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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 朝鮮 고조선 | 古朝鮮[1] Kojosŏn (Gojoseon)[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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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4][5]하가점 하층 문화(기원전 22세기경부터 발달)와의 연관성은 현재 연구중이며, 아직까지는 고고학적으로 유의미한 성과가 부족하다. 실증적으로는 기원전 9세기경 요서의 십이대영자 문화를 고조선의 연원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 시기를 국가의 초기 형태를 다지기 시작한 연대로 보고 있다.] ~ 기원전 108년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청동기 시대 비파형 동검 문화 |
한사군 | |
고구려 원삼국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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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저 | ||
동예 | ||
왕조 |
단군조선 위만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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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사건 |
기원전 ?년
단군이
고조선 건국 기원전 323년 조선왕 1세 칭왕 기원전 281년 고조선-연 전쟁[7] 기원전 195년 위만, 고조선 망명 기원전 194년 위만의 정변·위만조선 건국 기원전 2세기 진번국, 임둔국 정벌 기원전 109~ 108년 왕검성 전투, 전한에 의해 멸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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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아사달 → 장당경(藏唐京) → 왕검성(王儉城)[8] | |
민족 | 예맥, 한족[9] 등 | |
언어 | 고대 한국어[10] | |
문자 | 한자 | |
종교 | 한반도 토착 종교 | |
정치 체제 | 군장국가 → 연맹왕국 | |
국가 원수 | 단군(檀君)(?)[11], 왕검(王儉)(?)[12] / 후(侯) → 왕(王)[13] | |
주요 군주 | 단군조선 |
초대
단군왕검[14] □대 조선후 □대 조선왕 1세 □대 조선왕 3세 □대 부왕 말대 준왕[15] |
위만조선[16] |
초대
위만왕[17] 3대 우거왕[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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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성 | 불명[19] | |
현재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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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승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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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朝鮮)은 동북아시아의 예맥계 고대 국가이다. 한국의 고대사 기록은 훼손이 많이 되어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으나[23] 사학계의 정론으로는 요서부터 요동을 거쳐 한반도의 북부까지를 영역으로 가지고 있던 것은 확실하다고 본다.[24][25] 역사에서 한민족이 최초로 세운 국가이자 가장 먼저 등장한 국가이며 고조선 유민들이 이후 남하하여 마한과 진한에 소국을 세우기도 하고 삼한의 맹주 목지국을 위협하기도 하며 이후 한(韓)과 융합된다.만주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중국 동쪽 지역을 부르는 지명 중 하나로 사용되었던 조선이 이 나라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으며, 훗날 이 나라 또는 지역의 이름을 딴 근세의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먼저 세워졌던 조선을 고조선(古朝鮮)이라고 표기하고 부른다.
2. 국호
후삼국시대의 국가들이나 '통일신라'의 예와 같이, 본래 국호는 '고(古)'자가 없이 원래는 조선(朝鮮)이다. 조선이라는 명칭이 숙신에서 나왔다는 말이 있다. 숙신은 주신(珠申) 직신(稷愼), 식신(息愼) 으로 기록 되어 있다. 1392년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세우기 이전 시대의 기록에서 혹 '조선'이라는 단어(조선후, 조선공, 조선국공 등)가 나오면 그것은 고조선이거나, 또는 고조선의 중심지였던 평양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거나, 조선 민족, 곧 ' 한민족'과 ' 만주, 한반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약간은 다른 어휘로 신라의 수도 금성의 숲에서 유래하여 나중에 한반도 전체를 가리키게 된 '계림' 등이 있다.고려시대의 기록인 《 삼국유사》에서는 기자조선과 단군조선을 '고조선'으로, 위만조선을 '조선'으로 일컬었다. 때문에 더 이전에 존재한 국가에 '고'(古)를 붙이는 것은 잘못된 용법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삼국유사》의 사례처럼 이러한 용법의 유래 자체는 제법 깊다. 현대 한국 학계에서는 기자조선설을 부정하고, 위만조선을 기존의 고조선과 연속된 실체로 파악하려는 취지와, 14세기 말에 옛 조선의 국명을 가져다가 새로운 나라의 이름으로 삼았던 이성계의 조선 왕조와 구분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조선을 쓰는 용법이 정착되었다.
