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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03 04:40:17

모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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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연 초대 황제
세조 성무제 | 世祖 成武帝
출생 326년
모용부 창려군 극성현
(現 랴오닝성 진저우시 이현)
사망 396년 6월 2일 (향년 70세)
후연 상곡군 저양현
(現 허베이성 장자커우시)
능묘 선평릉(宣平陵)
재위기간 초대 황제
384년 1월 ~ 396년 6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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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8a2c8><colcolor=#000> 성씨 모용(慕容)
패(霸) → 수(垂)
부모 부황 태조
모후 문소황후
형제자매 19남 1녀 중 5남
배우자 성소황후, 장안군 가씨, 오왕비 단씨
성애황후, 황태후 단씨
자녀 10남
아명 숙인(叔仁)
도명(道明)
작호 빈도후(賓都侯)
묘호 세조(世祖)
시호 성무황제(成武皇帝)
연호 연원(燕元, 384년 ~ 386년)
건흥(建興, 386년 ~ 3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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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전연의 황족2.2. 중원 진출의 야망2.3. 전진으로의 망명2.4. 비수대전2.5. 후연의 황제2.6. 말년과 붕어
3. 사후4. 대중 매체5. 기타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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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호십육국시대 선비족 모용부가 세운 후연의 초대 군주.[1]

거듭되는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른 일세의 효웅인 동시에 5호 16국시대 배신의 아이콘이었다. 흔히 비수대전(383. 11)에서 참패한 부견을 배반한 일로 악명이 높지만 뛰어난 능력과 인품 덕분에 생전에도 일세의 영걸로 평가받던 인물이다.

파란만장한 인생 역경에 걸맞게 이름이 몇 차례 바뀌었다. 처음에는 아버지 모용황의 총애를 받아 이름을 (覇)라고 했지만, 형인 모용준이 즉위한 후에는 견제를 받아 (缺)로 바뀌었다. 나중에는 도참서를 신봉하여 이름을 (垂)로 고쳤고, 자는 도명(道明)이라고 했다. 사후의 시호는 성무황제(成武皇帝)였다.

2. 생애

2.1. 전연의 황족

326년, 전연을 건국한 연왕 모용황(태조 문명제)의 5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지략과 도량이 남다르고 비범한 자질이 있어 아버지 모용황에게 큰 총애를 받았다. 모용황은 자신의 아우들 앞에서 모용수를 가리켜
"이 녀석이 언젠가 나라를 망치던지 혹은 일으킬 것이다"
라며 크게 칭찬하기도 했고, 심지어 이름을 패(覇)라 하고 자를 도업(道業)이라 지어주기까지 했다.[2] 때문에 맏형이었던 세자 모용준은 유능했던 아우 모용수를 은근히 견제했다.

아버지의 총애에 걸맞게 모용수는 어려서부터 군사 경험을 쌓았으며 숱한 활약상을 펼쳤다. 342년에는 모용황의 고구려 침공을 따라 나섰다. 이 싸움에서 모용선비는 고구려를 크게 격파하여 수도인 환도성을 파괴했을 뿐 아니라 고국원왕(제16대) 고사유의 아버지인 미천왕(제15대) 고을불의 왕릉을 도굴하고 어머니인 태후 주씨를 납치해가는 등 고구려에 큰 타격을 입혔다. 344년에 모용황이 우문부를 공격해 멸망시킬 당시에도 참전하여 전공을 세우고 도향후에 봉해졌다. 345년에는 후조 석호가 장군 등항을 보내 낙안을 점거한 후 전연까지 공격하려 했으나 모용수가 도하에 주둔하며 그와 대치하자 등항이 더 이상 전연을 넘보지 못했다.

348년, 모용황이 낙마사고로 승하하자 모용준이 뒤를 이어 연왕에 즉위했다. 모용준은 아우인 모용수를 노골적으로 견제하여 그의 이름을 결(缺)로 고치도록 했다. 표면상으로는 춘추시대 진나라의 명신인 극결의 이름을 따서 지어 준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모용수가 사냥을 하러 나갔다가 낙마하여 이가 부러진 것을 조롱하는 뜻이었다. 모용준이 모용수를 얼마나 경계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점차 모용준은 모용수의 능력을 신임하여 그에게 군사업무를 맡기다시피 하게 되었다.

