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이란 계통의 종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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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Aum). 힌두교에서 부르는 '깨닫는 소리'이다.[1] 만( 卍)자와 함께 힌두교의 대표적 상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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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힌두교[2](हिन्दू धर्म, Hinduism)는 인도 신화를 기반으로 하는 종교로, 인도, 네팔, 발리섬의 유력종교이다. 2020년 기준으로 11.6억명 (세계 인구의 15%) 이상이 믿으며 신자 수로는 그리스도교, 이슬람에 이어 3위다.[3]2.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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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힌두교 신자 분포.[4] |
힌두교는 인도아리아인 민족들의 고유종교인 동시에 드라비다 계 민족들의 전래종교로서 현재 인도와 네팔의 다수 종교이다. 네팔은 2008년까지 힌두교를 국교로 삼았다. 2008년 왕정폐지 이후 국교가 더 이상 아니며, 2015년 제정된 헌법에서는 네팔을 세속국가로 규정하였다. 방글라데시와 스리랑카에도[5] 힌두교 인구가 상당하다. 발리섬에서도 힌두교도가 많은데, 남아시아 밖에서 인도 계통의 이민자들이 아닌 원주민들이 힌두교를 믿는 유일한 사례다.[6] 동남아시아 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힌두교가 인도의 민족종교라는 주장은 주로 힌두교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나오는데, 그러한 여론이 커지고 있는 것과 별개로 일단은 종교를 막론한 인도아대륙 전체의 정치적 통합을 추구하는 인도 정부의 공식방침에 어긋나고 내부적으로도 아리아계 이슬람교도나 시크교도, 혹은 드라비다계 힌두교도들에게 반발을 산다.
힌두교는 앞으로도 인도 문명권의 종교로서 오랫동안 존재할 것으로 보인다. 단지 해외 선교가 쉽지 않은 교리상[7] 인도와 네팔외 해외 전도에는 크게 관심이 없을 것 같지만, 사실 과거에는 인도 문화와 함께 동남아시아로 활발하게 전파되어서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참파(베트남 남부). 필리핀 일대에서 힌두교가 상당한 세를 가졌다. 태국 국왕의 라마라는 칭호도 힌두교의 신 라마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역시 해외 전도에 부적합했는지 그 이후로 동남아시아에서는 발리 섬과 인도인 밀집지역을 제외하면 불교와 이슬람에 완전히 밀렸다. 그래도 교류 자체는 계속 이어진지라 어떠한 형태로든 힌두교 문화의 흔적 자체는 남아있기는 하다.
그 밖에도 스리랑카에도 제법 힌두교인이 많이 있으며, 피지, 가이아나, 남아공, 모리셔스[8], 수리남같이 인도인이 많이 사는 나라들도 힌두교세가 크다. 총집계는 10억 명이 넘으리라 보는데 전세계 인구의 13~14% 정도에 해당한다.
또한 인도네시아의 발리섬에도 힌두교인들이 700만 명이 사는데, 이들의 신앙은 인도의 힌두교와 다른 현지화된 힌두교로 발리 힌두라 부른다. 발리 힌두의 가장 큰 특징은 카스트 제도가 없다는 점이다.[9] 이슬람 및 토속신앙에 맞춰져서 계급제도가 사라진 경우라, 인도와 네팔의 힌두교인들은 인도네시아의 힌두교를 이슬람교에서 수피교나 이바디파를 다른 종교로 보듯이 다른 종교로 여긴다.
세계 4대 종교 중 하나답게 '철학적'인 면이 강한 종교 중 하나로 꼽힌다. 유럽인들에게 있어 유럽과는 다른 패러다임에서 깊은 철학적 사유들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그러나 힌두교가 가장 철학적인 종교라는 의미는 아니다. 현대까지 살아남은 주류 종교 중 적지 않은 수가 철학적 면모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는 아카데미아학파, 소요학파, 스토아학파, 근현대철학 등과 교류하며 교부 사상, 스콜라 사상, 신스콜라 사상 등으로 승화시켰고, 신약 필립비서에서 이미 예수와 성부의 관계를 그리스 철학의 형상(Morphē, 라틴어로는 Forma)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유대교도 지혜서에서 사추덕(현명, 정의, 절제, 용기)을 서술하여 아카데미아 학파와의 교류가 확인된다. 또한 도교는 노장 사상의 영향이 있고, 이슬람교도 철학논쟁이 대단히 활발히 진행되었다. 물론 이러한 철학적 교류는 해당 종교의 첫세대가 아닌 후대인들의 철학적 기여도 많지만, 힌두교 역시도 첫세대가 아닌 후대인들의 철학적 기여가 적지 않다. 결국 서양 지성인들이 힌두교 혹은 인도철학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것은, 서양 의사들이 한의학에 관심을 보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의사들이 착각하는 것과 달리, 동양의학이 나름의 자극을 준다고 해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의학은 아니듯이. 물론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철학 중 하나'라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시크교가 힌두교에서 파생되었다. 불교와도 공통분모가 꽤 많은데, 불교가 힌두교의 신들을 호법신, 천인으로 낮추어잡는 반면, 힌두교는 부처를 비슈누의 화신 수준으로 취급하는 등 서로간에 은근히 알력이 있다. 이런 와중에도 서로의 세계관을 끌어들이려는 흔적이 역력한 것은, 두 종교 모두 서로의 위상을 주시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사람들 중엔 힌두교와 불교를 아예 '친족지간'으로 보는 견해도 보인다. 다만 불교는 교조 석가모니가 사마나[10] 출신인 데다가 교리의 내용 면에서도 크게 다른 점이 몇 군데 있다. 아마도 굳이 비교하자면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사이의 관계와 유사한 점이 있을 것이다.[11]
가장 대표적인 논쟁은 '아트만'에 관한 것으로, 즉, '고정불변하여 영속하는 자리가 있는가'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쉽게 풀어 '나의 실체가 존재하는가' 정도의 논쟁으로 받아들이면 얼추 맞다. 힌두교는 '아트만(Atman)'을 인정하여 '나'의 실체'가 있음을 받아들이는 반면, 불교는 '안아트만(Anatman)' 혹은 '아나타(Anatta)'라고 하여 '나'의 '실체'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안아트만(Anatman)'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그 유명한 '무아(無我)'라는 용어이며, 반대로 힌두교의 아트만(Atman)을 한역할 때는 '진아(眞我)'라고 함이 보통이다.
이외에도 불교는 카스트를 인정하지 않는 점이라든가, 수행의 목적이나 방법[12][13], 중도사상 등에서 힌두교의 주류와 의견을 달리한다.
3. 역사
중세 시기 힌두교 전파 지도
힌두교는 불교, 이슬람, 그리스도교 세력의 지배를 모두 수백 년에 걸쳐 경험하고도 밀려나긴커녕 오히려 더더욱 교리가 체계화된 종교이자 고대부터 현대까지 몰락이나 큰 침체 없이 번성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다신교신앙이다.
덤으로 불교는 마우리아 왕조부터 쿠샨 왕조까지 왕실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하였고, 이슬람은 군대를 이끌고 북서쪽에서 쳐들어와서 델리 술탄 왕조 시절부터 무굴 제국까지 사실상 북인도를 지배했다. 그리스도교의 경우 대영제국에 의해 인도 제국이 세워져 전 인도 반도가 영국의 통치를 받았다. 이 세 종교의 영향을 받고도 토착종교가 온전한 나라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힌두(Hindū)'라는 이름은 산스크리트어로 '거대한 물'을 가리키는 단어인 '신두(Sindhu)'에서 유래했다. '거대한 물'이란 '바다'나 '큰 강'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신두'가 가리키는 '큰 강'은 바로 4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인 인더스 강이다.[14] '힌두'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바로 고대 페르시아인들의 기록인데 이들은 '신두'라는 단어를 페르시아어 단어인 '힌두'라고 불렀다.[15] 기원전 515년 아케메네스 왕조의 샤한샤 다리우스 1세는 인더스 강 유역 일대를 정복하여 그 일대를 '힌두'라고 칭했고 그 아들인 크세르크세스 1세 대에 '힌두'라는 단어는 기존의 범위인 인더스 강 유역을 넘어 동쪽으로 갠지스 강 유역 일대까지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다. 즉 '힌두'는 곧 데칸 고원과 히말라야산맥 사이에 놓인 인더스 강과 갠지스 강 유역 일대, 나아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단어로 힌두교란 '힌두'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신봉하는 종교라는 뜻이다.
