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28 15:20:53

대관식

파일:external/www.crisismagazine.com/Friedrich-Kalbach-1861-Charlemagne.jpg 파일:Jacques-Louis_David_-_The_Coronation_of_Napoleon_(1805-1807).jpg
카롤루스 대제의 대관식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1]
파일:빅토리아_대관식.jpg 파일:king-charles-iii-and-queen-camilla-during-their-coronation-ceremony-in-westminster-abbey_-230506_aaron-chown-pool-reuters_700x467.png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 찰스 3세 대관식

1. 개요2. 역사3. 한국사에서의 즉위식4. 현대의 대관식 영상5. 대관식을 치른 캐릭터6. 비유적 의미

[clearfix]

1. 개요

대관식(, coronation)은 주로 유럽의 군주국에서, 군주가 즉위식 때 왕관을 머리에 올려 그 위상과 권력의 발동을 정식으로 공표하는 행사이다. 왕관은 국교가 있을 경우 대개 그 나라의 최고위 성직자에 의해 관을 쓴다.[2]

군주가 즉위식에서 왕관 등의 레갈리아를 착용하여 권위를 나타내거나, 이 과정에 사제가 관여하는 형태는 동서양을 막론하여 나타난다. 대관식은 이러한 즉위식의 한 종류이다. 때문에 즉위식은 꼭 무릎 꿇고 왕관을 받아 쓸 필요 없는 즉위선서나 착좌식도 포함한다.

동양에선 황태자 또는 왕세자가 옥새를 받고 용상에 올라가 앉을 때까지 의식이 서양 대관식과 비슷하다. 이러한 의식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관을 받아 쓰는 의식'이 아니고 즉위식이지만 편의상 함께 서술한다.

2. 역사

고대 유럽의 즉위식 요소들은 문명이 앞서 발달했던 근동으로부터 영향받았다. 군주가 착용하던 여러 기물들이 있었지만, 왕관은 고대 이집트와 고대 페르시아의 고위층이 착용했던 다이아덤(diadem)을 비롯한 관들이 헬레니즘 제국들을 거쳐 전파돼 월계관을 주로 쓰던 지중해 유럽 세계에 영향을 주었다.

관련 의식도 근동권에서 넘어왔다. 구약 열왕기 역대기를 보면 솔로몬 기름 부음을 받고 왕좌에 착좌하는 장면이 묘사됐다. 기원전 10세기경 이스라엘의 즉위식을 다루는 장면이 이러하니 이전 고대 이집트나 이후 근동을 통일한 최초의 패권국인 아케메네스 왕조도 유사한 즉위식을 치렀을 것이리라 추측할 수 있겠다.

한편 고대 게르만족, 켈트족의 족장이나 왕은 즉위시 방패즉위(Raising on a Shield)라는 의식을 치렀다. 군주가 방패 위로 올라타고, 전사나 유력자들이 이를 들어올려 사람들 앞에 보임으로서 즉위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로마 제국에선 군인 황제 시대 율리아누스 황제가 최초로 이렇게 즉위했는데, 당시 로마군내에 많던 게르만족 출신 병사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본격적으로 '성직자로부터 관을 받아서 쓰는 의식'으로서 대관식이라고 부를만한 형식과 기록이 나타난 것은 로마 제국이다. 457년 2월 7일 즉위한 레오 1세가 그 주인공이다.

레오 1세의 대관식은 로마 제국 역사에 있어서 큰 사건 중 하나였다. 당대의 제국은 고대 로마 중세로 이행하는 후기 고대(Late Antiquity)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전제군주정화, 동방천도, 기독교 공인 및 국교화, 동서 분할, 분야를 막론한 체제 개혁 등. 이러한 변화의 시대 교회 세력은 일관적으로 상승세를 달리고 있었는데, 그 와중 마르키아누스 황제가 죽어 테오도시우스 왕조가 단절되었다.

