 · 호송 · 조병연
203권 「정악등전(鄭岳等傳)」
정악 · 유옥 · 왕원석 · 구천서 · 당주 · 반진 · 이중 · 구양탁 · 도해 · 반훈 · 여경 · 구양중 · 주상(朱裳) · 진찰 · 손무 · 왕의(王儀) · 증균
204권 「진구주등전(陳九疇等傳)」 205권 「주환등전(朱紈等傳)」
진구주 · 적붕 · 손계로 · 증선 · 정여기 · 양수겸 · 상대절 · 해일귀 · 양선(楊選) 주환 · 장경 · 호종헌 · 조방보 · 이수 · 당순지
206권 「마록등전(馬錄等傳)」
마록 · 정계충 · 장규 · 정일붕 · 당추 · 두란 · 엽응총 · 해일귀 · 육찬 · 소경방 · 유세양 · 위양필
207권 「등계증등전(鄧繼曾等傳)」
등계증 · 주제 · 양언 · 유안 · 설간 · 양명(楊名) · 곽홍화 · 유세룡 · 장선 · 포절 · 사정천 · 왕여령 · 양사충
208권 「장근등전(張芹等傳)」
장근 · 왕응진 · 소명봉 · 제지란 · 원종유 · 허상경 · 고제 · 장교 · 여산 · 위상신 · 여관 · 팽여실 · 정자벽 · 척현 · 유회 · 전미 · 홍원 · 주사겸 · 안경
209권 「양최등전(楊最等傳)」
양최 · 풍은 · 양작 · 주이 · 유괴 · 심속 · 심연 · 양계성 · 양윤승
210권 「상교등전(桑喬等傳)」
상교 · 사유 · 하유백 · 서학시 · 여여진 · 왕종무 · 주면 · 조금 · 오시래 · 장충 · 동전책 · 추응룡 · 임윤
211권 「마영등전(馬永等傳)」 212권 「유대유등전(俞大猷等傳)」
마영 · 양진 · 왕효 · 주상문 · 마방 · 하경 · 심희의 · 석방헌 유대유 · 척계광 · 유현(劉顯) · 이석 · 장원훈
213권 「서개등전(徐階等傳)」 214권 「양박등전(楊博等傳)」
서계 · 고공 · 장거정 양박 · 마림 · 유례건 · 왕정(王廷) · 갈수례 · 근학안
215권 「왕치등전(王治等傳)」
왕치 · 구양일경 · 주홍조 · 첨앙비 · 낙문례 · 정이순 · 진오덕 · 왕문휘 · 유분용
216권 「오산등전(吳山等傳)」
오산 · 육수성 · 구경순 · 전일준 · 황봉상 · 여계등 · 풍기 · 왕도(王圖) · 옹정춘 · 유응추 · 당문헌 · 이등방 · 채의중 · 공내 · 나유의 · 요희맹 · 허사유 · 고석주
217권 「왕가병등전(王家屏等傳)」 218권 「신시행등전(申時行等傳)」 219권 「장사유등전(張四維等傳)」
왕가병 · 진우폐 · 심리 · 우신행 · 이정기 · 오도남 신시행 · 왕석작 · 심일관 · 방종철 · 심확 장사유 · 마자강 · 허국 · 조지고 · 장위 · 주갱
220권 「만사화등전(萬士和等傳)」
만사화 · 왕지고 · 오백붕 · 유응절 · 왕린 · 필장 · 서화 · 이세달 · 증동형 · 신자수 · 온순 · 조세경 · 이여화
221권 「원홍유등전(袁洪愈等傳)」
원홍유 · 왕정첨 · 곽응빙 · 경정향 · 왕초 · 위시양 · 학걸 · 조참로 · 장맹남 · 이정 · 정빈
222권 「만사화등전(萬士和等傳)」
만사화 · 왕지고 · 오백붕 · 유응절 · 왕린 · 필장 · 서화 · 이세달 · 증동형 · 신자수 · 온순 · 조세경 · 이여화
223권 「성응기등전(盛應期等傳)」 224권 「엄청등전(嚴清等傳)」
성응기 · 주형 · 반계순 · 만공 · 오계방 · 왕종목 · 유동성 · 서정명 엄청 · 송훈 · 육광조 · 손농 · 진유년 · 손비양 · 채국진 · 양시교
225권 「장한등전(張瀚等傳)」 226권 「해서등전(海瑞等傳)」
장한 · 왕국광 · 양몽룡 · 양외· 이재(李戴) · 조환 · 정계지 해서 · 구순 · 여곤 · 곽정역