힌두교의 원형은 브라만교로 아리아 민족의 다신교가 발전한 형태였다. 참고로 고대 인도의 천공신 드야우스는 그리스의 제우스, 라틴어의 데우스, 북유럽의 초기 주신인 티르[16]와 그 어원이 같은 점에서 그 오래된 뿌리를 엿볼 수 있다.
브라만교가 발전 및 정립된 게 힌두교이다. 즉, 브라만교는 그대로 남은 게 아니라 힌두교로 진화한 것이며 또한 브라만교는 인도의 생활방식, 사회구조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17]
원래는 캅카스 근처에서 살며 인도유럽조어[18]를 썼던 것으로 알려진 유목민족이 유라시아의 서부와 동부로 진출하였는데 이들 중 인더스 강 유역에 정착한 인도아리아인의 종교가 브라만교였고, 그 경전이 베다였다. 베다에는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와 여기에 살고 있던 적을 패배시켰다는 이야기가 자주 묘사되는데, 바로 이것들은 유목민이었던 아리아인들이 본 인더스 문명과 그 정복을 묘사한 것이다.
이렇게 인도아리아인의 종교였던 브라만교는 이후 멸망시킨 인더스 문명의 요소를 받아들이면서 발전을 계속하였다. 힌두교의 유력한 신격인 시바도 실제로는 인더스 문명의 토착 신이라는 학계 가설도 존재하며[19], 비슈누의 가장 중요한 화신인 크리슈나 역시 인도 토착민의 신일 가능성이 상당하다. 두 신 모두 피부가 검거나 푸르게 묘사되는 점에서 백인종인 아리아인과 전혀 다른 인종적 특징을 보인다. 카스트 제도와 같은 것은 정복민인 아리아인들이 피지배 민족을 관리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이후 불교나 자이나교와 같은 종교의 도전을 받기도 했지만, 4-6세기 굽타 왕조 때 교리가 확정된 이후 현재와 같은 형태로 발전하여 현대에 이른다.[20]
브라만교가 힌두교로 전환된 것은 8세기 샹카라의 베단타 철학이 나왔을 때로 여긴다.[21] 샹카라는 대승불교의 사상을 일부 받아들여 범아일여 사상을 주창하였다. 고대 인도의 불교와 자이나교는 도회지를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브라만교는 농촌 사회를 중심으로 유지되었는데 불교를 지원하던 쿠샨 왕조의 멸망과 로마 제국과의 무역 쇠퇴로 도회지 상인들이 중심이 되었던 불교는 큰 타격을 받고 브라만교 사제들은 불교, 자이나교의 영향력을 서서히 흡수하여 교리를 정비한다. 인도에서 불교는 이슬람과 힌두교의 영향으로 점차 소멸했다. 형이상학적인 베단타 철학 때문에 다소 사변적으로 흐르던 힌두교는 11세기 라마누자가 나타나 신에 대한 대중신앙을 부활시켜 현재와 같은 종교로 발전했다.
7세기 이후 다신교와 상극인 유일신교 이슬람이 서쪽으로부터 전파되었고, 이들은 무력을 앞세워 인도를 장악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힌두교 신앙을 유지하는 인도내 소왕국들과 종교전쟁이 빈발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위로 무굴 제국과 같은 이슬람 왕조들이 인도를 지배하기도 했으나, 힌두교는 워낙 인도에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중동/ 중양과는 달리 이슬람이 다수가 되지는 않았다. 전근대 인도 사회는 쟈티를 기반으로 고도로 분업화된 사회였는데, 힌두교 사회구조를 해체할 경우 무슬림 정복자들 입장에서도 세금 수입이 감소할뿐더러 사회를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힘들었다.[22] 이슬람은 힌두교에 이어 인도의 제2의 종교로 남았다.
인도가 영국에서 독립한 후, 종교갈등으로 많은 무슬림들이 인도에서 분리된 파키스탄으로 이주했고 반대로 파키스탄 일대에 거주하던 힌두교도들은 인도로 이주했다. 이 영향으로 인도내 이슬람의 세력은 위축되었고, 힌두교는 인도인의 절대 다수가 믿는 종교가 되었다. 현재 인도와 파키스탄 두 나라에서 힌두교와 이슬람의 갈등은 아주 심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양쪽에 의한 테러가 자주 일어나는 편이다. 인도에서 다수가 된 힌두교는 이슬람 왕조 치하에서 당했던 것을 갚으려고 하고, 파키스탄 이슬람교인의 경우에는 힌두교가 우상숭배를 하는 데다가 아예 종교 때문에 나라가 갈라지기까지 했으니 인도에 적대적인 만큼 힌두교에도 적대적이다. 물론 영토와 종교권이 100%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서 파키스탄 내에도 적지 않은 힌두교도가 있으며, 이에 따라 힌두교도들은 혹독하게 탄압당하고 있다. 힌두교 성직자를 살해하고 신전을 공격하는 테러가 계속되어 왔으며, 그나마 버틸만한 카라치, 라호르 등 대도시권에나 건재한 상황이다. 제도적으로도 심한 차별을 가하여 힌두교도는 혼인신고조차 받아주지 않았었다고. (2017년에 금지가 해제되었다.)
그래서 자신이 힌두교임을 숨기고 무슬림으로 행세하며 신앙을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런 혹독한 환경 때문에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인도로 이주하는 파키스탄 힌두교도가 꾸준히 늘고 있다. 그 중에는 자식들을 인도로 유학 보내서 터를 닦게 해서 이주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공식적으로는 1% 정도지만, 힌두교도의 주장으로는 5%라고 한다. 다만 파키스탄은 힌두교와 이슬람의 종교적 대립이나 카슈미르를 둘러싼 영토 갈등도 그렇고 인접국가인 인도와는 핵개발과 군비경쟁까지 각오할 정도로 적대관계를 유지하는 데 비해 인도와 마찬가지로 힌두교도가 절대 다수인 다른 남아시아 국가인 네팔과는 외교적으로 사이가 나쁘진 않다. 네팔은 파키스탄과 국경을 맞대지 않은 먼 나라이기 때문이다.
3.1. 베다에서 푸라나로
이상에 서술한 것처럼 힌두교는 고대 또는 상고 시대의 브라만교에 기반하였지만, 특히 굽타 제국 시대 이래 작성된 수많은 문헌에 기반하여 고대 후기 내지 중세에 새로이 성립한 것이다. 브라만교와 힌두교의 차이는 거칠게 말해 ' 베다에서 푸라나(Purana)로'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데, 베다 성전의 의미를 명료화하거나 쉽게 설명하기 위해[23] 브라만들이 서사와 비유를 곁들여 작성한 푸라나 문헌들이 굽타 시대와 그 이후에는 오히려 사실상 베다를 밀어내고 교리의 중심이 되었다. 베다 중심의 원-힌두교(브라만교)와 푸라나 중심의 힌두교 간 차이는 매우 크며, 간단히 정리하면 이하와 같다.[24]- 베다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아그니, 인드라, 소마, 미트라, 바루나 등의 신은 푸라나 시대에 오면 위상이 크게 추락하고, 베다에 언급되지 않았거나 중요하지 않았던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 3대 신이[25] 새로운 3대 주신으로 등장했고 가네샤 등[26] 여러 새로운 중요 신격이 힌두 만신전에 추가되었다. 인드라는 여전히 신들의 왕이었지만 이제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르기도 하는 등 권위가 크게 낮아졌고, 인드라의 실질적인 권력은 사실상 모두 비슈누에게 넘어갔다.