전임 황제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상황에 제위공백이 발생하자, 마르키아누스를 옹립했던 권신이자 동방군 총사령관(Magister militum) 아스파르에게 공이 넘어갔다. 아스파르는 자신의 부하 트라키아인 레오(Leo the Thracian)를 지명했다. 레오는 명문가 출신도 아니었고, 황가와 혈연적으로 무관했으며, 원로원도 지지하지 않았다. 때문에 레오 측은 자신만의 장점을 강조하여 부족한 정통성을 보충하고자 했다. 장점은 그가 순혈 로마인이었다는 것이었고, 아스파르로 대표되는 군부의 지지가 있었으며, 아리우스파였던 아스파르와는 달리 정통 칼케돈파 기독교인이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레오 1세의 즉위식은 크게 두 가지 절차를 거치게 되었다. 첫번째는 군인들이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제국 인민들 앞에서 방패 위에 오른 황제를 들어올리는 방패즉위였다. 군인 황제 시대 율리아누스 황제 이래 관행이 된 방패즉위는 전통적인 추대 방식인 군대의 지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자 로마군의 총사령관인 임페라토르로서 권위를 보이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이전까지 없었던, 주교가 집전한 대관 의식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아나톨리오스는 하기아 소피아에서 즉위 미사를 집전하며 황제관을 레오의 머리에 씌웠는데, 이는 레오 자신이 정통 기독교인임을 강조함과 동시에 스스로의 정통성에 신성성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교회로부터 지지를 얻기 위한 이 타협은 제국내 기독교 위상이 황제 즉위식에 참여할 정도로 공고해졌음을 나타내며, 1인자인 황제 또한 세속법칙을 초월한 신의 섭리 아래 지명되는 필부임을 인정한 것이었다.

대관식이 정통성 보충을 위해 실시한 퍼포먼스였던만큼 다른 방식 또한 이어지고 새로 나타났다. 앞서 언급한 방패즉위는 7세기까지 보이다가 제국이 점차 동로마 제국으로 이행하는 20년간의 혼란 이후 사라지며[3], 공화정 전통이 강했던 로마 제국에서 시민대중의 지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환호즉위(Acclamatio) 의식도 제노 황제 때 최초로 나타나 제국이 멸망하는 콘스탄티노스 11세까지[4] 근천년을 이어가지만 제국이 멸망하면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레오 1세가 시작한 대관식은 다른 즉위 절차가 나타나고 사라지는 와중에도 끝끝내 살아남았다. 제국의 기독교 색이 짙어지는 7세기 즈음부터 기름 부음 절차가 추가되거나 대관 의례를 전후하여 녹색당과 청색당으로 대표 되는 원로원, 정부 고위 관료, 군부 고위 장교, 황족과 귀족, 타국의 대사, 시민 대표 등이 참가하는 등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성직자가 군주에게 관을 씌우는 행위 자체는 핵심으로 남았다.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다른 군주국들도 의례와 율법의 원류인 동로마 제국을 따라 즉위식 때 대관 의례를 모방하였고, 이는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유럽의 대관식의 경우 그 나라의 중심 종교시설에서 국가적인 행사로 성대하게 치르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이기 때문에 새 국왕이 왕위를 계승한 후 즉시 치르는 경우보다는 어느 정도의 준비기간을 가진 후에 치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길게는 1년 이상 걸릴 때도 있다.

중세 유럽에서는 군주권을 상징하는 왕관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이 수여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교황으로부터 대관 받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여겼고, 대관식을 제대로 치르지 못한 군주는 정통성이 떨어진다고 보았다. 일례로 샤를 7세 잔 다르크 랭스를 탈환하기 전까지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프랑스 국왕의 즉위식은 프랑크 왕국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랭스 대성당에서 행했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 1세의 경우 대관식에서 이러한 종교적 권위를 대놓고 돌파하는 행보를 보인 바 있다. 나폴레옹 자신이 로마로 가지 않고 역으로 교황을 끌고 온 데다 수도 파리 한복판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황제관을 본인이 직접 들어 스스로 쓴 것. 자세한 것은 황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문서 참조.

하지만 근대에 접어들면서 상당수 국가들에서 왕정이 폐지됐다. 왕정 존치 국가서도 의식이 갖는 의미가 점점 퇴색되어 대관식 문화는 사장됐다. 아래는 대관식이 있었으나 사라진 나라들.

19세기에 창립된 베네룩스 3국[8]이나 이탈리아 왕국[9], 그리스 왕국 같은 나라들은 건국 이래 대관식을 아예 하지 않았고, 프로이센 빌헬름 1세[10], 세르비아 페타르 1세(1904년), 노르웨이 호콘 7세(1906년), 루마니아 페르디난드 1세(1922년)[11]처럼 창업이나 그에 준하는 업적을 이룬 군주만 대관식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교황도 삼중 교황관을 쓰는 대관 미사를 거쳐 즉위한 사람은 1963년의 바오로 6세가 마지막이었고 이후 즉위미사로 대체하고 있다.

