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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9 14:02:06

발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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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발흐 도시.jpg
외성과 내성 사이의 시가지 전경
파일:발흐 외성.jpg
시가지를 두르고 있는 11km에 달하는 성벽. 현재의 시가지도 성벽 내부의 절반 가량을 차지할 뿐이다.

1. 개요2. 역사
2.1. 박트리아의 수도2.2. 토하리스탄의 중심2.3. vs 우마이야 왕조2.4. 호라산의 요충지
2.4.1. 연이은 쟁탈전
2.5. 파괴와 재건2.6. 티무르 제국 & 부하라 칸국
2.6.1. 무굴 제국의 북벌2.6.2. 근대
2.7. 유대인 공동체2.8. 과거의 영광을 뒤로한 채
3. 아프가니스탄의 주

1. 개요

페르시아어/ 다리어 بلخ
영어 Balkh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도시로, 인구는 약 14만명. 북부의 중심 도시 마자르이샤리프에서 서북쪽으로 20km 떨어진 평지에 위치한다. 유라시아 스텝에 살던 이란 민족[1]이 기원전 1500년경 아무다리야를 넘어 처음 정착한 곳으로, '도시의 어머니'란 별명을 지니고 있다. 옛 이름은 박트라[2]로, 박트리아의 중심이자 그 어원이다. 고대와 중세 호라산의 주요 도시이자 실크로드의 거점으로 크게 번영하였다.[3]

하지만 1220년 몽골 제국군에게 파괴된 이후 제대로 재건되지 못하였다. 특히 1480년 인근 마자르이샤리프에서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무덤이 ( 수니파 한정) 확인되어 성지가 된 후에는 그 위성도시 격으로 전락하였다. 비록 주도 역시 그에 뺏기긴 했지만, 발흐 주의 지명에 남아있다. 현재 발흐 주는 쿤두즈와 함께 아프간 북부의 곡창지대 중 하나이다. 북쪽 50km 거리의 아무다리야를 넘으면 우즈베키스탄 테르메즈이다.

2. 역사

파일:발흐 성.jpg
옛 박트라 성벽 유적

발흐에는 기원전 2000년 경부터 아리아 민족이 살았고, 박트리아 분지의 중심 도시였다. 남러시아 스텝에 살던 아리아 민족이 아무다리야를 넘어 처음 세운 도시로, 기원전 1500-1000년경 초기 철기 문명이 확인되었다. 아리아 민족이 더욱 남하하여 인도에 정착할 무렵의 서사시인 라마야나 등에도 명마가 나는 지역 '바흘리카' (बाह्लिक)로 기록될 정도로 유서가 깊은 도시이다. 뒤이어 고대 박트리아 왕국이 세워졌는데, 그 군주 비슈타스파가 조로아스터교를 처음 수용한 군주였다. 또한 피르다우시에 의하면 자라투스트라가 처음 설교한 곳과 사망한 곳 모두 발흐였다 한다. 따라서 자라투스트라를 기리는 신전이 세워졌고 그 신전의 이름을 따서 발흐는 페르시아 제국 시절 공식적으로 '자리아스파'라 불리기도 하였다.

한편 불교 측에서는 첫 재가신자인 바할리카와 트라푸사에서 발흐의 지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발흐 혹은 오디샤 출신의 상인인 그들은 부다가야에서 고행 후 깨달음을 얻은 부처에게 음식을 공양하고 보답으로 머리카락 8 가닥을 받았다 한다. 이후 바할리카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고향에 2개의 스투파 (불탑)와 비하라 (수도원)를 건립하고 불교를 전파, 이로부터 발흐 지명이 유래했다는 것이다.[4] 다만 박트리아 지방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전파된 것은 쿠샨 왕조 때부터로 추정된다. 아케메네스 제국기 박트리아 (바흐트리쉬) 혹은 소그디아나 사트라프에 속했던 일대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정복 후 급속도로 헬라화되어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로 부상하였다.

