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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의 일본원정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의 대외 전쟁·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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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의 일본원정 제1차 원정 파일:미나모토씨 가몬.svg 일본 (가마쿠라 막부)
제2차 원정 파일:미나모토씨 가몬.svg 일본 (가마쿠라 막부)
카다안의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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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요동정벌 ( 위화도 회군) 파일:고려 의장기.svg 공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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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몽골 제국 및 원나라 문장 white.svg 몽골 제국 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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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의 2차 일본원정
,1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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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의 일본원정
元國之 日本遠征
원-일본 전쟁 | 元-日本 戰爭
<colbgcolor=#fedc89,#444444><colcolor=#670000,#FFCECE> 시기 1차 원정: 1274년 (원종 15년) 10월 5일 ~ 10월 20일[1]
2차 원정: 1281년 (충렬왕 7년) 5월 21일 ~ 7월 7일[2]
장소 쓰시마 섬, 이키 섬, 규슈 섬
원인 쿠빌라이 칸의 일본 정복 야욕, 고려의 원정 동원
교전국 <rowcolor=black> 일본
(수세)
고려-원 연합
(공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미나모토씨 가몬.svg 호죠 토키무네
파일:미나모토씨 가몬.svg 쇼니 츠네스케
파일:미나모토씨 가몬.svg 쇼니 카게스케
파일:미나모토씨 가몬.svg 타이라노 카게타카
파일:미나모토씨 가몬.svg 쇼니 스케토키 †
파일:미나모토씨 가몬.svg 오오토모 요리야스
파일:미나모토씨 가몬.svg 우츠노미야 사다츠나
파일:미나모토씨 가몬.svg 시마즈 나가히사
파일:미나모토씨 가몬.svg 키쿠치 타케후사
파일:미나모토씨 가몬.svg 타케자키 스에나가
파일:미나모토씨 가몬.svg 미츠이 스케나가
파일:미나모토씨 가몬.svg 소 스케쿠니 †
고려 지휘관

파일:고려 의장기.svg 김방경 (중군)
파일:고려 의장기.svg 박지량 (1익 지병마사)
파일:고려 의장기.svg 김흔 (1익 지병마사)
파일:고려 의장기.svg 임개 (1익 부사)
파일:고려 의장기.svg 김신 (1익 좌군사)[3]
파일:고려 의장기.svg 위득유 (2익 지병마사)
파일:고려 의장기.svg 손세정 (2익 부사)
파일:고려 의장기.svg 김문비 (2익 우군사)
파일:고려 의장기.svg 나유 (3익 지병마사)
파일:고려 의장기.svg 박보 (3익 기병마사)
파일:고려 의장기.svg 반부 (3익 부사)
파일:고려 의장기.svg 노진의 (중랑장)
파일:고려 의장기.svg 박구 (수군)
파일:고려 의장기.svg 김주정 (수군)
원 지휘관

파일:몽골 제국 국기.svg 훈둔 (도원수·봉주경략사)[4][5]
파일:몽골 제국 국기.svg 홍다구 (우부원수)
파일:몽골 제국 국기.svg 유복형 (좌부원수)
파일:몽골 제국 국기.svg 범문호 (양절대도독)[6]
파일:몽골 제국 국기.svg 쿠차르 (忽察)
파일:몽골 제국 국기.svg 사모카 (三沒合)
파일:몽골 제국 국기.svg 여덕표 (厲德彪)
파일:몽골 제국 국기.svg 왕국좌 (王國佐)
파일:몽골 제국 국기.svg 유복형 (劉復亨)
1차 병력 일본군: 700명 연합군: 39,700명
- 고려군: 14,700명
- 원군: 25,000명

군함: 900여척
2차 병력 일본군: 40,000명 연합군: 157,000명
- 고려군: 27,000명
- 원군: 30,000명
- 강남군: 100,000명

군함: 4,000여 척
피해 피해 규모 불명
1차 원정

사상자: 13,500여 명
군함: 200척
2차 원정

사상자: 91,592명 ↑
- 고려군: 7,592여 명
- 원군: 84,000명~141,290여 명

군함: 3,500여 척[7]
결과 고려-원 연합의 패배
영향 원나라의 대일본 영향력 제한
- 정동행성의 일시적 폐지
- 가마쿠라 막부의 붕괴

1. 개요2. 명칭3. 몽고습래회사(蒙古襲来絵詞)4. 제1차 원정
4.1. 발단4.2. 몽골의 원정 준비4.3. 쓰시마 섬 전투4.4. 이키 섬 전투4.5. 하카타 만 상륙 작전4.6. 사와라 전투 & 하코자키 전투4.7. 신의 바람(神風)
5. 제2차 원정
5.1. 남송 멸망과 가마쿠라 막부의 도발5.2. 원나라와 고려의 원정 준비5.3. 쓰시마 섬 전투5.4. 제1차 이키 섬 전투5.5. 시카노 섬 전투5.6. 제2차 이키 섬 전투5.7. 하카타 만 공략5.8. 또다시 신의 바람이 불다
6. 두 세력의 무력 차이7. 원정의 여파
7.1. 원나라7.2. 일본7.3. 고려
8. 원나라의 일본 정벌 성공 가능성에 대하여
8.1. 대체역사: 만약에 일본 원정이 성공했다면?
9. 현대 일본에서 바라보는 시각
9.1. 음모론
10. 번외: 원나라의 아이누 침공11. 대중문화에서12.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1274년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원나라 가마쿠라 막부를 침공하면서 발생한 전쟁. 1259년 여몽전쟁에서 패배하고 강화한 후 원나라의 부마국(駙馬國)이 된 고려 역시 연합군으로서 동원되었으나, 원나라군의 전투 의지 부족[8] 태풍 등 자연재해의 발생과 막부의 반격 등으로 상당수의 병력을 잃었으며,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종결되었다.

2. 명칭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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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bgcolor=#FFFFFF,#191919> 한국어 <colbgcolor=#fff,#191919> 원나라의 일본원정
<colbgcolor=#fedc89,#444444> 중국어 [ruby(元日战争,ruby=yuánrìzhànzhēng)] / [ruby(元日戰爭,ruby=ㄩㄢˊ ㄖˋ ㄓㄢˋ ㄓㄥ)]
일본어 [ruby(元寇,ruby=げんこう)]
[ruby(文永,ruby=ぶんえい)]の[ruby(役,ruby=えき)]
[ruby(弘安,ruby=こうあん)]の[ruby(役,ruby=えき)]
[ruby(蒙古襲来,ruby=もうこしゅうらい)]
몽골어 ᠬᠤᠪᠢᠯᠠᠢ ᠬᠠᠭᠠᠨ ᠶᠠᠫᠣᠨ ᠢ ᠳᠠᠶᠢᠯᠠᠭᠰᠠᠨ ᠨᠢ ( 몽골 문자)
Хубилай хаан Японыг дайлсан нь ( 키릴 문자) }}}}}}}}}

당시 원나라에서는 동(東)쪽을 정(征)벌한다 하여 정동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고려에 설치된 정동행성 역시 정동을 준비하기 위한 행성(行省, 파견 기구)라는 의미다. 일반적으로 1274년의 1차 원정과 1281년 2차 원정을 합쳐서 이야기하며, 한국에서는 원나라( 몽골 제국)의 일본 원정 혹은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이라고 부른다. 중국에서는 원군침일전쟁(元軍侵日戰爭), 즉 원나라의 일본 침략 전쟁 혹은 원일전쟁, 몽일전쟁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당시의 연호를 따서 1274년의 원정을 분에이의 역(文永の役, 문영의 역), 1281년의 원정은 코안의 역(弘安の役, 홍안의 역)이라 부르며 이때 쳐들어온 여몽연합군을 원구(元寇), 몽구(蒙寇)라고 부른다.

몽고 내지 몽골이라고는 하지만 이 때면 쿠빌라이 칸이 이미 베이징에 도읍을 잡고 나라 이름을 원(元), 연호를 중통(中統)으로 하고 중국 천자를 자처했을 때이며 몽골인들은 적은 숫자로 인해 잡병이 아닌 귀족뿐이어서 전원 고급 장수였고 하급 장수는 대개 북중국 한족들이고 잡병은 거란 여진족 그리고 머릿수 많은 금나라 출신 한족들이었다. 고려인은 주로 외인부대였다. 당장 고려 침공 때도 잡병 대부분이 거란/여진인과 한족이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역사 용어에 비추어 볼 때 '원나라의 일본 원정'이나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이라는 단어는 선전과 침공 사실을 대칭적으로 나타내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9] 이는 고려군이 강제적으로 동원되었기는 했지만 침략의 피해자가 아니라 거꾸로 침략군에 부역했다는 사실을 한국사 학습자에게 전달하기에는 심리적 장벽이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 사학계만 이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가 자신들이 벌인 전쟁은 '원정', '정복 사업', '영토 확장'으로, 자신들이 당한 전쟁은 '침략', '침공', '○○구(寇; 도적)', '○○의 난(亂)' 등으로 적의를 담아 부른다.
파일:km_014_106_01.gif
▲여몽연합군의 1차 원정로[10]
파일:km_014_106_02.gif
▲여몽연합군의 2차 원정로
파일:전근대 한국-일본 간 항로.jpg

영어로는 "Mongol invasions of Japan(몽골의 일본 침공)"이라고 부른다. 이 당시 고려 일본을 공략하기 위한 최일선 교두보였으며, 원나라를 위해 준비해야 했던 막대한 함선 등에서 전쟁의 한 축을 또한 담당했다. 또 1차 원정군과 2차 동로군은 합포( 마산)에서 출발했다. 그러므로 한국 입장에서는 여몽연합군 혹은 여원연합군이란 표현을 쓸 수 있다.[11] 다만, 숫자와 전력상으로 보았을 때 주체는 원나라가 맞다. 1차 원정에서 원나라군은 2만 5천, 고려군은 1만 5천[12]이었고, 2차 원정에서 강남군[13]은 10만 명[14], 나머지 4만의 동로군은 원나라군 1만[15], 고려군 1만, 고려의 수부 1만 7천[16]이 동원되었다. 한편 1차 원정에서 900척의 전선을 만드는데 4개월 동안 고려인 3만 5천 명이 동원되었다. 사실 이는 고려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달가운 전쟁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몽골과의 대규모 전쟁으로 전 국토가 피폐해져 있는 상태에서 또 다른 전쟁에 강제로 동원되었기 때문이며, 농경지나 도시의 복구에 쓰여야 했을 인적, 물적 자원을 전쟁용으로 돌리게 되면서 고려 말기는 더욱 더 피폐해지게 된다.

이 전쟁에서 중요한 변수가 된 태풍은 후에 카미카제라는 말이 생긴 원인이 되었다.[17]

3. 몽고습래회사(蒙古襲来絵詞)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C5%8Dko_Sh%C5%ABrai_Ekotoba.jpg
▲<몽고습래회사>의 일부. 선봉으로 나와 활을 쏘며 창을 던지는 세 명의 병사가 고려군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른쪽에서 말을 타고 있는 무장은 히고(지금의 구마모토현)의 고케닌으로서 1, 2차 몽고습래에 모두 참전했던 타케자키 스에나가.

전체 그림을 보면 화살 맞고 도망가는 병사가 보인다. 이 병사들의 복식이 원나라 병사에 가깝다는 이유로 선두에서 싸우는 3명의 병사들을 고려군으로 보는 설이 있다. 도망가는 병사들이 쓰고 있는 투구를 보면 투구 옆의 드림이 목의 앞부분까지 모두 감싸는 형태로 여며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명 몽골식 갑옷의 형식이다.[18] 굳이 다른 모습으로 그린 것으로 보아, 활을 쏘고 있는 이들이 원나라군이 아닐 가능성은 충분하다. 더구나 이 그림이 1274년 1차 원정 때의 사실을 그린 그림임을 감안하면 저 원나라군과 이질적인 복장을 하고 있는 군대가 남중국 병사들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원나라군은 항복한 나라의 군대를 선봉에 세우곤 했는데, 이 그림에서도 저 병사들이 선봉에 서 있다. 더구나 원군이 도망가는 상황에서 저들이 버티고 있는 것도, 당시 원정 기록을 살펴보면 원군이 후퇴하는 상황에서 고려군이 막부군의 습격을 격퇴한 사실이 여러 번 보이므로 근거가 될 만하다.

파일:7월군밤장수.jpg

그런데 영국 오스프리(Osprey) 출판사에서 나온 역사서에서는, 본문에서 몽골군(원군)으로 지목했던 병사들을 고려군(Korean auxiliaries, 고려 외인 부대)으로 보고, 위 그림과 같이 고려군 복색을 후방 병사들의 그것에 맞추어 삽화를 그린 적이 있다. 아무래도 억지로 끌려온 군대가 적극적으로 싸웠을 리 없다고 봐서 도망가는 군인들이 고려군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몽고습래회사를 전체적으로 보면, 전방에 있는 소수 (고려군) 병사들의 복장보다 후방의 본대 (몽골군) 병사들 복장이 더 많은 걸 충분히 알 수 있고, 본 문서에 나온 부분 외의 다른 그림 부분에도 목까지 보호하는 북방식 갑옷을 입은 원나라 병사들 투성이다. 몽골족은 물론 여진족/ 거란족 및 북중국 한족들을 모두 긁어모은 원군[19]이 고려군보다 훨씬 더 많았음을 고려한다면, 도망가는 몽골군을 고려군으로 표현한 영국 출판사가 그림 전체를 다 보지 않고 무성의하게 제작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참고로 토탈 워 시리즈 첫 작품 쇼군: 토탈 워의 확장팩인 몽골 인베이전에서도 이들은 고려군으로 나온다. 다만 외국 출판사라 일부러 무성의하게 제작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저 그림은 오스프리의 상당히 초창기 타이틀에 속한 것이고, 삽화가인 앵거스 맥브라이드는 이미 고인이다. 이때 나온 그림들은 지금 기준으로 틀린 고증이 많다. 로마군 관련 그림도 지금 보면 상당수가 부정확하다. 최근에 일본원정을 주제로 다시 나온 책의 삽화는[20] 훨씬 더 정확한 고증을 보여준다. 또한 오스프리 삽화에서 한중일 3국 중에 한국 쪽이 제일 정확도가 떨어지는데, 근본적으로는 자료[21]와 전문가[22] 부족에서 기인한 것이다.

파일:고려원병.jpg

이를 안타깝게 여겼는지 조선전쟁 생중계로 유명한 산그림 작가가 그나마 양호하게 고증해서 그려내었다.

하지만 앞의 병사들이 고려군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앞의 병사들을 보면 옷깃을 지우고 가필(加筆)한 흔적을 근거로 드는데, 후대에 몽골군을 좀 더 포악하게 묘사하고자 상상으로 그림을 덧그린 것이라는 얘기이다. 다만 이 주장에 대해선 몇 가지 반박이 가능한데, 목화는 물론 직령깃 두루마기의 경우 전부 한국의 복식에서 전부 찾아볼 수 있다는 점, 활집의 경우도 이성계의 어궁구와 상당한 유사점을 보인다는 점, 애초에 저 앞의 병사를 제외한 후방의 병사들의 복식도 고려군, 원군 어느 쪽도 닮지 않았으며, 그나마 원군 쪽을 닮았다는 점을 보면, 오히려 앞의 병사가 고려군이 맞고, 이 그림은 애초에 구전된 말만 듣고 그린 것이라 세세한 부분을 잘못 그렸던 것일 가능성이 높다.