2.2. 중원 진출의 야망

349년, 전연의 막강한 적수였던 후조의 석호가 붕어하자 모용수는 형 모용준에게 이 기회를 노려 중원 진출을 도모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모용준은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모여근 등이 모용수의 전략이 시의적절한 것이라고 간언하자 그 뜻을 따라 모용수를 전봉도독으로 삼았다. 이때 모용수가 세운 전략은 곧 전연이 화북의 절반[3]을 석권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인 350년에 모용수는 후조를 공격하여 유주를 함락시켰다. 당시 모용준이 포로들을 모두 학살하려 하자 모용수가 중원을 평정하려면 인망도 신경써야 한다며 반대하여 무산시키기도 했다.

351년, 모용준은 중원 정복의 야망을 불태우며 황제를 칭했다.(열조 경소제) 그에 맞춰 모용수 또한 오왕에 봉해져 신도를 지켰고, 이후 우금장군녹류대사에 임명되어 동북 지역을 관할하는가 하면 형연이주목에 임명되어 남부 전선에서도 이름을 떨쳤고, 수도 업성으로 돌아와 사례에 임명되는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360년, 모용준이 붕어하고 모용위(헌무제)가 즉위했다. 당시 모용위의 나이가 어렸기에 모용준의 동생이며 모용수의 형이었던 태재 모용각이 실권을 장악했다. 훗날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칠 정도로 안목이 뛰어났던 모용각은 모용수를 중히 여겨 그를 적극적으로 밀어주었고, 심지어 유제 모용위에게 자신이 죽고 나면 그에게 정치를 맡길 것을 권하기까지 했다.

369년, 동진의 명장이자 실권자였던 환온이 낙양 수복을 위해 50,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제3차 북벌에 나섰다. 환온은 명성에 걸맞게 전연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하며 파죽지세로 방두까지 진군했다. 그 기세에 놀란 황제 모용위가 수도인 업성을 버리고 달아날 마음까지 품을 정도였다. 이때 모용수는 아우인 모용덕과 함께 달아나려는 모용위를 말리고 항전에 나섰다. 모용수는 모용위를 안심시킨 후 직접 50,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군과 방두에서 환온과 접전을 벌였다. 모용수는 환온보다 앞서 유리한 지형을 점령했을 분 아니라 수차례 동진군에게 타격을 입히는데 성공했다. 더욱이 전진 부견이 전연을 위해 구원군을 파견했다는 소식까지 들려오자 환온은 아직 식량이 떨어지지 않았을 때 퇴각하려고 했다. 모용수는 동진군이 국경 부근에 이르렀을 즈음에 그들이 매우 피로해져 있음을 알아채곤 기병으로 그 뒤를 추격해 크게 격파했다. 이 싸움에서 대패한 환온은 30,000명에 달하는 군사를 잃는 수모를 당했다. 당대에 적수가 없었던 명장 환온을 격파한 일로 모용수의 명성은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2.3. 전진으로의 망명

그러나 모용수는 능력과 인망이 뛰어난 탓에 정적이 많았다. 형 모용각의 사후에 그 뒤를 이어 태재가 되어 전연의 정권을 장악한 모용평[4]과 모용위의 외척이었던 가족혼씨 가문은 모두 모용수를 질시하고 두려워했다. 이들은 몰래 모용수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는데, 이를 엿들은 조카 모용해가 그 사실을 모용수에게 알리곤 차라리 선수를 쳐서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권했다. 그러나 모용수는
"일족끼리 서로를 죽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다른 나라에 망명하는게 낫다."
라고 답했다. 그 직후 자식들과 조카들을 데리고 사냥을 나간다며 거짓말을 하고, 곧장 전진의 명군이었던 부견에게 망명했다.