《 삼국사기》에 등장하지는 않으나 조선이란 국호만 한 차례 등장한다.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의 '신라 6촌의 주민들은 본래 조선의 유민이다.'라는 기록에서 조선이 한 번 언급된다. 《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이 세운 한민족 최초의 국가로 등장한다. 중국의 사서 가운데 《 사기》와 《 정사 삼국지》, 《 한서》, 《 후한서》 등에 조선 기사가 수록되어 있으나 단편적이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삼국유사》에서 위만조선을 다룰 때 이들 중국 사서를 인용하고 있다. 조선이라는 국호는 고조선에서 유래하며, 이후 4세기경 《 진서》(晋書)에서 라는 기록으로 등장한다. 2세기에 등장하는 선비족의 대영웅 단석괴(檀石槐) 또한 고구려의 주몽과 같이 햇빛에 의한 회임에 관련된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고조선의 군주를 단군이라고 불렀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 단군 신화>를 통해 유추한다. 하지만 최근 학자들에 의하면 '단군'은 몽골 신화에서 '탱그리', 튀르크에서는 '탕그리'로 불리는 신적인 인물이며, 군주명이 '왕검'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편 2019년, 한국어문교육연구회의 박광민(67) 연구위원이 《온지논총》 제60집에 발표한 <고조선 국명 및 지명에 대한 어원적 고찰>이란 논문에서 아사달이 조선을 이르는 말이었을 것이라는 추가적 근거를 당대 사료를 통해 제시했다.
《시경》(詩經)과 《일주서》(逸周書)에 달린 주석을 바탕으로 '선'(鮮)을 '작은 산'의 의미로 읽었다는 해석이 제기되었는데, 해당 문구와 주석은 다음과 같다.
《일주서》(逸周書) 제4권}}}
度其鮮原 居岐之陽
작은 산과 언덕을 헤아려, 기산의 남쪽에 터를 잡으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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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 <대아>(大雅) -황의-(皇矣)}}}작은 산과 언덕을 헤아려, 기산의 남쪽에 터를 잡으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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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서》는 서주 시대, 《 시경》은 춘추 시대에 엮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이에 따르면 '조선'은 '아침 땅'이나 '아침 산' 정도의 뜻을 가진 고대어 ' 아사달'을 당대의 고대 중국인들이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는 학설이다. 이 가설이 맞다면 '아사달=조선'이 된다.
또 한편으로 현재는 잘 주장되지 않는 전근대 시기의 학설로는, 남북조시대의 《 사기집해》(史記集解)에서는 후한 말~조위 초의 인물로 추정되는 장안(張晏)이
朝鮮有濕水·洌水·汕水, 三水合爲洌水, 疑樂浪·朝鮮取名於此也
"조선에는 습수(濕水)·열수(洌水)·선수(汕水)가 있으며 세 강물이 합쳐져서 열수(洌水)가 되니 낙랑(樂浪)·조선(朝鮮)이 이 이름을 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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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張晏), 《사기집해》(史記集解) 인용}}}"조선에는 습수(濕水)·열수(洌水)·선수(汕水)가 있으며 세 강물이 합쳐져서 열수(洌水)가 되니 낙랑(樂浪)·조선(朝鮮)이 이 이름을 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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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한 것을 들어 선수(汕水)의 이름에서 조선(朝鮮)의 이름이 나왔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는 '낙랑'을 언급하는 데서 볼 수 있듯이 현 평양시 일대에 낙랑군 조선현이 설치되었고, 그곳의 대동강을 '열수'(列水)라고 부르던 한나라 시대 이후의 시각이 투영된 것이다. 아무리 늦어도 기원전 4세기에는 분명히 '조선'이라는 지명이 확인되는 상황에서 중심지 이동설까지 나올 정도로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가 확실하지 않은 현재로서는 대동강의 지류였을 '선수'와 '조선'을 연결지어 말하기에는 확실하지 않은 점이 많다.
3. 역사
자세한 내용은 고조선/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4. 위치와 강역
자세한 내용은 고조선/위치와 강역 문서 참고하십시오.5. 문화
5.1. 고고학적 지표
전통적으로 비파형동검, 미송리식 토기, 탁자식 고인돌 등을 특징으로 하는 문화권을 고조선의 영역으로 본다.80년대 이후로는 랴오닝 성 요서 차오양시 일대의 십이대영자 문화를 고조선의 초기 문화로 보는 학설이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이 십이대영자 문화는 비파형 동검이 매우 밀도 높게 출토되어서 비파형 동검 문화의 중심지로 여겨지고 있다. 또 토기는 이중구연토기(겹아가리토기)와 점토대토기(덧띠토기)가 출토되며, 묘는 땅을 파고 돌이나 나무로 관을 만들어 묻는 토광묘가 주류다. 부장자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서 묘실을 만들고 따로 관을 다시 만들어 부장품을 넣은 목곽묘, 석곽묘도 존재한다. 기존에 고조선과 관련지어졌던 민무늬 토기와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전기부터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청동기 관련 문화요소일 뿐, 고조선의 문화로서 특정지을 근거가 없다.