4. 제1차 원정

1265
파일:km_014_106_01.gif 원조 元朝
파일:쿠빌라이 칸.jpg 황제 원세조
고려 (원 제후국)
王元宗 제후
,주군: 원세조,
고려 원종
金俊 섭정
,주군: 원종,
,황제: 원세조,
김준
일본 日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55px-Emperor_Kameyama.jpg 천황 카메야마 덴노
宗尊 섭정,쇼군,
,주군: 카메야마 덴노,
무네타카 친왕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C5%8Dj%C5%8D_Tokimune.jpg 섭정,싯켄,
,주군: 무네타카 친왕,
,천황: 카메야마 덴노,
호죠 토키무네

4.1. 발단

1265년 몽골 제국의 5대 칸이자 원나라를 개창한 쿠빌라이 칸 베이징, 당시 대도에 도읍을 잡고 남송 정복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는데, 남송 정복의 계획을 주위에 묻던 중 고려 출신인 조이(趙彛)[23]가 남송과 교역하는 밀접한 나라로 일본이라는 곳이 있다면서 남송을 고립시키려면 일본을 초유[24]해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게 좋다고 진언했다. 이것이 쿠빌라이 칸이 일본 정복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266년 쿠빌라이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조서를 전달했는데, 그 내용은 일본으로 가는 길 안내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재상인 이장용(李藏用)은 이것이 고려에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올 것임을 예견했고 북중국 출신인 사신들이 바다에 어두운 점을 이용, 일부러 바다가 험난하고 풍랑이 심하다는 등[25] 겁을 잔뜩 주었다. 이 계략은 제대로 먹혀, 사신들은 겁에 질려 일본까지 가지 못하고 거제도까지만 간 뒤 본국으로 귀환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포기할 쿠빌라이가 아니었으니, 이듬해인 1268년 6월 쿠빌라이는 다시 사신을 보내 고려에 일본으로 가는 길 안내를 요구했고, 이번에는 할 수 없이 반부(潘阜)[26]라는 관리를 사신으로 삼아 쿠빌라이와 고려의 국서를 일본에 전했다.

사신은 당시 일본의 대외창구였던 다자이후에 도착해 국서를 전달했고 당시 대륙의 정세를 전해줬으나, 섬나라라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유사 이래 한번도 외침을 당한 적이 없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데다[27] 교토 천황을 힘으로 누르고 있는 가마쿠라 막부에선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사신을 5개월 동안이나 다자이후에 머물게 하며 박대했다.

다만 겉으로는 무시로 일관한 가마쿠라 막부도 실은 큰 충격을 받았고, 제관 등을 신궁과 산릉에 보내 국난을 고했으며, 여러 신사와 사찰에서는 신불(神佛)의 자비를 빌었다. 물론 무사들에게도 수비를 강화하라는 명을 내렸다.

사신은 고려로 귀환했고 고려에선 다시 이를 원나라에 보고했는데 쿠빌라이는 보고 내용을 불신하며 다시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사신 일행은 쓰시마 섬까지만 갔다가 그 곳에서 섬 사람 두 명만 잡아서 돌아왔다. 빈손으로 가면 질책을 받을까봐 두려워한 듯. 쿠빌라이는 섬 사람 두 명을 잡아온 것에 대해 크게 기뻐했고 사신들을 치하한 뒤[28] 두 명은 다시 돌려보냈다.

고려는 다시 다자이후에 국서를 전달했으나, 이번에도 일본은 무시로 일관했다.[29] 그러자 1268년에 쿠빌라이는 남송을 공격할 거라고 선언하며 고려에 병선 건조와 군량 비축을 명했다.[30]

고려사에 따르면 1268년 4월에 고려에서 이장용이 사신으로 원나라에 왔을 때 쿠빌라이가 이장용에게 "너희 나라 왕족인 영녕공 왕준에게 다 들었다. 너희 나라에는 강한 군사가 5만 명은 있다면서? 1만 명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전부 내가 남송과 일본을 원정하는 데 필요하니까 4만 명은 원병으로 보내. 그리고 쌀 3, 4천 석까지 실을 수 있는 전함 1천 척도 만들어 와"라고 명했으나, 이장용은 "재목은 있지만 독촉하셔도 현실적으로 말씀하신 기한은 너무 짧습니다."라고 곤란하다고 했고, 쿠빌라이는 이에 "너희는 예전에 서하 칭기즈 칸께 금나라나 호라즘을 칠 때 꼭 돕겠다고 약속해놓고 입 싹 닦았다가 무슨 꼴 났는지 알아, 모르는가?"라며 은근히 경고했다.

그러나 이장용은 다시 "고려에 군사가 4만 명이 있었던 것은 옛날 이야기고, 30년 전쟁에 역병까지 돌아서 거의 다 죽었습니다. 군사라고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는데 이후 쿠빌라이와의 대화가 참 걸작인 게 이 때 이장용이 계속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원정을 결심한 쿠빌라이는 협박도 안 먹히자 "너네 나라에는 죽은 사람만 있고 산 사람은 없냐? 여자가 있을 테니 새로 태어난 사람이 있지 않느냐." 라고 마지막으로 다 알고 있다는 듯 빼지 말라고 말했으나 이장용은 "새로 태어난 애들은 이제 겨우 9 ~ 10살이라 싸울 병력은 아니다."라고 답하며 끝까지 없다고 말했다. 이 때 왕준은 아마 군사가 있을 것이라고 쿠빌라이 편을 들었는데 여기서 이장용은 쿨하게 "안 믿을 거면 여기서 더 논쟁해 봤자 시간만 버리니까. 사람을 보내 직접 확인하십시오."라고 대답하며 대화를 끝냈다. (출처: 고려사절요) 참고로 1차 원정에서 고려가 내놓은 군함이나 병력의 수를 보면 알지만 결국 줄이는데 성공했다.

4.2. 몽골의 원정 준비

이듬해인 1270년에 쿠빌라이는 고려에 둔전경략사를 설치했다. 물론 목적은 일본 침공이었다.

둔전 정책은 고려 백성들에게 막대한 고통을 안겨주었고, 이듬해 원종은 쿠빌라이에게 글을 올려 가을까지 군량과 말먹이는 힘이 닿는 데까지 조달할 것이니 백성들이 굶어죽지 않도록 해줄 것을 호소했다. 이때 원종은 진도에 거점을 마련한 삼별초가 아직 진압되지 않았다는 점도 강조했다. 당시 삼별초는 진도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 일종의 해적 집단이 되어 해안을 따라 오가던 조운선을 약탈하고 육지를 공격해 배를 불사르고 몽골군을 죽이거나, 심지어 일본에 사신을 보내 협공을 제의하기도 했다. 막부 측이 삼별초가 보낸 국서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지 만일 이해했다면 자칫 그간 왜구 침입과는 차원이 다른 재난이 일어났을 것이다.[31]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삼별초는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을 늦어지게 한 셈이다.

1271년 쿠빌라이는 다시 일본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번 사신인 금나라 유민 출신 조양필[32]은 그동안 무시로 일관했던 가마쿠라 막부의 대외 창구인 다자이후에 가서 교토의 천황과 직접 교섭을 하겠다고 요구했다. 당시 가마쿠라 막부의 최고 권력자는 불과 18세였던 호죠 토키무네였는데 토키무네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서일본의 슈고[33]와 지토[34]들에게 수비를 강화하라고 명했다.

결국 원나라는 말로는 도저히 일본을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즉각 고려에 병선 건조와 징병을 명했다. 그와 더불어 1272년에는 일본 원정에 방해가 되던 제주도 삼별초를 토벌했다.[35]

1273년에 마지막 초유사가 귀환했고 쿠빌라이는 삼별초 토벌을 마치고 돌아온 장수들을 모아 일본 원정을 결의했다.

1274년 홍다구(洪茶丘)[36]의 악랄한 독촉으로 불과 4개월만에 군함 900척이 건조됐다. 300척은 전선, 300척은 상륙을 위한 소형선, 300척은 물을 나르기 위한 급수선이었다. 이 과정에서 인부들이 겪은 참상은 끔찍했다. 하루 종일 물 속에 있다보니 그들의 다리가 썩어 구더기가 들끓기도 했다.

지휘관은 원나라 측은 몽골인 훈둔(忻都, 忽敦), 고려 출신 홍다구, 금나라 항장 유복형[37]이었고 고려 측은 김방경이었다. 병사 수는 원나라군이 2만 5천[38], 고려군은 전투병 8천에 뱃사공, 바닷길 안내자, 수부 6천 7백으로 총 1만 4천 7백이었다.[39]

그리고 1274년 음력 10월 3일 여몽연합군은 고려 경상도 합포를 출발했다.[40]

4.3. 쓰시마 섬 전투

파일:external/blog-imgs-35.fc2.com/2010020404375273c.jpg 파일:여몽연합군_쓰시마섬.jpg

음력 10월 5일 여몽연합군은 쓰시마 섬 남단의 사스우라에 상륙했다.

이에 쓰시마의 소가 당주인 소 스케쿠니가 이끄는 80여명의[41] 쓰시마 현성 군들이 응전을 시도하여 선발대로 먼저 상륙한 300여명의 원-고려 연합군과 맞서 싸우며 원나라가 자랑하는 기병 수십 기를 쏘아 죽이고 스케쿠니의 장남이 현장을 지휘하던 원나라 무장을 활로 쏘아 낙마시켜 이들을 잠시 동안 패주시키는 등 용전하였으나 연합군의 본대 1천이 상륙하여 맹공을 펼치자 단 반나절 만에 전멸당하고 연합군에게 섬을 내주었다.[42]

4.4. 이키 섬 전투

파일:external/ironna.jp/f98b6b79b501b3185b1e2530b8e28f96.jpg

음력 10월 14일 신시[43]에 연합군은 쓰시마 섬과 규슈 사이에 있는 이키 섬에 도달했고, 이 소식은 즉각 이키 섬의 슈고다이(守護代)[44]인 타이라노 카게타카(平景隆)에게 전해졌다. 타이라노 카게타카는 가신으로 구성된 기마 사무라이[45] 100기를 이끌고 출전해서 신조무라(新城村)의 히즈메성(樋詰城) 앞에서 연합군과 싸웠으나 병력, 무기, 전투 방식의 열세로 인해 한나절도 되지 않아 참패했다.

결국 타이라노 카게타카는 살아남은 기마 사무라이 20기와 함께 히즈메성으로 달아나 농성을 시도했지만, 성이 워낙 소규모인데다가 남은 사무라이에 성 내 모든 인력과 합세한다고 해도 연합군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병력인지라 이후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날이 저물어서 배로 돌아갔던 연합군이 다음날인 15일 날이 밝자마자 다시 히즈메성을 공격했고, 이들은 성에서 최선을 다해 싸웠으나 앞서 언급한 이유 때문에 성은 단시간에 함락되고, 그는 가신(家臣) 소자부로(宗三郞)에게 다자이후로 가서 본토에 위급함을 알리라고 지시한 뒤 할복자결했다.[46]

비록 참패라고 하지만 쓰시마 섬과 마찬가지로 이키섬은 지형 특성상 동원 가능한 가신과 병력들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100여명 이상의 병력을 소집하기도 힘들거니와, 이들을 압도하는 연합군들의 화력과 병력들의 숫자를 감안하면 한나절 동안 버티고 20명이 살아남은 것은 상당히 치열하게 분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쓰시마 섬만큼이나 피해가 가장 심했던 곳이 이키 섬으로, 쓰시마에 이어 이키 섬은 연합군에 의해 말 그대로 박살이 났다. 일본 측 기록으로 다소 과장이 있겠지만 하치만구도오쿤(八幡愚童訓)의 기록을 보면 연합군은 임산부의 배를 갈라서 태아를 꺼내고, 젖먹이들의 가랑이를 찢고, 잡은 남녀의 코나 귀를 베고, 젊은 여자들은 강간하고, 저항하면 손바닥에 구멍을 뚫어 그 구멍에 밧줄을 꿰고 끌고 다니거나 뱃전에 매달기도 했다. 또한 처자식을 데리고 산속으로 달아난 주민들은 아기 우는 소리를 듣고 군사들이 올까 봐[47] 아이들을 죽이기까지 했다. 이키 섬에는 ‘가쿠레아나(隱穴)’라고 불리는 동굴이 도처에 남아 있는데, 이키 섬 주민들이 연합군을 피해 숨었던 곳이라고 한다.

현재 이키 섬에는 타이라노 카게타카를 제신으로 모시는 신죠신사(新城神社)라고 불리는 신사가 있는데, 신사의 부지는 타이라노 카게타카가 농성했던 히노츠메성터로 당시 섬이 함락되고 학살당했던 이키 섬 주민들의 시신을 묻은 센닌즈카(千人塚)라는 무덤과 원구순국충혼탑(元寇殉國忠魂塔)이 세워져 있으며, 현지 안내문은 연합군이 이키 섬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에 방점을 두고 이를 상세히 기술해 전하고 있다.

4.5. 하카타 만 상륙 작전

파일:여몽연합군_하카타만.jpg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3d18f24fb0f1a189a51745daedce7bb1.jpg

음력 10월 17일에 연합군은 일본 본토인 규슈에 있는 다카시마에 상륙했고, 일본 막부군은 급히 내려가서 산성을 구축하고 싸웠으나, 막부군은 계속 밀리기만 했다. 일본 무사들의 개인 전법에 대항하는 연합군의 집단 전법, 연합군이 무장한 철포(鐵砲)의 위력에 막부군은 완전히 압도당했다. 그리고 여몽연합군은 겐카이나다(玄海灘, 현해탄)를 지나 지금의 후쿠오카시 하카타 만으로 향했다. 여기서 조금만 내려가면 당시 규슈 지방의 중심도시 다자이후가 나오기 때문에 하카타 만 상륙은 전쟁 초반의 분수령이나 다름없었다.

음력 10월 19일, 여몽연합군의 일부 병력이 하카타 만 서부 해안에 상륙해 교두보를 확보했고 다음날 모모치바라, 이키노하마, 하코자키 해안 등 3개 방면에서 연합군의 대규모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다. 다자이후의 총사령관 쇼니 스케요시(少弍資能)는 이미 쓰시마 섬, 이키 섬이 점령당했다는 급보를 듣고 가마쿠라 막부와 교토에 급사를 전했고 규슈 내의 슈고, 지토 및 고케닌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렸다.

또한 하카타 지구에는 일본군 총사령관 쇼니 스케요시(少弍資能)의 아들인 쇼니 카게스케(少弐景資)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당시 규슈 지역의 총동원령을 통해 소집된 일본군 전체 병력은 대략 1만 1천 명이었다.

4.6. 사와라 전투 & 하코자키 전투

음력 10월 20일 김방경이 지휘하는 연합군은 사와라(三郞浦, 현 후쿠오카현 사와라구)를 거쳐 내륙으로 진격하며 닥치는 대로 적군을 싹 쓸며 같은 연합군 지휘관인 훈둔조차 감탄할 정도였다고 한다.[48] 여기에 연합군 주력 부대의 합세공격으로써 막부군이 만든 하카타 만의 해안 방위선 30km가 전부 붕괴되었다.

그래도 아카사카에선 제법 막부군이 선전을 했다. 전선 사령관 쇼니 가게스케는 시마즈 가문[49]의 병사들과 함께 하카타에서 맹렬히 연합군에 항전했는데, 화살을 쏴 원나라 장수를 낙마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때 화살에 맞은 이는 원나라 좌우군부원수 유복형이었다.[50] 결국 패배한 막부군은 다자이후의 서쪽 관문 미즈키성(水城)[51]에 모여 대비했다. 한편 연합군은 함대로 귀환해 차후 전투 계획을 논의했다.

4.7. 신의 바람(神風)

하지만 음력 10월 20일과 21일 사이 새벽, 하카타 만에 대폭풍이 몰아쳤고 이는 연합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900척의 군함 중 200여척이 하룻밤 사이 침몰했다. 전투의 지속 여부는 의미 없었고, 남은 선택지는 오직 철수뿐이었다.

당시 200여 척이 침몰했다곤 하나, 다른 배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으리라 쉽게 추측이 가능할 정도로 피해가 심했으며, 결국 태풍에 의해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 연합군은 사실상 지휘체계를 상실하고 전투를 지속할만한 동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이와 관련된 다큐멘터리가 나온 적이 있는데,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은 것이 배를 너무 빨리 건조하다가 보니 발생한 내구도 문제가 심각했으며 배가 부족한 나머지 중국 쪽에서는 대양 항해에 부적합한 황하를 다니는 강가용 배를 징발한 문제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온다.[52]

일본은 이 태풍을 카미카제(神風, 신의 바람)이라 부르면서 기렸다. 이 용어는 이후 2차 세계대전 일본의 자살특공대의 별칭으로 사용되었다.