- 가부장적 면모가 강한 원 베다에서는 여신들(우샤Usha, 프리트위Prithvi 등)이 상대적으로 중요치 않게 취급되었지만, 푸라나 시대의 여러 새로운 여신들― 두르가, 락슈미, 칼리, 라다(Radha) 등―은 우주적 힘과 에너지를 갖춘 존재로 신들의 사회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주요 숭배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푸라나가 인도 내의 여러 지역 전통을 베다에 맞추어 힌두교로 흡수하는 과정에서 지역의 강력한 토착 여신들도 새로이 받아들인 것 같다.
- 베다가 교리의 중심이던 시대에 신은 어느 정도 추상적인 존재였지만, 푸라나의 시대에는 신의 형상이 인간과 흡사하게, 때로 인간보다 매우 강력해 보이는 모습으로 매우 다양하고 자유롭게 묘사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신의 형상을 직접 묘사하는 신상 제작이 활발해졌고, 신상은 사원과 집의 특별한 장소에 위치하며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푸라나의 시대 이전에도 테라코타 등으로 만든 작은 신상은 존재했지만, '신상을 안치하기 위한 사원 건립'은 굽타 시대 이후에나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 신상이 대거 만들어지고 숭배의 대상이 되면서 베다의 근엄한 제의와 희생제, 베다 만트라 암송 등은 비교적 생명력을 잃었고, 신상과 신상 주위를 장식하고 신상 주변에 각종 공물을 바치는 행위가 널리 퍼졌으며 각 지역의 성지로 순례를 떠나는 행위가 유행하는 등 의례의 실천 방식도 크게 변화했다. 성지 순례는 바르나에 무관하게 ( 불가촉천민 등 바르나 외의 사람을 제외하면) 모두가 참여할 수 있었고, 성지 순례 동안에는 접촉에 의한 오염이라는 전통적 금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 신을 숭배하는 태도도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베다가 중심인 시절, 숭배자가 모든 의례를 문헌의 절차에 맞게 준수하면 신은 숭배자가 원하는 바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믿었으으로 둘의 관계는 다소 기계적이었다. 그러나 푸라나의 시대에 숭배자는 단순히 절차를 준수하는 존재가 아니며, 적극적이고 개인적인 헌신으로 신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때 숭배자는 일상적으로 행하는 의례를 통해 자신이 숭배하는 신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게 되며, 다소 역설적이게도 일종의 '신의 후견인'과도 같은 위치에 선다. 푸라나의 시대에 숭배자는 이렇게 개인적으로 아끼고 사랑할 자신이 숭배하는 신을 개인적인 선호나 가문의 결정 등으로 선택할 수 있었다.[27]
4. 힌두교의 주요 신과 영웅들
자세한 내용은 인도 신화 문서 참고하십시오.5. 교리
6. 이모저모
힌두교 3대 경전 | ||
베다 | 우파니샤드 | 바가바드 기타 |
대외적으로는 인도혹소[28]를 신성시해 절대 먹지 않는 종교로 유명하다. 정확히는 암소, 하얀 소, 다리가 5개 달린 기형 소 오족우 같은 특이한 소가 신성시되면서 엄청난 대우를 받는다. 사실 이것만 너무 부각되어서 그런지, 그 외의 특성에 대해서는 제대로 인지하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그러나 사실 중세와 근대를 거치면서 잊혔을 뿐이지, 소 숭배 자체는 전세계적으로 봐도 그렇게 드물거나 특이한 종류의 신앙은 아니다.(고대 이집트의 아피스, 성경의 금송아지 이야기 등)
다만 인도라고 아무 인도혹소나 다 신성시하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웹툰 작가 고리타는 " 소가 된 게으름뱅이가 인도에서라면 잘 먹고 잘 살았지 않았겠느냐"고 그린 바 있는데, 실제로 인도를 가 보면 숫소들이 거리를 떠돌면서 거리 가로수잎을 뜯어먹고 길거리에서 떠돈다. 물론 극렬 힌두교인이 먹을 거 주는 경우가 있지만, 소가 워낙 많아서인지 배고픈 소들이 노점상 채소를 먹으려다가 힌두교인들에게 죽어라 맞는 일도 있다고... 이걸 본 외국인들이 "힌두교인은 죄다 소를 신성시하는 거 아니었냐?!"라며 깜짝 놀라는 경우가 많다. 소들도 워낙 배고파서 물러서지 않으니까, 큼직한 몽둥이로 얼굴에 피멍이 들도록 패는 이들도 있다! 또한 물소나 인도들소같이 소가 아닌 종, 특히 물소의 경우 힌두교도들이 죽음의 신 야마가 타고 다니는 동물로 여겨 죽이거나 먹어도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그런데 소가 이렇게 거리를 활보하게끔 배려하고 소를 일체 먹지 않는 것 자체가 소를 다른 동물보다 훨씬 잘 대접해준다는 증거이긴 한데, 그래도 먹긴 먹는다.
우선 인도네시아 발리섬에선 쇠고기를 되려 종교적 명절에 먹는 힌두교인들도 여럿 있다. 그것도 직접 도살하여 먹은 신선한 쇠고기이다. 이에 대하여 현지 힌두교인들은 신의 사자인 소를 먹음으로서 신성함을 되새기는 것으로 여기며, 소를 직접 도살하는 이도 힌두교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며 열심히 임한다고 인터뷰할 정도이다. 애초에 이들이 도축하는 소는 반텡으로 신성시되는 인도혹소와 다른 종이다.
일단 인도에 1억 5천만이 넘는 이슬람교도를 비롯해서 " 소 숭배? 그게 뭔데?" 하는 다른 종교인들이 주로 먹기도 하지만, 특정 카스트 중에는 소를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카스트도 있다. 전통시대에 소 시체를 처리하던 계급이라고... 물론 신성한 소를 잡아먹는 계급이므로 천민이다. 게다가 소를 먹도록 되어 있는 카스트인데, 종종 소를 잡아 먹는다고 구타당하거나 심하면 살해당하기도 한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소를 도축하는게 아니라 자연사한 소를 처리하는 카스트인데, 극단주의 소 숭배자들은 이들이 살아있는 소를 도축해서 쇠고기를 먹거나 비 힌두교도들에게 공급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마하트마 간디를 죽인 극단주의 힌두교도 살인범죄자 나투람 고드세가 무슬림은 무조건 적이니 무조건 다 죽여야 하고, 화해하자는 사람도 무조건 다 죽여야 한다!!던 억지 미치광이 사고방식과 같다고 보면 된다.
한편으로 눈치 봐 가면서 쇠고기 먹는 힌두교인들도 종종 있다. 인도 여행기를 쓴 메이가 쓴 책을 보면, 인도에 가서 쇠고기 커리나 쇠고기를 갈아 만든 빵을 먹고 놀랐는데 , 더 놀라운 건 그걸 만드는 게 힌두교인이며 힌두교인 지인들도 즐겨 먹어서 더 놀랐다고. 물론 먹는 건 조용하게 먹지만 "너무나도 쇠고기가 맛있어!!"라는 반응이었다. 근데 따지고 보면 이슬람교도이나 유대교도들도 분위기 봐가면서 종교적으로 금지하는 돼지고기와 술, 게, 바닷가재, 새우 따위를 먹는 이들이 있기는 있다.[29] 한국에서 활동하는 아비셰크 굽타의 말에 의하면 힌두교인들이 쇠고기를 먹어도 법에 저촉되지 않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이 잘만 먹는다고 한다. 그리고 참 아이러니한 것이, 쇠고기 수출국 세계 1위 국가마저도 인도라고 한다. 또한 북미에서 (특히 캐나다) 쇠고기 패티 쓰는 패스트푸드 체인 점주 중 인도인 비중이 가장 높다.