고조선은 요서 지역, 요동 반도, 남만주부터 한반도 북부에 걸쳐 있는 문화권을 기반으로 한다. 기원전 4~3세기부터 중국 연나라의 철기 문화를 수입하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2세기경에는 한나라와의 약조를 통해 철기를 본격적으로 수입한 것으로 보이지만, 한반도 전체로 철기의 제작이 확대되는 것은 원삼국시대 중후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일이었다.
5.2. 신화
건국 신화로는 < 단군 신화>가 존재하나, 그것이 고조선 시대부터 전하던 것인지 아니면 고조선 이후 어느 시점에 만들어져 《 삼국유사》 등에 기록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삼국유사》에서는 《고기》(古記) 및 《위서》(魏書)라는 출처를 명시했으나, 《고기》의 정체는 불분명하고 《위서》 또한 어느 위나라의 문서인지 알 수 없다. 심지어 《위서》의 '위'가 '위'(魏)로 적힌 것과 《삼국유사》에서 '위만'이 '魏滿'[27]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당대에 위만조선에 대한 역사 의식을 표방한 독립적인 사서가 존재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잠부론》 등에서도 '魏滿'이라고 했으므로 근거는 빈약한 편이다.한편 서사시인《동명왕편》을 지으며 이규보는 《 위서》와 《 통전》의 기록을 읽어보았으나 중국의 기록이라 그런지 기록이 자세하지 못하다고 했는데, 이 《위서》가 일연이 읽은 것과 같은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더욱이 현재 <단군 신화>가 기록된 문헌들도 《 삼국유사》와 《 제왕운기》, 《묘향산지》 등의 기록이 조금씩 다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 단군신화>가 고려 시대 때 《삼국유사》를 쓴 일연으로 인하여 창작되었다고 주장했지만 현대에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단군신화>가 정확히 언제 성립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 고구려에서도 벽화에 곰과 호랑이로 추정되는 동물을 그려놓는 등 고조선과 관련한 무언가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종교 항목 참고.
이와 별개로 고조선이 연나라와의 전쟁 이후 밀려났던 대동강과 평안북도, 그리고 그 부근에 <단군신화>가 널리 퍼져 있는 점, 그리고 <단군신화>에 나오는 풍백, 우사, 환웅의 상징성을 고려했을 때, 연나라와의 전쟁 이후 중심지를 평양으로 이동한 고조선의 지배층들이 개판이 된 나라를 다시 안정시키기 위해 <주몽 신화>처럼 ‘내가 너네한테 이런거 알려줘서 문명을 부여했으니 우리 따라’ 식의 메세지를 담아 신화를 창조했다 보기도 한다. <주몽 신화>의 경우, 부여의 <동명왕 신화>를 따라한 거긴 하지만 어쨋든 천손의 후손이 남쪽으로 내려와 부족국가로 갈라져 있었던 원 고구려 사회를 통합해 강대국으로 성장시켰다는 메시지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또한 평안남도의 점제현 신사비가 고조선 계통의 신앙 구조를 반영한 것이라면, 산신(山神)에 대한 숭배가 존재했을 수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동천왕- 21년 조에는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이 살던 곳이다(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라고 했는데 고조선이
신선 사상과 관련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5.3. 음악
< 공무도하가>를 작사로 활용한 이상은. 원래 전설처럼 공후와 함께 재현했다.
< 공무도하가>(공후인)가 고조선의 음악이라고 한다. 다만 문헌을 읽기에 따라 고조선 사람 백수광부의 아내가 지었다는 설, 지나가던 뱃사람 곽리자고가 지었다는 설,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이 지었다는 설로 나뉠 수 있다.