5. 제2차 원정

5.1. 남송 멸망과 가마쿠라 막부의 도발

1274년 11월 27일, 충렬왕에게 원정군의 퇴각에 관한 보고가 올라갔으며, 4일 후 생존한 여몽연합군의 배들이 속속 고려로 귀환했다. 몽골군 장군 훈둔, 홍다구, 유복정은 1개월 후 개경에 올라와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 앞에 일본에서 포로로 잡아온 남녀 어린이 200명을 헌상하고 자초지종을 보고한다. 몽골군이 실질적으로 입은 피해는 거의 없었고, 퇴각의 책임 또한 패전과는 거리가 먼데다 전과는 초라했기 때문에 충렬왕은 쿠빌라이 칸이 다시금 원정을 재추진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1275년 1월, 대도에 도착한 사령관 훈둔은 과연 태풍 때문에 병력을 잃고 퇴각한 사정은 숨기고 일본을 패퇴시킨 전적만 부풀려 보고하며 태풍에 입은 피해는 고려가 만든 배가 튼튼하지 않았던 탓으로 책임을 돌렸다. 이에 쿠빌라이 칸은 충렬왕의 예상대로 1차 원정을 전혀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고 2차 원정에 대한 열의를 불태웠다. 충렬왕은 김방경을 사신으로 보내 고려는 열매는 고사하고 껍데기조차 남지 않은 상황이니 일본 원정을 재고해달라고 하소연을 했으나 쿠빌라이는 고려의 사정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재원정에 앞서 일본이 충분히 쫄았을 것으로 판단하고 재차 제국에 굴복하고 입조할 것을 권하는 사신단을 보낸다.

일본 사서 간토평정전(關東評定傳)에 따르면 1275년 4월 15일, 중수대부 예부시랑(외무차관급) 두세충과 봉훈대부 병부낭중(국방차관급) 하문저 등이 이끄는 30여명의 원나라 사신단이 쿠빌라이의 국서를 가지고 다자이후에 도착했다. 사신단의 수장 일본선론정사(日本宣論正使) 두세충은 몽골인, 부사 하문저는 한족이었다. 또한 위구르 아라비아계 색목인 관료 2인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일본에 가기 전 고려에 들러 서찬이라는 이름의 고려역어랑장(고려군 통역장교) 한 명을 추가했다고 한다.

싯켄 호죠 토키무네는 아직 원나라와 교전상태라는 인식 하에 4개월 동안 이들을 다자이후에 쳐박아 두고 내부적으로 대응 방안을 논의했고, 이후 8월, 마침내 원 사신 5인을 가마쿠라로 불러들일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9월 7일, 사전 경고도 없이 에노시마에 마련된 공개처형장으로 끌고 가 수많은 일본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들을 모두 참수하고 효수해버렸다.[53] 국난을 맞아 다이묘 사무라이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국위를 선양한다는 명분이었다. 관련 글

그리고 1276년 3월, 가마쿠라 막부는 거기에 더해 연합군의 원정에 대한 응징으로 반격을 가할 계획을 세웠다. 서일본 지역 다이묘들에게 전함 건조와 병력, 자원 및 비용을 징발할 것을 명령하고, 이 부담을 부과하고 징수할 책임을 키타큐슈[54]의 가장 강대한 다이묘인 쇼니 가게스케에게 맡겼다. 이를 이국출격(異國出擊) 계획이라 했다. 원정군의 본영은 하카타에 설치되었으며 총사령관으로 역시 쇼니 가게스케가 임명되었다. 필요한 선박과 무사들은 규슈를 중심으로 조달하되 부족하면 시코쿠 주고쿠에서도 보충하고 1280년까지 준비해 고려로 출격하기로 했다. 이러한 임진왜란 프리퀄 삘의 계획은 거창했으나 실제로 실행되지는 않았는데, 사실은 원 사신단 참수와 같이 내부결속 및 막부의 권위 세우기의 일환이었을 뿐이었다.[55] 하지만 이국출격과 함께 계획된 하카타 만을 방비하기 위한 대규모 방벽 건설 및 석루 축조는 예정대로 실행되었다.

어쨌든 두세충 사신단의 운명은 4년 후인 1279년까지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동안 쿠빌라이 칸은 푸젠성 광동성 일대가 전장인 남송 원정에 골몰한 데다 아리크부카와의 후계 다툼 및 카이두의 반란 등 내부 문제로 골치를 썩이고 있었기 때문에 2차 일본 원정에 대한 결단을 미뤄야 했고 고려에게도 무기 제조와 군선 건조를 잠시 중단하도록 한다.

이후 1276년이 되어서야 명장 바얀이 지휘하는 원나라군이 남송의 수도 임안( 항저우)을 공격해 점령했다. 그리고 광동 방면으로 밀고 내려가며 원군은 하이난 섬까지 내려와 남송 잔당과 전투를 계속하고 난링산맥 인근 군현을 하나둘씩 먹어갔다.

남송 출신 항장으로서 쿠빌라이의 가장 큰 신임을 받고 있던 장군 범문호[56] 임안 함락 후 김방경 등 원나라에 와 있던 고려 관리들도 참석한 일본에 대한 2차 원정 실행여부를 논하는 회의에서 일본 토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칭기즈칸의 명재상 야율초재의 손자 야율희량이 그동안의 전란에 지친 백성들을 쉬게할 때라며 반대하자 쿠빌라이는 야율희량의 손을 들어주었고 아직 남송의 잔당이 남아있다는 이유도 들어 일본 원정에 대한 결론을 계속 연기하기로 했다. 김방경은 이를 충렬왕에게 보고했고 고려는 일시적으로 긴장감을 풀 수 있었다.

그러나 홍다구는 계속 고려에 남아 패악질을 일삼다가 그 끝에 가서는 김방경에 이어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까지 연루된 무고 사건을 일으켰고 이에 쿠빌라이는 충렬왕을 원의 수도인 대도로 소환해 사실관계를 따진 후 충렬왕에게 부마국고려국왕(駙馬國高麗國王)이라는 금인를 주어 공식적으로 부마국으로 지정함으로써 고려를 완전히 속국화시킨다.

그리고 1279년 3월에 현 광동성 남부 광저우 앞바다에서 벌어진 애산 전투에서 남송이 완벽하게 멸망하고 중국 대륙을 몽골족이 통일하며 중원이 온전히 원나라의 것이 되자 쿠빌라이 칸은 더 이상의 망설임 없이 일본 원정을 재추진할 것을 결의했다.

먼저 쿠빌라이는 남송까지 자신의 지배권에 들었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기 위해 범문호 등에게 남송 출신 한족 항장 인사들로 구성된 새로운 사신단을 꾸리게 했고 범문호는 자신의 가신인 주복과 연충을 정사, 부사로 하고, 남송에 유학 와 있던 일본인 승려를 안내 및 통역관으로 포함시켜 일본에 보냈다. 그러나 이들 역시 같은 해 6월, 아무것도 모른 채 다자이후에 도착한 후 가마쿠라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곧장 포박되었고, 막부의 지시로 하카타 만의 해변까지 끌려가 처형당했다.

이후 고려사에 따르면 두 달 후인 8월, 생존한 두세충 사신단의 선원들 중 4인이 기적적으로 고려로 탈출해와 자초지종을 알렸으며, 고려 조정은 이듬해인 1280년 2월, 원나라에 이 소식을 보고한다.[57]

보낸 사신단이 죄다 몰살당했다는 소식에 극대노한 쿠빌라이 칸의 일본 정벌 의지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조부 칭기즈 칸 호라즘 왕국 서하를 칠 당시 상황과 똑같은 경우였다.

남송의 강서 4성에 600척의 군선 징발 명령이 떨어졌고, 이를 담당하게 된 남송의 항장들은 빡친 쿠빌라이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가 요구한 것의 5배가 넘는 3500여 척의 배를 건조해 주었다. 이후 1280년 8월, 쿠빌라이 칸은 요양( 랴오양시)에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정동원수(征東元帥) 훈둔, 홍다구, 범문호를 지휘관으로 대군을 모아 2차 일본 침공을 명령한다.

이에 고려에도 또 징발령이 떨어지자 충렬왕은 다시금 김방경을 통해 어려운 형편을 설명하며 병력 동원과 군량 비축은 무리라고 필사적으로 호소했으나, 이미 일본을 족치기로 결정한 터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5.2. 원나라와 고려의 원정 준비

이후 충렬왕은 쿠빌라이의 2차 일본 원정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갑자기 적극적으로 참전 의사를 밝히기 시작했다. 물론 원나라의 부마국이라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것도 현실이었다.[58] 쿠빌라이가 재차 고려에 군함 건조를 명하자 사신을 파견해 환영의 뜻을 밝혀 호의를 샀고 이에 쿠빌라이는 고려에서 마음껏 패악질을 벌이던 권신 홍다구를 본국으로 소환했다.

1280년 2차 원정을 위한 연합군이 편성되었는데, 동로군과 강남군으로 나뉘어서 편성했다.

동로군은 원나라군과 고려군으로 구성되었는데 북중국 출신들로 구성된 원나라군 지휘관은 훈둔과 홍다구였고 고려군 지휘관은 김방경이었다. 병사 수는 원나라군 1만 명, 고려군 전투병 2만 명, 뱃사공·수부 1만 7천 명, 함선 9백 척, 군량 12만 3000석이었다. 광동성 푸젠성, 저장성 등 남중국인들로 구성된 강남군은 주로 옛 남송 출신들이었는데 병사 수는 10만에 지휘관은 범문호였다. 강남군은 그 특성 상 주로 수군이었다.

숫자로 보면 강남군이 훨씬 많지만 실제론 전함에 무기보다는 괭이·삽 등의 농기구와 씨앗 등을 잔뜩 실은 데다 병사 대다수는 급히 징집하여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남송군 중에서도 가장 약해빠진 집단이었다. 주력은 당연히 동로군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2차 원정당시 연합군은 1차 원정에 비해 규모가 크지 않았고, 숫적 주력인 남송군 측은 기술자나 농사꾼 등이 태반이었던 것으로 보았을 때, 2차 원정의 본래 목적은 일본 내에 상륙하여 거점을 마련하고 둔전을 하면서 실제 정복을 담당할 대규모 원군 본대가 올 때까지 대기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시각이 주를 이루고 있다.

1281년 음력 5월 4일, 원정 준비가 끝나자 여원연합군은 고려 경상도 합포를 출발했다.

5.3. 쓰시마 섬 전투

1281년 음력 5월 21일, 동로군이 쓰시마 섬을 공격했지만 막부군의 저항이 심해서 공략에 실패하였다. 26일, 결국 이키 섬으로 배를 돌렸다.

5.4. 제1차 이키 섬 전투

1281년 음력 5월, 이키 섬에 상륙한 동로군은 저항하는 막부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때 막부군의 지휘관은 7년 전 11살의 나이로 전쟁을 경험한 쇼니 스케토키(少弐資時)로 쇼니 츠네스케의 아들이었다. 그는 중과부적임을 알면서도 싸우다 전사했다.[59]

5.5. 시카노 섬 전투

10일 간 휴식을 취한 동로군은 음력 6월 6일 하카타 만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이때 동로군은 장벽에 부딪혔으니 1276년에 막부의 지시로 하카타 만 연안 20㎞에 축조된 높이 2m 전후의 방루가 그것이었다. 하카타 만 해안에 즉각 상륙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한 동로군은 수비가 엷다고 판단되는 시카노 섬에 상륙했고 같은 날, 오토모 가문의 당주이자 고케닌인 오토모 요리야스가 이끄는 막부군이 시카노 섬에 상륙한 동로군에 먼저 선공을 가했다. 시카노 섬 쟁탈전은 6월 8일까지 이틀 동안 지속되었는데, 동로군은 생각 외로 고전을 반복했다.

5.6. 제2차 이키 섬 전투

시카노 섬 상륙을 포기한 동로군은 다시 이키 섬으로 철수해 야영 생활에 들어가고, 20여일 간 교전은 벌어지지 않는다.

이후 7월 2일, 동로군은 중국 대륙 남쪽에서 오는 강남군과 합류하기 위해 히라도 섬으로 이동했고[60] 이때를 틈타 쇼니 카게스케의 지휘 하에 오토모 가문, 시마즈 가문, 마츠우라 가문, 류조지 가문, 다카시 가문에 속한 1만의 일본군 병력이 이키 섬을 탈환했다.

북서부 해안 일대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오토모 가문의 주요 가신 한명이 전사하고, 1차, 2차 원정 동안 연합군을 상대로 주력으로 맞선 쇼니 가문의 장수이자 쇼니 츠네스케, 카게스케의 아버지인 쇼니 스케요시(少弐資能)가 중상을 입는 등 막부군은 분전하며 몇 배의 병력 열세를 딛고 동로군을 격퇴시켰으며, 이키섬에서 패퇴한 동로군은 이키섬을 포기하고 히라도섬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부상당한 쇼니 스케요시는 평생 이 부상으로 고통받았고 늙은 나이에 입은 부상이 후일 악화돼 전쟁 이후 사망한다.

5.7. 하카타 만 공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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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7월 27일, 히라도에서 합류한 동로군과 강남군은 다카시마에 상륙하여 진영을 축조하는 한편, 다시 하카타 만 공략을 준비했다. 막부군은 이 소식을 듣고 반격을 준비했으나 4천여 척의 대함대의 위용에 눌려 전면전을 벌일 엄두를 내지도 못하고 소선으로 기습전을 벌였다.[61]

당시 기습전에 참가한 이요국의 고케닌 고노 미치아리(河野通有)는 3척의 배들에 자신의 일가를 포함한 별동대를 분승시켜 연합군 군함에 접근해 분전을 벌이다[62] 연합군의 석궁에 맞아 부상을 입게 되지만, 배를 접현시키는데 성공하여 연합군 배에 횃불을 던지고 적병을 베며 연합군 지휘관 한명을 납치하고 귀환하는 등 활약했다 심지어 무사들이 직접 수영하여 연합군의 선박 하나에 침투해 다수의 병사들을 베고 돌아오는 기막힌 상황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몇 차례 감행된 소선 기습 당시 일본군은 연합군의 배에 설치된 투석기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

동로군과 강남군이 합류한 비슷한 시기 일본 본토에서는 호죠 토키무네의 직명을 받은 우츠노미야 사다츠나(宇都宮貞綱)가 산요 산이 지방 등지의 고케닌들로 부터 소집한 6만의 대군을 이끌고 기타큐슈를 향해 출전했다.[63]

5.8. 또다시 신의 바람이 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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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음력 7월 30일, 다카시마 근해에 강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했고[64] 타고 온 배, 3,500여 척 거의 전부가 서로 충돌하거나 바위에 부딪혀 대부분 침몰하거나 떠내려 가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이틀 후 피해집계가 끝나자 훈둔, 범문호 등 몽골 및 강남군 지휘관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결정을 내리고는 병사들 몰래 자기들끼리 멀쩡한 배를 골라 타고 일본에서 탈출했고, 그 외 선박에 별 피해를 입지 않은 2만 명에 가까운 고려군도 생환에 성공했다.

일단 공식적인 생존자는 이들밖에 없다.

일본에 남겨진 나머지 군사들은 전부 포로가 되거나 몰살당했다. 이미 육지에 있었거나 박살난 배에서 탈출해 살아남은 인원은 약 10만에 달했는데, 이들은 장백호(張百戸)라는 인물을 장 총관이라 부르며 지휘권을 맡기고 산 속으로 들어가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어 돌아오려 했으나, 소형 선박만으로 게릴라전만 하던 막부군이 본함대를 동원하여 대규모 공격을 가해 오자 굶주림에 오래 버티지 못해 대부분이 패사했으며 남은 생존자들도 모두 항복하였다.