2.1. 박트리아의 수도

파일:박트라 기둥.jpg 파일:토하라 백제국.jpg
박트라 유적에서 출토된 코린트 양식의 주두 / 박트라 (백제)의 조공 사신을 묘사한 당나라 그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이후 그리스 인들이 정착하여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이 세워졌고 발흐는 박트라라고 불리며 그 수도가 되었다. 기원전 208-206년에는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에 의해 포위되기도 하였다. 그리스-페르시아 문화를 이어오던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은 기원전 120년경, 월지 사카 족의 침공에 의해 왕실이 박트라를 포기하고 카불 방면으로 피신하며 멸망하였다. 그 무렵 월지를 방문한 장건은 박트라를 온갖 종류의 물건이 거래되는 대도시로 묘사하였다. 월지족은 이후 사카족마저 힌두쿠시 너머로 몰아내며 박트리아를 장악한다.

2.2. 토하리스탄의 중심

파일:타크트 에 루스탐.jpg
3세기 경 세워진 토하리스탄 최대의 불교 사찰 나바 비하라 (새 사원)로 추정되는 발흐 동남쪽 90km 지점 사마간의 타크테 로스탐 유적.

박트리아는 이후 월지족의 통일 왕조인 쿠샨 제국령이 되었고, 이때부터 월지족을 비롯한 동이란계 토하라인들이 유입되었기에 박트리아는 토하리스탄이라 불리게 되었다. 3세기 들어 쿠샨 제국이 쇠퇴하자 사산 제국이 토하리스탄과 간다라를 정복했는데, 그 사산 왕가의 사령관이 그대로 자립하여 쿠샨샤 (인도-사산) 왕국을 세웠다. 발흐는 그 수도로 번영하였고, 3세기 말엽 호르즈미드 1세는 스스로 쿠샨샤한샤라 칭하며 사산 제국에 대한 복속을 철회하기도 하였다. 다만 4세기 들어 사산 제국이 간다라를 병합하며 약화되었고, 본래 사산 제국에 복속해 있던 이란-튀르크계 유목 민족인 키다라가 봉기하여 360년경 토하리스탄과 간다라를 장악하였다. 키다라 지배기에 발흐에는 조로아스터교와 불교가 모두 흥하였다. 5세기 초엽 발흐를 방문한 구법승 법현은 소승불교의 중심지라 평하였다. 사산 제국은 466년에야 유연의 속국이던 에프탈과 동맹하여 키다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에프탈은 474년 사산 제국을 격파해 연공을 받아내기 시작한 이래로 484년 헤라트에서 페로즈 1세를 전사시키는 등 토하리스탄과 호라산, 소그디아나 등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에프탈은 발흐를 초창기 수도로 두었다가 알촌 후나 (인도-에프탈)가 북인도로 이주하여 토하리스탄을 완전히 장악한 후에는 쿤두즈로 천도하였다. 다만 발흐는 여전히 그 주요 도시였고, 이란-인도-소그드-서역을 잇는 실크로드 무역으로 번영하였다. 그러던 557년 사산 제국은 이번에는 돌궐 제국과 연합하여 에프탈을 격파하였고, 카불 등 에프탈 계열 소국들을 병합시켰다. 그러나 570년대 동로마-페르시아 전쟁을 틈타 돌궐은 아무다리야를 넘어 남하하였고, 588년 발흐의 사산 제국군을 격파하고 도시를 함락하였다. 제2의 에프탈 사태가 터지나 싶었지만 같은해 이란의 명장 바흐람 추빈이 돌궐군을 대파며 토하리스탄을 수복하였다.

승승장구 하던 바흐람 추빈은 샤한샤의 견제를 받은 끝에 590년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듬해 동로마 제국에 패하여 폐위된 후 페르가나로 도주했다가 암살되었다. 606-7년에는 서돌궐이 에프탈 공국들의 반란과 연대하여 침공했으나 슴바트 4세 바그라투니에게 격퇴되었다. 그러나 동로마-페르시아 전쟁이 점차 로마측 승리로 기울 무렵인 625년, 이라클리오스 황제의 부탁을 받은 서돌궐의 통 야브구 카간 (통엽호가한)이 재차 아무다리야를 넘어 손쉽게 인더스 강까지 진격하였다. 그는 아들 타르두시 샤드 (달두설)를 토하리스탄의 야브구 (부왕)에 봉하였다. 이렇게 설립된 토하라 야브구국은 에프탈과 마찬가지로 쿤두즈를 수도로 두었다. 다만 역시 발흐의 영향력이 강하여 토하라 야브구국은 중국측 사료에서도 발흐를 음차한 백제국 (白題國)이라 기록되었다. 토하라 야브구국 시절 사산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발흐에는 더욱 불교 색채가 강해졌다.