오스만 제국의 경우 조금 독특해 대관식보다는 즉위 의례에 가까웠다. 셀림 2세까지는 선제가 사망한 곳에서 바로 즉위 의식을 치렀지만, 무라트 3세부터는 톱카프 궁전에서 즉위 승인 의식을 치른 후 예윱 술탄 모스크에서 시조 오스만 1세의 검을 착용한 뒤 아야 소피아까지 코스탄티니예 시가지를 쭉 순례하는 방식이었다. #

현재 유럽에서 대관식을 제대로 치르는 나라는 영국밖에 안 남았다.[12][13]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및 급변하는 국제 정세와 불황 속에서 엘리자베스 2세의 뒤를 잇는 찰스 3세 국왕의 대관식은 전보다 축소되어 진행되었다. 의외로 근현대 유럽 군주국들은 대관식을 하지 않고 즉위선서나 착좌식 등으로 대신하는 나라가 많다.[14]

유럽 바깥에서도 포르투갈 왕실과 한 뿌리였던 브라질 제국, 기독교 문화권인 에티오피아 제국, 비기독교권이었지만 근대화를 지향했던 이란 제국, 유럽 문화권의 강력한 영향을 받아 기독교를 받아들인 통가, 하와이 왕국 같은 폴리네시아 왕국들도 유럽의 예를 따라 대관식을 했다. 반면에 중동 같은 아시아 쪽의 군주국에서는 왕실만의 행사로 비밀스럽게 치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일본의 천황 즉위식도 여전히 비밀스러운 부분(주로 신토에 깊게 관련된 종교적인 의식)과 공개적인 행사가 혼재되어 있다.

3. 한국사에서의 즉위식

한국사에서는 신라는 전임 임금이 승하하면 일단 후임자가 즉시 왕위를 물려받아 즉위하고, 그 다음 해 봄인 음력 1~2월경에 경주 서남쪽에 있는 시조묘(초기) 혹은 신궁( 지증왕 이후)에서 즉위 의례를 거행하였다. 이 관례는 2대 남해 차차웅이 시조묘를 건립한 후 천년동안 거의 대부분의 임금이 꼬박꼬박 지켰으므로, 신라만의 제도화된 즉위의식으로 여겨지고 있다. 시조묘에서 모신 신은 여러 설이 있으나 1대 혁거세 거서간으로 보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다만 대부분의 왕이 2년차 신궁 방문을 지키긴 했어도 정확한 시기가 고정된 건 아니었는데, 신궁 참배를 언제 하는지 자체는 융통성이 있었던 듯 하다.[15]

고려의 즉위의례는 조선과는 달리 의례로 정리되어 전해지지 않아 역사서에 그 대략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고려 국왕의 즉위의례는 분명히 존재하였고, 이를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고려 국왕의 즉위의례는 대체로 고명(유명)→ 훙 → 즉위식 → 반조서 → 고즉위례 → 대사 등의 과정을 거쳤다. 고려의 즉위의례는 당일 즉위이고 빈전이 아닌 중광전(강안전), 대관전과 같은 특정한 전각에서 거행되었다. 그리고 즉위를 고하는 의례도 종묘보다는 주로 고려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신 경령전에 가서 즉위를 고하고, 역대 왕의 위패를 모신 태묘와 9릉에는 사신을 보내 즉위를 고하는 형식이었다고 한다.

고려 즉위의례의 가장 큰 특징은 불교 의식이 즉위례의 하나로 거행되었다는 사실이다. 고려 사왕은 즉위식에서 원년에 보살계를 받았으며, 무신정권기 이후의 즉위식에서는 관정도량을 거행하였다. 고려 사왕은 불교의례를 통해 신성성을 강화하였던 것이다. 태조 이래 고려 왕들은 신성 관념을 형성하여 지속해 나갔는데 특히 제불, 혹은 신·불의 호위를 강조하였다. 이에 고려 사왕은 불교의례를 통해 신·속을 아우르는 신성한 존재임을 즉위의례에서 나타내었던 것이다.