힌두교의 특성 중 하나는 깨끗함과 더러움이라는 관념이다. 더운 열대지방이다보니 질병 예방을 위해 위생을 중시하면서 이런 관념이 종교적인 수준으로 승화된 것으로 추측된다. 힌두교에서는 피, 땀, 침, 눈물 등 인체의 체액 일체를 더러운 것으로 보는 관념이 형성되어 있다. 인도인들이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도, 다른 이(식당 등)가 제공하는 식기가 깨끗이 씻이지 않아 혹시 전에 사용한 타인의 침이 섞여있을까 하는 염려에서 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길거리에서 파는 차는 일회용 질그릇에 담아서 주며, 그것을 마신 뒤에는 깨버려 다시 쓰지 못하도록 만든다.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는 무척 엄격한데, 카스트에 들지 않은 외국인이나 이교도는 일단 모두 불가촉천민으로 분류된다. 힌두교인은 외국에 나갔다 돌아오면 정화의식을 받을 정도다.[30] 이러니 해외로는 퍼지지 않지만, 아예 이교도 자체를 매우 더러운 것으로 취급하고 특권의식을 부여하니 쉽게 무너지지도 않는다.
굉장히 특이하게도, 인도 내에서는 불교, 자이나교, 시크교는 이교가 아닌 힌두교의 한 분파로 바라보는 시선이 지배적이라는 것이다. 불교의 석가모니는 아예 비슈누 신의 아바타로 바라보고, 자이나교는 독자적인 규율과 신을 고수하면서도 아예 힌두 경전이나 힌두 신을 일부 받아들였고, 시크교는 아예 힌두교와 이슬람이 합쳐진 종교니…그렇기 때문에 정말 인도에서 탄생하지 않은 종교, 이슬람과 그리스도교는 이교도로 보고 극우 힌두 단체[31]가 지속적으로 폭력 사태와 테러를 일으키는 형편. 이 종교 문제에 따른 테러 문제가, 카스트 제도와 더불어 인도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세계에서 신의 숫자가 가장 많은 종교다. 일단 인도가 한 나라기는 하지만 인도 아대륙이라는 말이 있듯이 어지간한 나라 수십개를 합친 면적이라 그 안에 많은 민족과 다양한 지역&토속신앙이 융합되었기 때문이다. 그 수는 자그마치 3~4억(!)[32]이라고 한다. 아마도 종교 중 유일하게 일본의 민속 종교 신토의 신 물량을 능가하는 종교일 듯. 일단 애매하지만 일본 신토의 신의 수는 흔히 800만이라고들 칭한다. 물론 이는 '그만큼 신이 많다'라는 이야기이지 이를 액면 그대로 생각하면 곤란하고, 대충 3만 정도가 통계로 잡힌다. 그래서 힌두교는 1인당 1신이라는 설명도 있다.
이 가운데서 가장 중심이 되는 주신은 브라흐마(창조), 비슈누(유지), 시바(파괴)의 3신이다. 이들을 트리무르티(Trimurti)라고 부르는데, 가끔 삼신일체, 삼위일체라는 말로도 번역하지만 통일된 명칭은 없다. 그런데 이들 중 현대 힌두교에서 실제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비슈누와 시바뿐이고, 브라흐마는 철학적인 우주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뿐 그 자체로 주신으로서 숭배를 받은 일은 없다.[33] 근대에 들어서 힌두교가 인도의 발전에 방해가 된다고 보고 일신교로 대체하고자 한 민족주의자들이 인위적으로 브라흐마 유일신 신앙을 시도한 적은 있다. 그렇다고 저 두 신만 믿는가 하면 절대 그게 아니고 상술한 대로 신이 엄청나게 많다보니 그 외에도 가네쉬, 락슈미 등 인기 있는 신도 상당수다. 또한 지역별로 받드는 신도 크게 달라져서 특정 주에서만 숭배되는 신도 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이 신들이 그 지역 한정으로는 트리무르티 쌈 싸먹는 교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인도의 주 하나하나가 웬만한 국가보다 인구와 면적이 크다보니 이런 양상도 이상한 건 아니다. 이러한 힌두교 신 간에는 일단 상호 존중 및 공존이 기본이긴 하지만 어쨌든 갈등이 아주 없지는 않다. 주로 비슈누와 시바 중 누가 더 위대한가로 갈등을 빚는데 이 대립은 역사가 아주 깊어서 이미 기원 전에 두 종파간의 화해를 주장한 종교 지도자가 나올 정도였다. 여러 경전에서나오는 비슈누와 시바 두 신의 상호존중에 대한 이야기는 이러한 종파간 갈등을 완화하려는 의도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갈등은 이어져서 중근세 시대에 크리슈나 신을 믿는 왕자비를 독살하려는 시바교도 왕자 집안의 이야기도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힌두교내 갈등은 시대가 내려오면서 많이 완화되어 오늘날에는 사실상 거의 없다고 보면된다.
힌두교의 갈래들 중에서 4가지 주요한 분파가 트리무르티와 관련된다. 이들은 비슈누를 최고로 치는 비슈누파(산스크리트어: वैष्णवसम्प्रदाय[Vaishnava Sampradaya], 영어: Vaishnavism), 시바를 최고로 모시는 시바파(산스크리트어: शैवसम्प्रदाय[Shaiva Sampradaya], 영어: Shaivism), 여신들을 모시는 샥티파(산스크리트어: शाक्तसम्प्रदाय[Shakta Sampradaya], 영어: Shaktism), 트리무르티를 한 신의 세 측면으로 보는 스마르타파(산스크리트어: स्मार्तसम्प्रदाय[Smarta Sampradaya], 영어: Smartism)이다. 샥티파에서도 트리무르티에 대응되는 3여신이 있는데, 이들은 락슈미( 비슈누의 아내), 파르바티( 시바의 아내), 사라스바티( 브라흐마의 아내)이다. 그 외에도 많은 여신을 모시며 두르가, 칼리, 마하샥티 등이 핵심이다. 샥티파는 탄트라와도 관계가 있어서 불교(특히 밀교 계열)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힌두교에 많은 신들이 있다고 하지만, 이 신들을 죄다 믿는 게 아니라 마음대로 믿는다. 물론 비슈누와 시바가 넘사벽으로 인기 있기는 하지만, 저 많은 신에서 어느 신을 믿든지, 하나를 믿든지 열을 믿든지 그건 자유. 심지어 안 믿어도 된다! 나름의 사상적 근거가 있다면. 이런 무신론적 힌두교가 종파를 형성하기도 했다. 덤으로 그 신에는 예수와 알라와 부처까지도 들어가 있다. 그러니 나는 예수를 믿는 힌두교인이라고 말하는 이를 만나면 놀라지 말 것. 그래서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인도에서 선교해도, 애써 귀의하는가 했더니 '나는 예수를 믿는 힌두교인입니다.' 이러는 게 많아서 환장한다고 한다. 덕분에 힌두교도를 다른 종교로 귀의시키는 것은 불가능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이며, 인도에선 해외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포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 한 가지 재밌는 일화. 유학 생활 중에 힌두교를 믿는 다른 학생과 만나 종교 얘기를 하다가 힌두교와 그리스도교의 차이점을 다신교와 일신교의 관점에서 비추어 설명을 하자, 다 듣고 있다가 하는 말이 "그래? 그러면 그쪽에서 말하는(그리스도교의) 신도 우리 신 중 하나야."
