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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11:32:57

은본위제도

1. 개요2. 예시
2.1. 한국2.2. 중국2.3. 유럽2.4. 이슬람권

1. 개요

/ Silver standard

화폐 단위의 가치와 의 일정량의 가치가 등가관계(等價關係)를 유지하는 본위제도. 서로 다른 화폐를 쓰는 여러 국가가 공동으로 채택하는 환율제도의 하나다. 현재는 거의 쓰이지 않는 제도로, 장단점에 대해서는 금본위제도에 기재되어 있다.[1]

2. 예시

2.1. 한국

한국에서는 연은분리법의 제정에도 불구하고 본위제도라는 개념 자체가 늦게 도입된다.[2]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하여 조선 조정은 최초로 은본위제를 도입하였고, 광무개혁 금본위제를 도입하였으나 재정상 문제가 많았다. 이후 일본이 본격적으로 한반도 점유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한 1904년 화폐정리사업을 통해 일방적으로 은본위제도를 완전 폐지하고 금본위제도를 재도입하게 된다. 일본은 1897년 금본위제도를 채택했다.

2.2. 중국

은본위제를 채택한 가장 대표적인 국가였다. 기본적으로 중국인의 관념에 노란색은 황제의 색깔이라는 이유로 황금은 황제만이 쓸 수 있어서 기축통화로 쓸 생각 자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은을 기축통화로 쓰는 관념이 박혀있었고, 은을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던 나라였다. 그래서, 은행(銀行)이란 한자어의 어원도 은본위제도에서 상인들이 은을 유통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금행(金行)이 아니라 은행(銀行)이라고 하는 이유는 중국이 장기간 은본위제 국가였기 때문이다.

이후 2차대전이 끝나고 브레튼 우즈 체제로 미국 달러와 태환 연동된 금본위제도가 대세가 되면서 채택을 포기했지만, 명청시대부터 중화민국 국민정부 시기까지 은본위제를 시행했다. 명청시대는 과장을 좀 보태자면 ''은 공급이 절단나서 나라가 망조로 접어들었다"라고 말할 수까지 있을 정도.

명나라 중/후기였던 16세기, 신대륙에서 은이 대량으로 발견되면서 신대륙 수탈에 나선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 의해 다량의 은이 유럽으로 흘러들었고 (에스파냐가 볼리비아의 포토시 은산에서 원주민들을 동원해 채굴, 수탈해 간 은의 양이 당시 전 세계 은 생산량의 80%에 달했다고 한다.), 또 이 은이 각종 교역을 통해[3]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1585년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에게 패한 이후로 스페인 제국이 점차 내리막길을 타면서 은의 공급이 17세기에 이르면 뚝 끊겨버렸고, 이로 인해 국가 경제가 휘청거리다가[4] 결국 이자성 청나라에게 멸망당하게 된다. 물론 단순히 은이 모자라서 정복당했다고만 생각하면 곤란하다.

청나라 시대 역시 마찬가지여서 소위 마제은이라고 불리는 은화가 각종 거래에 사용됐는데[5] 19세기에 이르면 영국이 비단 등의 사치품을 수입하느라 엄청난 양의 은이 청나라로 넘어가게 되자, 은을 다시 회수하겠다고 청나라에 팔아버린 것이 바로 인도산 아편이었고, 그 결과는 알다시피 아편전쟁이었다.

청나라 멸망 이후 수립된 중화민국 북양정부 시절부터 은본위제를 폐기하고 금본위제로의 전환을 고려하였으나 행정력과 경제에 대한 정부의 통제력 부족, 자본 부족으로 포기해야 했다. 국민혁명 이후 수립된 국민정부는 1928년부터 본격적으로 금본위제도로의 전환을 고려했지만 자본력 부족으로 1933년의 폐량개원을 통해 은본위제를 기반으로 하는 개혁으로 만족해야 했다. 중화민국이 은본위제를 포기한 것은 1934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행정부가 은구입법을 실시하면서 중국의 은 유출 현상이 심각해지면서부터였다. 건국 이래 최대의 경제위기를 맞이한 중화민국은 미국의 금을 구입하여 금본위제를 실시하고자 했으나 미국이 거절했고 이 때문에 영국과 협력하여 1935년 11월 4일 법폐개혁을 단행하여 은본위제도를 폐기하고 관리통화제를 실시하였다. 신화폐인 법폐는 미국이 중국의 은을 구입하면서 제공한 달러로 안정성을 확보하였다.

한편 일본이 수립한 만주국도 은본위제도를 채택하고 있었는데 이는 대륙과의 교역이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만주국 경제의 특성상 중국의 화폐제도와 어느 정도 보조를 맞출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화민국 정부가 은본위제도를 폐기함에 따라 1935년 12월, 만주국도 일본엔과의 연계로 전환함에 따라 중국의 은본위제도는 완전히 종식을 고했다. 다만 서북의 마부팡 군벌이나 운남의 룽윈 군벌 등은 국민정부에 저항하면서 법폐를 쓰지 않고 은본위제도를 비밀리에 유지하였다.