조선 왕조의 경우, 대행왕이 승하하자마자 곧바로 즉위식을 거행하는 것이 아니라 서거 엿새째 되는 날 상복인 최복(衰服)을 입게 되는 성복(成服) 직후에 즉위식을 거행했다. 대행왕의 관을 모시는 빈전(殯殿) 문 밖에서 열리게 되는 즉위식장엔 왼쪽에 대보(大寶)로도 일컬어지는 옥새가, 오른쪽엔 대행왕의 유언인 유교(遺敎)가 놓였다. 면복을 입은 새 국왕이 빈전을 향해 향을 올리고 나면 영의정이 유교를 읽고 좌의정은 대보를 왕에게 전했다. 옥새는 왕이 서거한 즉시 왕대비 대왕대비에게 전해지고, 그들은 새 임금이 즉위 예식을 거행할 때까지 이를 보관했다. 빈전 밖에서 진행된 즉위의 예식이 끝나면 새 국왕은 연을 타고 대전으로 가 임금이 앉는 어좌가 있는 어탑(御榻)의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가 용상(龍床)에 정좌하게 되는데, 바로 이때를 새 국왕이 탄생하는 순간으로 여긴다.

참고로 조선에서 이런 방식으로 처음으로 즉위한 왕은 5대 문종이다. 문종 이전의 4명의 조선 왕들은 1명은 개국 군주였고 나머 지 3 명은 전부 선대 왕이 살아있을 때 양위 받아 즉위했기에 저런 방식으로 즉위하지 않았다. 개국 군주 태조는 옥좌를 내놓지 않고 버티던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을 폐위시킨 후 즉위했고 조선 건국 후 무인정사로 권력을 잃고 영안대군에게 양위했고 아무런 권력이 없던 허수아비 정종은 동생 정안대군에게 양위했고 태종은 충녕대군이 세자가 된 해에 양위했다. 이렇게 3명의 왕들이 연속으로 살아있을 때 양위했고 4명이 왕들이 연속으로 선대 왕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즉위하다가 세종이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양위하지 않고 재위하다가 사망, 세자 이향이 즉위하면서 조선이 드디어 상술한 방법으로 즉위식을 거행하기 시작했다. 즉, 개국 군주이거나 선대 왕이 살아있을 때 양위 반정 같은 방법으로 즉위한 태조, 정종, 태종, 세종, 세조, 예종, 중종, 인조, 순종은 저런 방법으로 즉위하지 않았다. 무려 조선의 군주의 3분의 1이나 된다.

대행왕 승하 후 기다리는 기간은 정통성 등 위기의식에 따라 짧아질 수도 있다. 광해군은 이복동생 영창대군 문제로 불안감을 느낀 지지파에 떠밀려 하루만에 즉위했으며, 심지어 성종은 사촌 제안대군과 친형 월산군 등이 존재하는 와중에 정통성의 문제로 당일에 즉위했다.

재위기간 중 즉위식을 두번 거행한 사례도 있었는데, 고종은 1864년 국왕으로 즉위했을 당시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식을 치렀으며,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대한제국의 황제로서 환구단에서 제사를 지내고 황제로서의 즉위식을 다시 치렀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은 근대화 이후인만큼 전통적인 방식의 즉위식이 아닌, 서양식 즉위식을 거행했다. 서양식 건물인 덕수궁 돈덕전의 알현실에서 즉위식이 열렸으며, 환구단에서 고유제를 올리는 대신 일본으로부터 국서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대리 하세가와 요시미치, 영사 대표 방카르트가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는 축하문을 낭독했다. 즉위식장에 참석한 이들은 전통 의복이 아닌 서양식 대례복이나 프록 코트를 입었으며, 사배례[16] 대신 몸을 공손하게 숙이는 서양식 인사법을 했다고 한다. 전통 악대인 전정궁가와 서양식 군악대가 모두 등장하였다는 점이 특징인데, 순종 황제가 등장과 퇴장할 때와 참석자들이 인사할 때 전통음악을 연주하였다. 군악대는 에케르트가 서양음악 어법으로 작곡한 대한제국 애국가를 연주하였다. 즉위식이 끝난 후 각계에서 기념행사가 펼쳐졌는데, 돈덕전의 식당에서는 서양식 연회가 열렸다. 특히 일진회는 독립관에서 매우 성대한 경축회를 벌였다고 한다.