그러나 힌두교가 이런 특성을 가졌다고 해서 하늘이 무너져도 언제 어디서나 다른 종교로 절대 개종 안 하는 무적의 종교라는 식으로 생각하면 안된다.[34] 사실은 사회 환경이나 계급, 지역적 특성, 개인의 종교적 성향에 따라서 케바케라고 봐야 옳다. 서술했지만, 힌두교는 사실 절대적인 단일 교리를 가진 종교가 아니라 인도 문화의 특성을 지닌 수많은 민족신앙과 전통을 뭉뚱그려 칭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35] 더욱이 주류 힌두교 계층에게 짐승 이하 취급을 당하고 배척받는 달리트(불가촉천민) 계층과 하위 카스트 신자들은 예로부터 평등사상이 담겨져 있는 불교나 이슬람, 시크교로 개종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인구(크리스천 달리트)도 계속해서 증가해 힌두 극단주의자들과의 갈등이 늘어나기도 했으며, 2010년대 이후로는 선교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도 사실상 옛말이 되어서 중산층 힌두교 계층에서 그리스도교 등 타종교로 아예 바꾸는 사람들도 상당히 늘어났다. 거기다 힌두교 배경의 부족민들도 타종교로 개종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다만 인도나 네팔의 힌두교 인구 비율이 계속 줄어드는 것 자체는 이슬람,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사람이 늘어나서가 아니다. 힌두교는 일단 인도 인구의 80% 전후를 차지하는데 이것도 비율이 줄어든 것이기는 해도 신도수 자체는 늘어나는 추세이다. 이슬람교의 증가율이 힌두교 증가율보다 높아서 비율이 낮아지는 것일 뿐으로 힌두교도 증가율은 이슬람의 뒤를 이은 2위이다. 한편, 현재 힌두교 인구는 무종교 인구 전체를 밑돌고 있지만 2050년 이후에는 무종교 인구를 앞지르는 명실상부 세계 3위의 거대 종교로 성장할 전망이라고 하니, 비록 비율은 줄어든다 할지라도 인구 자체는 계속 증가하고 있어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하지만 개종에 대한 힌두 극단주의자들의 반발이 있는 것도 사실이어서 개종 금지법 등으로 말이 많은 상태이며 그게 아니더라도 원체 인도인의 생활에 깊이 뿌리내린 종교인지라 인도 내에서 힌두교의 절대적인 우위는 이번 세기에도 계속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워낙 오랫동안 외부 종교와 공격에 맞서서 싸워오다보니 내부 교리 및 종교적인 철학 또한 고도로 체계화되어 신학적인 면에서도 수준이 높다. 섬기는 신이나 분파마다 다르지만 신에 대한 헌신이나 사랑을 강조하는 면도 그리스도교와 어느 정도 비슷한 면이 있어 한때 서양 학자들의 주목을 모은 바 있다.[36] 또한 라마크리슈나 미션이나 하레 크리슈나 운동 같이 외부 지역으로의 선교도 활발히 시도되어 근대에 들어와서 약간이긴 하지만 시대에 맞춰 변화하려는 모습도 보인다. 단순히 수호신 개념으로 믿는 것은 당연히 아니며 박티 운동 등 종교 교리에 바탕을 둔 개혁&변화 운동이 중근세에 활발하게 일어나 인도 전역을 휩쓸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한국인 신자를 사실상 찾을 수 없다. 이건 어떤 의미로는 당연한 결과인데, 인도의 힌두교에서는 이교도가 힌두교 신자가 되면 카스트 제도의 최하위인 수드라로 등급이 내려간다. 가령 인도로부터 늦게 힌두교를 받아들인 인도네시아의 발리섬의 경우, 신도 절대 다수가 수드라라고 한다. 종교연구가인 김나미 교수가 한국 내 소수 종교 신도[37] 관련 책자를 쓸 당시에 한국에서 사는 힌두교인을 찾아간 적이 있지만, 한국에 사는 힌두교인들은 인도계 이민자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다만 이것도 케바케라서 네팔의 카스(खस)족이 힌두교로 개종하는 대가로 크샤트리아 정도로 취급되는 '체트리'라는 새 카스트를 얻었기도 했고, 마니푸르에서 힌두교를 받아들였을때 온 백성들에게 브라만과 크샤트리아에 해당되는 계급을 주는 등 원활한 포교를 위해 개종자들에게 좋은 카스트를 주는 경우도 있다. 물론 힌두교를 거부하면 딱 불가촉천민 취급. 한편, 라마크리슈나 미션이나 하레크리슈나 운동과 같이 처음부터 서구권 포교에 초점을 맞춘 힌두 종파들은 카스트에 의한 신분이나 민족, 인종적 차별을 배격하고 평등주의에 입각하여 선교 활동을 벌이고 있기도 하다. 이런 종파는 카스트도 인정하지 않으며, 세속주의 성향을 지향한다. 서구에서는 불교와 더불어 종교적이라기보다 학문적 내지 문화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 역시 활발한 편인데 대표적인 미국의 베단타 학자로는 데이빗 프롤리 등을 들 수 있다.
한때 연예인 강은비가 인도를 다녀와서 힌두교로 개종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이는 와전된 것이고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대한민국으로 일하러 오는 인도인들이나 한국에 귀화한 인도인들이 신자이긴 한데, 이 경우를 한국계 신자로 보아야 할지는 좀 모호하다. 이태원동에 있는 외국식품 슈퍼마켓에서는 힌두교도들이 신상 앞에서 기도할 때 사용하는 향과 향로, 간혹 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나 조각을 팔 때도 있는데, 이를 보아선 한국에서 힌두교를 믿는 사람도 그다지 적지는 않은지도 모른다. 물론 한국에 일하러 온 인도인 신자가 많다는 이야기다. 인도인 슈퍼마켓 주인에 의하면 1주일에 향을 적어도 20통 정도는 판다고 한다.
하지만 이거 말고도 힌두교는 다신교 사상이 강해서 그리스도교나 이슬람 같은 유일신 종교와 역사적으로 원수지간이라서, 이전부터 계속 그래왔다. 이슬람을 국교로 삼은 무굴 제국을 비롯하여 이슬람 세력이 침입하며 힌두교 사원을 우상숭배라며 파괴하고 힌두교도에 대한 불관용이 상당했으며 그리스도교는 과거 영국의 지배를 비롯하여 고아 주 지배를 받을 당시 포르투갈이 힌두교인에게 강제로 가톨릭 개종을 요구하던 역사(개종하지 않으면 모든 경제행위를 금지했다)가 있다. 그 외에 이슬람교에서는 힌두교의 성지인 아요디아[38]에 모스크를 세우고[39] 크리슈나 신이 태어났다는 힌두교의 성지 바로 그 자리에 이슬람 모스크를 세우는 등, 힌두교도를 자극하고 모욕적인 행위를 많이 했기 때문에 감정이 더더욱 악화되었다. 유일신 계통에게 장기간 침략과 핍박을 당한 역사적 과거로 인하여 오늘날 힌두교도는 이러한 종교적 보복행위를 당연한 것으로 치는 게 많다. 게다가 힌두 극우들이 90년대 이후 이들이 포함된 국민당이 큰 힘을 얻으면서 정치적으로 성장해 인도 대기업 및 정치인, 군인 같은 기득권 지원 및 동참으로 세가 엄청나다는 것도 문제. 인도는 일단 민주주의체제이고 힌두교 극우들도 일단은 민주정치 하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인도이기 때문에 힌두교 극우들의 주장이나 만행에 대해서 지방 의회 등지나 언론에서 거세게 반발하는 의견이 나오기도 하고, 국민회의당 같은 힌두교 극단주의에 반대하는 민주적 정당들이 크게 세력을 잡고 있기도 하긴 하다. 특히 인도는 공식적인 국교가 없으며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세속국가라 이 힌두교 광신자들의 주장을 더욱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렇지만 많은 정치인들이 입으로만 힌두교 극우에 열렬히 반대할 뿐, 뒤로는 힌두교 극단주의자들의 표와 기득권과의 결탁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쉽사리 나아지지 않는다.