630년경 발흐를 방문한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사찰이 100개, 승려가 3천에 달하고 스투파로 가득한 도시라 묘사하였다. 한동안 평화가 유지되던 토하리스탄은 7세기 중반 이슬람 정복의 물결 속에서 재차 전장이 되었고, 점차 바드기스 (메르브 루드)의 에프탈계 호족 네자크 타르칸이 토하라 야브구의 봉신에서 실권자로 대두하였다. 642년 나하반드 전투 후 645년 이슬람 제국군 분견대가 발흐를 약탈하였고, 650년에는 사산 제국의 야즈데게르드 3세 이스타크르를 잃고 메르브를 거쳐 발흐로 피신하였다. 이때 나바 비하라는 잠시 조로아스터교 사원으로도 쓰였다. 토하라 야브구를 비롯한 튀르크 측의 원군을 얻은 그는 651년, 인근 옥수스 강변에서 아흐나프 빈 카이스의 이슬람 제국군에 맞섰으나 대패하였다. 이후 중앙아시아를 떠돌던 야즈데게르드 3세는 같은해 메르브에서 그 성주 및 네자크 타르칸에게 격파된 후 살해되었다.

2.3. vs 우마이야 왕조


마지막 샤한샤의 암살로 메르브가 항복하고 이란의 구심점이 사라지자, 이슬람 제국군은 본격적으로 호라산 정복에 나섰다. 652년 압둘라 빈 아미르가 니샤푸르, 아흐나프가 헤라트를 함락하였다. 후자는 더욱 동진하여 토하리스탄을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5] 다만 653년 아크라 빈 하비스의 아랍 군대가 재차 침공해오자 발흐는 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이슬람 제국에 복속하였다. 다만 654년 네자크 타르칸과 카렌 가문이 주도한 반란이 터지자 발흐 역시 동참했으나, 같은해 압둘라 빈 아미르에게 진압되며 재차 복속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오래가지 못하여 1차 피트나로 이슬람 공동체가 분열되자 발흐와 헤라트는 재차 자립하였다. 한편 그 무렵인 657년, 토하라 야브구의 종주국인 서돌궐이 당나라에 멸망되자 토하리스탄 역시 그에 복속하였다. 당은 토하리스탄을 토화라국 (吐火羅國), 발흐를 발저군 (縛底那)이라 지칭하며 안서도호부 휘하 월지도독부 (月氏都督府)에 편성하였다.[6]

당의 명목상 지배는 길지 않았다. 내전을 마무리하고 우마이야 왕조를 세운 무아위야 1세는 663년, 압둘라 빈 아미르를 다시 파견하여 발흐를 비롯한 호라산 남부를 굴복시켰다.[7] 이때 여러 주민들이 살해되고 발흐의 가장 오래된 조로아스터교 사원이 파괴되었다. 나바 비하라 역시 보석을 약탈당했으나, 건물 자체와 승려들은 무사하였다. 이어진 우마이야 조의 지배기에도 발흐는 불교 도시로 유지되었고, 종종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던 670년, 현지 불교도 귀족 나자크 타르칸이 봉기하여 일대의 아랍 주둔군을 축출하고 집권하였다. 그는 과거 발흐 함락 당시 이슬람으로 개종한 나바 비하라 대사제 (프라무카) 및 그의 열 아들을 처형하였고, 막내 아들만이 모친과 함께 카슈미르로 피신해 목숨을 건졌다. 반란을 제어하지 못한 사하바 출신의 호라산 총독 갈립 빈 압둘라 알-라이티는 이라크 부왕 지야드 빈 아비히에 의해 라비 빈 지야드 알-하리티로 교체되었다.