고려사와 원사에 따르면 막부군은 포로들 중에서 우선 고려인, 몽골인, 한인(북중국인)을 선별해내 이들부터 모조리 참수했고, 신부군(남송인)만이 살아남았다. 고려사에 의하면 그 뒤 8월 7일에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자, 기술자 등 2~3만 명만 살려주고 나머지 남송인을 모두 참수. 9일에도 추가로 다수가 참수되었고, 나머지는 당인( 당나라 사람)이라 하여 노예로 삼아 본토로 끌고 간다.[65]

일본 기록들을 참고하자면 막부는 포로가 도망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선박을 왕래하며 감시하도록 고케닌(御家人)에게 명하였다. 또한, 근래에, 오사카부(大阪府) 이즈미시(和泉市)내의 한 절이 소장하고 있는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経)』 수정(修正)에, '코안의 역(弘安の役)' 때 투항했던 포로가 코안 9년 (1286년) 4월 초순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본 서적에는「대당국강서로서주군인하삼어(大唐国江西路瑞州軍人何三於)」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경전의) 수정(修正)에 종사하고 있었던 사람은 강남군(江南軍)에 소속되어 있던 군인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남송인 포로들의 처분은 각기 따로 맡겨진 곳에서 자율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알려졌다.

제 2차 원정에 참여한 고려군 26,989명 중 7500여명이 죽고 19,397명이 생환했다. 남송에서 참전한 지휘관급을 제외한 병사는 공식적으로 우창(于閶), 막청(莫青), 오만오(呉萬五)의 단 3명만 귀환하는 데 성공했으며, 그나마도 당장 귀환한 자는 없고 나중에 도망쳐온 자들만 있었다. 물론 지휘관급이 아닌 몽골인 중에는 단 한 명도 생존자가 없었다.[66]

고려군의 생환자가 원나라군보다 많았던 데는 전투에 소극적인 점도 한몫했다. 김방경의 태도와 별개로 고려군 자체는 전의가 원나라군보다도 떨어져 있었으며[67], 방어할 때는 잘 싸웠으나 공세에는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이 견해는 원사(원나라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추측하는 것이고, 실제 전투 주력군은 고려군이었으며 이 증명은 당시 일본군 지휘관이던 가마쿠라 막부의 타케자키 스에나가 장군이 제작한 몽고습래회사라는 그림의 분석을 토대로 고려군이 원나라군에 비해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했음이 확인되고 있다.[68] 물론 그 이유는 몽골이 자신들이 정복한 지역의 군대를 화살받이 선봉대로 내세우는 전술을 사용해왔기 때문이고, 여기선 정복당한 고려국의 군대가 선봉대로 차출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고려인 생존자가 월등히 많이 생환하자 이로 인해 원에서는 고려군이 일부러 원나라군을 몰살시키기 위해 사보타주를 한 것으로 의심하기까지 했다.[69]

6. 두 세력의 무력 차이

원정은 실패했으나, 1차 원정 때의 여몽연합군의 전술은 일본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헤이안 시대부터 가마쿠라 시대의 일본의 주 전투 무장은 장창으로 무장한 대규모 보병부대의 근접전투가 주축인 전국시대와 임진왜란 때 일본군과는 달리 주무장이 이었고 원거리 전투로 화살만 주고받고 끝나는 전투도 존재했으며, 일기토조차 기마궁술로 치를 정도로 활 위주의 전투를 하였다.[70] 또한 일본의 병력은 사무라이 세력을 위시한 기마궁병이 주전력이었으며 보병은 보조 병력에 불과했다. 또한 대다수의 전투가 씨족단위의 다툼이었기 때문에 많을 병력을 소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러한 경향으로 사무라이들은 개인의 무력에 의존하는 형태를 보이는데 소규모 전투에서는 이러한 기형적 구조가 오히려 유리했을 지라도 대규모 집단전에 익숙한 만 단위가 넘는 외세의 전력과 싸우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였다. 그들에게 만 단위가 넘는 대규모 전투는 그들의 할아버지의 군담에서나 나오는 숫자였다. 일본이 일본도를 위주한 근접 전투로 나가는 것은 전국시대 이후 일이다.

화약이라는 일본에 존재하지 않는 무기와 원나라 측의 집단전법에 일본군은 적응하지 못하고 패퇴했다.

일본의 기술에 따르면 '몽고의 활은 짧다고는 하나. 촉에 독이 발라져 비와 같이 내리니 감히 대적할 수 없었다. 몽고군에게 돌격한 무사는 좌우로 포위당하여 몰살당했다...'[71] 고 기록했다.

당시 일본에서의 전투 방식은 부하에게 우는 살(명적)을 쏘아 개전 신호로 삼은 뒤, 종과 징을 요란하게 치며 자신의 가계, 이름, 전적들을 자랑스레 읊는 나노리라는 것을 한 뒤 싸우는 거였다. 쉬운 말로 무사도를 준수하는 일기토 시전. 물론 여원연합군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원나라 역시 명적을 사용했는데 이는 진격을 알리거나 대량으로 사용해 적의 사기를 꺾거나, 전투 중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지휘관끼리 연락을 취하는 매우 실용적인 것이었다. 결국 일본군이 명적을 쏘는 것은 장수가 나서서 가계를 읊겠다는 신호였지만, 원군은 이걸 진격 시도로 받아들였을 것이며, 만구다이가 돌격해 측면을 돌파 중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 전에 지휘관이 앞으로 나와서 예법에 맞춰서 말을 하는 건 여원연합군 입장에서는 나 죽여 주시오 하는 꼴이었을 것이다.
다만 여기에는 드라마적 과장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하치만몽고기(八幡ノ蒙古記)'의 기술에 따르면 '무사들은 서로 아군끼리 자기소개 '나노리'(名乗り)를 하며... '[72] 라고 기록되어 있다. 가마쿠라시대 전투는 씨족 간의 소규모 전투 위주였다. 따라서 개개인의 무력과 성과가 중요했다. 이에 소집된 무장은 눈에 띄어 은상을 받기 위해 공을 세웠다는 증인이 필요했는데 이를 배경으로 자신이 참전했음을 알리고 공을 세웠음을 어필하고자 자기소개를 하는 풍습이 생긴 것이었다. 또한 현대전에서도 삐라를 돌리듯 적군의 사기 저하와 아군의 사기 진작을 위한 정당성 주장 등을 위해 나노리를 하는 목적 또한 존재 했다. 쓸모없는 게 아니라 실용적인 목적이었다는 것.

원나라 침략의 경우, 서로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나노리를 해봤자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게 바로 이 기록의 아군끼리 나노리, 즉 서로 '나는 이 전투에 참가했으니 나중에 증인 부탁드립니다.'를 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설사 명적을 울리고 전투를 개시하기 전 나노리를 했다고 했을지라도 그건 아군들이 들으라고 하는 거지 말도 못 알아듣는 원군이 들으라고 한 게 아닌 것이다.

다만 동 서적에 기록에 의하면 습관적으로 일본군 장수가 적진에 돌격하며 명적을 쏘자 원군이 비웃으며 징과 북을 치자 말이 놀라 달아나 버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심지어 원나라 군대는 일본군에 대한 파훼법까지 쓸 정도로 철저히 전술을 준비했는데, 말 탄 사무라이로 구성된 일본군에게 극상성인 병력 구성인 도검병[73] + 화포 및 원시적 총기인 화창(火槍)[74] + 최초의 수류탄이었던 철포(테츠하우, 鉄砲)[75]로 밀어붙였다.[76] 이는 원나라가 멸망시킨 송나라와 금나라가 일찍이 화약무기를 갖고 있었기에 이를 계수한 것이었다. 일본에 화약무기가 전래되는 건 한참 나중에 타네가시마를 통해 조총이 전래된 때 일이다.

전장이 넓은 평야 지대가 아니라 좁아터진 해안가라 도검병이 기마 사무라이에게 접근하기도 적절하거니와 화포의 활용도가 높았고, 덕분에 여원연합군은 막부군을 압도적으로 유린했다.

또한 원정 당시 원나라와 고려 연합군에 대한 공포심은 극에 달해, 일본인들은 무쿠리(몽골족)와 고쿠리(고려)라는 두 마리 또는 무쿠리 고쿠리라는 한 마리의 도깨비로 부르며 어린아이가 울 때 "'무쿠리와 고쿠리가 잡으러 온다."'라고 하면 울음을 뚝 그친다라는 전설이 내려올 정도였다.[77] 당시 일본에서 여원연합군의 침공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과부적으로 기습당했던 1차전과는 달리 2차전에서는 철저히 대비하며 1275년 이국경고번역을 실시하면서 각지의 병사와 물자를 징발할 준비를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던 데다, 고려 쪽에 첩자를 계속 보내 침공군의 규모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2차 원정 당시 규슈의 방어군은 1차 원정 때의 2배 정도를 동원했으며, 이요의 수군에 중앙에서 아다치 모리무네의 1만가량의 증원군까지 파병해 4만 이상의 숫자가 모여 있었다. 그래서 여몽 연합군은 쉽사리 상륙하지 못했으며, 결국 태풍이 불어올 때까지 일본이 버틸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7. 원정의 여파

7.1. 원나라

쿠빌라이 칸은 두 번에 걸친 원정이 모두 실패하고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사신단을 일본에 보내고[78]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3차 원정을 계획하는 등 # 일본을 복속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계속되는 반란에 직면하는 바람에 추진에는 실패했고, 결국 1294년 80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과 동시에 일본 원정은 완전히 중단되었다.[79]

쿠빌라이의 후계자인 테무르 칸 시기에 일본 원정을 재추진하자는 목소리가 나왔으나 황제 본인이 직접 반대의사를 내비쳤고 고려인 출신 관리인 홍군상[80]도 쿠빌라이 칸이 죽자마자 곧장 승상에게 가서 일본 원정 계획을 중지할 것을 간언했기에[81] 이를 마지막으로 원나라 조정에서 일본 원정에 관한 논의 역시 완전히 사라진다. #

되려 테무르 칸은 일본과의 국교를 복원하고 몽골과 일본 간 무역을 활성화하고자 했다. 그리고 원나라가 쇠퇴기에 접어들며 몽골만호부도 무력화되는 과정에서 남방 장쑤성 저장성 등 화동 일대는 원나라 말기에 대규모 왜구 침입으로 몸살을 앓게 된다.

7.2. 일본

원나라 군을 두 번이나 별 피해없이 물리치긴 했으나 규슈 지역의 다이묘들은 큰 손실을 입었으며 이에 막부는 내부적으로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다. 바로 보상으로 무사들에게 내려줄 토지가 없다는 것이었다.[82] 이기긴 이겼으되 영토를 얻은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영토를 얻기위해 바다를 건너 고려를 공격해도 사실상 이길 리 만무했다. 당시 고려가 아무리 내부적으로 엉망이라고 해도 엄연히 대몽전쟁 30년을 치른 국가였고 원나라의 강요 때문이라지만 2만의 군대를 자비로 보낼 만큼 군사적 여력이 있었다.[83]

결국 자비를 들여 원군과 싸웠던 무사, 즉 고케닌들은 보상으로 아무 것도 받지 못해 갈수록 궁핍해졌고, 막부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이에 자동적으로 고케닌들에게서 쫓겨난 비(非)고케닌 무사들 및 총령(가문의 상속자)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한 서자들이 악당을 조직해 슈고를 위협할 정도로 세력이 커졌다. 이것은 곧 가마쿠라 막부에 대한 위협이 되었다.

막부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을 무렵, 교토 조정에선 천황의 후계 문제를 두고 내분이 벌어졌고, 내전은 고다이고 덴노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고다이고 덴노가 막부 토벌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자 막부는 고다이고 덴노를 외딴 곳으로 귀양을 보내버렸다. 하지만 호죠 정권의 장기독재에 반감을 품은 무사들, 특히 닛타 씨와 아시카가 씨가 호죠 타도를 노리고 있었다.

1333년 마침내 전국에서 호죠 정권 타도의 깃발이 올랐다. 같은 해 5월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교토를 함락시켰고, 닛타 요시사다가 가마쿠라를 공략했으며, 호죠 씨 일족은 마지막 싯켄 사다도키를 비롯해 전원 자결하여 가마쿠라 막부는 원나라 군을 막아낸 지 52년 만에 멸망했다.

또한 이 시기의 일본에서는 원의 침략을 예상하고 경고한 승려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창가학회의 기반이 되는 일련정종(日蓮正宗)을 만든 니치렌(日蓮)이다. 그는 원 침공이 있기 10년 전부터 법화경 이외의 다른 경전을 사도(邪道)라며 부정했고, 당시 빈발하던 지진, 이상기후, 역병, 기근 등 재해의 원인이 사람들이 법화경을 믿지 않고 염불교나 선종, 정토종 따위의 사도를 믿는 데에 있으며, 이대로 그들을 내버려두었다간 국내에 조만간 큰 내란이 일어날 것이며, 외국으로부터의 침공이 있을 것이고, 정법인 법화경을 중심으로 세워야 국가와 국민 모두가 평안무사함을 얻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내용을 막부에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이라는 제목으로 올렸다가 다른 종파의 승려들에게 내몰려 귀양까지 갔다. 진짜 쳐들어온 원나라 침공이 아니었다면 그냥 좀 맛이 간 땡중1 정도로 취급받고 역사에서도 묻혀버렸을지 모를 이였지만 그가 입정안국론을 올리고 꼭 10년 뒤에 원의 침공이 두 차례나 벌어지면서, 정신나간 땡중에서 순식간에 예지를 지닌 고승대덕으로 격상되었다. 다만 원 침공이 실패로 끝난 이후에도 니치렌의 주장처럼 법화경 하나만을 정법이라 주장하는 니치렌종이 일본의 '국교'로 지정되는 일은 없었다.

여담으로 두 차례 일본 원정에서 항상 처음부터 두들겨 맞았던 대마도의 경우, 두 차례의 전쟁과 위의 가마쿠라 막부의 붕괴 덕분에 행정 체계가 마비되었고, 이는 차후 조선 초기까지 대마도가 왜구의 소굴이 되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연구가 있다.

7.3. 고려

동국통감 고려사에서 드러난 기록들을 보면 고려의 왕과 조정 대신들부터가 원정을 그다지 찬성하지 않았는데 문하시중 김방경(金方慶)과 대장군 인공수(印公秀)[84]를 원에 보낸 표문 내용은 이렇다.
소방(小邦)이 근래 역적들을 소탕하는 일로 인하여 몽고 대군의 군량미를 해마다 백성들에게서 거두어 들였으며, 게다가 왜국을 정토(征討)하려고 전함(戰艦)을 수리 건조하는 일 때문에 장정(壯丁)들은 모조리 공사 부역에 나가고 노약자들만이 겨우 밭을 갈고 씨를 뿌렸으나, 시절이 일찍이는 가물고 늦게는 큰물이 졌습니다.
그리하여 곡식을 제대로 거두지 못하여 나라의 비용마저 피폐한데, 더구나 싸움에 다치고 물에 빠져 죽어서 돌아오지 못한 자가 많으니, 비록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더라도, 어느 세월에 소생될지 기약할 수 없습니다.
만일 다시 일본을 치더라도, 그에 필요한 전함과 군량미를 실로 소방에서 감당해낼 수 없사오니, 삼가 간절한 정성을 굽어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한마디로 원정에 참여한 김방경조차 직접 이 표문을 낼 정도로 정벌의 필요성보단 오히려 회의를 느낀 전쟁이었다. 애초에 고려 땅 늘리자고 하는 전쟁도 아니라, 원나라 땅 늘려주자고 하는 전쟁인데 좋다고 했을 리가 있나. 해봐야 우리 땅이 느는 게 아니고 중국의 1개 성(省)이 더 생기는 것 뿐이었으니 고려가 의욕을 가질 메리트 자체가 없었다.