여러 지역에서 그리스도교나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이 서서히 늘자, 몇몇 주에서는 힌두 극단주의자들이 힌두교 외 종교로 개종을 어렵게 하는 일종의 비 힌두교 차별법을 추진해서 빈축을 사기도 했다. 2014년에도 힌두 극단주의자들의 주도로 무슬림과 그리스도인 수백명을 속이거나 회유, 강압으로 강제 개종시키는 일이 벌어져 인도 그리스도교, 이슬람계의 고소 크리와 세속주의 세력도 극단주의자들을 단속하고 처벌하자는 시위를 불러오기도 했다.[40] 이에 힌두 극단주의 세력은 적반하장으로 '이교도'들을 힌두교로 개종시켜야 한다고 엄포놓는다.
하지만 인도 정부는 우린 관계없다는 변명에만 급급하고 신경쓸 여유가 없다며 제대로 된 단속을 하지 않는 무관심한 모습을 보였다. 한편으로 힌두 우파 측에서는 오히려 다수 종교인 힌두교가 세속주의 국가 체제에서 역차별을 받고 있으며, 타종교에 의해 행해지는 강제 개종은 언론 측이 침묵하고 있다며 반발하는 경우가 많아 논란의 폭이 좀체 좁혀지지 않는다.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분리의 상흔이 남아있어서 그런지 힌두교가 미약해지면 또다른 분리 독립을 유발할 것이라며 우려하는 게 이들의 주요 논지. 이와 별개로 해외의 힌두교는 인도인들이 소수이다보니 인도처럼 타종교에 대한 행패는 하지도 못한다.
인도 내에서도 힌두교와 앙숙인 이슬람과 그리스도교(특히 북동부)와의 종교갈등, 폭동사태는 거의 내전급이고, 힌두교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유일신앙이 들어간 시크교와도 사이가 나쁘다. 그나마 바하이교[41]나 불교나 자이나교, 같은 유일신 종교가 아닌 종교는 덜한 편이긴 해도, 불가촉천민 출신으로 유명한 인도 정치가 암베드카르(1883~1956)가 불교로 귀의[42]한 걸 두고 비난한 힌두교 극우도 있었고, 불가촉천민이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나 바하이교로 개종한 걸 반대하던 힌두교 극우들은 몇몇 주에선 개종금지법을 만들었다가 불가촉천민들이 무력으로 막겠다고 나서자 없던 일로 하던 것처럼, 이들과도 사이가 꼭 좋은 것만도 아니다. 힌두교인과 무슬림과의 싸움은 슬럼독 밀리어네어 영화판 초반에서도 묘사되어 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를 비롯 많은 종교에서 그러는 것처럼 월경하는 여성을 부정하다고 취급하는 관습이 남아있다.[43] 실제로 이런 악습으로 인해 15세 소녀가 목숨을 잃는데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다신교지만 묘하게 유일신교적이다. 종교학자 막스 뮐러가 힌두교의 종교를 단일신교(henotheism/單一神敎)라고 명명한 바 있다. 일반적으로 우파니샤드 전후 시기를 나누어 힌두교의 단일신교성을 설명한다. 베다 전통 시기 당시의 힌두교인들은 인드라 신에 대한 숭배에 더욱 집중했다. 고전 힌두교 시대에는 우파니샤드에서 우주의 초월적 자아(brahman, 梵)개념이 가장 지고한 신적 속성을 가졌다고 설명하며, 고전 이후에는 우주의 초월적 자아의 세가지 특징적 구성을 파괴, 창조, 유지로 보는 경우가 생겨났고, 쌍키야 철학 시기에 와서는 일개 신들이 우주의 초월적 자아를 조금이나마 쉽게 알 수 있는 통로라고 정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는 일신교적 형태를 취한다. (쌍키야 철학에 기본하여 부가적으로 설명하면, 가장 그 본질에 근접하게 우주의 초월적 자아를 칭하게 된다면 그를 니르구나 브라흐마라고 칭하고, 그 자아가 가진 좋은 측면을 칭하는 말은 싸구나 브라흐마이며, 그 좋은 측면 가운데 으뜸이 인간적 성질이요 그것이 비슈누나 시바와 같은 신으로 드러났을 때 이슈바라(주님이라는 뜻)라고 칭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힌두교는 아브라함교와는 달리 그리스도교 이슬람 유대교적인 유일신이라기보다는 범신론, 이신론적 유일신교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 각종 오해와 통념들
이 문단은
- 힌두교도들은 소를 숭배한다.
- 신성하다고 여기는 것이지 소를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하지는 않는다. 또한 소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소(Bos taurus)와 다른 종인 인도혹소(Bos indicus)다.
- 소도 카스트가 있어서 높은 카스트인 흰소, 암소, 다리 다섯 달린 소는 대접받지만 낮은 카스트인 숫소는 도축되기도 한다. 다만 낮은 카스트라도 무자비하게 도축하진 않으며, 보통 숫소가 상점에서 채소를 훔쳐먹다 걸려도 그냥 몽둥이로 얻어맞으며 쫓겨나는 걸로 끝난다.
- 비슷한 편견으로 '힌두교 신자들은 소를 신성시해서 절대로 잡아먹지 않는다'는 것이 있는데,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일단 위에서 말했듯이 낮은 카스트의 소는 도축되어 잡아먹히기도 하며, 인도는 브라질에 이은 세계 2위의 쇠고기 수출국이다. 그리고 섬이라서 식량 수급이 힘든 인도네시아 발리섬이나, 인도의 이웃나라이자 해안이 없는 내륙 산간 국가인 네팔의 경우는 외려 ' 소가 신성한 동물이기에 깨끗하게 도축되는 경우에 한해 기쁜 마음으로 먹어야 된다'는 이유를 내세워 쇠고기를 즐겨먹을 정도이다. 그리고 서구권의 힌두교 신자들도 성향에 따라 쇠고기를 딱히 거부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흔히 힌두교 근본주의자들이 소를 먹는다는 이유로 하위 카스트인 사람들이나 타 종교 신자들을 공격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냥 하층민에 대한 단순한 차별에 가깝다.
- 힌두교도들은 채식주의자들이다.
- 30~35%만이 채식주의자다. 단 여기서 말하는 채식주의자는 락토/락토오보 채식주의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고기를 먹는 힌두교도들 중에서도 쇠고기나 돼지고기 등 특정 고기는 먹지 않는 경우는 매우 흔하다. 힌두교 채식주의자들 덕에 인도는 인구 대비 채식주의자의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가이지만, 지역마다 차이가 커서 서벵골은 인구의 1.3%만 채식을 한다.
- 힌두교에는 3억 3,000만 위의 신이 있다.
- 이는 과장된 수치이다. 단순히 아주 많은 신을 의미한다고 봐야 한다.
- 힌두교는 카스트를 교리적으로 긍정한다.
- 제도적으로 폐지되었다고는 하지만 일단 북부지역이나 농촌 산간 지역에서 카스트를 고수하는 경우가 많고 카스트가 힌두교에서는 나름대로 중요한 근간중 하나이긴 하다. 허나 이것도 지역별로 차이가 있어서 다 같지는 않고, 서구권에 널리 퍼진 힌두교 종파인 하레 크리슈나는 카스트를 아예 인정하지 않으며, 인도의 힌두교 신학자들 중에서도 카스트를 부정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
- 18세기경에 출범한 힌두교 정권 마라타 동맹은 카스트에 따른 차별을 엄금하는 세속주의 정권이었다. 마라타 동맹의 발원지인 인도의 마하라슈트라 주[44]는 그 영향으로 인해 지금도 세속주의 경향이 강하다.