평소 모용수의 인물됨을 흠모했던 부견은 그가 자신에게 망명했다는 소식을 듣자 크게 기뻐하며 몸소 성문 밖으로 나가 그의 손을 잡아주며 환대했다. 그러나 부견의 오른팔이었던 명재상 왕맹은 이에 반대하며 모용수를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절대로 남의 밑에 있을 인물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견은 본래 투항해오는 이들에게는 매우 관대했을 뿐 아니라 이미 천하에 이름을 떨친 모용수의 능력과 명성을 몹시 탐냈기 때문에 왕맹의 말을 듣지 않고 도리어 그를 관군장군으로 삼았고 빈도후에 봉했으며 화음의 500호를 식읍으로 주는 등 그를 극진히 대접했다.

이를 보다 못한 왕맹은 모용수를 제거하기 위해 정치공작까지 꾸몄다. 그 해에 부견은 모용수와 왕맹으로 하여금 전연을 공격하게 했으니, 모용수는 낙양에서 낙주자사 모용축을 포위했고, 왕맹은 모용축을 구원하기 위해 100,000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온 모용장과 대치했다. 이때 모용수와 함께 망명했던 그의 아들 모용전이 참군이 되어 왕맹과 함께 종군한 상태였다. 왕맹은 모용수의 지시인 것처럼 모용전을 속여서
"나는 동쪽(전연)으로 돌아갔으니 너도 돌아와라"
는 편지를 보냈다. 모용전이 이를 믿고 전연의 황제 모용위에게 돌아가자 왕맹은 부견에게 글을 올려 모용전이 모반을 일으켰다고 알렸다. 이에 놀란 모용수는 동쪽으로 달아났다가 남전에서 부견의 기병들에게 체포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부견은 도리어 자식인 모용전의 잘못으로 아비인 모용수까지 처벌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며 그를 위로해주었을 뿐 아니라 그를 이전과 같이 후하게 대접해주었다.

370년, 부견은 왕맹을 앞세워 대대적으로 전연 공략에 나섰다. 사실 부견은 전연의 대들보 노릇을 하던 명재상 모용각이 죽은 후 이를 쳐서 합병할 뜻을 품고 있었으나 동진의 명장 환온을 격파한 모용수의 능력을 경계하여 전연을 함부로 공격하지 못했는데, 그런 모용수가 투항해서 지금은 자신에게 의탁하고 있었으니 이젠 거리낄 것이 없었던 것이다. 왕맹은 전연의 주력군을 거느리고 출전한 간신 모용평을 크게 격파했고, 부견은 직접 대군을 거느린채 전연의 수도인 업성을 점령하여 전연을 멸망시켜 버렸다. 이렇게 전연은 환온을 격파하고 모용수가 망명한지 불과 1년 만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황제 모용위를 위시한 전연의 모용씨 황족들은 포로가 되어 전진의 수도인 장안으로 압송되었고, 모용수를 제거하려던 모용평은 고구려로 망명했다가 고국원왕에게 체포당해 전진으로 송환당했다.

전연이 멸망한 후 모용수는 부견을 따라 옛 수도인 업성에 들어갔다가 그 곳에서 전연의 옛 신하와 관리들을 마주쳤다. 모용수는 망국의 한이 북받쳐 올랐는지 그들을 크게 나무랐으나, 부하인 고필이 그들에게 화를 내기 보다는 지금의 역경을 이겨내고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감싸야 한다고 간언했다. 모용수는 그 말을 받아들여 더 이상 그들에게 험한 말을 하지 않았다. 이처럼 모용수는 전진에 의탁하며 벼슬살이를 하는 처지였음에도 모용선비의 왕조를 다시 일으킬 기회를 모색하고 있었다.

2.4. 비수대전

부견이 다스리는 전진은 날로 강성해져 373년에 서쪽의 한족 왕조인 전량과 북쪽의 선비 탁발부가 세운 대나라를 격파하고 5호 16국시대 최초의 화북 통일을 달성했다. 한편 전연이 멸망한 후에도 부견은 모용수를 몹시 총애했다. 부견의 조정에서 모용수는 계속 승진하여 경조윤의 벼슬을 받았고, 천주후에 봉해졌다. 모용수는 그에 걸맞게 378년에 부견의 아들 부비의 양양 공략을 지원했고, 383년 5월에 동진의 환충이 100,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양양을 침공하자 이를 방어하는 등 전진을 위해 수차례 큰 전공을 쌓았다.