5.4. 의복 문화
《한서》<지리지>를 통해 고조선의 풍습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으며, 위만의 입국 기록을 볼 때 상투를 틀었고, 중국과는 다른 복식을 갖췄음을 알 수 있다.고조선의 의복 문화는 스키토-시베리아 문화로 일컬어지는 고대 중앙아시아 유목민 문화의 영향을 짙게 받은 호복을 입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 측 기록에서 옷을 왼쪽으로 여몄다(좌임, 左衽)는 기록 등이나, 단군 신화 등 유목민 문화의 소가 여럿 발견되기 때문이다.
6. 사회
6.1. 언어, 문자
고조선에서 자체적으로 남긴 기록은 현존하지 않으며, 단지 BC 108년 고조선 멸망 직후에 적힌 《 사기》나 후대의 《 염철론》, 《 정사 삼국지》 같은 서적에서 고조선에 대해 나온다. 하지만 중국의 입장에서 적힌 데다가 그다지 상세하게 적지 않아 이것만으로 고조선에 대해 많은 정보를 알아내기에는 한계점이 분명히 있다. 그리고 명도전, 반량전, 오수전 등의 화폐와 진나라에서 수입된 '진과'(秦戈)의 명문 등 극소수의 한자 유물을 제외하면 고조선에서 문자가 사용되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고조선 후기에 중원의 영향으로 본격적인 문자의 사용이 시작될 수도 있지만 문자 사용이 보편화되었을지는 의문이기에 현재까지 고조선에 대한 연구에 크나큰 장애물로 남고 있다. 물론 음성언어나 기타 타국 언어로라도 기록된 자체적인 기록물 역시 남아있는 것이 없다. 그나마 멸망 이후 양웅의 기록으로 어족만 유추하는 수준의 연구가 이루어지기는 한다. 해당 항목 참고.6.2. 정치 체계와 지방행정
미흡하나마 왕, 장군, 대부, 상, 비왕 등의 관직 제도로 보이는 것이 확인되기에 중국식의 관료제를 수입했을 것이라 예측하기도 한다. 혹은 토착 세력을 중앙 관료화시킨 이후, 중국측에서 이를 기록하는 과정에 중국 관직 제도가 투영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연과의 전쟁을 막은 예가 가진 ‘대부’라는 직위는 관직이 아닌 왕의 자문역을 이르는 말이라는 것이 통설이며, 위만이 받은 박사도 관직명인지 확실하지 않다.'고조선에서는 10월에
무천이 열렸고, 출정에 앞서 소를 잡아 그 발굽의 형상으로 길흉을 점치던 우제점(牛蹄占)을 행했다'
7세기경의 '둔황문서'중 하나인 《 토원책부》에 인용된 《 위략》의 내용이 발굴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흔히 동예의 제천 행사로 알려진 무천이 고조선의 풍속이었다고 한다. 또한 소를 잡아 발굽의 형상으로 점을 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
우제점(牛蹄占)은 《 정사 삼국지》 <위서(위지)> -동이전-(東夷傳) '부여조'에도 동일하게 나오며, 장초금(張楚金)이 지은 《한원》(翰苑) 권30 <고려[28]조>에 인용된 《위략》(魏略)에 의하면 고구려에도 이와 같은 관습이 있었다고 하며, 한편 경상남도 창원시 웅천패총(熊川貝塚)에서 6점의 복골(卜骨)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볼 때 삼한사회에도 역시 이와 같은 관습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비교하자면, 중국은 상나라 시대부터 갑골(거북이 등껍질)로 점을 쳤었고, 고조선 영역에서는 우제점(소뼈로 점을 침)이 성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방행정의 경우, 준왕이 다스리던 때, 위만을 박사에 임명한 뒤 서쪽 변경의 수호를 맡겼다는 걸로 보아 중앙집권적 행정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한 인물에게 특정 지역을 할당하는 방식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위만조선 시대에 오면 중국의 승상 제도가 상으로 낮춰져 수입된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의 '상'은 다른 국가와 달리 여러 명이었으며, 조선상 역계경이 수하에 있던 2,000명을 이끌고 고조선을 이탈해 버릴 정도로 독자적인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걸로 보아 중국처럼 관료 조직이라기보단 지방 수장과 같은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서북쪽에서 독자 행동을 했던 위만과 달리 왕과 중앙에서 협의해 일을 처리한 걸로 보아 노태돈 교수는 왕과 각 '상'들은 조정에서 나름의 회의체를 통해 의사결정을 했는데 이는 마치 훗날의 고구려가 각 부의 수장들이 상당한 자치력을 보유하면서도 임금과 함께 제가회의를 통해 국가를 이끌어가는 '부체제'와 아주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고 추정했다. 즉 고구려만큼의 고도의 부체제는 아니고 아직 초기 형태였지만 고조선 멸망 이후 간접 통치를 받았던 구려족에게서 부체제가 발전되어 고구려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사기》에는 비왕이란 관직이 나온다.