게다가 전투로 인한 직접적인 인명피해가 적었을 뿐이지, 1, 2차 원정에서 침몰된 군선이 장난 아니게 많았고, 부역에 끌려간 백성들도 사고 혹은 전염병으로, 떼죽음을 당하거나 불구가 되면서 사회 전체가 큰 타격을 받아 카다안의 침입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결과까지 만들었다.[85]

일본 측에선 극우사관과 식민사관의 영향에 일제강점기 임진왜란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려가 이 전쟁을 주도한 원흉이라 왜곡하며 다른 고려사의 기록을 곡해하기도 하나 이것은 일본 측에서 하나만 본 거지 저건 보지 못한 것이다. 실제로 이노우에 야스시의 경우는 고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던 듯하다. 애초 고려는 원이 상국이라 시키는 대로 끌려다녀야 했을 뿐이지 절대 자의가 없었다. 왜구를 뿌리뽑을 목적이면 대마도만 족치면 그만이었을 뿐이지 굳이 일본 본토를 쳐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한편 원나라가 2차 원정 직전에 설치한 정동행성은 약 76년 후 공민왕이 철폐할 때까지 고려에 남아 사사건건 내정간섭을 일삼는 귀찮은 존재가 된다. 일본 대신 고려를 수탈했던 것이다.[86] 또, 위에서 언급한대로 일본의 대 중국/대 고려 악감정만 촉발하고 대마도가 왜구의 소굴이 되면서 조선 초기까지 왜구들에게 지속적으로 시달리며 나중에는 임진왜란의 명분을 주는 등 결과적으로 한국사에 좋지 않은 영향만 끼쳤다.

대략 700년 뒤 당시 원정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있다. 기사

8. 원나라의 일본 정벌 성공 가능성에 대하여

1차 침공 당시 연합군의 압도적인 화력으로 하카다의 일본군을 쫓아냈고, 공세가 계속된다면 다자이후마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졸장 원군 사령관 힌두의 결정으로 공세를 포기한 채 배로 철수했고, 결과는 결국 재앙으로 끝났다.

만약 이때 김방경의 말대로 공격을 계속했다면 다자이후는 연합군에게 함락되었을 것이며, 적어도 북규슈 정복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북규슈를 정복했다 해도 규슈 전역, 나아가 일본 전역을 정복하고 막부를 전복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규슈 섬을 정복하고 고케닌들과 백성들의 저항을 진압하는 데 연합군은 상당한 병력을 소모해야 했을 것이며, 여기서 세토내해를 건너 혼슈를 공략하려면 더욱 복잡한 준비를 거쳐야 한다. 설사 어찌저찌하여 줄어든 병력을 이끌고 혼슈 섬에 상륙했다고 해도 규슈 섬 때와는 차원이 다른 저항을 마주해야 하는데 이를 모두 뚫고 가마쿠라까지 진격할 수 있었을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2차 원정의 경우, 태풍이 불지 않았다 해도 난이도는 한층 어려워졌을 것이다. 이때 막부는 1차 침략을 교훈삼아 하카다에 20km에 달하는 장벽을 쌓았으며, 이전보다 훨씬 많은 4만명의 병력을 배치했다. 실제로 이 장벽과 고케닌들의 격렬한 저항 때문에 여몽연합군은 제대로 상륙조차 하지 못했으며, 강남군과 합류하기 위해 철수했을 때도 일본군 선박들의 기습에 시달리며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몽골의 침략-몽골의 거대원정군에 맞서 싸운 가마쿠라 무사단>에 의하면 2차 침공 때 막부가 일본 서부에 배치한 병력은 규슈에 4만 명, 주코쿠에 2만 명, 쿄토에 6만 명이었다고 한다. 이때가 중세이고 당시 일본군이 중세 봉건적 기사의 형태를 취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는 당시 기준으로 엄청난 전력이다. 이 정도 방비라면 규슈를 정복하는 일만으로도 상당한 출혈을 강요했을 것이며 일본 본토 서부에 진격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중국에서만 해도 송나라 금나라의 경우 물론 세계 최강국이었고 당연히 일본보다는 훨씬 강력했으나 몽골군의 주력 수십만 명을 수십년간 때려 박고 나서야 겨우 정복했다. 호라즘 왕국은 인구와 영토는 많아도 정치시스템이 잘 갖춰져있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무함마드 2세와 어머니 간에 내분이 일어나 내부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애초에 호라즘은 호라즘 지방을 기반으로 한 튀르크계 부족들이 다른 부족들을 정복하고 세운 연맹체에 가까워서 왕국 내에 있는 부족들이 비협조적으로 나오거나 심지어 몽골군에 붙는 일도 흔했다. 덤으로 이제 막 영토를 넓힌 참이었기에 넓은 영토를 제대로 살리기도 어려웠다. 러시아는 마찬가지로 영토가 넓고 인구가 많았지만, 이쪽은 아예 통일조차 안된 채 수십 개의 공국들로 분할되어 있었고 각 공국들 간의 연계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손쉬운 각개격파가 가능했다. 서하 고려는 내부 사정이 일본 이상으로 막장이었는데 지형상으로도 불리했고 기나긴 무신정권의 뻘짓과 최충헌의 자기 위신을 위한 기존 군대 약화 및 사병 병설로 인해 군사력과 행정력이 심각하게 약화된 상태였다.[87]

반면 일본은 인구가 최소 600~700만에 달해 당시 중세 기준으로는 상당한 사이즈의 국가였고,[88] 섬이라는 지형적 이점이 있었다. 단순히 섬이라서가 아니다. 일본 열도, 특히 혼슈는 북고남저 지형으로 동해를 마주한 일본 북단은 평야가 거의 없고 대부분 가파른 산지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북단에서 상륙작전을 해봐야 남부의 평야지대에 몰려있는 주요 도시를 공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북에서 남으로 내려와서 일본 열도에 상륙할 길이 규슈밖에 없다. 문제는 규슈에 상륙한다고 해도 점령도 힘들고, 규슈에서 동진해 교토까지 가기 위해서는 좁은 길을 따라 진군해야하는데 당연히 뚫을 방법이 마땅치 않다. 원군의 최대 강점은 대규모 기병을 이용한 기동력인데, 일본은 그 지역의 특성상 군마를 대규모로 운송할 수 없었으며, 이는 원나라의 최대 강점이 사라진다는 것을 뜻했다. 봉건국가이긴 했지만 분열상이 호라즘, 서요, 러시아, 헝가리, 폴란드 같은 동네들에 비하면 훨씬 양호했고 가마쿠라 막부의 싯켄을 중심으로 한 단일화된 국가체계와 천황을 중심으로 한 동족의식을 갖추고 있어 조직적이고 단일화된 저항이 가능했다. 실제로 가마쿠라 막부의 쇠망 원인을 이때 너무 열심히 전쟁 준비를 한 탓이라고 보는 사견이 있을 정도로 당시 일본은 일종의 총력전을 준비했고, 모든 고케닌들이 군사를 뽑아내고 전쟁준비에 심혈을 기울였을 정도이니 더 말할 것이 없을 것이다.

가장 큰 문제점은 원정군이 장기전이 과연 가능했냐는 것. 보급의 경우 고려에 크게 의존해야 하고 고려는 등골이 휘는데 십만이 넘는 대병력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백년전쟁의 잉글랜드군처럼 보급이 부족해 아무 곳이나 약탈하다 도리어 원정군이 민심을 잃고 일본군이 게릴라나 지연전으로 몰고 가면 일본은 바다 건너 세력이라 원군조차 보내기 힘들며 그곳은 그들의 홈그라운드이니 답이 없다.[89] 이는 '원사'(元史)에도 지적하는데 "일본은 바다가 멀고 사람이 많고 땅이 넓으며 사방에 병사가 모인다. 아군의 원군은 없고 만일 불리해져도 지원을 보내기 힘들다."고 일본 정복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다.[90] 쓰시마나 이키 섬의 장렬한 전투의 예를 보면 오히려 극렬한 저항에 질색하며 떠났을 가능성이 더 크다. 애초에 전쟁은 잘 싸운다고 이기는 게 아니다.

'가능성이 높았다, 장기전을 하면 이긴다'고 태풍만 없었으면 확정적으로 이겼을 거라 주장했지만 여몽전쟁조차도 아홉 차례의 원정 끝에 겨우 항복을 받아냈다. 몽골은 당시 일본보다도 멀리 있고 훨씬 부유하고 인구가 많은 나라들을 전부 복속시킨 전력이 있다.

남송 등의 강대국을 꺾은 원이니만큼 일본이 버티지 못할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첫째로 원의 여력이다. 극소수의 인구로 드넓은 영토를 통치하는 특성상 일본까지 정벌할 여력이 남았는지가 중요한데 그것이 의문스럽다. 상술했듯이 일본은 생각보다 중세 기준으로 일반적인 전력도 만만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쟁 대비까지 사력을 다해서 하고 있었으며 각 지방세력의 저항의지도 의외로 꽤 강했다. 그리고 일본이 섬이 아니었다면 당연히 정복되었겠지만 현실은 일본이 섬, 그것도 열도 국가라는 것이다. 강화도조차 제대로 점령 못해서 빌빌대던 원이 아무리 남송과 고려의 도움을 얻는다 해도 다시 더 멀리 바다를 건너서 일본을 점령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현대인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원 입장에서 일본은 현대인의 체감이나 생각보다는 드럽게 멀다는 것이다. 현대야 워낙 선박과 항해술이 발달하고 비행기까지 있으니 직선거리로 쭉 달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 당시에는 모든 물자와 군사를 남쪽에서부터 끌어올려 북경에 모은 다음, 다시 그걸 요서를 지나 요하를 건너 요동반도를 삥삥 돌아 압록강을 건너고, 3000리길을 남북으로 지나가서 경상남도까지 가야 한다. 그리고 원 입장에서는 그제서야 배를 타고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다. 규슈에 닿은 이후 끝이 아니라 다시 동쪽으로 직선거리만 해도 수백킬로미터를 길게 가야 한다.

일본은 주로 북쪽에 산이 있고 남쪽에 도시가 있다. 원 입장에서는 익숙지도 않은 배를 타고 상륙한 이후 다시 산 넘고 물 건너야 된다. 규슈를 정복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규슈 부근은 바닷길도 좁아터졌고 육지길도 좁아터졌다. 즉 행군로가 뻔하게 한정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 이유는 앞서 말했던 일본의 산과 강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기습당하기 딱 좋다는 것이다.

즉 원 입장에서의 보급로는 일단 규슈까지 닿는 것만 해도 당시의 불안한 항해기술을 믿고 남송지역에서 바닷길로 바로 규슈로 뿌리던지, 아니면 어떻게든 고려를 거쳐서 보다 더 안전한 보급을 유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봐야 규슈에 닿은 이후에도 좁고 뻔한 보급로를 길게 유지해줘야 한다.

고려처럼 육지로 연결되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말타고 맘대로 쓸다가 퇴각하는 것도 안 된다. 혼슈에서 규슈로 퇴각할 때도 위험하고 규슈에서 다시 고려까지 퇴각할 때도 항상 위험하다.

몽골이 국가의 모든 활력을 남송 정복에 쏟아붇고 그 여파로 일찍 망해버렸다는 주장이 있듯이, 몽골이 얼만큼 일본 정복에 열의를 보였나가 중요하다는 건데 쿠빌라이 칸 죽음 이후로 원정은 완전히 중단된다. 전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군사나 명분, 지형과 동맹이 아니라 전쟁수행의지이다.[91] 강력한 무기들을 잔뜩 가지고도 싸울 의지가 전혀 없는 군대라면 빈곤한 무장의 반군 상대로도 나라가 넘어간다. 결국 몽골은 일본 원정을 시도했으나 실패를 맛본 후 손을 털었고, 일본은 두 차례의 침공을 총력전에 가까운 준비와 저항으로 결사항전을 벌였다는 점에서 몽골이 일본 열도를 모조리 정복하는 건 가능성이 낮다.

일본이 의지가 없다면 어찌어찌 할 수 있었겠지만, 일본의 강한 전쟁의지를 봤을 때 원나라가 성공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전유럽을 정복했으면 사실 중국을 정복한 것과 다름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을 정복하지 못한 사례가 있듯이, 폭풍이 몰아치지 않는다고 가정해도[92] 섬을 정복하는 것은 어렵다.[93]

8.1. 대체역사: 만약에 일본 원정이 성공했다면?

만약 가마쿠라 막부가 굴복할정도로 일본 정벌이 성공했다고 가정한다면 일단 천황 가문에 원나라의 공주를 보내 몽골인의 피가 섞인 황족을 천황으로 세우게 할 것이다. 또한 고려처럼 시간을 들여 조정에 간섭 세력을 만드는데 이 경우 일본은 고려보다 훨씬 간단하다. 일단 싯켄 호죠 일문을 멸문시키고 새로운 무사 세력을 옹립시켜 주던가 슈고를 쪼개어 나누어서 인세이 쇼군, 싯켄 기타 등등 일본 역사 속에 등장한 모든 섭정세력을 전부 부활시켜 버리면 된다. 조정 내에서는 고셋케의 관백과 상황(조우고), 천황이 삼파전을 벌일 것이고, 동서로는 조정과 쇼군이 대립할 것이고 쇼군가 내에서는 쇼군과 칸레이가 서로 대립할 것이며 지방에서는 슈고와 고케닌들이 대립할 것이다. 여기서 가운데 이들 사이에 중재자 역할을 할만한 원나라의 외교 대리인을 잘만 뽑으면 원나라는 이들을 조율하면서 단물을 빨아먹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고려에게 새로 획득한 일본 영토의 일부를 떼어내 통치를 시키면 설사 일본에 대한 간섭을 상실하더라도 고려와 일본은 자연스레 대립하게 되니 원나라를 직접 위협하는 고려의 군사력 상당수가 일본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다만 일본의 황족과 귀족 세력은 세가 너무 약했고 만약에 세력의 균형이 깨지게 되면 바다 건너 개입하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금방 영향력을 벗어나게 될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이 독립을 선언하지 않는다 해도 사실상 무력개입이 힘들다는 것이다 일본은 수당 시대도 중원과 맞먹으려 하며 독자성을 기른 국가란 것을 잊으면 안된다. 따라서 원정이 성공했다 쳐도 조공국으로 끝날 것이며 이마저도 금방 독립해버릴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다시 원정할 만큼의 무력 개입은 1-2차 원정의 결과를 보자면 여러 모로 수지가 안 맞는 원정이다. 전국시대가 더 빨리 일어날 수도 있는데 원나라의 비호가 사라진 괴뢰정권이 실권을 잃으면서 지방 씨족들이 들고 일어날 수도 있다. 문화적으로는 무역이나 교류가 활발해져 복식이나 식습관 관례 등 몽골식 문화가 일본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직접적인 외세의 영향력 앞에서 그 반작용으로 전통 종교인 법화종 등의 불교나 신토가 중시되거나 중국과의 교류가 원활해짐에 따라 고려 말처럼 유교학자들이 크게 대두했을 가능성도 높다.[94] 또한 원나라와 정식으로 무역을 하면서 밀무역이 줄어들고 왜구가 쇠퇴했을 가능성 또한 있다. 확실한 것은 일본이 전국적으로 복속된 상태로 유지되었다면 고려에게 여몽전쟁에 맞먹을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끼친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은 있을 수 없었다.

만약에 천황을 통해 중앙집권을 한다 처도 천황은 다시 무사 세력에게 실권을 뺏길 것이다. 애초에 원나라가 조장할 가능성이 높다. 중앙집권 및 천황 권력 강화로 일본의 천황의 만세일계가 끝날 수도 있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지만, 원나라의 중국본토 내 봉토들인 남방인 장쑤성 일대 같은 곳조차도 중앙 결집력이 상당히 떨어지는데 바다 건너 수백년이 흐른 세월이 흐른 고착된 향토세력을 자기 땅도 관리 못하는 원나라의 개입으로 멀리 바다 건너 속국의 미미한 천황을 후원해 적대하는 무사세력을 일소할 수 있을 가능성은 적으며, 애초에 일본 내부세력 중에 천황의 대를 끊어버릴 정도로 강력한 세력은 없었다.[95][96] 확실한 것은 일본인들이 항공기를 이용한 자폭 공격을 카미카제라고 부를 일은 없었을 것이란 점이다.