227권 「방상붕등전(龐尚鵬等傳)」
방상붕 · 송의망 · 장악 · 이재(李材) · 육수덕 · 소름 · 가삼근 · 이이 · 주홍모 · 소언 · 손유성 · 사걸 · 곽유현 · 만상춘 · 종화민 · 오달가
228권 「위학증등전(魏學曾等傳)」 229권 「유대등전(劉臺等傳)」
위학증 · 이화룡 유대 · 부응정 · 왕용급 · 오중행 · 조용현 · 애목 · 심사효
230권 「채시정등전(蔡時鼎等傳)」 231권 「고헌성등전(顧憲成等傳)」
채시정 · 만국흠 · 요신 · 탕현조 · 녹중립 · 양순 · 강사창 · 마맹정 · 왕약림 고헌성 · 고윤성 · 전일본 · 우공겸 · 사맹린 · 설부교 · 안희범 · 유원진 · 엽무재
232권 「위윤정등전(魏允貞等傳)」
위윤정 · 왕국 · 여무형 · 이삼재
233권 「강응린등전(姜應麟等傳)」
강응린 · 진등운 · 나대굉 · 이헌가 · 맹양호 · 주유경 · 왕여견 · 왕학증 · 장정관 · 번옥형 · 사정찬 · 양천민 · 하선
234권 「노홍춘등전(盧洪春等傳)」 235권 「왕여훈등전(王汝訓等傳)」
노홍춘 · 이무회 · 이기(李沂) · 낙우인 · 마경륜 · 유강 · 대사형 · 조학정 · 옹헌상 · 서대상 왕여훈 · 여무학 · 장양몽 · 맹일맥 · 하사진 · 왕덕완 · 장윤의 · 추유연
236권 「이식등전(李植等傳)」 237권 「부호례등전(傅好禮等傳)」
이식 · 강동지 · 탕조경 · 김사형 · 왕원한 · 손진기 · 정원천 · 이박 · 하가우 부호례 · 강지례 · 포견첩 · 전대익 · 풍응경 · 오종요 · 오보수 · 화옥
238권 「이성량등전(李成梁等傳)」 239권 「장신등전(張臣等傳)」
이성량 · 마귀 장신 · 동일원 · 두동 · 소여훈 · 달운 · 관충병 · 시국주 · 진백우
240권 「엽향고등전(葉向高等傳)」 241권 「주가모등전(周嘉謨等傳)」
엽향고 · 유일경 · 한광 · 주국조 · 하종언 · 손여유 주가모 · 장문달 · 왕응교 · 왕기(王紀) · 손위 · 종우정 · 진도형
242권 「진방첨등전(陳邦瞻等傳)」
진방첨 · 필강무 · 소근고 · 백유 · 정소 · 적봉충 · 홍문형 · 진백우 · 동응거 · 임재 · 주오필 · 장광전
243권 「조남성등전(趙南星等傳)」 244권 「양련등전(楊漣等傳)」
조남성 · 추원표 · 손신행 · 고반룡 · 풍종오 양련 · 좌광두 · 위대중 · 주조서 · 원화중 · 고대장 · 왕지채
245권 「주기원등전(周起元等傳)」 246권 「만조천등전(滿朝薦等傳)」
주기원 · 요창기 · 주순창 · 주종건 · 황존소 · 이응승 · 만경 만조천 · 강병담 · 후진양 · 왕윤성
247권 「유정등전(劉綎等傳)」 248권 「매지환등전(梅之煥等傳)」
유정 · 이응상 · 진린 · 등자룡 · 마공영 매지환 · 유책 · 이약성 · 경여기 · 안계조 · 이계정 · 방진유 · 서종치
249권 「이표등전(李標等傳)」 250권 「손승종전(孫承宗傳)」
주섭원 · 이운 · 왕삼선 · 채복일 손승종
251권 「이표등전(李標等傳)」 252권 「양사창등전(楊嗣昌等傳)」
이표 · 유홍훈 · 전용석 · 성기명 · 하여총 · 서광계 · 문진맹 · 장덕경 · 방악공 양사창 · 오성(吳甡)
253권 「왕응웅등전(王應熊等傳)」 254권 「교윤승등전(喬允升等傳)」
왕응웅 · 장지발 · 설국관 · 정국상 · 진연 · 위조덕 교윤승 · 조우변 · 손거상 · 조광 · 진우정 · 정삼준 · 이일선 · 장위
255권 「유종주등전(劉宗周等傳)」 256권 「최경영등전(崔景榮等傳)」
유종주 · 황도주 최경영 · 황극찬 · 필자엄 · 이장경 · 유지봉