671년 라비는 신속히 진군하여 협상을 통해 발흐를 복속시켰고, 에프탈 반군을 진압하였다. 한편 카슈미르에서 인도 의학과 천문학을 배워 돌아온 프라무카의 아들은 장성한 후 발흐로 돌아와 대를 이어 프라무카가 되었다.[8] 그는 프라무카의 아랍어 발음인 '바르마크'라 불렀다. 2차 피트나기에도 살름 빈 지야드, 압둘라 빈 카짐 총독 하에서 안정을 유지하던 호라산은 690년 들어 내전을 정리하던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에 후자가 반기를 들며 혼란에 빠졌다. 압둘라의 아들 무사는 테르메즈를 거점으로 에프탈-튀르크 호족들과 봉기하였고 발흐 역시 재차 자립하였다. 그러던 704년 총독 야지드 이븐 알-무할라브가 테르메즈를 함락하고 바드기스의 네자크 타르칸을 격파해 복속시켰다. 705년 신임 총독 쿠타이바 빈 무슬림은 발흐를 5번째로 정복하였다. 이때 우마이야 왕자 마슬라마 빈 압둘 말리크가 의술로 명성이 높던 바르마크를 다마스쿠스로 초빙, 바르마크 가문의 부상이 시작된다.[9]

우마이야 조에 복속했던 네자크 타르칸은 709년 재차 반란을 일으켰고, 발흐 역시 동참했으나 이듬해 쿠타이바에게 제압되었다. 네자크 타르칸은 처형되었고, 그의 명목상 주군인 토하라 야브구는 인질로써 다마스쿠스로 압송되었다. 쿠타이바는 현지인들의 반란 의지를 꺾기 위해 토하리스탄의 랜드마크인 나바 비하라를 파괴하였다. 대탑과 그를 두른 360개의 방으로 구성되었던 대사원은 그렇게 폐허가 되어 오늘날 타크타-이-로스탐이라 불리고 있다. 발흐 시가지 역시 파괴되었고, 그렇게 한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726년 호라산 총독 아사드 빈 압둘라 알-카스리가 재건하여 수비대를 배치하였다. 아사드는 자신의 2차 재임기인 734년 ~ 738년간 메르브 대신 발흐를 총독부로 삼았고, 따라서 발흐는 다시 호라산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회복될 수 있었다. 다만 720년대 토하리스탄을 방문한 혜초의 기록처럼 불교는 여전히 토하리스탄의 주요 종교로 이어졌다.[10]

2.4. 호라산의 요충지

파일:발흐 모스크.jpg
10세기 사만 왕조 대에 세워진 모스크 유적. 발흐 남서쪽 외곽 (옛 외성 밖)에 위치.

3차 피트나 중인 747년에 시작된 압바스 왕조의 지배 하에서도 불교가 번성했으나 점차 주민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821년 칼리파 알 마문은 호라을 타히르 왕조에 맡겼다. 한편 12세기 말의 현지 작가 아부 바크르 압둘라 알-와이즈가 저술한 '발흐의 매력' (파다일-이-발흐)에 의하면 848년 발흐 총독에 봉해진 다부드 (다우드)가 나우샤드 (새 쾌락)라 명명한 호화 궁전의 건설에 열중하는 동안, 그의 카툰 (부인)이 민생과 행정을 도맡았다고 한다. 반세기간 이어진 타히르 조의 지배를 거쳐 870년, 이란계 사파르 왕조의 야쿱 이븐 알 라이트가 점령하였다. 야쿱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아므르는 압바스 칼리파 알 무타디드로부터 트란스옥시아나 총독에 봉해지자, 여세를 몰아 그곳의 또다른 이란계 왕조인 사만 왕조를 공격하였다. (900년)

하지만 이스마일 사마니가 선수를 쳐 남하하였고, 이어진 발흐 전투에서 아므르는 포로가 된 후 바그다드로 보내져 처형되었다. 바흐람 추빈의 손자이자 발흐 인근 마을 사만의 호족이던 사만 후다[11]에서 비롯된 사만 왕조는 (이스마일 사마니는 그의 증손자) 발흐를 포함한 호라산을 장악하며 이슬람권 동부의 패자로 자리매김하였다. 10세기의 아랍 지리가 이븐 하우칼은 발흐가 진흙으로 세워진 도시라며 6개의 문을 갖춘 2.5km의 성벽이 두르고 있으며, 시타델 및 대사원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한 세기간 이어진 사만 왕조의 지배는 10세기 말엽 사만 왕조가 내전으로 쇠퇴하고, 그 틈에 부상한 튀르크계 가즈니 왕조가 호라산을 명목상 (994년)에 이어 997년 사만 왕조의 멸망과 함께 실질적으로 장악하며 종식되었다. (997년)[12]