반일감정이 있는 이들은 일본 원정이 실패한 것에 대해 아쉬워하는 경우가 많은데 점령을 하더라도 기껏해야 원나라 본토와 일본과의 거리가 먼 관계로 조공을 운송하는 업무의 대부분은 고려에 맡겼을 수는 있고 중간 과정에서 약간의 이득을 챙길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뱃길로 수송해야 하는 관계로 손실분이 더 컸을 수도 있다. 당연히 원나라는 손실분의 보충은 고려에 맡겼을 것이다. 또한 전쟁에 동원됐던 고려군의 상당수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 본토에 계속 주둔하여 피를 흘려야 했을 것이 당연하다. 이게 공민왕 대까지 지속됐다고 치면 원말명초에도 가용 병력이 부족해서 원나라에 저항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97] 하여간 일본이 독자적으로 발전하는 기세를 확실히 꺾어놔서 어느 이상으로 국력이 성장하지 못해 어쩌면 임진왜란도 없었을 가능성은 아주 조금이나마 있었을지도 모르나, 스노우볼이 그렇게까지 흘러갈 가능성은 낮다.

9. 현대 일본에서 바라보는 시각

근현대 일본에서는 이 승리를 자랑하면서 국가적 자긍심으로 찬양했다. 이를테면, 아시아에서 몽골을 이긴 건 유일하게 일본뿐이니 하는 말 등이다. 이에 대하여 반대 주장을 펼친 책이 다나카 요시키 창룡전이다. 사실 원나라를 진짜로 크게 물리친 베트남에서도 원나라에게 호되게 당했음에도 베트남의 명장 쩐흥다오 지휘 아래 원나라군을 크게 물리친 경우도 있고, 인도나 자바 등 여러 아시아 나라들도 원나라 군을 이겨낸 적이 있다. 문제는 이 허황된 이야기를 한국에서도 그대로 불법 출판한 여러 일본 책자에서 나온 걸 그대로 썼었다는 점이다.이는 1990년대만 해도 국내에서 번역이 아니라 한국인 저자들이 쓴 인문 역사 서적들에는 전 세계에서 몽골군을 이긴 유일한 나라가 일본뿐이라는 내용이 버젓이 들어갔다. 사실 1990년대까지 국내의 세계사 관련 서적들은 거의 다 일본 서적들을 불법으로 마구 베껴서 나온 것들이었고 그 밖에도 국내의 세계사 관련 지식이 매우 빈약했던 탓도 있었다.

아시아 전역에서는 몽골을 물리친 것은 베트남 말고도 여럿 있었다. 인도 인도네시아도 그랬는데 인도는 초창기 몽골 제국 시절 1299년 킬리 전투에서 몽골 왕자인 쿠틀륵이 이끈 20만 명의 몽골군을 30만 명의 기병과 2700마리의 전투 코끼리 부대로 격파했고, 1306년 다시 쳐들어온 10만 명의 몽골군을 라비 강 전투에서 격파하여 그중 6만 명을 포로로 잡아 델리로 끌고가 코끼리들한테 짓밟혀 죽게 하는 식으로 몽골군을 상대로 정면으로 평야에서 대규모 군대를 투입하여 대승리를 했었다.

그리고 훗날 원나라가 자바 원정을 시도했을 때 인도네시아 역시 북중국의 기병 위주 원군의 허약한 수군을 공략해 이를 막아냈다. 심지어 미얀마도 파간 왕조가 원나라의 대대적 공세로 멸망했으나 끝내 원나라가 정복하는 건 실패했다. 물론 이때 원나라 침입과 이후 신뷰신과 싸우던 청나라 팔기군의 침입 후 미얀마인들은 중국인을 굉장히 혐오하여 중국 하면 이를 간다. 이민족 정복왕조들 때문에 한족까지 싫어하게 된 것이다.

덤으로 몽골을 물리친 일본도 그렇지만, 여러 나라들은 이기긴 했어도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했다. 쩐흥다오도 3번이나 엄청난 대군을 막아냈지만 4번째 원나라군 파병으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이미 군이 한계라고 포기했고 대월국 인종도 사신을 보내 항복하려고 했다. 조공을 바치며 신하 나라로 대원제국을 받들겠다고 했지만, 쿠빌라이칸은 거절하고 각오하라고 사신을 내쫓았던 것. 그러다가, 쿠빌라이칸이 운좋게 병사하는 통에 겨우 위기를 넘겼으나 기회를 보던 참파 왕국에게 대월은 크게 패했으며 이후 명나라에게 1407년 정복당해 21년동안 지배받아야 했던 것도 몽골과 전쟁에서 쏟아부은 점이 컸었다.

나아가 당시 태풍의 역할이 지나치게 과장되었으며 실제로는 원나라가 일본군에 의해 전술적으로 격퇴되고 있었다는 시각 역시 존재한다.[98]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일본이 태평양 전쟁 말기에 카미카제 특공대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나라를 구한 태풍'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였으며, 그로 인해 자국 무사들의 역할을 지나치게 깎아내렸다는 견해가 있다. 실제로 '승자'인 일본 측의 기록에서는 승전에 대한 세세한 기록들이 더 많으므로, 이러한 것들을 취사선택하여 '태풍은 부차적인 요인이었고 원나라는 이미 패퇴하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기도 한다. 그러나 원나라의 집단 전법과 다양한 화약 병기 등 일본 입장에서 굉장히 생소한 전법으로 인해 일본군이 초반에 압도되었다는 것은 당대 일본 사서에 엄연히 기록된 내용이기도 하므로, 쉽사리 '일본의 퍼펙트 승리'를 주장하지는 못하는 모양이다.[99]

1950년대 일본에서 이 원정을 흥미로운 시각에서 바라본 소설이 발표되었다.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가 지은 《풍도(風濤)》. 한국에도 번역본이 나왔는데 원제를 그대로 쓴 것과 적당히 의역해 '검푸른 해협'이라고 제목을 붙인 두 종류의 번역본이 있다. 재미있는 건 "일본"이 주인공이 아닌 충렬왕 김방경이 주인공으로 일본 원정에 따른 고려 백성들의 고난과 투쟁기를 다룬다. 사실 이 당시의 고려를 미 군정 하의 일본에 빗대어 냉전 시기 군사 기지화 한 일본의 상황을 비판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노우에 야스시의 이 소설이 의외의 역할을 한 것이 있다면 일본 사람들이 갖고 있던 은근한 묵은 감정(?)을 어느 정도 해소해 주었다는 점이다. 이노우에 야스시가 《풍도》를 쓰면서, 또 저자 본인이 생전 “고려도 역시 몽골에 정벌당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을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일본의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표했고, 한일 간 이해의 폭이 다소나마 넓어졌다고 평가받는다.[100] 물론 본토는 크게 피해를 입지 않았고 하도 오래 전 일이라 별 신경 안 쓰는 사람도 있는 등 개인차는 있다.

NHK 대하드라마 < 호죠 토키무네>(2001년)에서 이 원정을 다루었다. 해당 방송 38화 中. 참고로 해당 영상에서 처음 날리는 화살은 '카부라야' 혹은 효시, 명적 화살이라고도 하는 휘파람 같은 소리가 나는 화살인데 일본에서는 당시 이것과 나노리로 개전의 신호를 알렸다. 하지만 고려인들이나 몽골인/거란인/여진인들 혹은 원나라 치하 한족들은 그런 격식을 갖춘 싸움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101]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만다. 여원연합군이 트레뷰셋을 사용해 던지는 폭탄은 진천뢰로 추정된다. 이미 금나라 때 개발되었으며 조선의 비격진천뢰와는 달리 수류탄에 가까웠다. 주로 손으로 던지지만, 각종 투척기로 날려보내기도 했다.

여담으로 작가의 독특한 해석인지, 1차 원정 때 원군의 철수 이유를 태풍 때문이 아닌 일본에게 경고를 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1차 원정이 원의 무력 시위였다는 해석이다.[102] 다만 연출 시 고증에 문제가 있는데, 몽고습래회사에서 명백히 차이가 있는 고려군을 몽골군과 똑같이 만들었다. 또 고려의 김방경과 원의 홍다구도 등장했는데 한국인 배우가 아닌 중국인 배우를 김방경으로 출연시켰다. 사실 한국 사극도 일본인이나 중국인 배역에 한국 배우를 기용하는 경우가 대다수인 것을 고려하면 그냥 되는대로 쓴 듯 하나, 13세기 고려에서는 손꼽히는 인물인 김방경의 역사적 입지를 생각해보면 차라리 친원파 홍다구를 중국인 배우가 맡고 김방경은 재일동포나 한국인이 맡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1892년에는 일본이 제국주의로 접어들며 이것을 기념하는 군가도 만들어젔다. 원구 문서로. 이후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청을 압도한 뒤 원구의 복수를 했다고 여기게 된다.[103]

9.1. 음모론

일설엔 원나라가 남송의 잔여 부대들을 성공하면 좋고, 실패하면 반란 위험도 줄이고 입도 덜고 하는 심정으로 원정을 보냈다는 말도 있다. 결국 10만의 병사들은 현해탄의 고기밥이 되었으니(...) 말이다.[104]

일본사 연구가 중 음모론자들은 이 사건이 反 가마쿠라 막부 성향의 다이묘들이 사주한 것이라 주장한다. 즉, 반 가마쿠라 성향의 다이묘 가운데 한반도 도래인의 후손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고려와 손잡고 '가마쿠라 막부 좀 밟아주세요' 해서 원정이 시작되었다는 주장이다. 이외에도 해당 정벌의 원흉을 충렬왕(...)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고려가 굳이 이득도 없는 일본 원정을 단지 저런 이유만으로 강행하려고 했는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도 그 반 가마쿠라 성향의 다이묘들은 저 원정 당시에 왜 배후에서 군사행동을 안 했던 걸까? 백년전쟁 당시만 해도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플랑드르인들과 함께 이간질한 부르고뉴파만 해도 배후에서 프랑스 왕을 괴롭혔던 걸 생각하면 말이 안 된다.[105] 그런 걸 생각하면 터무니 없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고려가 막대한 자원을 착취당한데다 애초에 몽골의 침입으로 전 국토가 황폐화된 지경에 침략전쟁을 또 벌인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10. 번외: 원나라의 아이누 침공

원나라 아이누 족이 살던 사할린 섬을 타타르 해협을 건너 1264년, 1284년, 1285년, 1286년에 침공하기도 했다. 몽골이 사할린 섬을 공격한 사연은? 원사 세조본기에 따르면 1만의 병력을 투입했다고 하는데 몽골인들은 겨우 2만 병력으로도 러시아 공국 연합군 8만을 탈탈 털어버릴 만큼 당대 기준으로 정예병이었기 때문에 아이누인들에게는 가히 외계인의 침공이나 마찬가지의 날벼락이었다. 만주 동부와 연해주에 거점을 마련하고 쳐들어온 원나라 동로군[106]은 사할린에 거점을 확보하고 둔전을 일궜지만 아이누들의 저항이 의외로 강력했고 하필 1287년 원나라 본토에서 카이두를 중심으로 동몽골의 왕가들이 합세해서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사할린 지배가 그리 오래가진 못했고 조공 체제를 유지했다.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여몽연합군 규슈 침공과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짐작하기 쉽지만, 원나라, 명나라 시기의 지도를 보면 당대인들은, 규슈 , 혼슈 , 홋카이도, 사할린이 쭉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아예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원나라 지도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만 봐도 연해주 사할린 일본 열도는 실제로는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계속 이어져 있지만 지도에는 완전히 다른 위치로 표기되어 있다. 지도에서는 일본 열도가 대륙의 먼 남쪽에 위치해있고, 연해주 사할린이 대륙의 극동쪽에 위치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만약 그걸 알았다면 여기서 도호쿠 방면으로 남진하면 태풍도 거의 없고 원나라 본토인 만주에서도 더 가까운 침공 루트인데다[107] 겨울에는 타타르 해협이 얼어붙어서 걸어서 건널 수도 있기 때문에 이쪽 루트로 침공을 고려해볼 수도 있었겠지만, 지리 지식의 부재로 그러지 않았다. 물론 이쪽 길은 상당히 험하기도 하고 여름에 출병한다 해도 원주민들의 저항이나 당시 숲과 산으로 울창하게 둘러싸인 홋카이도 사할린 섬의 특성상 몽골 기병을 포함한 원나라 원정군들이 게릴라에 상당한 타격을 입을 가능성도 있는지라 태풍만 없다 치면 고려를 통해 공격해 들어가는 루트가 훨씬 안전하다 볼 수 있겠다.

더욱이 이 당시 일본의 중심지는 교토와 그 서부 지역이었고 현재의 도쿄를 포함한 관동 지방은 그냥 뻘밭이었으며[108] 일본 동북부는 미개척지였다. 따라서 만주 동부와 연해주에서 사할린, 홋카이도, 일본 도호쿠 지방을 거쳐 규슈로 간다는 건 지리를 알아도 수만 명의 보급이 힘든 루트였다. 지역민들의 게릴라는 덤이다. 거기에 만주 자체가 지형이 험악해 대규모 군대의 기동이 여의치 않고 원에 복속하지 않은 야인여진[109] 부족들의 습격이라는 변수도 커서 중간에 전력 누수가 더 심했으면 심했지 득을 볼 순 없었을 것이다.

11. 대중문화에서

드라마 호조 도키무네가 원나라의 일본원정을 다루었다.

애니메이션으로는 앙골모아 ~원구전투기~가 있다.

그보다 먼저인 1980년에 나온 마르코 폴로가 주인공으로 나온 마르코 폴로의 모험이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도 1회를 거의 차지했다. 각색되어서 1281년 24살인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군과 같이 가는 게 나오는데 고려군은 아예 생략. 극중 일본군은 대사도 없이 나와 그야말로 원나라군에게 학살 수준으로 마구 당한다. 갑옷 차림 일본 장수도 극중 마르코 폴로와 친하게 된 원나라군 젊은 장수에게 가볍게 한 칼에 베여 쓰러졌다. 폭풍 때문에 원나라군이 지자 그 장수가 원나라군이 지다니라고 절규한다. 물론, 당시 원나라는 이미 여럿 전투에서 패했다. 1257년 베트남 원정 역시 참패한 전투였다. 뭐, 극중 24년이나 지나 젊은 장수에게 처음으로 겪는 패배라고 볼 수 있겠지만.

쇼군 토탈워 확장팩 몽골 인베이젼에선 몽골군이 이기면 몽골 제국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몽골 제국의 주요 영토가 된 일본 주가 된 가상 역사로 막을 내린다.

고스트 오브 쓰시마에서는 1차 원정 당시 코모다 해변 전투에서 생존한 사무라이 사카이 진 코툰 칸이 이끄는 몽골 군대에 맞서는 내용이다.