동진과의 전쟁을 말리던 왕맹이 죽은 데다가 화북 통일 이후 자신감이 하늘을 찌를 지경이 되었던 부견은 383년 8월, 장강 이남의 동진을 멸하고 중국 천하를 통일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전쟁을 일으켰다. 당시 부견의 아우인 부융을 비롯한 측근과 친족들은 하나같이 동진과의 전쟁에 반대하고 우선 내부 사정을 돌아볼 것을 권했으나 부견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때 모용수는 강족 요장과 함께 부견의 뜻에 적극적으로 찬동하고, 그의 기운을 북돋아 주는 발언을 했다. 당시 모용수의 진의를 알기는 어려우나, 여러 기록에서는 모용수가 일부러 부견을 동진과 싸우게 한 후, 그 틈을 타서 멸망한 모용선비의 제국을 부활시키려 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모용수는 이때부터 이미 부견의 패망을 예측했다는 것이다.

평소에 총애하던 모용수와 요장 등의 지지에 힘을 얻은 부견은 100만 명에 가까운 대군을 거느리고 남진을 개시했으나 383년 11월, 비수대전에서 동진군에게 예기치 못한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부견은 주력군의 대부분을 잃었고, 그동안 부견이 넓은 마음으로 받아 주었던 각지의 이민족 유력자들은 그 틈을 타서 독립 정권을 일으키려는 야망을 품었다. 물론 그 가운데에는 진즉부터 모용선비의 부흥을 꿈꿔왔던 모용수도 있었다.

당시 모용수 또한 부견과 함께 출전하여 10,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운성 일대를 점령한 후 후방을 맡고 있었던 참이었다. 덕분에 모용수는 비수대전 직후에도 병력을 온전히 보존한 상태였다. 그는 동진군의 추격을 피해 도망친 부견을 호송하여 관중으로 후퇴했다. 이때 모용수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부견을 죽일 수 있었고, 실제로 당시 모용수의 아들 모용보와 동생인 모용덕은 모용수에게 부견을 제거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모용수는 대략 몇 가지 이유를 들며 이를 거부했다. 당장 부견을 제거하는 것보다는 이후의 정세를 관망하다가 일을 꾀하는 것이 좋고, 과거 부견에게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그의 목숨을 취할 수 없으며, 저족의 본거지인 관서의 땅보다는 과거 모용씨의 땅이었던 관동을 도모하는 것이 낫다는 것 등이 바로 그 이유였다.[5]

2.5. 후연의 황제

비수대전의 여파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모용수는 부견에게 자신을 하북으로 보낼 것을 요청했고, 부견은 이를 수락해 당시 구도 업성을 지키고 있었던 아들 부비에게 보냈다. 이후 384년 정월, 낙양에서 유목민족인 튀르크계 정령(퇼레스)의 적빈이 반란을 일으키자 부비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모용수를 부비룡과 함께 낙양으로 보냈는데, 얼마 후 모용수는 적빈을 회유하여 복속시킨 후 부비룡을 제거했다. 모용수가 거느린 군대가 형양에 이르자 그 추종자들이 그를 추대하니, 마침내 모용수는 연왕을 칭하며 후연을 건국했다.[6]

연나라를 부흥시킨 모용수는 곧 중산에 웅거하며 대군을 거느리고 업성을 포위 공격했으나 부비가 끈질기게 저항한 탓에 싸움이 쉽게 끝나지 않았다.[7] 싸움이 길어지면서 업성 내부에 식량이 떨어지자 부비는 동진에 도움을 요청했다. 동진의 사현은 이를 받아들여 명장 유뢰지로 하여금 20,000명의 군사와 군량미를 가지고 부비를 지원하도록 했다. 설상가상으로 정령족의 수장 적빈이 반란을 일으키자 모용수는 이를 진압하고 적빈을 죽였으나 그 조카인 적진이 탈출했다. 부비는 정령의 적진과 양평태수 소흥에게 사람을 보내 그들과 힘을 합쳐 모용수를 무찌르고자 했으나, 모용수는 아들 모용농으로 하여금 현지의 민심을 달래는 한편 또다른 아들인 모용륭 등으로 하여금 소흥을 격파했다.