섭하(涉河)가 돌아가면서 국경인 패수(浿水)에 이르러서 마부를 시켜 전송나온 조선(朝鮮)의 비왕(裨王) 장(長)을 찔러 죽이고 바로 [패수를] 건너 요새 안으로 달려 들어간 뒤, 드디어 천자(天子)에게 ‘조선(朝鮮)의 장수(將帥)를 죽였다’고 보고했다.
《사기》 <조선열전>
《사기》 <조선열전>
즉 '비왕'(裨王)은 무관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비왕'은 흉노에서도 발견이 되며, 흉노에서의 '비왕'은 각 왕들의 분봉지 내의 부족장 정도의 성격으로 이해되는 것을 고려하면 노태돈 교수는 고조선의 경우, '상'이 왕권에 일정한 통제를 받듯이 '비왕'도 '상'의 일정한 통제를 받는 읍락의 족장으로 이해했다. 즉, 그는 비왕이 자신이 속한 읍락을 자치적으로 이끌어 나가던 족장이자, 유사시에는 자신의 읍락원들을 이끌고 참전하기에 '장수'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노태돈 교수는 고조선의 지방 행정을 왕(국가) > 상(자치 집단) > 비왕(읍락)으로 볼 수 있으며, 사회 차원에서 본다면 읍락의 비왕들은 상의 지배를 받고, 여러 상들은 왕의 지배를 받는 누층적인 지배구조였다고 본 것이다.
장군이란 관직도 나오는데, 고조선-한 전쟁 당시 장군 왕겹은 한음, 노인, 참과 같이 왕검성 내에서 한나라에 투항하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고조선 멸망 이후, 장군 왕겹은 별다른 공로가 발견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봉호 1,480호의 열후로 봉해졌다. 한음이 540호, 참이 1,000호를 받은 것에 비하면 봉호가 굉장히 많은 편인데(《사기》 <건원이래후자연표>), 이는 공로와는 무관하게 한나라 조정이 그의 이용가치를 높게 평가했거나 고조선 내에서 장군 왕겹의 위치가 높았던 것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노태돈 교수는 그렇다면 장군 왕겹은 고조선 왕실의 직속 부대의 장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으며, '상'이 자신의 집단 주민들로 구성된 군사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한다면 장군 왕겹은 왕실에 소속된 직할 주민들로 이루어진 군사를 이끈 것이라고 추정했다.
6.3. 법률
고조선 멸망 이후에도 한나라의 법률은 시행 흔적만 보이고, 독자적인 《 8조법》이 유지되었다. 초보적인 법률의 모습을 보이며, 강한 강도의 처벌법으로 평가된다. 노비제의 출현이니, 인명의 존중이니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정규교육 과정의 한국사 시간에 배우는 내용이니 여기서는 생략한다. 기자에 의해 《8조법》이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사료의 오독으로 전하게 된 것이다.《 한서》의
箕子去之朝鮮, 敎其民以禮義田蠶織作. 樂浪 朝鮮民犯禁八條 …(기자가 조선으로 가 그 백성들에게 예의와 전잠, 직조를 가르쳤다. 낙랑 조선 백성의 《범금 8조》는…)
를 《
후한서》등에서 箕子去之朝鮮, 敎其民以禮義田蠶織, 作樂浪朝鮮民犯禁八條(기자가 조선으로 가 그 백성들에게 예의와 전잠, 직조를 가르쳤으며, 낙랑 조선민에게 《범금 8조》를 가르쳤다.)
로 오독했고, 이것이 후대의 사서에 답습되면서 벌어진 오해이다.다만 후에는 한나라의 상인 등이 유입되면서 사회 생활이 복잡해지고, 60여 개의 법 조항으로 늘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과거 낙랑군에는 한나라의 법률이 시행되지 않았다는 것이 중론이었으나, 최근 한나라의 법률이 담긴 목간의 발굴로 재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樂浪 朝鮮民犯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羞之, 嫁取無所讎,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辟. 其田民飮食以籩豆, 都邑頗放效吏及內郡賈人, 往往以杯器食. 郡初取吏於遼東, 吏見民無閉臧, 及賈人往者, 夜則爲盜, 俗稍益薄. 今於犯禁窾多, 至六十餘條.