4. 현대의 대관식 영상

1953년 6월 2일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 기록영화.[17]
1963년 7월 4일 바오로 6세의 대관 미사.[18]
1967년 7월 4일 통가 투포우 4세 대관식 기록영화.[19]

5. 대관식을 치른 캐릭터

6. 비유적 의미

세계 정상의 선수가 올림픽과 같은 세계 최고의 대회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며 금메달, 혹은 우승을 하여 트로피나 메달을 수여받을 때를 대관식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파일:셰이크 메시.jpg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에서는 타밈 빈 하마드 알사니 국왕이 우승팀의 주장인 리오넬 메시에게 손수 어의를 입혀줘서 진짜로 축구 황제의 대관식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프로레슬링계에서는 해당 단체의 가장 큰 PPV에서 새로운 메인 챔피언이 되어 다음 메인이벤터 자리를 계승받는 과정을 뜻한다. 대표적으로 레슬매니아 14 스티브 오스틴 vs 숀 마이클스, 레슬매니아 21 존 시나 vs JBL의 경기가 있다.

간혹 1년으로 끝나지 않고 몇년에 걸쳐서 대관식을 진행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는 기존의 메인이벤트가 계속해서 이기다가 마지막에 계승 받는 선수가 이기고 메인이벤터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레슬매니아 39, 레슬매니아 40 코디 로즈 vs 로만 레인즈의 대립, NJPW 레슬킹덤 7,레슬킹덤 9,레슬킹덤 10의 오카다 카즈치카 vs 타나하시 히로시의 대립이 있다.