2.3. 유럽

이미 고대 로마 시대부터 금본위제와 은본위제를 동시에 채택하는 복본위제도를 시행했다. 다만 금의 희귀함 등으로 인하여 실질적인 기축통화는 은화였기 때문에 사실상 은본위제였다. 하지만 19세기에 은의 가치가 금에 비해 폭락했고 이 무렵이 전성기였던 대영제국 금본위제를 채택하였기 때문에 다른 유럽 국가들도 19세기 말에 이르면 대부분 금본위제를 시행한다.
파일:신항로 개척과 은본위제.png
은의 가치 하락 자체는 16세기 신대륙에서 은이 대량 발견된 후였다.[6] 하지만 도리어 은이 대량으로 발견되어 공급되면서 중국 명나라가 은본위제도를 채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세기에 은의 가치가 금에 비해 폭락한 것만이 아니라 바로 직전 시기엔 폭등하기도 했는데 19세기 중반에 미국 서부와 호주에서 대량의 금이 발견되면서 금의 가치가 하락하고 은의 가치가 상승했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가치 변화는 너도나도 금을 팔고 은을 사들이는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런 금과 은의 가치 변화는 바로 직후에 다시 반대로 변화하게 되는데 유럽에서 영국에 이어 두번째 경제대국이며 은본위제 국가였던 프랑스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전한 후 독일에게 배상금 지불을 위해 은본위제를 포기하여 가치가 높아진 은을 팔고 가치가 떨어져있던 금을 사들여서 금본위제로 전환하였고,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 대량의 은광이 발견되면서 은의 공급이 폭증하여 은의 가치가 폭락하게 된 것이다. 영국은 물론이고 프랑스도 금본위제로 전환한데다 은의 가치까지 폭락하기 시작하자 결국 은본위제나 금과 은을 같이 사용하는 복본위제도 시행하던 유럽 국가들도 중앙은행이 보유한 은 가치 폭락에 따른 손해를 피하기 위해 금본위제를 시행할 수 밖에 없었다. 여담으로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갈 즈음에 남아공과 미국 알래스카 주에서 대량의 금이 또 발견되었으나 이때엔 금의 가치가 별 변화가 없었는데 당시는 산업혁명으로 전세계적인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탓에 대량의 금은 그대로 각국의 중앙은행으로 들어가 통화량 발행으로 이어지면서 경제 성장 유지에 필요한 통화 유동성 공급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2.4. 이슬람권

애초에 이슬람이전의 고대 근동지방 자체가 유럽과 꾸준히 교역이 이어지고 있었고, 은본위제의 역사는 고대 수메르부터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만큼 유서깊었다. 당장 함무라비 법전에 명시된 화폐단위나 성경에서 다루는 화폐단위를 생각해보자. 물론 금도 통화로 사용했지만 금의 희소성으로 인해 은이 기축통화로 쓰이게 되었다. 이슬람 제국 발흥 이후, 우마이야 왕조에서 첫 화폐를 주조할때에도 로마의 예를 따서 금화로 디나르를 주조하고, 은화로 디르함을 주조했었다. 근세에 들어 오스만 제국 또한 은본위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는데, 튀르키예 리라 항목을 보면 설명되어 있듯이 초기에는 악체(Akçe)라는 90%은 1,4그램을 기준으로 삼았고, 17세기 이후로 쿠루쉬(Kuruş) 은화를 기준으로 삼았다. 하지만 유럽의 가격혁명은 오스만 제국에도 타격을 가했고, 은값이 너무 떨어져버리자 실생활에서 금화를 접할 일이 많아지게 되었는데, 기축통화는 어디까지나 은화였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에서 주조한 금화든 당시의 국제통화였던 플로린, 두카트, 리브르, 인접한 국가라서 그런지 의외로 널리 통용되었던 폴란드 즈워티 금화 모두 변동환율로 통용되었다. 결국 19세기 들어 유럽의 예를 따라 오스만 제국도 리라화를 도입해 금본위제를 시행하게 된다.

[1] 금본위제와 구별되긴 하지만 사실 은본위제 국가들도 은이 많은 정부 등 기관이나 개인은 필요 유동성을 제외한 보유 은의 상당부분을 금으로 바꿔 보관하곤 했다. 은본위제 국가들에서도 금의 환전성은 여전히 강했기에 은본위제 국가라 해서 금본위제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은본위제 대표 국가였던 중국도 부자들이 쌓여있는 은의 상당부분을 금으로 바꿔(은화로 금덩이를 사는 방식) 보관했던 기록이 많고 필요시 바로바로 팔아 은화로 바꾸곤 했다. [2] 다만 조선에는 이를 적용할 만한 은광이 거의 없어 연은분리법은 계륵에 불과했다. [3] 특히 청화백자가 유럽에서 대박을 쳤다. [4] 이 시기 명나라의 사회상에 관련된 기록을 보면 은을 찾으려고 백성들의 집과 무덤까지 관료들이 멋대로 파헤치는 상황이었다. 흠좀무. 또한 명나라의 은 부족은 단순히 명나라의 혼란에 그치지 않고 조선에게까지 그 여파가 미쳤다. 알다시피 조선은 임진왜란 당시의 빚 덕분에 17세기 초반 명나라에게 절절 기던 상황이었고, 명나라 사신이 한 번 조선을 왕복할 때 마다 막대한 은을 뇌물사례로 바쳐야만 했다. 그 결과 명나라 조정 사이에서 조선행 사신은 최고의 재태크(...) 방법으로 인기를 모았고 점점 부담해야하는 은의 양이 천정부지로 치솟아서 마지막에는 조선의 1년 예산에 가까운 은을 바치는 상황으로까지 치닫는다(...) [5] 물론 고액화폐이다보니 일반 백성들은 은보다 동전을 주로 쓰긴 했다. [6] 이로 인해 은을 기축통화로 한 유럽의 물가가 한 세기 동안 크게 뛴 일이 있었는데, 이 사건을 가격혁명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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