낙랑 조선 백성들의 《범금 8조》는 서로 사람을 죽이면 죽임으로써 갚고, 서로 상해를 입히면 곡식으로 갚으며, 서로 도둑질하는 자는 남자는 함몰하여 가노(家奴)로 삼고, 여자는 비(婢)로 삼는다. 스스로 속죄하고 싶으면 한 사람당 50만 전을 내야 한다.[29] 비록 면하여 일반 백성이 되더라도 습속으로 오히려 차별하여, 혼인하고 싶어도 짝을 찾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하지 않아 문을 닫는 자가 없었고, 부인은 정숙하여 간음하지 않았다. 밭 가는 백성들은 변두[30]에 음식을 담아먹고, 도읍의 관리들은 (중국) 내군의 상인처럼 하여 왕왕 술잔 같은 그릇으로 식사한다. 낙랑군은 처음에 관리를 요동군에서 데려 왔다. 관리가 백성들을 보아도 문을 닫지 않자 상인들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밤이면 도둑질하여, 풍속이 점점 박해졌다. 지금은 범금이 늘어나 60여 조가 되었다.
낙랑 조선 백성들의 《범금 8조》는 서로 사람을 죽이면 죽임으로써 갚고, 서로 상해를 입히면 곡식으로 갚으며, 서로 도둑질하는 자는 남자는 함몰하여 가노(家奴)로 삼고, 여자는 비(婢)로 삼는다. 스스로 속죄하고 싶으면 한 사람당 50만 전을 내야 한다.[29] 비록 면하여 일반 백성이 되더라도 습속으로 오히려 차별하여, 혼인하고 싶어도 짝을 찾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하지 않아 문을 닫는 자가 없었고, 부인은 정숙하여 간음하지 않았다. 밭 가는 백성들은 변두[30]에 음식을 담아먹고, 도읍의 관리들은 (중국) 내군의 상인처럼 하여 왕왕 술잔 같은 그릇으로 식사한다. 낙랑군은 처음에 관리를 요동군에서 데려 왔다. 관리가 백성들을 보아도 문을 닫지 않자 상인들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밤이면 도둑질하여, 풍속이 점점 박해졌다. 지금은 범금이 늘어나 60여 조가 되었다.
당시 고조선 사회는 이미 상당한 정도로 계급 분화가 진행되었다. 8조의 법금(法禁) 중 현전하는 3개 조항에서 화폐 개념과 노비의 존재, 그리고 사유재산 보호조치를 볼 수 있다. 청동기 후기 시대 지배층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화려한 부장품들은 계급 분화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촌락에선 공동체적 관계가 여전히 작용되었다. 여담으로 '백성들이 집문을 닫지 않는다'는 것, 외래인들이 이를 노리고 도둑질을 서슴치않게 했다는 것으로 보아 본래 고조선 백성들 사이에선 강도질이 거의 없고 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두터웠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마치 제주도의 '정낭'과 같다.
7.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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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부여
자세한 내용은 고조선-부여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7.2. 연나라
자세한 내용은 고조선-연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7.3. 진국
자세한 내용은 고조선-진국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7.4. 흉노
자세한 내용은 고조선-흉노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7.5. 제나라
자세한 내용은 고조선-제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7.6. 전한
자세한 내용은 고조선-한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8.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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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병사 복원도. 병사가 입고 있는 갑옷이 황금빛으로 보이지만 갑옷을 금으로 만든건 아니고 청동으로 만든 것이다. 흔히 청동은 유물이 녹색이라 녹색으로 아는 이들이 많지만 갓 만들어진 청동은 원래 노란색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녹슬어 녹색으로 변하는데 유물들은 보통 녹슨 상태로 발견되기 때문에 녹색이 많은 것이다. |
위만조선에 와서는 적어도 중앙군에서만 20,000명 이상 동원가능했던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고조선-한 전쟁에서 우거왕이 태자를 보내 항복하려고 했을 때 태자가 이끌고 간 중무장한 병력이 10,000명의 규모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나라와의 전쟁때 한나라가 동원한 전투 병력이 육•해군 도합 약 57,000명이었다.[31] 이를 보면 적어도 고조선의 상비군 병력 및 동원가능한 규모가 1/3은 되었을 가능성이 상존한다는 점에서도 동원력이 어느 정도 되었기 때문에 한나라가 고조선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흉노의 한팔을 꺾었다라고 할 정도로 군사력이 강력했다는걸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9. 역사귀속과 계승의식
자세한 내용은 고조선/계승 문서 참고하십시오.10. 고조선의 인물 목록
10.1. 왕족
자세한 내용은 고조선/왕사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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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조선왕 2세 | 우거왕 | |
우거왕 | 태자 | 장항 | |
주군: 고조선 군주 | }}}}}}}}} |
사실 자료 자체도 별로 없고, 남아있는 자료들도 신빙성이 의심되는 것들이 많다.