이듬해인 385년 4월, 동진의 유뢰지가 부비를 구원하기 위해 지원군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유뢰지의 공격에 타격을 입은 모용수는 잠시 군사를 신성으로 물린 후 유뢰지가 추격해오자 이를 역습하여 크게 격파했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유뢰지마저 패배하고 업성 내부의 기근이 심각해지자 결국 부비는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결국 그해 8월, 업성은 모용수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모용수는 중산에 수도를 정했으며 국가의 기틀을 정비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386년 정월, 모용수는 마침내 황제로 등극했다. 제위에 오른 모용수는 대사면령을 내리며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연호를 건흥이라 하고 종묘사직을 수리했다. 또한 아들인 모용농을 요서왕으로, 모용린을 조왕으로, 모용륭을 고양왕으로 삼았으며, 동생인 모용덕을 상서령으로 삼았고, 또한 조카인 모용해와 모용온 등을 각기 좌복야와 사례교위로 삼았다.

이후 모용수는 파죽지세로 세력을 확장했다. 387년 정월에는 모용륭으로 하여금 동진을 공격하게 하여 연주 일대를 장악했고, 2월에는 제섭과 장원 등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한 후 역성을 공략하여 그 주변의 여러 지역의 항복을 받아내 청주와 서주 일대까지 장악했다. 또한 이해에 정령족의 수령인 적요를 복속시켰고, 철불부 유위진이 진상하던 말을 약탈한 독고부의 유현을 토벌했다. 392년에는 정령족이 세운 나라인 적위를 멸망시켰고, 394년에는 서연을 멸망시키며 그 마지막 군주인 모용영을 제거하여 하북 일대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해에 모용수는 아들 모용농을 앞세워 동진의 동평태수 위관을 격파하여 죽이고, 주변 지역을 복속시켜 그해 겨울에는 산동 일대까지 장악했다.

이처럼 옛 전연의 영역이었던 요동 일부, 요서, 하북은 물론 산동까지 장악한 모용수는 후연을 건국한지 10여년 만에 화북의 패자로 등극했다. 전연-전진-동진의 삼국 정립은 다시 후연-후진-동진의 삼국으로 재정립되었다. 사실 강족 요장이 다스린 후진 전진의 잔존 세력이나 선비 모용씨의 서연, 선비 걸복씨 서진(西秦), 저족 여씨의 후량, 선비 독발씨 남량, 노수호족 저거씨의 북량, 한족 이씨의 서량, 선비 모용씨의 남연 등을 진압해야 했고, 신진 세력인 선비 탁발씨 북위와 갈등해야 했다는 점에서 후연이 더 우세했다.[8]

2.6. 말년과 붕어

이처럼 모용수는 후연을 건국한 후 착실하게 국세를 확장시켜 나갔으나 그에게는 몇 가지 큰 문제점이 있었다. 첫 번째는 모용수가 이미 노령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전진으로부터 독립하여 연왕을 칭할 당시에 모용수는 이미 58세의 노인이었고, 이후에도 후연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과로를 했기 때문에 기력이 크게 상했던 것 같다. 실제로 모용수는 후연을 세운 뒤 구도 업성을 공격했으나 신속히 함락시키지 못하고 시일을 질질 끄는 등 군사적인 기량은 확실히 젊은 시절보다 못해졌다. 또한 종묘사직을 다시 세우면서 종법을 무시하고 첩실이었던 친모를 억지로 적실로 바꾸려 했을 뿐 아니라 이에 신료들이 난색을 표하자 크게 화를 내며 겁박하여 의견을 관철시키는 등 세심했던 정치적 감각도 조금 떨어지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두 번째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모용수의 뒤를 이어야 할 태자 모용보를 비롯한 후계자들의 능력이 시원찮았다는 것이다. 모용보는 모용수의 차남으로, 형인 모용전이 요절하는 바람에 운좋게 태자가 된 인물이었다. 그는 비록 재능은 있었지만 우유부단한 성격 탓에 치세에는 나라를 이끌 수 있지만 난세에는 군주의 재목이 될 수 없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다만 태자가 된 후에는 공부에 매진하고 대신들의 인망을 얻으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모용수는 그에게 큰 희망을 걸고 있었다.