비록 사만 왕조를 멸한 카라한 칸국이 1006년 발흐를 점령했지만 2년 후 술탄 마흐무드가 회복하였고, 그후 반세기간 가즈니 조에 속하였다. 그러다 단다나칸 전투에서 가즈니 왕조를 격파하고 호라산의 패권을 잡은 셀주크 제국이 1059년 발흐를 정복하였다. 다시 반세기가 지나 셀주크 제국의 내전을 틈타 1115년 오우즈 튀르크 유목민이 도시를 함락하고 약탈했으나, 아흐마드 산자르가 격퇴하여 질서를 회복하였다. 산자르의 통치 하에서 발흐를 비롯한 호라산은 안정과 번영을 누렸다. 12세기의 혼란을 겪으면서도 도시 자체는 번영을 이어갔다. 당대의 역사가 알 이드리시는 발흐에 교육 시설이 많고, 인도와 중국을 잇는 무역이 활발하다고 기록하였다. 하지만 셀주크 제국의 쇠퇴와 함께 발흐는 혼란을 겪게 된다.

2.4.1. 연이은 쟁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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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흐 외성의 성탑

1141년 카트완 전투에서 산자르가 카라키타이에게 패하여 약화되자, 기존의 제후국이던 호라즘 왕조 구르 왕조가 남북으로 호라산을 노렸다. 우선 호라즘샤 아트시즈가 발흐를 비롯하여 호라산 곳곳을 장악했으나, 1142년 산자르가 반격하여 회복하였다. 구르 왕조의 알라웃딘 후세인 역시 1150년 가즈니를 점령하는 등 힘을 키우자 술탄 알 무아잠을 칭하며 독립을 선포하였고, 1152년 발흐를 점령하였다. 다만 곧 반격에 나선 산자르는 구르 군을 격파, 발흐를 회복하고 후세인을 사로잡아 2년 후 막대한 몸값과 충성 서약을 받아낸 후에야 풀어주었다.

그러던 1153년 쿠탈과 토하리스탄에서 오구즈 튀르크 반란이 터지자 산자르는 진압에 나섰으나 패하였고, 메르브에서 벌어진 2차전에서 사로잡혀 감금되었다. 이후 호라산은 오구즈의 약탈에 노출되며 혼란에 빠졌고, 발흐는 니샤푸르의 아미르 무아이드 앗 딘 아이 아바의 수중에 들어갔다. 아이 아바는 임시로 술탄에 옹립된 옛 서카라한 칸국의 군주 마흐무드 칸에 명목상 복속하긴 했지만 사실상 독립된 군주였고, 오구즈에 맞서며 호라산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1156년 산자르가 탈옥하여 테르메즈를 거쳐 메르브로 돌아왔으나 이듬해 사망하였고, 이로써 셀주크 제국은 사실상 붕괴하였다.

혼란 속에서 아이 아바와 마흐무드 칸은 오구즈 토벌에 나섰으나, 전자의 위세를 질투한 후자가 오구즈와 동맹해버리며 이탈하였다. 이로써 니샤푸르도 일시 상실하는 등 궁지에 몰렸던 아이 아바는 곧 재기하였고, 1161년 재차 동맹을 제안한 마흐무드 칸을 감금하며 사실상 술탄을 칭하였다.[13] 실명된 마흐무드 칸이 1162년 사망하자, 이를 핑계로 호라즘샤 일 아르슬란이 남하하여 발흐를 점령하였다. 다만 헤라트를 접수하고 일디귀즈 가문과 동맹하는 등 아이 아바가 반격을 준비하자, 일 아르슬란은 호라즘의 종주국인 카라키타이에게 도시를 넘기고 아무다리야 이북으로 철수하였다.

다만 얼마 후 바미안 술탄 샴스웃딘 무함마드가 구르 왕조 명의로 토하리스탄을 정복했고, 그의 사촌인 구르 왕조의 술탄 기야스 알 딘 무함마드가 헤라트 ~ 구즈간 일대를 정복하며 호라산 남부를 석권하였다.[14] 1193년 내전을 끝난 호라즘 술탄 테키쉬가 남하하여 일시적으로 발흐를 점령했으나, 1198년 기야스 알딘이 구르 왕조령으로 회복하였다. 1200년 테키쉬가 사망하자 기야스 알딘은 호라산 서부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나, 그 역시 1203년 사망하였다. 각자의 후계자인 호라즘샤 알라 웃 딘 무함마드와 구르 술탄 무이즈 앗 딘 무함마드와의 대결에서 전자가 승리하였고, 1206년 무이즈 앗딘이 사망하자 알라 웃딘이 재침하여 발흐를 드디어 호라즘 제국령으로 편입시켰다.