- 사회적, 문화적으로는 숱하게 차별받지만, 경제적으로는 북인도에 비해 압도적으로 부유한 남인도는 힌두교의 교세가 절대적이지만, 정작 고위 카스트라고 해봐야 바이샤가 대부분이고, 그보다 높은 카스트들은 소수인데다 가난하기까지 하며[45], 부유층을 포함한 절대다수의 인구가 수드라나 불가촉천민인 터라, 외려 카스트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그래서 이 동네는 북인도와는 달리, 자기가 노력만 하면 살아생전에도 카스트가 올라갈 수 있다고 믿었고[46], 그래서 조선 시대에 부유한 천민이나 노비들이 공명첩을 사서 양반이 되었던 것처럼, 하위 카스트들이 고위 카스트의 신분을 돈으로 사서 신분을 세탁하기도 했다. 당연히, 힌두교 근본주의가 사회 전반에 뿌리깊게 박혀있던 북인도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 이마에 점을 찍은 힌두 여자는 결혼한 여자이다.
- 전부는 아니다. 남자도 찍기도 한다. 정확하게 말하지면 빈디는 그냥 장신구의 일종으로, 여자라면 메이크업 포인트로 하기도 하며, 남자도 종종 한다. 결혼한 여자만 하는 것은 신두르 라고 부르며, 이마에 점을 찍거나 스티커를 붙인 게 아니라 이마 가르마 쪽을 붉게 칠하는 것이다. 원래는 남편이 칠해주는 것이다.
8. 한국의 힌두교
8.1. 힌두교 사원
서울 용산구 용산동 2가 해방촌에 크리슈나를 모시는 힌두교 사원, 즉 스리 라다 샤마순더르 사원이 있었다. 과거 위치. 용산동 2가 고바우 슈퍼 근처에 위치했는데, 그 고바우 슈퍼는 현재 GS 편의점으로 바뀌었다. 그 힌두교 사원은, 경의중앙선 한남역 근처에 이사간 후 하레 크리슈나 사원(Hare Krishna Temple)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주소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557-47[47]이고, 사원은 '청운독서실' 건물의 1층에 있다. 하지만 간판이 없기 때문에, 도착하더라도 어리둥절할 수는 있다.
여기 다니는 외국인들이 인사동 크라운 베이커리 앞에서 얼굴에 분칠을 하고 주황색 옷을 입고 바닥에 앉아 명상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시줏돈도 받는다. 사실 저 종파는 미국에서 시작된 '크리슈나 의식국제협회(ISKCON)'의 한국 지부로 '하레 크리슈나'라는 이름으로 서구권에 널리 알려져 있는 종파인데, 사실상 서구 힌두교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6~70년대에 미국과 영국 등 서유럽으로 급속히 확산되어 주목을 받다가, 소련의 붕괴 이후에는 오히려 동유럽에서 그 교세를 넓히고 있다고 하며, 그 창시자인 스와미 프라부파다의 저서들은 80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4억 5천만 권 이상이 유포되었다고 한다. 한국인 신자도 5~10명 정도 있다는 듯.
포천시에도 스리 스리 라다 크리시나 만디르 참고영상1 2가 있다. 이쪽도 ISKON 계열의 힌두교 사원으로 크리슈나를 모시고 있다.
9. 둘러보기
[1]
그
옴 마니 반메 훔이나
비틀즈의
Across the Universe 가사 속 "Jai Guru Deva, Om"의 그 옴이 맞다.
[2]
'흰두교'가 아니다.
구글에 이렇게 검색하면 약 15,000건의 검색결과가 조회되는 것으로 보아 의외로 틀리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이 표기는 1932년 조선일보에 연재된 인도유람기에서도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과도교정이거나 외국어 'Hi-'의
구개음화를 피하기 위해 '희-'로 표기해온 옛 언어습관의 흔적일 수 있다.
[3]
출처
[4]
인도와 네팔 한정으로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나머지 나라에서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수준. 그나마 해외에 있는 힌두교 신자들도 다른 세계 종교처럼 현지인들이 믿는 게 아니라, 해외에 나가 있는 인도인들(indian diaspora)이 믿는 것이다. 그래서
중화권에선 아예 인도교(印度教)라고도 부른다. 물론 인도가 유럽 국가 전체를 합한 것 이상으로 크고 복잡한 구성을 가진 다민족 국가라는 점은 감안해야 된다.
[5]
방글라데시는 수니파 무슬림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힌두교인 대다수는 인도-파키스탄 분리과정에서 대부분 인도로 떠났지만 남아있는 힌두교인이 수치상으로는 9%에서 12%로 추산되니 인구수로 따지면 1500~2천만 명에 달하고, 스리랑카는 타밀족이 힌두교를 믿고 싱할라족은 불교를 믿는다.
[6]
물론 캄보디아,미얀마,태국에도 소수의 힌두교도들이 있지만 이 사람들도 조상대에 가면 인도인이 있음으로 완전히 원주민이라 보기에는 애매하다.
[7]
힌두교는 좋게 말하면 개방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모든 것을 흡수해 버리는 패권적인 경향 탓에 다른 종교에 대한 '방어력'은 강한데 공격력은 약하다. 또한 하나의 체계적인 종교 이전에 고대부터 이어져온 인도의 문화 자체이며, 근대로 올수록 민족종교화된 면이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와 비슷한 경우이다.
[8]
모리셔스의 경우 인구의 49%가 힌두교도로, 모리셔스에서 가장 신도 수가 많은 종교이다.
[9]
정확히 말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절대다수가 수드라라
카스트에 따른 차별 등은 없다고 한다.
[10]
석가모니가 활동할 당시 힌두교(당시는 브라만교)에 반발하여 나온 수행집단을 일컫는다. 본래 힌두교(브라만교)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구도행위는 '브라만' 출신만 얻을 수 있는 특권이었다. 이에 반발하여 계급에 큰 관계없이 누구나 나와 구도를 할 수 있음을 주창하던 이들이 바로 사마나이다. 물론 사마나 모두가 카스트에 반발했던 것은 아니고, 그 외의 철학적 견해의 다름으로 뛰쳐나온 사마나들도 있었다.
[11]
예를 들어 같은 뿌리(각기 브라만교와 유대교)에서 기원했다는 점, 그에 따라 서로간에 유사한 면모가 여럿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교리상에는 양립불가능한 중대한 차이점이 있다는 점 등이 있다.
[12]
현대의 힌두교는 범아일여를 필두로 하여 나와 우주를 일치시키려하는 신비주의적 성향이 강한데 비해, 불교는 예나 지금이나 철저히 '괴로움의 소멸'이 목적이다. 불교에 신비주의적 성향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신비주의적인 것조차 괴로움을 없애기 위한 '수단'으로 쓰일 뿐 결코 '목적'이 되는 경우가 없단 소리다.
[13]
불교수행법 중 아나빠나사띠(Anapanasati) 같은 수행법은 최초 소개자가 부처 그 자신이며 힌두교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자적인 수행법이다. 참고로 아나빠나사띠는 외부인이 보기에 흔히 '참선한다'라고 부르는 수행인데, 가부좌 등의 정적인 자세에서 자기자신을 인식하는 과정을 말한다. 본인의 호흡이나 심박 등 몸 안팎의 물리적 운동은 물론, 떠오르는 생각과 망상 기억 등도 살핀다. 궁극적으로 인식한 나를 놓아두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4]
파키스탄의
신드 주의 이름도 같은 어원이다.
[15]
이러한 관계를 어원이 같다는 뜻에서 '
동원어(cognate)'라고 부른다.
[16]
북유럽의 주신은 티르->토르->오딘 순으로 바뀌어 결과적으로 티르와 토르는 오딘의 아들이라는 식으로 격하되었다.