257권 「장학명등전(張鶴鳴等傳)」
장학명 · 동한유 · 조언 · 왕흡 · 양정동 · 웅명우 · 장봉익 · 진신갑 · 풍원표
258권 「허예경등전(許譽卿等傳)」
허예경 · 화윤성 · 위정윤 · 모우건 · 오집어 · 장정신 · 황소걸 · 부조우 · 강채 · 웅개원 · 첨이선 · 탕개원 · 성용 · 진룡정
259권 「양호등전(楊鎬等傳)」
양호 · 원응태 · 웅정필 · 원숭환 · 조광변
260권 「양학등전(楊鶴等傳)」
양학 · 진기유 · 웅문찬 · 연국사 · 정계예 · 정숭검 · 소첩춘 · 여응계 · 고두추 · 장임학
261권 「노상승등전(盧象昇等傳)」 262권 「부종룡전(傅宗龍等傳)」
노상승 · 유지륜 · 구민앙 부종룡 · 왕교년 · 양문악 · 손전정
263권 「송일학등전(宋一鶴等傳)」
송일학 · 풍사공 · 임일서 · 채무덕 · 위경원 · 주지풍 · 진사기 · 용문광 · 유가인 · 유지발
264권 「하봉성등전(賀逢聖等傳)」
하봉성 · 남거익 · 주사박 · 여유기 · 왕가정 · 초원부 · 이몽진 · 송사양 · 마희 · 왕도순 · 전시진
265권 「범경문등전(范景文等傳)」
범경문 · 예원로 · 이방화 · 왕가언 · 맹조상 · 시방요 · 능의거
266권 「마세기등전(馬世奇等傳)」
마세기 · 오인징 · 주봉상 · 유이순 · 왕위(汪偉) · 오감래 · 왕장 · 진량모 · 진순덕 · 신가윤 · 성덕 · 허직 · 김현
267권 「마종빙등전(馬從聘等傳)」 268권 「조문조등전(曹文詔等傳)」
마종빙 · 장백경 · 송공 · 범숙태 · 고명형 · 서견 · 녹선계 조문조 · 주우길 · 황득공
269권 「애만년등전(艾萬年等傳)」
애만년 · 이비 · 양구주 · 진우왕 · 후량계 · 장령 · 맹여호 · 호대위 · 손응원 · 강명무 · 우세위 · 후세록 · 유국능
270권 「마세룡등전(馬世龍等傳)」 271권 「하세현등전(賀世賢等傳)」
마세룡 · 하호신 · 심유용 · 장가대 · 노흠 · 진양옥 · 용재전 하세현 · 동중규 · 나일관 · 만계 · 조솔교 · 관유현 · 하가강 · 황룡 · 김일관
272권 「김국봉전(金國鳳等傳)」 273권 「좌양옥등전(左良玉等傳)」
김국봉 · 조변교 · 유조기 좌양옥 · 고걸 · 조관
274권 「사가법등전(史可法等傳)」 275권 「장신언등전(張愼言等傳)」
사가법 · 고홍도 · 강왈광 장신언 · 서석기 · 해학룡 · 고탁 · 좌무제 · 기표가
276권 「주대전등전(朱大典等傳)」
주대전 · 장국유 · 장긍당 · 증앵 · 주계조 · 여황 · 왕서전 · 노진비 · 하개 · 웅여림 · 전숙락 · 심진전
277권 「원계함등전(袁繼鹹等傳)」
원계함 · 김성 · 구조덕 · 심유룡 · 진자룡 · 후동증 · 양문총 · 진잠부 · 심정양 · 임여저 · 정위홍
278권 「양정린등전(楊廷麟等傳)」
양정린 · 만원길 · 곽유경 · 첨조항 · 진태래 · 왕양정 · 증형응 · 게중희 · 진자장 · 장가옥 · 진방언 · 소관생
279권 「여대기등전(呂大器等傳)」
여대기 · 문안지 · 번일형 · 오병 · 왕석곤 · 도윤석 · 엄기항 · 주천린 · 장효기 · 양외지 · 오정육
280권 「하등교등전(何騰蛟等傳)」
하등교 · 구식사
281권 「순리전(循吏傳)」
진관 · 방극근 · 오리 · 요흠 · 고두남 · 여언성 · 사성조 · 오상 · 사자양 · 황신중 · 하승 · 패병이 · 유맹옹 · 만관 · 엽종인 · 왕원 · 적부복 · 이신규 · 손호 · 장종련 · 이기(李驥) · 왕영 · 이상 · 조예 · 조등 · 증천 · 범충 · 주제 · 범희정 · 유강 · 단견 · 용사언 · 정적 · 전탁 · 당간 · 탕소은 · 서구사 · 방숭 · 장순 · 진유학