2.5. 파괴와 재건

파일:발흐 시타델.jpg
현재까지도 폐허로 남아있는 발흐 내성 일대
파일:티무르 발흐 1370.jpg 파일:발흐 모스크 1.jpg
1370년 티무르의 발흐 함락도 티무르 왕조기의 사원 유적

1220년, 본격적으로 호라산 정복에 나선 칭기즈칸의 몽골군이 발흐를 점령하고 성벽을 허무는 등 모든 방어 구조물을 파괴하였다. 이때 주민들 역시 다수 학살되었고, 약 반세기 후 발흐를 지난 마르코 폴로는 '고귀한 도시이자 학문의 중심지였다'고 기록하였다. 1333년, 일 칸국의 타지크계 번국인 카르트 왕조 시기에 방문한 이븐 바투타는 거주자가 없는 폐허이나, 모스크나 마드라사 등 외형을 유지하는 대규모 건축군 때문에 주민이 있다고 여길 수 있다고 묘사하였다.[15] 한세기 이상 '잘 보존된 폐허'로 남아있던 발흐는 일 칸국이 해체된 후에야 재차 도시화되었다. (1338년) 발흐를 재건한 카르트 왕조의 무이즈 웃딘 후세인은 사르바다르를 격파하여 호라산의 패권을 장악한 후, 술탄을 칭하며 완전히 자립하였다.

다만 호라산은 곧 동쪽의 서 차가타이 칸국의 침공에 직면하였다. 1358년 서차가타이 칸국의 실권자 아미르 카자간이 호라산을 침공, 헤라트를 함락했으나 회군 도중 동차가타이 (모굴리스탄) 칸국의 투글루크 티무르 칸에게 암살되었다. 이렇게 차가타이 칸국을 통합한 후자는 아들 일야스 호자를 트란스옥시아나 총독에 봉하고 돌아갔는데, 일야스 호자의 학정에 현지 몽골-튀르크 부족들은 저항에 나섰다. 그중 일전에 복속하여 바를라스 부족장이 되었던 아미르 티무르와 아미르 카자간의 손자이자 티무르의 매부 아미르 후세인이 두각을 드러냈다. 2년 이상 각지를 떠돌던 티무르는 1천여 기병과 함께 발흐를 접수하였고, 옛 동료들이 합류하며 세력을 키웠다.

이를 좌시할 수 없던 일야스 호자는 3만 대군을 모아 남하하였고, 티무르는 6천 병력과 함께 발흐와 쿤두즈 사이의 아무다리야 남안에서 그와 맞섰다. (1363년) 이러한 발흐 전투에서 티무르는 승리하였고, 마침 투글루크 티무르가 사망했기에 일야스 호자는 모굴리스탄으로 철수하였다. 따라서 트란스옥시아나는 티무르의 것이 되었다. 1365년 일야스 호자는 대군과 함께 돌아와 타슈켄트 전투에서 티무르와 후세인의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다만 그들이 패주한 후로도 사마르칸트 주민들은 필사 저항하였고, 따라서 별 소득 없이 철수한 일야스 호자는 1368년 사망한다. 기사회생한 티무르와 후세인은 호라산의 패권을 두고 내전을 벌였다. 전자는 유목민들의 지지를, 후자는 발흐를 재건하여 본거지로 삼는 등 정주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1370년 티무르는 아무다리야를 건너 발흐를 포위하였고, 반격에 나선 후세인을 2차례 모두 격파하였다. 후자의 경우 티무르 병력이 발흐 외성에 진입하는데 성공했고, 후세인은 내성 (시타델)에서 농성하였다. 얼마 후 그는 메카로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며 목숨 보장을 조건으로 항복했는데, 이후 탈출을 시도했다가 사로잡혀 일전에 원한을 산 귀족에서 살해되었다.[16] 발흐를 점령한 티무르는 내성과 궁전을 약탈한 후 파괴하였고, 정통성 강화를 위해 후세인의 과부인 차가타이 공주 사라이 물크 하눔[17]과 결혼하였다. 또한 그는 후세인이 옹립했던 카불 칸을 처형하고 우구데이 가문의 소유르가트미쉬를 허수아비 차가타이 칸으로 추대한 후, 자신은 실권자인 아미르로 등극하였다.