세 번째는 내몽골 및 오르도스 일대를 중심으로 한창 세력을 확장하던 북위의 존재였다. 북위는 탁발선비의 젊고 야심찬 수령인 탁발규가 건국한 나라로서 강대국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기에 후연으로서는 좌시할 수 없는 상대였다. 처음에 모용수는 탁발규를 지원하여 다른 이민족들을 견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후연이 탁발규를 지원하고 그 주변의 이민족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북위의 세력이 어부지리의 효과를 얻어 급격히 강성해지자 상황이 달라졌다. 지난 391년, 모용수는 탁발규의 동생 탁발고를 볼모로 삼고 군마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모용수가 탁발고를 살해하면서 후연과 북위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또한 394년에 모용수가 서연을 공략할 당시에는 탁발규가 이를 구원하기 위해 지원군을 보내려고까지 했다. 결국 모용수와 탁발규는 관동 일대의 패권을 두고 결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395년 11월, 마침내 모용수는 태자 모용보로 하여금 80,000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북위를 정벌하도록 했다. 이에 탁발규는 모용수가 죽었다는 거짓 정보를 퍼뜨려 모용보를 퇴각하게 만든 후 20,0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그 뒤를 추격했다. 결국 참합피에서 모용보는 탁발규에게 참패를 당하여 간신히 목숨만 살아 달아났고, 탁발규는 포로로 잡은 50,000명의 후연군을 모두 죽여버렸다. 이 전투를 참합피 전투라고 한다. 당시의 참패를 기점으로 후연의 성장세는 무참히 꺾이고 점차 쇠퇴일로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는 모용수가 서연을 멸망시키고 비로소 전성기를 누리게 된지 불과 1년 만의 일이었다.

이듬해인 396년 3월, 참합피에서의 참패에 격노한 모용수는 70세 노구에도 불구하고 복수를 위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북위를 공격했다. 모용수는 노련한 백전노장답게 탁발규가 방심한 틈을 놓치지 않고 은밀히 선발군을 보내 북위의 주요도시인 평성을 점령했다. 이후 모용수는 직접 평성으로 향하던 중 참합피에 이르러 탁발규에게 학살당한 후 산처럼 쌓여있던 후연 병사들의 시신을 발견했다. 모용수는 잠시 행군을 멈추고 위령제를 지냈는데, 참합피 전투에서 부형자제를 잃은 후연의 군사들이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대성통곡을 터뜨렸다. 이미 고령의 나이였던 모용수는 이 기막힌 광경에 충격과 울분을 견디지 못해 피를 토하고 쓰러져 버렸다. 이후 모용수는 들 것에 실려 중산으로 돌아가던 중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곤 진중에서 태자 모용보를 비롯한 측근들을 불러 자신의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라는 유언을 남기고 붕어했다.

한편 모용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탁발규는 급히 군사를 거느리고 퇴각하던 후연군을 추격하려고 했으나 이미 평성이 후연군에게 점령당한 것을 보고는 크게 놀라 음산으로 달아나 숨는 촌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죽은 모용수가 살아있는 탁발규를 물리친 셈이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간에 일세의 영걸이었던 모용수가 사라지자 후연은 북위에 대한 우위를 잃고 말았다. 모용수의 뒤를 이어 태자 모용보가 제위를 계승했으나 앞서 언급하였듯이 모용보는 무능하여 탁발규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후 북위는 여세를 몰아 후연의 영토를 유린했고, 후연은 모용수가 죽은지 겨우 11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3. 사후

모용수의 죽음과 함께 후연도 북위에게 밀려 쇠퇴하기 시작하더니 제4대 황제인 모용희때 결국 고구려까지 덤벼드는 바람에 국력을 만회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멸망했다.