282·283·284권 「유림전(儒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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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286·287·288권 「문원전(文苑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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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290·291·292·293·294·295권 「충의전(忠義傳)」
화운 · 왕개 · 손염 · 모로 · 왕강 · 왕의(王禕) · 웅정 · 역소종 · 금팽 · 황보빈 · 장영(張瑛) · 왕정 · 만침 · 주헌 · 양충 · 오경 · 곽은 · 손수 · 허규 · 황굉 · 송이방 · 왕면 · 진문시 · 왕부 · 전순 · 주부 · 손당 · 두괴 · 황천 · 왕덕 · 왕일중 · 소몽양 · 장진덕 · 동진륜 · 공만록 · 관양상 · 서조강 · 희문윤 · 주만년 · 장요(張瑤) · 하천구 · 반종안 · 장전 · 하정괴 · 고방좌 · 최유수 · 정국창 · 당환순 · 이헌명 · 장춘 · 염생두 · 왕조곤 · 손사미 · 교약문 · 장병문 · 언윤소 · 길공가 · 형국새 · 장진수 · 등번석 · 장혼방 · 장윤등 · 장광규 · 이중정 · 방국유 · 하승광 · 방유 · 윤몽오 · 노겸 · 공원상 · 왕신 · 사기언 · 양지인 · 왕국훈 · 여홍업 · 장소등 · 왕도(王燾) · 장가징 · 서상경 · 완지전 · 학경춘 · 장극검 · 서세순 · 무대열 · 전조징 · 성이항 · 안일유 · 반홍 · 진예포 · 유진지 · 이승운 · 관영걸 · 장유세 · 왕세수 · 허영희 · 이정좌 · 노세임 · 유인 · 하섭 · 조흥기 · 하통춘 · 진미 · 심길신 · 노학고 · 진만책 · 허문기 · 곽이중 · 최문영 · 서학안 · 풍로운 · 채도헌 · 장붕익 · 유희조 · 왕손란 · 정양주 · 황세청 · 양훤 · 당시명 · 단복흥 · 간인서 · 사오교 · 도임 · 축만령 · 진빈 · 왕징준 · 정태운 · 하복 · 장나준 · 김육동 · 탕문경 · 허담 · 왕교동 · 장계맹 · 유사두 · 왕여정 · 윤신 · 고기훈 · 장요(張耀) · 미수도 · 경정록 · 석상진 · 서도흥 · 유정표
296·297권 「효의전(孝義傳)」
정렴 · 서윤양 · 전영 · 요비 · 구탁 · 최민 · 주완 · 오홍 · 주후 · 유근(劉謹) · 이덕성 · 심덕사 · 사정가 · 권근 · 조신 · 국상 · 왕준(王俊) · 석내 · 사오상 · 주오 · 정영 · 부즙 · 양성장 · 사용 · 하경 · 왕원(王原) · 황새 · 귀월 · 하린 · 손청 · 유헌 · 용사언 · 유자(兪孜) · 최감 · 당엄 · 구서 · 장균 · 왕재복 · 하자효 · 아기 · 조중화 · 왕세명 · 이문영 · 공금 · 양통조 · 장청아
298권 「은일전(隱逸傳)」
장개복 · 예찬 · 서방 · 양항 · 진회(陳洄) · 양인(楊引) · 오해 · 유민 · 양보 · 손일원 · 심주 · 진계유
299권 「방기전(方伎傳)」
활수 · 갈건손 · 여복 · 예유덕 · 주한경 · 왕리 · 주전(周顚) · 장중 · 장삼봉 · 원공 · 대사공 · 성인 · 황보중화 · 동인 · 오걸 · 능운 · 이시진 · 주술학 · 장정상 , 유연연,