[17]
이러한 측면에서 브라만교-힌두교의 관계는 유대교-그리스도교의 관계와는 다르다. 유대교는 여전히 존립하기 때문이다. 굳이 아브라함 종교의 비유를 들자면, 기원후1세기 유대교의 세 교파 중 사두가이파가 브라만교의 지위를 가질 것이고, 바리사이파가 힌두교의 지위를 가질 것이다. 바리사이파가 갈려서 바울로 등 기독교로 이행하는 파와 유대교에 잔류하여 랍비 중심으로 재정비하는 파로 갈리는 와중 사두가이파 유대교가 바리사이파 중심의 랍비 유대교로 진화하였기 때문이다.
[18]
이는 Proto-IndoEuropean 이라고 불리는데, 실제로 존재하는 형태가 발견된 것이 아니고 재구한 언어에 해당한다. 오늘날 사용되는 여러 언어들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구성한
인도유럽어족을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이 언어는 오늘날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언어들의 조상격이 된다.
[19]
원(原) 시바 신이라고 부른다. 인더스 문명의 유물 중 시바 신을 묘사한 듯한 부조가 있다.
[20]
즉
굽타 왕조 이전 힌두교가 성립되기 전의 인도 국가들은
브라만교와
불교,
자이나교 남인도의 경우 그들만의 민족 신앙
드라비다교를 믿었다.
[21]
2세기의 브라만교부터 힌두교로 부르기도 하지만 협의의 힌두교는 샹카라 시대에 확립되었다.
[22]
반면 무슬림들이 정복한
조로아스터교
사산 왕조 페르시아는 신분 계급이 사제-군인-평민-노예 수준으로 단순한 편이었고, 사산 왕조 황실을 무너트리자 구심점을 잃고 금방 무너져내렸다.
[23]
원칙적으로는 이렇지만, 방대한 푸라나 문헌들을 이런 식으로 요약하는 것은 과도하게 단순화한 것이기는 하다. 푸라나는 인도 전역에 힌두교가 전파되며 서서히 지역의 관습 및 신앙을 베다적으로 재해석하는 역할도 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힌두적 역사 서술의 형식으로도 발달해 나갔다.
[24]
이 절의 내용은 다음 문헌의 인용에 기반하였다: 꿈꿈 로이, 꾸날 짜끄라바르띠, 따니까 사르까르, 힌두 바로보기 (서울: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2019), 83-94.
[25]
비슈누만이 베다에서 인드라의 동료로 언급되지만, 베다 시대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신이었다.
[26]
가네샤 역시 베다 문헌에는 없는 신이었다.
[27]
인용한 책에서는 푸라나 문헌에서 아이의 모습으로 묘사되는
크리슈나가 유독 인기가 많은 이유가 이렇게 신이 숭배자가 돌봐줘야 하는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 아닐지 의문을 제기한다.
[28]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소와는 다른 종이다.
[29]
대표적으로 미국의 유명한 유대계 출신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도 종교적으로 유대교인이였으면서도 정작 유대교 집회를 가지 않을 때 한해서 게나 바닷가재, 킹크랩 등 유대교에서 금기하는 갑각류 요리들을 즐겨 먹었을 정도였다.
[30]
다만 현대 들어선 일반적으로 보수적인 신도들만 이런다.
[31]
가장 중심이 되어 활약하는 RSS와 VHP는 현재
인도의 제1야당인 인도인민당의 하부 조직이다!
[32]
흔히 힌두교 신의 숫자가 3억 3천이나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뜨라야스뜨린사띠꼬띠(trayastrinsatikoti)라는 어휘에서 '꼬띠'를 잘못 번역해서 생긴 현상이다. '꼬띠'는 '뛰어남'과 '천만'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는데, '신'이라는 전자의 뜻으로 쓰였지만 후자로 이해해서 33신이 3억 3천의 신이 되어버린 것이다.베다에 나오는 33신은 아디띠야 열둘, 루드라 열하나, 바수 여덟, 아슈윈 둘.
[33]
철학적 창조신이 관념적으로만 존재하고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가지지 않는 것은 세계 종교에서 흔한 일이다. 종교학자 엘리아데에 따라 학자들은 모든 종교의 구성에서 창조나 소위 '시작'이 언급될 때에는, 더 이상 묻지 않는 primordial background를 바탕으로 한다고 본다. 일례로 그리스신화에서도 0세대 신들인
프로토게노이는 추상적 관념으로 취급받고 신화 그자체에서 중요도를 갖지 않는다. 아브라함계 종교에서도 여호와/야훼는 창조주 없이 이미 창조된 질료인 '물' 혹은 '혼돈' 위를 운행하다가 천지를 창조한다. 도교에서는 '도'道를 더 이상 추궁하지 않는, 그냥 받아들이는 근본개념으로 본다.
[34]
사실 지금 원리주의적인 이슬람교가 득세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남부나 파키스탄 지역도 이슬람 도래 전에는 힌두교가 퍼져있었다. 즉, 이 지역 주민들의 조상들은 힌두교에서 개종했다고 볼 수 있다.
[35]
그래서 몇몇 학자들은 Hinduism을 복수명사 Hinduisms로 쓰기도 한다.
[36]
일례로 존 니콜 파커라는 영국 선교사는 북인도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람차리트마나스'를 접하고 많은 점이 그리스도교와 아주 비슷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부도덕한 묘사가 없다며 극찬하기까지 했다.
[37]
바하이,
유대교,
정교회 같은 신자들을 손수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고 신도 수를 대략 쓴 바 있다.
[38]
라마야나에 나오는 라마왕의 도시로 전해진다.
[39]
이 모스크는 1992년에 힌두교인의 테러로 파괴되었다.
[40]
애초부터 인도는 철저한 세속 국가이기에 광신이 금지다. 물론 다수파인 힌두교만 일방적인 가해자는 아니라서, 한편으로 지방사회에서는 이슬람교나 그리스도교 역시 '러브 지하드'와 같이 회유, 강압 등을 통해 힌두교도들을 개종시키는 일 역시 빈번한 듯하다.
[41]
유일신 종교인데도 힌두교와 사이가 좋다.
[42]
인도인 불교 신자들 사이에서 암베드카르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인도인 불교도들은 암베드카르의 생일과 사망일도 중요한 종교적 축제일로 기념하며, 불상 곁에 암베드카르의 사진을 두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그래서 "부처님을 믿는지 암베드카르를 믿는지 모르겠다"라는 비판이 나올 정도. 암베드카르 자신은
미얀마 승려에게서 계를 받았지만, 이후로는 자기가 직접 다른 개종자들에게 계를 주어서 "재가자(승려가 아닌 평신도)가 다른 사람에게 계를 줌이 합당한가?"라는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암베드카르를 보고 불교로 개종한 인도인들은 5계뿐만이 아니라, 힌두교 신들을 숭배하지 않고, 힌두교 의례에 참석하지 않겠으며,
석가모니가
비슈누의 화신이라는 말을 믿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들이기도 한다. 암베드카르가 저술한 불교 교리서가 인도에서 불교를 가르칠 때 쓰이는 사실상 유일한 개종자용 입문서라고 한다. 인도 불교계에서 암베드카르의 영향력은 이처럼 절대적이지만, 암베드카르가 반힌두, 평등에 집착한 나머지 불교의 정통 가르침과 어긋나는 주장을 한 것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또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가난한 불가촉천민 계층에서는 힌두교와 불교를 합쳐서 믿는 경우도 많아 불교계로서도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43]
힌두교 용어로는 '차우파디'라고 한다.
[44]
인도 최대의 대도시인
뭄바이가 여기에 속해있다.
[45]
20세기 최고의 천재
수학자들 중의 한 명으로, 남인도의
타밀나두 주 태생인
스리니바사 라마누잔은
카스트의 최정점인
브라만 출신이었지만, 어머니가 직물거래상을 하면서 간신히 입에 풀칠하는 수준일 정도로 무척 가난했고, 이 때문에 본인도 은사인
G. H. 하디를 만나기 전까진 정규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
[46]
원래는 날 때부터 정해진 카스트가 죽을 때까지 유지된다는게 원칙이다.
[47]
도로명: 독서당로 3길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