10.2. 신하
11. 대중매체에서
11.1. 소설
- 개혁신당의 다섯 번째 제자 - 작품의 시대 배경이 한나라와 위만조선으로, 세 번째 제자인 고길동이 준왕의 아들로 나온다.
11.2. 만화
11.3. 영상
- 신화: 진시황릉의 비밀 - 성룡, 김희선 주연의 영화. 고조선의 공주로 추정되는 옥수 공주( 김희선)가 진나라 시황제의 후궁으로 바쳐진다.
11.4. 게임
-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 고대 시대는 고조선을 모델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을 선택하면 나오는 국가 지배자 이름 중에 단군이 있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1: 플레이 문명 중 하나로 등장한다. 한민족의 시조 국가답게 우방 타워랜드 방어전(...)이 주 전략인 국가. 타워가 좋고 성직자 생산 비용이 저렴해서 타워로 방어와 공격을 하는데 이때는 마을 회관에 전투력이 없었고, 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공격할 때 성직자들로 적의 고급 유닛들을 아군으로 바꾸는 전략이 주를 이룬다. 여기에 장검병 / 군단병이 보너스 체력 + 80이라는 점과, 노포가 대부분의 업그레이드가 된다는 점 때문에 의외로 강한 국가.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결정판/로마의 귀환: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1을 2에 이식한 버전인 만큼 전작의 고조선이 다시 등장한다.
- 엠파이어 어스 2: 한국 캠페인 초반은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다룬다.
11.5. 노래
- 사람이 되기 싫은 곰 - 유튜버 과나가 부른 곡이다. 자세한 내용은 사람이 되기 싫은 곰의 문서 참고.
12. 관련 문서
[1]
본래 국호는 '朝鮮'(조선)이지만 14세기에 건국한 동명의
조선과 구분하기 위하여 '옛 고'(古)자를 붙인 것이다. 원래부터 국호가 고조선이었던 것이 아니다. 참고로 이씨 조선의 국명이 '조선'인 이유 역시 옛 '고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였다.
상고한어 발음은 벡스터-사가르의 재구에 따르면 t<r>aw [s\][a\]r, 정장상팡의 재구에 따르면 ʔr'ew sen
[2]
고조선이 정식 국호가 아님에도 영어권에서 Ancient Joseon이나 Old Joseon이 아닌 Gojoseon을 그대로 쓴다.
[3]
국토지리정보원 국가지도집 고대의 강역
#
[4]
건국년도는 불명이며, 대략적인 추정도 견해가 갈린다. 《
동국통감》의 서술을 역법으로 환산하여 기원전 2333년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해당 서술은 정통성을 강조하는 목적의 신화적 묘사에 가깝다. 《동국통감》부터가 기원후 1430년대에 발간되어 교차검증은 아예 불가능하고, 단군조선 시대의 다른 기록이 없다. 기원전 2000년대 부근으로 잡는 움직임은 이미 고려시대때에도 있었으나 이에 대해 문헌학적인 논란이 적지 않다.
단군기원 참조.
[5]
해당 시기의 관련 문화로 여겨지는 요서 지역의 청동기 문화인
[6]
실존이 불분명함
[7]
연소왕이 진개를 보내 조선을 침공한다.
[8]
기존 <단군 신화>에서는 이를 두고 아사달과 장당경이
평양,
오녀산성,
구월산 등으로 비정되곤 했지만 현재 고고학적인 연구에 의하면 고조선은 요서에서 출발하여 요하, 평양 순으로 중심지를 옮겼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이에 따르면 아사달은
차오양, 장당경은
선양에 위치한 것으로 비정된다.