300권 「외척전(外戚傳)」
진공 · 마공 · 여본 · 마전 · 장기(張麒) · 호영(胡榮) · 손충 · 오안 · 전귀 · 왕천 · 주능 · 왕진(王鎭) · 만귀 · 소희 · 하유 · 진만언 · 방예 · 진경행 · 이위 · 왕위(王偉) · 정승헌 · 왕승 · 유문병 · 장국기 · 주규
301·302·303권 「열녀전(列女傳)」
정월아 · 제아 · 정금노 · 노가랑 · 탕혜신 · 묘총 · 만의전 · 왕묘봉 · 당귀매 · 양태노 · 정은아 · 두묘선 · 초낭맹 · 호귀정 · 오길고 · 서아장 · 양옥영 · 우봉랑 · 예미옥 · 고형와 · 항숙미
304·305권 「환관전(宦官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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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고 만일 그렇게 홍치제가 여러 아들을 두었다면 실제 역사처럼 정덕제가 후사 없이 죽었더라도 정덕제의 형제 중 한 명이 황위를 이었을 것이므로 가정제가 즉위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2] 유근의 자택을 수색했을 때 위조한 옥새, 갑옷, 곤룡포 등 환관으로서는 절대 소유할 수 없는 황궁의 귀물들이 무더기로 나왔으며 또 그가 평소에 사용하는 접이식 부채 안에서 비수 두 자루가 발견되었다. [3] 후궁 마씨와의 사이에 연가공주 1녀만 두었다. 남동생으로 울도왕 주후위(朱厚煒)가 있긴 했으나 일찍 죽었다. [4] 자금성 서쪽에 표방(豹房)이라는 사파리 겸 놀이터를 지었다. 표방이라는 이름은 표범들을 길렀기 때문인데, 표범 뿐만 아니라 호랑이도 있었다. 그런데 정덕제는 자신의 무력을 과시한다고 무장한다음 호랑이랑 싸워보기까지 했는데 당연히 상대도 안 됐고 까딱하면 죽을 뻔 했다. 주변의 호위무장들이 달려와서 호랑이를 죽여서 간신히 살았다. # [5] 패배라고 보는 기록에서는, 변방 수비군 50여 명이 죽고 몽골인은 16명 정도가 죽었다고 적는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승리를 선전하고 패배는 감추었을 테니까 패배가 사실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싸우는 것에 긍정적인 선례가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한 문인 관료들에 의해 부정적인 왜곡이 가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비슷한 예인 정화의 원정에 관한 기록이 삭제된 것을 봐도 당시 명나라 관료들이 이런 문제에 얼마나 극도로 예민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무엇보다 큰 규모의 정규전에서 수비군 50여 명이 죽고 몽골병 16명 정도가 죽은 걸로 끝이라는 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규모 피해이다. 무엇보다도 당시 상황은 몽골 측에서 중국 영토로 쳐들어온 상황. 