[1]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그림으로, 대관식하면 바로 이 그림이 떠오를 정도로 매우 유명하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2] 예를 들어 영국은 캔터베리 대주교가 관을 씌운다. [3] 단, 수백여년 뒤인 1254년 귀족 세력이고 교회 세력이고 찍어누르려 했던 테오도로스 2세의 즉위식 때 반짝 나타나긴 했다. 귀족 세력 및 현지 유력자와의 타협을 통해 살아남았던 망명 정권인 니케아 제국이 기반이 안정되자 황권을 강화하려 했던 시도라 볼 수 있겠다. [4] 다만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멸망 직전 위기의 순간이었기 때문에 대관식이 아닌 환호즉위를 택했다. 당시 제1계승권자인 콘스탄티노스 친왕은 임지인 모레아 친왕부에 있었던 반면 제2계승권자인 동생 디미트리오스 친왕이 먼저 수도에 입성해 계승권을 강조하고 있었고, 대관식을 집전할 총대주교가 정교회 전반에서 배척받던 교회통합 찬성파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중앙에서 파견한 사절단과 모레아 현지의 인사들이 참여한 환호즉위로 즉위식을 갈음했다. [5] 오스트리아는 대관식으로 권위를 내세울 필요가 없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혈통만으로 세습이 보장되는 영토였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황제로서는 대관식이 없었다. 헝가리가 동군연합으로 보유한 크로아티아의 경우 아르파드 왕조 초반에는 별도의 대관식이 있었으나 벨러 4세 이후로는 하지 않았다. [6] 프란츠 요제프 1세 카를 1세 합스부르크 가문을 향해 점점 험악해진 체코인의 민심 때문에 대관식을 치르지 못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민심 무마 차원에서 몇 번 계획이 잡혔으나 질질 끌리다 결국 무산되었고, 카를 1세는 제1차 세계 대전 말미로 치달을 무렵이라 대관식을 치를 형편이 아니었다. [7] 리투아니아 대공으로서는 별도의 대관식이 없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가 1829년 바르샤바 왕궁에서 폴란드 입헌왕국 국왕으로 대관식을 치르긴 했으나 폴란드인에게 러시아 지배의 정당성을 알리려는 쇼맨십에 불과했다. [8] 네덜란드의 경우 19세기 이전에도 존재하지 않았나 생각할 수 있지만 네덜란드의 왕정은 19세기에 성립되었다. [9] 전신인 사보이아 공국 시절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끝낸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시칠리아를 얻었을 때 시칠리아 국왕으로 팔레르모까지 건너가 대관식을 치르긴 했으나, 1720년 사국 동맹 전쟁으로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반강제 교환하고 나서는 사르데냐 국왕으로 따로 대관식을 치르지는 않았다. 이후 사보이아 가문의 군주들은 사르데냐 왕국의 국왕으로서 특별히 대관식을 치르지 않았고, 대신 카를로 알베르토부터는 1946년 왕정 폐지 전까지 왕국의 헌법인 알베르토 헌법(Statuto Albertino)에 선서를 하며 즉위를 알렸다. [10] 독일 황제 즉위 때가 아니라 프로이센 국왕 즉위(1861년) 때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대관식을 했는데, 창업군주 프리드리히 1세 이후 두 번째 대관식이었다.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한 건 독일 황제 대관식이 아니라 독일 제국 선포식이었다. [11] 여담으로, 트란실바니아 합병을 기념하여 알바이울리아(Alba Iulia)에서 대관식을 했는데, 문제는 알바이울리아가 과거 헝가리 왕국이 사실상 붕괴되고 헝가리 문화를 보존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헝가리인의 자치공국 에르데이 공국의 수도였던 곳이라 헝가리의 어그로를 제대로 끌었다. [12] 20세기 유럽에서 열린 8번의 대관식( 교황 제외) 중 영국이 4번( 에드워드 7세, 조지 5세, 조지 6세, 엘리자베스 2세)이다. 여담으로 인도 제국 황제로서의 즉위식은 따로 했는데, 친히 인도 델리까지 가서 대관식을 한 것은 조지 5세가 유일했다. 수많은 마하라자들을 이끌고 조지 5세, 테크의 메리를 위시한 왕실 구성원들이 배석한 세기의 행사. 다만 인도의 군주들은 아니꼬왔던 면은 있었던지 떨떠름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하이데라바드, 마이소르, 바로다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은 영국의 동맹국이기 때문에 신하의 예를 보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영국 관리들이 재촉을 하니 참석해서 조지 5세 앞에서 인사하며 예를 표하긴 했는데 바로다의 샤야지로 3세는 세 번 인사를 해야 하는데 한번 인사를 하고 등을 보이지 말고 뒷걸음 쳐서 나가야 하는데 그냥 돌아서 나가고, 지팡이를 휘두르며 살짝 비꼬는 듯한 미소를 보여 영국 언론의 질타를 받았다. 영상 원본 영상 기사 [13] 한편 빅토리아 여왕 에드워드 7세는 대리인을 보냈고, 조지 6세는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 인도까지 가서 대관식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14] 덴마크만 하더라도 위에서 언급했듯 1840년 이후로 대관식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2024년 마르그레테 2세의 퇴위로 즉위한 프레데리크 10세도 어머니의 퇴위 선언서 서명 및 만세삼창 이후 바로 덴마크 국왕으로 즉위했다. 펠리페 6세는 2014년 6월 17일, 스페인 상원의 가결이 있고 이틀 뒤인 2014년 6월 19일 0시를 기하여 후안 카를로스 1세가 퇴위하면서 스페인 국왕으로 즉위했다. [15] 1월에 할지 2월에 할지는 제각각 다르고, 특이 케이스로 예를 들어 경덕왕은 미루다가 즉위 3년차에 신궁 제사를 지냈고 진덕여왕은 가을인 10월에 신궁 제사를 지냈다. [16] 왕에게 네 번 절해 예를 갖추는 것 [17] 70년 후인 2023년 5월 6일 그의 아들 찰스 3세 대관식이 개최되었다. [18] 일종의 가마인 세디아 제스타토리아 삼중관을 착용하는 교황의 모습이 보인다. 이후의 교황들은 다른 나라에서 삼중관을 선물받는 경우는 많지만 실제 착용하지는 않고 그대로 박물관으로 보내 전시하는 것이 보통이다. 즉위할 때에도 대관미사 대신 즉위미사만을 거행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이 현재 기준 마지막 교황 대관미사이다. [19] 통가 왕실의 종교가 감리회이다 보니 전형적인 개신교식 대관식이다. [20] 시즌 3 16화에서 생명의 나무의 여왕이 되는 대관식을 치른다. [21] 마지막 화에 생명의 나무의 왕이 되는 대관식을 치른다. [22] 한 것 까진 좋은데 하자마자 갈바트론에게 사망. [23] 이쪽은 황제가 아닌 공주 대관식. 대관식 에피소드를 방영전 Princess Coronation로 홍보했다. [24] 자국민을 외면한 친형을 완전히 몰아내는데 성공하면서 이후 대관식을 치를 예정.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