[9]
춘추전국시대와
진•한교체기,
위만조선 시기에 다수의 피난민이 유입되었고, 춘추전국시대의 양식과 비슷한 청동기가 발굴되었다.
[10]
부여와 함께 예맥계 고대 국가이고, 기록상 고구려가 부여의 별종이며, 고구려, 백제, 신라는 서로 말이 통했다. 고조선 유민들이 이후 남하하여 마한과 진한에 소국을 세우기도 한다.
[11]
고조선의 군주가
단군이라고 불렸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
단군 신화>를 통해 유추한다. 그러나 이는
이병도를 위시한 현대 사학 극초기의 연구자들이 언급한 정도이며, 21세기 연구에서는 <단군 신화>가 청동기시대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는 연구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12]
<단군 신화>에도 언급되는 명칭이지만
왕검성(왕험성)이라는 지명에서도 추정할 수 있다.
[13]
조선의 지도자를
중국에서는 '후'로 불렀다고 한다. 물론
주나라 왕실이 직접적으로 봉했다는 기록은 없으며,
전국시대 각국의 지배자인
제후들과 동등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왕(王)의 경우는 중국의
전국칠웅에 속하던
연나라를 따라 고조선의 군주(
조선왕 1세)가 '후'(侯)에서 '왕'(王)을 칭했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연나라가 칭왕한 것이 기원전 323년
연역왕 대이므로 그 근처의 어느 시점 이전에는 후(侯)로, 그 이후에는 왕(王)으로 불린 것이 된다.
[14]
창업군주
[15]
위만에게 나라를 뺏김
[16]
현대 한국 사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단군조선 다음은
위만조선으로 본다. 다만 정확하게 따지면 단군조선도 실체가 부정확하다.
단군은 신화 속 인물이지 실질적으로 입증된 존재가 아니며, 오히려 실증적 관점에서 보자면 토착계 조선 왕조라는 표현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17]
창업군주
[18]
망국의 군주
[19]
부왕,
준왕의 경우, 그 성씨가 《
한씨
족보》 등을 통해 전해지나, 실제로 해당 시대에 성씨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없다. 당시의 사서나 금석문 등의 증거는 없다.
고구려 초기까지도 당시
중국에서 사용되던
성의 의미로 사용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준왕을 축출하고 왕이 된
위만조차도, 처음으로 언급되는
사마천의 《
사기》에서는 '만'(滿)이라는 이름으로만 기록(朝鮮王滿, 故燕人也.)되어 있으며,
배송지가 《
삼국지》에 주석으로 인용한 《
위략》이라는 역사서에서 최초로 '위만'(衛滿)이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20]
경기도 북부와
백령도,
강화도 일대.
[21]
평안도와
황해도,
함경남도 일대.
[22]
랴오닝성과
지린성 일대.
[23]
현존하는 한국사 역사책에서 처음 고조선이 언급되는 것은
삼국유사이다. 한국사 역사책 중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삼국사기는
삼국시대를 담은 역사책이다.
[24]
일각에서는
부여와
동부여가 조선의 일부였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하고
진의 모호성 때문에
단군조선의 최대영역에 '부여+위만 조선+진'의 영역을 놓고
위만조선을
삼한과 분리해야한다는 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25]
단군조선을 한민족 최초의 통일왕조로 보는 시각은 아무래도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나
마한으로 내려간 뒤에 삼한의 입장에서는 외국세력이었어야 할 준왕의 세력이 한동안 마한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이런 설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이나 고고학적인 증거가 없다. 단
고구려,
백제,
신라가 통역없이 대화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이 설을 설명하려는 사람은 있다. 오랜시간 나라가 단절되어 있었다면 언어분화로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어야한다는 것이 이 주장의 핵심이다.
[주(註)]
‘작은 산을 선이라 한다(小山曰鮮)’
[27]
반면 《위략》에서는 衛滿
[28]
高麗 : 여기서는 고구려를 가리킴.
[29]
50만 전은 상당히 비현실적인 액수인데,
사마천이 사형 혹은 궁형을 면하기 위해 지불해야 했던 돈이 50만 전이었으나 마련하지 못했다라는 점에서 한나라의 규정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이는 고조선 시기에는 없었던 단서 조항을 낙랑군 시대 이후 삽입한 것으로 보고 있다.
[30]
제사 그릇처럼 생긴 그릇.
[31]
육군 50,000명 / 해군 7,000명
[32]
개천절 특집으로 고조선을 소재로 다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