여기서 명나라군이 패배하고 물러났다면 자연스레 대규모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어야 하나 당시 행정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몽골군도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서로 물러난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이번엔 양군 피해규모가 발목을 잡는다. 기록만으로 유추할 수 있는 당시 전투의 결과는 서로간에 매우 가벼운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몽골군이 물러났다고 보는 쪽이 앞뒤가 맞는다. 아마 황제가 직접 나오자 일이 커지길 원하지 않았던 몽골 측에서 다음 기회를 노렸을 가능성이 높다. [6] 다만 직접적으로 처형하지만 않았을 뿐, 태형이나 채찍형과 같은 벌을 내리는 경우는 있었으며, 그 후유증으로 사망한 이들이 다수 존재한다. [7] 이 조치는 당대에는 말할 것도 없고, 효과가 무려 1세기나 가서 이후 천계제의 환관이던 위충현이전까지 비슷한 급의 갑질을 하는 환관이 나오지 않았다. 또한 유근의 전횡은 세금 제도의 개혁을 위해 환관을 이용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환관을 내세워 악명은 고스란히 환관이 받게 하고 황제는 실속을 챙긴 다음 나중에 환관을 처형함으로써 명분까지 챙겼다는 것이다. [8] 사실 명나라에서도 직접 전투에 나간 황제는 황제이기 전에 중국을 통일한 장수인 홍무제와 그의 아들이자 제위를 찬탈한 영락제, 오이라트를 상대로 출정했던 정통제, 그리고 정덕제를 제외하면 없다. 황제가 직접 전투까지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신하들이 얼마나 기절초풍했을지를 생각하면... [9] 이를 뒷받침해주는 사례로는 북송의 사례가 있는데 창업군주인 송태조 조광윤이나 송태종 조광의 형제는 절도사 출신이라 군사적인 수완이 뛰어나고 변방의 사정도 잘 알고 있어서 요나라를 공격해서 관광보내는 등 능수능란한 대처가 가능했지만 후대의 황제들은 군사적인 능력이 아예 존재하질 않아서 전국에 100만명이라는 대군을 갖추어놓고도 그중 대부분을 수도에 짱박아서 썩혀놓다가 전쟁이 터지자마자 대부분이 도망가서 정강의 변이라는 치욕을 겪은 바 있다. 사료에 따르면 당시에도 북송의 군대는 당나라 군대를 아득히 뛰어넘은 개막장 군대로 악명이 높았었다. 명나라 역시 정덕제 사후 왜구로 인해 항구들이 쑥대밭이 되고 몽골 군대가 북경을 포위하는 등 국방력이 허술해진 모습을 보여준다. [10] 예를 들면 요제프 2세와 같이 외교용 작위로서 세습되었던 팔켄슈타인 백작위를 사용했다. [11] 충선왕은 심왕의 작위 역시 겸한 바 있다 [출처] 샹관핑, 《 중국사 열전 황제편》, 158p [13] 중국어에서는 두 글자의 발음이 성조까지 똑같은 zhū이다. [14] 정덕제는 중종반정 다음해에 중종의 즉위건에 대해 결재해준다. [15] 정덕제 특성상 작정하고 잡으려고 하면 인조반정 때의 천계제처럼 조선이 엄청 피곤했을 것이다. [16] 피해자는 5곳의 자상을 입었는데 아랫사람은 자살로 결론을 내렸다. [17] 참고로 진혜제 사마충은 백치에 돌대가리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가 남긴 대표적인 명언 중 하나가 바로 하불식육미. [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