12. 관련 문서



[1] 율리우스력 기준 11월 4일 ~ 11월 19일. 그레고리력 1582년에야 발명되었기에 율리우스력으로 변환하는 것이 옳다. 굳이 그레고리력을 따르면 7일이 추가되어야 하므로 11월 11일 ~ 11월 26일이라 할 수는 있다. [2] 율리우스력으로 6월 9일 ~ 8월 22일. 역시 그레고리력은 아직 발명 이전이었다. 굳이 그레고리력을 따르면 6월 16일 ~ 8월 22일. [3] 몽골측 기록에서는 김선(金侁)으로 기재되어 있다. [4] 일본 원정을 위해 고려에서 둔전을 하던 중 홍다구와 함께 삼별초의 난을 진압한 여력이 있다. [5] 고려에서 주둔한 이와 원정을 간 이가 서로 다르다는 이야기도 있다. 해당 항목으로. 만약 서로 다른 인물일 경우 직위도 도원수, 봉주경략사로 달라진다. [6] 양절(兩浙)은 오늘날의 저장성 전체와 장쑤성 남부를 아우르는 지역이다. [7] 강풍이 불었을 때는 상당수 인원이 육지에 들어가서 생존율이 높았지만, 이후 막부군에 포위되면서 강남군과 원군은 거의 몰살되었다.+토네이도 [8] 원정군 병력에는 멸망한 금나라, 남송, 서하 출신 한족들이 대거 동원되었다. 문제는 이들의 충성심과 전투의지가 미약했다는 것이다. [9] 특히 일본을 낮추어 부르는 '왜'가 아니라 '일본'이라는 어휘를 선택한 것도 주의할 만하다. 사실 '일본'이라는 국호 자체는 훨씬 이전인 8세기에 정립되었지만, 중국과 한반도 왕조들은 자신들이 처한 외교적 상황 및 대의명분에 따라 왜와 일본의 호칭을 혼용했다. [10] 기록에 따르면 고려군은 합포에서 출발해 지금의 거제대교가 있는 견내량과 거제도 서쪽 해안선을 거쳐 남진한 뒤 대마도로 건너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를 반영하지 않고 거제도 동쪽 해안으로 이동한 것처럼 그렸다. 당시 고려수군 진영도 거제면에 있었고 이는 대한해협의 해류로부터 안전하여 고대부터 쓰인 항로다. 2차원정도 그렇고 여말선초 대마도 원정 때도 마찬가지였다. [11] 고려를 독립국으로 볼 것이냐에 관하여는 여몽관계 문서로. [12] 전투 병력은 8천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뱃사공이었다. [13] 원조에 의해 패망한 남송의 잔여 병력. 1차(1274)와 2차(1281) 그 사이에 남송이 멸망했기(1279) 때문이다. [14] 함선 3,500 [15] 몽골인 지휘관 밑에 거란/ 여진족 한족으로 구성된 하급 장수와 군졸들이 딸렸다. [16] 함선 900척 [17] 1차, 2차 전쟁 모두 태풍 때문에 실패했다. [18] 몽골과 만주의 갑옷이 이같이 목까지 보호한다. 청나라 팔기군 두정갑을 봐도 알 수 있는 부분. [19] 몽골군이라고는 하지만 몽골인은 귀족인 니룬뿐으로 잡병으로 복무하지 않았으며 하급 장교 이하는 전원 서하나 금나라의 한족들이나 거란/여진인들이었다. [20] 아래에도 있다 [21] 오스프리 책들에서 한국 관련 삽화는 정확성이 떨어지는 국내 민족기록화를 참고한 게 많다. [22] 그쪽 필진들 중에 일본사와 중국사에 대해 전문적으로 쓰는 저자들도 있고, 축적된 데이터도 그만큼 많지만, 한국 관련 저자는 없다 [23] 경상남도 함안군 출신으로 일본과의 교류가 잦았던 합포(마산) 및 금주(김해), 동래(부산) 등과 가까워 일본의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24] 불러서 타이름을 뜻한다. [25] 이른바 풍도험조(風濤險阻). 후술할 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 제목 역시 여기서 따왔다. [26] 거제 반씨의 시조. [27] 다만 그보다는 한반도나 중국의 대외 사정에 대해서 정말로 무지해서 그랬을 가능성이 더 높다. 실제로 일본 조정은 고려 조정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삼별초와 고려 조정의 차이점도 몰라서 허둥댔을 만큼, 정말이지 대외 사정에 대해서 너무 몰랐다(...) [28] 잡은 섬 사람들한테는 "내가 니들을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너네한테 국서를 보냈는데 너네가 대답이 없어서 그랬다."고 했다. [29] 이후로 1268년, 1269년에도 지속적으로 일본을 초유했으나 일본은 거듭 이를 무시했다. [30] 쿠빌라이가 이때까지는 남송을 먼저 칠지 일본을 먼저 칠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듯 하다. [31] 고려 원종의 조정이 보낸 국서와 삼별초에서 보낸 국서에서의 몽골에 대한 태도가 판이하여, 같은 고려 국서인데 왜 이러냐고 무지 헷갈려했다. 삼별초 문서로. [32] 한족화된 여진족 출신의 관료다. 원에는 사람이 워낙 부족해 색목인이나 한족, 거란/여진족 관리가 많았다. [33] 지방 군벌 [34] 슈고보다 하위 계급 [35] 제주도에 목장을 설치한 것도 일본 원정에 필요한 군마를 이곳에서 조달하기 위해서였다. [36] 그의 가문은 일찍이 조부 홍대순(洪大純) 시절에 몽골에 투항해 부역하였으며, 부친 홍복원(洪福源)도 여몽전쟁 시절에 몽골군 앞잡이로 활약해 매국노 짓을 했다. 거기에 홍다구는 어린 시절부터 원나라에서 벼슬을 했기에 고려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홍다구의 동생 홍군상(洪君祥)은 일본 정벌 당시 고려의 사정을 원 조정에 전달하여 그 부담을 경감시켜주게 해 고려에서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익성후로 봉하였다. [37] 여진족으로 별 능력은 없었으며 고려군을 우습게 보고 독자행동하다 화살 맞고 아프다며(...) 중국으로 돌아가서 다신 안 오는 찌질한 추태를 보였다. 2차 원정 때 합류한 남송 출신 한족 항장 범문호가 오히려 더 활약했다. [38] 원나라군에서 몽골인은 예나 지금이나 적은 인구 탓에 지휘관 몇 명을 제외하면 매우 적었고, 대부분은 이미 원나라에 항복한 한족이나 여진족, 혹은 몽골 제국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거란족 출신들이 훨씬 많았다. 실제로 밑에서 서술할 일본군의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은 유복형도 산동성 출신의 금나라 항장인 여진족이었고 수군 사령관 범문호는 남송 항장 출신의 한족이었다. [39] 이때 격군이 전투 병력보다 배로 많았던 판옥선과 비교하여 뱃사공이 전체 규모의 절반도 안 되는데 어떻게 일본까지 간 건지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판옥선은 연안 전투함이자 평저선이었다. 격군이 많았던 이유는 돛을 이용하기보다 전장 기동성을 위주로 운용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일본 원정용 함선이라면 원양 항해를 목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수부가 적게 필요한 것이다. [40] 이때만 해도 일본과의 교역은 동래부(부산)보다는 합포(마산)이 주로 쓰였다. [41] 어째서 의외로 병력이 이렇게 적은지 의문을 표할 수도 있지만 쓰시마의 지형 특성상 동원 가능한 무사들의 숫자가 적을 수밖에 없었고, 이는 이키섬도 마찬가지였기에 이키의 슈고다이 타이라노 카게타카도 고작 100여기의 무사들과, 당시 규슈에서 활동하던 해적 무리들인 마츠라토(松哺黨)의 전사 소수만을 이끌고 출전하게 되었다. [42] 이 전투가 애니메이션 앙골모아 ~원구전투기~, 게임 고스트 오브 쓰시마의 배경이다. [43] 오후 네 시에서 여섯 시 사이 [44] 가마쿠라, 무로마치 막부 때 지방관으로,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슈고(守護)들의 대리인이다. [45] 참고로 일본은 한국, 중국과 같이 국가의 필요에 의해 훈련된 전문 기병 부대가 1862년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영주 휘하 사무라이들이 직접 말을 타고 다른 나라의 기병 부대에 해당하는 역할을 대신했다. [46] 타이라노 카게타카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정4위가 추증된다. [47] 그리고 어차피 연합군 손에 죽으나 자신의 부모 손에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자포자기 심정에서였다. [48] 1차 원정에서 훈둔이 말하길, "비록 몽골의 병사들이 전투에 익숙하다고는 하나 어찌 고려의 병사들보다 더 낫겠느냐"라고 했다고 한다. [49] 훗날 임진왜란에서 노량 해전에 참전하며 전력 대부분을 잃지만 일본군 주요 지휘관들의 안전한 패주를 성공시킨다. 시마즈군이 개싸움을 벌여 조선 수군의 혼을 빼놓고 명에 뇌물을 준 덕이었다. [50] 호죠 토키무네를 다룬 드라마에서도 이것이 묘사되는데, 실제로 가게스케 본인이 직접 활을 쏘았지만, 드라마 상 묘사와는 달리 분전 중 추격해오는 유복형을 맞추었다고 한다. 또한 연합군에게서 노획한 활로 맞춘걸로 묘사되지만, 승마 상태에서 자신의 장궁으로 맞추었다. 유복형은 이때 죽지는 않았지만 부상이 심해서 상처를 치료한다고 먼저 배를 타고 원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고작 화살 한 대에 아프다며 징징거리고 싸우지도 않고 되돌아가 버린 것을 보면 확실히 졸장이 맞다. 뒤에 벌어진 일들을 생각한다면 노린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51] 성 이름이 미즈(水)+키(城) 즉 '물의 성'이라는 뜻이다. 과거 백제부흥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왜국으로 망명한 옛 백제 유민들이 다자이후를 비롯해 규슈 각지에 쌓았던 '조선식 산성' 가운데 하나인데, 원래 왜국 조정에서 백제 유민들을 동원해 미즈키성을 비롯한 '조선식 산성'들을 쌓았던 목적이 혹시 있을지 모를 당나라와 신라로부터의 일본 열도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상대가 바뀌었을 망정 원래 쌓았던 목적을 한 700년 쯤 지나서 달성할 뻔했다고나 할까... [52] 고려 측 배도 중국 쪽 못지않게 허약했는데 1274년 홍다구의 악랄한 독촉으로 4개월 만에 군함 900척을 급조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53] 이 때 동행한 통역관 서찬도 함께 처형당하는 운명을 맞이 했는데, 서찬을 포함해 사신단을 이끌던 5인의 신상과 그들이 최후에 남긴 시문이 일본 사서 '가마쿠라 연대기'에 전해지고 있다. [54] 현존하는 북부 규슈 지역 최대도시다. 일본 내에서 야쿠자의 활보로 치안이 좋지 않기로 유명하다. [55] 이국인 고려 측의 상황이 막부 측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데다 당시 일본의 국력으로 해외로 출정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당시에는 고려가 평화를 찾고 무신정권이 붕괴되면서 고려군이 원에 복속된 형태이기는 해도 그럭저럭 재건된데다, 원나라군도 다수가 고려에 주둔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물론 일본 원정이 끝난 뒤에는 원나라가 고려군을 철저하게 약체화시키면서 13세기 말 카다안. 그리고 14세기 내내 이어진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조차 제대로 막지 못하던 그 약체 고려군이 나오게 되지만, 이 시기에는 일본 원정에 끌고 가야 했기 때문에 오히려 해체하지 않았다. 게다가 막장테크 타던 시절에도 침략 수개월 뒤 20만을 모을 수 있을 만큼 동원력은 건재했기 때문에 막부가 고려로 쳐들어가면 원래 자기들이 생각했던 혼슈에서의 원나라 군대와의 대결을 고려군 상대로 반대 입장에서 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더구나 그때 고려 수군은 그야말로 넘사벽이어서 침공해봐야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함대에 당한 대굴욕을 미리 겪었을 것이다. [56] 당시 원나라에 부족했던 수군 장군이어서 대규모의 수군 전단을 끌고오자 쿠빌라이가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훗날 후금 역시 모문룡이 이끄는 가도 패거리의 항복 후 명나라 항장들이 대규모 수군과 함께 조총, 불랑기포, 홍이포 등 화약무기까지 가져오자 천군만마를 얻었고 조선을 병자호란에서 패퇴시켰다. [57] 뱃사공 상좌(上左)와 바닷길 안내자[引海] 일충(一冲) 등 네 명이 일본으로부터 도망쳐 돌아와,“지원(至元) 12년(1275) 황제가 사신을 일본에 보낼 때 우리나라에서는 통역관으로 낭장(郞將) 서찬(徐贊) 및 사공 서른 명을 함께 보냈는데 사신과 서찬 등은 모두 살해되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이에 왕이 낭장 지선(池瑄)을 시켜 상좌 등을 원나라로 압송해 그대로 보고하도록 조치했다. [58] 일각에선 '몽고의 침략과 동시에 50년 전부터 출몰해 약탈을 해대기 시작한 왜구가 지긋지긋한 데다가, 원나라와의 관계를 가까이 하여 지분을 얻고 원나라의 앞잡이 홍다구가 고려에서 패악질을 벌일 틈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고도 하나 1차 원정 동원때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을 날린 고려가 또 휘말리면 고통스러운 것은 당연해서 울며 겨자먹기로 휘말린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매도 먼저 맞으려고 했다는 게 옳을 것이다. [59] 지금도 쇼니 스케토키는 이키 섬의 신사에서 제신(祭神)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60] 나가사키에 있으며 정성공이 여기서 태어났다. [61] 이 당시 막부군이 동원한 배들은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물을 퍼나르던 아주 작은 크기였다(...) [62] 참고로 배가 소선이였던 탓에 보다 체급이 컸던 고려 함선인 '천료주'에 접현이 힘들어 배의 돛을 부러뜨리고(...) 올라탔다고 한다. [63] 이때 총대장 우츠노미야 사다츠나의 나이는 무려 16세였다. 물론 당시 15세 정도면 성인 취급이었기에 가능했으며, 당시 우츠노미야가는 관동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문무가 뛰어났기에 호죠가 신뢰하고 맡긴 것으로 보인다. [64] 사실 이번 2차 원정 시기는 동아시아에서 태풍이 많이 활동하는 6월 - 8월(양력)이다, 즉 앞의 1차 원정과 달리 2달 동안 강풍을 안 만난 게 기적이었던 것이다. [65] 당시 일본은 중국 대륙의 왕조나 문화권을 그 시점에서의 정식 국호로 호칭하지 않고 일본과 제일 밀접한 관계였을 시절의 국호인 당(唐, 일본어로는 카라 또는 도우라 읽는다.)으로 퉁쳐 불렀다. 명나라로 쳐들어가려던 임진왜란 역시 카라이리(唐入り)라 불렀다. 심지어 조선인을 비롯한 외국인도 당인(唐人, 도진)이라 불러서 조선 통신사가 항의하는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했으며( 아메노모리 호슈 문서로.), 통신사의 수행원이었던 조선인 최천종이 일본 측 역관에게 살해당하는 사건 역시 당나라 사람 살인사건(唐人殺し)라 불렀다. 사실 무로마치 막부부터 당시 일본 사상가들의 세계관은 전통적인 일본(本朝), 중국(唐土), 인도(天竺)의 삼국관에서 무로마치 말기 이후 인도가 탈락하고 유럽(南蛮)이 추가되는 형태로 바뀌었다. 이를 근세적 삼국관이라하며 이들의 세계관에서 조선, 류큐, 에조 등은 중국이나 일본에 종속된 존재로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66] 우창은 포로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탈출하였으나 막청과 오만오가 일본에서 탈출해 고려에 귀부한 해는 충렬왕 8년인 1302년이었다. 