2.6. 티무르 제국 & 부하라 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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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1년에 세워진 카와자 아부 나스르 파르사 영묘 (녹색 모스크)

발흐는 티무르가 공식적으로 호라산-트란스옥시아나의 주인임을 선포한 상징적인 도시였다. 사실상 티무르의 후계자인 샤 루흐는 부왕이 파괴했던 내성을 복구하였고, 다른 호라산 도시들처럼 발흐는 15세기 내내 이어진 티무르 제국의 지배 하에 안정을 누리며 일정 수준의 번영을 회복하였다.

1506년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의 우즈벡 족이 발흐를 점령하였고, 1510년 사파비 제국의 이스마일 1세가 점령했다가 이듬해 카불의 티무르 왕공 바부르에게 복숙하는 조건 후에 내어주었다. 다만 1512년 바부르는 부하라 칸국에게 2번 연속 패하여 카불로 밀려났고, 1598~1601년 아바스 1세의 점령기 빼고는 한세기 이상 부하라 칸국령으로 남았다.

2.6.1. 무굴 제국의 북벌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샤 자한의 중앙아시아 원정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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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무굴 발흐.jpg
무굴 제국 지배기에 발행된 탄카 금화. 중앙아시아에서 주조된 유일한 남아시아 동전이다

그러다 1646년 바부르의 고손자 샤자한이 고토 회복 북벌에 나서 바다흐샨과 함께 발흐를 수복, 최고 행정구역인 수바흐를 두었다. 샤자한은 차남인 아우랑제브를 총독으로 두었다. 그러나 한파와 우즈벡 부족들의 집요한 게릴라전에 지친 무굴 원정군은 결국 발흐 태수의 명목상 복속을 대가로 발흐와 바다흐샨 모두에서 철수하였다.

2.6.2. 근대

다시 한세기 가까이 부하라 칸국령으로 남았다가 1736년 나디르 샤가 호타키 왕조 원정 중 점령. 1747년 나디르샤 사후 혼란을 틈타 우즈벡 부족장 하지 칸이 봉기하여 아프간 북부에 마이마나 칸국을 세웠고, 발흐 역시 그 일부였으나 1751년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점령하여 두라니 제국령이 되었다.

2.7. 유대인 공동체

발흐에는 고대부터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다. 아랍 역사가 알 마크리지는 이들이 아시리아 왕 센나케립에 의해 축출된 유대인들의 후손이라 기록하였다. 또한 무슬림 사가들은 발흐로 예레미야가 피신해 왔고, 에제키엘 역시 매장되었다고 기록하였다.

9세기의 토라 학자 히위 알-발키가 그중 하나이다.

중세 발흐의 유대인들은 정원 및 과수원을 운영하며 가즈니 제국 술탄 마흐무드에 세금을 납부했다.

티무르는 발흐의 유대인들에게 따로 성벽으로 둘러진 구역을 하사했다 한다. 한마디로 게토

근대에도 존재하던 발흐의 유대인 공동체는 20세기 들어 타지로 이주하며 사라졌다.

2.8. 과거의 영광을 뒤로한 채

파일:발흐 시가지.jpg
옛 시타델과 신도심의 위성 사진. 외성도 희미하게 보인다

2021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공세 때 결국 8월 14일에 함락되었다. 이 주에서 여성 군수 살리마 마자리가 저항하고 있었다. 한동안 그녀가 탈레반에 포로로 잡혔다가 살해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으나 외신에 따르면 미국으로 탈출에 성공했다고 한다 #

하지만 현재 아흐마드 마수드가 부활시킨 북부동맹 파르완 주와 그 주도 차리카르를 탈환하였는데, 이 곳은 카불과 판지시르를 잇는 고속도로의 지점이고 미군이 설치했던 고속도로 휴게소가 남아있다. 또한 이곳은 발흐 주의 마자르 이 샤리프를 잇는 고속도로와 연결되어 있는 지점이라, 북부에 있는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을 통해 이 연결 통로로써 외부의 지원[18]을 기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3. 아프가니스탄의 주

아프가니스탄 북쪽에 위치해 있다. 주도는 마자르이샤리프이다. 우즈베키스탄과 접해 있어서 주민들의 대부분이 우즈베크인이다. 그리고 우즈베크어의 사용비중이 높다.