아들들이 꽤 많았다. 전처 단씨의 소생인 모용전(慕容全)[9]· 모용보· 모용주(慕容宙), 후처 단씨의 소생인 모용랑(慕容朗)과 모용감(慕容鑒), 그리고 여러 희첩들의 소생인 모용린(慕容麟)·모용농(慕容農)·모용륭(慕容隆)·모용유(慕容柔), 모용희가 있었다. 관련 가계도는 모용선비/왕사 항목을 참고.

그중 모용농은 고구려 제18대 고국양왕이 빼앗은 요동군 현도군을 수개월 만에 되찾은 인물이기도 했다. 그 외에도 부황 모용수에게 전연의 재건을 조언했으며 동호 오환족의 노리, 장양, 고녹관위 등을 설득한 후 오환족을 유세해 끌어들여 후연의 설립에 기여했고, 이후 튀르크계 정령족의 적위를 멸망시켰으며, 서연을 침공해 영토를 늘리는 등 활약했으나 후처 소생이라 제위를 이어받지는 못했으며 뒤에 보듯 단속골의 난과 난한의 난에 휩쓸려 다른 황제들처럼 죽임을 당했다.

4. 대중 매체

5. 기타

무협소설에 흔히 나오는 연나라의 부활을 위해 암약하고 음모를 꾸미는 모용세가 당주의 원형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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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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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연은 전연을 계승했으므로 전연까지 포함하면 제4대 군주였고, 전연 이전 모용부 모용외부터 세면 제5대 군주였다. [2] 한결같이 천하를 차지할 패왕에게 어울릴만한 위엄찬 이름들이었다. [3] 화북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태항 산맥의 동쪽으로 관동(關東)이라고도 하는데, 이 시기는 화남이 아직 개발되지 못하여 사실상 중원의 1/3에 해당하는 알짜배기 땅이었다. 나머지 2/3는 태항 산맥 서쪽의 관중(關中)과 회하 남쪽의 강남(江南)이었다. [4] 모용외의 막내 아들이자, 모용황의 동생이었으며, 황제인 모용위에게는 숙조부 뻘이었고, 모용수에게는 숙부가 되었다. [5] 이때의 기록들을 보면 모용수는 상당히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데 그가 부견을 제거하지 않은 본심이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과거 부견에게 은혜를 입은 것이 양심에 걸렸을 수도 있고, 어설프게 반역을 했다가 공적으로 몰려서 다른 장수들에게 공격받는 것을 두려워했을 수도 있으며, 주군을 죽이고 은혜를 원수로 갚은 배은망덕한 자로서 오명을 쓰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고, 정치적이나 전략적으로 볼 때 관서보다는 관동의 땅을 노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다만 이 당시의 모든 기록들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모용수는 이미 이때부터 전진으로부터 독립할 마음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6] 이때의 기록들을 보면 기록에 따라 서로 관점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기록에서는 모용수가 처음부터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고 하고, 다른 기록에서는 부비가 먼저 모용수를 제거하려 했다고 하고 있으며, 또한 기록에 따르면 당시 책사들이 부비에게 모용수를 제거하라고 충고했지만 부비가 무시한 일이 있었는데 기록마다 그 이유가 각각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등 여러모로 서로 말이 안 맞아서 모순되는 점이 많다. [7] 당시 모용수는 전진군의 사기를 흔들기 위해 포위진에 일부러 빈틈을 만들어 부비가 달아나도록 유도했으나, 부비도 이미 업성의 방어에 사활을 걸고 있었던지라 모용수의 계략에 넘어가지 않았다. [8] 애초에 관동이 관중보다 인구가 많았기 때문에 기본적인 세력에서 후진을 압도했다. 모용수 사후에 후연이 북위의 침공을 받으며 몰락하고, 후진이 주변을 정리하며 세력을 확장하자 후진이 후연을 능가하게 되었다. [9] 자치통감》에는 모용령(慕容令)이라고 되어 있다. 모용수가 전연에서 전진으로 망명하자 이를 따라갔다가, 왕맹의 계략에 속아 전연으로 돌아가서 유배되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