여몽연합군이 합포를 떠난 해가 1281년이었으니 장장 20년 이상을 노예로 혹사당한 것이다. 나머지 포로들은 노예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보인다. [67] 특히 강제로 동원되었고 원나라에 대한 악감정이 많았다. [68] 이에 대한 내용은 KBS 역사스페셜 145회에 방영되었다. [69] 1차와 2차 원정 모두 귀환병의 절대다수는 고려인이었고, 고려군 병력들만이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제대로 된 함선에 타고 있었기에 의심할 만한 상황이기도 했다. 하지만 고려군의 조선술과 고려 지휘관인 김방경의 판단력이 원나라에 비해 월등히 뛰어났기 때문에 귀환 비율이 높았다는 역사학자들의 의견도 다수다. [70] 이 활의 중시되는 일본의 전투는 언어적으로도 남아서 최고의 무사를 '弓取り'(활잡이)라 칭할 정도였다. [71] 蒙古か矢、みじかしといへとも、矢のねに毒をぬりたれは、ちともあたる処、とくに氣にまく、かくて敵より数百人、矢さきを、そろへて雨のことくに、いけるに、向ふへくもあらす、楯、鉾、長柄、物の具の、あき間をさして、はつさす、一面にたちならんて、もし、よする者あれは、中に包て引退て、左右より端をまはし合せて、とりこめて、皆ころしける...그 후에 그 무사의 간을 뽑아먹고 말까지 잡아먹었다는 기술이 있으나 생략. (小野尚志『八幡愚童訓諸本研究 論考と資料』三弥井書店 2007年 194〜195頁) [72] 日本の軍の如く、相互に名のりあひ、高名せすんは、一命かきり勝負とおもふ処に、此合戦は、大勢一度に、より合、足手のうこく所、われもと取つきて、おし殺し、又は生捕けり、この故に、かけ入ほとの日本人に、一人として、もれたる者こそなかりけれ [73] 말을 직접적으로 공격해서 기수를 무력화하는 충격력을 갖췄다. [74] 물론 총기라고는 해도 시대가 시대인지라 화승총 같은 총기류가 아닌 44cm 정도 길이에 직경이 3cm 정도 되는 핸드캐넌이었고, 두명이 뒤에 나무 대를 잡고 버티는 형식이었는데, 당연하게도 화약이 터졌을 때의 반발력은 사람이 온전히 감당할만한 수준이 아니다보니 150m 이상 날아가도 유효사거리는 50m가 채 안 되는 것은 물론, 바로 앞에 갖다 대고 쏘는 게 아니고서야 사람을 맞추는 건 매우 힘들었다. 물론 화기의 특성상 활과는 달리 어디를 맞든 치명상을 입히며, 딱히 막을 수단도 없으므로 한 명만 맞아도 병사들이 공포에 질리게 하기엔 충분했을 것이다. 화포 역시 나중에 등장하는 불랑기포 같은 대포가 아닌 대구경 핸드캐논이었다. [75] 지름 14cm의 청동 용기 안에 화약을 담고 심지를 꽂은 것으로, 심지에 불을 붙여 터트리는 원시적 수류탄이다. 폭발하면서 주위로 흩어지는 깨진 청동 조각으로 피해를 줄 순 있었겠지만, 수류탄의 특성 상 매우 근접하지 않고선 정확하게 던지기 힘들고, 정확히 던진다고 해도 언제 터질지 알 수 없는 건 둘째치고 불발될 가능성부터 높은데다, 당시 화약의 폭발이 균일하지도 않고 충분히 강하지도 않아, 직접적인 피해를 노리기보다는 폭발음에 말이 놀라서 일어나는 기동력 상실을 주로 노렸다. [76] 원군은 퇴각하면서 이 철포(鉄砲)를 던져 퇴각시 추격을 막았다는 기록도 있다. [77] 여담으로 이 무쿠리 고쿠리는 산 사람을 잡으면 생가죽을 벗겨 내버린다는 전설이 있다. [78] 이때 쿠빌라이는 일본에 불교가 융성하다는 정보를 듣고(당시 일본의 지배자 호죠 토키무네가 머리를 깎고 불교에 귀의하기도 했다.) 승려를 부사로 삼아 보냈으나 배의 승무원들과 수행원들이 과거 사신단들의 최후를 알아내고는 선상 반란을 일으켜 이들을 모두 죽이고 도망쳤다는 기록이 있다. # [79] 사실 쿠빌라이 칸이 일본보다 더 치려는 상대가 있었는데 바로 베트남이었다. 베트남은 원격한 거리와 열대 밀림 지대, 그리고 쩐흥다오의 지휘 아래에서 육로로 이루어진 원군의 진격을 막아내는 위업을 이룩했다. 이외에도 몽골 제국을 격퇴한 건 자바, 이집트, 인도를 꼽을 수 있다. 원의 3차 베트남 침공은 대(對) 일본 원정을 중단시키고 침공한 상황에서 1287년에 이루어졌고, 쿠빌라이 칸은 4차 베트남 침공을 준비하던 와중에 죽었다. [80] 홍다구의 동생이다. [81] 이 공으로 홍군상은 고려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받고 공신으로 우대받았다. [82] 몽고습래회사를 제작한 타케자키 스에나가만 하더라도 1차 원나라 침공 당시에 선봉장으로 싸웠음에도 자신의 공을 막부로부터 인정받지 못해 자신의 말까지 팔아가면서 여비를 마련해 직접 가마쿠라로 가서 고케닌 아다치 야스모리를 만나 호소, 기어이 히고 가이도 향(海東鄕)의 지토 자리를 얻어냈다. [83] 고려가 제대로 망한 건 14세기 흑사병과 원나라의 경제파탄으로 인해 보유한 교초가 말 그대로 종이가 된 이후이며, 이 때는 일본도 무정부 상태여서 고려에 보복한다고 해봐야 왜구들이 수천명 단위로 상륙해서 약탈하는 정도였다. 일본이 후일의 임진왜란처럼 15만이 넘는 대군을 한번에 함선에 태워서 고려에 보낼 수 있다면 모를까, 그 정도가 아니라면 보복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임진왜란 역시 일본 입장에선 도박수였고 끝내 패퇴해서 정권의 붕괴까지 이어진 것을 감안해보면 당시보다 국력이 뒤떨어지는 일본 입장에선 평화로 해이해진 조선도 아니라 연이은 전투로 살기등등한 고려에게 보복이란 꿈이나 다름없다. [84] 제국대장공주를 따라 원에서 와서 고려에 정착해 살게 된 훌라타이(忽剌歺)라는 몽골인이 이 사람의 성을 빌려 써서 인후(印侯)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연안 인씨의 시조가 되었다. 인공수 본인은 고려인이며 교동 인씨인데, 사마진의 빙익대부(馮翊大夫)로 신라에 귀순했다는 인서(印瑞)의 33세손인 인빈(印份)이 고려 인종 때 한림학사를 지내고 교수부원군(喬樹府院君)에 봉해진 것을 시작으로 교동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인공수의 손자가 공민왕 때에 압록강 서쪽 8참을 공격했다가 처형당한 장군 인당(印璫)이다. [85] 다만 일본 원정이 끝난 후 원이 고려의 정규군 육성을 철저하게 막았다는 점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기는 하다. 남송처럼 대놓고 식칼도 소유 못하는 수준까진 아니었다지만 사회질서 유지와 외적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최소한의 병력만 유지하는 상황이다 보니 카다안(합단적)의 공격에 적극적으로 맞서기 위해 필요한 군대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14세기 중반 이후에는 홍건적의 침입 등으로 군사력이 필요해졌고 원나라도 영향력이 약해져 군사력 육성이 가능해졌지만 이번에는 돈이 없어서 5만 명 이상을 보유하지 못했다. 다만 권문세족들을 위시한 유력 귀족들이 사병을 대거 보유했기 때문에 유사시 동원가능한 실병력은 그보다는 더 많았다. 당장에 국력이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공민왕 시기의 고려가 20만 대군을 동원하기도 했다.(다만 해당기록은 임진왜란당시 일본군 동원병력처럼 작은 단위까지 세세히 기록된 구체적인 수치가 나온것이 아니라 그냥 20만 홍건적이 침략해오자 20만 군사로 격퇴했다는식으로 간단히 서술되어 있어 과장된 수치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86] 애초에 원이 조공체제 등 중화질서 전통에 대한 이해가 심각하게 부족했던 것도 문제였다. 그저 수탈하기만 하고 주는 건 없으니 힘이 없어 굴복하긴 했다지만 고려인들의 감정이 좋을 리가 있나. 후대의 여진족이 만든 또 다른 이민족계 중국 통일왕조 청나라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에 의해 조선과의 관계 개선이 이루어진 것도 해당 황제들이 중화 전통에 대한 이해가 충분했던 덕분이다. 물론 청나라도 초창기엔 중화 전통을 모르는 통에 조선을 엄청나게 수탈해 원성이 잦았다. [87] 이 정도면 분열되긴 했어도 외적의 침공 앞에서는 똘똘 뭉칠 줄 알았던 일본이 더 나아보일 지경이고 실제로도 이 전쟁으로 가마쿠라 막부 호조씨는 쇠락의 길을 걸었으니 충분히 할 만큼 했다. [88] 14세기 고려 말기 인구가 이와 비슷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나 지금이나 중세의 동북아시아 삼국은 어지간한 중세 유럽보다 인구가 많았다. [89] 백년전쟁 때도 마찬가지였다. 흔히 잉글랜드가 대승한 전투 탓에 잉글랜드에게 털리기만 했던 프랑스라는 인식이 있는데, 실상은 잉글랜드에 너무나 괴로운 전쟁이었다. 국력도 프랑스가 2,3배 가량이라 잉글랜드가 약탈로 깔짝댄다고 해도 프랑스 왕권의 타격은 미약했으며 잉글랜드가 정규전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후에야 전쟁으로서 확전이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압도적인 승리 후 잉글랜드의 정치적 굴복이 늦어져 대내외적 상황으로 후퇴하면 프랑스는 금방 전쟁 때의 피해와 불이익을 회복해버렸고 잔 다르크가 반대로 연이어 승리를 거두자 빈손으로 전쟁을 끝내야 했다. [90] 『元史』巻一百六十八 列傳第五十五 劉宣「況日本海洋萬里、疆土濶遠、非二國可比、今次出帥、動衆履險、縱不遇風、可到彼岸、倭國地広、徒衆猥多、彼兵四集、我帥無援、万一不利、欲發救兵、其能飛渡耶、隋伐高麗、三次大擧、數見敗北、喪師百万、唐太宗以英武自負、親征高麗、雖取數城而還、徒增追悔、且高麗平壤諸城、皆居陸地、去中原不遠、以二國之衆加之、尚不能克、况日本僻在海隅、與中国相懸萬里哉、帝嘉納其言 [91] 명분은 전쟁수행의지와 큰 상관관계에 있긴 하다. [92] 이 가정을 극단적으로 하면 그냥 보급도 공세도 남경에서 바로 출발해서 바닷길로 규슈까지 가면 되기 때문에 상당히 쉬워지긴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말이 안 된다. [93] 영국과 일본의 사례는 다를 수 있겠지만 그나마 동쪽과 남쪽이 평지라 상륙도 쉽고 중심지인 남쪽 영토가 길게 유럽대륙에 닿아 있는 영국과 달리 일본은 동서로 길게 뻗은 열도라 국력이나 해군이 강하고 약하고 하는 것과는 별개로 최소한 자연지형적인 면에서는 일본 정벌이 훨씬 어렵다. 앞서 말했듯이 일본이 청야전술을 시전하거나 수도 버리고 튀기를 쓰면 답이 없다. [94] 이에 따라 유목민의 육식문화의 전래로 실제로는 메이지 시대에나 폐지된 육식금지령이 훨씬 일찍 없어질 것은 확실하다. [95] 흔히 퍼진 오해를 정정하자면 미나모토 가문이나 타이라 가문 등조차도 천황의 방계 출신이며 이들이 권력은 가졌어도 명분은 어디까지나 황가에 있기 때문에 천황을 완전히 몰아낼 만큼의 세력은 아니었다. 쇼군은 무가의 대표자이지 정통 군주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장 강력했던 에도 막부조차도 명분을 잃자 토막파와 전쟁 후 대정봉환으로 천황이 있는 조정에 모든 걸 양도해야 했다. [96] 사실 천황가는 방계나 여계 자손이 군주의 자리를 계승하여 왕조 명칭이 바뀌는 유럽식 왕조 교체와 비슷한 일이 여러 번 일어났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천황가가 만세일계로 이어져왔다는 표현은 반만 맞다고 볼 수도 있다. 허나 동양식으로 보면 아무리 먼 친척이라도 부계 계승으로만 이어져 왔다면 한 왕조로 치는 만큼 실존한 것과 부계계승이 확실한 덴노는 일본이 내세우는 만세일계와 비슷하다. 서양식으로 치면 조선왕조는 몇번이나 왕조교체가 일어난 셈이 된다. [97] 단 역으로 보면 일본에 주둔하면서 왜구의 영향력이 고려에 미치는 것을 차단할 수도 있겠지만, 원나라가 쇠퇴하여 일본에 대한 영향력이 사라진다면 바다 건너 병력을 유지하기 힘든 고려군은 바로 귀환했을 것이다. 당장 고려, 그리고 조선이 왜구에 시달린 가장 큰 이유는 왜구의 기지가 일본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대마도 정벌 당시에도 일본의 영토로 분류되었던 이키섬 등이 왜구의 근거지라는 건 조선도 알고 있었지만 일본의 영토라는 이유로 공격하지 않았다. [98] 물론 위위 2차 침공 문단에서 볼 수 있듯이 2차 침공 한정으로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99] 사실 여원연합군을 상대로 싸운 일본 무사들은 여원연합군이 강할 때에는 게릴라전으로 대응하다가 연합군의 함대가 태풍으로 침몰하고 나서야 고립된 연합군을 상대로 정규전을 펼쳐 요격하는데 성공했다. 여원연합군과 싸운 경험을 묘사한 그림인 몽고습래회사의 주인공이기도 한 타케자카 스에나가는 여원연합군의 1차 침공 이후에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다가 연합군의 2차 침공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에야 가마쿠라 막부에 포상을 요구하러 말까지 팔아가며 가마쿠라를 찾아가서 지토에 임명되었다. 또한 정작 여원연합군이 상륙을 시작한 6월 말 즈음에서 7월 1일까지, 일본은 이키 섬 지역을 점령당하고 규슈 북부의 섬들을 차례로 점령당하는 사태를 빚게 된다. 이후 가미카제가 온 것이 7월 말~8월 초 경이며,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은 바로 이 가미카제 이후에 이루어지며, 일본군에 의한 연합군의 잔당 소탕도 9월경에나 완료된다. 즉, 연합군은 보급이 끊기고 큰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고립되어 전멸하였던 것이지 결코 일본 무사들의 무력에 밀려서 전멸했던 것이 아니었다. # [100] 출처: 매일신문 사설 "일본 각료들의 자질을 우려한다" [101] 당장 섬 안에서 지들끼리 영지 갖고 치고박던 일본과 달리 중국은 한족과 이민족이 오랫동안 피 터지게 진심으로 전란을 벌여왔으며 요나라가 송나라를 격파하고 연운 16주를 뜯어가거나 이후 금나라가 송을 남쪽으로 밀어낸 정강의 변 같은 죽기살기로 싸운 이벤트가 많았다. 당장 그 원나라도 남송을 피터지게 싸운 끝에 간신히 멸망시켰다. 요-금-원에 차례로 시달리고 왜구 침입까지 겪은 고려는 말이 필요없었다. 고려나 중국에게 있어 싸움은 생존을 건 문제였지 무슨 예의 따질 여유가 없었다. [102] 독특한 해석까지는 아니고, 일본에서도 몽골사나 중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서 많은 수가 이런 의견을 보이고 있다. [103] 공교롭게도 청나라 자체가 기본적으로 만주족 왕조이긴 했지만 몽골족 또한 2인자격 민족으로서 나름대로 지위가 높았으며, 청일전쟁에 참전한 청군 병사들 중에는 몽골족 병사들도 있었다. [104] 이러한 설이 맞다면, 원나라가 일본원정 당시 고려를 강제로 동참시킨 것도 무신정권 패잔병들을 처리하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105] 굳이 따져보자면 김자점이 청의 침공을 유도해 혼란을 일으킨 뒤에 모반을 일으키려고 했던 것과 비슷다고 할 수도 있겠는데, 그렇다면 저런 혼란한 시점에 가마쿠라 막부를 급습하려고 하는 게 정상이다. [106] 지역 특성 상 만주에 잔존하던 여진족의 비율이 높았다. [107] 연해주와는 아예 바다를 마주하며 붙어 있으며 동만주의 훈춘, 옌지 등과도 가깝다. [108] 도쿄가 본격적으로 개발된 건 관동 지방을 영지로 삼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때부터고 에도 막부 시기 쯤 되어야 현재 도쿄의 모습이 등장한다. 애초 에조라고 부르던 아이누 잔당들이 관동과 도호쿠 곳곳에 남아서 일본과 싸우고 있었다. [109] 월타족, 오로치족, 나나이족, 에벤키족 등 만주 북부와 현재의 하바로프스크인 외만주 일대에 잔존한 퉁구스인들을 야인여진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원나라와 명나라에 복속되지 않고 순록을 유목하며 살다가 청나라 숭덕제에 의해 복속되었다. 조선은 이들을 올량합이라 불렀고 이게 오랑캐의 어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