2021년 8월중에 탈레반이 발흐주를 점령했다.


[1] 페르시아인, 파슈툰인, 타지크인, 발루치인 등의 공통 조상 [2] 박트리아 어로는 βαχλο 나 ẞaxlɔ 로 불렸다. [3] 메르브, 헤라트처럼 제국의 수도가 되지는 못했지만, 경제 / 문화 수준은 더 높을 정도였다. [4] 미얀마 측에서는 그들이 부처의 머리 8가닥을 다곤의 왕에 바쳤고, 후자는 이를 양곤의 슈웨다곤 파고다에 봉안했다고 믿는다 [5] 이후 메르브 루드 (바드기스)로 철수한다 [6] 이때 페로즈 3세가 돌아와 명목상으로나마 당의 파사 도독으로서 약 10여년간 호라산 일부를 통치하였다 [7] 667년에는 알 하캄 빈 아므르 알-기파리가 파견되어 아무다리야 너머로 진군, 페로즈 3세를 다시 당으로 축출하였다 [8] 이로써 그의 후예인 바르마크 가문은 카슈미르 출신이라는 설이 퍼지게 되었다. 실제로 바르마크 가문은 집권한 후 카슈미르 현지 학자들을 바그다드로 초청하고 카슈미르 왕가에 사절을 보내는 등 카슈미르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9] 바르마크는 곧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아들은 칼리드로 개명하여 후일 압바스 왕조의 와지르 (재상)에 오른다 [10] 왕오천축국전에서 혜초는 토하리스탄에선 여전히 불교가 보편적이며, 나바 비하라 역시 왕후장상들이 방문해 대불에 공물을 바치는 등 번성한다고 기록하였다. 다만 이는 옛 기록을 그대로 전한 것일 수도 있다 [11] 그는 발흐를 재건한 아사드 알 카스리를 만난 후 감명받아 조로아스터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아들을 아사드로 개명시켰다. 그리고 그 아사드의 네 아들들이 알 마문에게서 사마르칸트, 헤라트, 타슈켄트, 페르가나 총독에 봉해지며 사만 왕조가 시작된다 [12] 994년부터 이미 명목상 봉신인 호라산 총독 명의로 일대 장악, 997년 카라한 조가 사만 조를 멸하자 완전 독립 [13] 그는 1163년 하마단의 셀주크 술탄에게서 책봉받기도 했다 [14] 구르 왕조의 손쉬운 호라산 평정은 1172년 일 아르슬란의 사후 호라즘 왕조가 테키쉬와 술탄샤 형제 간의 내전이 터져 약화되고, 1174년 아이 아바가 후자의 편에서 호라즘을 공격했다가 패배한 후 사로잡혀 처형되며 니샤푸르 정권의 호라산 패권이 붕괴된 것에서 기인한다. 다만 니샤푸르 정권 자체는 아이 아바의 아들과 손자까지 이어지다 1187년 테키쉬에게 정복된다 [15] 코발트 염료를 바른 건물 양식은 당대에도 유행했고, 여러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한다 [16] 세 귀족이 그가 감금되어 있던 미나렛으로 올라가 떨어뜨려 죽였다 한다 [17] 하눔은 칸의 딸이란 뜻으로, 사마르칸트의 비비 하눔이 그녀의 이름을 따 지어졌다. 그녀와의 결혼으로 티무르는 '테무르 구르간', 즉 대칸의 사위라는 호칭을 공식 석상에서 늘상 사용하게 되었다 [18] 특히 인도. 인도는 아프간에서 파키스탄의 힘이 커지는 것을 매우 우려한다. 그리고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은 러시아의 영향이 강한데, 러시아와 인도는 소련 시절부터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해 왔다. 러시아도 탈레반이 중앙아시아 쪽으로 슬금슬금 넘어오는 가능성 자체를 싫어하므로, 인도의 지원은 흔쾌히 허락할 가능성이 높다. 한편으로, 파키스탄 정부는 계속 테러나 저지르는 탈레반을 슬슬 손절하고 싶은 상황이다. 다만 ISI가 파키스탄 정부의 말도 무시하고 탈레반을 계속 키워줬을 뿐이다. 즉, 파키스탄 정부도 암암리에 판지시르를 지원할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